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라의 귀향 룻기 1장 19-22절
금의환향(錦衣還鄕)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비단옷을 입고
고향에 돌아온다는 말이지요.
출세하고 성공해서
고향을 다시 찾는 사람을 두고 하는 말입니다.
얼마 전에 신문에 이런 이야기가 있었습니다.
돈이 없어 학업을 중도 포기하고
혈혈단신 밀항선을 타고 현해탄을 건너간 청년이
일본에서 갖은 어려움과 차별을 극복하고
세계적인 석학이 돼 41년만에 고국을 찾아왔습니다.
그야말로 금의환향을 한 것이지요.
이 기사의 주인공은
얼마전 전북대에서 열린
국책지원사업단 자동차 신기술 세미나에
참석하기 위해서 입국한
일본 사이타마(埼玉)공업대
이경은(李庚垠.62)교수입니다.
재료공학이라는 분야에서
국제적으로 명성을 얻고 있는 李교수는
세계 최초로 3년전부터 연구를 시작한
'형상기억합금 복합체'로 주목을 받고 있다고 합니다.
우리에게는 생소한 것이지만.
이 형상기억합금복합체라는 것이
아주 대단한 것인 모양입니다.
이 신소재를 교량 구조물에 집어넣으면
지진이 발생해도
형상기억합금의 압축응력으로
진동을 최소화할 수 있고,
우주선과 비행기에 이 합금을 사용하면,
균열이 생겨도
압축응력이 확대를 막아
사고를 방지할수 있다고 합니다.
잘은 모르지만,
이 합금은 여러 가지 점에서
사람들의 생명을
좀더 안전하게 지켜줄 뿐만 아니라.
상업화시키면,
많은 돈을 벌 수 있을 것같습니다.
아무튼 굉장한 것을 만들어낸 것입니다.
그런데
밀항한 청년이
이처럼 재료공학 분야에 우뚝서기까지는
파란만장한 과거가 있었습니다.
이경은 교수는
1935년에 여기서 가까운
전북 김제 원평에서 태어났습니다.
이교수는
전주고를 거쳐 전북대 물리학과에 입학했는데,
학비가 없어서
1학기만에 학교를 그만 둘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런데
어떻게든 공부를 해야겠다는 마음이 떠나지 않아서
1956년에 무작정 밀항선을 탔습니다.
그리고 일본으로 건너갔습니다.
일본에 가서
재일동포들이 다니는 학교에
낮엔 청강생으로,
밤엔 학교를 지키는 수위로 일하면서
일본말을 배웠습니다.
돈을 벌어 대학에 가야 된다는 생각에
빠찡꼬 업소에서 종업원으로 근무하기도 했답니다.
주린배를 물로 채운 적도 많았지만
무슨 일이 있어도
학자로 성공하겠다는 의지를 다지며
이를 악물고 견뎌냈습니다.
그렇게 해서
23세때 원하던 대학에 들어갔는데,
고생은 여전했습니다.
학비를 마련하기 위해서
부두 하역노동도 하고
오전 2시면 일어나
매일 5백여부씩
꼬박 8년간 신문배달을 해야 했습니다.
이같은 어려움을 이겨내고
간토(關東)학원대를 거쳐
사이타마공업대에서 박사학위를 받은 李교수는
현재까지 사이타마공업대 교수로
32년째 재직하고 있다고 합니다.
그리고 이번에 고향에 돌아온 것입니다.
이런 정도면 금의환향했다고 할 수 있지 않을까요?
여러분.
박찬호 알지요?
요즘 박찬호 열풍이 대단합니다.
박찬호가 시합을 하는 날에는
티비에서 위성으로 생중계를 합니다.
그리고 매일매일
스포츠 뉴스 시간에
박찬호 소식을 전합니다.
사람들도 모이면
온통 박찬호 이야기뿐입니다.
이런 정도면
대통령 이상가는
대단한 대접을 받는 것이지요.
미국에 사는 교포들이
박찬호 때문에
기를 펴고 산다고 합니다.
지난 94년 1월 김포공항에서
청운의 꿈을 품고
미국 로스앤젤레스행 비행기를 기다리던 박찬호는
메이저리그에서 이룩하고 싶은 목표가 뭐냐
묻는 주위사람들에게
최소한 2백억원을 벌어서 한국에 돌아오겠다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반드시 성공해서 돌아오겠다는 뜻이지요.
지금 박찬호는
어려운 시기를 잘 넘기고
승승장구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의 말대로
금의환향할 것으로 보입니다.
박찬호는 이제 거의 국민적인 영웅이 되었습니다.
그러니 박찬호가 귀국할 때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열렬하게 환영하겠습니까?
이러면 고향에 돌아갈 마음이 생길 것입니다.
사람이라면 누구든 고향에 돌아갈 때는
이렇게 돌아가고 싶을 것입니다.
크게 성공해서
남보라는 듯이
그렇게 돌아가고 싶을 것입니다.
그러고 싶지 않은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그리고 외지에 나왔다가
고향에 돌아갈 때는
다 출세해서 돌아가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니 출세하지 못한 사람은
고향에 돌아갈 엄두도 내지 못합니다.
출세한 사람은 고향가는 것이 기쁘지만,
그렇지 못한 사람은
명절이 돌아오면
고향에 가는 생각만해도 끔찍하다고 합니다.
금의환향하는 것.
얼마나 좋은 일입니까?
그러나 여러분.
고향은 성공한 사람만 돌아가는 곳이 아닙니다.
그런 사람들보다 더 고향이 그리운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런 사람들보다 더 고향이 필요한 사람들이 있습니다.
성공한 사람들보다 더 고향이 절실한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실패한 사람들입니다.
오늘은 실패한 사람의 이야기를 하려고 합니다.
어떤 일본 사람은
20대에 꼭 만나야 할 50인이라는 책을 썼습니다.
삶의 의미를 알기 위해서
만나보아야 할 사람들을
여럿 이야기합니다.
그 사람은 무엇보다 성공한 사람들을 만나보라고 권합니다.
그러나 인생에서 성공한 사람도 만나보아야 하겠지만,
실패한 사람도 만나보아야 한다고 말합니다.
우리는 오늘
한 여인을 만나보려고 합니다.
이 여인은 성공한 사람이 아닙니다.
실패한 사람입니다.
그것도 완전히 실패한 사람입니다.
더 이상 잃을 것이 없을 정도로
모든 것을 잃은 사람입니다.
이 시간에는
그 사람을 만나보려고 합니다.
그 사람의 이름은
나오미입니다.
나오미는 실패한 사람입니다.
금의환향은커녕
아무 것도 가진 것없는
완전히 실패한 모습으로
완전히 거지꼴로 고향을 찾아갑니다.
여러분.
혹시 이런 생각이 들지 않습니까?
우리가 이런 사람을 만날 필요가 있을까?
그녀를 만나서 무슨 도움이 될까?
성공한 사람들도 많은데,
왜 하필이면
실패한 사람을 만나보아야 하는가?
이런 의문도 들 것입니다.
그래도 우리는 그녀를 만나보아야 합니다.
그녀가 살아온 이야기를 들어야 합니다.
그래야 진정한 삶의 의미를 알 수 있습니다.
우리는 그녀의 실패한 삶에서
강하고 적극적인 삶의 철학을 배울 수 있습니다.
삶의 깊이를 배울 수 있습니다.
여러분,
욥 알지요?
욥은 사탄의 시험을 받기 전에는
얼마나 성공한 사람입니까?
그 정도로 성공하기가 어렵습니다.
그런데 그것을 한순간에 다 잃어버렸습니다.
욥은 완전히 실패했습니다.
실패했어도
몸만 성하면 다시 일어날텐데,
몸마저 만신창이가 되었습니다.
그러니 이제는
희망이라고는
한오라기도 없습니다.
그러나 욥은 실망하지 않습니다.
끝까지 버텨냅니다.
그리고 나서
욥은 더 깊어지고 성숙해집니다.
욥이 뭐라고 말합니까?
내가 주께 대하여
귀로 듣기만 하였삽더니
이제는 눈으로 주를 뵈옵나이다.
귀로 듣던 단계에서 벗어나서
이제는 눈으로 주님을 직접 뵙는
그런 높은 단계에 이른 것입니다.
고생과 좌절은 사람을 연단시켜서
성숙하게 만듭니다.
그런데 성숙해지는 것은
무엇보다도 겸손해지는 것입니다.
삶을 겸허하게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삶을 소중하게 여기는 것입니다.
나오미가 귀향하는 모습을 보면,
탕자의 귀향장면이 생각납니다.
객지에서 돈을 다 잃고,
돼지먹이로 연명하던 둘째 아들은
더 이상 방도가 없어서
아버지집으로 돌아가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그것은 마지막 결단입니다.
이제는 어찌 해볼 도리가 없습니다.
제 힘으로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다는 것을
뼈저리게 느낍니다.
아무리 자존심이 상해도
그 사실을 인정할 수 밖에 없습니다.
이제는 아버지 집으로 돌아가는 수 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돌아가기로 마음먹습니다.
이것은 모든 자존심을 다 포기한 결단입니다.
탕자는 자존심을 다 버리고
겸손한 마음으로 돌아왔을 것입니다.
모든 것을 포기한 마음으로 돌아왔을 것입니다.
나오미도
모압에서 어떻게든 살 수만 있었다면
그곳에서 살지,
결코 돌아오지 않았을 것입니다.
차라리 그곳에서 고생하는 것이 낫지
성공하지 못하고
알거지가 되어서
고향에 돌아가는 일은
죽기보다 싫은 일이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제 남은 거라고는
죽는 일밖에는 없는
그런 어려운 상황에 처했습니다.
그래서 돌아가는 것입니다.
할 수 없어서 돌아가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이렇게 해서
겸손해지는 법을 배우는 것입니다.
여러분.
하지만 고향으로 돌아가는 나오미의 마음은
얼마나 고통스러웠을까요?
남편과 두 아들과 함께
그래도 꿈에 부풀어서 떠나온 고향을
이제는 남편도 잃고 두 자식도 잃고,
한 며느리는 친정으로 돌려보내고,
자신처럼 과부가 된
며느리 룻과 함께
고향으로 돌아오는 나오미.
나오미의 귀향.
세상에 이만큼 슬픈 귀향도 없을 것입니다.
모압을 떠나온 두 여인은
서로를 부축하면서
험한 길을 걸어서
요단강을 다시 건너서
이스라엘 땅으로 들어왔습니다.
19절 앞부분을 보십시오.
이에 그 두 사람이 행하여
베들레헴까지 이르니라.
이 구절은
나오미와 룻이
모압 국경을 떠나서
베들레헴까지 오는 과정을
아주 짧게 기록합니다.
그러나 그 길은
사연이 많은 길입니다.
나오미와 룻은 그 먼 길을 걸어서
드디어 베들레헴까지 왔습니다.
베들레헴까지 오면서
자기가 떠날 때와는 달리
이스라엘이 얼마나 부유해졌는지
직접 보았을 것입니다.
그러면서 지난 세월을 또 얼마나 한탄했을까요?
모압땅에 묻고온 남편과 두 아들이
사무치게 그리웠을 것입니다.
그녀들은 계속 걸었습니다.
드디어 유다 땅으로 들어섰습니다.
저 멀리에 베들레헴이 보입니다.
나오미와 룻이
베들레헴 마을로 들어선 것은
아마도 저녁 무렵이었을 것입니다.
드디어 고향에 돌아온 것입니다.
오랜 세월
이국 생활을 마치고
그녀는 이제 고향에 돌아왔습니다.
지는 해에
긴 그림자를 끌면서
고향으로 돌아옵니다.
멀리서도 고향의 흙냄새가 느껴집니다.
동네 사람들이 마을 입구로 들어서는
두 여자를 봅니다.
나오미와 룻은
오랫 동안 걸어오느라
몰골이 말이 아니었을 것입니다.
그 두 여자를 바라보면서
왠 사람들이 이 저녁에
우리 마을에 들어올까
의아해하면서
동네사람들은
두 여자를 찬찬히 바라보았습니다.
가만히 보니
어디서 많이 본 사람입니다.
아니,저게 누군가?
생김새가 나오미같기는 한데.
그리고는 점점 가까워지는 두 사람.
정말 나오미가 맞네.
나오미가 돌아왔다.
이 소식이 온 베들레헴에 퍼졌습니다.
19절 뒷부분을 보십시오.
베들레헴에 이를 때에
온 성읍이 그들을 인하여 떠들며.
온통 난리가 났습니다.
사람들이 다 모여들었을 것입니다.
모든 사람들이 다 모여서
나오미와 룻이 마을로 들어오는 것을 지켜봅니다.
나오미가 그들을 바라봅니다.
낯익은 얼굴들이 하나씩 하나씩
보이기 시작합니다.
그 사람들이 나오미에게 달려와서
나오미의 손을 붙잡습니다.
이게 누군가 그래?
자네가 정말 나오미인가?
어쩌면 이렇게 되었나.
그동안 고생이 많았구만.
고향사람들은
나오미를 알아보기는 했지만,
나오미의 변한 모습을 보고
다들 놀랐을 것입니다.
19절 마지막 부분을 보십시오.
이르기를
이가 나오미냐 하는지라.
사람들이 나오미를 보더니
이게 정말 나오미인가?
이렇게 말하는 것입니다.
몰라서 그런 것이 아닙니다.
나오미라는 것을 다 알지요.
그런데 나오미가 하도 변해서
옛날에 보았던 나오미가 아니라는 말입니다.
그래서 하는 말입니다.
이가 나오미냐?
이런 정도니
나오미도 나오미지만,
보는 사람들이 얼마나 마음이 아팠을까요?
친구들이 달려와서 나오미를 붙들고
눈물을 흘렸을 것입니다.
사람들은 나오미를 바라보면서
한편으로는 기쁘면서
한편으로는 그 초라한 모습에
놀라움을 금치 못했을 것입니다.
나오미가 그들에게 무어라 대답합니까?
20절 앞부분을 보십시오.
나오미가 그들에게 이르되
나를 나오미라 칭하지 말고
마라라 칭하라.
여러분.
제발 나를 나오미라고 부르지 마십시오.
이 모양이 되었는데
내가 어찌 나오미라고 하겠소.
차라리 나를 마라라고 하시오.
나를 기쁨이나 희락을 누리는 사람이라고 하지 말고,
인생의 쓴맛을 본 사람이라고 부르시오.
나는 나오미가 아니고
마라입니다. 마라.
그런데 왜 마라라고 부르라고 합니까?
이는 전능자가
나를 심히 괴롭게 하셨음이니라.
내가 풍족하게 나갔더니
여호와께서
나로 비어 돌아오게 하셨느니라.
여호와께서 나를 징벌하셨고
전능자가 나를 괴롭게 하셨거늘
너희가 어찌 나를 나오미라 칭하느뇨 하니라.
여기보면,
나오미는 같은 말을 네 번이나 합니다.
전능자가 나를 괴롭게 했다는 말을
처음과 마지막에서 합니다.
그리고 여호와께서
자기를 빈 손으로 돌아오게 했고,
또 여호와께서 자기를 징벌하셨다고 말합니다.
나오미는 여기서 세 가지를 말합니다.
첫 번째는,
자신이 당한 일은 그냥 일어난 일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하신 일이라는 것입니다.
자신이 당한 일들이
하나님의 뜻이라는 것입니다.
때로는 원망하고 싶을 때도 있지만,
하나님이 하시는 일인데,
하나님이 나를 징계하신 것인데,
아무리 심한 고통이라도
겸손하게 받아들일 수 밖에 없다는
그런 말입니다.
그리고 두 번째는
엄청나게 고통을 당했다는 것입니다.
나오미는 자신이 당한 고통이
이루 말로 형용할 수 없다는 것을
같은 말을 네 번이나 반복하면서
우리에게 알려줍니다.
그리고 세번째는,
하나님께서 자기를 이렇게 괴롭게 하셨는데,
어떻게 나오미라고 할 수 있느냐
나를 마라라 불러라.
나는 나오미가 아니고 마라다.
이렇게 세가지를 말합니다.
이 말을 하는 나오미의 마음이
얼마나 아팠을까요?
지난 세월이
주마등처럼 스치고 지나갔을 것입니다.
나오미는 사람들과 인사를 나누고,
어느 집에선가 저녁식사를 하고,
마을을 둘러보았는지도 모릅니다.
자기가 살던 옛집을 찾아갔는지도 모릅니다.
그러면서 자신의 비참한 처지를 생각했을 것입니다.
나갈 때는 조금이라도 가지고 나갔는데
돌아올 때는 아무 것도 가지고 오지 못했습니다.
그야말로 거지꼴로 돌아왔습니다.
고향에 올 때는
선물을 가지고 와서
만나는 사람마다 나누어주어야 하는데,
그러지를 못했습니다.
선물을 나누어주기는커녕
마을 사람들의 신세를 져야만 했을 것입니다.
마을 사람들이 도와주지 않으면
살아갈 수가 없습니다.
옛집이 남아있겠습니까?
살림살이가 있습니까?
당장 저녁거리도 없습니다.
그리고 밤에 덮을 이부자리도 없습니다.
주위의 도움으로
간신히 거처를 마련하고
살아가는 두 여인을 생각해보십시오.
나오미는 마라가 되어서
고향에 돌아왔습니다.
삶의 깊은 상처를 입고 돌아왔습니다.
그런데 그때는 추수할 때였습니다.
보리를 거두어들일 때였습니다.
22절을 보십시오.
나오미가 모압 지방에서
그 자부 모압 여인 룻과 함께 돌아왔는데
그들이 보리 추수 시작할 때에
베들레헴에 이르렀더라.
나오미와 룻은 때마침 잘 돌아온 것입니다.
추수할 때니까
인심도 넉넉했을 것입니다.
보리를 거두어들일 때는
봄입니다.
긴긴 겨울이 지나고
드디어 봄이 온 것입니다.
그래서 무엇인가
희망이 보이는 것같습니다.
은혜의 때가 온 것같습니다.
그래도 아직은 암담합니다.
그리고 그때까지
나오미와 룻이 어떻게 살았을까요?
어떻게 겨울을 보냈을까요?
흉년에 겨울나기가
얼마나 끔찍합니까?
옛날에는 그 어려움이 말도 못했을 것입니다.
그 겨울을 견딜 길이 없어서
나오미와 룻은
모압을 떠나온 것입니다.
베들레헴.
본문에는
베들레헴이라는 말이 여러번 나옵니다.
베들레헴.
빵집입니다.
이 베들레헴이 이름대로 빵집이 되었습니다.
그곳으로 다시 돌아온 것입니다.
이렇게 베들레헴에서
나오미와 룻은 새로운 삶을 시작합니다.
베들레헴이 이름값을 하게 된 것은
나오미도 이름값을 하게 될 것을 보여줍니다.
여기에 희망이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본문에서 룻을 어떻게 부릅니까?
그 자부 모압 여인 룻.
룻은 나오미의 자부이고,
모압 여인입니다.
모압 여인.
이것은 룻에게 따라 다니는 별명입니다.
사람들은 룻을 보면,
모압 여인이라고 불렀을 것입니다.
룻은 베들레헴 사람들이 볼 때
이방여인입니다.
그리고 사람들이 모압을 어떻게 생각했겠습니까?
엘리멜렉과 말론과 기룐
이 세 사람이 살러갔다가 다 죽은 곳입니다.
나오미가 그나마가 갖고 있던 것들을 다 잃고
빈 털털이로 돌아온 곳이
바로 모압입니다.
그러니 사람들이
모압을 좋게 생각했을 리가 없습니다.
룻은 그런 모압 여인입니다.
모압 여인 룻.
룻은 베들레헴에서 이방인 삶을 시작합니다.
룻에게는 모든 것이 낯섭니다.
새로운 곳,
희망을 갖기가 어려운 그곳에서
룻은 새로운 삶을 시작합니다.
그러면서 희망을 만들어갑니다.
두 여인은 이렇게
베들레헴에서
귀향 첫날밤을 지냅니다.
여러분.
나오미와 룻이 잠이 왔을까요?
베들레헴에서 귀향 첫날밤을 보내는
나오미와 룻의 마음이 어떠했을까요?
고향으로 돌아온 사람들.
돌아올 곳이 있다는 게
얼마나 복된 일인지 모릅니다.
여러분.
우리도 살다보면
나오미가 아닌
마라가 될 때가 많습니다.
인생이란 그럴 경우가 많은 것입니다.
그때마다 우리의 베들레헴을 기억하십시오.
이 교회를 기억하십시오.
주님의 말씀을 기억하십시오.
나오미가 베들레헴으로 돌아갔듯이,
탕자가 아버지집으로 돌아갔듯이,
우리에게도 돌아갈 곳이 있습니다.
주님의 품입니다.
나오미와 룻이 돌아간 곳.
그들이 좌절과 아픔 속에서 돌아간 곳.
그 베들레헴에서
우리 구주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태어나십니다.
베들레헴은 예수 그리스도의 고향이고,
우리가 돌아갈 영적인 베들레헴은
주님이 피흘려 세우신 바로 이 교회입니다.
이 교회는 주님이 계신
주님의 품입니다.
사랑이 깊으신 하나님의 품입니다.
힘들고 어려울 때마다
이 교회를 기억하십시오.
그리고 기도하십시오.
금의환향하지 않아도 좋습니다.
우리 하나님은
탕자들을 기다리십니다.
헐벗은 채
내 힘으로 더 이상
아무 것도 할 수 없다고 생각하고
겸손한 마음으로 돌아오는 사람들을
밤새 기다리시다 따뜻하게 안아주십니다.
여러분.
이 교회에서 주님을 만나십시오.
삶에 지친 여러분을 안아주시는
우리 주님을 꼭 만나십시오.
출처 :천성을 향하여 글쓴이 : 하늘 군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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