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구약 성경강해***/- 요나 강해

요나서를 어떻게 읽을 것인가

에반젤(복음) 2019. 9. 30. 12:02




요나서를 어떻게 읽을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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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지자 요나는 과연 어떤 사람입니까?

열왕기에 등장하는 “가드헤벨 아밋대의 아들 선지자 요나”(왕하 14:25)와

“아밋대의 아들 요나”(욘1:1)는 동일인물입니까?

만약 동일인물이라면 그의 활동시기도 어느 정도는 가늠할 수 있습니다.

견해의 차이가 없는 것은 아닙니다만 저의 입장은 동일인물로 봅니다.

그래서 이하의 내용도 동일인물의 관점에서 서술해 나가려고 합니다.

 

선지자 요나에 대해 처음 알게 된 것은 청년 시절에 부른 노랫말 덕분입니다.

“불순종한 요나”란 가사가 너무도 선명했습니다.

요나는 제게 불순종의 대명사처럼 인식이 되었습니다.

그 날도 여러 청년들이 함께 모여 집회 중 이 노래를 불렀습니다.

요나뿐만 아니라 도마도 도마 위에 올랐지요.

왜냐하면 “의심 많은 도마”였기 때문입니다.

그 때는 눈물도 많았습니다.

주책없이 눈물을 흘리며 이 노래를 뜨겁게 부르고 있었습니다.

지도 목사님께서 그런 청년들에게 한 마디를 툭 던지고 지나가셨습니다.

가사 말이 정말일까 한번쯤은 곱씹어보는 자세가 필요합니다.

틀림없이 우리가 부르고 있는 노랫말에 대한 언급이었지요.

다른 이들은 모르겠지만 제겐 그 말이 가슴을 쿵쾅거리게 했습니다.

그렇게 요나를 만나게 되었습니다.

요나는 과연 어떤 인물입니까?

 

선지자 요나는 예수님께서 언급한 중요인물입니다.

살펴보십시오.

예수님께서 구약의 인물을 과연 몇 분이나 언급하셨습니까?

그 소수의 인물 가운데 한 분이 요나입니다.

더구나 예수님께서 선지자 요나에 대해 언급한 상황은 얼마나 중요합니까?

그 상황은 바로 예수님의 고난입니다.

그러므로 선지자 요나의 상황은 예수님의 고난을 예표하고 있습니다.

그런 인물을 우리는 너무도 쉽게 “불순종한 요나”로 불러왔습니다.

그래서 묻습니다.

과연 요나는 불순종의 대명사입니까?

그렇다면 요나에게서 불순종은 무엇입니까?

 

요나는 문서 선지자의 테이프를 끊은 인물입니다.

여로보암 2세의 통치 기간이 선지자 요나의 활동시기라면 그렇습니다.

그래서 그의 시대가 어떠했는가를 먼저 살펴봅니다.

 

북 이스라엘의 정치적 상황은 언제나 불안하기만 했습니다.

경제적 규모는 점점 더 왜소해져 가고 내란도 끊임없이 이어져 왔습니다.

숱한 정권교체가 정상적으로 이루어진 경우가 없습니다.

그러나 이보다 더 심각한 상황은 국제정세였습니다.

북 이스라엘을 둘러 싼 강대국들이 호시탐탐 침략의 기회를 노리고 있습니다.

솔로몬 당시의 국토는 어느새 쪼그라들어 초라한 형세가 되고 말았습니다.

북 이스라엘은 안팎으로 위기의 상황에 내몰리고 있습니다.

여로보암 2세가 통치하던 시절도 어렵기는 마찬가지입니다.

그런 상황에서 수리아가 침공합니다.

숱한 선지자들이 저마다 하나님의 뜻이라며 의견을 내 놓았습니다.

당연한 일이지만 수리아에 항복하여 목숨만은 건지라는 비굴한 협상제안뿐입니다.

그러나 가드헤벨 아밋대의 아들 선지자 요나는 달랐습니다.

그는 수리아와 당당하게 맞서 싸울 것을 요청합니다.

그의 예언이 진정한 하나님의 뜻임을 일깨웁니다.

여로보암 2세는 고민에 빠집니다.

모두가 절망을 말할 때에 희망을 말하는 소수가 요나였습니다.

여로보암은 요나 선지자의 예언을 믿고 나갑니다.

치열한 한 판 전투가 예상되었습니다.

그러나 강군으로 여겼던 수리아의 군대는 종이호랑이에 불과했습니다.

북 이스라엘의 군대는 강력하게 수리아를 밀어 냅니다.

견디다 못한 수리아는 결국 항복하고 맙니다.

그 항복 조건으로 예전의 북 이스라엘 땅들을 되돌려줍니다.

주인 없는 땅들을 되찾은 것입니다.

 

대승을 거둔 북 이스라엘입니다.

잃어버렸던 옛 땅들을 되찾았습니다.

무주공산의 땅들을 놓고 정치결탁이 이루어집니다.

신흥 귀족들이 생겨납니다.

소위 졸부들이 대거 늘어난 것입니다.

그야말로 가진 것이 돈 밖에 없다고 하는 세력이 사마리아에 진을 칩니다.

사마리아는 황금으로 넘쳐납니다.

어느새 사마리아는 쾌락의 도시로 변모합니다.

돈이 모든 것을 좌우하는 황금도시로 바뀐 것입니다.

그 시대에 활동한 대표적 선지자가 아모스와 호세아입니다.

경제적 부흥을 가능하게 한 선지자가 요나였습니다.

그러니 요나의 위상이 어떠했겠습니까?

거짓 선지자들과는 철저하게 구별된 참 선지자 요나가 아닙니까?

 

요나는 요즘 식으로 말하면 잘 나가는 목사가 된 것입니다.

영력이 탁월한 선지자였습니다.

국가가 인정한 공인 선지자이며 왕의 선지자이기도 합니다.

요나서는 이런 배경을 전제로 해석되고 이해되어야 합니다.

그 유명 선지자를 하나님께서 어느 날 부르십니다.

하나님께서 부르시면 반응하는 것이 선지자입니다.

요나 역시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습니다.

문제는 그 하나님의 명령입니다.

하나님께서 요나에게 지시한 내용이 무엇입니까?

“너는 일어나 저 큰 성읍 니느웨로 가서 그것을 향하여 외치라.

그 악독이 내 앞에 상달되었음이니라.”(욘 1:2)

 

선지자는 마땅히 하나님의 소명을 받아야 합니다.

그 하나님의 뜻을 정확하게 읽을 줄 알아야 합니다.

요나는 하나님의 명령을 받았습니다.

니느웨로 가라는 명령입니다.

니느웨가 어딥니까?

수리아의 수도입니다.

적의 심장부 한 복판에 하나님의 사람인 선지자가 서라는 것입니다.

솔직한 말로 선지자가 감히 상상하지도 못할 명령이 떨어진 것입니다.

한 마디로 말하자면 죽으러 가라는 것이지요.

선지자 요나가 어떤 사람입니까?

그가 니느웨에 나타났다는 것을 알면 그곳 백성이 어떻게 하겠습니까?

뻔히 보이는 일인데 쉽게 결정하겠습니까?

그러나 요나가 주저하는 일은 단순히 자신의 생명문제가 아닙니다.

적어도 선지자라면 미래를 내다 볼 줄 알아야 합니다.

미래를 전망하고 예측합니다.

요나가 망설이고 결국 도피하게 된 궁극의 이유입니다.

니느웨는 장차 앗수르의 수도가 됩니다.

그 앗수르에 의해 북 이스라엘은 멸망하게 됩니다.

 

요나는 지금 하나님의 뜻을 정확하게 읽었습니다.

니느웨로 가라는 것은 니느웨의 멸망을 예고하는 일이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그의 외침을 통해 니느웨의 회개를 촉구하기 위함임을 알았습니다.

요나의 갈등은 그렇게 시작됩니다.

소위 선지자 요나인가, 아니면 애국자 요나인가의 갈등입니다.

그리고 요나는 선지자임을 포기합니다.

그 포기가 니느웨가 아닌 다시스로의 도피결정입니다.

다시스는 지금의 스페인 지경이니 멀찌감치 도피하는 것이지요.

자신이 그렇게나 먼 곳으로 도피했는데 하나님께서 자신을 찾겠느냐는 스스로의 판단입니다.

요나의 판단은 물론 틀렸습니다.

아무리 먼 곳으로 도망한다고 해도 하나님께서 찾지 못할 이유가 없습니다.

그러나 그것보다 더 심각한 오판이 있습니다.

요나는 자신이 아니면 니느웨로 파송될 선지자가 없다고 생각한 것이지요.

그래서 자신만 사라지면 니느웨는 멸망하게 될 것이라 믿고 있습니다.

선지자 요나가 아니면 하나님의 뜻이 성취될 수 없습니까?

내가 아니면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지 않습니까?

요즘 이런 망상에 빠진 요나들이 너무 많습니다.

마치 자신이 모든 것을 할 수 있다는 식으로 전횡을 일삼는 이들이 많습니다.

그러나 기억하십시오.

내가 아니어도 하나님의 일을 진행이 됩니다.

 

요나는 자신의 도피로 니느웨에 대한 하나님의 계획이 수포로 돌아가리라 판단했습니다.

그의 도피행각은 일견 성공적으로 보입니다.

모든 일이 순조롭게 진행이 됩니다.

욥바로 내려와 다시스로 가는 배를 만납니다.

그 배에 오르고 뱃속 깊은 곳으로 내려가 깊은 잠에 빠져듭니다.

그렇게 요나서는 시작되고 유명 인사였던 한 인물의 소리 없는 퇴장을 예고합니다.

 

요나서의 첫 장면이 워낙 드라마와 같은 구도를 지니고 있습니다.

그러다보니 요나하면 그 장면만 떠올리는 경우가 많습니다.

정작 중요한 요나의 기도는 우리의 기억 속에 희미합니다.

저는 이따금 이런 생각을 해 봅니다.

어떤 기도가 가장 생명력 있는 기도일까요? 미사여구로 가득한 기도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며 기도하는 사람은 나 밖에 없다는 광적 기도도 많습니다.

어떤 분들은 얼마나 오래 기도하느냐, 기도시간을 갖고 참 기도를 가늠하기도 합니다.

그러다보니 참 기도에 대해 왜곡된 생각들이 너무 많습니다.

그러나 참 기도는 그 기도 속에 생명력이 있느냐에 달려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겟세마네 기도가 참 기도입니다.

그 속에 생명을 담아두고 있기에 참 기도입니다.

저는 생명을 담은 기도를 실존의 기도라 말합니다.

적어도 믿음의 사람은 실존의 기도를 해야 합니다.

누군가에게 들려주고 보여주는 가식적인 기도가 아니어야 합니다.

 

성경에는 더러 사람들의 기도가 나옵니다.

그 기도들 속에 요나의 기도도 있습니다.

그저 여러 기도 중 하나로만 기억됩니다.

그러나 잘 보십시오.

요나의 기도야말로 실존의 기도입니다.

그는 지금 물고기 뱃속에 있습니다.

그의 고백 속에 나와 있듯이 물고기가 입을 벌릴 때마다 바닷물이 쏟아져 들어옵니다.

숨이 턱턱 막히는 절망적 조건 속에서 그는 기도합니다.

요나의 기도는 소리 없는 기도입니다.

아니 소리를 내고 싶어도 소리 칠 수 없는 상황입니다.

요나의 기도는 아주 짧은 기도입니다.

이 보다 더 짧은 기도는 아마도 아이들의 식사기도밖에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요나의 기도는 생명의 기도입니다.

그래서 실존의 기도입니다.

그 짧은 기도 말에 모든 주제를 담을 수 있다는 것이 그저 놀라울 뿐입니다.

 

그 기도를 하나님께서 들어주십니다.

선지자 요나는 물고기 뱃속에서 살아남은 사람입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예수님께서 죽음의 고난을 예고하시면서 요나의 표적을 말씀합니다.

물고기 뱃속에 있었던 삼일을 가리킵니다.

요나는 삼일의 시간, 그는 정확하게 하나님께 기도합니다.

요나서 2장의 첫 시작은 얼마나 중요한지 모릅니다.

참된 기도의 구성요소를 정확하게 일러주고 있기 때문입니다.

“요나가 물고기 뱃속에서 그의 하나님 여호와께 기도하여”(욘 2:1)

 

『아무도 보는 이 없을 때 당신은 누구입니까?』란 책이 있습니다.

요나의 기도가 그렇습니다.

그는 선지자의 거추장함을 내려놓고 하나님께 기도합니다.

숨이 턱턱 막히는 수초더미에서 그는 하나님께 마음의 기도를 합니다.

그야말로 짤막한 기도이지만 그 기도 속에 모든 것이 있습니다.

 

요나의 기도를 보면서 요나의 학습태도를 떠올립니다.

왜냐하면 그의 기도에는 온통 시편의 말씀들이 등장하기 때문입니다.

잘 정제된 언어들이 막힘없이 술술 나오고 있습니다.

이것은 그의 평소 학습관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아무튼 그에게 다시 소명이 주어집니다.

선지자 요나는 니느웨의 한 복판에 섭니다.

심판을 강력하게 외칩니다.

외치면 외칠수록 니느웨의 영적 분위기가 달라집니다.

드디어 왕이 나서서 회개를 외칩니다.

심지어 사람이 아닌 가축까지 회개의 표지를 달고 있습니다.

요나는 하나님의 말씀을 그대로 전합니다.

요나는 끝까지 하나님과 담판하려고 대듭니다.

니느웨의 성 밖에 틀어 앉아 멸망을 기대합니다.

당연히 멸망하지 않을 것을 알면서 우기듯이 주저앉아 있습니다.

사실 요나가 외치는 “사십일 후가” 멸망이 아님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그 하나님의 사랑이 싫었습니다.

편협한 민족주의자답게 이스라엘 백성만 사랑하는 하나님이길 기대했습니다.

그래서 적까지도 사랑하는 하나님의 보편적 사랑에 짜증을 냅니다.

 

하나님의 보편적 사랑이 새로운 주제로 부각되며 요나는 추억의 사람이 됩니다.

요나는 어느새 역사의 현장에서 사라집니다.

아무도 그를 기억하지 않는 씁쓸한 퇴장인 셈입니다.

한 때는 유명했던, 그러나 이제는 잊혀버린 갑작스런 퇴장을 보게 됩니다.

우리가 아는 요나는 여기까지입니다.

과연 요나서의 진짜 신학주제는 무엇일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