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구약 성경강해***/- 요한계시록 강해

요한계시록 어떻게 설교할 것인가?

에반젤(복음) 2019. 11. 9. 17:00



  

요한계시록 어떻게 설교할 것인가? 

 

 

 

- 김서택 -

 

1. 비밀 편지 훔쳐 읽기

 

필자가 어렸을 때, 부친은 일본 교육을 받으셨기 때문에 한글 실력이 형편없으셨다. 가끔 멀리 떨어져 계신 아버지께서 어머니께 보낸 편지를 한번 훔쳐 면 도무지 무슨 말인지 알 수가 없었다. 그러나 어머니께서는 그 편지를 다 해독하셨다. 가끔 부모님은 우리가 들어서는 안 되는 어른들만의 얘기를 하실 때 일본어로 하셨다. 우리는 주의를 집중하고 그 중에서 몇 마디라도 알아내려고 애를 썼으나. 거의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이런 일은 가끔 텔레비전 프로에서 외국 드라마를 시청할 때도 경험한다. 액션 없이 주로 대화로만 진행되는 드라마는, 무슨 말인지 통 알아듣지 못하기 때문에 조금 보다가 결국 우리나라 프로로 채널을 돌릴 수밖에 없다.

 

성경 중에서, 목회자들에게는 두려움을 안겨주고 교인들에게는 기피의 대상이 되고 있는 부분이 바로 요한계시록이다. 우리는 요한계시록을 읽으면서 도무지 이해할 수 없어서 고민하다가 그만 중단하고 다른 곳으로 갈 때가 많다. 그것은 마치 남의 비밀 편지를 훔쳐 읽는 것처럼 도대체 무슨 말인지 알 수가 없기 때문이다. 물론 처음에는 어느 정도 호기심을 가지고 대하지만 시간이 좀 지나면 역시 의미가 통하는 성경이 더 은혜스럽다고 생각하게 된다.

 

우리는 구약의 예언서나 신약의 서신서를 대하면서 마치 남의 편지를 훔쳐 읽는 것 같은 느낌이 들 때가 많다. 왜냐하면 선지자나 사도가 어떤 이야기를 할 때에는 분명히 그럴 만한 사정이 있었을 텐데, 우리는 그"사정" 을 모르기 때문이다. 그래서 어떤 분들은 성경의 배경에 대한 참고서적이 있으면 좀 추천해달라고 한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우리는 성경의 내증 외에는 그 배경에 대한 아주 적은 자료들밖에 가진 것이 없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하겠는가? 결국 성경의 진실성을 믿고 성경 안의 표현들을 통하여 그때의 상황을 역으로 추정하면서 읽는 도리밖에 없는 것이다.

 

이러한 태도는, 어떻게 보면 순환론적인 것 같기도 하고 어떻게 보면 근거도 없는 일방적인 추론인 것 같은 생각이 들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우리는 성경 저자들의 진실성, 그리고 성경이 성령의 감동으로 기록되었다는 것을 믿는다. 다시 말해서 성경의 기록은 그 저자의 진실한 기록임과 동시에 오류가 없도록 성령께서 간섭하신 글이라는 사실을 믿는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가, 성경의 어떤 의미있는 기록을 통하여 당시에는 이럴 수밖에 없었다는 것을 추론한다고 해도 그것은 잘못일 수 없다.

 

그래서 우리가 구약의 예언서나 신약의 서신서를 읽을 때- 물론 다른 구체적인 외증이 있으면 그것보다 더 좋은 일이 없겠지만, 설사 없다 하더라도-성경 자체의 표현을 통해 당시의 상황을 최대한으로 재구성하면서 ‘이러하니까 이런 말씀을 하셨구나’ 하는 식으로 읽을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이것은 종교 개혁자들의 입장과 조금 다른 것 같지만 근본적으로는 결코 다르지 않다. 종교 개혁자들의 성경 해석 원리는 ‘성경은 성경으로’ 해석한다는 것이었다. 다시 말해서 성경의 한 책은 성경 내의 다른 책으로 해석하는 것이 가장 안전하다는 뜻이다. 성경을 교리적인 입장에서 접근했을 때에는 이 방법이 가장 건전하고 바른 방법이었다. 그러나 오늘날 우리들은 성경이 단순한 교리의 체계일 뿐만 아니라 당시의 하나님 백성들에게 구체적으로 선포된 말씀(케류그마)인 것을 또한 믿는다.

 

즉. 당시 사람들이 전혀 알아듣지도 못하는 소리를 어떤 교리적인 체계를 세우기 위해서 하셨다고 볼 수는 없는 것이다. 성경은 분명히 그 말씀을 첫 번째로 받은 당시의 청중들에게 구체적인 유익을 주기 위하여 선포된 말씀이었다. 그래서 우리는 이런 예언서나 서신서를 읽을 때. 물론 구체적인 정황을 제공하는 다른 성경의 도움도 받아야 하겠지만 그 본문 안으로 들어가서 당시의 상황을 재구성하고 그런 입장에서 성경을 읽고 적용하는 것이 더 적실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요한계시록은 단순히 남의 편지를 훔쳐보는 정도가 아니라 남의 ‘비밀 편지"를 훔쳐 읽는 것과 같다. 왜냐하면 요한계시록이 그렇게 이상한 상징들이나 숫자들을 사용해서 기록되어 있는 까닭은, 물론 사도 요한이 그것을 환상으로 보았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분명 이 안에 들어 있는 메시지의 의미를 일부 사람들은 깨닫지 못하기를 바라는 의도가 있기 때문이다.

 

그러면 우리는 요한계시록을 다른 선지서나 서신서를 대할 때와는 분명히 다른 방식으로 읽어야만 한다. 왜냐하면 남의 비밀편지를 있는 그대로 읽는다면 의미도 통하지 않을 뿐 아니라 도무지 말이 되지 않기 때문이다. 군대에서는 비밀로 해야 할 내용을 통신으로 할 때 반드시 암호로 바꾸어서 한다. 왜냐하면 적에게 그 정보가 알려지면 안 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 통신을 그대로 읽으면 도무지 말이 되지 않는다. 그래서 우리는 요한계시록의 해석 "원리" 를 먼저 이해한 후에, 요한계시록을 해석하든지 이해하든지 해야 할 것이다.

 

2. 서신과 묵시

 

우리는 신약성경 후반부의 많은 부분이 서신의 형식으로 되어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물론 그 안에 들어 있는 내용은 결코 시시콜콜한 일상적인 내용이 아니다. 어떤 서신은 교리적인 논쟁 혹은 윤리적인 가르침을 담고 있고, 어떤 부분은 교회의 문제에 대한 성경적인 가르침이나 때때로 힐난하는 책망의 내용을 담고 있기도 하다.

 

그러나 일단은 편지의 형식을 취하고 있기 때문에 앞부분에 발신자와 수신자를 밝히고 수신자에 대한 간단한 문안 인사를 담고 있다. 다시 말해서 편지의 형식으로 주어졌지만, 그 안에 들어 있는 내용은 결코 사적인 내용이 아니라는 말이다. 주님이 사도를 통하여 그 교회에 주시는 공적인 메시지이며 권위를 가진 말씀이다.

 

그런 의미에서 요한계시록은 이런 서신들과 마찬가지로 교회에 보내어진 권위 있는 주님의 말씀이다. 게다가 앞부분에 보면 그런 서신의 형식을 취하고 있다. 그러나 그의 메시지 표현 방법은 평이한 형식이 아니라 "묵시" 라는 글의 형식을 취하고 있다.

 

여기서 "묵시" 라고 하는 것은 요즘 우리가 흔히 볼 수 있는 그런 스타일의 글이 아니다. 요즘 흔히 보는 글의 스타일은, 수필이나 소설 또는 기행문이나 논설문. 시나리오 혹은 시나 시조일 것이다. 가끔 이해하기 어려운 글이 장편 서사시일 것이다. 필자는 옛날에 대학 입학시험을 친 후, 니체의 「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하였다」를 읽은 적이 있다. 그때 그 책을 다 읽기까지 필요한 것은 오직‘인내’뿐이었다. 그 책은 일종의 장편 대서사시였기 때문에 이해하기가 쉽지 않았다. 그런데 요즘에는 "묵시" 라는 장르 자체가 아예 없다. 그래서 우리는 요한계시록을 읽기가 더욱더 쉽지 않은 것이다.

 

"묵시" 라는 형식의 글은, 대체로 BC 2세기에서 AD 1세기 사이에 유대인들이나 기독교인들이 많이 사용했던 문학 양식의 일종이다. 특히 우리가 외경으로 분류하고 있는 글들 중에서 이런 양식을 볼 수 있다. 이 묵시의 기원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견해가 있지만, 유대인들이 바벨론에 포로된 후 하나님 나라의 회복을 간절하게 갈망하는 과정에서 나타난 글로부터 비롯되었다고 보는 것이 정설인 것 같다.

물론 이상한 괴물들이 나타나는 것을 보면 희랍신화의 영향을 받은 것 같기도 하고, 또 빛과 어두움의 양 세력이 쟁탈전을 벌이는 것을 보면 이란 종교에서 영향을 받은 것 같기도 하지만, 포로기의 유대인들에게서 나왔고 기독교인들 사이에서도 많이 사용되었던 문학 형태로 보는 것이 좋을 것 같다.

 

(1) 묵시문학의 특징

 

이런 묵시 문학은 다음과 같은 몇 가지 특징이 있다.

 

그 첫째는 항상 종말론적이라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묵시는 현재의 이 모순투성이인 현실을 종결시키기 위하여 역사의 세계 안으로 개입해 들어오시는 하나님의 역사를 다루고 있다.

 

두 번째, 묵시는 항상 이원론적이다.

눈에 보이는 모순 뒤에는 두 개의 엄청난 초자연적 세력이 있는데, 하나는 사단의 세력이고 다른 하나는 하나님이시다. 그리고 이 세상에도 악하고 불의한 현 세대가 있는가 하면 의롭고 영광스러운 미래가 있다. 악한 현세대는 사단의 지배아래 있으며. 앞으로 하나님께서는 이 악한 세대를 멸망시키시고 의롭고 영광스러운 새 세상을 만드실 것이다. 여기서‘중간’이라는 것은 없다. 그런 점에서 묵시는 언제나 흑백논리를 취한다는 것이 특징이다.

 

세 번째, 결정론적이다.

여기서 결정론적이라고 하는 것은 인간 만사가 모두 다 하나님이 짜 놓으신 시간표에 의해 움직이게 된다는 것이다. 따라서 눈에 보이는 악이 아무리 세력이 강하고 온 세상을 주무르고 있다 하더라도, 하나님이 정하신 때가 되면 악의 세력은 패배하고 하나님이 통치하시는 의로운 나라가 오게 되는 것이다. 지금 악이 그렇게 날뛰는 것도 하나님께서 일시적으로 그들을 허용하셨기 때문이며 그들의 활동시간도 정해졌다는 뜻이다.

 

네 번째, 많은 상징과 환상이 나타난다.

이것은 묵시의 내용이 대부분, 저자가 꿈이나 환상 가운데 하늘로 이끌려 올라가서 하나님의 영원한 계획을 보는 것으로 되어 있기 때문이다. 하늘에서 일어나는 일은 이 세상일과 달라. 기이하고 이상하게 느껴진다. 종종 해석자인 천사가 저자를 안내하기도 하고 때로는 그가 보는 특별한 일의 의미를 설명해주기도 한다.

 

다섯 번째, 묵시는 익명성을 가진 것이 특징이다.

사실‘익명’이라고 하기보다는 "차명" 이라고 하는 것이 더 옳을 것이다. 실제로 저자는 자신의 이름이나 신분을 감추고 구약 성경에 등장하는 유명한 사람을 저자로 빌려온다. 그 이유는. 청중들을 속이려는 의도라기보다는 그들의 관심을 끌기 위한 것으로 풀이된다.

 

(2) 요한계시록의 특징

 

우리는 요한계시록이 분명 이러한 묵시문학의 형태를 취하고 있는 것을 보게 된다. 다시 말해서. 글의 내용은 다른 서신이나 복음서처럼 사도적인 권위를 가진 것이지만 표현 형식은 어떤 특별한 이유로 인하여 "묵시"의 형식을 빌어쓰고 있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몸은 사도적인 증거인데. 옷은 묵시라는 옷을 입고 있다는 뜻이다. 따라서 우리는 묵시라는 옷에 지나치게 신경을 써서는 안된다. 왜냐하면 요한계시록은 묵시의 형태를 취하고 있지만, 당시의 묵시와는 현저하게 다른 특징들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 다른 특징 중 첫 번째는 요한계시록의 실명성이다.

거의 대개의 묵시가 저자의 실명을 밝히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요한은 여러 곳에서 기록하고 있는 이가 요한 자신임을 밝히고 있다. 이것이 바로, 입고 있는 옷은 묵시이지만 그 내용은 다른 묵시들과 분명히 구분되는 점이다.

 

뿐만 아니라 요한은 이 요한계시록의 서두에서 교회들에게 다른 서신과 마찬가지로 이 글을 교회 안에서‘읽고 듣고 그 가운데 기록된 내용을 지킬 것을 권면’하고 있다(1:3).

 

이것은, 교회가 요한계시록을 이상한 비밀문서처럼 생각해서 깊이 감추어둘 것이 아니라 다른 서신들과 마찬가지로 예배 시에 읽고 가르치고 또 그 말씀이 명령하는 바를 지키라고 요한 자신이 명하고 있는 것이다.

 

두 번째는 대부분 묵시의 글들은 현세에 대하여 비관적인데 비해, 요한계시록은 결코 비관적이거나 염세적이지 않다는 것이다.

묵시의 글들은 대개 유다 나라나 교회가 정상적이지 못할 때 너무나도 간절히 하나님의 개입을 갈망한 나머지 기록된 글들이다. 그래서 그 글들을 보면 악의 세력이 너무 강해서 인간이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아무것도 없는 것 같다. 오직 그들이 할 수 있는 일은 하나님께서 이 악한 세력을 뒤집어엎으시기를 기다리는 것뿐이다.

 

그러나 요한계시록은 대단히 현실적이며 낙관적이다. 사단의 세력은 더 강해지겠지만 이 세상은 하나님의 통제 아래 있으며 교회는 궁극적으로 승리 한다고 말한다. 물론 최종적으로는 더욱 영광스러워지고 새로운 세계가 열리겠지만, 그렇다고 이 현실 가운데서 하나님의 백성들이 가만히 있기만 하지는 않는다. 그들은 황제 숭배를 거부하고 이 세상의 악과 싸울 것이다.

 

세 번째, 앞부분에 목회 서신을 포함하고 있는 것도 중요한 특징 중 하나이고 편지의 대상이 되고 있는 일곱 교회도 당시에 실제로 존재하던 교회들이었다는 것 또한 특징이다.

어떤 사람들은 나중에 누군가가 이 목회서신 부분을 삽입시켰을 것이라고 주장하지만 그런 주장을 받아들이는 자는 많지 않은 것 같다. 물론 거기에 나타난 주님의 모습도 우리가 이 세상에서 볼 수 있는 그런 모습은 아니지만, 구체적인 상황에 처해 있는 교회를 위해서 교훈하는 편지가 기록되어 있는 것도 다른 묵시의 글에서는 볼 수 없는 중요한 특징이다.

 

따라서 요한계시록은, 내용적인 면에서 볼 때는 다른 복음서나 서신서와 다를 바 없는 권위있는 사도적 말씀이다. 그러나 그 글이 입고 있는 옷은 묵시라는 스타일의 글 인출, 그것은 아마도 당시에 로마 당국으로부터 교회를 보호하기 위해 취했던 조치로 생각되어진다. 그러나 요한계시록을 다른 묵시와 동일시하거나 묵시적인 특징에만 지나치게 몰두하게 되면, 그 안에 들어 있는 사도적인 증거를 놓치게 된다.

 

우리는 요한이 실제로 밧모섬에서 이런 내용들을 환상 가운데 본 것을 믿는다. 그가 아무런 체험도 없이, 마치 이런 일들을 경험한 것처럼 상상해서 쓴 것은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요한계시록을 묵시의 장르로 보고 그런 문학적인 특징에 유의하면서 이 글을 해석하는 것은 분명 잘못된 것이 아니다. 어떤 분은 예언과 묵시의 차이에 대하여 "예언은 설교이지만 묵시는 문학에 속한다”라고 말했는데, 대단히 통찰력 있는 지적이다. 예언의 말씀은 설교이다. 구체적인 상황에 처해 있는 교회에 선포된 말씀이다. 그러나 묵시는 직접적인 설교가 아니라, 어떤 구조를 가지고 있고 어떤 목적을 위하여 기록된 문학적 표현이라고 보아야 한다.

 

3. 요한계시록의 해석과 적용

 

요한계시록의 역사는 적용의 역사라고 보아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왜냐하면, 지금까지 요한계시록에 대한 다양한 해석이 있어야만 했던 것은 결국 요한계시록을 초대교회나 역사적인 상황, 혹은 오늘날의 시대에 어떻게 적용해야 하는가 하는 것과 직결되는 문제였기 때문이다.

 

최초에 이 요한계시록을 받은 소아시아의 일곱 교회는 이 글을 이해하고 적용하는데 별로 큰 어려움이 없었을 것이다. 물론 많은 상징이나 환상이 있지만 대체로 사실 그대로였고 또 그 상징들이 자신들의 처지와 잘 맞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앞으로 일어날 일들에 대해서는 아직 일어나지 않았으니까 그들로서는 알 수가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 해석이 문제가 된 것은 그 후의 일이었다. 왜냐하면 이 모든 일들이 "속히 될 일" 이라고 했는데, 상당한 시일이 지었음에도 불구하고 아직 사단의 세력은 결박된 것 같지 않고 새 하늘과 새 땅도 임한 것 같지 않기 때문이다. 그리고 오신다고 약속하신 주님은 몇 백년이 지나도 올 것 같지가 않기 때문이다.

 

대체로 초기의 교부들은 문자적인 천년 왕국을 믿었던 것 같다. 그들은 조금 지나면 그리스도가 오셔서 악의 세력을 모두 심판하시고 실제로 이 지구 위에 의인들이 통치하는 왕국이 실현되었다가 영원한 영광의 나라에 들어갈 것으로 믿었다. 그러나 콘스탄틴 대제의 기독교 공인 후에도 가시적인 하나님의 나라는 도래하지 않았고, 오히려 몬타누스 같은 종말론자가 무리하게 천년 왕국을 건설하려고 했다. 그러자 그에 대한 반작용으로 전통적인 교회는 천년을 상징적으로 해석하려고 하였다.

 

또한 12세기에 요아킴이라는 사람은 요한계시록을 역사적인 사실 안에 적용시키려고 했는데 그의 제자들은 교황을 짐승으로. 그리고 로마 천주교를 짐승을 탄 음녀로 해석했다. 이러한 반천주교적인 해석은 후에 종교 개혁 사상에 그대로 전수되어 오랫동안 지속되었다.우선 요한계시록의 해석은 몇 가지로 나눌 수 없다.

 

(1) 역사주의적 해석 :

 

이것은 요한계시록을 실제로 이 세상에 일어난 일에 대한 예언으로 보는 것이다. 그래서 요한계시록에 기록된 일들을 역사적으로 중요한 사건들과 일치시키려는 입장이다. 이런 의미에서 본다면 짐승이 교황이 될 수도 있고 666이 오늘날 상품마다 적히는 바코드로 해석될 수도 있다. 또 이러한 입장은. 뒤에 나오는 아마겟돈 전쟁을 중동 전쟁이나 혹은 제3차 세계대전으로 해석하기도 하는 것이다. 사실 많은 사람들이 어떤 큰 재앙이 일어날 때마다 계시록의 내용과 자신들의 경험을 연결시키려고 많이 시도하였다.

 

예를 들면. 중세 시대에 흑사병이 퍼졌을 때 사람들은 성경의 ‘청황색 말을 탄 사람’을 이 무서운 전염병과 연결시켰다. 또 현재 일어나는 환경오염이나 자연 파괴 같은 상황은 계시록의 내용과 잘 일치된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이런 역사적인 관점은 맞는 부분도 있지만 잘 맞지 않는 부분도 많이 있다. 사실 요한계시록의 내용을 역사적인 사건과 정확하게 일치시키려고 하기 때문에 해석이나 적용을 함에 있어서 많은 오류가 생긴다고 말할 수 있다.

 

(2)상징적 해석 :

 

요한계시록의 내용을 역사적인 사건과 일치시키려고 해서는 안되고 하나님께서 일하시는 방식으로 보아야 한다는 입장이다. 그래서 사단의 결박은 실제적으로 사단을 무저갱에 가두어두는 것이 아니라 진리로 사단의 세력을 결박하는 것이며 ,천년 왕국도 실제로 의인들이 통치하는 문자적인 천년 왕국이 아니라 교회 시대를 상징하는 것으로 본다. 사실 종교 개혁자들은 천년 왕국을 무천년의 입장에서 보는 것이 지배적이었다.

 

물론 요한계시록 1장에 나타나는 주님의 이상한 모습도 부활하신 주님의 실제적인 모습이 아니라 교회에 인상적인 교훈을 주기 위하여 나타난 모습으로 보는 것이다. 그리고 4장의 ‘보좌’나 5장의 ‘어린양의 등장’등도 상징적으로 해석할 때 환상의 이질성을 극복하기가 더 쉽다. 알렉산드라 학파는 이런 식으로 어려운 내용을 대할 때 상징적으로나 우화적으로 처리하는 것이 전통이었다.

 

요한계시록에는 많은 상징이 있지만 그러나 그 모든 것을 상징으로만 볼 수는 없다. 분명히 많은 부분들이 역사 안에 일어날 일들이며, 결국 교회의 승리나 그리스도의 재림 혹은 새로운 하늘과 새로운 땅의 창조 등은 문자적으로 성취되어야 할 것들이다. 그렇다면 어디서 어디까지는 상징적으로 해석하고. 어디서 어디까지는 문자적으로 해석해야 하느냐 하는 부담이 남게 된다.

 

(3) 과거주의 혹은 미래주의적 해석 :

 

과거적 해석이라고 하는 것은 요한계시록의 내용을 1세기의 역사적인 배경 하에서 해석하려고 하는 것이다. 어떤 사람은 요한계시록의 내용이 예루살렘의 멸망과 로마의 멸망사이에 다 성취되었다고 주장하기도 하는데. 그것은 좀 지나친 해석인 것 같다. 우리는 요한계시록이 1세기에 소아시아 지방에 있던 일곱 교회에 주어진 말씀이며 그들의 역사적인 상황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는 사실을 부정할 수 없다.

따라서. 그들이 요한계시록의 내용을 모두 다 알지는 못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시각에서 요한계시록을 읽고 해석해야 한다는 것이 요한계시록 해석의 기본자세이다. 다시 말해서 그들은 전혀 생각하지도 못했던 20세기의 상황을 그 예언 안에 끼워넣어 해석을 시도하는 것은 요한계시록의 기록 취지에서 볼 때 상당한 무리가 아닐 수 없다. 그러나 사도 요한이 여러 번 밝혔듯이. 이 서신에 포함되어 있는 내용이 모두 그 시대에 종료되는 일은 아니다.

 

그들도 확인할 수 없는 미래에 속하는 일들도 상당 부분 있는 것이다. 아브라함 카이퍼 같은 사람은 요한계시록 4장 1절 이하를 완전히 미래에 속하는 일로 단정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그것도 지나친 입장인 것 같다.

 

우리는 요한계시록을 읽으면서 무엇보다도 먼저 이 글은 묵시의 장르에 속한다는 것과 묵시 문학의 특징들을 이해해야 한다. 그리고 1세기경의 소아시아 일곱 교회의 입장에서 보되 상당한 부분은 아직도 성취되지 않은 미래에 속한다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 그리고 많은 환상이나 숫자가 비유나 상징이기 때문에 상징적으로 해석해야 하며, 역사적으로 정확하게 일치시키려고 하는 것은 무리일 때가 많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4. 요한계시록과 한국 교회

 

우리 한국교회는 요한계시록과 깊은 관계가 있다. 그 이유는 원래 우리 한국 교회가 성경 공부를 좋아하기도 했지만, 일제 식민지 과정을 겪으면서 요한계시록의 교회가 처했던 상황과 우리 한국 교회의 처지가 너무나도 비슷했기 때문이다. 우리나라 성도들의 입장에서 볼 때, 일제 신사 참배를 강요하고 우리의 자유를 억압하며 전쟁으로 세상을 정복하려는 일본은 요한계시록에 나오는 짐승과 같았다. 그리고 악이 지배하는 이 세상은 누가 보아도 천년 왕국은 아니었다. 그래서 우리나라 교회의 전통적인 입장은 대단히 강한‘역사적 전천년’의 입장이다.

 

다시 말해서 그리스도가 공중에 재림하시면 교회는 공중으로 끌려올라가며 이 세상에는 천년 동안 의인들이 다스리는 시대가 온다는 것이다. 그리고 나서 잠깐 악이 풀려났다가, 곡과 마곡의 전쟁이 있은 후 인간의 운명이 영원한 생명과 멸망으로 나누어지게 된다는 것이다. 이렇게 믿은 이유는 성경에 그렇게 기록되어 있기 때문이다.

 

곁길로 나갔던 죄인 하나가 다시 돌아오는 것, 그것은 사단의 왕국에서는 큰 재앙이다. - 찰스 스펄전 -

 

물론 이런 천년 왕국이 복음서에 나타난 주님의 종말에 대한 예언이나 사도들이 말씀하신 종말에 대한 설명과 일치되지 않는 것이 문제이긴 하지만, 우리는 성경을 있는 그대로 믿었고 또 종교 개혁자들이 가지고 있는 "계시의 점진성" 원리에 의해 뒤에 계시된 것이 보다 구체적이라고 믿었던 것이다.

 

필자도 어렸을 때 교회에서 요한계시록에 대한 설교를 아주 많이 들었다. 그런데 그 내용들은 다 이러한 역사적 전천년의 입장이었다. 그리고 어려운 상장들이 하나씩 하나씩 해석될 때마다 기가 막히다는 생각을 하곤 했었다.

 

그러나 요즘 생활이 좀 편해지면서 요한계시록에 대한 설교를 듣기가 점점 어려워지고 있으며, 특히 20세기가 끝나가면서 계시록의 예언과 현실을 역사적으로 무리하게 일치시키려는 입장을 많이 보게 된다. 우리는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이지만 사람의 글로 되어 있으며, 어떤 부분은 인간의 문법적인 규칙이나 문학적인 특성을 가진다는 사실을 전혀 배제할 수 없음을 인정해야 한다. 묵시 문학은 묵시 문학으로서의 독특한 특징이 있으며, 특히 묵시의 많은 상징들을 예언처럼 직역하려고 하면 안 된다.

 

특히, 요한계시록이 나중에 기록되었다고 해도 복음서에 나타난 주님의 말씀이나 서신서에 기록되어 있는 사도들의 증거와 일치해야 한다. 아무리 요한의 계시록이라고 해도 복음서에서 주님이 말씀하신 것과 모순되면 그것은 바른 해석이 아닌 것이다.

 

오늘 우리는 두 가지 입장에서 요한계시록을 대하고 있다. 하나는 이미 풍요에 젖은 오늘날의 교회가 1세기 때 고난 받던 교회의 처지를 더 이상은 이해하기 어렵다는 것이다. 그리고 다른 하나는 일제시대의 그 어려웠던 환경도 이제는 많이 없어졌다는 것이다. 그래서 극심한 고난과 핍박 하에 있던 교회에 주어졌던 말씀을 풍요에 젖어 있는 교회가 제대로 이해하기는 매우 어렵다는 점이다. 그러나 새로운 한 세기가 끝나고 또 다른 한 세기를 맞이하는 우리들은, 미래에 있을 불길한 일들에 대한 생각 때문에 더욱더 역사적인 호기심을 가지고 요한계시록을 해석하려는 태도를 갖게 된다.

 

특히 많은 목회자나 교인들이 계시록의 중간에 나오는 일곱 인이나 일곱 대접의 재앙 같은데 큰 관심을 가지는 것도 바로 이런 지적인 호기심에서 기인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처럼 미래에 대한 지적인 호기심을 가지고 요한계시록을 해석하려고 하는 태도는 대단히 잘못된 태도라고 보아야 한다. 우리는 복음서에서 주님이 말씀하신 것과 서신서에서 사도들이 증거한 것과의 균형을 생각하면서 요한계시록을 이해해야 하며, 종교 개혁자들의‘불명확한 구절은 더 명확한 구절로 해석하는 것이 옳다’고 한 입장을 기억해야 할 것이다.

 

5. 요한계시록을 어떻게 읽을 것인가?

 

요한계시록은 일곱이란 숫자로 된 일련의 내용으로 그 뼈대를 형성하고 있다.

 

즉, 요한계시록의 뼈대는

일곱 교회에 보낸 편지 (2-3장),

일곱 인(6,7장),

일곱 나팔(8,9장),

일곱 대접(15,16장)이다.

 

그리고 앞뒤와 중간 중간에 다른 환상이나 메시지가 들어 있다.

서론(1장),

하나님의 보좌와 어린양(4,5장).

작은 책과 두 증인(10,11장),

여자. 짐승. 심판(12,13,14장).

바벨론의 멸망(17,18장),

최후의 승리(19.20장),

새 창조, 새 예루살렘(21,22장).

그리고 결론(22장)으로 짜여져 있다.

 

결국 일곱 뼈대로 구성되어 있는 환상들은 메시지의 긴박감과 극적인 효과를 더하기 위한 것이지만 이것만이 요한계시록의 핵심적인 내용은 아니다.

 

오히려 중간 중간에 나오는 막간 계시가 더 주된 계시(main message)일 수 있다. 더욱이 일곱 인의 환상을 보면, 일곱째 인에서 일곱째 인의 내용이 나오지 않고 바로 일곱 나팔로 넘어가고 있다. 바로 이런 것이 청중들로 하여금 잠시도 다른 곳으로 눈을 돌리지 못하게 하고 이 메시지에 계속 주의를 집중하게 만드는 기법이라고 생각한다.

 

결국 이 요한계시록은 요한이 서두에 밝힌 것처럼 소아시아에 있는 일곱 교회에 보낸 편지이며 그들이 일차적으로 이 서신을 받은 자들이다. 목회 서신에 나타난 것처럼 그들이 처한 상황은 매우 다양했는데, 대체로 두 가지 중요한 위협을 받고 있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하나는 황제 숭배를 강요하는 핍박이요, 다른 하나는 로마의 타락하고 음란한 문화의 공격이었다.

 

그래서 한편으로는 황제 숭배를 거부하고 끝까지 믿음을 지키는 자들에게 돌아온 순교의 박해가 있었는가하면, 다른 한편으로는 니골라 당의 교훈처럼 방임적인 사상이나 발람의 교훈 같은 배금사상, 또는 이세벨의 교훈과 같은 도덕적인 부패가 목회자나 교인들을 위협하고 있었다.

 

다시 말해서 사단의 목적은 로마라는 엄청난 세력을 동원해서 가장 말씀이 풍성했고 가장 복음의 빛이 찬란하게 비취었던 이곳의 교회를 멸절시키려는 것이었다. 이즈음의 교회는 마치 폭풍 앞에서 막 꺼져가는 촛불처럼 그 힘을 잃고 해체되는 상태에 있었다. 주님은 이때 요한에게 이 묵시를 보여주심으로써 눈에 보이는 이 세상 위에 하나님께서 다스리시는 나라가 있으며 주님은 교회가 끝까지 믿음을 지키기를 바라신다는 메시지를 보내고 있는 것이다.

 

그러면 우리는 이 요한계시록을 어떻게 읽을 것인가?

 

(1) 교회 중심적으로 읽어야 한다.

 

요한계시록은 처음부터 끝까지 교회에 대한 말씀이라고 볼 수 있다. 글의 서두부터 저자는 교회가 이 서신을 예배중에 읽고 가르치며 적용할 것을 명하고 있다.그리고 뒤이어 바로 일곱 교회에 대한 목회 서신이 나오고, 그 뒤에 죽음을 당하는 두 증인(11장)이나 한 아이를 탄생시키는 여자(12장)이야기를 통하여 이 세상과 싸우는 교회의 모습이 나타난다. 그리고 하늘에서 내려오는 새 예루살렘의 모습을 통하여 교회의 영광과 완성된 모습을 보여준다(21절).

 

결국 교회를 핍박하던 짐승이요 유혹하던 음녀인 로마는 멸망하고 교회는 영광스럽게 승리한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 계시의 목적이다. 따라서 요한계시록은 교회에 대한 말씀이며 교회 중심적으로 읽어야 제대로 이해할 수 있다.

 

(2) 하나님의 구원 역사 중심으로 읽어야 한다.

 

이 당시 교회가 어려움을 겪었던 주된 이유는 오시겠다던 주님은 오시지 않고 교회에 대한 핍박과 유혹만 더 심해졌던 데 있다. 이것은 주님께 "그 나라가 언제 임하느냐?’ 고 물었던 제자들의 태도와 다를 바가 없다. 당시 사람들은 하나님의 나라가 속히 임할 것으로 생각했다.

그러나 하나님의 나라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시작되어 완성을 향해 가고 있는 과정에 있었던 것이다. 교회는 그 나라의 완성의 시기가 어디냐에 관심을 쏟을 것이 아니라 이 교회의 시대에 영혼을 구원하는 자신의 사명을 다하는 데 관심을 쏟아야 할 것이다. 그래서 주님은 그 불꽃 같은 눈으로 교회를 보고 계시며 결국 충성하지 않는 교회를 심판하시는 모습으로 나타나고 있다.교회는 세상을 두려워할 것이 아니라 교회의 주인되신 주님을 더 두려워해야 할 것이다. 당시 로마가 교회에 있어서 무서운 유혹이었던 이유는 그렇게 비기독교적이면서도 겉으로 나타나는 모습은 거의 인간이 도달할 수 있는 최고의 문명과 향락을 누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요한은 보좌에 앉으신 하나님의 모습을 보여준다(4장).

 

이것은 실제적인 하나님의 모습이 아니다. ‘보좌’ 는 하나님의 통치를 나타내며 거기에 나타나는 보석의 색깔은 하나님의 통치의 성격을 보여준다. 사람들의 눈에는 로마의 통치가 절대적인 것처럼 보이지만 그 위에는 하나님의 통치가 있고 하나님의 통치는 로마 황제의 변덕이나 발광에 전혀 영향을 받지 않는 모습이다. 그리고 보좌에 앉으신 분의 오른손에는 일곱 인으로 봉한 한 책이 보인다. 이 책에는 구원받은 사람들의 이름이나 사람들의 행동이 기록되어 있지 않다. 하나님의 구원 계획이 들어 있다. 그 책을 펼친다고 하는 것은 하나님의 구원 계획을 성취하는 것을 의미한다.

 

로마는, 당시 사람들이 겉으로 나타난 그 부귀영화만 보고 과연 인류가 로마를 넘어서 더 발전할 수 있을까 생각할 정도로 인류가 이룩한 문명의 극치였다. 그러나 성경은 로마를 넘어서 하나님의 구원 역사는 계속될 것이며, 이후에도 전쟁이나 기근은 계속 되지만 하나님은 자기 백성을 구원하는 데 결코 실패하시지 않는다는 것을 계시를 통해 보여준다.

 

(3) 상징적으로 보아야 한다.

 

그래서 요한계시록의 상징을 지나치게 역사적인 사건과 일치시키려는 시도는 무리이다. 우리는 마음속으로 요한계시록이 앞으로 인류에게 되어질 일을 밝히는 예언 같은 책이기를 바란다. 물론 시대에 따라서 요한계시록의 내용이 그 시대에 놀랍게 적용되어졌던 때가 있었던 것은 사실이지만, 그러나 최종적인 하나님 나라의 완성은 역시 하나님의 주권에 속한다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

 

그리고 요한이 직접적인 예언을 하기보다는 묵시라는 한 문학 양식을 사용하여 말씀한 것을 볼 때, 우리는 상당히 많은 부분을 상징적으로 해석해야 할 것이다. 예를 들어서 1장에 나타난 그리스도의 모습을 실제적 인 주님의 모습으로 본다거나 4장에 등장하는 보좌에 앉으신 하나님과 그 주위에 있는 네 생물도 상징적으로 해석해야 한다.

 

예를 들어서, 하나님의 보좌 주위에 실제로 사자나 송아지나 사람이나 독수리 모양을 한 생물들이 돌아다닌다는 뜻이 아니라 이런 어려운 때 교회가 어떤 자세를 가져야 할 것인지 보여주는 의미로 생각해야 한다. 그래서 죽임을 당하는 두 증인이나 바다에서 올라오는 짐승이나 붉은 짐승 위에 앉은 음녀도 다 상징적인 의미를 가지고 있다. 이것은 666이라는 숫자나 아마겟돈 전쟁 혹은 사단의 결박이나 천년 왕국에도 마찬가지로 적용되어야 할 것이다.

 

숫자 666에 대해서는 황제 "네로 카이"(Nevrwn kai 50+200+6+50+100+60 +200=666)를 뜻하는 것으로 보는 입장이 가장 유력하다. 혹 어떤 사본에는 이 숫자가 616으로 되어 있는데 이것 역시 ‘Nevrwn kai"의 히브리어 합산이다. 그렇다면 666은 황제 숭배의 표시이며 666의 도장을 맞는 것은 황제 숭배에 굴복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런데 황제 숭배의 핍박이 가장 심했을 때는 도미티아누스 황제 때였고 또 요한 계시록이 기록된 때도 그때라는 설이 가장 유력한데, 왜 하필이면 "네로 황제" 냐 하는 의문이 제기될 수 있다. 그러나 네로가 자기를 신성시한 대표적 인물이고 초대 교회 때 교회를 가장 심하게 핍박했던 장본인이라는 것을 생각하면 그를 666의 상징인물로 삼는 것도 큰 무리는 아닐 것으로 생각된다.

 

"아마겟돈"은‘알 므깃도’로서‘므깃도의 산’이라는 뜻이다. 드보라 때에 시스라의 군대가 하나님의 백성들을 대적하기 위하여 철병거를 몰고 와서 대격전을 벌였던 곳이 바로 므깃도이다. 물론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백성들과 세상 사람들이 늘 전쟁을 하고 다투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때로 사단은 자신의 모든 세력을 다 집결시켜서 하나님의 백성들을 대적할 때가 있다. 그런 일이 일어나는 곳이 바로 아마겟돈 전쟁터로 여겨지는 것이다. 대표적인 한 예가 루터를 소환했던 보름스 의회장과 같은 곳이다. 이것은 군사적인 전쟁이 아니라 영적인 전쟁이었으며, 교회가 완전히 죽느냐 아니면 승리하느냐가 판가름 나는 중요한 전쟁이었다.

 

(4) 4복음서나 다른 서신서의 종말에 대한 예언과 균형을 이루어야 한다.

 

우리는 요한계시록을 읽으면서 이 요한계시록에 기록된 내용과 복음서에서 주님이나 다른 사도들이 종말에 대하여 예언한 내용과의 관계에 대하여 고심하지 않을 수 없다. 우리는 한편으로 주님이 사도들을 통하여 나중에 말씀하신 것에서 계시가 한층 더 진보된 것을 볼 수 있다.

 

< 토막글 >

희생

희생은 사람들을 감동시킨다. 그것은 사람들을 녹인다. 그리고 마침내 그것은 사람들로 하여금 인생을 살아가다가 멈추어 서서 이런 질문을 하게 만든다 “왜, 도대체 왜 당신은 나를 위해 생명을 버리려 했소7”-빌 하이벨스-

 

예를 들어서 바울의 ‘나의 복음’ 은 구원론에 있어서 보다 구체적인 것을 보여준다. 그래서 "계시의 역사적 점진성" 의 원리를 말하기도 한다. 그러나 요한계시록처럼 상징으로 가득 찬 말씀이 과연 복음서나 서신서에서 주님이나 다른 사도들이 증거한 것보다 더 진일보한 계시를 우리에게 전하고 있다고 보아야 할 것인가, 아니면 요한계시록의 내용을 복음서나 서신서의 종말론에 제한시켜야 하느냐 하는 문제가 생긴다.

여기에서 우리는 아무리 요한계시록이 마지막에 기록되었고 요한 자신이 서신의 끝에서 계시의 종결성을 강조하고 있다고 해도(22:18-19),요한계시록의 종말론은 복음서에서 주님이 말씀하신 것이나 사도들의 증거의 제한을 받는 것이 안전하다고 생각한다. 다시 말해서 복음서나 사도들의 서신에서는 새 하늘과 새 땅이 이루어지기 전의 "천년 동안의 낙원"을 말씀하고 있지 않다. 따라서 사단의 결박이나 천년 왕국도 복음을 통하여 하나님의 구원이 이루어지는 이 교회 시대를 상징적으로 나타낸다고 보는 것이 안전하다고 여긴다.

 

6. 요한계시록 어떻게 적용될 것인가?

 

우선 우리가 요한계시록을 무슨 비밀문서 다루듯이 기피하고 멀리하는 것은 옳지 않은 것 같다. 왜냐하면 서신의 서두에서 요한은 이 예언의 말씀을 교회가 예배 시간에 부지런히 읽고 배우며 자신들의 삶에 적용할 것을 권면하고 있기 때문이다(1:3).

 

따라서 우리도 예배 시간에 이 요한계시록을 자주 설교하고 또 개인적으로도 자주 읽고 묵상하는 것이 좋을 것 같다. 또한 상징을 해석할 때에는 누가 생각해도 자연스럽고 수긍이 가는 방식으로 해석하는 것이 좋으며, 유달리 이상하게 해석을 시도하거나 혹 모든 부분을 다 정확하게 해석하려고 하다가는 묵시 문학의 올무에 걸려 넘어지기 쉽다.

 

(1) 요한계시록은 현대에 매우 적합한 말씀이다.

 

우선 이 예언의 말씀을 받은 일곱 교회가 있던 소아시아지역 (지금의 터키)은 얼마 후에 사라센 제국의 침략을 받아서 교회는 모두 파괴되고 말았다. 지금은 관광객들이 옛날 교회의 유적을 찾아서 그곳을 방문하고 있을 뿐이며, 아직도 터키 당국은 기독교의 포교나 전도를 인정하지 않고 있다.

 

우리는 20세기에 들어오면서 바로 이 무서운 "교회 파괴" 의 현실을 경험했다. 그것은 바로 공산주의자들에 의한 교회의 파괴였다. 지금의 동구권이나 러시아 혹은 공산화된 중국은 한때 기독교가 대단히 번창했던 곳이다. 그런데 공산주의 혁명이 일어나면서 철저한 교회 파괴가 일어났고 수많은 기독교인들이 강제 수용소 등지에서 순교하는 일들이 벌어졌다.

 

사실 북한도 한때는 남한 이상으로 기독교가 번창했던 곳인데, 공산 정권이 들어서면서 교회가 철저하게 파괴되었고, 많은 교인들이 남한으로 내려와 교회를 세웠다. 이후 북한의 성도들은 많은 탄압을 받았으며 지금도 지하에 숨어 예배드리는 것으로 알고 있다. 무서운 교회 파괴가 2천년만에 재연된 것이다.

 

(2) 현대의 문명은 로마 시대를 방불케 한다.

 

로마 당시에 교회가 가장 받아들이기 힘들었던 현실은. 하나님을 거역하는 로마 당국의 부와 지식과 문명의 수준이었다. 어떤 역사가는 "모든 역사의 물은 로마로 흘러들어가서 로마에서부터 흘러나온다"고 말하였다. 로마는 그만큼 사상적으로나 법률적으로나 문명적으로나 부의 극치를 이루고 있었다. 사람들은 인류가 로마를 넘어 그 이상 더 발전할 수 있으리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로마가 이룩한 평화(팍스 로마나)는, 설사 그리스도가 온다고 해도 더 나은 평화를 이룰 수 있을까 생각될 정도로 완벽한 평화처럼 보였다. 그러나 로마가 역사의 종착역은 아니었다. 그 후에도 역사는 계속되었고 전쟁과 질병과 기근은 수없이 되풀이되었다. 이것은 오늘날에도 마찬가지이다. 오늘의 기술문명은 인류가 생각한 최고 수준이다. 일단 사람이 머리로 한 번이라도 생각해본 것은 거의 대부분 과학 기술에 의하여 가시적으로 이루어진 상태이다.

 

사람들은‘도대체 인류가 이 현실을 넘어서 더 진화하거나 발전할 수 있을까’하는 교만한 생각에 빠져 있다. 그러나 역사는 계속될 것이며 전쟁이나 질병이나 기근 역시 계속될 것이다. 그리고 그런 가운데 하나님께서는 자신이 택한 백성들을 다 구원하실 것이다.

 

(3) 요한계시록은 교회로 하여금 항상 정신을 차리게 한다.

 

요한계시록은 마치 무대 뒤에 있는 실체를 보여주듯이 이 세상 뒤에 있는 하나님의 구원 역사를 보여주고 있다. 물론 승리한 교회는 천국에서 영광스러운 지위를 누리고 있지만, 이 지상의 교회는 전투중인 교회이다. 이 세상에서는 우리의 싸움이 아직 끝나지 않은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치 이 세상에서의 싸움이 끝난 것처럼 영적 전투를 포기한 교회는 주님의 책망을 받을 수밖에 없다. 교회의 종말론적인 모습을 가장 잘 보여주는 비유는 "그리스도의 신부" 이다. 신부는 신랑이 올 그 순간까지 긴장하면서 기다리고 있어야한다. 그래서 요한계시록에는 "속히" 또는‘빨리" 라는 말씀이 많이 나온다. 그 이유는 긴장하지 않는 신부는 더 이상 신부가 아니기 때문이다.

 

우리나라 교회가 일제시대에 이 요한계시록의 말씀으로 그 고난들을 잘 견딘 것은, 이 말씀이 당시 우리의 상황에 너무나도 잘 맞게 적용되었기 때문이다. 황제 숭배를 강요하는 일본 천황은 분명 계시록에 나오는 그 짐승이었다. 그리고 교회는, 처음에는 박해 때문에 죽임을 당하는 것 같지만 결국에는 반드시 승리하게 되어 있다.

 

그래서 필자는 역사적 전천년의 입장을 완전히 무시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 일제 당시의 우리나라나지금의 북한 같은 상황에서는 분명 ‘멸망의 가증한 것" 이 서지 못할 곳에 서 있으며, 그런 상황을 교회의 시대나 천년 왕국이라고는 결코 말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 지상의 교회는 온전한 하나님의 나라를 회복하기 위하여 늘 전쟁을 치루고 있는 상태라고 말할 수 있다. 따라서 교회는 자주 이 요한계시록을 읽고 가르침으로써 교인들의 영적 각성을 고취시키고 영적인 전쟁에 대비하게 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