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구약 성경강해***/- 시편 강해

시편연구 1

에반젤(복음) 2019. 9. 8. 19:44




시편 연구 1


시편연구 1 제1권 다윗의 시(시1-41편)
시편을 연구하는 방법에는 책별, 주제별, 저자별의 세 가지가 있다. 이중에서 책별로 나누어 보녀 모두 5권의 책으로 나눌 수 있다. 이중 제 1권에 해당하는 본문은 그 내용상 창세기에 대응하고 있으며, 그 주제는 피조물인 사람들에 관한 내용들을 다르고 있는 것으로 불 수 있다. 이 세상을 살아가는 사람들은 크게 두 부류로 구분할 수 가 있다.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구원을 얻는 사람들과 그렇지 못한 사람들이다. 본 연구에서는 이렇게 나누어지는 두 부류의 사람들이 각자 하나님께 어떠한 모습으로 보여지며, 참된 신앙을 갖추는 삶은 어떠한 것인가에 대해 알아보고자 한다. 


1. 복 있는 사람과 악인(시1-13편)
하나님께서는 인간을 창조하시고 그 인간에게 축복을 내리셨다(창1:28). 이러한 축복에 반해 저주라는 말은 창조된 인간이 하나님 말씀에 불순종함으로 말미암아 생겨난 것이라고 볼 수 있다(창3:14-19). 창조된 인간들은 이 세상에서 각자의 모습대로 자신의 모습이 어떠한 모습인지를 망각한 채 살고 있다. 즉 이 세상의 삶이 복 있는 사람으로서의 삶인지 잊어버리고 살아가고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복 있는 사람과 악인은 각각 어떠한 사람들을 가리키는 말인가? 


1) 하나님께서 축복하시는 사람과 심판하시는 사람
성도들의 생활은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의 첫 걸음을 내디딜 때부터 시작된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사람들은 기본적으로 세 가지 죄를 벌하지 않아야 한다(시1:1). 이것은 세속과 분리된 생활을 의미한다. 그리고 이들의 생활이 늘 하나님의 말씀으로 가득 채워져야 한다(시1:2). 이러한 모습으로 살 때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복을 주시는 것이다. 반면 악인은 하나님의 심판의 대상으로서 우리들에게 보여지고 있다(시1:5). 이들은 하나님의 뜻보다는 자신들의 경험을 의지하며(행20:27), 또 하나님의 말씀보다는 물질적인 삶에 대해 신경쓰고 있다(창6:5). 결국 복 있는 사람은 하나님의 축복을 받으며 살아가고 있고, 악인은 그렇지 못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2) 참된 성도의 삶
자칭 그리스도 인이라고 하는 많은 사람들이 이 세상에서 살아가고 있다. 그러나 그들 모두의 삶을 진정한 그리스도의 삶이라고 인정할 수 는 없다. 의인의 길은 하나님께서만 인정하신다(시1:6). 여기서 인정하신 다는 뜻은 하나님께서 성도들의 삶에 깊은 관심을 가지고 크나큰 사랑으로 늘 인도하시고 보살펴 주신다는 것을 뜻한다. 


2. 참된 목자와 양떼들(시14-25편)
피조물로서 인간은 창조주이신 하나님과 늘 관계를 맺으며 살아가야 한다. 이러한 관계를 성경에서는 목자와 양의 관계로 설명하고 있다(요10:11-15). 관계성이 파괴되거나, 잘못된 관계로 이루어질 때 목자와 양은 고민 속에서 방황하게 된다. 따라서 목자와 양의 진정한 관계를 알아보고, 하나님과 성도들의 올바른 관계를 유지해야 할 것이다.
1) 목자에 대한 절대적인 신앙을 소유
여기서 말하는 목자는 삯군 목자(요14:12)가 아니라 선한 목자이다. 그러기에 양들은 목자들을 따라 가기에 두려움이 없어야한다(시23:4). 목자들은 양 떼들 앞에서 가야 하며 양들은 그를 따라가는데 있어서 조금도 의심이 없어야 한다. 목자에 대한 양들의 순종의 모습이 있을 때 양들에게는 부족함이 없는 것이다(시23:1). 왜냐하면 목자이신 하나님께서 만물을 창조하셨기 때문이다.
2) 푸른 초장과 물가에 거하는 성도의 삶
다윗은 하나님의 인도하심 가운데 그의 보호를 받았다. 예수그리스도를 믿는 성도라면 예수님께서 자신을 돌보는 참된 목자라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그러기에 예수님께서 성도들의 삶을 인도하시게 되며, 성도들은 그분의 인도하심에 모든 것을 의지해아 하는 것이다. 


3. 하나님의 공의로우심(시26-46편)
다윗의 생애는 배신과 좌절의 연속이었다고 볼 수도 있다. 특히 자신의 아들인 압살롬의 반역(삼하15:7-12)과 세바의 반역(삼하20:1-22)으로 인한 그의 괴로움은 상당히 컸었다. 이럴 때 그는 하나님께 자신의 처한 상황을 아뢰며 하나님의 도우심을 간구하였다. 그 모습은 구체적으로 어떠하였는가?
1) 하나님께서 판단하시기를 원함
다윗은 자신에게 다가오는 환난에 처해 있을 때 자신의 떳떳한 신앙생활을 말하며(시26:3-8), 하나님의 판단을 기다렸다. 그리고 악인들에게 대한 하나님의 보응을 간구하였다(시28:3-5; 시31:14; 시34:15-22). 이렇게 간구하는 가운데 그는 하나님의 응답과 악인에 대한 의인의 승리를 확신하는 신앙의 자세를 가질 수 있었다(시27:13-14; 시31:19-22). 결국 다윗은 자신에게 주어진 시험을 통해 하나님께서 자신의 삶을 주장하시며, 자신을 연단 하시기를 원했던 것이다.
2) 신앙으로 고난을 극복
다윗은 자신에게 다가온 신앙의 연단들을 여호와를 의지하는 신앙으로 극복하였다. 우리는 흔히 고통을 당할 때 때로는 하나님을 원망하며 심지어는 하나님의 존재를 부인하기까지 한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공의의 하나님이심을 망각한데서 오는 결과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이 세상이 가져다 주는 환난을 나의 신앙에 성숙을 가하는 채찍질로 여기고 잘 극복할 수 있어야 할 것이다.
다윗은 본 서에서 인간이 살아가는 과정 중에 닥칠 수 있는 많은 문제점들을 제시하고 있다. 특히 그리스도인과 비그리스도인들의 삶에 대해서 그리스도인들과 목자와의 관계를 보여 주고 있다. 그리고 자신의 자신 있는 신앙의 모습을 말하면서 하나님의 공의를 구하고 있다. 우리도 하나님 앞에서 우리의 삶의 모습들이 자신 있는 모습이 되기를 힘써야 할 것이다. 인간으로 태어나서 그리스도인이 되지 못한다는 것보다 서글픈 일은 없다. 그러나 그것보다 더 서글픈 것은, 그리스도인이면서 하나님을 절대적으로 의지하지 못하며 살아가고 있다는 사실이다.
1. 억울함을 당한 성도의 처신(시4:1-3)
하나님 안에서 복된 삶을 영위하는 모든 신자는 물론하고 특히 어려움 등으로 고난받는 성도들은 기도의 방을 계속 두드려야 한다. 성경도 이를 강하게 주장하고 있는데. 시145:18에서는 여호와께서 진실하게 구하는 자에게 가까이하신다고 말씀하였고, 시81:10에서도 입을 넓게 열 때 여호와께서 채우신다고 덧붙이고 있다. 많은 신앙의 위인들도 기도에 대하여 강조하기를 주저하지 않는다. 루터(M.Luther)는 기도는 영혼의 독소를 빨아내는 거머리와 같다고 표현했으며, 위대한 설교자 스펄전(Spurgeon)은 기도는 모든 불경건과 포악스러운 죄의 압제를 이기고 위로 올라간다고 말하였고, 웰쉬만(Wel-shman)도 부흥의 비결에 대한 질문을 받았을 때 그저 자신은 구한 것을 받았을 뿐이라고 응하였다. 이처럼 성도들에게도 자신의 어떠한 환경에 대하여 오직 하나님께 간절히 구하겠다는 생각과 실천이 필요하다.

2. 복된 신자의 신앙(시11:1-7)
1)여호와께 피하는 신앙
시냇가에 심은 나무가 시절을 좇아 과실을 맺으며 가뭄이 올지라도 그 잎사귀가 마르지 않는 것같이(시1:3) 여호와께 피하는 신앙을 소유한 성도가 참으로 복되다. 이러한 자명한 사실이 있음에도 세상의 많은 사람들은 여호와께 피해 있는 사람들을 향하여 자꾸만 자신의 산으로 도망갈 것을 유혹하고 있다(시11:1). 그런데 신자들 가운데는 이러한 사실을 알고 있음에도 아직도 주님께 피하지 못한 사람이 있다. 이것은 아직 그 사람이 주님께 피할 만한 상황에 직면하지 못함이요, 한 단계 더 나아가서 곧 그러한 상황을 만나는 것을 피할 수 없는 사람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자기의 백성을 자신에게로 묶어 놓고 싶어하시기 때문이다.
2) 성도의 기도를 들어 주심과 그의 공의를 믿고 안심하는 신앙
다윗은 이 세상에서 정의와 진실이 무너지면 과연 의인은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염려하였다. 그러나 세상의 질서가 무너져서 어지러울 때도 하나님은 여전히 그의 보좌에 계시니 성도들은 언제든지 여호와께 기도 할 수 있다. 영국이 사회적으로 문란해졌을 때 옥스퍼드 대학에서 6명의 젊은이가 기도 운동을 시작했는데, 요한 웨슬리(J.W-esley),찰스 웨슬리(C.Wes-ley), 횟필드(Whtiefield)가 그중에 속하였다. 곧 그들은 세계적인 인물로 성장하였다. 또 사회가 어지러울지라도 하나님의 능력과 공의는 여전하시니 그로 인하여 위로 받을 수 있다. 하나님의 공의는 인류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수학적이다. 따라서 고난으로 인하여 괴롭더라도 하나님의 공의로우심에 위로를 받고 세태를 헤쳐나가는 성도가 참으로 복되다.

3. 다윗의 신앙(시23:1-6)
1) 여호와는 나의 목자
다윗은 분명히 하나님과 개인적인 친분관계를 맺고 있었다. 왜냐하면 하나님에 대하여 고백하기를 '나의' 목자라 하였는데, 이것은 결코 형식적이거나 사회적 위치에서 나오는 겉치레의 말이 아닌 진정한 친분의 고백이기 때문이다. 또한 하나님과 진실한 관계를 맺기 원한다면 반드시 그는 성경에 입각한 건전한 신앙을 소유하여야한다. 지나치게 감정에 의존할 때때로 하나님의 범위를 넘어설 수 있기 때문이다.
2) 내가 부족함이 없음
다윗이 이처럼 하나님 앞에 만족할 수 있었던 것은 스스로 과욕을 품지 않았으며(시131:1), 어디서나 만족할 줄 알았기 때문이다, 무릇 욕심이 잉태한 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하여 사망을 낳는 바(약1:15) 바울처럼 주신 은혜에 감사치 않으면 곧 그는 범사에 감사를 잃어버리는 사람이 될 것이다.

4. 성경적인 복의 개념
첫째, 참된 복은 성령 가운데 기쁨으로 찾아든다. 즉 죄를 멀리하고 악한 것을 버릴 때, 하나님의 말씀으로 일관할 때 그 사람의 내면에 기쁨과 평안으로 찾아온다는 것이다. 이것은 물질만능주의에 팽배해진 현대의 인류들에게 경종을 울려 준다.
둘째, 성경의 볼은 필연적이며 범사에 적용되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생각할 수 있는 것처럼 잔꾀를 부리고 재주를 써서 받는 복이 아닌 주의 성도가 경건한 삶을 살 때 필연적으로 얻게 되는 것이라는 사실이다. 또한 이 복은 심령의 기쁨에만 그 치지 않고 범사에 적용된다.
셋째, 참된 복은 하나님이 거하시는 거룩한 곳에 있다(시1:6). 의인은 그의 행함대로 판단을 받게 되고 결국 이것에서 참된 복을 누리게 되는 것이다

시편연구 2 제2권 다윗과 고라의 시(시42-72편)
제2권에 해당하는 이 부분은 출애굽기의 내용과 비슷하며, 그 중심 내용은 하나님의 구원에 대한 것이다. 죄악으로 인하여 죽을 수밖에 없었던 인간들에게 구원이라는 놀라운 은총을 주셨다. 성도들은 그 은총을 받으며 살아가고 있지만 때로는 고난에 처할 때가 있다. 그 고난은 외적일 수도 내적일 수도 있다.
본 서에서는 이러한 고난의 삶 속에서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놀라운 구속의 사역을 발견할 수 있다.
1. 능력을 주시는 하나님(시42-50편)
인간들에게는 목마름이란 것이 있다. 이것은 육체적인 것뿐만 아니라 영적인 것에도 쓰인다. 본 서에서 저자는 자신의 목마름을 표현하면서 세상사람들이 "네 하나님이 어디 있느냐"(시42:3,10)고 조롱할 때 자신에게 오는 고통을 말하고 있다. 이러한 고통 가운데서 어떻게 헤어나 올 수 있었는가? 만약 이러한 소리를 듣는 성도들이 있다면 본 서의 저자처럼 고통스러워 할 신앙의 자세가 도어 있는가? 있다면 어떠한 방법으로 그 고통을 해결하겠는가?
1) 하나님 앞에서의 진실된 삶
시인은 하나님을 찾기에 갈급해 한다(시42:1). 즉 자신이 당한 어려움이나 괴로움으로 인해 좌절하거나 실망하지 아니하고 하나님을 찾는 모습을 보여 주고 있다. 그리고 절대 신앙인 하나님만을 의지하고 있는데, 하나님을 의지하지 아니하고 세상의 가치들을 의지한다면 그것들로 인해 도리어 멸망하고 말 것이다(행8:20). 인간의 영혼에 관심을 두고 계신 하나님 앞에서 우리의 삶이 이루어질 때 그러한 목마름은 깨끗이 사라질 것이다.
2) 헌신적인 삶의 실천이 필요
물질 문명의 발달로 인해 인간소외 현상이 극도에 치닫고 있으며, 인간들의 삶은 절대적인 신에 의지하기보다는 물질에 의지하는 경향이 짙어져 가고 있다. 자연히 진리의 말씀은 허공을 치는 메아리와 같이 쓸모없는 존재가 되어버렸다. 우리는 시편 기자의 헌신적인 삶의 실천(시42:8; 시63:63)을 통해 우리의 신앙을 진단해 보아야 할 것이다.
2. 단절된 하나님과의 관계회복(시51-61편)
아담이 지은 최초의 죄악으로 인해 생긴 하나님과의 단절된 생활(롬3:23)은 오늘날까지 이어져 오고 있다. 인간이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짓는 모든 죄는 하나님과의 관계를 파괴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사59:1,2). 결국 하나님과의 관계성 파괴는 인간 자체의 파멸을 가져오게 된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생명의 근원이 되시기 때문이다. 따라서 인간들은 하나님과의 관계성 회복에 최선을 다하여야 한다.
1) 하나님께 자신의 죄를 고백
다윗은 자신의 죄에 대해 "내가 주께만 범죄하여"(시51:4)라고 고백하고 있다. 사실은 다윗은 밧세바를 간음하였고(삼하11:1-12,13), 그 남편 우리아를 전쟁터로 내보내 죽게 하였다. 그러나 다윗의 이러한 죄악은 하나님께 범죄한 것이 너무나 큰 탓에 그것에 의해 가리워지고 만 것이다 .어쨌든 다윗은 자신의 죄악성을 하나님께 아뢰며 용서를 구하고 있다(시51:2-9), 회개치 않는 삶은 죽은 삶인 것이다.
2) 구원의 확신을 갖고 간구
위기에 처해 있는 성도라면 누구나 하나님께 의지하게 된다(시54:4). 그러나 구원에 대한 확신이 없이 간구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다. 흔히 간구 하면서도 정말로 응답해 주실까? 라는 의심을 갖곤 한다. 그러나 시편 기자는 모든 것을 여호와께 맡겨 버리라고 한다(사55:22). 인간사에 펼쳐지는 질고 속에서도 끝끝내 좌절하지 않고 하나님께 구원을 간구하고 확신하는 삶을 살아가야 하는 것이다.
3. 하나님 절대의지의 신앙(시62-72편)
성도들에게 주어진 삶의 최대 목적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성이나 물질에 자신들의 가치관을 두고 살아가는 현대인들에게는 이 말이 생소하게 들린 것이다. 하지만 그럴수록 가장 절실하게 요구되는 것이기도 하다(롬5:2). 왜냐하면 목적을 잘못 정했을 때 오는 좌절은 결국 죽음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왜 굳이 하나님만 바라보아야 하는가? 그 구체적인 이유는 무엇인가?
1) 하나님은 나의 구원
시편 가지는 하나님을 가리켜 자신의 구원자이시며, 산성이시다(시62:2)고 한다. 그리고 어려울 때 피할 수 있는 피난처라고 한다(시51:13). 이 세상의 구원자는 오직 한 분 하나님밖에 없다(행4:12). 그 누구도 인간들을 구원할 수가 없는 것이다. 따라서 구원을 주시는 그분에게는 참된 소망이 있다. 이 소망은 인간들에게 즐거움을 주는(잠10:28), 부활에 대한 소망을 말한다. 따라서 하나님께 인간의 생사 화복이 달려 있는 것이다. 죄악으로 더러워진 이세상의 구원자는 오직 하나님뿐이라는 사실을 망각해서는 안 될 것이다.
2) 함께 하시는 하나님
인간의 삶 가운데 항상 함께 하시는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며 생이 다하는 그 순간까지 떠나지 말기를 간구하는 시인의 모습(시71:9)은, 세상적인 모습과는 너무나 다른 모습이다. 즉 세상에서의 인간의 노년은 보잘 것 없는 존재가 되어 버리지만 함께 하시는 하나님의 자녀들의 모습은 노년이 되어갈수록 그리스도를 닮아가는 영광스러운 모습이 되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모습이 되기까지는 하나님의 축복만이 있었던 것은 아니다. 시편 기자는 주께서 우리에게 고난을 주셨다(시71:20)고 하였다. 특히 우리라고 표현한 것은 이스라엘 백성을 하나의 연합체로 본 것이다. 이것은 결국 예수그리스도를 믿는 하나님의 자녀 된 모든 사람들에게 적용된다고 볼 수 있다. 따라서 성도들이 살아가는 과정 속에는 고난이 따르게 된다. 하지만 그 고난이 따르게 된다. 하지만 그 고난 속에서도 함께 하시는 하나님이 계시다는 사실에 우리는 감사해야 할 것이다.
인간은 한 사람 아담의 범죄로 말미암아 부패되고 타락되었다. 따라서 인간 스스로는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 없는 존재가 되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러한 인간들에게 은혜를 베푸셔서 구원을 얻을 수 있는 길을 주셨다. 시편 기자는 이러한 영적인 구원 외에 외적으로는 구원을 말하면서 자신이 처한 현실을 하나님께 아뢰고 있다.(시72:14).
이 부분을 가리켜 칼빈(Calvin)은 "이 세상의 의인들이 악인들에게서 겪는 억압과 핍박으로부터 구원받을 수 있도록 하는 구속 사역의 성격을 암시하고 있다"고 표현하고 있다. 나의 구원자 되신 하나님께서는 이렇듯 영적인 것뿐만 아니라 이 세상에서의 모든 환난 가운데서도 우리들을 구원하고 계신다.
1. 성도의 소망(시42:5)
대개 사람들은 어려움에 직면하면 쉽게 포기하거나 좌절하고 낙담하기 쉽다. 그러나 그리스도인들은 이러한 고난중에도 전혀 낙담할 필요가 없는데, 그 이유들을 예로 들면 첫째, 성도의 난관은 오히려 본인의 인격을 훈련할 수 있는 좋은 방편이 되기 때문이다. 「실락원」의 저자였던 밀톤(J.Milton)도 많은 역경을 극복하고 44세에 비로소 명저를 남기게 되었고, 이러한 예는 역사적으로 많이 있다. 둘째, 난관은 성도로 하여금 하나님께 감사케 만든다. 사실 인류가 하나님께 받은 은혜와 사랑은 무궁 무진하며 한량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사랑을 기억치 못하는 것이 상례인데, 고난은 이들에게 감사하도록 가르친다. 셋째, 하나님의 약속을 기억하기에 염려할 필요가 없다. 즉 어두움 가운데서도 염려치 말라는 하나님의 말씀을 기억하면 얼마든지 염려 속에서 벗어날 수 있다. 마지막으로 전능하신 하나님을 믿을 때 소망을 찾게 된다. 하나님은 무소 부재, 전지 전능하신 분이시다(창18:14; 렘32-27; 눅1-37). 더욱이 그러한 하나님은 우리들을 눈동자와 같이 감찰하신다. 그러므로 어떠한 난관이나 역경이 올지라도 성도는 오히려 소망을 가지고 기뻐하며 능히 이길 수 있어야 하겠다.

2. 정의가 충만하신 하나님(시48:10)
하나님은 공의로우신 분이시며, 우리의 행위대로 보응 하시는 심판의 주이시다. 따라서 우리는 모두 자기의 죄로 인하여 멸망을 받기에 충분한데, 하나님은 공의의 덕을 베풂으로 자기의 백성들을 긍휼히 여기시고 구원하셨다. 따라서 모든 구원받은 백성들은 자신들의 자의적선 때문에 구원받은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공의의 덕으로 구원받은 것이 확실하다(신7:6-8; 신9:6). 이러한 하나님의 공의는 자기의 백성들을 구원하시기 위한 방편으로 나타나는 행동으로서 원수들도 이것을 이유로 무어라 말할 수 없게 하셨다. 결코 우리의 구원은 세상 사람들이 말하는 것처럼 스스로 이룩한 것이 아님을 명심하여야 하며, 그것만이 하나님의 구원하신 은혜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일 것이다.

3. 죄로 인한 고통(시51:3)
첫 사람아담이 범죄한 이후 인류는 범죄한 순간부터 고통에 처하게 되었는데, 그렇다면 왜 이처럼 사람이 죄를 범하면 고통을 당하게 되는 것인가?
첫째, 사람이 죄를 범하면 하나님께 벌을 받는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고통스럽다. 죄를 짓는 그 순간까지 일반 은총으로 허락된 양심은 계속 고통을 받으며, 죄를 짓고 난 이후에도 우리의 영혼은 잠재적으로 불안과 고통을 느끼게 된다. 이것은 지은 죄로 인하여 분명히 하나님께 벌을 받을 것이라는 사실을 각 개인의 영혼이 알기 때문이다.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의 중재가 필요하다. 주님은 우리의 고통을 대신하여 친히 하나님의 화목 제물이 되셨으며, 따라서 회개를 통하여 그분의 중재를 힘입는 것만이 죄로 인한 고통을 앨 수 있는 방법이다.
둘째, 사람이 죄를 범하면 하나님께서 그를 대적하시기 때문에 고통스럽다. 하나님은 죄의 모양이 어떠하든 결코 용납하시거나 기뻐하시지 않는다. 따라서 죄는 하나님을 피하게 하며 대적케 한다. 그러므로 죄지은 인류는 결코 마음 편할 수 없는 것이다.
셋째, 범죄자는 반드시 우주질서와 상충되기 때문에 고통스럽다. 하나님의 능력과 그분의 숨결이 내재되어 있는 우주는 조화로우며 결코 질서를 벗어나지 않는다. 그러나 죄는 이것에 역행한다. 그래서 질서를 파괴하고 조화를 깨뜨린다. 때문에 죄지은 인간은 고통스러울 수밖에 없는 것이다.

4. 다윗의 신관(시65:1-3)
1) 찬송받으실 주님
하나님은 결코 세상의 군왕들처럼 찬송과 경배를 강제로 취하시거나 요구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온 우주 만물은 그가 찬송하기를 기다리고 있다(시 65:1). 하나님께서는 샘솟는 참된 기쁨을 결코 중단하시지 않으신다. 따라서 찬송하는 무리들은 이러한 마음가짐으로 찬송해야 하며, 결코 외식하는 자와 같이 형식에만 그치지 않도록 해야 한다.
2) 기도를 들으시는 하나님
하나님은 성도의 눈물 어린 간구에 결코 냉담하지 않으신다는 것을 다윗은 인지하고 있으며, 이러한 사실은 교회사를 통해서도 이미 증명되어 있다. 공익을 위하여 불타는 기도를 드렸던 모세(신9:25-29), 담대한 기도의 주인공 여호수아(수1:12-14), 백성들을 위한 간절한 기도의 주인 느헤미야(느1:4-11)등이 모두 좋은 예이다. 그리고 하나님은 이 모든 기도에 각각 응답해 주셨다.
3) 죄를 사하시는 주님
다윗의 침상을 적시는 회개의 기도는 하나님의 사죄를 받기에 충분했다. 비록 죄인의 몸이었지만 회개하였을 때 비로소 아들의 위치를 회복할 수 있었던 것이다. 하나님은 회개하는 백성들을 결코 외며하지 않으시며 눈물 어린 간구를 들어주신다.







시편연구 3 제3권 아삽의 시(시73-89편)

제3권은 아삽의 시로서 레위기가 그 배경으로 쓰여졌다. 쓰여지는 주요 단어는 '성소'이다. 그 내용은 한 인간의 인생뿐만이 아니라 사회의 전반적인 구조적인 모습 가운데서 하나님의 구속 사역을 말하고 있다. 시인은 외적으로 보이는 행운이나 복에 대해 유혹을 느끼며 사회의 구조적인 모순에 대해 불평을 한다. 그러면서도 하나님에 대해 바른 자세를 갖고 사는 삶이 행복한 삶이라는 것을 고백한다.
1. 하나님 앞에서 모순은 있을 수 없음(시73-75편)
아삽은 현대를 살아가고 있는 그리스도인들이라면 한 번쯤 던졌을 질문에 대해 시원한 답변을 하고 있다. 그 질문은 아마도 예수를 잘 믿고 순종 잘하는 성도들의 삶과 그렇지 못한 불신자들의 삶의 차이에서 오는 모순에 대한 갈등에 관한 것일 것이다. 즉 하나님의 자녀들은 고통을 받을 때 비그리스도인들은 왜 행복할 수 있는가? 하는 문제이다(눅16:19-31). 이렇게 불공평한 현실을 하나님께서는 어떻게 다루시는가?
1) 멸망의 종국
비그리스도인들에 대한 시인의 판단이 성전에 들어설 때에 비로소 바로 설 수 있음을 고백한다(시73:17). 인간의 이성이나 생각만 가지고는 올바른 행복을 맛볼 수 없다. 결국 신앙이 필요하다. 시인은 모순된 현실의 대답을 성전의 파괴와 연관짓고 있다(시74:7,8). 당시 성전이라고 하는 것은 회당이라고 보는 것이 바람직하다. 회당은 하나님께 대한 예배가 행해지던 곳이다. 그러나 이러한 회당이 파괴되었다는 것은, 그 드려지는 예배 위에 하나님께 대한 바른 신앙이 없었음을 암시하고 있는 것을 보여 준 예라 할 수 있으며, 또 악인은 반드시 그 행한 대로 보응을 받게 된다는 사실을 깨달은 것이다(시75:8;렘25:15).
2) 공의의 하나님을 찬양
시인은 자신의 간구(시 74,75)가 이루어짐에 대해 감사하고 있다. 그리고 심판 날에 있을 하나님의 심판의 모습을 묘사하고 있다(시75:4-8). 즉 악인에게는 영원한 형벌을, 의인에게는 영원한 복을 주시는 하나님의 공의로우심을 바라본다. 오늘날 수없이 많이 드려지는 예배 가운데 진정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며 신뢰하는 자세로 드려지는 예배가 얼마나 될까? 만약 이러한 진정한 예배의 자세를 지니지 못한 자들은 그 종말이 형벌로 끝나 버릴 것이다.
2. 하나님께 대한 신앙의 당위성(시76-78편)
하나님께서는 구약의 선민인 이스라엘 백성에게 교훈을 주신다. 그것은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에서 탈출하면서부터 시작되고 있다(시78편). "옛 비밀한 말을 발표하리니"(시78:2)라는 말은 누구든지 한 번쯤은 생각해 보고 관심을 가져도 될 가치 있는 진리를 뜻한다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왜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의 지난 과거를 회상하게끔 하셨을까?
1) 참소망을 하나님께 둠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의 구원 은혜를 체험하고도 계속하여 범죄하였다(시78:9-64). 이것은 아담의 죄로 인하여 필요하게 된 하나님의 구속 사역의 필연성을 보여 주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구속 하역의 대상인 인간들의 죄악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사역을 수행해나가시는 놀라운 사랑을 보여 주고 있다(롬3:25; 딛3:5).
결국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선조들의 죄악성을 보여 주면서 성도들은 그러한 어리석음을 답습하지 않기를 원하고 계신 것이다(시78:1-8). 그리고 하나님 자신에 대해 참소망을 두며 살아가기를 원하시는 것이기도 하다.
2) 영원히 함께 하시는 하나님
시인은 시78:69에 "영원히 두신 땅같이 지으셨으며"라고 한다. 이 말은 '하나님께서 택하신 백성들, 곧 성도들과 영원히 함께 산다'는 뜻이다. 이 땅의 성도들도 인간이기에 완벽할 수는 없으며, 때로는 하나님께 범죄하는 모습으로 살아갈 때도 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택하신 성도들은 영원히 사랑하신다는 것을 기억하고 그 사실을 증거하는 복음의 사역자가 되어야 할 것이다(마28:19,20; 딤후4:2).
3. 민족구원을 위한 타원
위기에 처한 양을 구할 수 있는 사람은, 양 떼를 지키는 목자뿐이다. 양은 자기 목자를 알며, 목자 또한 자기 양을 안다(요10:14,15). 그것은 천국 공동체의 사랑의 관계를 상징한다. 시인은 공동체의 일원으로서 공동체가 겪고 있는 어려움을 하나님께 호소하고 있다. 하나님의 눈에 비친 그 공동체의 모습은 어느 정도로 비참해져 있는가? 비참해진 현실속에서 해야 할 일은 무엇인가?
1) 황폐된 포도원 같은 이스라엘
시인은 이스라엘 민족을 포도나무에 비유하고 있다(시80:8). 이 포도나무는 애굽에서 가져왔음을 나타내는데, 이는 이스라엘 백성의 출애굽을 의미하며, 그 사건이 하나님의 주권적인 사역에 있음을 암시하고 있다. 하나님께서 친히 옮겨 놓으신 포도나무를 하나님께서는 황폐케 하셨다(시80:12). 여기서 시인은 하나님의 백성의 타락과 그 비극을 적나라하게 묘사하고 있다(시79:17, 18),그러나 종국적으로는 이스라엘 백성의 회복에 대한 확신을 가지고 있음을 고백한다.
2) 회개와 구원을 호소
시인은 이스라엘 백성에게 향하신 하나님의 진노를 돌이키시기를 간구하고 있다(시85:4-7). 이스라엘 백성으로 상징된 포도밭이 황폐한 이유를 알고 거기에 따르는 회개의 기도를 하면서 구원을 호소하고 있으며, 자신들을 괴롭히는 재앙을 거둬 주시기를 간구하고 있다(시79:5-12). 이처럼 성도들은 자신의 과오와 잘못을 늘 살피고 그것을 솔직하게 고백하는 자세가 필요하다.
본 서에서 시인은 세상의 모순으로 인한 불공평함을 토로하며 민족의 구원을 호소하고 있다. 어떻게 보면 불공평한 현실이지만 하나님의 공의로우심을 의지하고 그분께 참 소망을 두고 살아가는 것이 가장 바람직한 삶의 지혜인 것이다. 개인의 삶과 한 민족의 운명을 주관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심을 망각해서는 안 된다. 인생 중에 가장 절망적일 때가 오더라도 참 소망이신 하나님을 섬기는 일을 게을리 해서는 안될 것이다.
1. 참된 예배
하나님의 형상대로 피조된 인류는 그를 즐거워하며, 영광을 돌리고 예배를 드려야 할 책임이 있다. 또한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는 신령과 진정을 다하는 것으로 성부께서 받으실 만한 것이 되어야한다(요4:24). 그러면 이와 같이 하나님이 받으실 만한 참된 예배란 어떤 것인가?
첫째, 하나님 중심으로 드리는 예배이다(시15:1). 누가 예배의 중심이 되는가는 매우 중요한 요소임에도 불구하고 간과되어지는 일들이 많다. 사람이 중심 되는 예배와 성부께서 중심 되어지는 예배는 본질적으로 상이하다. 따라서 받으실 예배란 하나님 중심의 예배이며, 이는 모든 관심과 생각을 그분께 집중하는 것을 의미한다.
둘째, 참된 예배는 거룩한 생활을 통해서만 완성된다(시15:2-5). 일반적으로 교인이든 아니든 예배를 교회, 특히 장소 적인 교회와 관련짓는다. 그러나 이것은 하나님의 요구를 결코 올바르게 이해한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매일 매일의 삶 역시 중요한 예배이며, 결코 소홀히 여겨서는 안 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그의 백성들에게 교회에만 제한되는 거룩을 원치 안으시고 보편적으로 유지되어지는 거룩을 원하신다. 때문에 참된 예배는 거룩한 실천이 있는 생활을 통해서만 완성될 수 있다.

2. 그리스도인과 찬양
1) 찬양의 의미와 이유
찬양은 히브리어로 hlht(테힐라)인데, 이것은 '찬양하는 것, 찬미하는 것' 등의 의미로 단순한 노래를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행동도 포함하는 광의의 찬양이다. 신약에 와서는aijnevw(아이네오)란 단어를 사용했는데, 여기에는 '가치'의 의미가 포함되어 있다. 이 말을 사용한 것은 찬양을 받으실 만한 가치가 있는 대상에게 찬양을 드린다는 것을 가르치기 위함이다. 결론적으로 찬양은 오직 합당하신 그분께 나의 모든 것으로 경배 드림을 의미한다고 할 수 있다. 그러면 왜 찬양을 하는가?
첫째, 우리는 피조물이요, 그분은 지으신 창조주이시기 때문이다. 둘째, 그리스도께서 죄를 대속하여 화목 제물이 되심으로 영멸에서 우리를 건져 주셨기 때문이다.
2) 찬양하는 생활
중심을 감찰하시는 하나님께서 마음도 없이 겉으로만 체하는 사람을 외모로 받지 않으심은 지극히 당연하다. 많은 웅장한 형식들보다는 간절하고 뜨거운 영혼의 찬양 원하신다(시69:30,31). 따라서 환경에 의하여 좌우될 수 없으며, 상황에 따라 바뀔 수도 없다, 그러므로 모름지기 성도는 하나님이 크게 기뻐하실 찬양을 드리도록 힘써야 하며, 결코 형식이 되지 않도록 주의하여야 할 것이다.

3. 아삽(Asaph)
게르손 족속 베레갸(Berch-iah)의 아들이었던 아삽은 다윗이 거느렸던 세 음악가들 중 한사람으로 찬송을 맡았던 악사의 우두머리이다. 그는 150편의 시편 중에서 12편(시 50,73-83편)을 손수 지었는데, 그 내용으로 보아 두 사람인 것으로 추정된다. 먼저 한 사람은 시편 50, 73, 76, 78편 등을 쓴 다윗 시대의 아삽으로 시편 75, 77, 82편도 지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아무튼 아삽의 시는 특이한 문체로 강하고 영적인 특성들을 지닌다(대하29:30; 느12:46) 그 밖에 그의 아들들은 찬송 대원으로 불렸으며(대상25:1; 대하20:14), 성전 봉헌식 행사에 참가하기도 했다 (대하5:12). 법제 앞에서 찬송하는 것과 심벌즈를 치는 일 외에 아삽은 노래하는 자의 우두머리였으며, 그의 자손은 148명에 달한다(느7:44), 유배 이전에는 그렇게 알려지지 않았으나 유배에서 돌아온 이후 고라 자손과 함께 음악 업무를 담당하였으며, 백성들의 신앙 회복에 크게 기여함으로 알려지게 되었다.

4. 포도나무의 상징적 의미(시80편)
구약 성경에서 포도나무와 포도원은 종종 이스라엘의 비유로 사용되었다. 하나님은 한 포도나무를 애굽에서 가져다가 심으셨는데(시80:1-13), 선택된 포도나무였음에도 불구하고 후에 들 포도나무가 되어 버렸다(사5:1-7; 렘2:21; 호10:1). 이것은 패역하게 되어 버린 이스라엘을 가리키이요, 이후에는 땔감으로 밖에 아무데도 쓸 수 없는 것이 되어 버린 이스라엘을 상징한다(겔 15장; 겔19:10-14). 또한 에스겔도 이스라엘에 대하여 상징하기를 한 '큰 독수리'(느부갓네살)가 '땅의 종자'(시드기야)를 취하여 심을 것이고, 이것이 굵은 가지와 가는 가지가 난 포도 나무로 자랄 것이나 후에 다른 독수리가 와서 옮겨 심을 것이라고 미래를 예견하였다. 한편 은유적 표현으로도 사용되었는데,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만나기를 "광야에서 포도를 만남같이"(호9:10) 하셨다고 했으며, 택한 이스라엘 백성들을 포도송이에 비유하기도 했다(사65:8)


시편연구 4 제4권 저자 미상의 시(90-106)편

본문의 주요 내용은 삶의 대한 방황과 불안이다. 이 세상에는 악인과 의인이 살고 있다. 악인으로 인해 의인은 불안에 떨며, 악인이 받는 행복에 의해 신앙의 방황을 가져오게 된다. 그러나 시인은 이러한 모든 상황을 하나님의 통치에 맡기며 참 기쁨의 찬양이 넘쳐남을 얘기하고 있다.
세상에 살면서 불안해 본 적은 없는가? 세상 사람들의 모습을 보고 신앙의 갈등을 느껴본 적은 없는가?
1. 심판주 되시는 하나님(시90-92편)
인생은 나그네의 길이며, 그 끝은 결국 죽음이다. 모세는 인생의 연수를 70이라고 했다(시90:10). 누구나가 한 번 태어났다가는 반드시 죽게 되며 그 후에는 심판이 있게 됨(히9:27)을 알수 있다. 이 심판은 하나님께서만 하실 수 있다. 하나님께서 심판사실 때 어떻게 할 것인가? 의인과 악인은 각각 어떠한 심판을 받을 것인가?
1) 악인에게는 징벌을, 의인에게는 구원을 주심
죄의 열매는 죽음이다. 이 죽음에서 구원받기 위해서는 예수그리스도를 영접해야 한다(요1:14), 그 이유는 주 예수그리스도를 영접한다는 것 그것이 바로 '지혜의 근본'이기 때문이다. 그렇지 못한 악인은 종국에 가서는 멸망하고 만다(시92:7-9).
특히 '죄악을 행하는 자는 다 흩어진다'(시92:9)라는 표현은 심판날에 양과 염소를 구분하는 의미로 본다. 또한 시인은 의인을 종려나무와 백향목에 비유하고 있는데(시92:12), 이것은 결국 의인의 승리적인 삶을 의미한다고 할 수 있다(요16:33).
2) 하나님의 보호에 대한 확신
성도들은 어떠한 위치에 처하든지 늘 안전하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왜냐하면 성도들이 자신들의 생명을 유지하려고 하나님께 매달려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그 오른손으로 성도들을 붙들고 계시기 때문이다(시94:18). 이러한 확신을 가지고 살아갈 때 성도들은 늘 승리하는 삶을 살 수 있는 것이다.
2. 여호와의 통치(시93,94편)
세상은 죄악의 만연으로 이해 인간성 상실과 가치 판단이 흐려지고 있다. 성도들은 세상의 권력에 순응해야 한다. 하지만 그것이 죄악으로 치닫고 있다면 대항할 의무 또한 있는 것이다. 하나님은 자신의 절대 주권으로 이 세상을 통치하신다(시99:1). 하나님께서 통치하실 때 세상의 모습은 어떠할까? 또 자신의 이성과 경험에 의존해 살 때와 하나님께서 주관하실 때의 차이는 어떠할까?
1) 요동치 아니함
세상의 상황은 의인들을 대적하는 무리들로 가득 차 있다. 자연 세계 중 인간들에게 공포심을 줄 수 있는 가장 대표적인 것은 물과 큰 파도일 것이다(시93:3,4). "큰 물이 소리를 높였고"(시93:30)가 의미하는 것은 이 땅의 악한 세력들이 하나님의 왕권에 도전하며 하나님의 백성들을 대적하는 것이라고 한다. 그러나 이러한 대적들 보다 더 크신 능력을 가지신 분은 하나님이시다(요4:4-6). 따라서 이 세상의 거센 물결이 휘몰아칠지라도 결코 흔들림이 없는 것은 주의 통치 아래 있기 때문이다.
2) 하나님의 통치에 대한 감사
불안과 공포 속에서 헤어나올 수 있는 유일한 길은 나의 모든 것을 하나님께 맡겨 버리는 것이다(마11-28). 주님께서 내 마음을 주관하시도록 비워놓아야 한다. 예수그리스도를 떠난 삶은 무의미하다.
만약 마음속에 하나님에 대한 신앙심이 없다면 시련을 겪어야 할 하등의 이유가 없다. 다만 현실에 만족하는 어리석은 죄인들과 같은 것이다(고전15:32). 주님이 다스리는 인생의 기쁨이요, 보람이며, 가치있는 삶인 것이다.
3. 감사와 찬양(시95-106편)
구속의 궁극적 대상인 인간들이 하나님께 마땅히 드려야 하는 것은 바로 찬양이다(계19:5).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창조주이시기 때문에 모든 피조물들이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은 당연한 것이다(시102:18). 그리고 이 찬양을 통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신앙의 성장을 가져오기도 한다. 하나님께서는 제물보다 찬양을 기뻐하고 계신(시69:30,31). 예수님께서도 이러한 찬양을 하나님께 직접 드린 것을 볼 수 있다(막14:26). 그렇다면 이러한 찬양은 어떠한 모습으로 드려야 하는가?
1) 영혼에서 우러나는 감사와 찬양
하나님 앞에 나아갈 때의 우리의 모습은 늘 감사하는 모습이 되어야한다(시95:2). 여기서 감사라는 것은 '서두르다'는 뜻을 가지고 있다. 즉 감사하는 마음을 가지고 하나님께 신속히 나가야함을 의미한다. 그리고 새 노래로 여호와께 노래해야 한다(시96:1). 이것은 하나님 앞에 나아갈 때 새로운 심령으로 나아가야 한다는 것을 뜻한다. 죄악에 물든 심령으로는 하나님을 찬양한다고 할 수 없다. 따라서 성도들의 찬양은 하나님께서 부어 주시는 은총을 날마다 깨닫고 부르는 은혜의 찬양이 되어야 한다(시42:10; 계14:3).
2) 매일의 삶 속에서의 찬양
우리가 하나님께 드리는 찬양은 형식적인 찬양이 되어서는 안 된다. 특히 예배시에 드려지는 찬양은 신령과 진정으로 드려져야 할 것이다(요4:24). 왜냐하면 찬양도 예배의 일부분이기 때문이다. 특히 칼빈(Cal-vin)은 시편 95편을 가리켜 '예배시에 사용된 감사 예배'라고 하였다. 이처럼 중대한 찬양은 그저 입술로 부르는 노래가 아니라 마음과 온 영혼을 다해서 드리는 생활의 예배가 되어야 하는 것이다.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고민과 걱정이 없는 사람은 없다. 그리고 그러한 것들로 인해 방황하며 두려워할 때도 있다. 그러나 참된 성도라면 하나님의 궁극적인 공의를 믿어 그의 통치에 의존하는 삶을 살 수 있어야 한다. 왜냐하면 삶의 과정도 중요하지만 그 과정 속에서 보여지는 궁극적인 하나님의 인정하심이 더 중요한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모든 것을 주님의 통치에 맡겨 버릴 때 기쁨이 넘쳐나는 것이다. 이것은 인간적인 이성이나 경험에 의존하는 것이 아니라 온 우주의 절대 주권자이신 하나님께 모든 것을 맡기는 것을 의미한다.
1. 하나님의 영광과 우상 숭배
우주를 통틀어도 본질적으로 영광스러우신 분은 오직 하나님 한 분이시다. 따라서 우리는 그 분께 영광을 돌려야 할 의무가 있다. 이것은 이미 하나님에 의해서 천명된 것으로 오직 하나님 외에 다른 신을 섬기지 말도록 계약의 제일 조건으로 제시하셨다. 또한 이러한 하나님의 주도적 계약은 역사적으로 증명되었는데, 기나긴 종살이를 청산하고 하나님의 인도 아래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들이 모세가 하나님과 만나고 있는 틈을 이용하여 금송아지를 마들었을 때 하나님은 이를 노여워하셨으며, 즉시로 모든 대적들을 멸절시켰다(출 32장). 하나님은 결코 그의 영광과 찬송을 다른 신 또는 우상에게 빼앗기기를 원치 않으신다(사42:0).

2. 심판의 오른손
신구약에 등장하는 '오른손'은 일반적인 것보다 훨씬 더 상징적인 의미를 갖는다.
오른손은 힘의 손(욥40:14; 시45:4; 눅6:6; 행3:7)이고, 축복과 관계된 손(창48:14; 출29:20; 겔21:22; 마25:33; 계1:16, 17)이다. 특히 '하나님의 오른손'은 더욱 상징적인 의미들을 갖는데, 먼저 하나님은 오른손으로 우주를 창조하셨고(사48:13), 전쟁터에서 곤욕을 치르고 있는 그의 백성들을 구원하셨다(신33:2; 시89:13). 따라서 오른손을 거두심은 더 이상 그의 백성들을 돌보지 않는다는 뜻이요(시74:11; 시77:10; 에2:3), 오른손으로 그의 백성들을 징계하시기도 하였다(사62:8; 에2-4). 특히 시110:1은 '하나님의 오른손'의 규범이 되는 구절이기도하다.
반면 왼손은 정반대의 의미들을 갖는데, 기만이나 살의를 뜻한다(삼하20:9,10).

3. 찬송하는 이유(시96:3-6)
영광과 찬송을 받으시기에 합당하신 하나님께 그의 백성들은 마땅히 찬송하여야 한다. 그러나하나님을 찬송하는 것은 의무뿐만 아니라 찬송할 수 밖에 없는 이유들을 동반한다.
첫째, 구원과 기이한 행적 때문이다. 하나님은 그의 백성들을 사랑하시어 멸망의 자리에서 구원의 긍휼을 베풀어 주셨는데, 이것이야말로 찬송의 가장 커다란 요인이라 할 수 있다.
둘째, 하나님은 관대하신 분이시기 때문이다. 여기서 관대 하시다는 것은 우리의 죄를 사하심은 물론 연약한 우리의 신앙도 인정하시고 분에 넘치는 복을 주심을 뜻한다.
셋째, 그는 하늘을 지으신 위대하신 하나님이신 까닭이다. 그의 지으신 우주 만물은 이성으로는 헤아리지 못할 만큼 기묘한데, 하물며 지으신 하나님은 얼마나 기묘자이겠는가?
넷째, 하나님께는 존귀와 위엄이 그리고 능력과 아름다움이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존귀와 위엄은 이성을 초월하는 것이며, 그분의 능력은 측량을 불허한다.

4. 통치자가 명심해야 할 것
첫째, 다스리는 자는 하나님의 인자와 공의를 사모해야 한다. 양자는 서로 불가분의 관계에 있는데, 양자를 운영할 수 있는 것은 오직 하나님의 능력에 의해서만 가능하다. 따라서 다스리는 자는 하나님의 능력으로 인자와 공의를 겸해야 한다.
둘째, 배도자들의 행위를 배척해야 한다. 변절과 배신은 단체를 위기에 빠뜨린다. 그러므로 통치자는 반드시 배도적 행위를 배척해야 할 것이다.
셋째, 사특한 마음에서 떠나며 악인을 멀리해야한다. 분명 악인은 사특한 말로 통치자를 꾀어서 곧은 것을 굽게 할 것이다. 그러므로 다스리는 자는 반드시 사특한 말과 아울러 그 조성자들을 배척해야 한다.
넷째, 오만과 거짓을 물리치고 충성된 자를 등용시킨다. 성군의 이면에는 언제나 충성스러운 부하가 있는 것처럼 현명한 통치자에게 충성스러운 자는 필수적이다.

5. 찬송의 방법(시103:1,2)
문명의 발달은 음악에 있어서도 전문성을 가져왔고 심지어는 하나님을 찬송하는 부분에서도 더욱 전문화, 다양화를 이룩하였다.
그러나 오랜 시대가 지났음에도 불구하고 다윗이 하나님을 찬송할 때 느꼈던 것과 현재 찬송에 대한 요구는 동일하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을 전심 전력하여 찬송하는 것'이다. 아무리 훌륭한 악기를 동원하고 엄청난 규모를 이루었다 해도 찬송하는 사람이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소극적이기 때문에 힘이 없는 찬송이라면, 이것은 한두 사람이 모여 드리는 열정적이고 전력을 다하는 찬송보다 훨씬 못 미치는 것이 되고 만다.
따라서 가장 올바르게 찬송하는 방법이란 영혼으로 찬송함과 속에 있는 것들로 찬송하는 것이요, 정성껏 그리고 힘껏 하는 것이다.


시편연구 5 제5권 다윗의 시(시107-159편)

시편의 마지막 책인 본 서는 신명기에 그 배경을 두고 있다. 여기에서 사용된 주요 단어들은 '하나님의 말씀'이다. 신명기에서는 애굽에서 구원받은 이스라엘의 상황을 설명하고 있지만 여기서는 바벨론에서 구원받은 이스라엘의 상황을 설명하고 있다. 이 땅에서 인간들이 경배해야 할 대상은 오직 하나님 한 분뿐이시다. 한 분 하나님만을 의지하며 그분의 말씀대로 살아가는 삶이야말로 진정한 그리스도인의 삶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본 연구에서는 피조물인 인간이 하나님만을 경배해야 하며, 계시로 보여 주신 진리의 말씀을 바로 깨닫고, 구원하여 주신은혜에 늘 감사하며 살아가는 삶이 어떠한 것인가를 보여 준다.
1. 경배의 대상인 하나님(시107-118편)
인간들의 삶의 제일목적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인간들 스스로의 삶으로서는 구원받을 수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영광을 나타내시기 위해서 인자하심과 진실하심으로 그 구원을 행하신다(시115:1). 그러나 인간들은 하나님보다는 자신들의 손으로 만든 우상에게 신성을 부여하여 그것들을 의지하려고 한다. 따라서 가장 어리석은 사람은 자신이 만든 우상에게 신성을 부여하는 사람이다(시115:8).
1) 유일한 경배의 대상인 여호와
하나님께는 인생들에게 땅을 주셨다. 그것은 곧 이 땅에서 인간 자신들의 삶을 마음껏 누리며 살 수 있도록 하신 것이다. 이 우주의 주인은 하나님이시다. 시편 기자는 어떠한 일이 있더라도 죽은 우상을 신뢰하지 말고 살아 계신 하나님을 섬기며 의지하라고 한다(시115:9-11). 의지한다는 말에는 하나님께서 성도들의 보호자요, 방패시며, 상급이 되신다는 뜻이 암시되어 있음을 볼 수 있다. 따라서 죽은 우상을 섬기는 어리석은 사람이 되기보다는 여호와를 의지하는 지혜로운 사람이 되어야 할 것이다.
2) 여호와만 의지하라
지혜롭게 되기를 원한다면여호와를 의지해야 한다(시111:10).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과 맺은 언약(창12:1-3)을 이루어 나가시고 계신다. 여호와를 의지하는 자들에게는 축복이 주어진다. 이 축복의 조건은 하나님을 경외하고 섬기는 사람들에게 국한된다. 하나님의 사랑과 인자하심은 지금 이 시간에도 끊임없이 이어지고 있다. 주의 인자하심이 영원하기 때문이다(시118:2-4).
2. 살아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말씀(시119-140편)
성경은 인간들의 삶 전반에 관여한다(딤후3:16). 이 세상의 모든 것을 잃어버렸을지라도 하나님의 말씀만을 가지고 있다면 그 사람의 생활은 풍성하다. 우리는 계시된 말씀 가운데서 하나님을 발견할 수 가 있다. 이처럼 중요한 하나님의 말씀을 시편 기자는 어떻게 묘사하고 있는가? 그리고 인간들의 생활 속에서 그 말씀은 어떠한 영향을 끼치고 있는가?
1) 우리를 깨끗하게 하는 물이요, 생명을 줌
물이 육체를 깨끗게 하듯(요15:3l 엡5:25) 말씀은 속사람을 깨끗게 한다(시119:9-16). 말씀은 꿀이며 등불로(시119:103, 105, 130), 이세상 무엇보다도 가치 있는 것이다(시119: 14 ,72, 162). 하나님의 말씀은 송이꿀(시19:10)보다도 더 달다고 고백한다. 어두워진 인생에 참 인도자가 된다. 또한 성경은 그것을 소유한 삶들에게 참 생명을 주신다(시119:25,37,93).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 있는 말씀(히4:12)이기에 좌절하고 실의에 빠졌을 때 참 생명과 삶의 방향을 제시해준다(시119:133).
2) 말씀에 비추인 우리 삶의 모습
본 서에서 말씀을 묵상하는 시편 기자의 모습을 볼 수 있다(시119:148). 묵상한다는 것은 '몸과 마음에 하나님의 말씀을 펼친다'라는 뜻을 내포하고 있다. 즉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며 신뢰하고 묵상함으로써 하나님의 뜻을 바로 깨달아야 하며, 또 그것을 실천해야 함을 의미한다. 일상 생활 가운데서 주의 법도대로 살려고 노력하는 시편 기자의 모습은 오늘날 바쁘게 살아가는 현대인들의 표본이라고 할 수 있다.
3. 찬양받으시기에 합당하신 하나님(141-150편)
성도들은 삶 속에서 하나님을 우러러 보아야할 때가 있으며, 때로는 기도를 통하여 하나님을 찾기에 갈급할 때도 있다. 온 우주를 창조하시고 인간들에게 안정과 평화를 주신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피조물인 인간이 해야 할 가장 기본적인 행동은 무엇인가? 그 행동을 하는 데 필요한 것들은 무엇인가? 왜 이러한 방법으로 자신들의 마음을 하나님께 아뢰야 하며, 왜 굳이 사람이 아닌 하나님께 아뢰야 하는가? 시편 기자는 이러한 일련의 질문들에 대해 상세히 답하고 있다.
1) 여호와를 찬양하라
가장 간단히 답할 수 있는 것은 "내 영혼아 여호와를 찬양하라"이다(시146:1). 이 찬양은 시인의 내면 깊숙이 자리잡고 있는 하나님께 대한 감사에서 우러나온 것이다, 찬양은 인간에게 드려질 수 없다. 왜냐하면 인간은 결국에 가서 죽게 되고 (전3:20), 생전에 인간들에게 부여된 권력이나 명예도 죽음과 함께 사라지기 때문이다(눅12:16-21). 따라서 찬양은 영원 무궁하신 우주의 창조주 하나님께 드려져야 함이 마땅하다(시148:1-14). 또한 찬양을 할 때에 모든 종류의 악기를 동원하여 찬양하여야 한다(시150:3-5). 그러나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악기로 하든 그렇지 않든간에 하나님을 찬양하는 그 마음 자세가 중요하다는 것이다.
2) 호흡이 있는 자마다 여호와를 찬양하라
시편 기자는 마지막으로 호흡이 있는 모든 사람들은 여호와를 찬양할 것을 시사한다(시150:6). 보잘 것 없는 인생을 돌보시고(시144:3), 은혜를 주시는 하나님의 그 크신 은혜를 생각하며 찬양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생명이 있는 모든 것들-자연을 포함하여-이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은 의무요 책임이다(시148:1-14).
오늘날 수업이 많이 외쳐지는 하나님의 말씀 속에서 그 말씀대로 살려고 노력하는 사람은 흔하지 않다. 우리의 호흡이 끊어지는 그 날에는 결코 주를 찬양할 수 없게 된다. 따라서 살아 숨쉬는 하나님의 진리 말씀 속에서 평안을 얻으며 구원의 은혜를 맛보며 살고 있다는 것이 얼마나 복된 일인가를 깨닫을 수 있어야 할 것이며, 날마다 하나님을 찬양하며 모든 존귀와 영광을 그분께 돌려야 할 것이다.
1. 은혜의 하나님(시111편)
하나님은 인류의 역사에 구체적으로 간섭하셨으며, 그들에게 은혜를 베푸심으로 영광과 찬송을 받으시기에 지극히 합당하시다. 때문에 시편 기자는 은혜로우신 하나님의 구체적인 사역을 예로 들며 감사하고 있다.
첫째, 과거 이스라엘에 기이한 일을 행하심을 감사드린다. 성경에 기록된 역사들 중 어느 것도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받지 않은 것이 없으니 아버지께서는 친히 그들의 안내자가 되셔서 실패의 수렁에 빠질 수 있는 것을 피하게 해주셨다. 이러한 모든 사건들은 아버지의 은혜와 자비를 알게 하기에 충분하다.
둘째, 과거 광야에서 이스라엘에게 양식을 주셨던 것처럼 하나님은 영원히 언약을 지켜 주신다는 것을 믿고 감사드린다. 또한 과거 이스라엘에게 약속하신 땅을 기업으로 주심으로 모든 백성들에게 신뢰의 근본을 보이셨다. 이처럼 하나님은 불변하시며 신뢰가 한이 없으
신 분으로 은혜의 하나님이시기에 충분하다.
셋째, 그의 백성을 구속하신 것을 통하여 아버지의 구원 계획이 영원함을 알며 그로 인하여 감사드린다.
이상에서 기자는 하나님은 역사 속에서 구체적으로 은혜를 허락하시며 신뢰하고 앙망하는 그의 자녀들에게 큰 복을 주시리라 확신하고 있는 것이다.

2. 말씀의 적극적인 준행자
아버지께서는 그의 사랑하는 자녀들이 무지함으로 죄를 먹고 마시도록 버려두지 않으셨으며, 주신 지혜로 기록되 말씀을 깨달아 자신의 뜻에 복종하도록 의도하셨다.
그렇다면 이처럼 하나님의 말씀을 준행하려면 어떻게 하여야 하는가?
첫째, 스스로 하나님의 말씀을 적극적으로 수용하며 그대로 지키려는 의지가 있어야 한다.
둘째, 성령의 조명과 인도하심이 있어야한다. 자의적 동참이 없으면 그것은 곧 멍에가 되고, 억지가 되며, 멀지않아서 형식에 그칠 우려가 있으므로 무슨 일이든지 자의적 참여는 매우 중요한 태도이다. 그러나 자의적 동참이 있다 하더라도 성령의 인도하심이 없다면 그저 한낱 순간적인 열심에 그칠 우려가 많다. 더욱이 이성을 추월하는 말씀을 위해서는 반드시 성령의 조명이 있어 밝히 깨닫게 하는 역사도 필요한 것이다.
이상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과 연관된 중요한 교훈을 두 가지 발견하게 되는데, 말씀을 위한 인간의 노력과 하나님의 도우심이 그것이다. 이 두 가지 요소가 적절히 조화를 이룰 때 인류는 말씀의 적극적인 준행자가 될 수 있는 것이다.

3. 말씀을 사랑함
하나님의 말씀은 생수의 강 같아서 기쁨의 근원이 되며, 생명의 원동력이 된다. 그러므로 사람은 모름지기 하나남의 말씀을 사랑함으로 주시는 은혜와 기쁨을 한껏 경험해야 할 것이다. 그러면 왜 이처럼 말씀을 사랑해야 할 것인가?
첫째, 말씀은 사람을 지혜롭게 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말씀을 사랑하는 사람은 월등하게 지혜로와 질 수 있다.
둘째, 하나님의 말씀이 송이꿀 보다 더 달기 때문이다. 지혜의 근본이 되는 하나님의 말씀을 제대로 이해하는 자는 성경을 손에서 떼지 않는다. 그것은 말씀의 달고 오묘한 맛을 알기 때문이다. 따라서 주의 성도들은 말씀의 진귀함을 하루 속히 알도록 말씀에 주의하여 탐독해야 하겠다. 이러한 말씀의 진귀함을 시편 기자는 깨달았다. 그리고는 주의 말씀을 지켜 떠나지 않았으며(시119:101, 102), 도리어 모든 거짓 행위를 미워하게 되었다(시119:104).
이상에서 우리는 몇 가지 교훈을 얻게 되는데, 먼저 진실한 성도는 말씀을 사랑하기에 묵상하는 일에 계속해서 열중한다는 것이요, 이론으로만 인식하지 않고 온 인격으로 관계하려고 한다. 그러므로 이러한 본을 받아 우리도 말씀을 사모하는 진실한 성도가 되어야 하겠다.

4. 말씀의 무오성
'주의 말씀은 강령은 진리'(시119:160)이다. 즉 아무런 오류가 없다는 것이다. 말씀의 무오성의 교리는 신앙의 가장 기초가 되는 것으로 반드시 고수되어져야 할 부분인데, 무오성이라 함은 가장 핵심적인 내용들에 오류가 없다는 것이 아니라 모든 진술과 기록이 진리와 전혀 다르지 않다는 것이다. 따라서 말씀의 무오성에 관해 혼돈이 없도록 정확한 이해가 요구된다. 이러한 무오성은 그것을 확증하는 여러 기초들 위에 굳건히 서 있는데, 딤후3:16에서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되었다"라고 기록되어 있으므로 결코 한 구절도 소홀히 여길 수 없음을 시사하고 있다. 그 밖에도 시19:7-9, 시111:7,잠30:5, 눅1:4, 요19-35 등에서 각각 말씀의 무오성을 확증하고 있다. 따라서 모든 사람은 말씀 앞에서 권위를 인정하는 태도와 아울러, 주시는 말씀 속에서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자 하는 겸허한 태도가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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