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구약 성경강해***/- 요엘 강해

[스크랩] [구약연구27] 하나님의 심판과 영광(요엘, 아모스)

에반젤(복음) 2019. 9. 26. 09:08




하나님의 심판과 영광(요엘, 아모스)

 

 

 

 본서들은 미래에 있을 하나님의 심판과 영광을 다루고 있는 중요한 책들로 하나님의 최후 심판과 이로 말미암아 누리게 되실 하나님의 영광을 함께 주된 내용으로 다루고 있습니다. 한편, 요엘서는 ‘구약의 성령전’이라 칭할 수 있을 만큼 성령 강림에 대하여 강조하고 있으며, 신약시대의 오순절 성령 강림 사건 때(행2:1~3) 구체적으로 성취된 바 있습니다.

 

 

[요엘] 

* 제목: 요엘

이는 ‘여호와는 하나님이시다’라는 뜻으로, 하나님의 절대주권을 강조하는 저자의 이름을 반영한 것입니다.

* 저자: 요엘

1:1의 내증으로 보아 요엘이 그 저자임이 명백합니다.

“브두엘이 아들 요엘에게 임한 여호와의 말씀이라.”(욜 1:1)

* 기록연대: 주전 830년경.

유다 왕 요아스(주전 835~796년)의 재위 초기 어느 시점. 제사장에 대한 언급이 많이 나타나는 것으로 보아, 대제사장 여호야다가 어린 왕 요아스 대신 섭정을 했던 요아스 왕 초기로 보입니다.

* 기록목적:

1)‘여호와의 날’이 무서운 심판의 날임을 가르치기 위해.

2)여호와의 날을 준비하기 위해.

3)하나님이 주실 영적 축복을 체험하도록 준비하기 위하여

* 기록장소: 예루살렘.

남유다와 예루살렘에 대한 메시지가 대부분을 차지하며, 성전과 제사장들의 규례에 익숙한 점 등으로 미루어 보아 예루살렘 혹은 그 인근으로 추측됩니다.

* 핵심단어: 여호와의 날

선지자 요엘은 유다 땅에 임한 메뚜기 재앙과 가뭄 등을 ‘여호와의 날’과 관련지으면서 자신의 동족, 유다 백성들에게 거듭 회개를 촉구하고 있습니다.

* 핵심장: 제2장

본장은 유다 백성들에게 그 회개를 촉구하고 있습니다.

“너희는 옷을 찢지 말고 마음을 찢고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로 돌아올지어다 그는 은혜로우시며 자비로우시며 노하기를 더디 하시며 인애가 크시사 뜻을 돌이켜 재앙을 내리지 아니하시나니 주께서 혹시 마음과 뜻을 돌이키시고 그 뒤에 복을 내리사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 소재와 전제를 드리게 하지 아니하실는지 누가 알겠느냐’(13,14절)

* 대상: 유다의 백성들.

본서는 선지자 요엘이 활동하던 요아스 시대의 유다 백성에게 주는 예언입니다.

* 배경: 이세벨의 딸 아달랴는 자기 아들 아하시야가 예후에 의해 살해되자 왕의 자손들을 모두 멸절하는 등 반정을 일으켜 정권을 장악, 6년간 군림했습니다. 하지만 이와 같은 위험천만한 상황 중에서도 아하시야의 누이 여호세바가 그녀의 어린 조카 요아스를 구출하는 데 성공, 6년간 유모와 함게 성전에 숨어 지내게 합니다.

 제7년째 해에 대제사장 여호야다는 가리 사람의 백부장들과 호위병의 백부장들과 성전에서 언약을 맺고 마침내 요아스의 즉위는 물론 악녀 아달랴 및 바알의 제사장 맛단 축출, 바알 신당의 훼파까지 모든 거사를 성공적으로 이루게 됩니다. 하지만, 요아스의 당시 나이는 7세, 혼자서 국정을 수행하기에는 여러 가지로 힘겨운 상황, 대제사장 여호야다의 섭정을 필요로 했던 것입니다. “요아스는 제사장 여호야다가 그를 교훈하는 모든 날 동안에는 여호와 보시기에 정직히 행하였으되.”(왕하12:2)

 한편, 대제사장 여호야다의 섭정이 이루어졌던 요아스 왕의 초기 때, 메뚜기 재앙 및 가뭄이 유다 땅에 임했는데, 선지자 요엘은 이러한 재앙들 직후에 등장, 유다와 그 주민들을 향해 하나님의 말씀을 대언했던 것입니다.

* 특징:

1)성령강림의 약속(2:28) -이는 성령의 강림에 대한 확약으로 신약시대에 이르러 오순절 성령강림 사건 때(행2:1~3) 구체적으로 성취되었습니다. 한편, 구약시대에는 특별한 사명을 위해 특정한 사람에게만 성령이 부분적이고도 조건적으로 임했으나 신약시대에 이르러서는 하나님을 믿는 자라면 누구든 상관없이 차별 없이 성령이 임하게 된 것입니다(‘내 영’은 성령에 대한 일반적인 표현임).

2)종말론 -본서의 중심 주제인 ‘여호와의 날’은 가깝게는 앗수르의 침입을, 궁극적으로는 종말에 있을 최후심판을 각각 의미합니다.

* 요절: 2:28

“그 후에 내가 내 영을 만민에게 부어 주리니 너희 자녀들이 장래 일을 말할 것이며 너희 늙은이는 꿈을 꾸며 너희 젊은이는 이상을 볼 것이며.”

* 내용전개

1)유다가 당한 재앙(1:1~2:17)

: 선지자 요엘은 이스라엘 땅에 임한 메뚜기 재앙과 가뭄을 통해 백성들의 죄악을 지적, 그 회개를 거듭 촉구하고 있습니다. 결국 이 같은 재앙이 장차 임할 하나님의 진노의 날을 상징하고 있음을 밝히 이르면서 말입니다.

2)다가올 여호와의 날(2:18~3:21)

: 여기서는 ‘여호와의 날’이 지니고 있는 이중적 성격, 즉 하나님께서 범죄한 유다를 징계하시기 위해 재앙을 내리시긴 하셨으나 만일 그들이 회개할 경우 그 같은 재앙을 거두시고 도리어 이전보다 더 풍성한 축복을 주실 것을 밝혀주고 있습니다. 한편, 이 같은 약속은 궁극적으로 ‘여호와의 날’에 이루어질 것인데 이때 택한 백성을 대적하던 열국들은 하나님의 심판을 받게 되고 택한 백성들은 온전한 평화와 구원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 개요:

1. 과거의 여호와의 날(1:1~20)

1)메뚜기 재앙(1:1~12)

2)가뭄(1:13~20)

2. 다가올 여호와의 날(2:1~3:21)

1)임박한 여호와의 날(2:1~27)

-유다를 향한 침략의 예고(2:1~11)

-유다의 구원에 대한 약속(2:12~27)

2)최후의 여호와의 날(2:28~3:21)

-주의 날 전에 있을 종말 사건들(2:28~32)

-주의 날에 일어날 사건들(3:1~21): 이방인들에 대한 심판, 유다의 회복

 

 

* 핵심단어 및 구절, 인물연구

메뚜기 재앙(1:20) -선지자 요엘은 이 부분에서 이스라엘 땅에 갑자기 닥친 메뚜기 재앙의 비참함에 대해 상세히 언급하면서, 이 재앙이 단순한 천재지변이 아닌 하나님의 진노의 채찍임을 상기시킴으로써, 이스라엘 백성들로 하여금 자신들의 죄를 회개하고 하나님께로 돌아올 것을 촉구하고 있습니다. 한편, 1:4절의 ‘팥중이’, ‘메뚜기’, ‘느치’, ‘황충’은 모두 메뚜기를 가리키는 각기 다른 네 개의 히브리어를 우리말로 번역한 것으로써, 이처럼 한 종류의 곤충인 메뚜기를 네 가지 이름으로 부르고 있는 까닭은 이 메뚜기 재앙이 아주 혹독한 것이었을 뿐만 아니라 일정한 시간을 두고 여러 차례에 걸쳐 계속적으로 임한 것이었음을 강조하기 위함일 것입니다.

참고로, 팥중이(히, 가잠)는 ‘베는 메뚜기’, 메뚜기(히, 아르베) ‘떼 짓는 메뚜기’, 느치(히, 엘레크) ‘뛰는 메뚜기’, 황충(히, 하실) ‘파괴하는 메뚜기’를 각각 뜻하는데 곤충학자들은 엘레크를 1기 유충, 하실을 2,3기 유충, 가잠을 4,5기 유충, 아르베를 날아다니는 성충으로 봅니다.

불, 불꽃(1:19,20) -극심한 태양열과 가뭄을 상징함. 이는 당시 메뚜기 재앙에다가 극심한 기근까지 겹쳐 최소한의 희망마저 상실되고 만 상태를 묘사하고 있습니다. “여호와여 내가 주께 부르짖으오니 불이 목장의 풀을 살랐고 불꽃이 들의 모든 나무를 살랐나이다 들짐승도 주를 향하여 헐떡거리오니 시내가 다 말랐고 들의 풀이 불에 탔음이니이다.”

이제라도 ...내게로 돌아오라(2:12~14) -이스라엘 백성들이 진실로 회개하고 애통하기만 한다면 하나님의 온전한 심판을 면할 수 있는 기회가 여전히 남아 있음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한편, 유대인들에게 옷을 찢는 행위는 내면적인 큰 슬픔의 외적인 표현방법입니다. 그렇지만 하나님께서는 이제 옷 대신 마음을 찢으며 상하고 통회하는 마음으로 자신에게 돌아오기를 간절히 원하시고 있는 것입니다. “너희는 옷을 찢지 말고 마음을 찢고 너희 하나님 여호와에게로 돌아올지어다...”(2:13)

북쪽 군대(2:20) -이는 1차적으로 북쪽에서부터 바람에 밀려 날아온 메뚜기 떼를 가리키는 것이나 결국 이스라엘 북쪽에 거하는 이방민족 앗수르나 바벨론 등을 의미한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실제로 북왕국 이스라엘은 주전 722년 앗수르 제국에 의해서, 남왕국 유다는 주전 586년 바벨론 제국에 의해서 각각 패망하였습니다.

피와 불과 연기기둥(2:30) -마지막 심판 날이 임할 때 생기는 전조(前兆)들로서, 피는 애굽의 강물이 피로 변한 이적을(촐7:17), 불은 애굽에 내렸던 우박 섞인 불을(출9:24), 연기기둥은 전쟁 때 불타는 마을에서 솟아나는 검은 연기를(사9:17), 해가 어두워지고 달이 핏빛같이 변하는 현상은 애굽에 있었던 흑암의 재앙을(출10:21) 각각 연상케 합니다.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는 자(2:32) -이는 하나님을 올바로 알고 믿어 입으로 시인하는 자로 성경은 이러한 자만이 구원을 받을 수 있다고 증언하고 있습니다. “네가 만일 네 입으로 예수를 주로 시인하며 또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네 마음에 믿으면 구원을 받으리라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느니라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받으리라.”(롬10:9,10,13)

여호사밧 골짜기(3:2) -“내가 만국을 모아 데리고 여호사밧 골짜기에 내려가서 내 백성 곧 내 기업인 이스라엘을 위하여 거기에서 그들을 심문하리니 이는 그들이 이스라엘을 나라들 가운데에 흩어 버리고 나의 땅을 나누었음이며.” 이는 남왕국 유다 왕 여호사밧이 하나님의 기적적인 도움을 받아 적은 수의 군사로 모압과 암몬, 그리고 에돔 연합군을 물리친 브라가 골짜기를 가리킵니다(대하20:26). 그런데 선지자 요엘이 바로 이곳을 만국을 향한 하나님의 심판 장소로 언급한 것은 이러한 역사적 사실을 근거로 하여 살아계신 하나님의 역사가 반드시 이루어질 것이라는 사실을 알리기 위함일 것입니다.

한편, ‘심판의 골짜기’(3:14) 역시 ‘여호사밧 골짜기’를 의미합니다. “사람이 많음이여 심판의 골짜기에 사람이 많음이여 심판의 골짜기에 여호와의 날이 가까움이로다.”(3:14)

싯딤골짜기(3:18) -이는 아카시아 나무 외에는 자랄 수 없는 사해 부근의 메마른 골짜기로 이곳까지 하나님의 성전에서 흘러나온 샘물로 말미암아 비옥한 땅으로 변화되리라는 것은 장차 하나님께로부터 말미암은 복음이 메마른 골짜기와 같은 사람들의 심령을 적셔 소생하게 될 것임을 시사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여호와의 성전에서 샘이 흘러 나와서 싯딤 골짜기에 대리라.”(3:18 하)

한편, 하나님의 성전에서 흘러나오는 샘물이 동쪽을 향해 강을 이루면서 흘러간다는 표현은 에스겔 47장에서도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가 나를 데리고 성전 문에 이르시니 성전의 앞면이 동쪽을 향하였는데 그 문지방 밑에서 물이 나와 동쪽으로 흐르다가 성전 오른쪽 제단 남쪽으로 흘러내리더라 ... 그가 내게 이르시되 이 물이 동쪽으로 향하여 흘러 아라바로 내려가서 바다에 이르리니 이 흘러내리는 물로 그 바다의 물이 되살아나리라.”(겔47:1,8)

 

 

 

젊은이는 이상을 볼 것이며(2:28,29)

* 내가 내 영을 만민에게 부어주리니

“그 후에 내가 내 영을 만민에게 부어 주리니....”(2:28 상)

 하나님은 선지자 요엘을 통해 놀라운 사실 하나를 알려주십니다. 무엇입니까? 당시 즉, 구약시대로서는 특정한 사명을 위해 특정한 사람에게만 성령께서 부분적이고도 조건적으로 임하셨지만(물론 ‘성령이 임하고 떠난다.’는 표현은 직무와 관련된 것으로 중생과 관련된 표현은 아니며, 구약이나 신약이나 성령은 개인과의 관계에 있어서 한번 오시면 떠나지 않으십니다), 언제가 때가 되면 하나님을 믿는 자이면 누구에게나 성령이 하나님의 선물로 임하게 될 것이라는 내용입니다. “그 후에 내가 내 영을 만민에게 부어 주리니...”(28절)

 이는 구체적으로 언제 성취되었습니까? 신약시대의 오순절 성령강림 사건 때입니다(행 2장). “오순절 날이 이미 이르매 그들이 다 같이 한 곳에 모였더니 홀연히 하늘로부터 급하고 강한 바람 같은 소리가 있어 그들이 앉은 온 집에 가득하며 마치 불의 혀처럼 갈라지는 것들이 그들에게 보여 각 사람 위에 하나씩 임하여 있더니 그들이 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 성령이 말하게 하심을 따라 다른 언어들로 말하기를 시작하니라.”(행2:1~4)

 한편, ‘오순절’(‘칠칠절’, ‘맥추절’ 등)은 ‘초실절’ 즉, ‘유월절 후 첫 안식일 다음날(예수님께서 부활하셔서 새 생명 가운데서 첫 열매로 드려지심을 상징) 이후 7번째 안식일이 지난 다음 날 즉, 만 49일(7×7)일이 지나서 오십일 째 되는 날을 가리키는 날로 이 때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보리 추수가 거의 끝나가고 밀 추수가 새로 시작되는 무렵으로, 이는 신약시대에 예수 그리스도께서 부활승천하신 후 (부활 후 50일째 되는 날에) 성령께서 새로이 우리들에게 오셔서 하나님의 역사를 나타내시고, 또한 이로 인해 세워질 교회의 설립을 상징합니다.

 “맥추절을 지키라 이는 네가 수고하여 밭에 뿌린 것의 첫 열매를 거둠이니라...”(출23:16) /“칠칠절 곧 맥추의 초실절을 지키고...”(출34:22) /“일곱 주를 실지니 곡식에 낫을 대는 첫 날부터 일곱 주를 세어 네 하나님 여호와 앞에 칠칠절을 지키되 네 하나님 여호와 앞께서 네게 복을 주신 대로 네 힘을 헤아려 자원하는 예물을 드리고.”(신16:9,10) /“안식일 이튿날 곧 너희가 요제로 곡식단을 가져온 날부터 세어서 일곱 안식일의 수효를 채우고 일곱 안식일 이튿날까지 합하여 오십일을 계수하여 새 소제를 여호와께 드리되.”(레23:15,16)

 이날 약 몇 명 정도의 성도들이 다락방에 모여 기도하고 있었습니까? 120명 정도입니다. “들어가 그들이 유하는 다락방으로 올라가니 베드로, 요한, 야고보, 안드레와 빌립, 도마와 바돌로매, 마태와 및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 셀롯인 시몬, 야고보의 아들 유다가 다 거기 있어 여자들과 예수의 어머니 마리아와 예수의 아우들과 더불어 마음을 같이 하여 오로지 기도에 힘쓰더라.”(행1:13,14) 그들은 대부분 ‘갈릴리 사람들로’(행2:7)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내게서 들은 바 아버지께서 약속하신 것 즉, 성령을 기다리라”(행1:4)는 예수님의 분부대로 젊은이로부터 늙은이에 이르기까지 남녀노소, 지위고하를 막론하고(행2:17,18) 마음을 같이한 채 오직 기도에 전념하고 있었던 것입니다(행1:14).

* 꿈과 이상을 보고, 장래 일을 말할 것이며

“...너희 자녀들이 장래 일을 말할 것이며 너희 늙은이는 꿈을 꾸며 너희 젊은이는 이상을 볼 것이며.”(2:28절 하)

 결국 그들은 무엇을 보게 되었습니까? 꿈과 이상(환상)입니다. 또한 무엇을 말하게 되었습니까? 장래 일입니다. 그런데 이들 모두는 무엇에 관한 것들이었습니까? ‘하나님의 큰 일’입니다. “....우리가 다 우리의 각 언어로 ‘하나님의 큰 일’을 말함을 듣는 도다 하고.”(행2:11) 당시 그 120명의 성도들은 다 성령의 충만함으로 (꿈과 이상 등을 통해) ‘하나님의 큰 일’을 보게 되었고, 또한 그 성령의 말하게 하심을 따라 ‘각기 다른 언어로’(일시적이긴 하나) 그 일들에 관해 예언하게 된 것입니다.

 물론 ‘하나님의 그 큰 일’ 중 상당수는 ‘장래의 일’에 관한 것임이 분명합니다(욜2:28 ‘장래 일’). 예수님께서도 진리의 성령, 그분이 오시면 그분의 우리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실 뿐만 아니라 (성부와 성자의 뜻에 결코 반하지 않는, 오히려 성부와 성자의 뜻의 연속선상에서) ‘장래 일’을 우리에게 알려주시리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진리의 성령이 오시면 그가 너희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리니 그가 스스로 말하지 않고 오직 들은 것을 말하며 장래 일을 너희에게 알리시리라.”(요16:13)

 한편, ‘오순절 성령강림’은 ‘구속사적 차원에서’ (다시 반복되지 않는) 단회적인 사건이며, ‘사도시대’ 역시 특별계시기로서, 완결된 특별계시로서의 주어진 성경을 가지고 있는 교회시대와 동일하지 않습니다(사도시대와의 동일한 경험이 동일한 형태로 임한다는 일부 주장은 바르지 못합니다). 하지만 동시에 이 오순절 사건은 ‘선교적, 교회적인 차원에서’ (반복될 수 있는) 계속적인 사건임이 분명합니다. 물론 이 계속성이란 반드시 오순절 성령강림의 단회성에 비추어서 고려되어야 하지만 말입니다.

그렇다면 본문에서 성령강림 이후 시대의 두드러지는 특징들로 묘사되고 있는 예언(장래 일을 말함)과 꿈, 이상(환상) 등은 어찌 봐야 합니까?

첫째, 예언입니다. “... 너희 자녀들이 장래 일을 말할 것이며...”(욜2:28) /“...너희의 자녀들은 예언할 것이요...”(행2:17) 구약시대에서 예언이 주로 장차 오실 메시야, 즉 그리스도에 관한 내용을 그 핵심으로 다루고 있다면, 신약시대에 이르러서는 그리스도의 재림과 종말에 대한 계시가 가장 큰 주류를 형성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신약시대에서의 이 예언 역시 ‘성경의 완성’을 기점으로 크게 구분될 수 있는데 (아직 성경이 완성되지 않았던) 초대교회의 상황에서 예언의 은사가 하나님의 뜻을 알려주는 본질적인 역할을 담당했다면, 성경이 완성된 이후의 예언은 (초대 교회와 같은 특수성을 갖지 못한 채) 성경에 기록된 하나님의 뜻을 깨달으며, 복음에 나타난 하나님의 계시를 알게 하는 보편적인 은사를 의미하게 된 것입니다.

 무슨 말입니까? ‘성경의 완성’과 함께 그동안 성경기록과 관계 했던 (예언의 은사를 포함한) 모든 은사들이 사실상 종료되었지만, 여전히 우리는 ‘성령을 통해’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함을 받을 수 있고, ‘역시 그 성령을 통해’ 우리 자신과 세상을 향해 ‘장래 일’을 말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물론 여기서 ‘장래 일’이란 성부 하나님과 성자 예수님의 뜻 즉, 신구약 성경의 정신에 결코 반하지 않는 것이자, 다음에 함께 소개되고 있는 ‘꿈과 이상’과 깊은 연관성을 가진 것임이 분명합니다.

둘째, 꿈과 이상입니다. “... 너희 늙은이는 꿈을 꾸며 너희 젊은이는 이상을 볼 것이며.”(2:28절 하) 사실 ‘꿈’과 ‘이상’, (앞서 언급한) ‘예언’ 세 가지는 모두 성경이 완성되기 전 계시의 방편으로 사용되던 것인데, 예언은 주로 ‘계시의 전달적 측면에서’, 꿈과 이상(환상)은 ‘계시의 수납적인 측면에서’ 주로 사용되어 왔던 것입니다. 참고로, 이상(환상)은 ‘깨어 있는 상태 즉 지각이 온전한 상태에서’ 하늘의 신비를 접하는 것인 반면, 꿈은 ‘수면 상태에서’ 접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결국, 본문을 통해 알 수 있는 성령강림 이후 시대의 두드러지는 특징들은 무엇입니까? 꿈과 이상을 보고 장래 일을 말하게 되는 것입니다. 오순절 성령강림 사건 때 120명의 성도들이 그리하였던 것처럼 말입니다(물론 이 같은 특징들 역시, 오순절 성령강림이 그러하듯, 단회적인 성격과 계속적인 성격을 동시에 지니고 있긴 하겠지만 말입니다). “그들이 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 성령이 말하게 하심을 따라 다른 언어들로 말하기를 시작하니라.... 우리가 다 우리의 각 언어로 하나님의 큰일을 말함을 듣는도다 다 놀라며 당황하여 서로 이르되 이 어찌 된 일이냐 하며.”(행2:4,11,12)

 지금 우리는 어떻습니까? 성령의 부으심에 따라 그 속에서 꿈과 환상(비전)을 보고 있습니까? (물론 그렇다고 해서 우리가 직접 꿈을 꾸며 실제로 환상을 보아야 한다는 말을 하려는 게 아닙니다. 대부분의 경우 실제로 꿈을 꾸고 육안으로 환상을 볼 수 있기보다는 마음과 생각 속에 투영되고 각인되기 때문입니다) 또한 우리는 어떻습니까? 성령의 말하게 하심을 따라 ‘장래 일’을 말하고 있습니까? 물론 여기서의 ‘장래 일’이란 신구약 성경에 결코 반하지 않는 것이자, ‘꿈과 환상’(욜2:28)의 다른 표현으로써 결국 ‘하나님의 큰 일’(행2:11)에 속한 것일 겁니다.

 어떻습니까? 꿈과 비전의 사람이 되고 싶지 않으십니까? 하나님의 (장래의) 큰 일, 특히 그 속에 포함된 나의 달려갈 길, 주 예수께 받은 나의 사명을 발견하고 또한 이뤄가지 않으시렵니까? “내가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증언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조차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행20:24)

 


 

믿고 시인하는 자가 구원을 얻는다(욜2:30~32)

* 여호와의 크고 두려운 날이 이르기 전에...

“내가 이적을 하늘과 땅에 베풀리니 곧 피와 불과 연기 기둥이라 여호와의 크고 두려운 날이 이르기 전에 해가 어두워지고 달이 핏빛 같이 변하려니와.”(2:30,31)

  성경은 마지막 때, 여호와의 크고 두려운 날이 이르기 전에 어떤 일들이 있을 것이라고 증언하고 있습니까? 하나님께서 하늘과 땅에 이적(기사)과 징조를 베푸시되 해가 어두워지고 달이 핏빛으로 변하며, 피와 불과 연기기둥(연기) 등으로 대변되는 전조(前兆) 현상들이 있게 될 것입니다. “또 내가 위로 하늘에서는 기사를 아래로 땅에서는 징조를 베풀리니 곧 피와 불과 연기로다 주의 크고 영화로운 날이 이르기 전에 해가 변하여 어두워지고 달이 변하여 피가 되리라.”(행2:19,20)

 한편, 여기서 ‘피와 불, 연기 기둥’은 각각 무엇을 연상하게 합니까? ‘피’는 애굽의 강물이 피로 변한 이적을(출7:17), ‘불’은 소돔과 고모라에 비같이 내렸던 유황과 불을(창19:24), ‘연기기둥’은 이로 인해 소돔과 고모라에서 옹기 가마의 연기처럼 피어올랐던 연기를(창19:28), ‘해가 어두워지고 달이 핏빛같이 변하는 현상’은 애굽에 있었던 흑암의 재앙을(출10:21) 연상하게 합니다.

 결국 우리는 ‘여호와의 크고 두려운 날’(2:31), 또는 ‘주의 크고 영화로운 날’(행2:20)이 이르기 전, 이와 같은 이적(기사)과 징조, 즉 마지막 심판의 전조들을 피할 수 없을 것입니다. 우리는 어떻습니까? 주의 날, 즉 주의 크고 두려운 날 맞을 준비하고 있습니까? 주의 크고 영화로운 날 맞기를 예비하고 있습니까?

* 주의 이름을 부르라

“누구든지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니....”(32절 상)

 한편, 성경은 이와 같은 상황 중에서도 어떤 자가 구원을 얻게 된다고 증언하고 있습니까?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는 자입니다. 무슨 의미입니까? 이는 진실로 여호와 하나님을 알고 믿되, 그 입술로 시인하는 데까지 이르는 자라야 구원을 얻게 된다는 의미입니다.

 사실, ‘마음으로 믿는 것’과 ‘입으로 시인하는 것’은 신앙의 기초, 아니 그 전부라도 과언이 아닐 뿐만 아니라, 이 둘의 관계는, 마치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것이며 헛것인 것처럼(약2:17,20), 뗄 레야 뗄 수 없는 불가분의 관계임이 분명합니다. 따라서 사도 바울은 로마서에서 이 부분에 대해 어떤 명쾌한 결론을 내려놓았습니까?

 “네가 만일 네 입으로 예수를 주로 시인하며 또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네 마음에 믿으면 구원을 받으리라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느니라 성경에 이르되 누구든지 그를 믿는 자는 부끄러움을 당하지 아니하리라 하닌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차별이 없음이라 한 분이신 주께서 모든 사람의 주가 되사 그를 부르는 모든 사람에게 부요하시도다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받으리라.”(롬10:9~13)

 무슨 말입니까? 사람은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을 얻게 되며, 또한 입으로 (예수를) 시인하되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마음에 믿으면 구원을 얻게 된다는 말씀입니다. 이를 뒷받침하기 위해 사도 바울은 구약의 어떤 구절들을 인용해왔습니까? “성경에 이르되 누구든지 그를 믿는 자는 부끄러움을 당하지 아니하리라 하니”(롬10:11/사28:16 인용)와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받으리라.”(롬10:13/욜2:32 인용)는 말씀입니다.

 한편, 여기서 ‘시인’(헬, 호몰로게이타이)이란 ‘공개적으로 고백하다’의 의미로, 매순간마다 사람들 앞에서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자신의 신앙을 아무 두려움 없이 공언하되, 단순한 지적인 확인 차원을 넘어서 생활에서의 가치기준으로 신앙고백 되어져야 함을 의미합니다. 참고로, 본 동사의 시제는 현재형으로 ‘계속적으로 시인할 것’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어떻습니까?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고 있습니까?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시인하되 하나님께서 그분을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마음으로 굳게 믿고 있습니까? 또한 날마다 자신의 신앙을 사람들 앞에서 스스럼없이 공언하고 있습니까? 그것도 단순한 지적인 확인 차원을 아닌 삶에서의 분명한 가치기준으로 말입니다.

 

 

 

 

 

 

[아모스]

* 제목: 아모스

‘짐진 자’라는 저자의 이름을 따른 것입니다.

* 저자: 아모스

본서의 내적 증거(1:1) 및 1인칭을 사용한 문체(5:1; 7:1,4,7,8: 8:1,2; 9:1)를 볼 때 아모스의 저작이 분명합니다. 그는 목축, 뽕나무 재배 등을 하던 농부였으나, 문체 등으로 보아 학식을 갖춘 은둔한 야인으로 추측됩니다.

* 기록연대: 주전 767년~ 745년 사이.

본서 1:1에 의해 지적된 남왕국 유다의 웃시야와 북왕국 이스라엘의 여로보암 2세의 통치가 겹치는 시기는 주전 767년부터이며, 앗수르의 침략이 미래형으로 나타나고 있는바 본서는 주전 767년 이후부터 주전 745년 이전임을 알 수 있습니다. 참고로, 아모스는 남왕국 유다의 웃시야와 북왕국의 여러보암 2세의 통치기에 활동했으며 호세아 선지자보다 조금 앞선 시기에 활동했습니다. “유다 왕 웃시야의 시대 곧 이스라엘 왕 요아스의 아들 여로보암의 시대 지진 전 이년에 드고아 목자 중 아모스가 이스라엘에 대하여 이상으로 받은 말씀이라.”(1:1)

* 기록목적:

1)이스라엘의 배교와 방종으로 얼룩진 종교, 사회적 부패를 책망하기 위하여.

2)이스라엘의 사로잡힘, 임박한 멸망을 경고하기 위하여(7:17).

3)순종하는 자가 종국적으로 얻게 될 새 나라의 구원의 희망을 갖게 하기 위하여.

* 기록장소: 드고아(유다 베들레헴 남쪽 촌락으로 저자의 출신지).

* 대상: 북왕국 이스라엘

* 배경: 이스라엘은 여로보암 2세 시대에 앗수르와 아람의 다툼으로 거의 외세의 위협이 없는 평안과 태평성대를 누렸으나 극심한 빈부격차와 부정부패, 땅에 떨어진 상업윤리, 비뚤어진 성윤리 등으로 얼룩져 있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참된 예배가 사라진 지 오래, 대신 위선적인 종교 행사들만이 가득, 결국 혼합종교적인 양상에까지 이르러 있었던 것입니다.

* 핵심단어: 이스라엘의 심판

* 핵심구절: 5장 24절

“오직 정의를 물 같이, 공의를 마르지 않은 강 같이 흐르게 할지어다”

* 핵심장: 제9장

아모스의 준엄한 심판의 외침에는, 구약성경 어느 곳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이스라엘의 회복에 대한 예언의 일부가 포함되어 있는데(9:11~15) 이는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다윗과 맺은 언약처럼, 팔레스타인에 정착한 백성들과 맺은 언약 역시 메시야의 재림을 통해 궁극적으로 성취되어질 수 있음을 알게 합니다. “그 날에 내가 다윗의 무너진 장막을 일으키고 그것들의 틈을 막으며 그 허물어진 것을 일으켜서 옛적과 같이 세우고 그들이 에돔의 남은 자와 내 이름으로 일컫는 만국을 기업으로 얻게 하리라 이 일을 행하시는 여호와의 말씀이니라.”(9:11,12)

* 특징:

(1) 하나님의 대표적인 속성을 ‘공의’로 보고, 이에 어긋나는 것에 대한 심판을 선포함(공의 강조).

(2) 종교의 본래적 의미를 존중하여 내용 없는 형식적 종교 의례를 배격했음.

(3) 소선지서 중 가장 세밀하게, 그리고 중점적으로 ‘사회적 정의를 이룰 것’을 역설했음.

 

* 개요:

본서에는 범죄한 이스라엘이 당할 파멸의 당위성과 함께, 그것에서 벗어나기 위해 취해야 할 바와 끝내 당하고야 말 심판의 참혹함, 그리고 하나님의 자비로우심으로 인하여 다시 회복될 영적 이스라엘에 대하여 기록되어 있습니다.

1. 서론(1:1,2)

2. 8가지 예언(1:2~2:16)

먼저 이스라엘의 주위에 있는 열방들의 죄악을 지적하고 심판을 예언함으로써 이스라엘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 역시 당연하다는 사실을 밝히고 있습니다.

1)다메섹에 대하여 -철 타작기로 타작하듯 길르앗을 압박하였기 때문.

2)가사에 대하여 -모든 사로잡은 자를 끌어 에돔에 넘겼기 때문.

3)두로에 대하여 -형제의 계약을 기억하지 않은 채 모든 사로잡은 자를 에돔에 넘겼기 때문.

4)에돔에 대하여 -칼로 그의 형제를 쫓아가며...항상 맹렬히 화를 내며 분을 끝없이 품었기 때문.

5)암몬에 대하여 -자기 지경을 넓히고자 하여 길르앗의 아이 밴 여인의 배를 갈랐기 때문.

6)모압에 대하여 -에돔 왕의 뼈를 불살라 재를 만들었기 때문.

7)유다에 대하여 -여호와의 율례를 지키지 아니하고 조상들이 따르던 우상에 미혹되었기 때문.

8)이스라엘에 대하여 -가난한 자를 멸시 ‧ 학대하고, 음행으로 하나님의 이름을 모독하며, 우상숭배에 빠졌기 때문.

3. 3가지 설교(3:1~6:14)

여기에는 모두 하나님께서 백성들을 죄에서 돌이키기 위해 노력하신 사실과 그들이 하나님의 회개의 요청을 거부하고 거듭 범죄한 사실이 반복하여 묘사되고 있습니다. 특히 아모스서가 주로 북왕국에 대한 예언이지만 제6장의 경우에서 볼 수 있듯 남왕국 유다에 대한 경고 역시 포함되어 있음을 유의할 필요가 있습니다.

1)첫번째 설교: 이스라엘의 심판(3:1~15)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징계하시는 까닭

-이스라엘의 멸망을 선포할 수밖에 없는 선지자의 사명

-사마리아의 멸망과 소수의 구원

-우상숭배와 세속적 향락에 대한 결과로서의 멸망 선포

2)두번째 설교: 이스라엘의 죄(4:1~13)

-이스라엘의 사치한 부유층에 대한 심판

-더욱 깊어지는 우상숭배의 범죄상

-하나님의 경고를 듣고도 돌아오지 않음에 대한 탄식

-하나님의 더 큰 심판에 대한 최후의 경고

3)세번째 설교: 이스라엘의 애가(5:1~6:14)

-심판을 받을 만한 이스라엘과 그들이 받을 심판

4. 심판에 대한 5가지 환상(7:1~9:10)

이는 미래에 내려질 이스라엘 심판에 대한 환상들로 처음에 언급된 메뚜기와 불 심판은 아모스의 도고로 인해 거두어지지만, 이어지는 다림줄, 여름 실과, 부서지는 문설주 등의 환상은 하나님의 자비에도 불구하고 거두어지지 않았습니다(이스라엘이 불가피하게 징계 받을 수밖에 없음을 보여줌).

1)메뚜기 떼

2)불

3)다림줄

4)여름 실과

5)부서지는 문설주

5. 회복에 대한 5가지 약속(9:11~15)

비록 이스라엘이 죄의 보응을 받게 되지만, 결국 하나님의 구속 계획 아래 무너진 다윗 가계가 복원되고, 땅이 새로워지며, 포로들이 귀환할 것이라는 희망 찬 선포가 주어져 있습니다.

 

 

 

* 핵심단어 및 구절, 인물연구

다메섹(1:3~5) -다메섹을 수도로 하는 아람(수리아)은 남하정책으로 르우벤과 갓과 므낫세 반 지파가 살던 길르앗 지역을 끊임없이 위협했습니다(특히 하사엘과 그의 아들 벤하닷 때에 가장 심하게 이스라엘을 압제했음/왕하 13:3). 그들은 단순히 이스라엘을 침략한 것에 그치지 않고 오히려 악랄한 방법으로 인간성을 말살했으므로 하나님의 진노를 받게 되었던 것입니다. 한편, 이 예언은 주전 732년 앗수르의 디글랏 빌레셀 3세의 정복 전쟁으로 인해 완전히 성취되었습니다(왕하15:6-9).

가사(1:6~8) -가사, 아스돗, 아스글론, 에그론, 가드 5개 도시로 구성된 블레셋은 유다를 침략, 여호람의 가족들과 왕궁의 재물을 약탈해 갈 때(대하 21:16,17) 많은 사람들을 포로로 잡아 에돔에 넘겼을 뿐만 아니라, 산헤립의 유다 침공 때에도 블레셋으로 피난간 사람들을 헬라인에게 팔아넘기는 만행을 저질렀습니다(욜3:4-6). 한편, 블레셋은 웃시야 왕(대하26:6,7)과 히스기야 왕(왕하18:8) 때 크게 파괴되었으며, 그후 애굽, 바벨론, 헬라의 침입을 받았고 오늘날에는 혈통조차 보존하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두로(1:9,10) -두로는 옛적 두로 왕 히람이 이스라엘 왕 다윗과 솔로몬 등과 맺은 ‘형제의 계약’, 즉 ‘상대방 백성을 노예로 팔지 못한다’는 계약(삼하5:11;왕상5:1~12;9:13)을 일방적인 파기한 채 이스라엘의 사로잡은 자를 에돔에 팔아 넘겼습니다. 한편, 이 예언은 주전 332년 마게도냐 알렉산더 대왕이 두로를 함락, 약 3만 명의 거민을 노예로 팔고, 수천 명의 지도자를 사형시킴으로 성취되었습니다.

에돔(1:11,12) -에돔은 이스라엘의 출애굽 당시 그 행로를 막았고(민20:14-21), 느부갓네살의 예루살렘을 공격할 때에 바벨론의 앞잡이 노릇을 하는 등 형제국가인 이스라엘을 끊임없이 학대하고 괴롭혔습니다.

암몬(1:13~15) -암몬은 영토 확장에 대한 지나친 욕심을 가지고(삿11:13; 삼상11장), 아람과 동맹을 맺어(삼하10:6) 이스라엘을 침공 시 길르앗의 아이 밴 여성의 배를 가르는 등 비인도적인 만행을 저질렀습니다(왕하8:12). 한편, 그들은 주전 580년경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 바벨론의 느부갓네살에 의하여 멸망당하고 말았습니다(렘49:2).

모압(2:1~3) -모압은 가나안 입성 직전에 발람 선지자를 통하여 이스라엘을 저주하려 했고(민22~24장), 바알브올에서 이스라엘을 범죄 하게 했으며(민25장; 호9:10), 사사시대에는 18년 동안 이스라엘을 침략, 자신들의 지배 아래에 두었으며(삿3:12~30), 사울 왕 때에도 이스라엘과 전쟁을 펼친 바가 있으며, 심지어는 (적성국인) 에돔을 침공, 그 왕의 뼈를 불사르는 반인륜적, 반인간적인 범죄를 서슴지 않았던 것입니다. 한편, 모압은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 바벨론의 니보폴라살에 의해 멸망하고 말았습니다.

나실인으로 포도주를 마시게 하며(2:12) -이스라엘 백성들은 ‘나실인과 선지자를 통하여’ 하나님의 자비를 체험했음에도 불구하고, (나실인에게 포도주를 마시게 함으로써) 영적 축복의 상징인 나실인의 순결을 침해하고, 선지자들의 말씀 선포를 방해함으로써 선택받은 백성의 권리를 스스로 포기, 결국 하나님의 엄정한 심판을 자초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너희가 나실 사람으로 포도주를 마시게 하며 또 선지자에게 명령하여 예언하지 말라 하였느니라.”(2:12)

예고하신 후 심판하신다(3:7) -하나님은 범죄에 대한 징계에 있어서조차도 먼저 예고하신 후 심판을 행하십니다(창6:13-21; 창18:17-21;19:12,13; 출7~12장). “주 여호와께서는 자기의 비밀을 그 종 선지자들에게 보이지 아니하시고는 결코 행하심이 없으시리라.”(3:7)

식굿과 기윤(5:26) -별신을 섬기기 위하여 만든 우상, 메소보타미아에서 유입되었습니다.

다메섹 밖으로 사로잡혀 가게 하리라(5:27) -이는 결국 이스라엘 백성들이 자신들의 죄악 으로 말미암아 ‘가나안에서 쫓겨나’ 포로가 될 것을 선포하는 말씀입니다.

다림줄(7:7) -이는 건물의 수직을 바로잡는 도구로서 건물을 세우거나 헐 때에 사용되었습니다(사34:11; 에2:8). 하나님께서는 여기서 이과 같은 다림줄을 이스라엘 가운데 두고 다시는 용서하지 않을 것을 말씀하고 계십니다.

아마샤(7:10) -그는 벧엘에서 우상숭배를 주도하는 대제사장, 여로보암 2세의 신임을 받던 자로서 벧엘의 성소에서 왕궁과 연결된 어용적 직무를 수행했습니다(13절). 한편, 그는 아모스의 예언 중 ‘여로보암의 집을 치리라’(9절)를 ‘여로보암은 칼에 죽겠고’(11절)라는 자극적인 말로 바꾸고, ‘여호와를 찾으라 그리하면 살리라’는 예언의 핵심을 고의로 제외함으로써 여로보암 2세를 자극, 아모스를 반역죄로 처단하고자 했습니다.

여름과일 한 광주리 환상(8:1~3) -이는 보기에는 화려하나 조만간 썩을 수밖에 없는 여름 실과처럼 지금은 부강하나 부패로 인하여 멸망으로 끝날 이스라엘의 미래를 보여주는 내용입니다.

부서지는 문설주 환상(9:1~6) -이는 성전이 무너지는 것을 기점으로 이스라엘 전체가 멸망 받게 될 것을 내용으로 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제단’(1절/히브리어 원문에는 단 앞에 정관사가 붙어 ‘그 단’임)은 ‘벧엘의 단’이라기보다는 (9장 전체의 내용 등으로 살펴보건대) 예루살렘 성전의 번제단이라고 보는 것이 타당할 것입니다. 한편, 심판에 앞서 성전이 파괴되는 것은 이스라엘 멸망의 일차적인 원인이 종교의 타락에 있음을 암시합니다.

다윗의 무너진 장막을 일으키고(9:11) -‘다윗의 무너진 장막’은 임시로 사용하려고 엮은 초막을 가리킵니다(이는 다윗의 왕국이 아무리 강력한 국가라 하더라도 이 세상에 있는 한 초막에 불과함을 깨닫게 합니다). 이제 하나님께서 스스로 분열되고 원수들에게 점령되어 폐허화 된 나라를 다시 일으켜 세우시겠다고 약속하고 계시는데 이와 같은 하나님의 약속은 유다와 이스라엘이 한 두목을 세우고 일어날 것을 바라본 호세아의 예언(호1:11)과 그 맥을 같이하고 있습니다. 물론, 여기서 다윗의 회복된 왕국은 역사적인 왕국이 아닌 영원한 그리스도의 나라를 상징하고 있음이 분명합니다.

 

 

 



드고아 목자 아모스를 부르시다(암7:14,15)

* 드고아의 목자,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다.

“유다 왕 웃시야의 시대 곧 이스라엘 여로보암의 시대 지진 전 이년에 드고아 목자 중 아모스가 이스라엘에 대하여 이상으로 받은 말씀이라.”(암1:1)

 남유다의 웃시야 왕과 북이스라엘의 여로보암 2세의 통치 시기가 겹친 시점에서 북이스라엘에 대해 이상을 받은 사람은 누구입니까? 드고아의 목자 아모스입니다. “...드고아 목자 중 아모스가 이스라엘에 대하여 이상을 받은 말씀이라.”(1:1)

 사실 아모스는 자신의 증언대로 (전문적인 선지자 교육을 받은, 직업적인) 선지자나 선지자의 아들(제자)이 아니었습니다. “아모스가 아마샤에게 대답하여 이르되 나는 선지자가 아니며 선지자의 아들도 아니라...”(7:14 상) 단지 남유다 드고아 지역의 일개 목자요 농부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나는 목자요 뽕나무를 재배하는 자로서 양 떼를 따를 때에 여호와께서 나를 데려다가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기를 ‘가서 내 백성 이스라엘에게 예언하라’ 하였나니.”(7:14,15)

그런 그에게 하나님은 무엇을 명하셨습니까? “...가서 내 백성 이스라엘에게 예언하라...”(1:15) 어떤 내용을 말입니까? 부강했던 남북왕조들이 그들의 죄를 회개치 않을 때 받게 되는 무서운 재앙들입니다. “그가 이르되 여호와께서 시온에서부터 부르짖으시며 예루살렘으로부터 소리를 내시리니 목자의 초장이 마르고 갈멜 산꼭대기가 마르리로다.”(1:2)

 사실, 그 당시 북이스라엘은 여로보암 2세의 치세 때로 앗수르와 아람의 다툼으로 거의 외세의 위협이 없는 태평성대를 누렸으나 내부적으로는 극심한 빈부격차와 부정부패, 땅에 떨어진 상업윤리, 비뚤어진 성윤리 등으로 얼룩져 있었던 것은 물론 종교적으로도 참된 예배가 사라진 지 오래, 대신 위선적인 종교 행사들만이 가득하는 등 결국 혼합종교적인 양상에까지 이르러 있었던 것입니다.

이와 같은 상황 속에서 하나님은 남유다 출신의 한 목자요 농부, 전문적인 선지자 교육을 받지 못한 아모스를 부르셨고, 결국 그를 통해 범죄한 이스라엘 백성들을 돌이키고자 하셨던 것입니다.

* 가서 내 백성 이스라엘에게 예언하라!

 “양떼를 따를 때에 여호와께서 나를 데려다가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기를 가서 내 백성 이스라엘에게 예언하라 하셨나니.”(7:15)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당시 드고아의 한 목자를 불러 사용하신 하나님께서 지금도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을 불러 당신의 기이한 일에 사용하고자 하시며, 당시 남유다의 한 농부를 불러 사용하신 주님께서 지금도 우리 한 명 한 명을 불러 당신의 선하신 일에 들어 사용하시고 원하십니다.

 우리 같았으면 다음과 같이 핑계를 대며 그 사명을 저버리고자 했을지도 모릅니다. ‘저는 광야 곧 척박하기 이를 데 없이 농사조차 지을 수 없는 지역의 일개 목자에 불과합니다. 그저 양 떼나 치고 뽕나무를 조금씩 재배하면서 입에 풀칠이나 하는 촌부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저는 제대로 된 (선지자) 교육을 받은 사람도, 그 제자도 아닙니다. 이런 제가 주님을 위해 무엇을 할 수 있겠습니까? 이런 제가 어찌 그런 큰일을 감당할 수 있단 말입니까? 말도 안 됩니다. 주님! 보낼 만 한 자를 보내소서.’

 그러나 그는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그럼 어찌 했습니까? 마치 ‘내가 여기 있나이다 나를 보내소서’(사6:8)라고 말하듯 당당하게 그 소명 앞으로 그 부르심 앞으로 나아갔습니다.

 ‘주님, 잘 아시다시피 저는 척박하기 그지없는 드고아 라는 곳에서 그저 양떼나 치고 뽕나무를 재배하면서 살아온 일개 목자요 촌부에 지나지 않습니다. 또한 제대로 된 선지자 교육은 물론 그 문턱조차도 밟아보지 못했습니다. 뭐 하나 내세울 게 없는 사람입니다. 그렇지만, 주님이 하라 하시면 기꺼이 하겠습니다. 주님이 가라 하시면 당당하게 그 길을 걸어가겠습니다. 주님이 외치라 하시면 남김없이 외치겠습니다. 주님이 죽으라 하시면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제 생명까지도 내어놓겠습니다.’

 지금 나에게 이런 일이 생긴다면 어찌 하시겠습니까? 지금 나에게 이와 같은 하나님의 소명이 주어진다면 어찌 하시겠느냐 말입니까?

사실 하나님의 부르심에 있어서 우리가 육체를 따라 얼마나 지혜롭고, 능하며, 문벌 좋은 지는 그리 중요하지 않습니다. “형제들아 너희를 부르심을 보라 육체를 따라 지혜로운 자가 많지 아니하며 능한 자가 많지 아니하며 문벌 좋은 자가 많지 아니하도다.”(고전1:26) 왜냐하면 우리 하나님은 세상에서 미련한 사람을 택하셔서 지혜 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시고, 세상의 약한 자들을 택하셔서 강하고 능한 자들을 능히 낮추시며, 천하고 멸시 받는 사람, 없는 사람을 택하셔서 있는 자들을 폐하시는 분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세상의 미련한 것들을 택하사 지혜 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시고 세상의 약한 것들을 택하사 강한 것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며 하나님께서 세상의 천한 것들과 멸시 받는 것들과 없는 것을 택하사 있는 것들을 폐하려 하시나니.”(고전1:27,28)

 단 하나 요구하시는 게 있습니다. 무엇입니까? 하나님을 향한 불타는 사랑과 열정입니다. 지금 우리는 어떻습니까? 하나님을 향한 불타는 사랑과 열정으로 충만해 있습니까? 이 세상 어떤 이들보다도, 어떤 것들보다도 오직 하나님 한 분만을 최고로 사랑하고 있습니까? “...네가 이 사람들보다(이것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요21:15~17)

 

 

씀을 듣지 못한 기갈(8:11~13)

* '지구의 허파' 아마존의 열대우림이 마르고 있다.

남미의 아마존 열대우림은 세계 최대 규모라고 널리 알려져 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흔히 그 곳을 '지구의 허파'라고도 부르곤 합니다. 그런데 몇 해 전 그 아마존이 극심한 가뭄에 시달리고 있다는 뉴스를 접하고 깜짝 놀랐습니다. 울창한 열대 우림지역이 바짝 바짝 마르고 갈라지고 있습니다. 사막화가 진행 중이라는 것입니다. 많은 학자들은 ‘지구 온난화와 무분별한 삼림개발’이 그 주범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그 가뭄보다 더 끔찍한 가뭄이 있습니다. 무슨 가뭄이냐구요?

* 먹을 것, 물이 없어서가 아닙니다.

“보라 날이 이를지라 내가 기근(가뭄)을 땅에 보내리니 양식이 없어 주림이 아니며 물이 없어 갈함이 아니요...”(11절)

먹을 것이 없어서가 아닙니다. 먹을 게 없다면, 어떻게 해서든지 먹을 것을 밭에서 길러내서라도 해결하고야 말았을 것입니다. 물이 없어서가 아닙니다. 물이 없다면 댐을 더 많이 건설하고 각종 수리시설을 정비해서라도 문제를 해결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문제는 이런 차원의 가뭄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못한 기갈

“...여호와의 말씀을 듣지 못한 기갈이라 사람이 이 바다에서 저 바다까지, 북쪽에서 동쪽까지 비틀거리며 여호와의 말씀을 구하려고 돌아다녀도 얻지 못하리니 그 날에 아름다운 처녀와 젊은 남자가 다 갈하여 쓰러지리라.”(암8:11상~13)

놀라지 마십시오. 아모스 선지자가 활동했던 시기는 사회적으로, 정치적으로 그리고 경제적으로 가장 안정적인 시기였습니다. 이때는 이스라엘과 유다 두 나라 모두 안정과 번영의 절정을 이루었던 시기였으며 특히 북이스라엘의 경우 우리나라 고구려의 '광개토대왕'과 견줄 만한 여로보암 2세의 치세 때였고, 남쪽도 그에 못지않은 강성한 왕 웃시야가 통치하던 시기였습니다.

“유다 왕 웃시야의 시대 곧 이스라엘 왕 요아스의 아들 여로보암의 시대 지진 전 이년에 드고아 목자 중 아모스가 이스라엘에 대하여 이상으로 받은 말씀이라.”(아모스 1:1)

 여로보암 2세(BC. 793-753)로 불리는 그는 41년 동안이나 이스라엘을 통치한 왕으로 그의 통치기간 내내 이스라엘의 국력은 최 절정기를 구가했습니다. 그가 선한 왕이었냐구요? 물론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그의 때에 선지자 요나의 예언을 이루셔서 이스라엘 땅의 거의 전 국토를 회복케 하셨던 것입니다. 오로지 하나님의 긍휼과 은혜 덕분입니다. 그의 방대한 정벌사업으로 회복된 땅은 다윗 때 소유했던 땅에 비길 만 했습니다.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 종 가드헤벨 아밋대의 아들 선지자 요나를 통하여 하신 말씀과 같이 여로보암이 이스라엘 영토를 회복하되 하맛 어귀에서부터 아라바 바다까지 하였으니 이는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의 고난이 심하여 매인 자도 없고 놓인 자도 없고 이스라엘을 도울 자도 없음을 보셨고 여호와께서 또 이스라엘의 이름을 천하에서 없이 하겠다고도 아니하셨으므로 요아스의 아들 여로보암의 손으로 구원하심이었더라.”(왕하 14:25~27)

 유다 왕 웃시야(아사랴)는 여로보암 2세와 거의 비슷한 시기에 통치했으며 그의 치세 또한 솔로몬 통일왕국 이래로 유다가 가장 부흥한 시기였습니다. 그는 16세의 어린 나이로 왕위에 올랐으며, 통치 초기 하나님만을 의지하여 영토를 확장하고 정복국의 조공을 받기도 했습니다. 또 부국강병책을 써 아라비아의 상인들과 무역로를 트고 광업과 농업을 부흥시켰으며 군대를 재정비하고 요새 건설에 힘썼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은혜로 나라가 부강해지자 나중에 교만해졌고 그 결과 문둥병에 걸려 죽을 때까지 별궁에 갇혀 지내야만 했습니다.

* 풍요 속의 빈곤

 그러나 하나님은 '풍요 속의 절대적 빈곤'을 말씀하셨습니다. 이스라엘과 유다 모두 하나님의 은혜로 나라가 부강해졌지만 결국 교만해졌고 그 풍요 속에서 하나님을 점점 잊고 있었던 것입니다. 어쩌면 경건의 모양은 더욱 화려해졌고 예배의 형식은 더욱 복잡해지고 수려해졌을지도 몰라도 경건의 능력은 결여된 상태였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모든 것이 풍요로워졌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을 등진 두 나라에 대해 하나님은 어떤 징벌, 어떤 심판을 내리셨는지 아십니까?

 하나님은 그런 그들에게 준엄한 심판을 내리셨습니다. ‘풍요속의 빈곤의 심판’ 말입니다. 하나님은 두 나라에게 더 이상 '하나님의 말씀'을 들려주지 않기로 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못한 가뭄....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은 영적인 존재입니다. 쉽게 말하면 영혼을 가진 육체라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육체를 가진 인간이 이 육신을 위해 음식을 먹어야 하는 것처럼, 영혼을 위해서도 영적 양식을 먹어야 합니다. 영적인 양식이란 무엇을 가리킵니까? 바로 하나님의 입에서 나오는 말씀입니다.

 “너를 낮추시며 너를 주리게 하시며 또 너를 알지 못하며 네 조상들도 알지 못하던 만나를 네게 먹이신 것은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요 여호와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사는 줄을 네가 알게 하려 하심이니라.”(신8:3)

 하나님백성의 특권은 바로 이 영적인 양식인 말씀을 부족함 없이 공급받는데 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특권을 백성 스스로가 멀리 했을 때, 하나님은 심판의 일환으로 말씀 공급을 멈추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이스라엘 백성이 당하는 재앙 중의 가장 큰 재앙인 것입니다.

* 역설 중의 역설

 '아니러니(역설)'... 도무지 어울릴 것 같지 않아 보이는데도 실제로는 함께 공존하는 것을 흔히들 역설이라고 합니다. 지금의 풍요가, 지금의 안정이 우리의 덫이 될 수 있습니다. 풍요속의 빈곤처럼 말입니다. 이것은 마치 홍수로 물난리가 난 중에도 마실 물을 제대로 구하지 못하는 것과도 같을 것입니다. 또 우리나라는 여름철에 엄청난 양의 집중호우가 쏟아지는데도 불구하고, 유엔이 지정한 '물 부족 국가'인 것과 같은 이치일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못한 기갈이 오기 전에 먼저 하나님의 말씀 앞으로 우리가 나아가야합니다. 지금은 지식 홍수의 시대입니다. 눈만 뜨면, 마우스 몇 번 클릭하기만 하면, 텔레비전을 틀기만 하면, 신문을 펼치기만 하면 설교, 칼럼, 좋은 글들을 얼마든지 들을 수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수 있는 여건들이 너무도 좋아졌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아우성칩니다. 도움을 구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수가 없다고??? 풍요 속에서 주님을 점점 멀리하다가는 더 이상 주님의 말씀을 듣지 못하게 될지도 모릅니다. 지금 들으십시오. 지금 찾으십시오. 더 지체하다간 영영 늦을지도 모릅니다.

 “사람이 이 바다에서 저 바다까지, 북쪽에서 동쪽까지 비틀거리며 여호와의 말씀을 구하려고 돌아다녀도 얻지 못하리니 그 날에 아름다운 처녀와 젊은 남자가 다 갈하여 쓰러지리라.”(아모스8:12~13)

잠언은 이렇게 말합니다.

 “나의 책망을 듣고 돌이키라 보라 내가 나의 영을 너희에게 부어 주며 내 말을 너희에게 보이리라 내가 불렀으나 너희가 듣기 싫어하였고 내가 손을 폈으나 돌아보는 자가 없었고 도리어 나의 모든 교훈을 멸시하며 나의 책망을 받지 아니하였은즉....... 그때에 너희가 나를 부르리라 그래도 내가 대답하지 아니하겠고 부지런히 나를 찾으리라 그래도 나를 만나지 못하리니.”(잠언1:23-25,28)

 

 

 

다윗의 장막을 일으키고(암9:11)

* 다윗의 장막이 무너지고 허물어진다.

 “하나님이 갈대아 왕이 손에 그들을 다 넘기시매 그가 와서 그들의 성전에서 칼로 청년들을 죽이며 청년 남녀와 노인과 병약한 사람을 긍휼히 여기지 아니하였으며 또 하나님의 전의 대소 그릇들과 여호와의 전의 보물을 다 바벨론으로 가져가고 또 하나님의 전을 불사르며 예루살렘 성벽을 헐며 그들의 모든 궁실을 불사르며 그들의 모든 귀한 그릇들을 부수고 칼에서 살아남은 자를 그가 바벨론으로 사로잡아 가매 무리가 거기서 갈대아 왕과 그의 자손이 노예가 되어 바사국이 통치할 때까지 이르니라.”(대하36:17~20)

 아모스를 비롯한 수많은 선지자들이 다윗의 장막, 즉 다윗의 왕국이 무너질 것을 예언해왔습니다. 결국 다윗의 왕국은 어찌 됩니까? BC 586년 바벨론의 왕 느부갓네살에 의해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게 됩니다.

 한편, 여기서 다윗의 왕국은 무엇으로 비유되고 있습니까? 장막, 즉 임시로 사용하려고 엮은 초막입니다. 왜 하필 장막입니까? 이는 다윗의 왕국이 한때 아무리 강력한 국가를 이루었다 할지라도 하나님이 보시기에는 이 세상에 있는 한 초막에 불과함을 깨닫게 하기 위함일 것입니다. 우리네 인생도 마찬가지입니다. 제 아무리 큰 권세와 영화를 누린다 해도 하나님 앞에선 한낱 장막에 지나지 않습니다. 제 아무리 빼어난 외모와 재능으로 인기를 누린다 해도 하나님 앞에선 일개 초막에 지나지 않는 것입니다. “만일 땅에 있는 우리의 장막 집이 무너지면...”(고후5:1)

 실제, 다윗의 왕국은 어찌 되었습니까? 스스로 분열된 채 각종 죄악들만 일삼다가 결국 주변 열국들에 의해 차례로 점령당하고 말았습니다. 폐허가 되고 만 것입니다.

 지금 우리는 어떻습니까? 혹 그들처럼 자신들의 나라가, 자신들의 인생이 한낱 초막에 지나지 않음을 깨닫지 못한 채 각종 세상 향락과 달콤함에 빠져 무너져 내리고 있지는 않습니까?

* 그러나 이제 다시 일으키고 친히 세우실 것입니다.

 “그 날에 내가 다윗의 무너진 장막을 일으키고 그것들의 틈을 막으며 그 허물어진 것을 일으켜서 옛적과 같이 세우고 그들이 에돔의 남은 자와 내 이름으로 일컫는 만국을 기업으로 얻게 하리라 이 일을 행하시는 여호와의 말씀이니라.”(암9:11,12)

 그러나 이제 하나님께서 스스로 분열되고 원수들에게 점령되어 폐허화 된 이 나라, 즉 다윗의 무너진 장막을 다시 일으켜 세우시겠다고 약속하십니다. 언제 말입니까? ‘그 날에’, 즉 ‘여호와의 날에’입니다. 어떻게 말입니까? 무너진 것을 일으키고, 벌어진 틈을 막으며, 허물어진 것을 다시 지어 일으킴으로써, 하나님의 이름으로 일컫는 모든 이방인들로 주를 찾게 하심으로써 말입니다. “이후에 내가 돌아와서 다윗의 무너진 장막을 다시 지으며 또 그 허물어진 것을 다시 지어 일으키리니 이는 그 남은 사람들과 내 이름으로 일컬음을 받는 모든 이방인들로 주를 찾게 하려 함이라 하셨으니 즉 예로부터 이것을 알게 하시는 주의 말씀이라 함과 같으니라.”(행15:16-18)

 다른 선지자들의 증언과 마찬가지로 말입니다. “이에 유다 자손과 이스라엘 자손이 함께 모여 한 우두머리를 세우고 그 땅에서부터 올라오리니 이스르엘의 날이 클 것임이로다.”(호1:11) /“그 땅 이스라엘 모든 산에서 그들이 한 나라를 이루어서 한 임금이 모두 다스리게 하리니 그들이 다시는 두 민족이 되지 아니하며 두 나라로 나누이지 아니할지라 그들이 그 우상들과 가증한 물건과 그 모든 죄악으로 더 이상 자신들을 더럽히지 아니하리라 ...내 종 다윗이 그들의 왕이 되리니 그들 모두에게 한 목자가 있을 것이라 그들이 내 규례를 준수하고 내 율례를 지켜 행하며 내가 내 종 야곱에게 준 땅 곧 그의 조상들의 거주하던 땅에 그들이 거주하되 그들과 그들의 자자손손이 영원히 거기에 거주할 것이요 내 종 다윗이 영원히 그들의 왕이 되리라.”(겔37:22~25)

 물론 여기서 ‘다윗의 장막’(또는 다윗의 왕국)이란 1차적으로 역사적 이스라엘의 회복을 의미하나, 궁극적으로 영적 이스라엘의 회복과 영원한 그리스도의 나라의 완성을 의미합니다. 그런데 이 그리스도의 나라는 오직 무엇을 통하여만 궁극적으로 성취될 수 있습니까?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입니다.

지금 우리는 어떻습니까? 다윗의 무너진 장막을 일으키실 분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 한 분뿐임을 믿고 있습니까? 우리의 무너지고 황폐케 된 심령 역시 오직 예수님 한 분만을 통해 회복되고 다시 소성하게 됨을 믿고 의지하고 있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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