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구약 성경강해***/- 역대상,하 강해

[스크랩][참 고] 유다 왕국의 종말(대하 36:2-20)

에반젤(복음) 2019. 9. 16. 23:14



유다 왕국의 종말(대하 36:2-20)

 

 1-1. 포로로 잡혀간 세 왕(36:2-10)

  불행하게도 요시야의 개혁은 지속적인 효과를 거두지 못했다. 요시야의 개혁은 심지어 자기 가족 안에서도 영향을 미치지 못했다. 이어지는 두 왕은 모두 요시야의 아들이었지만 그들은 모두 여호와 보시기에 악을 행하였다. 이제 내리막 길로 치닫는 유다의 몰락을 막을 제동 장치는 남아 있지 않았다. 그리고 이로 인해 유다 왕국의 몰락은 신속하게 전개되고 있었다. 역대기는 유다의 마지막 네 왕에 대한 기사(36:2-10)를 불과 9절로 간단히 처리하고 있다. 역대기 기사의 자료는 열왕기하의 동일 사건들과 유사하면서도, 그 서술 방식에서는 역대기 안에서 그 유례를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독특하다.

  첫째, 여호아하스, 여호야김, 그리고 여호야긴의 세 왕은 그 자체로서 다루어지지 않고 있다. 그들은 "포로로 잡혀간 왕"이라는 공통점에 의해 한꺼번에 묶여서 다루어지고 있다. 여호아하스는 바로 느고에 의해 애굽으로 잡혀갔으며(36:4), 여호야김은 느부갓네살에 의해 바벨론으로 끌려갔고(36:6), 여호야김 역시 느부갓네살에 의해 포로가 되어 바벨론에 유배되었다(36:10). 결국 이 세 왕의 포로됨은 이미 오래 전에 여호아하스로부터 시작된 왕의 포로됨의 결론이 된 셈이다. 물론 이 포로됨의 운동은 일찍이 아하스 왕(대하 28:5,8,11,13), 히스기야 왕(대하 29:9, 30:9), 므낫세 왕(대하 33:11)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그러나 포로됨의 운동은 역대하 36장에 이르면 엄청난 가속도가 붙어서 급격한 내리막 길을 내리 달리는 모습을 보이게 된다. 왕들의 포로됨은 국가의 운명이 어떻게 될 것인지를 알리는 전조인 셈이다.

  둘째, 열왕기의 병행 본문(왕하 23:31-25:30)과 비교해 보면 역대기 본문은 여호아하스 기사가 40%, 여호야김 기사가 55%, 그리고 여호야김 기사는 80% 줄었다. 그리고 시드기야의 통치 기사는 세 단락의 열왕기 기사를 한 절씩으로 요약해서 무려 92%나 줄어들었다. 역대하 10-36장에서 열왕기보다 간력하게 다룬 왕의 기사는 이 곳뿐이다. 우리는 이러한 특징을 통해서 역대기 기자가 포로된 세 왕의 기사를 의도적으로 줄였다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 여호아하스(36:2-4), 여호야김(36:5-8), 여호야긴(36:9-10)의 스토리는 일련의 공식적인 틀에 의해 고정된 패턴으로 처리되고 있다. 여러 상세한 내용들을 생략한 채 네 가지 사항만 고정적으로 반복하고 있다.

 

여호아하스

여호야김

여호야긴

왕이 된 나이

23세

25세

8세

악행

여호와 앞에 악행

여호와 앞에 악행

여호와 앞에 악행

포로

애굽으로

바벨론으로

바벨론으로

약탈 당함

벌금물어냄

성전 기구 약탈

성전 기구 약탈

  결국 세 왕의 기사는 등극에서, 여호와 앞에 악을 행하다가, 애굽이나 바벨론으로 포로로 잡혀가고, 그 때에 벌금이나 성전 기구가 약탈되었다는 것이 전부이다. 역대기 기자는 이 왕들에 대해서 할 수 있는 이야기는 이것이 전부인 양 도식적으로 다루고 있다. 역대기 기자는 열왕기 본문과 비교할 때에과감히 상세한 내용을 생략하고 이러한 도식으로 세 왕에 대한 기사를 처리하고 있다. 이는 역대기 기자가 "집단적 해석"(a corporate interpretation)을 시도하고 있다는 증거라고 할 수 있다. 역대기 기자는 왕이 포로가 된 사건은 개별적이고 독립적인 사건이 아니라, 동일한 문제의 다양한 현상에 지나지 않는다는 점을 지적하고 있는 것이다. 역대기 기자는 각 왕들이 구체적으로 어떤 행동을 하고 어떻게 죽었는지와는 관계 없이, 그들이 "여호와 앞에 악을 행함으로", 모두 포로가 되어 잡혀갔다는 점만을 강조하고 있다. 느부갓네살이 성전 기명을 약탈해다가 바벨론 신당에 가져다 두었다는 기록은 매우 상징적인 것이라고 할 수 있다.


 
1-2. 시드기야와 포로됨의 이유, 유다의 멸망(36:11-21)

  시드기야의 기사는 앞의 세 왕의 패턴과 마찬가지의 패턴에 의해 묘사되고 있다. 그러나 시드기야의 묘사에는 한 가지 요소, 즉 그가 포로된 이유가 첨가되었고, 이것이 크게 확장되어 기록되어 있다. 따라서 역대기의 시드기야 스토리는 (왕하 25장)의 병행본문의 사실적 기사와는 많이 다르다. 그 이유는 역대기의 스토리는 포로가 된 신학적 이유를 설명하는 데 주안점이 주어져 있기 때문이다. 역대기에는 시드기야와 백성들이 모두 포로됨의 책임이 있는 것으로 묘사되고 있다. 우선 시드기야의 잘못은 "여호와 앞에서 겸비치 아니하였으며", "여호와께로 돌아오지도 아니한"데 있었다(36:12-13). 이것은 여호와께서 죄를 사하시고 땅을 고치시는 두 가지 조건을 축족시키지 못햇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역대기의 핵심 메시지인 (대하 7:14)은 이스라엘을 고치시는 두 가지 조건을 "그 악한 길에서 떠나 돌아오고", "스스로 겸비하는"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시드기야

왕이 된 나이

21살

악행

여호와 앞에 악행

포로된 이유

겸비치 아니하고, 목을 곧게 하고, 여호와께 돌아오지 않음

포로

백성들이 바벨론으로 잡혀감(시드기야 개인의운명은 언급이 없음)

약탈 당함

성전 기구 약탈

  백성들의 잘못도 왕의 잘못 이상이었다. 백성들은 크게 범죄하였으며, 성전을 더럽게 하였고, 선지자들을 비웃고 조롱하였다(14-16). 이러한 태도는 시드기야 시대의 유다 백성들만의 태도가 아니라, 유다 왕국 전체의 역사를 통해서 나타난 태도의 축소판이었다. 따라서 그들은 더 이상여호와의 진노를 피할 길이 없었으며, 결국 갈대아 군대의 손에 유다 왕국은 멸망되고 말았다. 역대기 기자가 유다 멸망의 모습을 그린 단락을 보면 아래의 몇 가지 요소가 강조되어 있음을 발견할 수 있다. 1) 포로됨의 책임은 한 개인이나 한 세대가 져야 하는 것이 아니며, 유다 백성 전체가 져야 한다. 2) 포로됨은 포괄적이다. 즉 땅도 왕정도 성전도 모두 포로가 되었으며, 오직 남은 자만 남게 되었다. 3) 이제 남은 희망은 오직 여호와 한 분 뿐이다.

  이러한 메시지를 기저에 깔고 있는 역대기의 결말은 겉으로는 낙막으로 보이지만, 실제로는 희망의 어조를 담고 있다. 이는 종말로 보이는 것이 더 이상 종말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이에 대해서 역대기 기자는 놀라운 솜씨로 회복의 가능성을 열어 두면서 이 단락을 마무리하고 있다. "이에 토지가 황무하여 안식년을 누림 같이 안식하여 칠십년을 지내었으니 여호와께서 예레미야의 입으로 하신 말씀이 응하였더라(대하 36:21)."


 1-3. 본토 귀환을 허락하는 고레스의 칙령(36:22-23)

  이제 70년이 지났다. 이 70년은 징계의 성격도 있지만(렘 25:11-14), 회복의 성격도 지니고 있다(렘 29:10). 그렇다면 어떻게 이 회복이 일어날 것인가? 여호와께서 예레미야를 통해서 하신 회복의 말씀은 성취되길 기다리고 있다. 그런데 놀랍게도 이번에는 이방 황제의 칙령을 통해서 하나님의 말씀이 성취되었다.

  "바사 왕 고레스 원년에 여호와께서 예레미야의 입으로 하신 말씀을 응하게 하시려고 바사 왕 고레스의 마음을 감동시키시매 저가 온 나라에 공포도 하고 조서도 내려 가로되(22), 바사 왕 고레스는 말하노니 하늘의 신 여호와께서 세상 만국으로 내게 주셨고 나를 명하여 유다 예루살렘에 전을 건축하라 하셨나니 너희 중에 무릇 그 백성 된 자는 다 올라갈찌어다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서 함께하시기를 원하노라 하였더라(대하 36:22-23)."

  이제 포로기를 통해 정화된 하나님의 백성들이 예루살렘으로 올라와서 하나님의 집을 짓게 될 것이다. 여호와의 집을 건설하라는 고레스의 명령은 다윗의 언약의 두 집, 다윗 왕조와 성전을 모두 생각나게 한다. 결국 하나님의 다윗에게 주신 약속은 포로기 안에서도 유효하였으며, 포로 후기 공동체는 물론, 미래에까지 유효한 것이었다. 이에 역대기 공동체는 여호와의 언약을 믿고 여호와께 충성을 보이면서 회복을 기다려며 살아야 했다.


2. 결론: 역대기 신학

 2-1 예배하는 공동체의 중요성

  포로 후 공동체는 독립 국가를 형성하지 못한 채, 아직도 페르시아 황제의 종노릇을 하는 소규모의 속주에 불과했다. 따라서 "과연 이스라엘이 아직도 여호와의 성택된 백성인가?" "여호와께서 포로 전 이스라엘 백성에게 관심을 가진 것처럼 지금도 그들에게 관심을 갖고 계신가?"라는 의문이 제기되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역대기 기자는 하나님 나라가 예루살렘 성전을 중심으로 하는 "예배 공동체"를 통해서 지속되고 있음을 설득력 있게 설명하고 있다. 역대기 기자는 여호와의 성전이 단순히 포로 후 공동체의 국지적인 종교 중심지가 아님을 분명히 밝히고 있다.  

 (1) 성전: 창조 이후 하나님의 사역의 중심
  앞에서 살핀대로 역대기 기자는 아담의 창조부터 시작해서 성전 재건으로 끝이 나는 큰 틀을 통해서 "재건된 성전"이 창조 이후 지속된 하나님의 중요한 관심사임을 드러내고 있다. 재건된 성전은 하나님께서 아담을 창조하면서 시작한 하나님의 구속 사역의 "지속", 혹은 "회복"을 가리키고 있다. 따라서 성전은 선택 사항이 아니라 창조 이래로 이스라엘과 전 인류를 향한 하나님의 계획에서 중심적인 역할을 감당하고 있는 것이다. 역대기 기자가 "이스라엘이 교회, 곧 예배 공동체로 부르심을 받았다는 확신"을 강력히 피력한 것은 바로 이러한 이유 때문이었다. "이스라엘은 넓은 의미에서 제사장 나라이며 거룩한 민족이기 때문에, 자신들의 삶 전체가 하나의 전례, 또는 하나님에 대한 예배가 되어야 했다. 그러나 특수한 의미에서 이 공동체는 제사장들과 레위인들이 예배 집행에 필수 요소인한 성전을 중심으로 할 것이다."

 (2) 다윗 왕국의 최대 유산
  또한 역대기 기자는 성전이 여호와께서 다윗 왕조를 통해서 이스라엘을 위해 행하신 최대의 행위라는 것을 강조하고 있다. 역대기 기자는 성전과 예배의 유산이 얼마나 귀중한 것인지에 대해서 일련의 하나님의 선택 행위를 통해서 확실하게 강조하고 있다. 역대기 기자는 예루살렘에 재건된 성전과 그 안에서 드려지는 예배가, 포로후 공동체가 하나님의 선택을 받은 백성임을 증거해주는 명백한 증거임을 분명히 말해주고 있다.

  구약에서 이렇게 사람이나 지명을 선택한 것을 강조하는 것은 신명기를 제외하고는 역대기가 가장 두드러진다. 위의 도표에서 볼 수 있듯이 역대기가 아홉 군데에서 선택을 강조한 반면에, 이전 성경에서는 세 군데에서만 선택을 언급하고 있다. 이는 역대기 기자가 선택 사상을 얼마나 크게 강조하고 있는지를 보여주고 있다. 그러나 역대기의 선택은 모세 언약보다는 다윗 언약과 깊은 관계가 있다. 모세 언약은 이스라엘의 선택, 여호와께서 택하신 장소의 선택을 강조하는 데 반해, 역대기는 다윗 가족, 특히 다윗과 솔로몬의 선택, 예루살렘과 성전의 선택, 제사장과 레위인의 선택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기 때문이다. 역대기 기자는 성전이 여호와께서 다윗 왕국을 통해 이스라엘에게 베푸신 최대의 은혜라는 것을 이런 방식으로 말하고 있다. 다윗 이야기와 솔로몬 이야기가 주로 성전 건축 준비와 성전 건축에 할애되어 있는 것은 이러한 이유 때문이다. 역대기는 다윗을 시편을 작사하고, 성전 봉사를 위해 레위인들을 조직한 인물로 소개하고 있다. 역대기에서는 다윗이 성전 건축을 위해 모든 것을 준비한 사람으로 묘사되고 있고, 솔로몬은 그 일을 실행한 인물로 묘사하고 있다. 다윗은 모세와 맞먹는 두 번째 율법 수여자, 즉 성전을 중심으로 하는 공동체의 창지사로 제시된다. 역대기 기자는 한 걸음 더 나아가 이스라엘의 역사를 "성전 중심 공동체"라는 관점에서 서술하고 있다. 후대의 왕들도 성전과 그 안에서의 예배를 어떻게 대했느냐에 따라 평가가 달라진다. 이런 관점은 아비야왕이 그 대적인 여로보암 1세에게 한 말에서 분명하게 볼 수 있다.

  "우리에게는 여호와께서 우리 하나님이 되시니 그를 우리가 배반치 아니하였고 여호와를 섬기는 제사장들이 있으니, 아론의 자손이요 또 레위 사람이 수종을 들어(10), 조석으로 여호와 앞에 번제를 드리며 분향하며, 또 깨끗한 상에 진설병을 놓고 또 금 등대가 있어 그 등에 저녁마다 불을 켜나니, 우리는 우리 하나님 여호와의 계명을 지키나 너희는 그를 배반하였느니라(11).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사 우리의 머리가 되시고, 그 제사장들도 우리와 함께하여 경고의 나팔을 불어 너희를 공격하느니라. 이스라엘 자손들아 너희 열조의 하나님 여호와와 싸우지 말라. 너희가 형통치 못하리라(대하 13:10-12)."

 

선택대상

역대기 본문

이전 본문

1

언약궤 앞에서 섬기는 레위 지파를 선택

대상 15:2

 

2

다윗과 솔로몬을 왕으로 선택

대상28:4-10

 

3

솔로몬을 성전 건축자로 선택

대상29:1

 

4

예루살렘과 다윗을 선택

대하6:5-6

왕상8:16

5

예루살렘 성을 선택

대하6:34,38

왕상 8:44,48

6

예루살렘 성전과 터를 선택

대하7:12,16

 

7

예루살렘을 선택

대하12:13

 

8

레위 사람을 선택

대하29:11

 

9

성전과 예루살렘을 선택

대하33:7

왕하 21:7

  북왕국은 여로보암 1세의 죄로 인해 참된 예배 공동체로부터 떨어져 나갔기 때문에 멸망하고 말았다. 그러므로 역대기 기자는 바벨론에 있던 유다 포로들이 하나의 국가가 아닌 성전 중심의 종교적 공동체로 다시 돌아와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     

 (3) 회개와 용서가 일어나는 성전
  그렇다면 도대체 성전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기에 성전을 중심으로 하는 예배 공동체가 이토록 중요한 것인가? 여호와의 전은 여호와께서 다윗에게 영원한 왕조를 하사하신후에 그의 후손을 통해 여호와의 전을 짓게 하겠다고 약속하셨다. 성전은 이 언약의 성취로서 솔로몬이 지은 것이었다. 솔로몬은 성전을 지은 후에 이 전에서 죄를 회개하면 죄를 용사하고 그 땅을 고쳐 달라고 기도했으며, 하나님은 그 기도를 허락해 주셨다. 이러한 저에서 성전은 기도와 속죄의 장소였다. 실제로 유다 왕국의 역사를 보면 범죄한 왕들과 백성들이 성전에 나아와 겸비하고 기도하며 회개할 때, 죄를 사하시고 땅을 고치신 일이 여러 번 반복되어 기술되고 있다. 비록 세스바살이나 스룹바벨 같은 다윗 계열의 후손이 왕위에 오르지 못하고, 왕정이 사라지고 다시 돌아오지 않는다고 해도, 하나님께서 다윗 왕과 맺은 언약은 지켜질 것이다. 성전을 주시고 그 안에 거하시며, 백성들이 겸비할 때에 죄를 용서하시고 땅을 고치겠다고 안 약속은 영원히 지켜질 것이다. 포로 후기 공동체의 희망은 다윗 왕정보다는 다윗 언약과 성전에 놓여있다. 이 성전에서 여호와께 예배를 드리고 기도를 하는 한 유다 공동체는 미래에 희망을 가질 수 있는 것이다.

  역대기 기자가 성전의 직원들 가운데서 제사장보다 레위인들을 강조하고 있는 것도 성전에서 예배를 드리는 일의 중요성을 강조려는 데 그목적이 있었다. 열왕기에서는 이러한 일을 여러 번 반복해서 요약해주고 있다(대상 23:27-32, 대하 8:13, 13:11, 31:3). 이러한 예배 형태에 레위인들이 기여한 사실은 매우 중요하다(대상 9:28-32, 23:28-32, 대하 8:14, 13:10). 다윗이 레위인들을 세 구룹으로 나눈 것이 여러 번 언급되어 있는데(대상 6:31-48, 15:16-22, 25:1-31, 대하 8:14, 29:25-30). 이들의 기능은 백성들을 찬양으로 인도하는 데에 있었다(대상 6:31-32, 15:16, 16:4-6,37-42 등). 레위인들의 임무는 백성들로 하여금 스스로 경배자가 되게 하고, 그들을 통해서 그들을 위해 하나님께서 무엇을 하실 수 있는지 깨닫게 하는데 있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러한 레위인들의 격려로 성전에서 하나님께 신령과 진리의 예배를 드릴 수 있었다.

  이러한 역대기의 강조점은 이스라엘 매 세대마다 성전이 얼머나 중요한 지를 잘 보여주고 있다. 이들의 예배에 대한 태도는 하나님에 대한 헌신의 바로미터이며, 하나님이 이들을 새롭게 복주는 통로이기도 하다(대하 7:10, 31:21, 참조-24:16). 역대기 기자는 성전 예배야말로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이스라엘 정체성 의식을 회복하는 가장 분명한 희망이라고 보았다. 히스기야와 요시야가 지킨 유월절 예배에서 이러한 사실이 잘 드러나고 있다(대하 30:1-13, 35:17-18). 성전은 이방인까지 포함한 예배하는 무리들이 모인 공동체로서, 이스라엘이 정체성을 잘 드러내주고 있다(대상 13:13-14, 대하 6:32-33). 결국 포로 후기 공동체가 "예배하는 공동체"로서의 모습을 보인 것은 독립 국가를 형성하지 못한 정치적인 상황으로 인해 일어난 어쩔 수 없는 선택이 아니었다. 이것은 오히려 하나님의 인간 창조의 중심 계획이며, 다윗으로부터 전해 내려온 유대교희 헌장으로 되돌라간 것이었다. 따라서 바벨론 포로와 페르시아의 종노릇이라는 황폐함에도 불구하고, 하나님 나라와 언약에 충실하신 하나님의 신실성은 변함이 없는 것이다.
 

 2-2 여호와를 신뢰함의 중요성

  포로 후 유다 공동체는 성전 외에 언약의 삶의 핵심 요소인 율법과 선지자들을 소유하고 있었다. 다윗 왕의 후손이나 성전도 그 자체로서 이스라엘의 안전과 축복을 보장하는 것은 아니었다. 이 모든 것은 이스라엘과 왕이 율법에 순종하느냐의 여부에 달려 있었다(대상 28:7, 대하 6:16, 7:17, 12:1, 38:8). 역대기 기자가 다윗 계열의 충성스런 왕들에게 가장 큰 관심을 가진 것은 율법에 대한 그들의 충성 여부였다. 다음 구절을 참고해보면 이를 쉽게 확인할 수 있다. 1) 다윗-대상 6:49, 15:13,15, 16:40, 22:12-13, 29:19. 2) 아사-대하 14:4, 15:12-14, 3) 여호사밧-대하 17:3-9, 19:8-10, 4) 요아스-대하 24:6,9, 5) 히스기야-대하 29;10,31, 30:15-16, 31:3,4,21, 6) 요시야-대하 34:19-21,29-33, 35:6,12,26 등.

  또한 역대기 기자는 유다 왕의 역사를 통해서 하나님의 선지자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강하게 부각시키고 있다. 다윗과 아사와 여호사밧과 히스기야와 요시야와 같은 충성스러운 왕들과, 심지어는 르호보암(대하 11:4, 12:6)이나 아마샤(대하 25:7-10)와 같은 왕들도 선지자의 말씀을 존중하여 하나님의 보호와 축복을 받을 수 있었다. 그러나 여호람(대하 21:12-19), 요아스(대하 24:19-25), 아마샤(대하 25:15-16,20), 므낫세(대하 33:10-11, 참조 36:15-16)와 같은 불충성스러운 왕들은 선지자의 말을 멸시했다가 패가망신하고 말았다. 사실상 역대기는 사무엘이나 열왕기보다 더 많은 선지자들의 사역을 소개하고 있다. 이스라엘을 향한 여호사밧의 말은 역대기 기자의 이러한 관점을잘 드러내고 있다. "너희 하나님 여호와를 신뢰하라! 그리하면 견고히 서리라! 그 선지자를 신뢰하라! 그리하면 형통하리라(대하 20:20)."

  역대기 기자는 왕들의 통치보다는 이스라엘의 율법과 선지자에 대한 반응이 그들의 운명에 더욱 결정적인 영향을 미친 것으로 기록하고 있다. 따라서 역대기 기자는 왕의 유뮤보다는 성전과 더불어 율법과 선지자의 말씀이 여호와 하나님과의 지속적인 관계를 유지하는 데 더 중요한 것으로 다루고 있다. 다윗 계열 왕들의 통치가 이스라엘을 멸망과 포로됨으로부터 보호하지 못했다는 사실은 이를 웅변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역대기 기자는 다윗 계열의 왕들도 여호와를 신뢰하고 하나님을 찾을 때에만 형통했다는 사실을 유다 왕정사를 통해 보여주고 있다. 여기에서 "찾는다"는 말은 단지 하나님을 찾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향한 삶 전체의 오리엔테이션을 가리킨다. 유다의 왕들은 예배 안에서(대상 13:3, 대하 1:5, 15:12, 31:21) 뿐 아니라, 건축에서(대상 11:8-9, 대하 14:7), 그리고 군사적 행동(대하 20:22-26, 32:7) 안에서도 여호와를 찾아야 했다.


 2-3 용서하시는 하나님

  이스라엘은 하나님의언약 백성이지만, 여호와를 신뢰하고 언약의 의무를 이행하는 데에는 늘 부족하였다. 역대기의 반복적인 주제 가운데 하나는 이스라엘의 불성실이다. 그러면 이스라엘은 더 이상 희망이 없었는가? 그렇지 않았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용서하시는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다. 역대기 기자는 다윗 언약과 성전을 강조함으로 여호와께서 죄를 용서하시는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강조하고 있다. 율리우스 벨하우젠(J. Wellhausen) 이래로 많은 학자들이 역대기 기자는 "즉각적 보응"의 사상을 핵심 사상으로 가지고 있다고 주장했다. 이 견해를 가장 많이 유포시킨 딜러드(Dillard)는 역대기에서 "보상과 처벌은 지연되지 않았으며, 이를 초래한 사건들의 발뒤꿈치를 바로 따라 왔다"고 말한다. 우리는 구약 기자들가운에에서 역대기 기자가 누구보다도 한 개인의 삶 가운데 순종과 축복, 불순종과 처벌의 강한 연결을 강조한 것을 부인하지 않는다. 그러나 이 원리는 셀만(Selman)이 지적대로 그대로 이루어진 것은 아니었다. 예를 들어 유다가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간 경우는 즉각적인 보응이라기 보다는 그 동안 쌓인 유다의 죄에 대핸 보응의 성격이 강했다(대하 36:16). 또한 심판의 경고를 받고 회개함으로 심판이 일어나지 않은 경우도 있다(대상 21:15-19, 대하 12:5, 15:1-8, 36:15). 따라서 "즉각적 보응"이라는 표현은 역대기 기자의 심판과 축복의 신학을 묘사하기에는 너무 좁은 용어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이 용어를 사용하기는 하되, 용어의 용도를 많이 개조해서 조심스럽게 사용할 필요가 있다. 셀만은 이러한 경우 우리가 유의해야 할을 세 가지로 제시해 주고 있다.

  "첫째, 역대기 기자가 죄와 형벌을 연결시키는 것은 사실보다는 심판의 방식과 더 연관이 있다. 역대기 기자는, 형벌은 저지른 죄와 상응해야 한다는 원리를 믿고 있었다. '너희가 만일 저를 버리면 저도 너희를 버리시리라'(대하 15:2; 참조, 대상 28:9, 대하 7:19-22)는 원리가 바로 그것이다. 역대기 기자는 이러한 원리에 대한 예를 많이 제시하고 있다(대하 21;13-18, 24:21-26, 28:23). 심판은 원래 범죄한 자에게 돌아간다."

  "둘째, 백성들이 마땅히 받아야 할 심판을 받지 않은 경우가 있음을 주목해야 한다. '역대기 기자에게는 죄가 항상 심판과 재앙을 가져온다'는 원리와는 대조적인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이는 다음과 같은 다윗의 말 가운데에 잘 요약되어 있다. "내가 곤경에 있도다. 여호와께서는 긍휼이 심히 크시니 내가 그의 손에 빠지고 사람의 손에 빠지지 않기를 원하나이다(대상 21:13)."  다윗의 후손들은 열왕기보다는 역대기에서 긍정적으로 다루어지고 있다. 그것은 역대기 기자가 좀 더 관대하기 때문이 아니다. 이는 하나님의 인자하심의 명백한 증거를 그들의 삶 속에서 발견했기 때문이었다. 역대기에서는 솔로몬, 르호보암(대하 11-12장), 아비야(대하 13장), 특별히 므낫세(대하 33장)와 같은 왕의 이야기가 열왕기와 크게 다르다. 이는 역대기 기자가 죄에 대한 자동적인 보응보다 하나님의 은혜를 강조했기 때문이다."

  "세째, 역대기 기자는 죄의 보응이라는 냉엄한 현실보다는 회복의 희망을 강조하는데 주된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이러한 원리의 핵심 본문은 (대하 7:12-16)이다. 이 구절에 따르면 다윗 언약의 원리에 다라 하나님의 용서와 회복을 가져다 주는 통로는 성전이다. 그러나 물론 이스라엘 백성들의 회개와 기도가 있을 때에만 용서와 회복이 가능했다."

  열왕기 기자는 므낫세를 유다 왕 가운데 가장 사악한 인물로 묘사했다. 그러나 역대기 기자는 그를 겸비하여 하나님의 은혜를 입은 왕으로 그리고 있다. 이러한 점은 역대기 기자가 여호와를 용서하시는 하나님으로 소개하고 있다는 것을 단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2-4 하나님 나라의 이중 구조

  역대기 기자는 포로 후 공동체가 예루살렘 성전을 중심으로 하나님을 섬기면서 실제로 하나님 나라를 경험할 수 있음을 강조하고 있다. 성전을 속죄의 장소가 되게 하신 것은 하나님이시며(대상 28:11), 하늘에서 불을 내려 용서의 기도를 응답해주시는 분도 하나님이시다(대상 21:26). 성전이 지상에 있는 하나님의 거처이기에 하나님은 결코 백성에게서 멀리 떨어져 계시지 않는다. 역대기 기자는 미래에 올 하나님 왕국보다는 이스라엘 안에 이루어지는 하나님의 왕국의 임재에 더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다. 역대기는 열왕기 기자가 여호와의 신의 감동을 받은 것으로 보지 않은 사건들을 영의 감화를 받은 것으로 설명하려는 경향을 보이고 있다. 아래의 예를 참고하라.

 1) "때에 성신이 30인의 두목 아마새를 감동하시니....(대상 12;18)."
 2) "성신의 가르치신 모든 식양(성전건축)(대상 28:12)."
 3) "하나님의 신이 오겟의 아들 아사랴에게 임하시매....(대하 15:1)."
 4) "여호와의 신이 회중 가운데서 레위 사람 야하시엘에게 임하셨으니....(대하 20:14)."
 5) "이에 하나님의 신이 제사장 여호야다의 아들 스가랴를 감동시키시매(대하 24:20)...."

  여호와의 신은 이스라엘의 역사 가운데서 전체 공동체의 구성원들에게 폭넓게 역사하신 것으로 해석되고 있다. 여호와의 신은 군대 장관(대상 12;18) 아마새를 감동시키셨으며, 오뎃의 아들 아사랴에게 임하여 아사 왕이 우상을 제거하는 일을 촉진시켰고(대하 15:1), 레위 사람 야하시엘을 감동시켜 전쟁터에서 용기를 잃지 않도록 격려해 주셨고(대하 20:14), 스가랴 선지자를 감동시켜서 목숨을 걸고 요아스 왕에게 심판을 선언하게 하셨다(대하 24:20). 그리고 하나님의 신은 성전의 모든 식양을 가르쳐 주셨다(대상 28:12). 역대기 기자는 이렇게 여호와의 신을 강조함으로  이미 포로 전기부터 하나님의 신이 그들 안에 역사를 시작하셨음을 말해주고 있다. 그리고 역대 기 기자는 이러한 하나님의 신이 포로 후 공동체 안에서도 임재하고 있음을 선언하고 있다. 그는 포로후 공동체가 이미 경험하였듯이(스 8:21-32, 느 4:7-23), 여호와의 신이 역사하고 있으므로(학 2:5, 슥 4:6) 신앙이 있다면, "지금 여기에서" 유익을 얻을 수 있음을 말해주고 있다.

  역대기 기자가 다윗 가문이 포로 후기까지 지속된다는 점(대상 3:17-24), 예루살렘 재정착 기사(대상 9:2-34), 고레스 칙령(대하 36:22-23)을 언급하는 것은 하나님이 지금 그의 집을 짓고 계시며, 백성들을 이 과업에 참여하도록 부르시고 있음을 보여주려는 데 있다. 우리는 여기에서 실현된 종말론의 모습을 살펴볼 수 있다. 포로 후기에 남은 자들은 비록 페르시아의 종노릇을 하고 있지만 새 시대의 입구에 서서 회복을 미리 맛보고 있었다. 물론 그렇다고 역대기 기자가 현재를 넘어서는 일에 관심이 없었다는 말은 아니다. 비록 포로 후 시기가 회복의 시기요, 새 언약 시대의 시작인 것은 사실이지만, 완전한 성취의 시기는 아직 오지 않았다. 포로후 공동체는 일부 약속들의 실현을 체험했지만 완전한 성취는 아직 미래의 일이었다. 이스라엘이 다윗 왕정을 잃고 위축된 모습을 보이고 있지만, 재건된 성전은 하나님께서 아직도 일하다는 가시적인 상징이었다.

  역대기 기자는 에스라-느헤미야를 통한 이스라엘의 역사를 통해서 미약하게 보이는 성취 앞에 서 좀더 궁극적인 미래의 "귀한"을 바라보고 있다. 그는 이미 유대 땅에 돌아온 일부 유대인들을 통해서 미래에 있을 수많은 디아스포라 유대인들의 귀환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러나 이러한 귀환과 포로된 유대 백성의 완전한 복귀는 하나님이 주도권을 잡으시고 행하시는 종말론적 속죄의 행위에 달려 있었다. 이스라엘 공동체는 그 날을 기다리는 동안에 하나님에 대해 레위적 의무를 잘 감당하고, 백성들을 잘 감독해야 할 책임을 지고 있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께 예배하는 공동체로서 모든 의무를 잘 감당한 후에 조용히 회복을 기다랴야만 했다. 따라서 성전에서 예배하는 공동체는 언젠가 진정한 다윗 왕의 후손이 와서, 그들의 죄를 사하고 그들을 종노릇에서 해방시킬 날을 고대하면서, 그들의 신앙을 미래 세대에게 전할 중요한 책임을 지고 있었다. 하나님의 목적은 아직 성취되지 않았다. 러나 미래는 하나님이 시작하신 것을 마침내 이루실 것임을 믿는 모든 일들에게 열려 있었다. 포로 후기 공동체는 하나님의 신의 임재가 주는 축복을 어느 정도 경험하면서, 이 신의 임재의 최종적인 완성을 앞당길 책임을 지니고 있었다.

  과거 이스라엘 역사의 흑암의 기간 동안 유다 왕국이 존속할 수 있었던 근거는 이전에 다윗에게 주신 약속을 지키시는 여호와의 신실하심이었다(대하 21:7). 신약 시대에 하나님의 언약에의 신실하심은 십자가로 나타났다. 현실 속에서는 악이 승리하는 것처럼 보일 때가 있다. 그러나 하나님은 한 번 맺으신 언약을 신실하게 지키시기 때문에, 우리는 믿음으로 인내할 수 있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박해로 인해 목숨을 잃는 한이 있어도, 하나님의 백성을 그 사랑에서 끊을 수는 없다는 사실을 분명하게 보여주고 있다(롬 8:39, 히 12:24, 13:20). 여기에 역대기의 정경적인 의미가 있다고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