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구약 성경강해***/- 누가복음 강해

누가복음 개론

에반젤(복음) 2019. 10. 6. 15:47




가복음 개론



누가 기자는 창조된 이 땅의 세계를 주목한다. 신 앞에 서있는 인간을 주목한다. 이 땅에서의 삶, 이 땅에서의 하루, 지극히 작은 하루가 곧 영원의 꽃을 피우는 시간과 공간이다. 현재를 영원처럼 사는 일, 현재를 온 생명으로 사는 일, 필시 예수께서 증거하는 하나님나라의 복음은 현재의 삶을 유보하는 특별한 진리를 명령하는 대신, 현재의 삶이야말로 영원이 꽃피는 현장임을 말하고 있다. 그래서 누가 기자는 전통적으로 시공을 초월한 신학적 주제들(예컨대, 선택, 구속, 하나님나라, 재림 등)을 “지금 여기에서”라는 인간의 역사틀 속에서 펼쳐 보이고 있으며, 복음의 출현시점을 당시 헬라문화의 중심이라 할 수 있는 로마와 주변 세계 속에 자리매김하고 있다. 그 이유는 복음을 새 시대가 소화할 수 있도록 현재적 인간 역사의 플롯으로 설명하기 위함이다(synchronization). 우리가 발을 딛고 있는 지금 이 땅이야말로 육체를 가진 인간이 유일하게 하나님을 만나고 체험하는 장소이기 때문이다. 누구보다 예수는 이 땅에서의 “덧없는 삶”을 죽도록 사랑함으로써, 현재에 이미 영원을 살기 시작한다. 현재가 가지는 즉흥성의 덧없음에 파묻히지 않고, 그 속에서 영원의 번뜩이는 섬광을 발견하고, 매일의 삶이 기적으로 살아나게 하는 것, 그것이 예수께서 이끄는 하나님나라에 참여하는 조건이다.


        누가는 단순히 종말적 시간 프레임 속에서 지연된 종말을 대체하는 현재의 기능적 가치를 말하고 있지 않다. 현재의 교회시대는 우리의 합당한 반응에 의해 구원사가 결정되는 시공간이다. 종말적 성취에 지나치게 집착하고 있던 바리새인들과 달리 예수는 평범한 삶에서 멀리 떨어진 별도의 시간과 장소를 말하지 않는다. 그리고 그것을 위해서 현재의 삶을 유보하는 어떤 언급도 하지 않고 있다. 삶을 이탈하는 종교는 축복된 삶을 묶는 쇠사슬이기 때문이다. 종교는 이 창조된 세계와 매일의 일상 속에서 모든 존재가치의 아름다움과 신비를 발견하는 눈을 깨우치는 것이고 감동하며 놀라는 일이다. 금방 지나가 버리고 말 존재들이지만, 창조 세계 안에 숨 쉬고 있는 “신적인 절대미”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관람하며 감동하는 것이 종교의 본질이다. 그렇기에 종교에는 법칙이 따로 필요 없다. 마치 사랑에는 법칙이 필요 없듯이, 그리고 섬김에도 법칙이 필요 없듯이. 또 다른 거룩의 영역을 창조하려는 어리석음을 누가의 예수는 경계한다. 오직 있는 삶을 그대로 받아들이고, 그대로 신적 감동에 사로잡히는 것, 바로 예수께서 그렇게 하셨다.

        

I. 온 인류의 구주, 소외인간 예수

        인간은 모두 고통스런 삶을 회피하고 행복과 안락을 추구하려는 본능을 가진다. 더 많은 재물, 더 좋은 직위, 더 큰 행복과 건강, 더 멋진 조건을 가진 배우자를 차지하려는 노력은 바로 인간의 한계를 회피하려는 지극히 본능적인 행동들이다. 이기적인 유전자의 지시에 따라 본능적으로 사는 삶. 그러나 우리의 진정한 행복은 과연 어디서 오는 것인가. 누가는 예수를 단순한 유대인의 왕이 아니라 모든 인류 공동체의 소망을 성취하는 대표자로 소개하는 그의 족보를 필두로 해서(3:23-38), 약하고 소외된 자들 즉 사회 변두리 인생들에 대한 광범위하고 깊은 사랑과 연민을 갖고 계신 하나님의 “아들됨”을 주목한다. 인간의 행복은 인류 공동체가 모두 하나님의 아들과 딸로서 하나님의 한 가족이라는 것을 깨달을 때 가능한 것이기 때문이다.


        예수는 어느 그룹보다 먼저 병들고 가난한 자들을 만나 손을 대시고 치유하며 회복하시고 그들과 어울리신다. 그분은 심지어 “세리와 죄인들”과 더불어 먹고 마시며 돌아다닌다고 “먹보” 혹은 “술주정뱅이”라는 비난을 받을 정도였다(15:1-2). 그런 비난에는 오히려 소외된 자들에 대한 예수의 정중함과 심각함이 엿보인다. 특히 당시 가정적 사회적 권익을 전혀 기대할 수 없었던 아이들에 대한 사랑(8:49-56; 9:37-48; 18:16)이나, 사회-종교적 편견과 차별로 현저한 불이익을 받고 있던 여성들에 대한 배려는, 단지 사회적 약자를 돌보아야 한다는 교훈 차원을 넘어, 하나님나라의 새질서에 합당한 반응을 보이는 진정한 모범 사례로 소개하려는 의도가 깔려있다(엘리사벳, 마리아, 안나, 나인성 과부, 향유를 부은 여인, 함께 섬겼던 여인들, 18년간의 병에서 치유된 여인, 잃은 동전을 찾아내는 여인, 십자가 처형시 울던 여인들, 부활의 최초 목격자 막달라 마리아 등). 하나님의 가족을 회복하기 위하여, 메시아는 종교의 궤도를 대대적으로 수정한 것이다. 한 걸음 더 나아가, 바리새인들과의 수차례에 걸친 해석적 논쟁을 통해, 예수는 종교적 삶에 덧칠된 온갖 거짓과 위선을 과감하게 벗김으로써 스스로 변두리 인간으로 소외되었다. 삶의 궁극적인 보장과 진정한 의미가 재물이나 지위, 가족관계 그리고 전통을 따르는 데 있다는 환상을 떨쳐 버릴 때, 즉 거짓된 희망의 유혹으로부터 자신을 해방시키는 사람이 새 시대의 주인공이 되기 때문이다.


II. 실패와 거절, 기다림의 길을 가는 예수

        누가복음은 서두의 유년기사(1:5-2:52)와 더불어, 예수께서 예루살렘으로 여행하는 소위 “중앙부분”(9:51-19:44)에 복음서의 가장 중요한 특징들을 담고 있다. 그의 여행은 유년기사의 화려한 예고와는 달리 십자가 처형이라는 끔찍한 종말로 막을 내린다. 예수의 예루살렘 여행은 과연 실패한 것인가. 예수의 여행은 애초부터 예루살렘에 시온의 왕국을 건설하여 거기에 다윗의 깃발을 꽂고 왕으로 취임하기 위한 것이 아니었다(이점은 부활 후 신앙공동체에서도 오해를 받고 있는 부분이었다, 행 1:6). 예수의 목적은 당시 바리새주의가 꾀하던 것처럼 왕좌에 오르고 평안을 누리는 것이 아니었다. 예수는 실패하기 위해 예루살렘으로 떠났다. 그것은 “거절”의 여정이었다(9:22; 20:17). 그분은 이미 거절의 길을 가야하는 자신의 미래를 처음부터 알고 있었고 또 나사렛 회당에서 그렇게 선포하지 않았던가. 그는 성전 안에서도 거절당했고, 성전 밖에서도 거절당했다. 안식일에도 거절당했고, 평일에도 거절당했다. 높은 자나 낮은 자나 종교를 가진 자나 안 가진 자들에게 모두 거절당했다. 그리고 가장 사랑하는 가족들에게도 거절당했다(누가는 심지어 모든 제자들이 어떻게 자기 스승을 거절하는지의 역설적인 과정을 담고 있다). 예수는 헨리 나우웬의 말처럼, 자신이 당한 거절의 상처를 치유하면서 다른 이들의 붕대를 풀어주는 “피투성이” 메시아다. 피투성이로 사랑하고 피투성이로 전쟁하며 피투성이로 여행하는 메시아다.


        거절을 통한 구원의 성취는 역사의 첫 순간부터 예수사건은 물론 그 이후 지속되는 교회시대에 이르기까지 계속 이어질 것이다. 예수의 뒤를 따르는 자들은 진리와의 깊은 관계를 추구하며 모든 부적절한 힘으로부터 거절당함을 기뻐한다. 그것은 맏형 예수 그리스도(히 2:11-18)의 모범, 즉 하나님나라를 인격적 교제와 연합의 자리가 아닌, 장사하는 강도의 굴혈로 변질시키는 종교를 청소하기 위한 고통에서 비롯된다. 그리고 그를 따르는 모든 동생들에게도 동일한 ‘불’과 ‘검’이 주어진다(눅 12:49, 51). 예수께서 그렇게 거절의 여행을 계속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하나님 나라의 백성으로서 진정한 자유와 진리를 추구하는 자의 고통과 대가가 무엇인지를 보여주기 위함인가? 우리는 예수의 거절을 이해하는 데 엄청난 어려움을 느낀다. 왜냐하면 우리 자신들의 현재 여행이 거침없이 그리고 현저하게 예수를 거절하고 있기 때문이다. 예수를 거절하도록 세워진 질서 속에 파묻혀 함께 동조하며, 더 멋진 ‘거절의 기술’을 신학교 안팎에서 배우고 연마하면서 아무 일 없다는 듯이, 광야길이 아닌 세련된 하이웨이를 질주하고 있기 때문이다. 


        예수의 사역을 눈여겨보면, 처음에는 수많은 일들을 행하며 메시아로 데뷔하실 만한 화려한 능력들을 거침없이 사용하는 것을 볼 수 있다. 그는 복음을 가르치고 선포하며, 소외된 자를 위로하고 그들과 깊은 교제를 나누었으며, 병자를 고치고 귀신을 쫒아내며 죽은 자를 살렸다. 많은 여행을 다녔으며, 바다를 잔잔케 하는 등 초자연적인 이적도 많이 행했다. 한마디로 예수는 모든 면에서 신적 주도권을 쥐고 있었다. 그러나 예수는 재판석에 넘겨지는 순간, 순식간에 어떤 일이든 당하는 사람이 되었다. 체포되었고, 대제사장에게 끌려갔고, 빌라도 재판에 넘겨졌고, 옷이 벗겨지고 머리에는 가시관이 씌워졌으며, 온갖 참을 수 없는 모욕과 수모를 받고, 결국은 십자가에 못 박혔다. 그런 예수의 입에서 마지막 떨어진 “다 이루었다”라는 말은, “내 소명을 완수하기 위해서 나에게 행해져야 할 일이 완수되도록 다 허락하였다”라는 의미를 강하게 암시한다. 해야 할 행동의 사역을 다 하였을 뿐만 아니라, 당해야 할 수난을 다 당했다는 말일 것이다. 


        그래서 예수의 진정한 수난은 거절이라기보다는 바로 “기다림”이었다. 그의 기다림은 위대한 드라마다. 세상을 깜짝 놀라게 한 온갖 초자연적인 이적들보다도, 그의 기다림이야말로 더욱 위대한 사역이다. 그분은 무엇을 행하기 위해 온 것이 아니라, 이 기다림과 수난을 위해 예루살렘에 올라갔다.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에 담겨있는 예수의 고뇌는 죽음에 대한 고뇌가 아니라, 인간을 의존해야만 완성할 수 있는 신적인 기다림, 성육신의 고뇌였다. 연약하고 고통 속에 있는 인간들과 예수 자신을 완벽하게 동일시하는 기다림의 역설적 함성이었다. 기독교 사역자의 진정한 고통은 자신에게 주어진 “파워의 사용”을 포기하고 기다리는 일이기에 야기되는 것이다.

        

III. 현재적 삶 속에서 날마다 요구되는 회심

        누가는 인간이 아담의 범죄로 인한 타락 때문에 고통당하고 있음을 전제하고 있다. 예수의 사역은 하나님나라의 성취를 위하여 인간들을 유린하는 죄와 마귀의 세력을 꺾는 데 초점을 맞추고 있다. 그런데도 예수는 인간이 여전히 인간으로서의 창조적 신비를 간직하고 있으며, 자신들의 전 생애 속에서 하나님의 요구에 대답해야 하는 책임있는 존재임을 인식하고 있다. 인간의 원죄는 선과 악도 스스로 분별할 수 없을 만큼 인간을 헤어날 수 없는 무능력에 가두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어떤 모습의 삶이든 인간은 그 모든 삶을 최후의 순간까지 자기 책임아래 두고 씨름해야 한다. 창조주의 절대주권을 고백하는 것이, 자신의 선택과 결정에 따르는 책임을 유보하거나 회피할 수 있다는 의미가 아니다.


        그런데 무의미하게 반복되는 것처럼 보이는 우리의 일상에 우리의 선택과 결정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우리는 잘 알지 못한다. 우리는 평범한 하루를 살면서도 얼마든지 올바른 길을 선택할 수도 있고, 또는 죄악된 길을 선택할 수도 있다. 선택하고 결정할 책임은 신이 우리에게 주신 가장 고귀한 선물이다. 오스 기니스는 우리의 존재 전체는 하나의 들음이요 하나의 반응이라고 말한다. 인간은 그렇게 “반응할 수 있는”(responsible) 존재다. 신앙의 삶이란, 자기 인생의 매 순간에 대해 영원히 책임지기 위해 모든 가능한 것을 동원하는 삶을 말한다. 살아가면서 내리는 모든 선택과 결정은 모두 나의 몫이다. 세상의 주도권을 쥐고 계신 전능하신 하나님은 내 선택과 결정을 기다리며 그것을 존중하며 그것에 의존하신다.


        누가는 우리에게 닥치는 역경과 고난이 우리 인간의 책임을 회피하는 구실이 되지 않는다고 말한다. 우리는 현재의 삶 속에서 무엇이 “하나님의 뜻”인지 혼란스러워한다. 그러나 당면한 현실에서 올바른 선택을 하고, 고난 중에서도 낙심하지 않고 범죄하지 않으며, 꿈을 잃지 않고 사는 것, 즉 자기를 끝까지 책임있게 지키는 것이 현재적인 하나님의 뜻이다. 수많은 이방인들의 회심사건이 모범의 사례가 된다(사마리아인, 백부장, 혈루증 여인, 삭개오, 고넬료 등). 원죄의 사슬에 매여 있지만, 인간은 여전히 자신의 삶에 대하여 대답해야 할 책임있는 존재다. 누가복음은 인간의 죄악성과 그로 인한 형벌의 무거움보다는, 그러한 조건과 상황 속에서도 인간이 갖는 선택과 책임의 중요성을 외치고 있다. 그래서 누가복음에 나타나는 인물들은 위기의 경고와 회개의 촉구에 즉각 반응하며, 위기가 현실화되기 전에 돌이키는 특징을 갖는다(불의한 청지기, 십자가상의 죄인 등). 그들은 “어찌하여 옳은 것을 스스로 판단치 아니하느냐”(12:57)라는 예수의 촉구를 계속 듣고 있는 사람들이다. 모든 인간들에게는 스스로 판단하여 신 앞에 대답할 능력이 주어졌기 때문이다. 


IV. 세속적 순환고리 끊기의 복음

        유대전승에는, 50년마다 희년(Jubilee)을 지켜 빚을 탕감해주고 노예를 풀어주며 저당잡았던 논과 밭을 원주인에게 돌려주라는 모세의 율법에 대하여, “프로스불”(Prozbul)라는 안티(反) 희년법을 제정하고 그 율법이 시행되지 못하게 막은 장본인이 랍비 힐렐(Hillel)이라고 말한다. 그것은 물론 희년이 다가오면서 부자들이 돈을 잘 풀지 않는 문제를 해결하여, 가난한 자들에게 돈을 빌려주도록 하는 계기가 되기는 했지만, 결국 채권자들의 이익을 위해 채권을 법정에서 보호해주면서, 하나님의 명령을 어기는 결과를 낳았다. 그러나 누가복음은 마리아의 찬가(1:46-55)나 예수의 나사렛회당 설교(4:16-30), 그리고 지혜로운 청지기 비유(16:1-9) 등을 통해, 부자들에게 신앙 공동체 안팎의 가난한 자들에 대한 복음의 현실적 가치 실행을 촉구하고 있다.


        특히 나사렛 회당 설교에서 예수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한다는, 그의 사역 전체를 포괄적으로 묘사하는 표현을 사용하였다. 가난한 자는 육체적으로 연약하고 병든 자와 영적으로 죄악에 빠져있는 자들, 즉 소외되어 살아가는 모든 사람들을 포함한다. 그들은 누가 공동체 안에 있거나 바깥에 있는 사람들이다. 이사야 61:1,2과 58:6을 인용함으로써 두드러지게 강조되는 복음의 이미지는 구약적 희년(Jubilee)과의 연속성을 말해준다. 물론 그런 인용을 통하여 예수께서 레위기 25장이나 신명기 15장에서와 같은 구약적 희년 시행을 문자적으로 요구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다만 희년에 관한 언어를 사용함으로써 메시아가 성취하려는 종말적 구원의 성격을 분명히 밝히려는 것이다.


 대표적인 두 가지 희년 언어가 사용되고 있다. 첫째, 노예를 풀어주고 얽매인 부채에서 해방시켜 준다는 ‘자유’(liberty)라는 언어의 빈번한 사용이다. 그 단어는 ‘죄사함’과도 직접 연관된 언어이며(1:77; 3:3), 간접적으로는 유년 기사에서 마리아의 찬가의 핵심을 이루는 종말의 대역전(1:51-53) 주제와 맞닿아 있다. 예수께서 전하는 복음은 통전적이다(holistic). 그것은 개인과 공동체, 영적이면서도 육체적인 삶의 전반을 아우르면서, 창조질서를 왜곡하고 유린하는 모든 거짓 질서와 악의 굴레를 깨뜨리는 목적을 가진다. 누가복음과 초기 예루살렘 공동체에 관한 묘사를 보면, 특히 희년적 자유의 복음을 시행해야 한다는 누가의 주된 관심이 경제적 영역에 모아지고 있음이 분명하다. 그것은 가난한 자에 대한 주제와 관련하여 누가복음 16장의 ‘지혜로운 청지기 비유’나 사도행전 2, 4장의 초기 예루살렘 제자공동체의 재물공유로 아름답게 나타난다. 두 번째로 누가가 사용하고 있는 주된 희년 언어는 사 61:2a를 인용하고 있는 ‘주의 은혜의 해’라는 단어다. 정확하게 번역하기 어려운 히브리적 개념이다(‘쿠리우 데크톤,’ 즉 ‘주님이 받으실 만한 해’: the acceptable year of the Lord). 그 단어는 희년을 상징하는 신명기적 ‘셰미타’ 혹은 ‘데로우’와 같은 개념이다. 예수께서는 지금 청중을 향하여 희년 성취적 성격의 복음을 선포하고 계신 것이다.


        가난한 자의 문제와 관련하여 누가가 매우 중요하게 사용하고 있는 개념들이 있다. 당시의 그레코-로만 사회는 광범위하게 ‘균형잡힌 주고받기 문화’(balanced reciprocity)가 오늘날보다 훨씬 정례화 되어 있었다. 이것은 일반적으로 비교적 짧은 시간 내에 등가의 가치를 주고받는 것이 예상되는 사회 시스템이었다. 서로 주고받는 격을 맞추기 위한 것이다. 그것은 서로의 명예를 존중하는 방식이었다. 만일 상대방의 명예를 더럽히고 수치를 주었다고 판단되면, 그는 교제의 범주(circle)에서 배제되었다. 그렇게 때문에 그러한 신분적 균형을 깨는 교류나 거래는 거의 일어나지 않았다. 그러나 누가복음은 폐쇄된 주고받기 식 고리를 끊고 팽팽한 균형을 깨라는 예수의 말씀을 중요하게 부각시키고 있다. 가문의 명예가 실추되고 신분상 수치를 당하더라도, 잔치 자리에 오히려 가난한 사람들과 장애인들을 초청하라는 것이다. 예수께서 제시하는 이유는 우스꽝스러울 만큼 분명하다. 그들은 다시 초청해 갚을 능력이 없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이들이야말로 다른 사람을 축복할 진정한 권리를 갖기 때문이다. 그렇게 예수께서 장담하는 이유는, 그러한 선행이 부활 시에 반드시 보상을 받기 때문이라고 한다. 당시 사회의 후견인 제도(patronage system) 속에서 충분히 이해되는 개념이다. 세상의 균형적인 주고받기 식 시스템에 따라 상대방으로부터 일정량 돌아올 것을 전혀 기대하지 말라는 것이다. 오직 하나님만을 최고의 후원자(supreme benefactor), 유일한 후견인으로 삼으라는 것이다. 하나님의 아들은 그렇게 갚을 길 없는 자들을 초청하기 위해 직접 이 땅에 뛰어내려온 메시아다. 그분은 진정한 초청자가 되기 위해, 스스로 ‘소외인간’으로 머물렀다. 그러한 행동은 종교지도자들에게는 상식 밖의 파계(破戒)행위, 종교가 감히 해서는 안 되는 행위였기에, 그들과의 갈등은 애당초 좁혀질 수 없는 것이었다. 그것은 이스라엘이 그동안 지켜왔던 거룩함의 에토스(ethos)와 그 정치세계를 근본적으로 뒤흔드는 일이기 때문이다.

        

V. 경계넘기의 언어, 비유

        누가복음은 비유의 복음이다. 누가의 비유는 공관복음서들이 공통적으로 다루고 있는 하나님나라의 원리와 관련하여, 별도의 영역이 아닌, 세상을 살아가는 모든 사람들의 삶 자체에 초점을 맞추는 의미를 가진다. 사람들의 현재적 삶 속에서 어떻게 회개하고 어떻게 선한 삶을 살 수 있는지를 구체적으로 보여준다. 왜냐하면, 비유의 이야기들 속에는 예수가 하나님나라의 주인으로서 어떻게 ‘하나님처럼’ 말씀하는지가 나타나기 때문이다. 비유는 추상적이나 신학적이라기보다는, 일상적이고 체험적인 언어다. 따라서 일부 계층만이 알아들을 수 있는 논리적, 체계적으로 설명하는 세련된 언어가 아니고, 평범한 사람들이 이해할 수 있도록 사건 속에서 특정한 단면을 두드러지게 극화시킨 보편적인 생활언어다. 비유는 경전의 법적 의미를 해석하거나 일상적인 교훈을 해석하기 위해 현시대적인 삶의 경험과 관련시키면서, 성경이 무엇을 의미했느냐(what the Bible meant)의 문제 보다는 성경이 오늘날 우리에게 무엇을 의미하느냐(what the Bible means)의 문제에 더 많은 관심을 집중시킨다. 


        비유는 하나님의 권위를 스스로 저버리는 어리석은 언어다. 그러나 비유는 성육신적 언어요 화해의 언어다. 비유는 고정된 울타리를 뛰어넘어 새로운 생각으로 나아가는 새로운 형식의 계시언어다(liminality). 비유는 삶의 우선순위를 뒤흔듦으로써 특정그룹이 사용하던 세련된 절대언어의 억압적 목소리를 경계선상에 세우고, 하나님나라의 새틀짜기를 시도한다. 비유는 특별한 시간, 특별한 장소, 특별한 지식(소위, 그노시스)이 필요한 종교를 경계한다. 우리의 평범한 삶의 자리가 곧 하나님나라의 무대가 된다. 삶이 진리의 수단이 아니라 곧 목적이다. 비유는 대부분 물질세계에서 체험되는 실제적인 이야기로서, 가정적 또는 일상적인 세밀함과 자상한 인물묘사가 두드러진다. 빚쟁이, 강도, 여행자, 부자, 가난한 자, 주인, 손님, 청지기, 목자, 여인, 창녀, 세리, 왕, 아버지, 아들 등을 소개하는 세계는 보통 자연스러운 인간의 세계다. 비유는 그런 인간의 물질세계에 하나님나라가 이미 뚫고 들어왔음을 보여준다. 특정 층의 세련된 언어개념으로 축소되어가던 사회-종교적 흐름을 차단하는 판막이 같은 역할을 한다. 그동안 은밀히 감추어졌던 힘과 권세의 상징이던 모든 절대언어의 가면을 벗기고, 그들의 절대가치를 상대화시켜 버린다. 어찌 보면 비유는 감성의 언어요 연약한 언어다. 인간의 오관과 육신이 지적언어의 감옥에서 벗어나 살아난다. 물론 지성은 직관을 지지하고 방향을 제시하는 역할을 한다. 지성은 분석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감성만이 지성의 부분적 지식을 결합하고 체험으로 포착할 수 있는 전체를 만든다. 초월자의 놀라운 계시는 이제 어리석은 형태인 비유를 통하여 연약한 인간과 역사에 의존한다.


VI. 누가복음 전체개관과 구조

        누가복음은 1세기 후반의 헬라문명 속에서 살아가는 신앙공동체(일차적으로는 시리아의 안디옥 공동체)를 향하여 전승된 자료를 새롭게 해석하고 적용하는 복음서로서 다음과 같은 독특한 의도를 갖는다. 첫째, 하나님의 아들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는 기존의 질서에 얽매이지 않고 모든 계층의 인간들을 대상으로 새 시대 하나님나라의 백성모집을 주도하신다. 둘째, 모세와 같은 선지자 예수는 신앙공동체와 함께 광야 같은 세상을 여행하는 동안 그들을 훈련시키면서 하나님의 주권적 은혜 베푸심에 합당한 반응, 즉 회개와 죄용서의 삶을 향한 결단을 내리도록 가르치신다. 셋째, 복음의 선포자 예수 그리스도는 취임설교(4장) 및 복음서 중앙부분 등의 수많은 비유들을 통해(특히 15-16장), 신앙공동체가 복음의 구체적이고 현장적 행동원리인 사회-경제적 희년(jubilee) 회복을 이룰 수 있도록 지금 여기에서 십자가적인 희생과 포기의 삶을 살도록 촉구하신다. 누가복음의 개략적인 구조는 다음과 같다.


1.서론(1:1-4)

2.유년기 기사(1:5-2:52)

        i.요한과 예수의 탄생예고(1:5-38)

        ii.두 어머니의 교제와 찬양(1:39-56)

        iii.요한과 예수의 탄생(1:57-2:52)

3.예수의 갈릴리 사역(3:1-9:50)

        i.공생애의 준비(3:1-4:13)

                1)요한의 세례사역(3:1-20)

                2)예수의 세례,족보,광야시험(3:21-4:13)

        ii.갈릴리 사역(4:14-9:50)

                1)유대회당 설교(4:14-44)

                2)제자 부름과 가르침, 이적행함(5:1-8:56)

        iii.예수의 정체성과 제자도(9:1-50)

                1)12명 파송(9:1-17)

                2)베드로의 고백과 변화산사건(9:18-50)

4.예수의 예루살렘 여행과 가르침(9:51-19:44)

        i.하나님나라에 대한 가르침(9:51-13:9)

                1)70인 파송과 제자도(9:51-11:54)

                2)일상속에서 깨어있기(12:1-13:9)

        ii.하나님나라에 참여하는 조건(13:10-17:10)

                1)하나님나라의 “불편한” 질서(13:10-14:35)

                2)하나님나라의 경제학(15:1-17:10)

        iii.하나님나라에 참여하는 자(17:11-19:48)

                1)합당하게 반응하는 자녀들(17:11-19:27)

                2)예루살렘 입성(19:28-44)

5.예수의 예루살렘 사역(19:45-24:53)

        i.정체성과 반대자들의 도전(19:45-21:38)

        ii.고난과 죽음(22:1-23:56)

        iii.부활과 승천(24:1-53)


VII.우리시대를 향한 메시지

        예수로부터 너무 멀리 떨어져, 기적이 더 이상 불가능해 보이는가. 매일 매일 벌어지는 엄청난 창조세계의 기적과 생의 신비에 대하여 아무런 놀라움도 느껴지지 않는가. 오히려 그러한 감동과 놀람은 이미 정지되고, 싸늘한 의식과 법칙만이 난무하는 그런 메마른 삶을 살아가고 있는가. 종교는 문법이 아니다. 종교란 이 땅에서의 삶의 도약을 위해, 창조된 사물을 다시 살펴보고, 본능과 직관으로 생명의 본질로 계속 들어가며, 끊이지 않는 영감을 공급하여 대지 위에서 창조의 삶을 펼쳐가게 하는 것이다.


        그렇게 창조적 대리자의 삶을 사는 자라야 사도행전 1장 8절의 명령을 진심으로 이행할 동력을 발견하게 된다. 교회란 멈춤과 이동의 신적 에너지를 품고 있는 사람들이다. 이동의 때가 되면 자신의 경계를 넘어 미지의 세계를 향하는 모험적인 진출을 감행하기 위해 도전해야 한다. 특히 예수의 증인이 되라는 말씀은 단지 해외선교를 명령하는 근거구절이 아니라, 적대와 긴장과 분열과 장벽의 경계를 뛰어 넘어, 희생을 감수하면서라도 평화의 관계를 창조하고 개척하는 자가 되라는 의미다. 그것이 이동하는 교회의 모습이다. 하나님의 가족을 회복하기 위해, 해묵은 적대 관계를 뛰어넘어 평화와 화해를 주도하면서 스스로 십자가의 길을 가는 것이다. 그 길은 자신의 계급적인 기반을 스스로 포기하고 허무는 운동이다.


 이 계절은 창조세계의 아름다운 정원을 가꾸며 온통 그리스도의 미소를 파송하고 있지 아니한가.

        


                                                               정종성(백석대학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