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구약 성경강해***/- 누가복음 강해

누가복음 개요

에반젤(복음) 2019. 10. 6. 16:09




누가복음 개요



본서는 유일하게 이방인이 쓴 복음서로, 이는 바울의 사랑받는 의원 누가가 완전한 인간으로서는 유일한 인간인 예수님의 인간적 행적과 고뇌, 그리고 그분이 주시고자 했던 절대적 구원에 대하여 이방인들에게 알리고자 유려한 헬라어를 사용, 폭넓은 어휘와 뛰어난 구성력으로 짜임새 있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물론 요한도 주로 이방인들을 1차적 독자로 생각했으나 (누가가 역사적 내지 기사적 접근을 했던 것과는 달리) 그는 신학적으로 접근했던 것입니다.

 

<누가복음의 메시지: 인자의 온 것은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려 함이라(19:10)>

1. 저자

: ‘누가에 의한’(카타 루콘), 후에 복음(헬, 유앙겔리온)이란 말이 첨가됨.

누가, 바울의 사랑받는 의원(주치의), 바울과 마지막까지 함께 했던 사람.

초대교회의 주요관심사에서 관계된 자료수집자. 바울의 2차 전도여행부터 함께함.

사도행전의 저자와 동일인(행1:1~2 비교, 사도행전에는 '우리'라는 표현이 28:16까지).


 

 누가는 수리아 안디옥에서 출생한 헬라인으로 추정(골4:14), 누가복음과 사도행전의 저자로(눅1:3; 행1:1), 이방인 출신이며 바울에게 사랑받은 의사로서, 바울이 투옥되어 있는 동안 바울의 동역자로 활동한 인물입니다.

 그는 수리아 안디옥에서(?) 태어나 바울의 2차 전도여행 때(A.D. 50~52년), 드로아에서 바울과 합류, 마게도냐의 첫 성 빌립보 전도에 참여했고(행16장), 바울의 로마 투옥(A.D. 61년)시에도 함께 했으며(행27:1~28), 에베소나 비두니아에서 84세를 일기로 죽었다고 전해지고 있습니다. “‘우리가’ 드로아에서 배로 떠나 사모드라게로 직행하여 이튿날 네압볼리로 가고.”(행16:11) /“‘우리가’ 로마에 들어가니 바울에게는 자기를 지키는 한 군인과 함께 따로 있게 허락하더라.”(행28:16)

 그는 뛰어난 저술가로서 사도행전과 누가복음 두 권의 성경을 기록했는데 특히, 누가복음의 서문은 신약성경에서 최고의 고전 헬라어로 기록되어 있고, 1장의 뒷부분과 2장에서 그 운율이 최고의 히브리어적 색채를 띠고 있으며, 10장과 15~18장에 아름다운 비유가 사용될 정도로 풍부함 감성과 다양한 문학적 자질을 지녔던 사람입니다.

 또한 그는 의사로서 바울의 허약한 육신을 주께서 주신 의술의 달란트로 치유하여 바울로 하여금 자신의 복음 전파의 사명을 끝까지 완수하도록 끝까지 곁에서 도왔습니다. 그는 드로아에서 빌립보까지 동행함은 물론, 바울이 가이사랴에서 투옥, 로마로 가서 그곳에서 순교할 때까지 함께 있을 정도로 열심 있고 의리 있는 신앙이었던 것입니다. “데마는 이 세상을 사랑하여 나를 버리고 데살로니가로 갔고 그레스게는 갈라디아로, 디도는 달마디아로 갔고 누가만 나와 함께 있느니라...”(딤후4:10,11)

 한편, 누가는 불행한 사람들, 즉 가난한 자나 소외당한 자들에 대해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었으며, 또한 다른 복음서의 저자들보다 더 많이 기도에 대해 언급하는 등 뜨거운 기도의 사람이었던 것입니다(눅11:5~13; 18:1~5).

 

2. 기록연대: 주후 58~63년

바울의 로마 체제(A.D. 61~63) 이전, 혹자는 58년 가이사랴에서 기록된 것으로 추정. 한편, 사도행전은 대략 로마 대화재 사건(A.D. 64년 7월) 이전인 A.D. 63~64년경에 기록된 것으로 보입니다.

 

3. 기록목적

: 로마 관리 '데오빌로'(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누가복음과 사도행전의 수신자이기도 함)로 대표되는 지성적 이방인들에게 완전하고 유일한 한 인간 즉, 인간으로서의 예수 그리스도의 생애와 사상을 알림으로써, 그들의 믿음을 견고케 하고, 불신자들의 공격을 막으며, 결국 복음이 더 널리 전파되도록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4. 기록장소: 로마(바울과 함께 로마에 갇혀 있는 동안, 행28:30)

 

5. 주제: 인자(사람의 아들)이신 그리스도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인성을 지닌 진정한 사람으로서, 다른 사람들과 똑같이 세상에 살면서 하나님의 뜻을 이루셨습니다.

 

6. 특징:

1) 역사적 사실에 근거한 연대기적 기록

: 예수님의 행적을 역사적 사실에 근거해서 연대기적으로 기록한 대표적인 복음서. 이 같이 연대적 순서를 따른 배열과 여러 문서를 참고하여 저술한 사실의 기록은, 역사성과 예수님의 전기로서 그 가치를 지닌다고 할 수 있음.

2) 인성, 완전한 사람이셨음을 강조(인자의 복음)

: 그리스도의 족보, 출생과 성장, 감정 상태 등을 기술함으로써 그분의 인성을 강조함.

3) 유려한 헬라어를 사용, 폭넓은 어휘와 뛰어난 구심력으로 짜임새 있게 기록

: 누가의 역사가로서의 면모와 신학자로서의 구속사적인 관심이 잘 나타남.

4) 보편성을 강조

: 이방인 여자들, 가난한 자 등 유대 사회에서 소외된 자들에 관한 기록이 많음. 참고로, 누가는 다른 복음서 기자들과 달리 이방인, 경제문제, 사회문제, 여성, 인간의 개성 등에 대한 관심을 기울였습니다.

 

7. 핵심장: 제15장

: 제15장에는 잃은 양, 잃은 동전, 잃은 아들에 대한 비유가 기록되어 있는데, 이는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를 통하여 잃어버린 자들을 찾으시고 구원하신다는 본서의 중심사상이 잘 함축되어 있는 대목입니다.

 

8. 본서에 나타난 그리스도

: 본서에는 인자(人子)이신 그리스도를 주제로, “인자의 온 것은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려 함이니라.”(19:10)는 구절에 그 주요사상은 집약되어 있습니다. 즉 인간을 죄에서 해방시켜 생명으로 인도하는 인자 예수님의 사역과 교훈에 그 초점이 맞추어져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그분의 기적, 비유, 교훈 등 모든 행적에는 인간이신 예수님의 인간에 대한 연민과 인간미 및 신이신 그리스도의 능력과 의지가 잘 조화되어 드러나고 있습니다.

 

9. 예수님의 유년 시절에 관한 기록(2:40~52)

: 이는 예수님의 유년 시절에 관한 유일한 기록입니다.

① 예수님 역시 유년시절 보통의 아이들처럼 키와 몸무게가 자라며 지혜와 지식이 자라는 성장과정을 거쳐 왔음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아이가 자라며 강하여 지고 지혜가 충만하며 하나님의 은혜가 그의 위에 있더라.”(40절)

② 예수님 역시 여느 아이들처럼 8일 만에 할례를 받았고(2:21~39) 유월절에도 참여하셨음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참고로 당시 유대인들은 12세까지 초보적인 율법교육을 마치고, 13세부터 각종 종교행사에 참여하면서 본격적인 율법공부를 시작하게 되는데 예수께서는 이때부터 벌써 율법교사들(랍비들)을 깜짝 놀라게 하셨던 것입니다(46,47절). 물론 예수님의 부모는 그분이 길을 잃어버릴까봐 염려했었지만 말입니다(48절).

“예수께서 열두 살 될 때에 저희가 이 절기(유월절)의 전례를 좇아 올라갔다가”(42절) /“...그가 선생들 중에 앉으사 그들에게 듣기도 하시며 묻기도 하시니 듣는 자가 다 그 지혜와 대답을 놀랍게 여기더라.”(46,47절) /“....아이야 어찌하여 우리에게 이렇게 하였느냐 보라 네 아버지와 내가 근심하여 너를 찾았노라”(48절).

③ 예수님 역시 부모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등 여느 부모와 여느 자식처럼 그렇게 지내셨음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예수께서 함께 내려가사 나사렛에 이르러 순종하여 받드시더라...”(51절)

 

10. 완전한 하나님이자 완전한 사람

: 예수님은 (죄는 없으시나) 모든 일에 우리와 한 결 같이 시험을 받으시되(히4:15 하), 자신이 직접 고난을 당하셨으므로 시험 받는 자들을 능히 도우시는(히2:18) 등 우리의 연약함을 동정하시는 분입니다(히4:15 상). “자기가 시험을 받아 고난을 당하셨은즉 시험받는 자들을 능히 도우시느니라.”(히2:18) /“우리에게 있는 대제사장은 우리 연약함을 체휼하지 아니하는 자가 아니요 모든 일에 우리와 한 결 같이 시험을 받은 자로되 죄는 없으시니라”(히4:15) 한편, 여기서 ‘동정’(체휼)이란 경험적으로 공감하는 깊은 동정을 말하는 것으로 여기서는 그리스도의 인성을 의미합니다.

 

11. 내용전개

1) 인자에 대한 소개(1:1~4:13)

: 누가는 인자의 족보, 탄생, 어린 시절 및 세례 요한의 출현에 대한 이야기에 강조점을 두되, 특히 예수님의 수태 고지 및 어린 시절에 성전에 올라가던 일을 비교적 자세히 소개하고 있습니다. 이 후 30살이 될 때까지의 과정에 대해서는 2:52에 약간의 암시만 있을 뿐 별다른 기록을 하고 있지 않다가, 세례 요한에게 세례 받으시고 마귀에게 시험받으시는 것을 필두로 그분의 본격적인 공생애의 사역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2) 인자의 사역(4:14~9:50)

: 4:14~6:49에는 사단, 질병, 자연, 죄의 영향력, 유전 등과 같은 모든 백성의 모든 영역을 지배하는 그리스도의 영적 권위가 나타나 있는 반면 7:1~9:50에는 그리스도의 본격적인 사역, 즉 전도하며 가르치고 제자들을 양육시키는 일들이 잘 나타나 있습니다.

3) 인자의 배척당하심(9:51~19:27)

: 이전에는 인자에 대한 믿음이 점점 커가고 한편 적대감 역시 커져가는 이중적인 반응이 나타났으나(4:14; 5:11), 본문부터는 인자의 사역에 대한 배척과 갈등이 심해 갑니다. 심지어 유대의 종교지도자들은 예수님을 ‘귀신 들린 자’라고까지 비난하기까지 했습니다(11장). 또한 예수님은 예루살렘에로 마지막 여행 떠남을 아시고 제자들에게 기도, 탐욕, 신실함, 회개, 겸손, 제자직, 복음 증거, 돈, 용서, 봉사, 감사, 재림, 구원 등과 같은 실제적인 문제를 가르침으로서 자신이 십자가에 달려 죽을 것에 대비했습니다(12:1~19:27).

4) 인자의 죽음과 부활(19:28~24:53)

: 예수님은 예루살렘에 입성하신 후 그의 적대자들에게 예루살렘의 멸망을 예언하셨습니다(19:28-21:38). 그분은 겟세마네 동산으로 올라가 제자들에게 마지막 교훈을 하셨고, 기도하시는 중 체포되어 종교적인 심문과 정치적인 신문을 여섯 차례나 받으셨으며, 십자가에 달려 죽으심으로 그 고난이 절정에 이르렀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약속하신 대로 무덤을 깨뜨리고 3일 만에 부활하셔서 제자들에게 여러 번 보이심으로 승리의 과업을 이루셨던 것입니다.

 

<핵심 단어 및 구절 연구>

1:3 그 모든 일을 근원부터 자세히 미루어 살핀... : 이는 지금까지 예수님의 행적을 기록하려 붓을 든 사람이 많이 있었지만, 그때까지만 해도 (시간적 순서나 연대기적 기록 등을 고려하지 않은) 아무렇게나 소개하고 있던 형편, 처음부터 예수님의 행적에 관해 자세히 살펴 왔던 누가로서는, 그 모든 일을 차례대로 기록하는 것이 좋은 줄로 생각하고 직접 붓을 들었던 것입니다. 이로 보건대 누가는 예수님에 관한 전승의 발전 과정을 주의 깊게 조사하였으며 당시 아무렇게나 알려져 있던 예수님의 이야기를 체계적으로 정리하여 데오빌로에게 증정하려 한 듯 보입니다.

1:3 데오빌로 : 본서 1:3과 행1:1에 이름만 언급되어 있을 뿐 성경에는 그에 관한 기록이 전혀 나타나 있지 않습니다. 다만 누가가 그를 ‘각하’라고 부른 점을 보아, 그는 로마 제국의 고관이었음이 분명하며, 또한 ‘데오빌로’라는 이름이 헬라어 ‘데오스’와 ‘필로스’의 합성어로서 그 뜻이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 ‘신을 사랑하는 자’이니만큼 그는 아마도 기독교로 개종한 지 얼마 안 되는 초신자이었던 것 같습니다. 따라서 기독교에 관해 좀 더 자세히 알기 원하는 데오빌로를 위해 누가가 본서를 기록, 증정한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혹 지금 우리는 어떻습니까? 우리가 직접 돌보고 양육해야 할 초신자가 있습니까? 그를 위해 어떤 노력을 기울이고 있습니까?

2:1,2 호적: 본문은 당시의 로마 황제이었던 가이사 아구스도(Caesar Augustus, B.C. 27~A.D. 14)의 명에 의해 내려졌던 호적, 즉 인구조사에 관한 내용입니다. 당시 로마는 14년마다 한 번씩 인구 조사를 실시했는데 그 조사는 고향에서 하는 것이 관례였던 것입니다. 한편, 당시 로마법에 의하면 여자도 호적해야 할 의무가 있었지만 자신이 직접 고향에 가서 호적할 필요는 없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요셉이 마리아와 함께 호적 하러 간 것에 대해 혹자는 처녀 마리아가 임신한 것으로 인해 동네에서 평판이 좋지 않았으며 이로 인해 마리아가 받은 정신적 고통을 풀어주기 위함이었던 것으로 추정됩니다. 물론 이는 예수께서 다윗의 동네, 즉 베들레헴에서 태어나리라는 예언이 성취되도록 하기 위함 하나님의 섭리로 말미암은 것이지만 말입니다.


3:21,22 하늘이 열리며 성령이 비둘기 같은 형제로 그의 위에 강림하시더니: 예수님께서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시자 하늘로부터 음성이 들리며 성령이 함께 하셨는데(3:22) 이는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사실(1:32)과 그분이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 드리기 위하여 이 세상에 오신 분이라는 점과 이 같은 사역을 수행함에 있어서 성령의 도우심과 성부 하나님의 재가가 함께 하였다는 점을 보여줍니다.

한편, 성령은 하나의 막연한 힘이나 에너지가 아닌 한 인격이십니다(비교, 여호와 증인의 경우는 성령 하나님을 어떤 힘이나 에너지 정도로 설명). 그분의 사역이 때때로 다른 두위(성부, 성자 하나님)의 하나님께 종속되는 것처럼 보일지라도, 우리는 결코 성령 하나님을 성부와 성자 하나님보다 열등한 존재로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 구약에서의 성령

1)구약에는 ‘성령’이란 용어는 대신 ‘하나님의 신’ ‘하나님의 영’ ‘여호와의 영’ 등의 표현이 더 일반적입니다. 그리고 구약에서의 성령의 사역은 창조사역(창1:2)과 이스라엘 백성들의 영적인 삶 속에 관여(재창조사역)를 비롯해 성경과 예언을 주시는 일, 임무수행을 위해 필요한 기술부여 등입니다.

(1)창조사역에 관여: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고 ‘하나님의 영’은 수면 위에 운행하시니라.”(창1:2)

(2)임무수행을 위해 필요한 힘을 부여: “여호와의 영이 삼손에게 강하게 임하니 그가 손에 아무것도 없이 그 사자를 염소 새끼를 찢는 것 같이 찌었으나...여호와의 영이 삼손에게 갑자기 임하시매 삼손이 아스글론에 내려가서 그 곳 사람 삼십 명을 쳐 죽이고 노략하여 수수께끼 푼 자들에게 옷을 주고 심히 노하여 그의 아버지의 집으로 올라갔고”(삿14:6,19)

(3)우리 안에 정한 마음을 창조하시고 정직한 영을 새롭게 하심: “하나님이여 ‘내 속에’ 정한 마음을 창조하시고 ‘내 안에’ 정직한 영을 새롭게 하소서. 나를 주 앞에서 쫓아내지 마시며 ‘주의 성령(성신)’을 내게서 거두지 마소서”(시50:11) 주의 성신의 역사는 ‘내 안에’ 정한 마음을 창조하시고 정직한 영을 새롭게 하심입니다.

(4)성도들 안에 내주하심: “이 구원에 대하여는 너희에게 임할 은혜를 예언하던 선지자들이 연구하고 부지런히 살펴서 ‘자기 속에 계신 그리스도의 영’이 그 받으실 고난과 후에 받으실 영광을 미리 증언하여 누구를 또는 어떠한 때를 지시하는지 상고하니라.”(벧전1:10,11)

(5)구약이나 신약이나 성령으로 거듭나지 아니하면 구원에 이를 수가 없음: “예수께서 이르되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요3:5)

2)구약에서 ‘성령이 임하고 떠난다’는 표현은 직무와 관련된 것입니다(사사, 왕, 제사장, 선지자). 결코 중생과 관련된 표현이 아닙니다. 구약이나 신약이나 성령은 개인과의 관계에 있어서 한번 오시면 떠나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은 성령을 통해 모든 신자 안에 내주하시며 결코 우리를 떠나거나 버리지 않으십니다. “너희는 강하고 담대하라 두려워하지 말라 그들 앞에서 떨지 말라 이는 네 하나님 여호와 그가 너와 함께 가시며 결코 너를 떠나지 아니하시며 버리지 아니하실 것임이라 하고”(신31:6;히13:5)

그러므로 다음의 구절은 위의 맥락에서 이해되어야 할 것입니다.

“...삼손이 잠을 깨며 이르기를 내가 전과 같이 나가서 몸을 떨치리라 하였으나 여호와께서 이미 자기를 떠나신 줄을 알지 못하였더라.”(삿6:20)

* 신약에서의 성령

신약의 전반부와 후반부 구별이 먼저 필요. 전반부(복음서)에서는 성령께서 예수님께 집중되었고 그의 제자들에게는 아직 약속으로, 미래의 선물로 나타나고 있는 반면 후반부(사도행전, 서신서)는 주로 그의 교회와 성도들에게 집중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 둘 사이에는 ‘오순절 사건’(행2장)이 있으므로 이에 대한 바른 이해가 필요합니다.

1)오순절 성령강림사건은 ‘구속 역사의 차원’에서 단회적이며 반복되지 않지만, 선교적인 차원에서 볼 때는 오늘날 계속적으로 적용될 수 있는 요소를 가지고 있습니다(단회성과 계속성을 모두 가지고 있음). 단회성이란 사도시대는 특별계시기로써, 완결된 특별계시로서의 주어진 성경을 가지고 있는 교회시대와는 동일하지 않다는 점을 의미하며, 계속성이란 오늘날도 반복될 수 있다는 의미인데 이는 반드시 오순절 성령강림의 단회성에 비추어서 고려되어져야 하며, 사도시대와 동일한 경험이 동일한 형태로 임한다고 주장은 잘못된 해석입니다.

두 가지가 다 강조되어야 하지만 분명한 순서를 가지고 있습니다. 먼저 구속역사적인 관점에서 단회적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계속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 계속성은 늘 구속역사적인 관점에서 살펴보아야 합니다.

* 성령의 두 가지 사역

1)성령의 특별사역(특별은혜) -우리의 구원과 관계되는 사역

2)성령의 일반적인 사역(일반은총, 보통은혜) -우리의 구원과는 관계없지만 창조에 근거해서 특별히 자연을 통하시든지, 인간의 양심을 통하시든지, 아니면 역사의 진전을 통해서 역사하시는 성령의 사역.

* 성령세례와 성령의 충만

성령세례와 성령의 충만을 잘 구분하지 못해 생기는 적잖은 해프닝들이 우리 주변에 많습니다. 교단의 신학에 따라 차이가 나기도 합니다(비교, 장로교와 순복음)

1)성령세례 -각 개인에게 단회적(반복적이지 않음)으로 임하는 하나님의 주권적 은사로, 이는 곧 중생(거듭남)을 의미합니다. 중생 이후에, 성령세례 이후에 지속적으로 성령의 충만을 받아야 합니다. “우리가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유자나 다 한 ‘성령으로 세례를 받아’ 한 몸이 되었고 또 다 한 성령을 마시게 하셨느니라.”(고12:13)

2)성령의 충만 -믿는 자가 성령의 세례로 구원을 받고 신앙생활을 계속하는 동안에 반복하여 받는 성령의 특별한 은혜입니다. 이는 구원받은 백성의 영적생활에 계속적으로 반복하여 역사하는 은사로써 ‘생활’(성화)과 ‘봉사’의 두 목적을 갖습니다. “술 취하지 말라 이는 방탕한 것이니 오직 성령으로 충만을 받으라.”(엡5:18) -현재시제로 계속적인 의미로서 성령 충만은 매순간 계속되어야 한다는 사실을 보여줍니다.

*쉬어가는 코너 : 술 취함과 성령 충만의 공통점

1. 말수가 는다.

2. 노래를 한다.

3. 자꾸만 권한다.

4. 운다.

5. 용감해진다.

6. 지배당한다.

7. 중독된다.

8. 안주가 필요하다(말씀필요).

9. 냄새를 풍긴다.

10. 아픔을 이기게 된다.

3:23-38 예수님의 족보: 누가는 예수님의 족보를 전 인류의 조상인 아담에게뿐 아니라 하나님에게까지 연결시키고 있는데 이는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시라는 사실을 다시 한 번 강조하며 예수님이 아담의 후손으로서 온 인류와 관련된 자임을 나타내기 위함입니다. 즉 누가는 예수님의 족보를 통하여 예수님이 첫 사람 아담 안에서 죽을 수밖에 없는 운명에 놓인 온 인류를 다시금 살릴 메시야이심(고전15:21,22)이심을 증거 하려 한 것입니다. “그 위는 에노스요 그 위는 셋이요 그 위는 아담이요 그 위는 하나님이시니라.”(눅3:38) /“사망이 한 사람으로 말미암았으니 죽은 자의 부활도 한 사람으로 말미암는도다 아담 안에서 모든 사람이 죽은 것 같이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사람이 삶을 얻으리라.”(고전15:21,22)

4:23 의사야 너 자신을 고쳐라: 의사가 자기 약으로 자기를 고칠 수 있어야 한다는 뜻으로 이는 예수께서 메시야이심을 입증하기 위해서는 가버나움 및 기타 여러 곳에서 행한 일을 여기 나사렛에서도 행해야 한다는 말입니다.

4:24 선지자가 고향에서는 환영을 받는 자가 없느니라: 인간은 언제나 남보다 자신이 더 우월하다고 생각하는 교만증에 걸려 있습니다. 그리하여 남이 자신보다 잘난 면이 있으면 그 사람이 자신과 같거나 못난 면, 아니면 과거 그 사람의 평범한 측면을 자꾸만 들추어내어 자신과 그 사람을 동일시하여 자위하곤 합니다. 과거 엘리야나 엘리사 때의 이스라엘 백성들의 경우처럼(4:23~27), 예수님 당시의 나사렛 사람들의 경우에서 볼 수 있듯 말입니다. 지금 우리는 어떻습니까? 우리 역시 교만증에 걸려 있지는 않습니까?

5:8: 주여 나를 떠나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시몬 베드로는 예수님의 무릎 아래에 엎드려 다음과 같이 고백합니다. “주여 나를 떠나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즉, 자신이 극악한 죄인이라는 사실을 깨닫고 고백하게 된 것입니다. 이는 마치 밝은 빛 가운데로 나아갈수록 내게 뭍은 점과 얼룩이 더 잘 보이는 것과 같이 말입니다. “그때에 내가 말하되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 나는 입술이 부정한 사람이요 나는 입술이 부정한 백성 중에 거주하면서 만군의 여호와이신 왕을 뵈었음이로다 하였더라.”(사6:5)

지금 우리는 어떻습니까? 지금 내가 죄인임을 깨닫고 있습니까? 혹 나 역시 죄인이면서도 나는 의인입네, 건강한 것입네 하면서 자신을 속이고, 또 하나님을 속이려 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만일 우리가 죄가 없다고 말하면 스스로를 속이고 또 진리가 우리 속에 있지 아니할 것이요.”(요일1:8) 아니면 ‘제가 죄인입니다. 저를 불쌍히 여기소서’라는 고백과 함께 그분 앞에 나아가길 힘쓰고 있습니까?

 명심하십시오. 신앙생활의 출발은 자신의 죄인임을 깨닫는 데에서부터 시작된다는 점을 말입니다. “....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눅18:13)

6:17~49 평지수훈(눅)과 산상수훈(막) 대조표

평지수훈(눅)

내 용

산상수훈(마)

6:10~23

팔 복

5:2~12

6:27~36

복수에 대하여

5:38~43

6:37

비판에 대하여

7:1,2

6;38

황금률

7:12

6:39~42

비판에 대하여

7:3~5

6:43~45

열매를 보고 나무를 앎

7:15~20

6:46~49

지혜로운 건축자

7:24~27

11:2~4

주기도문

6:9~13

11:9~13

기도의 원리, 효력

7:7~11

11:33

생명의 빛

5:15

11:34~36

눈은 몸의 등불

6:22,23

12:22~31

염려에 대하여

6:25~33

12:33,34

보화에 대하여

6:19~21

12:58,59

화해의 정신

5:25,26

13:24

좁은 문

7:13,14

13:26,27

하나님의 배척을 당하는 자

7:22,23

14:34,35

세상의 소금

5:13

16:13

하나님과 재물

6:24

16:17

율법의 완성자

5:18,19

16:18

간음

5:32


마태는 비교적 한 곳(마5~7장)에 예수님의 설교를 모아 놓은 것에 비해 누가는 예수님의 말씀을 여러 곳(11:2~4; 12:58,59; 13:26,27; 14:34,35; 16;17)에 분산시켜 놓고 있기 때문에 예수님께서 이 같은 설교를 단 한번 하셨는지 아니면 유사한 내용의 설교를 기회 있을 때마다 반복하셨는지에 대하여는 잘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여러 가지 성경의 정황을 살펴보건대, 예수께서 비슷한 내용의 설교를 여러 차례 진행하신 것으로 보는 편이 무난합니다.

7:2 백부장: 자신의 수하에 100명의 군사를 거느리고 있던 로마의 외인부대 장교. 이들은 로마 정부로부터 하달되는 명령을 수행하며 군대의 기강을 유지시키는 등 군사적인 중추역할을 하였습니다. 이들은 대개가 로마인으로서 식민지 사람들을 잔학하게 다루었는데 본문의 백부장은 매우 특이한 경우로 유대인들을 사랑하며 그들로부터 존경을 받았던 인물이었던 것입니다. “그가 우리 민족을 사랑하고 또한 우리를 위하여 회당을 지었나이다 하니.”(7:5)

한편, 본문에 나오는 백부장은 자신들의 벗들을 보내어 예수께서 자신의 집에 들어오시지 말고 말씀만 하사 자신의 하인을 고쳐주실 것을 요청합니다. “...말씀만 하사 내 하인을 낫게 하소서”(말씀만 하소서 그리하면 내 하인이 낫겠나이다)

어째서 이었습니까? 예수님의 주권의 성격과 전능성 그리고 그에 마땅한 자기의 자세를 잘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즉, “나도 남의 수하에 든 사람이요 내 아래도 병사가 있으니 이더러 가라 하면 가고 오라 하면 오고 내 종더러 이것을 하라 하면 하나이다.”(8절)라는 구절에서 볼 수 있듯, 그는 신적 권위를 가지신 예수님과 인간 자신의 관계가 영적 상하관계에 있음을 인식하는 것과 동시에 이를 모든 사람들 앞에서 시인했던 것입니다. 상관의 명령은 절대적 권위를 가지듯이 예수님의 영적 명령은 절대적 주권이 있으므로 굳이 행동하지 않으셔도 말씀만으로도 일이 이루어질 수 있음을 믿었던 것입니다.

7:36~50: 한 여자가 예수께 향유를 붓다: 예수께서 바리새인 시몬의 집에 계실 때에 한 여인이 나아와 예수님의 발에 향유를 부었는데 이는 예수님께서 베다니 나병환자 시몬의 집에 계실 때 예수님의 머리에 향유를 부은 사건과 다른 사건입니다(마26:6~13; 막14:3~9; 요12:1~8). 즉 이 같은 사건은 예수님의 생애에 두 번 있었던 것입니다.

한편, 본문의 여성이 전통적으로 막달라 마리아를 가리킨다는 견해가 지배적이나 그 근거가 희박합니다. 참고로, 예수님 주변에는 이름이 밝혀지지 않은 여성들이 상당수 있었습니다(마9:20~22; 26:7~13; 막1:31; 눅13:11~13). 이들은 주로 예수님에 의해 병 고침을 받은 자들로, 이들 중 그 이름이 공개된 자들에는 마리아와 마르다 외에도 막달라 마리아, 야고보와 요셉의 어머니 마리아, 세배대의 아들들의 어머니(마27:56), 헤롯의 청지기 구사의 아내 요안나, 수난나(눅8:3), ‘다른 마리아’(마27:61; 26:7~13) 등이 있었습니다. 이들은 자신들의 소유로 예수님과 그분의 제자들을 정성껏 섬겼으며, 또한 예수님께서 골고다 언덕으로 올라가실 때, 그리고 그분이 십자가에 못 박히실 때에도 그분의 곁을 떠나지 않았으며(마27:55; 눅23:27), 안식 후 첫날 예수님의 무덤을 먼저 찾아간 것 역시 제자들이 아닌 여성들이던 것입니다. 또한 이들은 제자들과 함께 마가의 어머니 마리아의 집에 모여 전혀 기도에 힘쓰다가 오순절 성령강림을 체험하기도 했습니다(행1:14; 2:1~4).

8:43 혈루증: 대개 혈관 조직이 약하여 혈관의 틈을 통해 피가 몸 밖으로 나오는 병을 가리키나 여기서는 만성 출혈증으로서 여인의 자궁벽에 종기가 생겨 규칙적 또는 불규칙적으로 피가 흐르는 병을 의미하는 것 같습니다.

한편, (마가의 기록에 의하면) 본문의 이 여인은 자신의 이 같은 병을 고치기 위해 많은 의사들에게 치료를 받았으나 도리어 그 병세가 심해졌으며, 게다가 치료비로 자신의 전 재산을 완전히 탕진해 버렸습니다. 즉, 이 여인은 불치병에 걸려 더 이상 삶에 대한 소망을 가질 수 없던 상태였던 것입니다.

그렇지만 그녀에게도 한 가닥 희망이 생겼습니다. 예수님의 소문을 들었기 때문입니다. 무슨 소문입니까? 어떤 병이든 고치시며, 심지어 죽은 자까지도 다시 살리신다(눅7:11~17)는 소문 말입니다. 어찌하든지 그분의 옷에만 손을 대어도 구원을 얻으리라는 확고한 믿음이 생긴 것입니다. 그 결과 어찌 되었습니까? 손을 대는 즉시 그 병에서 나음을 얻은 것입니다. “예수의 뒤로 와서 그의 옷 가에 손을 대니 혈루증이 즉시 그쳤더라.”(44절)

참고로, 외경인 ‘니고데모 복음서’에 의하면, 이 여인은 예수께서 십자가를 지시고 갈보리로 가실 때(눅23:26~31) 도중에서 손수건으로 예수님의 얼굴의 땀을 닦아 드린 것으로 전해지고 있는데 그녀의 이름은 베로니카(Veronica)였다고 합니다.

9:10~17 오병이어사건: 물고기 두 마리, 보리떡 다섯 개로 장정만 오천 명을 먹이신 이 사건을 가리켜 보통 ‘오병이어의 기적’이라고 부르곤 합니다. 이 기적은 유일하게 마태, 마가, 누가, 요한복음인 사복음서 전체에 등장할 정도로 꽤나 유명했으며 예수님의 대표적인 이적 중 하나로 평가받기에도 손색이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주님은 왜 제자들에게 ‘너희가 먹을 것을 주라’(13절)고 하신 것일까요?

“날이 저물어 가매 열두 사도가 나아와 여짜오되 무리를 보내어 두루 마을과 촌으로 가서 유하며 먹을 것을 얻게 하소서 우리가 있는 여기는 빈들이니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가 먹을 것을 주라 하시니...”(11,12절)

예수님은 자신의 제자들에게 장정만 해도 오천 명이 넘는 이 큰 무리를 먹일 수 있는 능력이나 방법이 있지 못함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습니다. 제자들의 말처럼 날은 이미 저녁때가 되었고, 장소는 아무 것도 없는 황량한 빈들이었으며, 설령 모인 사람들에게 음식을 제공하고자 한다 해도 최소한 200데나리온은 있어야 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도 주님은 왜 제자들에게 그처럼 다소 엉뚱해 보이는 명령을 하신 것일까요? 제자들의 형편과 처지를 누구보다도 잘 아시면서 말입니다. 골탕을 먹이거나 놀려주려 함이었을까요? 아니었습니다. 장담하건데 제가 알고 있는 예수님은 그런 일을 행하실 분이 결코 아닙니다. 그러면 무슨 의도로 그렇게 말씀하신 것일까요?

‘확신에 찬 어조로’ 당당하게 주님은 제자들에게 요구하셨습니다. 동일한 상황 앞에서도 전혀 흔들리거나 요동함 없이 말입니다. 주님은 무엇을 확신하고 계셨던 것일까요? 혹 주님만 아셨던 비밀이라도 있었던 것일까요?

물론 여러 가지가 이유가 있었을 것입니다. 여기서는 구약의 ‘오병이어 사건’이라고 할 수 있는 열왕기하 4장의 사건을 중심으로 그 이유 중 하나를 찾아보도록 하겠습니다.

* 구약의 ‘오병이어 사건’

“한 사람이 바알 살리사에서부터 와서 처음 익은 떡 곧 보리떡 이십과 또 자루에 담은 채소를 하나님의 사람에게 드린지라 그가 이르되 ‘무리에게 주어 먹게 하라’ 그 사환이 이르되 ‘내가 어찌 이것을 백 명에게 주겠나이까’ 하나 엘리사는 또 이르되 ‘무리에게 주어 먹게 하라 여호와의 말씀이 그들이 먹고 남으리라 하셨느니라’ 그가 그들 앞에 주었더니 여호와께서 말씀하신 대로 먹고 남았더라.”(열왕기하 4:42-44)

선지자 엘리사는 그 땅에 흉년이 창궐하던 때에, 스무 개의 보리떡과 자루에 담은 채소로 100명을 먹이는 이적을 베풀었습니다. 이는 예수님께서 뱃세다에서 행하신 오병이어의 이적과 매우 유사합니다. 예수님께서도 구약의 이 사건을 잘 알고 계셨을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안식일마다 회당에 모여서 구약 성경 두루마리들을 낭독하고 또 들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뿐만 아니라 제자들도 이 사건을 분명 들어 알고 있었을 것입니다. 뱃세다 빈들에 병들고 가난하고 주린 사람들이 몰려왔을 때, 아마도 주님은 제일 먼저 열왕기하 4장의 사건을 떠올리셨을 것이며, 자신의 제자들 또한 깨닫기 원했을 것입니다. 구약의 이 사건은 예수님이 장차 베푸실 ‘오병이어의 사건’의 예표적인 성격이 뚜렷하고 강하기 때문입니다.

오병이어의 사건과 마찬가지로, 본문에서도 하나님의 기적은 작은 희생과 헌신으로부터 비롯되었습니다. 오병이어 사건에서 한 소년이 자신의 도시락을 바쳤듯이, 본문에서도 바알 살리사에서 살던 한 사람이 흉년이 들어 극심한 어려움을 겪고 있는 중에도 자신의 첫 열매를 하나님의 사람 엘리사에게 가져왔던 것입니다. 아마도 그는 흉년의 어려움 속에서도 보리와 채소를 조금이나마 수확하게 해주신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고자 엘리사에게 가져온 것 같습니다.

“엘리사가 다시 길갈에 이르니 그 땅에 흉년이 들었는데 선지자의 제자들이 엘리사의 앞에 앉은지라 .......”(열왕기하 4:38)

엘리사는 ‘보리떡 스무 개, 자루에 담은 채소’를 받자마자 그 사환을 통해 자기 앞에 앉아 있던 100여명의 ‘선지자 후보생들’에게 나눠주라고 했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엘리사는 그 상황에서 무엇을 생각하고 있었던 것일까요? 그 사환은, 예수님의 제자들의 경우처럼, 이런 엘리사의 말이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았습니다. 도통 납득이 되지 않았습니다. 어려분이라면 그 상황에서 어떻게 했을 것 같습니까?

“그 사환이 이르되 내가 어찌 이것을 백 명에게 주겠나이까?”

이 말은 이런 뜻입니다. “도대체 이 상황에서 어쩌라구요?”, “이것을 가지고 누구 입에 풀칠하라는 거죠?” 분명 엘리사에게는 그 사환이 알지 못하는 무엇인가가 있었습니다. 어디엔가 분명히 믿는 구석이 있었을 것입니다. 괜히 실언할 사람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도대체 엘리사는 그때 그 자리에서 무엇을 생각하고 있었던 것일까요?

* 무리가 먹고 남으리라

“엘리사는 또 이르되 무리에게 주어 먹게 하라 여호와의 말씀이 그들이 먹고 남으리라 하셨느니라.”(열왕기하 4:43하)

옳거니, 바로 이것이었군요. 엘리사는 이런 말씀을 들었던 것이군요. 엘리사는 바알살리사 사람이 첫 열매를 가져왔을 때, 그 순간에 하나님으로부터 다음과 같은 내용의 음성을 들었던 것입니다.

‘무리가 다 배부르게 먹고 남을 것이다. 무리에게 주어서 먹게 하렴. 내가 저 사람의 마음을 감동시켜서 이것을 가져오게 하였단다. 이것은 고작 보리떡 스무 개와 채소 한 자루에 불과하지만, 나는 이것들을 통해 능히 나의 차고 넘치는 하나님의 은혜를 너와 네 사람들에게 이번 기회에 알려주고 싶구나.’

엘리사는 사환이 듣지 못한 여호와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던 것입니다. 그 말씀대로 100여명의 사람들에게 일일이 나눠주었더니, 이게 웬일입니까? 자루에서 아무리 꺼내고 꺼내도 보리떡과 채소들이 없어지지 않았습니다. 사환은 두 눈이 휘둥그레졌고 그 입이 다물어지지 않았습니다.

“그가 그들 앞에 주었더니 여호와께서 말씀하신 대로 먹고 남았더라.”(열왕기하4:44)

뱃세다 광야의 예수님께서도 동일한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음이 분명합니다. “무리에게 주어 먹게 하라 무리가 먹고 남으리라” 비록 4복음서 그 어디에도 이런 말씀이 기록되어 있지 않지만 말입니다. 예수님은 분명히 이 가운데에 ‘바알 살리사의 사람처럼’ 그 누군가가 하나님께 무엇인가를 바칠 것을 아셨을 것입니다. 엘리사의 경우처럼 말입니다.

“이르시되 너희에게 떡 몇 개나 있는지 가서 보라 하시니 알아보고 이르되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가 있더이다 하거늘”(마가복음 6:38)

이 자리에서 예수님께서 ‘엘리사의 이적’을 떠올리셨을 것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들도 이 상황에서 구약 성경을 떠올려야만 했습니다. 유대인들은 회당에 안식일마다 보여서 구약 성경을 듣고 또 들었던 민족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너희가 먹을 것을 주어라”고 하셨을 때, 제자들은 눈치를 채었어야 했습니다. 예수님은 이 상황에서 제자들에게 무엇을 알리고 싶으셨을까요? 아마도 주님은 “내가 엘리사보다 더 큰 존재”라는 것을 말씀하고 싶었는지도 모릅니다. 엘리사는 훨씬 더 많은 보리떡 스무 개로 고작 일백 명을 먹이는데 그쳤지만, 예수님께서는 보리떡 다섯 개로 여자와 아이 외에 남자 오천 명을 먹이실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한 가난한 소년의 희생과 헌신을 통해 아주 큰일을 행하셨습니다. 가난한 가정의 한 소년이 꾸려온 도시락이 얼마나 볼품없고 초라했겠습니까? 그러나 우리 주님은 언제나 그런 사람이 드리는 희생과 헌신을 주목하십니다. 이를 통해 큰일을 행하는 것을 더욱 즐거워하시는 분입니다. 당신은 가난한 사람입니까? 당신은 초라한 사람입니까? 믿음을 가지십시오. 그리고 작지만 소중한 그것을 주님께 드리십시오. 주님이 원하실 그 때에.......

* 차고 넘치는 은혜

오병이어와 엘리사의 이적의 공통점은 무엇입니까? 차고 넘치는 하나님의 은혜가 잘 나타나 있다는 점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목적도 바로 ‘이 풍성하신 하나님의 은혜를 나타내시기 위함’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요한복음 10:10).

그러나 간과하지 말아야 할 것이 하나 있는데, 이는 매번 이런 기적이 일어나지 않았다는 점입니다. 언제 일어났습니까? ‘먹고 남으리라’는 하나님의 말씀이 있을 때였습니다. 하나님의 차고 넘치는 은혜는 하나님께서 ‘먹고 남으리라’고 말씀하실 때에 그렇게 될 줄로 믿습니다. 주님의 말씀을 먼저 들으십시오. 그런 다음에 행동으로 옮기십시오. 하나님의 말씀을 정확히 듣지 않은 채 경솔하게 행동하거나 판단해서는 안 되기 때문입니다. 항상 하나님의 차고 넘치는 은혜가 여러분의 삶과 가정, 크고 작은 공동체 위에 늘 함께 하시기를 기도합니다.

9:51~56: 성질 급한 야고보와 요한: 이 두 사람은 사마리아의 한 마을 사람들이 예수께서 예루살렘을 향해 가시는 이유 때문에 영접하지 않는 것을 화를 내며 예수님께 이런 말씀을 드립니다. “...주여 우리가 불을 명하여 하늘로부터 내려 저들을 멸하라 하기를 원하시나이까.”(54절) 물론 예수님의 꾸중으로 일단락되지만 말입니다.

한편, 야고보와 요한은 보아너게, 즉 ‘우뢰의 아들’(막3:17)이라는 별명을 받았는데 그 까닭은 본 절에서 볼 수 있듯 그들의 성격이 매우 급하였기 때문입니다.

10:1 70인의 전도대 : 이는 오직 본서에만 나오는 내용으로, 예수께서 사도들이 아닌 일반 제자들 중에서 70인의 전도자를 따로 세워 파송하신 기사입니다. 한편,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70이란 숫자는 세계 열국을 상징하는 것인데, 예수께서 이처럼 70인의 전도자를 세우셨다는 것은 복음이 전 세계를 위한 것이며 또한 전 세계에 전파되어야 한다는 의미를 지닌다 할 수 있겠습니다. 또한 두 사람을 한 개조로 보내신 것은 어려움에 부딪칠 때 서로를 격려하며 힘을 합하여 난국을 타하고 복음을 보다 힘 있게 증거 하도록 하기 위한 배려로 보입니다.

10:18 사탄이 하늘로부터 번개 같이 떨어지는 것을 내가 보았노라 : 사14:4~21을 인용한 이 말은 70인 전도대가 귀신들을 쫓아낸 결과 사단의 권세가 무너져 내리고 있는 것을 가리킵니다. 즉, 사단의 권세가 무너지는 것은 상대적으로 하나님의 나라가 흥왕하게 되는 것을 의미하며 이러한 사역은 하나님의 백성들의 복음 전파를 통해 점차 전진되다가 마침내 그리스도의 재림으로 완성될 것입니다.

11:1~4 주기도문(Lords` Prayer) : 예수님은 각기 다른 상황에서 주기도문을 재차 반복하여 가르쳐 주셨으며, 또한 이로 인해 다음과 같은 다소의 차이점이 발생하게 된 것입니다.

누가복음(11장)

마태복음(6장)

2절

아버지여

9절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2절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9절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2절

나라이 임하옵시며

10절

나라이 임하옵시며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

3절

우리에게 날마다 일용할 양식을 주시옵고

11절

오늘날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고

4절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모든 사람을 용서하오니 우리 죄도 사하여 주옵시고

12절

오늘날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

4절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옵소서

13절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옵시고 다만 악에서 구하옵소서

 

 

13절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아버지께 영원히 있사옵니이다 아멘)


13:10~17: 안식일과 주일의 차이

안 식 일

주 일

현대력으로 토요일

현대력으로 주일

한주간의 마지막 날

한 주간의 첫 날

날이 저물면서 시작

동이 트면서 시작

하나님의 천지창조에서 기원

그리스도의 부활에서 기원

하나님, 인간, 피조물이 안식하고 예배를 온전히 드리기 위함

그리스도의 부활로 말미암은 구원 완성을 선포하고 기념하기 위함.


14:2 수종병(dropsy): 이 병은 신체의 세포조직이나 각종 강막(腔膜)에 혈장액이 비정상적으로 축적도니 상태를 가리키는데 대개 심장에 결함이 있거나 신장이 병들었을 때 발생합니다. 이병에 걸린 사람은 얼굴이 부어오르며 팔과 다리도 크게 부풀어 올라 살갗이 물러지는 증상을 보이게 됩니다.

14:15~24 큰 잔치 비유: 마태복음 22장 1~14절에 나오는 ‘혼인잔치 비유’와 유사하나 그 세부 내용에 있어선 차이점이 있습니다.

큰 잔치 비유(눅14:15~24)

구분

혼인 잔치 비유(마22:1~14)

어떤 사람

16절

잔치를 배설한 자

어떤 임금

2절

큰 잔치

16절

잔치의 이름

혼인 잔치

2절

한번

17절

초청 회수

두번

3,4절

18절

거절한 양상

5절

19절

상업

5절

장가

20절

종들을 능욕, 살해

6절

없음

 

그에 대한 보응

군대를 보내 진멸

7절

없음

 

기타

예복에 대한 언급

11~13절


한편, ‘혼인잔치 비유’가 하나님께로부터 청함을 받은 자는 많되 택함을 입은 자는 적다는 데에, ‘큰 잔치 비유’는 하나님의 초청을 거절하는 것이 얼마나 심각한 결과를 야기 시키게 되는가에(24절) 각각 강조점에서 차이를 보이고 있는 것 등을 통해 이 두 비유가 서로 다른 역사적 상황에서 주어진 별개의 비유임을 알 수 있습니다.

15:1~32 ‘1/100, 1/10, 1/2 비유’: 예수님은 세리 및 죄인들과 사귀는 것에 대하여 유대 종교 지도자들이 비난하자 잃은 양 비유(15:3~7), 잃은 드라크마 비유(15:8~10), 탕자 비유(15:11~32), 즉 일명 ‘1/100, 1/10, 1/2 비유’를 주심으로써, 하나님은 죄인 하나가 회개하고 돌아오면 크게 기뻐하시다는 사실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한편, 본장에서는 잃어버린 바 된 것의 가치가 점점 더 상승되고 있는데(양→드라크마→아들) 이는 죄인 하나가 회개하고 하나님께로 돌아오는 것이 얼마나 귀하고 기뻐해야 할 일인가를 강조해 주고 있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15:4~6 목자와 그 잃어버린 양 : 팔레스타인에서 목초지는 아주 귀할 뿐만 아니라 그 중 대부분이 팔레스타인 남북을 잇는 중앙 고원지대에 형성되어 있고, 또한 그 고지는 해발 평균이 500미터나 되기 때문에, 일단 양이 목자를 떠나 길을 잃어버리기라도 하면 사고를 당하기 다반사입니다. 그러므로 팔레스타인에서는 대개 서너 명의 목자가 한 조를 이루어 마을 공동 소유의 양들을 치는 방식을 택하는데, 만일 양 떼를 이탈해 돌아오지 않는 양이 있으면 여러 목자들 중 한 명이 끝까지 양을 찾아 그 시체라도 가져오도록 되어 있습니다. 따라서 양을 찾아 길을 떠난 목자가 있으면 마을 사람들은 그가 무사히 돌아오기를 학수고대하는데 이때 목자가 잃어버렸던 양과 함께 돌아오면 모두가 크게 기뻐하곤 했다고 합니다. 본 비유는 바로 이와 같은 유대인들의 목양 양식을 소재로 하여 주신 것입니다.

15:8~10 열 드라크마 : 유대 여인들에게 있어서 열 드라크마는 결혼반지에 해당하는 것입니다. 즉, 유대인 사회에선 남자가 여자를 아내로 맞이할 때 사랑의 증표로 드라크마 열 닢을 줄에 꾀어 주는데, 여인은 그것으로 자신의 머리를 장식했던 것입니다. 따라서 이것을 잃어버렸다가 다시 찾았다는 것은 자신의 목숨과도 같은 것을 찾은 의미를 지닐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16:9 불의의 재물 : 여기서 세상 재물을 불의의 재물로 표현하고 있는 이유는 재물 자체가 불의하기 때문이라기보다는 11절에 나오는 ‘참된 것’, 즉 영원히 없어지지 아니할 하늘의 참된 보화와 대조시키기 위함입니다. 따라서 ‘불의의 재물로 친구를 사귀라’는 말을 오해하시는 일이 없기를 바랍니다.

16:22~26 사후 중간기 상태(낙원과 음부) : 본문은 인간이 죽은 후 부활을 맞이할 때(고전15:50~58; 살전4:13~18)까지의 중간 상태에 관해 간접적이나마 언급하고 있는 부분입니다. 물론 이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이견들이 있지만 개신교 학자들은 대개 사후의 중간 상태를 인정하고 있습니다.

한편, 우리는 26절을 통해 다음과 같은 사실들을 알 수 있습니다. 이 땅에서는 회개할 기회가 있지만 죽고 나면 더 이상 그 같은 기회가 없으며, 또 죽음에 의해 결정된 각자의 처소는 어느 누구의 권세와 능력으로도 변경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천주교의 연옥교리는 비성경적이며 잘못된 것입니다.

인간이 죽은 후 세상 마지막 날 흰 보좌 심판을 통해 영원한 축복과 영원한 형벌을 선고받기까지 일단 머무는 처소에 대하여 성경은 결정적인 확증을 주고 있지 않습니다. 다만 다음과 같은 점들은 성경을 통해 확인할 수 있습니다.

(1)최종적인 심판은 인간 사후 즉시 개별적으로 행해지는 것이 아닌 오직 세상 마지막 날 흰 보좌 앞에서 공식적으로 행해진다.

(2)영생과 영벌의 장소는 오직 세상 종말 뒤에 새로이 도래할 새 하늘과 새 땅의 천국과 지옥밖에 없다.

(3)일단 생명이 끝나면 더 이상 최후 심판에 영향을 끼칠 회개와 범죄가 없다.

(4)육체적인 죽음을 통해 일단 영과 육이 분리되며 영은 각기 중간기 초소로 가나 육은 완전히 부패하여 흙으로 돌아간다. 그리고 성도는 부활 시에 새 육체를 갖게 된다.

(5)사후에 육(육체)은 무덤에서 부패하나 영(영혼)은 각각 새 하늘과 새 땅의 천국과 지옥의 중간기적 상태인 '낙원'과 '음부'로 돌아간다고 본다.

(6)성도들의 영은 낙원에, 불신자들의 영혼은 음부에 가는데 낙원은 이 세상에 비해 비할 데 없이 즐거운 곳이고, 음부도 이 세상에 비하면 분명히 고통이 있는 곳이나 장차 도래할 완전한 천국과 지옥에 비하면 그야말로 그림자에 불과하다.

(7)죽음 이후 인간은 각기 처소에서 즐거움 혹은 고통을 느낄 수 있는 의식을 가지고 있다.

18:1 항상 기도하되 낙심치 말자! : 오랫동안 기도 했는데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응답이 없을 때(엄밀하게 말하자면, 그 응답이 없는 것처럼 보일 때) 낙심한 채 기도를 중단하고 하나님을 원망하곤 합니다. 그러나 이는 하나님의 섭리와 경륜을 이해하지 못한 그릇된 태도에서 비롯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반드시 우리의 간구에 응답하시되, 적절한 때를 좇아, 최상의 기회에, 최상의 것으로 응답하십니다(11:9~13). 따라서 우리는 이 같은 사실을 깨닫고 자신의 간구에 대하여 하나님께서 응답하시는 경륜의 때를 기다릴 줄 아는 지혜로운 성도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하물며 하나님께서 그 밤낮 부르짖는 택하신 자들의 원한을 풀어 주지 아니하시겠느냐 그들에게 오래 참으시겠느냐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속히 그 원한을 풀어 주시리라 그러나 인자가 올 때에 세상에서 믿음을 보겠느냐 하시니라.”(7,8절)

19:41 예루살렘 성을 보시고 우신 예수님 : 예수님은 예루살렘 성을 보시고 우셨는데 이는 사복음서 기자 중 오직 누가만의 독특한 강조점입니다. 이는 예수님께서 일전에 예루살렘을 위해 한탄하셨던 장면(13:34,35)과 유사한데 그분께서 우신 까닭은 주후 70년에 있을 로마 황제 디도의 예루살렘 함락 사건을 미리 예견하셨기 때문이었습니다(43, 44절).

한편, 예수께서 이 세상에 계시는 동안 눈물을 흘리시며 애통해 하신 경우는 이것 말고도 두 차례 더 있는데 곧 나사로의 죽음을 동정하여 눈물을 흘리셨던 것(요11:35)과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실 때(마26:36~39) ‘심한 통곡과 눈물로 간구와 소원을 올렸던’(히5:7) 경우입니다.

“이르시되 그를 어디 두었느냐 이르되 주여 와서 보옵소서 하니 예수께서 눈물을 흘리시더라.”(요11:34,35) /“그는 육체에 계실 때에 자기를 죽음에서 능히 구원하실 이에게 심한 통곡과 눈물로 간구와 소원을 올렸고 그의 경건하심으로 말미암아 들으심을 얻었느니라.”(히5:7)

20:37,38 산자의 하나님 :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자신을 소개하시면서 주신 말씀은(출3:6) 곧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요 이삭의 하나님이요 야곱의 하나님’인데 여기서 우리는 현재형으로 말씀하신 점에 유의해야 할 것입니다. 즉 이는 아브라함, 이삭, 야곱 등이 비록 몸은 죽었으나 그 영혼은 지금도 살아 있어 이 세상 마지막 날에 하나님의 능력에 의해 다시금 부활할 것을 의미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에게는 모든 사람이 살았느니라.”(38절 하) ‘하나님은 죽은 자의 하나님이 아니요 살아 있는 자의 하나님이시라’는 대목 역시 바로 이러한 맥락에서 이유될 수 있을 것입니다.

23:26~38 슬픔의 길(Via Dolorosa) : 이는 예수께서 자신의 십자가를 지시고서 겟세마네 동산에까지 이르신 ‘슬픔의 길’(26~33절)과 예수님에 대한 뭇사람들의 희롱(34~38절)에 대한 내용을 언급하고 있습니다.

23:38 유대인의 왕이라 쓴 패 : 요한의 기록에 의하면 이 같은 죄패는 히브리어와 로마어(라틴어), 헬라어로 기록되었음을 알 수 있는데(요19:20) 이처럼 빌라도가 다양한 언어로 예수님의 죄명을 기록한 까닭(요19:19)은 뭇사람들이 이를 보고서 예수님을 조소할 수 있게끔 하려는 의도에서였지만, 이와는 달리 이 죄패는 곧 그분의 왕권이 전 세계적이며 우주적인 것이며, 또한 장차 온 세계에 전파되어 뭇사람들의 심령을 지배하게 될 것 등과 같은 의미를 사람들에게 일깨워 주는 동시에 복음의 확산이라는 결과를 낳게 되었던 것입니다.

24:13~35 두 제자 : 이들은 예수님의 열두 사도가 아닌 다른 제자들로, 그중 한 사람은 ‘글로바’(13절)이며, (유대 전승에 의하면) 나머지 한 사람은 시몬이라고 전해지고 있습니다. 글로바는 ‘명성의 아버지’라는 뜻으로 혹자는 예수님의 십자가 수난을 목격했던 여인 중 하나인 마리아의 남편(요19:25)과 동일 인물일 것으로 추정하기도 합니다. 그리고 유대 전승에 의하면 글로바와 동행하였던 또 한 사람의 제자 이름은 시몬이었으며 그는 예수님의 의해 전도 파송되었던 70인의 전도자 중 한 명이었다고 합니다.

 

 

성탄의 주인공이 되세요(2:11)

* 첫 번째 성탄의 주인공들

 성탄의 주인공은 누구일까요? 물론 산타나 루돌프가 아닌 우리를 구하러 이 땅에 오신 아기 예수님일 것입니다. 아기 예수님뿐만 아니라 그분의 탄생을 함께 기뻐하고 축하했던 사람들 역시 성탄의 주인공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첫 번째 성탄의 주인공들은 마리아와 요셉 외에 또 누가 있었을까요? 동방에서 그의 별을 보고 경배하러 왔던 박사들, 밖에서 자기 양떼를 지키다가 천사들이 전하여 준 기쁜 소식을 듣고 한 걸음에 달려온 목자들일 것입니다. 첫 번째 성탄의 주인공들은 우리 주님의 성탄을 어떻게 축하했을까요? 지금의 우리 모습과는 무엇이 같고 무엇이 다를까요? 이천년 전 그들의 모습을 통해 참된 성탄의 의미를 다시 한 번 새겨 보는 시간이 되었으면 합니다.

* 찬양으로 영광 돌렸습니다.

 “홀연히 수많은 천군이 그 천사들과 함께 하나님을 찬송하여 이르되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하나님이 기뻐하신 사람들 중에 평화로다 하니라.”(눅2:13,14)

 수많은 천군과 천사들은 함께 하나님을 찬송했습니다. 어떤 내용이었습니까? 한 마디로 요약하자면, ‘하늘엔 영광이요 땅에는 평화’이었습니다. 성탄의 성격을 이처럼 분명하게 드러내는 노랫말도 또 없을 것입니다. 우리는 어떻습니까? 어떻게 하나님을 찬양하실 작정입니까?

 “천사가 이르되 무서워하지 말라 보라 내가 온 백성에게 미칠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을 너희에게 전하노라 오늘 다윗의 동네에 너희를 위하여 구주가 나셨으니 곧 그리스도 주시니라 너희가 가서 강보에 싸여 구유에 뉘어 있는 아기를 보리니 이것이 너희에게 표적이니라 하니.”(눅2:10~12)

 또 천사들은 이 기쁜 소식을 사람들에게 전했습니다. 오늘 우리는 이 성탄의 기쁨을 누구와 나누시렵니까?

* 합당한 예배와 예물을 드렸습니다.

 “(동방 박사들이) 집에 들어가 아기와 그의 어머니 마리아가 함께 있는 것을 보고 엎드려 아기께 경배하고 보배합을 열어 황금과 유향과 몰약을 예물로 드리니라.”(마2:11)

 동방 박사들은 먼 길을 마다하지 않고 달려와 아기 예수께 엎드려 경배했습니다. 다시 말하면 예배했다는 말입니다. ‘크리스마스’(Christmas)는 ‘그리스도’(Chirst)와 ‘미사’(Mas)의 합성어로 ‘그리스도의 날’ 또는 ‘그리스도의 미사’를 의미합니다(X-mas는 X 가 헬라어로 그리스도를 뜻하는 헬라어 글자이기 때문에 줄여서 X-mas라고 하는 것이며, 노엘이라는 말은 불어로 성탄을 의미함). 그러므로 우리가 성탄절에 제일 우선시해야 하는 것은 바로 ‘예배드리는 행위’일 것입니다. 우리는 어떠합니까?

 또 성탄절은 부모가 아이들에게 선물을 주는 날로 흔히 인식되어 왔으나, 엄밀히 말하자면 부모와 자녀 모두 아기 예수께 예물을 드리는 날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동방 박사들은 황금과 유향과 몰약 등 최선을 다해서 그 예물을 준비했습니다. 예물을 준비하되 분명한 의미를 가지고 그리했습니다. 우리는 이번 성탄선물로 무엇을 준비하고 있습니까? 반드시 물질이어야한다고는 생각하지 마십시오. 작은 크리스마스카드 하나, 간단한 엽서 하나 옆에 있는 지체들에게 써보지 않으시렵니까?

 “...너희가 여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마25:40하)

* 성탄의 주인공이 되어주세요.

 2천 년 전 예수님은 낮고 천한 데로 임하셨습니다. 아기 예수님의 탄생, 즉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을 기념하는 날이 바로 ‘성탄절’이기 때문입니다. ‘성탄’은 역사상 단 한 번 밖에 없는 단회적인 사건임이 분명하지만 어떤 의미에선 현재까지도 진행 중인 ‘연속적인 사건’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무엇 때문입니까? 예수님을 내 마음 가장 깊숙한 곳에 모시지 않겠습니까? 우리 가운데 아직 예수 그리스도를 나의 주 나의 하나님으로 영접하지 않은 사람들이 있다면, 지금 이 순간 그 분을 영접하시기 바랍니다. 그러할 때에라야 비로소 성탄이 나에게 참된 의미를 갖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번 성탄의 주인공이 바로 여러분이길 축원합니다. 할렐루야

 “볼지어다 내가 문 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와 더불어 먹고 그는 나로 더불어 먹으리라.”(계3:20)

 

 

보기 전에는 죽지 아니하리라(2:22~35)

 시므온이라는 의롭고 경건하여 이스라엘의 위로를 기다리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는 한때 아주 특별한 지시를 받은 적이 있는데 그것은 바로 '주의 그리스도를 보기 전에는 죽지 아니하리라'는 내용이었습니다. 곧 메시야를 보게 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의 생이 다 끝나기 전에 그리스도를 볼 수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본문의 ‘이스라엘의 위로’란 이스라엘뿐만 아니라 온 세상을 구원하실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가 오실 것을 의미할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는 성령의 지시하심에 민감하게 반응하며 살아가고 있습니까? 성령의 인도에 따라서 살아가고 있습니까?

 본문에서 시므온은 그토록 기다려온 메시야를 만날 수 있었는데 이는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임과 동시에 매일매일 성령님과 동행하며 살아온 결과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도 그 날이 오늘이라는 것과 그 곳이 예루살렘 성전이라는 것을 생각지 못했을 것입니다. 또 그토록 기다려온 주의 그리스도가 ‘품안의 한 아이’이라고는 도무지 예상치 못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시므온은 성령의 감동으로 성전에 들어가 ‘주의 그리스도를 보기 전에는 죽지 아니하리라’는 약속대로 아기 예수를 만났고 하나님만을 마음껏 찬양할 수 있었습니다.

 “성령의 감동으로 성전에 들어가매 마침 부모가 율법의 관례대로 행하고자 하여 그 아기 예수를 데리고 오는지라 시므온이 아기를 안고 하나님을 찬송하여 이르되 주재여 이제는 말씀하신 대로 종을 평안히 놓아 주시는도다 내 눈이 주의 구원을 보았사오니 이는 만민 앞에 예비하신 것이요 이방을 비추는 빛이요 주의 백성 이스라엘의 영광이니이다 하니.”(눅2:27-32)

당일 성령님은 아마도 다음과 같이 시므온에게 말씀해주셨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너는 성전에 가서 한 아기를 보리니 이것이 너에게 표적이니라’

 시므온은 평생 메시야 보기를 간절히 사모해오다가 ‘죽기 전에 메시야 볼 것’을 약속받았고 오늘 그 꿈을 이루게 된 것입니다. 얼마나 복된 사람입니까? 이처럼 간절히 사모하는 자에게 주님을 만날 수 있습니다. 간절히 사모하는 자가 그 꿈을 이룰 수 있습니다.

 “나를 사랑하는 자들이 나의 사랑을 입으며 나를 간절히 찾는 자가 나를 만날 것이니라.”(잠8:17)

* ~하기 전에는 죽지 아니하리라

 시므온의 경우처럼 우리가 메시야를 직접 목도할 수는 없겠지만, 우리가 시므온처럼 간절히 사모하기만 한다면 그 보다도 더 큰 일들을 목도하게 될지도 모르겠습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내가 너를 무화과나무 아래에서 보았다 하므로 믿느냐 이보다 더 큰 일을 보리라.”(요1:50)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나를 믿는 자는 내가 하는 일을 그도 할 것이요 또한 그보다 큰일도 하리니 이는 내가 아버지께로 감이라.”(요14:12)

 어쩌면 성령께서 우리에게 다음과 같이 약속하실 수도 있습니다. ‘~하기 전에는 네가 죽지 아니하리라.’ ‘~이 이루어지는 것을 보기 전까지는 네가 결코 죽지 아니하리라’ 그러므로 우리는 언젠가 시므온과 같은 고백을 동일하게 하게 될 것이 분명합니다.

 ‘주재여, 이제는 말씀하신 대로 종을 평안히 놓아주시는도다.’

 '주재'란 전체를 통괄하며 일을 처리하는 분을 의미합니다. 성경에는 '창조자'를 가리키는 용어로 한정해서 사용하고 있습니다. 시므온의 삶에서 하나님은 '주재'이셨던 것입니다. 그의 전 생애를 통괄하시며 진행시켜 오셨던 것입니다. 그러기에 그의 죽음까지도 하나님의 손에 달려 있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주재'이시기도 합니다. 주재되신 그분은 우리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이 일을 하기 전에는, 이 일을 보기 전에는 죽지 아니하리라’

 주께서 허락하신다면, 어떤 분은 분열된 한반도의 통일을 보기 전에 죽지 않을 수 있을 것입니다. 주께서 허락하신다면, 다시 오실 주님의 재림을 볼 수도 있을 것입니다. 또 주께서 허락하신다면, 여러분은 여러분이 지금 뿌리고 있는 사역들의 결과를 보게 될 것입니다.

지금 성령은 여러분에게 무엇을 지시하십니까?

 그 일이 끝날 때 비로소 하나님은 우리를 평안히 놓아 주실 것이므로, 그때까지 우리에게 많은 수고와 굶주림, 자지 못함, 핍박, 오해와 정죄, 여러 가지 역경과 환란 등은 쉬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너무 상심하거나 낙심하지 마십시오. 주께서 때마다 일마다 돕는 은혜로 우리를 도우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물론 오해는 하지 마십시오. 어떤 사람이 어떤 특정한 일을 시작하였다고 해서 꼭 그가 그 일의 열매를 걷어야 한다는 말은 결코 아닙니다. 그 사람이 거두지 못한 열매를 다음 사람이 걷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제가 말하고 싶은 것은 그 사람에게 지우신 그 분량만큼은 반드시 그를 통해서 이루시고야 만다는 것을 말하고 싶은 것입니다.

 우리는 그 일이 언제 어디에서 어떤 방법으로 이루어질 것인지에 대해서 분명히 알 수가 없습니다. 단지 성령의 인도하심대로 날마다 걸어갈 뿐입니다. 매일 성령이 지시하시는 대로 말입니다. 오늘이 바로 그날인지 모릅니다. 지금 이 순간 성령께서 지시하는 대로 움직이십시오.

 

 

누굴 따라가고 있습니까?(6:39)

* 성급한 신호 하나에....

 “아프리카에서는 해마다 수만 마리의 물소 떼가 목숨을 건 질주의 대이동을 연출한다. 비가 내리지 않는 건기가 닥쳐오면 물소 떼는 물을 찾아 수천km를 쉬지 않고 내달린다 ...<중략>... 어느 때인가 수천 킬로미터 앞두고 대형 참사를 당한 적이 있었다. 물 냄새를 맡은 리더가 따라오는 무리를 향해 앞으로 물이 있는 곳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신호를 본능적으로 보낸 것이다. 그러자 이제까지 묵묵히 리더를 따라오던 물소 때가 순간적으로 흥분하며 동요하기 시작했다. 먼저 물을 먹으려는 충동으로 질서와 페이스는 무너지고 뒤에 있던 물소들이 앞에 뛰는 물소들을 추월하며 파행이 일어난다. 넘어지는 물소 위에 그 물소를 밟고 뛰어넘다 다시 넘어지는 물소들로 아비규환이 된다. 결국 강까지 무사히 도달한 물소의 수는 처음 출발할 때의 절반도 안 된다.” -백지연의 <뜨거운 침묵> 중에서 -

 이 같은 대형 참사의 원인은 무엇이었습니까? 리더의 성급한 신호 하나 때문입니다. 즉, 물 냄새를 맡은 우두머리가 따라오는 무리를 향해 앞으로 물이 있는 곳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신호를 본능적으로 보냈기 때문입니다.

 사실 이 아프리카물소(Syncerus caffer)는 아프리카들소, 아프리카버팔로, 버팔로 등으로 불리는데 어깨높이 1.5~1.8m에 500~800kg에 이르는 거구로, 800마리가 넘는 큰 떼를 지어 다니며, 자그마치 시속 50km이 넘는 무서운 속도로 내달립니다.

 이와 같은 거구들이 갑자기 뒤엉키면 어찌 되겠습니까? 불 보듯 훤할 것입니다. 지금 우리는 어떻습니까? 누굴 따라가고 있습니까? 누구와 함께 달리고 있느냔 말입니다. 혹 지금 광란의 질주를 하고 있지 않습니까? 멈추고 싶어도 도저히 멈출 수 없는 그런 질주 말입니다.

* 누굴 따라가고 있습니까?

 “또 비유로 말씀하시되 맹인이 맹인을 인도할 수 있느냐 둘이 다 구덩이에 빠져지지 아니하겠느냐.”(눅6:39)

빨리 달리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무엇 말입니까? 올바른 방향을 향해 나아가는 것입니다. 어째서입니까? 전혀 엉뚱한 곳으로 달리고 있다면, 제아무리 빨리 달린들, 아무런 소용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 뿐만이 아닙니다. 자칫 길이라도 잘못 들어섰다간 모두가 다함께 추락할 수도 있습니다.

 지금 우리는 어떻습니까? 누굴 따라가고 있습니까? 누구와 함께 달리고 있느냔 말입니다. 명심하십시오. 어떤 리더를 만나느냐에 따라 인생의 승패가 좌우될 수 있다는 점을 말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언급하고 있는 바와 같이. “또 비유로 말씀하시되 맹인이 맹인을 인도할 수 있느냐....”(39절 상)

 한편, 여기서 전자는 누굴 가리킵니까? 맹인된 인도자입니다. “화 있을진저 눈 먼 인도자여... 어리석은 맹인들이여... 맹인들이여....”(마23:15,17,19) 후자는 또한 누구를 의미합니까? 역시 영적 맹인인 우리입니다. 성경은 말합니다. 사람들은 누구나 남녀노소, 지휘고하를 막론하고 다 영적 맹인들이라고 말입니다.

 영적 맹인된 우리에게 진정 필요한 이는 누구입니까? 맹인된 인도자입니까? 능히 우리의 모든 것을 밝히 아시고 또한 그 정로(正路)로 인도하시는 하나님이십니까? “주께서 너희에게 환난의 떡과 고생의 물을 주시나 네 스승은 다시 숨기지 아니하시리니 네 눈이 네 스승을 볼 것이며 너희가 오른쪽으로 치우치든지 왼쪽으로 치우치든지 네 뒤에서 말소리가 네 귀에 들려 이르기를 이것이 바른 길이니 너희는 이리로 가라 할 것이며.”(사30:20,21)

 그런데도 많은 사람들은 여전히 자신들의 잘못된 선택만을 고집하고 있습니다. 잘못된 리더를 바꿀 생각조차 안하고 있는 것입니다. 명심하십시오. 계속해서 눈 먼 리더를 고집했다만, 결국 둘 다 구덩이에 빠지게 되고, 동반 추락하게 되고 말 것이라는 점을 말입니다. 혹 뒤늦게 이 같은 사실을 안다 해도 이미 그땐 늦습니다. 왜 입니까? 마치 앞에서 질주하던 물소들이 멈추려 해도, 바짝 붙어서 뒤쫓아 오는 다른 물소들에 의해 떠밀려 구덩이나 절벽 아래로 함께 추락하고 말테니 말입니다. “...둘 다 구덩이에 빠지지 아니하겠느냐.”(39절 하)

 지금 우리는 어떻습니까? 누굴 따라가고 있습니까? 누구와 함께 달리고 있습니까? 어떤 방향을 향해 나아가고 있습니까?

* 누구와 함께 달려야 합니까?

 “네게 무엇을 하여 주기를 원하느냐 이르되 주여 보기를 원하나이다.”(눅18:41)

 누구와 함께 달려야 합니까? ‘볼 줄 안다’ 말하면서도 정작 아무 것도 못 보는 교만한 자들입니까?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가 맹인이 되었더라면 죄가 없으려니와 본다고 하니 너희 죄가 그대로 있느니라.”(요9:41) 아닙니다.

 그럼 누구입니까? 영적으로 눈을 뜬 자입니다. 즉,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알기에 게으르지 않을 뿐만 아니라 삶 속에서 그 열매를 풍성히 맺어가는 사람입니다. “이런 것이 너희에게 있어 흡족한즉 너희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알기에 게으르지 않고 열매 없는 자가 되지 않게 하려니와 이런 것이 없는 자는 ‘맹인’이라 멀리 보지 못하고 그의 옛 죄가 깨끗하게 된 것을 잊었느니라.”(벧후1:8,9)

또한 나아가야 할 방향을 정확히 알고, 그곳까지 가는 가장 빠르고 안전한 경로를 찾는 능력을 가진 자입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요14:6)

 사실, 아프리카에서는 지금도 건기가 되면 수만 마리의 물소 떼가 목숨을 건 질주의 대이동을 하고 있습니다. 물을 찾아 수천km를 쉬지 않고 내달려야 하는 것입니다. 결국 이런 상황에서 리더의 역할이 클 수밖에 없는데 어떤 물소가 대이동의 리더로 세워질까요? 가장 힘이 센 물소입니까? 아니면 가장 빨리 달리는 물소? 아닙니다. 물이 있는 지점을 정확하게 파악하고, 그곳까지 가는 가장 빠른 경로를 찾는 능력을 가진 물소라야 합니다. 물 냄새를 멀리서도 맡을 수 있는 후각을 가진 물소 말입니다. 지금 우리는 어떻습니까? 누굴 따라가고 있습니까? 누구와 함께 달리고 있습니까?

 마지막으로, 끝까지 인내하되 결코 서두르거나 성급해 하지 않는 자입니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빌2:8,9)

 한편, 물소 떼의 리더는 잘 달리고 물 냄새를 잘 맡을 뿐만 아니라 물 냄새를 맡고도 신호를 보내는 본능을 억누를 수 있는, 오아시스에 도달할 때까지 침묵을 지킬 줄 아는 물소라야 합니다. 만일 이 같은 본능을 억누르지 못하면 어찌 됩니까? 서로 먼저 물을 먹으려는 물소들로 인해 그동안의 모든 질서와 페이스는 무너져, 결국 뒤엉킨 채 서로 무너지고 밟는 등 아비규환이 되고 말 것이기 때문입니다.

혹 우리는 어떻습니까? 침묵했어야 할 순간에 그 충동을 이기지 못한 채 무심코 내뱉은 말, 정제되지 않은 생각으로 성급하게 저지른 행동, 심사숙고하지 않고 표현한 말과 행동 등으로 인해 내 자신, 내 가정, 내 교회가 크고 작은 어려움에 처해 있지는 않습니까? 그 정한 목표에 미처 이르지도 못한 채 큰 낭패를 겪고 있지는 않습니까? 마치 어리석은 물소가 침묵의 금기를 깨고 신호를 보내 비극적 결과를 야기한 것처럼 말입니다.

 

 

훌륭한 시간 관리는 명확한 비전확립에서(10:38~42)

* 너무 많은 일들로 염려하고 근심하고 있습니까?

 “그들이 길 갈 때에 예수께서 한 마을에 들어가시매 마르다라 이름 하는 한 여자가 자기 집으로 영접하였더라...마르다는 준비하는(봉사하는) 일이 많아 마음이 분주한지라 예수께 나아가 이르되 주여 내 동생이 나 혼자 일하게 두는 것을 생각하지 아니 하시나이까 그를 명하사 나를 도와주라 하소서”(38,40)

 ‘마르다’라는 한 여성은 예수님을 자신의 집으로 영접하고, 예수께서 잡수실 음식들을 정성껏 준비했습니다. 이 일로 마음이 분주했던 그녀는 함께 거들지 않는 동생 마리아가 원망스러웠습니다. 그래서 그녀는 하던 일을 멈춰 놓고 주님 앞에 나아가 원망 섞인 말을 내뱉었습니다. “주여 내 동생이 나 혼자 일하게 두는 것을 생각하지 아니 하시나이까 그를 명하사 나를 도와주라 하소서.”(40절) 사실 예수님을 대접하기 위한 준비로 바쁜 자신을 내버려두고 혼자서 예수의 발 아래 앉아 그의 말씀을 듣고 있는 마리아에 대해 원망하는 마르다의 이 말은 지극히 당연한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여기서는 시간관리에 초점을 맞춰 살펴볼까 합니다.

 마르다는 예수님으로부터 뜻밖의 대답을 받았습니다. 무엇이었습니까? 많은 일로 염려하고 근심하나 몇 가지만(한 가지만)이라도 족하다는 말씀이셨습니다. “...마르다야 마르다야 네가 많은 일로 염려하고 근심하나 몇 가지만 하든지 혹은 한 가지만이라도 족하니라...”(41,42절) 본문의 ‘몇 가지만 하든지 혹은 한 가지만이라도 족하니라’는 GNT 4판에 ‘한 가지만으로도 족하니라’로 되어 있습니다.

 지금 마르다의 심적 상태를 어떻습니까? 마음이 몹시도 분주해 있으며(40절), 많은 일로 염려하고 근심 중입니다(41절). 여기서 ‘염려하고’(헬, 메림나스)는 ‘메리조’(나누어지다)의 파생어로 과도한 욕심으로 인해 어지럽게 분열된 마음의 상태를 나타내고 있는 말입니다. 누구 잘못입니까? 어디서부터 잘못된 것입니까? 마르다는 동생 마리아가 자신을 도와주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하나 예수님은 그리 생각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럼 무엇 때문입니까? “마르다야 마르다야 네가 많은 일로 염려하고 근심하나...”(41절) (예수님의 지적처럼) 너무 많은 일들로 염려하고 근심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너무 많은 일들을 한꺼번에 다 처리하고자 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어떻습니까? 너무 많은 일들로 인해 마음이 분주해 있지는 않습니까? 너무 많은 일들로 인해 마음이 사분오열로 나뉘어져 있지는 않습니까? 그렇다면 예수님께서 제시하시는 시간관리 방법에 귀 기울여 보십시오.

* 몇 가지만 하든지 혹은 한 가지만 하십시오.

 “몇 가지만 하든지 혹은 한 가지만이라도 족하니라(한 가지만으로도 족하니라) 마리아는 이 좋은 편을 택하였으니 빼앗기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42절)

 너무 많은 일들로 염려하고 근심하고 있다 구요? 그렇다면 “몇 가지만 하든지 혹은 한 가지만이라도 족하니라”는 예수님의 말씀에 귀 기울여 보십시오. 몇 가지 또는 한 가지만 잘 하셔도 됩니다. 어떻게 그것을 골라낼 수 있냐 구요? 결국 우선순위, 즉 선택과 집중의 문제입니다. 한 홍 목사는 <시간의 마스터>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습니다.

 “자신이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 분명히 아는 사람은 하지 말아야 할 일을 결정하는 데 갈등이 없다. 훌륭한 자기 관리는 명확한 비전 확립에서 시작된다. 사람들이 시간 낭비, 힘 낭비를 하는 것은 반드시 이뤄야 할 무엇이 없기 때문이다. 다른 사람들이 자꾸 당신의 삶을 이래라 저래라 하는 것에 따라 혼란스러워 하고 흔들리는 것은 하나님 앞에서 정립한 분명한 목표가 없기 때문이다. 크리스천 보비도 이렇게 말한다. ‘성공하는 사람은 송곳처럼 어느 한 점을 위하여 일한다’고 말이다.”

 사람들이 자꾸 시간과 힘 등을 낭비하는 것은 무엇 때문입니까? 너무 많은 일들을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서 반드시 이뤄야 할 그 무엇이 없이 닥치는 대로 모두 다 해내려 하기 때문입니다. 다른 사람들이 이래라 저래라 하는 것에 따라 흔들리고 혼란스러워 하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분명한 목표가 없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서 되고자 하는 바가 정확히 정립되지도 않은 채 우왕좌왕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어떻습니까? 반드시 이뤄야할 그 무엇이 있습니까? 달려가야 할 인생의 분명한 푯대를 발견하셨습니까? 잊지 마십시오. 자신이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 분명히 아는 사람은 하지 말아야 할 일을 결정하는 데 갈등이 있을 수 없으며, 훌륭한 자기 관리 역시 명확한 비전 확립에서 시작된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두드리는 이에게 열릴 것이니(11:9~13)

 여태까지 우리는 하나님 앞에 어떤 것들을 구해 왔습니까? 무엇을 찾아 왔습니까? 구체적으로 어떤 문들을 두드려 왔습니까? 또한 (그것들에 대해) 얼마만큼 응답을 받아 왔습니까?

 지난 세월을 되돌아보면, (솔직히) 받았던 것보다 받지 못했던 것들이 더 많았고, 찾았던 적보다 찾지 못했던 적이 더욱 빈번했으며, 열렸던 경우보다 열리지 않았던 경우들이 보다 많았음을 발견하곤 합니다. 무엇 때문일까요? 무슨 이유에서일까요?

첫째, 구하지 않았거나 정욕으로 구했기 때문입니다.

 “지금까지는 너희가 내 이름으로 아무 것도 구하지 아니 하였으나 구하라 그리하면 받으리니 너희 기쁨이 충만하리라”(요16:24)

“...너희가 얻지 못함은 구하지 아니하기 때문이요 구하여도 받지 못함은 정욕으로 쓰려고 잘못 구하기 때문이라.”(약4:2,3)

 구하지 아니하였기 때문은 아니었을까요? ‘너희가 얻지 못함은 구하지 아니하기 때문이요.’이로 보건대, 지금까지 우리가 받지 못한 이유는 하나님 앞에 구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구하지도 않은 것을 어찌 받을 수 있고, 찾지도 않은 것을 어찌 찾을 수 있으며, 두드리지도 않은 문이 어찌 열릴 수 있다는 말입니까? 지금 받기를 원하십니까? 그렇다면 무엇보다도 먼저 하나님 앞에 구하기를 시작해야 합니다. 지금 찾기를 원하십니까? 그렇다면 무엇보다도 먼저 찾기 시작해야 합니다. 지금 (어떤 문들이) 열려지길 원합니까? 그렇다면 무엇보다도 먼저 두드리기 시작해야 합니다.

 물론 어떤 이들은 이 시점에서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줄을 아시느니라.”(마6:32)는 말씀을 들어 간구의 필요성을 일축하려 들지도 모르나 “...그래도 이스라엘 족속이 이같이 자기들에게 이루어 주기를 내게 구하려야 할지라...”(겔36:37)는 말씀을 통해 이와 같이 주장은 그 설득력을 잃게 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또한 구하여도 받지 못함은 정욕으로 쓰려고 잘못 구했거나(약4:3) 마음에 죄악을 품었기 때문일 것입니다(시66:18). “내가 나의 마음에 죄악을 품었더라면 주께서 듣지 아니하시리라.”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 앞에 쉼 없이 구하고 찾고 두드리되 혹 정욕으로 구하거나 죄악을 품고 있지는 않은지 부지런히 우리 자신을 되돌아보아야 할 것입니다.

* 기도는 ‘구하는 그 이상’입니다.

 “내가 또 너희에게 이르노니 구하라 그러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11:9)

 보통 우리는 기도를 ‘구하는 것’에만 국한시켜 생각하곤 합니다. 그래서인지 ‘구했으면 다 되었다’는 식의 태도로 일관한 채 이 외의 일들은 좀처럼 하지 않으려 합니다. 구했으면 거기에 따른 행동이 반드시 따라 나와야 하는데도 말입니다.

 “...찾으라 그러면 찾아낼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러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 구하는 이마다 받을 것이요 찾는 이는 찾아낼 것이요 두드리는 이에게는 열릴 것이니라.”(눅11:9~10)

 구했으면 거기에서 끝내지 말고, 구한 그것을 적극적으로 찾아나서야 합니다. 언제까지 말입니까? 특정한 문 앞에 이를 때까지 말입니다. 찾았으면 이제 어찌해야 합니까? 문을 두드려야 합니다. 언제까지 말입니까? 그 문이 열릴 때까지. 이처럼 우리는 문을 두드리는 일까지 끝마쳤을 때 비로소 ‘기도를 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기도는 ‘구하는 그 이상’입니다. 지금 우리의 경우는 어떻습니까? 하나님으로부터 무엇인가를 받을 것을 기대하고 있으면서도 정작 내가 해야 할 일, 즉 구하는 것을 게을리 하고 있지 않습니까? 찾을 것을 생각하면서도 정작 그것을 찾는 일에 무심하지 않습니까? 열릴 것을 고대하면서도 정작 문 두드리는 일에 대해선 소홀히 하고 있지 않습니까? (마치 초인종도 누르지 않고 문이 열리기를 기다리는 사람처럼) 막연한 기대만으로는 부족합니다. 한 걸음 더 나아가 하나님 앞에 구하고, 찾으며, 두드려야 합니다.

* 구하고 찾고 두드리기

 문을 두드리기 위해서는 먼저 뭐가 가장 필요할까요? 두드려야 할 문을 제대로 찾는 일일 것입니다. 아무 집이나 가서 두드릴 순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두드리기 위해선 먼저 (두드려야 할 대상, 즉 문을) ‘찾아야’ 합니다. 찾기 위해서는 반드시 무엇이 선행되어야 할까요? 구하는 것입니다. 내가 지금 무엇을 하는지 어떤 행동을 취해야 하는 지도 모르면서 그것을 찾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우리가 구하기 시작할 때, 그리고 기도가 계속 되는 동안, 두드려야 할 문을 보여주기 시작하실 것입니다. 이렇게 말하면서 말입니다. ‘지금 그곳에 그렇게 서 있지만 말고, 가서 내가 네게 보여준 그 문을 찾아 나서라. 부지런히 찾되 그 문에 이르도록 그리 해라, 그래서 그 문 앞에 이르렀다면 주저하지 말고 두드리기 시작하렴. 몇 번 두드려서 문이 안 열린다고 해서 쉽사리 돌이키지 말고, 그 문이 열릴 때까지 두드리려무나. 그러면 머지않아 그 문이 열릴게다. 자~ 그러니 어서 시작해보렴.’ 한 번 구했다고 해서 기도가 끝난 게 아닙니다. 오히려 시작입니다. 구하고 찾고 두드리세요.

 기도할 때 주님은 직접 문을 열어주시기보다 먼저 그 문에 이르는 방법을 보여주실 것입니다. 만약 우리가 자갈밭을 통과해야 한다면 거기에 맞는 튼튼한 신발을, 길도 표지판도 없는 곳으로 나아가야 한다면 해당 지역의 지도와 나침반을, 암벽을 올라가야 한다면 암벽등반에 필요한 도구들과 강인한 의지력을, 일정한 시험을 치러야 한다면 필요한 자료와 능력을, 먼 길을 가야 한다면 적절한 운송수단을, 얼마간의 돈을 필요로 한다면 그 돈을 벌 수 있는 일자리를 각각 주실 것입니다.

이런 것들이야말로 우리가 진정 두드려야 할 문들인 것입니다. 우리가 해야 할 일을 찾았다면 주저하지 말고 그 일 하기를 시작합시다.

* 계속해서 두드려야 합니다(눅11:5~8).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비록 벗됨으로 인하여서는 일어나서 주지 아니할지라도 ‘그 강청함을 인하여’ 일어나 그 요구대로 주리라.”(눅11:8)

 당시 생활이 부유하지 못한 유대인 가정에서는 대개 온 가족이 하나 밖에 없는 방에서 그것도 한 이부자리에서 잠을 잤습니다. 따라서 한 밤 중에 손님이 찾아왔을 경우 누군가가 문으로 가서 문빗장을 열어주어야 하는데 그러려면 부득불 자고 있는 가족 전체를 깨워야 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한 밤 중에 손님을 맞는다는 것은 그들에게 그리 달갑지 않은 일일 수밖에 없던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본문 속 집주인은 잠자리에서 일어나 벗의 요구를 들어주었습니다. 무엇 때문입니까? 성경은 ‘그 간청함을 인하여’라고 말하고 있습니다(눅11:8). 이는 우리에게 무엇을 더 말해주십니까? 기도하되 기도한 것을 얻기까지 두드리기를 쉬지 말라는 말입니다(‘계속해서 두드리는 수고와 인내’의 필요성). 그러므로 우리는 항상 기도하되 쉽게 낙망하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눅18:1~8 과부와 재판장 비유 참조/ “예수께서 그들에게 항상 기도하고 낙심하지 말아야 할 것을 비유로 말씀하여”).

 구하는 이마다 받을 것이고 찾는 이마다 찾게 될 것이며 두드리는 이에게 열릴 것이기 때문입니다(눅11:10). 지금 구하고 있습니까? 아직 받지 못했다고 하더라도 낙심하지 마세요. 지금 찾고 있습니까? 아직까지 찾지 못했다고 실망하지 마세요. 지금 두드리고 있습니까? 아직 문이 열릴 생각조차 하지 않더라도 두려워하지 마세요. 분명히 받을 것이고, 찾을 것이며, 열릴 것이기 때문입니다.

* 특별히 성령 충만 받기를 구해야 합니다(눅11:11~13).

 “너희 중에 아버지 된 자로서 누가 아들이 생선을 달라 하는데 생선 대신에 뱀을 주며 알을 달라 하는데 전갈을 주겠느냐 너희가 악할지라도 좋은 것을 자식에게 줄 줄 알거든 하물며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성령을’ 주시지 않겠느냐 하시니라.”

 하나님 앞에 항상 구하고 찾고 두드리되 특별히 ‘성령 충만 받기’를 구해야 합니다. ‘성령님’이야말로 하나님께서 성도들에게 주신 최고의 선물이며(요16:7), 각양 좋은 은사들을 주시는 분이기 때문입니다(갈5:22,23).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니 이 같은 것을 금지할 법이 없느니라.” 지금 우리는 하나님 앞에 부지런히 구하고 찾으며 두드리되 최고의 선물이신 성령

 

 

주님의 제자가 되려면(14:25~27,33)

이시간은 주님의 제자가 되려면 어떤 결단이 필요한지 또 무엇이 필요한지 함께 살펴보았으면 합니다.

* 주님을 따르는 수많은 사람들

“수많은 무리가 함께 갈 새 예수께서 돌이키사 이르시되 무릇 내게 오는 자가....”(25절)

 본문은 예수께서 안식일에 한 바리새인 지도자의 집에서 떡을 잡수시고 나오면서 벌어졌던 일입니다. 예수님 주변에는 늘 허다한 군중들이 따르고 있었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주님을 좇고 있었지만, 각자의 생각과 의도는 제각각이었습니다. 각기 저마다의 계산과 의도로 주님을 좇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 그들에게 주님은 도전하십니다. 촉구하십니다.

 본문 말씀은 다른 사람이 아닌 예수님을 좇고 있던 ‘수많은 무리, 허다한 무리들’에게 하신 말씀입니다. 그들 중 대부분은 분명히 방관자요 구경꾼으로 주님을 좇고 있었던 사람일 것입니다. 그들은 시간이 지나도 여전히 ‘군중 속에’ 자신을 감춘 채 항상 ‘적당한 거리를’ 유지하며 ‘멀찍이’ 떨어져서 따라다녔을 것입니다.

 허다한 무리가 예수님을 따르고 있었지만 그들 모두가 주님의 길을 걷고 있었던 것은 결코 아닙니다. 수많은 무리가 주님을 좇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 주님의 제자가 되려고 몸부림치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았던 것입니다. 주님은 지금 ‘수많은 무리를 향해’ 몸을 돌이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더 이상 허다한 무리 중에, 수많은 사람 중에 머물러 있거나 안주하지 말고, 큰 군중 속에 휩쓸려 다니지 말고 그중에서 나와 나의 길을 걸으라.’

 주님을 따라다닌다고 해서 다 주님의 제자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주님의 이름을 부른다고 해서 다 주님의 제자인 것은 아닙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어떻게 하면 주님의 참된 제자가 되어 그 길을 온전히 걸어갈 수 있을까요? 지금까지는 허다한 군중 속에 머물러 있었지만, 이제부터는 달라져야 합니다. 그 속에서 뛰쳐나와 적극적으로 주님과 동행하기 시작해야 합니다.

* 미워(?)할 줄 알아야 합니다.

 “무릇 내게 오는 자가 자기 부모와 처자와 형제와 자매와 더욱이 자기목숨까지 ‘미워하지 아니하면’ 능히 내 제자가 되지 못하고”(26절)

주님의 제자가 되려면 미워(?)할 줄 알아야 합니다. 본문은 주님의 제자는 가족도, 심지어 자기 목숨까지도 미워해야 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게 무슨 말일까요? 네 이웃을 네 몸까지 사랑하는 말씀에 정면으로 위배되는 것 같은데요. 여기서 ‘미워하다’(헬, 미세이)는 ‘조금 사랑하다’는 뜻입니다. 실제로 미워하라는 것이 아닌 상대적으로 다른 것보다 덜 귀히 여기라는 의미인 것입니다. 무엇보다 덜 귀히 여기라는 말일까요? 하나님이요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이 말씀은 주님보다 이 모든 것을 덜 사랑하라는 것이라기보다 오히려 ‘이 모든 것보다 더욱 더 주님을 사랑하라’는 말씀으로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주님을 따르던 군중들 대부분은 주님을 좇고 있었지만 실제로는 주님보다도 자기 가족, 자기 목숨을 더욱 사랑했고 또한 그것들에 상당한 애착을 가지고 있었기에 주님 앞에 온전히 나아올 수 없었던 것입니다. 십자가의 길을 걸을 수 없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덜 사랑하려 애쓰기보다는 주님을 지금보다 더 사랑하고자 몸부림쳐야합니다. 그러나 실상 우리는 ‘조금 사랑할 것’을 최고로 사랑하고, ‘최고로 사랑할 분’을 조금밖에 사랑하지 않을 때가 더 많습니다.

 ‘너희가 언제까지 허다한 군중 속에만 머물 작정이냐? 언제까지....’

* 잘 알아야 합니다.

 “너희 중에 누가 망대를 세우고자 할진대 자기의 가진 것이 준공하기까지에 족할는지 먼저 앉아 그 비용을 계산하지 아니하겠느냐. 그렇게 아니하여 그 기초만 쌓고 능히 이루지 못하면 보는 자가 다 비웃어 이르되 이 사람이 공사를 시작하고 능히 이루지 못하였다 하리라.”(28,29,30절)

 주님의 제자가 되려면 사전에 그 길이 어떠한 길인지 분명히 깨닫고 이에 따른 자기희생을 처음부터 각오해야 합니다. 건축을 하려면 사전에 철저한 계획과 준비가 필요하듯 주님의 제자가 되기 위해서도 사전에 그 길이 어떠한 길인지 충분히 헤아려보고 분명히 깨달아야 하는 것입니다. 멋모르고 섣불리 뛰어들어 도중에 부도내는 사람을 하나님은 결코 기뻐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제자가 된다는 것은 일시적인 충동이나 무모한 서원을 백지수표처럼 남발하는 것과는 거리가 있습니다. 또 분위기에 휩쓸려 얼떨결에 아무런 사전지식이나 사전 준비도 없이 막무가내로 뛰어드는 것이 아닙니다.

 ‘아는 것이 힘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주님의 제자가 되기 위해선 우선 그 길에 대해서 잘 알고 있어야 하며 우리가 얼마만큼 자기희생을 각오해야 하는지 충분히 헤아려야 합니다. 그리고 이에 대한 계획과 준비를 사전에 철저히 해두어야 합니다.

 본문 말씀은 주님의 길이 힘들고 어려우므로 지레짐작하고 미리 다 포기하라는 말씀이 아닙니다. 오히려 우리 자신이 얼마만큼 자기희생을 각오해야 하는지 충분히 알고 발을 내딛으라는 것이며 사전에 철저한 계획과 준비를 하라는 말씀인 것입니다. 다음의 말씀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될 수 있습니다.

 “또 어떤 임금이 다른 임금과 싸우러 갈 때에 먼저 앉아 일만 명으로 저 이만 명을 거느리고 오는 자를 대적할 수 있을까 헤아리지 아니하겠느냐 만일 못할 터이면 그가 아직 멀리 있을 때에 사신을 보내어 화친을 청할지니라.”(31,32절)

* 버릴 줄 알아야 합니다.

 “이와 같이 너희 중의 누구든지 자기의 모든 소유를 버리지 아니하면 능히 내 제자가 되지 못하리라”(33절)

 주님의 제자가 되려면 자기의 모든 소유를 버려야(?) 합니다. 그렇다고 해서 지금 당장 모든 것을 밖에 내어버리는 말은 아닙니다. 오해하지 마십시오. 진짜 버리라는 말이 아닌 소유권을 주님께 내어드리라는 말입니다. 진짜로 버려야 한다면, 우리의 경험과 지식 등은 어떻게 버릴 수 있을까요? 지금까지는 내 뜻대로 내 생각대로 사용해왔지만 지금부터라도 주님께서 뜻대로 사용하시도록 내어드리는 말인 것입니다.

 여기서 ‘버리지’는 ‘포기하다’의 현재형으로 항상 현재 시점에서 버려야 할 것이 생기면 과감히 포기해야 함을 강조하고 있는 말입니다. 손에 다른 무엇인가를 잔뜩 쥔 채로 다른 것을 받을 수 있을까요? 그럴 수 없습니다. 더 좋은 것을 얻기 위해선 먼저 내 손에 잔뜩 쥐어진 그것들을 모두 내려놓아야 합니다. 포기해야 합니다. 이것은 단순히 ‘포기’한다기보다 ‘더 좋은 것을 얻기 위한 준비’라고 해야 할 것입니다. 우리에겐 ‘포기해야 할 많은 것들’이 있습니다. 그렇게도 뿌리칠 수 없을 것만 같던 잠, 텔레비전, 좋은 못한 습관들....

* 아직도 방관자로 서 있습니까?

“수많은 무리가 함께 갈 새 예수께서 돌이키사 이르시되...”

지금 여러분은 아직도 주님의 주변에서만 서성거리는 방관자로 있지 않습니까? 주님을 따르고 있으면서도 여전히 주님의 길을 걷지 않고, 주님의 이름을 부르면서도 여전히 주님과 상관없이 지내고 있지 않습니까? 더 이상 주님 앞으로 나아오려 하지 않으면서도 여전히 주님을 떠나지 않는 사람들이지 않습니까? 그들은 아마도 ‘안전(?)거리 유지의 대가’일 것입니다. 어쩌다가 주님과의 사이가 가까워지려하면 어느 새 정신을 바짝 차리고 금 새 속도를 떨어뜨립니다. 너무 멀리 왔나 싶으면 조금씩 속도를 내지만 여전히 일정거리는 유지하려 애를 씁니다. 그들이 항상 좋아하는 단어는 ‘멀찍이, 적당히’입니다.

 그런 우리에게 주님은 이 시간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더 이상 군중 속에 숨어 있지만 말고, 당당히 주님 앞에 나아오라고 말입니다. 더 이상 수많은 무리 속에 안주하지 말고 가까이 나아와 제자가 되라고 말입니다. 우리는 어떻습니까?

 

 

삭개오를 삭개오 되게 하시려고(19:1~10)

* 삭개오를 삭개오가 되게 하시려고...

 “예수께서 여리고로 들어가 지나가시더라 삭개오라 이름하는 자가 있으니 세리장이요 또한 부자라.”(눅19:1,2)

 예수님께서 왜 여리고에 오셔야만 했는지, 그리고 왜 많은 사람들 중에서 세리장 삭개오를 만나야만 했는지 그 이유를 혹시 아십니까? 예수님께서는 단순히 여리고를 우연히 지나치신 게 아닙니다. 또한 뽕나무 위에 있는 삭개오를 우연히 만나 그의 집에까지 들어가게 되신 것도 결코 아닙니다.

 그렇다면 무엇입니까? 도대체 예수님은 왜 여리고로 가셨던 것일까요? 예루살렘을 향해 마지막 여행을 하시던 예수님은 마치 아직 해결되지 않은 일이라도 있는 것 인양 여리고를 향해 발걸음을 재촉 하셨습니다. 마치 거기서 누군가 만나야 할 사람이 있는 분처럼 말입니다. 누구였습니까? 과연 누굴 만나시려고 말입니까?

 오늘 우리가 함께 살펴볼 여리고의 세리장 삭개오입니다. 삭개오, 그는 어떤 사람이었습니까? ‘삭개오’는 '청결한', '의로운'이라는 의미의 히브리어 '자카이'에서 유래된 말로 그 이름의 뜻은 ‘의로운 사람’ 또는 ‘순전한 사람’입니다. ‘의로운 사람, 순전한 사람’ 어쩌면 이것이야말로 하나님께서 그를 통하여 이루시고자 하는 비전이 아니었을까요? 본래 하나님은 그를 하나님 앞에서 '의롭고 순전한 사람'으로 빚으실 꿈을 품으셨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물론 예수님께서 그를 찾아왔을 당시에도 유효했을 것이 구요.

 결국 예수님의 여리고 방문 목적은 무엇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까? 바로 삭개오를 만나 본래 그를 향한 하나님의 계획, 즉 그의 이름의 뜻대로 회복시키고, 잠들어 있는 그의 꿈을 일깨워 다시 그 꿈을 향해 달음질하게 하기 위함일 것입니다. 또한 무엇입니까? 예수님의 말씀처럼, 잃어버린 자들(여기에선 삭개오)을 찾아 일일이 구원하시기 위함입니다. “인자가 온 것은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려 함이니라.”(눅19:10)

 오늘날도 예수님은 마찬가지로 잃어버린 한 영혼 한 영혼을 찾아다니십니다. 그리고 그들의 잃어버린 꿈들 역시 되찾아주고 싶어 하십니다. 비록 그들이 삭개오처럼 자신들의 꿈과 아무런 상관없이 살고 있는 사람들이라 할지라도 말입니다. “너희 중에 어떤 사람이 양 백 마리가 있는데 그 중의 하나를 잃으면 아흔 아홉 마리를 들에 두고 그 잃은 것을 찾아내기까지 찾아다니지 아니하겠느냐.”(눅15:4)

 한편, 여리고는 발삼나무의 주산지였을 뿐 아니라 길르앗 지방으로부터 들어오는 향유가 그곳을 통하여 팔레스타인 각지로 보내지는 길목이었으므로 통관세를 받는 큰 세관이 있었습니다. 그가 이 세관의 최고책임자였다는 것은 정당치 못한 방법으로 엄청난 부를 축적했기 때문일 가능성이 큽니다. “삭개오라 이름 하는 자가 있으니 세리장이요 또한 부자라.”(눅19:2)

 여기서 우리는 그의 꿈이 완전히 사라져버린 것 같은 느낌을 받을 수밖에 없습니다. 이미 그는 중년의 나이를 넘긴 상태이고 또한 온갖 부패에 연류된 것처럼 보이며 자기 동족들에게마저 지탄의 대상, 즉 공공의 적이 되어 있으니 말입니다. 이미 그는 '의로운 사람'이 되는 대신 ‘불의로 가득 찬 사람’이 되어 있었고, ‘순전한 사람’이 되는 대신에 정당치 못한 방법으로 부를 착복해 온 사람이 되어 있었기 때문입니다. 온갖 열등감과 외로움의 노예가 된 채 말입니다. “뭇 사람이 보고 수군거려 이르되 저가 죄인의 집에 유하러 들어갔도다.”(눅19:7)

 그러나 예수님의 생각은 달랐습니다. 아직 늦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삭개오도 그러하고 그의 꿈 역시 그러하다고 생각하셨던 것이 분명합니다. 왜 입니까? 무엇을 근거로 그리 말할 수 있습니까? 예수님의 여리고 방문 그 자체가 이미 그걸 증명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결코 포기하지 않으셨습니다. 무엇을 말입니까? 삭개오가 다시 삭개오로 회복되어질 것이라는 희망을 말입니다.

* 꿈이 없는 생활이란 살아있으나 죽은 것이나 다름이 없습니다.

 꿈이 없는 생활이란 지옥이나 다름이 없습니다. 왜 입니까? 살아있다고는 하나 죽은 것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에 등장하는 삭개오처럼 말입니다. 그는 어떠한 삶을 살았습니까? 많은 부를 축적한 부유층 인사였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동족들로부터 온갖 무시와 천대를 당하며 살았습니다. 당시 대부분의 세리들이 그러하였듯이 말입니다(당시 유대인들은 세리와 죄인을 거의 동일시했음).

 “예수께서 마태의 집에서 앉아 음식을 잡수실 때에 많은 세리와 죄인들이 와서 예수와 그의 제자들과 함께 앉았더니 바리새인들이 보고 그의 제자들에게 이르되 어찌하여 너희 선생은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잡수시겠느냐.”(마9:10,11)

 그러던 차에 예수님께서 마침 여리고를 지나가신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혹시 그분께 가면 자신의 근본적인 문제가 해결을 되지는 않을까?’, ‘혹 그분께 가면 칠흑 같은 자신의 삶에 한 줄기의 빛이 비추이지 않을까?’라는 기대감이 들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예수님을 그토록 보고 싶어 했던 것이 아닐까요? “그가 예수께서 어떠한 사람인가 하여 보고자 하되 키가 작고 사람이 많아 할 수 없어 앞으로 달려가서 보기 위하여 돌무화과나무에 올라가니 이는 예수께서 그리로 지나가시게 됨이러라.”(눅19:3,4)

 여기에서 '하되' (헬라어, 에제테이)는 '제테오'(찾다)의 미완료과거로 중도에 포기하지 않고 목적을 이룰 때까지 계속해서 방도를 모색하는 것을 뜻합니다. 실제로 그는 키가 작고 사람이 많아 예수님께 갈 수 없었지만(눅19:3), 결코 거기에 굴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어찌하였습니까? 돌무화과나무에 오른 것입니다(눅19:4). 그가 얼마나 필사적이었는가를 짐작하게 하는 대목입니다.

 꿈을 찾고 싶습니까? 희망을 발견하고 싶습니까? 그런데 지금 여러분 앞에 놓인 장애물들이 너무 많다 구요? 너무 많은 것들이 가로 막고 있어 여러분의 힘으로는 도무지 헤쳐 나갈 방법이 보이지 않는 다구요? 포기하지 마세요. 낙심하지 마세요. 설령 동서남북 사면이 다 막힌다 해도 솟아날 구멍이 있습니다. 하늘을 뚫려 있으니까요. 위를 바라보세요. 삭개오처럼 말입니다. 여러분 곁에 있는 뽕나무 위로 올라가기를 주저하지 마세요. 어서요.

* 삭개오의 마음을 두드리셨습니다.

 “볼지어다 내가 문 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와 더불어 먹고 그는 나와 더불어 먹으리라.”(계3:20)

 예수님께서는 ‘여리고 성을 지나면서’ 삭개오를 찾고 계셨습니다. 여리고 성 그 어딘가에 있을 삭개오를 말입니다. 삭개오가 예수님을 만나고 싶어 하는 것 그 이상으로 말입니다. 삭개오는 어떠했습니까? 그 역시 이번이 아니면 더 이상의 기회는 없다고 생각했는지 예수님을 만나기 위해 필사적인 몸부림을 쳤습니다. 마치 두 연인이 서로를 만나기 위해 군중 속으로 헤치고 나아가듯 말입니다.

 그러기를 한참, 드디어 예수님과 삭개오의 눈은 마주쳤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군중 속에 계셨고, 삭개오는 뽕나무 위에 있었을 때 말입니다. 서로는 서로를 한 번에 알아 볼 수가 있었습니다. 비록 두 사람 사이에는 수많은 사람들이 인산인해를 이루고 있었지만 말입니다.

예수님은 삭개오의 마음을 두드리셨습니다. 이렇게 말씀하시면서 말입니다. “삭개오야 속히 내려오라 내가 오늘 네 집에 유하여야 하겠다.”(5절) 한 번도 제대로 열어본 적이 없는 문을, 굳게 닫혀있던 그 문을 주님이 맨 처음 두드리신 것입니다.

 삭개오는 기쁜 마음으로 자신의 마음을 활짝 열어 보이며 예수님을 모셔 들였던 것입니다. “급히 내려와 즐거워하며 영접하거늘.”(눅19:6) 이는 단지 한 가정으로 영접한 것만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예수님을 그의 마음 속 깊은 곳 한 가운데에까지 영접한 것입니다. “볼지어다 내가 문 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와 더불어 먹고 그는 나와 더불어 먹으리라.”(계3:20) 유대인 사회에서는 가정집에 초청받는 다는 것, 특히 음식대접까지 받는 것은 집주인이 그 손님을 마음으로 깊이 대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유대인들은 웬만해선 낯선 사람들에게 초대를 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오늘에서야 비로소 삭개오는 자신의 이름의 뜻대로 '순전한 사람', '의로운 사람'이 될 수가 있었습니다. 그를 향한 하나님의 선하신 계획 역시 활짝 피어나기 시작했던 것이 구요. “예수께서 이르시되 오늘 구원이 이 집에 이르렀으니 이 사람도 아브라함의 자손임이로다.”(눅19:9)

 물론 예수님의 여리고 방문에는 여러 가지 중요한 이유들이 포함되어 있었겠지만, 예수님은 이 방문을 통해 삭개오라는 한 사람의 생애를 변화시켰고, 그 속에 두신 사명을 불일 듯 일깨우셨다는 사실만큼은 도무지 의심할 수가 없을 것입니다.

 한편, 삭개오는 전승에 따르면 초대교회 당시 주님의 훌륭한 일군이 되었다고 합니다. 누가는 자신이 알고 있는 훌륭한 일군 삭개오가 어떻게 회심하고 부르심을 받았는지 관심 있게 들었고 또한 그것들을 성경에(누가복음에) 기록했던 것입니다. 비록 삭개오의 이후 생활이 성경에 기록되어 있지는 않지만, 그는 주님 안에서 발견한 자신의 사명을 붙잡고 일평생 멋지게 살아가다가 그 생을 마감했을 것입니다. 어찌 삭개오 뿐이겠습니까?

 우리는 어떻습니까? 지금도 우리를 부르고 계시는 주님의 음성이 들리십니까? 이렇게 말입니다. “누구야 속히 내려오라 내가 오늘 네 집에 유하여야 하겠다.”

 

 

돌이킨 후에 네 형제를 굳게 하라(22:31~34)

 살다보면 정말 우리 자신이 실망스러울 때가 참 많습니다. 절망스러워 도무지 일어날 힘조차 없을 때가 있습니다. 일어설 용기조차 없을 때가 한 두 번이 아닙니다. 자꾸만 넘어지고 또 넘어지는 내 자신의 모습이 너무도 부끄럽게 수치스럽게 느껴질 때가 많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런 우리를 밀 까부르듯 요구하고 있는 존재가 있음을 오늘 본문을 통해 분명하게 인식했으면 합니다.

*끊임없는 고소장(31절)

 사단은 우리를 끊임없이 청구(요구)합니다. 다시 말해서 참소(고소)합니다. 이간자요 고소자인 사탄(계12:10)은 중보자이신 예수 그리스도와 너무도 대조적입니다. 사탄은 항상 성도의 허물을 하나님께 참소함으로 마치 자신이 하나님을 위해 발 벗고 나선다는 인상을 주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의 궁극적인 목적은 어떠하든지 하나님과 사람을 이간시키는 것입니다(요기1,2장)

“... 우리 형제들을 참소(고소, 중상모략)하던 자 곧 우리 하나님 앞에서 밤낮 참소하던 자가 쫓겨났고”(계12:10)

*사탄은 베드로를 밀 까부르듯 하려고 했습니다.

“시몬아, 시몬아, 보라 사탄이 밀 까부르듯 하려고 너희를 요구하였으나...” (31절)

 농부들은 진짜 밀과 그 안에 섞인 다른 것들을 분리하기 위해 밀을 까부르곤 했습니다(아모스9:9) 팔레스틴 농부들에게 키질은 매우 친숙한 일상사였습니다. 밀을 공중에 쳐올리면 무거운 알곡과 가벼운 겨가 바람에 의해 분리되고, 별 쓸모없는 겨는 불에 태워지게 마련입니다.

 사탄은 베드로를, 그리고 우리를 '쓸모없는 겨'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우리 주님은 아니라고 합니다. 오히려 알곡이라고 합니다. 누구의 말이 옳습니까? 사탄은 베드로를 키질해봐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빈껍데기뿐이라고 말합니다. 사탄은 끊임없이 욥을, 베드로를, 우리를 기소하려고 안간힘을 씁니다. 히브리어에 있는 '사단'이라는 말은 문자적으로 '적, 즉 '기소자'라는 의미입니다.

사단은 지금도 틈만 나면 나를 참소하려고 합니다. 우리가 실수하고 넘어지면, 그것을 빌미로 우리를 정신없이 막다른 골목으로 몰아 부치려 합니다.

 “주님 ! 저것보세요! 제게 크리스천입니까? 당장에 당신의 생명책에서 지워버려야 마땅하지 않습니까? 혹시나 했더니 역시나 아닙니까? 될 성싶은 나무는 떡잎부터 알아본다고 했는데, 벌써 싹이 노랗지 않습니까? 실수도 한두 번이지 지금까지 도대체 몇 번입니까? 죄짓기를 밥 먹듯이 하고 넘어지기를 매일같이 하는 저 인간들을 그냥 내버려둔다는 것은 말도 안 됩니다. 당장이라도 뽑아내버려야 합니다. 저 몰골들은 보세요. 해도 해도 너무하다고 생각되시지 않습니까? 무늬만 크리스천이지 않습니까?”

 왜 우리가 의기소침해집니까? 왜 종종 다운됩니까? 사단의 참소 소리에 귀 기울이기 때문입니다. 사단의 고소에 귀 기울이기 때문입니다. 이젠 더 이상 참소 소리에 귀 기울여서는 안 됩니다. 우리 가운데 계시는 예수님의 소리에 귀 기울어야 합니다.

* 주님은 결코 사단의 청구에 응하지 않으셨습니다.

 사단은 예수님의 수제자인 베드로마저 밀 까부르듯 하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다음에 하신 주님의 말씀은 정말 우리의 마음을 흠뻑 적셔 주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내가 너를 위하여 네 믿음이 떨어지지 않기를 기도하였노니 너는 돌이킨 후에 네 형제를 굳게 하라!”(32절)

 끊임없이 우리를 참소하고 있는 사단의 모습 옆에 쉬지 않고 사랑으로 우리를 위해 기도하고 계시는 주님의 모습이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주님은! 지금도 나의 믿음이 떨어지지 않기를 기도하고 계십니다. 이런 주님의 기도가 없었다면, 지금 나는 이 자리에 있지 못할 것입니다. 주님은 사단이 그 어떤 말로 우리를 참소해 와도 전혀 개의치 않고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그리고 우리를 그 따뜻한 품으로 안아주십니다.

 고소자인 사단은 우리를 참소하고 고소하지만, 중보자이신 예수님은 우리를 위해 기도하기를 쉬지 않으십니다. 우리는 어떠합니까? 고소하기에 급급해 하지 않습니까? 어쩌다가 실수한 것을 가지고 참소하기에 급급해하지 않습니까?

 주님은 베드로의 믿음이 떨어지지 않기를 기도하셨습니다. 베드로가 큰 소리치고 호언장담하고 있을 때 말입니다. 믿음이 떨어지지 않는 방법은 오직 기도 밖에 없는 것 같습니다. 여전히 주님은 보좌 우편에서 우리를 위해 중보하고 계십니다.

 믿음도 떨어질 수 있습니다. 믿음이 떨어지면 신앙생활이 무너지게 됩니다. 그래서 우리 주님은 무엇보다도 우리의 믿음이 떨어지지 않기를 간구하십니다. 사탄은 고소할 빌미를 찾지만 예수님은 위해서 기도하십니다.

 “근신하라 깨어라 너희 대적 마귀가 우는 사자와 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나니 너희는 믿음을 굳게 하여 저를 대적하라...”(벧전5:8.9상)

 우리의 대적은 지금 이 순간에도 마치 성난 사자가 먹이를 찾듯이 두루두루 다니고 있습니다. 기회만 생기면 언제든지 달려들 것처럼 우리들 주위를 맴돌고 있습니다. 방심을 틈타 사람들을 자신의 희생물 곧 미혹의 대상으로 삼으려고 말입니다. 정신을 바짝 차리고 있어야 하는데 그렇지 못할 때가 많습니다. 사단은 언제나 우리의 방심을 틈타 임합니다. 마귀는 영적으로 방심하고 있는 자를 자신의 희생물 곧 미혹의 대상을 삼습니다. 삼킴을 당하지 않으려면 우리의 믿음을 굳게 하는 수밖에 없습니다. 믿음을 굳게 합시다.

* 주님은 우리의 믿음뿐만 아니라 우리의 비전을 위해서도 기도하십니다.

 “...너는 돌이킨 후에 네 형제를 굳게 하라”(32절 하)

 주님은 우리를 위해 기도하실 때, 단지 우리 개인의 안녕만을 위해 하지 않습니다. 단지 우리의 믿음이 떨어지지 않게 해달라고만 하지 않습니다. 여기에서 더 나아가 우리의 사명을 위해서 기도하셨던 것입니다. 주님은 베드로를 위해 기도하신 것은 베드로 한 사람만이 믿음 위에 굳게 서도록 하기 위함이 아니었습니다. 그를 통해 주님의 많은 교회들이 굳게 세워지기를 원하셨던 것입니다.

 실제로 베드로는 주님을 세 번씩이나 부인하고 멀어져 가는 듯 했지만 돌이킨 후에는 초대교회를 돌아보며 초대교회에서 없어서는 안 될 기둥 같은 존재가 되었습니다. 주님은 부활하신 후 갈릴리 바닷가에서 베드로를 다시 만났을 때에도 세 번씩이나 이렇게 부탁하셨습니다(요21장).

 "내 어린양을 먹이라" "내 양을 치라" "내 양을 먹이라"

 주님은 베드로에게 너 보다 영적으로 미성숙한 자 곧 어린양(헬, 알나온)들을 신령하고 순전한 젖(말씀)으로 양육하라, 그릇된 길사53:6)로 가기 쉬운 영혼들을 잘 감독하라, 장성한 양(헬, 프로바톤) 즉 비교적 성숙한 그리스도인도 끊임없이 양육하라고 하신 것입니다.

 우리가 끊임없이 주께로 돌이켜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우리보다 더 성숙치 못한 그들을 굳게 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신기한 것은 우리가 우리 자신의 문제에만 골똘하다보면 쉽게 그 무력감에서 헤어 나오기 힘들지만, 다른 지체들을 돌아보고 격려하다보면 자신도 모르게 힘과 에너지가 솟는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원래 그렇게 지으셨기 때문입니다. 사단은 나뿐만 아니라 내 옆에 있는 형제들조차 삼키려고 하고 있으므로 부지런히 우리 형제자매들을 돌아보아야만 합니다.

 “그러므로 네가 깨닫고 돌이킨 후에 형제들에게 힘이 되어주고 그들의 믿음을 북돋아 주어라”

 또 주님은 본문에서 '시몬아 시몬아'라고 부르셨다가 다시 '베드로야"라고 부르셨습니다. 왜 그러셨을까요? '게바' 혹은 '베드로'라는 별칭은 예수께서 시몬의 가능성을 보시고 지어준 이름입니다. 그러나 그는 종종 '반석'의 면모를 제대로 보여주지 못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잡히시던 날 밤 세 번의 부인은 그의 나약성을 표출한 대표적인 경우일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시몬' 또는 '요한의 아들 시몬아'라고 부르시면서 그의 실수에 대해 간접적으로 꾸중하시기도 했습니다.

 아마도 오늘 본문은 "베드로 네가 지금 이렇게 장담하고 있지만 아직도 내 눈에는 '냐약한 시몬'으로만 보이는구나. 제발 네 믿음이 떨어지지 않기를 깨어 기도해라.... 제발 '베드로'가 되어주렴. 베드로가 되어서 오늘 밤 나를 부인하는 일이 없었으면 좋겠구나."

여러분의 경우는 어떻습니까?

 

 

십자가 앞으로 나아오라(23:26)

 오늘 예배 보러 오신 분들이 혹시 있으세요? 설령 구경 왔더라도, 친구 따라 억지로 끌려왔더라도, 부모님에 의해 등 떠밀려 왔더라도 한 사람도 예외 없이 은혜 받고 돌아가시길 바래요. 오늘 본문에 나오는 시몬처럼 말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를 대신 지고 갔다가 인생이 180도로 바뀐 시몬이라는 사람의 이야기를 통해서 은혜를 받고자 합니다. 그냥 지나쳐 버리기 쉬운 한 구절이지만, 하나님께서 하시고자 한다면 이 속에서도 놀라운 은혜가 주어질 줄 확신합니다.

의문의 청년

 구레네(Cyrene)는 아프리카 북부 연안의 도시입니다. 그리스 로마 시대에는 헬라어를 사용하는 유대인들이 많이 거주했습니다. 절기 때에는 이곳에 있는 많은 유대인들이 예루살렘을 방문했는데, 시몬 또한 그러한 사람들 중 하나였습니다.

 그는 여느 해와 마찬가지로 예루살렘으로 유월절을 지키러 왔습니다. 벌써 성내에는 전 세계에 흩어져 살던 유대인들로 북새통을 이루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번에는 조금 심상치 않은 일들이 벌어지고 있었습니다. 사람들은 유월절 전날 거리로 쏟아져 나왔으며 무엇인가를 구경하느라 정신없었습니다. 도대체 무슨 일이 이곳에서 벌어지고 있는 거지? 시몬은 사람들을 헤치고 가까이 다가갔습니다.

그런데 어떤 한 청년이 다른 죄수 두 명과 함께 이른 아침부터 십자가 형틀을 짊어지고 사형지로 끌려가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 청년은 전날 채찍질을 당한 것처럼 온 몸이 피투성이가 되어 있었고 몹시도 지쳐 있었습니다. 건강한 사람도 짊어지기 힘든 그 형틀을 저 몸으로 지고 간다는 것은 도무지 불가능해보였습니다.

 시몬은 곁에 있던 사람들에게 물었습니다. “저 청년은 도대체 누구요? 누구 길래 이렇게들 나와 있는 거요? 무슨 죄를 졌기에 이토록 극형에 처해졌답디까?”

 사람들의 대답은 저마다 상이했습니다. 그리고 그 청년 뒤에는 많은 여인네들이 가슴을 치며 슬피 울면서 따르고 있었습니다. 시몬은 좀 더 가까이 가서 그 청년을 보고 싶었습니다. 아무리 봐도 그의 얼굴에서 그 어떤 악함도 보이질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는 사람들 사이를 비집고 그 청년에게로 가까이 가까이 다가갔습니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청년을 호송 중인 로마 군인들에 의해 제지당해 더 이상 가까이 갈 수는 없었습니다. 시몬은 그 청년을 다시 한 번 찬찬히 바라보고 또 바라보았습니다. 짠하기도 하고 조금 안되 보이기도 했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억지로 짊어진 십자가

 청년이 자꾸만 쓰러지자 로마군인은 이대로는 도무지 안 되겠다 싶던지 다른 사람으로 하여금 대신 형틀을 메고 가게 해야겠다고 말했습니다. 바로 그때 가까이에 와있던 건장한 사내 하나를 발견했습니다. 바로 시몬이었던 것입니다. 군인은 시몬의 의사는 물어보지도 않고 강제로 십자가 형틀을 짊어지고 가라고 명령했습니다. 시몬이 딱 걸린 것입니다. 시몬은 너무도 당황스럽고 수치스러웠습니다. 유대인들은 십자가만 봐도 수치스럽고 혐오스러워 했기 때문입니다.

 ‘내가 왜 저 사람의 십자가를 대신 지고 가야 하나? 나와는 전혀 상관도 없는 사람인데... 사람들이 다 나만 볼텐데 얼마나 창피하고 낯 뜨거울까? ...까짓껏 죽은 사람 소원도 들어준다는데, 저 불쌍한 청년을 위해 이것쯤이야 잠깐 대신 저주지 뭐. 잠깐만 참자 참어.’

그 십자가의 주인은 따로 있었어요.

 그런데 그 일이 있은 후 얼마 뒤 시몬은 그 청년이 누구인지 알게 되었습니다. 또 그 청년은 십자가 형틀을 짊어질만한 아무런 죄도 짓지 않았다는 것두요. 성경에는 구레네 시몬이 이 일 후 어떤 심경의 변화를 겪었는지 아무 것도 남겨두고 있지만 다음의 구절을 볼 때 시몬의 생이 180도로 바뀌었고 그로 인해 그의 온 가족이 주님을 믿게 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주 안에서 택하심을 입은 루포와 그의 어머니에게 문안하라 그의 어머니는 곧 내 어머니니라”(롬16:13)

 “마침 알렉산더와 루포의 아버지인 구레네 사람 시몬 이 시골로부터 와서 지나가는데 그들이 그를 억지로 같이 가게 하여 예수의 십자가를 지우고”(막15:21)

 원래 그 십자가는 시몬의 것이었습니다. 성경은 모든 사람이 다 죄인이며 죄의 삯은 곧 사망이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사실 예수님은 아무런 죄가 없으신 분으로 그 십자가를 지실 필요가 전혀 없으셨습니다. 그렇다면 그분은 왜 그 곳에서 자신의 것도 아닌 그 십자가를 묵묵히 지고 가셨던 것일까요? 만신창이가 된 몸을 이끈 채 말입니다. 누굴 위해 그렇게 하신 걸까요? 시몬은 자신의 십자가를 예수님이 대신 지고 가신다는 것을 모른 채 남의 일 보듯 구경만 하고 있었습니다. 불쌍하다고 혀를 차면서 말입니다. 짠한 마음, 동정의 눈빛으로 뒤에서 지켜보고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는 어떻습니까? 예수님의 십자가를 보면서 무슨 생각을 하고 계십니까? 그분이 묵묵히 지고 가셨던 그 십자가는 원래 제가 지고 갔어야 한 것이었습니다. 그분이 못 박히셨던 그 십자가에는 원래 우리가 못 박혀 있어야만 했던 곳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은 마치 그것이 자신의 것 인양 묵묵히 지고 가셨던 것입니다. 그분은 그것을 당연시 여기셨고 자청하여 그 길을 걸어가셨던 것입니다. 구레네 시몬이 처음에 그랬듯이 우리도 자신이 마치 예수님의 십자가를 대신 지고 가고 있는 것 인양 여기고 있지 않습니까? 마치 큰 호의라도 베푼 것 인양 생색내고 있지는 않습니까?

주님은 당신의 계획에 시몬을 초대하셨습니다.

 구레네 시몬은 이 사건을 계기로 그의 온 가정이 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게 되었습니다. 그의 아들 루포와 알렉산더는 훗날 초대교회에서 없어서는 안 될 정도로 유명한 주의 일꾼들이 되었습니다. 루포의 어머니, 즉 시몬의 아내는 사도 바울이 ‘나의 어머니’ 라고 부를 정도로 존경받는 신앙의 위인이었습니다. 모든 게 다 시몬이 예수님의 십자가를 억지로 짊어지고 간 사건을 계기로 시작된 것입니다.

2천 년 전 구레네 시몬이 ‘십자가의 길’로 초청되었던 것처럼, 주님은 지금도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을 부르고 계십니다. 그 십자가의 길로 나아오라고 말씀하시면서.......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아직도 이런 생각들을 떨쳐버리지 못하고 있습니까?

 ‘이것은 주님의 일인데 왜 내가 이것을 짊어져야 되죠? 왜 내가 그 일에 헌신해야 하는 거죠? 주님의 일을 위해 왜 내가 내 시간, 내 노력을 기울어야 되는 거죠? 이런 것들은 나와는 상관없는 순전히 주님의 일이 아닙니까? 주님! 당신은 지금까지 내게 너무도 많은 것들을 요구해왔고, 지금도 요구하고 있습니다. 왜 자꾸만 나를 귀찮게 하는 거죠? 억지로 내게 떠맡기지 마세요. 저는 이렇게 뒷짐 지고 물러서서 구경만 하다 가렵니다. 이젠 제게서 신경 끄시죠!’

 그렇지가 않습니다. 절대로 그렇지가 않습니다. 주님의 지셨던 그 십자가는 바로 내가 져야했던 것이라구요. 그런데도 주님은 마치 자신의 것 인양 아무 말 없이 묵묵히 골고다 언덕길을 걸어가고 계셨던 것이랍니다. 우리는 어쩌면 구레네 시몬처럼 처음에는 ‘억지로’, ‘다른 사람에게 떠밀려서’ 여기까지 와 있는지도 모릅니다. 여러분~ 부득이 함으로 시작하였다 할지라도, 우리는 지금 이 순간부터라도 자원하는 마음으로, 기쁜 마음으로 우리에게 주어진 그 길을 걸어가기 마다 하지 않아야 할 것입니다.

이제야 그 십자가 앞으로 다가섭니다.

 ‘이제야’ 그동안 주님이 내 대신 지고 가던 그 십자가 앞으로 다가갑니다. ‘이제까지는’ 나와는 전혀 상관없는 줄 알고 살아왔습니다. ‘여태껏’ 십자가가 내 자신의 것이라고는 추호도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그리고서는 예수님께서 도살장에 끌려가는 양처럼 묵묵히 나아가실 때, 그저 수많은 군중들 속에 파묻혀 방관자, 구경꾼으로 서 있었던 것입니다. 강 건너 불구경 하듯이, 남의 일 보듯이 그저 그렇게 서 있었던 것입니다.

 주님은 이 시간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더 이상 방관자로 서 있지 말고 가까이 나아오라”

 이제야 제 것이었음을 깨닫고 십자가 앞으로 나아옵니다. 이제야 내 십자가, 내 사명인줄 알고 골고다 언덕길로 나아옵니다. 여러분, 그 십자가의 길이야말로 우리가 평생 걸어가야 할 길입니다. 물론 그 길엔 수많은 사람들의 조롱과 무관심 등이 가득합니다. 그렇지만 그 길은 앞서간 믿음의 선배들(선진들)이 한 사람도 예외 없이 지나간 길이며 지금도 많은 믿음의 사람들이 그 길로 나아가고 있습니다. 그들은 우리를 향해 어서 오라고 손짓하고 있습니다.

“........그에게 십자가를 지워 예수를 따르게 하더라”

 여전히 주님은 시몬의 앞에 서서 그 길을 걸어가셨습니다. 시몬 혼자 걸어가도록 내버려두지 않았습니다. 마찬가지로 주님은 여전히 앞장서서 우리를 인도하고 계십니다. 그리고 우리에게 그 분의 뒤를 좇으라고 하십니다. 지금 결단하십시오. 예수님은 두 번 십자가에 못 박지 마십시오.

 “한 번 빛을 받고 하늘의 은사를 맛보고 성령에 참여 한 바 되고 하나님의 선한 말씀과 내세의 능력을 맛보고도 타락한 자들은 다시 새롭게 하여 회개하게 할 수 없나니 이는 그들이 하나님의 아들을 다시 십자가에 못 박아 드러내 놓고 욕되게 함이라”(히6:4~6)

직접 못 박지는 않았어도 결국은 인간 모두가 자신의 죄로 예수님을 못 박은 것인데 이를 깨달은 후에도 또 다시 예수님을 저버리는 것은 예수님의 희생을 모독하고 그분을 다시 못 박는 큰 죄를 자행하는 것입니다. 결단하십시오. 그리고 돌이키십시오.

 

 

안식 후 첫날(24:1~12)

* 최초의 부활절 ‘안식 후 첫날’

 “안식 후(그 주간의) 첫날 새벽에 이 여자들이 그 준비한 향품을 가지고 무덤에 가서.”(눅24:1)

 오늘은 “이르시기를 인자가 죄인의 손에 넘겨져 십자가에 못 박히고 제 삼일에 다시 살아나야 하리라 하셨느니라...”(눅24:7)는 말씀처럼, 우리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셨다가 삼일 만에 다시 사신 것을 기념하는 ‘부활절’ 또는 ‘부활주일’입니다. 오늘 이 시간은 역사상 최초의 부활절을 말씀을 통해 살펴봄으로써 받은 바 그 은혜들을 함께 나누고자 합니다.

 역사상 최초의 부활절은 언제였습니까? ‘안식 후 첫날’입니다. 다른 복음서를 봐도 마찬가지입니다. “안식일이 다 지나고 안식 후 첫날이 되려는 새벽에...”(마28:1) /“안식 후 첫날 매우 일찍이 해 돋을 때에...”(막16:2) /“안식 후 첫날 일찍이 아직 어두울 때에...”(요20:1) /“이날 곧 안식 후 첫날 저녁 때에...”(요20:19) 이처럼 사복음서 기자 모두가 아무런 이견 없이 최초의 부활절을 ‘안식 후 첫날’로 증거 하고 있는데 이는 이후 (기독교인들이) 안식일에 예배를 드려 왔던 유대인들의 전통을 깨고 이 날에 예배를 드리는 시작했다는 점에서 중요한 의의를 지니고 있다 하겠습니다.

 ‘안식 후 첫날’은 언제입니까? ‘그 주간의 첫날’로 오늘날의 ‘주일’(Lord`s day)에 해당합니다. 그렇다면 ‘주일’이라는 용어는 언제부터 사용되기 시작한 것일까요? 초대교회 때부터입니다. “주의 날에 내가 성령에 감동되어 내 뒤에서 나는 나팔 소리 같은 큰 음성을 들으니.”(계1:10) 행20:7과 고전16:2 등이 이를 뒷받침하고 있으며, 초대 교부들의 문헌 역시 초대 교회가 ‘주의 날’이라는 날로 일컬어진 특정일에 모여 예배와 친교를 가졌다고 증언하고 있습니다. “매주 첫날에 너희 각 사람이 수입에 따라 모아 두어서 내가 갈 때에 연보를 하지 않게 하라.”(고전16:1) /“그 주간의 첫날에 우리가 떡을 떼려 하여 모였더니 바울이 이튿날에 떠나고자 하여 그들에게 강론할 새 말을 밤중까지 계속하매.”(행20:7)

 한편, 초대교회는 왜 이 날, 즉 ‘안식 후 첫날’을 ‘주의 날’이라 부르면서 (이 날에 모여) 예배와 친교를 가졌던 것일까요? 한 마디로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기리기 위함입니다(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기리는 ‘안식 후 첫날’에 더 큰 의미를 부여했기 때문). 그 당시 안식일이 더 이상 시간적 구속력을 강요하는 율법적인 멍에가 아니라는 점이 (성도들에게) 점차 보편화 되자(골2:16), 안식일의 기본 정신을 폐기하지 않으면서도 예수님의 부활을 기릴 수 있는 ‘안식 후 첫날’에 더 큰 의미를 부여하기 시작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먹고 마시는 것과 절기나 초하루나 안식일을 이유로 누구든지 너희를 비판하지 못하게 하라.”(골2:16)

 그러다가 로마인들이 태양의 날(Sun-day)로 인정했던 주간의 첫날이 AD 321년 콘스탄틴(274~337) 대제에 의해 공유일화 되면서 ‘공의로운 해’(말4:2)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날로 굳어진 것입니다. “내 이름을 경외하는 너희에게는 공의로운 해가 떠올라서 치료하는 광선을 비추리니 너희가 나가서 외양간에서 나온 송아지 같이 뛰리라.”(말4:2)

* ‘주일’(Lord`s day)를 통해 구현된 부활신앙

 “주의 날에 내가 성령에 감동되어 내 뒤에서 나는 나팔 소리 같은 큰 음성을 들으니.”(계1:10)

 여기서 ‘주의 날’(Lord`s day)은 무엇을 가리킵니까? (예수께서 부활하신) 안식 후 첫날, 즉 오늘날의 주일(主日)을 의미합니다. 결국 사도 요한은 언제 성령에 감동되어 환상을 본 것입니까? 주일입니다. 아마도 그는 주일을 맞아 홀로 하나님 앞에 예배하다가 환상을 본 듯합니다. 그렇다면 요한은 왜 ‘안식 후 첫날’, 즉 ‘그 주간의 첫날’을 ‘주의 날’로 부르고 있는 것일까요? 당시 성도들 역시 무슨 이유로 ‘안식 후 첫날’을 ‘주의 날’이라는 부르게 된 것일까요? 물론 여러 가지 이유들이 있을 수 있겠지만, 여기서는 다만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에 대한 신앙고백’과 관련해서 생각해 보았으면 합니다.

 기독교를 흔히 ‘부활의 종교’ 혹은 ‘빈 무덤의 종교’라고 일컫습니다. 무슨 이유에서입니까? ‘부활’이 없으면 기독교는 아무 것도 아니기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과) 부활이야말로 기독교의 가장 중요한 진리로서 우리의 신앙과 소망의 근거가 되고 복음 전파의 요체가 되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께서 만일 다시 살아나지 못하셨으면 우리가 전파하는 것도 헛것이요 또 너희 믿음도 헛것이며 또 우리가 하나님의 거짓 증언으로 발견되리니 우리가 하나님이 그리스도를 다시 살리셨다고 증언하였음이라.... 그리스도께서 다시 살아나신 일이 없으면 너희의 믿음도 헛되고 너희가 여전히 죄 가운데 있을 것이요 또한 그리스도 안에서 잠자는 자도 망하였으리니...”(고전15:14~19)

 그러므로 초대교회 성도들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신의 부활사건을 통해 이 세상을 다시금 새롭게 재창조하셨음을 기념하기 위해서 우리 주님의 부활하신 날, 즉 ‘안식 후 첫날’(그 주간의 첫날)을 ‘주님의 날’로 부르면서 이날에 예배와 친교를 갖기 시작한 것입니다. 안식일에 예배를 드려 왔던 유대인들의 전통을 과감히 깨뜨리고서 말입니다.

 결론적으로, ‘주일’(Lord`s day)에는 초대교회 성도들의 어떤 신앙고백이 담겨져 있다고 볼 수 있습니까? (역사상 최초의 주일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다시 살아나신 ‘안식 후 첫날’이라는 점에서 볼 수 있듯) 그들의 ‘부활신앙’입니다. 즉, 그들은 분명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하심을 증거 하는 것은 물론 부활신앙에 대한 자신들의 신앙고백을 분명히 하기 위해 ‘주일’을 지키기 시작했던 것입니다. 우리는 어떻습니까? 주일에 담긴 초대교회 성도들의 부활신앙을 우리 역시 소유하고 있습니까?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요11:25) /“그러나 이제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사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가 되셨도다.”(고전15: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