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대교회의 출발을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오순절 날에 성령의 임재가 제자들에게 임합니다. 제자들은 곧장 성령의 주도적 이끄심 아래 난 곳 방언으로 말하기 시작합니다. 당연히 복음에 관한 말이었겠지요. 사람들은 화들짝 놀랍니다. 오순절을 맞아 예루살렘으로 모여온 순례자들이 대부분이었습니다. 숱한 지역에서 올라온 만큼 사용하는 언어들이 다양했습니다. 그런데 지금 그 숱한 언어들을 아우르는 방언의 향연이 펼쳐진 것입니다. 그저 놀랍기만 합니다. 그러나 여전히 빈정거리는 사람들은 있기 마련입니다. 심지어 그들의 영적 은혜를 폄하하는 발언을 늘어놓습니다. 새 술에 취했다고 그들의 영적 역사에 상처를 냈습니다. 비난하는 사람들은 도무지 다른 이의 인격은 고려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철저하게 제자들의 방언을 무시했습니다. 그 때에 베드로가 제자들을 대표하여 말합니다.
베드로의 지적은 두 가지였습니다. 첫째는 지금 시간이 도대체 몇 시인가 묻습니다. 이런 시간에 술 먹는 사람이 있냐고 되묻습니다. 그렇게 생각하고 판단하는 사람이 정신 나간 사람이 아니냐는 일침이지요. 둘째는 제자들의 방언은 성령의 이끄신 역사라는 증언입니다. 베드로는 그저 변명한 것이 아닙니다. 그저 강변한 것이 아닙니다. 성령을 통한 은혜의 역사가 가능하다는 것을 성경을 들어 입증합니다. 베드로가 인용한 말씀을 바로 이 말씀이었습니다.
“하나님이 말씀하시기를 말세에 내가 내 영을 모든 육체에 부어 주리니 너희의 자녀들은 예언할 것이요 너희의 젊은이들은 환상을 보고 너희의 늙은이들은 꿈을 꾸리라. 그 때에 내가 내 영을 내 남종과 여종들에게 부어 주리니 그들이 예언할 것이요 또 내가 위로 하늘에서는 기사를 아래로 땅에서는 징조를 베풀리니 곧 피와 불과 연기로다. 주의 크고 영화로운 날이 이르기 전에 해가 변하여 어두워지고 달이 변하여 피가 되리라.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받으리라 하였느니라.”(행 2:17-21)
베드로는 거침이 없었습니다. 그는 인용한 말씀을 들어 방언의 역사를 변호합니다. 그들의 입을 단번에 막아 버린 것입니다. 베드로는 구약의 말씀들을 줄줄이 인용하며 복음을 외칩니다. 베드로의 증거는 너무도 강력하여 항변할 근거가 도무지 없었습니다. 그들의 입을 틀어막은 것으로 끝나지 않았습니다. 그들의 잘못을 지적합니다. 또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주실 생명의 약속도 잊지 않습니다. 그 조건을 위해 회개할 것을 촉구합니다. 자그마치 삼천 명이나 되는 사람들이 세례를 받는 놀라운 역사의 반전이 이루어집니다.
베드로가 처음 인용한 예언의 말씀이 무엇입니까? 베드로가 말한 그대로 선지자 요엘의 예언이었습니다. 베드로는 요엘의 예언 줄거리를 정확하게 기억하고 있었습니다. 요엘의 예언은 이랬습니다.
“그 후에 내가 내 영을 만민에게 부어 주리니 너희 자녀들이 장래 일을 말할 것이며 너희 늙은이는 꿈을 꾸며 너희 젊은이는 이상을 볼 것이며 그 때에 내가 또 내 영을 남종과 여종에게 부어 줄 것이며 내가 이적을 하늘과 땅에 베풀리니 곧 피와 불과 연기 기둥이라. 여호와의 크고 두려운 날이 이르기 전에 해가 어두워지고 달이 핏빛 같이 변하려니와 누구든지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니 이는 나 여호와의 말대로 시온 산과 예루살렘에서 피할 자가 있을 것임이요 남은 자 중에 나 여호와의 부름을 받을 자가 있을 것임이니라.”(욜 2:28-32)
우리 기억 속에 요엘 선지자는 베드로의 오순절 설교에 오롯이 남아 있습니다. 베드로가 인용한 요엘의 예언 대목은 상당히 희망적입니다. 그래서 일까요? 베드로가 인용한 그 내용을 여과 없이 그대로 복음송의 가사로 택한 노래도 나왔습니다. 성경구절을 그대로 가사말로 사용하는 것은 상당히 위험한 일입니다. 솔직히 성경구절을 가사말로 사용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대부분은 가사비판을 피하기 위한 한 방편에 지나지 않습니다. 이 문제는 찬송가학의 과제이니 이 정도에서 끝내겠습니다. 자, 그렇다면 우리가 아는 요엘은 어디까지 입니까? 솔직히 베드로가 인용한 예언이 우리가 알고 있는 요엘의 전부가 아닙니까? 과연 선지자 요엘은 어떤 사람입니까? 그는 어떤 예언을 토해내며 그 시대의 불꽃으로 살았습니까?
선지자 요엘은 브두엘의 아들입니다.(욜 1:1) 그러나 솔직히 이 말은 그가 누구의 아들이란 것 말고는 없습니다. 그가 어느 시대의 사람인지 확인할 길이 없습니다. 그러다보니 요엘의 시대에 대한 학자들의 견해도 편차가 심합니다. 심지어는 포로기 시대로 보는 견해까지 나옵니다. 학자에 따라서 요엘은 최초의 문서선지자일 수 있습니다.(E. J. Young) 그런가하면 마지막 문서선지자일 수도 있습니다.(H. W. Wolff) 그러나 통설은 호세아나 아모스와 동 시대의 인물로 보는 입장입니다.
초기 선지자로 보는 입장은 이렇습니다. 요엘서의 편집 위치입니다. 소선지서 묶은 여러 이유 가운데 하나는 분명 시대적 배경입니다. 요엘서는 호세아서와 아모스서 사이에 위치합니다. 이는 그들과 동 시대의 인물임을 웅변합니다. 또한 언어와 문체, 그리고 초기 선지자들이 지닌 공통된 주제가 그렇습니다.
반면 말기 선지자일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습니다. 포로에 대한 언급은 놓칠 수 없는 것이지요.(욜 3:2) 또한 장로들과 제사장의 위치와 역할도 그렇습니다.(욜 1:2, 1:9, 13-14) 특히 “금식일”에 관한 예언은 대 속죄일보다는 애도일의 의미가 연상되기 때문입니다. 더구나 헬라인에 대한 언급은 포로기 이후 시대를 적극 옹호하게 합니다.(욜 3:6)
그래서 요엘서를 살필 때에는 하나의 전제가 필요합니다. 요엘의 시대 배경이지요. 이것은 요엘서와 다른 예언서와의 인용여부를 가늠하는 기준이 됩니다. 선지자 요엘은 문학적 재능이 풍부한 인물입니다. 그의 예언 문체가 이를 입증합니다. 요엘서의 문학적 장치로 흔히 거론되는 것을 보십시오. 풍유와 대구, 수사적 강조기법 등 풍부한 문학 장치를 활용하고 있습니다. 뿐만 아닙니다. 그의 예언서는 정확하게 두 단락으로 나뉩니다. 또한 그 예언 내용들이 상호 대구를 이루고 있습니다. 이를 통해 그의 예언 핵심이 무엇인지 가늠해 볼 수 있습니다. 반게메렌은 요엘서의 구조를 이렇게 분석합니다.
표제 1:1 A. 작황 실패에 대한 탄식, 1:2-20 B. 종말론적인 대 재해, 2:1-11 C. 회개 요청, 2:12-17 A'. 축복과 기쁨, 2:18-27 C' 성령의 권능 부여, 2:28-32 B'. 종말론적인 여호와의 날, 3:1-21 (VanGemeren, p.207)
A와 A', B와 B', C와 C'가 쌍을 이룹니다. 전형적인 교차대구법의 양식이지요. 요엘의 문학수준을 엿보게 하는 좋은 자료입니다. 둘째 단락의 B'와 C'가 뒤바뀌어 있기에 약간의 논란이 있습니다. 즉, 요엘서의 핵심이 어디에 있느냐 하는 것이지요. 베드로 사도의 요엘서 인용으로 우리는 희망적 메시지에 익숙합니다. 즉 회개 요청과 성령의 권능 부여가 핵심으로 쉽게 떠오릅니다. 그러나 반드시 그렇게만 볼 수는 없습니다. 오히려 종말론적인 대 재해와 쌍을 이루고 있는 종말론적인 여호와의 날이 결론일 가능성이 높습니다. 물론 어떤 관점을 갖고 있느냐에 따라 달라질 수는 있겠지요. 요엘서는 간결한 문체상의 특징을 보여줍니다. 그러나 쉽게 결론을 내릴 수 없는 심각한 두 주제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요엘서에는 놓칠 수 없는 또 다른 주제가 있습니다. 시온사상의 핵심인 시온에 대한 내용이지요. 시온과 예루살렘으로 대변되는 시온사상의 핵심이 무엇입니까? 남북으로 이스라엘이 분열되면서 쟁점으로 부각된 것이 성전의 자리입니다. 당연히 제사장과 선지자들을 통해 시온, 곧 예루살렘이 유일한 성전임을 강조합니다. 선지자적 감각을 지닌 시인들을 통해 시온신학은 노래로 승화됩니다. 선지자 요엘 역시 시온신학의 입장을 강력하게 옹호합니다.
“여호와께서 시온에서 부르짖고 예루살렘에서 목소리를 내시리니 하늘과 땅이 진동하리로다. 그러나 여호와께서 그의 백성의 피난처, 이스라엘 자손의 산성이 되시리로다. 그런즉 너희가 나는 내 성산 시온에 사는 너희 하나님 여호와인 줄 알 것이라. 예루살렘이 거룩하리니 다시는 이방 사람이 그 가운데로 통행하지 못하리로다.”(욜 3:16-17)
원문 히브리어 성경(MT)은 4장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 성경은 3장으로 재편집을 했습니다. 그 차이점보다 더 심각한 것은 사실 3:23절의 번역입니다. 일반적으로 “그가 너희를 위하여 비를 내리시되”로 번역이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히브리어 원문을 어떻게 읽느냐에 따라 달라질 수 있습니다. “그가 너희를 위하여 의의 교사를 주시되”로 번역이 가능합니다. 표준 새 번역 성경의 난하주와 NIV가 그 가능성을 열어 놓았습니다. 제 개인적 입장은 “의의 교사”로 번역하는 것을 지지합니다. (보다 더 진지한 연구를 원하시면 김희보, 『요엘서』 총신대학교 출판부, 참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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