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린도전서의 방언(Tongues at Corinth<고전 12장; 14장>)
(1) 사도 바울과 고린도 교회
사도 바울 당시에 고린도 시(市)는 약 70만 명의 인구가 살고 있는 대 상업도시였다. 그중에 약 25만 명은 자유인들이었고, 약 40만 명(2/3)은 노예들이었다. 고린도 시는 상업의 중심지였으며, 아덴과 같은 대학촌은 아니었으나 헬라문화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그리고 그들의 헬라 철학 사상은 복음을 영접함에 있어서 오히려 장애물이 되었다. 고린도에는 아프로디테(Aphrodite)라고 불리는 신전(temple)이 해발 약 470km에 있었으며, 그 신전에는 소위 사랑의 여신이라는 1,000명 이상의 창녀들이 종교의 이름으로 매음 행위를 하였다. 그리하여 향락, 비행 등이 난무하고 성적(性的) 도덕 윤리가 극히 문란하고 타락하였다.
사도 바울은 이러한 도시에 제2차전도 여행시 교회를 개척하였다(고전 3:6, 10; 4:15; 행 18:1-17). 그리고 그곳에서 주후 51년-52년까지 약 1년 반 동안 복음을 증거하였다. 그는 복음을 전하는 동안 유대인들, 이방인들 그리고 세상 연락을 즐기는 사람들로부터 하나님의 말씀과 예수 그리스도의 증거로 인하여 많은 반대와 박해를 받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복음이 전파, 확산되어 이방인들의 많은 수가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하게 되었다. 바울이 고린도를 떠난 후에는 아볼로(Apollos)가 에베소로부터 와서 고린도 교회를 맡아 시무하게 되었다(행 18:24-28).
사도 바울이 고린도를 떠난 후에 고린도 교회 내에 많은 도덕적, 영적 문제들이 발생하였다는 소식을 글로데의 집 사람으로부터 보고받아 알게 되었다. 즉 고린도 교회에 분열(1:11), 육욕(3:3), 복음 사역에 대한 잘못된 생각(3:5-4:21), 간음과 음란(5:1), 그리스도인들 사이의 문제를 세상 법정에 고소(6:1), 성도덕 타락과 문란(6:15, 7:1-2), 자유의 남용과 위반(8:1), 여성의 위치(11:3), 주의 성찬의 오용(11:20-22), 영적 은사들에 대한 무지와 혼란(12:1), 잘못된 방언(14장), 그리스도인들의 육체적 부활 부인(15:12) 등 도덕적, 윤리적, 교리적 문제들이 많이 발생하였다. 그러므로 사도 바울은 제3차 전도 여행시 그와 같은 잘못을 바로잡고 훈계하기 위하여 에베소에서 고린도서를 기록하여 고린도 교회에 보냈다.
사도행전의 방언(2장; 10장; 19장)과 고린도전서의 방언(고전 12장; 14장)은 동일한가, 상이한가?
사도행전의 방언은 외국어였으며, 고린도전서에서 교훈 하는 방언도 외국어이다. 그러나 고린도 교회 일부 신자들의 방언이란 사람들이 알지 못하는(unknown), 횡설수설하는 무아지경의 말(gibberish ecstatic tongues)이었다. 이것은 성경이 교훈하는 방언이 아니라 잘못된 방언이다. 그러므로 사도 바울은 고린도 교회 신도들에게 방언, 방언의 규정, 경고, 금지 등에 관한 원리 문제들을 교훈하였다.
고린도 교회 신도들은 이방인들로서 기독교에 개종하기 전에는 사신 우상들을 섬기는 자들이었다. 그들은 기독교로 개종한 후에도 세상 연락을 즐겼을 뿐만 아니라, 자기들이 섬기던 사신 우상 개념과 관습을 그대로 교회 안으로 들여왔다. 그리하여 그들은 황홀한 무아지경에서의, 횡설수설하는, 중언부언하는, 이해할 수 없는 헛된 말을 계속 반복함으로써 자기들이 섬기는 신들과 접신하여 친밀한 관계를 맺으며, 따라서 어떤 계시를 받는 것으로 생각하였다. 고린도 교회에는 그와 같은 생각을 가진 사람들의 소위 방언으로 말미암아 무질서와 큰 혼란에 빠지게 되었다. 그와 같은 방언은 울리는 꽹가리와 허공에 말하는 것이 되었으며, 교회에 덕이 되지 않으며, 자신은 야만인이 되고 미쳤다는 말을 듣게 되었다.
그러므로 사도 바울은 “너희가 알지 못하기를 원치 아니하노니 너희가 알거니와 너희가 이방인으로 있을 때에 말 못하는 우상(벙어리 우상들; dumb idols)에게로 끄는 그대로 끌려 갔느니라”(고전 12:2)고 고린도 교회 신도들을 깨우쳐 주었다.
이방인들은 무의미한 말들을 계속 중언부언 반복하여야 자기들의 기도가 신(gods)에게 상달되는 것으로 생각하였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이방인들과 같이 중언부언하지 말라고 말씀하셨다. 무의미한 말을 계속 반복하는 중언부언의 형식적이고도 외식적인 기도는 하나님께서 받으실 리 만무하다. 그러기에 예수님께서 기도에 대하여 가르치시기를 “기도할 때에 이방인들과 같이 중언부언하지 말라. 저희는 말을 많이 하여야 들으실 줄 생각하느니라”(마 6:7)고 말씀하셨다.
고린도전서에서 언급된 방언은 은사를 가장 중요시하거나 사용하기 위한 권장이 아니라, 방언에 대한 잘못된 개념을 규정하고, 오용과 남용으로 인한 무질서와 혼돈을 금지하고 바로잡기 위함이었다. 방언은 교회의 유익을 위하여 방언의 규칙에 따라야 한다고 교훈하였다. 물론 이때의 방언도 외국어를 말한다.
(2) 방언 통역(The Interpretation of Tongues)
방언 통역은 일반이 알지 못하는 외국어를 자국어로 옮기는 은사이다. 방언 통역은 고린도전서 12:8-9에 나열된 아홉가지 영적 은사들 중 가장 마지막 은사이다. 방언과 방언 통역은 각기 상이한 은사들이면서도 서로 분리할 수 없는 상호 의존적인 연합체이다. 따라서 방언과 통역은 각기 독립적으로 또는 독자적으로는 작용할 수 없다.
방언 통역은 의사전달의 한 방편이다. 그러므로 통역 없는 방언은 천사의 방언이라도 울리는 꽹과리와 같다. 그 이유는 통역 없는 방언은 이해할 수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통역 없는 방언은 어떠한 모임에서도 하지 못하도록 금지되어 있다. 고린도전서 14:28에서는 “만일 통역하는 자가 없으면 교회에서 잠잠하라”고 금지령을 내렸다.
“교회에서 잠잠하라” 는 말씀은 “씨가토 엔 에클레시아”(; let him be silent in church; 교회에서 잠잠하라, 조용하라)이다. 그런데 헬라어 문법상 에클레시아 앞에 관사가 없으므로 에클레시아는 어느 특정 교회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고, 신자들의 어떠한 모임(any gathering of believers)에도 다 언급한다. 관사가 없으면 어느 특정 교회를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일반적으로 교회를 가리키기 때문이다. 따라서 부흥회, 기도원 집회 등 신자들이 모이는 어떠한 집회에서도(in any assembly) 방언함을 금하신 것이다. 방언(외국어)을 모르는 사람들에게 통역 없는 방언이란 이해할 수 없다. 사람이 이해하지 못하는 천만 마디의 말이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통역 없는 방언은 엄격히 금지되었음에도 불구하고 현대방언파 사람들은 이 규례를 완전히 무시하고 있다.
방언파에서는 방언 통역자가 있을 경우에는 통역자가 마음대로 통역할 수 있도록 상당한 해석을 부여하고 또 그렇게 함으로써 통역으로 인한 어떠한 공격에도 피할 수 있는 돌파구를 열어 놓았다. 그들은 말하기를 “통역이란 넓은 의미를 가지고 있으므로 단어 하나하나를 번역한다는 생각에 집착하지 않아야 한다. 통역의 넓은 의미는 설명한다, 해석한다(explain or expound)는 뜻이다. 그러므로 방언 통역이란 정확한 번역이 아니라 의미의 해석(설명)과 적용이다. 통역자는 방언의 내용을 이해하지 못하나 성령께서는 통역자로 하여금 순간적으로 즉시 통역하도록 하신다. … 통역은 방언보다 다소 길어지거나 짧아진다 …”고 하였다.1)
방언하는 사람은 통역이 없으면 스스로 통역하기를 위하여 기도하라고 하였다(고전 14:13). 방언의 은사를 받은 사람이 동시에 통역의 은사를 받은 경우도 다소 있다. 그러나 이 경우에는 방언하는 사람 자신이 방언(외국어)에 상당한 실력이 있어서 신자들로부터 충분한 실력을 인정받아야 한다. 그런데 방언하는 자와 통역하는 자는 대부분 동일인이 아니고 구별지어져 있는 것이 통상례이다.
소위 현대 방언과 방언 통역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다는 것이 과학적 분석이다. 서너 마디의 반복되는 무의미한 말들을 많은 내용으로 통역한다든지, 또는 동일한 방언을 녹음하여 다른 통역자에게 통역케 한다면 통역의 내용이 전연 상이하다. 또 한 통역자가 같은 소리의 방언이라도 다른 장소, 다른 상황하에서는 달리 해석한다. 실례로 달라스 신학교의 한 젊은 신학도가 시편 23편을 히브리어로 암송하였더니 통역하는 사람은 시편과는 전혀 관계도 없는 허무맹랑한 말을 통역이라고 하였다고 한다.2)
(3) 방언 통역자의 수와 질서(Number and Order)
“만일 누가 방언으로 말하거든 두 사람이나 많으면 세 사람이 차서를 따라 하고 한 사람이 통역할 것이요”(고전 14:27).
하나님은 어지러운 혼돈의 하나님이 아니시요, 질서의 하나님이시다. 하나님은 모든 것을 질서대로 하라고 명하셨다(고전 14:33, 40). 예배에 있어서 모든 순서는 질서적으로 진행하여야 한다. 성령의 열매들 중 하나는 절제이다(갈 5:22; 행 24:25; 벧후 1:6). 하나님은 신자들의 생활 속에서도 동일한 절제와 질서의 열매를 산출하기를 원하신다.
① 방언자의 수와 질서에 관한 교훈
• 방언(외국어)에는 통역이 있어야 한다. 통역 없는 방언은 이해할 수 없는 꽹과리 소리이므로 금지되었다.
• 한 사람이 방언하면, 한 사람이 통역해야 한다. 통역자나 듣는 사람들이 이해할 수 있도록 적당한 길이의 문장을 방언하고 통역해야 한다. 여러 사람이 동시에 방언을 하거나 여러 사람이 동시에 통역한다는 것은 방언의 수와 질서의 원리에 위배된다. 절서도 없고 통역도 없이 모든 사람이 한꺼번에 알 수 없는 괴상한 방언을 한다는 것은 비성경적이다.
• 차서를 따라 방언해야 한다. 한 사람이 방언하고 난 후에 다음 사람이 방언하고, 다음 사람이 방언하고 난 후에 또 다른 사람이 방언하여야 한다. 한 집회(예배)시에 방언하는 사람은 두 사람, 많아도 세 사람이 넘지 않아야 하며, 방언의 뜻을 분명히 이해하기 위해서는 한 사람이 방언하고 다른 한 사람이 통역하도록 하였다. 방언으로 기도하든지, 노래하든지, 말하든지, 어떠한 형태의 방언이든지간에 질서가 있어야 한다고 성경은 교훈하였다. 어지러운 분위기 속에서 많은 사람들의 무문별하고 무질서한 방언은 성경의 교훈과 규례에 위배된다. 참된 방언은 방언의 규례에 준하여야 한다. 성경은 조직적이고 질서적이고 규정에 의한 방언을 허락하였다. 예의와 질서는 예배의 본질적 교훈에 대한 외형적 표시이다. 현대 방언과 방언의 표시 그리고 방언의 수와 질서 등을 성경의 교훈에 비추어 볼 때 소위 현대 방언은 방언의 규정과 규칙에도 맞지 않는다.
② 방언으로 기도하는 것은 성경적인가?(Prayer in tongues: Biblical?)
현대 방언파에서는 주장하기를 방언은 대신방언(tongues to God)과 대인방언(tongues to man)이 있다고 한다. 그들은 하나님께 방언으로 기도하는 것을 대신방언이라 하고, 사람들에게 방언하는 것을 대인방언이라고 한다. 대다수 신도들은 기도라는 명목으로 대신방언을 하고, 일부 교역자들과 일부 신도들은 대인방언 또는 대인방언 통역을 한다.
먼저 그들은 방언은 하나님께 하는 것이라고 하면서 고린도전서 14:2의 “방언을 말하는 자는 사람에게 하지 아니하고 하나님께 하나니 이는 알아듣는 자가 없고, 그 영으로 비밀을 말함이니라”와 고린도전서 14:28의 “… 자기와 및 하나님께 말할 것이요”라는 말씀을 아전인수격으로 인용한다.
“방언을 말하는 자는 하나님께 하나니.” 여기에 방언은 당시 고린도 교회 신자들 가운데 성행하는 알지 못하는 방언(unknown tongue)을 가리킨다. 그러므로 원문에는 “알지 못하는”이라는 단어가 없으나 영어성경 흠정역(KJV)에는 본문의 이해를 돕기 위하여 “알지 못하는”(unknown)이라는 단어를 이탤릭체로 삽입시켰다. 그렇다면 사람들이 이해하지 못하는 방언을 말하는 자는 하나님께 말하는 것같이 보여진다는 뜻이다. 그 이유는 하나님은 전지하셔서 방언하는 사람의 속 중심을 다 아시기 때문이다. 그러나 실상은 방언을 말하는 자는 하나님께 하는 것이 아니라는 뜻이다. 이 말씀(“방언을 말하는 자는 하나님께 하나니”)은 14절 말씀에 비추어 해석해야 한다.
“알아듣는 자가 없고 …” 왜냐하면 그와 같은 방언은 아무도 알아듣는 자가 없기 때문이다. 알아들을 수 없는 이해할 수 없는 말을 하니 알아듣는 자가 없는 것은 당연하다.
“비밀을 말함이니라.” 알아듣지 못하는 자들에게는 그 방언이 비밀이 된다는 뜻이다. 본 절에서 비밀이란 복음의 비밀, 경건의 비밀(마 13:11; 고전 4:1; 엡 3:9; 6:19)이 아니라, 단순히 이해할 수 없는 말, 이해가 안되는 말, 설명할 수 없는 말을 가리킨다. 청중들이 이해할 수 없는 애매모호한 비밀(not secret, but mystery)이다. 그러나 방언파에서는 이해할 수 없는 비밀을 복음의 비밀로 생각한다. 오순절파에서는 “비밀을 말한다”(고전 14:2)는 말씀에서 “비밀은 감추어진 진리요, 감추어진 진리는 복음에 계시되지 않았음으로 방언으로 나타난다”고 주장한다. 후렌취 알링톤(French L. Arrington)은 “방언을 말하는 자는 비밀을 말한다(고전 14:2). 감추어진 비밀은 인간 정신으로는 획득할 수 없고 오로지 성령으로만 드러난다. 그러한 감추어진 진리들은 복음에 계시되지 않았다. 방언으로 말하는 감추어진 진리는 하나님의 구속계획과 축복과 관계된다. 방언을 말하는 자는 성령의 역사를 따라 이 비밀들을 말한다…”라고 한다.3) 방언파의 그와 같은 주장은 계시의 완전성. 최종성을 부인하는 큰 오류를 범하는 결과를 초래한다.
“내가 만일 방언으로 기도하면 영으로 기도하거니와 나의 마음은 열매를 맺지 못하니라”(고전 14:14). “내가 만일 방언으로 기도하면”이란 말씀 중에 “만일” 이라는 단어는 헬라어로 이안(; if; 만일)이며 가정(假定)을 나타내는 접속사이다. 가정은 사실이 아니거나 또는 사실과 반대된다. 그러므로 “내가 만일 방언으로 기도하면”이란 말씀은 곧 방언으로 기도하지 않았다는 뜻이다. 소위 고린도 교회의 방언으로는 물론 외국어로도 기도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열매를 맺지 못하니라”는 말씀은 다른 사람들에게는 물론 나 자신에게도 아무 유익도 주지 못한다는 뜻이다. 왜냐하면 말하는 이의 열매는 듣는 자의 유익에서 맺어지기 때문이다. 외국어인 방언으로 기도해도 열매를 맺지 못하거든 하물며 괴상한 말로 기도한다면 무슨 열매를 맺겠는가?
방언은 하나님께서 사도시대 극소수의 사람들에게 일시적 은사로 주셨다. 은사들을 주신 목적은 받은바 은사들을 발견하고 개발하고 사용함으로써 하나님께 영광이 돌아가고, 교회에 유익이 되며, 자신을 세워 나가게 하기 위함이다. 방언을 주신 목적은 그 방언으로 기도하라고 주신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방언으로 하나님께 기도한다는 자체가 잘못된 것이다. 방언의 은사를 받기 위하여 기도하라고 가르치는 것은 비성경적이다.
그러면 사도 바울은 어떻게 기도하였는가?
고린도전서 14:15, “내가 영으로 기도하고 내가 또한 마음으로 기도하리라.”
㉮ 사도 바울은 영으로 (토 푸뉴마티, ; with the spirit) 기도하였다. 하나님은 영(Spirit)이시기 때문에 중생한 영이 깨어서 분명한 의식과 경건한 자세로 기도해야 한다.
㉯ 사도 바울은 마음으로 (토 노이, ; with the mind) 기도하였다. 우리말 성경의 마음으로 기도하리라는 말씀에 “마음”이란 누스(; mind; 정신)로서 정신을 가리킨다. 정신은 이해의 좌소(the seat of understanding)이다. 하나님은 사람을 지적인 피조물로 만드셨다. 그리고 정신을 사용하기를 원하신다. 정신은 이해를 수용하기 때문이다. “마음으로” 기도한다는 말은 정신을 차려서 분명한 기도를 드렸다는 뜻이다. 사도 바울은 결단코 무의식적으로 정신이 오락가락하는 중에 영문 모를 말로 횡설수설 중언부언하는 기도를 하지 않았다.
㉰ 사도 바울은 신령한 기도 (spiritual prayer)를 드렸다. “영”이란 단어는 푸뉴마티()로서 신령한(spiritual)이란 뜻이 포함되어 있다. 하나님은 영이시요, 영은 신령하시기 때문에 예배드리는 자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드려야 한다(요 4:24).
㉱ 사도 바울은 진정한 마음 으로 기도하였다. 마음은 카르디아()로서 지·정·의를 포함한 전영혼의 중심 좌소를 가리킨다. 그러므로 마음으로 기도한다는 말은 형식적이고 외식적인 기도가 아니라, 속 중심으로부터 나오는 진정한 기도를 의미한다.
㉲ 사도 바울은 자기 말(His own language)로 기도하였다. 바울은 고린도 교회 방언이나 소위 현대방언과 같은 이해할 수 없는 말로 기도한 것이 아니라, 자신과 듣는 사람들이 분명히 이해하는 모두가 사용하는 언어로 기도하였다.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라”(마 6:9)고 가르치실 때, 주님은 사람이 알지 못하는 이상한 방언으로 기도하라고는 결코 가르치신 일이 없으시다. 하나님께서 받으실 만한 기도는 자기 말로 하는 기도이다. 칼빈(Calvin)은 방언은 외국어로 정의하고 외국어로 기도하는 것은 옳지 않다고 하였다.
“그러므로 지금까지 관습이 되어 온 것처럼 로마 사람이 헬라어로 공중기도를 한다든지, 프랑스사람이나 영국사람이 라틴어로 공중기도를 해서는 안된다는 사실이 분명히 드러난다. 공중기도는 전체회중이 모두 이해할 수 있는 그 민족의 언어로 해야만 한다. 공중기도는 회중 전체의 교화를 위하여 하는 것인데 알아듣지도 못하는 소리로서는 전혀 은혜를 받을 수 없다 …”4)
③ 그리스도인은 자신의 유익을 위하는 것이 중요한가, 교회의 유익을 위하는 것이 더 중요한가?(A christians priority: church or self?)
고린도전서 4:4, “방언을 말하는 자는 자기의 덕을 세우고, 예언을 하는 자는 교회의 덕을 세우나니.”
방언을 말하는 자는 “자기의 덕을 세운다”는 말씀은 헬라어로 “헤아우톤 오이코도메이”()로서 자신을 개발하다 또는 세우다는 뜻이다. 오이코도메오()는 오이코스(; a house; 집)와 도메오(; to build; 세우다)로 구성된 합성어이다. 이 단어는 건축용어이다. 방언을 말하는 자가 “자기 덕을 세운다”는 말씀은 자신을 개발한다, 세운다, 발전시킨다는 뜻이다. 방언의 은사를 받은 사람이 통역 없이 말한다면 자신은 세워 나가지만 다른 사람들에게는 유익을 주지 못한다. 방언은 자신을 개발하고 발전시킨다. 예를 들면 한국 사람으로서 영어를 잘 안다면 그 영어를 통하여 많은 지식을 획득하게 되며 따라서 자신을 개발하고 세우게 된다. 이 경우 영어는 하나의 방언(외국어)으로서 자신을 세워주는 큰 방편과 도구 그리고 유익이 된다. 그러나 사람이 방언으로 말하면 교회에 무슨 덕과 유익이 되겠는가? 따라서 그리스도인들은 교회를 세우는 예언을 더욱 사모하여야 한다. 그리스도인들은 몸의 지체들이니 만큼 몸이 잘 세워져 가면 지체들은 당연히 잘 세워져 나가게 마련이다. 고린도전서 14:4은 개인의 덕을 세우는 주요목적이 절대로 아니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 교인들이 받은 은사들을 몸된 교회를 세우기 위하여 사용하지 않고, 자기 자신들만의 유익을 위하여 남용하므로 이기적(selfish)이라고 책망하였다(고전 12:7). 사람이 받은 은사를 몸된 교회를 위하여 사용하지 않고 자신의 유익만을 위하여 사용한다면 그것은 이기적이요 은사를 주신 목적에 위배된다.
반면에 예언은 교회를 세운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이요, 그리스도의 몸은 지체들인 그리스도인들의 총체이다. 예언은 사람을 상대하여 가르치므로 그들의 덕을 세우고 권면하고 위로한다. 예언은 교회 성도들 전체에게 덕과 유익을 준다.
④ 그리스도인은 자신들이 원하는(요구하는) 대로 영적 은사들을 받을 수 있는가?(Spiritual gifts: your choice or God's?)
고린도전서 12:11, “이 모든 일은 같은 한 성령이 행하사 그 뜻대로 각 사람에게 나눠 주시느니라.”
영적 은사들은 하나님 자신이 원하시는 뜻대로 그의 자녀들에게 나눠 주신다. 모든 사람이 모든 은사를 다 받는 것이 아니다. 한 사람은 이 은사, 다른 한 사람은 저 은사를 성령께서 결정하시고 분배하신다. 내가 원하는 것만을 성령님께 요구한다든지 하는 것은 죄이다. 이것이 바로 고린도전서 12:15에서 교훈한 말씀이다. 고린도전서 12:17, 30절에서는 모든 사람이 다 동일한 은사를 받는 것을 반대하였다. 은사들은 성령께서 결정하시는 대로 분배하는 대로 받는다. 하나님은 자신의 자아 의지에 의하여 자신의 선하시고 기뻐하시는 뜻대로 그의 자녀들에게 은사들을 나누어 주신다.
하나님은 자신이 결정하신 대로, 목적하신 대로, 뜻대로 영적 은사들을 각 사람에게 나누어 주신다는 말씀은 은사를 나누어 주심에 대한 하나님의 절대적 주권을 나타내며, 그리스도인들은 받은 바 은사들에 대하여 조금도 자랑하거나 교만할 수 없음을 교훈한다. 우리가 은사를 받고 못 받는 것은 온전히 하나님의 손에 달려 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들은 자신의 생각으로 자신들이 원하는 은사만을 취사선택하여 받을 수는 없다. 인간이 아무리 욕심으로 구할지라도 하나님의 뜻이 아니면 받을 수 없다. 만일 사람이 자신이 원하는 은사만을 소유하기를 원한다면 그것은 탐심이요, 탐심은 죄이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전서 12:17에서 “만일 온 몸이 눈이면 듣는 곳은 어디며 온 몸이 듣는 곳이면 냄새 맡는 곳은 어디뇨?”라고 질문하여 잘못된 생각을 지적하여 주었다. 방언하는 사람들은 모두가 방언의 은사를 받아야 한다고 주장하지만 모든 사람들이 모두 동일한 은사를 소유한다는 것은 하나님의 뜻도 역사도 아니다. 하나님은 자신의 뜻대로 그의 자녀들에게 영적 은사들을 나누어 주신다.
⑤ 영적 은사들은 어느 특정인들만 받을 수 있는가, 그리스도인이면 누구나 다 받을 수 있는가?(Spiritual gifts: who’s qualified?)
영적 은사들은 어느 특정인들만 받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자녀들이면 한 사람도 빠짐없이 누구나 다 받는다. 영적 은사는 어떤 특정인의 독점물이 아니다.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의 지체들인 그리스도인 한 사람 한 사람은 하나님의 영적 은사들을 특별한 선물들로 받는다.
고린도전서 12:11 의 “각 사람에게 나누어 주시느니라”라는 말씀 중에 “각 사람”(헤카스토, ; each, every)은 개별적인 한 사람, 한 사람(every one)을 가리킨다.
베드로전서 4:10 에서도 “각각 은사를 받은 대로…”라고 말씀하였는데 본 절에서 “각각”이란 단어도 각 사람(헤카스토스, ; every one)을 가리킨다. 따라서 모든 신자들은 적어도 한 가지 이상의 은사들은 다 받는다. 영적 은사를 한 가지라도 받지 않은 신자는 없다. 하나님은 영적 은사들을 각 사람에게 그의 선하신 뜻을 따라서 나누어 주신다. 고린도전서 12:8-10에서 “어떤 이에게는 성령으로 말미암아 지혜의 말씀을, 어떤 이에게는 같은 성령을 따라 지식의 말씀을, 다른 이에게는 같은 성령으로 믿음을, 어떤 이에게는 한 성령으로 병 고치는 은사를, 어떤 이에게는 능력 행함을, 어떤 이에게는 예언함을, 어떤 이에게는 영을 분별함을, 다른 이에게는 각종 방언함을, 어떤 이에게는 방언 통역함을 주신다”고 하였다.
상기 말씀이 교훈하는 바는 누구나 모든 은사들을 다 소유하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이다. 어떤 사람이 한 은사를 받았으면 다른 사람은 다른 은사를 받는다. 사도 바울은 이 진리를 증거하기 위하여 역설적으로 변증하기를 “다 사도겠느냐 다 선지자겠느냐 다 교사겠느냐 다 능력을 행하는 자겠느냐 다 병 고치는 은사를 가진 자겠느냐 다 방언을 말하는 자겠느냐 다 통역하는 자겠느냐”(고전 12:29, 30)고 반문하였다.
하나님은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에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잘 아시고 그것을 충족시키기 위하여 각 신자들에게 필요 적절한 은사들(특별 선물)을 나누어 주신다. 하나님은 한 사람이 모든 은사를 다 갖거나 또는 모든 사람이 같은 은사만을 갖는 것을 원치 않는다.
그러므로 모두가 방언의 은사를 받아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은 잘못되었다. 비록 방언이 은사로서 중단되지 않았다고 가정할지라도 모두가 방언을 해야 한다는 것은 비성경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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