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본문의 말씀은 사도베드로의 마지막 권면과 축복의 말씀입니다.
1)먼저 교회의 장로들, 즉 교회의 지도자들에게 하시는 권면입니다.
1절부터 3절까지의 말씀을 보겠습니다.
벧전5:1. 너희 중 장로들에게 권하노니 나는 함께 장로 된 자요 그리스도의 고난의 증인이요 나타날 영광에 참여할 자니라 2. 너희 중에 있는 하나님의 양 무리를 치되 억지로 하지 말고 하나님의 뜻을 따라 자원함으로 하며 더러운 이득을 위하여 하지 말고 기꺼이 하며 3. 맡은 자들에게 주장하는 자세를 하지 말고 양 무리의 본이 되라
1절을 보시면 너희 중에 장로들에게 권한다고 합니다. 그런데 베드로는 그 자신도 함께 장로된 자라고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여기서 장로란 교회의 지도자들을 모두 함께 일컫는 말입니다. 오늘로 말하면 교회의 장로님들과 목회자들을 일컫는 말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 본문을 자세히 보시면 목회자와 장로님들이 교회의 무엇이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까? 2절에 보시면 양무리를 치는 자, 즉 목자라고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교회의 목회자만 아니라 장로님들도 양무리를 돌아보고 치는 목자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사도행전에도 같은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사도행전20장 17절부터 보시기 바랍니다.
“17. ○바울이 밀레도에서 사람을 에베소로 보내어 교회 장로들을 청하니 --28. 여러분은 자기를 위하여 또는 온 양 떼를 위하여 삼가라 성령이 그들 가운데 여러분을 감독자(목자)로 삼고 하나님이 자기 피로 사신 교회를 보살피게 하셨느니라 ”고 합니다.
이 말씀은 사도바울이 에베소교회의 장로들에게 고별설교를 하는 장면입니다. 여기서 보면 에베소교회의 장로들을 가리켜서 “그들 가운데 여러분들을 감독자로 삼고”라고 합니다.
그런데 여기서도 감독자가 무엇에 대한 감독자이겠습니까?
우리들은 감독자라고 했을 때 단순히 교회에서 행정을 감독하는 자라고만 이해를 합니다. 물론 당연히 장로님들이 교회의 행정에 대한 감독자가 되어야합니다. 교단헌법에서도 이것을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교단헌법 66조에 장로의 직무가운데 1항이 (1.목사와 협력하여 행정과 권징을 관리하는 일)이라고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장로교, 다른 말로 하면 개혁주의 교회는 모든 것이 오직 성경에 기초를 하고 있습니다. 사도행전에서 장로님들에 대해서 감독자라고 하는 것은 문맥으로 보면 단순히 행정상의 감독이 아니라 양떼를 치는 목자로서의 감독을 일컫는 말입니다.
“행20:28. 여러분은(장로들은) 자기를 위하여 또는 온 양 떼를 위하여 삼가라 성령이 그들 가운데 여러분을 감독자(목자)로 삼고 하나님이 자기 피로 사신 교회(의 양떼)를 (목자로서) 보살피게 하셨느니라”고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 교단헌법에서도 이것을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장로의 직무 1항에서는 행정을 관리는 일이라고 하는데, 이제 2항부터는 양떼를 돌아보는 목자로서 직무를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장로의 직무 2항에서부터 부면 “2. 교회의 영적상태를 살피는 일, 3. 교인을 심방 위로 교훈하는 일. 4. 교인을 권면하는 일. 5.교인들이 설교대로 신앙생활하는 여부를 살피는 일, 6.언약의 자녀들을 양육하는 일. 7.교인을 위하여 기도하고 전도하는 일, 8. 목회에 필요한 제반사항을 목사와 상의하고 돕는 일” 이라고 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잘못 보면 이 직무가 권사들에 대한 직무로 생각할 수 있는데, 헌법에 보면 장로의 직무라고 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성경에서는 목사만 아니라 장로님들도 목자라고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교회도 이제 성경적인 원리를 따라서 장로님들을 목자로 내세우면서, 구역을 개편하려고 합니다. 구역이라는 명칭도 목장이라고 하려교 합니다. 예를들어 사랑목장, 희락목장, 화평목장으로 하려고 합니다. 장로님 전원을 목자로서 구역강사를 하려고 합니다.
그러면 오늘 본문에서 교회의 장로, 혹은 목자들에게 주시는 권면의 말씀은 무엇입니까?
먼저 2절을 보시기 바랍니다.
“2. 너희 중에 있는 하나님의 양 무리를 치되 억지로 하지 말고 하나님의 뜻을 따라 자원함으로 하며 더러운 이득을 위하여 하지 말고 기꺼이 하며”
여기서는 억지로 하지 말고 자원하는 마음으로 기꺼이 양떼를 돌아보는 일을 하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또 3절을 보시기 바랍니다.
“3. 맡은 자(양떼들, 목원들)들에게 주장하는 자세를 하지 말고 양 무리의 본이 되라”
여기서 주장하는 자세란 아무 것도 하지 않고 말로만 명령하는 자세를 말합니다. 맡은 자들은 이런 말로만 주장하는 자세로 하지 말고 친히 양 무리의 본이 되라고 권면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양무리의 본이란 무엇보다 섬기는 본을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주되신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섬김의 본을 보여주신 것처럼 교회의 지도자들은 무엇보다 말로만 명령하는 자세가 아니라 섬김의 본을 성도들에게 보이라 권면합니다.
그렇게 할 때 4절에 보시면 “그리하면 목자장(예수님)이 나타나실 때에 시들지 아니하는 영광의 관을 얻으리라” 고 말씀합니다. 여기서 목자의 장은 바로 예수님이십니다. 이렇게 할 때 예수님께서 오실 때 시들지 아니하는 영광의 면류관을 얻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2)또 일반성도들에 대한 권면입니다.
5절입니다. 같이 읽겠습니다.
“5. 젊은 자들아 이와 같이 장로들에게 순종하고 다 서로 겸손으로 허리를 동이라 하나님은 교만한 자를 대적하시되 겸손한 자들에게는 은혜를 주시느니라”
이렇게 지도자들이 말로만 주장하는 자세가 아니라 섬김의 본을 보일 때 젊은 자들은 그 장로들에게 순종하라고 권면하고 있습니다.
또 “겸손하라”고 권면하고 있습니다.
5절에 보시면 “하나님은 교만한 자를 대적하시되 겸손한 자들에게는 은혜를 주시느니라
6. 그러므로 하나님의 능하신 손 아래에서 겸손하라 때가 되면 너희를 높이시리라“
우리는 사실 겸손한 것이 좋기는 좋은데, 겸손에 대해서 불안한 마음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렇게 내가 겸손하게만 하다가 사람들이 나를 무시하면 어떻게 하는가? 또 계속 겸손하기만 하면 언제까지 더 낮아져야하는가? 하는 불안한 마음을 가질 때가 있습니다.
/그래서 겸손하게 살려고 해도 이런 불안한 마음 때문에 겸손이 잘 되지 않을 때가 많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은 우리에게 어떻게 말씀하고 있습니까?
“하나님의 능하신 손아래에서 겸손하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 하나님의 능하신 손이란 죽기까지 낮아지신 예수님을 지극히 높여주신 하나님의 손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어떻게 예수님처럼 자신을 비우고 죽기까지 낮아지는 겸손한 삶을 살 수 있습니까? 하나님의 전능하신 손을 믿음으로 겸손한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예수님을 본받아 끝까지 겸손하게 살아가면 예수님을 높여주신 하나님의 전능하신 손이 반드시 우리를 높여주실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전능하신 손을 믿음으로 예수님처럼 끝까지 겸손하게 살아가는 성도님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3)또 이제 고난당하는 자들에게 대한 권면과 축복의 말씀입니다.
베드로전서는 처음부터 고난당하는 자들에게 주시는 말씀이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베드로는 고난당하는 자들에게 마지막으로 “너희 염려를 다 주께 맡기라”고 권면하고 있습니다.
/고난가운데 있는 초대교회 성도들이 얼마나 염려가 많겠습니까? 나의 미래가 어떻게 될까? 우리를 시험하는 저 사탄을 내가 이길 수 있는까? 내가 끝까지 이 믿음을 지킬 수 있겠는가? 등의 여러 가지 염려가 있었을 것입니다. 염려란 말은 원어로 보면 마음이 한 곳으로 집중되게 하지 않고 나누어지는 것을 말합니다. 우리가 염려가 되면 우리의 마음이 나누어집니다. 그래서 하나님에게 집중이 되지 않습니다. 이에 대해서 사도베드로는 “그 모든 염려를 다 주님께 맡기라”고 권면합니다. 맡긴다는 말은 “위에 올려 놓는다” 또 “던져버린다”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우리의 모든 염려의 짐을 위에 계신 하나님께 다 올려놓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그 주님께 다 던져버리기를 바랍니다.
이렇게 그 어떤 고난가운도 우리의 모든 염려를 주님께 맡기면 하나님께서 우리를 친히 돌보아주실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또 마지막으로 고난당하는 자들에게 대한 축복의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10. 모든 은혜의 하나님 곧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를 부르사 자기의 영원한 영광에 들어가게 하신 이가 잠깐 고난을 당한 너희를 친히 1)온전하게 하시며 2)굳건하게 하시며 3)강하게 하시며 4)터를 견고하게 하시리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여기서도 우리가 당하는 고난에 대해서 어떻게 말씀하고 있습니까?
우리가 당하는 고난은 절대 영원하지 않습니다. “잠깐”입니다.
따라합시다. “내가 당하는 고난도 잠깐입니다”
그런데 그 고난은 우리에게 어떤 축복을 줍니까?
첫째, 우리의 믿음과 인격을 더 온전하게 합니다.
둘째, 우리의 믿음을 더 굳건합니다.
셋째, 우리의 믿음을 더 강하게 합니다.
넷째, 우리의 믿음의 터를 더 견고하게 합니다.
그래서 결론적으로 우리가 당하는 고난은 축복입니다.
고난가운데 절대 낙심하지 마시고, 고난가운데 늘 하나님을 찬양하시며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또 고난가운데 주실 축복으로 인해 늘 기뻐하시며 살아가시는 성도님들이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4)마지막으로 영적인 권면입니다.
먼저 근신하고 깨어 있어야합니다.
“8. 근신하라 깨어라 너희 대적 마귀가 우는 사자 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나니”
여기서 깨어 있으라는 말은 사탄의 존재에 대해서 항상 깨어 있으라는 말입니다.
어떤 성도가 목사님에게 “목사님 저는 사탄의 존재를 전혀 느끼지 못하고 있습니다” 고 했습니다. 그때 목사님은 “그것이 사탄에게 사로 잡혀 있는 증거입니다” 고 했다고 합니다.
우리가운데 영적으로 깨어 있는 사람이라면 하나님의 존재만 아니라 사탄의 존재도 늘 의식하면서 살아갑니다. 사탄은 지금도 정말 우는 사자와 같이 두루 다니면 택하신 성도들조차도 삼키려고 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늘 깨어서 “아 이것이 바로 사탄의 시험이구나” 라고 깨달을 때는 우리가 사탄의 종노릇을 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대부분 사탄의 시험을 깨닫지 못해서 사탄에게 넘어 갈 때가 많습니다. 그래서 “늘 깨어서 사탄이 나를 어떻게 시험하고 있는가”에 대해서 늘 깨어 있어야합니다.
오늘 이 시대 사탄이 우리를 넘어뜨리려 하는 가장 큰 무기 무엇이라고 했습니까?
그것은 바로 낙심이라고 했습니다. “나는 할 수 없어, 아무 것도 아니야 해도 안 돼”라고 하는 사탄의 시험에 절대 넘어가지 마시기 바랍니다.
또 9절에 “너희는 믿음을 굳건하게 하여 그를(사탄을) 대적하라”고 합니다. 우리는 절대 사람을 대적해서 안 됩니다. 마귀를 대적해야합니다. 마귀는 오직 예수님의 이름으로만 대적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오직 기도로만 대적할 수 있습니다.
/늘 깨어서 사탄에게 미혹되지 마시고, 우리를 낙심하게 하여 넘어지게 하는 사탄을 대적하여 영적으로 승리하는 삶을 사시는 모든 성도님들이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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