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하 1
▣ 왕이 된 다윗-사무엘하 1-5장-
이 장들에서는 다윗이 이스라엘 왕으로서 왕관을 쓰게 되기까지의 사건들을 설명한다. 역대상 10장 1-14절, 11장 1-19절, 14장 1-8절에 이와 유사한 설명이 나온다.
1. 사울의 죽음을 슬퍼하는 다윗(1장)
소심한 성도라면 그의 원수가 죽은 것을 기뻐했을 것이다. 그러나 다윗은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사람이었으며, 사울의 죄로 인한 비극을 예민하게 느꼈다. 물론 다윗의 신실한 친구 요나단도 죽었다. 불순종하는 아버지의 죄가 무죄한 사람들에게 심판을 초래하는 것은 참으로 유감스러운 일이다. 우리는 사무엘상을 공부할 때 사울의 죽음이 주는 교훈들을 이미 살펴보았다. 그러나 몇 가지 다른 세부적인 사항들을 생각해 보는 것이 유익할 것이다.
한 아말렉 사람이 소식을 전해 주고는 사울을 최종적으로 죽인 사람이 자기라고 주장하였음에 유의하자. 만일 사울이 사무엘상 15장에서 여호와께 순종하여 아말렉 사람들을 모두 죽였다면 이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우리가 죽이지 못한 죄는 우리를 죽이게 된다(신 25:17-19 참조).
다윗이 슬퍼하는 것은 감동적이다(잠 24:17 참조). 이 "활의 노래"는 요나단이 활을 사용한 것과 관련이 있다(삼상 20:20- 이하). 이 노래에는 사울에 대해 불손한 말이 없다! 다윗의 주된 관심은 여호와께서 기름 부으신 종이 죽임을 당하면 주님의 영광이 흐려진다는 것이었다. 그는 구원받지 못한 대적이 이 승리를 기뻐하지 못하게 하는 데 관심이 있었다. "용사가 엎드러졌도다!" 이것이 그가 노래하는 주제였다(13, 25, 27절). 사무엘상 10장 23절에서 사울은 다른 어떤 사람보다도 높이 있는 자였으나 적보다도 낮게 "엎드러졌다!" "선 줄로 생각하는 자는 넘어질까 조심하라"(고전 10:12)."
삼하 2-4
2. 사울의 가족과 대적하여 싸우는 다윗(2-4장)
이제 우리는 그의 전 생애를 통하여 재난이 된 "정치적인 음모들"을 공부하기 시작한다. 다윗이 하나님의 뜻을 구하기는 했지만 자기 조력자들의 음모와 계획을 피할 수는 없었다. 다윗은 이 사람들에게 빚이 있었기 때문에 그들을 다루기가 힘들었다. 왕좌를 향한 행진은 피에 젖은 것이었다.아사렐의 죽음(2장)-요압, 아비새, 아사헬은 모두 다윗의 이복 누이 스루야의 아들들이었다(대상 2:16/삼하 17:25). 이들은 군대에서 중요한 사람들일 뿐아니라 다윗의 조카들이었다. 다윗은 우선 자신이 속한 지파인 유다를 통치하였는데 헤브론에 그 사령부를 두고 있었다. 그러나 사울의 군대장관 아브넬은 사울의 아들 이스보셋을 다른 지파들의 왕으로 삼았고, 수도를 요단강 건너편 마하나임에 정하였다. 이것은 자신과 새 왕을 다윗의 사람들에게서 지키기 위함이었다. 물론 아브넬은 사울의 사촌이었기 때문에 사울의 집에 대한 관심도 가지고 있었다(삼상 14:50). 이스보셋이 통치하는 것을 보게 됨으로 그에게 유익이 되었지만 그가 이스보셋에게 왕관을 씌운 것은 하나님의 말씀에 고의적으로 반역한 것이었다. 하나님께서는 다윗 홀로 이스라엘을 통치하게 될 것을 분명히 밝히셨었다. 어쩌면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이 그 당시의 유대인 같았을 것이다. 우리는 왕이 우리의 생활을 다스리도록 허락하지만 일부만을 허락한다. 그 결과는 갈등과 슬픔이다. 아브넬이 아사헬을 죽인 것은 두 왕 사이의 긴 전쟁의 서막이었다(3:1). 우리가 보게 될 것이지만 남은 두 동생이 이 죽음을 복수했으며 다윗에게 근심을 더해 주었다.
아브넬의 죽음(3장)-다윗이 많은 아내를 둔 것은 신명기 17장 15-17절의 직접적인 위반이었다. 어떤 이들은 다윗의 이러한 육욕의 표현이 결과적으로 말년에 재앙을 일으킨 여러 가지 가정 문제로 이끌어 갔다고 생각한다. 암논은 그의 이복 누이 다말을 강간하였고(13장), 압살롬은 다윗에 반역하여 왕관을 노획하려 하였으며(13-18장), 아도니야는 솔로몬에게서 왕국을 빼앗으려고 하였다(왕상 1:5- 이하). 그러나 아브넬도 육욕의 문제를 일으켰는데 사울의 첩을 취하여 이스보셋의 노여움을 샀다. 이 일은 아브넬과 이스보셋 사이에 분열을 초래했다. 아브넬은 다윗과 평화 조약을 맺으려 하였으나 "스루야의 아들들"은 음모를 꾸며 그를 죽였다(26-30절). 살인을 행한 것은 사실상 요압이었으나 그의 형제도 음모에 가담했던 것같다. 요압의 손은 자신의 죽음을 맞이하기 전에 피로 물들여졌다. 왜냐하면 그는 아브넬을 죽였을 뿐아니라 압살롬(삼하 18:14)과 아마사(삼하 20:1- 장)도 죽였다. 다윗은 그의 아들 솔로몬에게 요압을 처치할 것을 요청했으며 솔로몬은 그 요구대로 행하였다(왕상 2:5-6/왕상 2:28-34). 아브넬이 살았더라면 역사
가 어떻게 달라졌을지 말하기는 어려운 일이다. 요압이 다윗에 대하여 비범한 권력을 행사한 것은 분명하며, 특히 죄없는 우리아에 대한 그의 살인 계획으로 왕을 도운 이후부터는 더욱 그러하였다(12:14- 이하). 하지만 아브넬의 죽음에 관해서 다윗이 취한 경건한 행위를 주목해 보자.
이스보셋의 죽음(4장)-이것은 하나의 전환점이 되었다. 이스보셋이 죽었을 때 다윗이 전 국가를 통치하도록 길이 활짝 열렸다. 그러나 다윗은 림몬의 아들들이 사용한 방법을 인준하지 않았으며, 그들의 범죄를 인하여 살인자들을 죽여야만 했다. 다윗은 하나님께서 그를 보좌로 올리실 줄을 알고 있었으며, 선을 이루기 위하여 악을 행하려고 하지는 않았다(롬 3:8).
이 세 가지 살인은 왕좌를 향한 다윗의 길이 피로 얼룩졌다는 증거이다. 보좌를 얻기 위하여 다른 사람들의 피가 아닌 자신의 피를 흘리신 우리의 구세주와는 얼마나 대조적인가! 역대상 22장 8절에서 다윗의 피로 물든 경력을 하나님께서 어떻게 평가하셨는지 보자."
삼하 5
3. 사울의 보좌를 계승하는 다윗(5장)
다윗은 헤브론에서 유다 지파를 7년 반 동안 다스렸다. 이제 그는 33년 동안 전체 민족을 다스리게 되었으며, 총 40년 이상을 통치한다. 다윗은 세 번 기름부음을 받았다. 사무엘이 베들레헴 집에서 그에게 기름을 부어 주었고, 유다 사람들이 헤브론에서 기름을 부었었다(2:4). 하나님께서 다윗의 모든 원수들을 물리치시고 그에게 평화를 주신 후에 다윗이 부른 승리의 노래를 시편 18편에서 찾아 보자. 이 시는 괴로움 가운데 있을 때 읽으면 좋을 것이다. 왜냐하면 이 시는 여호와께서 우리를 이끌어내어 더욱 큰 축복으로 어떻게 인도하시는지를 보여 주기 때문이다. 물론 다윗은 시련이 많은 것을 즐거워하지는 않았으나 뒤를 돌아보며 그것들로 인하여 하나님께 감사할 수 있었다.
왕은 이제 예루살렘을 수도로 택하였다. 이 요새는 이전에 점령당한 일이 없었고(수 15:63/ 삿 1:21) 여부스 사람들은 오만하여 다윗이 공격하는 것을 무시하였다. "소경과 절뚝발이라도 너를 물리치리라"고 그들은 조롱하였다. 그러나, 다윗과 신하들은 이 조롱을 패전의 외침으로 갚아 주었다. 역대상 11장 5-8절은 하나님께서 성문을 여는 데에 충성된 요압을 사용하셨음을 말해 준다. 어떤 이들은 다윗의 신하들이 수로를 통하여 알아차리지 못하도록 성에 기어 들어갔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다른 고고학자들은 그 당시에는 수로가 설치되지 않았었다고 주장한다. 본문에서 볼 때는 입성하는 방법으로 수로를 사용한 것이 분명하며, 요압이 왕의 능숙한 계획을 수행한 듯하다.
다윗이 자신의 성을 건설하자마자 옛 원수 블레셋이 돌아왔다! 우리의 개인생활에 있어서도 이것은 진리이다. 사단은 "승리 후의 소강 상태"를 이용하여 다시 우리를 공격하려고 기다리고 있다. 다윗은 여호와의 뜻이 승리를 위한 유일한 길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그는 즉각적으로 하나님과 상의하였다. 두번째 공격은 첫번째 공격과 다른 것에 유의하자(22-25절). 다윗은 또다시 하나님의 뜻을 구할 만큼 충분히 지혜로웠음에 대해서도 주목하자. 하나님께서는 새로운 방법으로 그를 인도하셨다! 우리는 하나님의 뜻을 "복사"하지 않도록 돌보아야 한다. 새로운 결정을 주시도록 새롭게 구해야 한다.
물론 다윗이 나라 전체를 다스리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었으며 이것은 마치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생활 전체를 다스리는 것이 하나님의 뜻인 것과 같다. 하나님의 뜻 밖에 남겨진 부분들은 반역을 일으키며 문제를 야기시킨다. 우리는 그의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므로(5:1/엡 5:30), 하나님께서 우리를 다스리도록 초청해야 한다. 그럴 때에만 완전한 평화와 승리를 소유하게 된다.
왕좌를 향한 다윗의 길은 여러 해가 걸렸으며 많은 시련이 따랐다. 그러나 이 모든 일에 있어서 그는 하나님을 첫 자리에 두었으며 대적에게 복수하거나 앙갚음하려 하지 않았다. 하나님은 그 일에 있어서 다윗이 하나님의 때와 계획에 의해 보호를 받으며 격려를 받는다는 것을 아셨다. 하나님은 만일 우리가 그를 신뢰하기만 하면 우리에게도 똑같이 행하실 것이다."
삼하 6:1-11
▣ 본향으로 옮겨진 법궤-사무엘하 6장-
본 장을 연구하려면 역대상 13, 15, 16장을 읽어야 할 필요가 있는데, 이 장들이 다윗의 생애에 일어났던 중요한 사건들에 대하여 추가로 자료를 제공해 주기 때문이다. 시편 132편 1-6절은 법궤가 제자리로 돌아옴으로 말미암아 여호와를 찬양하고 싶은 강렬한 그의 소망을 대변해 준다. 약 80년 동안 법궤는 기럇여아림에 있었으며(유다의 바알/ 삼상 6:21-7:2), 다윗은 예루살렘에 법궤를 둘 특별한 장막을 준비하여(대상 15:1) 이 성스러운 궤를 본향으로 되돌려올 준비를 하였다. 그가 이 임무를 끝마치는 데는 3개월 이상이나 걸렸다(6:11).
1. 하나님을 노하게 한 다윗(6:1-11)
물론 다윗의 편에서는 법궤를 예루살렘으로 가져오는 것이 온당한 욕심이었다. 그러나 "지식이 없는 열성"을 가지거나 또는 선한 일을 행함에 있어 고의적으로 그릇된 형식을 취할 수도 있었다. 일을 시작함에 있어서 다윗은 여호와와 상의하지 않았다. 대신 그는 정치적인 지도자들과 의논하였다(대상 13:1-4/삼하 5:19/삼하 5:23). 그의 주된 동기는 여호와를 영화롭게 하는 것보다는 그의 통치 하에 있는 민족을 단합시키려는 데에 있는 것같다. 13장 3절에서 다윗은 사울이 법궤를 소홀히 하였던 것을 비난한다. 아마도 이러한 발언은 6장 20절 이하에 기록된 대로 사울의 딸, 미갈의 행동과 관련이 있는 듯하다. 모든 지도자들과 회중들은 다윗의 계획에 동의했으나 그렇다고 해서 그 후의 일들이 정당화되는 것은 아니었다.
다윗의 그 다음 실수는 하나님의 말씀을 무시한 것이다. 법궤를 레위인들이 그들의 어깨에 메도록 요청하는 대신(민 3:27-31/민 4:15/민 7:9/민 10:21), 블레셋이 하던 대로 세상의 본을 따라 법궤를 새 수레에 실었다(삼상 6장). 하나님이 블레셋이 이 방법을 사용하는 것을 허락하셨던 것은 그들이 말씀을 교육받은 언약의 백성이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유대인들이 거룩한 명령을 무시하고 이방 민족을 흉내낸다는 것은 재난을 초래하는 것이었다. 오늘날 얼마나 많은 그리스도인들(또는 교회들)이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 주신 형식"을 따르는 대신 "세상"을 따르는가!(롬 12:2/출 25:40) 모든 백성들은 열정적으로 기뻐하였으나 그렇다고 하여 그들의 방법이 하나님의 눈에 합당하게 되는 것은 아니었다. 이스라엘은 언제나 "다른 나라들처럼" 되기를 원했다(삼상 8:5). 그리고 그 일은 언제나 그들을 비극으로 인도해 갔다.
하나님의 일을 하는 데에 인간의 방법을 동원하는 것은 결과적으로는 실패하는 것이 당연하다. 황소들은 비틀거렸고 법궤는 떨어질 위험에 처해 있었다!
이로 인해 세번째 실수를 범하게 되었다. 레위인이 아닌 사람이 법궤를 만졌다(민 4:15). 하나님은 그 사람을 즉각적으로 심판하실 수 밖에 없었으며, 그렇게 하지 않으면 하나님의 영광이 손상을 입고 주님의 말씀을 위반해도 된다고 허용하는 일이 된다. 이같이 갑작스런 심판에 대한 다윗의 반응은 일을 처리함에 있어 그의 마음이 하나님과 완전히 바른 관계에 있지 않았음을 나타낸다. 왜냐하면 처음에 그는 화를 내었으며 다음에 그는 두려워하였다. 잠시 중단하고 심판에 대한 이유를 발견하기 위해 하나님의 뜻을 구하지는 않고 다윗은 대열을 정지시키고 재빨리 법궤를 배치하였다. 역대상 26장 1-4절은 오벧에돔의 가족이 레위지파에 속하였으며 법궤를 안전하게 돌볼 수 있었음을 시사한다.
하나의 실수가 다른 실수로 이끌어 간다! 하나님의 뜻을 따르기로 결심하는 일과 그 뜻을 성취함에 있어서 하나님의 방법을 따르는 것은 얼마나 중요한 일인가!"
삼하 6:11-19
2. 자기의 열성을 과시하는 다윗(6:11-19)
석달이란 기간 동안에 다윗이 자기의 마음을 성찰하고 자신의 죄를 고백한 것은 의심할 나위 없다. 그는 법궤를 운반하기 위하여, 또한 하나님의 지시를 발견하기 위하여 율법을 들추었을 것이 분명하다(대상 15:1-2/대상 12-13). 하나님은 오벧에돔의 집을 축복하고 계셨으며 다윗은 그 축복이 전체 민족에게 있기를 원했다. 이번에는 장막을 준비하였고 레위인들도 자신들의 임무를 적절히 준비했던 것을 볼 수 있었다. "여호와의 기구를 메는 자여 스스로 정결케 할찌어다!"
시편 24편은 이 사건을 축하하기 위하여 지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역대상 16장 7절 이하를 보면 시편 105편이 이 행복한 사건에서 나온 것임을 알게 된다. 하나님은 다윗이 자신의 마음의 기쁨을 표현하도록 하는 데 사용하셨으며 그의 노래는 여호와를 영화롭게 하였다. 왕은 자신의 용의를 제쳐놓고 제사장의 겸손한 옷을 입은 채 대열을 인도해 갔다. 레위인들은 여섯 발걸음을 내딛고 잠깐 멈추어서 하나님께서 그들을 받으시는지 보려고 기다렸다. 아무 심판이 없자 그들은 제사를 드리고 예루살렘으로 향하는 남은 길을 진행해 갔다.
여호와 앞에서 다윗이 "춤을 춘 것"은 하나님의 법궤가 백성들에게 회복된 것을 기뻐하여 자연발생적으로 그 기쁨을 표현한 것이 분명하다. 다윗이 이렇게 행동한 것은 위엄이 없는 일이었을까? 물론 그렇지 않았다! 그의 행동이 우리가 따라야 할 모범으로 주어진 것은 아니지만, 정반대로 나아가 하나님을 예배하는 중에 기쁨과 찬양을 외적으로 표현하는 것을 모두 제어해서는 안된다. 어떤 신자들은 이와 같은 행동들을 극단적인 육의 일로 규정하는 반면 다른 이들은 거짓된 근엄성으로 성령을 근심되게 하는 죄를 범한다. 끝으로, 다윗의 "춤"은 근대적인 "춤"을 찬성하는 핑계가 되어서는 안된다. 왜냐하면 그의 행동은여호와 앞에서 그를 찬양하기 위하여 한 것이기 때문이다.
다윗은 백성들을 축복하고 법궤가 돌아온 것을 축하하기 위하여 선물을 주었다. 오래 전에 "영광이 떠났었다." 이제 만군의 여호와("군대들의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 가운데 다시 돌아오셨다! 다윗이 기뻐하는 것도 무리가 아니다!"
삼하 6:20-23
3. 아내를 징계하는 다윗(6:20-23)
우리는 앞서 사울의 딸 미갈이 다윗에게 적합한 아내가 결코 아니었음을 살펴보았다. 그녀는 사울의 가족에 속하였으며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믿는 신앙을 진실로 나타내 본 일은 한 번도 없다. 사무엘상 19장 13절은 그녀가 우상을 섬겼음을 시사한다! 다윗은 여호와의 인도하심을 인하여 그녀를 아내로 취하지 않았으며, 골리앗을 죽임으로, 또한 사울의 살인적인 요구를 성취함으로 "그녀를 얻었다."(삼상 17:25/삼상 18:17-27). 사울의 가족과의 평생 동맹은 그 시작으로부터 문제거리였으며 모든 신성하지 못한 동맹들이 다 이러하다(고후 6:14-18). 다윗과 사울 사이의 대결은 육신과 영 사이의 전쟁을 예증하는 것이다. 그래서 다윗이 미갈과 연합한 것은 육신에 양보한다는 의미가 있었다.
미갈이 왜 그의 남편을 경멸하였는지를 아는 데는 많은 상상력이 동원되는 일은 아니다. 물론 그녀의 죄악된 태도가 여러 해를 두고 내적으로 자라갔던 것이 분명하다. 그녀는 아버지의 무기 책임자에게 승리의 "상"으로 결혼을 하게 된 것을 원망하였다. 그녀는 다윗이 다른 아내들을 취한 것을 원망하였는데(5:13-16/3:2-5), 이들은 모두 그녀가 다윗과 결혼한 후에 선택된 여인들이었다. 그녀의 아버지는 부끄럽게 죽임을 당하였으며 그의 적이 이제는 승리 가운데 전이스라엘을 다스린다. 물론 이러한 모든 이유들을 넘어 근본적인 이유가 있었다. 그녀는 여호와의 일들에 대해서는 이해하지 못했던 불신자였다(고전 2:14-16). 그녀는 이런 화려한 의식을 통해서 다윗이 그의 왕권을 표현하기를 원하였으나, 다윗은 자기의 지위를 보통 사람들과 함께 하여 여호와를 영화롭게 하기를 더 좋아하였다.
찬양의 위대한 시간이 지난 후 미갈이 다윗에게 한 심한 말은 그에게 깊은 상처를 입힌 것이 틀림없다. 우리가 주 안에서 기뻐하고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기를 추구할 때는 반드시 사단은 "미갈"을 우리에게 보낸다는 것은 대체로 맞는 말이다. 그리스도께서 기적을 행하실 때마다 한 편 구석에는 바리새인들이 있어서 그를 비판하는 일이 비일비재하였다. 그녀의 사악한 말은 사악한 마음을 나타낸다. 다윗은 그녀가 처결되어야 할 것을 알고 있었다. "네 손이 너로 범죄케하거든 찍어 내어 버리라!" 그는 미갈이 여호와의 일에 있어서 그에게 도움이 되지 않을 것을 깨달았다. 이에 따라 그녀를 내어 쫓고 결혼의 특권을 주지 못하게 하였다. 유대 여인에게 있어서 자녀들이 없이 죽는다는 것은 그녀에게 큰 수치였다. 다윗은 그녀의 어리석음에 따라 그녀에게 응대하였다(잠 26:5).다른 사람들이 우리를 비판할 때, 그리고 우리가 우리의 마음과 동기가 정당하다는 것을 알 때, 낙심해서는 안된다. 다윗이 다른 성도들 같았더라면 그는 이렇게 말했을 것이다. "좋아, 나는 더이상 여호와를 섬기지 않겠어! 내 아내조차도 그 진가를 인정해 주지 않는군!" 그러나, 이와는 반대로 다윗은 훨씬 많은 일들을 계획하였으며 여호와를 위하여 성전을 건설하려는 것을 본다. 사단이 길에 어떠한 장애를 두더라도 상관하지 않고 여호와를 높이는 것이야말로 그리스도인들이 지녀야 할 합당한 정신이다."
삼하 7:1-3
▣ 다윗 언약-사무엘하 7장-
본 장의 12, 16절은 주된 교훈을 요약하고 있다("당신의 보좌... 그리고 당신의 씨"). 다윗과의 언약은 하나님의 계획에 있어서 대단히 중요하다. 이 언약은 역대상 17장에도 기록되어 있는데, 이 언약을 통하여 하나님은 유대 민족에 대한 영원한 축복을 약속하셨다. 아브라함과의 언약에서 하나님은 자손과 땅과 전 민족에 대한 축복을 약속하셨
으나(창 15장), 다윗과의 언약에서는 약속된 메시야가 다윗의 혈통을 통하여(롬 1:4) 다윗의 보좌로부터 이스라엘의 왕국을 통치하게 될 것을 계시하셨다.
1. 고귀한 목적(7:1-3)
망명의 날들과 위험은 끝났다. 다윗은 자기의 집에서 안식과 축복을 누리고 있었다. 왕은 선지자 나단과 교제하고 있었으며 이들은 여호와의 일들을 논의하였다. 이 장면을 다니엘 4장 30절과 비교하라. 여기서 느부갓네살은 하나님 앞에서 자신을 겸손히 낮추는 대신 자기의 행한 일을 자랑하고 있다.
다윗은 항상 개인적으로 하나님의 집에 대한 사랑을 지니고 있었다(시 132편). 그리고 그의 소망은 법궤를 위하여 아름다운 집을 건설하는 것이었다. 하나님은 이것을 허락하지 않았으나(대상 22:8), 다윗의 사랑은 인정하셨다. 왜냐하면 이 소원이 그의 마음에 있었기 때문이다(왕상 8:18). 나단은 이 문제에 있어서 하나님이 밝히신 뜻을 알지 못했으며 다윗에게 권하여 그의 마음 속에 있는 일을 행하라고 하였다. 다윗과 나단은 둘 다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위하여 마음을 열어 놓고 있었으며 주께서 말씀하실 때는 듣고 순종하였다. 우리는 영적인 문제에 있어서 언제나 서로를 격려해야 마땅하며 서로 선한 일을 하도록 자극을 주어야 한다(히 10:24-25).
다윗은 진실로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사람"이었다. 왜냐하면 그는 그의 마음에 하나님의 말씀과 하나님의 집을 가장 귀한 것으로 지니고 있었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백성들은 더욱더 그를 닮아가야 하겠다!"
삼하 7:8-17
2. 놀라운 약속(7:8-17)
나단은 "밤에" 말씀을 묵상했던 것이 분명하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그에게 밤에 말씀하셨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어두울 때에 우리에게 말씀하실 때가 종종 있다!(창 15장, 하나님의 아브라함과의 언약) "주께서 밤에 나를 권고(방문)하시며"(시 17:3). 하나님은 나단에게 특별한 멧세지를 주셔서 왕에게 전하게하셨으며, 이 멧세지에는 다음의 사항들이 들어 있다.
하나님의 은혜(5-10절)-하나님은 이 민족이 애굽에서 나온 이후로 "천막집"에 거하셨으니 얼마나 은혜스러우신가! 그는 애굽의 신들이 즐기는 정교한 성전을 요구하시지 않으셨다. 그는 "자신을 겸손케 하셨으며" 장막에 거하시어 백성들과 함께 여행하셨고 그들보다 앞서 가시며 길을 열어 놓으셨다. 요한복음 1장 14절은 "말씀(그리스도)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taberna-cled)..."라고 기록되어 있다.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또다른 증거는 다윗을 대우하심에 있었다. 하나님은 목장으로부터 그를 부르셔서 보좌에 두셨다! 하나님은 그의 모든 적들을 물리쳐 승리를 거두게 하셨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을 축복의 장소로 인도하셨으며 다시는 이동치 않을 것이었다(10절/ 동사가 과거로 되어야 한다-"내가 약속했었던").
하나님의 목적(11-16절)-"집"이란 단어가 이 구절에서는 두 가지 의미를 지니고 있는데, 즉 물질적인 집, 성전(13절)의 의미와 인간의 집안, 다윗의 가족(11, 16, 13, 25, 27, 29절)의 의미이다. 왕의 가족을 "집"이라고 부르는 것은 관습이었으며, 마치 영국에서 "윈저 가(家)"라고 부르는 것과 같다. 다윗은 돌로 하나님의 집을 건축하기를 원하였으나, 하나님은 왕족, 곧 그의 보좌에서 다스릴 가족으로서 다윗의 집을 창설하려고 하셨다.
이 언약의 개념들에는 예수 그리스도를 세상에 보내시는 하나님의 목적이 포함되어 있으므로 중요하다. 우리는 우선 이 언약들 중의 일부가 다윗의 보좌를 계승한 솔로몬에게서 성취되었음을 주목해야 한다(대상 22:6-16 참조). 하나님은 그 가족 중의 다른 사람들이 사악한 음모들을 꾸몄음에도 불구하고 솔로몬을 보좌에 앉혔다. 그리고 하나님은 솔로몬에게 아름다운 성전을 건설하도록 허락하셨다. 솔로몬과 그의 후손들이 죄를 범하였을 때 하나님은 그의 약속을 지켜 그들을 징계하셨다(시 89:20-37 참조). 그러나 이 언약에 있는 어떤 사항은 예수 그리스도에게만 적용할 수 있음을 유의해야 할 것이다. 하나님은 그 보좌가 영원하리라고 말씀하신다(13절). 그리고 다윗의 집과 왕국이 영원할 것 또한 말씀하신다(16절). 우리는 오늘날 다윗의 후손들이 보좌에 앉아 있지 않음을 안다. 하나님은 그의 약속을 지키시지 않으셨는가? 하나님은 시편 83편 33-37절에서 다윗의 후손들을 징계할지라도 다윗과의 약속을 깨뜨리지는 않을 것이라고 언급하셨다.
이 약속의 궁극적인 성취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어졌다. 누가복음 1장 28-33절에서 천사가 마리아에게 보
낸 멧세지를 주의깊게 읽어보자. 그리고 하나님께서 다윗의 보좌와 왕국을 그리스도께 약속하신 것을 주목해 보자. 어떤 이들은 이 구절을 "영적으로 해석하여" 오늘날의 교회에 적용시킨다. 그러나 만일이 천사의 멧세지의 남은 부분을 문자 그대로 적용시킨다면 보좌와 왕국을 어떻게 영적으로 해석할 수 있는가?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아 스가랴는 그리스도께서 조상들의 언약을 성취하실 것이라고 분명히 언급하였다(눅 1:68-75). 우리가 확신하기는 그리스도께서 천년왕국 동안에 다윗의 보좌에 앉아 통치하실 때 다윗의 언약을 성취하실 것이다(계 20:1-6). 구약 예언서들에 나오는 모든 위대한 왕국 약속들이 성취될 때도 그 때이다. 사도행전 15장 13-18절에서 사도들은 하나님께서 이방인들을 권고하시기를 마치고 자기 이름으로 한 백성을 불러내신(교회) 후에 다윗의 집(장막)을 다시 세우실 것으로 이해했다."
삼하 7:18-29
3. 겸손한 기도(7:18-29)
다윗은 나단으로부터 멧세지를 받고 기도하러 갔으며 여호와의 말씀을 성취하시도록 하나님께 구한다(28-29절). 만일 우리가 교훈이나 설교를 들은 후에 "그 멧세지를 가지고" 기도한다면 우리는 얼마나 더 많이 얻을 수 있는 것일까!
하나님은 "우리가 구하고 생각하는 것을 넘어서 풍성하게" 주시기를 즐겨하신다. 다윗은 지상적인 성전을 건설하도록 허락을 받고자 기도했으나, 하나님은 영원한 왕국을 그에게 약속하심으로 응답하셨다! 이러한 놀라운 은혜의 행위는 다윗으로 하여금 여호와 앞에 겸손하게 하였다. 그리고 기도 중에 왕은 여호와의 위대하심을 찬양한다. 그는 이스라엘의 특권적인 지위를 깨닫고 있었다(22-24절). 오늘날 하나님의 백성들은 하나님이 얼마나 위대하시며 얼마나 위대한 일들을 이루셨던가 이해하고 있다! 그러나 다윗의 관심은 자기의 이름이 칭송을 받는 것이 아니었으며 여호와의 이름이 영화롭게 되는 것이었다(26절/ 빌 1:20-21). "주께서 말씀하셨으니 이제 그 약속들을 이루소서!"라고 다윗은 기도하였다. 아브라함처럼 다윗도 "약속하신 그 일을 능히 이루실 줄을 확신하였다"(롬 4:21).
다윗은 하나님께서 그에게 집을 짓도록 허락지 않으신 것을 인하여 실망하였는가? 아니다! 누가 건설하느냐 하는 것은 그에게 중요하지 않았다. 문제가 되는 것은 하나님의 뜻이 성취되는 것이며 하나님께서 영광을 받으시는 것이다!
구약의 약속들과 하나님이 유대인과 맺으신 언약들을 해석함에 있어 복음적인 그리스도인들 사이에 두 가지 근본적인 부류의 견해가 있다.
(1)전천년설-그리스도께서 지상에서 1,000년간 통치하실 때에 구약 언약들이 문자 그대로 성취될 것이라고 믿는다.
(2)후천년설-이 예언들과 언약들을 오늘날 교회에 영적으로 적용시킨다.
전천년설을 믿는 연구자들이 이 구절들을 문자 그대로 보는 반면, 후천년설을 믿는 학자들은 "영적으로" 보기를 더 좋아한다. 이 두 가지 설은 모두 성경의 영감을 믿는다. 다만 차이점은 영감의 문제에 있는 것이 아니라 해석에 있다.우리는 주 안에서 후천년설의 주장자들을 영접하며 비록 성경의 진리에 대한 견해가 다르다 해도 그들과 교제한다. 우리는 어떤 한 가지 해석을 교제의 시금석으로 삼아서는 안된다. 그러나 우리는 전천년설의 관점을 더 좋아하며, 구약 예언들과 언약들을 문자 그대로 해석하여 이들이 교회가 아닌 이스라엘 민족에 적용되는 것을 더 지지한다. 그리스도의 초림에 대한 구약의 모든 약속들은 문자 그대로 성취되었다. 따라서, 그의 미래 왕국에 대한 약속들 또한 문자적으로 성취되지 않으리라는 근거가 없다. 우리가 성경을 "영적으로 해석하기" 시작하면 모든 사람들은 자기 눈에 좋은 대로 해석할 것이며, 결국에는 해석의 다양성으로 말미암아 대립을 가져오게 될 것이다. 이 문제에 관해서는 찰스 라이리, "오늘날의 세대주의"를 참조하라(Chatles Ryrie, Dispensationalism Today, Moo-dy Press, 1965)."
삼하 9
▣ 절름발이 왕자-사무엘하 9장-
이 장은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가지는 구원에 관한 놀라운 예증을 제시한다. 다윗이 므비보셋을 대하는 태도는 확실히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사람"임을 보여 준다.
1. 므비보셋-잃어버린 죄인
그는 거절당한 가정에서 태어났다-요나단의 아들인 므비보셋은 거절당한 가족의 일원이었다. 그는 왕자의 아들이었으나 예루살렘성 밖에서 다른 사람에게 의존하여 살고 있었다. 오늘날 모든 잃어버린 죄인은 아담의 가족으로 죄아래에서 태어나며 저주아래 있게 된다(롬 5:12- /엡 2:1-3).
그는 떨어진 경험이 있어 걷지 못했다-그는 양 발을 쓰지 못하는 절름발이여서(3, 13절) 걸을 수가 없었다. 오늘날 사람들은 아담의 타락으로 인하여 죄인들이므로(롬 5:12)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행실을 하지 못하며, 순종함으로 행하지 않고 "이 세상의 풍속을 좇아 행한다"(엡 2:2). 인간들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려고 노력할 수는 있으나 자기 노력이나 선한 행실로서는 구원을 받을 수가 없다.
그는 가장 좋은 것을 잃고 있었다-그는 "로드발"에 살고 있었는데, 이 말은 "목초가 없는"이란 뜻으로서 이 세상을 잘 나타내는 말이다. 목장이 없고 영혼이 만족할 만한 장소가 없다. 인간들은 목이 마르고 배가 고프지만 이 세상과 그 즐거움은 만족을 주지 못한다.
그는 다윗의 도움이 없었다면 멸망했을 것이다-다윗이 그를 구원하기 위하여 은혜로운 발걸음을 내딛지 않았더라면 우리는 므비보셋이란 이름도 듣지 못했을 것이다. 다윗이 그에게 가서 그를 도왔으므로 그의 이름이 하나님의 말씀에 기록되어졌다.
잃어버린 죄인은 얼마나 비극적인 환경에 있는가! 그는 떨어져서(타락하여) 하나님을 기쁘게 할 수가(걸을 수가) 없다. 가정에서 분리되어 저주 아래있으며 스스로 도움을 줄 수가 없다.
2. 다윗-은혜로운 구원자
다윗이 먼저 움직였다-구원이란 주님께 속한 것이다! 그가 먼저 첫발을 내딛어야 한다. 왜냐하면 잃어버린 죄인들은 본질상 하나님을 찾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롬 3:10-12). 다윗은 불쌍한 므비보셋을 데리러 사람을 보냈다. 마치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를 세상에 보내어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게 하신 것"과 같다(눅 19:10).
다윗은 요나단을 위하여 행동했다-이 일은 몇 년 전에 다윗이 요나단과 맺은 사랑에서부터 비롯되었다(삼상 20:11-23). 다윗은 므비보셋을 본 적이 없었으나 요나단을 위하여 그를 사랑하였다. 우리는 우리 자신이나 또는 사회의 공로로 구원을 받는 것은 아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덕택으로 구원을 받는다! 우리는 그분 덕에 용서를 받는다! 우리는 우리를 "사랑하시는 자 안에서" 영접을 받는다(엡 1:6). 아버지 하나님께서 구주를 믿고 의지하는 모든 사람들을 예수로 인하여 구원하실 것은 "영원한 언약"의 일부이다(히 13:20-21).
친절에서 나온 행위였다-3절에서 다윗은 "여호와의 친절"이라고 말한다! 그리스도는 우리를 구원하시는 일을 통하여 그의 친절을 나타내 보이셨다(엡 2:7/딛 3:4-7). 다윗의 보좌는 공의의 보좌가 아니라 은혜의 보좌였다. 므비보셋은 다윗에게 무엇을 주장할 만한 근거가 없었으며, 선물을 받을 아무런 이유가 없었다. 만일 그가 정의를 요구하며 보좌 앞에 나타난다면 그는 저주를 받았을 것이다!
다윗은 개인적으로 초청하였으며 그가 왔다-다윗은 종을 보내어 그를 데려오게 했다(5절). 그러나 종은 왕에게 여유를 주기 위하여 물러나 있었다. 목사나 부흥강사로 말미암아 구원받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종이 할 수 있는 모든 일이란 죄인으로 하여금 그리스도 앞에 서도록 안내하는 것뿐이다. 므비보셋이 다윗 앞에 겸손하게 엎드리는 것에 유의하자. 왜냐하면 그는 저주받은 사람으로서 자기의 위치를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다윗은 "므비보셋"을 부를 때 얼마나 부드럽게 말했던가! "그는 자기의 양의 이름을 불러 인도한다."(요 10:3).
다윗은 그들 자신의 가족으로 삼는다-오늘날 많은 죄인들처럼 므비보셋은 종이 되기를 원하였다(6, 8절). 그러나 다윗은 그를 아들로 삼았다(11절). 탕자도 역시 종이 되기를 원하였다. 그러나 아무도 일함으로써 구원을 벌 수는 없다. "보라 우리는 이제 하나님의 아들들이다!"(요일 3:1/요 1:11-13).
다윗은 그에게 평화의 말을 한다-"두려워 말라 !" 이것이 두려워 떠는 절름발이에게 다윗이 한 은혜의 말이었다. "두려워 말라"는 말은 그리스도께서모든 믿는 죄인들에게 하시는 말씀이다. "그러므로... 정죄함이 없나니"(롬 8:1). 하나님의 말씀을 통하여 우리는 하나님의 평화를 누린다.
다윗은 그의 모든 필요를 공급하였다(9-10절)-므비보셋은 더이상 "목장이 없는" 곳에 살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는 매일 왕의 식탁에서 먹을 것이기 때문이다. 더구나 종 시바와 그의 아들들은 므비보셋의 종들이 되었다! 다윗은 므비보셋에게 그가 받을 모든 유업을 주었다. 이처럼 그리스도께서도 자기 가족에게 영적이고 물질적인 모든 필요를 만족시켜 주신다. 그는 우리에게 영원한 유업을 주신다(엡 1:11/엡 1:18/벧전 1:4-/골 1:12). 만일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우리가 받을 정당한 유업을 주셨다면 우리는 지옥으로 가게 될 것이다! 그러나 그의 은혜 가운데서 하나님은 우리를 택하여 그와 더불어 우리의 유업을 나누게 하셨는데 우리는 "그리스도와 함께한 후사"이기 때문이다(롬 8:17).
다윗은 심판으로부터 그를 보호하였다-사무엘하 21장 1-11절에서 하나님은 자기 백성을 징계하시기 위하여 그 땅에 기근을 보내셨다. 다윗이 하나님의 뜻을 구했을 때에, 이 기근은 사울이 기브온 사람들을 처리했던 사악한 방법때문인 것이 밝혀졌다. 성경에는 이 사건에 대한 기록은 없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이 사람들과 조약을 맺었으므로(수 9장), 사울의 행동은 진리에 대한 직접적인 위반이었으며 하나님께 대항하는 죄였다. 하나님은 이 죄를 밝혀 심판하시기까지 여러 해를 기다리셨다. "당신의 죄가 당신을 찾아낼 것을 명심하라".
사울의 자손들을 희생시켜 제물로 바침으로 이 백성을 심판하는 것은 오늘날 은혜 시대에 사는 우리에게 해당되는 것은 아니다. 하나님께서 과거에 이런 일이 일어나도록 허락하셨던 것으로 충분하다. 다윗이 므비보셋을 따로 분리시켜 희생되지 않게 한 것에 유의하자. 사울의 자손 가운데 또다른 므비보셋이 있다. 그러나 다윗은 그 차이를 알고 있었다. 오늘날 하나님의 자녀라고 고백하는 사람들이 많다. 아마도 우리는 진짜를 구별해낼 수는 없을 것이나, 심판의 날이 이르면 하나님은 진실로 자기에게 속한 사람들을 드러내실 것이다.
이 실례를 통하여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가지는 구원이 "훨씬 많은 것"을 제공함을 명심해야 할 것은 물론이다. 다윗은 므비보셋을 육체의 위험에서 건져 육신의 필요로 하는 것을 공급하였다. 그러나 그리스도는 영원한 지옥으로부터 우리를 구원하셨으며 우리가 영적으로 그리고 육신적으로 필요한 매일의 필요에 대처하신다. 우리는 어떤 지상의 왕의 아들들이 아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들이다. 사무엘하 16장 1-4절은 그 차이를 설명해 준다. 다윗이 그의 아들 압살롬의 반역이 있는 동안 예루살렘에서 도망하였을 때, 종 시바가 그를 만나 므비보셋에 관하여 고발을 하였다. 다윗은 그 고발을 믿고 성급히 므비보셋의 땅을 모두 그 시종에게 주었다. 그러나 나중에 다윗이 예루살렘으로 돌아왔을 때 그는 므비보셋을 만나 진실을 알게 되었다(삼하 19:24-30). 시바가 그 절름발이에 대해 거짓말을 한 것이다 ! 그는 므비보셋이 다윗과 함께 도망할 때 사용하도록 동물을 제공하겠다고 약속하고는 그 약속을 지키지 않았다. 시바는 무죄한 사람을 중상했으며, 다윗은 이 중상자의 말을 믿었던 것이다 ! 물론 이와 같은 일은 예수 그리스도와 신자 사이에는 생기지 않을 것이다. "누가 능히 하나님의 택하신 자들을 송사하리요"(롬 8:33-39). 사단은 우리를 고발하고 중상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리스도는 우리를 위한 그의 사랑에 있어서 또는 우리를 대하신 그의 약속에 있어 결코 변하지 않을 것이다.
우리는 "왕의 돌아오심"에 대하여 신자들이 마땅히 가져야 할 태도를 므비보셋을 통하여 볼 수가 있다. 이 추방된 절름발이는 그의 왕이 돌아올 날을 기다리며 살았다. 그는 자신의 편안함과 위안을 생각한 것이 아니라 그를 사랑하고 죽음에서 그를 건져준 한 분의 귀환만을 기다리며 기도하였다. 비록 자기 소유의 땅을 박탈당하였지만 므비보셋은 다윗이 돌아오는 것을 한없이 기뻐하였다 !"
삼하 11:1-4
▣ 다윗의 죄와 회개-사무엘하 11-12장-
성경은 하나님의 백성의 죄들을 분명히 드러내었다. 그러나 죄가 용납을 받은 일은 결코 없다. 오늘날 이른바 "생명의 진실"이란 책들과는 달리 성경은 사실을 언급하고 교훈을 그려내지만 상상에 머물러 있도록 허락하지는 않는다. "말하기도 부끄러운 일들도 있으며"(엡 5:12), 본 장에 나오는 사건들은 성령의 지시를 받는 마음과 정신으로 연
구해야만 한다. "자신을 돌아보아 우리도 시험을 받을까 조심하라"(갈 6:1).
1. 다윗과 밧세바(11:1-4)
고의적으로 이러한 죄를 범했던 다윗은 정열적인 청년이 아니라 중년에 들어선 하나님의 사람이었다. 그가 범죄하게 된 이유는 자명하다. 그는 승리와 번영을 누린 후에 자신감을 얻었고, 전쟁터에 있어야 할 때 집에 머물러 있음으로써 불순종하였을 뿐아니라 저녁 시간에 침상에 누워 게으름을 피우고 있었다. 또한 자신을 제어해야 할 때에 자기의 욕망을 자유롭게 풀어놓음으로써 자기관대에 빠지고, 눈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에 굴복하도록 부주의하였다(요일 2:16).
야고보서 1장 13-15절은 다윗의 경우를 완벽하게 묘사한다. 그의 욕망은 눈으로 봄으로써 활성화되었고 이를 제어하는 데에 실패하였으며, 욕망을 그의 마음에 상상력을 일으켰다. 그럼으로써, 그의 의지는 굴복되어 죄로 인도되어졌으며 그의 죄는 죽음으로 이끌어 갔다. 그는 마태복음 26장 41절에서 명령하신 대로 "깨어있어 기도하지 않았으며" 그의 "방황하는 눈"을 결정적으로 처리하지 못하였다(마 5:29/마 18:9- 이하).
다윗은 하나님의 말씀을 상고하거나(출 20:14), 또는 밧세바가 누구의 딸이며 아내라는 점(3절)을 고려하여 유혹을 물리칠 수도 있었다(시험을 받는 것은 죄가 아니다). 사실, 그녀는 다윗의 가장 용맹한 장군 중의 한 사람의 아내였고(23:29) 또한 아히도벨의 손녀였다. 아히도벨은 후에 다윗에게 반역하고 압살롬의 수하에 가담하였다(23:34/삼하 16-17). 다윗에게는 이미 많은 아내들이 있었고, 하나님은 더 주실 수도 있었다(12:8). 이 경건한 사람에 대한 기록이 헷사람 우리아의 문제로 인해 영원히 망쳐졌다(왕상 15:5). 물론, 그 여인이 이 죄에 동참했다는 것은 인정해야 할 것이나, 다윗은 왕이요 거룩한 종으로서 더욱 문책을 받아야 한다."
삼하 11:5-27
2. 다윗과 우리아(11:5-27)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는다"고 야고보서 1장 15절은 경고한다. 그리고 이 말씀은 다윗의 경험에 있어서 얼마나 참된 말인가! 여호와를 불러 자신의 죄를 고백하는 대신 왕은 그 남편을 불러오게 했으며 집으로 보내어 술수를 쓰려고 하였다. 이렇게 하면 죄를 감출 수 있을 것이었다. 그러나 우리아는 그의 왕보다도 더 나은 사람이었으며 집으로 가기를 거절하였다! 1-2절에 나오는 다윗의 방종과 11절에 나오는 우리아의 훈련된 생활을 비교해 보라. 그의 계획이 실패하자 다윗은 새로운 속임수를 시도하였으며 그 사람을 술 취하게 하였다! 술의 영향 아래 있으면서도 우리아는 술 취하지 않은 다윗보다 더욱 훈련된 면을 보여 주었다!
죄는 여전히 자라고 있었다. 다윗은 이 사람을 죽이고 그의 아내를 취하기로 결심하였다. 요압은 협력하는 정도가 아니라 적극적이었다. 왜냐하면 이 일은 나중에 왕의 이점을 취할 수 있는 기회를 주기 때문이다. 우리아는 그 날에 자기의 죽음을 보장하는 편지를 가지고 갔다. 이 계획은 성공했으며 용감한 군인은 죽었다. 다윗은 "겉으로는 슬픈 척 꾸미다가" 곡하는 주간이 끝나기를 기다려 과부와 결혼하였다. 궁중에 있는 어떤 이들은 다윗이 밧세바를 이처럼 위로하는 것을 보고 높이 평가했을 것이다. 그러나 주께서는 달리 생각하셨다. "자기의 죄를 숨기는 자는 형통치 못한다"(잠 28:13)."
삼하 12
3. 다윗과 여호와(12장)
다윗의 고백(1-14절)-적어도 일년은 지났으며 이 기간 동안 다윗은 죄를 숨기고 있었다. 시편 32편과 51편을 읽고 이 어려운 기간 동안에 다윗의 생활에 대한 설명을 알아보자. 그는 육체적으로 연약해지고 병이 들었다. 그는 기쁨을 잃었고 간증을 잃었으며, 그의 능력을 잃었다. 하나님은 다윗에게 일을 바르게 처리할 시간을 많이 주셨으나 자기의 죄를 숨기기를 고집하였다. 만일 그가 참된 회개로써 자신의 문제를 여호와께 가지고 나아갔다면 그 후의 일들은 달라졌을 것이다. 마침내 하나님은 선지자 나단을 보내셨는데 축복의 말은 한 마디도 없고(7장) 다만 죄를 깨닫게 하는 멧세지였다. 다른 사람의 죄를 깨우친다는 것은 얼마나 쉬운가! 나단은 두려움없이 다윗에게 "당신이 그 사람이라"고 말했다.
우리는 다윗에게 하나님의 말씀 아래 엎드리고 자신의 죄를 시인하라고 권고해야만 한다. 그는 나단을 죽일 수도 있었다! 나중에 다윗은 아들의 이름을 나단이라고 붙이기도 하였다(대상 3:5/눅 3:31). 하나님은 다윗의 죄를 용서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 그러나 하나님은 죄가 "죽음을 낳는"(약 1:15) 일을 막을수는 없으셨다. 하나님의 은혜는 용서한다. 그러나 하나님의 통치는 그 사람이 뿌린 씨를 거두게 하실 수 밖에 없다(시 99:8 참조)."네 배로 갚아야 한다"고 다윗은 선언하였다. 하나님은 이 선언을 받아들이셨다. 검이 다윗의 집에서 떠나지 않을 것이었다. 어린 젖먹이가 죽었고 압살롬은 다말을 범한 암논을 죽였으며(13장), 요압은 압살롬을 죽였고(18:9-17), 아도니야는 브나야에게 죽임을 당하였다(왕상 2:25). 네 배였다! 이런 시련들에다 첨부하여 다말은 무섭게 무너져버렸고 다윗의 아내들은 압살롬에게 부끄러운 취급을 당했다(12:11/16:20-23). 이에 압살롬의 반역이 더하여진다. 다윗은 한 순간의 육욕으로 말미암아 엄청난 값을 치르게 되었음을 볼 수 있다. 그는 육욕을 심고 똑같은 것을 거두었으며, 살인으로 심고 살인을 거두었다. "사람이 무엇으로 심든지 그대로 거두리라"(갈 6:7).
다윗의 통회(15-25절)-즉각적으로 하나님의 징계의 손길이 움직였으며 아이가 아프게 되고 나단은 그 아이가 죽을 것이라고 말했다(14절). 그러나 다윗은 그 아이의 생명을 위하여 금식하며 기도하였다. 그는 그의 종들의 말을 듣지 않았으며, 그 주말에는 아이가 죽었다. 다윗의 금식과 기도는 하나님의 결정을 바꿀 수가 없었다. 그는 죽음에 이르는 죄를 범했으며 이에 대하여 기도하는 것은 잘못이었다(요일 5:14-16). 그러나 우리는 아이와 어머니에 대한 다윗의 관심, 그리고 하나님의 선하심에 대한 그의 믿음을 높이 평가한다. 우리는 또한 그가 하나님의 말씀을 신뢰한 것을 인정한다. 왜냐하면 그는 그 아이가 천국에 간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23절). 우리가 다윗의 죄와 이에 따른 모든 문제거리들을 소름이 끼치도록 싫어하지만 슬퍼하는 부모들에게 주는 놀라운 확신의 구절들을 인하여 하나님께 감사를 드린다. "죄가 많은 곳에 은혜가 더욱 넘친다." 죽은 자를 위하여 기도하는 것이 잘못임을 주목하라.
다윗의 정복(26-31절)-이 비극적인 이야기는 다윗이 집에 있으며 제멋대로 행한 데에서 시작되었다. 그런데 이야기가 끝날 때 쯤에 다윗은 그가 있어야 할 바른 위치인 전쟁터에 있으며, 그 민족을 승리로 인도하고 있었다. 하나님께서는 다윗의 죄에도 불구하고 다윗을 기꺼이 사용하시는 것을 볼 때 격려가 된다. 그는 죄를 고백하였고 하나님은 그를 용서하셨다. 이제 그는 주님을 위하여 다시금 싸울 수가 있었다. 신자들이 죄를 범하는 것은 나쁜 일이다. 그런데 이들이 과거에 살면서 죄를 고백한 후에도 자신을 쓸모없다고 생각하는 것도 나쁘다. 사단은 하나님께서 이미 용서하시고 잊으신 죄들에 대한 기억들로 하나님의 백성을 흔들어 높기를 좋아한다!
24-25절에는 하나님의 은혜가 정말로 놀랍게 빛난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밧세바를 택하여 다음 왕의 어머니가 되게 하셨기 때문이다! "솔로몬"이란 "평화"를 뜻하며, 여디디야란 뜻은 "하나님께 사랑을 받은 자"란 뜻이다. 하나님은 저주를 축복으로 바꾸셨다. 왜냐하면 솔로몬은 22장 9절에서 다윗에게 주신 약속을 성취하였기 때문이다.
이 내용은 우리 모두에게 "넘어질까 조심하라"는 경고가 되어야 마땅하다(고전 10:12).고린도전서 10장 13절은 우리가 시험을 당할 때에 피할 길을 주신다고 약속한다. 그러나 다윗의 경우에서와 같이 우리의 욕망이 일하도록 버려두면 유혹을 정복할 수가 없다. 우리는 죄의 시작을 조심해서 알아차리고 우리의 상상력을 정결하도록 지켜야 한다. 바울은 우리를 죄악으로 이끌어가는 몸의 지체를 "죽음에 내어 주라"(억제하라)고 우리에게 명령하였다(골 3장/ 롬 6장). 우리는 모두 "깨어 기도해야" 하며 결국 육신의 일을 도모하지 말아야 한다(롬 13:14)."
삼하 15:1-1▣ 압살롬의 반역-사무엘하 15-19장-
다윗은 이제 자기 죄에 대한 슬픈 추수를 하고 있다(삼하 12:10-12 참조). 우리가 우리의 죄를 고백할 때에 하나님은 은혜로우셔서 용서하신다. 하나님이 우리의 죄에 대한 비극적인 결과에 개입하셔도 그의 거룩함에 위배되지는 않으신다.
1. 왕자의 반역(15:1-12)
완전한 줄거리를 알려면 13, 14장을 읽으라. 압살롬의 아름다운 동생 다말은 이복 오빠인 암논에게 욕을 당했는데, 그는 다윗의 장남이었다(3:2). 다윗은 밧세바와 더불어 간음죄를 범하였는데 그와 같은 죄가 자기의 집안에서 저질러졌다!
압살롬은 암논이 행한 일을 알게 되었을 때 마음에 두 가지 목적을 지녔다. 암논을 죽임으로써 다말에게 복수하고 싶었고 동시에 보좌에 대한 분명한 상속자가 되어 지는 것이다. 다윗이 자기의 가족에 대해 훈계할 만한 영향력을 가지고 있지 못한 것은 너무도 나쁜 일이었다. 13장 21절에서 우리는 다윗이 화를 낸 것을 읽는다. 그러나 일들을
교정하기 위하여 그가 어떤 행동을 취했다는 말은 없다. 아마도 자기 자신의 죄에 대한 기억이 이를 저지시켰을 것이다. 압살롬은 자기 손으로 일을 꾸미어 암논을 죽였다. 그리고는 이방 영역으로 도망하여 어머니의 친척에게 가서 숨었다(13:37/3:3 참조). 14장에서 요압은 압살롬을 위하여 중재하였으며 다윗에게 술수를 써서 그 고집센 아들을 집으로 돌아오게 하도록 하였다.
압살롬은 단시일 내에 자기를 추종하는 충성된 무리들을 모으는 데에 성공하였다. 그는 공개적으로 그의 아버지의 행정을 비난하였으며 은밀하게 백성들의 마음을 훔쳤다(15:7). 얼마간 지난 후에 압살롬은 그의 움직임이 공개적인 반란을 감행할 만큼 충분히 강해졌음을 발견하였다. 다윗의 고문인 아히도벨이 반역자의 편에 선 것은 놀랄 일이 아니다. 왜냐하면 다윗이 취한 밧세바는 그의 손녀이기 때문이다(11:3/23:34). 일은 압살롬이 성공하여 아버지의 왕관을 빼앗을 것처럼 보였다.
삼하 15:13-16:23
2. 백성들의 반응(15:13-16:23)
다윗이 힘으로 다스리고 있을 때 그의 실제 적들은 감히 그에게 반대하지 못하였다. 그러나 압살롬의 반역은 왕에게 저항하여 그를 해치울 놀라운 기회가 될 것으로 생각케 했다. 이 때는 거짓된 자들로부터 참된 자들을 걸러내는 기간이었다.
다윗의 친구들(15:13-37)-다윗에게는 예루살렘을 떠나는 것이 현명한 이동이었다. 왜냐하면 자기의 궁에서 죄수가 된다면 압살롬이 그를 지키기가 용이해지기 때문이다. 가드 사람 잇대의 지휘 하에 있는 이방인 군사들이 왕에게 충성하였음을 주목하자. 이 사람들은 그의 망명의 시련 기간 동안에 다윗의 편에서 있었던 사람들이었다. 두 제사장 사독과 아비아달이 왕을 따르기 위해서 길을 떠났으나, 다윗은 그들에게 성으로 돌아가라고 말했다. 이것은 신앙의 발걸음을 내딛은 것이었다. 다윗은 하나님께서 그에게 승리를 주시어 보좌로 돌아가게 하실 것을 믿고 있었다. 다윗은 엘리의 아들들이 성급하게 법궤를 전쟁터로 가져가는 것같은 실수를 범하지는 않았다(삼상 4-5장). 그는 제사장들을 보내어 법궤를 예루살렘으로 가져가게 했다. 물론 제사장들은 그를 위하여 정탐할수 있었으며 그들의 아들들에게 정보를 주어 보냈다. 또한 압살롬의 동맹자로 가장하여 성으로 돌아간 후새의 모략은 아히도벨의 모략을 변경시킬 수 있었다.
다윗과 그의 보잘것 없는 작은 군대가 성에서 도망하여 기드론 강을 건너는 모습은 슬픈 광경이다. 이것은 예수께서 예루살렘에서 거절당하여 성을 떠나 기도하러 기드론을 건너가신 일을 생각나게 한다(요 18:1). 다윗의 상황에 있어서 "유다"란 그의 이전 친구인 아히도벨을 말한다. 아마도 시편 55편 12-15절은 이 때에 씌어졌을 것이다. 우리는 시편 3편이 이 반역의 기간 동안에 씌어졌음을 안다. 이 시를 읽고 다윗이 어디에 믿음을 두고 있는지 알아보자.
다윗의 적(16장)-반역의 기간은 모든 것이 드러나던 기간이었다. 우리는 이때 사람이 진실로 무엇을 믿으며 어디에 서 있는지 보게 된다. 시바가 다윗에게 므비보셋에 대하여 거짓말을 하였을 때(19:24-30), 그는 성급한 판단을 내렸었다. 사울 집안의 친척인 시므이는 공개적으로 다윗에 대한 증오를 나타내었다. 시련 중에서의 다윗의 인내는 놀랄 만하다. 그는 여호와께서 적절한 때에 그에게 보복하실 것임을 알고 있었다. 아비새는 그 사람의 머리를 자르고 싶어했으나(눅 9:54/벧전 2:23) 다윗은 그를 멈추게 했다. 다윗은 광야에서 뿐아니라 자기 궁에서도 수치를 당하고 있었다. 왜냐하면 아히도벨은 압살롬에게 권하여 다윗의 첩들을 취하도록 하였으며 그럼으로써 공개적으로 그의 아버지와 관계를 끊는 것이었다. 이것은 12장 11-12절에 있는 하나님의 예언의 성취였다.
오늘날 우리 주 예수께서 인간들에게 업신여김을 받으시고 거절을 당하신다. 마치 다윗이 반역의 기간 동안에 당했던 일과 같다. 오늘날 사람들이 왕에게 충성스럽게 남아 있기 위해서는 용기가 필요하다. 하지만 예수께서 돌아오실 때는 하나님께서 이러한 충성에 보상해 주실 것임을 확신할 수 있다."
삼하 17-19
3. 여호와의 응보(17-19장)
하나님은 이 반역을 다윗이 우리아와 밧세바와 연관된 죄에 대해 치러야할 댓가의 일부로 허락하셨다. 하나님은 이 기회를 선용하여 다윗의 왕국을 정화하셨으며, 불충성한 자들과 충성된 자들을 분리해 놓으셨다. 마침내 응보의 날이 임했던 것이다. 하나님의 심판이 내릴 때는 즉각적으로 정확하게 닥칠 것이다.
아히도벨의 죽음(17장)-아히도벨의 계획이 둘 중에서 더욱 좋은 것이었음은 의심할 나위가 없다. 그러나 하나님은 압살롬이 이를 거절하도록 하셨다. 압살롬 자신이 군대를 인도하도록 제안함으로써 심리학적으로 접근하는 후새에 주목하자(17:11). 이것은 남자의 공명심에 호소하는 것이었으며, 그 허영은 그를 죽음으로 인도해 갔을 뿐이다! 아히도벨은 그의 작전이 거절당한 것을 알게 되자 자기의 생명을 끊었다. 이것은 신약에서 그리스도의 경험과 유사한 또 한가지의 일이다. 왜냐하면 유다가 밖에 나가서 목매어 죽었기 때문이다.
압살롬의 죽음(18:1-19:15)-허황된 왕자는 후새의 충고를 따랐으며 그의 군대를 에브라임의 숲으로 인도해 갔다. 물론 그는 전쟁을 치를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다. "교만은 패망의 선봉이요 거만한 마음은 넘어짐의 앞잡이이다"(잠 16:18). 그의 머리와 긴 머리카락이 가지에 걸려(14:25-26) 내려올 수가 없었다(욥 20:1-7). 요압은 다윗의 명령을 불순종하고(18:5) 이 반역자를 죽였다. 그리고는 이 사실을 왕에게 전하였는데, 이 소식을 들은 다윗은 비통하게 울었다. 다윗이 자신에게 그같은 죄를 범한 사람을 향해 어떻게 그처럼 애곡을 할 수 있었는지 우리는 설명할 수가 없다. 그러나 그는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사람"이었고 자기 아들에 대한 풍성한 사랑 가운데서 어떠한 잘못도 보지 못할 수 있는 것이다. 사실상 다윗의 비정상적인 슬픔은 그로 하여금 거의 왕국을 잃게 했다!
시므이가 용서를 받음(19:16-23)-반역자들은 왕이 돌아올 때 "태도를 바꾸려" 할 것이다! 다윗왕은 자기 왕국의 조각들을 모으려 하고 있었다. 그래서 그는 지파들 간의 불화를 피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그러나 후에 솔로몬은 시므이에게 마땅히 받을 것을 받게 하였다(왕상 2:36-46).
시바와 므비보셋이 화해함(19:24-30)-시바가 시므이의 무리와 함께 도착하였는지는 기록되어 있지 않다(16-17절). 물론 그는 자기의 주인에게 거짓말을 하였으며 다윗은 정당한 재판을 내리고 싶었다. 말하기는 슬프지만 이전의 경솔한 재판은 문제를 완전히 해결하는 데 어려움을 두었다. 그러나 우리는 다윗의 태도의 진가를 인정한다. 도성에 왕이 없을 때에 므비보셋이 보인 관심있는 태도는 우리에게 좋은 본보기이다.바르실래가 보상받음(19:31-42)-그는 다윗의 일행이 도움을 필요로 할 때에 이에 대처하였다(17:27-29). 이 친절한 행위로 말미암아 그가 친구들을 잃었을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그러나 왕이 돌아왔을 때 그는 놀랍게 상을 받게 되었다! 바르실래는 그의 집을 떠나고 싶지 않았으며 사랑하는 사람들과 헤어져 죽게 되기를 원치 않았다. 그래서 그는 김함(아들이나 손자에게)에게 그 축복을 주도록 제안하였다. 예레미야 41장 17절은 다윗이 김함에게 베들레헴 근처의 땅을 주었으며 그의 가족이 오랫동안 거기서 살았음을 전해 준다.
다윗이 거절을 당했다가 다시 돌아온 이 전체의 이야기는 물론 오늘날 그리스도를 향하여 인간이 가지는 태도를 예증한다. 떠나있는 왕의 편에 남은 충성된 사람들은 몇 안된다. 그리고 반역하기를 좋아하는 이기적인 대다수가 있다. 그러나 왕이 돌아올 때 무슨 일이 생길 것인가? 그의 추종자들인 우리는 왕에게 무엇을 돌려드릴 수 있는가?"
삼하 24:1-9
▣ 다윗의 큰죄-사무엘하 24장-
역대상 21장에는 다윗의 생애에 있어서 범한 큰 죄에 대하여 다루고 있다. 여기에 하나님의 목적을 성취하기 위해서 사단이 일할 수 있도록 허용되어졌던 또다른 실례가 있다(눅 22:31-34).
1. 죄(24:1-9)
백성의 인구조사 배후에는 다윗의 어떤 욕망이 놓여 있었겠는가? 아마도 교만이었을 것이다. 그는 많은 위대한 승리들을 경험했으며(대상 18-20장) 성공에 대한 영광을 받고 싶었던 것같다. 인구조사 자체에는 물론 아무 잘못이 없었다. 왜냐하면 그들의 민족 역사에 있어서 가끔 있었던 일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는 인간을 높인 인구조사가 결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지 못할 것임을 명심해야만 한다.
출애굽기 30장 11-16절에는 고려해 보아야 할 또다른 요소가 있다. 인구조사에는 각 사람이 지불해야 하는 "속전"(구속의 돈)과 연관이 있으며 이 은 한 세겔은 그들이 여호와께서 값주고 사신 소유인 것을 생각나게 하는 것이었다. 출애굽기 30장 12절은 만일 백성이 그들의 속전을 소홀히 하면 나라에 재앙을 내릴 것이며 숫적으로 감소하게 될 것이라고 경고한다. 그런데 바로 이런 일이 발생하였다. 하나님은 다윗에게 거의 10개월을 주셔서 마음을 바꾸어 징계를 피하도록 하셨다(8절). 또한 하나님은 단념시키려고 요압의 지혜로운 권고를 사용하기조차 하셨으나 다윗은 들으려 하지 않았다. 하나님의 자녀들이 때때로 마음에 고집하여 자기의 길을 주장하는 것은 참으로 안된 일이다! 다윗의 죄는 경솔해서 범한 것이 아니었다. 그는 냉철하게 이 일을 수행하였으며 정확하게 계산하였다. 그는 하나님께 대항하여 반항하고 있었다.
이 죄와 밧세바와의 죄 사이에는 흥미로운 대조점이 있다.
(1)하나는 영적인 죄(교만)였고 다른 하나는 육적인 죄였다.
(2)여기서는 고의적인 고집으로 행하였고 밧세바와의 죄는 육신의 넘치는 욕망의 결과로 온 것이다.
(3)이 죄는 민족이 연관되었으며 70,000명이 죽었고, 다른 하나는 가족의 문제였으며 몇 명이 개입되었을 뿐이다.
(4)이 두 가지 죄에서 하나님은 다윗에게 회개할 시간을 주셨으나 그는 너무 오랫동안 기다렸다.
우리는 그 교만과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반역이 무서운 죄라고 생각하지 않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다윗의 생애에 있어서는 그가 간음을 범하였을 때보다도 더 큰 슬픔과 비극을 산출하였다! 우리는 "육과 영의" 죄들을 삼가야만 한다(고후 7:1)."
삼하 24:10-17
2. 고난(24:10-17)
"죄의 삯은 사망이다." 다윗은 심판이 임하기 전에 마음에 죄를 깨닫고 있었다. 그는 물론 자신과 여호와께 정직하였으나 그외 깨우침과 회개는 너무 늦었다. 12장 13절에서 다윗은 "내가 죄를 범하였노라"고 말하였다. 그런데 여기서는 "내가 큰 죄를 범하였나이다"라고 말한다. 인간의 관점에서 볼 때는 민족의 수를 센다는 것은 간음이나 살인보다 더 큰 죄로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하나님의 관점으로 볼 때는 그 불순종과 그 결과에 있어서 더 큰 죄였다. 이 세상에 계실때 예수께서는 세리들과 죄인들은 용서하셨으나 교만하고 반역한 사람들에 대해서는 신랄하셨다. 물론 영적인 것이나 육적인 것이나 둘 다 죄인 것은 마찬가지이며, 인간이 둘 중에 하나에만 개입될 수는 없는 일이지만, 우리는 교만과 고집센 불순종을 과소평가해서는 안되겠다.
하나님은 다윗에게 자신의 징계를 선택하게 하셨다. 그의 선택은 마음의 믿음과 사랑을 보여 주었다(13절의 "7년 기근"은 다른 두 형벌의 3년, 3개월과 비슷해지도록 3년으로 보아야 한다). 다윗은 인간들의 손보다는 자비로운 여호와의 손에 맞기를 원하였다. 그리하여, 오전 6시에 천사가 와서 백성들에게 재앙을 내리기 시작하였다. 저녁 제사를 드릴 즈음에(오후 3시) 천사는 70,000명의 유대인을 죽였다! 다윗과 그의 장관들은 심판하는 천사를 보았으며 다윗은 즉각적으로 백성을 위하여 중재에 나섰다. "이 양무리는 무엇을 행하였나이까? 주의 손으로 나를 치소서!" 그러나 하나님은 전체 민족에 대해 분명한 원인을 가지고 계셨으며(24:1), 다윗의 죄를 이용하여 백성들을 심판하신 것임을 기억해야 할 것이다. 아마도 백성들 중의 많은 사람들이 압살롬을 따랐을 때에 다윗에 대항하여 반역한 죄를 벌하고 계신 것일 수도 있다.
권위자의 위치에 있는 사람들을 위한 실천적인 경고가 여기 나온다. 직분이 높으면 높을수록 선악 간에 그 영향력이란 더 크기 마련이다. 레위기 4장에서 만일 대제사장이 죄를 범하면 제물로 황소를 드려야 했으며, 전 회중이 범죄하였을 경우에도 하나님은 똑같은 제사를 요구하셨다(13-14절)! 다윗의 죄가 이번에는 전민족과 연관이 되었으며, 이것은 그의 "가족의 죄"가 전체 집안에 연관된 것과 같다."
삼하 24:18-25
3. 희생 제사(24:18-25)
서로 다른 두 가지 요소가 심판을 멈추는 데에 개입되어 있었는데 곧 여호와의자비(16절)와, 죄인들의 고백과 희생(17절)이다. 하나님은 그의 종에게 멧세지를 보내어 그가 천사를 보았던 아라우나(또는 오르난)의 타작마당에 제단을 세우게 하셨다. 다윗과 그의 장관들은 그곳으로 가서 값을 치르고 샀다. 그는 그 "장소"를 위해서는 금 600세겔(전체
지역/ 대상 21:25)을 주었으며 황소와 타작곡식을 위해서는 은 50세겔을 주었다. 오르난은 전체 소유를 왕에게 드리려 했으나 다윗은 받지 않았다. 다윗은 다른 사람의 희생을 여호와께 드리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값싼 희생은 전혀 희생이 없는 것보다 더 나쁘다. 이것은 우리가 그리스도인의 행보(行步) 가운데서 본받아야 할 좋은 원리이다.
다윗은 즉각적으로 여호와께 황소를 번제로 드렸으며, 피흘림은 죄를 처리하였다. 역대하 3장 1절은 바로 이 자리에 솔로몬의 성전이 들어섰음을 알려 준다. 하나님은 저주를 축복으로 바꾸실 수가 있으시다! 다윗의 간음 사건에 관련되었던 밧세바에게서 솔로몬이 태어났다는 것은 흥미로운 일이다. 더구나 솔로몬은 다음 왕이 되었을 뿐아니라, 백성을 계수한 다윗의 큰 죄와 연관된 지점에 성전을 세웠다!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의 사역은 이와 같다. 물론 "선을 이루기 위하여 악을 행해서는" 안된다(롬 3:8). 그러나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룸"(롬 8:28)을 확신하는 가운데 쉼을 얻을 수 있어야 한다.
본 장에서 몇 가지 교훈에 주목하자.
(1)사람은 시험에서 결코 벗어나 있지 못한다.
다윗이 이 죄를 범하였을 때는 경험이 없는 젊은이가 아니었다! 만일 그가 "깨어 기도했더라면" 시험에 들지 않았을 것이며 죄에 그렇게 쉽게 빠지지 않았을 것이다.
(2)하나님은 은혜롭게도 회개할 시간을 주셨다.
그는 다윗에게 이 죄를 처리하고 일들을 바로잡도록 9개월 이상의 시간을 주셨다. "여호와를 만날 만한 때에 찾으라."
(3)영적인 죄들은 큰 해를 끼친다.
모든 죄들이 사악하며 피해야 할 것이지만, 확실히 우리가 깨달아야만 할 것은 성경에서는 거듭 반복해서 고집센 교만을 정죄한다는 것이다. 일단 다윗이 자신의 사악한 길에 들어서자 그는 너무 교만해져서 돌이킬 수가 없었다! 사울왕도 같은 죄를 범하였었다. 우리는 간음과 살인을 범하지는 않았을지 모른다. 그러나 굳은 마음과 교만한 눈은 더 큰죄악으로 이끌어 갈 것이다.
(4)우리의 죄들에 다른 사람들이 관여된다.
다윗이 불순종하였기 때문에 70,000이 죽었다.
(5)참된 고백은 값진 것이다.
우리는 "죄의 비싼 값"을 깨닫고 있는가? 참된 고백은 재빠른 기도나 요한일서 1장 9절을 인용하는 것 이상이다. 참된 고백이란 죄를 정직하게 직면하여 그 값을 고려하지 않고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이다.
(6)하나님께서 용서하시고 축복하실 것이다.
우리 자신을 여호와의 손에 맡기자. 우리를 향한 그의 자비가 크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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