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구약 성경강해***/- 벧전,후서 강해

베드로전후서 강론

에반젤(복음) 2019. 11. 28. 10:54



    

베드로전후서 강론

 

신약성경은 언약문서이기 때문에 어떤 성경이든지 다 그렇지만 구약의 출애굽기나 신명기를 토대로 하고 풀어지도록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이 시내산에서 나라를 설립하셨기 때문에 그리고 그 은혜의 일들을 그리스도안에서 완성하셨기 때문에 항상 토대는 신명기나 출애굽기적인 토대를 보아야 합니다.
그리고 기록내용을 보아서 기록 형식을 구분할 필요가 있겠는데요. 1장 1-2절은 인사말, 3-12절까지는 찬송하리로다 해서 하나님께서 베푸신 은혜의 일들을 감사하는 내용입니다. 여기가 베드로전서를 총체적으로 설명하는 부분입니다. 서론적인 성격을 갖습니다. 나머지 설명들은 13절 이하의 설명들은 3-12절까지의 내용을 설명하는 내용입니다.
우리가 알기 좋게 베드로전서의 주제가 무엇이냐 하면 뭐라고 말할 수 있습니까? 5장 12절에 보면 "내가 신실한 형제 실루아노로 말미암아 너희에게 간단히 써서 권하고 이것이 하나님의 참된 은혜임을 증거하노니 너희는 이 은혜에 굳게 서라."고 말합니다. 실루아노는 대필한 사람이겠지요. 하나님의 참된 은혜에 굳게 서라는 것이 되겠지요. 형식대로 하자면. 그런데 참된 은혜가 무엇이냐 하면 실은 여기에 설명된 말씀입니다. 앞에 시작의 말에서는 3절에 우리로 산 소망이 있게 하시며, 산 소망에 대한 설명들이어요. 그러니까 산 소망과 은혜를 합치면 될까 그래도 말이 너무 단순하지요. 단순하면 외우기는 좋은데 내용을 담을 수 없어요. 그러면 산 소망 가운데 굳게 서라. 은혜 가운데 굳게서라. 내용을 보았을 때는 나타날 그리스도의 영광을 보라보고 믿음에 굳게 서라.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라. 나타날 그리스도의 영광을 바라보고 그리스도의 고난에 굳게 서라. 온전하라는 말이다. 내용을 설명하자면, 그렇게 되어 있어요.

읽어 가면서 하는 것이 제일로 좋은 방식이 되겠습니다.
[벧전 1:1] 예수 그리스도의 사도 베드로는 본도,갈라디아,갑바도기아, 아시아와 비두니아에 흩어진 나그네 [벧전 1:2] 곧 하나님 아버지의 미리 아심을 따라 성령의 거룩하게 하심으로 순종함과 예수 그리스도의 피 뿌림을 얻기 위하여 택하심을 입은 자들에게 편지하노니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더욱 많을 찌어다. 그러니까 인사말에도 실은 베드로전서의 주제들이 들어 있습니다. 여기서 하나님 아버지 성령 예수 그리스도 즉 얼핏 보기에는 삼위일체 이야기를 하는 것 같아요. 그러나 여기서는 삼위일체를 논증하려는 것이 아니고 구약 언어를 토대로 했을 때, 여기보면 거룩한 언약 백성, 언약을 설명하는 말이어요. 그런데 하나님 아버지의 미리 아심을 따라, 여기서 미리 아심은 미리 사랑하심인데, 어떻게 사랑했느냐 하면 뒤에서 설명할 때 보면 20절에 보면, 그는 창세전에 미리 알리신 바 된 자나 이 말세를 위하여 너희를 위하여 나타나신 바 되었으니. 그리스도를 주셨으면 그리스도가 창세전에 알리산 바 되었으면 그런 의미로 이들도 미리 아신 바 된 백성들이겠지요? 그것을 에베소서에서는 창세전에 그리스도안에서 선택했다고 말씀하고 있지요.
그러니까 여기서 말하는 미리 아심은 루터파나 칼빈파가 대항하는 것처럼 미리 믿을 줄 알고 예지예정이냐? 하는 이야기하고는 상관이 없는 말이다. 여기서는 단지 언약적인 언어들이다 미리 사랑하심. 히브리 개념은 미리 안다했을 때 안다라는 말은 항상 언약적인 관계, 사랑의 관계이지 인식론적인 지식의 개념이 아니기 때문이다. 아버지께서 미리 사랑하셔서 이들을 택했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택했느냐면 성령의 거룩하게 하심으로 순종함과 예수 그리스도의 피 뿌림을 얻기 위하여. 우리는 성령의 거룩하게 하심으로 순종함과 이렇게 띠어 읽으면 우리의 교리에 잘 맞을 것 같습니까? 성령으로 거룩하게 하니까 말을 잘 듣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피뿌림으로, 그러면 피뿌림은 무엇인고? 하나님 말을 잘 들으면 먼저 피뿌림을 받아야 그 다음에 성령이 오셔서 말을 잘 들을 것인데, 잘 안맞아 들어가지요. 내용을 보니까 미리 사랑했다. 피뿌렸다. 순종이다 하는 것을 보니까 우리의 구원론 체계에 맞는 것처럼 되어 있으나 이 본문은 순서도 그렇게 안되어 있을 뿐만아니라 그러니까 그렇게 읽어서는 안됩니다.
구약에서 하나님이 자기 백성을 시내산에서 나라와 제사장 민족으로 삼으시면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을 사랑하셨는데 조상들안에서 사랑하셨지요. 조상들안에서 사랑하셨고 그들을 물을 뿌려서 거룩하게 하면 그들이 이제 하나님 앞에 순종하는 백성들이 되고 그리고 언약체졀 백성이 되겠지요. 그러니까 시내산에서 물을 뿌려 정결케 하고 그리고 그들이 지킬 언약의 법을 주고 그리고 언약의 피를 양쪽에 뿌려서 언약을 획증했지요. 그렇게 함으로 그들이 나라와 제사장 백성이 되었지요. 이 베드로전서는 그런 말들로 가득차 있지요. 그러니까 앞의 3-12절까지가 서두적인 성격으로 전체를 포괄한다는 말입니다. 나중에 보면 이런 것들을 더 부연해서 설명할 것이어요.
그러니까 여기서 처음에 인사말을 할 때 너희가 이런 저런 복을 받으라 했을 때도 누구입니까? 흩어진 나그네. 베드로전서에서 흩어진 나그네는 디아스포라적인 개념인데 그리스도를 위하여 고난을 받고 흩어져있어요. 그러니까 그들이 흩어진 세계에서 기업이 없고 고난밖에 못 받아요. 그래서 이들이 두려움에 휩싸여 있겠지요. 그런 의미로 나그네여요. 그냥 천당가는 과정에 있는 나그네라는 개념보다는 여기서는 그런 의미로 나그네여요.
이들에게 편지했는데 하나님이 미리 이들을 사랑하셨습니다. 여기서는 언제 미리 사랑하셨는가는 아직 설명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사랑하심과 성령으로 거룩하게 하심을 입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을 물을 뿌려서 정결하게 했는데, 여기서는 성령으로 그들을 거룩하게 햇다는 말은 직접적으로 우리의 도덕성을 바꾸었다는 개념으로 거룩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성령에 속한 자라는 개념이다. 물이 뿌려지면 물이 뿌려진대로 여호와 하나님께 정결한 자거든요. 피가 뿌려지면 피가 뿌려진 대로 여호와 하나님께 거룩하고 정결한 자여요. 여기서 거룩은 직접적으로 윤리적인 깨끗함을 말하는 거룩이 아니어요. 이들은 성령에 속한 자여서 성령에 속한 자로서 주님께 속한 자여요. 구약 백성은 모세의 영을 주면 모세에게 속한 자로 하나님의 백성이지요. 그 언어 개념을 여기서 사용하고 있는 것이어요. 그래서 성령으로 거룩하게 하심과, 이제 모세의 영으로 여호와께 속한 백성, 하나님 나라와 제사장 백성이 되었으면 그런 의미로 거룩인데, 그러면 그들은 당연히 하나님 앞에 순종하는 백성이지요. 그리고 그 일이 피뿌림을 통해서 언약이 확정된 백성이지요. 그런 의미로 여기서 예수 그리스도의 피뿌림이어요. 여기서는. 그러니까 시내산 언약 체결의 언어들을 여기서 사용하고 있다. 그렇게 해서 택하심을 입은 자들입니다.
이들에게 은혜와 평강이 있어야 하겠는데, 은혜와 평강은 같은 말입니다. 은혜로 말미암은 평강이니까. 이 은혜로 말미암은 평강도 은혜는 미리 아심을 따라 성령의 거룩하게 하심으로 순종함과 예수 그리스도의 피뿌림을 주신 은혜이지요. 그로 말미암은 평강이지요. 항상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 앞에서 약속받은 것은 안식이어요. 가나안 땅의 안식, 그것이 하나님의 축복이어요. 이전에는 모세의 제도에 속한 안식이어요. 시내산에서 조상들을 따라 택하시고 물을 뿌림으로 거룩하게 하시고 그들에게 순종할 법을 주시고 언약의 피를 뿌려서 그들과 언약을 체결하고 확증하셨어요. 그것이 그들이 누리는 평강이어요. 그때 대표들이 시내산에 올라가서 하나님 앞에서 먹었지요. 이런 언어 개념을 사용해서 여기서 설명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창세전에 예비하신 아들을 통해서 사랑하시면, 그 진리안에서 우리가 하나님의 백성이 되었으면, 그것은 하나님이 사랑하신 완전한 사랑으로 서로 사랑해야지요. 그런 의미로 여기서 진리와 사랑은 일치하고 있어요. 형제를 뜨겁게 사랑해라.
자 그리고 설명하기를 또 한번 경고적인 말을 하겠지요. 왜 이렇게 사랑해야 하겠는가 너희가 거듭난 것이, 여기서 거듭난 것은 창세전에 그리스도안에서 예비하신 그 하나님께 믿음과 소망 그 하나님께로 부르심을 받은 그런 출생입니다. 이런 출생을 한 것이 썩어질 씨로 된 것이 아니라, 썩어질 씨는 모세제도에 속한 것입니다. 모세제도에 속한 것이 전부 썩어질 씨입니다. 그렇다면 모세제도 밖에 있는 것은 더 이상 말할 것이 없지요. 모세제도가 하나님의 거룩한 약속이어도 썩지 아니할 하늘의 것이 오기 전에, 예수님이 오시기 전에, 썩어질 시대 가운데서 이스라엘 백성이 이방의 장자로 있었을 때의 개념이기 때문에 유대인의 복이나 이방인의 복이나 엇비슷한 것이어요. 언약적인 관계가 달라서 차이가 나는 것이지, 그들이 누리는 먹고 마심의 이야기들은 엇비슷한 것이어요. 오히려 유대인들만 이방인들보다 더 제한적으로 먹었어요. 이방인들은 마음대로 먹어서 죽음의 의미를 모르고 먹었어도 이스라엘 백성들은 갇혀서 먹도록 하고 죽음의 의미를 실감나도록 해서 가르쳤던 것이어요. 그러니까 그런 차이점들이 있는 것이어요.
일단 이 문맥에서는 창세전에 알리신 바 된 그 아들, 그 분이 오셔서 우리의 소망을 창세전에 그리스도를 예비하신 그 하나님께 소망을 두도록 구속하셨지요. 아들의 피로, 유월절 양으로, 그 하나님께 드리셨지요. 그것이 우리를 진리로 난 것이고 완전한 빛으로 뜨겁게 형제를 사랑해야 하는 것인데, 다시 한번 경고적으로 또 말하기를, 항상 언약을 말하고나면 경고가 따르지요. 자 너희들이 거듭난 것이 하늘에 속한 출생이 썩어질 씨로 된 것이 아니라 썩지 아니할 씨로 된 것이라. 썩어질 씨는 무엇입니까? 구약을 인용하고 있는 것입니다. 풀의 꽃처럼 사라진다 이 문맥은 이스라엘 백성의 멸망 문맥을 말해요. 이사야 40장을 보면 너희들은 다 망해도 하나님이 새로운 구원은 영원하지 않느냐 했을 때 이 말을 해요. 나라의 파숫꾼의 소리가 이스라엘 백성에게 너희 하나님을 보라고 선전할 것이어요. 이스라엘 백성의 모든 영광은 사라져도 이제 오시는 하나님의 말씀은 세세토록 살아있도다. 하면서 종말의 구원을 약속하신 하나님의 말씀을 썩지 않을 말씀으로 말하고 있는데, 그 언어를 여기서 사용하고 있는 것이어요.
그러니까 이스르엘의 구원은 썩어질 구원이어요. 왜냐하면 썩어질 씨로 되어 있기 때문이다. 어떤 의미로, 하늘의 것이 오기 전에는 이제는 하늘의 것이 왔어요. 이 말씀은 누구입니까? 하늘에 계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복음전한 자가 전한다고 그랬지요. 이 복음의 말씀이 하늘에서 온 썩지 아니할 것을 증거하지 않느냐? 그러니까 이 말씀을 너희들이 잘 듣고 하늘에 속한 자로 살아라. 땅에 속한 자로 살지 말라. 이렇게 완전한 윤리를 설명한 데는 다른 데는 없어요. 이렇게 언약적인 윤리로 설명을 해야 됩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하나님의 형상으로 인격입니다. 아내는 남편을 사랑함으로 새로운 윤리에 접어드는 것처럼 하나님의 형상인 사람은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지 자기 개선을 통해서 되는 법이 없어요. 그것은 하나님 없는 사람들의 자기 영광일 뿐이어요. 하나님이 없으니까. 그리고도 거룩을 추구하니까 그런 철학적인 작업을 하는 것이어요. 그러나 부부는 사랑에서 윤링지 철학적인 자기 갈등을 통해서 아내가 거룩하게 되는 것이 절대로 아니어요. 사랑이 없으면 거룩이 아니어요. 사랑은 완전한 하나을 이루어요.
그러니까 여기서도 완전히 그 문맥에서 설명하고 있지요. 이 복음의 말씀을 잘 붙들으라고 말하고 있지요. 이것이 종말론적인 약속의 말씀이 아니냐? 하늘의 하나님이 이스라엘의 썩어질 영광이 아니라 이사야 40장의 말씀처럼 종말의 약속의 복음이 아니냐? 하늘에 속한 성령으로 이 복음을 증거했는데 구약의 선지자들도 이것을 깊이 연구했지만 그들 때는 아니다. 우리를 위한 것이다. 어떤 구원이냐? 창세전에 예비하신 아들, 그 피로 우리를 값주고 사셔서 우리를 위해 아들을 예비하신 그 살아계신 하나님께 믿음과 소망을 주었지 않느냐? 그 분이 우리를 부르셨다. 우리를 부르신 그 분처럼 우리의 모든 행실에 거룩해야 된다. 우리들은 우리들이 이전에 가졌던 사욕들, 우리 조상들이 따랐던 망령된 행실을 따라서는 안된다. 모세를 따라서도 안되어요. 그러니 어떻게 구속사적으로 신구약을 대비해야 할 것인지 알겠지요. 항상 구약을 토대로 하고 풀어야 합니다.

자 그리고 이처럼 거룩하게 했는데, 이 거룩은 나는 고상하도다 하는 거룩이 아니라 하나님이 세상에서 대접받은 식으로 사는 것이 또 하나님이 세상에서 하는 식으로 사는 것이 하나님을 닮는 것이어요. 세상에 그리스도를 배교하듯이 믿는 자들도 고난을 받아요. 하나님이 세상을 사랑하시기 때문에 믿는 자들도 모든 고난 중에 그들을 사랑해야 되어요. 하나님이 그리스도를 높였기 때문에 믿는 자들도 영광을 받을 것이어요. 그것이 뒤에서 설명하는 것이어.
그러니까 두 번째 이하의 문제들은 말하자면 다시 한번 언약의 틀을 말하면서 시행령처럼 이런 저런 문제들을 설명하겠지요. 앞의 이야기는 시내산 언어로 그렇게되어 있고 다시 한번 그 언약의 언어를 반복하면서 또 반복할 것이어요.

 

(저녁먹고 시간)

[벧전 1:3] 찬송하리로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하나님이 그 많으신 긍휼대로 예수 그리스도의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거듭나게 하사 산 소망이 있게 하시며. 하늘에 오르사 하나님 우편에 계시니 천사들과 권세들과 능력들이 저에게 순복하니, 그런 의미로 주여요. 모세는 이런 주는 아니지요. 모세는 아멜렉을 물리칠 때 여호수아는 가나안을 정복할 때 주요 왕이지 이런 주는 아니지요. 그런데 그런 주를 보내신 아버지시다. 그런 주의 아버지시다. 그러니까 이 주되신 그리스도는 아버지의 모든 것을 상속받는 분으로 주여요.
자 그 아버지 이름이나 그 다음에 보면 그 크신 긍휼대로 그 많으신 긍휼대로 벌써 이름에도 긍휼이 나타나 있지만, 그 긍휼은 뒤에 설명하겠지요. 예수 그리스도의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거듭나게 하사 산 소망이 있게 하시며. 여기서 긍휼은 우리를 용서했는가 안했는가 하는 것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고 우리로 산 소망이 있게 했다, 이것이 하나님의 긍휼이어요. 우리는 죄를 용서받아야 항상 긍휼이지요. 그런데 여기서는 산 소망이 있게 한 것이 긍휼이어요. 구약언어입니다. 누가 하나님의 긍휼의 백성이지요. 하나님이 조상들을 따라 그들을 사랑하심, 그들을 나라와 제사장으로 삼으셔서 가나안 땅의 기업을 주면 그것이 이스라엘 백성이 누리는 구약적인 은혜와 평강과 긍휼이어요. 그 언어를 지금 사용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산 소망이 있게 하는데, 어떻게 산 소망이 있겠습니까? 거듭나게 해서. 이 거듭나게 한다는 말은 마음이 바뀌었다는 거듭남이 아니라 새로운 출생이어요. 이스라엘은 조상들을 따라 출생함으로 하나님의 사랑을 입고 시내산에서 나라와 제사장 나라로 부름받고 가나안 땅을 기업으로 소망을 받았지요. 그런데 여기서는 그런 것이 아니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이, 그 분이 그리스도를 주로 보내심으로 크신 긍휼을 나타내셨는데, 그는 우리를 어떻게 하셨냐? 예수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게 하심으로 우리를 거듭나게 했다. 예수께서 죽어서 우리를 용서햇다는 말이 아니라 부활과 거듭남이 같지요. 부활하게 하심으로 거듭나게 하셨지요. 부활과 거듭남, 산 소망이 같은 계열이지요. 왜 반복해서 이처럼 설명하는가 하면 이런 구원론적인 언어만 나오면 법정적인 개념이 떠오르니까 그러는 것이어요. 그러나 시내산 언어를 배경으로 하는 것입니다.
그의 부활에서 나라와 제사장으로 부름받은 백성들은 새로운 출생, 하늘에 속한 출생을 갖는 것이어요. 누구에게 속한? 주 되신 그리스도에게 속한. 그것이 그들의 거듭남이어요. 조상들을 통해서 혈통을 따라 출생하면 거듭남이 아니어요. 물론 그것도 일종의 거듭남이어요. 할례를 받으니까. 그러나 이 거듭남은 육체를 따라 난 거듭남이 아니고 모세에게 속한 이스라엘로 하나님의 백성으로 출생된 것이 아니라 주되신 그리스도께 속한 백성으로 출생된 백성이기 때문에 그런 의미로 거듭남인데, 이렇게 새 백성으로 출생되었기 때문에 산 소망을 주셨어요.
산 소망은 무엇입니까? 뒤에서 설명하기를 '썩지 않고 더럽지 않고 쇠하지 아니하는 기업을 잇게 하시나니' 이스라엘 백성들은 조상들에게 약속하신 기업을 상속했습니다. 그런데 실은 그것은 썩을 기업입니다. 땅에 속한 기업이니까.
그런 의미로 어떤 의미로 썩지 않고 쇠하지 않을 기업인가? 곧 너희를 위하여 하늘에 간직하신 것이라, 하늘에 속한 것이기 때문에 그렇다. 이 하늘은 누구와 상관이 있겠어요? 우리 주 그리스도와 상관이 있겠지요. 주되신 그 분이 모든 위엄의 높은 데 계시니까.
어떤 본문이든지 그 말 자체가 왔다 갔다 설명을 해 주어야되지 그 본문을 빼버리고 다른데로 가면 안되요. 토대는 모세언어를 가지지만 내용상은 그 문장에서 왔다 갔다 하면서 읽어내야되어요. 여기서는 소위 말하자면 우리가 말하는 구원론 언어개념은 없다. 시내산 언어개념이다. 나라와 제사장 나라 백성삼으신 이야기가 강조이다. 그러니까 처음에 나오는 인사말도 면장님 훈시처럼 글세 하면서 쓸데없는 말을 하는 것이 아니라, 전체를 담고 있는 인사말어요. 그 인사말이 전체를 못 담으면 그 다음에 다른 말을 하면 안맞아요. 그러니까 항상 논문처럼 앞에 무엇을 제시하면 인사말이든지 축복이든지 그것이 서두적인 성격이어서 전체를 담고 있는 것이어요. 그 이하에서는 그것을 여러 관점에서 확대해서 풀어가는 것이어요. 이런 방식으로 읽으면 되어요.
여기서도 산 소망은 썩지 않는다는 의미로 산 소망입니다. 죽었냐 살았냐 하는 말이 아니다. 썩지 않는 다는 의미로 산 소망이다. 하늘에 간직한다는 의미로 산 소망이다. 하늘에 간직했기 때문에 썩지 않고 더립히지 않고 쇠하지 않는 것이어요. 그리고 썩고 더럽고 쇠하는 기업은 풀의 꽃처럼 사라지는 기업은 누구의 것이지요? 이스라엘 백성의 멸망에서 꽃은 사라지고 여호와의 영광은 세세토록 있다고 말하고 잇지요. 예수님 자신도 말했습니다. 조상들의 만나는 먹었어도 뒤로 나아고 죽은 것이 아니냐? 내 살을 먹는 자는 죽지 않는다 하면서 신구약을 대비하고 있지요. 그러니까 구약과 대비되는 방식으로 지금 설명하고 있는 것이다. 하늘에 간직하신 것이라.

그런데 '너희가 말세에 나타내기로 예비하신 구원을 얻기 위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능력으로 보호하심을 입었나니, 그런데 하늘에 간직하신 것은 말세에 나타내기로 예비하신 구원을 얻기 위하여 즉 말세에 나타날 것이어요. 여기서 말세는 예수님의 재림쪽에 해당됩니다. 일반적으로 말세는 구약에서 바라보았을 때 세상의 끝. 곧 그것은 메시야시대인데, 신약 본문이 말세의 의미를 이렇게 쓸때도 있다. 예수님은 이 세상 끝날에 오셨다. 이럴 때는 구약을 두고 하는 말입니다. 그런데 여기서는 그런 말이 아니라 예수님의 재림쪽에다 맞추어 놓았어요. 그러니까 산 소망 쪽에다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너희가 말세에 나타내기로 예비하신 구원 그러니까 하늘에 간직하신 구원은 이 본문대로 하면 말세에 나타내기로 예비하신 구ㅇ원입니다.
자 믿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능력으로 보호하심을 입었나니, 여기서 믿음, 하나님의 능력과 보호는 같은 개념이지요. 여기서 율법과 복음을 대비하는 의미로 복음을 강조하지는 않지만, 여기서는 개인의 믿음을 말하는 것 보다도 믿음과 하나님의 능력과 보호를 같은 문맥으로 말하고 있기 때문에 지금 그들이 살고 있는 믿음은 곧 하나님의 능력과 보호의 복이지요. 가령 이스라엘 백성이 모세 시대에 속했으면 모세 시대에 속했다는 의미로 하나님의 능력과 보호로 구름기둥과 불기둥이 인도했지요. 이제 이들이 말세에 나타내기로 예비하신 구원, 나중에 보면 창세전에 미리 알리신 바 된 자입니다. 이 분이 왔을 때 그 분을 믿는 그 믿음의 시대, 그것은 하나님의 능력의 시대요 보호의 시대요 그렇게 보호를 받고 있다.
[벧전 1:6] 그러므로 너희가 이제 여러 가지 시험을 인하여 잠간 근심하게 되지 않을 수 없었으나 오히려 크게 기뻐하도다 [벧전 1:7] 너희 믿음의 시련이 불로 연단하여도 없어질 금보다 더 귀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나타나실 때에 칭찬과 영광과 존귀를 얻게 하려함이라, 여기 7절 너희 믿음의 시련이 하는 것은 개인의 믿음으로 해석을 해도 상관이 없을 것이어요. 자 여기 보니까 하나님의 산 소망은 기업을 잇는 것인데, 이 기업은 하늘에 간직하신 것입니다. 그것이 말세에 나타내시기로 예비하신 구원입니다. 이 기업은 말세에 나타나게 될 것이어요. 그런데 지금 그들이 그 기업을 받고 믿고 있는데, 그것은 하나님의 능력과 보호의 믿음이어요. 그렇게 살고 있어요. 그러기 때문에 많은 이런 저런 시험을 받고 있지만, 오히려 크게 기뻐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능력과 보호아래 살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들이 믿음으로 당하는 시련이 불로 연단하여도 없어질 금보다 귀하여, 그러니까 여기서 금보다 귀하다 했을 때 귀하다는 의미로 금을 말하지만, 또 하나는 없어진다는 의미로의 금을 말하기도 합니다. 금은 불로 연단하면 실은 안 없어지지요. 금이 순전하게 되지 없어지지는 않거든요. 실은 다른데서는 찌꺼기를 제거하는 금처런 순전하게 된다고 말합니다. 야고보서 같은데서는. 여기서는 금도 없어진다. 그러니까 썩어질 것에 해당되는 것입니다. '에수 그리스도의 나타나실 때에 칭찬과 영광과 존귀를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여기서 말세에 나타내실 구원은 그리스도의 나타나실 때 칭찬과 영광과 존귀를 얻는 것이 곧 말세에 나타내실 구원이고 하늘에 간직하신 구원이군요. 왜냐하면 하나님이 항상 자기 백성을 기뻐하시고 자기 영광의 빛을 빛시고 함께거하심, 하나님의 기업을 백성에게 주고 하나님의 안식을 백성에게 주고 하는 것이 구약의 기업개념이거든요. 여기서도 그런 언어 개념입니다. 불로 연단하면 금은 없어지지만 너희들의 것은 연단받아도 없어지지 않는다. 없어지지 않기 때문에 상급이 있겠지요. 없어지지 않기 때문에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시면 칭찬을 받고 그 칭찬이 영광과 존귀여요.

[벧전 1:8] 예수를 너희가 보지 못하였으나 사랑하는도다 이제도 보지 못하나 믿고 말할 수 없는 영광스러운 즐거움으로 기뻐하니, 여기서의 믿고도 개인의 믿음이 되겠지요. 예수 나타나실 때에 칭찬과 영광과 존귀를 얻는다 했는데, 나타나기는커녕 본적도 없지요. 베드로는 보았지요. 변화산상에서 음성도 들었고. 그러나 이들은 직접 보지 못했어요. 사도들의 증거를 통해서 믿었어요. 또 지금도 보지 못해요. 그런데도 말할 수 없는 영광스런 즐거움으로 기뻐하니 [벧전 1:9] 믿음의 결국 곧 영혼의 구원을 받음이라, 이런 말을 보니까 아 육체하고는 다른 영혼의 구원, 육체와 영혼의 이분법으로 그냥 쓸려고 그래요. 그런데 여기서 말하는 영혼의 구원은 육체와 반대되는 개념이 아닙니다. 히브리서의 개념대로 하자면 완전한 구원이어요. 구약의 구원들은 육체의 예법만 되고 썩어질 기업이어요. 그런데 썩지 아니할 기업을 얻는다. 그리스도의 칭찬과 영광과 존귀를 받는다. 그런 의미로 영혼의 구원개념이어요. 그들이 예수를 본 적이 없어요. 지금도 못 보아요. 그런데도 말로 다할 수 없는 즐거움이 잇어요. 어떤 의미로? 영광스럽다는 의미로. 여기서 말로 다할 수 없는 영광스러움은 모세의 영광이지요. 모세의 영광은 사람의 말로 다 설명되어 있잖아요. 그러나 말로 다할 수 없는 영광은 그리스도안에 나타난 영광이어요. 그것은 이전에 나타난 영광이 아니기 때문에 그것은 말로 다할 수 없는 영광이어요. 인간의 지각이 측량할 수 없는 지혜, 모세제도안에서 나타난 지혜, 이 지혜는 종을 통해서 나타난 지혜요 가나안 땅의 썩어질 기업, 조상들에게 약속하신 기업을 상속하도록 그안에서 물을 뿌리고 짐승의 피를 뿌리고 순종하는 나라와 제사장을 삼으심으로 주신 복이었어요. 그러나 주 되신 그리스도의 아버지께서 주신 복은 이것과는 달라요. 썩지 아니할 기업이고 산 소망인데, 하늘에 간직한 것인데, 이것은 예수 강림하실때 나타나게 될 것이어요. 이것은 금처럼 없어지는 것이 아니라 없어지지 않습니다. 오히려 썩어진 정도가 아니라 예수오시면 주님이 칭찬과 영광과 존귀를 받게 될 것이어요. 이것이 사실은 것은 이미 너희들이 구원을 받아서 기뻐하고 있지 않느냐? 미음의 결국 너희들이 구원을 받은 것이라. 너희들이 추구했던 목표 그것이 너희들의 완전한 구원인데 그것을 받는 것이 아니냐? 어떻게? 말로다 할 수 없는 하늘에 속한 영광으로 기뻐하기 때문에. 여기서는 성소적인 교제에다 강조를 두고 있지요. 에베소서 같은 데는 성령이 우리안에 보증이 되셨다는 말로 말하고 있지요. 그런데 여기서는 하나님의 얼굴을 대면함, 보고 즐거워하고 있어요 시내산적인 언어를 가지고 설명하고 있어요. 너희들이 구원을 받았지 않느냐? 완전한 구원을 받았지 않느냐? 말로 다할 수 없는 영광스런 기쁨으로 즐거워하고 있지 않느냐? 이것이 믿음의 결국 목표점이 아니냐? 그러니까 아직 나타나지 않았지만 그 기쁨으로 즐거워하고 있지 않느냐? 그러니까 이미 받은 기업이지요. 그러니까 그 기업을 놓지 말고 고난중에서도 굳게 서라는 말이 되겠지요.
[벧전 1:10] 이 구원에 대하여는 너희에게 임할 은혜를 예언하던 선지자들이 연구하고 부지런히 살펴서 [벧전 1:11] 자기 속에 계신 그리스도의 영이 그 받으실 고난과 후에 얻으실 영광을 미리 증거하여 어느 시, 어떠한 때를 지시하시는지 상고하니라. 이 구원이 믿음의 결국인데, 구약의 백성들도 그런 의미로 하나님을 믿었지요. 여기서 신구약을 직접 나누고 있는 개념은 아니군요. 믿었는데 그들도 이 영광을 바라보았어요. 자기 속에 계신 그리스도의 영이 그 받으실 고난과 후에 얻으실 영광, 이런 것이 무엇인지 깊이 연구를 한 것입니다. 그런데 그들은 이것을 보지 못했지요. 그런데 여기 보니까 [벧전 1:12] 이 섬긴 바가 자기를 위한 것이 아니요 너희를 위한 것임이 계시로 알게 되었으니, 왜냐하면 이제 이 구원이 나타난 바 되었기 때문에 구약의 선지자들은 그들속에 계신 그리스도의 영이 후에 받으실 영광이 어느때인지를 상고하고 연구했어도 그들의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이제는 이것이 나타났기 때문에 그들을 위한 것이 아니라 너희를 위한 것임이 계시로 알게 되었다는 말이다.
'이것은 하늘로부터 보내신 성령을 힘입어 복음을 전하는 자들로 이제 너희에게 고한 것이요 천사들도 살펴보기를 원하는 것이니라.' 그 전에도 모든 계시가 하늘로부터 왔겠지요. 그러나 그전의 계시는 하나님께서 선지자들을 통해서 모세를 통해서 모든 계시의 원천은 일단은 모세여요. 모세를 통해서 모든 선지자들은 자시를 해석해야 되어요. 하늘은 하늘이지만 시내산에 임한 하늘이어요. 그런데 이 하늘은 어떤 하늘이냐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시지요. 말로 다할 수 없는 영광중에 계신 아버지시지요. 그 영광 가운데 함께 있기 때문에 그래요. 아직 보지 못햇지만, 강림하지 않았기 때문에 눈으로 보지 못햇지만, 본것과 같기 때문에 말로 다할 수 없는 영광으로 즐거워해요. 이미 이 은혜는 선지자들에게도 약속되어 있어요. 그들도 탐구를 했어요. 그러나 그들은 이것을 보지 못했어요. 그들을 위한 것이 아님이 계시로 나타났어요. 이제 하늘로부터 온 성령으로 말미암아 증거되었거든요. 그러니까 구약의 선지자들은 이 약속을 받고 보전했지만 아직 보지 못했어요. 그런 의미로 믿음의 결국은 믿음의 목표였던 것은 완전한 구원인데 이 구원을 너희들이 받은 것이 아니냐?
누구를 통해서? 하늘로부터 보내신 성령을 힘입어 복음을 전하는 자들로 이제 너희를 구하는 것처럼, 여기서 하늘로부터 보내신 성령 하는 것은 요한복음적인 개념인데 인식론을 위해서 하늘로서 보내신 것이 아니라, 아버지께서 그 아들을 보내셨는데 아들이 아버지께 가셔서 주가 되심으로 아버지가 아들의 이름으로 성령을 보내셔서 아들의 영광을 증거토록 해서 그 영광을 백성으로 누리도록 했지요. 그런 의미로 하늘로부터 보낸 성령이다. 인간과 대비시킴으로 하늘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모세제도적인 하늘, 종교적인 이원론으로서의 하늘이어요. 이스라엘 백성은 하늘의 식양대로 땅에 장막을 짓고 살았거든요. 그런 언어개념이다. 이제 성령을 보내셔서 증거했는데 복음전하는 자들로 했다. 에베소서하고 비슷하지요. 에베소서 3장에서 이런 말씀을 하고 있지요. 천사들도 살펴보기를 원한다. 이제 천사들은 어디에서 하늘의 지혜를 보느냐? 이 교회에서 본다. 구약에서는 천사들이 어디서 하나님의 지혜를 보느냐면 천사들은 하나님의 시은소나 내려다 보고 있지 휘장으로 가리워져서 교회는 캄캄한 암흑이다. 하나님과의 관계는. 하나님의 영광은 시은소 하나님의 보좌에 있지 보좌 밖에 있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나타난 것이 아니어요.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의 은혜로 일곱 촟대를 밝히시고 금상에서 함께 먹고 마시는 친교를 허락하셨지만, 하나님은 캄캄한 암흑 가운데 가리우고 계셨어요. 보지 못했어요. 나아갈 길이 막혔어요. 그런데 여기서는 그런 것이 아니어요. 천사들도 이제 말로 다할 수 없는 하늘의 영광, 하나님께서 친히 자기 백성을 대면하시고 기뻐하시는 것을 본고 기뻐한다. 어디에서 봅니까? 교회에서 살펴보시기를 원한다. 에베소서 3장에서 그런 이야기를 했지요. 이것이 구원이다. 그러니까 이제까지 모든 선지자들이 증거했던 그 증거를 너희들이 받은 것이다. 이것은 모든 믿음의 백성들이 목표했던 믿음의 결국이다. 그러나 선지자들은 이 약속을 받았어도 자기들 때는 아니었다. 그들이 연구하고 증거했지만 아니었다. 이제 하늘로부터 성령을 보내셔서 복음을 증거했는데 이 복음이 선지자들이 받았고 사모했던 것이 이제 성취되었다. 이제는 천사들로 여기서 하나님의 지혜와 영광을 보는 것이다. 왜? 우리가 보지 못했지만, 주께서 강림하지않았다는 의미로 보지 못했지만, 우리가 말로 다할 수 없는 영광으로 아들을 증거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것이 종말의 구원을 받은 것이 아니냐? 이것이 하늘에 예비된 구원이 아니냐? 이 구원이 나타나면 너희들이 지금 기뻐하는 것처럼 주님의 영광과 칭찬과 존귀를 받는 것이 아니냐? 이것이 산 소망이다. 왜? 하나님이 조상들안에 선택한 것이 아니라 미리 아심을 따라 창세전에 미리 아심을 따라 너희들을 성령으로 부으셔서 하나님께 속한 자로 거룩하게 하신다. 그리고 예수의 피뿌림을 통해서 언약을 체결해서 순종하는 나라와 백성으로 삼았지 않느냐 하는 말입니다.
지금 이것이 서론인데 무엇이냐면 너희들이 믿음의 결국, 모든 믿음이 목표했던 것, 종말의 구원, 말세의 구원이 나타났다. 하나님의 크신 긍휼이 나타났는데 창세전에 그리스도 예수안에서 미리 알았고 이제 그 아들을 보내셨는데 성령의 거룩하게 하심과 순종, 예수의 피뿌림을 통해서 언약을 완성했지 않느냐? 이것은 썩어질 것이 아니다. 어떤 연단을 받아도 없어질 것이 아니다. 그 증거가 무엇이냐? 너희들이 하늘의 기쁨으로 즐거워하고 있지 않느냐? 말할 수 없는 영광의 기쁨으로. 그것이 너희들이 받고 있는 이 구원이 나타날 것이다. 문제는 무엇입니까? 이 구원을 끝까지 붙들어라는 말이다. 그런데 이 구원은 하나님이 함께하시니까 하나님의 능력과 구원과 보호하심을 입은 것이다. 너희들이 지금 믿은 것이 이이렇다. 그러니까 너희들이 두려워하지 말라. 놀라지 말라. 고난 중에서도 이 구원을 붙들어라. 주께서 나타날 영광을 기다려라.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함으로 나타날 영광을 기다려라. 소위 고난과 영광이 연결된 복음이지요. 이것이 베드로전서의 총체적인 이야기입니다.


[벧전 1:13] 그러므로 너희 마음의 허리를 동이고 근신하여, 허리동이라는 말은 근신하라는 말인데, 아마 일하는 사람 종이 순종하는 자세로 허리를 동입니다. 다른 데서는 깨어라는 말로 하지요. 그러므로 너희 마음의 허리를 동이고 근신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나타나실 때에 너희에게 가져올 은혜를 온전히 바랄찌어다. 이런 의미로 근신입니다. 주님이 오실 것인데 그 은혜를 온전히 바람으로 깨어있으라. 일하라는 말입니다. [벧전 1:14] 너희가 순종하는 자식처럼 이전 알지 못할 때에 좇던 너희 사욕을 본 삼지 말고 [벧전 1:15] 오직 너희를 부르신 거룩한 자처럼 너희도 모든 행실에 거룩한 자가 되라 [벧전 1:16] 기록하였으되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할찌어다 하셨느니라. 여기서도 시내산 언어지요. 뭐냐면 레위기를 보면 내가 거룩하니 너희들도 거룩하라고 말하고 있지요. 레위기가 시내산 언약입니다. 레위기는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과 함께하는 거룩한 삶, 거룩한 교제의 삶을 말하고 있는 것이지 죄지으면 용서받는 방법을 말하고 있는 책이 아니어요. 시내산에서는 하나님이 강림하셔서 언약을 체결하시고 언약을 체결하시면 언약 문서에 써야 되겠지요. 그리고 이것이 확증되었으면 피로연 같이 먹고 마셔야 되겠지요. 그리고 나면 하나님이 거하실 대사관을 지어야 되겠지요. 집을 짓도록 했지요. 그 집의 대표는 아론입니다. 아론을 통해서 하나님이 자기 백성을 만나실 것입니다. 이런 생명의 교제를 나타내고 있는 것이 레위기입니다.
그러니까 여기서 뭐라고 말씀합니까? [벧전 1:14] 너희가 순종하는 자식처럼 이전 알지 못할 때에 좇던 너희 사욕을 본 삼지 말고 [벧전 1:15] 오직 너희를 부르신 거룩한 자처럼 너희도 모든 행실에 거룩한 자가 되라 [벧전 1:16] 기록하였으되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할찌어다 하셨느니라. 그런데 문제는 구약성경을 똑같이 인용을 해도 내용이 다르다는 말입니다. 그것이 기독론적인 해석입니다. 영감되었다는 말은 말과 글자가 똑같아야 영감되었다는 말이 아닙니다. ............신약성경에서의 영감, 성령에 속한다 하는 문제들은 모세제도에 속한 것이 아니라 의에 속한다는 것이 가장 기본적인 개념이어요. 여기서 내가 거룩하니 너희들도 거룩하라. 내가 부르신 자처럼 모든 일에 거룩하라 했을 때 구약이 본문을 보면 별볼일 없어요. 레위기 18장을 보십시오.
여기보면 구약의 거룩은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하라 했을 때의 거룩은 존재론적으로 말하는 것이 아니라, 거룩하신 하나님이 거룩한 율법을 주셨어요. 그렇다면 부르신 자처럼 거룩하라는 말이다. 하나님은 누구입니까? 모세 율법에 나타난 하나님이십니다. 존재론적으로 하나님을 탐구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모세율법에 나타난 하나님이셔요. 우리가 알고 있는 하나님은 우리가 탐구하는 하나님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안에서 나타나신 하나님이셔요. 그 외의 하나님을 몰라요. 물론 존재적으로는 크지요. 하나님이 역사적으로 하신 일만 자기 백성을 위해서 하신 일입니다. 그것만이 하나님의 구원의 능력이어요. 하나님이 모든 것을 다한다는 전능이 아니라 자기 백성을 위해서 구원의 일을 하신다는 의미로 전능이셔요. 하나님의 백성을 빼앗을 세력이 없어요. 그러니까 구약때는 너희를 부르신 하나님처럼 거룩하라고 하나님이 부르셨는데 모세제도안에서 부르셨고 그들에게 율법을 순종하도록 부르셨고 그리고 피를 뿌리셔서 언약을 체결하셨다. 그러면 그들이 어떻게 거룩하는가? 모세 율법을 지키면 되어요. 그런데 우리를 부르신 하나님은 누구냐? 미리 아셨고 뒤에 보면 창세전에 미리 아신 바 되나 이 세상 끝날에 우리를 위해서 나타내셨으니 그 분의 피뿌림으로 언약이 체결되었지요. 우리는 그런 분이 부르셨다. 종인 모세가 부르신 것이 아니라 주되신 그리스도의 아버지께서 부르셨다. 그래서 하늘에 속한 기업을 주셨다. 그 분이 말하기를 내가 거룩한 것처럼 너희도 거룩하라 하십니다. 이것이 우리의 거룩이어요. 왜냐하면 하나님과 함께함이 구원이고 거룩이거든요. 성경이 말하는 윤리는 언약적이며 관계적인 의미입니다. 어떤 존재적인 의미가 아니다. 이제 하늘에 산 소망, 부활하신 예수의 얼굴을 대면하고 하늘에 속한 말로 다할 수 없는 즐거움으로 기뻐하는 이 교제에로 부르셔서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하라. 그 분은 죽음을 이기시고 부활하신 분이셔요. 부활하셔서 중생, 부활하셔서 죽음을 이기신 새 백성으로 지으신 분이셔요. 그래서 그들은 땅에 속한 백성이 아니어요. 이렇게 사는 것이 그들의 거룩이어요. 항상 관계로 윤리를 설명해야 됩니다. 법적으로 설명해서는 안됩니다.

그러면서 [벧전 1:17] 외모로 보시지 않고 각 사람의 행위대로 판단하시는 자를 너희가 아버지라 부른즉 너희의 나그네로 있을 때를 두려움으로 지내라, 처음에 14절을 보면 순종하는 자식처럼 이전 알지 못할 때 좇던 너희 사욕을 본받지 말고, 이제는 너희가 자녀가 되었지 않느냐? 그전에는 자녀가 아니었지 않느냐? 자녀가 아니었을 때는 너희가 사욕을 좇았지만, 이제는 자녀가 되었으니까 아버지를 본받아라, 이렇게 되어있지요.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을 자기 장자 삼으신 모델을 가지고 설명하는 것이어요. 실은 이스라엘 백성이 본래 하나님의 백성이었어도 애굽에 있을 때는 시내산의 윤리를 요구하지 않으셨어요. 그러나 그들은 내 장자를 놓아라. 내 백성을 놓아라. 그렇게 해서 시내산에 불러서 이제는 물로 씻고 순종의 말씀을 주셨고 언약을 체결하셨으면 그들은 이전의 바로의 종으로 살았던 방식으로 살아서는 안되는 것이어요. 이제는 여호와께 속한 백성으로 하나님의 율법을 따라서 순종하고 가나안 땅에 하나님 나라를 드러내 주어야 되어요. 그런 언어 모델을 사용하고 있다.
그런데 구약때는 어떻게 하셨습니까? 이스라엘 백성은 특별히 봐 주었지요. 이방 백성은 전부 밥이고. 이것이 외모로 보는 것이어요. 우리들이 외모를 본다고 하니까 사람의 메너를 보아요. 성경의 외모는 이스라엘 백성은 내 아들이고 이방 백성은 밥이어요. 이것이 성경이 말하는 구분점이어요. 제사장은 이리오고 백성은 저리로 가야되요. 이방 백성이 아무리 깨끗해도 성소에 발만 들여놓았다가는 죽어요. 이스라엘 백성은 이런 저런 일을 했어도 범죄했을 때 속죄피를 흘리고 들어오면 모든 특권을 다 누려요. 왜냐하면 이스라엘만 자녀 삼으셨으니까. 다른 사람은 자녀가 아니어요. 그런 의미로 이스라엘 백성과 이방 백성을 하나님이 구분하셨어요. 이스라엘 백성이 잘못해서 하나님이 이방 백성에게 맡기셨어도 이스라엘 백성이 회개하면 매는 누가 맞냐면 이방백성이 맞아요.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을 장자 삼으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외모를 보았어요.
그런데 지금은 그렇지 않습니다. 그전에는 하나님과 모세, 하나님과 아론, 간격, 모세와 하나님의 간격이 모든 간격을 규정했지만, 이제는 주되신 그리스도의 아버지 하나님과 간격이 없어요. 그분이 모든 영광의 주자리에 앉아 계셔요. 그 분의 아버지셔요. 그 분안에서 하나님과 그리스도안에 간격이 없는 것처럼 모든 사람의 간격이 없어요. 사람을 외모로 취하지 않는다. 그러니까 조심하고 두려워하라는 말입니다. 여기서 두려움은 판단을 두려워하라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자기의 특권을 자랑하면 안되고 오직 믿음을 붙들어라는 말이다.

[벧전 1:18] 너희가 알거니와 너희 조상의 유전한 망령된 행실에서 구속된 것은 은이나 금같이 없어질 것으로 한 것이 아니요 [벧전 1:19] 오직 흠 없고 점 없는 어린 양 같은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로 한 것이니라, 그러면서 왜 거룩해야 될 것인가를 첫째는 하나님이 외모로 판단하지 않으니까 조심해라. 그 다음에 근거를 말하기를 너희들이 구속을 받았는데, 여기서의 구속은 무슨 죄의 권세로부터 구원했다는 말 보다는 자녀가 되었다는 의미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구속을 무엇으로 비유하냐면 조상들의 유전된 행실에서, 여기서 조상들이 누구인지를 보아야겠지요. 이 문맥에서는 유대인인지 이방인인지를 차이를 두고 있지 않다. 나중에 보면 너희는 이방인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는 구분이 없다. 따라서 유대인과 이방인을 같이 말해야 됩니다.
그런데 여기보면 무엇과 무엇을 대비하냐면 은이나 금같이, 은이나 금은 제일로 보배로운 것입니다. 이처럼 값진 것인데 없어질 것이라고 비유합니다. 그리고 썩어질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니까 썩어질 것 중에 가장 가치있는 것, 이렇게 말하는 것입니다. 그것과 대비된 것이 무엇입니까?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로 된 것이다.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는 무엇입니까? 흠없는 어린 양같은 구약 제물을 모델로 삼고 있어요. 하나님이 구약 백성은 유월절 피로 구속했거든요. 유월절 제물을 통해서 애굽에서 이스라엘을 건지셔서 자기 자녀 삼으셨어요. 그런데도 여기서는 그 언어를 사용하면서도 무엇과 대비하냐면 세상의 제일로 귀한 것 금과 은인데, 그런 것은 썩어질 것인데, 그런 것으로 값주고 산 것이 아니다. 흠도 없고 점도 없는 어떤 의미로 보배로운 피다. 가치를 비교하고 있지요. 얼마나 귀한 피로 너희를 구속하였느냐? 이것은 세상에 있는 그런 것이 아니다. 이 말이지요.
이 피는 어떤 피인가 하면 어린양같은 보배로운 피여요. 항상 이스라엘의 출발은,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값주고 산 것은 유월절 제사여요. 그러니까 여기서 어린양도 유월절 양이 될 것이어요. 보배로운 피로 한 것이다.

[벧전 1:20] 그는 창세 전부터 미리 알리신 바 된 자나 이 말세에 너희를 위하여 나타내신 바 되었으니, 그런데 이 어린양은 언제부터냐면 창세전부터 미리 알리신 바 된 자라. 이 말세에 너희를 위하여 나타내신 바 되었다. 이 말세는 창세전부터 그 구원 약속이 이루어진 지금, 지금 나타났지요. 말세는 종말의 말세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지금 이 구원을 누리고 있는 것이 말세다. 그런데 이 어린 양은 언제부터 알리신 바 되었느냐? 창세전부터 예비되었느냐? 이것을 존재론적으로 설명하자 말자 하나님의 작정 하나님만 아시는 계획 그것이 창조를 통해서 진행되었다. 섭리를 통해서 진행되었다. 이런 식으로 설명해서 운명론적으로 빠져요. 그런데 여기서 예비하셨다. 작정하셨다. 미리 아셨다는 이야기는 그런 개념이 아니라 모세제도적인 언약적인 개념을 가지고 말하는 것이다. 자기 백성과 함께하시는 구원의 개념으로 설명하는 것이다. 자기 백성과 함께하신다는 의미로 구원입니다. 무슨 말이냐면 이스라엘 백성은 조상들안에서 선택되었어요. 그리고 유월절 어린양은 유월절 피흘림의 삼일 전에 예비되었지요. 이스라엘 백성을 선택했을 때 내가 아브라함을 알았다. 아브라함 때문에 내가 너희를 사랑하고 이것이 모든 이스라엘의 토대여요. 조상들. 그러니까 여기서도 조상들했을 때는 구약의 조상들을 언급하기 쉬어요. 그러나 다음의 문맥을 보면 너희와 저희를 구분하고 있으니까 여기서 그냥 한 것 뿐인데. 일단은 구약개념으로 하면 조상들하면 이스라엘의 조상들이어요.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은 조상들안에서 선택되었고 유월절 양은 애굽에서 구원의 밤을 위하여 사흘전에 예비되었어요. 그런데 지금 우리들은 이스라엘의 조상들안에서 선택된 것이 아니지요. 우리들은 그리스도안에서 선택되었지요. 이스라엘 백성들은 가나안 땅의 구원이어요. 우리들은 하늘에 속한 간직한 것을 받았지요. 하늘에 속한 것은 천지를 창조하기 이전의 이야기가 하늘이지요. 순서로 보자면, 창세전에 하는 이야기는 그런 이야기입니다. 천지창조는 성경대로 하자면 가나안 땅의 성소를 설명하기 위한 천지창조여요. 그것은 하늘의 식양대로 나타난 일이어요. 이제는 하늘이 왔다. 너희들은 조상들안에서 가나안 땅에 속한 백성들로 선택된 것이 아니라 애굽에서 구원받은 백성으로 된 것이 아니라 너희들은 그리스도안에서 택하심을 받은 것이 아니냐? 이 그리스도는 창세전에 미리 알리신 바 된 자이신데 이 마지막 말세에 너희들을 위해서 흠없는 양으로 계시지 않느냐? 그런 이야기입니다. 그러니까 너희들이 거룩해야 되겠다는 말입니다.

그 다음에 또 보면 [벧전 1:21] 너희는 저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시고 영광을 주신 하나님을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믿는 자니 너희 믿음과 소망이 하나님께 있게 하셨느니라. 그런데 이 어린양을 보내셨는데, 어린양을 통해서 구속하셨는데 하나님이 모세를 통해서 자기 백성을 구속했는데 유월절 양을 통해서 구속하셨을 때 그들은 누구를 만나도록 갑니까? 여호와를 만나지요. 그들이 모세를 믿으면 여호와를 믿어요. 하나님은 모세를 통해서 자기 백성을 유월절 양을 통해서 구속하고 값주고 사내셨거든요. 그렇게 된 것이어요. 그런데 여기서는 누구를 믿느냐면 창세전에 알리신 바 된 자인데, 말세에 우리를 위하여 주신 바 되었어요. 그런데 그는 분명히 주신바 되었는데 죽으셨지요. 그런데 하나님이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셨어요. 그러니까 이분은 분명히 하나님이 모세에게 능력을 나타내시면 모세는 자기를 보내셔서 자기를 세우신 하나님을 증거하지요. 그러니까 모세를 믿으면 하나님을 믿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모세에게 보이신 증거가 있지요. 손을 넣었다가 빼어라. 지팡이를 던져서 뱀이 되는 증거를 주셨지요. 권능이 있는 분으로 치료하시는 분으로 모세를 통해서 나타내신 것입니다.
이제 아들을 보내셨는데 하나님이 이 아들을 통해서 자기 능력을 나타내시는데 아들을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셨다. 그러니까 이 아들이 증거하신 하나님이 하늘의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이 이 아들을 통해서 자기를 증거하셨어요. 그러니까 이제 예수를 믿음으로 예수는 어린양으로 자기 백성을 위한 대속의 제물로 주어졌는데, 구속의 제물로 주셨는데, 이 아들을 하나님이 유월절 흠없는 어린양으로 주셨는데, 이 아들을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셔서 이제는 이 아들이 증거하는 하나님을 믿을 수 있도록 우리를 믿음과 소망이 하나님께 있어요. 그러니까 예수믿는 자가 아니면 하나님을 믿는 자가 아니어요. 모세를 믿으면 여호와를 믿어요. 여호와 증인대로 하면 그 분이 하나님이시지요. 그러나 신약의 하나님은 여호와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셔요.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시다. 그분이 신약의 하나님이셔요. 그러니까 확실하게 이 하나님을 믿을 수 잇는 것은 아들의 부활이여요. 부활을 통해서 하나님이 내가 그를 구원자로 보내셨다. 만일에 예수가 죽어버리면 마지막 구원자가 아니어요. 그가 죽음을 이겼기 때문에 죽음을 이긴 새로운 생명으로 통치할 왕이여요. 그리고 승천하시고 보좌우편에 앉으셨다. 이분이 왕이시다. 이분이 교회의 아버지시다. 너희 믿음과 소망이 하나님께 있게 하셨다. 그런대 이 아들은 창세전에 미리 알리신 바 되었고 창세전에 예비하신 구원을 주셨다. 그리고 우리의 소망이 창세전에 아들을 예비하시고 그 하나님께 소망이 있도록 했다. 그래서 골로새서에서도 이 아들은 아버지로부터 나오셨지만 지음을 받지 않으시고 만물의 머리가 되셨다.

[벧전 1:22] 너희가 진리를 순종함으로 너희 영혼을 깨끗하게 하여 거짓이 없이 형제를 사랑하기에 이르렀으니 마음으로 뜨겁게 피차 사랑하라 [벧전 1:23] 너희가 거듭난 것이 썩어질 씨로 된 것이 아니요 썩지 아니할 씨로 된 것이니 하나님의 살아 있고 항상 있는 말씀으로 되었느니라, 자 여기보면 먼저는 그들이 어떻게 해서 하나님의 백성이 되었는가를 설명했지요. 백성이 되었으면 어떻게 할까요 백성으로 살아야겟지요. 그것을 여기서는 어떻게 설명하느냐면 너희가 진리를 순종함으로 너희 영혼을 깨끗케 하여, 여기서 진리가 무엇인지 직접 언급하고 있지는 않아요. 그런데 그 앞의 문맥을 보면 누구를 순종합니까?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살아계신 하나님께 믿음과 소망을 두게 했지요. 그러니까 누구 때문에 믿습니까? 그리스도를 순종함으로 살아계신 하나님을 믿도록 되어 있지요. 이 그리스도는 창세전에 아버지께 예비하신 양이시지요. 그런 의미로 진리시지요. 그래서 복음의 말씀이 진리다. 하늘에서 성령으로 말미암아 전파된 진리, 그것이 진리다. 그런데 여기서는 진리라는 말씀과 나중에 하나님의 복음의 말씀과 연결을 합니다. 그런 의미로 복음은 진리이고 진리가 자유하게 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진리는 모새 율법에 속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품에 속한 것이다. 그런 의미로 종의 말씀이 아니라 자유하게 하는 말씀입니다.
자 항상 모세제도와 대비되는 방식으로 설명을 해야되지 우리 인간의 기능을 가지고 설명하자 말자 우리들은 하나님 앞에 저주가운데 있어요. 그리고 성령이 충만하자마자 신비적인 체험쪽으로 넘어가야되고 그는 신이어요. 말로만 겸손하지 신이여요. 왜냐하면 신적인 능력으로 행하니까. 만일에 선지자가 신적인 능력으로 행하면 그는 하나님의 재판장으로 신이어요.
그러니까 너희들이 이제 이 진리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소망을 하나님께 두고 있는 것이다. 은과 금으로 구속한 것이 아니라 피로 구속해서 이 창세전에 아들을 예비하신 하나님께 소망이 있고 믿음이 있도록 그 하나님께로 우리를 인도했으니 우리가 뜨겁게 형제를 사랑하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영혼을 깨끗하게 했다는 말은 완전히 깨끗하게 했다는 말이지요. 그냥 몸은 더러운데 마음은 깨끗하고 혀는 더러운데 마음은 깨끗하고 하는 말이 아니다. 여기서는 완전한 사람이 되었다는 말을 영혼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히브리서를 보면 모세의 율법은 육체를 정결케하고 그리스도안에서는 양심을 정결하게 하고 우리 영혼을 하나님을 섬길수 있도록 인도해요. 그런 의미로 완전한 구원을 설명하는 것입니다.
어떤 의미로 영혼의 구원입니까? 창세전에 예비하신 그 하나님께 인도함을 받은 그런 의미로 구속이니까. 완전한 구원입니다. 그런데 이 문맥에서 뜨겁게 피차 사랑하라는 말은 ................(녹음상태불량)


[벧전 1:24]
그러므로 모든 육체는 풀과 같고 그 모든 영광이 풀의 꽃과 같으니 풀은 마르고 꽃은 떨어지되 [벧전 1:25] 오직 주의 말씀은 세세토록 있도다 하였으니 너희에게 전한 복음이 곧 이 말씀이니라,
......창세 전에 그리스도에게 속한 구원인줄 알고 그렇게 하라고 권면하고 있습니다. 이전의 모든 영광은 풀의 꽃과 같이 사라지고 지금은 복음을 통해서 증거된 구원이 소멸되지 않기 때문에 기업이 영원하다고 말하므로 기업의 영원함을 말하면서 하늘의 소망을 따라 살도록 권면하고 있습니다. 그러니 그들의 거룩함이 곧 썩지 않고 쇠하지 않는 영원한 기업을 사모하고 그리스도께서 오시면 이 영광스러운 것을 줄 것이기 때문에 거룩하라고 권면하고 있습니다.

2장에서는 총괄적인 의미로 거룩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구체적으로 그들의 행할 바를 말하면서 행할 근거들을 강조합니다.
[벧전 2:1] 그러므로 모든 악독과 모든 궤휼과 외식과 시기와 모든 비방하는 말을 버리고, 1장에서 14절에 '너희가 순종하는 자식처럼 이전 알지 못할 때에 좇던 너희 사욕을 본 삼지 말고' 이것은 일단은 그리스도 밖에 있는 모든 것이 사욕이 되겠지요. 그러나 거기서는 알지 못할 때 사욕과 부르신 자를 따라 거룩하게 살라는 그것이 대비되어 있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는 그런 것을 더 구체적으로 설명하고 있는 식입니다. 그런데 그러므로 모든 악독과 모든 궤휼과 외식과 시기와 모든 비방하는 말을 버리고, 이것이 사욕의 대표적인 예들입니다. 그런데 왜 하필이면 이런 것을 두었는가 하는 것입니다. 몇 개 되지도 않고요? 갈라디아서처럼 아홉 개나 조금 길면 좋겠는데, 로마서 1장처럼 많은 면 좋겠는데, 31가지나 되면 좋겠는데, 모든 악독과 모든 궤휼과 외식과 시기와 모든 비방하는 말을 버리고 갓난 아이들같이 순전하고 신령한 젖을 사모하라 이는 이로 말미암아 너희로 구원에 이르도록 자라게 하려 함이라 너희가 주의 인자하심을 맛보았으면 그리하라 사람에게는 버린 바가 되었으나.
먼저는 사욕을 본삼지 말고 너희를 부르신 거룩한 처럼 거룩한 자가 되라고 했는데, 여기 2장에서는 구체적으로 그것을 적용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모든 악독과 궤휼과 외식과 시기와 비방하는 말 등을 보니까 어떤 특징이 있지요. 악독과 궤휼이 무엇인지 정확하게는 잘 모릅니다. 포괄적인 이야기이고 외식과 시기와 비방은 좀 성격이 드러나 있지요. 이런 것은 무엇인가 다른 사람 위에 군림하고 자기가낮아지면 시기하고 비방하는 것과 관계가 있지요. 그러니까 앞에 있는 악독과 궤휼도 시기나 비방과 관련된 의미이겠지요. 그 모든 악한 계획들이 시기와 비방의 말들을 통해서 나타나겠지요. 그러니까 여기서는 무엇인가 사욕을 버리고 하는 것이 특징이 있지요. 베드로전서에서 서신을 받는 교회에 요구하는 것은 겸손해라. 그리고 고난을 받아라. 그리고 어떤 권력자들이 너희를 핍박하더라도 대신 욕하지 말라.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는 시련이여요. 그리스도의 낮아짐에 참여하는 시련이어요. 그것도 너희를 부르신 거룩한 처럼 거룩하라 했을 때도 그 거룩을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는 것에 맞추어서 설명하고 있거든요. 왕들에게 복종하고 안믿는 남편에게 복종하고 안믿는 아내도 귀히 여기고 종들은 사환들을 조심하고 전부 이런 안믿는 질서에서 어떻게 겸손하게 봉사할 것인가? 그리스도께서 겸손히 봉사하셨는데도 어떻게 영광을 받으셨는가? 이쪽에다 총 초점을 맞추고 있지요. 그러니까 베드로전서에서 너희들에 그렇게 하라 했을 때는 거룩의 핵심은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는 자로서 겸손하고 온유하라. 이것이 핵심이다. 어떤 고난을 받을 때도 대신 위협하고 그렇게 하지 말고 낮아져라. 이것이 베드로전서에서 말하는 윤리적인 핵심입니다.
그리고 그 이유들을 또 설명을 하겠지요. 왜 너희들이 외식과 시기와 모든 비방하는 말을 버리고. 제가 이런 것을 거듭해서 설명했을 때 이런 것이 소위 육체의 소욕에 속한 것이고 하나님을 알기 이전에 사욕을 본삼는 것인데, 이것이 우리 마음이 얼마나 나쁜가 그쪽으로 직접 접근하지 말고 모세제도를 통해서 해석해보라는 말이 무슨 말인고 하면, 모세제도는 큰 자가 작은 자를 지배하는 질서여요. 모세제도는 그리스도 오시기 이전에 이스라엘이 이방인의 장자로 있었을 때의 윤리여요. 그러니까 큰 자가 작은 자를 지배하는 윤리여요. 그런데 베드로전서에서는 그리스도께서 고난을 받았으니 그 고난을 받고 낮아졌을 때 모든 것을 다 빼앗겼을 때 공포 중에 살아요. 그랬을 때 대신 위협하고 시기하고 하지 말고 그리스도의 온유와 겸손 가운데 너희 믿음을 끝까지 붙들어라. 그래야 나타날 영광에 참여한다고 하니까 모든 사욕을 즉 외식하고 시기하고 비방하고 그리고 이런 것을 품을 수 있는 근원적인 모든 악독과 궤휼을 버리라. 이쪽에서 설명하고 있어요.
만일에 이것이 에베소서 윤리 같으면 이런 식으로 설명하지 않아요. 에베소서 윤리는 불신세계에서 고난 받은 중에 어떻게 완전할 것인가? 그렇게 해서 나타날 영광을 바라볼 것인가? 그렇게 말하지 않고 몸이 윤리를 설명해요. 몸의 윤리를. 그러니까 에베소서는 부부도 믿는 부부를 설명하지 믿지 아니하는 부부를 설명하지 않아요. 그리고 거기는 왕이 어떠한가 하는 말도 하지 않아요 전부 거기는 가족 공동체처럼 부부간의 질서, 부자지간의 질서, 그때 주인과 종의 관계도 가족이어요. 구약개념으로 주인과 종은 한 가족개념입니다. 지금처럼 노사문제가 아니어요. 부부,부자지간, 주종의 문제여요. 에베소서는 완전히 가족공동체적인 윤리를 가지고 설명을 합니다.
그런데 베드로서는 어떻게 핍박받는 세상 중에서도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며 낙심하지 않고 끝까지 붙들고 겸손함으로 나타날 주님의 영광에 참여할 것인가? 그러니까 낮아진 것과 대비된 것은 외식하고 시기하고 비빙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런 일을 위해서 모든 궤휼이 있고 악독이 있겠지요. 그런 쪽에서 설명하고 있는 것이 사욕입니다. 물론 우리들이 믿기 전에도 그와 같아요. 왜냐하면 우리들이 믿기 전에는 이스라엘 밖에 있었기 때문에 이스라엘의 윤리가 장자의 윤리이면, 이스라엘 밖의 윤리는 위와 동문이어요. 어떻든 그리스도안에서는 낮아진 자가 큰 자지 그리스도 밖에서는 반드시 지배자가 큰 자여요. 그런데 지금 이방인들이 낮아져서 점수를 따는 것은 그 이방인들도 그리스도 시대를 살고 있는 이방인들이기 때문에 낮아지는 자가 영웅취급을 받는 것이어요. 그리스도가 오시기 이전의 세상에서는 낮아진 자는 영웅이 아니어요. 절대로. 옛날에 영웅 중에 낮아진 사람을 보았어요. 그런 영웅은 세상에 없어요.
그러니까 우리들은 이방인의 윤리로 빨리 접근하기 쉽고 이방인의 언어로 해석하려고 그래요. 어떻게 접근하셔야 할 지 알겠지요. 베드로전서 전체가 고난에 참여함으로 영광에 참여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사욕을 버리고 했을 때도 그의 고난에 참여함, 낮아짐의 윤리가 아니면, 지금 겸손하라. 낮아져라, 모든 낮아짐에도 인내해라, 그래야 그리스도의 영광에 참여한다. 이것이 핵심인데도 여기다가 도적질하지 맙시다. 거짓말하지 맙시다고 해 보았자 이것은 전체적인 핵심에 어긋난 것이지요. 그러니까 윤리가 각 책마다 책의 목표에 맞게 윤리가 결정되어 있어요. 로마서 같으면 하나님 나라 통치의 윤리지요. 그러니까 각자 받은 은사대로 봉사하고 그리고 왕들에게 순종하고 율법은 사랑의 완성이니까 마지막 때를 기대해서 사랑으로 일깨우고 그리고 나서 유대인 이방인이 다 하나되려면 다 양보해야 할 것이 아니냐? 그렇게 해서 유대인과 이방인의 하나됨의 윤리 통치 문제를 설명하면 로마서여요. 빌립보서는 봉사지요. 겸손한 봉사. 에베소서는 이방인의 삶을 살지 말고 이제는 하나님 앞에 향기나는 생축으로 드리도록 이방인을 본받지 말고 하나님의 성소가 되었으니 그런 한 몸된 윤리, 공중의 권세잡은 자와 싸운다는 윤리 개념이 에베소서나 골로새서의 윤리여요. 그러니까 윤리의 개념들이 전부 문맥을 따라서 읽어야 됩니다. 어떤 보편적인 윤리 개념을 찾아서는 안맞아요. 문맥을 보아야지 문자풀이해서는 안됩니다.
그러니까 여기 베드로전서에서 너희들이 가져야할 윤리,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모든 행실에서 거룩하라. 그것과 첫째적인 대비는 알지 못했던 사욕, 조상들의 망령된 행실, 그것을 따라 살아서는 안되겠는데 그것은 한마디로 악독과 궤휼과 시기와 비방과 분쟁이다. 이런 것들이다. 왜냐하면 옛 질서는 전부 큰 자가 작은 자를 지배하는 질서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야곱도 자기 형 에서의 자리를 차지하려고 죽자사자 노력한 것입니다.
자 그런데 지금 신약 백성의 윤리는 이런 옛 질서의 윤리가 아니라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이제 그 이유를 설명해야 되겠지요. 아까 처음에 말씀한 것은 너희들이 나타날 영광을 잘 붙들어라. 나타날 상급을. 너희들이 안받은 것을 받으라는 것이 아니라 이미 받은 것을 즉 너희들이 지금 하늘의 기쁨으로 즐거워하지 않으냐? 이 기쁨은 무엇이냐? 창세 전에 예비하신 그리스도 그를 믿음으로 그 하나님께 속한 기쁨이 아니냐? 이것은 사라질 이스라엘처럼 썩어질 그런 영광과 기쁨이 아니다. 이 복음은 하늘에서 오신 성령이 증거해서 세세토록 있는 약속의 말씀이 아니냐? 그러니 이 약속의 말씀을 끝까지 붙들어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살라. 이것이 총체적인 이야기였지요. 그리고 이제 구체적으로 무엇이 너희들이 조심할 것이냐? 했을 때 첫째 높아진 이야기여요. 이런 것을 조심하도록 해라.
그리고 무엇을 사모해야 하느냐면 아이들처럼 순전하고 신령한 젖을 사모하라. 예수님도 아이들을 앞에 놓고 큰 자는 작은 자 처럼 섬겨야 되리라고 가르치신 적이 있지요. 여기서도 아이들은 젖을 빱니다. 젖을 먹어야 자랍니다. 이런 이야기를 하려는 것이 아니라 첫째는 시기하고 비방하고 분쟁하는 의미와 대비되는 의미로 갓난 아이들같이. 이쪽으로 먼저 말하고 있지요. 그런데 무엇을 사모해야 하느냐면 순전하고 신령한 젖을 사모하라. 여기서 순전하다는 말이나 신령하다는 말은 비슷한 말이 됩니다. 신령한 젖은 이 앞에서는 세세토록 있는 하나님의 말씀이겠지요. 진리의 말씀입니다. 그들이 진리의 말씀을 순종함으로 거듭났거든요. 그 진리의 말씀을 사모하라는 말입니다. 이는 이로 말미암아 너희로 구원에 이르도록 자라게 하느니라. 이 말은 이 믿음의 결국, 모든 선지자들이 보았던 믿음의 목표, 말로 다할 수 없는 구원을 이미 받았는데 성경은 한번 구원을 받았으니까 이제는 따논 당상이다. 이런 개념을 물론 한 데도 있습니다. 한 데도 있는 것은 신분이 변함이 없다는 말을 하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약속의 불변이나 우리의 구원자의 권능을 말했을 때 하는 이야기이지 그것을 가지고 다시 풀어 가지고 그러면 우리는 가만히 있으면 되겠내요? 하고 그냥 있으면 안됩니다. 성경은 언약의 책이기 때문에 하나님이 자기 언약을 말했을 때는 나는 가만이 있으라는 말이 아니어요. 가령 부자지간에 내가 너에게 모든 것을 다해 주마 공부나 열심히 해라. 이때 아들이 아버지가 다해주니까 하면서 가만이 있으면 아버지 말을 해석한 것이 아니어요. 아들이 열심히 공부함으로 아버지가 해주시는 것에 참여해야 되는 것이어요. 그런데 우리들은 언약을 어떻게 해석을 하냐면 인간끼리의 언약은 당사자의 언약이기 때문에 한쪽이 배반하면 한쪽도 무효거든요. 그런데 하나님의 언약을 내가 우리들은 수시로 변하거든요. 하나님이 네가 그러면 나도 그러마 하면 끝장나거든요. 그러니까 우리들은 언약을 어떻게 생각하느냐면 디아데케는 서로 동등한 당사자끼리의 언약, 그리고 하나님과의 언약은 주권적인 언약이라 일방적인 언약, 해 가지고 이것 저것을 푸는 것이어요. 그것이야 하나님과 인간을 존재론적으로 대비하면 다 주권적인 언약이지요. 동등한 당사자끼리의 언약이야 사람끼리의 언약이지 하나님과의 언약은 안되지요. 그러니까 하나님과의 언약은 기본적으로 주권적인 언약이 토대가 되겠지요. 칼빈주의식으로 확대하면 하나님이 하실 것이니까 내가 할 것이 없지요. 그런데 언약에는 그런 존재적인 간격이 없어요. 아버지는 아버지로서 약속하고 자식은 자식으로서 약속하는 것이지 아버지가 다 하니까 나는 할 일이 없구나. 그것은 철학에서 존재적인 간격을 두고 하는 말이지 부자지간에는 그런 말을 한 적이 없어요. 하나님과 그렇게 말씀하신 적이 없어요. 그러니까 아브라함에게 약속했던 때는 하나님이 약속의 체결자로 쪼갠 고기사이로 지나가요. 그러나 시내산 언약에서는 하나님이 말씀하시니까 백성들이 받으렵니다. 모세가 전달하니까 백성이 듣겠다고 합니다. 그리고 나서 전부 도장찍었지요. 그리고 나서 동등한 당사자처럼 언약하고 있잖아요. 언약에 동행하라고 그럽니다.
그러니까 구원에 이르도록 자라게 한다는 말의 이 구원은 말세에 나타난 영광, 주님 오실 때 가져올 영광, 그 구원에 이르도록 자란다는 말입니다. 역사적인 이야기를 이렇게 하는 것입니다. 칼빈주의식으로 하면 한번 구원받으면 끝이어요. 뭐 다음에 구원받고 할 것이 없어요. 그런데 여기서는 그런 것이 아니라 그렇게 어린아이처럼 낮아지고 그렇게 겸손함으로 그 겸손한 가운데 신령한 젖 진리의 말씀 창세전에 그리스도안에서 우리를 예비하시고 우리를 그에게로 부르신 진리의 말씀 사라지지 않고 세세토록 있는 이 진리의 말씀을 사모하고 어린아이가 젖을 먹는 것처럼 사모하여 구원에 이르도록 성장하라는 말입니다. 동행하는 개념이어요. 그러니까 성경의 구원개념은 그전에 우리들이 말했던 구원개념하고는 달라요.
너희가 주의 인자하심을 맛보았으면 그리하라. 어떤 인자하심인가 하면 4절 이하겠지요. 사람에게는 버린 바가 되었으나 하나님께는 택하심을 입은 입은 보배로운 산 돌이신 예수에게 나아와 [벧전 2:5] 너희도 산 돌같이 신령한 집으로 세워지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기쁘게 받으실 신령한 제사를 드릴 거룩한 제사장이 될지니라. 여기서 산 돌같은 신령한 집 이것은 성전이지요. 그리고 신령한 제사를 드리는 거룩한 제사장, 그런 제사장적인 삶을 살라는 말입니다. 물론 그 인자하심은 하나님의 인자하심은 이전에는 너희 조상들의 망령된 행실에서 했으니까 하나님을 알지도 못한 백성들을 하나님이 성소삼으신 것이 인자하심이어요. 그러니 너희들이 성전이 되어라. 제사장이 되어라 하는 것은 안된 것을 되라는 말이 아니라 이전의 어린양의 보배로운 피로 구속해서 믿음으로 하나님께 있도록 그렇게 했지요. 그러니까 하나님이 너희들의 성전이 되셨고 하나님이 너희들을 그렇게 사랑하시니 너희들이 이전에 알지 못했을 때는 자랑하고 그랬지만 그것은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었어요. 하나님의 크신 인자하심이 아들을 보내셨고 그 분이 품에 이처럼 품으셨어요. 그러면 너희들이 높아져서는 안될 것이 아니냐? 지금 그런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사람에게는 버린 바가 되었으나 이 사람은 유대인이지요. 여기서 설명하기를 8절에서 설명하기를 저희가 말씀을 순종치 아니하므로 넘어지나니 이는 저희를 이렇게 정하신 것이라, 유대인의 넘어짐을 이야기하고 있지요. 그러니까 여기 사람들은 유대인이어요. 사람에게는 버린 바가 되었으나 하나님께는 택하심을 입은 보배로운 산 돌이신 예수께로 나오라. 이것이 하나님의 인자하심이 나타나신 것입니다. 사람에게는 버린 바가 되었는데, 왜 버린 바가 되었습니까? 모세 율법을 따라 판단하니까 버린 바가 되었지요. 그는 메시야가 아니어요. 바울로 말하면 저주받은 자여요 나무에 달려 죽었기 때문에. 그런데 하나님은 그를 택하셔서 새로운 성소거 되시고 그래서 사람에게는 버린 바가 되었지만 하나님께는 택하심을 입었어요. 보배로운 산 돌이신 예수께로 나오라. 이 산 돌은 성전의 기초인 산 돌이겠지요. 너희도 산 돌같이 신령한 집으로 세워지고 여기서 살아있다는 말은 그의 부활을 설명하는 것이 될 것입니다. 왜냐하면 버린 바가 된 것과 비교되니까. 산 돌같이 신령한 집으로 세워지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기뻐받으시는 신령한 제사를 드릴 신령한 제사장이 될 지니라. 신령한 성전, 신령한 제사장, 이 신령함은 버린 바가 되었으나 하나님께는 택하심을 입은 바된 신령한 돌, 신령한 제사장, 이것이 신령함입니다. 하나님은 영이시다는 요한복음의 말씀도 그런 말씀입니다. 존재론적으로는 하나님은 항상 영이시지요. 그러나 메시야 시대의 예배를 말하면서 하나님이 영이시니 이 산에서도 저 산에서도 말고 이제 메시야 안의 예배, 그런 의미로 하나님은 영이시지요. 그런 이야기입니다. 여기서도 신령하다는 말은 버림을 받았으나 하나님께는 택하심을 받았다는 의미로 보배로운 산 돌, 그의 부활에다 강조를 두고 있는 것입니다.
공관복음에서는 예수님이 마지막 재판을 받을 때 이 성전을 헐라 했을 때, 재판장이 묻기를 네가 하나님의 아들이냐? 아마 하나님의 아들이 오면, 새로운 대사가 오니까 바꾸어지는 모양이어요. 하나님의 아들이면 새로운 성전을 지으실 분, 그렇게 이해하고 묻는 것입니다. 그런데 요한복음에서는 성전짓는 이야기를 예수께서 부활하신 뒤로 제자들이 예수님의 몸을 성전으로 이야기한 줄을 알았다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요한복음은 처음부터 예수님을 세상에 오신 하나님으로 증거하기 때문에 처음부터 자기 증거를 시작하는 것입니다. 공관복음서는 그의 메시야 사역을 마무리하므로 이제는 새로운 이스라엘 백성을 건설할 것입니다. 그래서 뒤에 배열한 것입니다. 두 번 이 사건을 했으냐는 것과 성관이 없습니다.
그러니까 여기서도 왜 너희들이 하나님의 신령한 젖을 사모하고 구원에 이르도록 자라야 하는가 하나님의 인자하심을 맛보았으면 그래야 되겠다. 하나님의 인자하심이 어떤 인자하심입니까? 사람에게는 버린 바가 되었지만 하나님께는 택하심바 된 산 돌이신 예수께 나와 신령한 제사장이 되고 신령한 돌이 되어라. 이것은 하나님이 아들을 보내신 이야기지요. 버린 바가 되었다. 왜 버린 바가 되었느냐면 이것 때문에 그래요. 2장 1절에 있는 악독과 궤휼과 외식과 시기와 비방, 이스라엘의 제도를 신령한 성전인 그리스도의 관점에서 보았을 때는 외적인 이런 저런 제도요 그리고 서로를 높이는 것이어요. 메시야는 높고 힘이 있어야 되지 낮은 자는 메시야가 아니어요. 그래서 예수를 십자가에 못박으소서 하고 버린 것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인자하심입니다. 그렇게 해서 너희를 거듭나게 했지 않느냐? 그 아들의 죽으심을 통해서 너희를 성전삼고 제사장 삼았지 않으냐? 그러니 하나님의 진리의 말씀, 신령한 젖을 사모함으로 신령한 성전, 신령한 제사장으로 되라.

그 다음에 [벧전 2:6] 경에 기록하였으되 보라 내가 택한 보배롭고 요긴한 모퉁이 돌을 시온에 두노니 저를 믿는 자는 부끄러움을 당치 아니하리라 하였으니, 이 말씀은 시편 인용입니다. [벧전 2:7] 그러므로 믿는 너희에게는 보배이나 믿지 아니하는 자에게는 건축자들의 버린 그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고 [벧전 2:8] 또한 부딪히는 돌과 거치는 반석이 되었다 하니라 저희가 말씀을 순종치 아니하므로 넘어지나니 이는 저희를 이렇게 정하신 것이라. 이것은 인용구절들은 전부 이스라엘 백성의 멸망을 예언하는 구절들이어요. 그리고 약속은 하나님이 나를 믿으라. 내가 신령한 돌이 되마. 자기를 믿으라고 했을 때 이 말을 하고 있어요. 이스라엘 백성의 멸망을 예언하고 있을 때. 여기 인용된 시편이나 이사야서가 전부 그런 구절이어요. 특별히 이사야서는 이스라엘 백성의 멸망을 말할 때 문맥이 27장 그런 쪽이어요.
그러니까 여기서는 무슨 말을 하고 있느냐면 보라 내가 보배롭고 요긴한 모퉁이 돌을 시온에 두노니 저를 믿는 자는 부끄러움을 당하지 아니하리라. 이스라엘 백성의 멸망, 그 멸망은 성소의 파멸이어요. 그런데 하나님께서 새로운 모퉁이 돌을 주고 잇어요. 그를 믿으라는 말입니다. 그런데 이들이 하나님이 허락하신 새로운 돌을 믿지 않고 버려요. 그러니까 그 돌이 믿는 자에게는 보배롭고 산 돌이지만, 믿지 않는 자에게는 그들 머리 위에 떨어지면 그들이 박살날 것이어요.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옛 성전의 멸망과 이스라엘의 멸망과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새로운 성소가 되시고 그를 믿고 의지하도록 요구하고 있는 본문을 여기서 인용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사람에게 버린 바된 것은 이스라엘 백성이 예수를 버린 것이어요. 왜냐하면 그들의 모세제도의 영광에 합당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들이 말씀을 순종치 않음으로 그렇게 된 것이다.
로마서에서도 그런 이야기를 하고 있지요.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을 알되 그리스도안에서 하나님을 알아야 하는데 이전의 자기들의 영광 모세제도로 하나님을 알기 때문에 하나님의 아들을 버린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이 버림을 당한 것입니다. 자 이처럼 이스라엘 백성이 버림을 당했습니다. 그들이 멸망했을 때 하나님이 새로운 성소를 약속하셨어요. 하나님이 성소가 되셨어요. 그리고 아들을 보내셔서 그는 버림을 당했지만 신령한 성전, 하나님이 택하신 신령한 성전, 하나님이 받으시는 신령한 제사장, 그렇게 자기 백성을 성전을 삼으시고 신령한 제사장 삼으셨습니다. 이제 옛 성전제도는 끝났습니다. 옛 성전제도에 속한 것이 악독과 궤휼, 외식과 시기와 비방 그런 것이어요. 높아진 이야기여요. 하나님은 이 아들을 통해서 아들을 보내셔서 버림받은 아들을 통해서 새로운 성소가 되셨다.
그러기 때문에 9절을 보면 [벧전 2:9] 오직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데서 불러 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자의 아름다운 덕을 선전하게 하려 하심이라. 이제 하나님이 그들의 성전이 되셨고 왜 하나님이 그들의 성전이 되셨습니까? 그들을 나라와 제사장을 삼으시려고 그런 것입니다. 완전히 시내산 언어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왜 그렇게 하셨습니까? 그들을 불러낸 하나님의 영광이 그들에게 증거되고 그런데 어디서 불렀습니까? 이것은 애굽에서 불렀다고 하지 않고 어두운 데서 불러냈는데 어떻게 그의 기이한 빛, 1장에서는 말로 다할 수 없는 영광스러운 즐거움으로 즐거워하니 보지 못했으나, 그 하나님의 영광을 뵈옵는 빛이지요. 왜? 하나님은 성소에 계셨는데 구약에는 휘장으로 가리우고 계셨지만, 하나님은 일곱 촛대 가운데서 자기 영광을 드러내시면 그 빛 가운데서 제사장은 하나님 앞에 떡을 떡상에 진설하고 그리고 하나님 앞에 나아가 분향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나타난 영광은 일곱 촛대 가운데 나타난 빛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가리우고 계셔서 아무도 그 하나님의 영광을 볼 수 없었어요. 그런데 이 기이한 빛은 모세제도는 가리워져 있지만 이 기이한 빛은 창세 전에 아들을 예비하신 그 하나님을 뵈는 그 기이한 빛이지요. 누구에게서? 사람에게는 버림바 되었지만 하나님께는 택하심을 입었습니다. 예수의 부활로 거듭나게 하시고 산 소망이 있게 하셨습니다. 그는 부활하심으로 새로운 성전이 되셨거든요. 아들안에서 아버지를 뵙는 것입니다. 그것과 반대되는 것이 어두움입니다. 그러니까 직접 이방인만 언급한다고 말할 필요는 없어요. 물론 이 문맥은 이방인을 언급하지만 이스라엘이 예수를 버린 것을 말하고 잇지요. 자 덕을 선전하게 하려 하심이니라. 그러니까 하나님이 빛이시고 그들도 빛을 드러내야 할 것입니다.

[벧전 2:10] 너희가 전에는 백성이 아니더니 이제는 하나님의 백성이요 전에는 긍휼을 얻지 못하였더니 이제는 긍휼을 얻은 자니라. 그러니까 이 문제는 점 묘합니다. 8절을 보면, 저희는 그렇게 정한 것이니라 하는 것은 분명히 유대인이어요. 그 다음 9절에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같은 제사장이다 이것은 믿는 신자여요. 10절은 너희가 전에는 백성이 아니더니 이제는 하나님의 백성이요 전에는 긍휼을 얻지 못하더니 이제는 긍휼을 얻는 자니라. 이것은 꼭 이방인을 두고 하는 것 같지요. 왜냐하면 이 말이 에베소서에서 쓰면 분명이 이 말은 이방인이어요. 그런데 에베소서는 이런 대비가 강조가 아니라 이스라엘 백성을 하나님의 성소 삼으실 때 너희들은 그 밖에 있었지 않느냐? 그런데 그들을 그리스도안에서 하나가 되게 하시고 그리스도안에서 성전이 되게 하셨다 했을 때 그때 이방인을 말했을 때 이런 언어로 강력하게 말을 해요. 그런데 여기서는 직접 이방인을 말하는 것인지 우리들은 잘 몰라요. 그러나 나중에 보면 이방인들의 문맥이 강합니다. 여기서는 순수한 이방인으로 되어 있는지를 우리가 잘 모르니까 왜냐하면 베드로는 사역이 유대인 사역이거든요. 베드로전서를 썼을 때는 네로황제도 때로 복음이 한참 진행되는 때여요. 그런데다가 이 편지를 쓰는 갈라디아 비시디아 이쪽 지역은 바울의 전도 때문에 이방인들이 많이 들어와 있었어요. 그러니까 잘 모르겠어요. 모르면 더 읽어 보면 되어요.

[벧전 2:11] 사랑하는 자들아 나그네와 행인같은 너희를 권하노니 영혼을 거스려 싸우는 육체의 정욕을 제어하라 [벧전 2:12] 너희가 이방인 중에서 행실을 선하게 가져 너희를 악행한다고 비방하는 자들로 하여금 너희 선한 일을 보고 권고하시는 날에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려 함이라. 이것가지고 이방인 가운데서 부름받았다는 보증은 안되어요. 교회가 이방세계에 있기 때문에. 무슨 말이냐면 먼저 2절에서는 이전 시대에 살았던 윤리를 모든 비방과 시기로 말하고 이제는 그들에게는 버림을 받았지만 하나님께는 택하심을 입었다. 왜 버렸습니까? 그들의 질서에 안맞기 때문에 버린 것입니다. 그들이 보았을 때는 멸시받을 자여요. 그러나 하나님은 그들을 택하셔서 이스라엘 영광을 대신하는 새로운 성전을 지으셨어요. 바로 새로운 성전안에서 하나님을 섬기는 하나님의 백성이 되었어요. 택하신 족속, 왕같은 제사장, 거룩한 나라, 그의 소유된 백성, 어떻게 해서? 어두운 데서 불러내서. 하나님의 기이한 빛의 영광을 드러내게 하려고 한 것이 아니냐? 여기서는 먼저 그전의 사욕에 속한 시기하고 분쟁하는 그런 질서를 먼저 총괄적으로 말하고 나서 이제는 새로운 성소 새로운 백성, 버림받았으나 하나님이 택하심받음, 그런 새로운 질서 겸손의 질서를 먼저 설명하고 나서
그 다음 11절에서 사랑하는 자들아 나그네와 행인같은 너희들에게 권하노니 이제 구체적인 영혼을 거스려 싸우는 육체의 정욕을 제어하라. 이것은 영혼과 육체라는 말이 여기서는 사람의 이분법을 쓰는 개념은 아니지요. 여기서는 조상들의 행실과 사욕 그리고 너희들이 버려야할 것, 이제 그들은 하나님 앞에 멸망받았고 열납받는 백성이 아니어요. 이제는 그들에게 버림받은 예수를 믿고 그 계통으로 기이한 빛 가운데서 사는 백성, 이들이 하나님 앞에 열납받는 제사장이다. 이런 것을 대비하고 있는 것이지 영혼과 육체가 갈라디아서 말대로 하면 육체의 소욕과 성령의 소욕 그런 것을 대비하는 이야기입니다. 만약 이분법으로 하자면 육체의 생각과 영혼의 생각은 어떻게 다릅니까? 그러니까 여기서는 열납받지 못한 자들, 이제는 이전의 성전이 무너졌습니다. 그들은 거치는 돌이 되었습니다. 그들은 그전에 하나님을 예배했는데 지금과 같은 방식으로 하지 않았습니다. 그전 방식으로 보고 이제 나타난 아들을 버렸습니다. 이 아들에게서는 하나님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는 백성으로 하나님 앞에 제사하는 백성이어요. 이런 백성의 제사를 하나님은 열납을 하셔요. 그것이 아린 아이와 장성한 시기를 대비시켰지요. 그리고 나서 영혼을 거스리는 육체의 정욕을 제어하라고 했으니까 그것을 대비시킴으로 지금 확대하고 있는 것입니다. 육체의 생각과 영혼의 생각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닙니다.
자 너희가 이방인 중에서 행실을 선하게 가져 너희를 악행한다고 비방하는 자들로 너희 선한 일을 보고 권고하시는 날에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 앞에는 이 기이한 빛을 선전하게 한다고 그랬지요. 왜냐하면 우리가 기이한 빛의 나라의 백성이 되었으니까. 그러면 어떻게 하면 구체적으로 그 기이한 빛을 선전하느냐? 하는 이야기입니다. 그 이야기를 11절 이하에서 하고 있는 것입니다.
첫째는 영혼을 거스려서 싸우는 육체의 정욕을 제어해야 합니다. 구체적으로 무엇이 육체의 정욕이고 무엇이 영혼의 행동인가? 12절을 보니까 이방인 중에서 선한 행실을 가져 악행한다고 비방하는 자들로, 여기서 어두움에서 불러내서 그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했고, 어두움은 조상들의 망령된 행실이고 아버지를 알기 이전의 사욕에 속한 것이고, 그러니까 이방인들의 행위이지요. 그러니까 여기서 육체의 소욕은 이방인에게 속한 것과 같아요. 그리고 영혼의 행위는 믿는 신자들의 행위입니다. 보십시다. 너희를 악행한다고 비방하는 자들로 너희 선한 일을 보고, 여기 선한 일이 영혼의 행위가 될 것이어요. 권고하시는 날에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 이것이 그 기이한 빛을 선전하는 것이 될 것이어요.
그 다음 무엇이 악한 일이고 무엇이 선한 일이냐? 무엇이 육체의 정욕이고 무엇이 영혼의 행실이야? 하는 이야기가 13절 이하에서 구체적으로 적용이 되겟지요. 벧전 2:13] 인간에 세운 모든 제도를 주를 위하여 순복하되 혹은 위에 있는 왕이나 [벧전 2:14] 혹은 악행하는 자를 징벌하고 선행하는 자를 포장하기 위하여 그의 보낸 방백에게 하라 [벧전 2:15] 곧 선행으로 어리석은 사람들의 무식한 말을 막으시는 것이라. 왜 선한 일을 행해야 하는가? 선행으로 어리석은 자들의 무식한 말을 막기 위해서 그런다. 로마서에서는 하나님 나라의 관점이니까 하나님이 모든 것을 통치하니까 모든 권세들에게 복종하라고 합니다. 그런데 여기서는 핍박받고 있는 교회, 이방세계에서 고난받고 있는 교회가 어떻게 그를 부르신 빛에 속한 하나님의 기이한 영광을 증거할 것인가? 했을 때 세상과는 다르게 삶으로 증거하겠지요. 그전에는 조상들의 소욕을 따라서 살았고, 이제는 그들을 따라 살아서는 안되어요. 그들은 누구입니까? 예수를 버렸던 사람들이어요. 그렇게 하면 안되어요. 그들은 예수를 버렸지만 우리들은 예수를 믿어서 기이한 나라의 백성이 되었어요. 이 영광의 나라를 증거해야 되어요. 이것이 영혼을 따라서 사는 것이고 반대하는 것이 육체를 따라 사는 삶이어요. 그것을 거절하는 것이 이방인의 삶이요 악행하는 삶입니다. 그런데 믿는 신자들은 선행을 행하는 것이다. 그러면 무엇이 선행을 행하는 것인가? 무엇이 악행인가? 했을 때 베드로서의 문맥에서는 무엇을 말하니까? 높아진 것은 악행이고 낮아진 것은 선행이어요. 지금 그리스도의 고난에다 총체적으로 맞추고 있지요. 그러면 세상의 통치질서라는 것은 왕이 제일로 높지요. 그러면 왕에게 마땅히 복종하라는 말입니다. 그러면 어리석은 자들의 말을 말을 것이 아니냐. 그런데 믿는 신자들이 복종해야 하는데 어떻게 복종하냐면 선행으로 어리석은 사람들의 무식한 말을 막으려는 것입니다. 즉 그들의 순복하는 행위를 통해서 무식한 자들, 이방인들, 하나님을 모르는 모든 권세자들, 그들의 말을 막으려는 것이다.
어떻게 [벧전 2:16] 자유하나 그 자유로 악을 가리우는데 쓰지 말고 오직 하나님의 종과 같이 하라 [벧전 2:17] 뭇 사람을 공경하며 형제를 사랑하며 하나님을 두려워하며 왕을 공경하라. 여기서 공경할 그룹들을 하꺼번에 다 언급했지요. 왜 그렇습니까? 자유하나 그 자유로 악을 가리우는데 쓰지 말고, 이 자유는 무슨 자유냐면 그들이 왕같은 백성이요 제사장 나라요 나의 소유된 백성이니 그 기이한 빛에 들어간 하나님의 백성이니 그 하나님의 백성입니다. 그런 의미로 그들은 자유자입니다. 그러나 그 자유를 가지고 다른 사람에게 불순종하는데 쓰지 말고 순종하라. 그렇게 함으로 하나님을 모르는 자들 이방인들 하나님의 권세를 대항하는 모든 권세들, 그런 사람들을 부끄럽게 하려고 그런 것이다. 여기서는 그런 이야기입니다. 더 보시면알것입니다.
그 다음에 보면 [벧전 2:18] 뭇 사람을 공경하며 형제를 사랑하며 하나님을 두려워하며 왕을 공경하라., 왕이나 권세자들 다음에 주인이 우무머리, 권세자이겠지요. 에베소서 윤리 같으면 주인과 종이야기는 저 뒤에 나옵니다. 여기서는 왕들, 모든 권세자들, 모든 주인, 모든 안믿는 남편, 그 다음 안믿는 아내, 이런 순서로 나오고 있지요. 그러니까 이것은 말하자면 복음을 대항하는 권세들, 그리스도의 권세를 대항하는 어두움의 권세들, 자기 힘의 원리를 자랑하는 그런 것들, 하나님의 아들을 멸시했던 높아진 것들, 그런 것을 대비하면서 이방인들이 아니냐? 거기서 너희는 순복하라. 그러면 너희들보고 악하다고 할 것이지만 하나님이 그들을 부끄럽게 할 것이다. 하나님이 그들을. 그러니까 너희들은 왕같은 제사장이 되었으니까 너희들은 그들의 백성이 아니다. 너희는 하늘에 속한 거룩한 백성이다. 이스라엘과 다르지요. 그래서 이런 권세자의 말을 안들어도 되겠지만 그런 자유로 하지 말고 순종하라는 말이다. 순복이 강조이다. 순복이 선행이다.
 뭇 사람을 공경하며 형제를 사랑하며 하나님을 두려워하며 왕을 공경하라 선하고 관용하는 자들에게만 아니라 또한 까다로운 자들에게도 그리하라 [벧전 2:19] 애매히 고난을 받아도 하나님을 생각함으로 슬픔을 참으면 이는 아름다우나 [벧전 2:20] 죄가 있어 매를 맞고 참으면 무슨 칭찬이 있으리요 오직 선을 행함으로 고난을 받고 참으면 이는 하나님 앞에 아름다우니라, 왕들에게 복종해야 되고 까다로운 자들에게도 복종해야 한다. 애매히 고난을 받으면 아름답지만 잘못해서 매맞으면 당연한 것이 아니냐? 우리들을 실을 선을 위하여 고난을 받도록 부르신 것이 아니냐?
그러면서 그리스도를 모델로 제시합니다. [벧전 2:21] 이를 위하여 너희가 부르심을 입었으니 그리스도도 너희를 위하여 고난을 받으사 너희에게 본을 끼쳐 그 자취를 따라 오게 하려 하셨느니라. 첫째는 본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항상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이 하신 대로 했지요. 하나님이 이방인은 들어오지 마 하면 이스라엘도 이방인이 못들어오게 해야되어요. 하나님이 아론만 들어와 하면 아론은 다른 백성이 못들어오게 해야 되어요. 하나님이 가나안 백성을 전부 죽이면 이스라엘도 가나안 백성을 전부 죽여야 되어요. 그것이 하나님의 형상으로 하나님의 자녀로서 하나님의 장자로서의 그들의 윤리여요. 그냥 살인하지 말라는 말은 보편적인 윤리를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구약에서 하나님 나라의 윤리여요. 그러니까 살인하지 말라고 하신 그 분이 가나안 족속을 전부 죽이라고 하신 것이어요. 전두환보다 더 고약한 명령을 내렸어요. 애기까지 전부 죽이라고 했으니까. ..............

[벧전 2:21] 이를 위하여 너희가 부르심을 입었으니 그리스도도 너희를 위하여 고난을 받으사 너희에게 본을 끼쳐 그 자취를 따라 오게 하려 하셨느니라 [벧전 2:22] 저는 죄를 범치 아니하시고 그 입에 궤사도 없으시며 [벧전 2:23] 욕을 받으시되 대신 욕하지 아니하시고 고난을 받으시되 위협하지 아니하시고 오직 공의로 심판하시는 자에게 부탁하시며 [벧전 2:24] 친히 나무에 달려 그 몸으로 우리 죄를 담당하셨으니, 너희는 바로 이 예수 그리스도의 백성이 아니냐? 그러니까 너희들도 너희의 주를 따라 마땅히 순종하는 것이 합당하다. 순종하라는 말이지요. 이처럼 본을 이야기 합니다.
그리고 교회의 능력으로 말씀합니다. "이는 우리로 죄에 대하여 죽고 의에 대하여 살게 하려 하심이라,"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의 길은 우리의 본이 뿐만아니라 우리의 능력입니다. 이것을 히브리서에서도 우리 앞서 가신 구원의 주 온전케하시는 이 그 분을 따라 가자. 그가 휘장안으로 먼저 들어갔지 않느냐? 했을 때 이런 말을 하고 있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본이 되셨고 죽으심으로 죄의 권세를 끝내셨습니다. 그렇게 하고 이제는 부활하신 주님안에서 하나님을 섬길 수 있도록, 의의 종이 되도록 하나님의 종이 되도록 했습니다. 그러니까 그전에 자기 보다 약한 자를 학대하는 것은 죄의 종이어요. 큰 자가 작은 자를 지배하는 것은 죄의 종이어요. 이제 그리스도의 고난을 통해서 나타나는 것은 주님을 따르기 때문에 큰 자가 작은 자를 섬기는 것, 큰 자가 고난을 받은 것이 이것이 의여요. 여기서는 하나님을 따라 살도록 했지 않느냐? 뒤에서는 하나님으로 이야기합니다.

'저가 채찍에 맞음으로 너희는 나음을 얻었나니 [벧전 2:25] 너희가 전에는 양과 같이 길을 잃었더니 이제는 너희 영혼의 목자와 감독 되신 이에게 돌아왔느니라. 그전에는 양이아니고 자식이 아니더니 이제는 목자에게 하나님께로 돌아왔지 않느냐? 이제는 죄에서 해방되고 의의 종, 하나님의 종이 되었지 않느냐? 하나님이 아들을 낮아지게 하셔서 고난을 받게 하셨고 그렇게 하셔서 세상을 구원하셨어요. 그러니까 너희들도 마땅히 그분을 따라서 낮아져야 하고 본이 되어야 할 뿐만아니라 그의 죽으심을 통해서 이제는 하나님께 종이 되도록 그가 우리 죄를 대신해서 죽으셨지 않느냐? 그의 구원의 능력을 말하는 것이어요. 그러니까 이제는 죄의 종이 아니어요. 그전에 모세제도의 아래 있었을 때는 죄의 종이어요. 이제 그리스도안에 있을 때는 의의 종, 하나님의 아들이어요. 로마서와 비슷한 말을 하고 있지요. 이것이 말하자면 모든 사람에게 순종할 이유여요.
순종할 이유가 2장 21절 너희에게 본을 끼쳐 이하입니다. 그리스도께서 본, 그가 죽고 부활하심으로 죄에서 해방되어 의의 종이 되게 했다. 우리를 하나님께로 인도했다. 그것이 마땅이 모든 권세들에게 순종할 이유이다. 여기서는 그리스도의 낮아짐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는 욕을 받아도 욕하지 않았습니다. 고난을 받아도 위협하지 않았습니다. 오직 하나님께 맡겼습니다. 오직 그는 낮아졌고 상급과 심판은 하나님이어요. 너희들도 그렇게 하라.
그런데 예수 그리스도의 본을 여기서 제시했겠는가? 아마 남편에게 복종하는 것은 좀 쉽겠지요. 그래서 한 것입니다. 그래서 특별히 권세들을 강조하는 왕들 권세자들 주인들을 말하고 나서 그리스도의 본을 말한 것입니다. 거기서 그리스도를 본받아야 할 이유를 설명하고 나서 그 다음에 3장에서 또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 다음에 [벧전 3:1] 아내 된 자들아 이와 같이 자기 남편에게 순복하라 이는 혹 도를 순종치 않는 자라도, 도를 순종하지 않는 자는 안믿는 사람입니다. 말로 말미암지 않고 그 아내의 행위로 말미암아, 행위는 뒤에서 말하는 행위겠지요. 예수께서도 말로 증거했던 것이 아니요 자기 몸의 고난의 행위를 통해서 구원했지요. 자 여기서도 그런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행위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게 하려 함이니, 이것도 우리들은 어떻게 해석합니까? 우리들은 행위가 아니라 믿음으로 구원을 받는데 어떻게 아내의 행위로 구원을 받는고, 말이 안되지요.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의 증인인 것처럼 믿은 자가 하나님의 기이한 빛에 들어간 백성이 하나님의 영광의 증인이어요. 하나님이 아들을 보내서 그 구원을 이루셨던 것처럼 우리들도 낮아져서 그 길을 걸음으로 그 영광을 봉사할 것이어요. 그러니까 말이 아니라 행위를 통해서 남편을 얻으려는 것이다. 어떻게? [벧전 3:2] 너희의 두려워하며 정결한 행위를 봄이라 [벧전 3:3] 너희 단장은 머리를 꾸미고 금을 차고 아름다운 옷을 입는 외모로 하지 말고 [벧전 3:4] 오직 마음에 숨은 사람을 온유하고 안정한 심령의 썩지 아니할 것으로 하라 이는 하나님 앞에 값진 것이니라 [벧전 3:5] 전에 하나님께 소망을 두었던 거룩한 부녀들도 이와 같이 자기 남편에게 순복함으로 자기를 단장하였나니, 이것을 가지고 또 성경을 보아라, 금반지 끼고 교회 오지 말라고 했지 않느냐? 이런 말을 직접 하려는 본문이 아닙니다. 이 앞에 썩어질 영광과 대비했지요. 그것을 가장 귀한 것을 금으로 이야기했지요. 여기서 핵심은 외모를 단장하는 것이어요. 왜? 외모를 단장하는 것도 구약을 토대로 하는 것입니다. 구약은 가난한 자는 벌받고 부자는 복받은 것이어요. 가나안 땅의 복이. 그러니까 외모를 단장ㅎㄹ 수록 하나님의 영광이 더 있을 것이어요. 여기서는 하나님이 어떻게 아시고 미니스커트 입지 말고 귀고리를 차지 말라고 하셨는고 하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어떻게 하나님의 백성이 자기 아름다움을 드러낼 것인지를 비교시키고 있는 것이어요.
이전의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식으로 자기 아름다움을 드러내지 말고 새로운 아름다움으로 해라. 이 아름다움은 이전의 모든 여인들도 그렇게 했지 않느냐? 너희 믿음의 종국에 도달한 너희들도 당연히 그렇게 해야 될 것이 아니냐 하면서 대표적으로 누구의 예를 들고 있습니까? 하나님께 소망을 두었던 부녀들도 이와같이 자기 남편에게 순복함으로 자기를 단장하였는데, 대표적으로 사라지요. 사라는 믿음의 어머니지요. 아브라함이 믿음의 아버지인 것처럼 사라도 믿음의 어머니입니다. 자기 남편을 주로서 복종했다. [벧전 3:6] 사라가 아브라함을 주라 칭하여 복종한 것같이 너희가 선을 행하고 아무 두려운 일에도 놀라지 아니함으로 그의 딸이 되었느니라. 위의 말처럼 하면 사라가 아브라함을 주로 칭하여 복종한 것과 같이 너희도 너희의 남편을 주로 칭하여 복종하라 하면 좋을 것 같은데, 그런 말이 아닌 다른 말로 마무리 짓고 있습니다. 너희가 선을 행하고 아무 두려운 일에도 놀라지 않고 그의 딸이 되었느니라. 여기서 선을 행하는 것은 순복하는 것입니다. 놀라는 것은 여기보면 하나님의 도를 순종치 않는 자라도 아내에게 하는 행위가 두려움이겠지요. 아내로서 존귀한 영광을 믿지 않는 남편이 빼앗으면 그것은 대단히 두려운 일이어요. 그래서 여기서 하고 있는 말은 너희가 선을 행하고, 순복하는 일입니다. 남편이 혹시 이렇게 하더라도 두려워하지 말고 순복하라. 그렇게 함으로 너희들도 사라와 같은 딸이 되었지 않느냐? 그 말입니다. 그러니까 남편에게 순종은 남편이 하나님의 도를 알지 못하고 악행을 행할지라도 순종함으로 하나님의 딸이 되지 않느냐? 모르겠어요. 사라를 예로 든 것이 아브라함이 자기 아내 사라를 두 번 팔아먹었거든요. 그래도 쫄쫄 따라 다녔거든요. 그것을 염두해두고 하는 말인지 잘 모르겠습니다. 당시는 아내가 남편이 재산처럼 되어 있어요. 딸도 그렇고. 그래서 그런 것도 있었는지는 모르겠습니다만 그래도 어떻든 아브라함의 부끄러운 모습을 염두해 두고 하는 말인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여기서 선을 행하는 일은 순종이고 두려운 일은 남편이 하나님을 순종하는 도를 모르기 때문에 아내를 학대하는 것이 되겠지요. 그것이 두려운 일이 되겠지요. 그런 두려운 일이 있어도 놀라지 말고 선을 행하라. 너희들이 아브라함을 주로 절대적으로 복종한 사라처럼 믿음의 딸이 되었지 않느냐? 그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그를 본받으라.

[벧전 3:7] 남편된 자들아 이와 같이 지식을 따라 너희 아내와 동거하고 저는 더 연약한 그릇이요 또 생명의 은혜를 유업으로 함께 받을 자로 알아 귀히 여기라 이는 너희 기도가 막히지 아니하게 하려 함이라. 에베소서에서는 그리스도를 경외함으로 피차 복종하라고 했습니다. 아내들아 남편을 공경하라 남편들아 아내를 네 몸처럼 사랑하라. 이것이 서로 서로 복종하라는 것이 에베소서의 말입니다. 그런데 여기서는 그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도를 모르는 사람에게 어떻게 낮아지고 복종할 것인가를 말하고 있습니다. 여기서는 안믿는 아내를 말합니다. 남편이 아내말 안들으면 그것 이길 사람없어요. 여기서는 안믿는 아내입니다. 그러더라도 지식을 따라 동거하라.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따라서 동거하라는 말입니다. 네 아내가 되었으니 함께 생명을 유업으로 받을 자로 생각하라. 이런 저런 연약함이 있지 않느냐 그런 것을 네가 감당해야 할 것이 아니냐? 그것이 남편의 순복입니다. 믿은 부부관계를 말하는 것이 에베소서의 이야기입니다. 안믿는 부부의 이야기는 베드로전서입니다. 하나님을 대항하는 세계 가운데서도 어떻게 고난 중에 그리스도의 영광을 증거할 것인지를 설명하고 있는 것입니다.
자 남편이 아내를 그처럼 봉사하지 않으면 기도가 막힌다는 말은 남자는 기도함으로 하나님을 봉사하지요. 디모데서를 보면 남자는 손을 들어 기도함으로, 여자는 아이를 낳아 기르므로 그렇게 함으로 구원을 봉사한다고 디모데전서 2장에서 말합니다. 그러니까 네가 아내를 용납하고 아끼고 생명의 유업을 함께 나눌 자로 귀히 여기지 않으면 하나님 앞에 나올 수 없다는 말입니다. 아무리 남편이 힘이 있어도 아내를 순복해 주어야 됩니다. 그런데 제일로 부부끼리 무례합니다. 여성을 무시하는 것이 아니라 남자를 머리로 세웠기 때문에 사고방식들이 남자와 다릅니다. 여러 약점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런 것을 감래하는 것이 그리스도인 남편이 할 일입니다. 그렇게 할 때 기도가 막히지 않습니다. 하나님 앞에 설 수 있습니다. 아내를 섬기라는 말입니다.

[벧전 3:8] 마지막으로 말하노니, 여기서는 이제 총괄적으로 말하면서 서로 서로 섬기라고 하면 되겠지요. 너희가 다 마음을 같이하여 체휼하며 형제를 사랑하며 불쌍히 여기며 겸손하며, 형제를 사랑하며 불쌍히 여기며 겸손한 데 있어 마음을 같이하라는 말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믿으면 마음이 딱 맡고 할렐루야 마음이 통해야 하는데 마음이 안통하니까 괴롭고 하는데, 성경은 사랑함으로 마음이 통해요. 집에서도 할아버지하고 손주하고 제일로 세대차가 없다고 그랬지요. 제일로 나이가 비슷한 동기간끼리 세대차가 많습니다. 제일로 싸움도 잘합니다. 그러니까 교회에서도 마음이 하나되라는 이야기는 서로 불쌍히 여기고 서로를 사랑하고 서로를 섬기는 일에서 마음을 같이 하라는 말입니다. 이것이 새 백성의 윤리라는 말입니다.
이것과 반대되는 것은 [벧전 3:9] 악을 악으로,욕을 욕으로 갚지 말고 도리어 복을 빌라 이를 위하여 너희가 부르심을 입었으니 이는 복을 유업으로 받게 하려하심이라. 총괄적으로 사랑하라 하면서 사랑하는  정도가 아니라 어떤 경우에도 복을 빌어라. 거기서 모든 분쟁이 그치겠지요. 그리고 다시 복을 빌 이유들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여기서는 복음을 이론적으로 설명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백성의 삶을 위해서 복음을 설명하고 있지요.

자 [벧전 3:10] 그러므로 생명을 사랑하고 좋은 날 보기를 원하는 자는 혀를 금하여 악한 말을 그치며 그 입술로 궤휼을 말하지 말고 [벧전 3:11] 악에서 떠나 선을 행하고 화평을 구하여 이를 좇으라 [벧전 3:12] 주의 눈은 의인을 향하시고 그의 귀는 저의 간구에 기울이시되 주의 낯은 악행하는 자들을 향하시느니라 하였느니라. 복을 유업으로 받는데 어떤 복이냐면 축복이 유업입니다. 무슨 말이냐면 이스라엘 백성은 가나안 땅을 유업으로 받았는데 그것은 부정한 자를 정죄하고 잘못된 자는 모세의 제자들에게 고발하고 그렇게 해야 그는 율법에서 큰 자여요. 한 마디로 저주를 유업으로 받는 것이어요. 묘한 이야기입니다. 분명히 가나안 땅의 복인데 서로를 감시한다면 그것은 저주지요. 대충대충 살아서는 안되어요. 그런데 지금 우리들은 복을 받았는데 그 복에는 저주가 없어요. 가나안 땅의 복을 받았으면 서로 감시하고 감독해 주어야 큰 자가 되며 율법에 이르지 못한 자는 진 밖으로 쫓아내어야 합니다. 그것이 이스라엘 백성의 삶입니다. 그러나 이제는 복을 유업으로 받았기 때문에 항상 사랑하고 용서하고 그 일에 하나가 되고 불쌍히 여기고 왜 이것이 하나님이 그리스도안에서 자기 백성에게 주신 사랑이거든요. 여기에는 나는 너와 다르다는 간격이 없어요.
너희들은 복을 유업으로 받았지 않느냐 하면서 구약성경을 인용하고 있는데 이 구약성경은 다윗이 사울에게 쫓겨서 아기스와 불레셋으로 쫓겨갔을 때의 이야기입니다. 미친채 하며 침을 흘리며 도망쳤을 때 지은 시입니다. 시편 34편입니다. 그러면서 하는 말이 내가 ...죽을 뻔 했구나. 하나님이 그를 경외하는 줄로 진치고 그것으로 복을 주는구나. 너희들은 하나님을 찬송해라. 하면서 다시는 너희들 그런 악독한 말을 하지 말고 화평하라. 다윗이 여기서 지금 시를 노래할 때는 지금 자기를 대적하는 자들을 두고 하는 말이거든요. 신약적인 윤리를 직접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자기를 대적하는 자들을 향해서 너희들이 화평하라. 특별히 나하고. 나는 하나님이 들으시고 보호하셨지만, 나하고 화평하지 않고 거짓말하는 자는 죽을 것이어요. 하나님이 나를 지키셨다고 시편에서 노래하고 있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기름부음을 받은 왕이어요. 그러니까 여기서 그런 말을 구약에서는 다윗이 자기를 두고 화평하라고 했던 말을 신약에서는 우리가 그리스도안에서 다 화평한 백성이 되었지요. 그리스도와 화평했으면 모든 형제와 화평해야 되겠지요. 그런 식으로 인용하고 있다는 말씀입니다. 구약을 보아서는 신약 윤리를 직접 담고 있는 것 같은데 구약을 보면 다윗이 직접 자기를 두고 하는 말입니다. 나에게 거짓말 하면 너희는 죽어. 나하고 화목해야 한다. 생명을 보기를 원하느냐? 누구의 하나님이냐? 내 하나님이 아니냐? 나를 지켰지 않느냐? 내 기도는 들어도 너희는 망할 것이다. 그러니 생명을 사모하는 자들은 다 나와 화목하자, 실은 그런 의도로 화평을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어요.
그런데 그 하나님이 우리와 화평하셨어요. 자기 아들을 세상에 보내심으로. 버림을 받게 하심으로. 그래서 우리를 그의 귀한 백성으로 참여하게 하셨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하나님이 아들을 통해서 화평했는데 만일에 내가 형제를 원망하면 그는 하나님과 싸운 것이어요. 그것이 요한일서에서도 하나님을 사랑하면 오직 형제를 사랑해라는 말이 그런 이야기입니다. 그러니까 모든 일에 서로 서로 용서하고 화평하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제 13절에 보면 형제끼리만 그런 것이 아니라 더 확대시켜서 [벧전 3:13] 또 너희가 열심으로 선을 행하면 누가 너희를 해하리요 [벧전 3:14] 그러나 의를 위하여 고난을 받으면 복 있는 자니 저희의 두려워함을 두려워 말며 소동치 말고, 여기서는 완전히 핍박을 더 강화시켜서 설명하고 있습니다. 너희가 열심으로 선을 행하면, 여기서 선을 행하는 것은 순종하는 의미입니다. 누가 너희를 해하겠느냐? 아무도 해하지 못한다. 의를 위해서 고난을 받으면 너희에게 복이 있다. 그렇게 순종해도 고난을 받아요. 악을 행했기 때문에 고난을 받는 것이 아닙니다. 저희의 두려워하는 것을 두려워 말고 소동치 말고, 이것은 그들은 그들의 높아진 것이 없어지면 두려워하고 소동하지요. 지금 순종하니까 낮아져 있어요. 그런데도 핍박을 받으면 다 빼앗기지요. 그러면 우리들도 두려워하고 소동하기 쉽겠지요. 그 모든 것을 다 빼앗길지라도 두려워하지 말고 소동하지 말아라.

[벧전 3:15] 너희 마음에 그리스도를 주로 삼아, 너희 마음에 그리스도를 주로 삼고 하나님을 왕으로 삼는 것입니다. 거룩하게 하고 너희 속에 있는 소망에 관한 이유를 묻는 자에게는 대답할 것을 항상 예비하되 온유와 두려움으로 하고. 그 모든 것을 다 빼앗겼다고 두려워하지 말고 예수님을 왕, 절대적인 주로 삼고 그리고 너는 왜 그토록 모든 것을 다 빼앗기고도 주를 사랑하느냐? 하고 묻는 자에게 대답할 것을 예비하되 온유함으로 말해라. 나도 성질이 있어. 하고 대항하지 말라는 말이다. 그러니까 사람들은 낮아지면 두려워해요. 소동해요. 그러나 여러분들은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핍박을 받을 때 놀라지 말라. 소동하지 말라, 두려워하지 말라고 합니다. 그리고 너는 항상 예수께서 주 왕이시라는 사실을 항상 믿어라 그렇게 해서 너는 다른 사람들처럼 살지 말고 주되신 그리스도의 백성으로, 하나님의 백성으로 너 자신을 거룩한 백성으로 살아라.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하라 그 백성으로 너희를 항상 염두해 두라.
그리고 또 뭐라고 하냐면 너희 속에 있는 소망에 관한 이유를 묻는 자에게는 대답할 것을 항상 예비하되 온유와 두려움으로 하라. 왜냐하면 하나님을 따라 순종하는 일이 마땅히 자기가 해야할 일이어요. 왜 그처럼 모든 것을 다 빼앗겨도 순종하는가? 나타날 주님의 영광 때문에 그렇다. 그가 낮아지셔서 나를 사랑했으니 나도 그 분의 낮아짐으로 섬기는 것만이 그 분의 기이한 빛을 증거하는 것이다. 주님이 오시면 나를 높일 것이다 했을 때 너희들 벌받아 그렇게 말하지 말고 온유함으로 대하라는 말입니다. 이 두려움은 온유와 같은 말이 되겠지요. 달달 떠는 두려움 보다는 온유한 의미로의 두려움입니다. 교만과 대비되는 말입니다. 그런데 우리들은 내가 믿으니까 참지 하면서 속은 다른 마음을 가지고 이런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속으로 공갈한 적이 없습니다. 여기서 두려움은 온유와 같은 의미입니다.

[벧전 3:16] 선한 양심을 가지라 이는 그리스도 안에 있는 너희의 선행을 욕하는 자들로 그 비방하는 일에 부끄러움을 당하게 하려 함이라 [벧전 3:17] 선을 행함으로 고난 받는 것이 하나님의 뜻일찐대 악을 행함으로 고난 받는 것보다 나으니라 [벧전 3:18] 그리스도께서도 한번 죄를 위하여 죽으사 의인으로서 불의한 자를 대신하셨으니 이는 우리를 하나님 앞으로 인도하려 하심이라.

육체로는 죽임을 당하시고 영으로는 살리심을 받으셨으니 [벧전 3:19] 저가 또한 영으로 옥에 있는 영들에게 전파하시니라 [벧전 3:20] 그들은 전에 노아의 날 방주 예비할 동안 하나님이 오래 참고 기다리실 때에 순종치 아니하던 자들이라 방주에서 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은 자가 몇 명 뿐이니 겨우 여덟명이라 [벧전 3:21] 물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이제 너희를 구원하는 표니 곧 세례라 육체의 더러운 것을 제하여 버림이 아니요 오직 선한 양심이 하나님을 향하여 찾아가는 것이라 [벧전 3:22] 저는 하늘에 오르사 하나님 우편에 계시니 천사들과 권세들과 능력들이 저에게 순복하느니라 [벧전 4:1] 그리스도께서 이미 육체의 고난을 받으셨으니 너희도 같은 마음으로 갑옷을 삼으라 이는 육체의 고난을 받은 자가 죄를 그쳤음이니 [벧전 4:2] 그 후로는 다시 사람의 정욕을 좇지 않고 오직 하나님의 뜻을 좇아 육체의 남은 때를 살게 하려 함이라.
물론 여기서 16절에 선한 양심을 가지라 했을 때 포괄적인 의미로 생각할 수 있겠지만 고난 문맥이 주입니다. 선한 양심을 가지라 이는 그리스도 안에 있는 너희의 선행을 욕하는 자들로 그 비방하는 일에 부끄러움을 당하게 하려 함이라, 언제 부끄러움을 당하게 합니까? 예수님이 오셨을 때 그렇게 되겠지요. 그냥 우리가 오래참고 선행을 하니까 그것에 감동되어서 부끄러움을 당한다는 말이 아니라 너희들은 낮아져도 그리스도 오시면 영광과 칭찬을 들을 것이 아니냐? 종말의 심판의 문맥에서 하고 있는 이야기입니다. 여기서 높인다 하는 이야기 그들로 부끄러움을 당하게 한다는 이런 이야기들은 나타날 주님의 영광, 너희들이 낮아지면 고난을 받아도 순복하면 주님이 칭찬과 영광이 있는 것이다. 이것을 대조하고 있는 본문입니다. 그러니까 모든 것을 판단하시는 하나님께 맡기는 것이지 당장 지금 높아지는 것, 실용적인 효과를 얻기 위해서 선행을 하는 것은 선한 양심을 가지는 것이 아니어요. 선한 양심은 그리스도의 낮아짐에 참여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해야 주님오실 때 우리가 영광을 받을 것이고 그리고 거짓한 자들은 그들의 행위에 대해서 판단받게 될 것이어요. 선을 행함으로 고난을 받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어요. 믿는 신자에게 주신 뜻이어요. 그리스도께서 고난을 받으셨기 때문에 악을 행함으로 고난을 받는 것하고는 비교가 안될 것입니다.
그리고 누구를 예로 듭니까? 그리스도께서도 한번 죄를 위하여 죽으사 의인으로서 불의한 자를 대신하셨으니 이는 우리를 하나님 앞으로 인도하려 하심이라. 그리스도께서는 단번에 죄를 위해서 죽으셨습니다. 그렇게 해서 의인으로서 우리 불의한 자를 대신했습니다. 우리를 하나님 앞으로 인도하시려고. 그러니까 예수님은 참은 정도가 아니라 우리 불의한 자를 대신해서 하나님 앞으로 인도하는 영광까지 주었지요.
더 보십시다. 그런데 예수님은 이처럼 죽으셨어요. 육체로는 죽임을 당하시고 영으로는 살리심을 받으셨으니, 이것을 우리는 어떻게 해석합니까? 육체로는 죽었는데, 영으로는 살았다고요. 성경은 육체와 영혼을 그런 이분법적인 방식으로 설명을 하지 않습니다. 특별히 로마서에서 설명하고 있는데, 육신의 혈통으로는 다윗으로 다윗의 혈통은 육신으로, 성결의 영으로는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셔서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되셨지요. 그러니까 여기서 육체로는 말은 죽임을 당하신 것이 육체의 문맥이고 그리고 살리심을 받은 것이 영이 영역이다. 그것이 성경의 기본 구도입니다. 죽음아래 있는가 죄아래 있는가 그것은 육의 영역 육체의 영역이고 그리고 부활에 속한 것 하늘에 속한 것은 영의 영역이어요. 그는 육체로 오셔서 죽음을 당하시고 성결의 영으로는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해서 보좌 우편에 취임하셨어요. 그런 의미로 그는 하나님의 아들이셔요. 이 주님이 우리를 대신해서 고난을 받으셨고 우리를 하나님 앞에 인도하시려고 그렇게 하신 것이 아니냐? 그러니까 너희들이 그를 따라 살라야 할 것이 아니냐? 그런데 그 분은 어떻게 낮아지셨는가? 죽임을 당하셨어요. 그래도 영으로는 살리심을 받으셨어요.
육체로는 죽임을 당하시고 영으로는 살리심을 받으셨으니 [벧전 3:19] 저가 또한 영으로 옥에 있는 영들에게 전파하시니라 [벧전 3:20] 그들은 전에 노아의 날 방주 예비할 동안 하나님이 오래 참고 기다리실 때에 순종치 아니하던 자들이라 방주에서 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은 자가 몇 명 뿐이니 겨우 여덟명이라. 옥에 있는 영들에게 전파했는데 그들이 누구인가? 노아시대에 노아를 조롱하고 순종하지 아니한 자들이다. 하나님이 오래참고 기다리셨다. 그들이 옥에 있는 영들, 죽은 자들입니다. 그렇게 말하고 있어요. 그 옥에 있는 영들에게 전파하셨느니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더 보십시다. [벧전 3:21] 물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이제 너희를 구원하는 표니 곧 세례라 육체의 더러운 것을 제하여 버림이 아니요 오직 선한 양심이 하나님을 향하여 찾아가는 것이라. 이전의 물의 씻음은 육체를 정결하게 하는 것과 같지요. 히브리서 9장에 있습니다. 모세제도는 육체의 예법으로 육체를 정결케 하는 것이다. 아들의 피는 양심으로서 하나님을 섬긴다고 했습니다. 그러니까 예수의 세례는 어떤 세레입니까? 그것은 육체의 더러움을 제거해 버리는 세례가 아니라 오직 선한 양심이 하나님을 향하여 찾아가도록 하는 것입니다. 구약때는 육체의 예법입니다. 죄를 완전히 제거한 것이 아니어요. 반복적인 피흘림이어요. 아들의 죽으심을 따른 세례는 무엇입니까? 아들의 부활로 말미암은 구원하는 표다고 했지요. 어떤 부활입니까? 노아홍수 때는 물에 씻음으로 죄있는 세상은 죽었고 노아는 살았어요. 노아는 죄가 제거된 의의 세상의 머리여요. 죄가 제거된 노아를 머리로한 백성은 새로운 성소의 장이어요. 그러면 이 물이 무엇이냐? 실은 예수의 부활로 말미암아 너희를 구원하신 표다. 이전의 모든 믿음의 역사가 여기에서 완성되었다고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어떤 세례냐? 모세제도처럼 육체를 정결케 하는 예법이 아니라 너희 선한 양심을 정결케 해서 하나님을 향해 찾아가도록 해서 그렇게 씻는 것이다.
왜 그렇게 하느냐? 예수 그는 누구십니까?  [벧전 3:22] 저는 하늘에 오르사 하나님 우편에 계시니 천사들과 권세들과 능력들이 저에게 순복하느니라. 저는 하늘에 계신 왕이시지요. 그 다음에 앞으로 돌아갑시다. [벧전 3:19] 저가 또한 영으로 옥에 있는 영들에게 전파하시니라 [벧전 3:20] 그들은 전에 노아의 날 방주 예비할 동안, 이 말을 해석하는 것은 이 문맥에서는 4장 6절에 보면 [벧전 4:6] 이를 위하여 죽은 자들에게도 복음이 전파되었으니 이는 육체로는 사람처럼 심판을 받으나 영으로는 하나님처럼 살게 하려 함이니라. 여기에 비슷한 말이 있고, 그리고 다른 구절은 에베소서 4장 이야기입니다. 모든 하늘에 있는 높으신 그자가 땅 아래 곳으로 내리신 분이시니 땅 아래 내리신 그 분이 모든 하늘 위에 오르신 분이 아니냐? 이는 만물을 충만하게 하기 위함이니라. 부활하신 예수께서 그에 속한 모든 신비한 능력들을 복주셨다고 하는 이야기가 에베소서 4장의 말씀입니다. 낮아지신 그 분이 모든 하늘 위에 높으신 자지요. 그 분은 땅 아래 곳으로 낮아지신 분이 아니냐? 땅 아래 곳으로 낮아지신 그 분이 모든 하늘 위에 높으신 자니 그 분이 모든 만물을 충만케 하리라 했을 때, 땅 아래 곳은 이전의 보수파는 그냥 무덤이어요. 왜냐하면 지옥에 갔다 하면 예수님처럼 거룩한 분이 안 맞거든요. 그래서 땅 곧 아래 곳은 하늘은 위에 곳, 구약에서는 땅 아래 곳은 죽음의 영역이거든요. 음부를 말하거든요. 그래야 예수께서 산 자와 죽은 자의 주가 되시고 그가 주시는 권능은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시는 주님을 봉사하는 권능이어요. 그러니까 여기서도 그런 것과 비슷합니다.
또 로마서 4장에도 그런 말이 있습니다. 예수께서는 산 자와 죽은 자의 주가 되십니다. 그러기 위해서 예수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셨어요. 그러니까 우리는 살아도 주의 것이고 죽어도 주의 것이어요. 죽은 자의 소리가 없어진 것이 아니어요. 왜내하면 예수께서 산 자의 죽은 자의 주가 되시려고 죽으시고 부활하셨으니까. 그가 다스리는 모든 통치의 영역을 말함으로 에베소서에서는 만물을 충만케 한다고 말합니다. 에베소서는 그리스도안에서 만물을 재통일한 것인데, 그리스도께서 머리가 되셨어요. 그리스도께서 땅 아래 곳으로 오셔서 모든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해서 모든 하늘 위에 오르셨기 때문에 만물을 충만케 합니다. 그러니까 그 분은 모든 산 자와 죽은 자의 영역을 총괄하는 분으로 높으신 분을 이야기해요.
실은 여기서도 그런 것입니다. 여기서는 구원론을 말하고 있지 않습니다. 죽은 자가 복음전파를 받아서 새로운 구원을 받는다는 새로운 구원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베드로의 이야기는 어떻게 낮은 자가 높아지는지 어떻게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낮아져도 영광을 받는지 어떻게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함으로 나타날 영광에 참여하는지 낮아짐과 높아짐을 대비하고 있는 것입니다. 어떻게 구원을 받는가 하는 것을 말하지 않습니다. 문맥을 보라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옛날에 너희들만 고난을 받은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도 고난을 받았지 않느냐? 모든 의인들이 다 고난을 받았다. 제일로 고난을 고약하게 받은 사람이 누구냐? 노아이고 또 조금 적게 받은 사람이 롯이어요. 그래서 마지막 심판의 모델을 노아 때와 롯의 때로 말하는 것입니다. 롯도 의인 롯이지요. 소돔성에서 고난을 받았어요. 노아는 그 당시 옛 세계에서 고난을 받았어요. 다 조롱했어요. 그리고 그들은 부요하게 먹고 마셨어요. 하나님이 오래참으셨지만 다 물로 쓸어버렸어요. 그리고 그때 멸시와 천대를 받던 노아는 물로 심판받고 장차 나타날 세계를 상속받은 의의 조상이 되었어요. 이 일이 예수의 부활에서 완성되었습니다. 이 물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로 말미암아 우리를 구원할 표인데 세례다. 어떤 세례입니까? 육체를 정결케 할 그런 세례가 아니라 우리 양심을 정결케 해서 하나님을 찾아가게 하는 그런 분이다. 왜 그렇습니까? 그 분이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분으로 하늘 보좌에 계시기 때문입니다. 누가? 낮아진 그 분이. 누구도 낮아졌습니까? 노아도 낮아졌어요. 그리스도도 낮아졌어요. 어떻게 낮아졌습니까? 앞을 보면, 우리를 하나님 앞으로 인도하려 하심이라. 하나님 앞으로 인도하려 하는 것이 우리 양심이 하나님을 찾아 나서는 것이어요. 어떻게?  육체로는 죽임을 당하시고 영으로는 살림을 받으셔서 그 일을 하셨어요. 육체는 옛 영역이고 영은 부활의 영역입니다. 그렇게 해서 우리를 하나님 앞으로 인도해요. 우리의 육체의 예법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 마음을 깨끗케 해서 그랬다. 누가? 저가 영으로 옥에 있는 영들에게 전파하시니라. 이 말을 가지고 예수님이 무덤에 계신 3일동안 어디 가셨느냐? 저 지옥에 갔습니다. 이 지옥도 등급이 있는데 조상들의 지옥, 연옥에 가셨다. 여기 예수님이 가서 복음을 전했다고 말합니다. 그 말이 아니라 예수님이 멸망받은 자들에게 증거했지요. 잘못하면 재구원이 되겠지요.
여기서는 그런 것이 아니라 그는 육체로는 죽임을 당하였지만 영으로는 살리심을 받았어요. 그래서 우리를 하나님 앞에 인도하십니다. 육체의 예법을 정결케 한 것이 아니라 양심을 정결하게 해서 하나님을 찾도록 한 것입니다. 그런데 이 분이 이런 고난을 받았는데, 이분의 고난을 앞에서는 뭐라 했습니까? 모든 믿음의 종국이다. 모든 믿음의 종국을 받은 것이다. 그런데 그전의 모든 믿음의 조상은 누구냐? 옛 세상에 하나님의 심판으로 정결케 되리라 했을 때 물이 심판은 노아여요. 그때 노아는 구원을 받았고 나머지는 망했는데 그때 노아는 조롱받았어도 그 조롱의 영광이 나타났는가 했을 때 안나타났어요. 나타난 것은 홍수로 쓸림받은 세계 뿐입니다. 더 이상은 아니어요. 만일에 홍수로서 구원받은 것만 구원이면 그것은 육체의 예법밖에 안되어요. 모세제도가 물로 씻음이기 때문이어요.
그러면 노아가 구원받은 구원이 어떤 구원이 되어야 되고 노아가 조롱받은 조롱이 어떤 심판이 되어야 하느냐? 예수의 구원에서 증거되지 않으면 그들의 소망이나 조롱은 소위 믿음의 종국 결론에 도달하지 않은 것이어여. 그래서 예수님은 부활하셨는데, 그 부활의 영광이 옥에 있는 영들에게 증거되었는데, 그들은 노아를 비웃었던 자들이다. 노아는 물로 말미암아 구원을 주었지만 이 아들을 통해서는 양심을 깨끗케 해서 하나님 앞으로 인도한다. 그는 하늘 보좌에 오르신 존귀한 분이 아니냐? 누가 낮아지신 분이. 그러니까 모든 의인들의 보상이 어디에서 주어졌어요. 부활하신 예수안에서 주어졌다. 모든 의인들의 조롱이 어디에 주어졌어요. 아들의 부활에서 옥에 있는 영들에게 증거했느니라. 여기서 나타나고 있지요. 그러니까 예수께서 죽은 뒤로 지옥에 내려갔는가 하는 말이 아니라 성경에서는 산 자와 죽은 자의 모든 영역을 통치하는 주여요. 이제는 모든 어두움의 세계도 그 빛 가운데서 진동해야 되어요. 그런 의미로 그가 살리심을 입었고 옥에 있는 영들에게 증거했는데 그들은 부끄럽게 되었다. 어떻게? 그들은 노아를 비웃었는데 예수의 부활에서 노아의 상급은 나타났고 그들은 부끄럽게 되었다. 그리고 노아의 상급 또한 물로 말미암는 구원이지만 우리의 구원은 양심을 깨끗케 해서 하나님 앞에 찾아가는 구원이 아니냐? 이런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악인들에 대한 심판과 의인에 대한 상급이 아들에게서 이루어졌다. 우리는 그의 죽으심과 부활안에서 씻김을 받아서 하나님 앞에 있지 않느냐? 이 영광을 우리가 지금 받아 놓고도 고난을 두려워 하느냐? 노아는 그 영광의 상급을 보지 못하고도 그는 그렇게 했고 아들의 부활에서 상급과 심판이 드러났는데 우리는 그 종국의 상급을 맛보고도 두려워해서 되겠느냐? 이런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구원론 이야기가 아닙니다.

자 더 보십시다. [벧전 4:1] 그리스도께서 이미 육체의 고난을 받으셨으니 너희도 같은 마음으로 갑옷을 삼으라, 예수께서 한번 고난을 받으셨고 이미 고난을 받으셨어요. 그러니까 교회도 같은 마음으로 갑옷을 삼으라는 말은 무장하라는 말입니다. 이는 육체의 고난을 받은 자가 죄를 그쳤음이니, 여기서 육체의 고난을 받은 자는 많이 고난을 받은 사람들이 다시는 죄를 안짓더라는 말이 아니라, 그리스도입니다. [벧전 4:2] 그 후로는 다시 사람의 정욕을 좇지 않고 오직 하나님의 뜻을 좇아 육체의 남은 때를 살게 하려 함이라. 여기서는 이미와 그 후가 대비되지요. 그리스도의 고난과 부활을 두고 언급하는 이야기이기 때문에 여기서 고난받는 자가 죄를 그쳤더라는 말은 매맞은 사람이 죄를 안짓더라는 말이 아니라 고난받은 그가 이미 그리스도께서 고난을 받으셨어요. 그리고 고난받는 그가 죄의 세력을 끝내셨어요. 왜냐하면 그가 고난받은 후로 사람들이 다시는 죄의 종으로 살지 않고 의의 종으로 살게 하려고 한 것입니다.

[벧전 4:2] 그 후로는 다시 사람의 정욕을 좇지 않고 오직 하나님의 뜻을 좇아 육체 의 남은 때를 살게 하려 함이라 [벧전 4:3] 너희가 음란과 정욕과 술취함과 방탕과 연락과 무법한 우상 숭배를 하여 이방인의 뜻을 좇아 행한 것이 지나간 때가 족하도다. 여기서 문맥은 이제 이방인이구만요. 유대인보다 더 구체적인 방식으로 더 부정하면 이방인겠지요. 유대인은 율법이 있지만 이방인은 그것도 없거든요. 그러니까 여기서도 이방인의 죄를 말하는데 그 죄도 하나님 없는 죄를 강조해요. 우상숭배 우상숭배하면 그 다음에는 무엇이겠어요. 말하자면 지금 그리스도의 고난과 대비되는 것은 높아지고 시기하고 취하는 것이지요. 그러니까 이방인의 율법을 말할 때까지라도 하나님을 섬김으로 겸손하는 길, 하나님 밖의 우상을 섬김으로 스스로 높아지고 세상 것을 취함으로 만족하고 높아졌는지 그쪽에서 지금 설명하고 있는 것이 이방인의 윤리이지요. 문맥을 보아야 합니다. 이방인들이 이런 짓만 합니까? 음란과 술취함과 방탕과 연락은 우상숭배와 관련된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백성이 낮아지고 겸손하고 모든 것을 다 빼앗겨도 순종하고 그리고 온유하고 두렵고 하는 것인데, 이들은 우상섬기니까 하나님 없이 만족하고 취하고 그렇게 살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그렇게 살지 않도록 그리스도께서 고난을 받았다. 그렇게 살지 말라. 그리스도께서 고난을 받은 것은 다시는 그처럼 살지 않도록 하게 하시려고 그런 것이 아니냐? 왜? 양심을 깨끗케 함으로 하나님을 찾아가도록 한 것입니다.

[벧전 4:4] 이러므로 너희가 저희와 함께 그런 극한 방탕에 달음질하지 아니하는 것을 저희가 이상히 여겨 비방하나 [벧전 4:5] 저희가 산 자와 죽은 자 심판하기를 예비하신 자에게 직고하리라. 그들이 아무리 조롱해도 심판하시는 이는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시는 이는 누구십니까? 영으로 살리심을 입고 옥에 있는 영들에게 증거하시고 모든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시는 그분이십니다.

[벧전 4:6] 이를 위하여 죽은 자들에게도 복음이 전파되었으니 이는 육체로는 사람처럼 심판을 받으나 영으로는 하나님처럼 살게 하려 함이니라. 여기보면 꼭 재구원같지요. 그리고 아까 옥에 있는 영들에게 증거했다 했을 때 예수님이 복음을 전파했지 그렇게 말하는 것 같지요. 그러나 여기서는 그런 구원론을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낮아져서 죽은 자들도 죽었지만 그들도 결국을 본 것이 아니냐? 지금 그런 이야기가 1장 서론에서 시작되었지요. 그래서 죽은 자들에게도 복음이 전파되었지요. 왜냐하면 예수님은 산 자와 죽은 자의 주시지요. 그렇게 했을 때는 신약 시대의 죽은 자를 말할 수 있어요. 그것은 너무 당연하겠지요. 그러나 이 죽은 자들은 이 앞의 문맥을 보면 부활시대까지 말하고 있지요. 옛 시대의 심판까지. 그들에게도 그래서 복음이 증거된 것이 아니냐? 이 복음은 이제 나타난 복음을 직접 설명한 것은 아니어요. 예수의 부활에서 그들이 믿었던 소망이 드러났지요. 그런 의미로 죽은 자들에게도 복음이 드러나서 그들이 육체로는 사람처럼 죽었지만 그들이 영의 영역에서는 하나님처럼 살게 하는 것이 아니냐? 그러니까 모든 믿고 죽은 자들이 보상이 있지요. 왜냐하면 예수님은 산 자의 죽은 자의 심판의 주시기 때문이다. 더구나 그리스도안에서 지금 살아있는 우리들은 말로 다할 수 없지요. 따라서 고난을 받고 겸손하게 살라는 말입니다.

[벧전 4:7] 만물의 마지막이 가까왔으니 그러므로 너희는 정신을 차리고 근신하여 기도하라. 만물의 마지막을 대비하라는 말입니다. 특별히 무엇을 함으로 예비하라 합니까? 열심으로 사랑함으로. [벧전 4:8] 무엇보다도 열심으로 서로 사랑할찌니 사랑은 허다한 죄를 덮느니라. [벧전 4:9] 서로 대접하기를 원망 없이하고 [벧전 4:10] 각각 은사를 받은 대로 하나님의 각양 은혜를 맡은 선한 청지기 같이 서로 봉사하라 [벧전 4:11] 만일 누가 말하려면 하나님의 말씀을 하는 것같이 하고 누가 봉사하려면 하나님의 공급하시는 힘으로 하는 것같이 하라 이는 범사에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시게 하려 함이니 그에게 영광과 권능이 세세에 무궁토록 있느니라 아멘

그리고 다시 결론적인 권면을 하고 있습니다. [벧전 4:12]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를 시련하려고 오는 불시험을 이상한 일 당하는 것같이 이상히 여기지 말고 [벧전 4:13] 오직 너희가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예하는 것으로 즐거워하라 이는 그의 영광을 나타내실 때에 너희로 즐거워하고 기뻐하게 하려 함이라. 왜냐하면 고난을 받으신 그리스도의 영이 너희 머리위에 있고 서두에서는 너희들이 그 분을 말할 수없ㄴㄴ 즐거움으로 즐거워했지 않느냐고 했지요. 그 영광의 영이 너희와 함께했기 때문에 즐거워하고 기뻐하라고 결론적으로 권면하고 있는 것입니다.

[벧전 4:14] 너희가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욕을 받으면 복 있는 자로다 영광의 영 곧 하나님의 영이 너희 위에 계심이라 [벧전 4:15] 너희 중에 누구든지 살인이나 도적질이나 악행이나 남의 일을 간섭하는 자로 고난을 받지 말려니와, 여기서 살인 도덕질 악행 하니까 좀 고약합니다만 이런 것들을 남의 것을 탈취하고 높아지려고 하니까 나타난 것들입니다.

[벧전 4:16] 만일 그리스도인으로 고난을 받은즉 부끄러워 말고 도리어 그 이름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 [벧전 4:17] 하나님 집에서 심판을 시작할 때가 되었나니 만일 우리에게 먼저하면 하나님의 복음을 순종치 아니하는 자들의 그 마지막이 어떠하며 [벧전 4:18] 또 의인이 겨우 구원을 얻으면 경건치 아니한 자와 죄인이 어디 서리요 [벧전 4:19] 그러므로 하나님의 뜻대로 고난을 받는 자들은 또한 선을 행하는 가운데 그 영혼을 미쁘신 조물주께 부탁할찌어다.


그리고 나서 교회생활에 대해서 권면합니다. 장로들은 교회의 치리자들입니다. [벧전 5:1] 너희 중 장로들에게 권하노니 나는 함께 장로된 자요 그리스도의 고난의 증인이요 나타날 영광에 참예할 자로라. 그의 고난과 영광에 참여할 자로 말하고 있스니다. 그리고 [벧전 5:2] 너희 중에 있는 하나님의 양 무리를 치되 부득이함으로 하지 말고 오직 하나님의 뜻을 좇아 자원함으로 하며 더러운 이를 위하여 하지 말고 오직 즐거운 뜻으로 하며 [벧전 5:3] 맡기운 자들에게 주장하는 자세를 하지 말고 오직 양 무리의 본이 되라 [벧전 5:4] 그리하면 목자장이 나타나실 때에 시들지 아니하는 영광의 면류관을 얻으리라. 본래 예수님께서 베드로를 목자장으로 불렀지요. 내 양을 치라. 네가 젊어서는 네 마음대로 다녔을 지라도 나중에는 고난을 받을 것이다. 너는 나를 따르라. 여기서는 그런 의미로 교회의 지도자들을 권면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그 고난의 길을 걸으심으로 베드로도 그 길을 걷게 하셨어요. 예수님이 고난의 잔을 받고 죽으심으로 베드로는 따라 갈 수 없어요. 후에는 따라 갈 수가 있어요. 예수께서 고난을 받고 승리하셨기 때문에 이제 죄에서 자유하게 하셨기 때문에 이제 베드로도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따라 갈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해서 이 양들을 하나님이 맡기셨어요? 하나님이 아들을 보내셨어요. 아들이 의로운 자로 불의한 자를 위해서 죽으심으로 하나님께로 보내셨지요. 이것이 목자장이어요. 우리가 그 목자에게로 인도받았어요. 그러니 마땅히 고난을 받고 고난에 참여함으로 그 영광에 참여한 것이어요. 하나님이 맡기신 양들을 그런 자세로 돌보아야 합니다. 옛날에는 양들을 주관하고 가르치고 해야 됩니다. 그리고 봉사하면 마땅히 몫이 있어요. 모세때는 레위지파는 십일조 따로 먹지요. 선지자에게 물으려면 복체를 가지고 와야 되지요. 그런데 여기의 목자는 그런 것이 아니어요. 그러니까 자원해서 해야 되어요. 이를 탐해서는 안되어요. 그리고 주장하는 자세로 해서는 안되어요. 세상 방식과는 잔혀 다르니까 사람이 감당못해요. 그리스도안에서 새사람된 자들만이 감당하지요. 모세제도 아래 있는 사람들은 감당 못합니다. 이렇게 백성들이 나를 무시하고 그러면 나 그만 두겠습니다. 예레미야도 자기의 생일을 저주했지요. 내가 무엇 때문에 이런 고난을 받는가 모르겠다고 말한 것입니다. 그러나 바울같으면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내 육체에 채우노라고 고백합니다. 내가 받은 직무만 다 수행하면 그것은 마땅히 할 일이지요. 내 모든 권리를 다 포기하고 아비가 자식을 위해 수고하는 것처럼 해야 합니다. 거듭거듭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권면해야 합니다. 여기서도 교회를 인도하시는 일에 목자장되시는 그리스도와 대비해서 장로들을 권면하고 그 다음에 낮아져서 봉사하면 면류관을 줍니다.

그 다음에 젊은 사람들도 장로가 겸손하니까 교만하면 안되고 장로들에게 순복해야 합니다. 서로 서로 순복해야 합니다. 그러면 때가 되면 하나님께서 높이실 것입니다. [벧전 5:5] 젊은 자들아 이와 같이 장로들에게 순복하고 다 서로 겸손으로 허리를 동이라 하나님이 교만한 자를 대적하시되 겸손한 자들에게는 은혜를 주시느니라 [벧전 5:6]  그러므로 하나님의 능하신 손 아래서 겸손하라 때가 되면 너희를 높이시리라. 이때는 종말의 때입니다. 오실 때입니다. 그때 영광과 칭찬과 상급이 있을 것입니다. 그러니까 장로들 밑에서 비굴하지 않고 서로를 섬기는 것이 그리스도안에서 높아지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장로들도 겸손하고 교인들도 서로 섬기라는 말입니다.

[벧전 5:7] 너희 염려를 다 주께 맡겨 버리라 이는 저가 너희를 권고하심이니라 [벧전 5:8] 근신하라 깨어라 너희 대적 마귀가 우는 사자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나니 [벧전 5:9] 너희는 믿음을 굳게 하여 저를 대적하라 이는 세상에 있는 너희 형제들도 동일한 고난을 당하는 줄을 앎이니라. 믿음을 빼앗으려고 하는데 고난을 통해서 믿음을 빼앗으려고 합니다. 그러니까 이 고난의 길을 걷는 것이 축복이 아니고 기쁨이 아니어요. 그리스도의 고난을 받고 그리스도의 기쁨으로 봉사해야 기쁨이 있는데 모든 부요한 것을 잃어버리니까 신경질이 나는 것입니다. 밥먹고 살아야 되지. 그러나 모든 믿는 자들을 다 고난을 받았지 않느냐?

[벧전 5:10] 모든 은혜의 하나님 곧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를 부르사 자기의 영원한 영광에 들어가게 하신 이가 잠간 고난을 받은 너희를 친히 온전케 하시며 굳게 하시며 강하게 하시며 터를 견고케 하시리라. 하나님의 능력으로 보호하심을 입었다고 1장에서는 말했지요. 누구? 모든 은혜의 하나님인데 그리스도안에서 우리를 부르신 하나님, 그리고 자기 영광에 들어가신 하나님, 로마서에서는 아들을 주신 하나님이 모든 것을 은사로 주시지 않겠느냐고 했지요. 그리스도안에서 우리를 자기 영광에 들어하게 했는데 창세 전에 그리스도를 예비하셨지요. 창세 전의 그리스도와 하나님과의 그런 영광이어요. 그 하나님이 자기 자신을 우리의 교제의 기쁨으로 주셨기 때문에 모든 은혜의 하나님이고 이분이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심으로 이 은혜를 주셨기 때문에 그는 권능있는 하나님이셔요. 예수님은 모든 하늘 위에 오르신 자입니다. 그가 우리를 지키시고 견고하게 하실 것이다. 염려하지말고 고난을 이려내라. 놀라지 말라고 말합니다. 이것은 모두 소망의 복음인데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함으로 나타날 영광을 소망하는 복음입니다. 베드로전서 이야기입니다.

항상 두 시대를 대비해야 되고 문맥을 보아야 합니다. 그리스도는 낮아지셨어도 모든 높아지신 분입니다. 이전의 모든 사람들도 그리스도의 높아짐안에서 그 증거가 드러나요. 노아시대에 조롱했던 자들도 입을 다물어야 합니다. 노아같은 사람은 죽었지만 하나님처럼 살게 하려고 그들에게도 바로 선지자들에게 계신 그리스도의 영이 증거했던 것입니다. 그들은 그때는 아직 받지 못했지만 부활하신 그리스도께서 증거함으로 그 영광이 드러난 것입니다. 그러니까 고난을 받으라는 이야기입니다. 구원론 이야기가 아닙니다.
처음부터 끝까지가 고난과 영광입니다. 그리스도인의 교회 봉사도 전부 고난받는 목자장을 따라서 고난을 받으면 예수를 살리신 그 하나님이 모든 것을 공급하시고 보호하시고 지키실 것입니다. 어떻게 출애굽기 언어들이 중요한지를 보시기 바랍니다.

[벧전 5:11] 권력이 세세무궁토록 그에게 있을찌어다 아멘 [벧전 5:12] 내가 신실한 형제로 아는 실루아노로 말미암아 너희에게 간단히 써서 권하고 이것이 하나님의 참된 은혜임을 증거하노니 너희는 이 은혜에 굳게 서라 [벧전 5:13] 함께 택하심을 받은 바벨론에 있는 교회가 너희에게 문안하고 내아들 마가도 그리하느니라 [벧전 5:14] 너희는 사랑의 입맞춤으로 피차 문안하라 그리스도 안에 있는 너희 모든 이에게 평강이 있을찌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