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구약 성경강해***/- 역대상,하 강해

[스크랩] 야베스의 기도에 응답하신 하나님 (1) (대상 4:1-10)

에반젤(복음) 2019. 9. 17. 00:19



야베스의 기도에 응답하신 하나님 (1)

대상 4:1-10

2013. 1. 13.

 

어느 날 할아버지와 할머니가 길을 가고 있었습니다. 할머니가 다리가 아팠습니다. 그래서 ‘내가 다리가 아파요. 나 좀 업어주세요.’ 했습니다.

할아버지는 할머니를 업었습니다.

할머니가 고마워서 ‘고마워요. 내가 좀 무겁지요?’ 했더니, 할아버지‘당연하지. 얼굴은 철판이지, 머리는 돌이지, 간은 부었지.’ 말했습니다.

돌아오는 길에 할머니가 좀 괘씸하기는 했지만, 미안하기도 해서 할아버지를 업어주었습니다.

할아버지가 좀 미안해서 할머니께 말했습니다.

‘그래도 생각보다 가볍지?’

그랬더니 할머니가 이렇게 말했습니다.

‘당연하지. 골은 비었지, 허파에 바람 들어갔지, 양심은 없지.’ 하더랍니다.

할아버지와 할머니가 티격태격은 하시지만, 그래도 참 행복한 부부인 것 같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2013년도를  누구와 동행하느냐?’에 따라 내 삶이 달라집니다.

하나님과 동행 하는 여러분들 되시길 바랍니다.

성경을 읽어보신 분은 한번쯤은 경험합니다. 

교회에 처음 나오신 분이 성경을 읽어보려고 구약을 펴보니, 너무 어려웠습니다. 그래서 신약을 펼쳤습니다. 마 1장에는 예수님의 족보가 나오는데, ‘누가 누구를 낳고, 누가 누구를 낳고’ 그래서 ‘아, 성경은 산부인과 책이구나!’ 더 이상 읽지 못했답니다.  그런데 구약성경 역대 상을 읽어보면, 1장-9장까지 계속 이스라엘의 민족 족보가 나옵니다. 

500명이 넘는 생소한 인물들이 등장합니다. 

이런 성경 본문은 읽어도 별로 은혜를 받지 못합니다. 그래서 대부분은 지루해서 건너뜁니다. 그런데 오늘 말씀 대상 4:1-8에 보면, 유다지파의 6대손으로 46명의 이름만 연속하여 기록하다가, 9절에 느닷없이 야베스가 등장합니다.

나열식으로 이름을 죽 기록하여 오다가, 갑자기9절에서 “야베스는 그 형제보다 존귀한 자라. 그 어미가 이름 하여 야베스라 하였으니, 이는 내가 수고로이 낳았다 함이었더라.”고 야베스의 이름이 거론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10절에 가서는 “야베스가 이스라엘 하나님께 아뢰어 가로되, 원컨대 주께서 내게 복에 복을 더하사 나의 지경을 넓히시고, 주의 손으로 나를 도우사 나로 환란을 벗어나 근심이 없게 하옵소서 하였더니, 하나님이 그 구하는 것을 허락하셨더라.”고, 야베스가 하나님께 기도하고 응답받은 것까지 말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자세히 살펴보면, 다른 사람들에 대해서는 그 이름들에 대해서 아무 설명도 없을 뿐만 아니라, 그 사람이 한 말이나 그 사람의 행적에 대해 전혀 기록하지 않고 있습니다.

그런데 야베스에 대해서는 ‘그가 형제보다 존귀한 자라’고 야베스의 사람됨을 평가하고, ‘그의 이름을 야베스라고 짓게 된 이유와 그 뜻을 설명하였을 뿐만 아니라, 야베스가 하나님께 기도를 드렸더니 하나님께서 그의 기도에 대해 응답하여 주셨더라.’고 아주 상세하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한 마디로 ‘야베스는 아주 특별한 사람이야’라고 야베스에 대해 설명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야베스는 별로 주목 받지 못했습니다. 

저도 목사가 되기 전까지는 야베스를 잘 알지 못했습니다.

야베스가 본격적으로 주목을 받은 것은 부르스 윌킨스목사님이 지은 『야베스의 기도』라는 책이 소개되면서 부터입니다. 

이 책은 미국에서 발행되자마자 500만부 이상 팔렸습니다. 기독교 서적이 일반서적을 제치고, 판매부수 1위를 기록한 놀라운 책입니다. 

이 책을 읽고, 수많은 사람들이 야베스가 한 기도를 드리게 되었고, 그 결과 상상할 수 없는 놀라운 일들이 벌어졌습니다. 저자인 윌킨스 목사님은 30년이 넘도록 야베스의 기도로 기도하고 있다고 합니다. 그 결과 하나님의 놀라운 축복이 임했음을 간증하고 있습니다. 개인과 가정이 매일 하나님의 말씀 안에서 성장하는 것을 돕기 위해 목사님이 발행하는 열 가지 잡지가 1억 부의 출판부수를 돌파했답니다. 

평범한 한권의 책이 이렇게 많은 사람의 관심의 대상이 된 이유는 무엇일까요? 

그 책에는 이런 부제가 달려 있습니다.  <내 삶을 기적으로 채우는 기도의 원리>입니다. 

오늘 야베스가 드린 기도는 우리 인생을 기적으로 채우는 기도의 능력이 있습니다. 

2013년 새해에는 이 야베스의 기도를 통하여 모든 늘푸른교회 성도들의 삶이 하나님의 기적으로 채워지는 역사가 있기를 축원합니다. ‘야베스’는 사람 이름입니다.

그의 이름은 성경에 딱 한번 등장합니다. 

바로 오늘의 본문입니다. (대상 2:25 지명)

그런데 왜 성경에 한 번밖에 등장하지 않는 ‘야베스’라는 낯선 이름이 이토록 세계의 주목을 받고 있을까요?  

본문 9절을 보면, 야베스는 태어날 때 상당한 진통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야베스의 어머니“내가 수고로이 낳았다”고 표현했습니다.

그래서 아들의 이름을 야베스라 지었습니다.

“야베스”의 뜻은 ‘고통, 수고’입니다. 

이름치고는 별로 좋지 않은 뜻입니다. 

사람들은 그를 ‘Mr. Pain’이라 불렀습니다. 

아마 오늘날 같으면 학교에서 왕따를 당했을 것입니다. ‘야, 고통아’, ‘야, 수고야’ 얼마나 견디기 힘든 이름입니까? 

그런데 야베스는 현실의 고통에 절망하지 않았습니다. 는 어려운 환경을 극복했습니다. 사막 같은 황량한 인생을 에덴 동산으로 바꿨습니다.  그 비결이 무엇일까요? 

바로 야베스는 기도하는 사람이었습니다. 

비록 는 짧은 한 문장의 기도를 드렸지만, 하나님 보좌를 움직인 능력의 기도를 드렸습니다.  그래서 야베스는 자기가 드린 기도에 대해 하나님께 응답을 받고, 축복의 사람이 되었습니다.   ‘수많은 사람들보다 존귀한 자’가 됩니다.  야베스는 기도함으로 자신의 운명을 바꾼 자가 된 것입니다.  

야베스가 기도함으로 그의 운명이 바뀌었다’면, 오늘 우리도 야베스처럼 기도 드릴 때, 하나님께서 응답하심으로 우리의 운명이 축복으로 바뀌는 역사가 임할 줄로 믿습니다. 

2013년 새해에 우리 모두 야베스처럼 하나님께 기도 드림으로 하나님의 응답을 받아, 하나님이 우리에게 베푸신 기적들을 간증하는 역사가임하기를 원합니다. 

야베스가 하나님께 드린 기도는 4가지입니다.첫째로, “하나님! 내게 복에 복을 더하여 주옵소서.”입니다.

우리말에는 '좋다, 더 좋다,  아주 좋다'로 표현하고, 영어로는 'Good-Better-Best' 이런 식으로 비교급과 최상급이 있습니다. 

그러나 히브리어에는 이런 최상급이 없습니다. 

 

히브리어는 그런 표현이 없기  때문에, 단어를 반복 사용해서 최상급의 의미를 나타냅니다.

그래서 야베스는 하나님께 “내게 복에 복을 더하사”(10절) 라고 기도했습니다.

야베스는 하나님께 ‘하나님 나에게 최상의 복을 주십시오.’라고 기도한 것입니다. 

야베스는 하나님께 ‘하늘의 보고를 여시고, 최고의 복을 나에게 충만, 충만하게 채워주십시오’라고 간구한 것입니다. 

야베스는 그의 평생에 걸쳐 이 기도를 드렸고, 하나님은 마침내 야베스에게 ‘복에 복을 더하여’ 내려 주셨던 것입니다.  여기서 한 가지 생각할 것이 있습니다. 

야베스가 구하는 복이 정말 올바른 기도냐?’라는 것입니다. 

‘오늘 날 한국교회 안에 기복주의 신앙이 팽배해 있다.’는 지적을 심각하게 받고 있습니다.

‘번영의 신학과 성공의 신학에 익숙한 한국교회에 야베스의 기도가 오히려 기복주의적인 면을 강화하지 않느냐?’는 우려도 있습니다. 

그동안 한국교회 내에 복에 대한 오해가 있었던 것은 사실입니다.

‘복’이라는 개념은 우리나라에 기독교가 들어오기 전부터 이미 샤머니즘으로 깊숙이 존재해 있었습니다. 굿하고 점치고 푸닥거리 등이었습니다.

그래서 어머니들이 정화수를 떠놓고 복 받기 위해 지성을 드렸습니다. 집을 짓거나 사업을 시작할 때 돼지머리를 놓고 복을 빌었습니다.

그러나 샤머니즘에서 비는 복과 성경이 말하는 복은 근본이 다릅니다. 

샤머니즘적 복의 핵심은 자기소원 성취입니다.  샤머니즘적 복은 인위적이요, 물질적이요, 이기적인 복입니다. 소유가 바로 복입니다.

복의 주체가 '나'입니다. 그래서 ‘내가 지극정성을 드려서 신을 감동시키면 그 신이 복을 준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성경이 말하는 복은 ‘하나님으로 만족한 상태’입니다. 성경적인 복은 하나님이 베풀어 주신 은총에 대해 감사하며, 기쁨과 즐거움을 충만히 누리는 상태입니다. 존재자체가 복입니다.

그러므로 성경적인 복은 내가 스스로 얻어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주시는 겁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들에게 베풀어주신 가장 본질적인 복이면서 동시에 우리가 반드시 받아 누려야 할 성경적인 복은 우리가 구원 받아 천국에 가서 영원히 하나님과 함께 사는 것입니다.

구원의 복에 대해 성경은 뭣이라고 합니까?

사도 바울엡 2:8-9에서 이렇게 증언합니다.

너희가 그 은혜로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치 못하게 함이니라.”

구원의 복은 하나님이 은혜로 주신 선물입니다.

구원의 복은 나의 행위와 상관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구원 받은 것에 대해 우리의 행위를 가지고 자랑할 것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우리는 우리를 구원하여 하나님의 자녀 삼아주신 하나님의 은혜에 대해 오직 감사할 뿐입니다.

 

선물은 내가 원하는 때에 받는 것이 아닙니다.

선물은 주시는 분의 마음에 달려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을 가장 잘 아시기에 최선의 것을 선물로 주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이 은혜로 주시는 선물에 대해 오직 기도할 뿐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복을 구한다.’는 것은 내 뜻이 아닌, 하나님의 소원을 구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도‘하나님이 가장 기뻐하시는 복을 내 원대로가 아니라 하나님의 뜻대로, 내가 원하는 때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때에 베풀어 주십시오.’라고 간구해야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겟세마네기도) 하나님은 우리에게 복주시기를 기뻐하시는 분입니다. 

하나님은 하늘의 보고를 여시고 항상 주의 자녀들에게 복주시기를 기뻐하십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부족하고 연약하지만, 풍성한 은혜로 채우시기를 원하고 계십니다. 

여러분의 자녀들을 생각해 보십시오. 

부모는 자녀들에게 항상 무언가를 주기를 원합니다. 주고 또 주어도 더 주고 싶어 안달하는 것이 부모의 마음입니다. 자식이 부족할수록 더 주고 싶은 것이 부모의 심정입니다. 예를 들면, 자녀교육을 위해서 부모는 여러 가지 준비를 합니다. 적금을 들어놓고, 자녀가 대학에 들어가기를 간절히 기도하고 있었습니다. 

자녀가 원하는 좋은 대학에 합격을 했습니다.  그런데 자녀가  ‘대학을 안 가겠다.’고 합니다. 

부모가 놀라서 ‘왜 안 가느냐?’라고 했더니, 자녀는 심각하게 ‘등록금이 없어서요.’ 대답합니다. 

부모는 기쁜 마음으로 ‘등록금은 내가 이미 마련해 놓았다.’ 그러자 자식이 ‘아버지, 저도 염치가 있지, 어떻게 매일 달라고만 하겠습니까? 저 대학에 안 가고, 내가 돈 벌어서 알아서 하겠습니다.’ 고집을 부립니다.

이게 올바른 태도입니까? 만약 자녀가 필요한 것이 있는데도 구하지 않고 혼자 끙끙거린다면, 부모의 마음이 어떨까요?  자녀가 자기의 힘으로는 할 수 없지만, 부모의 입장에서는 간단히 해결할 수 있는 문제일 경우에는 더욱 안타깝습니다.

 

성도인 우리들이 하나님 앞에서 이런 태도를 가질 때가 있습니다. 하나님은 이미 우리의 모든 필요를 아시고, 준비하고 계신데, 우리가  ‘내가 해보겠다.’고 하면서 하나님께 구하지 않으면, 하나님이 얼마나 안타까워하시겠습니까? 

하나님은 내가 연약할수록 더욱 귀히 여기시고, 더 선한 것으로 복주시기를 기뻐하십니다. 

그렇다면 우리들이 하나님의 자녀로서 하나님께 복을 구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할 것입니다. 

 

한 사람이 천국에 갔습니다. 

베드로 사도가 나와서 친히 천국을 다 안내해 줍니다. 이 방 저 방 열어 보이는데, 어떤 한 창고에 이르렀더니, 갑자기 베드로 사도가 깜짝 놀라면서 문을 닫고 안 보여주는 겁니다. 

그 사람이 너무나 궁금해서 ‘베드로 사도님, 그 안에 뭐가 들었습니까?’ 물었더니, 베드로 사도가 정색을 하며, ‘거기에는 들어가 볼 필요가 없습니다.’라고 대답하는 것이었습니다.

그 사람은 마음이 확 상해서  ‘천국까지 와서 이렇게 감추기냐?’고 하면서, ‘더 보여 달라’고 졸랐습니다. 

이에 베드로 사도가 아주 곤란한 듯이 ‘이곳은 당신이 안 보는 것이 좋겠어요.’ 말했습니다. 

그러니 그 사람은 정말로 더 보고 싶어졌습니다. 그래서 문을 확 열고 보니, 그 방 안에는 별의별 포장지로 싸여진 선물이 가득한 겁니다. 

더 놀라운 것은, 그 선물에 전부 자기 이름이 쓰여있는 겁니다. 너무 섭섭한 생각이 들었어요.  그래서 아주 섭섭한 마음으로 ‘베드로 사도도 다 나에게 온 선물인데, 안 보여주고.’ 하면서  선물들을 하나하나 다 뜯어보았습니다. 그 속에는 그 사람이 이 땅에 있을 때 그렇게 원하고 소원했던 모든 것들이 가득 차 있는 것이었습니다.   그 사람은 너무 마음이 상했습니다. 

‘왜 내가 이걸 못 받았지? 여기에 내 이름을 분명히 다 써놓았는데, 왜 나에게 도달하지 않았지? 왜 하나님께서 이 선물들을 내게 보내시지 않으셨을까?’ 생각하고, 그 사람은 베드로 사도에게 따졌습니다. ‘베드로 사도님, 왜 이것이 배달사고가 났습니까?’ 이에 베드로 사도는 아주 조용히 대답했습니다. ‘그 이유는 자네가 달라고 요청을 안 해서 그래. 하나님이 자네에게 줄려고 다 싸놓았는데, 자네가 달라고 요청을 해야 주지’

우리 가운데 천국에 가서 이런 일이 재현될 지도 모릅니다.  야베스는 적어도 그런 어리석음을 범치 않았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건강이 필요한 분은 건강의 복을 구하십시오. 

재물이 부족하신 분은 재물 복을 구하십시오.  직장을 구하는 분은 좋은 직장을 구하십시오.  사업이 힘드신 분은 사업 형통을 구하십시오.  내 삶에 있는 모든 고통과 수고의 짐을 져주시는 하나님께 맡기고, ‘하나님, 저에게 복에 복을 주십시오. 갑절의 복을 주십시오.’ 기도하십시오. 

그리고 이렇게 기도하십시오.

‘하나님, 나로 하여금 복주셨을 때 교만하지 않게 하시고, 주님의 영광을 위해서 살게 해주십시오. 설령 내가 원하는 대로 이루어지 않는다 할지라도 인내하게 하시고, 더 선한 하나님의 뜻을 구하게 해주십시오.’

이것이 야베스의 기도를 드리는, 우리의 기도의 자세인 줄로 믿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