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복음 개요
▣ 요한복음-개요와 서론-
요한복음 개요
▣ 머리말/1장 1-18절
1. 상고의 시기/1장 19절-6장 71절
“내 때가 아직 이르지 아니하였다“(2:4)
그리스도와 제자들/1장 19절-2장 12절
첫번째 표적을 보이심(2:1-12)
그리스도와 유대인들/2장 13절-3장 36절
그리스도와 사마리아인들/4장 1-54절
두번째 표적을 보이심(4:43-54)
그리스도와 유대 지도자들/5장 1-47절
세번째 표적을 보이심(5:1-9)
그리스도와 군중 /6장 1-71절
네번째, 다섯번째 표적을 보이심
-첫번째 위기-그들이 그리스도와 함께 다니기를 회피함/6장 66-71절
2. 갈등의 시기/7장 1절-12장 50절
“손대는 자가 없으니 이는 그의 때가 이르지 아니하였음이라“(7:30)(유대인들이 그리스도를 어떻게 대적했는지에 주목하라: 7장 1, 19, 23, 30, 32, 44절 /8장 6, 37, 48, 59절 /9장 22, 34절 /10장 20, 31-33, 39절/ 11장 8, 16, 46-57절 /12장 10절)
모세에 대한 논쟁 /7장 1절-8장 11절
아브라함에 대한 논쟁 /8장 12-59절
그리스도의 성자이심에 대한 논쟁 /9장 1절-10장 42절
여섯번째 표적을 보이심(9:1-7)
그의 능력에 대한 논쟁 / 11장 1절-12장 11절
일곱번째 표적을 보이심(11:38-44)-두번째 위기-그들이 주님을 믿으려 하지 않음/ 12장 12-50절
3. 절정의 시기/13장 1절-20장 42절
“예수께서 자기의 때가 이른 것을 아시고“(13:1)
“아버지여 때가 이르렀사오니...“(17:1)
십자가에 대한 준비의 절정/ 13장 1절-17장 26절
유대인들의 불신앙의 절정 / 18장 1절-19장 42절
-세번째 위기-그들이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박음/ 19장 13-22절
제자들의 신앙의 절정 / 10장 1-31절
여덟번째 표적을 보이심(21:1-6)
▣ 맺음말/21장 1-25절"
요한복음 서론
▣ 요한복음 서론
1. 요한복음의 주제
핵심구절(20:30-31)-본 서의 주제는 하나님의 신성한 아들로서의 그리스도이다. 여기서는 그리스도께서 사역하시는 동안 자신의 신성을 증거하는 표적들을 다루고 있다. 이 표적들은 목격자들(제자들)에 의해 목도되었으므로, 진실이며 정당한 것이다. 요한은 본 서를 기록하며, 사람들이 그리스도를 믿고 그의 이름을 통하여 생명을 받기를 원한다.
다른 복음서와의 비교- 첫 세 복음서는 “공관복음“이라고 불리우는데, 이것은 “함께 본다“는 의미의 헬라어에서 온 말이다. 마태, 마가, 누가복음은 각기 다른 강조점을 가지고 유사한 방법으로 그리스도의 생애에 대해서 보여 준다.
-마태복음/ 유대인의 왕으로서의 그리스도
-마가복음/ 종으로서의 그리스도(특히 로마인을 대상으로 기록됨)
-누가복음/ 인간으로서의 그리스도(특히 헬라인을 대상으로 기록됨)
-요한복음/ 하나님의 아들로서의 그리스도(전 세계를 대상으로 기록함)
첫 세 복음서가 그리스도의 생애에 있었던 사건들을 우선적으로 기록한 반면에, 요한복음은 그러한 사건들의 의미를 다루고 있다. 게다가 요한복음은 더 깊이 들어가서, 다른 복음서에서 강조하지 않은 그리스도에 대한 진리들을 제시한다. 예를 들면, 네 복음서가 모두 5,000명을 먹이신 사건에 대해 기록하고 있다. 그런데 요한복음만이 “생명의 떡“에 대한 위대한 설교를 보유하고 있어 이 기적의 의미를 설명해 준다.
핵심 단어-요한복음에는 “생명, 믿음, 빛과 어두움, 진리, 증거, 세상, 영광, 영접, 아버지, 오라, 영원한 영생“이라는 말이 반복되어 씌어져 있음을 유의하자. 이 단어들은 요한복음의 멧세지를 요약하고 있다.
2. 요한복음에 나타난 그리스도
요한복음은 그리스도의 사역 만큼이나 그리스도의 인격을 강조하고 있다. 본서에는 그리스도께서 친히 자신에 대해 말씀하신 내용과 자신의 사역에 대해 설명하신 몇 가지 설교들을 담고 있다. 그리스도께서 “나는...이다“라고 일곱 가지로 말씀하신 데에 유의하자.
-나는 생명의 떡이다/ 6장 35, 41, 48, 51절
-나는 세상의 빛이다/ 8장 12절/9장 5절-나는 양의 문이다/ 10장 7, 9절
-나는 선한 목자이다/ 10장 11, 14절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다/ 11장 25절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14장 6절
-나는 참 포도나무이다/ 15장 1, 5절
물론 이러한 이름들은 그리스도의 신성을 말해 준다. 사실 하나님의 이름이 “나는...이다“로 나타나 있기 때문이다(출 3:14 참조). 이와는 다른 경우, 그리스도께서 자신을 설명하는 데에 “나는...이다“를 사용하신 것 또한 눈여겨 보자(4:26/8:28/8:58/13:19/18:5-6/18:5-8). 이 복음을 읽을 때에, 우리는 그가 참으로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알게 된다.
3. 요한복음에 나타난 표적들
본 서에는 그리스도께서 행하신 많은 기적들 가운데서 그의 신성을 증거하는 일곱 가지의 표적만이 실려 있다(21장에 나오는 여덟번째의 표적은 제자들만을 위한 것으로서, 요한복음의 후주곡을 이룬다). 이 일곱 가지의 표적은 특별한 순서가 주어져 있으며(4:54 / “이것은... 두번째 표적이니라“), 구원에 대한 완전한 상징을 이루고 있다. 첫 세 가지 기적들은 구원이 오는 방법에 대해 보여준다.
물이 포도주가 됨(2:1-11)-말씀에 의한 구원
신하의 아들을 고침(4:46-54)-믿음에 의한 구원
38년 된 병자를 고침(5:1-9)-은혜에 의한 구원
뒷부분의 세 가지 기적들은 신자에게 있어서의 구원의 결과를 보여 준다.
폭풍을 잠잠케 함(6:15-21)-구원은 평화를 가져옴
소경을 고침(9:1-7)-구원은 빛을 가져옴
나사로를 살림(11:38-45)-구원은 생명을 가져옴
네번째의 기적(5,000명을 먹임/ 6:1-14)은 전환점으로서, 그리스도께서는 잃어버린 세상을 구원하시는 기적을 베푸시는 데에 인간의 도구를 사용하신다는 것과, 헌신한 사람은 죄인들에게 생명의 떡을 주어야만 한다는 것을 보여준다.
물론, 각 기적들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을 드러낸다(5:20/5:36). 또한 이러한 표적들은 그리스도께서 설교를 하시게 되는 출발점이 된다. 예를 들면, 니고데모는 그리스도께서 이루신 표적을 보고 그리스도께로 나아왔다(3:2). 그리고 38년된 병자를 고치신 일(5:1-9)도 5장 10-47절에 기록된 설교로 이끌어갔으며, 5,000명을 먹이신 것은 6장에서의 생명의 떡에 대한 설교의 기초가 된다. 고침받은 소경이 파문을 당했던 일은 어느 하나도 결코 내어쫓지 않는 선한 목자에 대한 설교로 이끈다(10장).
4. 요한복음에 나타난 믿음과 불신앙
요한복음의 주제는 믿음과 불신앙 사이의 갈등이다. 본 서는 이스라엘의 일부의 배척으로 시작하여(1:11) 종국에는 십자가에서 정점에 이른다. 본서를 통하여 유대인들이 증거를 받아들이기를 거부하며 불신앙으로 더욱 더 마음이 굳어져가는 것을 알게 된다. 반면에, 제자들과, 신하와 그의 가족, 사마리아인, 38년 된 병자, 소경 등 그리스도를 믿은 소수의 무리들 또한 보게 된다. 이와 똑같은 상황이 오늘날에도 전개되고 있다. 거대한 “종교적인 세계“는 그리스도를 믿지 않지만, 그를 하나님의 아들로서 증거하며 받아들이는 사람들을 곳곳에서 볼 수가 있다.
개요에서도 볼 수 있듯이, 유대인들은 5장의 기적이 있은 후, 그리스도께서 안식일에 사람을 치료하셨다는 것 때문에 그리스도와 논쟁을 벌이기 시작한다. 7장으로부터 12장까지 그러한 갈등은 더욱 심화되어, 그들은 몇 차례나 그리스도를 체포하거나 돌로 치려 하였다. 18-19장에서 그들이 그리스도를 체포하여 십자가에 못박는 때에 그것은 절정에 이른다. 요한복음에는 세 번의 위기가 제시되어 있다(개요 참조).
군중들이 그리스도를 왕으로 삼으려 한 후 그를 떠났을 때 /6장 66-71절
사람들이 그리스도를 믿기를 거절했을 때 / 12장 12-50절
그들이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박았을 때 / 19장 13-22절
첫번째 위기에서 사람들은 그리스도를 왕으로 삼으려 했다가 그를 떠나간다. 두번째 위기에서 그들은 그리스도를 왕으로 칭송했으나 그를 거절하였고, 세번째 위기에서 그들은 “가이사 외에는 우리에게 왕이 없나이다 !“라고 외친다."
요
▣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요한복음 1장-
요한복음의 주제는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시라는 것이며(20:30-31) 1장에서 이 주장을 증명하고 있다. 이 놀라운 장을 읽으면,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시라는 사실을 그의 이름과, 이루신 일들과, 그를 개인적으로 아는 증인들에 의해서 알게 되지 않을 수 없다.
1.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증명하는 그리스도의 이름들
그는 말씀이시다(1:1-3/1:14)-사람의 말이 그의 생각과 마음을 다른 사람에게 보여 주는 것과 같이, 그리스도는 인간에게 하나님의 생각과 마음을 보여주신다. “나를 본 자는 곧 아버지를 본 것이니“(요 14:9). 말은 문자들로 구성되어 지는데,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사랑을 우리에게 나타내는 알파요 오메가(헬라어의 처음과 마지막 글자)이시다.
창세기 1장에서 하나님은 그의 말씀으로 창조하셨는데, 골로새서 1장 16절과 베드로후서 3장 5절은 이 말씀이 곧 그리스도이심을 시사한다. 하나님께서는 자연과 인간의 가르침과 교훈을 통하여 부분적으로 자신을 알리시지만, 자신의 아들을 통하여 완전하게 알리신다(히 1:1-2).
말씀으로서 그리스도는 은혜와 진리를 가져오지만 인간이 그를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이 동일한 말씀은 곧 진노와 심판을 가져온다(계 19:13).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이 기록된 것이지만, 그리스도는 살아 있는, 육신을 입은 하나님의 말씀이다.
그는 빛이시다(1:4-13)-창세기 1장에서의 하나님의 첫번째 창조적 행위는 빛을 만드신 것이었는데, 이는 생명이 빛으로부터 오기 때문이다. 예수께서는 참 빛이시며, 모든 빛이 그 근원으로 하는 원래의 빛이시다. 요한복음에서 우리는 빛(하나님, 영원한 생명)과 어두움(차단, 영원한 죽음)간의 투쟁을 보게 된다. 1장 5절에서 시사하고 있는 바, 직역하면 “빛이 어두움에 비취고(현재시제) 어두움은 빛을 쫓아내지도, 붙잡지도 못하고 있다“고 되어 있다(3:19-21/8:12/12:46 참조). 고린도후서 4장 3-6절은 구원을 죄인의 어두운 마음에 빛이 드는 것으로 묘사한다.
그는 하나님의 아들이시다(1:15-18/1:30-34/1:49)-유대인들로 하여금 그리스도를 핍박하게 만든 것이 바로 이 주장이다(10:30-36). 요한복음에서 그리스도를 하나님의 아들로 부른 사람이 여섯 명이 있다. 즉, 세례(침례)요한과 나다나엘(1:34/1:49), 베드로(6:69), 치유된 소경(9:35-38), 마르다(11:27), 그리고 도마(20:28)이다.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로 믿지 않는 사람은 구원받을 수가 없다(8:24)
그는 그리스도이시다(1:19-28/1:35-42)-이 말은 메시야, 곧 기름부음을 받은 자라는 뜻이다. 유대인들은 메시야가 오기를 기대하였는데, 이 때문에 그들은 요한에게 메시야인가를 물었다. 사마리아인들조차 메시야를 갈망하고 있었다(4:25/4:42). 예수님을 그리스도라고 말하는 유대인들은 누구이거나 간에 회당에서 출회되었다(9:22).
그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시다(1:29/1:35-36)-요한의 선포는 “번제할 어린 양은 어디 있나이까?“라는 이삭의 질문에 대한 답변이다(창 22:8). 출애굽기 12장의 유월절 양과 이사야 53장의 어린 양은 그리스도를 향한 길을 지적하였다. 구약의 어린 양들은 단지 죄를 덮어 가리울 뿐이지만(히 10:1-4) 그리스도는 죄를 담당하셨다. 또한 구약의 어린 양은 이스라엘만을 위한 것이었으나, 그리스도는 온 세상을 위해 죽으셨다.
그는 이스라엘의 왕이시다(1:43-49)-이스라엘은 로마의 통치에 시달렸고 한 왕을 원하였다. 그리스도께서 그들을 먹이셨기 때문에 그들은 주님으로 왕을 삼으려 하였으나(6:15), 그리스도는 떠나셨다. 12장 12-19절에서 그리스도는 자신을 그들의 왕으로 제공하셨으나, 그를 환영하였던 바로 그 군중들이 후에는 “가이사 외에는 우리에게 왕이 없다 !“고 소리쳤다.
그는 인자(인간의 아들)이시다(1:50-51)-이 명칭은 다니엘 7장 13-14절에서 온 것으로서, 모든 유대인들은 그것이 신성을 의미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12장 34절에서의 유대인의 질문에 주목하자). 그리스도는 여기서 창세기 28장 10-17절의 “야곱의 사닥다리“를 언급하신다. 그리스도는 땅과 하늘 사이에 있는 “하나님의 사닥다리“로서, 하나님을 인간에게 계시하시며 인간을 하나님께로 데려가신다."
2.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입증하는 그리스도의 행적
그는 세상을 창조하셨다(1:1-4)-태초에 그는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세상이 그로 말미암아 창조되었던 신성한 대리자였다.
그는 인간을 구원하셨다(1:9-13)-그는 자기 땅에 오셨고, 자기 백성(유대인)에게서 거부당하셨다. 구원은 죄인이 그리스도를 믿어 영접할 때에 받게 되는 값없는 선물이다. “믿는 것“과 “영접하는 것“은 같은 일이다. 그러므로 새로운 탄생은 혈과 육으로, 또는 사람의 뜻대로 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으로 말미암는다.
그는 하나님을 계시하신다(1:15-18)-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은혜와 하나님의 진리를 계시하신다. 모세는 죄와 정죄를 나타내는 율법을 주었으나, 그리스도는 구속의 진리를 계시하셨다.
그는 성령으로 세례(침례)를 주신다(1:33)-우리는 여기에서 성부(1:14/1:18)와 성자와(1:14/1:18), 성령(1:32-34)의 삼위일체를 본다. 성령이 내려왔던 것은 요한에게 그리스도를 확인시키기 위함이었는데, 오늘날도 성령이 눈을 열어 주기까지는 참되게 그리스도를 볼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는 사람들에 대해 정통한 지식을 가지셨다(1:42/1:47-48)-그는 베드로와 나다나엘을 그 자신들이 아는 것보다도 더 잘 알고 계셨다(2:23-25). 오직 하나님만이 인간의 마음을 알 수 있으시다.
그는 죄를 용서하신다(1:29)-이 땅에 사는 그 어느 누구도 인간의 죄를 제거할 수 없다.
그는 하늘로 가는 길을 여신다(1:50-51)-창세기 28장 10-17절에서의 야곱처럼, 죄인들은 집을 떠나 죄의 어두움 속으로 달려 들어갔다. 그러나 그리스도는 우리에게 하늘의 영광을 보이시며 그리로 들어가도록 하늘을 여신다.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는 사다리“이시다."
3.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입증하는 증인들
요한복음에는 종종 “증거“라는 말이 사용되어 있다(1:7-8/1:15/3:26/3:28 /5:31-37/8:18/10:25/15:27/18-23). 이 증인들은 믿을만하다. 왜냐하면 그들은 그리스도와 개인적으로 접촉했던 사람들이며, 그들이 그리스도에 대해 증거함으로써 사람들에게서 무엇을 얻을 수 있는 것도 아니었기 때문이다. 오히려 그 때문에 고난을 받았다. 또한 그들이 거짓말을 하였다는 증거도 없다. 그들의 증거는 오늘날의 어떠한 법정에서도 설 수 있는 것이다.
세례(침례)요한(1:7/1:15/1:29/ 5:35)
사도 요한(1:14/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
구약 선지자들(1:23/1:45)-나다나엘은 빌립이 그를 찾아냈을 때에 모세 오경을 읽고 있었다.성경(1:33-34)
안드레(1:41)-그는 구령자(전도자)였으며, 그 일을 자기의 가정에서부터 시작하였다. 그가 베드로에게 조용히 증거하여 그리스도께로 데려가지 않았더라면, 오순절 사건이 없었을지도 모른다.
빌립(1:45)-빌립은 그의 증거를 하나님의 말씀으로 후원하였는데, 이는 현명한 방법이다.
나다나엘(1:49)-요한과 안드레는 한 설교자, 곧 세례(침례) 요한을 통하여 구원받았는데, 베드로는 안드레의 개인적인 사역으로 그리스도를 발견하였다. 빌립은 그리스도에 의해 개인적으로 부름을 받았으며, 나다나엘은 하나님의 말씀과 빌립의 증언으로 그리스도를 발견했다. 하나님은 사람들을 그리스도께로 이끄는 데에 각기 다른 사람과 각기 다른 환경들을 사용하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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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리스도의 첫기적-요한복음 2장-
어떤 교회들은 그리스도께서 어린아이였을 때 기적들을 행하셨다고 거짓되게 가르친다. 그러나, 요한복음 2장 11절은 물로 포도주가 되게 한 것이 그의 기적들 가운데 최초의 것이었다고 명백히 진술한다. 요한이 그리스도의 신성을 증명하고 사람들이 그를 밀어 구원받게 하기 위해 이 표적들을 기록했다는 것을 명심하자(요 20:30-31).
우리는 이 첫기적의 세 가지 면을 연구함으로 경륜적 교훈(이스라엘의 실패상)과 교리적 교훈(죄인을 구원하는 방법), 실천적 교훈(그리스도를 섬기는 방법)을 배우게 될 것이다.
경륜적 교훈-이스라엘의 실패
1. 경륜적 교훈-이스라엘의 실패
이스라엘은 그들 자신의 메시야에 대해 무지하였다. “너희 가운데 너희가 알지못하는 한 분이 계시다“라고 요한복음 1장 26절에서 세례(침례)요한은 말하였다.
이 혼인잔치는 이스라엘의 한 상징이다. 포도주가 떨어진 것처럼 그들의 공급은 비어 있었으나 그들의 메시야는 그들을 돕기 위해 그 곳에 계셨다. 여섯 개의 돌항아리는 결례를 위해 사용되었다(막 7:3). 그러나 그 유대 의식이 도울 수는 없었다. 나라는 영적으로 파산되어 기쁨도 희망도 없었다(포도주는 성경에서 기쁨의 상징이다/ 시 104:15/삿 7:13). 그들은 외적 의식을 가지고 있었으나 내적으로 만족시킬 것이 전혀 없었다.
그리스도께서는 그들이 그를 왕으로 받아들일 어느 날 이스라엘에게 다시 기쁨을 가져오실 것이다. 잔치가 “세째 날“에(2:1) 있었던 것을 주목하자. 역사는 이제 “이틀 동안“을 흘러 왔다(하나님께는 천 년이 하루와 같다/ 벧후 3:8). 그리고 그리스도께서는 “세째 날“이 밝아올 때 되돌아 오실 것이다. 이스라엘은 다시 자기의 하나님과 결혼하게 될 것이고(사 54장/ 호 2:1-), 기쁨의 포도주가 값없이 넘칠 것이며 그리스도의 영광이 나타날 것이다(요 2:11).
그 날이 오기까지 그리스도는 이스라엘에게 “나와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요 2:4)라고 물으셔야만 한다. 그 민족이 그를 거절하였으며, 그들은 주님께서 영광과 능력으로 되돌아 오실 날까지 그를 영접하지 않을 것이다."
교리적 교훈들-죄인이 구원받는 방 방법
앞의 요한복음 서론을 참조하면 일곱 가지 표적들이 죄인이 구원받는 법과, 그 결과가 그의 일생에 어떠한가를 보여 주고 있음을 알게 될 것이다. 이 첫기적은 우리에게 구원이 하나님의 말씀을 통하여 온다는 것을 가르친다. 상징들에 사용된 것들을 눈여겨 보자.
목마른 사람들 - 이것은 오늘날 잃어버린 세상의 모습이 아닌가? 그들은 죄로부터 오는 쾌락을 즐거워하고 있다. 그러나, 그들은 만족하지 못하며 쾌락들은 마침내 다 비워지게 된다. 성경은 목마른 죄인들이 구원과 만족을 얻기 위해 그리스도께로 오도록 초청한다(요 4:13-14/요 7:37/사 55:1/계 22:17).
빈 항아리 - 돌같이 굳으며 비어 있는 인간의 마음을 상징한다. 하나님의 말씀은 인간을 토기에 비유하신다(고후 4:7/딤후 2:20-21). 죄인의 생활은 외면적으로는 사랑스럽게 보일지 모르지만, 하나님은 그것이 비어 있고 딱딱하며 하나님의 신적인 기적없이는 희망이 없다고 보신다.
물로 채워짐 - 성경에서 깨끗케 하는 물은 하나님의 말씀을 상징한다(엡 5:26/요 15:3). 종들이 해야 할 일이란 빈 항아리에 물을 채우는 것이 전부였다. 그리고 그것은 하나님의 종들이 믿지 않는 자들의 빈 마음을 말씀으로 채우는 것을 말한다. 우리의 일은 영혼을 구원하는 것이 아니라, 말씀을 사람들에게 주어 그리스도께서 구원의 기적을 행하시도록 하는 것이다.
물이 포도주가 됨 - 죄인의 마음이 말씀으로 채워졌을 때 그리스도께서 죄인을 변화시키고 기적을 가져오는 기적을 행하실 수 있다. 사도행전 8장 26-40절에서 빌립은 말씀으로 구스(이디오피아) 내시를 채웠고, 그 사람이 믿었을 때 구원의 기적이 일어났으며, 그 구스인은 기뻐하며 자기의 길을 갔다. 요한복음 1장 17절을 주목하여 보자. 율법은 모세로부터 왔고 구약성경에서 변화되는 최초의 기적 중 하나는 물이 피가 되는 것이었다(출 7:19). 그것은 진노와 심판을 말한다. 그러나, 그리스도는 은혜와 기쁨을 뜻하는 것으로서 물로 포도주를 만드셨다.
세째날 - 이것은 항상 부활을 말한다. 이는 그리스도께서 세째날에 죽은 자들 가운데서 살아나셨기 때문이다. 이 사건은 주일(主日)에 일어났을 것으로 보인다. 요한복음 1장 19절-2장 11절을 주의깊게 읽어 보면 8일간의 일이 적혀 있다. 1장 19- 28절은 첫째날, 29-34절은 둘째날, 35-39절은 세째날, 40-42절은 안드레가 베드로를 그리스도께 인도한 네째날이며, 43-51절은다섯째날이고, 3일 후 또는 여덟째날에 혼인 잔치가 열렸다. 이것은 죽음에서 부활하여, 은혜로 새로운 피조물이 된 것을 말하고 있다(고후 5:17).
기적들의 시작 - 구원은 기적들의 시작이다. 왜냐하면, 사람들이 구원받은 후에야 하나님은 그를 위해 또다른 기적들을 수행하시기 때문이다. 그리고 우리가 체험한 기적들은 그리스도께 영광을 돌리게 된다.
실천적인 교훈들 - 그리스도를 섬기는 방법
3. 실천적인 교훈들 - 그리스도를 섬기는 방법
“너희에게 무슨 말씀을 하시든지 그대로 하라“(2:5)는 마리아의 말은 그리스도를 섬기고자 하는 모든 사람들이 앞세워야만 할 것이다. 종들이 그 항아리에 물을 채우는 것은 분명히 어리석게 보였을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둔한 것들을 사용하셔서 강한 것들을 부끄럽게 하신다(고전 1:27). 만일 우리가 사람들이 구원받기를 원한다면, 우리는 그리스도께 순종하여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주어야만 한다. 영혼을 구원하는 것은 여흥이나 오락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전파하고 가르치는 것이다. 만일 우리가 우리의 몫을 다한다면 그리스도께서 그 나머지의 일을 하실 것이다.
종들은 포도주가 어디서 왔는지 알았지만 그 연회장의 주빈들은 알지 못했다. 사람이 그리스도를 섬길 때 그는 하나님의 비밀을 배운다(암 3:7). 우리는 그리스도의 종들이며 친구이다(요 15:15). 그는 우리에게 그가 하고 계신 일을 알리신다. 성대한 잔치의 주인으로 앉아 있는 것보다는 그리스도의 겸손한 종이 되어 그의 기적들에 참여하는 것이 더 낫다. 우리는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모든 기회를 그리스도를 섬기는 데 사용하여야 한다.
▣ 부가적 사항
예수께서는 2장 4절에서 마리아에게 무례하지 않다. “여자여“는 인사말에서의 존칭어였다.
요한복음에서 그리스도의 “때“를 추적해 보자(2:4/7:30/8:10/12:23/12:27/16:32/17:1).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시간표에 따라 사셨고 누구도 그의 때가 오기 전에 그를 손대지 못했다.
그리스도께서 물로 포도주가 되게 하신 것은 술(알코올)을 사용하는 일을 정당화하지는 않는다. 성경에는 순수한 포도즙으로부터 취하게 하는 독주에 이르기까지 “포도주“에 대한 여러 가지의 말씀들이 있다. 이것들을 구별하기란 늘 쉽지만은 않다.구약과 신약은 둘 다 금주를 높이고 있다. 나실인이 술마시는 것은 금지되어 있었으며, 사무엘과 세례(침례)요한도 그 가운데에 포함된다. 성경은 술마시는 것이 악함을 경고하고 있다. 우리는 적당한 절제가 아니라 전적인 금주를 가르치는 것이 옳다. 왜냐하면 사람을 술꾼으로 만드는 것은 바로 첫번째의 한 잔이기 때문이다."
요 3:1-5
▣ 거듭남(중생)-요한복음 3장-
이 장은 아마도 요한복음에서 가장 중요한 장일 것이다. 왜냐하면 이 장이 거듭남을 주제로서 다루기 때문이다. 종교적인 제도들은 이 문제를 아주 혼란시켰기 때문에 거리의 평범한 사람들은 말할 것도 없고 니고데모 같은 종교 지도자들조차 다시 태어나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상상도 못하고 있었다.
1. 중생의 필요성(3:1-5)
하나님의 나라를 보기 위해서(3절)-니고데모는 도덕적이고 종교적인 사람이었으며, 유대인 가운데 우수한 선생들(관원들) 중의 한 사람이었다. 그러나 그는 아직 거듭남에 대한 진리를 알지 못했다. 오늘날 신학의 “학위“를 가지고 있는 수 많은 “신학교 졸업생“들도 이와 똑같다. 영적 진리는 죄인의 육적인 마음으로 파악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고전 2:10-14).
니고데모는 “밤에“ 왔는데 이것은 구원받지 못한 사람들의 상징이다. 그는 영적으로 어두운 가운데 있었다(엡 4:18/고후 4:3-6). 종교적이고 도덕적인 것으로 사람이 하늘나라에 들어가기에 합당하게 되지는 않는다. 그는 다시 태어나야만 한다. 즉, 위로부터 태어나야만 한다.
오늘날의 많은 사람들처럼 니고데모는 영적인 것과 육적인 것을 혼동하고 있었다(4절). 그는 육적인 탄생의 개념으로 생각한 반면에, 그리스도는 영적인 탄생에 대해 말씀하셨다. 사람들은 우리 모두가 합당치 못하게 태어났다는 것을 알 필요가 있다. “첫번째 태어남“은 우리를 아담의 후손으로서, 우리가 진노의 자녀이며 불순종의 자녀인 것을 의미한다(엡 2:1-3). 어떤 정도의 교육이나 깨끗케 함이나, 훈련이나 종교적인 활동도 우리가 가진 옛 성품을 변화시킬 수 없다. 우리는 우리가 하나님 나라를 보거나 들어갈 수 있기 전에 하나님으로부터 새로운 성품을 받아야 한다.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기 위하여(5절)-예수께서 말씀하신 “하나님의 나라“는 지상 왕국을 의미하지 않는다. 바울은 로마서 14장 17절에서 이 나라를 묘사하고 있다. “하나님의 나라는 먹는 것과 마시는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안에서 의와 평강과 희락이라.“ 사람이 다시 태어날 때 그는 즉시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간다. 그리고 어느 날 낙원에 들어갈 것이며 영원한 나라에서 분깃을 나눌 것이다.
니고데모는 그의 동료들처럼 유대인으로 태어난 것과 율법대로 산 것이 하나님을 만족하게 해드린 것으로 생각했다(마 3:7-12/요 8:33-39). 창세기 3장에서 아담이 범죄한 이래, 많은 사람은 낙원 밖에서 태어났다. 우리는 오직 거듭남으로써만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다."
요 3:6-13
2. 중생의 특성(3:6-13)
영적인 탄생(6-7절)-육신으로부터 태어나는 것은 옛 성품으로 정죄된 것이다. 영으로부터 태어나는 것은 새 성품이며(벧후 1:4), 영원한 것이다. 육체적인 수단들로써는 영적인 탄생을 얻을 수 없다.
5절에서의 “물로 태어남“은 문자적인 뜻으로의 물을 의미하지 않는다. 이는 세례(침례)가 물이라는 하나의 물질이 육체에 적용되는 것이므로 결코 영적 탄생을 가져오지 못하기 때문이다(요 1:11-13/요 6:63 참조). “물로 태어나는 것“은 결코 물세례(침례)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여기에는 몇 가지 근거가 있다.
-성경에서 “세례“(침례)란 탄생이 아니라 죽음을 뜻한다(롬 6:1-).
-구약에서는 어느 누구도 구원받을 수가 없게 된다. 구약 시대에는 세례(침례)의식이 없었기 때문이다.
-구원은 행위로 말미암는 것이 아닌데(엡 2:8-10), 세례(침례)는 인간적인 행위이다.
-그리스도는 구원하러 오셨기 때문에 세례(침례)를 주지 않으셨다(요 4:2).
중생은 다만 영적인 수단으로 이루어진다. 영적인 수단이란 곧 하나님의 성령(요 3:6/6:63)과 하나님의 말씀(벧전 1:23/약 1:18)이다. 5절에서의 “물“은 하나님의 말씀을 나타낸다(엡 5:26/딛 3:5- “중생의 씻음“). 사람은 믿음을 산출하기 위해 하나님의 성령께서 하나님의 말씀을 사용할 때 거듭나며, 그 사람이 믿을 때에 새 성품이 부여된다. 성령께서는 말씀을 주시기 위해서 신자들을 사용하지만, 오직 성령만이 생명을 주실 수 있다(고전 4:15).
신비로운 탄생(8-10절)-어떤 사람도 바람을 설명할 수 없으며 어느 누구도 성령의 일을 설명할 수 없다. 성령은 여기서 바람에 비유된다(행 2장). 니고데모가 구약의 가르침을 받았다면 성령의 새롭게 하시는 일의 진리를 알았을 것이다. 에스겔 37장에서 바람은 이스라엘의 마른 뼈들에게 생명을 준다. 우리가 중생에 대해 모든 것을 설명할 수 없다는 사실이 그것이 참되지 않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그리스도는 이것을 다음에서 다루신다.
참된 탄생(11-13절)-많은 것이 신비롭지만 그러나 여전히 참되다. 예수께서는 니고데모에게 거듭남은 학설이 아니라 실제라고 확언하신다. 만일 사람이 그리스도의 말씀을 다만 믿고 그를 영접한다면 그는 중생이 얼마나 참되며 놀라운 것인지 발견하게 될 것이다."
요 3:14-21
3. 중생의 토대(3:14-21)
그리스도께서 죽으셔야만 했다(14-17절)-그리스도는 다시 니고데모에게 구약을 참조하여 민수기 21장의 놋뱀 이야기를 언급하셨다. 그 뱀은 유대인을 죽이고 있었다. 그 문제의 기이한 해결은 모세가 놋뱀을 만드는 것이었다. 믿음으로 놋뱀을 바라본즉 치료가 되었다. 이처럼 그리스도는 우리를 위해서 죄가 되셨다. 왜냐하면 우리를 죽이고 있는 것은 바로 죄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믿음으로 그리스도를 보자마자 구원받았다.
놋뱀은 심판에 대해 말한다. 그리고 그리스도께서 십자가 위에 들리셨을 때 우리의 심판을 경험하셨다. 그리스도는 사람이 다시 태어나기 전에 죽으셔야만 했다. 그의 죽음은 생명을 가져온다.
죄인은 그를 믿어야만 한다(18-21절)-그리스도를 믿는 것이 유일한 구원의 수단이다. 하나님께서 민수기 21장에서 모세에게 명하신 것은 그가 뱀을 죽이고 상처에 고약을 바르거나 유대인을 보호하라는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모세가 뱀을 들어 올리고, 사람들에게 믿음으로 바라보라고 말하는 것이었다. 보지 않는 것이 정죄를 의미하나, 믿음은 구원을 의미한다.
요한복음 1장 4-13절의 빛과 생명, 어두움과 죽음의 상징을 여기서 다시 회고해 보자. 죄인들은 어두움 가운데서 살 뿐만 아니라 어두움을 사랑하기 때문에, 그들의 죄가 드러나고 용서될 그 빛으로 오기를 거절한다.
요 3:22-26
4. 중생에 대한 갈등(3:22-26)
가장 좋은 번역판들은 25절을 “요한의 제자들과 한 유대인 사이에 의식적인 결례에 대한 논의가 일어났다“고 번역한다. 우리는 이 유대인이 니고데모였을 것이며 여전히 진리를 추구하고 있었다고 믿는다. 오늘날의 많은 사람들처럼 니고데모는 세례(침례)와 종교의식에 대해 혼돈되어 있었다. 아마도 그는 물로 태어남이 세례(침례) 또는 유대의 결례의식이라고 생각했다. 세례(침례)요한이 유대인을 그리스도에게 인도한 방법을 눈여겨보자. 만일 세례(침례)가 구원에 필요하다면 이 부분이야말로 성경이 그렇게 말할 장소이다. 그러나, 아무 말도 없다! 그 대신, 믿는 것에 강조를 두고 있다(36절).
니고데모가 어둠으로부터 나와서 마침내 거듭난 그리스도인이 되었다는 것은 명백하다. 여기 요한복음 3장에서 우리는 니고데모가 혼란의 어두움 속에 있는 것을 보지만 7장 45-53절에서는 그가 확신의 새벽녘에 있는 것을 본다. 그는그리스도의 말씀을 공평하게 들어 주려고 한다. 그리고 19장 38-42절에서는 니고데모가 공개적으로 그리스도와 연합된 고백의 대낮에 있는 것을 보게 된다."
요 4:1-42
▣ 다섯 남편과 함께 한 여인-요한복음 4장-
이 장은 사마리아 여인에 대한 그리스도의 사역 부분(4:1-42)과, 귀족을 위해 그리스도께서 기적을 베푸신 부분(1:43-54)으로 구분된다. 어떤 면에서, 두 부분 모두 기적을 내포하고 있는데, 사마리아 여인의 변화는 왕의 신하의 아들을 위한 “먼 거리에서의“ 치료만큼이나 놀라운 것이다.
1. 사마리아 여인에 대한 그리스도의 사역(4:1-42)
사마리아인들은 유대인과 이방인들의 혼혈인이었으므로 유대인들에게서 배척되고 증오받는 대상이었다. 그들은 유대인과 경쟁하느라 그들 자신의 종교 체계를 가지고 있었으며(4:20-24) 메시야가 오실 것을 믿고 있었다(4:25).
예수께서는 “사마리아로 통행하셔야 했는데“(4절), 이는 하나님께서 죄 많은 한 여인을 위하여 그녀가 그리스도를 만나 그에게서 생수를 발견하게 되는 일을 계획하셨기 때문이다. 이 만남에 대한 기록에서 우리는 이 여인이 그리스도를 믿게 되는 각기 다른 단계들을 보게 된다.
“당신은 유대인으로서“(1-9절)-유대의 랍비가 사마리아 여인에게 호의를 요청했다는 것은 그녀를 놀라게 하였다. 그녀는 그리스도에게서 유대인이라는 사실 이상의 것을 전혀 발견하지 못했다. 그처럼, 죄인은 그리스도에 대해 장님이며, 영원한 것보다는 단지 물을 얻으려는 것과 같은 생활에 관한 일에 더 관심을 갖는다.
“당신이 야곱보다 더 크니이까?“(10-15절)-예수께서는 10절에서 그녀의 무지함을 두 가지로 말씀하신다. 즉, 하나님의 선물인 구원과, 그녀의 면전에 있는 구세주에 대한 것이었다. 예수께서는 생수(생명수)를 말씀하셨으나, 그 여인은 문자 그대로의 물로 받아들였다. 죄인은 육적인 것과 영적인 것을 얼마나 잘 혼동하는가 ! 니고데모는 예수님의 말씀을 육적인 탄생으로 생각했었으며(3:4), 제자들조차 후에 예수님의 말씀을 문자적인 떡으로 생각하였다(4:31-34).
예수께서는 그녀에게 세상 것들은 만족을 주지 못함과, 그리스도가 없이는 사람들이 항상 “다시 목마를 것“을 지적하셨다. 누가복음 16장 19-31절은 이 사실을 매우 명확하게 규명한다. 이 생에서 쾌락의 갈증을 느꼈던 부자는 지옥에서조차도 다시 목말라하는 자신을 발견하고 있다 !예수께서는 그 생수가 신자의 속에서 솟아나서 그를 계속적으로 소생시키며 만족시킬 것을 약속하셨는데, 여전히 이 여인은 혼동하면서 그 물을 요청하였다.
“당신은 선지자로소이다 !“(16-24절)-비록 혼동하고는 있었으나 생수에 대해 관심을 나타내었던 그녀는 스스로 자신의 죄에 직면하였다. “가서 네 남편을 데려오라 !“는 그리스도의 명령은 그녀의 양심을 자극시키기 위한 것이었으며, 그녀는 자신의 죄를 직시하였다. 어느 누구도 자신의 죄를 숨기고는 구원받을 수 없다(잠 28:13).
이 여인의 화젯거리가 어떻게 변하는지를 눈여겨 보라. 오늘날의 회심한 죄인처럼, 그들은 종교에 있어서의 차이점에 대해 논하기 시작했다 ! “우리가 어디서 예배하리이까 ?“ “어느 종교가 옳은지요?“ 예수께서는 하나님 아버지를 아는 것이 중요하다는 점과, 이 일은 다만 구원을 통해서만 가능하며, 구원은 유대인으로 말미암는다는 것을 지적하셨다. 이제 그리스도께서는 그녀가 자신의 죄와, 만족을 추구하는 욕망과, 그녀의 종교적 신앙의 공허함(헛됨)을 직면하게 하셨다.
“내가 그(그리스도)로라!“(25-42절)-이제 그리스도의 인격과 그 말씀의 권위에 눈이 뜨인 그녀는 그리스도를 믿고 구원받았다. 그녀는 그 동네의 사람들에게 공적으로 간증을 함으로써 자신의 믿음을 입증하였다. 그들은 그녀의 성격을 알고 있었음이 분명한데, 그들 역시 그리스도를 믿게 되었다. 이 신자들의 마지막 간증을 보자. “이는 그가 참으로 세상의 구주신 줄 앎이니라 !“
이 장에서 제자들에 대해 주목해 보는 것도 흥미있는 일이다. 그들은 영적인 음식보다도 육적인 음식에 더 관심이 있었다. 그리스도는 피곤하셨고(6절) 목말랐으며, 분명히 배고프셨다. 그러나, 육적인 것 이상의 영적인 것들을 두셨다. 제자들은 식품(유익한 것)을 사 온 반면, 그리스도는 영혼(보다 나은 것)을 구하셨다.
사마리아로 올 때에 제자들은 아마도 “여기서는 아무도 구원할 수 없을 겁니다. 이 곳 사람들은 마음이 굳은 사람들이고 유대인들의 적이니까요“라고 말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는 그들에게 추수하도록 무르익은 들을 보라고 말씀하셨다. 그리고 그들에게 뿌린 이들과 거둔 이들 모두가 추수할 밭에서 함께 일해야 함을 상기시키셨다. 자라게 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다(고전 3:5-9). 모든 사람이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서 자신의 적절한 상급을 받게 될 것이다.
영혼 구원자로서의 그리스도의 모범을 주목해 보자. 그리스도께서는 그를 가리우는 개인적인 편견이나 육적인 필요들을 허용하지 않으셨다. 그리스도는 그여인과 우호적인 방법으로 만나셨고, 결정하도록 그녀를 강압하지 않으셨다. 현명하게도, 그리스도는 대화를 이끌어 그녀의 마음에 효과적인 말씀을 하셨다. 또한 그녀에게 구원의 방법에 대해서 개인적이고 애정있게 제시하셨다. 그리스도는 물과 같은 일상적이고 직접적인 것에 대해 말씀하심으로써 그녀의 주의를 사로잡아, 이것으로 영원한 생명에 대한 실례로 사용하셨다(추운 밤중에 그리스도는 니고데모에게 바람에 대해서 말씀하셨다). 그는 죄에 대해 말씀하시기를 피하지 않았고, 그녀의 필요에 직면하게 하셨다.
2. 왕의 신하를 위해 베푸신 그리스도의 기적
이것은 요한복음에 나오는 일곱 가지의 기적 가운데 두번째의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기적들은 사람이 구원받는 방도와 그에 따르는 결과를 묘사하고 있음을 상기하게 될 것이다(요한복음 서론 참조). 첫번째의 두 가지 기적은 갈보리의 가나에서 일어났다. 물이 포도주로 바뀐 것은 구원이 하나님의 말씀으로 말미암는다는 것을 예증하며, 이 장에서 아들을 고치심은 구원이 믿음에 의한 것임을 보여 준다.
그 아들은 가나에서 27km떨어진 가버나움에서 죽어가고 있었다. 그 사람은 그리스도께서 자기와 함께 가시기를 원하였는데, 이는 그가 그리스도께서 거리상 멀리 떨어져 있어도 소년을 치료하실 수 있다는 것을 믿지 못했기 때문이다(11:21 참조). 예수께서는 고와 함께 가지 않으셨으나 그 대신 “가라 네 아들이 살았다“고 말씀하셨다. 그는 그 말씀을 믿었다 !
그가 집으로 돌아가는 데에 서너 시간밖에 걸리지 않았을 터인데 52절의 “어제“라는 말은 그가 가나에서 하루 내내 머물러 있었다는 것을 시사한다. 그 소년은 1시에 치료를 받았는데, 그 다음날에야 아버지는 집에 당도하였다 ! 이것은 그가 그리스도의 말씀을 실제로 믿었음을 나타내는데, 그는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를 보려고 집으로 내달리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받는 길을 보여 준다. “그리스도께서 말씀하셨으니 그대로 이룰 것을 나는 믿는다.“ 그 귀족은 분명히 가나에 머무르면서 어떤 업무를 처리한 후, 그 다음날 집으로 돌아갔다. 그는 “믿음 안에서 기쁨과 평강“을 소유하였다(롬 15:13). 그의 신뢰가 오직 그리스도의 말씀 안에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종들에게서 “당신의 아들이 살았나이다“라는 말을 들었을 때에 놀라지 않았다. 그는 단지 언제 치료되었는가를 그들에게 물었고, 그 시각이 그리스도께서 말씀하셨던 바로 그 때임을 확인하였다. 그 결과, 그의 온 집안이 그리스도를 신뢰하였다.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롬 10:17).예수께서는 42절에서 사람들이 믿지 않는 이유가, 그들이 무엇인가를 보며 표적과 기사들을 경험하기를 원하는 데에 있다고 말씀하신다. 사단도 속이기 위해 표적과 기사를 이룰 수 있음을 기억하자(살후 2:9-10). 만약 당신의 구원이 느낌, 꿈, 환상, 음성 또는 어떤 다른 육적인 증거들에 근거하고 있다면 매우 위험한 바탕 위에 서 있는 것이다. 오직 하나님의 말씀 안에서의 믿음만이 우리에게 영생의 확신을 줄 뿐이다(요일 5:9-13)."
요 5:1-16
▣ 무력한 자의 고백-요한복음 5장-
요한복음의 다른 장들처럼 이 장에는 한 기적과, 기적에 근거한 멧세지가 있다(5:17-47).
1. 기적-구원은 은혜에 의한다(5:1-16)
이 표적은 사람이 구원받는 방도를 보이는 세 가지의 기적을 완성한다. 첫번째(물이 포도주가 됨)는 구원이 말씀으로 말미암음을, 두번째(귀족의 아들을 고치심)는 구원이 믿음에 의한 것임을 보인다. 그리고 이 세번째 기적은 구원이 은혜에 의한 것임을 보여 준다.
이 사람은 가련한 처지에 놓여 있었다. 그는 과거의 죄 때문에 38년간이나 고통을 당해 왔다. 그는 심신이 괴로운 사람들로 둘러싸여 있었는데, 이들 모두는 구원받지 못한 자들의 슬픈 상태를 주는 실례로서, 병자(연약한 자/ 롬 5:6)와, 소경과 절름발이(올바로 걸을 수 없는 자/ 엡 2:1-3), 혈기 마른 자(중풍병), 그리고 기다리는 자(소망 없는 자/ 엡 2:12) 등이다. 만약 그들이 천사가 왔을 때에 물에 들어갈 수만 있다면 고침을 받았을 것이나, 그들에게는 거기까지 갈 힘이 없었다. 오늘날의 죄인들과 얼마나 흡사한 모습인가 ! 만약 하나님의 완전한 법을 지킬 수 있다면 구원받을 수 있을 것이지만, 그렇게 행할 수가 없는 것이다.
하나님의 은혜가 일하는 것을 보라. “베데스다“란 “은혜의 집“이란 뜻이다. 그리고 이것은 한 사람을 위해서 온 것이다. “은혜“란 받을 자격이 없는 사람들에게 주어지는 친절을 의미한다. 예수께서는 병든 많은 무리를 보셨으나, 오직 한 사람을 택하셔서 그를 고쳐 주셨다 ! 그는 결코 다른 사람들보다 더 받을 만하지 못했으나, 하나님은 그를 택하셨다. 이것은 구원의 놀라운 상징이며, 우리가 우리의 장점 때문이 아니라 “그 안에서“ 택함을 받았음을 아는 것은 우리를 겸손케 한다(엡 1:4).
그리스도께서 5장 21절에서 하신 말씀은 여기서 적용되는데, 그는 원하시는 자를 살리신다(생명을 주신다).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를 설명할 수는 없으나(롬 9:14-16), 만약 하나님의 은혜가 없었더라면 어느 누구도 구원받지 못했을 것이다(롬 11:32-36).몇 가지 다른 점들을 살펴보자.
-다섯 행각-성경에서 “다섯“은 은혜를 나타내는 숫자이다.
-양문 곁의 물웅덩이-희생을 나타낸다. 하나님의 어린 양은 하나님의 은혜가 죄인들에게 부어지기 전에 죽어야 했다.
-안식일에 병고치심-이는 율법이 치료와는 무관함을 입증한다. 우리는 율법을 지킴으로 구원받은 것이 아니다. 예수께서는 혼자서 그를 치료하셨는데, 구원은 오직 그리스도만으로 말미암기 때문이다. 그 사람도 “나를 도울 사람이 없다“고 불평했는데, 그를 도울 사람이 열 둘이나 있었다고 해도 그들은 그리스도께서 하신 일을 할 수가 없다. 잃어버린 죄인에게는 도움이 필요한 것이 아니라 고침이 필요하다.
그리스도는 그의 구주일 뿐만 아니라 또한 그의 주님이셨다. 그는 반대에도 불구하고 그리스도의 말씀에 순종했기 때문이다. 그리스도는 우리를 구원하고자 하실 뿐아니라 우리의 삶을 인도하기를 원하신다. 그는 성전으로 갔다. 이는 하나님의 집에서 예배드리는 것이 구원의 확실한 한 증거이기 때문이다(행 3:1-8). 그는 공공연히 그리스도가 그를 고치셨음을 증거하였는데(15절), 입술의 증거는 매우 중요한 것이다(롬 10:9-10).
이 사건은 그리스도를 미워하고 반대하는 것의 시작이었다. 이 갈등은 7-12장에서 더욱 악화되어 결국은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이끌어간다."
요 5:17-47
2. 멧세지-그리스도는 아버지와 동등하시다(5:17-47)
그리스도는 세 가지 면에서 아버지와 동등하시다(5:17-23)-안식일에 병자를 고치신 일은 유대 바리새인들의 율법에 저촉되는 것이었으므로 유대인들은 그리스도를 율법 파기자로 핍박하였다. 그리스도는 멧세지의 첫부분에서, 세 가지 면에서 성부 하나님과 동등하심을 나타낸다.
-사역에 있어서의 동등함(17-21절)-하나님의 안식일의 안식은 창세기 3장에서의 아담과 하와의 범죄함으로 깨뜨려 졌다. 그 때 이후로 하나님은 잃어버린 자들을 찾고 구하시는 작업을 해오셨다. 그리스도는 자신의 일에 대해, 하나님께서 하도록 하신 것이며 하나님을 개인적으로 계시해 보이는 일이라고 말씀하셨다. 그의 사역(기적들)은 죽은 자를 살리는(소생시키는) 기적을 포함하여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이다.
-심판에 있어서의 동등함(22절)-하나님은 모든 심판을 아들에게 위임하셨다. 오직 하나님만이 사람을 죄에 따라 심판하실 수 있으므로, 이것은 성자를 성부와 동등하게 하는 것이다(27절 참조).
-영광에 있어서의 동등함(23절)-죽을 운명에 있는 인간으로서 어느 누구도 감히 하나님만이 받으실 영광을 자기에게로 돌리라고 말할 수는 없다. 그리스도를 멸시하면서도 하나님께 예배 드리기를 주장하는 사람은 거짓말장이이며 속고 있는 것이다.
삼중의 부활(5:24-29)
-오늘날의 죄인들의 부활(24-27절)-이것은 영적인 부활로서(엡 2:1-3), 죄인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믿을 때에 일어난다. 그리스도께서 고치신 그 사람은 실제로 “살아 있는 죽은 자“였다. 그가 말씀을 듣고 믿었을 때에 그에게 새 생명이 주어졌다. 아무도 생명을 다른 사람에게 줄 수가 없다. 그리스도는 그 안에 생명을 가진 분이시며, 그리스도는 “생명“이시므로 다른 사람들에게 생명을 주실 수 있다.
-생명의 부활(28-29상반절)-이것은 장차의 신자들의 부활로서, 데살로니가전서 4장 13-18절과 고린도전서 15장 51-58절에 설명되어 있다. 성경은 “전체적인 심판“을 가르치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로 “전체적인 부활“도 가르치지 않는다. “생명의 부활“은 “첫번째 부활“과 같다(계 20:4-6).
-심판의 부활(29하반절)-이것은 요한계시록 20장 11-15절에 설명되어 있는 것으로서, 하나님께서 새 하늘과 새 땅을 만드시기 이전에 일어난다. 그리스도를 거절한 모든 사람이 심판받을 것인데, 이 심판은 그들이 천국에 들어갈지의 여부를 보이는 것이 아니라(이미 정해져 있으므로) 지옥에서 어떤 형벌을 받게 될지를 보여 주는 것이다.
지옥은 “두번째 사망“으로 불리워지는 것으로서 하나님과의 완전한 분리이다. 그리스도인은 아무도 이 심판을 받게 되지 않는다.
그리스도의 신성에 대한 삼중의 증거(5:30-47)
-세례(침례)요한(30-35절)-그들은 요한의 말에 귀를 기울이고 그의 사역을 즐거워하기조차 했으나, 그와 그의 멧세지를 거절하였다. 1장 15-34절을 다시 읽고 그가 그리스도에 대하여 사람들에게 어떻게 지시하였는지를 보라(3:27-36 참조).
-그리스도의 사역(36절)-니고데모조차도 그리스도의 기적이 그가 하나님께로부터 온 분임을 입증한다는 데에 동의하였다(3:2).
-하나님의 말씀(37-47절)-구약 성경은 아들에 대한 아버지의 증언이다. 유대인들은 성경을 읽었으나, 그들의 눈이 멀어 진리를 보는 데에는 실패하였다. 모세는 그리스도에 대해 기록하였으며 심판대에서 모세는 그들을 기소할 것인데도, 왜 그들은 믿지 않았는가? 그들은 말씀을 거절했고(38절) 오지 않았으며(40절)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았고(42절), 그를 영접하지 않았다(43절). 그들은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영광이 아니라 서로 사람들에게서 영광을 받고(44절) 말씀을 청종하려 하지 않았다(47절)."
요 6:1-21
▣ 생명의 떡-요한복음 6장-
1. 표적들(6:1-21)
첫번째의 세 가지 기적은 말씀과 믿음, 은혜로 말미암는 구원의 방법을 예증한다. 네번째 표적(5,000명을 먹이심)은 잃어버린 사람들을 구원하는데 있어 사람과 하나님 사이의 협력을 예증한다. 그리스도는 떡을 가지사 축사하시고 제자들에게 나눠 주신 후, 제자들은 군중에게 떡을 먹였다. 구원과 모든 은혜가 주님께 속하였지만 주님은 복음의 멧세지를 사람에게 가져다 주기 위해 아직도 인간이라는 기구들을 사용하신다. “전파하는 자가 없으니 어찌 들으리요“(롬 10:14).
아주 실제적인 의미에서, 그리스도는 굶주린 영혼에게 생명의 떡을 먹이는 데 우리의 손이 아닌 어떤 손도 가지고 계시지 않다. 만일 그 작은 아이처럼 우리가 주님께 우리의 모든 것을 드리면 그는 그것을 취하여 쪼개셔서 다른 사람을 축복하는 데에 사용하신다. 요한복음에서의 마지막 세 표적은 구원의 결과를 예증한다.
-폭풍을 잠잠케 하심(6:15-21)-구원은 평안을 가져온다.
-소경을 고치심-구원은 빛을 가져온다.
-나사로를 죽은 자들로부터 일으키심(11:34-46)-구원은 생명을 가져온다.
예수께서는 단지 배를 채우는 데에만 관심이 있는 무리들의 왕이 되려 하지 않으신다(26절). 그리스도는 군중들을 해산시키고, 폭풍이 오고 있음을 잘 아시면서도 제자들을 바다 건너로 보내셨다. 오늘날의 교회와 대단히 유사하다. 우리는 사단의 폭풍에 거스려 애쓰지만, 우리의 주님은 우리를 위하여 산 위에서 기도하시며, 어느 날 평화를 가져오실 것이다. 또한 그리스도께서 배에 오르셨을 때에 배가 기적적으로 목적지에 이른 데에도 주목하자.
구원은 그 마음에 하나님과의 평화(롬 5:1)와 하나님의 평강(빌 4:4-7)을 가져온다."
요 6:22-65
2. 설교(6:22-65)
22-31절에서 우리는 설교에 대한 본을 갖는다. 먹을 것에만 관심있는 그 사람들은 바다 건너편의 가버나움까지 그리스도를 따라와서 회당에 모였다(59절). 그리스도는 그들의 천박한 육적 동기(26-27절)와, 믿음으로 구원받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모르는 그들의 무지를 나타내신다(28-29절). 그리스도는 그들에게 떡을 은혜로써 먹이셨으며, 그들이 해야 할 모든 것은 믿음으로 그것을 받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그리스도는 그들에게 영생을 주시기를 원하셨다. 그러나 그들은 영생을 위해 일해야만 한다고 생각했다.
유대인들은 예수님께 “우리에게 표적을 보이라 !“고 도전하였다. 이들은 모세가 유대인들을 먹이기 위해 하늘로부터 떡(만나)을 가져온 것을 상기시켰는데(출 16장), 예수께서는 이것을 자신의 설교를 위한 기초로 사용하셨다. 이 설교는 세 가지로 분류되는데, 각기 군중들의 반응이 나타난다.
그는 자신의 인격을 나타내신다(생명의 떡/6:32-40)-이것은 그가 바로 하나님의 아들이시라는 대담한 주장이다. 하나님의 생명의 떡은 하늘로부터 오신 한 인격이다(33절). 그리고 그는 생명을 주시되, 모세가 했듯이 유대인에게만 주는 것이 아니라 온 세상에게 주신다. 이 떡을 받는 방법은 와서 취하는 것이다. 이 떡은 오늘날에도 생명을 줄 뿐만 아니라 미래에도 부활의 때에 생명을 준다.
유대인들의 반응에 주목하자(41-42절). 예수께서는 하나님이 곧 자신의 아버지이심(32절)을 말씀하셨으나, 그들은 요셉이 그의 아버지라고 말하였다(42절).
예수 그리스도의 상징적인 모형으로서 구약의 만나를 연구해 보는 것은 흥미로운 일이다.
-만나는 밤에 하늘로부터 왔고, 그리스도께서는 사람이 어두움 가운데 있을 때 하늘로부터 오셨다.
-만나는 이슬 위에 떨어졌다. 그리스도께서는 하나님의 성령으로 태어나셨다.
-만나는 땅에 의해 더럽혀지지 않았다. 그리스도께서는 죄가 없으셨고 죄인들과 구분되었다.
-만나는 작고 둥글고 희었다. 이것은 그리스도의 겸손, 영원, 순결을 말한다.
-만나는 맛이 달았다. 그리스도는 자기를 믿는 자들에게 달콤하시다.
-만나는 취해지고 먹혀야만 한다. 그리스도는 영접되고 소유되어져야 한다.
-만나는 값없는 선물로 왔다. 예수 그리스도는 세상에 대해 값없는 하나님의 선물이시다.
-모든 사람을 위해 충분했다. 그리스도께서는 모든 사람을 위해 충분하시다.
-만일 만나를 줍지 않으면 만나를 밟게 된다. 그리스도를 영접지 않으면 그를 거절하고 그를 밟게 된다(히 10:26-31).
-만나는 광야 음식이었다. 그리스도는 하늘까지 가는 순례길에 있는 우리의 양식이다.그는 구원의 순서를 나타내신다(6:43-52)-잃어버린 죄인은 하나님을 찾지 않는다. 따라서, 구원은 하나님과 함께 시작된다. 하나님은 어떻게 사람들을 그리스도께로 이끄시는가? 그는 말씀을 사용하신다(45절). 데살로니가후서 2장 13-14절을 주의깊게 읽고, 그리스도께서 의미하시는 “사람들을 이끄는 것“의 명백한 설명을 보라.
육적인 떡은 생명을 잠시동안만 유지시킬 뿐이며 사람은 여전히 죽는다. 영적인 떡(그리스도)을 받아들이는 것은 영생을 준다. 그리스도는 51절에서 그가 자신의 몸을 온 세상의 생명을 위해 내어주리라는 것을 분명하게 말씀하셨다. 유대인들은 이에 반발하였다(52절). 사람의 몸을 먹는 것은 유대의 율법에 저촉되는 것이기 때문이었다. 니고데모와 같이 그들은 영적인 것을 육적인 것으로 혼동하였다.
그는 구원의 능력을 나타낸다(6:53-65)-예수께서는 그의 살을 “먹는 것“으로, 그의 피를 “마시는 것“으로 의미하셨는가? 예수께서 문자적으로 말씀하신 것이 아니다! “살리는 것은 영이다“(63절). “내가 너희에게 이른 말이 영이요 생명이라“ 다른 말로 하자면, 사람이 그리스도의 살을 먹고 그의 피를 마신다는 것은 성령에 의해 가르침을 받은 것으로서 그 말씀을 받아들임이 곧 그리스도를 먹으며 그를 받아들이는 것이다.
그리스도는 성찬에서의 떡과 잔에 대해서나, 또는 로마 카톨릭의 미사에 대해 말씀하신 것이 아니다. 성찬은 단지 예수께서 그것을 기념하라고 말씀하셔서 설치된 것에 지나지 않는다. 그것은 생명을 주지 않는다. 사람이 떡을 먹고 포도주를 마심으로써 영생을 얻었다고 말하는 것은 “육체는 결코 유익이 없다“는 하나님의 말씀을 부인하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살아 있는 말씀이시며(1:1-4), 우리를 위해 “육체가 되신“ 분이시다(1:14). 성경은 기록된 말씀이다. 성경이 예수님에 대해 말씀하시는 것은 또한 그 자신에 대해 말씀하시는 것이다. 둘 다 거룩하고(눅 1:35/딤후 3:15), 진리이며(요 14:6/17:17), 둘 다 빛이며(요 8:12/시 119:105), 생명을 주고(요 5:21/시 119:93), 거듭나게 한다(요일 5:18 /벧전 1:23). 둘 다 영원하며(계 4:10/벧전 1:23) 하나님의 능력이다(고전 1:24 /롬1:16).
결론은 분명하다. 사람이 그 마음에 말씀을 받아들일 때에 곧 예수 그리스도를 받아들이는 것이다. 우리가 말씀을 취함으로써 “그의 살을 먹게 된다“. 예수께서는 51절에서 “나는 산 떡이라“고 하셨으며, 마태복음 4장 4절에서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으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베드로는 설교의 의미를 파악하여, 68절에서 “영생의 말씀이 계시매 우리가 어디로 가리이까 ?“라고 말했다.
사람들의 반응에 대해 주목해 보자. 그들은 그 교리에 마음이 상해서(61절) 더이상 그리스도와 함께 하려 하지 않았다. 이것은 요한복음에 나타난 첫 번째의 위기였다(개요 참조)."
요 6:66-71
3. 체질(6:66-71)
그리스도의 인격을 나타내는 하나님의 말씀은 항상 거짓으로부터 참을 분리해낸다. 육체를 위해 떡을 원하였던 군중들은 영혼을 위한 생명의 떡을 거절하였다. 베드로와 열 명의 제자들은 그리스도 안에서 그들의 믿음을 확고히 하였다. 그들의 믿음은 말씀을 들음에서 왔다(롬 10:17). 그러나 유다는 위선자였으며 결국에는 그리스도를 배반하였다.
66절에 있는 “제자들“이란 말은 열 두 사도들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군중들 중에서 “추종자들“을 가리키고 있음에 유의하자."
요 7:1-9
▣ 생명수이신 그리스도-요한복음 7장-
우리는 이제 요한복음의 첫단락인 “상고의 시기“를 마치고, “갈등의 시기“인 두번째 단락으로 접어들었다. 유대인들은 예수님의 표적을 보고, 설교를 들었으나, 이제 그리스도와의 투쟁을 시작한다(7:1/7:19/7:23/7:30/ 7:32/7:44/8:6/8:37/8:48/8:59/9:22/9:34/10:20/10:31-33/10:39/11:8/11:16/11:46-57/12:10 참조).
1. 절기 이전-의혹(7:1-9)
초막절은 일곱째 달(9-10월)의 15일부터 시작하여 8일간 계속된다(레 23:34-44/신 16:13-16/민 29:12-40). 이 절기는 이스라엘이 광야에서 방황할 때에 살았던 장막 시절을 기념하기 위한 것으로, 출애굽기 23장 16절은 이 절기가 또한 추수의 축제(초실절)임을 시사한다. 이것은 유대의 모든 남자가 반드시 참석해야 하는 세 절기 중의 하나였다.
여기서의 그리스도의 “여제들“이란 요셉에 의해 태어난 마리아의 자녀들이다. 누가복음 2장 7절은 그리스도를 마리아의 “한 아들“이라고 부르고 있는데, 이것은 마리아가 다른 자녀들을 낳았음을 시사한다. 마가복음 3장 31-35절과 마태복음 13장 55-56절 또한 이를 지적한다. 이 형제들은 어떤 이들이 마리아의 “완전한 동정녀“를 입증하려 하여 가르치는 대로 주님의 “사촌“이 아니다.
그리스도의 형제들은 비록 사도행전 1장 14절에서 그리스도의 부활 후에 그리스도를 영접하였음을 나타내고는 있으나 그 당시에는 그를 믿지 않았다. 시편 69편 8-9절은 그들의 불신앙을 예언하고 있는데, 아무튼 마리아가 다른 자녀들을 낳았음에 대한 또다른 증거이다.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때에 따라서 사셨다. 구원받지 못한 사람은 자기 뜻대로 오고 갈 수 있지만, 하나님의 자녀는 주께서 인도하시도록 해야 한다. 그리스도의 형제들이 종교적인 절기에 참석하기 위해 그들의 구세주를 뒤에 남겨 두었다는 것은 얼마나 슬픈 일인가 !"
요 7:10-36
2. 절기 도중-논쟁(7:10-36)
5,000명을 먹이신 일과 병자를 고치신 것은(5:1-9/7:23) 군중들의 흥미를 일으켰다. 예수께서 안식일에 병자를 고치셨으므로 유대인들은 그리스도가하나님께로서 온 사람이 아니라고 말했다. 그들은 그리스도를 귀신들렸다고 불렀으며 그를 죽이려고 모의하였지만 아직은 하나님의 정한 때가 아니었다(30절). 유대인들은 다섯 가지의 다른 논제를 놓고 논쟁을 벌였다.
그의 성품(10-13절)-어떤 이들은 그를 “선하다“고 하였고, 다른 이들은 “사기꾼“이라고 했다. 그들은 왜 혼동하고 있는가 ? 이는 그들이 유대의 지도자들을 두려워했기 때문이다. 잠언 29장 25절은 “사람을 두려워함이 올무에 걸리게 한다“고 경고하고 있다. 그리스도의 성품은 흠이 없었으므로 그들이 결국 체포하였을 때에는 그에 대하여 거짓 증인들을 데려와야 했다. 빌라도와 유다, 로마의 군사조차도 모두 다 그를 무죄하다고 선언하였다.
그의 교리(14-18절)-유대인들은 그리스도의 영적인 지식에 대해 깜짝 놀랐다. 왜냐하면 그리스도는 결코 그들의 “선지학교“를 다니거나 “학교를 졸업한 일“이 없기 때문이다. 교육이란 축복임에는 틀림없지만, 하나님께로부터 개인적으로 가르침을 받는 것은 단지 인간의 사상들을 빌리는 것보다 훨씬 낫다.
그리스도의 교리는 하늘로부터 온 것이나, 인간의 가르침은 인간의 어두운 마음에서 온 것이다. 바울은 “거짓되이 일컫는 지식(과학)“을 경고한다(딤전 6:20/골 2:8-). 17절은 “만일 사람이 나의 뜻을 기꺼이 행하려 한다면... “이라고 읽을 수 있다. 순종하려는 의지는 하나님의 진리를 배우는 비결이다.
그의 사역(19-24절)-그들은 그리스도께서 안식일에 일하신 것을 비난함으로써 그들이 율법 준수자인 체하였으나, 그리스도는 그를 죽이려는 그들의 욕구가 곧 그들이 존중하는 그 율법을 어기는 것임을 보이셨다. 그리스도를 반대하며 그의 말씀을 거절하는 사람들이란 얼마나 모순된가 ! 안식일에 할례를 줄 수는 있으나 안식일에 병을 고칠 수는 없나니 ! 오늘날의 많은 사람들처럼 그들은 진실이 아닌 외모로 얄팍하게 심판하고 있었다.
그의 근원(25-31절)-27절은 42절과 모순되지 않는다. 유대인들은 메시야가 태어나실 곳을 알고 있었으며, 또한 그의 탄생이 신비하고 초자연적일 것도 알았다(사 7:14). 달리 말해서, 그들은 그가 “어디서부터 왔는지“를 알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그 기록은 그리스도께서 처녀인 마리아에게서 탄생하심을 말하였으나, 유대인들은 이를 믿지 않았다.
요한복음 8장 41절은 유대인들이 예수께서 범죄함으로 인하여 태어났다고 비난하고 있음을 시사하는데, 아마도 요셉과 결혼하기 이전의 마리아의 상황이 이들로 하여금 이런 말을 하게 하였을 것이다. 28-29절에서 그리스도는 그가 하나님으로부터 보내심을 받았으며, 그들이 아버지를 안다면 아들도 알 것임을 확언하셨다.그의 경고(32-36절)-그리스도께서 말씀하신 “조금 더“는 약 6개월간 계속되었다. 사람들이 주님을 “찾을 만한 때에“ 찾는 것은 중요한 일이다(사 55:6 참조). 오늘날 그리스도를 거절한 많은 잃어버린 죄인들이 다음 날 그를 찾을 것이지만, 이미 그들 가운데서 떠나신 후일 것이다(잠 1:24-28).
유대인들은 영적 진리에는 무지하였으므로 그리스도께서 유대인들이 나라들 중에 흩어질 것을 말씀하신다고 생각하였다. 그들이 진리에 대해 순종하려 하지 않았으므로 그들은 진리를 알 수가 없었다. 그들은 그리스도께 순복하는 대신 그리스도와 논쟁을 하고, 그들의 영혼을 잃었다."
요 7:37-53
3. 절기의 마지막 날-분리(7:37-53)
절기의 일곱째 날은 가장 큰 날이었다(8일째 날은 장엄한 총회 중의 하나였다/ 레 23:36/민 29:35). 절기의 아침마다 희생이 드려지고 제사장들은 실로암 못에서 금대접으로 물을 길어 성전에 붓도록 운반하였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유대인에게 광야에서 주신 놀라운 물의 공급을 기념하는 것이었다. 이 일곱째 날은 “큰 호산나의 때“로 알려져 있으며, 그 절기의 절정을 이룬다.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고 그리스도께서 외치셨을 때에 어떤 일이 발생했으리라는 것을 알기에는 별로 상상력을 동원할 필요가 없다. 이는 제사장들이 물을 붓는 것과도 같은 것이다. 그리스도는 물을 흘려낸 반석이시다(출 17:1-7/고전 10:4). 그는 생명의 영이 죄인들을 구원하고 만족케 하기 위해 십자가 위에서 침을 당하셨다. 성경에서 정결케 하는 물은 하나님의 말씀을 나타내며(요 13:1-17/15:3) 마시는 물은 하나님의 성령을 상징한다(요 7:37-38).
그리스도의 초청에 귀를 기울이는 대신 사람들은 논쟁하고 다투었으며, 그들간에는 분리가 일어났다. 어떤 이들은 믿었고, 어떤 이들은 거절하였다(마 10:31-35/눅 12:51-52). 병사들은 그의 말씀이 그들의 마음을 압도했기 때문에 체포할 수가 없었다(46절). 유대의 종교지도자들이 그리스도를 거절함으로써 그들을 따르는 다른 이들에게 구원의 문을 닫았다(마 23:13).
니고데모가 이 상황에 다시 들어오는데, 그는 그리스도의 법적인 특권을 옹호하고 있다. 요한복음 3장에서 그는 혼란의 어두움에 있었으나, 여기서는 확신의 여명기를 경험하고 있었다. 그는 그리스도에게 정당한 기회를 드리려 하였다. 말씀에 순종하는 것이 하나님의 진리를 배우는 비결이므로, 이로 인하여 니고데모는 진리를 배우게 되었다(17절).
요한복음 19장에서 니고데모는 고백의 한낮에 있는데, 공개적으로 그 자신을 그리스도와 동일시하고 있다. 어떻게 그는 이러한 결심을 하게 되었는가? 그는말씀을 읽고 연구하기 시작하였다. 그의 관원들은 그에게 “조사해 보라“고 말하였으며, 그는 그렇게 하였다. 하나님의 말씀을 읽고 순종하는 사람은 누구나 어두움에서부터 하나님의 기이한 빛 속으로 이동하게 된다."
요 8:1-20
▣ 생명의 빛과 자유이신 그리스도-요한복음 8장-
이 장은 유대 지도자들과 대립되어 있는 그리스도를 보여 주며, 일련의 중요한 대조점들을 제시한다.
1. 빛과 어두움(8:1-20)
그들은 이 여인을 성전의 보배로운 부분인 여인의 뜰에 계신 예수께로 데려왔다(20절). 그들의 동기는 그리스도를 고소하고 곤경에 빠뜨리려는 것이었다. 만약 그리스도가 그 여인을 놓아주면 모세의 율법을 범할 것이며(레 20:10/신 22:22), 그녀를 돌로 치면 죄를 사하시는 분임을 주장할 수가 없게 된다.
아더 핑크(Arther Pink)는 그리스도께서 땅 위에 두 번 손가락으로 쓰신 것은 율법의 두 돌판과 하나님의 손가락으로 기록하심을 그들에게 상기시키기 위한 행동이었다고 말한다(출 31:18/출 32:15-18/출 34:1). 유대인들이 범죄함으로 인해 모세는 첫판을 깨뜨렸지만, 하나님은 피의 제사를 준비하고 두번째 돌판을 주심으로써 그들의 죄를 용서하셨다. 그리스도는 이 여인의 죄를 대신하여 죽으셨으며, 그녀가 그리스도를 “주여“라고 불렀을 때에 용서할 수 있으셨다.
12절의 위대한 “나는... 이다“는 그리스도의 선언이 이 사건 뒤에 나온다. 하나님은 빛이시므로, 세상의 빛으로서의 그리스도는 하나님이심을 주장하였다(요일 1:5). 어두움은 죽음과 무지와 죄를 말하지만, 빛은 생명과 지식과 거룩함을 말한다. 빛은 죄를 드러낸다(요 3:20). 잃어버린 죄인은 어두움 가운데 살며(엡 2:1-3/4:17-19/5:8), 그리스도를 거절하면 영원한 어두움가운데 지내게 될 것이다(마 25:30). 유대인들은 그리스도께 순복하는 대신 성전에서 그와 더불어 논쟁하였다 !"
요 8:21-30
2. 하늘과 땅(8:21-30)
여기에는 두 가지의 출생이 나오는데, 즉 하나님의 영에 의한 출생인 위로부터의 태어남과, 육에 의한 출생인 아래로부터의 태어남이다. 그리고 두 가지의 죽음의 길이 있는데, 즉 죄인이 그의 죄로 죽는 것과, 신자가 주님 안에서 죽는 것이다(계 14:13).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의 믿음은 차이점들을 만들어낸다.
예수께서는 그들에게 그가 하늘로부터 오셨음을 말씀하셨다. 아버지께서 그를 보내셨고(26절), 그를 가르치셨으며(28절), 그와 함께 계신다(29절). 아버지는 그리스도가 십자가에서 우리를 위해 죄를 지셨을 때에 그 아들을 버리셨다. 28절에서 그리스도는 “들려질 것“에 대해 말씀하시는데, 이는 물론 십자가 형을 의미한다. 그리스도는 이 사실에 대해 3장 14-16절에서 니고데모에게 말씀하셨으며, 12장 32-34절에서도 재차 언급하셨다."
요 8:31-40
3. 자유와 속박(8:31-40)
믿는 유대인들은 그들의 신실함으로 그들의 믿음을 증거하라고 조언을 받았다. 그리스도 안에서의 믿음은 사람으로 하나님의 자녀가 되게 하지만, 말씀에 거하고 진리를 아는 것(살아가는 것)은 제자가 되게 한다. 그리스도는 영적인 자유와 구속을 말씀하신 것으로, 육적인 의미나 또는 정치적인 뜻이 아니었다. 잃어버린 죄인은 육체와 죄, 사단과 세상의 속박을 받고 있다(엡 2:1-3). 그리스도 안의 진리를 받아들임으로써 그는 자유롭게 된다 !
물론, 그리스도의 반대자들은 그들의 육체적인 이점만을 드러내어 “우리는 아브라함의 자손이다“고 말한다. 그들은 세례(침례)요한에게도 똑같은 말을 하였다(마 3:8-9). 예수께서는 여기서 아브라함의 자손을 육적(37절), 영적(39절)으로 주의깊게 구분하신다. 바울은 로마서와 갈라디아서에서 이와 같은 구분을 하고 있다(롬 2:28-29 /4:9-12/9:6/갈 4:22-29).
사람들은 육적인 것과 영적인 것을 혼동하기 때문에 지옥으로 간다. 예수께서는 니고데모에게 영적 탄생에 대해 말씀하셨으나, 그는 육적인 출생에 대해 물었다(요 3:4). 그리스도께서 여인에게 영생의 물(산 물)에 대해 말씀하셨으나, 그녀는 문자적으로 육적인 물로 받아들였다(4:15). 육은 무익하다 !(6:63) 구원은 영적인 경험이며 인간으로서의 탄생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다."
요 8:41-47
4. 하나님의 자녀와 사단의 자녀(8:41-47)
성경에서 “영적인 자녀“의 네 가지 종류에 대해 말하고 있음을 기억하자. 우리는 본래 진노의 자녀로 태어난다(엡 2:3). 우리가 고의적인 죄와 반역의 나이에 이르면 불순종의 자녀가 되며(엡 2:2), 그리스도 안에서 믿음을 갖게 되면 하나님의 자녀가 된다(요 1:12). 그러나, 최종적으로 그리스도를 거절하고 자기 의(義/ 마귀의 대용품)를 더 좋아하는 사람은 마귀의 자녀가 된다.
마귀의 자녀가 거짓된 그리스도인으로 여겨지는 경우도 있다(마 13:24-30/13:36-43 참조). 예수께서는 마귀의 자녀들의 특성에 대해 지적하셨다.
하나님의 말씀이 거할 곳을 주지 않는다(37절).
인간적인 출생, 공로, 의식 등 육적인 일을 신뢰한다(39절).
그리스도를 미워하고 그를 죽이려 한다-사단은 살인자이다(40, 44절).그리스도 또는 그리스도의 일을 사랑하지 않는다(42절).
말씀을 깨닫지 못한다-사단이 그들을 눈멀게 했다(43절).
거짓말장이이며 진리보다 거짓말을 더 좋아한다(44절).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려 하지 않고 말씀을 미워한다(47절).
이 마귀의 자녀들은 부도덕하며 술취하거나 도박꾼들이 아님을 기억하자. 그들은 그리스도를 거절한 자기 의를 지닌 사람들이다 ! 오늘날 참으로 영적이고 성경에 근거한 종교가 아니면서 “기독교“로 간주되는 많은 것들이 마귀의 모조품이다(고후 11:14). 수 많은 사람들이 오늘날 복음의 능력이 없는 “경건한 모습“으로 사단에게 미혹되고 있다."
요 8:48-59
5. 공경과 무시(8:48-59)
하나님은 그 아들을 높이셨으나, 자기 의를 가진 인간들은 그를 무시하였다. 그들은 그리스도를 사마리아인이라 부르고 귀신이 들렸다고 비난함으로, 그를 멸시하였다. 사마리아인이란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그 땅의 찌꺼기였다. 예수께서는 그들에게 아브라함이 그의 날을 보고 즐거워하였다고 말씀하셨다. 어떻게 아브라함이 그리스도의 날을 볼 수가 있는가? 이는 믿음으로써 가능하다(히 11:10-16). 그는 제단 위에 이삭을 드릴 때에 모형으로서의 그리스도를 보았다. 그의 약속된 아들인 이삭이 태어난 그것은 바로 그리스도의 오심에 대한 상징이었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의 믿음과 순종때문에, 그를 친구라 부르시며 그와 많은 비밀을 나누셨다(창 18:16-22).
하나님의 말씀의 밝은 빛이 마음에 비췰 때에 사람들은 그것을 받아들여 구원을 얻든지, 아니면 거절하여 잃어버린 바된다. 이 종교적인 유대인들이 어떻게 그리스도를 미워했으며 그를 죽이려 했었는지를 보라 ! 이것은 실로 그들이 살인자인 사단의 자녀임에 대한 증거이다.
예수께서는 “아브라함이 나기 전부터 내가 있느니라“고 말씀하심으로써 여호와 하나님이심을 주장하셨다(출 3:14). 24절에서도 역시 “너희가 만일 내가 그인줄 믿지 아니하면 너희 죄 가운데서 죽으리라“고 말씀하셨으며, 28절에서는 “너희는 인자를 든 후에(십자가) 내가 그인 줄 알고...“라고 말씀하셨다. 사단의 거짓말은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아들이 아니라는 것이다(요일 2:22/요일 4:1-3). 하나님을 공경하는 동시에 그리스도를 무시하고 거절하기란 불가능하다(5:23).▣ 실제적인 적용
당신은 빛 가운데 행하는가 아니면 죄의 어두움 가운데 있는가?
당신은 육적 탄생에 의존하는가 아니면 하늘로부터 온 탄생을 의지하는가?
당신은 하나님의 자유하는 아들인가 아니면 사단의 노예인가 ?
당신은 마귀의 자녀가 되어 영원히 잃어버리게 될 위험에 처해 있는가?
오늘 당신은 그리스도를 믿고 그가 받으실 영광을 돌리려 하는가?"
요 9:1-7
▣ 소경의 고침-요한복음 9장-
이것은 그리스도의 신성을 증명하기 위해서(요 20:30-31) 요한복음에 기록된 일곱 가지의 기적 중 여섯번째 기적이다. 앞의 세 기적은 사람이 구원얻는 방법, 즉 말씀을 통해서(물이 포도주가 됨), 믿음으로(신하의 아들), 은혜로(병자) 말미암는 것을 보여 주었다.
이제 뒷부분의 세 기적은 구원의 결과로서 평화(폭풍을 잠잠케 함), 빛(소경의 고침), 생명(나사로를 살리심)을 보여 준다. 5,000명을 먹이신 일은 복음이 세상에 주어지는 데에 사람과 그리스도와의 협력이 요구됨을 보여 준다.
1. 치료(9:1-7)
이 사람은 잃어버린 죄인의 상징이다.
-그는 소경이었다(엡 4:14/요 3:3/고후 4:3-6)-니고데모와 같은 지식층일지라도 구원받지 못한 사람은 영적인 것들을 보거나 이해할 수 없다(고전 2:14-16)
-그는 구걸하였다-구원받지 못한 사람은 비록 세상적으로 보기에는 부유한 사람일지라도 하나님 보시기에 빈곤하다. 그는 만족을 위해서 구걸한다.
-그는 무기력했다-그는 스스로 치료할 수 없었으며, 이에 대해서는 다른 사람들도 불가능했다.
이 치료는 그리스도께서 죄인을 구원하시는 방법을 보여 준다.
-은혜 가운데 그에게로 오심-그 날은 안식일이었고 그리스도는 쉬려고 생각하셨으므로 그를 지나치실 수도 있었다(14절). 제자들은 그의 실명의 원인에 대해 논하였으나, 예수께서는 그를 위해 무엇인가를 하셨다.
-그를 자극시키심-진흙이 눈을 자극하였다. 진흙덩이가 어떤 느낌을 갖게했을지 상상해 보라. 그의 눈에 발려진 진흙은 씻으러 가고 싶은 충동을 일으키게 하였다. 말씀을 전하는 것도 그와 같다. 그것은 사람들을 자극하여 그에 대해 무엇인가를 하고 싶도록 만든다(행 2:37)
-그리스도의 능력으로 그를 치료하심-말씀에 순종함으로써 그는 그리스도 안에서의 자신의 믿음을 입증했다. 그리스도는 그에게 안경을 주시거나, 의사에게로 그를 보내거나, 실례를 들어 보이시거나, 또는 안내자를 붙이지 않으셨다. 그리스도는 그를 치료하셨다. 오늘날의 “종교“는 구원을 위해서 사람들에게 대용품들을 주지만, 오직 그리스도만이 죄와 지옥의 어두움으로부터 건질수 있으시다.
-치료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함-모든 참된 회심은 오직 하나님의 영광만을 위한 것이다(엡 1:6)
-그 치료가 다른 사람의 주목을 받음-그외 부모와 이웃들은 그의 삶에서의 변화를 보았다. 이렇듯이 사람이 거듭날 때에는 다른 사람들도 그것을 알게 된다."
요 9:8-34
2. 논쟁(9:8-34)
종교 지도자들은 누구든지 그리스도를 고백하는 자는 회당에서 출회당한다는 것을 알렸다(22절). 물론 이것은 친구들과 가족, 그리고 유대 종교로 인한 모든 이점들을 잃게 됨을 의미했다. 이 선언은 그 부모와 이웃들이 아들의 놀라운 치료에 대해 다루게 되어졌을 때에 변죽만 울리고 회피하게 만들었다.
비록 그 때에는 예수라고 불리우는 이가 실제로 누구인지 충분히 알지 못하였지만, 11절에서의 아들의 단순한 고백은 그리스도를 높였다. 바리새인들은 그리스도를 하나님이 아니라고 말하며(16절) 죄인이라고 함으로써(24절) 그를 공박하였다. 그 아들은 그가 아는 사실을 말하며(25절), 바리새인들이 얼마나 어리석은 생각을 하고 있는지를 보여 주었다(30-33절). 언제든지 단순한 마음을 가진 신자는 잘 교육받은 신학자들보다 영적 진리를 더 잘 안다는 것이 사실이다(시 119:97-104). 결국, 그들은 그를 회당에서 출회시켰다.
그 아들에게 있어서는 변죽을 울리거나 그의 고백을 숨기고 논쟁을 피하기가 더 쉬웠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두려워하지 않고, 자기의 주장을 내세웠다. 그는 그리스도께서 자기의 삶에 어떤 차이를 만들어 내셨는지를 알고 있었으며, 그것을 부인할 수 없었다. 그리스도를 만나고, 그를 믿는 모든 사람은 그 사실을 공개적으로 알리게 된다.
요 9:35-41
3. 그의 고백(9:35-41)
그는 당시에는 깨닫지 못하였으나, 그에게 있어서 가장 안전한 곳은 유대교의 밖에 있는 것이었다. 유대인들은 그를 추방했으나, 그리스도는 그를 영접하셨다. 바울처럼(빌 3:1-10), 그는 “그의 종교“는 잃었으나, 구원을 알았고 하늘나라로 갔다.
이 사람이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에서 어떻게 성장해 가는지를 주의깊게 보자.
예수라 하는 사람(11절)-이것은 그리스도께서 그를 치료하셨을 때에 그가 알고 있던 전부였다.
선지자(17절)-바리새인들이 물어왔을 때에 그는 그리스도를 선지자라고 불렀다.하나님께로서 온 사람(31-33절)-그는 그리스도에 대해 이렇게 결론지었다.
하나님의 아들(35-38절)-이것은 그의 최종적이고 완전한 신앙고백이다.
잠언 4장 18절은 “의인(구원받은 자)의 길은 돋는 햇볕 같아서 점점 빛나서 원만한 광명에 이른다“고 말한다. 이 사람의 “빛“ 가운데서 자라난 것은 이것을 증명한다. 그리스도인은 마음에 빛을 품은 사람이며(고후 4:6) 세상의 빛이다(마 5:14). 그는 빛 가운데서 행하며(요일 1장) 빛의 열매를 맺는다(엡 5:8-9). “주여 내가 믿나이다“는 그의 말은 그의 생애에서의 전환점이었다.
어떤 사람을 인도하는 그 빛이 다른 사람을 눈멀게 한다(39-41절). 바리새인들은 볼 수 있으면서도 그로 인하여 정죄되었다. 이는 그들이 증거를 거절하고 그리스도를 영접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복음은 각기 다른 종류의 마음에 각기 다른 반응을 가져온다. 가난하고 눈먼 죄인은 복음을 받아들이고 보게 되지만, 자기 의를 가진 종교적인 사람은 복음을 거절하고 영적인 소경이 된다. 빛을 거절하는 것은 위험한 일이다.
▣ 요한복음에 나타난 네 종류의 영적인 어두움
심령의 어두움(1:5-9)-빛이 비취었으나, 사람들은 그것을 깨닫지 못한다. 이들은 고린도후서 4장 3-6절이 가르치는 바와 같이 심령적으로 어두운 상태에 있다.
도덕적 어두움-사람들은 어두움 가운데 살고 있을 뿐만 아니라 어두움을 사랑한다. 이것은 고의적으로 하나님께 불순종하면서 매 순간마다 어두움을 사랑하는 인간의 마음의 부패함에 대해 말하는 것이다.
판단력의 어두움(12:35-41)-사람들은 항상 빛을 가지게 되지는 않는다. 빛을 지닌 동안 그들은 믿지만, 그들이 거절하면 하나님은 자신을 숨기시며 어두움이 임하게 된다. 12장 37-41절에는 두려운 결과가 나타나 있다.
-믿지 않음/ 37절 - 그들에게 기회가 있었을 때
-믿을 수 없음 / 39절 - 그들의 마음이 더욱 어두워짐
-믿지못하게 하심/ 40절 - 하나님의 인내가 끝남.
영원한 어두움(12:46)-어두움에 거하는 것은 바깥 어두운 곳, 즉 지옥에 사는 것을 의미한다. “유다가... 나가니... 밤이러라“(13:30). 그가 끝까지 그리스도를 거절하였으므로 그의 영혼은 어두움에 속하게 되었다."
요 10:1-6
▣ 문이신 그리스도-요한복음 10장-
이 장의 전반부(1-21절)는 9장 34절에서 그 사람이 출회당한 후 즉시 일어난 일이지만, 후반부(22-42절)는 두세 달 후의 일이다. 전 장은 목자와 그의 양에 대한 상징으로 묶여져 있다.
1. 예증(10:1-6)
처음 여섯 절은 목자와 양의 관계에 대한 상징이다. 6절은 이것을 “비유“로 부르지만 더 적절한 말은 격언 또는 풍유라 할 수 있다. 예수께서는 사람들에게 단지 목자와 양이 어떻게 행동하는가를 상기시키신다. 그리고 후에 그 적용을 말씀하셨다.
동양의 양우리는 무척 단순하다. 약 3미터높이의 돌담이 둘려져 있고 열려진 틈이 문으로 사용되었다. 마을에 사는 목자들은 해질 무렵에 그들의 양을 우리에 몰아 넣고 문지기에게 지키게 한다. 아침이면 목자들은 자기의 양들을 부르는데, 양들은 목자의 음성을 알아듣고 우리 밖으로 나온다. 문지기(또는 목자)는 입구에서 잠자기 때문에 사실상 “문“이 되는 것이다. 목자를 지나지 않고는 어느 누구도 들어가거나 나갈 수가 없다.
예수께서는 참 목자는 문을 통해 들어오며(1절), 양의 이름을 불러 모으고 양들이 그를 알아들으며(3절), 양을 인도하고 양들이 그를 따른다(4-5절)는 것을 지적하신다. 거짓 목자와 타인들, 즉 도둑이나 강도들은 다른 교묘한 방법으로 들어오려 하며, 양들은 그들을 분별하지도 따르지도 않는다."
요 10:7-21
2. 설명(10:7-21)
문(7-10절)-그리스도는 문이시며, 문으로 양을 “들어오며 나가도록“ 인도하신다. 9장에서의 소경은 그리스도를 믿었기 때문에 이스라엘에게서 추방(출회)되었으나, 그리스도에 의해 새 우리로 들어가게 되었다. 아더 핑크(Arther Pink)는 이 장에 실제로 세 가지의 문이 언급되어 있다고 지적하는데, 충분한 설명을 얻으려면 이 것들을 구분해야 한다.
-양 우리로 들어가는 문(1절)-여기서 양 우리는 천국이 아니라 이스라엘민족이다. 그리스도는 지시되어 있는 성경적인 길을 통해 이스라엘에 오셨으며, 문지기인 세례(침례)요한은 그를 위해 문을 열었다.
-양의 문(7절)-이것은 현재의 그들의 우리 밖으로, 이 경우 유대교의 밖으로 사람들을 인도하는 문이다. 그리스도는 무리들을 위하여 구 종교 체제를 떠나 새로운 생명을 발견하도록 길을 여셨다.
-구원의 문(9절)-양들은 들어가고 나가는 데에 이 문을 사용한다. 그것은 자유에 대해 말한다. 그들은 영생을 얻게 되며 하나님의 말씀의 꼴을 즐긴다. 사단은 자기의 거짓 교사들(도적이나 강도들)을 통하여 양들을 훔치고 죽이며 파멸시키기를 원하지만, 그리스도는 풍성한 생명을 주시며 양들을 돌보신다.
목자(11-15절)-여기에는 양에 대해서는 관심도 없는 삯군 목자인 바리새인과 선한 목자이신 그리스도 간의 대조가 나온다. 그들은 원수가 올 때에 도망치며 자신만을 보호하지만, 그리스도는 양을 위해 자기의 목숨을 기꺼이 포기하신다(행 20:29). 선한 목자이신 그리스도는 십자가에서 자기의 생명을 주셨다(시 22편). 큰 목자로서 그는 양을 돌보시며(히 13:20 /시 23편), 목자장으로서 그의 양을 위하여 영광 중에 다시 오실 것이다(시 24편/ 벧전 5:4). 18절에서 그리스도는 자신의 죽음과 부활에 대해 말씀하신다.
한 무리(16-21절)-“다른 양들“이란 유대인의 우리에 속하지 않은 이방인들이다. 그리스도는 그들을 데려와야만 하시며, 그의 목소리, 즉 말씀으로 그 일을 하신다. 이것은 우리를 사도행전 10장에서 베드로가 이방인들에게로 가서 그들을 구원받게 하는 데에서 본다. 16절은 “그리고 한 무리(참 교회)가 되어 한 목자(그리스도)와 함께 있을 것이라“고 읽을 수 있다. 교회는 유대인과 이방인들로 구성되었고, 한 몸과 한 떼, 그리고 한 공통적인 영적 생명이 있다(엡 4:1-5).
그리스도는 양을 위해 죽는 선한 목자이시다. 구약에서는 양이 목자를 위해 죽었다는 사실을 기억하자. 그리스도는 그의 말씀으로 부르시며, 믿는 이들을 그 문을 통하여 그들의 종교 집단에서 나와 그리스도의 참된 떼 곧 교회로 들어가게 하신다."
요 10:22-42
3. 적용(10:22-42)
두세 달 후에도 유대인들은 여전히 그리스도께서 말씀하신 데에 대하여 논쟁하였다. 그리스도는 그들이 “그의 양“이 아니므로 믿을 수 없다고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여기서 그리스도는 그의 양인 참된 그리스도인에 대해 아름답게 묘사하신다.
그들은 그리스도의 목소리를 듣는다-이 말은 그들이 그리스도의 말씀을 듣고 그에 대해 반응한다는 뜻이다. 구원받지 못한 자는 성경에 대해 무관심하나, 참된 양은 그의 말씀으로 산다.그들은 그리스도를 알며 또한 그리스도도 그들을 아신다(14, 27절)-따라서, 그들은 거짓 목자를 따르지 않는다. 한 종교 체계에서 다른 데로, 그리고 다른 이단 신앙으로 달려가는 교회 회원들은 그들이 참된 양이 아님을 증명하고 있다.
그들은 그리스도를 따른다-이것은 순종에 대해 말하는 것이다. 어느 누구도 고집과 저항, 노골적인 불순종, 또한 순종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하려 하지 않으면서 그리스도의 양이라고 주장할 수는 없다. 거짓 목자들이 있듯이 “양“으로 간주되려는 “염소“들이 있다. 그러나 어느 날, 그리스도는 그들에게 “내가 너희를 결코 알지 못한다“고 말씀하실 것이다(마 7:23).
그들은 영생을 가졌으며 안전하다-28, 29절은 참된 신자들이 그리스도 안에서 갖는 놀라운 안전에 대해 나타낸다. 우리는 “죄를 짓지 않는 한“ 생명을 갖는 것이 아니라 영원한 생명을 가진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양으로서, 영원한 보호에 대한 이중의 확신으로서 그리스도와 하나님의 손 안에 있다. 우리는 아들에게 주신 하나님의 선물이며, 하나님은 그 선물을 다시 빼앗지 않으신다.
양은 그리스도인에 대한 완전한 상징이다. 성경에서 양은 정한 동물이며, 그리스도인은 그들의 죄로부터 깨끗함을 받았다. 양떼는 함께 모여 있는데, 참된 신자들도 그와 같다. 양들은 순전한데, 그리스도인들 역시 그러해야 한다. 양들은 배회하는데, 우리 또한 그러하다. 양들에게 목자의 보호와 안내와 꼴이 필요하듯이, 우리도 영적인 보호와 매일의 인도와 영적 양식을 위해 그리스도가 필요하다. 양들이 유용하고 생산적이듯 참 그리스도인도 그러하다. 마지막으로, 양들은 희생제물로 사용되는데, 그리스도인들은 그리스도를 위해서 자신들을 기꺼이 포기해야 한다.
유대인들은 그리스도를 죽이려 함으로써 그들의 불신앙을 드러내었다. 그리스도는 시편 82편 6절을 인용하셔서 구약성경으로부터 그들을 논파하셨다. 만약 여호와께서 이 세상의 재판관들을 “신들“이라고 부르셨다면 그리스도께서 자신을 하나님의 아들로 부를 수 있음은 분명한 사실이다.
그리스도께서 그 장면을 떠나심으로써, 불필요한 위험 속에 자신을 내놓지 않으셨음을 주의하자. 많은 사람들이 그리스도께로 모여들어 그리스도를 신뢰하였다. 그들은 유대 종교의 무리를 빠져 나와 그 문을 통하여 믿음으로 들어섰으며, 오직 그리스도만이 주실 수 있는 자유와 영생으로 들어갔다."
요 1
▣ 생명을 주는 분이신 그리스도-요한복음 11장-
이것은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시기 이전 요한이 기록한 기적들 중의 일곱번째의 것으로서, 구원의 계획을 보여 준다. 여기서 우리는 구원이 죽음으로부터 부활하여 생명을 얻는 것으로 묘사되어 있음을 본다. 요한복음이 생명에 대해 얼마나 많이 말하고 있는지를 성구사전을 사용해서 알아보라. 나사로는 일곱 가지면에 있어서 잃어버린 죄인의 구원을 상징하고 있다.
그는 죽었다 1. 그는 죽었다
구원받지 못한 사람은 병들어 있는 것이 아니라 영적으로 죽어 있는 상태이다(엡 2:1-3/골 2:13). 사람이 육체적으로 죽을 때에 육체적인 것들, 즉 음식이나 기온, 고통 등에 반응하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로, 영적으로 죽으면 영적인 것들에 대해 반응하지 않는다. 그는 하나님과 성경, 그리스도인, 교회 등에 대해 관심이 없다. 하나님께서는 아담에게 불순종이 죽음을 가져올 것임을 경고하셨는데(창 2:15-17), 이는 영혼이 몸과 분리되는 육체적인 죽음과, 하나님으로부터 영혼이 분리되는 영적인 죽음이다. 요한계시록 20장 14절은 지옥을 두번째 사망, 영원한 죽음이라고 부른다. 실로, 죄인에게는 교육이나 의약품, 도덕성 또는 종교가 필요한 것이 아니라, 생명이 필요하다.
2. 그는 부패하였다
복음서에는 주님의 부활 이외에 세 번의 부활 사건이 기록되어 있는데, 그리스도는 방금 죽은 열 두살된 소녀를 살리셨으며(눅 8:49-56), 죽은 지 몇시간이 지난 청년(눅 7:11-17)과, 무덤에서 4일이나 지난 노인(요 11:1-)을 살리셨다. 여기서 우리는 죄인들의 각기 다른 세 종류의 상징을 보게 된다.
-어린 소녀-아직 공개적으로 부패되지는 않았다.
-청년-외부적으로 부패됨이 보이기 시작한다.
-노인-외부적으로 부패된 것이 분명하게 보인다.
요점은 이들 모두가 죽어 있다는 사실이다 ! 어떤 사람이 다른 사람보다 “더 많이 죽어 있는“ 일이란 있을 수 없다. 다만 차이점은 부패된 정도에 있다. 이것은 오늘날의 죄인들에게도 사실이다. 도덕적인 교회 회원도 나사로처럼 부패되어 있지는 않을지라도 여전히 죽어 있는 것이다."
그는 일으켜져 생명을 받았다
3. 그는 일으켜져 생명을 받았다
누이들의 유대 친구들은 다만 동정하며 눈물을 흘릴 수 있었다. 사람에게 생명을 주는 데에는 그리스도를 요한다. 종교 체계는 결코 생명을 줄 수 없다. 그리스도께서는 그에게 어떻게 생명을 주셨는가? 그는 말씀을 하셨을 뿐이다 ! 이것은 위에 언급된 세 명의 죽은 이들을 살려 내는 데에 사용하신 방법이다(요 5:24/엡 2:1-10).
그리스도께서 나사로를 살리신 이유는 무엇인가 ? 이는 그를 사랑하셨기 때문이며(5, 36절), 또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기 위함이었다(4절). 이것은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구원하시는 이유이기도 하다. 우리는 죽어서 지옥에 가기에 마땅하지만, 그리스도는 그의 크신 사랑으로 우리를 구원하셨다(엡 1:3-14/ 엡 2:1-10).
구원은 규범이 아니라 생명임을 기억하자(요 3:14-21/요 3:36/요 5:24/ 요 10:10/요일 5:10-13). 이 생명은 한 인격으로서 곧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죽은 죄인이 하나님의 아들의 음성을 듣고 믿을 때에 그에게 영원한 생명이 주어진다(요 5:25). 말씀을 거절하는 자는 영원히 죽게 된다.
4. 그는 매임에서 풀려졌다
나사로는 손발을 묶였으므로 스스로는 자유롭게 될 수가 없었다. 신자는 옛 생활의 수의로 묶여 있는 것이 아니라, 새 생활의 자유로움 안에서 행해야 한다. 골로새서 3장 1-15절은 그리스도인이 수의를 벗고 새 생활의 “은혜의 옷“을 입었다고 설명한다. 그리스도인들에게 있어서 옛 생활의 일들을 가지고 다니는 것은 가련한 간증이다."
그는 다른 이들에게 증거했다
5. 그는 다른 이들에게 증거했다
11장 45절, 12장 9-11, 17절에서, 우리는 나사로가 그 지역에 물의를 빚어 놓았음을 보게 된다. 사람들은 그를 보고 그리스도를 믿었다 ! 사실상, 그는 걸어다니는 기적이었는데, 모든 그리스도인이 그렇게 되어야 한다. 종려 주일에 거대한 군중들이 모였던 이유는 예수님 때문만이 아니라 나사로 때문이기도 하였다. 12장 11절에서 우리는 나사로가 다른 이들을 그리스도의 구원의 지식으로 인도하였음을 보게 되는데, 이는 그리스도인의 특권이며 의무이다.는 핍박을 받았다
6. 그는 핍박을 받았다
유대인들은 나사로가 다른 이들에게 그리스도의 신성에 대하여 납득시켰기 때문에 그를 미워하였다(12:10-11). 중심적인 제사장들 중의 다수가 사두개인들이었으며, 그들은 부활을 믿지 않는 사람들이었는데, 나사로는 그들의 어리석은 논의에 있어서 산 대답이었다.
하나님에 의해 그 제사장들이 조정을 받지 않았다면, 그들은 갈보리에 나사로를 위한 특별한 십자가를 세웠을 것이다. 이처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경건하게 살려는 사람들은 박해를 받을 것이다(딤후 3:12). 사단은 항상 살아 있는 기적과 싸운다.
7. 그는 그리스도와 친교하였다
12장 1-2절에서 우리는 나사로가 그리스도와 함께 한 상에 앉아 축연을 즐기고 있음을 본다. 이는 “일으켜져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늘에 함께 앉게된“(엡 2:5-6) 그리스도인이 있을 올바른 장소이다.
그리스도와 함께 시간을 보냄으로써, 나사로는 그리스도의 자비와 사랑에 감사를 보이고 있다. 그는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교훈을 받으며, 그리스도와 함께 동행하면서 증거할 새 힘을 얻었다. 구원의 기적은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을 준다. 그러나, 우리는 영적인 생명 안에서 성장할 수 있도록 그리스도와 매일 교제를 나누어야만 한다.
베다니의 온 가족이 그리스도인의 생활이 어떠해야 함을 보여 주고 있음에 주목하는 일은 흥미있다. 마리아는 늘 예수님의 발치에 앉아서 말씀을 듣고 있다(눅 10:38-42/요 11:32/요 12:3). 그리고 마르다는 봉사의 상징으로서, 항상 그리스도를 위해 바삐 무엇인가를 하고 있다. 나사로는 간증하며 날마다 그리스도께로 다른 사람들을 인도한다. 이 세 가지 실례 곧 예배(마리아), 봉사(마르다), 행함(나사로)은 우리 그리스도인의 경험에 있어야 할 일들이다.
▣ 부가적 연구
이 기적의 또다른 의미는 그리스도께서 그의 교회를 본향으로 데려가시려 돌아오실 날을 예시하는 것이다. 마리아와 마르다는 그리스도 안에서 살아 있는 성도이며 나사로는 잠들어 있는 자들을 상징한다(요 11:11-14/살전 4:13-18). 마리아와 마르다가 그리스도를 맞으러 나오듯, 살아 있는 성도들은 공중에서 그리스도를 만날 것이다. 나사로는 “큰 소리“에 의해 불려졌는데(43절), 그리스도께서 돌아오실 때에도 “외침“이 있을 것이다(살전 4:16). 그리스도께서는 나사로의 죽음에 대해 탄식하셨는데, 오늘날 모든 피조물들은 탄식하며마지막 구속의 날을 기다리고 있다(롬 8:8-25).
그리스도의 오심이 지연되는 것은 오직 우리에게 유익이 되게 함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이다. 그 자매들은 왜 주님께서 나흘씩이나 지체하셨는지를 이해할 수 없었으나, 이사야 30장 18절은 그 대답을 주고 있다.
예수께서 이 때 외에 눈물을 흘리신 다른 두 번의 경우를 눈여겨보라(눅 19:41/히 5:7)."
요 12:1-11
▣ 그리스도의 기름부음-요한복음 12장-
이 장은 풍성한 장이므로 우리는 단지 두드러진 요점들만을 다를 뿐이다. 요한은 십자가에 앞서 그리스도의 공적 사역에 있어서의 마지막 사건들을 기록하고 있다.
1. 그리스도와 그외 친구들(12:1-11)
유대 지도자들이 그리스도를 살해할 음모를 꾸미고 있는 동안, 그리스도의 친구들은 베다니의 잔치에서 그를 영화롭게 하고 있었다. 마가복음 14장 3절은 분명히 예수께서 치료하신 문둥병자 시몬의 집에서의 일임을 말하고 있다.
마르다는 식사를 대접하고 있었는데, 이번에는 전의 식사 때와 같이 화를 내거나 불만스러워하지 않는다(눅 10:38-42). 과거에 그녀는 그리스도와 나사로, 마리아와 자신의 4명 분을 준비했었으나, 여기서는 그리스도와 열 두제자, 나사로, 마리아, 시몬과 자신을 위해 17명 분의 음식을 준비하면서도 불평이 없다. 그녀는 그리스도께서 자신의 생활을 조정하시도록 내어맡기는 비결을 배웠다. 11장에서도 언급하였듯이, 마르다는 그리스도를 위해 봉사하는 일의 상징이며, 마리아는 예배를 상징하고, 나사로는 우리의 행함과 증거에 대해 말해주고 있다.
마리아가 사용한 향유는 보통 노동자의 일 년 품삯에 해당될 수도 있다. 마리아는 그것을 그리스도께 사랑으로 부어드리기 위해서 비축하여 두었다. 사람들에게 그들이 죽기 전에 사랑을 보여 준다는 것은 얼마나 좋은 일인가 ! 그녀는 이 향유를 오라비가 죽었을 때에 사용할 수도 있었으나, 그리스도를 위해 최선의 것을 아껴 두었다.
신자들이 그리스도께 대한 사랑을 보일 때에는 항상 비난의 소리들이 있기 마련이다. 유다의 마음이 바르지 못했으므로 그의 입술은 잘못된 것을 말하였다. 우리의 변호자이신 예수께서 어떻게 마리아를 변호하시는지를 보라(요일 2:1). “만약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하시면 누가 우리를 대적할 것인가?“ 스가랴 3장에서도 역시 우리는 사단이 여호수아를 비방하나 주님께서 그를 옹호하시는 것을 볼 수 있다.
마리아의 헌신에 대한 모범은 우리가 따라야 할 것이다. 그녀는 자기의 최고의 것을 아낌없이, 그리고 비판에도 불구하고 애정을 기울여서 드렸다. 따라서, 그리스도께서는 그녀의 예배로 인하여 그녀를 높이셨으며(막 14:7) 사단의 공격으로부터 그녀를 옹호하셨다.
분명히 유다는 자기 소유의 집을 사려고 금고에서 돈을 훔쳐왔을 것이다. 사도행전 1장 18절의 “밭“은 “소유지, 농장“을 의미하는데, 이것은 유다가 되돌려 준 은 30전으로 제사장들이 매입한 공동묘지와 혼동되어서는 안된다. 유다는 은거하려고 하였다. 그는 세상을 얻고, 자기의 영혼을 잃었다."
요 12:12-36
2. 예수 그리스도와 이방인들(12:12-36)
그리스도께서 탄생하실 때에 동방으로부터 이방인들이 왔었는데, 이제 그가 죽으실 때에도 이방인들이 다시 온다. 이 시점에서 요한이 이방인들에 대해 언급하는 이유는 그 왕이 이제 이스라엘에게서 거절당하셨기 때문이다 ! 유대인들은 “우리에게 표적을 보이라 !“(마 12:38)고 말했으나, 이방인들은 “우리가 예수를 보리라 !“고 말한다.
빌립은 헬라 이름을 가지고 있었으므로 그들은 빌립에게로 왔다. 그리고 빌립은 역시 헬라 이름을 가진 안드레에게로 그 문제를 가지고 갔다(요한복음에서 안드레가 나올 때마다 예수께로 누군가를 데려가고 있는데, 이는 참으로 영혼구원자의 실례이다/ 1:40-42/6:8-9/12:22).
그리스도는 십자가 위에 “들리울 것“을 말씀으로 대답하셨다. 마태복음 10장 5절과 15장 24절에서, 그리스도는 제자들에게 이방인들을 피하라고 가르치셨으나, 이제 이방인들이 십자가를 통하여 구원받게 될 것을 말씀하신다. 그리스도는 열매 맺을 수 있기 전에 죽어야만 하는 밀알이시며, 세상에 구원을 얻을 기회를 주셨다.
그리스도는 “모든 사람“이 자신에게로 이끌어지기 전에 들려져야만 했다. 여기서의 모든 사람이란 “예외가 없다“는 뜻이 아니라, 인종적인 차별이 없이 유대인이나 이방인 모두를 포함한다는 뜻이다. 그리스도는 2장 5절에서 처음 언급하셨던 “때“에 대해 다시 말씀하시며(23, 27절), 이것은 그리스도의 죽음의 때였으나, 그리스도는 그의 영광의 때라고 부르셨다.
그리스도께서 “누구나“ 초대하셨음을 주목하자(26절). 배경이란 십자가 아래서 동일하다. 여기에서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에게 로마인이나 특별한 지위를 갖지 않는다.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며... 의인은 하나도 없다.“"
요 12:37-50
3. 그리스도와 유대인(12:37-50)
그리스도의 공적인 사역의 마지막 말씀들은 구원의 기회를 지나게 하는 데에 대한 두려운 경고이다(35-36절). “예수께서 이 말씀을 하시고 저희를 떠나가서 숨으시니라“는 말씀에 주목하라. 그 다음 구절은 그리스도께서 숨으신이유와 유대인들을 정죄하신 까닭을 말해 주고 있다.
그들은 증거를 거절하였다(37절). 빛이 수 년간 비춰왔으나, 그들은 그 빛을 믿고 따르기를 거절하였다. 그리스도의 말씀을 반복해서 거절하는 데 대한 두려운 결과들을 눈여겨보자. 그들은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보았음에도 불구하고 믿지 않았다(37절). 그들은 믿을 수 없었다(39절). 이는 그들의 마음이 굳어지고 눈이 멀었기 때문이다. 이들은 하나님의 은혜를 일축해 버렸으므로, 하나님은 “그들이 믿지 못하게 하리라“고 말씀하셨다(40절). 이사야 53장 1절은 이들의 불신앙을 예언하였으며, 이사야 6장 10절은 그들의 마음이 완고함을 말하였다. 요한복음 12장 40절은 이사야 6장 10절을 인용하여,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를 거절하기를 고집하는 이들의 눈을 멀게 하시며 마음을 굳게 하심을 말하고 있음에 주목하자. 이 구절은 성경에서 일곱 번 발견되는데, 그 때마다 심판을 선언하고 있다(사 6:10/마 13:14/막 4:12/눅 8:10/요 12:40/행 28:26 /롬 11:8). 이것은 구원받지 못한 자들이 영적인 기회들을 경시할 수 없다는 반복적인 경고이다. “빛이 있을 동안에 빛을 믿으라!“ “주를 찾을 만한 때에 그를 찾으라!“
우리는 앞에서 빛과 어두움 간의 갈등에 대해 주목했었다. 빛은 구원과 거룩함, 생명을 상징하며, 어두움은 정죄와 죄, 죽음을 상징한다. 요한은 어두움의 네 가지 종류에 대해 말하고 있다.
-심령의 어두움(1:5-8/1:26)-구원받지 못한 사람의 마음은 사단으로 인해 소경이 되었으며(고후 4:3-6), 영적 진리를 보지 못한다.
-도덕적 어두움(3:18-21)-구원받지 못한 사람은 죄를 사랑하고 빛을 미워한다.
-판단력의 어두움(12:35-36)-빛에 순종하지 않으면, 하나님은 어두움을 보내셔서 그리스도를 그들에게서 숨기신다.
-영원한 어두움(12:46)-어두움 가운데 거하는 것은 지옥에서 사는 것을 뜻한다.
42-50절에서, 요한은 그리스도의 말씀을 인용하여, 많은 사람들이 빛을 거절하는 이유를 보여 준다. 어떤 이들은 그리스도를 사단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거절하는데(42-43절), 요한계시록 21장 8절은 지옥에 갈 사람들에 대해서, 목록의 서두에 “두려워함“을 기록하고 있다. 48절에서 그리스도는 말씀을 거절하는 것이 정죄로 인도함을 진술하신다. 구원은 말씀을 통해 오며(요 5:25), 심판 때에 바로 그 말씀이 오늘 거절한 사람들의 앞에 펼쳐질 것이다(48절/ 계20:12).
이 장은 그리스도의 공적 사역을 기록함으로 끝맺는다. 이것은 엄숙한 장이다. 이것은 우리에게 영적인 기회를 경솔히 여기지 말 것을 다시 상기시킨다. 빛은 항상 비치지 않을 것이며, 그리스도는 어느 날 그의 구원이나 그의 말씀에 관심을 갖지 않은 사람들로부터 자신을 숨기실 것이다. 잠언 1장 20-33절은 이 점에 대해 읽는 데에 유익한 구절이다.
▣ 12장 32절에 대한 설명
“들려진다“는 것은 “영광을 받는다“는 뜻이 아니라, 오히려 “십자가에 못박힌다“는 의미이다(33절이하). 모든 사람들이 그리스도를 끌어 내리기 때문에 그리스도인들은 좋은 의미로 “목사님이 그리스도를 높이 들도록 도우소서“라고 기도하지만, 그들은 이 말을 잘못 사용하고 있는 것이다. 여기서 말해지고 있는 것은 그리스도의 죽음을 뜻하고 있으며, 어느 목회자도 그리스도를 다시 십자가에 못박기를 원치 않는 것은 확실하다."
요 13
▣ 제자들의 발을 씻기심-요한복음 13장-
본 장을 1장 11-12절, 12장 36절과 대조해 보면, 이제 요한복음의 새로운 부분에 들어섰음을 알게 될 것이다. 그리스도는 “자신의 땅(세상)에 오셨으되 자기의 백성이 그를 거절하였다.“ 이제 그리스도는 이스라엘과 공적 사역으로부터 떠나셔서 개인적으로 “자기의 사람들“, 즉 제자들과 함께 계신다.
13-17장은 제자들에 대한 그리스도의 “다락방 사역“에 대하여 기록하고 있다. 이 기간 동안 그리스도는 자신의 죽으심과, 그 후에 제자들이 해야 할 사역에 대해 준비시키셨다. 13장에서는 모든 그리스도인에게 해당되는 3가지의 중요한 교훈이 담겨져 있다."
겸손에 대한 교훈
1. 겸손에 대한 교훈
발을 씻기신 것은 규례가 아니라 한 모범이었다(15절). 동양에서는 노예들이 방문자의 발을 씻겼다. 그리스도는 여기서 종의 위치에 서신 것이다. 그리스도는 그가 그들의 발을 씻길지라도 그들의 주님이실진대, 그들이 서로의 발을 씻기며 서로 겸손히 대해야 한다는 점을 제자들에게 분명히 하신다(13-16절). 이것은 열 두 제자들에게는 따끔한 꾸지람이었다. 이들은 바로 그 날 저녁에 누가 가장 큰 자인가를 놓고 다투었기 때문이다(눅 22:24-27 참조).
1-5절에서의 그리스도의 행동은 그가 하늘을 떠나 베들레헴에 태어나셨을 때에 하신 일을 상징하고 있다. 그는 그의 보좌에서 일어나셔서, 그의 영광의 외모를 버리고 종이 되어 사람들 앞에 겸손히 자신을 낮추셨다. 빌립보서 2장 5-11절에는 이 단계들이 아름답게 요약되어 있다. 발을 씻기신 후에 그리스도는 옷을 입고 자리에 앉으셨는데(12절), 이것은 그의 부활과 영광으로의 승귀와 아버지의 우편 보좌에 오르심을 상징한다.
베드로는 수 년 후에 베드로전서 5장 5-6절에서 이 겸손에 대한 교훈을 회고해야만 했다(이 구절들을 주의깊게 읽어 보라). 오늘날 너무도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인정받기와 지위를 위해서 쟁론하는데, 이 겸손에 대한 교훈을 회고해야 할 필요가 있다. 하나님은 거만한 자를 물리치시고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주신다.
거룩함에 대한 교훈
2. 거룩함에 대한 교훈
8절에서 베드로에게 하신 그리스도의 말씀은 중요하다. “만약 내가 너를 씻기지 아니하면 네가 나와 상관(교제)이 없느니라“ 성경에서 연합(union)과 교제(communion)에는 차이점이 있다. 베드로는 믿음을 통해서 “그리스도의 사람들“ 중의 하나로 그리스도와 연합(union)되어 있었다. 그러나, 그의 죄는 주님과의 교제(communion)를 파괴하였다.
“아들됨“과 “친교“에는 차이가 있다. 다만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깨끗케 하시도록 내어맡김으로써, 우리는 그리스도와 더불어 친교를 나누며 그의 임재하심과 능력을 누릴 수 있다.
10절에서 그리스도는 “씻음“과 “깨끗함“에 대해 중요한 구분을 짓고 계신다. 직역을 하자면 “온 몸을 한 번 씻은 사람은 발밖에 더 깨끗케 할 필요가 없다“는 뜻이 된다.
동양 지역에서는 사람들이 공중 목욕탕을 사용하는데, 그들이 집으로 돌아갈 때에 흙길을 걸어가므로 발이 더러워진다. 집에 도착하면 그들은 다시 목욕할 필요가 없으나 다만 발만은 씻을 필요가 있다. 이것은 신자에게도 마찬가지이다. 그가 구원받으면 그는 온 몸을 목욕한 것이다(고전 6:9-11/딛 3:5-6). 그가 일상적인 죄들을 주님께 고백할 때에 그는 그의 행함(걸음)이 깨끗하도록 그의 발을 씻는 것이다(요일 1:7-9).
구약의 제사장들이 임명받을 때에 온 몸을 씻는다는 것을 기억하자(출 29:4). 이것은 우리가 온 몸을 씻는 것을 상징한다. 그러나 하나님은 또한 물대야를 준비하셔서(출 30:17-21), 그들이 손발을 씻는 데에 매일 사용하도록 하셨다. 오늘날, 그리스도는 그 말씀의 물로 그의 교회를 깨끗케 하신다(엡 5:25-26/요 15:3). 그리스도인들은 매일 말씀을 읽음으로써 그 말씀이 자신을 찾아내도록 맡기며(히 4:12), 그의 죄를 고백함으로써 그는 발을 깨끗케하여 빛 가운데 행하게 된다(시 119:9).
이렇게 매일 깨끗케 함은 신자들이 그리스도와 교제하도록 유지해 준다. 이 교훈이 구원을 얻거나 “잃는 것“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음을 기억하자. 이것은 그리스도와의 교제와 친교의 문제이다. 많은 무지한 신자들이 베드로가 했던 것과 같은 실수를 범했다(9절). 그들은 다시 구원받기를 원한다."
위선에 대한 교훈
3. 위선에 대한 교훈
유다는 그리스도의 사람들 중의 하나인 양 가장하고 다락방에 있었다. 10-11절에서 그리스도는 그들 중의 한 명은 구원받지 못했음을 알고 계신다는 것을 분명하게 말씀하셨다. 유다의 속임수는 매우 교묘해서 다른 사람들은 그가 위선자인 것조차도 깨닫지 못하고 있었다.
그리스도는 먼저 시편 41편 9절을 인용하셔서(18절) 그가 배반당할 것을 알리셨다. 그리스도는 유다의 발을 씻기셨으나 이제 유다는 그리스도를 향해 발꿈치를 들려 하고 있다. 그러나 십자가에서의 그리스도의 죽음은 유다를 도구로 사용한 사단을 패배시켰다(2, 27절). 사단은 먼저 마음 속에 생각을 심어 두었고, 그의 삶을 조절하기 위해 그에게로 들어간다. 그리스도는 열 두 제자에게 그들이 불신앙 속에서 비틀거리지 않게 하려고 이 구절을 인용하셨다(19절). 말씀을 아는 그리스도인들은 패배하는 것처럼 보이는 일들에 의해서 낙심하게될 수가 없다.
21절에서 그리스도는 제자들에게 그들 중의 한 명이 그를 배반하리라는 것을 공개적으로 말씀하셨다. 사실상, 이 선언은 유다에게 주는 마지막 경고였다. 그리스도는 그의 발을 씻기셨고, 그에게 말씀을 인용하여 들리셨으며, 이제 공개적으로 그를 경고하셨으므로, 유다에게는 그의 마음을 바꿀 만한 모든 기회가 주어진 것이다.
요한은 예수님의 품에 기대어 그 비밀을 알아내고, 베드로에게 그것을 전해주었다. 그러나, 그들 중의 누구도 주님의 말씀의 참 뜻을 명백하게 이해하지 못했음이 분명하다(28절). 그리스도의 마음에 가장 가까이 있던 그리스도인이 주님의 비밀을 발견한다는 데에 주목하기란 재미있는 일이다.
유다가 적신 빵조각을 받았을 때, 그는 마침내 사단에게 굴복하였고, 사단이 그에게로 들어가 유다를 마귀의 자녀로 만들었다(요 8:44). 성령의 사역처럼, 사단은 인간의 몸을 통하여 그 안에서 사역하며 그에게 굴복하게 한다. “밤이었더라“(30절)는 것은 유다의 마음이 어두운 상태임을 의미한다. 그리고 사실상, 이 때는 어두움의 권세가 활동할 때였다(눅 22:53).
유다와 같은 사람이 되는 것은 위험한 일이다. 마가복음 14장 21절에서 예수께서는 “차라리 그가 태어나지 않았더라면 더 좋았을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유다는 그리스도인인 체하였고, 죄와 더불어 활동하였으며, 구원을 거부하였다. 이러한 일들을 행하는 어떠한 사람도 그가 태어나지 않았으면 하는 희망을 포기해야 할 것이다.
유다를 둘러싼 불가사의한 일들이 있지만, 한 가지는 분명하다. 즉, 유다는 그리스도를 배반할 때 고의적인 선택을 했다는 점이다. 요한복음 6장 66-71절에서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유다에게 경고하시며 “마귀“라고 부르시는 것을 보게 된다. “우리가 믿는다“고 말하는 것으로 보아, 베드로는 유다가 구원받는 것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유다가 나간 후에 예수께서는 다가오는 베드로의 실패에 대하여 그에게 경고하셨다. 24절에서 베드로는 다른 사람들의 죄를 찾아내는 데에 열심이었으나, 이제는 자기의 죄를 직면해야 했다. “비판을 받지 않으려거든 비판하지 말라.“베드로의 교만은 자신의 마음에 대한 이해가 결여되었음을 보여 준다. 자기확신은 그리스도인의 생활에 있어서 위험한 것이다. “네가 후에 나를 따를 것이라“(36절)는 말씀은 아마도 베드로가 그리스도를 위해 십자가에서 죽을 것을 말씀하신 듯하다(요 21:18-19/벧후 1:14)."
요 14:1-6
▣ 영혼의 집-요한복음 14장-
왜 제자들의 마음은 불안했는가?(1절) 이는 그리스도께서 그가 그들 곁을 떠나실 것임을 말씀하셨기 때문이다. 한 예로서, 베드로에게 경고하신 일은(13:36-38) 의심할 바없이 그들 모두를 불안하게 만들었다. 왜냐하면 그들은 베드로를 지도자로 보았기 때문이다. 그리스도께서는 비록 자신의 괴로운 마음은 제자들의 괴로운 마음과는 전혀 다르기는 하나, 자신의 내면적인 부담을 나타내셨다(13:21). 아마도 그 배반에 대한 말씀 또한 그들을 낙심하게 하였을 것이다.
이 장에서 그리스도께서는 그 열 두 제자를 위로하려고 하시며 그들의 불안한 마음의 요구에 응하셔서, 그들을 떠나 아버지께로 가야 하는 이유를 다섯 가지로 말씀해 주셨다.
1. 그들을 위해 한 장소를 예비하기 위함(14:1-6)
그리스도께서는 하늘나라를 “마음의 상태“가 아닌 실제적인 장소로 말씀하시며, 아버지께서 거하시는 사랑이 가득 찬 가정으로 묘사하신다. “처소“란 실제로, “거하는 장소“로서 우리의 영원한 하늘의 집을 말한다. 하늘나라는 예비된 백성을 위해 예비된 곳이다.
“목수“이신 그리스도는(막 6:3) 오늘날 그를 믿는 모든 이들을 위하여 하늘의 집을 짓고 계신다. 그리고, 그에게로 자기의 사람들을 받아들이기 위해 돌아오실 것이다. 바울은 후에 데살로니가전서 4장 13-18절에서 이 약속을 자세히 설명하였다. “몸 안에 없는 자들은 주님과 함께 있다.“ 만약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남아 계셨다면 자기 백성을 위해서 하늘의 집을 마련하지 못하셨을 것이다.
죄인들이 어떻게 천국에 들어갈 소망을 가질 수 있는가? 그리스도를 통해서 그것은 가능하다. 누가복음 15장 11-24절에 나와 있는 탕자에 대한 이야기는 요한복음 14장 6절과 관계가 있다. 죄인의 상징으로서 그 아들은 잃어버린 자이며(15:24) 무지하였고(15:17 / “스스로 돌이켜“) 죽어 있었다(15:24). 그러나 그는 아버지께로 돌아왔다(15:20). 그는 잃어버렸으나 그리스도는 길이시며, 그는 무지하였으나 그리스도는 진리이시며, 그는 영적으로 죽어 있었으나 그리스도는 생명이시다. 이제 그는 아버지의 집에 당도하였다 !"
요 14:7-11
2. 그들에게 아버지를 보이시기 위함(14:7-11)
빌립의 눈에 문제가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는 늘 보기를 원했다. 1장 46절에서 그는 처음에 “와 보라“고 말했고, 6장에서는 많은 무리를 보고는 그리스도께서 그들을 먹이실 수 없을 것으로 결론지었다(6:7). 빌립에게로 왔던 헬라인들은 “우리가 예수를 뵈옵고자 하나이다“라고 말했다(12:21).
예수께서는 자기를 보는 것이 곧 아버지를 보는 것임을 분명히 하셨다. 또한 9절에서 “이제부터는 너희가 그를 알리라“고 약속하셨다. 우리가 그리스도를 더욱 더 알게 되는 것처럼 아버지를 보는 것도 믿음에 의해서이다."
요 14:12-14
3. 그들에게 기도의 특권을 허락하시기 위함(14:12-14)
그리스도께서 그들과 함께 계셨던 동안 그는 그들의 필요들을 공급하셨는데(16:22-24), 이제 그리스도께서는 하늘로 돌아가시면서 그들에게 기도의 특권을 남겨 놓으신다. 그리스도는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기도에 응답하실 것을 약속하셨다.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한다는 것은 주님의 영광을 위하여 기도하는 것, 그분 자신의 요구를 위해서 구하는 것을 의미한다.
12절의 “더 큰 일“이란 사도행전에서 제자들이 경험한 놀라운 기적과 축복들을 말한다. 오늘날 우리를 통해서 하시는 주님의 일들은, 그리스도께서 지상에 계신 동안 육신을 입으신 하나님이신 반면에 우리는 토기로서의 인간이라는 관점에서 볼 때, “더 큰 일“이다."
요 14:15-26
4. 성령을 보내시기 위함(14:15-26)
이 장에서 그리스도께서는 성령에 대해 많은 말씀을 하려 하신다. 여기서 그리스도는 성령을 “보혜사“(위로자)라고 부르고 계신데, 직역을 하자면 “너희를 도우려고 곁에 서 계시는 분“이라는 뜻이다. “다른“이란 말은 “같은 류의 다른 것“이라는 뜻으로서,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이신 것과 같이 성령께서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사용된 것이다. 제자들 안에 거하시는 성령께서는 제자들 곁에 계신 구주를 대신하신다.
그리스도께서는 또한 “진리의 영“이라고 부르신다. 성령께서는 죄인들을 깨닫게 하면 성도를 인도하는 데에 하나님의 말씀을 사용하시며, 하나님의 말씀은 진리이다(17:17). 성령은 그리스도를 나타내며 그리스도는 진리이시다(14:6). 세상은 성령을 받지 못한다. 성령께서는 보는 것의 응답이 아닌 믿음의 응답으로 오시기 때문이다.
“내가 너희에게 오리라“(18절)는 그리스도의 말씀의 의미에는 상당한 논란이 있다. 문자적으로 그것은 “내가 너희에게 온다“(현재시제)라고 읽혀진다. 아마도 이 말씀은 그리스도께서 부활 이후에 사도들에게 오실 것과 성령의 인격속에서 그들에게 오시는 것, 미래에 그들을 하늘나라로 데려가시려고 오시는 것과 같은 여러 가지 의미를 내포하고 있는 듯하다.
21-26절에서 그리스도께서는 그의 제자들이 성령을 통해서 아버지와 아들과 함께 가질 더 깊은 교제에 대해 말씀하신다. 그들은 자기들이 “고아들“처럼 될 것이라고 생각했으나(18절/ 문자적으로 “위로가 없는“이란 뜻임), 사실상 주님께서 아버지께로 가시는 것은 성도와 구세주의 더 깊은 관계를 가능하게 하는 것이다. 이 관계는 말씀에 순종하는 것과(21절) 말씀을 사랑하는 것, 또한 성령의 가르치는 사역을 포함한다(26절).
말씀을 배우는 데에 시간을 드리며 그 말씀을 살아나가는 그리스도인들은 아버지와 아들과의 가깝고도 만족케 하는 교제를 즐길 것이다. 그리스도에 대한 사랑은 우리가 흔히 말하는 얄팍한 감정이 아니다. 그것은 성령에 의해서 말씀을 사랑하고 복종하는 것을 의미한다.
14장 1-3절에서 그리스도께서는 아버지와 아들과 교제하기 위해 하늘로 가는 성도에 대해 말씀하셨으나, 여기서는 성도와 함께 거하기 위해 오시는 아버지와 아들에 대해 말씀하신다. 헌신된 그리스도인의 삶은 실로 “지상에서의 천국“이다."
요 14:27-31
5. 그의 평안을 허락하시기 위함(14:27-31)
제자들에게는 참으로 평안이 필요했다. 그리스도께서 주시는 평안은 세상으로 말미암는 것이 아니며, 세상이 주는 방법으로 주지 않으셨다. 세상의 평안은 얕고 불만족하며 일시적이나, 그리스도의 평안은 마음 속 깊은 곳에서 항상 만족을 주며 영원히 머무른다.
세상은 외적인 수단을 통해서 평화를 주지만, 그리스도께서는 마음 속에 평화를 주신다. 심리학자들은 “정신(마음)의 평화“에 대해서 말하지만, 그리스도는 그의 죽으심과 부활과 승천을 통해서 “하나님의 평화“를 주신다(롬 5:1). 빌립보서 4장 4-9절에는 신자가 평화를 소유할 수 있는 방법이 설명되어 있다.
“내 아버지께서 나보다 크시니“(28절)란 말씀은 그리스도의 지상적인 삶의 날에 대해 언급하신 것이다. 하나님의 아들로서, 그리스도는 아버지와 동등하시며, 인간의 아들(인자)로서 그리스도는 말씀과 일들을 주신 아버지께 순종하셨다(14:10/14:24).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하늘로 돌아가심으로써, 그리스도께서는 혼란과 불안을 조성하는 사단을 패배시키셨다(30절). 남아 있는 제자들은 그리스도의 죽으심을 비극이나 실수로 생각하지만, 그리스도께서는 31절에서 십자가가 아버지를향한 그의 사랑의 증거임을 분명히 말씀하셨다. 그리스도께서는 아버지께서 그것을 명하셨기에 죽으셨고, 아버지의 뜻을 행하기 위해 오셨다.
이 장을 다시 읽으면 그리스도께서 당황하고 있는 그의 제자들을 얼마나 부드럽게 위로하고 계신지를 보게 된다. 이 위로의 말씀들은 오늘날 우리에게도 똑같이 적용된다."
요 15:1-11
▣ 참 포도나무-요한복음 15장-
요한복음 14장은 “일어나라. 여기서 떠나자“라는 말씀으로 끝나는데 이것은 다음에 오는 두 장이 동산으로 가는 도중에 말씀하여졌던 사실을 암시한다. 아마도 포도나무와 가지들의 비유를 말씀하셨을 때, 그리스도와 그의 제자들이 어떤 포도원이나 금으로 된 포도나무 장식이 있는 성전을 지나가고 있었을 것이었다. 이 장은 비유(1-11절)와, 계명(12-17절), 그리고 경고(18-27절)의 세 부분으로 나누어진다.
1. 비유(15:1-11)
연구를 시작함에 있어, 기억할 중요한 점은 어떤 비유에 있는 모든 일들이 반드시 특정 의미를 내포해야만 한다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아는 것이다. 한 비유는 중요한 한 진리를 가르친다. 그리고 그것을 “네 다리 모두를 가지고 서게“하려는 것은 이단으로 나가는 첫단계이다. 이 비유에서 그리스도께서 가르치시려는 주요한 진리는 열매를 맺기 위해서 그리스도 안에 거하는 일의 중대성이다. 열매라는 말이 여섯 번 사용되며, 거한다는 말은 적어도 열 다섯 번 사용된다(반드시 “거하다“라고 번역된 것은 아니다). 요점은 친교이지 양자 관계가 아니다.
6절을 그리스도인이 열매 맺지 못하면 구원을 잃고 지옥에서 불타게 될 것으로 가르치는 것은 비유의 의미를 왜곡하는 것이다. 그러한 가르침은 앞의 다른 구절의 명백한 가르침을 모순되게 한다(요 6:47/요 10:27-29 등). 무엇보다도 그리스도께서 6절에서 말씀하신 그 가지가 던져진 후 말랐다는 것을 주의하라. 만일 이 가지가 “구원을 잃은“ 타락한 그리스도인을 상징한다면 그는 먼저 “마르며“, 열매 맺기를 실패하고, 그리고는 던져져야만 한다.
그리스도안에 거하는 것은 우리 자신의 구원을 지킨다는 의미가 아니다. 그것은 그의 말씀 안에 사는 것과 기도하는 것(7절), 그리고 그의 계명을 순종하는 것(10절)과 그의 말씀으로 우리의 생활을 깨끗이 지켜나가는 것을 의미한다(3-4절). 그리스도 안에 거하는 데 실패하는 그리스도인은 쓸모없는 가지처럼 된다. 소금이 그 맛을 잃으면 아무 데에도 소용이 없다. 고린도전서 3장 15절은 우리의 행위가 불로 시험받을 것을 가르친다. 하나님께서 자기에게 주신 은사와 기회를 사용하는 데에 실패한 그리스도인들은 은사와 기회를 잃을 것이다(눅 8:18).포도나무 안에 있는 가지는 우리가 그리스도에게 연합된 것과 그의 생명을 나누는 것을 의미한다. 우리가 그 안에 거함으로써 그의 생명은 우리를 통해서 흐르고 열매를 맺는다. 육적 그리스도인들이 “행함“을 산출하는 것은 가능하다. 그러나 영적 그리스도인만이 계속해서 열매를 맺을 수 있다. 열매가 많은 가지는 “깨끗케 되어“ 더 많은 과실을 낸다는 것에 주의하라(2절의 “제해 버리다“는 3절의 “깨끗케 하다“와 같은 단어이다).
하나님은 말씀과 징계 등을 통해서 우리를 깨끗케 하신다. 왜냐하면 더 많은 과실을 맺게 하시기 위해서이다. 그것은 왜 헌신된 그리스도인들이 고난을 통해서 지나가야만 할 것인가에 대한 이유를 설명하는 데 도움이 된다. 그리스도인이 과실을 맺는 데서 “더 맺는“ 데로(2절), 그리고 “많은“ 과실을 맺도록(8절) 나아감으로써 그는 아버지를 영화롭게 한다. “거하는 생활“의 증거들은 구주의 사랑을 의식하는 것(9절), 말씀에 순종하는 것(10절), 응답된 기도(7절), 그리고 즐거움(11절)이다."
요 15:12-17
2. 계명(15:12-17)
우리가 서로 사랑하는 것은 “열 한 번째 계명“이라고 할 수 있다. 확실히 그리스도 안에 거하는 그리스도인은 다른 믿는 자들과 같이 사이좋게 지내야만 한다. 형제를 사랑하는 것은 제자의 표시이다. 이제 예수께서는 그의 제자들을 “친구들“이라고 부르신다. 십자가 위에서 죽으심은 그들에 대한 그리스도의 사랑의 증거이다. 지금 그들은 그리스도의 자녀들을 사랑함으로써 그리스도에 대한 그들의 사랑을 증명해야만 한다. 친구들은 서로 사랑해야만 하며 각각 서로에게 복종해야 한다.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요구하신 순종은 종으로서가 아니라 친구의 복종이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친구이며 그리스도 안에 거하기 때문에 우리는 그의 뜻을 알고 그의 비밀에 참여한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친구였다. 하나님은 그에게 소돔에 대한 계획을 말씀하셨다."
요 15:18-27
3. 경고(15:18-27)
형제들의 사랑으로부터 그리스도는 세상의 미움에 대해 방향을 돌리신다. 세상은 왜 그리스도를 미워하는가?
세상이 먼저 그리스도를 미워했고 우리가 그리스도에게 속했기 때문이다(요일 3:13).
우리는 더이상 세상에 속하지 않기 때문이다(요일 4:5/요 17:14).
세상이 그리스도의 말씀을 거절했기 때문이다(20절).
세상은 아버지를 모르기 때문이다(16:1-3).세상의 죄가 그리스도에 의해 폭로되었기 때문이다.
물론 “세상“은 그리스도와 아버지를 반대하는 모든 사회제도를 말하며, 적그리스도적인 사람들과 제도들과 철학들과 목적들로 이루어진다. “세상“의 임금은 그리스도의 최고의 대적인 사탄 안에 있다(요 14:30). 반면에 그리스도인은 세상 안에 있지만 세상에 속하지는 않는다. 배와 물에 대한 옛 예화는 아직도 훌륭하다. 배가 물에 있는 것은 전혀 잘못된 것이 없다. 그러나 물이 배안에 들어올 때에 조심해야 한다. 그리스도인은 세상적으로 될 수 있다. 그리고 그들은 롯처럼 점차적으로 그렇게 된다. 먼저 세상과 사귀고(약 4:4), 다음에는 세상을 사랑한다(요일 2:15-17). 그리고 마침내 세상에 일치한다(롬 12:2).
오늘날 우리들의 생활 속에서 하나님의 사랑을 즐기고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데로부터 떨어지게 하는 것은 어떤 것이든지 세상적인 것이며 버려야만 한다. 세상에 사는 것은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거부하는 것이다(갈 6:14). 세상은 그리스도를 미워한다. 그런데 어떻게 세상을 사랑할 수 있겠는가!
22-24에서 그리스도께서는 계시가 책임을 가져온다는 근본적인 진리를 말씀하신다. 그의 말씀과 그의 행위들은 하나님의 뜻과 인간의 죄악됨을 계시하셨다. 인간은 변명할 수 없다. 유대인과 이방인이 한 가지로 그리스도를 미워하고 못박는 일에 함께 참여한 사실은 모든 사람이 하나님 앞에 죄인이며 심판을 받아야 한다는 증거이다.
제자들을 격려하기 위해서 그리스도께서는 시편 69편 4절을 인용하신다(25절). 그 말씀은 우리를 강하게 하며 격려한다. 그리스도는 그들에게 성령의 사역을 말씀하시는데, 성령의 사역은 그리스도를 증거하고 그를 나타내는 것이다. 그는 말씀을 통하여, 그리고 성령의 능력 안에서 그리스도인이 수행하는 착한 행실들로써 이 일을 하신다. 성령은 그리스도인에게 증거하시고, 그 후 그리스도인은 다른 사람에게 증거한다(26-27절/ 행 1:8).
▣ 요약
우리는 이 장의 첫부분(1-11절)에서 말씀이 믿는 자와 그리스도와의 관계를, 12-17절에서는 믿는 자의 다른 그리스도인들과의 관계를 다루며, 그 반면에 18-27절은 그리스도인의 세상에 대한 관계를 다루고 있음에 주목하게 된다.
또한, 우리와 구주와의 관계가 첫번째에 놓여 있음에도 주목하게 될 것이다. 이는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 거하고 있다면 우리는 자연적으로 형제를 사랑할 것이며 세상의 미움을 능히 극복할 것이기 때문이다."
요 16:1-11
▣ 보혜사-요한복음 16장-
이 장은 성령의 사역에 관해 중점을 두고 있다. 제자들은 왜 그리스도께서 그들을 떠나셔야만 하는지를 이해할 수 없었다. 그리스도는 그들에게, 그가 아버지께로 돌아가는 것이 성령의 오심으로 더 큰 축복들을 가능케 할 것이라는 점을 보이신다. 그리스도인의 생활은 육신의 힘으로 유지될 수가 없다. 만일 우리가 주님을 영화롭게 하는 삶을 살려 한다면 하나님의 영이 필요하다. 우리 주님은 믿는 자를 통해서 일하시는 성령의 사역을 묘사하신다.
1. 세상을 책망하는 성령(16:1-11)
세상은 그리스도인에게는 친구가 아니다. 그리스도께서는 다가오는 그의 핍박에 대해 경고하셨는데, 마침내 그 때가 이르자, 그들은 휘청거리며 넘어졌다. 변화되지 못한 상태에서의 바울은 2절에서 묘사하는 것의 완전한 표본이다. 그리스도께서 이 사실을 좀더 일찍 말씀하지 않으신 까닭은 그리스도께서 그들을 보호하기 위해 그들과 함께 계셨기 때문이다. 이제 그리스도는 그들을 떠나려하시면서, 그들을 격려하는 말씀을 주셨다. 물론, 그리스도께서는 그들에게 핍박에 대해 말씀하셨으나(마 5:10-12), 그 출처(종교적인 사람들)와 이유(세상의 무지와 증오)에 대해서는 설명하지 않으셨다.
그리스도는 이제 불신앙의 세상 속에서 교회를 통해 행할 성령의 사역에 대하여 설명하신다. 성령께서 세상에 오신 것이 아니라(14:17) 잃어버린 세상에 오셨다는 점을 명심하라. 성령께서 이 세상에 오셨다는 바로 그 사실이 세상에 대한 고소이다 ! 실제로, 그리스도는 세상에 계셔서 왕으로서 통치하셔야 한다. 그러나, 세상이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박았으며, 이제 성령께서 여기 계시며 인류에게 그들의 가공할 무서운 죄를 깨닫게 하신다. 성령께서는 세상에 대해 삼중의 책망을 하신다.
죄에 대해서-이것은 불신앙의 죄이다. 성령께서는 개인적인 죄들에 대해 세상을 책망치 않으신다. 이것은 양심이 할 일이다(행 24:24-25). 성령께서 세상에 계심은 세상이 그리스도를 믿지 않은 증거이다. 그렇지 않으면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에 대신 계셔야만 한다. 영혼을 정죄하는 죄는 불신앙, 즉 그리스도를 거절하는 것이다(요 3:18-21).
의에 대해서-이것은 불의함, 즉 잃어버린 영혼의 죄에 대한 것이 아니다.그리스도께서는 세상에 대한 성령의 책망에 대해 말씀하신다. 여기에는 인격적인 적용이 있기는 하지만 개인적인 불신자에 대한 것은 아니다. 성령께서 세상에 계신다는 것은 이제 아버지께로 돌아가신 그리스도의 의로우심에 대한 증거이다. 이 땅에 계신 동안 그리스도는 사기꾼처럼 법을 어기는 자요 죄인으로 비난받으셨다. 그러나 이 땅에 성령께서 계시다는 사실은 아버지께서 아들을 일으키시고 하늘로 받으셨다는 증거이다.
심판에 대해서-이것을 사도행전 24장 25절의 “장차 오는 심판“과 혼동하지 말자. 여기서 그리스도는 미래의 심판이 아니라 십자가에서의 과거의 심판을 말씀하신다. 그리스도께서는 12장 31-32절에서 사단과 세상을 심판하실 일에 대해 말씀하셨었다(골 2:15 참조). 세상에 성령이 계심은 사단이 심판을 받았고 패배했다는 증거이다. 그렇지 않으면 사단이 이 세상을 통치하고 있을 것이다.
우리는 이 세 가지 심판을 개인적인 불신자에게 적용할 수 있다. 성령께서는 믿지 않는 자들에게 그의 불신앙의 죄와, 의의 필요성과, 그가 사단에게 속해 있으므로(엡 2:1-3), 잃어버린 편에 있다는 것을 확신시키기 위해 그리스도인과 하나님의 말씀을 사용하신다. 성령께서 주도하는 책망이 없이는 구원이 없으며, 성령께서는 잃어버린 영혼들을 책망하시는 데에 말씀을 사용하신다."
요 16:12-15
2. 그리스도인을 가르치는 성령(16:12-15)
제자들은 말씀에 대한 그들의 무지함을 느꼈음에 틀림이 없다. 그래서 그리스도께서는 그들에게 성령의 가르치는 사역을 설명하심으로써 그들을 안심시키셨다(14:26/15:26). “자신에 대해 말하지 않으심“은 성령께서 자신에 대해 말하거나 자신에게 주의를 끄는 일을 결코 하지 않으신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성령께서 성경을 쓰신 분이며, 성경의 각장에는 성령에 대한 많은 참고 구절들이 있다. 이 구절은 성령께서 그가 기뻐하시는 것을 성도에게 가르치려고 하시는 것이 아니고, 아버지와 아들로부터 지시를 얻으려 하신다는 것을 의미한다. 성령께서는 우리에게 말씀으로부터 진리를 가르치시며 그렇게 행하심으로써 그리스도를 영화롭게 하신다.
가이 킹(Guy King)이라는 사람은 성령께서 그리스도를 영화롭게 하는 방법을 세 가지로 제시하였다.
성령은 그리스도에 대하여 책을 썼다.
성령은 믿는 자를 그리스도와 닮게 만든다.
성령은 그리스도를 위하여 신부를 찾는다.
그리스도께 굴복한 그리스도인은 누구나 성령의 가르침을 받을 수 있다. 시편119편 97-104절에서 하나님께서 어떻게 겸손한 그리스도인을 가르치실 수 있는지를 보라. 측정기는 나이와 경험, 교육이 아니라 말씀을 배우며 말씀으로 살려고 자원하는 마음이다."
요 16:16-22
3. 성도를 위로하는 성령(16:16-22)
그리스도께서 떠나신다고 말씀하신 것 때문에 제자들은 대단히 불안해하며 낙심하였다. 16절은 역설이 되는 것처럼 보인다. “내가 아버지께로 가므로 너희가 다시 나를 보리라“고 말씀하시는 것 같다.
여기에는 이중의 의미가 있다. 먼저, 그들은 죽은 자들 가운데서 부활하신 후에 그리스도를 다시 보며, 그들은 또한 성령께서 그들에게 강림하셨을 때에 그리스도를 본다. 그들은 육체적인 안목을 영적인 시각으로 바꿔야 할 것이다. 오늘날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성령의 가르치심을 통하여 예수 그리스도를 본다(히 2:9).
그리스도께서는 자기의 고난당할 일을 아이의 탄생에 비유하신다. 그것은 기쁨이 뒤따르는 진통이다. 이사야 53장 11절은 “그가 자기 영혼의 수고한 것을 보고...“라고 기록하고 있다. 제자들은 울고 슬퍼하지만 그들의 슬픔은 기쁨으로 변할 것이다. 오늘날 우리는 슬픔과 고난을 갖지만 그리스도께서 돌아오실 때 그것은 즐거움으로 변할 것이다. 그리스도께서는 어떤 것도 빼앗을 수 없는 종류의 기쁨을 주신다."
요 16:23-33
4. 성도의 기도를 돕는 성령(16:23-33)
“그 날에“는 아마도 성령이 오셔서 그들 가운데서 그의 사역을 시작할 날에 대해 언급하는 듯하다. 그리스도께서 지상에 계실 때 제자들은 그들의 질문과 필요를 개인적으로 그에게 얻는 데 익숙해 있었다. 그리스도께서 하늘로 가셨을때 기도하는 가운데 그들을 도우며(롬 8:26-27) 아버지께 개인적으로 기도하는 것을 가르치기 위하여 성령을 보내셨다. 성경의 기도는 아버지께, 아들을 통하여, 성령 안에서 기도하는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그들을 위해서 아버지께 기도하는 것은 필요하지 않다(26절). 왜냐하면 아버지께서는 그들의 요구에 응하시는 것을 기뻐하시기 때문이다(27절).
기도는 굉장한 특권이다. 기도에 대한 그리스도의 다른 말씀들을 숙고하자(요 14:13-14/15:7/15:16). 믿는 자는 성령께서 자기에게 말씀을 가르치시도록 허락함으로써 그의 기도생활에서 성장한다. 왜냐하면 기도와 성경은 동반하기 때문이다. 유다서 20절은 우리에게 “성령 안에서 기도할 것“을 명한다. 하나님의 뜻 안에 있지 않은 것들을 구하는 기도, 육적인 기도가 너무도 많다(약 4:1-10). 성령께서 우리에게 기도의 짐을 지우실 때 받아들이는 것은 놀라운 일이다(롬 9:1-3). 성령은 아버지의 마음을 아시며,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고자 하시는 일들을 위해 기도하도록 우리를 인도하신다. 기도는 하나님의 싫어하시는 일들을 극복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붙잡는 것이다.
제자들의 간증은 그리스도의 마음을 기쁘게 했었음에 틀림이 없다. 그러나 그는 그들에게 다가오는 실패를 경고하신다(32절). 비록 아버지께서 마침내 그리스도를 십자가 위에 버리실지라도 주님께서 “기뻐하라“고 말씀하시는 것을 듣는 일은 얼마나 축복된 일인가 ? 그리스도께서 체포되시고 십자가에 못박히려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리스도는 자기를 따르는 자들에게 평화와 기쁨을 주시며, 그들에게 승리를 약속하신다.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
성령께서는 우리의 삶에 있어서 특별한 임무를 가지신다. 우리는 성령께서 그의 길을 갖도록 허락하고 있는가?"
요 17:1-8
▣ 그리스도의 대제사장적인 기도-요한복음 17장-
어떤 이들은 이 장을 “요한복음의 지성소“라고 쉽게 말해 왔다. 우리는 아들과 아버지와의 대화를 듣는 특권을 갖는다. 우리는 이 장에 있는 진리들에 대해 묵상하는 데 많은 주일들을 보낼 수 있지만 가장 중요한 점만을 다루려 한다.
1. 그리스도 자신을 위한 기도(17:1-8)
가장 큰 주제는 그가 구원의 일을 마치셨다는 것이다. 2장 4절에서 시작해서 요한은 “때“에 대해 자주 언급했다. 성구사전을 사용해서 이 절들을 추적해보라. 예수께서는 “내가(구원의 일을) 이루어...“라고 말씀하셨는데, 이는 “아버지를 이 세상에서 영화롭게 하기 위함“이었다. 항상 그리스도는 아버지를 영화롭게 하는 수단으로 십자가를 보셨으며(12:23), 바울 역시 십자가 안에 있는 영광을 보았다(갈 6:14).
그리스도께서는 자신이 죽기 위해 세상에 오실 때 제쳐놓은 영광을 다시 자신에게 주실 것을 기도하신다(빌 2:1-12). 영광이 나타난 유일한 때는 변화산 위에서였다(요 1:14/ 벧후 1:16-18).
2절의 “주신“이라는 말에 유의하자. 아버지께서는 아들에게 온 인류를 다스릴 권세를 주셨고, 아들은 아버지께서 아들에게 주신 자들에게 영생을 주신다. 요한복음 17장에 있는 보배로운 진리들 중의 하나는 각 신자들이 아들에게 주신 하나님의 선물이라는 점이다(요 6:37). 영생은 값없는 선물이다. 죄인들이 할 수 있는 모든 것은 믿음으로 그것을 받아들이는 것 뿐이다. 죄인이 이 일을 할 때에 그는 아버지께서 자기를 아들에게 주셨음을 알게 된다(요 6:37). 이것은 우리로서는 설명할 수 없는 신비이지만, 우리는 그에 대해 감사한다. “하나님의 은사와 부르심에는 후회하심이 없느니라“(롬 11:29). 이것은 우리의 구원이 안전하다는 사실을 의미한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아들에게서 결코 빼앗으려고 하지 않으실 것이기 때문이다.
“내가 아버지의 이름을 나타내었나이다“는 말씀은 요한복음에서 그리스도에 대한 진술인 “나는... 이다“에 관련시켜야 한다. 하나님의 이름이 “나는... 이다“(출 3:13-14)이며,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에게 있어서 하나님이 “우리가 필요로 하는 모든 것“이 되신다는 것을 계시하신다. 주린 자에게 그리스도께서는 “나는 생명의 떡이라“고 말씀하신다. 또한 잃어버린 자들에게는 “나는 길이요“라고 하시며, 눈 먼 자들에게는 “나는 빛이라“고 말씀하신다."
요 17:9-19
2. 그의 제자들을 위한 기도(17:9-19)
여기서의 핵심 사상은 거룩함, 곧 제자들의 세상에 대한 관계이다. 그리스도께서는 “내가 아버지의 말씀을 저희에게 주었다“(14절)고 말씀하시며, 17절에서는 우리가 말씀을 통하여 하나님께 따로 떼어져 거룩하게 되었다는 것을 말씀하신다. 거룩함(성화)이란 완전히 무죄함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그렇지 않다면 그리스도께서 “내가 나를 거룩하게 하오니“(19절)라고 말씀하실 수가 없다. 그리스도는 죄가 없으시기 때문이다. 거룩하게 된 그리스도인이란 매일 말씀 속에서 성장해 가는 사람들이며, 그 결과로서 세상으로부터 아버지께로 더욱더 성별되어 진다.
그리스도는 아버지께 제자들을 지켜 주시도록 간구하신다(11절). 이 요청은 그들이 구원을 상실하게 될 가능성을 시사하는 것이 아니다. “... 아버지의 이름으로 저희를 보전하사... 저희도 하나가 되게 하옵소서“는 참으로 완전한 기도임에 주목하자. 15절에서는 그들이 악으로부터 보전되기를 요청하신다. 그리스도께서는 육체적으로 제자들과 함께 계셨으며 마음과 목적에서 연합되어 세상으로부터 성별되도록 그들을 지키실 수 있으셨다. 이제 그리스도는 하늘로 돌아가려 하시며 그들을 지키시기를 아버지께 간구하신다.
어떤 사람들은 12절을, 믿는 자들이 그들의 구원을 잃을 수 있다는 증거로서 사용한다. 그러나 이 절을 주의깊게 읽어 보면 그 반대라는 것이 증명된다. 그리스도께서는 “그들 중 누구든지 멸망의 자식 외에는 잃어버리지 않는다“고 하신 것이 아니라, “그들 중의 어떤 누구도 잃어버리지 않으나, 오직 멸망의 자식만이...“라고 말씀하셨다. 이것은 유다가 믿는 무리 속에 전혀 속하지 않았다는 것을 보여 준다.
여기에 사용된 “오직“은 대조의 말로서, 유다가 다른 제자들과는 다른 부류에 속했다는 것을 보신다. 11절에서 예수께서는 아버지께서 자기에게 주신 모든 자를 지키신다고 명백히 말씀하신다. 유다는 잃어버렸으므로 그는 아들에게 주신 자 가운데 있을 수 없다. 오늘날 유다가 “그의 구원을 잃어버렸다“고 가르치는 많은 사람들은 6장 66-71절에서 유다가 구원을 받았다고 생각한 베드로와 같은 잘못을 저지른다. 그 때 그는 구원을 받지 못했다.
그리스도인은 세상에 속하지 않았다. 그러나 실제로 그리스도를 증거하기 위해 세상에 있다. 우리는 주의 말씀을 통해서 우리 생활을 정결하게 지킨다. 그리스도는 사실상 자기를 대신해서(18절) 우리를 세상에 보내셨다. 우리에게 얼마나 놀라운 책임이 있는가 !"
요 17:20-26
3. 그의 교회를 위한 기도(17:20-26)
여기서 중요한 주제는 영광이다. “아버지께서 내게 주신 영광을 내가 저희에게주었사오니“(22절). 그리스도는 “내가 그들에게 줄 것이라“고 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마음 속에서 신자는 이미 영화롭게 되었기 때문이다(롬 8:30). 이것은 믿는 자의 영원한 안전에 대한 또다른 증거이다. 우리는 이미 하나님에 관한 한 영화롭게 되었다. 그리스도께서는 우리가 그와 함께 있도록, 그리고 그의 영광을 보게 되도록 기도하신다. 골로새서 3장 4절은 우리가 하나님의 영광을 나누게 될 것을 말하며, 로마서 8장 18절은 우리가 그의 영광을 나타내리라고 약속한다.
그리스도께서는 그의 교회의 하나됨을 위해 기도하신다(21절). 하나됨과(마음과 영에 있어서 하나됨) 통합(기구와 계획에 있어서의 하나됨)에는 차이가 있다. 그리스도는 결코 모든 그리스도인이 하나의 세계 교회 속에 있게 될 것을 의미하시지 않는다. 현재의 교파적인 병합과 세계 연합 노력들이 기구적인 통합은 가져올지 모르지만, 그들은 하나됨을 낳을 수 없다. 하나됨은 외부의 압력에서가 아니라 내부로부터 온다. 그리스도인은 다른 교파에 속했을 때에도 참교회, 즉 그리스도의 몸의 모든 지체들이다. 그리고 세상에 복음의 진리를 확신시키는 것은 바로 이 사랑 안에서의 영적인 하나됨이다.
그리스도인이 사소한 문제에서 다르다는 것은 가능하지만 여전히 그리스도안에서 서로 사랑하고 있다. 그리스도인마다 죽으면 하늘로 간다. 왜냐하면 그리스도께서는 그렇게 되도록 기도하셨으며(24절), 아버지께서는 아들의 기도를 항상 들으시기 때문이다(11:41-42). 26절에서 그리스도께서는 아버지에 대한 더 깊은 계시를 약속하신다. 그리고 그는 그것을 성령을 통해서 제자들에게 주신다. 그는 우리가 우리의 일상적인 경험으로서, 아버지의 사랑을 누릴 수 있기를 위해 기도하신다(14:21-24). 우리는 이 기도의 주요 부분을 다음과 같이 요약할 수 있다.
구원 “내가 저희에게 영생을 주었사오니“ 과거
(1-8절) (2절)
성화 “내가 아버지의 말씀을 저희에게 주었사오매“ 현재
(9-19절) (14절)
영화 “내가 아버지의 영광을 저희에게 주었사오니“ 미래
(20-26절) (22절)
이 기도 안에서 신자의 영원한 안전에 대한 놀라운 증거들을 눈여겨보자.
신자들은 아들에게 주신 아버지의 선물이며(2절), 하나님은 그의 사랑의 선물을 되찾지 않으신다.
그리스도께서는 그의 사역을 마치셨다. 만약 신자들이 그의 구원을 잃어버린다면 그리스도는 그의 사역을 완전히 하지 않으신 것이다.
그리스도는 이 땅에서 자기의 사람들을 지키실 수 있었고, 오늘날도 그들을 지키실 수 있다. 이는 그가 동일한 군주이시기 때문이다.
그리스도는 이미 우리에게 하나님의 영광을 주셨기 때문에 우리가 종국에는 하늘에 있게 될 것을 아신다.
그리스도는 우리가 하늘에 있게 될 것을 위해 기도하시며, 아버지께서는 항상 아들의 기도에 응답하신다."
요 18:1-14
▣ 그리스도의 고통과 재판-요한복음 18장-
예수께서는 그의 대적들을 만나기 위해 기도의 장소를 떠나신다. “기드론 시내“는 가족의 반역으로 보좌에서 추방되던 다윗 왕을 상기시킨다(삼하 15장 참조). 이 장은 세 부분으로 나누어진다.
1. 체포(18:1-14)
예수께서는 자의적으로 유다와 그의 무리들을 만나셨다. 이는 주님께서 바야흐로 무엇이 일어나려 하는지를 아셨기 때문이다(13:1-3/6:6 예수께서는 아버지의 뜻을 아시므로, 항상 자신이 해야 할 일을 알고 계셨다). 동산에서 체포되었다는 사실에 주목하기란 흥미로운 일이다. 마지막 아담이신 그리스도는 적을 만나 승리하셨으나(고전 15:45), 첫번째 아담은 적을 만나 패배하였다. 아담은 자기를 감추었으나, 그리스도는 공개적으로 나타내셨다. 이 두 정원의 장면을 생각하며 다른 대조점들을 살펴보자.
유다는 원수들과 함께 서 있었다. “사도들이 다 놓이매 그 동류에게 가서 제사장들과 장로들의 말을 다 고하니...“(행 4:23). 사람은 항상 그의 마음이 있는 곳으로 가려고 한다. 유다는 그의 마음 속에 사단이 있었으므로 사단의 군중과 함께 있었다. 유감스럽게도 베드로 역시 이같은 무리들과 함께 서 있었다. 예수께서 거룩한 하나님의 이름(“내로라“ /I Am)을 사용하여 그들을 놀라 자빠지게 하는 것을 보라. 믿는 자를 구원하는(17:6) 그 이름이 또한 잃어버린 자를 정죄한다.
8절에서, 예수께서는 제자들이 문제에 빠지지 않도록 그들에게 떠나라고 경고하신다. 그리스도는 이미 제자들에게 그들이 흩어지리라고 말씀하셨으나(16:32) 베드로는 남아서 싸우기를 좋아했고, 그로 인하여 문제에 빠지고 말았다. 베드로의 죄는 그가 멀리서 따라갔다는 데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가 따랐다는 바로 그 점이다. 그는 말씀에 순종하여 떠났어야 했다.
9절은 17장 12절로 되돌아가 그리스도께서 제자들의 구원에 대해 말씀하신 것을 언급한다. 여기서 그리스도는 그들의 육체적인 보호에 대해서 말씀하시는데, 그리스도는 우리를 두 가지 면에서 지키신다. 그리스도는 우리의 영혼을 구원 가운데 보존하시며, 우리의 몸을 그의 영으로 인쳐서 구속의 날까지 지키신다.
검을 사용함으로써 베드로는 분명하게 그리스도께 불순종했다. 그리스도께는우리의 보호가 필요한 것이 아니다. 또한 우리가 사단과 싸울 때 사용할 무기도 육체가 아니라 영이다(고후 10:4-6/엡 6:1-). 그는 잘못된 무기를 사용했고 잘못된 동기로, 잘못된 순서로 행하여 결국 잘못된 결과를 빚어 내었다. 말고를 치료하시고 베드로를 보호하시는 예수님의 은혜가 얼마나 큰가 ! 그렇지 않았다면 갈보리산 위에는 다른 십자가가 섰을 것이며, 베드로는 그의 때가 이르기 전에 십자가에 못박혔을 것이다."
요 18:15-27
2. 부인(18:15-27)
이제 집중 조명의 촛점이 베드로에게 맞춰지며, 우리는 그의 슬픈 퇴보를 보게 된다. 다락방에서 그는 그리스도께 참되게 남아 있겠다고 세 번이나 장담했다(마 26:33/마 26:35/요 13:37). 동산에서 그는 기도해야 할 그 때에 세 번이나 잠에 빠져들었고, 그 후 주님을 세 번 부인하였다. 요한복음 21장에서는 그리스도에 대한 사랑을 세 번 고백해야 했다.
다락방에서 그는 마귀의 그물에 걸려들었고(눅 22:31-34), 동산에서는 육체의 연약함에 굴복하였으며, 이제 제사장의 뜰에서는 세상의 압력에 항복하였다. 깨어 기도하는 것은 얼마나 중요한 일인가 !
우리는 15절의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제자가 누구인지 모른다는 데에 동의해야 한다. 그는 니고데모나 아리마대 요셉일 수 있다. 종종 “다른 제자“로 불리워졌던(20:3) 요한이 대제사장과 친분이 있는 것 같지는 않다(행 4:1-3 참조). 그가 누구이든지간에, 그는 베드로를 위해 그 문을 열어 줌으로써 그를 죄로 인도하였다. 무지한 신자들이 다른 사람들을 주님께 불순종하도록하는 원인이 된다는 것은 참으로 비극이다. 18절은 “그 때가 추웠다“고 기록되어 있는데, 그래서 베드로는 불가에 앉았다. 그러나 누가복음 22장 44절은 그리스도께서 그 밤에 기도하실 때에 땀을 흘렸다고 말해 준다.
베드로는 영육간에 다 추웠고, 적의 불 곁에서 그를 따뜻하게 해야만 했다. 그는 “악인의 꾀를 좇아 죄인의 길에 서 있었고,“ 이제 곧 “오만한 자의 자리에 앉을 것“이었다(시 1:1 참조). 그리스도께서 고통당하시는 동안 베드로는 자신을 따뜻하게 할 뿐 그리스도의 고통에 전혀 동참하지 못하였다."
요 18:28-40
3. 거절(18:28-40)
제사장들을 조정하는 두 인물이 있다는 사실은 그 당시 유대 나라가 얼마나 부패하였는지를 보여 준다. 안나스와 가야바는 성전 상거래의 공동경영자이며, 성전을 두 번 깨끗케 했던 것으로써 그리스도를 증오하고 있었다. 그들은 오늘날 소위 “영적 지도자“로 불리우는 어떤 이들과 같이 하나님의 백성들을 상품화시키고 있었다.그리스도의 재판에 대한 불법적인 면들은 많이 기록되어져 왔다. 그 회의는 밤에 개최되어 죄수는 유죄로 기소되었고, 그들은 거짓 증인들을 고용하였으며, 묶여 있는 동안 잘못된 대우를 받도록 허용하였으며, 어떠한 변호도 승락하지 않았다. 은밀한 한밤중의 재판이 있은 후에, 교활한 유대인들은 최종적인 사형 언도를 위해 그를 빌라도에게로 데려갔다. 그들은 “더럽혀지지 않으려고“ 이방인의 홀에 들어가지 않았다. 그러나, 그들은 무죄한 자를 죽이려고 정죄하였다 ! 그리스도 없는 종교는 이러하다. 그들은 하루살이는 걸러내며 약대는 삼키는 것이다.
33절로부터 19장 15절까지, 우리는 빌라도의 비겁한 우유부단함을 보게 된다. 적어도 일곱 번씩이나 빌라도는 홀에서 유대인들이 있는 밖으로 들락거리며 타협하려 하였다. 빌라도는 겁장이였고, “사람들을 기쁘게 하기 위하여“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박았다. 얼마나 많은 죄인들이 사람들에 대한 두려움으로 인하여 지옥에 있게 되는가 !
그리스도는 빌라도에게 자신의 왕국의 영적인 성격에 대해 설명하셨다. “그러나 지금 내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라“고 말씀하신 데에 유의하자. 유대인들이 그리스도를 받아들였다면, 그리스도는 이 땅 위에 그의 나라를 세우셨을 것이다. 이제 그들이 그리스도를 거절함으로써 그의 나라는 사람의 마음속에 거하는 영적인 것이 되었다. 그리스도께서 돌아오시는 날, 그는 이 땅 위에 그의 문자 그대로의 나라를 세우실 것이다.
“진리가 무엇이냐“는 빌라도의 질문은 수 세기 동안의 철학자들이 묻던 것이다. 14장 6절에서, 예수께서는 “내가 진리라“고 하셨고, 17장 17절에서는 “아버지의 말씀은 진리니이다“고 말씀하셨으며, 요한일서 5장 7절은 “성령은 진리니라“고 진술한다. 성령과 하나님의 말씀은 진리이신 그리스도를 강조한다.
세상은 영적인 일에 이르면 늘 잘못된 선택을 해 왔다. 사람들은 생명의 왕보다는 살인자를, 법을 주신 분보다 법을 어기는 자를 더 좋아하였다. 유대인들은 그들의 참 메시야를 거절하였으나, 어느 날 사단의 거짓 메시야인 적그리스도를 받아들일 것이다(5:43). 사람들은 다른 이유들로 그리스도를 거절하였다. 유다는 마귀의 말에 귀를 기울임으로써 그리스도를 거절하였고, 빌라도는 세상에 귀를 기울였으며, 헤롯은 육체의 요구를 경청하였다.
빌라도는 “너희에게... 전례가 있으니“라고 말하였는데(39절), 그가 그리스도를 알지 못하면서 종교적인 관습을 알았다는 것은 참으로 유감스러운 일이다. 오늘날에조차 사람들은 이와 같아서 종교적인 축일이나 관습을 지키는 데는 주의하면서도, 세상의 구세주에 대해서는 무지하다."
요 19:1-22
▣ 십자가에서의 충성-요한복음 19장-
1. 조롱당하신 그리스도(19:1-22)
빌라도는 불법적이기는 하나 예수님을 채찍질하는 것이 유대인들의 마음을 움직여 그를 풀어 주려 할 것이라고 생각한 듯하다. 그러나, 그들의 마음은 굳어져서(12:40), 그리스도를 죽이기로 결정하였다. 빌라도가 그 군병들에게 모욕적인 가짜 왕관과 자색 옷과 왕홀을 가지고 그리스도를 조롱하도록 허용한 것은 잘못된 일이었다. 이 장면을 요한계시록 19장 11-21절과 비교해 보라. 거기서 그리스도는 왕으로서 영광의 관을 쓰고, 철장을 가지고 다스리러 오신다. 그때 모든 무릎이 그 앞에 꿇려질 것이다!
유대인들은 그리스도가 하나님이라고 주장함으로써 율법을 범하였다고 고소하였다(10:33). 이미 그리스도는 그의 멧세지와 기적들로 하나님이심을 입증하셨다. 그러나, 완악한 죄인은 그 증거를 거절하고, 그리스도를 멸망시키는데에 참여하였다.
9절에서의 빌라도의 질문에 왜 그리스도는 대답지 않으셨는가? 그 한 가지 이유는 빌라도가 이미 받은 계시에 순종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하나님은 그가 이미 주신 것들에 우리가 순종할 때까지는 더 많은 계시를 주지 않으신다. 10절에서의 빌라도의 장담은 자기 자신을 정죄하는 것이었다 ! 만약 그가 그리스도를 놓아 줄 권세를 가지고 있었다면 그리스도께서 무죄하다는 사실을 알았을 것이며(19:4), 그렇게 행했을 것이다. 그리스도는 모든 권세가 하나님께로서 말미암는다는 것을 그에게 상기시킴으로써 빌라도를 논박하셨다(롬13:1-/잠 8:15-16).
빌라도는 특별한 목적을 성취하기 위해 하나님의 손에 들려 있었으며, 그는 여전히 죄 가운데 있었다(눅 22:22). 11절의 “나를 네게 넘겨준 자“란 유다가 아니라 가야바에 대한 언급이다.
유대인들은 “가이사 외에는 우리에게 왕이 없나이다 !“라고 외친다. 6장 15절에서 그들은 그리스도를 왕으로 삼으려고 했었고, 12장 13절에서는 그리스도를 왕으로 찬양하였으나, 이제 그들이 그를 거절하고 있다 ! 이것은 요한복음에서의 세번째 위기이다.첫번째 위기 그리스도를 왕으로 삼으려 함 길
(6:15) -더이상 그를 따르지 않음(6:66)
두번째 위기 그리스도를 왕으로 찬양함 진리
(12:13) -그를 믿지 않음(12:37)
세번째 위기 그리스도에 대한 최종적인 거부 생명
(19:15) -십자가에 못박음
빌라도는 재판의 최종적인 결론을 맺고는 십자가 위에 “나사렛 예수, 유대인의 왕“이라는 표제를 붙였다. 관습적으로 죄수는 그의 목에 죄패를 걸었다가 그후 그것을 십자가에 걸어 놓았다. 그리스도의 “죄명“은 스스로 왕이 되었다는 것이었다 !
죄패는 히브리어(종교), 헬라어(철학과 문화), 라틴어(법과 정치)의 세 언어로 기록되었다. 이것은 우주적인 죄를 말해 준다. 세상의 이 세 정부가 그리스도의 죽음에 관여했기 때문이다. 문화와 법률, 종교는 사람을 구원하지 못한다. 또한 이것은 우주적인 사랑을 나타내는데, 하나님은 단지 유대인만이 아니라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셨다. 그리고 이것은 우주적인 구원을 선포한다. 그리스도는 헬라인에게는 하나님의 지혜이며, 로마인에게는 하나님의 권세이고, 유대인에게는 모든 종교 의식의 성취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사도행전 16장에서 유대 여인 루디아와 헬라의 여종과, 로마의 간수가 모두 구원된 것을 본다. 회개한 도둑은 이 죄패를 읽고 그리스도께서 “그의 나라에서“ 그를 기억하실 것을 믿었다."
요 19:23-30
2. 못박히신 그리스도(19:23-30)
요한은 그리스도의 가상 칠언 중 세 가지만을 기록하고 있다. 그는 솔기가 없는 옷을 제비뽑으며(시 22:18), 신포도주를 주는 것(시 69:21), 어떠한 뼈도 꺾이지 않고 옆구리를 찔린 것(시 34:20/출 12:46/슥 12:10)에 대한 성경의 성취를 주의깊게 주목한다. 그러나 37절은 스가랴 12장 10절을 성취하였다는 뜻이 아니라는 데에 유의하자. 오히려 스가랴 12장 10절은 그가 찔리신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그들은 장차 영광 중에 돌아오실 때 그를 볼 것이다(계 1:7). 십자가형에 대한 모든 세심한 일들이 하나님의 손에 의해 조심스럽게 수행되었다.
요한과 마리아를 서로에게 건네 줌으로써 그리스도는 지상에 있어서의 가족 관계를 최종적으로 끊으셨다. 그 일들을 조정한 것은 마리아가 아니라 그리스도이셨다. 우리는 십자가로 온 마리아의 헌신에 감탄한다. 그녀의 침묵은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심에 대한 증거였다. 왜냐하면 그녀의 말 한 마디는 예수님을 구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내가 목마르다“는 말씀은 육체적이며 영적인 고통을 나타내신 것으로, 그리스도는 우리의 죄를 위해 지옥의 고통을 당하시는 것이다. 그리스도는 우리가 결코 목마르지 않게 하시려고 친히 목마르셨다.
“다 이루었다“는 헬라어 “테텔레스타이“로서, 상인들간에 “가격이 모두 지불되었다“는 의미로 사용되어졌다. 목자들은 그들이 완전한 양을 발견했을 때에 그 말을 사용하였는데,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완벽한 어린 양으로 죽으셨다. 일을 완전히 마친 종들이 주인에게 보고할 때에 이 말을 사용하는데, 순종한 종이신 그리스도는 아버지께서 그에게 하라고 주신 일을 마치셨다. 그리스도는 기꺼이 자원하여 자기 생명을 포기하셨으며 친구들을 위하여 자기 생명을 내어 놓으셨다."
요 19:31-42
3. 장사되신 그리스도(19:31-42)
유대인들은 동정이나 또는 그들의 죄에 대한 두려움에는 관심이 없었고, 단지 그들의 안식일에 관한 율법을 지키려 하였다. 군병들이 그리스도의 다리를 꺾지 않았다는 사실은 그가 이미 죽었음을 증명하는 것이다. 생명의 주의 존전에서 죽은 사람은 아무도 없다. 만약 그리스도께서 먼저 죽지 않으셨다면 두 강도들은 결코 죽을 수 없었을 것이다.
피와 물은 구원의 양면성을 설명해 준다. 피는 죄책을 속죄하며, 물은 죄의 얼룩을 씻어 준다. 또는, 피는 십자가의 하나님 편에서의 칭의를 말해 주며, 물은 인간 편에서의 성화를 뜻한다. 이 두 가지는 항상 동반되어야 하는데, 그리스도의 피가 그를 구원한다고 믿는 어느 누구이든지 사람들 앞에서 정결한 생활을 해야 하기 때문이다.
35절에서 요한은 마리아를 그의 집에 모셔 놓은 후 다시 십자가로 돌아온 것이 분명하다. 그리스도가 마리아보다 더 중요하였다 ! 요한복음에서 마리아가 처음 발견되는 때는 그녀가 혼인 잔치에 있을 때였는데(2:1-11), 그녀에 대한 마지막 언급은 장례식에 있다.
하나님은 그리스도의 몸을 장사하기 위해 산헤드린의 두 회원인 니고데모와 요셉을 예비하셨다. 그렇지 않았다면 그리스도의 몸은 예루살렘 밖의 “쓰레기더미“인 게헨나에 던져졌을 것이다. 이사야 53장 9절은 그의 무덤이 부자와 함께 할 것이라고 약속하고 있다. 이것은 요한복음에서의 니고데모에 대한 세번째이자 마지막 언급이다. 적어도 우리는 그가 고백의 밝은 빛으로 나아오는 것을 본다(요 3장 참조).
니고데모와 요셉은 구약 성경을 통해 그리스도께서 언제, 어디서, 어떻게 죽으실 것인지를 알았다. 그들은 아마도 향유와 함께 이미 무덤을 준비해 두고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계신 동안 무덤에 숨어 있었을 것이다. 요셉은 이 무덤을 자기 자신을 위해서 마련한 것이 아니었다. 왜냐하면 어느 부자도 죄인들이 못박힌 장소의 근처에 묻히기를 원하지 않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는 그리스도의 몸을 재빨리 쉽게 돌볼 수 있도록 갈보리 근처의 토지를 구입하였다.
우리는 확실히 요셉이 두려워하는 제자이기 때문에 칭찬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그의 목적을 위해 이것을 사용하셨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요셉의 믿음이 공개적인 것이었다면, 공회는 그가 예수님을 돌보는 일에 대해 방해하였을 것이다. 요셉과 니고데모가 그리스도의 시신을 만졌을 때 그들은 스스로 유월절에 대해 더럽힌 것이었지만 그들은 개의치 않았다. 그들은 하나님의 어린 양이신 그분을 믿어야만 하였다.
그리스도의 탄생과 죽음을 대조해 보기란 흥미로운 일이다. 그는 빈곤하게 태어나 부자로 장사되었고, 강보에 싸여 이 세상에 오셔서 세상을 떠나셨다. 그의 탄생은 개인적인 것이었으나 그의 장사는 공적인 것이었다. 그의 탄생시에는 사람들이 경배하러 왔었으나, 그의 장례 때에는 그들이 그를 버렸거나 또는 조롱하였다."
요 20:1-18
▣ 그리스도의 부활-요한복음 20장-
이 장은 그리스도의 부활 후 세 번 나타나심을 기록하고 있다. 각각의 나타나심은 관련된 사람들의 삶에 다른 결과를 가져 왔다.
1. 마리아에게 보이심(20:1-18)
그리스도께서는 마리아에게서 일곱 귀신을 쫓아내셨고(눅 8:2), 마리아는 그리스도를 극진히 사랑하였다. 전형적인 “여성 특유의 스타일“로 그녀는 결론으로 비약하여, 누군가 그리스도의 몸을 훔쳐갔다고 생각하고는 베드로와 요한에게 알리기 위해 달려갔는데, 그들은 다음 차례로 무덤을 찾은 사람들이었다.
왜 요한이 베드로보다 앞서 달려갔는가?(4절) 여기에는 신체적인 이유가 있었을 것인데, 요한은 베드로보다 젊었다. 그러나 또한, 영적인 의미도 있다. 베드로는 아직 그리스도를 위한 그의 헌신을 재확인하지 않았으므로 그의 “영적인 힘“은 저조하였다. 이사야 40장 31절에서는 주님을 앙망하는 자는 “뛰어도 피곤치 않으리라“고 말하고 있다. 그러나, 베드로는 주님보다 앞서 달리면서 불순종하였다. 베드로의 죄는 그의 발(요 20:4)과 눈(요 21:7), 입술(주님을 부인함)과 그의 체온(요 18:18/눅 24:32)에 영향을 주었다.
그들은 무덤에서 무엇을 보았는가? 그들은 몸의 형체대로 수의(감긴 세마포)가 놓여져 있는 것을 보았으나, 몸은 없었다! 수의는 마치 빈 누에고치 같았다. 얼굴을 덮었던 수건은 조심스럽게 개켜져서 그대로 놓여져 있었는데, 이것은 도굴된 모습이 아니었다. 왜냐하면, 어떠한 도둑들도 수의를 찢지 않고 물건들을 흐트려 놓지도 않은 채 몸을 가져갈 수는 없기 때문이다. 예수께서는 수의와 바위 무덤을 통과하셨다. 8절은 그들이 본 것들을 증거로 그리스도의 부활을 믿었다고 말해 준다. 후에 그들은 그리스도를 개인적으로 만났고 또한 성경 때문에도 믿게 되었다.
여기에 영적인 문제들에 봉착할 때에 의지할 수 있는 증거의 세 가지 전형이 있다. 곧, 하나님께서 주신 증거들과 하나님의 말씀, 개인적인 체험이다. 사람이 그리스도께서 실재하신다는 것을 어떻게 알 수 있는가? 그는 다른 사람들의 삶에서 증거를 볼 수 있으며 하나님의 말씀 속에서 읽을 수도 있고, 그가 만약 그리스도를 믿는다면 개인적으로 그것을 체험하게 될 것이다. 10절에서, 그들이 집에 돌아간 후에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셨음을 선포하지 않았다는 것을 눈여겨보자. 지적인 증거만으로는 사람을 변화시킬 수 없다. 그는 그리스도를 만나야만 하는 것이다.
마리아는 선뜻 떠나지 못했기에 그리스도를 만났다. 기다림이 몇 배의 보상을 받았던가!(잠 8:17 참조) 그녀는 무덤 안에서 두 천사를 보았으나(눅 24:4 / “두 사람“), 너무나 큰 슬픔에 사로잡혀 있었으므로 그들이 위로가 되지 않았다. 12절에서의 천사에 대한 설명은 구약의 “시은좌“를 상기시킨다(출 25:17-19). 그리고, 부활하신 그리스도는 이제 하늘 나라에서 우리의 시은좌에 앉아 계신다.
그녀는 그리스도를 찾기 위하여 천사로부터 돌아섰다. 그녀는 천사들을 보는 것보다는 오히려 그리스도의 시신을 원하였다. 그 때 그녀가 본 사람은 진짜 그리스도이셨으나, 분명히 그녀의 눈은 가리워져서 그를 알아볼 수 없었다.
15절에서의 “... 줄을 알고“는 그녀의 슬픔을 전부 설명해 준다. 오늘날 얼마나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전혀 진짜가 아닌 것을 진짜 “...인 줄로 아는“ 비참함에 빠져 있는가? 예수께서 그녀의 이름을 부르시자, 그녀는 그리스도를 알아보았다. 그리스도는 자기의 사람들을 이름으로 부르시며(요 10:3-4), 그들은 그의 목소리를 안다(사 43:1).
17절은 부활의 아침 일찍, 아버지께 그의 마치신 일을 보고하러 그리스도께서 하늘로 승천하셨음을 시사한다. 이 승천은 안식일 다음 날 곡식 단을 흔드는 레위기 23장 1-14절에 주어진 모형을 성취하였다. 그리스도는 첫열매이시다(고전 15:23). 마리아의 그리스도와의 만남은 그녀를 선교사로 만들었다!"
요 20:19-25
2. 제자들에게 보이심(20:19-25)
“안식 후 첫날“이 두 번 언급되었다(20:1/20:19). 이 날은 안식일이 아니라 주일이다. 유대인의 안식일은 일곱째 날이며 일한 후에 쉬게 되는 것을 설명한다(율법주의). 주일은 주님의 날로서, 한 주의 첫날이며 일하기 전의 생명과 쉼을 말해 준다(은혜).
그리스도께서는 그의 영화로운 몸으로 잠긴 문을 통과하여 두려워하는 사람들에게 평화를 가져다 주셨다. 그리스도께서 그들에게 평화를 두 번 언급하셨음에 유의하자(19, 21절). 첫번째 “평강“은 십자가 상에서의 그리스도의 희생에 근거한 하나님과의 평화이며, 그리스도는 그들에게 그의 손과 옆구리를 보이셨다. 두번째 “평강“은 우리와 함께 거하심으로 인한 하나님과의 평화이다(빌 4장). 그리스도는 그들에게 그를 대신하여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대사의 직무를 행하도록 위임하셨다(요 17:15-18).
그들에게 숨을 내쉰 것은 하나님께서 아담에게 생명을 불어넣으신 것(창 2:7)을 상기시키는데, 디모데후서 3장 16절에서의 “하나님의 영감“이란 “하나님이 숨을 내쉬다“는 의미이다. 이러한 행동은 개인적이고 사사로운 것으로서그들에게 그의 명령을 수행하는 데에 필요한 영적인 힘과 분별력을 주는 것이었다. 오순절의 성령 강림은 봉사와 전도에 있어서 그들을 단결시키며 강하게 하였다.
23절에서의 “죄 사하는 권세“는 우리가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함으로써 죄들을 보류하거나 용서하는 의미 이외에는 오늘날의 그리스도인에게는 적용되지 않는다. 신약 성경의 어느 곳에도 사도가 사람들의 죄를 사하는 경우가 없다. 베드로(행 10:43)와 바울(행 13:38)은 모두 그리스도를 증거한다. 그 제자들에게는 특전이 있었다. 특히 사도행전의 앞 장들에서 그러한데, 여기에는 의문의 여지가 없지만, 이 사도적 특권은 오늘날 우리에게 속하지 않는 것이다."
요 20:26-31
3. 도마에게 보이심(20:26-31)
도마는 처음 모임에는 참석하지 알았다. 성도의 모임에 불참하는 것으로 인하여 우리는 얼마나 많은 것들을 잃는가 ! 도마가 “만일... 하지 않으면 믿지 아니하겠노라“고 말하는 것을 눈여겨보자. 그는 “쌍동이“라는 뜻의 “디두모“라고 불리워졌는데, 도마는 오늘날에도 많은 쌍동이들을 갖는다.
그 다음 주일(主日)에 제자들이 다 모여 있을 때에, 예수께서 그들과 도마에게 나타나셨다. 여기서 보여 주시는 그리스도의 용서하시는 그 사랑이 얼마나 놀라운가 ! 도마는 주님을 보고는 그가 요구했던 증거들에 대해서는 모두 잊어버렸다. “나의 주 나의 하나님 !“이라고 외치는 그의 간증은 우리를 전율케한다. 그리스도의 상처를 보이심은 그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그리스도는 여기서 우리가 이와 똑같은 축복을 소유할 수 있음을 말씀하신다. 왜냐하면 우리는 그리스도를 본 적이 없지만 믿는 이들 가운데 속해 있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의 모습이 나타났던 이 세 경우를 다시 검토하면 각기 다른 결과들을 볼 수가 있다.
마리아에게 있어서의 논점은 그리스도에 대한 사랑이다. 그녀는 그를 잃어버리고 그의 몸을 찾고자 하였다. 제자들에게 있어서는 소망이었다. 그들 모두의 소망은 사라져버렸으므로 그들은 방에 들어가 문을 잠그고 두려워하며 모여 있었다. 도마에게 있어서는 믿음의 문제가 제기되었다. 그는 증거를 보기 전에는 믿을 수가 없었다.
이것들은 그리스도인의 세 가지 은혜, 곧 믿음과 소망과 사랑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오늘도 살아 계시므로 우리의 믿음은 안전하다. 고린도전서 15장 17절은 “만일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 없으면 너희의 믿음은 헛것이니라“고 말한다. 우리는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신 주님을 통한 산 소망을 가지고 있다(벧전 1:3). 고린도전서 15장 19절은 “만일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의 바라는 것이 이생뿐이면 모든 사람들 가운데 우리가 더욱 불쌍한 자리라“고 말해 준다. 그리고 우리는 그를 보지 못하나 사랑한다(벧전 1:8).30-31절은 사람들이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영생을 얻게 될 것을 요한복음의 목적으로 진술한다. 이 책을 읽으면 그리스도를 믿고 영생을 얻은 많은 사람들, 예컨대 나다나엘(1:50)과 제자들(2:11), 사마리아인들(4:39), 왕의 신하(4:50), 소경(9:38), 마르다(11:27), 그리고 나사로를 본 유대인들(12:11)과 도마(20:28)처럼 그리스도를 만날 것이다. 이 모든 사람들이 “나는 믿는다 !“고 동일한 증언을 하였다."
요 21:1-3
▣ 요한복음의 맺음말-요한복음 21장-
이 마지막 장은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섬길 주인이시며 죄인들의 친구이심을 보여 준다. 이 장이 없었다면 우리는 베드로와 주님 사이에 무슨 일이 일어났으며, 그의 불순종이 실제로 다루어졌는지 어떤지의 여부에 대해 의문을 갖게 되었을 것이다.
1. 실패의 밤(21:1-3).
베드로는 그의 고기잡는 일로 되돌아가는 데에 명령도 없이 행하였다. 그는 그리스도를 따르려고 모든 것을 버렸었다(눅 5:1-11). 그러나, 이제 그는 옛생활로 되돌아 갔다.
이 장면에 대한 모든 것이 실패임을 말해 준다. 첫째로, 때는 밤이었다. 이것은 그들이 빛 가운데서 행하지 않음을 시사한다. 둘째로, 그들은 주님으로부터 오는 지시적인 말씀을 가지고 있지 못했으며, 세째로 그들의 노력은 실패하였다. 네째로, 그들은 그리스도께서 오셨을 때에 알아보지 못하였는데, 이는 그들의 영적인 시각이 희미하다는 것을 보여 준다. 베드로는 성급한 결정을 내림으로써 다른 여섯 사람을 그릇된 길로 인도하였다. 악영향을 끼친다는 것은 얼마나 비극적인 일인가 !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 거하고 그의 말씀에 순종할 때에만 하나님께서 축복하신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할 필요가 있다. “내가 없이는 너희가 아무 일도 할 수없으리라.“ 너무도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좋은 의미로 시작하여 비성경적인 일들을 행하나, 다만 시간과 재물, 힘만을 낭비하고 아무것도 얻지 못한다. 성급함에 대해서는 주의하자. 주님께서 인도하시기를 기다리고, 그로 하여금 축복하시게 하는 편이 우리 자신의 많은 육신적인 행위들을 갖는 것보다 낫다."
요 21:4-17
2. 결단의 아침(21:4-17)
그리스도께서 이 장면에 나타나시자, 빛이 비치기 시작한다. 그리스도는 해변에서 그들에게 지시하셨는데, 그들은 대단히 많은 고기를 잡았다 ! 주님께서 조정하시는 잠깐 동안의 일이 온 밤을 지새우는 육신적인 노력보다 더 많은 것을 성취하였다. 이 기적을 누가복음 5장에서의 베드로의 경력이 시작되는 한 때와 비교하는 것은 흥미로운 일이다.누가복음 5장 요한복음 21장
실패의 밤을 지낸후 실패의 밤을 지낸 후
수를 셀 수 없이 잡힘 153마리의 고기를 잡음(11절)
그물이 찢어지기 시작함 그물이 찢어지지 않음
그리스도께서 배에서 지시하심 그리스도께서 해변에서 지시하심
어떤 이는 이것을 오늘날의 교회(눅 5장)와, 그리스도께서 다시 오실 말세의 교회(요 21장)의 상징으로 본다. 오늘날 우리는 복음의 그물을 던지지만 종종 그물이 찢어지고, 실패처럼 보이며, 실제로 얼마 만큼의 영혼을 구원했는지를 알지 못한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다시 돌아 오실 때에는 정확한 수를 알 수 있으며, 잃어버리는 자가 없을 것이다. 오늘날에는 많은 배와 어부들이 일하고 있지만, 그리스도께서 다시 오실 때에는 한 교회와, 복음의 그물에 구속된 모든 이들을 보게 될 것이다.
이 장에는 사실상 고기를 잡은 것 이외에도 몇 가지 기적들이 있다. 베드로는 일곱 사람이 함께 해도 끌어 올릴 수 없었던 그물을 끌어 올리는 기적적인 힘을 받았다(6, 11절). 그물이 찢어지지 않았다는 사실도 놀라운 일이다. 숯불과 조반 역시 기적적인 공급임에 틀림없다.
이러한 전 상황은 베드로의 양심을 깨우고 그의 눈을 열게 하기 위해 계획된 것이었다. 고기를 잡은 일은 그에게 모든 것을 버리고 그리스도를 따랐던 과거의 결심을 상기시켰을 것이며, 숯불은 그리스도를 부인했던(요 18:18) 기억을 되살렸을 것이었다. 갈릴리해는 베드로에게 그리스도와 함께 체험했던 갖가지 일들, 예컨대 5,000명을 먹이신 일과 물 위를 걸었던 일, 동전을 삼킨 고기를 잡았던 것, 풍랑을 잔잔케 한 일 등을 상기시켜 주었을 것이다.
베드로가 세 번씩이나 그리스도를 공적으로 부인하였었으므로, 그는 그것을 공적으로 바로잡아야 했다. 그리스도께서 베드로의 죄를 다루시기 전에 그를 먹이신 것에 유의하자. 우리를 축복하시고 나서 우리를 다루시는 주님을 어떻게 닮을 수 있을까 !
논제는 그리스도를 향한 그의 사랑에 대한 것이었다. 만약 실제로 그리스도를 사랑한다면, 그 생활이 헌신되어야 할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베드로에게 주신 새로운 명령에 주목하자. 그는 사람을 낚는 어부일 뿐아니라 이제는 목자(목회자)이다(벧전 5장). 그는 이제 양들을 치는 목자이며, 그들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먹인다.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사람을 낚는 어부(영혼 구원자)가 되고자 하지만, 그중 몇몇이 양떼를 먹이는 특별한 사역을 위해 소명을 받는다. 만약 그들이 먹이고돌보아야 할 곳에 교회가 없다면 잃어버린 자들을 구하기에 얼마나 좋은 곳인가!
요 21:18-25
3. 헌신의 낮(21:18-25)
여기에 아들됨(구원받음)과 제자됨(주님을 따름)간의 차이점이 나타나 있다. 모든 그리스도인이 다 제자인 것은 아니다. 베드로는 범죄하였을 때 그의 아들의 신분을 상실한 것은 아니지만 제자로서의 상태를 벗어났다. 이 때문에 그리스도는 “나를 따르라“고 거듭 말씀하셨다.
또한 그리스도는 베드로와 십자가를 직면하여(18절) 어느 때 베드로가 십자가에 못박히게 될 것을 시사하신다(벧후 1:12-14). 그리스도를 따를 수 있기 전에 우리는 십자가를 져야만 한다. 베드로가 그리스도를 십자가로부터 지키려고 하였던 일을 회고해 보면, 이 명령은 새로운 의미를 갖는다(마 16:21-28).
이제 베드로는 다시 주님께로부터 눈을 돌려 다른 사람들을 보는 비극적인 실수를 저질렀는데, 이 경우는 요한에 대한 것이었다. 만약 우리가 그리스도를 따른다면, 우리는 오직 그에게만 우리의 눈을 고정시켜야 한다(히 12:1-2). 그리스도께서 그의 다른 일꾼들을 어떻게 인도하시는지에 대한 것은 “우리의 일“이 아니다. 우리의 할 일은 우리 자신이 그리스도를 따르며 그에게 순종하는 것이다. 로마서 14장에는 우리가 다른 그리스도인들을 어떻게 대해야 하는지에 관한 교훈이 기록되어 있다.
요한은 우리에게 이 세상 자체로는 그리스도의 생애에 대해 기록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보유할 수 없다는 것을 확신시킴으로 그의 복음서를 끝맺고 있다. 사복음서는 “그리스도의 삶“이 아니라 오히려 각기 다른 그리스도의 초상화로서, 각각의 다른 강조점을 가지고 있다. 요한으로 말하자면, 그리스도의 생애를 완전하게 기록하기란 불가능하다.
요한복음 21장에서 베드로가 그리스도를 만나 그의 죄를 고백하고 그의 사랑을 확고히 하지 않았더라면, 우리는 사도행전 1장에서 베드로를 결코 다시 만날 수 없었을 것이다. 하나님께서 베드로를 사도행전에서 사용하실 수 있었던 것은 그가 주님과의 관계를 바로잡았기 때문이었다. 그리스도는 그에게 순종하며 따르는 자들을 축복하시며 사용하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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