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저자 : 학개 (축제, 잔치, 향연의 의미) cf. 에스라5:1, 6:14에도 그의 사역이 언급되고 있다. 자신의 가문에 대한 소개는 없다. 그러나 학개는 "성공한 선지자"였다. 학개는 자신이 전한 메시지의 결과를 바로 눈 앞에서 볼 수 있었던 바 말로 표현하기 어려운 기쁨(학개)을 가졌던 몇몇 선지자들 가운데 한 사람이었다.
* 연대 : 다리오 2년 곧 B.C.520년 6월 초하루(1:1) ---- 말씀이 처음으로 임함
6월 24일 (1:15) ----- 성전 재건 시작
7월 21일 (2:1) ----- 다시 말씀이 임함
9월 24일 (2:10, 20) -- 말씀이 임함
* 대상 : 유다 총독 스룹바벨, 대제사장 여호수아, 포로에서 귀환한 이스라엘 백성들
* 주제 : 만약 하나님과의 복된 관계로 회복되기를 원한다면 삶 속에서 먼저 할 일을 먼저 하라.
* 개요 : 성전재건과 그 축복
1:1~11. 하나님의 명령 : 성전을 재건하라(첫 설교)
12~15. 백성의 순종
2:1~9. 재건될 성전의 영광(두번째 설교)
10~19. 순종하는 자가 받을 축복(세번째)
20~23. 스룹바벨에게 주는 약속(네번째 설교)
* 시대적 배경
B.C.605년 예루살렘의 1차 침입. 다니엘등이 포로됨,
BC.586년 예루살렘이 바벨론에 의해 멸망할 때 성전이 파괴되었다.
B.C.539년 바벨론의 멸망, 예레미야가 예언(렘25:11~12, 29:10, 대하36:21)했던 대로 70년이 되었을 때(B.C.605년부터 스룹바벨의 인도하에 제 1차 귀한 한 B.C.536년까지) 바벨론을 정복한 바사의 고레스는 이스라엘의 해방을 선포하였다. 바벨론과 달리 바사는 정책????
B.C.536년 여호수아와 스룹바벨을 중심으로 귀환한 이스라엘 공동체는 곧 성전을 재건하기 시작했지만 곧 어려움에 부딪쳐 성전재건은 중단되고 말았다.
그 이유는 첫째 주위에 있었던 사마리아인들의 방해 때문이었다.(스4:24) 둘째로 정치적 지원자였던 페르시아의 고레스왕이 전쟁중에 전사하고 말았다. 그 뒤를 이은 캄비세스는 대중적인 지지를 얻지 못해서 곳곳에서 반란이 일어났고, 이를 진압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사마리아인들은 이를 이용해서 유대인들이 모반하려 한다고 상소문을 왕에게 보냈었다. 곧 캄비세스는 성전 공사를 중단하라는 칙령을 내렸다. 셋째로 바벨론에 있는 동안 이스라엘은 성전 없이 예배드리는 일에 순응하였다. 또한 그들은 황폐된 예루살렘과 그곳의 적대행위와 고난을 보고 귀환운동에 환멸을 느꼈으며, 그 무렵 수확의 실패로 고난을 겪었고(학1:10~11), 각자 자신들의 집을 짓기에 몰두하였다(학1:9).
B.C.520년. 이러한 여러 원인들에 의해서 이후 15년의 세월이 흘렀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성전을 지을 때가 아니다"(학1:2)고 변명하면서 계속 성전을 방치해 두었다.
그러나 이런 상태로 계속 갈 때 이스라엘 공동체는 심각한 위기에 직면하게 될 것이 분명했다. 당시 이스라엘은 70여년의 포로생활을 거치면서 하나님의 백성으로서의 정체성이 희미해졌고, 또한 성전 재건이 중단된 15년 동안 이스라엘은 영적으로 심각한 침체기를 겪어야 했다. 말라기 선지자가 그들을 책망하며 말씀을 전한 것을 생각해 보라. 따라서 공동체는 내적으로 개혁하여 영성을 회복하고 방향성을 찾지 않으면 이웃 민족들과 사회 문화적으로 동화되어 결국 선민으로서의 정체성을 상실할 위험에 놓였던 것이다.
* 성전의 역사
창세기 곳곳에 세워진 제단들, 그들이 하나님을 만났던 곳에 세워졌었다. 그곳은 그들의 삶의 현장이었다.
야곱 : 벧엘에서 "하나님의 집" 하나님이 계신 곳이 바로 성전이고, 그래서 바로 그러한 곳에서 제단을 쌓았다.
1. 광야의 성막. 하나님이 그들가운데 계신 것을 증거하는 성막을 지었다. 그래서 성막에는 하나님의 구름기둥과 불기둥이 있었다. 하나님이 계시다는 것을 나타내었다. 이스라엘은 성막을 중심으로 진용을 짰었다. 성막을 앞세우고 광야를 여행했다. 성막, 회막, 장막이라 불리웠다. 이는 장막에 거하는 여호와의 임재를 강조하고 있다.
사사시대의 성막 : 주로 실로에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수18:1, 삿18:31, 삼상1:3). 이곳은 지파들의 중심지로서 에브라임 지파 영지의 중심부에 위치해 있었다. 그 이전에는 세겜과 벧엘에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존브라이트 p.224)
다윗이 언약궤를 옮겨옴 : 왕위에 오른 다윗은 예루살렘을 여부스족으로부터 점령하고 그곳을 수도로 삼았다. 이곳은 남부와 북부 두 지역의 중앙에 위치하고 어느 지파의 영토에도 속해 있지 않았기에 타협할 수 있었을 것이다. 또한 기럇여아림에 방치되어 있던 언약궤를 예루살렘으로 옮겨왔는데, 이로 인해 예루살렘은 정치적, 종교적 수도가 되었다. 이를 통해 다윗은 거의 독립적인 지파 동맹체제였던 이스라엘 각 지파들의 민심을 예루살렘으로 향하게 할 수 있었다. 다윗이 성전을 짓지 못했던 것은 당시 성소의 이동성을 원칙으로 한 전통과 지파 동맹의 중심으로서 그 지위를 회복 계승하기를 희망했던 선지자들의 요구에 따랐던 것으로 보인다. (존브라이트 p.272)
2. 솔로몬의 성전(대하2:1~7:22)
대하6:20 "주께서 전에 말씀하시기를 내 이름을 거기 두리라 하신 곳 이 전을 향하여 주의 눈이 주야로 보옵시며 종이 이 곳을 향하여 비는 기도를 들으시옵소서" 이 말씀은 성전을 그들의 삶의 중심에 두겠다는 다짐이면서 동시에 중심에 둔 성전에 항상 계시기를 간구하는 기도였다.
대하6:41 여호와 하나님이여 일어나 들어가사 주의 능력의 궤와 함께 주의 평안한 처소에 계시옵소서 여호와 하나님이여 원컨대 주의 제사장으로 구원을 입게 하시고 또 주의 성도로 은혜를 기뻐하게 하옵소서
그렇다면 예루살렘에 성전을 세우게 된 신학적인 이유는 무엇인가? 다윗과 솔로몬이 예루살렘에 도읍하고 그곳에 성전을 세워 법궤를 가져옴으로 예루살렘은 정치적 종교적인 중심지가 되었다.
성전은 침략자들에 의해 약탈을 당했고(왕상14:26), 자주 왕들에 의해서 정치적 힘이나 평화를 얻기 위해 약탈되었다.(왕상15:18, 왕하16:8)
요시야왕(B.C. 640년경) 대대적인 보수(왕하22:4이하)
B.C. 587 or 586년 바벨론의 느부갓네살에 의해 약탈 파괴됨(왕하25:9이하)
3. 학개, 스가랴, 스룹바벨에 의한 성전(제2성전)
귀환 포로들에 의해 B.C.536년 착공되었으며 B.C.534년 중단되었다가 15년 후인 B.C.520년 학개에 의해(스5:1, 학1:1) 재건되어 B.C. 516년에 완공되었다.(스6:14~15)
1차 파괴 뒤 포로에서 귀환한 사람들에 의해 재건되었기에 이 성전은 보잘 것 없이 작았고, 없는 것도 많았다.(학2:3) 쉐기나(하나님의 영광), 거룩한 불, 언약궤, 우림과 둠밈, 예언의 영 등 5가지가 없음, 일곱 개의 가지가 달린 등대 하나만 있을 뿐,
4. 헤롯 성전
B.C. 19년에 재개발을 시작하여 10년만에 핵심 건물 완공 A.D. 64년 까지 공사가 계속됨
A.D.70년 로마의 디도장군에 의해 파괴되었다.
* 이스라엘에 있어서 성전의 의미는?
고대 세계에서 성전 건립은 신의 현존에 대한 가시적인 상징인 동시에 성전 건립자를 승인해 주는 상징이기도 했다. 그래서 신전을 건립하는 것은 신과 왕들의 일이었다. 그러나 장막을 지을 때에는 하나님께서 백성들 사이에 거주하심(출25:8)을 약속하셨다. 솔로몬의 성전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로 약속하셨었다.
(왕상9:3 저에게 이르시되 네가 내 앞에서 기도하며 간구함을 내가 들었은즉 내가 너의 건축한 이 전을 거룩하게 구별하여 나의 이름을 영영히 그 곳에 두며 나의 눈과 나의 마음이 항상 거기 있으리니)
에스겔의 환상(겔40~44장)은 거룩함으로 회복되고 자기들의 땅 안에 재 설립되는 백성들 가운데서 하나님이 거주하실 것이라는 점을 상징적으로 보여 주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하나님께서는 온 백성이 함께 성전을 건축하기를 원하셨고 백성들은 자원하는 가운데 성전을 건축했다는 사실이다.
한편 예수님은 성전을 하나님이 그분의 백성 이스라엘 안에 거주하시는 장소로 보았다.(마23:21, 요2:16) 하지만 예수님은 성전보다 더 크신 분이시다(마12:6). 초대교회 때는 성전예배를 인정했지만 점차 특히 헬라파들은 변화를 시도하여 하나님은 인간의 손으로 만든 집에 거하시지 않는다고 주장했다.(행7:44~50, 행17:24) 바울은 더 이상 물리적인 건물을 가리키지 않고 기독교 신자들의 공동체로 언급하였다.(고전3:16, 17, 엡2:19~22) 계시록에 의하면 하나님 자신과 어린양이 그 성읍의 성전이 되실 것이며(계21:22), 하나님은 그의 백성들 사이에 거하실 것이다(계21:2,3)라고 말씀하고 있다.
이상의 자료들을 살펴볼 때 성전은 그 자체의 건물로서의 의미보다는 오히려 성전에 임재해 계시는 하나님에 중요성이 두어진다. 성전을 가지고 있다는 것은 하나님이 그들 중에 있다는 것을 나타내는 것이다.
따라서 만약에 성전에 하나님이 계시지 않는다면 그것은 아무 의미가 없다. 비록 그것이 아무리 아름답게 위용 있게 지어졌다 하더라도 의미 없는 것이 되고 말 것이다. 그러나 비록 성전이 초라하더라도 아니 성전이라 불리는 건물이 없더라도 하나님이 그들 중에 계시다면 그것은 바로 그곳이 성전이 된다. 이것이 신약에서 말하고 있는 개념이기도하다. 하나님은 그의 백성들 중에 계신다. 이것은 단지 신약에서의 견해만이 아니다. 구약에서도 그러한 개념을 말하고 있다.
(시26:8) 여호와여 내가 주의 계신 집과 주의 영광이 거하는 곳을 사랑하오니 (시68:5) 그 거룩한 처소에 계신 하나님은 고아의 아버지시며 과부의 재판장이시라 (시93:4) 높이 계신 여호와의 능력은 많은 물 소리와 바다의 큰 파도보다 위대하시니이다 (시123:1) 하늘에 계신 주여 내가 눈을 들어 주께 향하나이다
젠센은 이렇게 말한다. "성전 건축 자체는 상징으로서 하나님이 실재하시는 인격이시며 시온에 거하시는(욜3:21) 살아계신 분이며 또한 사람들의 경배를 받으실 뿐만 아니라 교제를 즐기기를 원하시는 분이라는 것을 이스라엘 민족에게 상기시키려는 의도가 있다"
성전을 재건하는 것이 이스라엘에게 어떤 의미를 가진 것일까?
"성전을 재건하는 것은 단순히 건물을 건축하는 그 이상의 의미를 가지고 있다. 공동체 안에 이에 상응하는 성장이 없다면 그것은 그저 경제적 부담을 야기시키는 건물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공동체에 다가오는 박해와 투쟁하면서 공동체는 영적인 발전을 해 나가야 했다. 이들의 존재 방식의 임시성은 이들이 하나님께 의존해야 할 필요성과 율법에 따라 자신들의 삶을 재조명해야 할 필요성을 강조하고 있다. 이 양 측면이 결국 에스라 느헤미야서의 많은 지면이 염두에 두고 발전시키고자 하는 두 주제인 것이다."(김지찬 p.602)
따라서 이스라엘에게 있어서 건물로서의 성전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성전을 건축하면서 하나님께 의존하는 삶을 훈련하게 되고, 율법에 따라 자신의 삶을 재정립할 기회를 갖게 된다는 것이다. 더구나 그 결과 하나님의 백성- 이스라엘 공동체가 회복되었다는 사실이 중요하다. 이 공동체는 그 백성 한 사람, 한 사람의 회복으로 이루어지는 것이다. 그래서 에스라-느헤미야서는 백성의 명단(cf. 김지찬 p.585)을 중요하게 언급하면서 백성들에 의해서 성전과 성벽이 재건되었음을 강조하고 있는 모습을 보게 된다.
성전재건과 율법의 회복은 포로 후기 공동체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모든 인간을 구속하시는 하나님의 구속계획이 진행되어 가는 유일한 수단이 되도록" 하였다.
오늘날에 있어서 성전은 우리에게 어떤 의미를 주는가?
신약은 우리 몸이 성전이라고 말하고 있다.(고전3:16) 특히 우리 성도들이 세상에 대해 하나님의 임재를 보여주는 성전이 되어야 하기에 거룩함을 회복해야 할 것이라는 말이다.
우리는 비유대교적인 상황에서 태어났다. 우리를 둘러싼 모든 문화는 성경적이 아니라 세상적이다. 그래서 그러한 것들을 당연한 듯이 받아들이고 있다. 우리의 삶과 삶에 대한 계획마저도 세상의 가치 기준에 따라 세우고 추구하며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성전으로서 우리는 하나님을 중심으로 삶을 재건해야 할 것이다. 이를 위해 우리 삶의 주인은 하나님이심을 인식하고 하나님의 주인되심이 우리 삶을 통해서 드러나도록 해야 한다. 베드로 사도가 바로 그러한 것을 잘 지적해 주었다.
벧전2:4 사람에게는 버린 바가 되었으나 하나님께는 택하심을 입은 보배로운 산 돌이신 예수에게 나아와 5 너희도 산 돌같이 신령한 집으로 세워지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기쁘게 받으실 신령한 제사를 드릴 거룩한 제사장이 될지니라
우리 몸이 성전이라는 것을 생각할 때, 학개서를 통해서 우리는 우선 순위를 재정립하여 먼저 우리 개개인의 삶을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삶으로 재건하고 그 바탕 위에서 자신이 속한 공동체를 재건하도록 해야 할 것이다.
특히 기독 청년으로서 희망을 가지고 삶을 설계하며 삶의 목표를 정립하면서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삶이 무엇인가를 물어야 한다.
따라서 성전을 재건하라는 학개의 메시지는 예배당을 지으라는 것도 아니고, 바로 우리 삶을 하나님과 함께 하도록 재건하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음을 알게 된다. 우리 삶의 모든 부분을 학개의 말씀에 따라서 재점검하고 재건하는 계기로 삼아야 할 것이다. 그러한 개인의 변화가 이루어질 때 그 바탕 위에서 공동체도 함께 변화할 수 있도록 힘을 모아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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