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구약 성경강해***/- 느헤미야 강해

[스크랩] 느헤미야 1-2장의 하나님 나라- 송영목목사

에반젤(복음) 2019. 11. 27. 19:38



     느헤미야 1-2장의 하나님 나라- 송영목목사

구약에 타난 하나님 나라: 느헤미야 1-2장을 중심으로

(1) 남 유다는 바벨론 제국의 느부갓네살 왕에 의해 주전 586년에 멸망당했다. 이 멸망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는 온 우주가 망하는 것과 같았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보좌가 있던 예루살렘 성전과 토라는 영존하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예레미야를 통해서 예언하신 대로 바벨론 포로 70년 후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다시 돌아오도록 하셨다. 이스라엘이 예루살렘으로 귀환한 후, 무너진 성전은 스룹바벨과 여호수아에 의해 재건되었고, 율법의 회복은 제사장겸 학사 에스라를 통해서 이룩되었다 (느 8:9). 예루살렘 성벽의 재건은 느헤미야의 몫이었다. 이 일은 주전 450년경의 일이다. 지금부터 약 2,400년 전의 일인데, 이 시기는 구약 성경의 제일 마지막 연대이다.

(2) 느 1:2절에 보니 느헤미야는 형제 하나니로부터 예루살렘의 비참한 상황을 보고 받았다. 느헤미야는 느 1:7절에서 남 유다가 패망한 이유는 하나님 앞에서 죄를 지었기 때문이라고 밝힌다: “주를 향하여 심히 악을 행하여”. 정확한 문제의 원인 진단과 그것에 대한 회개가 있어야만 참된 회복과 부흥이 있다. 그래서 느헤미야는 느 1:6, 11절에서 “여호와여 귀를 기울이사 종의 기도를 들으시옵소서”라고 반복해서 간구한다. 여기서 우리는 무너진 예루살렘의 재건을 위해 안타깝게 부르짖는 중보자로서의 느헤미야 선지자를 본다. 부흥과 회복은 안타깝게 부르짖고 하나님의 긍휼을 바라보는 데서 시작한다. 느헤미야가 애타게 기도하되 느헤미야는 1:5절에 보니 그가 부르짖는 하나님은 바로 ‘언약에 신실하신 하나님’이셨다. 이스라엘의 조상들 특히 다윗과 솔로몬과 언약을 맺으사 영원히 하나님 자신의 이름을 예루살렘에 두시겠다고 약속하신 하나님의 신실함에 호소하고 있다. 기도와 더불어 느헤미야는 느 2:2절에 보니 근심했다고 한다. 하나님의 영광과 그분의 백성을 위한 근심이었다. 하나님의 나라와 뜻을 이루기 위한 근심이요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근심이었다. 개인의 호의호식을 위한 근심, 일확천금을 노리는 로또 당첨이나 자녀의 조기 유학을 위한 근심은 아니었다.

(3) 느헤미야가 활동했을 때는 바벨론제국이 페르시아제국에 의해 멸망 당한 후였다. 느헤미야는 페르시아제국의 수도 수산 궁에 아닥사스다 왕의 술 따르는 관원으로 섬기고 있었다 (느 1:11). 이 아닥사스다 왕은 아닥사스다 1세 롱기마누스인데 그의 한쪽 팔이 다른 팔보다 길었던 것 같다 (주전 464-423). 페르시아 제국 안에서 느헤미야의 사회적인 지위가 상당했음을 알 수 있다. 사실 느헤미야에게는 현실에 안주하여 살고 예루살렘으로 돌아와서 성벽재건이라는 힘들고 골치 아픈 일을 자청할 이유가 없었다. 하지만 예루살렘이 패망한 소식을 듣고 아닥사스다 왕에게 조국으로 돌아가도록 간청했다 (느 2:5). 느 2:4절 이하 보니 하나님의 은혜로 아닥사스다 왕을 통해서 필요한 물자와 안전을 보장 받았다. 이것을 8절은 하나님의 선하신 손이 느헤미야를 도우셨다고 밝힌다.

(4) 이제 하나님의 구원과 회복의 역사가 시작된다. 느헤미야의 뜻은 ‘하나님의 위로’이다. 우리는 느헤미야라는 이름에서 이미 포로 귀환한 이스라엘 백성들이 경험했던 하나님의 위로를 본다. 이 회복과 위로의 경험은 바로 제 2의 출애굽 (the second exodus)의 경험이었다. 이 사실을 느 1:10절에서 느헤미야는 말하기를 하나님께서 바벨론에서 귀환시키신 백성은 “주께서 일찍 큰 권능과 강한 손으로 (애굽에서) 구속하신 주의 종이요 주의 백성이라”고 밝힌다. 이처럼 출애굽 사건은 이후의 모든 구원 사건의 기초가 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따라서 하나님 나라를 출애굽과 새출애굽의 관점에서 살펴볼 수 있다. 환언하면 출애굽 주제 역시 성경의 하나의 큰 광맥이다.

(5) 느 2:17절에서 느헤미야가 주도할 예루살렘 성벽의 재건은 이스라엘의 수치를 굴려버리는 것이었다. ‘수치를 굴러버린다’는 말은 길갈에서 출애굽한 이스라엘 남자들이 할례를 행한 것을 연상시킨다. 여기서도 출애굽 주제 (exodus theme)를 볼 수 있다. 성벽이 무너진 대로 그대로 방치된다면 이방 사람들이 보고는 이스라엘을 지키시는 하나님은 무능한 신이라고 조롱했을 것이고 이스라엘 전체에 수치가 되었다. 하나님은 자신의 명예를 위해서라도 예루살렘 성벽의 재건을 이루셔야만 했다. 예수님 당시처럼 느헤미야 시대의 사회 관습 중 가장 중요한 것은 명예와 수치였다. 하나님 자신의 명예의 회복을 위해서 그리고 자신이 전능하신 하나님이심을 증명하기 위해서라도 성벽 재건을 속히 이루셔야 했다.

(6) 하지만 교회의 회복과 하나님 나라의 확장에는 반대자가 있기 마련이다. 예루살렘 성벽 재건의 반대자들은 주로 사마리아 사람들이었는데 느 2:29절에서 그 대표자의 명단을 밝힌다: 산발랏, 도비야, 게셈. 우리는 이런 대적자들을 개인의 대적으로 보지 말고 교회와 복음의 대적으로 보아야 한다. 사마리아 사람들은 북 이스라엘에 속했던 사람들인데 앗시리아에 의해 주전 722년에 망한 후 여전히 사마리아 지역에 거주하고 있었다. 북 이스라엘 백성 중 유능한 자들이 주로 앗시리아로 잡혀갔다. 그리고 사마리아를 포함한 북이스라엘에는 앗시리아 사람들이 이주해서 살았기에 잡혼이 성행했다. 사마리아인들은 남 유다의 귀환이 자신들의 입지를 약화시킬 것으로 생각해서 성벽 재건을 반대했던 것이다. 어느 시대 건간에 하나님 나라의 부흥의 과정에는 항상 반대가 있기 마련인데 가장 가까이에 있는 사람이 주동적인 역할을 할 때가 있다.

(7) 하지만 느 2:20절에 보니 느헤미야는 하늘의 하나님의 형통케 하심을 믿고 일을 진행해 간다. 성도가 믿는 형통은 고난과 어려움 속에서도 하나님께서 이루시는 형통이다. 아무 어려움이 없는 무사안일한 형통은 성경이 가르치는 형통이 아니다.

(8) 느헤미야서는 하나님의 영감된 말씀이기에, 2,400년전 느헤미야의 이스라엘 재건이라는 역사적 사건에만 국한되지 않고 우리 시대의 교회의 영적 회복과 부흥이 어떠해야 할 것인가에 대한 원칙을 가르쳐 준다. 즉 훼파된 예루살렘 성벽은 (느 1:3) 하나님의 기업인 신약 교회를 계시사적으로 가리킨다. 느 2:10절에서 느헤미야는 ‘이스라엘을 흥왕케 하려는 사람’으로 불린다. 바로 이 점에서 느헤미야는 새 이스라엘 (=교회)을 회복하시고 이 땅에 하나님 나라를 이룩하시러 오신 예수님을 내다본다. 페르시아의 아닥사스다 황제 곁에 있었던 느헤미야는 자신의 영달을 포기하고 힘든 일을 자청했다. 이것 역시 모형론적으로 그리고 계시사적으로 하늘 보좌 버리고 이 땅에 새 이스라엘을 회복하고 구원하러 오신 예수님을 내다보게 한다. 예수님이야말로 새 출애굽 (the new exodus)을 이루신 분이신데, 예수님 안에서 우리는 성령으로 날마다 새로운 출애굽을 경험한다. 이 새로운 출애굽은 죄와 사탄의 권세로부터의 출애굽이다. 그리고 모든 사회의 악과 부조리 그리고 나의 죄성으로부터의 출애굽이다. 느헤미야가 하나님의 위로이듯이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보혜사의 위로와 은혜를 누린다. 이처럼 느 1-2장의 하나님 나라는 계시사의 전진을 고려하면서 살펴볼 때 기독론적으로 해석되는데 특별히 언약과 출애굽 주제 그리고 예수님의 온 교회적 인격의 관점과 연관된다.

(9) 느헤미야의 성벽 재건 사업은 일시적인 것이었다. 하지만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을 통한 교회의 회복의 역사는 완전하고 영원한 것이다. 예수님이야말로 “이스라엘 자손을 흥왕케하시는 분이시다”. 느 7, 10, 12장에 나타난 많은 사람들의 이름은 하나님께서 구약의 하나님 나라 안으로 들어오게 하시고 그들을 일군으로 만드신 하나님의 열심을 증명한다. 계시사의 전진을 고려해 볼 때 지금 우리가 이스라엘을 흥왕케 하는 사람들이다. 우리의 전도와 삶을 통해 하나님께로 돌아 온 사람들의 명단은 얼마나 되는가? 우리 신앙의 무너진 부분은 어디인가를 점검해 보자. 혹 우리의 범죄로 무너져 버린 것은 아닌가? 그렇다면 우리는 회개해야 한다. 하나님의 긍휼과 자비를 구해야 한다. 교회의 회복과 부흥을 위한 걸음에 분명히 어려움과 비웃음과 모함과 조소가 있을 것이지만, 형통케 하시는 하나님을 바라보아야 한다. 그 비웃음과 방해는 가장 가까이에 있는 사람으로부터 올 수 있다.

(10) 하지만 우리가 믿고 바라보는 하나님은, 예수님 안에서 우리에게 은혜와 위로를 베푸시고, 자신의 명예를 회복하기 위해서 라면 기꺼이 일하시는 분이시며, 고난 중에서라도 자신의 언약 백성을 형통하도록 하시는 우리 아버지이시다. 느 2:18절이 밝히듯이 이 일은 우리 모두 힘을 내어야 하는 선한 일이다. 교회 전체가 힘을 합하여 이루어야 할 일이요 하나님 보실 때 선한 일이다. 하나님의 열심을 바라보고 열심 내자. 느 1-2장에서 우리는 은혜가운데 승리하는 하나님 나라를 본다. 할렐루야.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