* 오늘의 말씀 : 바울의 고백,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로마서 7:14~25)
* 본문요약
바울은 자신이 율법이 선한 것도 알고 있으며, 누구보다도 죄를 미워하는 자임에도 불구하고 자신이 미워하는 죄를 행하고 있는 자신의 모습을 고백합니다. 바울은 자기 속에 거하는 죄가 악을 행하도록 끝없이 자신에게 충동질하고 있다는 것을 발견합니다. 그러므로 자기 안에 선을 행하려는 마음과 악을 행하려는 마음이 두 가지가 함께 있는 것을 깨닫습니다. 이 두 마음이 바울의 속에서 서로 싸우고 있습니다. 그 과정에서 바울은 죽음과 같이 고통스러운 갈등을 겪고 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그 고통의 현장에서 이 싸움에서 우리를 이기게 하신 이가 바로 우리의 주님이신 예수 그리스도이심을 고백하며 주를 찬양합니다.
찬 양 : 495장 (새 438) 내 영혼이 은총 입어
465장 (새 407) 구주와 함께 나 죽었으니
* 본문해설
1. 바울의 자기 고백(14~20절)
14) 우리는 다 율법이 신령한 것인 줄 알고 있습니다만, 나는 죄 아래 팔려 육신에 속해
있습니다(육인의 일에만 마음을 빼앗긴 죄 아래 팔린 자입니다).
15) 나는 내가 하는 것을 도무지 이해할 수 없습니다.
내가 원하는 것은 하지 않고 도리어 내가 증오하는 것을 행하고 있으니 말입니다.
16) 만일 내가 원하지 아니하는 그것을 행한다면(내가 그런 일을 하면서도 그것을 하면
안 된다고 생각하고 있다면), 그것은 곧 율법이 선하다는 것을 시인하는 것입니다.
17) 그렇다면 그와 같은 일을 하는 것은 내가 아니라 내 속에 자리 잡고 있는 죄입니다.
18) 나는 내 안, 곧 내 육신 속에 선한 것이 거하지 않았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선한 일을 해야겠다는 원함은 내게 있으나, 그것을 실행하지는 못하고 있으니 말입니다.
19) 나는 내가 원하는 선은 행하지 않고, 도리어 원하지 않는 악을 행하고 있습니다.
20) 만일 내가 원하지 않는 그것을 행한다면,
그것을 행하는 자는 내가 아니라 내 안에 거하는 죄입니다.
- 나는 죄 아래 팔려 육신에 속해 있습니다(14절) :
육신에 속한 자는 죄에 팔여 죄의 지배를 당하는 육적인 사람을 뜻합니다. 죄에 대한 저항력이 없으므로 죄의 공격에 속수무책으로 당하는 자입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신령한 율법을 알고는 있지만, 마음속에서 자꾸만 충동적으로 일어나는 욕망을 억제하지 못하는 자신에 대하여 바울이 죄 아래 팔린 자라며 한탄하는 것.
- 죄 아래 팔렸도다(14절) :
‘죄에 노예가 되었다’ ‘죄의 지배를 당하는 육적인 사람이다’는 뜻
- 나의 행하는 것을 내가 알지 못하니(15절) :
나는 하나님의 선하신 율법(말씀)대로 행하기를 원하는데, 왜 내가 원치 않는 악을 행하고 있는지 자신도 잘 알지 못하겠다는 것입니다. 악을 행하지 않고는 견딜 수 없는 강한 충동이 자꾸만 일어나는지 알 수 없다면서 한탄하는 것입니다.
- 도리어 미워하는 그것을 함이라(15절) :
하나님께서 원하시지 않는 일이라는 것을 이미 자신도 알고 있으나, 그 행위를 중지할 수 없습니다. 왜 이런 일이 자기에게 일어나고 있는지 잘 알지 못하겠다는 것.
- 이제는 그것을 행하는 자가 내가 아니요(17절) :
처음에는 악을 행하는 행동의 주체가 나 자신이었습니다. 그러나 어느 한계를 지나면 더 이상 행동의 주체가 자신이 아닙니다. 죄가 그 행위의 주체가 되어 나로 하여금 계속해서 악을 행하게 하는 것입니다.
- 내 속, 곧 내 육신에 선한 것이 거하지 아니하는 줄을 아노니(18절) :
여기에서 바울은 ‘나’와 ‘육신’을 구분하여 말합니다. ‘나’는 나 자신이고, ‘육신’은 나를 죄의 방향으로 끌고 가는 죄에 오염된 내 몸의 또 다른 부분입니다. 인간의 자아 속에 숨어서 육체의 본능을 자극하여 인간의 모든 행위를 타락시켜 도덕적으로 무능하게 만드는 내 몸 가운데 죄에 오염된 부분을 ‘육신’이라고 표현했습니다.
- 원치 아니하는 바 악은 행하는도다(19절) :
내 속에 있는 죄가 나를 악의 방향으로 이끌어가는 상태가 되면 선을 행하려는 거룩한 욕구는 거의 힘을 잃게 됩니다. 그러면 속수무책으로 악이 이끄는 대로 행하는 자가 되고 맙니다. 부패된 욕망과 무능해진 판단력으로 영적으로 신령한 책임 있는 행동을 거의 할 수 없는 자가 되고 맙니다.
2. 바울의 죽음 같은 갈등과 승리의 노래(21~25절)
21) 그러므로 나는 하나의 법칙을 깨달았습니다.
곧 선을 행하기를 원하는 나에게 악이 함께 있다는 것입니다.
22) 내 속 사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지만
23) 내 지체 속에서 한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법과 맞서 싸워서,
나를 내 지체 안에 있는 죄의 법의 포로로 사로잡는 것을 봅니다.
24) 오호라 나는 곤고한(비참한) 사람입니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구해 내겠습니까?
25)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나를 건져 주신 하나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그러므로 나는 (아직도) 내 마음은 하나님의 법을 따르지만,
육신으로는 죄의 법을 따르고 있습니다.
- 함께 있다(21절) :
‘함께 누워있다’는 뜻으로 우리 마음속에서 선과 악이 항상 가까이에 있다는 것을 뜻합니다.
- 하나님의 법(22절) :
믿음에 속한 자에게는 또 다른 법이 있습니다. 나를 죄의 방향으로 이끌어 가는 죄의 법에 속수무책으로 당하기만 하는 율법과는 그 종류가 다른 법입니다. 그 법은 죄의 방향으로 나를 이끌어 가는 죄의 세력을 이기게 할 만한 법입니다.
- 곤고한(240절) :
‘곤고한’으로 번역된 ‘탈라이포로스’는 ‘심한 고통, 깊은 절망감으로 마음이 찢어진 상태’를 의미합니다. 여기에서는 죄를 지을 수밖에 없는 연약함을 죽을 만큼 괴로워하는 것을 뜻합니다.
* 묵상 point
1. 바울의 자기 고백
1) 나는 육신에 속하여 죄 아래 팔렸도다(14절)
바리새파 중에서도 가장 엄한 선생인 가말리엘로부터 훈련받은 바울은 누구보다도 율법을 잘 아는 자입니다. 그러나 바울은 여전히 육신의 욕망을 절제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율법이 금지한 죄에 대항 욕망이 자꾸만 충동적으로 일어나지만 그것을 제어할 능력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바울은 이것을 가리켜 자신은 여전히 죄 아래 팔린 자라고 한탄합니다.
그렇게 엄하게 율법을 훈련받았지만 여전히 악을 행하려는 욕망이 불같이 일어나고 있고 그것을 절제하지 못하고 있는 자신을 바라보면서 바울은 자기가 아직도 죄 아래 팔려 육신에 속한 자임에 틀림없다며 한탄하고 있습니다.
2) 도대체 내가 하는 일을 도무지 이해할 수 없다(15절)
바울은 자기가 하는 일이 무엇인지 도무지 이해할 수 없다고 한탄합니다. 율법을 배웠고, 그 율법대로 살아야 하나님께 복을 받는다는 것도 잘 아는데, 자기는 하나님께서 증오하시는 일만 하고 있으니 자기가 무엇을 하고 있는지 이해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면 멸망을 받는다는 것을 누구보다도 잘 아는데 어찌하여 자신을 멸망으로 이끄는 죄의 충동을 절제하지 못하는지, 자신의 연약함을 한탄합니다.
3) 바울이 자기 고백을 한 이유
바울은 마치 사람들 앞에 혼자 발가벗겨진 것같이 자신의 추한 내면을 공개했습니다. 어떤 어려움이 있어도 불도저같이 어려움을 극복하며 복음을 전했던 바울도 죄를 이기지 못해 한탄했었다는 것이 당황스럽습니다. 그러나 바울 역시 육신을 입은 사람입니다. 바울도 긴장을 늦추고 게으름을 피우면 언제 망가질지 모르는 육신의 정욕을 가지고 있는 사람입니다.
● 묵상 :
바울도 날마다 주님의 은혜를 힘입지 않으면 언제 무너질지 모르는 연약한 사람입니다. 바울은 자신의 고백을 하면서 사람이 어떻게 해서 죄에 노예가 되는지 그 과정을 상세히 증거한 것입니다. 바울은 자기의 경우를 공개하며 누구든 언제든지 한 순간에 무너질 수 있다는 사실을 경고한 것입니다. 바울이 그러하다면 우리같이 평범한 사람들은 얼마나 더 쉽게 무너지겠습니까? 그러므로 영적인 긴장감을 잃지 말아야 합니다.
2. 갈등은 살아 있다는 증거
바울은 3차 전도여행까지 모두 마칠 즈음에 로마서를 썼습니다. 세상의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부러워할 만한 놀라운 믿음을 가지고 그 많은 핍박을 이겨내며 복음을 전한 바울이 자신의 실체를 이렇게 밝혔다는데 우리는 놀라움을 갖습니다. 이런 자도 죄를 이기지 못한 탄식을 하고 있다면 우리는 도대체 어떻게 되는 것인가 당황스러움을 느낍니다. 그러나 이것이 바로 우리의 모습입니다. 아브라함도 다윗도 사무엘도 바울도 우리와 다른 저 천사와 같은 존재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1) 선과 악이 함께 있다(21절)
그들도 우리와 똑같이 죄의 본능을 이기지 못해 고민하며 살던 자들입니다. 왜 이런 고민이 우리에게서 떠나지 않습니까? 선과 악이 우리 안에 함께 있기 때문입니다. 마치 침대에 나란히 누워 있는 것처럼 선과 악이 우리 안에 항상 같이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려는 결심을 할 때 악한 일을 하고 싶은 강렬한 충동이 동시에 일어나는 것입니다.
2) 내 지체 속에서 다른 한 법이 맞서 싸워서(22~23절)
예수님을 믿기 전에는 죄의 본능만 있었습니다. 그 때에는 한 가지 본능만 있으니 지금보다 마음이 더 편했습니다. 세상의 일에 대한 갈등은 있으나 죄에 대한 갈등은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죄의 본능만 있던 우리 안에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려는 거룩한 본능이 또 하나 생겼습니다. 이 두 본능이 우리 안에서 서로 싸웁니다. 그래서 우리가 이렇게 선한 일을 하려 하면 악한 본능이 나를 붙잡고, 악한 일을 하려하면 선한 본능이 또 나를 붙잡습니다.
3) 나를 내 지체 안에 있는 죄의 포로로 사로잡는다(23절)
항상 주님의 말씀대로 살려는 거룩한 본능이 이긴다면 이런 고민은 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런데 바울조차도 자꾸만 죄의 본능이 이겨서 하나님께서 증오하시는 일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바울조차도 그런 욕망을 멋지게 이기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바울은 예수님을 믿은 후로는 항상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며 살지만, 죄의 본능을 자극하는 육체의 욕망이 항상 자기를 이겨서 자기가 죄의 포로로 사로잡혀 있다고 한탄합니다. 언제쯤 나는 이 죄를 이겨 항상 거룩한 자가 될까 바울은 고민하며 울부짖습니다.
4) 누가 이 사망의 몸에서 나를 건져 내랴(24절)
이 갈등 속에서 바울은 사망의 고통을 느낍니다.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기는 해야겠는데, 육체의 욕망은 사라지지 않으니 이 노릇을 어찌하면 좋은지 고민이 됩니다. 온 세상을 다니며 복음을 전한 자신이 이런 사소한 죄조차 벗지 못하고 있다는 것을 누구에게 말을 합니까? 그래서 그는 날마다 사망의 고통을 느낍니다.
3. 이 갈등을 이기고 승리하는 자가 되려면
1) 주님의 신령한 것을 간절히 원하는 것에서 승리는 시작됩니다(16, 19절)
그러나 이 갈등과 번민은 바울이 사망의 몸이라 느낄 정도로 그 고통이 심합니다. 그러므로 이 갈등은 기회와 위험을 모두 가지고 있는 그야말로 위기입니다. 이 싸움에서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은 결코 우리들 혼자의 힘으로는 이길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바울 같은 사람도 불가능한 일입니다. 오직 주님의 은혜를 통해서만 이길 수 있습니다.
주께서는 간절히 원하는 자를 도우십니다. 그러므로 16절과 19절에서 바울이 언급한 바와 같이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기를 간절히 원하는 마음이 있어야 합니다. 바울은 자기 에게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기를 원하는 마음이 있으나 몸은 그 반대로 행한다고 했습니다. 비록 내가 육체의 욕망을 이기지 못해 자꾸만 엇나가는 일을 할지라도 내 마음에는 하나님의 은혜 속에 거하고자 하는 간절한 열망을 갖고 있어야 합니다.
2) 죄를 범하고 있는 자신에 대한 처절한 고통(24절)
에스겔서를 보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바벨론에 망하게 하시기 전에 천사들을 이스라엘로 보내시면서 “모든 가증한 일로 인하여 탄식하며 우는 자의 이마에 표를 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겔 9:4). 하나님께서 그 천사에게 예루살렘 성읍의 죄로 인하여 탄식하며 우는 자들의 이마에 표를 하라고 명하십니다. 그 죄를 슬퍼하며 우는 자들에게 표를 하라는 것인데, 그냥 슬퍼하는 것이 아니라 허리가 끊어질 정도로 극심하게 슬퍼하며 애통해하는 자들의 이마에 표를 하라는 것입니다. 물론 그가 한 표시는 사람이 보이는 것이 아닙니다. 천사가 이마에 한 표는 오직 하나님과 천사들만 볼 수 있습니다.
이처럼 죄를 범하는 자신의 연약한 현실에 대한 처절한 고통이 있어야 합니다.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마 5:4). 자신의 죄에 대한 애통함과 처절한 고통이 있는 자는 하나님의 위로를 받습니다. 이스라엘이 바벨론에 망할 때에도 그들을 살리셨고, 마지막 심판 때에도 이런 아픔을 가진 자들을 살리십니다.
3) 이 고통의 현장에서 주님을 바라보십시오(25절)
그 처절한 고통의 현장에서 주님을 바라보십시오. 바울은 사망의 몸이라 여길 정도로 고통스러운 그 죄의 번민에서 우리를 도우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았습니다. 날마다 죄에게 져서 여전히 육신에 속한 자라는 탄식을 했던 바울은, 죄에 대한 고통으로 울부짖는 모든 자들을 구하시는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기뻐하며 노래합니다.
4) 하나님을 즐거워하는 마음을 잃지 마십시오(22, 25절)
나는 비록 죄를 범한 자이지만 주께서 나를 사랑하시니, 내가 천국의 백성이 될 소망을 가질 수 있습니다. 내가 비록 마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따르지만 육신은 여전히 죄의 법을 벗지 못하는 이중적인 삶을 살고 있지만, 천국에 가기를 간절히 소망하는 나를 도우시는 주님이 계시기에 우리는 죄의 현장에서도 천국의 기쁨을 노래할 수 있습니다. 이 죄의 처절한 고통을 잃어 버리지 않아야 하는 것과 함께, 나를 도우시는 주님을 기뻐하는 마음을 잃지 마십시오. 이 두 가지는 주님이 오시는 그 날까지 우리가 간직하고 있어야 하는 마음입니다.
4. 내 마음이 미워하는 죄의 행위를 자꾸만 행하게 되는 이유는?
1) 죄가 사람을 파괴하는 과정
바울은 자신의 연약함을 공개하면서 죄가 어떻게 사람을 파괴시킬 수 있는지를 경고합니다. 사람이 죄를 범할 때 단순히 하나님의 금지된 법을 어긴 것에 불과한 것이 아닙니다. 그 죄를 통해서 내 안에서 숨어서 잠자고 있던 죄의 정욕이 활성화가 일어납니다. 그러면 마치 처음에는 내가 술을 먹는데 시간이 지나면 술이 나를 먹는다고 하는 것과 같이 절제하기 힘들어지게 됩니다. 처음에는 악을 행하는 행동의 주체가 나 자신이었으나, 어느 한계를 지나면 더 이상 행동의 주체가 자신이 아닙니다. 죄가 그 행위의 주체가 되어 나로 하여금 계속해서 악을 행하게 하는 것입니다.
2) 나를 죄로 이끌어가는 내 몸의 또 다른 부분(18절)
여기에서 바울은 ‘나’와 ‘육신’을 구분하여 말합니다. ‘나’는 내 몸 자체이고, ‘육신’은 나를 죄의 방향으로 끌고 가는 죄에 오염된 내 몸의 또 다른 부분입니다. 인간의 몸속에 숨어서 육체의 본능을 자극하여 타락시키는 내 몸 가운데 죄에 오염된 부분을 ‘육신’이라고 표현했습니다.
3) 내가 원하는 선은 행하지 않고 도리어 악을 행하는 자(19절)
이렇게 일단 내 육신이 죄에 오염되어 내 안에 잠자고 있던 육체의 본능이 활성화가 일어나면, 선을 행하려는 거룩한 욕구는 힘을 잃고 내 속에 있는 죄가 나를 악의 방향으로 이끌어가게 됩니다. 그러면 속수무책으로 악이 이끄는 대로 행하는 자가 되고 맙니다. 욕망의 자리는 살아나고, 판단력은 무뎌져서 영적으로 신령한 일을 거의 할 수 없는 자가 됩니다. 그러면 자신이 마음으로 경멸하고 미워하는 죄의 행위들을 자꾸만 행하는 자가 되고 마는 것입니다.
5. 갈등을 피하지 마십시오.
이렇게 죄의 무감각증으로 자신은 나름 괜찮은 사람이라고 여겼던 자에게 하나님의 말씀이 들어가면 자신이 영적으로 어떤 사람인지에 대한 자각이 생깁니다. 이것은 마치 감각을 잃어버려 그 통증을 몰랐던 사람이 약이 투여되면서 그 감각이 회복되어 통증을 느끼게 되는 것과 같습니다. 이 때에 나타나는 영적인 통증이 바로 ‘갈등’과 ‘번민’입니다.
갈등은 죄의 영역 속에서만 살던 사람에게 새롭게 신령한 영의 법이 주어지면서 생깁니다. 그동안 죄를 짓던 습관이 아직 고쳐지지 않은 상태에서 하나님의 선한 일을 하려는 새로운 욕구가 생겼으므로 이 과정에서 갈등이 일어납니다. 그러나 많은 경우에 갈등이 괴로우니 갈등 자체를 마음에서 없애려 합니다. 없애야 할 것은 갈등이 아니라 죄의 습관입니다. 가령 폐병에 걸려 열이 나는 사람에게 단순히 열만 떨어뜨리는 해열제만 먹인다면 그는 결국 죽고 말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없애야 할 것은 갈등이 아니라 죄의 습관인 것입니다.
1) 갈등을 피하려 하지 말고 오히려 더 깊게 하십시오.
바울은 자신이 왜 하나님께서 싫어하시는 일들을 하고 싶은 강렬한 충동에서 벗지 못하고 있는지를 깊이 묵상했습니다. 그는 갈등을 피하지 않고 오히려 더욱 깊이 갈등한 것입니다. 그 결과 자신의 안에서 자꾸만 죄의 충동을 일으키는 죄의 세력이 있음을 발견합니다. 그러므로 갈등을 피하지 말고 오히려 더 깊게 갈등하십시오. 적당히 회피하려 하지 말고 그 갈등 속에서 나의 치명적인 약점이 무엇인지를 파악하십시오.
2) 자신의 영적인 현실을 바르게 진단하십시오.
갈등을 더 깊이 하되 말씀과 기도를 하면서 해야 합니다. 나 혼자서는 아무리 갈등을 깊이 해도 아무런 결과가 나오지 않기 때문입니다. 혼자 하는 갈등은 절망에만 이를 뿐입니다. 그러나 말씀과 기도를 하는 중에 하는 갈등은 깊은 영적인 묵상이 됩니다. 나는 누구인지, 내가 왜 이런 일들을 반복해서 행하고 있는지를 깊이 묵상하는 중에 자신의 영적인 현실이 어떤지를 깨닫게 됩니다.
3) 하나님께서 주신 새로운 영의 법을 붙잡으십시오.
내 안에 나를 치명적인 죄의 질병에 빠지게 하는 죄의 영역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면 이 모든 것을 치료해주시기를 주께 간구하십시오. 그리고 주께서 부어주신 성령을 통하여 죄의 질병을 치료하십시오(이 부분에 대해서는 로마서 8장에서 자세하게 살펴볼 것입니다.) 나의 영적 현실이 어떤지 관심을 갖는 데서부터 영의 치료는 시작됩니다. 당신 자신에 대하여 좀 더 많은 관심을 보이십시오.
● 묵상 : 가장 치명적인 죄의 무감각증
그러나 많은 경우에 이렇게 죄가 잠자던 죄의 정욕을 활성화시켜서 죄가 또 다른 죄를 부르는 죄의 번식 현상이 일어나고 있어도 그것이 얼마나 무서운 것인지를 느끼지 못하고 있습니다. 마치 대단히 빠르게 증식하는 위험한 바이러스처럼 치명적인 이 죄의 질병의 파괴력을 전혀 느끼지 못하는 동안 죄가 그 사람을 완전히 점령하여 하나님의 선한 것을 찾지 못하게 만듭니다. 그러다 나중에 자신의 상태가 심각해진 것을 깨달았을 때에는 죄가 이미 너무 굳어져서 회복하기 힘들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우리를 치명적인 죄의 질병에 걸리게 만드는 일은 ‘가만히 있는 것’입니다. 단지 내가 말씀을 묵상하는 등의 하나님과 교제하는 일을 하지 않고 가만히 있는 것만으로 이런 일이 나에게 일어나게 됩니다. 내가 영적으로 게으름을 피우고 있는 동안 마귀는 내가 아주 사소한 죄들을 지을 때마다 계속해서 잠자던 나의 죄의 정욕을 자꾸만 깨우고 있는 것입니다. 나는 게으름을 피워도 마귀는 결코 게으름을 피우지 않는다는 것을 기억합시다.
* 기도제목
1. 치명적인 죄의 무감각증에 빠지지 않게 하옵소서.
2. 나의 영적인 현실이 어떤지 분별할 수 있는 신령한 판단력을 잃지 않게 하옵소서.
3. 주께서 주시는 새로운 영의 법을 붙잡고 살게 하옵소서.
출처 :가애교회 글쓴이 : 송호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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