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님의시선
역사는 수많은 사람들의 힘과 의지에 의해 이루어진다. 그러나 때로는 한 명의 위대한 인물에 의해 이루어지기도 한다. 현실에 대한 정확한 통찰력과 미래에 대한 바른 예견을 가진 사람에 의해 역사는 개혁되고 진보를 이루어 간다. 종교개혁자 마틴 루터(Martin Luther)나 영국의 웨슬리(Wesley) 그리고 만유인력의 뉴튼(Newton)과 같은 사람들이 바로 그런 사람들이다. 느헤미야도 그런 사람일 것이다.
본문에 나오는 느헤미야는 바사 제국의 술 맡은 관원이었다. 그러나 그는 이스라엘의 처참한 현실을 듣고 이스라엘의 현실과 미래를 걱정하고 금식하며 기도하였다. 그리하여 제3차 귀환이 이루어지게 되었고, 뒤이어 성벽재건 공사도 이루어지게 되었다. 본 연구에서는 제3차 귀환과 성벽 재건을 통해 그것의 의미와 그 속사적 의의를 찾아보고자 한다.
1. 귀환한 이스라엘 백성과 성벽재건 준비(느1, 2장)
예루살렘 성이 파괴된 채 그대로 방치되고 있다는 소식을 동생 하나니에게 전해들은 느헤미야는 어떤 태도를 취하였나? 당시 느헤미야는 어떤 위치에 있었으며, 성벽 재건의 허락을 누구에게 받았는가? 그리고 성벽 재건의 구체적인 방법으로 어떤 행동을 취하였는가?
1) 느헤미야의 기도
당시 바사 제국의 술 맡은 관원이었던 느헤미야는 바벨론 군대에 의해 예루살렘 성벽이 파괴된 후 약 131년간 그대로 방치된 것을 듣고 이스라엘 백성듸 고난과 고통을 염려하며 4개월 동안 금식 기도하였다(느2:4) 이런 느헤미야의 기도는 에스라 9장의 기도와 다니엘의 기도 방식(단9:4-19)과 거의 일치한다.
느헤미야의 기도는 철저한 언약 사상에 근거한 기도로서 자신에 대한 포기와 전적인 헌신이 내포된 기도였다. 이러한 헌식적인 기도의 모습을 통해 하나님은 바사 왕 아다사스다 왕을 움직여 예루살렘 성벽 재건을 허락하셨다. 아닥사스다 왕은 성벽 재건을 위한 불질적, 행정적, 군사적 도움까지 주어 느헤미야의 귀환을 도와주었다. 성벽을 비밀리에 탐사한 느헤미야는 산발랏과 도비야(느2:10) 같은 방해자들과 성의 파괴 정도가 극심한 것에 대해 근심하고 염려하였으나 믿음으로 성벽 재건을 이스라엘 백성에게 호소하여 성벽 재건을 시작하였다.
2) 민족을 위한 기도
느헤미야는 자신의 고국인 이스라엘이 위기를 당했을 때 자신 혼자만의 부귀와 안일을 추구하지 않고 하나님께 매달렸다. 우리도 나라가 위기에 처했을 때나 어려움을 당했을 때 내게 직접적인 피해나 어려움이 닥쳐오지 않더라도 나라와 민족을 위해 기도하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대하7:14). 진정한 신앙인이라면 당연히 그러해야 하는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일이나 교회 봉사를 하기 때문에 주위로부터 비난이나 핍박을 받을 때도 있다. 그럴 때 이방 사마리아 사람들의 방해에도 불구하고 성벽 재건을 시작했던 느헤미야처럼 담대하게 믿음으로 나아가야 할 것이다(행4:23).
2. 성벽재건(느3-7장)
예루살렘으로 귀환한 느헤미야는 지일 먼저 성벽 재건을 시작하였다. 그러나 방해 공작으로 인하여 잠시 주춤하였다. 그 당시 성벽 재건을 방해했던 사람은 누구인가? 또한 방해 가운데 공사를 어떻게 추진했으며, 그런 가운데 백성들의 어려운 생활고는 어떻게 해결하였는가? 그리고 성벽 재건이 몇 일 만에 완공되었으며, 그 영적 의미는 무엇인가?
1) 성벽재건이 계획대로 진행됨
성벽 재건은 온 백성들이 진심을 다해 동참하였다. 그러나 산발랏과 도비야가 사마리아 군대를 충동질하여 무력으로 방해 공작을 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느헤미야는 기도하며 담대히 공사를 추진해 나갔다. 공사가 어느 정도 진척이 되자 방해자들은 다시 무력을 행사하기 시작했다. 그러자 느헤미야는 역군들을 나누어 노역과 파수를 번갈아 시키며 성벽 공사를 계속하였다. 그러나 대외적인 문제보다 식량난으로 인한 내부의 불평이 일어나고 부자들을 원망하게 되자 느헤미야는 총회를 소집하여 이자 취수를 금하였다. 아울러 느헤미야 스스로도 총독으로서 청렴결백한 삶을 살았음을 보여 주었다. 느헤미야에 대한 암살 계획, 중상 모략(느6:5-9) 등의 계교에도 불구하고 성벽재건 공사를 시작한 지 52일 만에 성벽은 완공되었다.
2) 헌신을 통한 성벽재건
성벽을 재건하는 데 온 백성들은 힘을 모아 공사를 하였다. 하나님은 헌신된 하람들을 통해 당신의 일을 나타내신다(롬 16장). 우리는 하나님의 역사를 위해 얼마나 헌신하고 있는지 돌아보아야 할 것이다. 또한 복음 전파와 봉사를 위해 다른 형제 자매들이 헌신적으로 일할 때 방관하지 말고 같이 힘을 모아 협력하여 선을 이루어야 한다(롬8:28). 성벽 재건 과정에서 대적들의 방해 공작은 집요하게 계속되었다. 자칫 오랜 기간의 방해 활동은 느헤미야를 쓰러지게 할 수도 있었으나 느헤미야는 끝까지 기도하며 믿음과 담대함 그리고 정확한 영적 분별력으로 마침내 승리하였다. 우리의 삶에 있어서도 마귀는 하나님의 일을 하려는 우리는 집요하게 방해한다. 그러나 날마다 기도하는 가운데 하나님의 도우심에 대한 철저한 확신과 믿음을 갖는다면 반드시 승리하게 될 것이다.
3) 성벽재건이 갖는 의미
예루살렘 성벽 재건이 갖는 의의는 실로 크다. 성벽 재건은 바벨론 포로에서 귀환한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의 역사하심과 보호하심을 다시 한 번 느낀 사건이다.
또한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들 징계하시고(왕하25:1-21) 다시 회복시켜 주신 사실을 증명하는 역사적 사건이기도 하다. 성벽 재건은 죄로 인하여 죽을 수밖에 없는 우리의 생명이(롬3:23) 예수그리스도의 대속과 부활 은혜로 다시 살아난다는 사실을 예표해 준다.
지도자가 자신의 만족과 안일만 추구한다면 그 나라와 그 단체는 장래에 대한 비전을 가지기 힘들다. 그러나 지도자가 자신의 행복보다는 자신이 속해 있는 단체나 나라의 장래를 생각하며 염려하고 앞날을 준비한다면 그 단체나 나라에서는 많은 가능성을 찾을 수 있다. 느헤미야의 금식 기도는 이스라엘의 예루살렘 귀환을 이루었고, 더 나아가 무너진 예루살렘 성벽 재건을 이루었다. 느헤미야의 탁월한 지도자적 능력과 이스라엘에 대한 영적 준비가 이스라엘을 위기에서 구출하게 한 것이다. 그러나 이런 관점은 역사에 대한 세속사적인 관점일 뿐이다. 그 배후에는 하나님의 구속과 은총과 죄로 인해 죽을 수밖에 없는 인간의 회복을 위해 오신 예수그리스도를 예표하는 것이 제3차 귀환과 성벽 재건을 통해서 나타나고 있다.
본문 해설
1. 고대 술관원의 임무와 대우
고대 근동의 왕궁에는 왕이 식사할 때 주주류룰 시중드는 술맡은 관원이 있었다. 그런데 궁중 안에는 왕에 대한 음모와 책략이 항상 도사리고 있기 일쑤였기 때문에 왕의 술시중을 드는 술관원을 세우는 데 매우 신중을 기해야 했다. 그래서 일단 왕에 의해 간택된 술관원은 왕이 드는 잔에 독이 있는 제 살펴보아야 했고, 때로는 술을 왕에게 드리기 전에 먼저 조금 마셔 보아야 했다. 따라서 왕의 신임을 한 몸에 받았고 또 상당한 권력도 부여받았다. 예를 들어 창세기 40장에 나오는 애굽의 술 맡은 관원장도 애굽의 상당한 고관이었다. 때문에 요셉은 자신의 누명을 벗겨 주기를 그에게 당부했던 것이다. 또한 앗수르 왕 산헤립의 부하 랍사게(왕하18:17)도 사실상 술 맡은 관원장이었다. 그것은 랍사게라는 이름이 앗수르어로 술 맡은 관원장을 가리키는 직함인 사실에서 알 수 있다. 고대의 술곤원이란 오늘날 경호와 비서 업무를 총괄하는 고위직과 유사하다고 볼 수 있다.
2. 포로귀환 시대의 대제사장의 사회적 역할
1) 사회적 역할
포로귀환이 시작될 무렵부터 대제사장의 사회적 역할은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제1차 포로귀환 당시(B. C. 537) 스룹바벨과 함께 대제사장 예수아가 백성들의 최고 지도자로서 그 역할을 수행했다(스2:1; 느7:6). 또한 스룹바벨 성전 재건 당대의 역사를 기록한 학개서를 보면 B. C. 520년에 대제사장 여호수아의 역할이 얼마나 컸던가를 능히 짐작할 수 있다(학1:1,12; 학2:2, 4). 그리고 2차 포로귀환 당시 (B.C. 458)의 지도자였던 에스라도 역시 대제사장이었다. 그는 당시 1차 포로귀환 때에 예루살렘으로 돌아온 백성들의 이방인의 통혼 문제 등 기타 많은 문제의 개혁과 율법 교육을 통한 백성들의 신앙 교육, 즉 하나님의 선민으로서 마땅히 가져야 할 마음 자세 및 생활 교육으로 인하여 종교 부흥을 가져올 수 있었다. 그런데 3차 포로귀호나 당시에는 (B. C. 444) 느헤미야가 유대 총독으로서 그의 강력한 지도력을 발휘했기 때문에 대제사장의 역할은 다소 적어진 듯하다. 그러나 그것은 예루살렘 성벽 재건이라는 국가적 사업으로 인해 그렇게 된 것이며, 대제사장의 사회적 지위 자체가 격하된 것은 아니다. 느헤미야 당시 대제사장은 엘리아십이었다(느3:1). 그는 성벽 재건 당시 백성들의 모범이 되어 선봉에서 그 역할을 잘 감당하였다. 그러나 그는 느헤미야가 약 1년 동안 예루살렙을 떠나 있는 동안에 암몬 지방 총독 도비야와 친분을 맺고 그에게 성전 뜰의 한 방을 내어 주는 실책을 범하기도 했다. 하지만 조정적인 측면에서 그것도 결국은 암몬 지방 총독 도비야와 제휴함으로써 예루살렘 거주민의 안정을 도모코자 했던 것이라고 볼 수도 있다(느13:4). 이처럼 포로귀환 당시의 제사장은 사회의 최고 지도자로서 그리고 백성들의 모범자로서 그 역할이 지대하였음을 알 수 있다.
2) 제사장의 지위 격상 이유
신정 국가인 이스라엘에서는 '대제사장'이 종교 지도자로서 뿐 아니라 사회적, 국가적 측면에서 볼 때 대제사장의 지위는 왕정 시대와 그 이전보다 포로귀환 시대 이후에 훨씬 더 격상되었다. 그 이유는 왕정 시대에는 왕이 국가의 최고 통수권자였기 때문에 대제사장은 상대적으로 왕의 자문 역할이나 성전과 관련된 국가 행상에만 그 역할을 수행하기 마련이었다. 물론 왕정 시대에 있어서도 국가의 비상시에는 대제사장이 중요한 역할을 감당하기도 했다. 예를 들면 아도니야의 반란과 솔로몬 즉위 초기 제사장들의 세력 형성(왕상1:7; 왕상2:27-35) 그리고 분열왕국 시대 남왕국 요아스 즉위 직전에 악녀 아달랴를 몰아내고 요아스로 다윗 왕권을 계승케 한 대제사장 여호야다의 활약 등을 들 수 있다(왕하 11장).
반면에 포로귀환 시대 이후에는 왕이 따로 있었기 때문에 대제사장의 역할은 한층 더 중요하게 여겨졌다. 왜냐하면 포로귀환 시대 이후 외형적으로는 어느 정도 국가의 형태를 회복하기는 했지만 그래도 여전히 강대국의 속국에 불과했던 이스라엘은 예루살렘 성전만을 중심으로 한 종교 생활에 전념하였기 때문에 자연히 대제사장의 지위와 역할은 격상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3. 포로귀환의 영적 의미
기도의 응답으로 이루어진 느헤미야의 귀환은 하나님의 구속사적 흐름이 원만한 방향으로 고정될 수 있었다는 것에 의의가 있다. 만약 그의 귀환이 이루어지지 않았다면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방 백성들이 약탈로 인해 예루살렘뿐만 아니라 성전까지도 파괴될 수 있을지 모르는 심각한 영적 혼란을 겪었을 지도 모른다. 방해자들과 너무 심하게 파괴된 성벽으로 인해 성벽 재건이 어려웠으나 느헤미야는 하나님의 섭리와 역사 하심을 믿음으로 성벽 재건을 시작할 수 있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