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구약 성경강해***/- 사무엘상 강해

[스크랩] 사무엘상 --- [핵심성경연구-위어스비]

에반젤(복음) 2019. 11. 12. 11:42



   

사무엘상 서론과 개요

사무엘서, 열왕기, 역대기-서론과 개요-

 

서론

 

주제: 이 역사서들은 왕국의 건립과, 승리와 패전을 거듭하던 기간과, 분열왕국의 최후에 대해 기록한다. 이 책들을 읽을 때에 분명하게 나타나는 한 가지 교훈이 있다. "의는 나라로 영화롭게 하고 죄는 백성을 욕되게 하느니라"(잠 14:34). 나라가 하나님을 높일 때에 하나님께서는 그 민족을 높이셨으며, 지도자들과 선지자들과 백성들이 율법에 등을 돌리면 하나님은 그의 축복을 옮기셨다. 이러한 진리는 민족의 역사에서 집합적으로만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지도자들의 생활 가운데서 개인적으로 나타나고 있다. 다윗과 솔로몬은 하나님께 불순종하여 자신의 가정과 개인적인 생활에서 비싼 값을 치루었다.

 

유사성: 당신은 이 책을 읽을 때에 관주를 따라 읽고 싶을 것이다. 왜냐하면 이들은 서로 비슷하기 때문이다. 복음서 상호간에 조화가 있듯이 이스라엘과 유다의 역사를 나란히 비교하여 연구할 수 있도록 윌리엄 크로켓의 "사무엘, 열왕기, 역대기의 조화"(William Crokett, A Harmony of Samuel, Kin-gs & Chronicles, Baker Book

House)를 참조하라.

 

선지자들: 영적 쇠퇴의 시대에는 하나님께서 그의 선지자들을 보내어 백성을 일깨우셨다. 이 책들에는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몇몇 선지자들이 나오며 또한 엘리야, 엘리사, 이사야, 요엘, 아모스, 요나, 미가 등과, 같은 잘 알려진 하나님의 종들도 나온다. 각 선지자들과 역사서들간의 유사성을 알아보려면 성경사전이나 성경핸드북을 조사해 보는 것이 좋다.

 

역사의 하나님: "여호와로 자기 하나님을 삼은 나라는 복이 있도다"(시 33:12). 이스라엘은 참 하나님을 알았으며 그의 말씀을 소유하고 있었으나 고의적으로 하나님께 죄를 범하였으며 심판을 자초하였다. 선지자들의 사역에도 불구하고 통치자들과 백성들은 진리에 등을 돌리고 거짓 선지자들의 거짓말을 믿었다. 여호와를 믿는 믿음에서 의뢰하는 대신 이스라엘은 적들로부터 신을 보호하기 위하여 다른 나라들을 의지하였고, 결국 이들은 패망하였다. 만일 우리가 주님을 따르며 그의 말씀에 순종한다면 하나님께서 우리를 보호하시고 축복하실 것이나, 만일 우리가 주님께로부터 돌아선다면 그는 우리를 격렬하게 다루실 것이다. 어떤 나라가 하나님의 말씀을 소유한다는 것은 특전이지만, 우리의 개인 생활에서나 국가생활에 있어서 주님의 말씀을 높이고 순종한다는 것은 중요한 일이다.

 

개요

 

사무엘상, 하

 

사무엘상, 하는 사사시대로 부터 왕국시대에 이르는 이스라엘의 정치적 변화를 기록하고 있다. 사무엘은 최후의 사사이며 또한 최초의 선지자이다. 초대 왕 사울에게 기름을 부은 사람이 사무엘이며 그의 후계자 다윗에게 기름부은 사람도 그이다. 이 책들을 다음과 같이 요약할 수 있겠다.

 

1. 사무엘/ 사무엘상 1-7장

 

출생과 어린 시절/ 1-3장

초기 사역 /4-7장

 

2. 사울/ 사무엘상 8-15장

 

왕이 됨/8-10장

초기의 승리 /11-12장

죄와 반항/13-16장

 

3. 다윗/ 사무엘상 16장-사무엘하 24장

 

목자/ 사무엘상 16-17장

종/ 사무엘상 18-19장

추방됨/ 사무엘상 20-31장

왕/ 사무엘하 1-24장

(1)그의 승리/ 사무엘하 1-12장

(2)그의 시련/ 사무엘하 13-24장

-개인적인 죄(밧세바) / 11-12장

-암논의 죄 /13장

-가족의 반역(압살롬)/ 14-18장

-민족적 불안/ 19-24장열왕기상, 하

 

제목이 시사하고 있듯이 열왕기상, 하는 솔로몬의 영광스러운 통치로 시작하여 바벨론에게 유다가 비극적으로 끝

 

날 때까지 이 민족의 열왕들을 다루고 있다. 이 책들을 다음과 같이 요약할 수 있겠다.

 

1. 연합 왕국/ 열왕기상 1-11장

 

솔로몬의 부와 지혜/ 1-4장

솔로몬의 성전/ 5-9장

솔로몬의 죄/ 10-11장

 

2. 분열 왕국/ 열왕기상 12-22장

 

르호보암과 여로보암/ 12-14장

선한 왕들과 악한 왕들/ 15-16장

엘리야와 아합왕/ 17-22장

 

3. 포로된 왕국/ 열왕기하 1-25장

 

앗수르에 포로된 이스라엘(주전 722)/ 1-17장

바벨론에 포로된 유다(주전 606-586)/ 18-25장

 

역대상, 하

 

이 이전의 책인 열왕기상-하는 포로 이전에 씌어졌으며 선지자의 견해를 강조한것 같다. 반면에 역대상, 하는 포로 후에 씌어졌으며(대상 6:15) 제사장의 관점에서 본 듯하다. 이 두 책에 나오는 사건들은 사무엘서와 열왕기상, 하에 나오는 사건들과 비슷하며 보충적이다. 이러한 이유로 해서 우리는 이 책들은 요약하지 않고 넘어갈 것이다."

 

 

삼상 1:1-2:11

사무엘의 소명-사무엘상 1-3장-

 

여기에 나오는 사건들은 세 사람에 중점을 두고 있다.

 

1. 한나-경건한 어머니(1:1-2:11)

 

그녀의 슬픔(1:1-10)-태초로부터 하나님께서 주신 가족에 대한 완전한 형태는 한 남편과 한 아내이지만 "인간의 마음의 완악함"(마 19:8)을 인해 일부다처(또는 일처다부)를 허락하셨다(신 21:15-17 참조). 엘가나는 경건한 사람이었으나 가정이 분열되어 있었다. 그가 가장 좋아하는 아내 한나("은혜")는 아이를 못낳는 것과 다른 아내의 박해로 인해 슬픔의 짐을 계속 지고 있었다.

 

그녀의 탄원(1:11-19)-한나는 기도하는 여자였으므로 사무엘이 위대한 기도의 사람이 된 것을 볼 때 별로 놀랄 일은 아니다. 그녀의 마음이 심히 번민하였으므로 절기 동안 먹지도 않고 기도하러 성막에 갔다(1:9 에 나오는 "성전"이란 단어는 "큰 공공 건축물"이란 뜻이며 솔로몬의 성전을 가리키는 것은 물론 아니다. 그 성전이 아직 건설되지 않았던 때이다). 한나가 주님과 "거래"를 한 것은 아니다. 그보다는 그녀의 최선의 것, 즉 첫 아들을 하나님께 기꺼이 바침으로 그녀의 영성을 입증하였다. 21절은 그녀의 남편이 그 서약에 합의했음을 시사한다(민 30:6-16 참조). 나실인의 규약은 민수기 6장에서 찾아 볼 수 있다. 대제사장 엘리가 자기 아들들이 "벨리알(사단)"의 아들들이었는데도 오히려 한나를 그처럼 심하게 비판한 것은 참으로 나쁜 일이었다(마 7:1-5/마 2:12).

 

그녀의 양도(1:20-28)-하나님은 한나의 기도에 응답하셔서 한 아들을 보내셨으며, 그녀는 그를 사무엘("여호와께 구하였다")이라고 이름지었다. 유대의 여자들은 아이가 세 살 가량 되면 젖을 뗀다. 그 때가 되자 한나는 사무엘을

 

엘리에게 데려감으로써 하나님께 대한 서원을 이루었다. 세 마리의 수소는 속죄제, 번제, 나실인의 서약을 위한 특별한 제사를 위해 준비하였을 것이다(민 15:8). "이 아이를 위하여 내가 기도하였더니..."라는 말은 어머니로서의 얼마나 놀라운 간증인가!(딤후 1:5 참조) 만일 우리 가운데 엘가나와 한나 같은 부모가 더 있다면 사무엘 같은 경건한 사람들이 더 많아질 것이다. "빌려드리다"(lent)는 것은 "드린다"(given)는 뜻이다. 사무엘은 그의 남은 생애 동안 여호와께 속하게 되었다.그녀의 노래(2:1-11)-엘가나가 예배를 드리고 있는 동안(1:28) 그의 아내는 하나님께 기도하며 찬양드리고 있었다. 이 구절을 누가복음 1장 46-55절에 나오는 마리아의 노래와 비교해보라. 두 경우 모두 여인들은 하나님의 승리와, 겸손한 자의 간구를 높이신 것을 인하여 하나님을 찬양하고 있다. 2장 10절에 나오는 그리스도의 두 이름, 즉 "자기의 왕" 그리고 "자기의 기름부음을 받은 자(메시야, 그리스도)"에 주목하자. 한나가 지닌 부담감은 주의 백성들 가운데서 여호와의 영광을 위하는 것이었다. 한나는 물론 경건한 어머니의 훌륭한 본보기이다. 왜냐하면 그녀는 하나님을 첫 자리에 두었으며 기도하는 가운데 믿었고 서약을 지켰으며, 하나님께 모든 영광을 돌렸기 때문이다."

 

삼상 2:12-36

2. 엘리-부주의한 아버지(2:12-36)

 

그의 죄악된 아들들(2:12-21)-여호와의 종(그 당시는 대제사장)이 자기의 아들들을 여호와께로 인도하지 못한다는 것은 얼마나 비극인가! 엘리의 아들들은 이기적이었는데, 하나님의 말씀과 백성들의 필요보다도 자기들의 욕구를 앞세웠다. 그들은 건방지고 육욕에 사로잡혀 있었다(2:22). 빌립보서 3장 17-18절은 이 위선적인 제사장들을 정확히 묘사한 말이다. 육신이란 말이 반복되는 것에 유의하자. 18절에서는 "그러나 사무엘은"이라고 기록함으로써 엘리의 아들들과 어린 사무엘을 대조하고 있다. 엘리의 아들들이 어린 사무엘을 비웃으며 그의 충성된 사역에 대해 놀려 대었을 것은 뻔한 일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개입하고 계셨으며 오래지 않아 청산하실 것이었다.

 

그의 이기적인 불순종(2:22-26)-엘리는 사실들을 정직하게 대하는 것과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기를 거절하였다(신 21:18-21/신 17:12 참조). 3장 12절에서 하나님은 엘리가 그의 아들들의 방종함을 금하지 않고 내버려 두었음을 분명하게 말씀하신다. 2장 23-25절에 나오는 그의 연약한 경고는 명확한 징계를 결코 대신할 수 없었다(2:26 과 눅 2:52 비교).

 

그의 통렬한 심판(2:27-36)-하나님은 그의 은혜로써 알려지지 않은 하나님의 사람의 입을 통해 엘리가 아들들의 죄로 인하여, 그리고 자신의 부주의로 인하여 가족이 괴로움을 당하게 될 것이라는 통렬한 멧세지를 보내셨다. 그는 주님보다도 그의 아들들을 높였다. 따라서 하나님은 그를 제거하셔야만 했다. 나중에 사울은 엘리의 후손들을 많이 죽였으며(삼상 22:17-20), 또한 솔로몬은 사독의 자손으로 엘리의 가족을 대치하였다(왕상 2:26-27/왕상 2:35). 35절에 나오는 "충실한 제사장"이란 그 당대에는 사무엘을 가리키는 것이나 궁극적으로 그리스도를 가리키고 있음은 물론이다. 34절은 엘리의 두 아들의 죽음을 예언하고 있으며, 4장 17-18절에서 그 예언이 성취된 것을 본다."

삼상 3

 

3. 사무엘-헌납된 아들(3장)

 

여호와께 받은 그의 소명(3:1-10)-전설에 의하면 사무엘은 이 때 열 두살쯤 되었다고 한다. 그는 여호와 앞에서 성장하였고 성막에서 봉사하는 법을 배웠으나, 주님과의 개인적인 체험을 가지고 있지는 못하였다(7절). 그리스도의 가정에서 길러져 그리스도를 위해 살기로 자신이 스스로 결정하는 것은 얼마나 중요한 일인가! 사무엘은 등잔에 기름을 채워 두었는데, 새벽이 가까워질 즈음 등잔의 불이 꺼지려 하고 있었다. 사무엘이 자고 있을 때 주께서 그를 부르셨다. 처음에 그는 앞을 못보는 엘리가 도움을 청하는 줄 알고 그에게로 달려 갔다. 부르는 소리를 들은 이 소년이 순종하는 데에 얼마나 신속하였는지 보라. 사무엘은 "말씀하옵소서 주의 종이 듣겠나이다" 라고 대답하였다. 후에 하나님은 사무엘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을 것이다. "말하라, 종아, 너의 주가 듣겠노라!" 왜냐하면 사무엘은 위대한 기도의 사람이 되었기 때문이다.

 

여호와께 받은 그의 멧세지(3:11-14)-여호와께 순복하고 그에게 즐겨 귀를 기울이는 자는 반드시 하나님의 뜻을 깨닫게 될 것이다. 엘리는 여호와께 불순종하였으며 그의 가족을 먼저 생각하였으므로 하나님은 그에게 직접 말씀하

 실 수가 없었다. 그것은 엘리의 집을 심판한다는 멧세지였던 것이다. 이 멧세지가 사무엘의 마음에 중요한 역할을 했을 것임이 분명하다. 사무엘은 엘리를 사랑하였으며 그에게서 많은 것을 배웠다. 그러나 사무엘은 자신의 개인적인 욕구가 어떠하든지 여호와께 진실해야 함을 알고 있었다.

 

엘리에게 전한 그의 멧세지(3:15-21)-이러한 굉장한 영적인 경험이 다음 날 아침 그가 일상의 임무를 수행하는 일에 방해가 되지는 않았다. 그는 백성들 앞에 자신을 "자랑해 보이지" 않았다. 그는 여호와의 짐을 지고 큰 겸손으로 행하였으며, "내가 여기 있나이다"라고 여호와께 말했던 것처럼 엘리가 불렀을 때에도 "내가 여기 있나이다"라고 대답하였다. 여호와를 높이는 사람들은 자신들의 윗사람들도 존중할 것이다. 사무엘은 그 슬픈 멧세지를 마음에 간직하였으나 엘리는 모든 것을 말하라고 그에게 요청하였으므로, 그에게 모두 전했다. 우리는 자신의 가족에 대해서 실패한 엘리를 인정하지만 한편 자기와 아들들의 죽음을 의미할 때조차도 하나님의 뜻에 복종함을 찬양한다.

 

이 사건은 역사에 있어 하나의 전환점을 이룬다. 이제까지는 하나님이 백성들에게 자주 또는 공개적으로 뜻을 말씀하신 일이 없었으나(1절), 이제는 사무엘이 하나님의 선지자이며 여호와께서 그와 함께 계심을 모든 사람들이 알게 되었다. 주님은 그가 신뢰하는 사람이 있음으로 해서 다시 한 번 자신을 나타내실 수가 있었다. 하나님은 기꺼이 그의 종이 되기로 헌신하는 사람을 찾을 수만 있다면 자기 백성을 위하여 더 많은 일을 하실 것이 분명하다.여기 나타나 있는 몇 가지 실천적인 교훈들을 살펴보자.

 

(1)가족 중에 있는 죄의 권세를 과소평가하지 말자.

엘리의 아들들은 징계가 필요하였으나 오히려 그는 제멋대로 하도록 버려 두었다. 이로 인해 자기의 생명을 빼앗기는 값을 치루었으며 결국에는 제사장직도 잃었다.

 

(2)가정에서의 기도의 능력을 과소평가하지 말자.

한나와 엘가나는 기도의 사람들이었으며 하나님께서 그들의 기도에 응답하셨다. 우리는 오늘날 한나의 헌신으로 인해 축복을 받고 있다. 그녀를 통하여 하나님은 세상에 마지막 사사요 최초의 선지자인 사무엘을 주셨기 때문이다.

 

(3)하나님은 어린이들과 젊은이들에게 말씀하신다.

어른들은 그들이 하나님의 음성을 잘 듣고 믿음으로 응답하도록 해주어야 한다. 하나님께서 어린 사무엘을 부르고 계심을 안 엘리는 참으로 지혜롭다. 영적인 일들에 자녀들을 훈련하는 것은 세상에서 가장 위대한 책임이다."

 

삼상 4

 

영광이 떠나다-사무엘상 4-7장-

 

이 부분은 이스라엘의 역사에 있어서 세 가지 큰 사건들과 관계가 있다.

 

1. 하나님의 영광이 떠나다(4장)

 

큰 죄(1-5절)-이스라엘은 예비적인 전쟁에서 4,000명을 잃었으며, 이것은 하나님이 그들을 기뻐하지 않는다는 증거로 받아들여졌을 것이 틀림없다. 이들이 회개하고 기도와 고백을 통하여 하나님께 돌아왔던가? 아니다! 오히려 미신으로 돌아가 법궤를 전쟁터로 가져갔다. 이들은 믿음으로 법궤를 가지고 간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말씀으로 그들을 명령하셨던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이들의 행위는 단순한 미신이었다. 법궤가 광야에서 백성들 앞에서 진행하였으며 여리고 주위를 승리 중에 행진했었기 때문에, 이들은 법궤가 있음으로 해서 블레셋을 분명히 이길 수 있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법궤를 하나님의 임재에 대한 상징으로서 존중하는 대신 이들은 종교적인 유품으로 바꾸어버렸다(민 10:35- 이하 참조).

 

대 학살(6-10절)-블레셋 사람들은 처음에는 두려워 했으나,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의 진 중에 계신다 해도 용감한 군인으로 행동하기로 결심을 했다!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을 버리셨기 때문에 블레셋 사람들은 쉽게 승리를 거둘 수있었다. 시편 75편 56절 이하에서는 이 비극을 생생하게 설명하고 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이 그들과 함께 계시는

 

것은 그들이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데 달려 있음을 알았어야 했다. 홉니와 비느하스는 거룩하지 못한 제사장이었으며 이들이 전쟁에 참여한 것은 축복이 아니라 심판을 초래했다.

 

큰 슬픔(11-22절)-98세된 눈먼 제사장 엘리는 전령이 슬픈 소식을 가지고 실로에 도착했을 때 길가에 나와 앉아 있었다. 그러나 전령은 그를 지나쳐 성읍에 그 소식을 전하였다. 성읍의 소란은 엘리의 호기심을 일으켰으며 사무엘의 예언이 성취될 것을 생각하고 있었던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3:11-14/2:34-35). 전령이 나쁜 소식을 그 중요성에 따라서 네 가지로 질서있게 전하는 것에 주목하자. 이스라엘은 도망하였고 많은 사람들이 도륙을 당했다. 엘리의 두 아들이 죽었으며, 법궤는 빼앗겼다! 13절을 보면 엘리의 가장 큰 관심이 법궤의 안전에 있었던 것을 말해 준다. 이제 우리는 슬픔이 겹친 것을 본다. 엘리는 충격을 받은 상태에서 넘어져 목이 부러져 죽었으며, 그의 며느리도 아들을 낳다가 이러한 충격을 받고 생명을 잃었다. "이가봇"이란 이름은 "영광이없다" 또는 "영광이 어디 있는가?"라는 뜻이다(출 40:34- 이하 참조). "떠났다"라는 말은 "추방되었다"라고 번역되어도 된다. 이스라엘의 역사는 하나님이 영광을 받고 다음으로 그 영광을 잃는 줄거리로 이어져 왔다."

 

삼상 5-6

2. 여호와의 이름이 방어되다(5-6장)

 

이방인들 앞에서(5장)-하나님은 그의 죄악된 백성들로 인해 그의 능력을 나타내지는 않으실 것이지만 그의 영광이 조롱을 당하거나 무시당하는 것을 허락하지는 않으실 것이다. 블레셋의 지배자들은 법궤를 그들의 이교 신당에 두고 여호와를 그들의 어신(魚神) 다곤과 같은 수준에 두었다. 물론 하나님은 다른 모든 신들 위에 높이 계신다. 이교 우상들이 법궤 앞에 그 얼굴을 떨어뜨린 것은 하나도 이상할 것이 없다!(사 19:1 참조) 사람들이 다곤을 제자리에 갖다 놓았으나(다곤은 자기를 구할 힘도 없었다!) 다음 날 그들이 사랑하는 우상은 손과 목이 없는 채 발견되었다. 여호와는 다곤이 거짓 신임을 입증하셨던 것이다. 하나님은 그의 이름을 옹호하셨다. 다곤은 그의 손을 잃었지만 여호와의 손은 아스돗을 심판하시는 데 엄중하였다(6절). 하나님은 독종(종기)과 쥐(6:4)를 보내어 백성들에게 재앙을 내리셨다. 쥐들이 농사를 망쳤으며 백성들에게 전염병을 옮겼을 가능성이 있다. 그리고 나서 법궤는 아스돗에서 에그론으로 옮겨졌으나 그곳의 주민들은 옮겨갈 것을 간청하였다. 다시 한 번 하나님은 자기의 이름을 방어하셨다.

 

이스라엘 사람들 앞에서(6장)-법궤를 이스라엘에게 돌려주기로 결정되었다. 그러나 아무도 감히 그 임무를 맡으려 하지 않았다. 마침내 새 수레에 법궤를 실어서 암소들이 다른 도움을 받지 않고 길을 가도록 결정되었다. 암소들이 송아지들을 그리워할 것은 극히 당연한 일이다(10절). 그러나 이 암소들이 벧세메스로 향한다면 이것은 하나님께서 소들을 인도해 가신다는 증거이며, 또한 이 모든 재앙들을 보내셨다는 증거가 될 것이었다. 그들은 속건제물로서 수레에 다섯 개의 독종 형상과 다섯 개의 쥐의 형상을 함께 실었다. 하나님은 그 소들을 인도하셨고 소들은 수레를 벧세메스 사람 여호수아의 밭으로 끌고 갔다. 밭에서 추수하고 있던 이스라엘 사람들은 법궤가 돌아오는 것을 보고 기뻐하였으나, 호기심이 생겨 법궤 안을 들여다 보았는데(19-20절), 하나님은 이들을 심판하실 수 밖에 없었다. 19절에 나오는 숫자는 문제를 야기시킨다. 그 작은 마을의 주민은 50,000명이 안되기 때문이다. 히브리어에서는 문자로 숫자를 나타냈는데 글자 하나를 잘못 쓰거나 잘못 읽는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닌 것이다. 아마도 즉각적으로 70인이 심판을 받은 것 같으며 작은 마을에서는 "대 살육"이었던 것은 분명하다. 문제는 그 잔혹성에 있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께서 그들의 죄를 심판하셨다는 사실을 우리가 아는 것이 중요한 것이다. 얼마나 많이 죽었는가 하는 것은 절대적으로 중요한 문제가 되지 않는다.

홉니와 비느하스는 법궤를 믿음으로써 승리할 수 있다고 생각하였다. 그들의생활이 악해졌기 때문에 하나님은 그들을 죽이셨고, 엘리는 여호와를 욕되게 하는 자기 아들들을 징계하지 않았으므로 죽었다. 블레셋 사람들은 여호와를 그들의 신들 중의 하나처럼 취급함으로 인하여 죽었으며, 벧세메스 사람들은 여호와와 너무 친근하게 되어 부주의하게 법궤를 들여다 보았기 때문에 죽었다. 하나님을 가볍게 여겨서는 안된다."

 

삼상 7

3. 하나님의 백성들이 구원을 받다(7장)

 

법궤는 실로로 돌아오지 않았다. 20년 동안 아비나답의 집에 머물러 있었다. 이 기간 동안에 하나님은 무슨 일을 하고 계셨는가? 그의 종 사무엘이 적을 무찌르고 왕국을 재건하기를 기다리고 계셨다. 사무엘은 가는 곳마다 하나님

 의 말씀을 전하며 백성들을 치리하였을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3절은 사무엘이 백성들에게 회개하고 여호와께 돌아오라고 부르고 있음을 시사한다. 이것은 이방 신들을 버리고 여호와를 섬길 마음의 준비를 갖추는 것을 의미한다. 위대한 민족 이스라엘이 그들의 죄로 말미암아 패배하여 평판이 나빠진다는 것은 얼마나 비극인가! 엘리가 만일 충실한 아버지였다면 그의 아들들도 충성된 제사장들이 되었을 것이며 이러한 패배는 생기지 않았을 것이다. "바알들과 아스다롯"은 남성 및 여성 신들을 대표하였다. 그들의 예배는 언어도단의 음란한 의식들을 행하였다.

사무엘은 기도 모임을 열기 위하여 미스바로 이 민족을 불러 모았다! 사무엘은 언제나 기도와 연관되어 있다(12:23 참조). 그는 어머니의 기도의 응답으로 태어났다(1장). 그는 그 민족을 위하여, 적을 무찌르기 위하여 기도하였으며(7:13), 이스라엘이 여호와를 무시하고 왕을 요청하였을 때 기도하였다(8:6). 그는 하나님께서 불순종한 사울을 거절하셨던 후에도 왕을 위하여 기도하였다(15:11). 어떤 이들은 사무엘을 "하나님의 보결 선수"라고 부르는데 이 말은 확실히 적합하다! 사무엘은 제사장직이 부패하고 민족이 실의에 빠져있고 하나님의 영광이 떠났을 때에 무대에 들어섰다. 한나는 하나님께서 그의 아들을 얼마나 놀랍기 사용하실 것인지를 깨닫고 있었던 것이 확실하다. 2장 9-10절에 나오는 그녀의 노래(예언)를 보라.

 

미스바의 사건들은 이러하였다.

(1)사무엘은 이 민족의 회개를 상징하는 뜻으로 여호와 앞에 물을 쏟아 부었다.

(2)그는 이스라엘이 하나님께 완전히 헌신함을 시사하는 번제를 드렸다.

(3)백성들이 블레셋의 공격을 우려하여 두려워하고 있는 가운데 사무엘은 그 민족을 위하여 기도하였으며, 하나님은 이스라엘 군대에 큰 승리를 주셨다. 그 날이 얼마나 축복된 날이었겠는가 ! 사무엘은 삼손이 지도력을 행사한 20년 동안 누릴 수 없었던 승리를 한 번의 기도로써 성취하였다! 그 날 이후로는(다윗이 블레셋을 크게 이길 때까지) 적들은 멀리 떨어져 지내게 되었다. 이것이야말로 헌신한 삶의 능력이며 기도의 능력이다(약 5:16).

사무엘은 선지자와 사사로서의 사역을 확고히 해 나갔다. 각 성읍들을 여행하며 백성들을 치리하고 분쟁을 해결해 주었다. 그는 마지막 사사였고 최초의 선지자였다(모세의 선지자 직분은 약간 다른 성격을 띠고 있다). 사무엘의 아들들이 아버지의 경건한 행실을 따르지 않는 것을 보게 됨은 슬픈 일이다(8:5). 아마도 그 민족의 일을 돌보는 데에 너무 바빠서 그들을 훈련시키지 못한 것 같다. 엘리도 이와 유사한 실수를 했었다.

이 사건들은 경건한 가정의 중요성을 우리에게 보여 준다. 민족이 죄에 빠져 패전한 것은 엘리가 자기의 가정을 소홀히 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경건한 어머니(한나)의 기도와 하나님이 주신 그녀의 아들로 인하여 그 민족을 구원하셨다. 가정이 어떠한가에 따라서 나라의 어떠함이 결정된다."

 

 

삼상 8-10

실패자 사울-사무엘상 8-15장-

 

이 부분에서는 사울의 초기 생애와 여호와께 거절당하도록 이끌어간 죄들을 다룬다.

 

1. 왕을 요구함(8-10장)

 

여호와 하나님이 이스라엘의 왕이었으며, 그 시작으로부터 이 민족을 보살펴 오셨다. 그러나, 이제 이 나라의 장로들은 그들을 인도해 줄 왕을 원하였다.

 

왕을 요청하게 된 요인-사무엘의 아들들은 사무엘처럼 거룩하지 못하였으므로, 장로들은 사무엘이 죽은 후에 그의 아들들이 백성을 그릇된 길로 인도할 것을 염려하였다. 또한 이 민족은 사사들의 시대를 거쳐 오며 계속해서 임시적인 지도자들을 보아 왔는데 이제 그들은 보다 영속적인 통치자를 원하였고, 이스라엘이 다른 나라처럼 되어서 존경하며 따를 왕을 원하였다. 그들의 요청에 대한 사무엘의 반응은 그들의 불신앙과 반역을 충분히 이해하고 있음을 보여 준다. 그들은 왕을 원함에 있어 여호와를 거절하고 있는 것이다. 사울을 선택한 것은 아버지 하나님을 거절한 것이다. 바라바를 선택하여 성자 하나님을 거절하였으며, 이들이 사도들의 증거 대신 자기들의 지도자들을 선택했을 때 이들은 성령을 거절하였다(행 7:51).

 

하나님의 허용적인 뜻-하나님은 그들의 요청을 허락하셨으나, 그에 대하여 그들이 대가를 치러야 할 것을 경고하

 

셨다. 신명기 17장 14-20절에서 이 사건이 있을 것에 대한 모세의 예언을 보자. 민족은 사무엘의 말에 귀를 기울였으나 그 후에도 여전히 왕을 요청하였다! 하나님께서 다른 민족들과 구별되도록 이들을 부르셨을 때인데 이들은 다른 민족들처럼 되기를 원했다. 9장은 사울이 어떻게 하여 사무엘에게 인도되어졌으며, 개인적으로 왕으로서 기름 부음을 받게 되었는지를 설명해 준다. 9장 21절에서 나타난 겸손과, 10장 22절에서 백성들 앞에 서기를 주저하는 데에서 나타나는 겸손을 보자. 하나님께서는 사울이 자신감을 가질 수 있도록 세 가지 특별한 표적을 주신다(10:1-7). 그리고 이 표적들은 그대로 나타났다. 또한 사무엘은 길갈에 머물러 있어 그가 오기를 기다리라고 지시하였다(10:8). 8절은 "네가 나보다 앞서 길갈에 갈 때"로 번역되어야 마땅하다. 즉, 사울왕이 전쟁을 위하여 군인들을 준비시킬 미래 어느 날을 가리킨다. 이 사건은 몇 년 후에 발생하였다(13장).사울의 유리한 조건-그는 강건한 몸과(10:23) 겸손한 정신(9:21)을 가지고 있었으며, 새로운 마음(10:9)과 영적인 능력(10:10), 충성된 동료들(10:26)을 지녔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그에게는 사무엘의 인도와 기도가 있었다. 그러나 이러한 이점들에도 불구하고 그는 비참하게 실패하였다. 여호와께서 그의 삶의 주인이 되기 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삼상 11-12

2. 왕국의 부흥(11-12장)

 

사울은 집으로 돌아왔으나, 이 위대한 체험을 말하지 못하고 주저하였다. 이 일이 모든 것이 새로울 때, 왕국이 시작될 때 있었음을 기억하자. 사무엘은 여전히 영적인 지도자였으며 그와 사울은 민족의 미래에 대한 하나님의 인도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 민족은 교통이나 통신의 근대적인 수단을 가지고 있지 않았으므로, 사울과 사무엘이 연합하여 백성을 재규합하는 데는 몇 달이 걸렸을 것이다. 사울의 첫번째 기회는 나하스가 그 민족을 위협했을 때 왔다. 하나님의 영이 그에게 능력있게 임하였으며(11:6) 그는 철저하게 적을 진멸하였다. 이와같은 민족적 승리는 백성들 앞에 사울을 내세우게 했음은 물론이며 그의 권력을 세우게 했다. 그의 협력자들 중의 더러는 그의 통치를 반대한 이스라엘 사람들을 죽이고 싶어하였다(10:27). 그러나 사울은 여호와께 영광을 돌리며 다른 사람들에 대한 복수를 거절함으로 겸손과 자제를 보여 주었다.

이 승리는 왕국의 부흥과 재헌신의 계기가 되었다. 사무엘은 자신의 사역을 재고찰해 보며 그가 백성과 하나님께 충실했음을 상기시킨다. 다음으로 그는 민족의 역사를 회고하여, 왕을 요청함으로써 여호와께 큰 죄를 범하였음을 알도록 하였다. 그는 자기의 믿음과 하나님의 능력을 보이기 위하여 비를 내려 달라고 기도하였다. 추수 때의 갑작스러운 폭풍은(이때는 대개는 없는 일이다) 백성들에게 두려움을 일으켰다. 그들은 죄를 인정하였으며, 사무엘은 하나님의 은혜를 재확인시켰다. 그들은 왕이 그들을 구원하고 있는 것이 아님을 알 필요가 있었다. 그들에게 하나님의 축복을 확신케 하는 것은 여호와께 대한 그들의 충성과 순종에 있는 것이다. 그들은 실수를 범하였으나 그들이 순종한다면 이들을 용서하시고 파기하실 것이다.

 

삼상 13-15

3거절당한 왕(13-15장)

 

이 세 장에서는 사울의 세 가지 죄를 기록하고 있으며 이 죄들로 인하여 결국은 왕국을 내놓는 댓가를 치른다.

 

인내하지 못함(13장)-사무엘과 사울이 몇 달 전에 합의했던 대로(10:8) 이스라엘이 길갈에서 모일 때가 되었다. 사울은 그의 아들이 게바에서 승리한 것을 자기의 공로로 돌리며 백성들에게 강한 인상을 주고 그를 따르게 하려고 하였음을 주목하자. 막강한 블레셋 무리들이 모여들기 시작하여 사울이 기다리면기다릴수록 그의 위치는 더욱 위태로웠다. 만일 그가 즉각적으로 공격했다면 적을 멸망시킬 수가 있었다. 하지만 그가 지연시키는 것은 단지 블레셋의 힘이 더 강해질 기회를 만들어 주고 있을 뿐이었다. 인내심이 없는 사울은(불신앙을 의미) 사무엘 없이 진행했으며 제사가 끝나갈 때 선지자가 나타났다. 11-12절에는 사울의 핑계가 기록되어 있다. 그는 사무엘과 백성의 탓으로 돌리려고 하였다. "내가 부득이하여 번제를 드렸나이다!" 그는 사무엘에게 거짓말을 하였으나 선지자는 진실을 알고 있었다. 이것이 종말의 시작이 되었다. 하나님께서 이런 사소한 일에서조차 그를 신뢰할 수 없다면 왕국에 대해서 어떻게 그를 신뢰할 수가 있겠는가? 사울의 불순종은 왕국을 잃게 하는 값을 치르게 하였다.

 

교만(14장)-사울의 아들 요나단은 분명히 경건한 사람이었다. 왜냐하면 주께서는 그와 그의 병기든 자에게 블레셋을 이기고 승리하도록 하셨기 때문이다. 사울은 다만 관망하고 있다가(16-18절) 그의 군대를 풀어서 승리에 참여케

 

하였다. 그러나 사울은 그 날 자기 군인들에게 어떤 음식도 먹지 말라는 어리석은 서약을 했다. 여호와 하나님과 바른 관계에 있지 못한데 희생의 서약을 함으로 승리를 주실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얼마나 어리석은 일인가! 그는 "순종이 제사보다 낫다"는 것을 배우는 데 늦은 것이다. 요나단은 이 저주에 대해서 아무것도 알지 못했으므로 꿀을 먹었으며 힘을 얻었다(27절). 그의 실천적인 지혜의 본을 받아 군인들은 전진하는 데에 격려를 받고 승리를 거둔 후에는 먹었다(31-32절). 유감스럽게도 유대인들은 너무도 배가 고파서 피있는 채로 고기를 먹었다(레 17:10-14). 이것은 그 서약을 깨는 것보다 더 나쁜 것이었다. 사울은 전리품을 희생제물로 하나님께 바침으로써, 이 서약을 수정하려 하였다. 군대가 그 다음의 전투에 임하려 할 때에 그는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구하였으나 응답을 받지는 못했다. 이 일로 인하여 사울은 요나단이 불순종한 것을 알게 되었고 어리석은 왕은 자기의 아들을 죽이려고 하였다. 다른 사람의 죄에 대하여 가책을 느끼게 되기는 참으로 쉬운 일이다. 백성들은 요나단을 구해냈으나 사울의 행위는 마음이 어둡다는 것을 드러내었다. 문제가 곧 닥칠 것이었다. 그의 교만이 그를 낮추었던 것이다.

 

불순종(15장)-하나님은 사울이 자신을 증명해 보일 기회를 한 번 더 주셨는데 이번에는 이스라엘의 옛 원수인 아말렉을 철저하게 진멸하는 일이었다(신 25:17-19/출 17:16- 이하). 그러나 사울은 여호와께 순종하지 않았다. 자신을 위해 전리품 중에서 가장 좋은 것들을 보관해 두었으며, 아각 왕을 죽이지 못했다. 하나님은 사울이 한 일을 사무엘에게 알렸고, 마음에 근심이 된 선지자는 밤새 기도하였다. 사무엘이 사울에게로 나아갔을 때 왕은 그에게 거짓말을 했으며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였다고 말했다. 바로 그 때 사울의 죄가 그를 드러내었다. 동물들이 소란을 피웠기 때문이다. 사울은 한 번 더 핑계를 대었다. "그들(백성)이 동물들을 남겨 두었으며 우리(그와 지도자들)는 남은 자들을 진멸했다"고 하였다. 그러자 사무엘은 거절당한 왕에게 하나님의 멧세지를 전하였다. 사울은 초기의 겸손을 잃었다(9:21). 그리고 교만해지고 불순종하게 되었다. 그는 여호와의 말씀에 반역하였으며 제사를 드림으로 자신의 불순종을 변상하려고 하였다(21-23절). 그는 행동과는 다른 말을 했으며(15:13), 자백하는 대신 핑계를 대었고(15:15/15:21), 순종하는 대신 제사를 드렸다(22절). 그는 다른 사람들을 비판하고 문책하는 데 빨랐으나 자기 자신의 죄를 직면하여 판단하기는 꺼려했다.

사무엘이 사울을 떠나려 할 때에 왕은 그의 죄를 고백하였으나 그 고백이 선지자에게 감명을 주지는 못하였다(24-27절). 참된 고백은 "내가 잘못했습니다"라고 말하는 이상의 것이 포함되어 있다. 고백이란 죄를 뉘우치고 참으로 슬퍼하는 것을 뜻한다. 사무엘이 돌아서자 사울은 그의 옷을 붙잡았으므로 찢어졌다. 그러자 사무엘은 이것을 왕국이 찢겨져 다른 사람에게(다윗) 주실 것에 대한 예언으로 삼았다. 30절은 사울이 하나님보다도 사람들이 어떻게 생각할 것인가에 더 관심이 있었음을 나타낸다. 그는 좋은 평판을 원하였으나 참된 성품을 원하지는 않았다. 사무엘은 사울과 함께 제사를 드리고 여호와께서 명령하신대로 아각을 죽였다. 그러나 이것이 사무엘과 함께. 행한 마지막 일이 되었다. 사울은 그의 가장 좋은 친구를 잃었으며 하나님의 축복을 잃었고, 왕국을 잃었다. 그 후부터는 어두움의 나날이었고 버림을 받은 험난한 길이었으며 그가 죽이기를 거부하였던 그 아말렉에 의해 죽임을 당했다(삼하 1:13)."

 

 

삼상 16:1-13

다윗과 골리앗-사무엘상 16-17장-

 

이제 우리는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사람" 다윗의 생애를 공부하는 데 들어섰다. 사울이 육신적인 생활의 상징이라면 다윗은 하나님을 믿는 신자의 영적인 생활을 상징한다. 모든 사람이 그러하듯이 다윗도 죄를 범한 것이 사실이지만 사울과는 달리 자기의 죄를 자백하고 하나님과의 교제를 회복시켜 주실 것을 구하였다. 이 부분에서는 다윗의 초기 생활을 그린 세 장면을 볼 수 있다.

 

1. 순종하는 아들(16:1-13)

 

"내가 사울을 버렸노라." 이 얼마나 숙연한 선언인가! 이러한 거절은 아직 백성들에게 알려지지 않았으며 여전히 그 땅의 왕으로서 "앞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사람이 하나님께 거절을 당하고도 여전히 사람들에게 영접을 받을 수 있으나, 결국에 가서는 하나님의 심판이 임할 것이다. 사울이 너무도 위험한 인물이었으므로 사무엘은 베들레헴을 방문하였을 때 그의 진노를 피하기 위하여 한 계획을 궁리해 내야만 했다. 사울의 맹렬한 시기심에 대해서는 22장 18-19절에 한 예가 나와 있다.

 

 

사무엘이 이새의 집에 도착하여 잔치에 그들을 초대했을 때 다윗은 그곳에 있지 않았고, 양을 돌보며 들에 있었다. 우리는 다윗의 순종과 겸손에 감명을 받지 않을 수 없다. 그는 "그 가족의 막내"로서 미미한 위치에 있었으나, 그의 아버지와 여호와께 충실하였다. 다윗의 생애는 마태복음 25장 21절을 예증한다. 그는 종으로 시작하여 왕이 되었다. 몇 마리 양에 충성을 다하자 전체 나라를 물려 받았다. 그는 어떻게 일해야 하는지 알았으며 하나님은 그에게 기쁨을 주셨다. 이 사람과 누가복음 15장에 나오는 탕자와 비교해 보라. 그는 지도자로 출발하여 종이 되었고, 많은 것으로 출발하여 가난하게 끝내었으며 기쁨으로 출발하여 노예로 끝을 맺었다. 마태복음 25장 21절은 성공을 위한 하나님의 비결을 요약해 주고 있으며 이것이 다윗의 생애를 통하여 증명되는 것을 본다.

하나님께서 마음이 중요한 것이라고 상기시켰을 때는 사무엘이 육신의 재능으로 인간을 평가하는 실수를 범하려는 순간이었다(잠 4:23 참조). 들에서 호출을 받고 다윗이 나타나자 하나님은 사무엘에게 "이 사람이라"고 말씀하셨다. 그는 당시의 대부분의 유대인들처럼 검지 않았으며 피부가 희었고 머리칼은 붉었다. 그의 잘생긴 외모와 헌신적인 마음은 놀랍도록 조화를 이루었다. 그는 여덟번째 아들이었으며 여덟이란 수는 새로운 출발의 수이다. 기름이 그에게 부어지자 하나님의 영의 특별한 감동을 받게 되었다. 그리고 그 시간으로부터 그는 하나님의 사람이었다. 다윗이나 그의 가족은 그 날 있었던 기름부음의 중요성을 이해하고 있었던 것 같지는 않다. 사무엘은 물론 적절한 때에 다윗에게 그것을 설명했을 것이다."

 


3. 승리의 군사(17장)

 

삼상 16:14-23

2. 겸손한 종(16:14-23)

 

참으로 비극적인 대조이다. 성령이 다윗에게 임하였고 사울에게서는 떠났다. 하나님은 악령이 사울을 괴롭히도록 허락하셨고 그는 때때로 미친 사람같았다(18:10/19:9 참조). 그의 이상한 행동 때문에 그의 종은 능숙한 악사를 초청하여 마음을 부드럽게 하는 것이 어떻겠느냐고 제안하였다. 사울의 종들이 원인을 치료하려고 하지 않고 증세를 치료하려는 것은 참으로 슬픈 일이다. 왜냐하면 음악은 사울의 죄악된 마음을 변화시킬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왕은 그 후에 "기분이 좋아졌을"수도 있다. 그러나 그것은 거짓 평화였을 것이다. 종들은 사울이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맺도록 권고했어야 마땅하다.

다윗은 바로 사울이 필요로 하는 사람이었다. 그래서 종들 중의 하나가 그를 추천하였다. 우리는 이미 다윗이 능력을 인정받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었다. 그러나 다윗은 자신을 선전하고 있지는 않았다. 하나님께서 그 일을 행하고 계셨다(잠 22:29/잠 18:16/벧전 5:6 참조). 너무도 많은 젊은이들이 오늘날 자신의 가정에서 사소한 일들로 자신을 먼저 입증해 보이지 못하고 영원한 곳으로 자신을 밀어 넣으려 한다. 다윗은 궁전으로 왔으며 즉각적으로 인기있는 사람이 되었다. 만일 사울이 하나님께서 다윗을 왕으로 택하셨음을 알았다면 그 젊은이를 즉각 살해했을 것은 물론이다. 사울이 이러한 사실을 알게 되자 다윗을 박해하기 시작했으며 이스라엘의 광야에서 그를 추격하였다.

다윗은 계속적으로 궁정에 머물러 있지는 않았다. 17장 15절은 "그러나 다윗은 아버지의 양을 먹이기 위하여 사울을 떠나 돌아갔다"고 읽어야 할 것이다. 그는 필요할 때 궁정에 초청을 받았으나 가정에서의 자기의 책임을 소홀히 하지 않았다. 얼마나 겸손한가 ! 재능있는 젊은이이며, 왕이 되도록 선택된 사람으로서 하나님께 기름부음을 받은 사람이 여전히 양을 돌보며 종으로서 일하고 있다 ! 하나님이 다윗을 사용하실 수 있었던 것은 전혀 이상한 일이 아니다."

 

삼상 17

다윗과 골리앗의 이야기는 친숙한 것이며 그리스도인의 생활을 위한 많은 실천적인 교훈을 주고 있다. 우리 모두는 여러 종류의 거인들을 직면하지만 하나님의 능력을 통하여 이러한 거인들을 정복할 수가 있다. 골리앗은 150파운드(약 68kg)의 무장을 한 10피트(약 3미터)는 되는 거인이었을 것이다. 그는 "블레셋 사람"이었으며 더구나 그들의 위대한 참피온이었다. 그는 무시무시하여 유대 군인들을 공포로 몰아넣었다(11절). 사울이 경건한 지도자였다면 신명기 20장을 주장하여 그의 군대를 승리로 이끌었을 것이다. 사람이 하나님과의 교제를 떠나면 다른 사람들을 패망으로 인도해 갈 뿐이다.

다윗은 형제들의 양식을 가지고 도착하였으며 즉각적으로 그 거인의 도전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자기의 형제들이 그를 꾸짖었으며 용기를 꺾으려 했음에 주목하자. 사단은 누구를 통해서나 "그것은 안될 일이야"라고 우리에게 말

 

한다. 사울조차도 "네가 능치 못하리라"(33절)고 하여 그를 단념시키려 하였다. 다윗 자신의 힘으로는 할 수 없었으나 여호와의 힘으로는 어떤 적이라도 정복할 수가 있다(빌 4:13/엡 3:20-21 참조). 사울은 다윗에게 몇가지 무기를 주려고 하였으나 다윗은 그것을 착용해 본 일이 없기 때문에 이를 거절하였다. 사울이 누군가에게 승리하는 법을 말하고 있다고 상상해 보라 ! 다윗은 자기 양들과 함께 목장에 있을 때 개인적으로 하나님의 능력을 입증했었다. 그는 이제 그 능력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공식적으로 전시하려는 것이다. 이 전체 이야기를 통하여 다윗이 어떻게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있는지 주목해서 보자.

 

여기에서 하나님은 우리의 믿음에 대한 응답으로 승리를 주신다는 실제적인 교훈을 얻는다. 하나님은 사자와 곰으로 은밀히 다윗을 시험하셨으며 이제 거인을 가지고 공개적으로 시험을 치루는 것이다. 만일 우리가 개인적인 전쟁에서 충실하다면 하나님은 공식적인 시험들을 통하여 우리를 알게 되실 것이다. 하나님의 백성들은 그들의 길에 닥치는 "작은 시험들"이 앞으로 반드시 닥쳐올 보다 큰 전쟁을 위한 준비임을 깨닫지 못하고 넘기는 경우가 너무도 많다.

다윗은 간단하고 하찮은 무기로서 물매와 다섯 개의 돌을 사용하였다(고전 1:27-28/고후 10:3-5 참조). 다윗은 기드온이 미약한 무기로써 어떻게 승리를 얻었는지 알고 있었으며, 기드온의 하나님이 죽지 않았음을 알고 있었다. 그의 형제들의 비판이나 사울의 불신앙도 하나님이 승리를 주실 것을 믿는 다윗의 믿음을 막지는 못했다. 돌은 목표에 적중했다. 거인은 쓰러졌고, 다윗은 그 거인의 칼로 목을 베었다. 이 한 번의 승리는 이스라엘로 하여금 블레셋을 공격하여 그들의 진을 약탈하는 길을 열어 놓았다. "세상을 이긴 이김은 이것이니 우리의 믿음이니라"(요일 5:4). 우리는 "정복자 이상의" 사람들이다.

 

여기에는 모형적인 교훈도 있다. 다윗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훌륭한 모형이기 때문이다. 다윗이란 이름은 "사랑받는"이란 뜻인데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사랑받는 아들이다. 둘 다 베들레헴에서 태어났으며 둘 다 형제들에게 거절을 당하였다. 물론 다윗이 왕이 된 후에는 형제들이 그를 영접하였으며 이것은 마치 그리스도께서 통치하시기 위해 다시 돌아오실 때에 유대인들이 그리스도를 영접하게 될 것과 같다. 다윗은 통치하도록 허락받기 오래 전에 왕으로 기름부음을 받았다. 이것은 마치 그리스도께서 지금 하나님의 왕이지만 사단이 멸망하기까지는 통치하시지 않는 것과 같다. 사울 왕은 오늘날 현 시대의 사단을 모형으로 보여 준다. 왜냐하면 사울은 거절을 당하고 패전하였으나, 다윗이 보좌에 오를 때까지는 통치하도록 허락을 받았기 때문이다. 사단은 하나님의 백성들을 박해하도록 허락을 받았으나 어느 날 멸망할 것이다.

다윗이 아버지로 말미암아 전쟁터로 보냄을 받은 것과 같이 그리스도께서도 하나님 아버지로 말미암아 이 세상에 보내심을 받았다. 골리앗은 그 교만함과 능력에 있어서 사단을 예증한다(눅 11:14-23 참조). 사단은 자기의 소유(그의 지배 아래 있는 영혼들)를 지키는 강한 자이다. 그리고 그리스도는 그를 이기는 보다 강한 자이다. 그리스도는 사단의 왕국을 침략하여 사단의 권세를 이기고 그의 무기를 빼앗으셨고 잃어버린 영혼들을 구하여 하나님의 자녀가 되게하여 전리품을 나누고 계시다. 이것은 그 날 다윗이 한 일이다. 그는 강한 자를 이기고 이스라엘로 하여금 전리품을 나누도록 하였다(52-54절). 이것은 그리스도인이 승리를 위하여 싸우는 것이 아니라 승리로부터 싸움을 시작한다는 뜻이다.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고 예수께서 말씀하셨다.

 

사울은 왜 자기 무기 관리인인 다윗을 알아보지 못했는지는 분명히 밝혀져 있지 않다. 아마도 그가 악령의 영향 아래 있었을 때, 다윗을 보았기 때문인 듯하다. 또다른 원인은 다윗이 궁정에 있는 여러 종들 중의 하나였으므로 사울이 그들을 혼동하는 일은 그리 이상한 일이 아닐 것이다. 사울은 승리자에게 딸을 주기로 약속했기 때문에 그는 소년의 가족에 대해서 물어 보았을 것이 분명하다."

 

 

삼상 18

다윗과 요나단-사무엘상 18-21장-

 

이 부분에서는 다윗이 사울의 궁정에서 봉사하다가 망명자로서 유랑하는 그 중간의 변화를 다루며, 다윗이 어떻게 사울의 총애를 받던 자리에서 그의 원수가 되었는지를 설명한다. 중심 내용은 다윗의 믿음이며, 우리는 이 장들을 통하여 하나님의 사람이 그의 생애에 닥치는 시련들로 인하여 하나님께 대한 신뢰를 끝까지 잃지 않은 비결을 알게 된다.

 

 

1. 여호와를 신뢰하는 다윗(18장)

 

다윗이 가장 큰 신앙의 시험에 봉착했던 것은 골리앗을 직면했을 때가 아니라 그가 매일 사울의 궁정에서 봉사를 해야 하는 일이었다. 그의 신앙이 시험을 받는 여러 가지 방법들에 주목하자.

 

인기에 대한 시험(18:1-11)-다윗은 사울의 아들 요나단에게 사랑을 받았는데 이것 자체가 시험의 기회였다. 다윗은 다음 왕이 될 것이었으나 권리상으로는 요나단이 왕관을 물려 받게 되어 있었다. 이 두 하나님의 사람 사이의 우정은 우리에게 위대한 본이 된다. 다윗이 받은 영광에 대하여 요나단은 시기하거나 증오하지 않았다. 그러나 사울에게는 문제가 달랐다. 다윗이 백성들에게 인기가 높았던 때문이다. 여자들이 다윗을 찬양했으며 다윗의 하나님을 찬양하지 않았음은 의미심장하다. 그러나 다윗은 지혜로와서 그들의 말을 지나치게 신용하지 않았다. 그러나 사울은 자신보다 다윗이 더욱 찬양을 받는 소리를 들었을 때에 시기심으로 가득 찼다. "도가니로 은을, 풀무로 금을, 칭찬으로 사람을 시련하느니라"(잠 27:21). 칭찬은 뜨거운 도가니와 같으며 그 사람이 무엇으로 만들어졌는지를 나타낸다. 다윗을 겸손케 한 그 칭찬은 사울의 마음에 불순물이 꼭대기까지 차게 만들었으며 영광을 받으려는 교만과 욕망을 드러내었다.

 

강등(降等)에 대한 시험(18:12-16)-5절에 보면 다윗이 사울의 개인 경호 책임자였음을 암시한다. 그러나 이제는 강등되어 단지 1,000명만을 거느리는 대장이 되었다. 이러한 일이 다윗을 변화시켰는가 ? 아니다! 그의 신앙은 여호와께 있었으며 그는 계속해서 왕을 섬기고 존중하였다. 이 일은 사울을 무엇보다도 더욱 두렵게 만들었다. 왕은 하나님께서 자기를 떠나셨음과 다윗에게 축복이 주어졌음을 알았다. 백성들 앞에서 강등을 당하고도 여전히 겸손과 봉사를 유지할 수 있다는 것은 참된 믿음의 사람만이 할 수 있는 일이다.실의에 대한 시험(18:17-30)-사울은 골리앗을 물리치는 사람에게 그의 딸들 중의 하나를 주기로 약속했었다(17:25). 그리고 이제 그 약속을 지키려고 하였다. 왕 앞에서 다윗이 겸손한 것을 보자(18절). 그러나 사울이 그의 약속을 지켰는가? 아니다. 그 여인은 다른 사람에게 주어졌다. 그리고는 그의 딸 미갈을 이용하여 다윗을 죽이는 도구로 삼고자 하였다. 즉, 왕은 불가능한 지참금을 요구했으며 그것을 얻으려고 노력하다가 다윗이 죽기를 바랐기 때문이다. 그러나 여호와께서 다윗과 함께 계셨고, 그 사명을 성공적으로 마쳤다. 그가 미갈과 결혼한 것은 불행한 일이었다. 왜냐하면 그 결합이 결코 행복하지 못하였기 때문이다. 추방을 당하고 있던 동안 다윗은 미갈을 다른 사람에게 빼앗겼다가(25:44) 헤브론에서 통치를 시작했을 때 도로 얻었다(삼하 3:13-16). 그러나 다윗에 대한 그녀의 태도 때문에 나중에는 완전히 갈라 서게 되었다(삼하 6:20-23)."

 

삼상 19

2. 인간을 신뢰하는 다윗(19장)

 

사울이 다윗을 죽일 계획을 세웠다는 것은 이제 더이상 비밀이 아니었다. 그의 종들은 다윗을 죽이라는 명령을 받았던 것이다. 사울은 전에 여러 번 시도를 해보았지만 다윗을 죽일 수가 없었다(18:11/18:25). 이제는 그의 분노가 소모되어서 다윗은 다시 궁정으로 돌아 올 수 있었던 것 같다. 여기서 우리는 흔들리는 다윗의 믿음을 본다. 그는 하나님을 신뢰하여 그의 뜻을 추구하는 대신 사람을 신뢰하고 있었다.

 

요나단을 신뢰함(19:1-10)-왕의 아들이 다윗을 위해 중재할 수 있었던 것이 분명하다. 사울은 다윗을 보호해 주겠다고 맹세조차 하였으나, 이 약속은 결코 지켜질 수가 없는 것이었다. 다윗이 전쟁에서 큰 승리를 거두자마자 되살아난 사울의 옛 시기심은 또다시 다윗을 향해 창을 던지게 하였다. 요나단이 그를 "무마시킬" 것이라고 믿은 것은 다윗의 실수였다. 사울의 말이 신빙성이 있으려면 먼저 그의 마음이 변화되어야 할 필요가 있었다.

 

미갈을 신뢰함(19:11-17)-그의 아내가 다윗을 사랑하기는 했지만 두 사람 사이의 영적인 결속은 결코 찾아 볼 수 없었는데, 그녀의 나중 행동들이 이를 입증한다. 그녀는 사울이 감시하고 있다고 다윗을 경고하였으며 이에 따라 함께 거짓말을 꾸며 내었다.

이 일은 다윗에게는 연속된 곤고의 시작이었다. 왜냐하면 선을 이루고자 악을 행하는 것은 결코 옳은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롬 3:8). 미갈은 다윗이 침상에서 아프다는 인상을 주려고 우상을 사용한다. 그녀는 이제 자신의 아버지조차 속이고 있으며 일을 더 나쁘게 만들고 있을 뿐이었다(시 59편 참조).사무엘을 신뢰함(19:18-24)-이 일은 다윗이

 

할 수 있었던 가장 지혜로운 선택이었을 것이다. 사실상, 이 하나님의 사람은 그를 위하여 기도할 수 있고 권면할 수 있을 것이었다. 사무엘이 사울을 패배시킨 것은 거짓말이나 무기로써가 아니라 하나님의 영으로였던 것을 주목하자! 영적인 무기를 사용함으로써 사무엘은 사울을 지연시키고 다윗에게 도망칠 기회를 주었다."

 

삼상 20-21

3. 자신을 신뢰하는 다윗(20-21장)

 

이 장들에서는 아름다운 모습을 기록하고 있지 못하다. 왜냐하면 여기서 우리는 믿음의 사람이 비틀거리며 믿음에 실패하는 모습을 보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뜻을 구하며 기다리지 못하고 다윗은 두려움 가운데 도망하며 자기의 문제를 해결하려고 "계책"을 쓰고 있다. 그가 한 거짓말을 주목해 보자.

 

사울에게 거짓말함(20장)-1절에서 요나단에게 한 다윗의 말은 자기 중심적이며 인내심이 없음을 암시해 준다. 만일 이 두 친구가 계책을 꾸미는 대신 함께 기도했다면 얼마나 더 좋았을까? 요나단은 다윗이 어디쯤 있을 것이라고 그의 아버지에게 거짓말을 하였다(6, 28절). 그는 이 문제가 어떻게 끝나는지 보려고 며칠을 더 기다려야 했다. 한편 요나단과 다윗은 다윗이 왕이 된 후에 그의 가족을 보호해 줄 것을 언약하였으며, 다윗은 이 약속을 지켰다(삼하 9장). 사울은 요나단의 이야기를 믿지 않았으며(24-33절), 거의 요나단의 생명을 잃을 뻔하였다. 하나님이 그 사람을 포기하시고 마귀가 넘겨 받았을 때, 그 사람이 할 수 있는 사악함에는 끝이 없다. 요나단은 식탁을 떠나서 다음 날 아침 다윗을 만나 함께 울며 작별하였다.

 

아히멜렉에게 거짓말함(21:1-9)-다윗은 다시 도망하였다. 이번에는 전에 성막을 쳤던 놉땅으로 갔다. 다윗은 언제나 하나님의 집에 대한 큰 사랑을 가지고 있었으므로 아마도 숨으러 가기 전에 성막을 방문하고 싶었을 것이다. 다윗은 사울의 일로 왔다고 주장함으로써 제사장에게 거짓말을 하였다(2절). 제사장은 다윗과 그의 사람들에게 거룩한 떡을 먹도록 주었으며, 그를 방어하도록 골리앗의 칼을 내주었다. 모든 일들이 성공적으로 진행되는 것 같았지만 사울의 첩자인 도엑이 이 사건들을 목격하였으며 이 일은 결국 변절과 피흘림으로 이끌어 갔다(22:9- 이하/ 시 52편의 제목 참조).

 

아기스에게 거짓말함(21:10-15)-일이 더욱 악화되었다. 사람이 하나님의 지혜를 의지하지 않고 자기 자신의 지혜를 신뢰할 때는 반드시 이렇게 되는 것이다. 다윗은 이제 적의 수중으로 도망한다. "인간을 두려워하면 함정에 빠진다." 그런데 다윗은 이제 적의 지경에서 스스로 함정에 빠져들게 되었다. 물론, 왕은 유대의 영웅을 자기 지경에 두고 관용을 베풀려 하지는 않았으므로 다윗은 도망하기 전에 미친 짓을 해야만 했다. "아, 우리가 속임수를 쓰기 시작하면 얼마나 엉크러진 천을 짜게 되는 것일까" 이 일은 다윗의 생애의 종말이 될뻔하였다. 그러나 여호와께서 개입하셔서 왕의 마음을 바꾸어 다윗을 쫓아내도록 하셨다. 그러자 그는 아둘람동굴로 도망하였으며, "무법자들의 일당"을 조직하였다(시 34, 56편 참조).

 

믿음의 사람이 점점 두려움과 불신앙의 사람이 되어가는 것은 놀라운 일이다. 우리가 만일 성급하여 인간을 신뢰하고 우리 자신의 계획을 믿는다면, 오래지 않아서 모든 것은 산산조각이 나고 우리 자신은 하나님의 축복의 장소에서 벗어나 있음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우리는 다윗이 여호와를 기다리며 여호와의 뜻을 구하는 법을 배우게 된 것을 뒷 부분에서 보게 된다.

다윗과 요나단 사이의 우정은 놀라운 것이었으나 사실상 서로에게 아무런 유익을 주지 못하였다. 요나단은 왕관을 잃었고 다윗은 그의 삶을 낭비하였다. 그들이 시련에도 불구하고 이타적이며 지조가 있었다는 것은 그리스도인의 사랑과 우정의 아름다운 본보기이다."

 

 

삼상 22

망명중의 다윗-사무엘상 22-24장-

 

다윗은 이제 사울의 궁정에서는 완전히 분리되었으며 무법자요 반역자로 몰리게 되었다. 시편 34편은 아기스로부터 포위망이 좁혀지고 있을 때 쓴 것으로, 아마도 다윗의 시련과 추방 기간 동안의 승리를 가장 잘 표현했을 것이다.

 

"의인은 고난이 많으나 여호와께서 그 모든 고난에서 건지시는도다"(19절). 하나님은 다윗과 함께 계셨다.

 

1. 하나님이 다윗의 발걸음을 인도하심(22장)

 

다윗은 아둘람동굴에서 충성된 추종자들의 무리를 소집하였는데 400명 쯤 되었으며 나중에는 600명이 되었다(23:13). 동굴에서의 경험은 시편 57과 142편에서 발견된다. 사울은 다윗을 죽이려 하듯 형제들도 죽이고 싶어할 것이었으므로 다윗은 그의 형제들을 보호하고자 하였다. "이 잡다한 사람들"은 도피처를 구하여 그리스도께 도망온 환란당한 사람들, 죄로 인해 빚진 자들, 생활에 불만이 있는 사람들을 예증한다. 다윗의 무리는 적었고 업신여김을 받았다. 그러나 왕국은 그들의 것이었다. 다윗은 부모들을 모압땅에서 보호할 수가 있었다. 왜냐하면 그의 가족(룻의 후손들)은 그곳 출신이기 때문이었다. 다윗이 그의 사랑하는 자들을 돌보는 데 얼마나 사려깊었던가!(요 19:26-27 참조)

다윗의 생애에 있어서 이 박해의 기간은 왕좌를 위한 준비 기간이 되었다. 그는 위대한 군인이었으나 인간을 의지하지 않는 법과 여호와를 의지하는 법을 배우기 위하여 광야에서 고난을 당할 필요가 있었다. 우리들 모두에게는 우리를 여호와께 더욱 가까이 인도하며 그를 섬기기에 더욱 적합하게 되기 위하여 광야의 시험이 필요하다. 사울이 다윗을 박해한 것은 육신과 영 사이의 대결을 예증하는 것이다. 이것은 또한 사단이 오늘날 교회를 박해하는 것을 상징한다. 사울은 왕이 아니었으나 다스리고 있었고, 다윗은 왕이었으나 아직 보좌에 오르지 못하였다. 오늘날도 사단이 "다스리는 것" 같다. 그러나 그리스도가 왕이며, 어느 날 그는 그의 정당한 보좌를 차지하실 것이다.

사울이 놉땅에서 죄없는 제사장을 죽인 것은 사람이 한 번 여호와께 거절을 당하면 어느 정도까지 갈 수 있는지를 보여 준다. 사울은 사단이 그러하듯 거짓말장이며 살인자였다(요 8:44). 도엑은 에서의 후손인 에돔사람이었다(창 25:30). 그래서 다윗과 제사장들에 대한 그의 증오는 에서와 야곱 사이의 전투의 또다른 국면이다. 다윗이 놉에 있었다는 사실은 그 제사장들의 죽음을 초래했다. 그처럼 다윗의 계략은 비극을 초래했을 뿐이었다. 사울은 죄가 있는 아말렉(15장)을 죽이기는 꺼려했으면서도 무죄한 제사장을 죽이는 일은 문제로삼지도 않았다. 이 살육은 엘리의 가족이 심판을 받을 것이라는 하나님의 예언이 성취된 것이다(2:30-36 참조).

사울은 제사장들을 죽일 수는 있었으나 아비아달이 하나님의 뜻을 결정하는 도구인 에봇을 가지고 다윗에게로 도망하는 것을 막을 수는 없었다. 자기의 뜻대로 결정했던 사울에게 에봇이 무슨 소용이 있었겠는가! 아비아달은 나중에 다윗에게 도움을 주었다(23:9/30:7 참조)."

 

삼상 23

2. 하나님이 다윗의 생애를 인도하심(23장)

 

다윗이 살아 있다는 것은 중요한 일이었다. 왜냐하면 그는 이스라엘을 구원하여 영광된 왕국을 세울 사람이며 그리스도의 육신의 조상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롬 1:3). 사단은 사울을 사용하여 다윗을 죽이려고 하였는데 하나님은 그에게 너무도 강한 상대였다. 다윗은 할 수 있는 한 하나님의 뜻을 구하였고, 하나님은 그를 보호하며 승리하게 하셨다.

 

그일라에서의 승리(1-13절)-블레셋은 다윗의 적이며 이스라엘의 적이었으므로 그가 블레셋과 싸우는 것은 정당한 일이었다. 하나님의 자녀가 하나님의 뜻 안에 있을 때에 그는 하나님의 도움을 기대할 수가 있다. 사울의 증오가 너무도 강렬하였으므로 그는 다윗이 승전한 것에 대해 하나님께 감사치도 않았고 오히려 승리자와 직접 싸우겠다고 왔다! 그리고 그일라 사람들은 그들을 구원해 준 사람을 보호하지 않았을 뿐아니라 다윗을 사울에게 넘겨주려고 하였다! 하나님의 은혜가 와닿지 않는 인간의 마음은 얼마나 사악한가!

 

광야에서의 승리(14-18절)-매일의 위험과 박해를 견디어야 하는 다윗은 얼마나 인내를 해야 했던가! 그는 능통한 전략가였으므로 사울을 패전으로 몰아 넣을 수도 있었다. 그러나 그는 하나님께서 승리를 주시기를 기다리는 것을 더 좋아하였다. 요나단이 광야에서 다윗을 만나(자기의 생명이 위험에 처해 있으면서도) 그에게 확신을 주고 격려한다는 것은 얼마나 놀라운 일인가. 말하기는 슬프지만 요나단은 다윗과 더불어 통치하도록 허락을 받지 못하였다. 왜냐하면 아버지와 함께 전쟁에서 죽었기 때문이다. 의로운 사람들이 다른 사람들의 죄로 인하여 고난을 받는 일이 흔히 있다.

 

 

십 사람들(Ziphites)에 대한 승리(19-29절)-십은 유다에 있었으며 그 주민들은 다윗에게 충성을 하는 것이 도리였으나 그들의 정당한 왕을 배반하고 사울에게 향하였다. 시편 54편을 읽고 하나님께 구원해 주실 것을 청하는 다윗의 기도를 보자. 다윗과 사울 사이에 돌이 놓여 있었으며(23:26), 이것은 마치 이스라엘과 애굽인들 사이에 구름이 끼어있는 것과 같다. 사울이 찾던 사람은 마침내 잡힐 것 같았다. 그러나 블레셋의 침략이 그를 집으로 돌아가도록 했다. 물론 하나님께서 상황을 조절하고 계셨으며, 정확한 때에 자기의 사람을 구원하셨다.

 

삼상 24

3. 하나님이 다윗에게 은혜를 주심(24장)

 

"노하기를 더디하는 자는 용사보다 낫고 자기의 마음을 다스리는 자는 성을 빼앗는 자보다 나으니라"(잠 16:32). 하나님은 다윗이 적에게 호의를 베풀도록 필요한 은혜를 주셨는데 이것은 거인 골리앗을 물리친 것보다 훨씬 위대한 일이었다! 사울의 신하들은 다윗에 대하여 거짓말을 하였으며 사울에게 다윗이 그를 죽이려 한다고 말하였다(24:9). 만일 시편 7편이 이 사건에 적합한 것이라면(그렇게 믿는 성경 학자들이 많다) 베냐민 사람 구시는 거짓말장이의 우두머리였다. 이 사건은 다윗이 사울을 죽이려고 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사울과 지도자들에게 입증할 기회가 되었다. 비록 왕이 하나님의 뜻에 벗어나 있었지만 다윗은 그의 왕을 존중하였다.

 

유혹(1-7절)-사울은 휴식을 취하려고 동굴로 갔으며 긴장을 풀었다. 그리고 그는 들어올 때 겉옷을 벗어 놓은 듯하다. 그 동굴은 크고 매우 어두웠으므로 사울은 다윗과 그의 신하들이 바위에 숨어있는 것을 보지 못했다. 다윗은 발각되지 않고 사울의 옷자락을 베어낼 수가 있었다. 물론 이 일은 적을 죽일 놀라운 기회였던 것이 분명하다! 다윗의 추종자들 중에는 이러한 환경이 하나님께서 배정하신 기회임을 주장하는 사람들도 있었다(4절). 우리가 언제나 하나님의 말씀으로 환경을 시험하는 것은 중요한 일이다. 다윗의 마음(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사람)은 대단히 온유하였으므로 사울의 옷을 벤 경솔한 행위에 대해 공개적으로 회개하였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기름 부으신 사람에 대하여 적절한 존경을 표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다윗은 하나님께서 사울을 돌보시는 것을 기꺼워하였다(롬 12:19-21).

 

해명(8-15절)-다윗과 그의 신하들은 동굴 속에서 안전하였으며 사울의 신하들은 감히 그들에게 공격을 하지 못했다. 그래서 다윗은 걸어나왔으며, 왕과 어느 만큼 거리가 생기자 그에게 말했다. 사위의 목소리를 듣는 것이 사울에게는 충격이 아닐 수 없었을 것이다! 다윗은 사울이 들은 말이 거짓말임을 설명하였고(9절), 다윗이 호의를 베풀지 않았더라면 동굴에서 그의 생명을 잃었을 것이라고 말했다(10-11절). 옷조각은 다윗이 진실을 말한다는 충분한 증거가 되었다. "나는 벼룩이요, 죽은 개입니다. 나를 추적하는 것이 무슨 유익이 됩니까 ? 그러나 나는 당신을 죽이거나 해하지 않겠습니다. 왜냐하면 여호와께서 내 싸움을 싸우시며 나의 사정을 살펴 신원하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다윗에게 참으로 은혜로운 영을 주셨다! 오늘날 우리도 우리의 적들을 향해 이와 같은 태도를 가져야 할 것이다.탄원(16-22절)-자기보다 나은 사람 앞에 서 있을 때 사울이 얼마나 가련하였겠는가! 사울이 울며 자기의 죄를 시인하는 것은 순간적인 얄팍한 감정일뿐이다. 이 같은 일들은 마음에서 우러나온 것이 아니었다. 그는 너무나 기뻐서 다윗의 친절을 인정한 것이다. 어찌 되었든지 다윗은 자기의 생명을 살려준 것이다. 그리고 사울은 자기의 가족에 대하여 우선적으로 관심이 있었으며 다윗이 왕이 되었을 때 자기 가족을 죽이지 않을 것으로 추측했다. 20절은 사울의 마음이 사악함을 시사한다. 그는 다윗이 정당한 왕임을 시인하였다. 그러나 지속적으로 그를 반대하였다. 하나님께서 그의 은혜를 거두어 가실 때 인간의 마음은 얼마나 사악해지는가!

다윗은 사울에게 한 그의 약속을 지켰으며, 사울이 죽은 후에는 사울의 명예조차 지켜 주었다. 이것은 마태복음 5장 10-12절에 나오는 그리스도의 말씀에 대한 아름다운 실증이다. 다윗이 사울에게 친절을 보이고 그를 위하여 기도하는 것은 블레셋을 정복하는 것보다도 더 큰 승리였다. 만일 우리가 여호와께 순종한다면 그가 보시기에 좋은 때에 적으로부터 우리를 돌보실 것을 확신할 수있다."

 

 

삼상 26

사울의 최후의 죄-사무엘상 26-31장

 

우리는 이제 사울의 생애의 비극적인 종말에 이르게 된다. "다른 사람들보다 더 높이서 있던" 사람이(10:23) 무당의 동굴에서 땅에 엎드러지며(28:20) 그후에는 전쟁터에서 엎드러져(삼하 1:19) 죽는다. 이 슬픈 사건을 연구하는 가

 

장 좋은 방법은 다윗과 사울 사이의 명백한 대조점들을 눈여겨 보는 것이다.

 

1. 사랑과 증오(26장)

 

다윗이 전에 문제를 당한 경험이 있는 십광야로 돌아간 이유는 이해하기가 어렵다(23:19-  이하). 흙으로 지음받은 모든 인간들처럼 그도 역시 실수한 것이라고 밖에는 생각되지 않는다. 다윗의 일부다처적인 결혼(25:42-44)이 여호와와 밀접한 관계를 가지지 못하도록 방해했을 것이라는 암시로 받아들일 수도 있다. 왜냐하면 이러한 결혼은 하나님의 뜻이 아니기 때문이다. 물론 사울은 그를 끈질기게 괴롭혔다! 24장 17-21절에 나오는 사울의 눈물어린 고백은 오래가지 못했는데 그것은 마음으로부터 나온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아비새는 다윗의 조카였으며(대상 2:15-16) 용감한 전사였다(삼하 10:10). 후에 아비새는 거인에게서 다윗의 생명을 구하였다(삼하 21:17). 그러나 아비새는 아브넬을 죽인 일에 연관이 되어 있었으며(삼하 3:30), 이것은 다윗을 근심케 한 범죄였다. 하나님께서는 그 진이 깊은 잠에 빠지게 하셨으므로(12) 다윗과 그의 조카는 위험하지 앉았다. 7절의 "진"(참호)이라는 단어는 짐이나 마차들로 방책을 둘렀음을 시사한다. 또다시 사단은 다른 사람들을 사용하여 다윗에게 사울을 죽이도록 유혹한다(8절/ 24:4 참조). 그러나 다윗은 이 유혹에 저항하였다. 복수는 여호와의 손에 있었다.

다윗이 사울에게 준 멧세지는 사실상 여호와께로 돌이키라는 간청이었다. "만일 하나님께서 내 생애의 어떤 죄로 인하여 당신으로 하여금 나를 괴롭게 하는 것이라면 나는 당신과 함께 제사를 드림으로 이 문제를 해결할 것이며, 만일 사람들이 저주하는 것이면 하나님께서 나를 위해 이 문제를 해결하실 것이다"라고 그는 말하였다. 사울의 공허한 고백을 21절에서 들어보자. "내가 범죄하였도다... 내가 어리석은 일을 하였으니..." 사실상 그는 범죄하였으나 여전히 회개하고 있지 않다! 인간은 주님보다 앞서 달릴 때에(13:8- 이하), 완전히 순종하는 데 실패할 때(15장), 자기의 가장 훌륭한 친구(다윗과 사무엘)에게 등을 돌릴 때, 마귀에게 안내를 구할 때(28장), 잘못한 것을 알면서도 회개하기를 거절할 때, 어리석음을 연출한다. "당신의 죄가 당신을 찾아낼 것임"을 명심하라!"

 

 

삼상 27-30

2. 빛과 어두움(27-30장)

 

27장과 29-30장은 다윗이 하나님의 뜻을 구할 때 얻은 승리를 다룬다. 28장은 사울이 무당의 동굴에서 도움을 받고자 할 때의 무서운 실패를 묘사하고 있다. 물론 다윗이 언제나 여호와의 뜻 안에서 행한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적의 보호 아래 살기 위해 가드(Gath)로 돌아갔을 때 그의 믿음은 실패한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27장). 그는 전에 그곳에서 어려움을 당했으나(21:10-15), 이제 그는 600명의 강력한 무리의 지도자로서 훨씬 나은 접대를 받았다. 그러나 다윗이 적의 영역을 여행하는 때이므로 왕에게 거짓말을 할 수밖에 없었고(27:10-12) 블레셋이 모였을 때에는(29:1) 다윗은 거의 자기 백성과 전쟁을 할 뻔하였다! 육신의 지혜에 의존할 때에는 반드시 괴로움으로 끝나게 된다. 다윗이 자기의 본심을 드러내는 일과 그의 백성을 죽이는 일을 막게 한 것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였다.

 

28장과 30장 사이의 대조점은 현저하다. 사울은 여호와를 떠났으므로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받지 못하였다(28:6). 반면에 다윗은 용기를 주시며 방향을 제시해 달라고 하나님을 바라보았다(30:6-9). "너희는 여호와를 만날만한 때에 찾으라"(사 55:6)는 말씀을 사울은 마음에 새기지 못했다. 하나님은 다윗이 자기의 소유와 백성을 되찾게 해 주셨을 뿐 아니라 적들에게서 탈취한 전리품을 모을 수 있게도 하셨다! 우리는 소유물 곁에 머물렀던 사림들에게 전리품을 나누어 주는 그의 은혜로운 정신과 유다의 장로들에게 선물을 보낸 그의 친절을 높이 평가한다. 이러한 선물은 정치적인 의미도 있었을 것이다!

 

사울이 밤중에 무당의 동굴을 찾아간 것을 살펴볼 때 색다른 분위기를 느끼게 된다(28장). 사무엘은 죽었고 그가 살았을 때도 사울은 그의 사역을 진실로 존경하지 않고 있었다. 인간이 가진 참된 친구를 늦게야 깨닫게 된다는 것은 얼마나 슬픈 일인가! 사울이 의지할 유일한 방도는 무당을 방문하는 일이었으며 이 일은 율법에 금지된 것이었다(레 20:6). 사람이 여호와께 등을 돌릴 때에 그 종말이 어디까지 가는 것인지 놀랄 일이다. 무당의 부름을 받아 사무엘이 나타난 것에 대해서는 끝없는 논란이 일어 왔다. 사실은 다음과 같았을 것이다.

 

 

(1)사무엘이 나타난 것은 여호와께서 하신 일이며 무당의 기능 탓이 아니었다.

(2)무당은 사무엘이 나타나자 놀랐다.

(3)사무엘은 여호와께로부터 왕에게 줄 특별한 멧세지가 있었기 때문에 왔다.

 

무당이 다른 사람과 짜고 사무엘로 분장했을 수는 없다. 왜냐하면 그녀는 사울이 온다는 것을 알지 못했기 때문이다. 또한 사단이 이러한 업적을 성취할 수도 없는 일이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이처럼 무게있는 멧세지를 사단이 전하도록 하실 리가 없으며, 또한 그의 말씀이 정죄하고 있는 일을 실행하는 데 인준을 하실 리가 없기 때문이다. 무당은 사무엘이 나타난 것을 본 유일한 사람인 듯하다. 사울은 사무엘의 음성만 듣고(20절) 사무엘의 형태는 보지 못한 것같다(12-14절). 사무엘상 15장 35절과 16장 1절에서 사무엘과 사울의 분리가 이루어졌고, 왕은 더이상 그를 보지 못할 것이었다.

하나님에 의해 선택된 사울왕이 이같은 사악한 행동에 참여할 수 있었다는 것은 믿어지지 않는다. 그러나 "선 줄로 생각하는 자는 넘어질까 조심하라"는 말씀이 기록되어 있다. 그는 빛 가운데 행하지 않고 어두울 때 행했다. 그는 자신을 변장하였고(그러나 사실상 그의 본래의 성품이 드러났다), 한 여인이 율법을 어기는 것을 허용하였으며, 자기 민족과 가족과 군대와 자신에게 수치와 패배를 안겨 주었다."

 

삼상 31

3. 삶과 죽음(31장)

 

다윗이 그의 친구들에게 선물을 보내고 있는 동안에 사울과 그의 가족은 전쟁터에서 옷을 벗김을 당하고 있었다! "육의 생각은 사망이다"(롬 8:6)! 길보아는 드보라(삿 4-5장)와 기드온(삿 7장) 시대에 큰 승리를 안겨준 곳이었다. 그러나 이 날에는 비극적인 패전의 장소가 되었다. 하나님은 사울을 버렸고 반역한 왕에게 남은 일이란 죽음뿐이었다. 무죄한 아들 요나단이 아버지의 죄로 인하여 고난을 받아야 했던 것은 참으로 슬픈 일이다.

사무엘하 1장 1-10절에는 사울의 죽음에 대한 또다른 설명이 나와 있다. 이 두 기사를 조화있게 정리하는 것은 어렵지 않다. 사울은 그가 패전한 것을 알았다. 그는 산 채로 잡혀서 적에게 엎드러지기를 원치 않았다. 왜냐하면 그들은 그를 모욕할 뿐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는 자기의 칼 위에 엎드러짐으로 자기의 생명을 끊으려 하였다. 그러나 이 일로 그는 죽지 않았으며 그의 창에 기댄 채 살아있었는데(삼하 1:6) 아말렉 사람들이 따라와서 그 일을 끝냈다(그러나 사무엘하 1장에 나오는 아말렉 사람이 진실을 말하지 않고 다만 그가 왜 사울의 왕관과 팔찌를 가지고 있는지 그 이유를 다윗에게 설명하기 위하여 이런 이야기를 말한 것으로 믿는 사람들이 있음에 유의해야 할 것이다. 그는 아마도 사울을 죽여서 "호의를 베풀었기 때문에" 다윗에게 상을 받을 것으로 생각한 듯하다). 사울의 죽음에는 중요한 교훈이 있다. 사울이 아말렉을 죽이기를 거절했으므로(15장) 반대로 그들 중의 하나가 그를 죽였다. 우리가 처리하지 않음으로써 범한 죄들은 결국 우리를 패망시키는 원인이 된다. 사울은 그의 왕관을 잃었다. "내가 속히 임하리니 네가 가진 것을 굳게 잡아 아무나 네 면류관을 빼앗지 못하게 하라"(계 3:11).

적은 사울의 죽음을 얼마나 기뻐하였을 것인가 ! 이 승리가 그들의 거짓 신들의 산당에 어떠한 영광을 가져다 주었을 것인가 ! 사울은 살아 있을 때나 죽어서나 자기의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지 못했다(빌 1:20-21). 길르앗 야베스의영웅적인 사람들이 왕족의 신성함을 더럽힌 시신들을 구해내 적절한 장사를 지냈던 일은 칭찬할 만하다. 그들은 시체들이 앞으로 더욱 모욕을 당하지 않도록 보호하기 위하여 불태웠다. 한 때는 사울이 이 백성들을 구해냈는데(11장), 이 장사가 그에게 갚을 수 있는 유일한 길이 되었다. 다윗은 후에 그 뼈들을 가져다 무덤에 묻었다(삼하 21:12-14). 헤브론에서 왕이 되었을 때 다윗은 그들이 전왕을 존중한 것을 인하여 이 용감한 사람들에게 감사를 표했다(삼하 2:5-7).

 

사울의 비극적인 생애와 죽음은 우리에게 많은 실천적인 교훈을 준다.

(1)큰 죄들은 인내하지 못하거나 불완전한 순종, 변명하는 등의 작은 일들에서부터 비롯되는 경우가 많다.

(2)어떤 죄에 사로잡히게 되면 점점 더 나쁜 죄에 빠진다.

(3)하나님과 바른 관계에 있지 않으면 하나님의 백성들과도 동행하지 못한다.

(4)핑계들은 고백을 대신할 수 없다.

(5)타고난 재능이나 능력도 하나님의 능력이 함께 하지 않으면 아무런 의미가 없다.

(6)순종을 대신할 만한 것은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