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이드 존스, 로마서 강해 1권, 기독교문서선교회,1998
1권, 속죄와 칭의(3:20-4:25)
머리말
이 강해집의 시리즈는 3장20절부터 시작한다. 그것은 필자가 로마서의 ‘심장’이라 할 수 있는 곳으로 단숨에 나아가고 싶기 때문이다. 그래서 칭의와 사죄의 위대한 교리의 고찰로 직접 옮아갈 수 있기 위해 처음 두 장 반의 논점을 요약하였다.
설교 형식을 취한 강해들은 강의도 아니고 주석도 아니다. 오늘날에는 너무나 간단한 성경 주석과 성경 연구서들이 많다. 그래서 지금 가장 큰 요구는 강해식의 강도로 되돌아 가는 것이다. 강해식 강도는 기독교 역사에서 부흥시대나 복음운동이 일어났을 때 행해졌던 방식이다. 성경과 그 메시지의 위대함과 영광, 그리고 성경의 능력을 사람들에게 나타낼 수 있기 위해 이 방식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이 방식은 많은 반복을 가져오는데, 그것은 진리의 다양한 국면들로 너무나 감동 받았기 때문에 반복하여 진술하였다. 사도 바울도 자주 반복하며 말하고 있다. 아덴 사람들(행17:21)처럼 “아 나는 그것을 압니다”라고 말하며 인내하지 못하고 새로운 것으로 나아가는 그런 사람들이 오늘날에 많이 있다.
필자의 소원은 이 책과 다음에 나올 책들이 성도들에게 신앙의 위대한 중심 원리를 명백히 이해시켜 줄 뿐만 아니라, 그들이 말할 수 없는 기쁨과 가득찬 영광으로 충만해지며 ‘감격과 사랑’ 그리고 ‘찬양’의 깊은 경지에 들어가기를 바라는 바이다.
제1장 서론적 기초
(롬3:19-20) (19)우리가 알거니와 무릇 율법이 말하는 바는 율법 아래에 있는 자들에게 말하는 것이니 이는 모든 입을 막고 온 세상으로 하나님의 심판 아래에 있게 하려 함이라 (20)그러므로 율법의 행위로 그의 앞에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나니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음이니라
- 로마서의 주제는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방법에 대한 기쁜 소식이다. 이 점은 성경 전체의 총괄적인 주제이다.(1:16,17). 즉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얻는 교리에 관해 로마서에서 명백하고 광범위하게 다루고 있다
믿음으로 의롭다 함의 교리는 사람들의 구원과 하나님에 대한 화해의 길을 하나님이 친히 예배하셨다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복된 주님이시오 구세주이신 그의 아들의 행하심을 기초로 해서 복음을 믿는 모든 사람들의 죄를 은혜로 용서하시며 도말하신다는 것이다. 그리고 신자들은 더욱더 “예수 그리스도의 의”로 옷입으며 하나님이 보시기에 옳고 의롭다고 인정을 받는 것이다. 우리는 우리에게 전가되고 우리에게 이식된 그리스도의 의로 옷입었으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보기에 열납된 상태에 있는 것이다.
만일 당신이 믿음으로만 의롭다 하는 교리를 좋아하지 않으며 동의하지 않는다면 단순히 교회의 가르침에 동조하지 않는다기보다 성경 자체를 거부하고 있는 것이다.
- 1:16-3:20 율법이 아닌 믿음으로 의롭다함의 교리를 논증하고
3:21의 “이제는”이란 말로 다음이 연결되는 영광스런 사실(예수 그리스도)을 위한 토대를 마련하고 있다. 바울은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라고 표현하며 복음을 매우 자랑함을 강조한다. 그것은 사람에게서 나온 것이 아니고 하나님에게서 비롯된 하나님의 능력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것은 모든 자를 위한 것이며 모든 자에게 해당된다(1:17).
복음만이 인간의 이중적인 문제에 대한 해결책이다. 첫째 문제는 모든 불경건한 자들과 불의한 자들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이다. 둘째 문제는 인간이 실제적으로 불경건하고 불의한 가운데 있다는 것이다. 바울이 이 두 가지 문제를 표현한 순서에 강조점을 살펴 보자.
인간의 첫 번째 필요는 하나님을 알며 발견하는 것이다. 불경건은 불의보다는 우선한다. 왜냐하면 불의는 불경건의 결과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이것을 깨닫지 못하는 것이 현대 세계의 비극이다. 세계는 병의 증상들만을 약으로 치료하고 있으며 질병의 원인은 잊고 있다. 세상은 정치적 사회적 교육적 등 모든 영역에서 실제적이고 본질적인 문제를 회피하고 있는 것이다. 하나님을 제일 사랑하지 않은 사람은 자기 자신에 관한 참 문제를 알지 못하는 것이다.
우리들은 바울이 출발한 지점에서 출발해야 한다. 제일 큰 문제는 “하나님의 진노”의 문제이다. 하나님의 진노가 모든 사람의 불경건과 불의에 대하여 임하기 때문에 우리는 구원이 필요한 것이다. 복음 전도는 하나님과 하나님의 진노를 떠나서는 아무런 의미가 없는 것이다. 우리는 전도할 때 예수를 친구로서 육신의 치료자, 한 조각의 평안을 주는 자로 소개해서는 안된다. 그는 구세주이시다. 그는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러 오셨다.” 현대인들은 하나님의 진노에 대한 견해를 혐오하고 싫어하며 또한 공의와 의의 사상, 그리고 심판 받는다는 사상을 거부한다. 그러나 우리의 임무는 이 점을 설파하는 것이며 그것은 우리들 메시지 중에 하나의 핵심적인 부분이다.
- 바울은 우리들에게 하나님의 진노가 나타나는 경로에 대하여 진술하고 있다(1:24-27). 백성들이 하나님 음성을 듣기 싫어하고 그의 율법을 거역하며 하나님 없이도 생활을 영위할 수 있다고 장담할 때 하나님께서는 나타나신다. 처음에는 사신을 보내어 깨닫게 하려 한다. 그러나 그들이 여전히 악한 길을 고수하며 반역을 계속하면 “그들을 멋대로 내버려 두어” 간섭지 않으실 때가 오는 것이다. 그런 다음 하나님 없는 인간의 종말을 보게 되는 것이다.
그들은 피조물인 인간의 산물인 과학과 기술을 “영원히 찬송받으실 조물주보다 더” 섬기고 있는 것이다. 인간은 하나님보다 사람을 앞세우는 것이다. 바울은 먼저 이방인들이 받을 궁극적인 저주를 명백히 한다(1: 2:4). 그러므로 사람이 얼마나 많이 사회적인 개혁을 단행했든지, 얼마나 많이 불의와 악한 것들을 완화시켰든 간에 그 모든 것이 하나님을 떠난 그의 어리석음을 회개케 하거나 깨닫게 하지 못한다면 하나님이 보시기에 전혀 무익한 것이다.
- 이제 유대인들에게 시선을 돌린다. 이것이 2장의 주요 주제이다. 유대인은 율법을 지키고 있었고 또한 할례의 표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자동적으로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2:25에서 바울은 그런 생각이 어리석다는 것을 말하고 있다. “대저 표면적 유대인이 유대인이 아니며 표면적 육신의 할례가 할례가 아니라 오직 이면적 유대인이 유대인이며 할례는 심령에 있고 의문에 있지 아니한 것이라 그 칭찬이 사람에게서가 아니요, 다만 하나님에게로서다”. 바울은 자기의 할례를 의지하는 모든 유대인의 사례를 뒤엎었다. 국적이나 어떤 인간적인 연관성에 의지하는 모든 것은 할례에 관한 이 역설에 의하여 완전히 배제된다.
- 3장 초두에서 바울은 그럼 유대인에게는 어떠한 이익도 없으며 할례에 아무런 유익이 없다고 말하고 있는가? 라는 질문을 한다. “아, 그렇지 않다. 유대인의 유익은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율법을 나타내 주셨으며 금상첨화격으로 그것을 기록된 형식으로 주셨다는 것이다. 3:20까지의 나머지 부분은 유대인의 본래적인 부패 때문에 그 유익이 그들에게 전혀 도움을 주지 못했다는 것을 증명한다.
그래서 우리들은 이 3:19-20 안에 있는 요약과 굉장한 결론에 이르게 되며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얻는 교리의 핵심적인 서두를 접하게 된다. 바울은 1:16에서 시작한 말을 여기서 마무리 짓고 있다. 바울은 유대인들에게 율법이 뜻하는 참다운 목적은 “모든 입을 막게 하기 위함”이란 것을 지적해 주고 있다.
어떤 사람이 그리스도인인지 아닌지를 알려면 당신의 입이 닫혀져 함봉되고 할 말이 없어지기 전에는 아직 당신은 그리스도인으로 출발하지 않은 것이다. 당신의 주장을 내걸고 당신의 모든 의를 내보이면 율법은 그 모든 것을 쓸모없는 지푸라기이며 ‘더러운 넝마’와 ‘분토’라고 말한다. 이것이 율법이 하는 일이다. 모세를 통해 율법을 주신 이유는 우리에게 ‘죄에 대한 지식’을 주기 위함이다. 죄의 가공할 성격에 대해 알게 하기 위함인 것이다. 그것은 범죄를 억제하기 위해서가 아니고 ‘더 많게’ 하려 함이다.(7:5).
율법은 우리에게 우리의 전적인 무능력적인 절망을 보여주고 그럼으로써 율법은 “그리스도에게로 우리를 인도하는 몽학선생”이 되는 것이다.
2장 위대한 전환점 “이제는”
(롬3:21-31) (21)이제는 율법 외에 하나님의 한 의가 나타났으니 율법과 선지자들에게 증거를 받은 것이라 (22)곧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모든 믿는 자에게 미치는 하나님의 의니 차별이 없느니라 (23)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24)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속량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 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 (25)이 예수를 하나님이 그의 피로써 믿음으로 말미암는 화목제물로 세우셨으니 이는 하나님께서 길이 참으시는 중에 전에 지은 죄를 간과하심으로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려 하심이니 (26)곧 이 때에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사 자기도 의로우시며 또한 예수 믿는 자를 의롭다 하려 하심이라 (27)그런즉 자랑할 데가 어디냐 있을 수가 없느니라 무슨 법으로냐 행위로냐 아니라 오직 믿음의 법으로니라 (28)그러므로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얻는 것은 율법의 행위에 있지 않고 믿음으로 되는 줄 우리가 인정하노라 (29)하나님은 다만 유대인의 하나님이시냐 또한 이방인의 하나님은 아니시냐 진실로 이방인의 하나님도 되시느니라 (30)할례자도 믿음으로 말미암아 또한 무할례자도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하실 하나님은 한 분이시니라 (31)그런즉 우리가 믿음으로 말미암아 율법을 파기하느냐 그럴 수 없느니라 도리어 율법을 굳게 세우느니라
1:16~17 복음에 대한 진술
1:18~3:20 사람들의 모든 경건치 않음과 불의에 대하여 나타난 하나님의 진노가 유대인 뿐만 아니라 이방인들에게도 똑같이 해당된다는 것을 증명.
3:20에서 “그러므로 율법의 행위로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 가 없나니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음이니라”라는 말로 끝맺음.
- 바울은 그 점을 못박아 놓고서 이제 구원의 유일한 길이 있다는 것을 보여주기 시작한다. ‘그러나 이제는(But now)’ 이란 두 마디 말보다 성경 전체에 나타난 말 중에서 도 놀라운 말이 없다.(King James version에는 두 단어로 표현). 어느 누구도 자기가 전혀 소망이 없음을 깨닫지 않고서는 그리스도인일 수가 없다. 청교도들과 그 후계자들은 언제나 죄에 대한 확신부터 시작했다.
어떤 면에서는 신앙이란 진실로 일종의 저항(protest)이라고 말할 수 있다. 당신은 대적하는 모든 말을 듣고도 또한 가장 가혹한 환경 가운데서라도 ‘그러나 이제는’이라고 말해야 한다. 믿음의 모든 비결은 그 모든 것을 대항하여 이 두 마디로 대처하여 일어서는 능력이 있다. 우리는 보이는 대로 사는 것이 아니고 믿음으로 살아가는 것이다.
브라우닝, “나에게 있어서 믿음은 끊임없이 일어나는 불신앙을 잠잠헤 하는 방편이다.” 그의 말은 마치 미가엘 천사가 뱀의 머리를 발로 누르고서 있는 것 같은 느낌이 든다. 믿음으로 서 있다는 것의 의미는 무엇으로도 하나님 앞에서 자기의 옳음을 나타낼 수 없고 한가닥의 소망도 없다는 것이다. 이 점에 대해 확실하다면 “그러나 이제는”이란 말을 기뻐할 준비가 된 것이다.
“그러나 이제는 율법 외에 하나님의 한 의가 나타났으니” 바울은 이제 막 끝낸 이 사건, 주 예수 그리스도의 강림 생애와 죽음 부활 승천등이 모든 것을 변화시켰다는 것이다. 그것은 전혀 새로운 일이며 죄에 빠진 사람들에게 있어서 가장 놀라운 기쁜 소식이다(1:16,17). 자기 존재의 참 모습을 지각하는 마음이 없으면 이러한 것들을 생각할 수 없다.
- 이 경탄스러운 기쁜 소식이 무엇인가?
:21-24 구원의 길
첫째, 하나님께서는 의를 준비하셨는데 전에는 약속하셨고 이제 나타내 보이셨다는 것이다.
둘째, 이 하나님의 의가 우리의 것이 되는데 그것은 율법이 행위나 율법을 따른 결과가 아니고 전적인 믿음을 통해서만 된다는 것이다.
셋째, 이 길은 모든 자들에게 열려 있다는 것이다.
넷째, 그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로 되었다는 것이다.
다섯째, 주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 사업을 통해서만 그것이 가능하며 유효하다는 것이다.
:25~31 이 위대한 구속의 특징
첫째, 이 구속의 길이 하나님의 성품과 일치한다는 것이다(:25~26).
둘째, 이 길은 모든 영광을 하나님께 돌리는 길이라는 것이다(27~28).
셋째, 이 길이 하나님이 모든 세상과 모든 족속의 하나님이 되심을 보여주는 길이라는 것이다(:29~30)
넷째, 그 길이 율법을 영예롭게 하고 굳게 세우는 방법이라는 것이다(:31).
제가 여러분에게 강조하는 것은 구속에 대한 우리의 사상이 반드시 이 부분과 일치해야 한다는 것과 이 부분을 시금석으로 해서 우리의 사상을 점검해 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오늘의 우리들은 어떻게 해서든지 사람들을 그리스도께 오게 하고 결과를 얻기 위해 너무 나 과민한 나머지 하나님께서 구원하시는 방법을 그대로 말하지 않고 흘려 버리고 있다. 어떤 이는 이렇게 반박할지도 모른다. ‘아무리 그렇지만, 오늘날 사람들에게 먹혀들지 않으며 그들은 신학에는 관심이 없다’. 거기에 대한 답변은 만일 그들이 그리스도인 되려 한다면 신학에 관심을 가져야 하며 진리를 듣고 그것을 믿어야 한다는 것이다. 성령께서 사람들을 처리하시기까지는 그들을 절대 신학에 관심을 가지지도 않으며 그렇게 되지도 않을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령께서 그들의 눈을 열어 그것을 깨닫게 하실 것과 능력으로 그들에게 진리를 심어 주실 것을 믿으며 그들에게 설파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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