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구약 성경강해***/- 룻기 강해

[스크랩] 롯기에 나타난 여인의 향기 / 김지찬 교수

에반젤(복음) 2019. 11. 2. 13:22




   룻기에 나타난 여인의 향기 (글 김지찬 총신대 구약학과 교수 )

 

 

 

 


 

 

 

-룻기를 시작하며 (세계 명작 속의 룻 )


룻은 세계적인 문학가들에게 영감의 원천을 제공해 준 탁월한 여인이었다.
영국 시인 키츠(Keats)는 「나이팅게일에 부치는 노래(Ode to a Nightingale)」란 시에서 노래한다.

“저 종달새 소리는 룻이 고향 생각에 젖어 이방 땅 옥수수 밭에서 눈물을 흘리며 서 있을 때 들려온 소리이겠지.”

저 장미꽃에 찔려 죽은 시인, 장미를 사랑했고 장미를 노래했던 모순에 가득찬 시인 라이너 마리아 릴케는 「내 영혼은 당신 앞에서 한 여인」이라는 시를 통해 룻의 모습을 잔잔한 감동으로 그리고 있다.

 

한국에선 별로 인기 없는 룻


룻은 문학가들에게 영감의 원천이었지만, 한국에서는 룻의 인기가 그리 많지 않은 것 같다.

룻기를 사랑하며 자주 읽는다는 이야기는 별로 들어보지 못했다. 이것은 룻기에 대한 올바른 이해의 부족에 그 이유가 있으리라 본다. 단순하게 읽으면 시모에 대한 며느리의 충성을 담은 이야기로 들린다. 따라서 많은 기독교인 시어머니들이 며느리의 효도를 강조할 때 단골 메뉴가 바로 룻기이다.

필자가 아는 한 자매는 시어머니가 툭하면 성경의 룻을 보라면서 효심을 강요하는 바람에 ‘룻’이라는 이름만 들어도 소름이 끼친다고 한다. 어쩌면 이것이 한국에서 룻기가 인기가 없는 한 이유가 아닌가 생각한다.

 

자발적인 충성

 

그렇다면 과연 룻기는 이런식으로 읽어도 되는가? 룻은 시어머니에게 무조건적으로 보인 효도의 인물로 성경에 언급되고 있는 것인가? 전통적으로 효, 부모에 대한 충성은 하위자(약자)가 상위자(강자)에게 보이는 절대적 복종이었다. 이런 의미의 효는 과거에는 모를까 현대에는 피부에 와닿지 않는다. 따라서 우리는 효, 충성이란 단어를 들으면 왠지 닭살이 돋고 소름이 끼친다. 그러기에 위에서 언급한 자매처럼 ‘룻’이라는 이름만 들어도 알레르기 반응을 보이는 것이다. 그러나 룻기에 룻이 나오미에게 보인 효와 충성은 하위자가 상위자에게 대해 보이는 무조건적인 복종과 순종이 아니다. 당시에 나오미가 시어머니로서 위치상으로 상위자인지 모르지만, 당시의 상황으로는 불임에다가 자식이 없는 노인이었기에 현실적으로 상위자가 아니었다. 오히려 아직 젊고 아이를 낳을 수 있는 룻이 강자요 현실적 상위자였다. 더욱이 나오미는 룻에게 효도나 충성을 강요한 적이 없었다. 오히려 자신에게 헌신할 필요가 없음을 이유로, 어미의 집으로 돌아갈 것을 먼저 요청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룻은 곤궁에 처한 시어머니를 떠나지 아니하고 자발적으로 사랑과 충성의 삶을 보인 것이다. 이로 인해 텅빈 나오미의 삶을 풍성하게 채울 수 있었다. 따라서 성경에서 말하는 효와 충성의 개념은 우리가 전통적으로 이해하는 개념과는 정반대이다. 오히려 상위자(강자)가 하위자(약자)에게 보이는 자발적인 사랑과 헌신. 이것이 성경에서 말하는 충성의 개념이다.

구약에서는 이런 개념을 「헷세드(Hesed)」란 용어로 표현한다. 이 용어를 정확히 정의하자면, ‘약한 자가 곤궁에 처해 있을 때 강한 자가 그럴 의무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자발적으로 보이는 사랑과 충성‘이라고 규정할 수 있다. 그러기에 나이 드신 분들은 룻을 가지고 아래 사람들의 효심을 자극하려고 해서는 아니된다. 또한 아래 있는 사람들은 룻기만 펴면 공연히 심기가 불편해질 필요가 없다. 룻기야말로 ’곤궁에 처한 공동체의 멤버들의 공허한 삶을 풍성하게 만들 수 있는‘ 비결이 숨겨진 책이라고 할수 있다.

 

삶은 흐르는 강물처럼 (Life Goes on)

1. 엎친데 덮친 비극

사사시대에 '가나안 땅'에 흉년이 들게 되었다. 가나안 땅에 흉년이 들자 유다 베들레헴에 살던 한 사람이 아내와 두 아들을 데리고 모압 지방으로 가서 거기 잠시 우거하게 되었다. 베들레헴은 '떡의 집'이라는 뜻이다. 떡의 집에 살던 사람이 흉년이 들어 떡이 없어 자기 고향을 등지고 타향으로 떠나가는 모습에서 우리는 자연의 수준에서 공허함을 느낄 수 있다.

그런데 이들이 모압으로 피신한지 얼마 안돼 가장인 엘리멜렉이 죽고 말았다. 그후 나오미의 두 아들은 모압 여인 중에서 아내를 취하였는데, 하나는 오르바이고 다른 하나는 룻이었다. 그러나 이들이 오르바와 룻이 결혼한지 10년이 지나도록 아이를 낳지 못하였다. 나오미의 아들은 '병든'이란 이름의 말론과 '약한'이란 뜻의 기룐 둘이었다. 그런데 그만 그 이름이 암시하듯이 이들은 일찍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나오미는 남편과 두 아들을 잃고 사회적 수준에서 공허함을 느끼게 되었다.

우리는 룻기 1장에서 나오미가 어떻게 텅빈 모습으로 바뀌어 가는지를 볼 수 있다. 비극에 비극이 연달아 나타나는 모습이 룻기 1장에 극적으로 묘사되어 있다. 불과 5절 밖에 안되는 짧은 절들 안에 무려 3번의 비극이 잇따라 일어나고 있다.

2. 비극의 원인을 밝히려는 인간 본성


그러나 성경 기자는 이같은 비극의 원인이 무엇인지를 밝히지 않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이런 비극이 일어나면 쉽게 이런 비극의 원인을 도덕적으로 설명하려고 한다. 나오미의 남편은 가나안 땅에 있지 않고 모압 땅으로 갔기 때문에, 나오미의 아들들은 이방여인과 결혼했기 때문에, 죽은 것이라고 흔히들 많이 생각한다. 그러나 성경 기자는 이에 대해 아무런 언급도 하지 않고 있다.

실제로 우리는 인간에게 불어닥치는 재난과 비극을 도덕적으로 언제나 설명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때로는 악인이 잘되고 선인이 잘못되는 경우를 허다하게 볼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한국 교회에는 불행이나 비극에 빠진 이를 불쌍히 여기고 도와주기 보다는 때로는 그것이 무슨 죄 때문이니, 누구의 잘못 때문이니 하면서 오히려 상처를 주는 경우를 많이 불수 있다.

3. 삶은 흐르는 강물처럼

그러나 중요한 것은 불행을 당해 죽은 사람도, 불행의 이유도 아니다. 중요한 것은 살아 남은 자이다. 불행 가운데 살아 남은 자가 우리의 관심이 되어야 한다. 룻기 1:1-5에는 '뒤에 남았다'는 단어가 두 번 등장 한다. '나오미와 두 아들이 남았으며(3절)'; '그 여인은 두 아들과 남편의 뒤에 남았더라(5절).'

나오미는 무슨 이유인지 모르지만 남편과 두 아들을 여의고 혼자 남게 되었다. 남편을 여의었을 때 하늘이 무너질 것 같았으며, 두 아들이 자기보다 먼저 세상을 떠났을 땐 무덤에 묻은 것이 아니라 바로 자기 가슴에 묻었을 것이다. 나오미에게는 엄청난 일이 있었음에도 세월은 흐로고 나오미의 삶도 흐르지 않을 수 없었다. 마치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은 양 세월은 말이 없다. 마찬가지로 인생도 말이 없이 앞으로 나아가야 하는 것이다.

4. 돌아가자

따라서 불행을 당할 때, 우리의 삶이 텅비게 되었을 때 우리는 이를 탄식하고 원망하며 주저 앉을 수는 없다. 인생은 흐르는 강물처럼 지속되기 마련이기에. 이렇게 흘러가기 마련인 삶 가운데서 혼자 남아 있는 듯한 느낌을 가질 때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돌아가는 것이다.

그렇다면 어디로 돌아가야 한단 말인가? 그 해답은 너무나 자명하다. 나오미가 '여호와께서 자기 백성을 권고하사 그들에게 양식을 주셨다 함을 듣고(룻1:5)'모압 지방에서 하나님께로 돌아온 것처럼, 오늘도 그의 백성을 권고하시는 하나님께로 돌아가는 것이다.

여기서 '권고한다'는 말은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의 충성을 평가하시고 복종시에는 축복을, 불순종에는 징벌을 행하시는 주권적 통치 행위를 가리킨다. 즉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의 필요를 보시고 이 필요를 채우신다는 의미이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인생의 최대 파트너이다. 그리고 그만이 우리의 삶을 퐁요롭게 하실 수 있는 분이다. 결국 우리가 돌아가야 할 대상은 바로 하나님이시다. IMF 관리 체제 안에서 비극이 겹칠지도 모르는 수많은 한국 자어에 줄 수 있는 위로의 메시지가 있다면 이 밖에 없으리라.

나오미는 10년이라는 짧은 세월 안에 남편과 두 아들을 다 잃어버리고 텅빈 삶 앞에 견딜 수 없는 외로움을 느끼게 되었습니다. 게다가 그는 나이 들어 더 이상 아이를 낳을 능력이 없는 불임의 여인이 된 것입니다. 이에 나오미는 견딜 수 없는 내적인 공허를 느끼고 뒤를 따르는 자부인 오르바와 룻에게 "너희는 각각 어미의 집으로 돌아가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자부들은 울면서 시모를 떠나기를 거부하였습니다. 이에 나오미는 결심이 확고한 자부들을 단념시키기 위해 그 전보다 강한 언어를 사용합니다. "너희는 각각 어미의 집으로 돌아가라"고 했던 나오미는 이제는 "내 딸들아 돌이켜 너희 길로 가라"고 했습니다.

그러자 어미의 집으로 돌아가길 거부한 오르바는 '자기 길로 가라'는 나오미의 두번째 권면에 자기 인생의 길을 찾아 떠났습니다. 어떤 이들은 오르바가 떠난 것을 들어 비난하고 있지만 성경 본문에는 이렇게 볼 근거가 전혀 없습니다. 오르바는 먼저 나오미에게 그의 곁을 떠나겠다고 요청하지도 않았습니다. 처음에 나오미가 그들에게 각기 어미집으로 떠나라고 했을 때에도 거부하였습니다. 더우기 나오미는 자기 고향으로 돌아가는 도중이었습니다.

나오미를 따라간다는 거은 이방 에서 과부로서 살아간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보면 오르바의 결정은 결코 불충성이 아닙니다. 오히려 자신의 삶을 꾸려나가야 할 상식인으로 적절한 행동이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충성이 무슨 희생을 치르면서라도 모든 관계를 지속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닙니다. 이런 점에서 오르바는 상식적인 결정은 룻의 충성이 얼마나 대단한 것이엇는가를 단적으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죽음에 이르는 충성

룻은 꼭 그렇게 해야 하는 상황에 있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룻은 얼마든지 오르바처럼 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곤궁에 빠진 나오미를 그냥 놔두고 떠날 수 없었습니다. 자기가 아니고는 텅빈 나오미를 채워줄 사람이 없었습니다. 이에 룻은 자발적으로, 그 어떤 강압이나 체면 유지의 차원이 아니라, 사랑의 마음에서, 곤궁한 처지에 빠진 나오미에게 끝까지 충성하기로 결심한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인애(仁愛)입니다.

룻은 그저 자기의 인생길을 포기한 정도가 아닙니다. 룻은 나오미가 "네 동서는 그 백성과 그 신에게로 돌아가나니 너도 동서를 따라 돌아가라고 했을 때" 그가 보인 충성의 고백은 3천년을 넘는 감동으로 우리에게 다가오고 있습니다.
"어머니는 백성이 나의 백성이 되고 어머니의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이 되시리니, 어머니께서 죽으시는 곳에서 나도 죽어 거기 장사될 것이라. 내가 죽는 일 외에 어머니와 떠나면 여호와께서 내게 벌을 내리시고 더 내리시기를 원하나이다."(17절)
우리는 이 룻의 말을 단지 수사학적인 표현이나 과정법으로 이해해서는 아니됩니다. 여기서 룻은 죽음과 무덤에까지 이르는 충성을 맹세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런 룻의 모습을 도대체 이해할 수 없습니다. 도대체 무엇이 룻으로 하여금 이런 일을 가능케 했을까? 룻에게 이런 힘을 제공한 원동력은 무얼까?

 

예수를 본받아

우리는 극도의 개인주의적 사회와 교회 안에 살아온 결과 룻처럼 어느 한사람에게 죽음과 무덤에 이르기까지 충성한다는 개념이 쉽게 이해되지 않습니다. 그것은 특별한 사람들이나 하는 일이라든지, 과거의 봉건주의에서나 있을 수 있는 일로 간주하고 오늘날 현대인들과는 별 관계가 없는 일로 치부하기 쉽습니다.

대부분의 현대인들의 목표는 자기 실현입니다. 자기의 인생을 자기가 원하는대로 계획하고, 자기가 하고 은대로 사는 것을 최고의 가치로 생각합니다. 이런 가치관에 의한 교육을 오랫동안 받은 우리는 과 같은 삶의 태도를 그저 옛날이야기로 넘기기 쉽습니다. 또는 특별한 인물이나 하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사실이 아닙니다. 그리스도인들에게 요구하는 삶은 바로 자신을 위한 삶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는 스스로 남을 위해 사는 삶이 무엇인지를 보여주셨습니다. 주님께서는 그럴 필요가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죄인인 우리를 위해 죽기까지 충성하셨습니다. 죽음에 이르기까지, 무덤에 이르기까지 충성하신 것입니다. 그리고는 우리에게 자신의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르라고 하십니다.

우리는 지금 충성할 대상으로 누구를 가지고 있습니까? 오직 나 자신의 욕구와 나 자신의 욕망에만 충성하고 있는 것은 아닙니까? 어쩌면 지금 우리의 공동체 안에서 나의 충성을 간절히 필요로 하는 텅빈 삶의 이웃은 없습니까? 자매님들이여, 여성만의 섬세한 눈길로 조용히 주위를 돌아봐 주십시오. 그리고 모압 여인 룻처럼 충성의 향기를 드러내 주십시오

 

반갑지 않은 고향 친구

나오미는 남편과 두 아들을 잃고 마침내 베들레헴 고향으로 돌아왔습니다. 오랜만에 나오미를 본 성읍 사람들은 "이는 나오미가 아니냐"고 떠들었습니다. 나오미를 알아보고 반가와서 외친 소리입니다. 그러나 나오미는 옛날 친구들의 반갑게 아는 체 하는 소리가 하등 기쁘지 않았습니다. "나를 '나오미(즐거운자)'라 칭하지 말고 '마라(쓴자)'라 칭하라." 나오미의 이런 반응은 결코 무리가 아닙니다. 멀리 고향을 떠나 있다가 돌아올 때 우리는 모두 금의환향을 원합니다.

특별히 남편의 성공, 자식의 출세를 마치 자신의 승리인양 보는 여인들에게는 분신인 아들과 남편의 죽음은 나오미에게는 죽음보다 더 고통스러웠을 것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나오미는 자신을 알아보는 옛 친구들의 목소리에 신경질적인 답변을 하고 있습니다.
전능자가 나를 심히 쓰게 하셨음이라. 내가 풍족하게 나갔더니 여호와께서 나로 비어 돌아오게 하셨느니라. 여호와께서 나를 징벌하셨고 전능자가 나를 괴롭게 하셨거늘 너희가 어찌 나를 나오미라 칭하느뇨 하니라(룻 1:20~21)
우리는 충분히 나오미의 심정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내가 풍족하게 나갔더니 여호와께서 나로 비어 돌아오게 하셨느니라'고 한 대로 나오미가 텅 비어 돌아온 것은 분명한 사실입니다. 따라서 나오미가 하나님께 불평을 하는 것은 충분히 이해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나오미에게 왜 그렇게 신앙이 없느냐고 질타할 수 없습니다. 슬퍼만 하지 말고 기뻐하라고 말할 수가 없습니다. 이것은 정상적인 사람이 보일 수 있는 감정이 아닙니다. 아니 이것은 불가능한 일입니다.

보리 추수할 때에

따라서 성경 기자도 나오미에게 그가 당한 모든 재난을 잊어버렸어야 한다고 요구하지 않고 있습니다. 성경 기자도 나오미가 당한 고통을 함께 나누고 싶어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경 기자는 침묵으로 나오미의 삶이 처참한 것이 사실이긴 하였으나, 그의 삼이 흑암으로만 가득찬 것이 아님을 솜씨 있게 그리고 있습니다.
나오미가 모압지방에서 그 자부 모압 여인 룻과 함께 돌아왔는데 그들이 보리 추수 시작할 때에 베들레헴에 이르렀더라(룻 1:22)
'보리 추수할 때에' 비록 작은 어구이지만 성경 기자는 이를 통해 나오미의 삶이 아직은 칠흙같은 밤이라도 희미하게 멀리서 동이 떠오는 것을 우리로 느끼게 하고 있습니다. 물론 나오미는 아직 이 희미한 동틈을 느끼지 못했을는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나오미의 현재적 삶이 아무리 처참하다 하더라도, 그의 앞날이 칠흙같은 어두움이 아니었다고 성경 기자는 말합니다. 왜냐하면 자기 백성을 권고하사 양식을 주시는 하나님의 계시기에 '보리 추수 시작할 때에' 베들레헴에 도착한 나오미는 양식을 얻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남이 있기에

우리의 소망은 우리의 능력이 있는 것도 아니며, 우리의 밝아질 미래에 대한 전망에 있는 것도 아닙니다. 우리의 소망은 그의 백성을 권고하시는 구원의 하나님께 있습니다. 우리의 힘으로 우리의 미래를 창출하지 못하는 불안을 느낄 때, 바로 그 때가 하나님이 창조의 역사를 시작하실 때임을 우리는 명심해야 합니다. 사라가 자신이 아이를 나을 것이라는 이야기를 듣고 비웃을 정도로 아이를 나을 수 없는 불임의 지경에 도달했을 때 하나님께서 아이를 주시지 않았습니까? 그렇다면 불임은 좌절할 때가 아닙니다.
우리는 우리에게 우리의 문제를 해결할 능력과 자원이 고갈되었다고 느낄 때가 있습니다. 만일 우리가 가진 것만이 전부라고 생각한다면 우리는 이때 절망하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소유한 모든 것을 잃는다하더라도, 우리가 잃을 수 없는 것이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를 떠나시지 않는 하나님이십니다.

믿음의 공동체가 있기에

우리의 삶이 아무리 처참한 상황이라도 우리가 절망하지 않는 두 번째 이유는 우리의 이웃, 그리스도 안의 형제와 자매가 있기 때문입니다. 나오미는 스스로 텅 비었다고 했지만 나오미에게는 룻이 있었습니다. 물론 당장은 룻이 나오미에게 큰 도움이 되지 않을 듯이 보이지만, 후에는 그가 '일곱 아들보다 나은' 자부임이 드러나게 될 것입니다. 또한 믿음의 공동체, 베들레헴 성읍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때는 '보리 추수 시작할 때'였으니, 이들 가운데서 누군가가 함께 추수 이삭을 나눔으로서 이웃의 고통을 돌아볼 자가 나타날는지 알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이것은 오늘 우리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의 삶의 짐을 함께 져 줄 이웃이 있다면 우리의 삶은 결코 절망이 될 수 없습니다. 이런 점에서 믿음의 공동체는 아름다운 것입니다. 공동체 안에서 우리는 우리의 고민과 삶의 짐을 함께 풀어놓고 이야기 할 수 있습니다.

그러기에 불임을 자신의 창조의 무대로 삼으시는 하나님이 계시는 한, 우리의 삼의 짐을 함께 나눌 믿음의 공동체가 있는 한 우리는 어떤 상황에서도 절망할 이유는 없습니다. 물론 우리는 불평을 할 수도, 원망을 늘어놓을 수도, 잠시 고향을 떠나 멀리 방황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 어떤 경우라 하더라도 절망은 하지 맙시다. 누군가 말했던가요? '절망은 죽음에 이르는 병'이라고…

 

추수 풍요에 참여할 수 없는 빈한한 여인들

나오미와 룻이 돌아왔을 때 베들레헴은 축제였습니다. 여호와께서 양식을 주셨으므로 빵이 넉넉하게 된 것입니다. 더욱이 보리 추수가 시작될 때였습니다. 이에 베들레헴 사람들은 풍요로운 수확을 꿈꾸며 즐거워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누구나 이런 기대에 부풀어 있었던 것은 아닙니다. 우리의 주인공인 룻과 나오미는 그렇지 않습니다. 이들은 풍요로운 수확과는 관련이 없는 가난한 과부였습니다.

이제 막 모압 땅에서 돌아왔기 때문에 농사를 지은 것이 없었습니다. 더욱이 남편도 자식도 없는 과부들이었습니다. 게다가 젊은 주인공 룻은 계속해서 모압 여인으로 불리고 있습니다. 모압인은 여호와의 총회에 들어오지 못한다고 성경은 밝히고 있습니다.(신 23:3). 결국 이스라엘인들은 모압인을 경멸하고 천대했음이 분명합니다. 이런 상황에서 룻의 삶은 고달프기 그지없었을 것입니다. 누군가의 도움이 없으면 룻의 삶은 동냥하는 거지의 삶이 되었을 것입니다.

운명적 만남의 예고

여기서 성경 기자는 새로운 인물을 등장시키고 있습니다. 그는 보아스였습니다. 성경 기자는 보아스를 엘리멜렉의 친족으로 소개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보다 중요한 것은 그가 <탁월한 남자>(an excellent man : 한글 개역 성경은 '유력한 자')로 불리고 있습니다. 히브리 원어로 이 단어는 부유한 자를 가리키기도 하고, 전쟁에서 용맹한 자를 가리키기도 하고, 도덕적으로 평판이 좋은 인물을 가리키기도 합니다. 따라서 우리는 한마디로 <탁월한 남자>로 번역할 수 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한가지 사실을 지적하고 넘어가야 합니다. 룻 3:11에 가면 보아스가 룻을 가리켜 <현숙한 여인>(an excellent woman)으로 칭하고 있습니다. 잠언 31장에 나오는 현숙한 여인과 같은 용어입니다. "누가 현숙한 여인을 찾아 얻겠느냐 그 값은 진주보다 더하니라." 한글로 보면 유력한 남자와 현숙한 여자 사이에 강한 연결을 느끼기 힘드나, 히브리어 원문으로 보면 양 단어에 탁월한(excellent)이라는 용어가 쓰이고 있습니다. 보아스는 탁월한 남자, 룻은 탁월한 여자입니다. 결국 이 둘은 어떻게 해야 합니까? 물론 결혼해야 하지요.

인생의 최대의 비극이 무엇입니까? 소설 '테스'에 보면, 가장 알맞은 두 연인이 가장 알맞은 시간에 가장 알맞은 장소에서 만나지 못하는 것이 최대 비극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여기에 우리의 두 주인공, 보아스와 룻, 탁월한 남자와 탁월한 여자는 운명의 만남을 목전에 두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 둘은 아직 이러한 운명의 만남을 예기치 못하고 있습니다. 단지 성경 기자와 우리 독자들만 이런 비밀을 알고 있는 것입니다. 더욱이 나오미와 룻은 보아스에 대해서는 아무 것도 알지 못하고 있습니다.

룻의 결심

어찌되었건 룻은 밭에 나가서 이삭을 주워오게 해달라고 먼저 나오미에게 요청을 합니다. "나로 밭에 가게 하소서. 내가 뉘게 은혜를 입으면 그를 따라서 이삭을 줍겠나이다." 이스라엘 백성은 밭이나 포도원의 소출을 깡그리 거두어 들여서는 아니되었습니다. 그 이유는 밭의 소출의 일부를 가난한 사람과 타국인을 위해 남겨놓음으로써, 빈민을 구제하는 하나님의 자상한 배려라고 볼수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여기서 하나님께서 가난한 자들을 위해 어떤 배려를 베푸셨는지를 알수가 있습니다. 또한 우리는 여호와 하나님은 가난한 자들의 하나님임을 알수 있습니다.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은 가난한 자의 편에 서야 합니다. 교회가 가진자의 편에 설때 가난한 이들과 노동자들의 버림을 받게 될 것이며 결국은 교회의 사명을 잊게될 우려가 있습니다.

우연의 발길

룻은 이와 같은 빈민 구제 정책에 근거하여, 이방 땅에서 밭의 이삭을 주우러 나가게 되었습니다. 남편을 잃고 홀시어머니를 모시기 위해 자신의 어미와 백성과 신마저 버린 이 여인의 발길이 어떻게 될 것인가? 우리는 궁금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성경 기자는 3절에서 "룻이 가서 베는 자를 따라 밭에서 이삭을 줍는데 우연히 엘리멜렉의 친족 보아스에게 속한 밭에 이르렀더라'고 적고 있습니다. 시모에게 충성을 다하는 룻의 발길을 하나미께서는 그냥 내버려 둘 리가 없었던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우연이라는 단어를 보게 됩니다. 특별히 우리는 교회 내에서 '우연'이라는 단어를 사용해서는 안된다는 이야기를 많이 듣기에, 이런 표현이 성경에 나올 때 당황하게 됩니다. 그러나 여기서 룻과 보아스의 만남을 우연으로 돌린 것은 단지 인간적 의도가 전혀 없었다는 점을 강조하는 것에 불과합니다. 룻과 보아스에게 있어서 그것은 우연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는 우연이 아니었습니다. 룻기 전체 스토리의 어조를 보면 하나님의 손길이 구석구석 미치고 있음을 저자가 확신하고 있습니다. 결국 표현이 매우 세속적인 것 같지만, 실제로는 이같은 확신을 담고 있는 것입니다. 기자는 이 만남을 우연으로 부름으로써 하나님께서는 우연도 그 손안에서 움직이고 계심을 우회적으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렇다고 한다면 룻의 우연한 발길은 하나님의 신비한 섭리 가운데서 일어난 것입니다. 비록 추수 풍요에 참여할 수 없는 가난한 미망인이요 이방 모압 여인인 룻이었지만, 하루에 주어진 작은 일에 최선을 다하며 시모를 섬기는 룻의 우연한 발길을 하나님께서 움직여서 장차 기업무를 자인 보아스의 밭에 이르게 하신 것은 우리에게 크나큰 위로가 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비록 남의 밭에 이삭을 주우러 나가는 듯한 심정으로 하루를 살아가는 형편에 있다 하더라도 희망을 가지고 작은 일에 최선을 다할 때 우리의 발길도 그 분의 섭리 가운데서 선하게 인도하실 것을 보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의 나그네 된 YWCA 자매 여러분, 우연의 발길이 섭리의 발길이 될 그 날을 바라보며 오늘도 남의 밭에 이삭을 주우러 나가시지 않으시렵니까? 우리의 보아스를 보게 될 운명적 만남을 기대하면서…

 

남의 밭에 이삭 줍는 신세

베들레헴의 다른 이들은 모두 추수의 풍요에 동참할 수 있었으나 룻은 남의 밭에서 떨어지는 이삭을 주우면서 살아가고 있었습니다. 이 룻의 모습이 오늘 우리의 자화상 같습니다. 구조조정이니, 명퇴니 하는 단어가 매스컴을 타고 흘러나오고, 주변에서 실직을 당하는 분들이 늘어가고 있는 요즘 우리는 부쩍 남의 밭에서 떨어지는 이삭으로 연명하는 것 같은 느낌을 받습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이런 생각이 들 때에 어디서 위로를 받을 수 있습니까? 우리는 보아스가 룻에게 한 말에서 조그만 위로를 찾아볼 수 있습니다. 보아스는 남의 밭에서 이삭을 줍는 처량한 신세가 된 룻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네 남편이 죽은 후로 네가 시모에게 행한 모든 것과 네 부모와 고국을 떠나 전에 알지 못하던 백성에게로 온 일이 내게 분명히 들렸느니라. 여호와께서 네 행한 일을 보응하기를 원하시며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 날개 아래 보호하심을 받으러 온 네게 온전한 상 주시기를 원하노라"(룻 2:11~12)
보아스는 룻에게 "여호와께서 네 행한 일을 보응하시기를 원하시며... 네게 온전한 상 주시기를 원하노라"고 축복하고 있습니다. 오늘날은 흔히 이같은 축복은 그저 인사치레처럼 들립니다. 그러나 과거에 이스라엘에서는 하나님의 축복을 비는 기원은 훨씬 심각한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여호와의 축복이 없으면 아무도 제대로 살 수가 없다고 굳게 믿고 있기 때문입니다. 룻에게 있어서 성공과 실패는 그저 우연이나 팔자가 아닙니다. 인간을 축복하시는 하나님께 달린 것입니다.

룻은 여자 아브라함

그렇다면 보아스가 이렇게 룻에게 축복을 빈 이유는 무엇입니까? 이것은 룻이 보인 비상한 행동 때문이었습니다. 보아스는 룻이 시모에게 충성을 하기 위해 "자기 부모와 고국을 떠나 전에 알지 못하던 백성에게로 왔다"고 했습니다. 여기에 사용된 용어들은 누구의 행위를 연상시킵니까? 아브라함의 행위를 연상시키고 있습니다. 어쩌면 룻은 '여자 아브라함'이라고 불릴 수 있을지 모릅니다. 아브라함이 보인 위대한 행동, 자기 친척, 본토, 아비 집을 떠나는 결단의 행동을 룻도 보인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이 보인 결단을 행동을 보응하셨습니다. 아브라함과 사라는 아이를 낳지 못하였으나,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난 후에 여호와의 보상으로 복을 받고 자녀를 낳아, 하늘의 별처럼 땅의 티끌처럼 많은 후손을 얻게 되었습니다. 이에 보아스는 여호와께서 아브라함에게처럼 룻에게도 보응해주시기를 기원한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어떻습니까? 룻처럼 이웃에게 충성하기 위해 '부모와 고국을 떠나 전에 알지 못하던 백성에게로 오는' 결단의 행동을 보이고 있습니까? 혹시 우리 멋대로 행동하면서 하나님의 축복을 기대하는 것은 아닙니까? 만일 그렇다면 그것은 오산입니다.
여호와의 날개

보아스는 룻이 행한 행위를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의 날개 아래 보호함을 받으러 온 행위라고 성격지으며 축복을 빌고 있습니다. 룻이 비록 남의 밭에 이삭을 줍는 이방 여인이지만 여호와의 날개 아래 보호함을 받기를 원한 이상 소망이 있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하나님은 그 날개로 그의 백성을 보호하시는 분입니다. "나의 애굽 사람에게 어떻게 행하였음과 내가 어떻게 독수리 날개로 너희를 업어 내게로 인도하였음을 너희가 보았느니라"(출19:4)

보아스는 이스라엘이 가나안으로 오기 위해 광야를 40년간 여행하는 동안 하나님께서 그들을 어떻게 보호하셨는지를 잘 알고 있었습니다. 이스라엘은 광야 40년 동안 지낼 양식과 옷을 미리 준비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적의 공격에 대비하여 군대를 미리 양성하지도 않았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호와 하나님께서 그들의 하나님이 되신 한가지 이유만으로 온갖 어려움 가운데서도 부족함을 몰랐던 것입니다.

실제로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 한 분만으로 만족하는 접을 배워야 합니다. 이것이 신앙입니다. 신앙이란 별천지의 무엇이 아닙니다. 신앙이란 어떤 상황 가운데서도 철저하게 그 분만을 신뢰할 것을 원합니다. 하나님께서는 그의 백성이 자신만을 신뢰하는지 시험하시는 분입니다. 따라서 하나님께서는 그의 백성을 약속의 땅으로 바로 이끌지 않으십니다. 하나님께서는 그의 백성을 먼저 거친 광야로, 메마른 사막으로 이끄십니다. 많은 이들은 이같은 하나님의 방침을 싫어합니다. 하나님께서 바로 약속의 땅, 가나안 땅에 들어가게 하셨으면 하고 바랍니다. 그러나 문제는 약속의 땅은 무조건 그 땅에 들어가고 싶다고 원하기만 하면 들어가는 곳이 아닙니다. 참 믿음이 있음을 실제의 삶 가운데서 보여야 약속의 땅에 들어갈수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지금 어떤 상황에 있습니까? 하나님께 가나안 땅에 왜 빨리 들이시지 않느냐고 불평하고 있습니까? 왜 남의 밭에서 이삭만 줍게 하느냐고 짜증을 부리십니까? 기억하십시오. 광야 생활은 피곤하지만 하나님의 이적을 체험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입니다. 남의 밭에서 이삭을 줍는 것은 처량하지만 보아스를 만날 수 있는 최대 찬스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처럼 불평만 하다가 참다운 신앙을 보이지 못하고 결국은 광야에 엎드려져 죽고 마는 우를 범하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부모와 고국을 떠나 알지 못하는 미지의 세계'로 순례길을 내딛은 룻을 그 날개로 보호하신 여호와는 오늘도 룻의 후예들을 결코 실망시키지 않을 것입니다.

"내가 여호와를 가리켜 말하기를 저는 나의 피난처요 나의 요새요 나의 의뢰하는 하나님이라 하리니 이는 저가 너를 새 사냥꾼의 올무에서와 극한 염병에서 건지실 것임이로다. 저가 너를 그 깃으로 덮으시리니 네가 그 날개 아래 피하리로다"(시91:2~4)

 

위로 받는 룻

시어머니를 따라 남의 나라에서 과부의 신세가 된 룻이 남의 밭에 떨어진 이삭을 주으러 나간 첫날 룻에게 어떤 일이 일어난지 아십니까? 룻의 우연한 발길을 친족인 보아스의 밭에 이르게 하신 하나님은 룻의 마음을 열어 호의를 베풀게 하였습니다. 보아스에게 속한 밭에서 얼마든지 이삭을 줍게 허락을 한 것입니다. 이에 룻은 견딜 수가 없었습니다.
"내 주여 내가 당신께 은혜 입기를 원하나이다. 나는 당신의 시녀의 하나와 같지 못하오나 당신이 이 시녀를 위로하시고 마음을 기쁘게 하는 말씀을 하셨나이다(2:13)."
보아스는 룻을 딸이라고 불렀으나, 룻은 자신을 가리켜 '시녀'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남의 나라에서 이삭을 주워 연명하는 처지에서 부유한 보아스 앞에서 자신의 모습이 시녀에 불과해 보인 것은 어쩌면 너무나 당연한 것일는지 모릅니다. 그러나 시녀면 어떻습니까? 보아스의 위로와 권면을 받았으니 룻의 마음은 기쁘기 한량없었습니다.

보아스는 억눌리고 고통 당한 한 여인을 그냥 못 본 척하지 않았습니다. 보아스는 고통 당한 자를 위로하고 권면할 줄 아는 자였습니다. 남 같으면 그냥 지나쳤을 이방 여인을 불러다가 위로하고 권면한 이유는 무엇입니까? 보아스는 룻을 측은히 여기는 마음을 가진 듯합니다.

진정한 경건

이것이 구약에서 말하는 경건입니다. 실제의 삶 가운데 자기보다 연약한 자를 돌보는 행위 가운데 진정한 경건이 있는 것입니다. 사소한 이웃과의 관계에서 내가 하는 말이나 행도이 상처를 주지 않을까 하여 조심하며, 아주 사소한 것이나마 신경을 써주는 모습 이것이 바로 진정한 경건의 참 모습인 것입니다. 특별히 과부와 고아를 돌보는 것은 가장 경건의 행위로 야고보 사도가 언급하고 있습니다.

보아스를 경건한 인물로 칭찬하는 것은 룻의 아부에서 나온 것만은 아니었습니다. 우리는 이런 경건의 모습을 실제 보아스에게서 볼 수 있습니다. 식사할 때에 보아스는 룻에게 "이리로 와서 떡을 먹으며, 네 떡 조각을 초에 찍으라"(14절)고 자상한 마음씨를 보였습니다.

더욱이 룻이 이삭을 주우러 일어나자, 소년들에게 "그로 곡식 단 사이에서 줍게 하고 책망하지 말며 또 그를 위하여 줌에서 조금씩 뽑아 버려서 그로 줍게 하고 꾸짖지 말라"(15절)고 당부하였습니다. 인심쓰는 척하면서 아예 추수한데서 얼마를 퍼줄 수도 있었으나 이렇게 하면 룻의 자존심이 많이 상할 것 같아, 밭에서 이삭을 줍게 함으로 실질적으로 도움을 얻게 하는 보아스의 자상한 마음 씀씀이를 보십시오.

보아스는 베들레헴에서 부유한 지주였던 것 같습니다. 따라서 그런 시시한 일에는 간섭하지 않을 수도 있었습니다. 현대 같으면 이런 일에 신경쓰는 것은 지도자로서 할 일이 아니라고 할는지 모릅니다. 그러나 성경은 서로가 서로를 대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우리에게 가르치고 있습니다. 서로 상대방의 처지를 생각하여 아끼고 사랑하며 감싸주는 모습에서 우리는 하나님 나라의 도래를 느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중요한 것은 무엇을 하느냐가 아니라 어떤 인간이 되느냐가 더욱 중요함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는 어떤 일을 나느냐, 어떤 업적을 쌓았느냐, 그는 무엇을 달성했는가를 중심으로 사람을 평가합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이같은 가시적인 우리의 업적과 성취로 우리를 평가하지 않습니다.

삶의 열매의 중요성

주께서 우리를 평가하시는 것은 우리의 삶의 열매로입니다. 그렇다면 무엇이 우리의 삶의 열매입니까? 우리의 삶의 열매는 학벌이나 좋은 직장이나 재능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성경은 그 어디에서도 이런 것을 우리의 삶의 열매라고 말한 적이 없습니다. 그렇다면 무엇이 우리의 삶의 열매입니까? 갈라디아서 5 : 22~23은 말합니다.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니."
우리는 여기서 가시적인 업적과 공로가 전혀 삶의 열매로 언급되지 않고 있음을 보아야 합니다. 우리가 무엇을 하든지, 어떤 직업을 택하든지, 어떤 업적을 남기든지 간에 우리는 그것으로서 장차 하나님 앞에서 판단을 받지 않습니다. 우리는 오직 우리의 삶의 열매인 성품으로서만이 판단을 받을 것입니다. 누가 더 이웃을 사랑하였는가? 누가 더 온유한가? 누가 더 오래 참았는가? 누가 더 이웃과 화평하였는가? 누가 더 절제하였는가? 등으로 판단을 하게 됩니다.

이것은 세속의 원리와는 정반대입니다. 세상은 인간을 외모나 재산으로 판단합니다. 저는 언젠가 신문 기사에서 우스운 이야기를 읽은 적이 있습니다. 교통경찰이 차의 종류에 따라 운전자를 부르는 명칭이 다르다는 것입니다. 티코나 프라이드는 '거기' '어' 등으로 반말 비슷하게 부르고, 세피아나 엑셀을 모든 사람은 어중간하게 존댓말로 다하며, 쏘나타나 그랜져를 모는 사람은 깍뜻하게 선생님이라는 칭호로 대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세속사회에서는 어쩔 수 없는 것입니다. 세속 사회에서는 소유의 과다가 곧 힘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은 세속의 원리를 삶의 원리로 삼지 않고 있음을 삶의 열매로 분명히 드러내 보여야 합니다. 어쩌면 경제 위기에 놓인 오늘 우리의 현실은 그리스도인들의 참된 경건이 잘 드러날 수 있는 기회가 아닌가 생각합니다. 이런 생각으로 주변을 돌아봅시다. 보아스의 권면과 위로를 기다리는 오늘의 룻이 혹시 우리 삶의 주변에서 이삭을 주우며 무엇인가 요청하는 눈빛으로 우리를 바라보고 있지는 않은지…

 

낙망과 좌절의 담을 넘어서

룻의 한철 일이 끝이 났습니다. 보리 추수와 밀 추수기간의 7주 동안은 이삭을 주우며 그럭저럭 생계를 유지했습니다. 추수기가 끝나면 과부인 나오미와 룻의 생활은 어찌될 것인가? 낙망과 좌절의 담이 또다시 이들의 앞을 가로막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이제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낙심과 한탄의 세월을 또다시 보내야 할 것인가? 한동안은 주운 이삭으로 목숨을 유지할 수 있겠지만, 곧 겨울이 다가올 터인데 그때는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막막하기만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나오미는 낙망과 좌절의 담 앞에서 더 이상 움츠려들지 않았습니다. 이에 먼저 나오미가 룻에게 혼인할 것을 제안합니다(1절).

얼마동안 먹을 곡식 씨앗은 있었으나, 미래를 보장할 육신의 씨앗인 자녀는 없었기에 미래가 없었던 나오미는 이 모든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룻을 결혼시키는 것이 최선의 방책임을 알고 있었습니다. 이에 나오미는 매우 대담한 계획을 가슴에 품고 있었습니다. 그것은 보아스와 룻의 중매 계획이었습니다. 따라서 나오미는 혼처 주선의 의사를 전한 다음에 혼처의 대상을 언급합니다. "네가 함께 하던 시녀들을 둔 보아스는 우리의 친족이 아니냐?" 여기서 친족이란 계대 결혼의 책임이 있는 친척, 기업 무를 자 중 한 사람이란 뜻입니다.

사실상 약속의 땅에서는 땅과 후손 없이는 살아갈 수가 없습니다. 땅이 없이는 생계를 유지할 수 없으며, 자식이 없이는 미래는 보장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기업 무를 자인 보아스가 룻과 결혼만 한다면 땅과 미래의 문제를 동시에 해결할 수 있었습니다. 나오미는 그의 백성에게 인애 베풀기를 그치지 아니하시는 하나님과 기업 무름의 율법 가운데서 새로운 용기와 힘을 얻고 낙망과 좌절의 담을 넘으려고 시도하고 있음을 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도 낙망과 좌절의 담을 뛰어넘어야 합니다. 우리는 성경에 기록된 과거의 하나님의 백성들의 모습에서 새로운 활로를 찾을 줄 알아야 합니다. 우리는 낙심과 좌절의 담을 넘어 앞으로 나아가기 위해서 과거에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보이신 하나님의 위대한 구원의 행동에 대한 이야기를 들어야 합니다. 물론 하나님께서는 당장 필요한 모든 것을 넘치도록 풍성하게 하시지는 않지만, 낙망과 좌절의 벽을 넘어 앞을 향해 나아가는 우리에게 필요한 것을 최소한 공급해 주십니다. 이로 인해 우리가 세상에 대해 용기를 가질 수 있도록 하십니다.

나오미의 중매 계획

그렇다면 나오미가 세운 중매 계획이 무엇입니까? 보아스가 타작하는 날의 밤에 마치 신랑을 위해 단장하는 신부처럼 치장하고 밤에 타작마당으로 내려가 보아스 곁에 누우면, 보아스가 알아서 할 것이라는 것이었습니다(3~4). 밤에 아무 남자에게도 속하지 않은 미망인 룻이 나돌아다니는 것은 매우 위험한 일입니다. 아가서의 술람미 여인의 노래를 들어봅시다.
"내가 나의 사랑하는 자 위하여 문을 열었으나 그가 벌써 물러갔네. 그가 말할 때에 내 혼이 나갔구나. 내가 그를 찾아도 못 만났고 불러도 응답이 없었구나. 성중에서 행순하는 자들이 나를 만나매 나를 쳐서 상하게 하였고 성벽을 파수하는 자들이 나의 웃옷을 벗겨 취하였구나. 예루살렘 여자들아 너희에게 내가 부탁한다. 너희가 나의 사랑하는 자를 만나거든 내가 사랑하므로 병이 났다고 하려무나."(아 5:6~8)
밤에 타작마당으로 가는 것은 더더욱 위험하기 짝이 없는 것입니다. 타작마당은 남자들의 세계입니다. 특별히 타작을 다 끝내고 남자들이 먹고 마시는 장소인 타작마당은 여인들에게는 위험한 곳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같은 나오미의 지시에 룻은 놀랍게도 순종합니다. "룻이 시모에게 이르되 어머니의 말씀대로 내가 다 행하리이다(5절)." 우리는 여기서 룻의 감정과 느낌이 전혀 소개되지 않고 있음을 주목해야 합니다. 성경 기자는 룻의 감정과 느낌을 감춤으로써 룻의 충성이 얼마나 순수하고 절대적인가를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밤길을 지나 타작마당으로

우리는 그의 백성에게 인애 베풀기를 그치지 아니하시는 하나님과 그의 율법 가운데서 새로운 용기와 힘을 얻고 낙망과 좌절의 담을 넘으려고 시도하는 나오미와 룻의 모습에게 교훈을 얻어야 합니다. 현실이 아무리 암울하다 하더라도 이 절망과 좌절의 벽을 넘을 방법은 있습니다. 어차피 우리 모두는 발을 땅에 디디고 살 수밖에 없습니다. 때로는 땅을 잃고, 후손도 없는 절망 가운데 들어갈 때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가운데에서도 우리는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그 분의 구원을 기다리면서 오늘 땅 위에서 우리의 삶을 새롭게 창조해갈 필요가 있습니다. 비로 내 땅이 없다 하더라도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우리의 하나님은 무에서 유를 창조하시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땅도 후손도 없는 막막한 현실을 체념하고 주저앉는다면 미래는 열리지 않습니다. 물론 미래를 여시는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나 가만히 앉아있는 자에게 하나님은 미래를 열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그 약속 위에서 새로운 삶을 창조하기 위해 애쓰는 이에게 미래는 열리는 것입니다. 천국은 침노하는 자의 것이라고 주님도 말씀하셨습니다. 보아스를 만나기 위해서는 때로 어두운 밤길을 지나 타작마당으로 내려가는 용기도 내야 할는지 모릅니다. 새로운 미래를 창출하기 위해서는 위험한 세계인 타작마당으로 내려서는 모험도 감수해야 할 것입니다. 목욕하고 기름 바르고 의복을 입는 노력도 필요할 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모든 노력은 단지 요행을 바로 하는 행동이어서는 아니될 것입니다.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인간 편에서 최대한 노력을 기울이는 창조의 행동이어야 할 것입니다. 그때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뒤해 땅과 후손을 되돌려 주실 것입니다.

 

조심스런 접근

나오미의 중매계획은 룻이 타작마당에 밤에 내려가서 보아스의 발치에 눕는 것이었습니다. 밤중에 남자의 잠자리 안으로 들어가는 것은 위험천만한 계획이었음에도 룻은 “타작마당으로 내려가서 시모의 명대로 다 행하였습니다(3:6).” 보아스는 타작을 마친 후에 먹고 마시고 즐거운 저녁을 보내고, 마음이 즐거운 상태에서 노적가리 곁에 누웠습니다.

이에 룻은 가만히 가서 발치 이불을 들고 누웠습니다. 룻은 너무나 조심스러웠고 조용히 움직였기에 보아스는 룻의 존재를 느끼지 못했던 것처럼 보입니다. 어쩌면 룻은 한 가지 점에서 나오미의 말을 오해했는지도 모릅니다. 나오미는 보아스가 먹고 마시고, 마음이 즐거워 룻을 받아들이기 쉬울 때, 그러니까 잠이 들기 직전에 보아스에게 나아갈 것을 원했습니다. 그러나 룻은 너무 오래 기다려 보아스가 잠이 든 후에 접근하였으며, 너무 조심스럽게 다가가서 보아스가 눈치를 채지 못한 것 같습니다.

나오미는 로맨틱한 사명을 주었는지 모르나, 룻은 이를 기업 무를 자가 되게 해달라는 공식 요청으로 바꾼 것이 아닌가라는 느낌도 듭니다. 만일 나오미가 보아스에게 기업 무를 자가 돼달라고 요청할 의향이었다면, 밤중에 보아스를 놀래켜서 그런 요청을 했을 리는 없어 보입니다.


당신의 날개로 덮어주세요

한밤중이 되었습니다. 보아스가 갑자기 추위를 느낀 것 같습니다. 겉옷을 덮고 잤는데, 룻이 발을 벗겼기에 추위를 느낀 것인지, 겉옷이 옆으로 밀려서 추위를 느꼈는지는 잘 알 수 없습니다. 보아스가 옷을 찾느라 더듬거리는 사이에, 거기에 한 여인이 누워 있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이에 깜짝 놀라서 보아스는 묻습니다. “네가 누구뇨?” 이에 룻이 대답합니다. “나는 당신의 시녀 룻이오니 당신의 ‘날개’로 시녀를 덮으소서. 당신은 우리 기업을 무를 자가 됨이니이다(3:9).”

우리 한글 성경에는 ‘옷자락’으로 되어 있지만 히브리 본문에는 ‘날개’로 되어 있습니다. 보아스는 룻을 추수밭에서 처음 만났을 때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 날개 아래 보호를 받으러 온 네게 온전한 상주시기를 원하노라(2:12)고 빈 적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제 룻은 바로 보아스가 그 ‘날개’ 역할을 해야 함을 암시한 것입니다. 이에 보아스는 물론 하나님의 수준에서도 룻을 축복해야 하시지만, 인간의 수준에서는 자기가 룻을 보호해야 할 책임을 이제야 깨닫게 됩니다.

이에 보아스는 선언합니다. “내 딸아 여호와께서 네게 복 주시기를 원하노라. 네가 빈부를 물론하고 젊은 청년을 좇지 아니하였으니, 너의 베푼 인애가 처음보다 나중이 더하도다(3:10).” 룻이 나오미의 곁을 떠나지 않고 이삭을 주워 공양한 인애보다, 보아스와 결혼하여 죽은 남편의 씨와 기업을 영원히 이어지게 하려고 위험을 무릅쓴 나중 인애가 더욱 크다는 사실을 칭찬하고 있는 것입니다.

룻의 죽음에 이르는 충성

그렇다면 룻이 이런 젊은 청년들의 청혼을 거부하고 보아스와 결혼하라는 시어머니의 말에 순종한 이유는 무엇입니까? 그것은 보아스가 다른 청년보다 여러모로 낫기 때문이 아닙니다. 기업 무를 자와 결혼함으로써 죽은 남편의 씨가 이 땅에서 사라지지 않게 할 뿐 아니라 남편의 기업이 계속 그 이름으로 유지되도록 하려는데 그 목적이 있었습니다. 그것도 큰 위험을 무릅쓰고 말입니다. 룻이 밤중에 남자들만의 세계인 타작마당에 들어가 보아스의 발치 아래 들어간 것은 매우 위험스런 장면입니다.

만일 일이 잘못된다면 온갖 수모와 창피는 물론 목숨까지도 위태로울 수 있었습니다. 다말이 임신한 것이 드러났을 때 시아버지인 유다가 다말을 끌어내어 화형시키려고 한 것(창 38:24)은 룻이 당할 수 있는 위험이 어느 정도인가를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나오미와 죽은 남편에게 충성하기 위해 이런 위험을 감수한 것입니다.


기업 무를 자 보아스

이에 보아스는 룻에게 두려워 말라고 위로합니다. “내 딸아 두려워 말라. 내가 네 말대로 네게 다 행하리라. 네가 현숙한 여자인줄 나의 성읍 백성이 다 아느니라(3:11).” 사실 룻은 잠언 31:10~13에 나오는 현숙한 여인의 자질을 소유하고 있었습니다. 우리는 전에 성경 기자가 보아스를 ‘유력한 자’라고 부른 것을 기억할 것입니다(2:1). 보아스는 이런 표현을 통해서 룻을 자신과 같은 위치로 격상시킵니다. 룻이 낮은 위치에서 동일한 자격자로 격상되면서 사건 전개의 긴장에 물꼬가 트입니다. 이제 룻은 단지 ‘모압 지방에서 돌아온 과부’가 아닙니다. 그는 ‘ustnr한 여인’인 것입니다. 이에 탁월한 남자와 탁월한 여자의 운명적인 밤의 만남은 결국은 결혼으로 이어질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이에 보아스는 “내가 네 말대로 네게 다 행하리라”고 약속합니다. 보아스는 꼭 그렇게 해야 할 의미구가 있었던 것은 아닙니다. 먼 친척의 죽은 형제의 미망인과 결혼하여 그 형제의 이름을 잊혀지지 않도록 하는 일은 법으로 강제된 것이 아닙니다. 단지 궁핍한 사람에 대한 자비와 긍휼에서 자발적으로 행하는 도덕적 언약적 의무에 불과하였습니다. 그러나 보아스의 이런 기업 무름이 없었다면 룻은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구속주(기업 무르시는 하나님)’임을 체험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이런 면에서 오늘날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음을 통해 하나님의 구속을 먼저 경험한 그리스도인들은 약한 이웃들에게 기업 무를 자가 됨으로서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진정한 구속주임을 드러낼 책임이 있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이 말로만 ‘그리스도는 구속주’라고 외칠 뿐 실제 삶에서 기업 무름의 행동이 없다면 우리 안에 있는 약한 이웃이 그리스도도가 진정 누구인지를 알 길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이런 기업 무름의 행동은 어떻게 가능합니까? 바울은 말합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는 할례나 무할례가 효력이 없되 사랑으로써 역사하는 믿음뿐이니라(갈 5:6).” 보아스처럼 사랑으로써 역사하는 믿음으로 어려운 상황에 빠져 있는 자들의 기업을 무르는 자들이 많아진다면, 한민족의 마음을 얼어붙게 만든 경제난도 충분히 녹일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 모두 기업 무르는 자가 되어 보시지 않으시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