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구약 성경강해***/- 로마서 강해

로마서 복음에 대한 담론

에반젤(복음) 2019. 12. 18. 09:57



              

복음, 이대로 좋은가?(2-1)

로마서 복음에 대한 담론

강 금성 목사

A. 들어가는 말

 

  지난 번 “갈라디아서 복음에 대한 담론”에서 저와 0 교수님 사이에 있었던 대화 내용을 소개해 드렸습니다. 0 교수님은 “갈라디아서에는 ‘복음이 무엇이다.’라고 확실하게 말하는 구절이 없다.”는 입장이셨습니다. 하지만 그 주장은 사실과 다르다는 것을 말씀드렸는데, 그 내용을 요약하면 아래와 같습니다.

 

첫째, 바울은 갈라디아서에서 복음이 무엇인가에 대해 여러 차례 언급하고 있으며(갈 2:16, 3:5-6, 11. 5:5-7), 그 복음의 내용은 “사람이 의롭다하심을 얻는 것은 율법의 행위로 말미암지 않고 오직 믿음으로 말미암는다.”는 것입니다.

 

둘째, 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이 왜 믿음으로 말미암는가에 대해 바울 사도는 십자가 때문이라 합니다(2:21, 3:1). 그 십자가는 예수님만 못 박힌 것이 아니라 예수 믿는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못 박히고 대신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살게 하며(2:20), 내 육체와 함께 정과 욕심이 못 박히고 대신 성령의 소욕을 따라 살도록 하며(5:24-25), 세상이 나에 대하여 내가 세상에 대하여 못 박히고 대신 하나님께 대하여 살도록 하기 때문(6:14, 2:19)입니다. 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이 오직 믿음으로 말미암는 것은 십자가가 사람을 새로 지음 받게 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셋째, 교회에 전파되는 것이 참된 복음인지 다른 복음인지를 구분하는 것은 십자가를 볼 때 밝히 드러나게 되는데(3:1), 그 십자가는 사람을 ‘새로 지음 받게 하는 것’입니다(6:18).

 

  사도 바울이 갈라디아서에서 복음에 대해 말한 내용을 토대로 오늘날 교회에서 선포되고 있는 복음(사영리, 전도폭발훈련에서 제시하는 복음, 글 없는 책)을 검토해보면, 그것들은 모두 죄 용서만을 말할 뿐 새로 지음 받게 하는 것에 대해서는 침묵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현재 교회에서 선포하고 있는 대부분의 복음은 갈라디아서에서 바울이 말하는 복음과 명백히 다르며, 교회를 거룩한 공동체가 아닌 죄인들의 소굴로 전락시킬 위험성을 내포하고 있는 것이 분명합니다.

  그런데 0 교수님은 “‘갈라디아서에는 복음이 무엇이다.’라고 확실하게 말하는 구절이 없이 숨겨져 있으며, 복음은 로마서에 명확하게 나타난다.”라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대화의 내용이 자연스럽게 로마서로 옮겨졌습니다. 이 글은 로마서에 나타난 복음에 대해 저와 0 교수님이 나눈 대화 내용을 소개하며, 로마서에서는 복음이 어떻게 진술되고 있는지를 말씀드리겠습니다.

 

B. 본론

 

  사도 바울은 갈라디아서에서 말한 복음을 로마서에서도 그대로 말합니다. 그 본문이 로마서 6장 1-11절인데, 갈라디아서와 다른 점은 갈라디아서에서는 십자가만을 말했지만, 로마서에서는 십자가와 부활에 대해 말한다는 것입니다.

 

1. 로마서 6:1-11절

 

  로마서 6장 1-11절은 죄와 관련된 중요한 사실 네 가지를 말해줍니다. 그 네 가지는 다음과 같습니다. 첫째, 예수님을 믿는 사람은 ‘더 이상 죄 가운데 살 수 없다.’는 것입니다. 1절과 2절입니다.

 

(1)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을 하리요 은혜를 더하게 하려고 죄에 거하겠느냐

(2)그럴 수 없느니라 죄에 대하여 죽은 우리가 어찌 그 가운데 더 살리요

 

  그리스도인이 되면 죄에 거할 수 없고, 더 이상 죄 가운데 살 수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다수 그리스도인들은 생각하기를 “우리는 죄에서 벗어날 수 없다. 사람이 어찌 죄를 짓지 않을 수 있겠는가?”라고 생각하며, 자신이 예수를 믿으면서도 죄 가운데서 사는 것을 전혀 이상하게 여기지 않습니다. 이는 크게 잘못 생각하는 것이며, 미혹된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은 더 이상 죄에 거할 수 없고, 죄 가운데서 살 수 없습니다. 사실 자신이 죄 가운데 살면서도 구원의 확신을 갖고 있는 그리스도인들이 많은데, 현대 교회에서 선포하고 있는 복음이 그 신학적 근거를 제공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둘째, 예수님의 죽으심과 관련된 것인데, 우리가 예수님을 믿으면 ‘죄에 대하여 죽게 되고, 더 이상 죄의 종노릇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3-6절)무릇 그리스도 예수와 합하여 세례를 받은 우리는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은 줄을 알지 못하느냐

(4)그러므로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음으로 그와 함께 장사되었나니 이는 아버지의 영광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심과 같이 우리로 또한 새 생명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함이라

(5)만일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같은 모양으로 연합한 자가 되었으면 또한 그의 부활과 같은 모양으로 연합한 자도 되리라

(6)우리가 알거니와 우리의 옛 사람이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은 죄의 몸이 죽어 다시는 우리가 죄에게 종 노릇 하지 아니하려 함이니

 

  예수님을 믿으면 세례를 받습니다. 이 세례는 나를 그리스도와 연합한 자가 되게 합니다. 전혀 남남이었던 두 사람이 결혼을 통해 연합이 되어 하나가 되듯이, 세례는 나를 그리스도에게 연합한 자가 되게 합니다. 그래서 나를 그리스도와 공동운명체가 되게 합니다. 부부는 분명히 각각 다른 몸을 가졌지만, 누구 한 사람에게 무슨 일이 일어나면 그 일은 두 사람 모두에게 일어난 일이 되듯이, 그리스도와 연합한 자가 되면 그리스도에게서 일어난 일이 내게도 일어납니다. 3-6절에 보니,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신 것이 내게도 일어나 나는 죄에 대하여 죽고, 죄에 대하여 죽은 나는 더 이상 죄의 종노릇을 하지 않게 됩니다. 놀라운 일입니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죽으심이 이루신 이 놀라운 자유를 선포하고, 그리스도인은 이 자유를 마음껏 누릴 수 있어야 합니다.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우리에게 죄의 종노릇하지 않는 자유를 주셨으니 우리는 마땅히 자유를 누려야 합니다.

 

  셋째, ‘칭의의 의미’에 관한 것인데, 칭의는 죄 용서함 받아 의롭다함을 얻은 것이 아니라 ‘죄에서 벗어나 의롭다 하심을 얻은 것’입니다.

 

(7)이는 죽은 자가 죄에서 벗어나 의롭다 하심을 얻었음이라

 

  여기 ‘죄에서 벗어나’에서 ‘벗어나’의 뜻은 본래 ‘분리’의 의미를 가지고 있는데, ‘가까이 있는 것에서 떨어지다.’는 의미입니다. 그러니까 ‘죄에서 벗어나’란 뜻은 죄와 분리되어, 혹은 죄에서 떨어져서 살게 되는 것으로 진짜 의로워지는 것을 의미합니다.

  대다수 그리스도인은 ‘의롭다 하심을 얻은 것’, 즉 칭의를 “나는 죄가 많지만 예수님이 내 죄를 대신 지고 십자가에서 죽으셨다. 그 예수님을 믿을 때, 내 모든 죄는 사함 받고, 나는 하나님 앞에 의롭다 하심을 얻게 된다.”라고 생각합니다. 칭의의 개념을 죄 용서에 의한 것으로 본 것입니다. 그러나 7절을 주의 깊게 보시면, “이는 죽은 자가 죄에서 벗어나 의롭다 하심을 얻었음이라.”고 합니다. 칭의는 죄의 종노릇하던 사람이 십자가에서 옛 사람의 죽음으로 인하여 죄에서 벗어나고, 더 이상 죄의 종노릇하지 않게 됨으로 인하여 의롭다 하심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진짜 죄 짓지 않고 의롭게 사는 상태, 그렇게 ‘의롭게 되는 것’입니다. 성경을 깊이 연구하는 학자들은 이것을 압니다. 그러나 이것을 교회에서 설교로 하면 시비를 겁니다. 행위구원론자니, 율법주의자니... 하면서 말입니다. 사탄이 미혹의 영을 교회 가운데 보내 올바른 복음을 선포하지 못하게 하고 있는 것입니다. 7절에서 사도 바울이 말하는 칭의는 ‘죄 용서 받아’ 의롭다 하심을 받는 것이 아니라, 죄에서 ‘벗어나’ 의롭다 하심을 얻는 것입니다.

 

  넷째, 예수님의 부활과 관련된 것인데, 우리가 예수님을 믿으면 하나님을 향해 산 자가 됩니다.

 

(4-5절)그러므로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음으로 그와 함께 장사되었나니 이는 아버지의 영광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심과 같이 우리로 또한 새 생명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함이라 (5)만일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같은 모양으로 연합한 자가 되었으면 또한 그의 부활과 같은 모양으로 연합한 자도 되리라

(10-11절)그가 죽으심은 죄에 대하여 단번에 죽으심이요 그가 살아 계심은 하나님께 대하여 살아 계심이니 (11)이와 같이 너희도 너희 자신을 죄에 대하여는 죽은 자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께 대하여는 살아 있는 자로 여길지어다

 

  부활은 복음의 완성입니다. 예수님의 죽으심은 우리로 죄에 대하여 죽어 죄의 종노릇하지 않게 함이요, 예수님의 살아나심은 우리로 하나님을 향해 살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죄의 종노릇하던 사람이 하나님의 종이 되어 온전히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삶을 살 수 있게 됩니다. 이것은 믿음에 의해 이루어지는 일이며, 십자가와 부활의 복음이 가지고 있는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로마서 1장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16)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 먼저는 유대인에게요 그리고 헬라인에게로다

 

2. 로마서 3:21-28절

 

  제가 이 복음에 대해 말하니까 0 교수님이 제 말을 가로막으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아니다. 로마서 6장은 그리스도인의 생활에 대해 말한 것이고, 복음은 3장에 나온다.” 결과적으로 이 말은 로마서 6장을 통해 제가 말한 복음 자체를 부정한 것입니다. 저는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다시 살아나심을 통해 우리에게 이루신 이 놀라운 일을 어떻게 복음이 아니라고 하는지 의아할 뿐입니다. 어떻든 우리의 대화는 로마서 3장으로 옮겨갔습니다. 0 교수님의 주장은 로마서에서 말하는 복음은 특히 3장 21절 이하에 나온다고 하셨습니다. 다음은 그 본문입니다.

 

(3:21-28절)이제는 율법 외에 하나님의 한 의가 나타났으니 율법과 선지자들에게 증거를 받은 것이라

(22)곧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모든 믿는 자에게 미치는 하나님의 의니 차별이 없느니라

(23)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24)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속량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

(25)이 예수를 하나님이 그의 피로써 믿음으로 말미암는 화목제물로 세우셨으니 이는 하나님께서 길이 참으시는 중에 전에 지은 죄를 간과하심으로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려 하심이니

(26)곧 이 때에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사 자기도 의로우시며 또한 예수 믿는 자를 의롭다 하려 하심이라

(27)그런즉 자랑할 데가 어디냐 있을 수가 없느니라 무슨 법으로냐 행위로냐 아니라 오직 믿음의 법으로니라

(28)그러므로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얻는 것은 율법의 행위에 있지 않고 믿음으로 되는 줄 우리가 인정하노라

 

  이 말씀에서 바울 사도가 말하고자 하는 핵심 주제는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얻는 것이 율법의 행위에 있지 않고, 믿음으로 된다.”는 것입니다. 옳습니다. 지구상에 있는 모든 개신교에 속한 교회는 이 진리를 믿습니다.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얻는 것은 율법의 행위에 있지 않고, 오직 믿음으로 됩니다.” 0 교수님은 이것이 로마서에서 말하는 복음이라는 것입니다. 저 역시 이것이 로마서에서 말하는 복음이며, 예수님을 믿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는 것을 믿습니다. 그런데 저와 0 교수님은 이 본문에서 ‘어떻게 의롭다 하심을 얻는가?’에 대한 해석은 달랐는데 0 교수님은 전통적인 해석 그대로,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얻는 것은 예수께서 우리 죄를 대신해서 죽으셨고, 그 보혈의 공로로 값없이 죄 사함 받아 의롭다 하심을 얻는다.’는 입장이신데 반해, 저는 ‘예수님을 믿으면 사람이 새로 지음을 받아 의롭다 하심을 얻는다.’는 입장입니다. 제가 그렇게 주장하는 근거는 다음의 두 가지입니다.

 

  첫째는 24절입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속량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 이 구절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게 되는 이유를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속량으로 말미암아’라고 합니다. 여기 ‘속량’이란 단어는 헬라어 명사 ‘아폴뤼트로시스’(ajpoluvtrwsi"”)인데, 그 의미는 신약 성경이 기록될 당시의 사회에서 ‘노예였던 사람이 몸값을 지불하고 자유인이 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 단어가 성경적으로 사용될 때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죄의 종노릇하던 자가 죄에서 벗어나는 것(해방)을 의미합니다. 즉 속량이란 단어는 구출, 자유, 해방 등이 핵심 의미입니다. 0 교수님은 이 사실을 애써 부인하셨지만 권위 있는 사전과 주석은 모두 제 주장을 지지합니다. 그러니까 로마서 3장 21절 이하에서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얻는 것은 율법의 행위로가 아니라 믿음으로 말미암는 것이라고 말할 때, 실제로 죄에서 벗어나 의롭게 됨을 말하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항상 이를 염두에 두고 있습니다.

 

  또 한 가지 근거는 25절입니다. “이 예수를 하나님이 그의 피로써 믿음으로 말미암는 화목제물로 세우셨으니 이는 하나님께서 길이 참으시는 중에 전에 지은 죄를 간과하심으로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려 하심이니” 여기 사람을 의롭다 하심을 얻도록 하기 위해 하나님이 뭔가를 하셨다는 말씀이 나오는데, 그것은 ‘예수를 그의 피로써 화목제물로 세웠다.’는 것입니다. 여기에 쓰인 ‘화목제물’은 헬라어로 ‘힐라스테리온’(iJlasthvrion)인데, 속죄의 장소나 물건을 의미합니다. 신약성경에서는 본문과 히브리서 9장 5절 단 두 곳에만 쓰였습니다. 히브리서 9장 5절에서 이 단어는 지성소의 법궤를 덮고 있는 속죄소를 가리킵니다. 이 힐라스테리온(속죄소)은 뜰에 있는 번제단에서 드리는 속죄제와는 달리 대제사장이 1년에 단 한 번 속죄일에 들어가 짐승의 피를 뿌림으로써 대제사장과 그의 집안을 속죄하고, 이스라엘 자손의 모든 죄와 부정한 중에 있는 지성소와 회막을 위하여 속죄하고, 그리고 이스라엘 모든 회중을 속죄합니다(레 16:15-17). 그러므로 이 대속죄일에 속죄소에 피를 뿌리는 것은 1년 동안 죄 짓고 부정한 이스라엘 백성 가운데 거하며, 더럽혀진 성소를 정화시키고 제사장과 백성들 또한 정화시킴으로써 새롭게 하나님을 잘 섬기도록 하는 것이 이 속죄소에 피를 뿌리는 목적입니다. 즉 속죄소에 피를 뿌리는 것은 ‘정화’를 시켜 ‘하나님을 잘 섬길 수 있도록 하는 것’에 그 목적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히브리서에서 이 단어는 새 언약과 관련하여 사용되었습니다(히 8-10장). 옛 언약은 사람이 율법의 계명을 지킴으로 하나님의 백성이 됩니다. 그러나 사람이 약하여 율법을 흠 없이 지키는 자가 없어, 아무도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함을 보고, 하나님이 새 언약을 맺기에 이릅니다. 그 새 언약이란 하나님께서 사람의 생각 속에 하나님의 법을 두고, 성령으로 사람의 마음에 하나님의 법을 새겨서 하나님 뜻대로 살도록 하는 것입니다(렘 31:33, 겔 34:24-28). 즉 속 사람을 새롭게 함으로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고 따르도록 하는 방법의 언약이 새 언약입니다. 히브리서 9장은 이 새 언약을 맺는데 예수의 피가 하늘에 있는 성소의 속죄소(iJlasthvrion)에 뿌려졌다는 것입니다. 그 결과에 대해서 히브리서 9장 11-14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히 9:11-14)그리스도께서는 장래 좋은 일의 대제사장으로 오사 손으로 짓지 아니한 것 곧 이 창조에 속하지 아니한 더 크고 온전한 장막으로 말미암아

(12)염소와 송아지의 피로 하지 아니하고 오직 자기의 피로 영원한 속죄를 이루사 단번에 성소에 들어가셨느니라

(13)염소와 황소의 피와 및 암송아지의 재를 부정한 자에게 뿌려 그 육체를 정결하게 하여 거룩하게 하거든

(14)하물며 영원하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흠 없는 자기를 하나님께 드린 그리스도의 피가 어찌 너희 양심을 죽은 행실에서 깨끗하게 하고 살아 계신 하나님을 섬기게 하지 못하겠느냐

 

  특히 14절에 예수의 피가 어떤 능력이 있는지를 보여줍니다. 예수의 피는 육체를 정결하게 하는 것(13절) 이상으로 우리 양심을 죽은 행실에서 깨끗케 하고 살아계신 하나님을 섬기게 합니다. 즉 속 사람을 깨끗케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단순히 죄의 용서와는 다릅니다. 죄 용서는 그 안에 있는 죄를 없이 하지 못합니다. 따라서 그는 여전히 죄의 종노릇을 하며 하나님을 향해서는 죽어 있는 자입니다. 그러나 예수의 피는 죽은 행실 자체에서 깨끗케 하며(죄로부터의 해방), 살아계신 하나님을 섬길 수 있게 합니다(하나님의 종이 됨). 이것이 속죄소(힐라스테리온)에 뿌린 예수의 피입니다.

 

  긴 설명이었습니다만 요점은 이것입니다. 로마서 3장 21절 이하의 말씀은 0 교수님의 주장대로 죄 용서로 인한 칭의가 아니라(거의 모든 교회가 이렇게 믿고 있다), 우리를 죄에서 벗어나게 하고(속량, 24절), 양심으로 죽은 행실에서 깨끗케 하여 하나님을 섬길 수 있도록 하는 ‘새로 지음 받은 자’가 되게 하는(25절), 이 두 가지를 통해 사람이 의롭게 하심을 얻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3장에서 말하는 이 복음의 내용과 6장에서 제가 말한 복음의 내용은 동일합니다. 다만 3장은 개론적으로 복음을 말했고, 6장(1-11절)에서는 그것을 더 구체적으로 설명한 것입니다.

 

3. 로마서 6:22절

 

  그런데 0 교수님은 6장에 나타난 복음에 대해서도 부정하셨고, 3장에 대한 저의 해석도 부인하셨습니다. 그리고 0 교수님은 제게 물었습니다. “강 목사님은 로마서 6장의 주제가 무엇이라고 생각합니까?” 저는 대답했습니다. “예, 저는 로마서 6장이 그리스도와의 연합으로 인해 죄를 범하던 옛 사람이 십자가에서 죽어 죄에서 벗어나 자유하게 되고, 부활에 연합하여 이제는 하나님께 대하여 살아나서 의를 행하고 하나님의 뜻대로 살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대답을 했더니 0 교수님은 “그렇지 않습니다. 로마서 6장은 그리스도인의 생활에 대해 말하는 것이지 복음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라고 주장했습니다. 그 증거로 6장 22절을 제시했습니다.

 

(롬 6:22)그러나 이제는 너희가 죄로부터 해방되고 하나님께 종이 되어 거룩함에 이르는 열매를 맺었으니 그 마지막은 영생이라

 

   0 교수님은 로마서 6장을 해석하는 키가 바로 이 구절이고, 이 구절은 다음과 같은 뜻이라고 했습니다. “이제 너희는 그리스도인이 되었으니까 하나님께 순종해라. 그리하여야만 죄로부터 자유하게 된다.” 과연 이 구절이 그런 뜻일까요? 그 주장은 사실과 전혀 다릅니다.

  22절의 “그러나 이제는 너희가 죄로부터 해방되고"에서, ‘해방되고’의 동사는 과거형입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을 믿는 사람은 과거에 이미 죄로부터 해방된 것입니다. 또 “하나님께 종이 되어”에서 ‘종이 되다’는 동사도 역시 과거형입니다. 예수 믿는 사람은 ‘과거에 죄의 종노릇하던 사람이 죄로부터 해방되었고, 이미 하나님의 종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어떻게 그런 일이 일어났을까요? 그 일은 앞서 6:1-11절에서 말한 복음의 능력으로 인한 것입니다. 그리스도와 연합되어 십자가에 죽음으로 인해 죄로부터 해방되었고, 그리스도의 부활에 연합함으로 하나님께 대하여 산자가 됨으로 하나님께 종이 된 것입니다.

계속해서 22절의 “거룩함에 이르는 열매를 맺었으니”에서 ‘맺었으니’의 동사는 현재 능동태입니다. ‘맺었으니’의 동사가 현재형이란 것은 거룩함에 이르는 열매들을 현재 맺고 있다는 뜻이고, ‘맺었으니’의 동사가 능동태라는 것은 주어인 내가 그 열매를 스스로 맺고 있다는 의미입니다. 능동태와 대조되는 개념은 수동태인데, 이 동사는 주어의 동작이 타의에 의해서 수동적으로 이루어지고 있음을 의미합니다. 그러나 이미 말한 대로 ‘맺었으니’의 동사는 현재 능동태로써 거룩함에 이르는 열매를 내 스스로 맺고 있다는 의미입니다. 그것은 복음의 능력이 내 안에 역사하여 나를 죄에서 해방시켜 하나님의 종이 되게 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복음은 거룩함에 이르는 열매를 맺게 하는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그리고 마지막에 “그 마지막은 영생이라.”고 하는데, 그러므로 이렇게 해석할 수 있습니다. “예수 믿는 사람은 이미 죄로부터 해방되고 하나님께 종이 되었기 때문에 그는 늘 거룩함에 이르는 열매를 맺게 되고, 그러한 삶은 필연 영생이다.” 그런데 이 구절을 “이제 너희는 그리스도인이 되었으니까 하나님께 순종하라. 그리하여야만 죄로부터 자유하게 된다.”라고 해석하는 것은 ‘죄로부터의 자유’는 이미 이루어진 과거의 일인데 미래에 일어날 일로 해석하는 잘못을 범한 것입니다. 새삼스럽게 순종해야만 죄로부터 자유케 되는 것이 아닙니다. 죄로부터 자유케 되는 것은 복음의 능력으로 인해 이미 이루어진 과거의 사건입니다. 그런데 22절을 순종해야 죄에서 해방된다고 해석하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하지만 0 교수님의 해석에도 일리는 있습니다. 6장 12-21절에서 바울은 우리가 하나님께 순종해야 하나님의 종이 된다고 말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특히 16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16)너희 자신을 종으로 내주어 누구에게 순종하든지 그 순종함을 받는 자의 종이 되는 줄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혹은 죄의 종으로 사망에 이르고 혹은 순종의 종으로 의에 이르느니라

 

  0 교수님의 말처럼 하나님께 순종해야 하나님의 종이 된다는 것이나, 6장 12-23절이 하나님께 순종하라는 그리스도인의 생활에 대한 권면이라는 말도 사실입니다. 하지만 0 교수님은 이 단락(6:12-23)의 주제인 ‘하나님께 순종하라’는 권면이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으로 죄로부터 해방되고, 부활로 인해 하나님께 살게 된 이들에게 주는 것임을 잊은 것입니다. 6장 12-23절을 해석할 때 12절의 ‘그러므로’란 접속사를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 ‘그러므로’는 12-23절에서 하나님께 순종하라는 권면이, 1-11절에서 우리가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통해 죄로부터 해방되고 하나님께 대하여 산 자가 된 결과로써 오는 것임을 나타내는 접속사입니다. 죄로부터의 해방과 하나님께 대하여 산 것이 먼저이고, 하나님께 순종하는 것이 나중입니다. 그러나 죄로부터 해방된 사람일지라도 몸의 사욕에 순종하면 다시 죄의 종이 됩니다. 12-23절은 바로 이 부분을 다룬 것입니다. 복음의 능력이 나타나기 전, 즉 죄로부터 해방되기 전의 사람들은 하나님께 순종하는 것 자체가 불가능합니다.

 

C. 나가는 말

 

1. 사도 바울은 복음의 케뤼그마(선포)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신 것, 즉 십자가와 부활을 말합니다. 우리의 구원은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다시 살아나심을 통해 이루어진 사건입니다.

 

(롬 4:25)예수는 우리가 범죄한 것 때문에 내줌이 되고 또한 우리를 의롭다 하시기 위하여 살아나셨느니라

(고전 15:1-4)형제들아 내가 너희에게 전한 복음을 너희에게 알게 하노니 이는 너희가 받은 것이요 또 그 가운데 선 것이라 (2)너희가 만일 내가 전한 그 말을 굳게 지키고 헛되이 믿지 아니하였으면 그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으리라 (3)내가 받은 것을 먼저 너희에게 전하였노니 이는 성경대로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위하여 죽으시고 (4)장사 지낸 바 되셨다가 성경대로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사

 

  바울은 로마서 6장에서 이 십자가와 부활이 어떻게 우리를 죄로부터 해방하고 하나님께 대하여 살게 하는지를 구체적으로 설명했습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연합하여 죄에 대하여 죽고 죄로부터 해방되었으며, 그리스도의 살아나심과 연합하여 하나님께 대하여 산 자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것을 복음이 아니라고 말하는 것은 복음이 무엇인지를 알지 못하기 때문에 나오는 말입니다. 로마서 6장은 사람이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하심을 얻게 되는 것이 어떤 과정을 거쳐서 되는 것인지를 보여주는 복음의 정수를 보여준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 점에서 로마서 6장(1-11절)은 바울이 갈라디아서에서 말한 십자가(2:20, 5:24, 6:14)와 일치합니다. 다만 갈라디아서에서는 로마서 6장에서 말한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다시 살아나심 중에서 그리스도의 죽으심이 우리를 어떻게 죄로부터 해방하는지를 더욱 구체적이고 섬세하게 다루고 있음을 봅니다.

 

2. 0 교수님이 로마서에서 복음을 나타낸다고 한 로마서 3장 역시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얻게 되는 것이 죄의 용서를 통해 의롭다 하심을 얻게 하는 것이 아니라, 죄로부터 해방을 의미하는 ‘속량’과, 예수의 피로 사람의 양심을 깨끗하게 하여 하나님을 섬기게 하는 ‘새로 지음 받은 것’을 통해 의롭다 하심을 얻게 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는 바울이 로마서 6장 7절에서 말한 바 “이는 죽은 자가 죄에서 벗어나 의롭다 하심을 얻었음이라”는 진술과도 일치합니다. 바울은 이것을 하나님의 의라고 합니다. 하나님이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다시 살아나심을 통해 우리로 의롭다 하심을 얻게 하셨기 때문입니다. 이 의는 믿음으로 말미암는 것이며, 은혜로 값없이 주어지는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3. 이 두 가지 사실에서 결국 0 교수님이 “로마서 6장은 삶에 대해 말한 것이고, 복음은 3장에 나타나 있다.”고 말한 것은 복음에 대한 오해에서 기인한 것임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사도 바울의 복음에 대한 진술은 일관되게 ‘죄의 용서’로 인한 칭의에 맞춰져 있지 않고, ‘새로 지음 받는 것’에 초점이 맞춰져 있습니다. 그리고 차후에 확인하게 되겠지만, 이 사실은 바울에게 뿐만이 아니라 사도 베드로의 서신에서도 확인되는 바이며, 신약성경의 모든 책들이 동일한 입장을 가지고 있습니다.

 

  창세기부터 요한계시록까지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되었으며, 하나님의 거룩한 형상을 회복하는 것이 인간 자신의 구원뿐만 아니라, 피조물의 회복과 밀접한 관계가 있음을 말합니다. 그리고 인간이 타락한 이후 하나님 나라 백성으로 택함을 받은 이들은 하나님의 법을 지키는 자들입니다. 순종이 없는 하나님의 백성들은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다만 하나님의 법을 지키는 일이 옛 언약에서는 ‘율법으로’였고, 새 언약에서는 ‘믿음으로’가 다를 뿐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사람은 죄로부터 해방되고 하나님께 순종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다시 살아나심이 복음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