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구약 성경강해***/- 나훔 강해

나훔 (Nahum)

에반젤(복음) 2019. 9. 30. 20:56




나훔 (Nahum)

 

 

(나 2:6-13) “6. 강들의 수문이 열리고 왕궁이 소멸되며 7. 정한 대로 왕후가 벌거벗은 몸으로 끌려가니 그 모든 시녀들이 가슴을 치며 비둘기 같이 슬피 우는도다 8. ○니느웨는 예로부터 물이 모인 못 같더니 이제 모두 도망하니 서라 서라 하나 돌아보는 자가 없도다 9. 은을 노략하라 금을 노략하라 그 저축한 것이 무한하고 아름다운 기구가 풍부함이니라 10. 니느웨가 공허하였고 황폐하였도다 주민이 낙담하여 그 무릎이 서로 부딪히며 모든 허리가 아프게 되며 모든 낯이 빛을 잃도다 11. 이제 사자의 굴이 어디냐 젊은 사자가 먹을 곳이 어디냐 전에는 수사자 암사자가 그 새끼 사자와 함께 거기서 다니되 그것들을 두렵게 할 자가 없었으며 12. 수사자가 그 새끼를 위하여 먹이를 충분히 찢고 그의 암사자들을 위하여 움켜 사냥한 것으로 그 굴을 채웠고 찢은 것으로 그 구멍을 채웠었도다 13. 만군의 여호와의 말씀에 내가 네 대적이 되어 네 병거들을 불살라 연기가 되게 하고 네 젊은 사자들을 칼로 멸할 것이며 내가 또 네 노략한 것을 땅에서 끊으리니 네 파견자의 목소리가 다시는 들리지 아니하리라 하셨느니라”

 

 

‘나훔’이란 이름은 ‘위로자’, ‘위로’란 뜻입니다. 이것은 포로된 이스라엘 백성에게 그렇다는 말씀입니다. 요나서가 앗수르의 수도 니느웨이의 구원을 주제로 다루고 있다면, 반대로 본 나훔서는 니느웨이의 심판을 다루고 있습니다. 요나를 통해 심판을 면한 니느웨이 도성이 100년이 지났을 때는 하나님의 심판을 받을 수밖에 없는 나라가 되었습니다. 나훔서는 “하나님의 거룩하심(1:2-14), 니느웨이 성의 포위(1:15-2장), 니느웨이의 완전한 멸망(3장)”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 당시 앗수르 제국은 앗술 바니팔(B.C.669-626년)이 통치하던 시기였습니다. 그 들은 동쪽으로 페르시아 만, 서쪽으로 소아시아, 남쪽으로 애급, 북쪽으로 카스피 해에 이르는 광대한 제국을 다스리고 있었는데, 이런 최강의 힘을 자랑하던 때에 선지자 나훔은 니느웨이의 종말을 선포합니다. 역사는 나훔이 죽은 지 3년이 지났을 때 바벨론에 의해 앗수르가 멸망했다고 기록합니다.(B.C.612) 니느웨이의 멸망을 통한 진리를 살펴봅니다.

 

1. 자기에게 달렸다.

 

1장 10절 “가시덤불 같이 엉클어졌고 술을 마신 것 같이 취한 그들” 3장 1절-“화 있을찐저 피 성이여 그 속에서는 궤휼과 강포가 가득하며 늑탈이 떠나지 아니하는 도다.”

 

이것이 그들의 형편이요, 모습입니다. 그렇다면 니느웨이 도성이 무너지고, 앗수르가 멸망을 하는 원인은 나훔 선지자가 그런 예언을 하였기 때문이다. 맞습니까. 아닙니다. 선지자는 곧 일어날 일을 선포한 책임밖에는 없습니다. 니느웨이가 멸망한 것은 하나님 때문이다. 하나님이 그 성을 망하게 하지 않았는가, 라고 말해서도 안 됩니다. 그 도성이 망하는 것은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보십시오.

 

겔 33:11절 “주 여호와의 말씀에 나의 삶을 두고 맹세하노니 나는 악인의 죽는 것을 기뻐하지 아니하고 악인이 그 길에서 돌이켜 떠나서 사는 것을 기뻐하노라 이스라엘 족속아 돌이키고 돌이키라 너희 악한 길에서 떠나라 어찌 죽고자 하느냐 하셨다 하라.”

 

그러면 니느웨이의 멸망은 자기들 보다 강한 페르사의 고레스 때문입니까. 아닙니다. 그것은 전적으로 자신들이 멸망을 불러 온 것입니다. 이집트 선교사들에 의하면 그 사람들의 문제 중 하나가 있는데 그것은 그들이 '인샬라'라는 말을 많이 쓰는 것이랍니다. 이 말은 '신의 뜻'이라는 말입니다. 언뜻 생각하면 그들이 굉장한 신앙이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런데 실상은 이 말을 핑계 거리로 쓴다는 것입니다. 자신이 가난해도 그것은 인살랴, 신의 뜻이라는 것입니다. 약속보다 3-4시간 늦게 오면서도 '인샬라' 곧 신의 뜻'이라는 것입니다. 누가 죽어도 ‘인살라’ 이렇게 되다보니 모든 것이 ‘인샬라’입니다. 그들의 알라 신은 그들의 모든 책임을 회피하는 수단이 되고만 것입니다. 우리 신자들도 무슨 일이 있으면 무조건 하나님의 뜻에 갖다 붙여서 안 됩니다. 인간이 잘못을 해서 일어난 일을 무조건 하나님의 뜻이라고 말하거나 하나님 핑계를 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미국의 해리 트루먼 대통령은 자기 집무실에 이런 글을 적어 놓았습니다. "모든 일의 책임은 내가 진다." 트루먼의 그 당당한 책임감은 본받을 만합니다. 그러나 다시 생각 봐야 하는 것은 그러면 트루먼 대통령은 진짜 모든 책임을 다졌는가 하고 물으면 그렇지는 안습니다.

 

어떤 사람은 성공을 노력의 산물이라는 생각하며, 최선을 다합니다. 계획을 세우고, 부지런히 사는 것입니다. 그러나 어떤 사람은 반대입니다. 그것은 자기 자신에게 주어진 운명이 있는데 이것을 바꿀 수 없다는 생각을 하고 사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분명하게 알아야 하는 것은 인생은 우리 노력으로만 되는 것도, 아니고, 또 운명이 만들어내는 것도 아닙니다. 인생은 하나님이 주시는 복으로 사는 것입니다. 그러면 무엇이 복입니까. 그것은 하나님이 우리의 아버지시라는 것을 믿고 사는 것입니다. 이것이 복의 본질입니다. 이것이 확실한 사람은 어디서나 살아 남을 수 있습니다. 오늘 나훔은 니느웨이의 멸망의 원인이 분명히 그 자신들에게 있다고 말합니다. 우리는 문제가 밖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다른 사람이나, 환경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문제의 원인은 자신에게 있다, 라고 하십니다.

 

아담은 선악과를 따먹은 것을 이브 때문이라고 하였습니다. 가인은 하나님이 제물을 받지 않는 것은 동생 아벨 때문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요셉의 형들은 요셉 때문에 자기들이 미움을 받고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바로는 모세가 나타나서 문제를 일으킨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아담이 선악과를 먹은 죄를 묻고 있습니다. 가인의 살인에 책임을 묻고 있습니다. 아버지 야곱에게 책망을 듣는 것은 그들에게 잘못이 있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애급의 문제는 바로는 혹독한 노동과 남자 아이를 죽이는 정책이라는 것입니다. 이렇게 모든 사람은 하나님이 자신에게 책임을 묻고 있다는 것은 모르고, 남을 탓하고 사는 존재입니다.

 

겔 18:20절 “범죄 하는 그 영혼은 죽을찌라, 아들은 아비의 죄악을 담당치 아니할 것이요 아비는 아들의 죄악을 담당치 아니하리니 의인의 의도 자기에게로 돌아가고 악인의 악도 자기에게로 돌아가리라.”

 

여러분 악(惡)이나 의(義)도 다 자기에게 돌아간다고 하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여러분이 뿌린 씨앗을 여러분이 거둔다는 것입니다. 그 누구도 예수님의 손을 놓지 않는 한 여러분 중에 한사람도 지옥에 갈 수 없습니다. 죄를 두려워하는 한 심판에 설 수 없습니다. 결코 망할 수 없다는 말입니다. 여러분이 배신하지 않은 한, 하나님은 그 누구 한사람도 버리지 않으십니다. 낙심하지 마세오. 제 마음대로 살지 마십시오, 세상으로 나가지 마십시오, 정욕을 따르지 마십시오. 은혜 입은 사람은 끝까지 갈 것이며, 마지막에 천국에서 만날 것이고, 모두 다 해와 같이 빛날 것입니다.

 

사 43장1절-2절 “1.이스라엘아, 너를 창조하신 여호와께서 말씀하신다. '너는 두려워하지 말아라. 내가 너를 구원하였고 내가 너를 지명하여 불렀으니 너는 내 것이다. 2.네가 깊은 물을 지나갈 때 내가 너와 함께 할 것이니 강을 건널 때에 물이 너를 침몰시키지 못할 것이다. 네가 불 가운데로 지날 때에도 타지 않을 것이며 불꽃이 너를 소멸하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진리에 귀를 막고, 불순종한다면 그 사람은 어쩔 수 없이 심판을 받을 것이며, 니느웨이 성처럼 무너진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진리입니다. 여러분은 어디로 향하고 있습니까. 어디에 서있습니까. 지금 어떤 마음입니까. 빛입니까. 어두움입니까. 말씀입니까. 자기 생각입니까. 육신의 정욕입니까. 영적인 소원입니까.

 

2. 자랑할 것이 없다.

 

2장 9절 “은을 노략하라 금을 늑탈하라 그 저축한 것이 무한하고 아름다운 기구가 풍부함이니라.”

 

이렇게 은과 금이 무한하고 풍부한 니느웨이는 처음에 정복자로 니므롯이 건설한 도시입니다. 나중에 앗수르의 수도가 되었습니다. 요나 때 12만 명의 어린아이가 있었는데, 인구 100만 명의 도시입니다. 성벽의 높이는 30m에 달하며, 성벽 위에는 6대의 쌍두마차가 동시에 달릴 수 있을 만큼 넓었습니다. 그리고 성은 해자(垓字)로 둘러싸여 있었고 는데 해자는 성을 둘러싼 못입니다. 성 내부에는 병영(兵營)과 무기고(武器庫), 군량창고(軍糧倉庫)가있습니다. 이 성을 한번 도는데 3일이 걸리고,(욘3:2) 전체 면적은 220만 평에 달한다고 합니다. 그리고 1845부터 5년 동안 발굴로 니느웨이의 도서관이 밝혀졌습니다. 점토로 만든 서판들과 설형문자 비문, 언어학, 천문학, 점성술, 종교적 문헌, 법전, 과학 서적과 기구, 문학과 예술, 역사서와 연대표, 상업서, 각종 서간 등 서판이 무려 2만 6,000개나 소장돼 있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나훔을 통해서 앗수르의 죄를 지적하였습니다. 첫 번째는 군대입니다. 그 군대가 지나는 곳에는 피가 강처럼 흘렀으며, 많은 민족이 전멸되었고, 모든 것을 파괴해버렸습니다.(나훔2:11-13). 정복자 앗수르는 말뚝을 박아 사람을 죽였고, 해골로 피라미드를 쌓았으며, 너무 끔찍하여 말로 표현 할 수없는 수많은 악행을 저질렀습니다. 그들에게 여호와가 대적이 될 것이다, 라고 나훔은 선포하였습니다.

 

두 번째 죄악은 비양심적인 무역과 장사이었습니다. 그 주변 국가들은 아부하며, 정복자들의 사치와 악을 만족시켜 주고 있었고, 상인들은 황금에 굶주려 온갖 종류의 우상과 세공품, 그리고 악을 조성할 만한 모든 물건을 팔았다. 그들에게 정직과 도덕은 이미 사라지고 없었으며 부만 얻고 쾌락만 즐기려 하였다는 것입니다.(나훔 3:1-4).

 

노아 시대 이후부터 시작된 도시, 강과 해자로 둘려 쌓인 요새, 3일을 걸어야 다볼 수 있는 성, 100만 명의 사람들, 220만평의 넓이, 30m 높이의 성, 마차 6대가 달릴 수 있는 넓은 성벽 길, 2만 6천개의 도서 자료들, 천하무적의 군대, 그런데 이 엄청난 니느웨이가 페르사의 고레스에게 무너지고 난 후 60m의 진흙에 묻혔다가 발굴되기 시작하였다는 것입니다. 이 대단한 것들이 그 사람들을 지켜주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역사도, 성벽도, 말과 마차도, 금은, 보화도 아니고, 바로 사람입니다. 사람이 하나님의 눈 밖에 나면서 그들은 종말을 맞이하였고, 심판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개인이던 국가이던지, 자신들이 가지고 있는 것들이, 자신들을 지켜 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핵무기를 개발하고, 수소폭탄을 가졌다고 큰소리를 치는 것입니다. 그것뿐 아닙니다. 국방비를 보세요. 우리 40조, 중국 100조, 미국 500조, 300만의 군대입니다. 가공할 무기, 수많은 배와 잠수함, 하늘의 조기경보기, 폭격기, 미사일, 방사포와 폭탄, 더 나가서는 화학무기 같은 것이 있으니 안전할 것이다. 이제는 누구도 우리를 건들이지 못할 것이다. 라고 생각하고 안심하라, 걱정하지 말라하고 말합니다. 그러나 앗수리아가 니느웨이가 무기가 없고, 군대가 없어서 무너진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외면하시고, 온갖 악을 자행하고, 그것이 점점 도를 더해갈 때 그들에게 끝이 왔다는 것입니다. 그 앗수리아가 고레스에 의해서 무너지고 멸망을 하였다는 것을 역사는 증거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성을 쌓는다고 사는 것이 아닙니다. 돈과 재물을 손에 넣고, 집을 사고, 땅을 가졌다고 해서 그것이 자신을 지켜 줄 것이라고 생각하지 말아라는 것입니다. 아니면 아들과 딸 남편과 아내가 산성이 되고 요새가 되어서 지켜 주고 구원해 줄 것이다, 라고 믿지 말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흔히 지켜주지 못해서 미안하다, 라고 말합니다. 미안한 것은 맞지만 지킬 수 있는 힘이 우리에게 없다는 것입니다. 사람이 사람을 지킨다는 말은 희망 일뿐입니다. 우리가 믿음을 가진다는 것은 우리가 할 수 없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오늘 나훔서는 인간이 대단하고 엄청나게 생각하는 것이 하루아침 해장국에 불과하고 하루살이 같이 보잘 것이 없는 것이라 것을 보여주는 말씀입니다.

 

여러분 지식도, 정열도, 자신의 재주와 은사도 하나님 앞에 설 때, 그 심판 날에는 소용이 없습니다. 꼭 필요한 것은 예수님이요, 믿음이요, 겸손이라는 것이 나훔서의 메시지입니다. 그러므로 바울의 고백처럼 예수 외에는 자랑할 것이 없고, 주님 밖에는 의지 할 사람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 여러분은 정말 주님을 의지 하고, 주님을 자랑하는가 하는 것입니다. 신앙이 지식에 머물고, 마음은 식어있지 않는가 하는 것입니다. 옛날에는 사람이 죽으면 금은보화도 넣어주고, 종이나, 사람도 순장을 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거의 화장을 합니다. 읽던 성경책을 넣어 줍니까. 아끼던 금가락지를 넣어 줄 것입니까. 좋아하던 스마트폰을 넣어 줄 것입니까. 여러분 수의에는 주머니가 없습니다. 솔로몬도 그렇게 많은 금은보화와 사람들, 아름다운 궁전, 책과 지은 노래와 시를 두고 혼자 갔습니다. 우리도 그렇게 갈 것입니다.

 

3. 통해서 하신다.

 

2장 1절 “파괴하는 자가 너를 치러 올라왔나니 너는 산성을 지키며 길을 파수하며 네 허리를 견고히 묶고 네 힘을 크게 굳게 할찌어다,”

 

지금은 카드를 가지고 모든 것을 합니다. 현금을 가지고 다닐 필요가 없는 시대가 되었습니다. 하나님도 자신의 카드를 가지고, 세상을 다스리시고, 세상을 움직이십니다.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과 직통으로 거래를 하고 싶어 하지만 하나님은 성경 말씀으로, 천사를 통해서 일을 하신다고, 되어 있습니다. 또 세상에 많은 사람들을 보내서, 원하시는 역사를 이루십니다. 수많은 왕들과 제후 장군들과 위인을 통해서 역사를 움직이시고, 심판을 행하시는 분이십니다. 그러므로 하늘의 천사와 이 땅에 수많은 사람은 하나님이 사용하시는 카드입니다.

 

포로생활 70년이 찼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예루살렘으로 돌아갈 준비가 다 되었다고 해도, 그 당시 바벨론이나, 수도 니느웨이는 꿈적하지 않는 요새였습니다. 그런데 그 강한 성벽이, 그 군대가 한순간에 무너졌습니다. 북으로부터 군대를 끌고 온 고레스는 단숨에 그 도성을 함락합니다. 역사에서 두 가지 설이 있는데 고레스의 선봉장인 다리우스가 유프라테스 강에 둑을 쌓아 강물의 방향을 돌리고, 얕은 강바닥을 따라 진군하여 곧바로 입성에 성공했다고 합니다. 다른 하나는 바벨론 군주가 인심을 잃고, 다른 신을 숭배하는 고로, 백성들이 성문을 열어 고레스를 영접했다고 합니다. 확실한 것은, 고레스가 어떤 무력충돌도 없이 무혈 입성했다는 점입니다.

 

그 고레스가 “왕위에 오르고 그 유명한 고레스 칙령을 반포합니다. 유대인의 존재를 알지 못하는 그가 어떻게 그런 결정을 할 수 있었을까요. 성경은 “다니엘은 고레스 왕 일 년까지 왕궁에 머물러 있었다.”(다니엘서 1:21).라고 기록을 하는데 이 때 다니엘의 나이는 80이 넘었습니다. 고레스는 입성하여 원로대신들을 만났을 것이고, 그 중에 소문난 다니엘을 만났을 것입니다. 다니엘은 그 기회를 놓치지 않고, 고레스에게 “예레미야를 시켜서 하신 말씀”을 전했을 것입니다. 그것은 “바벨론이 고레스 대왕에 의해 멸망당할 것이고, 히브리 민족들이 70년 만에 왕을 힘입어 고향에 돌아갈 수 있을 것이며, 이 모든 일이 전능하신 여호와 하나님의 예비하신 것이다, 그러기에 우리는 당신을 이렇게 기다리고 있었다.”는 그런 말씀입니다. 고레스는 그 소리를 듣고 충격을 받고, “감동”을 받습니다. 그리고 칙령으로 썼던 것입니다.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 하나님께서 나에게 모든 나라를 다스리게 하셨다.

- 하나님을 섬기는 모든 백성에게 하나님이 함께 계시기를 빈다.

- 예루살렘에 하나님의 성전을 지으라 하셨다.

- 잡혀온 하나님 백성 중 원하는 자는 모두 귀국하게 하라.

- 귀국할 때 도움이 필요한 사람이 있으면 이웃은 그를 도와주라, 성전에 바칠 자원예물도 가지고 가도록 하여라.

- 느부갓네살 때 약탈해온 예루살렘 성전에 있던 여러 성물을 빠짐없이 돌려주라.

 

고레스 칙령 후에 이스라엘은 귀국합니다. 제1진은 B. C. 537년에 스룹바벨 인도로, 제2진은 B. C. 458년에 에스라의 인도로, 제3진은 B. C.445년 느헤미야 총독의 인도로 귀환합니다. 고레스 B. C.539년에 칙령을 내렸으니, 제 1진은 칙령 공포 후에 2년 만에 출발한 셈입니다. 예루살렘 성전과 도성 건축은, 많은 방해와 모략으로, 지체되었지만, 놀라운 것은 거의 100년 간 진행된 예루살렘 귀환과 복구 작업이 변경 없이 지속된 것입니다. 이것은 고레스를 축으로 하여 이루어진 하나님의 사역이라 보는 것이 맞습니다.

 

앗수르의 니느웨이를 점령하고 페르샤 제국을 세운 고레스(CYRUS)라는 영웅은, 페르사 주전559부터 530까지 29년간 다스리면서 바벨론 전영토를 비롯하여 티그리스 강으로부터 인더스 간에 이르는 대제국을 건설했습니다. 그런데 이것은 하나님의 계획이요, 뜻이었다는 것입니다. 이사야는 150년 전에 이미 고레스에 대한 예언을 하였습니다. 이사야 44:28-“고레스에 대하여는 이르기를 그는 나의 목자라 나의 모든 기쁨을 성취하리라 하며 예루살렘에 대하여는 이르기를 중건되리라 하며 성전에 대하여는 이르기를 네 기초가 세움이 되리라 하는 자니라,” 이사야45:1절-“나 여호와는 나의 기름 받은 고레스의 오른손을 잡고 열국으로 그 앞에 항복하게 하며 열 왕의 허리를 풀며 성문을 그 앞에 열어서 닫지 못하게 하리라”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나라의 흥망성쇠를 하나님께서 주관하신다,’ 는 진리를 분명히 깨달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고레스 같은 왕을 통해서 앗수르를 심판하고 이스라엘 백성을 예루살렘으로 돌아오게 하셨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실재로 이사야나 예레미야 같은 선지자들을 통해서 예언을 했던 것입니다.

 

소련은 155개 민족으로 구성되었다가, 지금은 15개 공화국으로 줄어들어 러시아로 존재하고 있습니다. 중국도 한족과 55개 소수민족으로 구성되었는데 앞으로 한족 국가와 여러 개의 소수민족국가로 나뉘게 될 것입니다. 인도는 원래 수많은 언어와 종족인 나라로 되었으나, 파키스탄과 둘로 갈라지게 되었고, 파키스탄은 다시 방글라데시와 나뉘게 되었습니다. 유럽은 지리적으로 볼 때 한나라를 이룰 만 했으나 유럽을 통일한 왕이 없었습니다. 우리 민족이 하나가 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하고, 당연한 일이나 아직 분단 상태로 극도의 갈등 속에 있습니다. 나라가 적다고 해서 나쁜 것도 아니요, 크다고 해서 좋은 것도 아닙니다. 싱가포르는 인구 270만의 도시국가이지만 세계 우등국가입니다. 덴마크는 4백만, 스웨덴 6백만, 노르웨이 5백만이지만 잘삽니다. 결국 민족의 문제는 “죄”입니다. 죄는 백성을 욕되게 하고 나라를 망하게 합니다. 죄악이 관영하고서는 오래 갈 나라가 없습니다.

 

하나님은 페르시아를 세운 고레스를 지명하셨습니다. 즉 그를 `고레스`라는 이름으로 부르고, 그를 `기름 받은 자`라고 불렸습니다. 왜 하나님은 고레스에게 이 모든 일을 하게 하셨습니까. 그 이유는 `하나님의 종 야곱`을 위함이었습니다. 이스라엘을 위해서입니다. 이스라엘에서 예수님이 오시고, 교회가 세워지는 것 말입니다. 고레스는 하나님의 종들의 유익을 위한 하나님이 세운 사람입니다.

 

하나님은 지금도 어떤 나라나, 인물, 개인을 통해서 일을 하시고, 역사를 이끌어 가십니다. 내가 하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이런 생각은 손으로 눈을 가리고 해가 없다고 하는 것과 같습니다. 만약 사단이 온 세상에 있는 교회의 문을 다 닫아 버린다고 해서 그리스도가 쓰신 그 면류관이 흐려지겠습니까. 하나님의 역사가 중단이 되겠습니까. 만약 사탄이 온 세상의 신자들을 모두 감옥에 가둔다고 하나님의 역사가 중단이 되겠습니까. 하나님의 역사는 밝아오는 아침 같습니다. 누가 떠오르는 태양을 막을 수 있습니까. 오늘 여러분 중에서 하나님이 사용하는 고레스가 되고, 다니엘이 되고, 에스더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그렇지 못하다면 주님의 손에 들린 보리떡은 어떻습니까. 베드로를 회개 시킨 닭이나, 발람선지자에게 말한 당나귀는 어떻습니까. 다 하나님이 사용하신 것들입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이 십니다. 할렐루야.

 

결론

 

고려 말에 역성혁명으로 개국된 나라에서 관리를 지낼 수 없다 하여 70여명의 고려 신하들과 두문동에 은둔하여 두문불출(杜門不出)이란 말을 탄생케 했던 황희는 태조, 정종, 태종, 세종 4대 임금에 걸쳐 무려 74년간을 관직 생활을 했으며 90세에 타계하였다. 황희는 조선조 제일의 명상(名相)으로서 평생을 오로지 나라와 백성을 위하여 살신성인의 자세로 초지일관하였다. 고려에 신하와 왕족들은 이성계가 개국한 나라에 지낼 수 없다하여 송악(개성) 동남쪽 고개에 조복(朝服)을 벗어 나뭇가지에 걸고, 헌 갓으로 바꾸어 쓰고 광덕산 서쪽에 있는 두문동으로 들어갔습니다. 태조 이성계는 회유책을 썼지만 그 충절이 변하지 않자 이들을 추방시키기 위하여 이곳 두문동에다 불을 질러 스스로 분사(焚死)하였습니다. 이래서 마을 이름을 두문동이라 칭하게 되었고, 따라서 '두문불출(杜門不出)'이라는 말은 두문동에 들어간 사람들이 일절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는 데서 유래된 말입니다.

 

그런데, 그 당시 72명의 신하들과 왕족들이 단 하루의 말미를 주면서 나오지 않으면 모두 불태우겠다고 했을 때 그 사람들이 "후세에 이것을 알릴 수 있는 한사람은 남겨두어야 하는 것 아닌가." 해서 한 사람이 나왔는데 이 사람이 황희입니다. 이 당시에도 황희의 인품을 많은 사람이 믿었던 것 같습니다. 혼자 살아난 황희는 태조부터 세종에 이르기까지 4대에 걸쳐 임금을 모셨고, 특히 세종 때는 최고 벼슬인 영의정을 18년간 지냈으며 74년간을 관직생활을 하였고 90세까지 살았습니다.

 

한번은 6진을 개척한 장군 김종서가 한양으로 올라왔는데 황희 정승이 해수(咳嗽.기침병)로 고생한다는 말을 듣고 벌꿀을 구해왔습니다. 그러나 황희는 “빈청에는 예빈시가 있으니 배가 고프면 음식을 시켜 먹을 것이요, 병이 나면 약을 지어 먹을 것인데 일국의 판서가 뭐 할 일이 없어서 벌꿀을 들고 다니느냐”고 크게 꾸짖었습니다. 지켜보는 맹사성이 김종서가 물러간 후 황 정승에게 “너무 과하지 않소,”라고 따졌는데. “김종서 사람됨은 맹 대감이나 내가 잘 아는 바 아니요, 대감하고 내가 죽으면 나라 일 맡길 사람이 김종서 밖에 없지 않소, 우리는 지금부터 그 사람을 옥으로 만들어야 하니 한 마디 좀 한 것이지”라고 황희가 말했습니다. 세종이 신하들에게 당부한 어린 단종을 죽음으로써 끝까지 지키려한 충신 김종서가 이렇게 단련되었습니다.

 

황희는 90까지 살면서 한시도 잊지 않은 것은 두문불출 하다가 타죽은 72명의 생명이며 자신은 그들을 대신한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러니 함부로 살수가 없는 것이지요. 그래서 그는 이름을 남기는 명재상으로 살았다는 것입니다.

 

갈 2:20절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골 3:1-3절 “그러므로 너희가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리심을 받았으면 위엣 것을 찾으라 거기는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느니라. 2.위엣 것을 생각하고 땅엣 것을 생각지 말라. 3.이는 너희가 죽었고 너희 생명이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안에 감추었음이니라.”

 

골 1:24절 “내가 이제 너희를 위하여 받는 괴로움을 기뻐하고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그의 몸 된 교회를 위하여 내 육체에 채우노라.”

 

▲조영호 목사

'***신구약 성경강해*** > - 나훔 강해' 카테고리의 다른 글

[스크랩] 나훔 (내용분해)  (0) 2019.09.30
[스크랩] 나훔서 연구  (0) 2019.09.30
나훔서 : The Book of Nahum  (0) 2019.09.30
나훔서 개론  (0) 2019.09.30
나훔 개요  (0) 2019.09.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