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명기 연구 최근경향
I. 서 론
반세기 이전까지만 해도 '신명기(Deuteronomy)' '신명기적(Deuteronomic)' 이라는 용어는 성서학에서 특별히 신명기를 지칭하거나 오경의 D전승을 지칭하는 용어로 사용했었다. 그러나 현재는 많은 변화가 일어나 새로 만들어진 용어인 'Deuteronomistic'이라는 개념은 그것의 영향이 모든 것에 퍼져 있다고 말할 정도로 그 개념을 정의하기가 힘든 용어가 되었다.2)
신명기 역사의 사전적인 정의는 "히브리 성서의 전기 예언서로 알려진 여호수아, 사사기, 사무엘 상,하, 열왕기 상, 하 뿐 아니라 신명기까지를 지칭하는 일반적으로 사용하는 용어"3) 라고 나타나 있다. 이는 신명기에 나오는 역사관, 혹은 역사철학이 그 다음에 나오는 6권의 책에 그대로 반영되어 있다는 것으로 이 6권의 책에 나타난 구체적인 사건을 해석하는 척도는 신명기로부터 제시된, 다시 말해 신명기 신학에 입각하여야 한다는 것이다.
신명기 역사는 이스라엘이 가나안에 들어가 정착하는 과정에서부터 왕국이 멸망하고 바벨론 포로 중반부까지의 역사를 일관된 신학적 관점으로 기술하며 바벨론 포로라는 상황에서 제기되었던 가장 중요한 질문 중의 하나인 "왜 이와 같은 비극적인 상황이 일어나게 되었는가" 에 대해 신학적인 해석을 해주고 있다. 즉, 이스라엘이 겪고 있는 고통을 이스라엘의 죄에 대한 하나님의 징벌 때문이라는 것을 처음부터 분명히 밝히고 있고 이에 덧붙혀 이스라엘이 회개하고 하나님께 돌아오면 하나님께서 새 출발을 허락해 주신다는 것을 밝히고 있다. 이렇게 완성된 최종 형태의 신명기 역사는 포로기에 형성된 신학적 통찰력의 산물이라 말할 수 있다.4)
그런데 최종 완성된 신명기 역사가 어떠한 과정을 거쳐서 최종 형태를 이루게 되었는지에 대해서는 학자들 사이에 많은 주장들이 있어왔고 오늘에 이르기까지 활발하게 학문적인 논의가 계속되고 있다. 이러한 신명기 역사의 최종 편집 단계에 대한 논의는 최근까지 다음의 4가지 방향에서 진행되었는데 이에 대해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II. 마틴 노트(M. Noth)와 신명기 역사
신명기 역사의 편집에 대한 연구는 노트(M. Noth)의 『전승사 연구』(Uberlieferungsgeschichtliche Studien)가 출판된 1943년부터 본격적으로 논의되기 시작 하였다.5) 노트의 연구는 신명기와 전기 예언서라고 불리는 여호수아, 사사기, 사무엘 상, 하 열왕기 상, 하 등 6권의 책은 포로기 시대의 한 저자에 의해 쓰여졌다고 규정하며 이 저자를 '신명기 역사가'라고 칭했다.6) 노트의 이러한 주장은 그의 독창적인 주장이라기 보다는 한 세기 전부터 드 베테(W. M. L. de Wette)나 벨하우젠(J. Wellhausen) 등에 의해 연구되어진 ‘전기 예언서에 나타난 신명기 역사가의 활동 연구’의 연장선에서 나타난 것이다.7) 노트는 이들의 연구를 뛰어넘어 신명기 역사가를 단순한 전승의 수집자가 아닌 자료의 창조적인 편찬자로 보고 있다. 노트는 신명기 역사의 통일성을 다음의 4가지 주된 논증으로 설명하고 있다. 첫째, 신명기 역사안에 있는 동일한 단순 구절의 잦은 반복이나 비슷한 문장 구조 등은 그것이 신명기 역사의 형식이라고 쉽게 이해할 수 있게 되어 있다. 노트는 이러한 신명기 역사 안에 들어 있는 언어의 통일성들은 적어도 그 저작이 독립적인 것이라는 것을 반증한다고 말하고 있다.8)
둘째, 노트에 의하면 신명기 역사의 통일성은 정기적으로 특별한 주제를 강조하기 위해 쓰이고 있는 연설이나 회고를 통해 나타난다고 보는데 이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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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호수아 1:11-15절 - 땅의 점령에 대한 여호수아의 연설
여호수아 12장 - 정복에 대한 회고
여호수아 23장 - 가나안 땅에서 이스라엘의 삶에 관한 여호수아의 고별 연설
사사기 2:11-23절 - 사사시대 역사 과정의 예고
사무엘 상 12장 - 왕의 즉위식에서 백성들에게 행한 사무엘의 연설
열왕기 상 8:14-61절 - 성전 봉헌식에서의 솔로몬의 기도
열왕기 하 17:7-23절 - 이스라엘 왕조의 비참한 최후에 대한 회고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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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연설 또는 회고를 통하여 신명기 역사가는 이스라엘이 그들의 역사를 통해 순종하였을 때와 불순종하였을 때 일어나는 각각의 결과를 보여주며 하나님의 뜻을 전달해 주고 있다고 본다.
셋째, 연대기적 구조를 통해 통일성을 살펴볼 수 있다. 노트는 신명기 역사가는 복잡한 역사를 그의 전체 구조 속에서 통일시켜 하나의 역사를 이루어 놓은 것으로 보고 있다.10)
넷째, 신명기 역사 안에는 일관된 신학 사상이 나타나고 있다는 것이다. 노트에 의하면 신명기 역사는 하나님을 경배하는 주제가 그의 역사의 중심이며 신명기 법에 의해 이러한 요구를 그의 관점에 늘 간직하고 있다고 본다.11)
위와 같은 관점에서 이 작업을 수행한 사람은 포로 중반기의 한 사람의 신명기 역사가로 노트는 생각하고 있다. 이러한 노트의 연구를 오늘날 그대로 받아들이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그러나 노트의 연구는 이후 신명기 역사의 편집 과정을 연구하는 학자들의 연구 출발점이 되었고 이에 대한 수정, 보완, 거부 등 다양한 연구가 뒤따르게 되었는데 노트 이후의 연구 경향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III. 신명기 역사의 이중 편집이론
신명기 역사가 한 사람의 편집자에 의해 편집되었다는 노트의 주장에 대한 수정으로 제시된 이론은 이중편집 이론이다. 이 이론이 제기된 가장 큰 이유는 신명기 역사가 왕국의 멸망을 경험한 이후 쓰였음에도 불구하고 일관되게 왕국 멸망 이후의 시각이 반영된 것이 아니라 멸망 이전의 시각도 그 역사에서 종종 나타나기 때문에 노트의 이론은 한계 상황에 직면하고 있다는 이유에서이다.12) 이러한 이중 편집이론의 대표자는 크로스(F. M. Cross)이다.
크로스는 그의 연구를 통해 신명기 역사의 편집을 요시야왕 때의 첫번째 편집(Dtr1)과 포로기 때의 두번째 편집(Dtr2)으로 구성되었다고 보는 이중편집이론13) 을 주장하였다. 그는 신명기 역사의 첫 번째 편집을 요시야 통치시기에 요시야의 개혁과 다윗 왕국 재건 계획의 문서로서 쓰여졌다고 본다. 그래서 Dtr1 에는 요시야왕을 새 다윗왕으로 묘사하고 있고 모든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최근에 발견된 신명기 율법책을 통해 직접적으로 야웨에게로 돌아오도록 선포하고 있는 특징이 있다고 한다. 그 뒤 대략 주전 550년경 포로기 편집자(Dtr2)에 의해 이것이 개정되어 현재 포로기 상황에 적용하게 하였는데 크로스에 의하면 포로기 편집자에 의한 신명기 역사의 재편집은 상대적으로 적은 부분이었으며 그가 가지고 있는 초기 자료에 대한 신뢰성으로 인해 초기 자료는 거의 손대지 않은 상태에서 남아 있었다고 한다.14)
크로스 연구의 공헌은 4경과 신명기 역사의 관계에서 4경은 주전 6세기 중반의 작품으로 보지만 신명기 역사는 그 대부분이 요시야 시대에 완성된 것이 포로기 때 조금의 수정이 가해진 것으로 보며 노트의 연구와의 차별을 나타냈다는 점에 있다. 그러나 크로스의 이중 편집 이론은 오브라이언(M. A. O'Brien)에 의해 비판을 받고 있다. 오브라이언에 의하면 크로스는 이중 편집 이론을 주장하면서도 포로기 편집보다는 지나치게 요시야 시대의 개혁의 부산물로서의 신명기 역사를 강조하고 있다고 지적하고 있다.15) 이러한 크로스의 연구경향은 크로스의 하바드 대학 제자들과 미국 학자들에 의해 지지 받고 있다.16)
이중편집이론의 경향이 있는 학자 중 최근 활발히 연구를 진행하고 있는 사람은 프로반(I. W. Provan)이다. 프로반은 신명기 역사의 3중, 혹은 다중 편집이론에 반대하고 이중편집이론을 제시하기 때문에 크로스 학파의 지지를 받고 있다.17) 그러나 그들과의 차이는 신명기 역사의 포로이전 편집의 주인공을 주전 7세기 요시야왕이 아닌 히스기야 왕으로 보고 있는 차이가 있다. 그의 연구는 주로 열왕기 상, 하에 나타난 심판 양식의 분석을 통해 이루어졌다. 프로반의 연구는 기존의 포로 이전 편집을 주장하는 학자들과 같이 요시야 왕정의 초기 시대에 신명기 역사가 1차로 편집되었다고 본다. 그러나 시기상으로는 요시야 시대일지라도 그 안에 나타나고 있는 신학적 주제나 그 정점은 히스기야 시대의 것으로 보고 있다. 그래서 프로반이 제시하는 Dtr1은 사울에서 히스기야 시대까지의 역사였으며 신명기에서 사사기까지의 포로기 편집이 뒤에 첨부되었다고 주장한다.18)
이상 신명기 역사의 이중 편집 이론을 주장한 학자들의 의견은 크게 두 방향에서 진행되었다고 할 수 있다. 첫째 방향은 그 편집 시기를 요시야 시대의 종교 개혁을 선전하기 위한 첫 번째 편집과, 포로기 상황에 대응하기 위한 두 번째 편집의 과정으로 나누어 본 경향의 연구이다. 둘째 방향은 첫 번째 편집의 정점을 요시야 통치시기가 아닌 히스기야 통치시기로 보며 두 번째 편집을 포로시기로 잡는 경향의 연구이다. 이러한 연구들은 신명기 역사를 포로 시기 한 사람의 편집자에 의해 저술되었다고 보는 노트 의견의 모순을 해결한 점을 인정할 수 있지만 다음과 같은 문제점을 가지고 있다. 우선 그들이 주장하고 있는 요시야 시대의 편집(혹은 히스기야 시대)을 뒷받침 할 수 있는 성서의 본문이나 구조, 당시의 역사 등 그들의 가설을 증명할 만한 세심한 연구가 부족하다는 것이다. 또한 신명기 역사가 이중 편집될 때 누구에 의해서 신명기 역사가 쓰여졌는가도 중요한 문제인데 각 학자들의 의견이 불일치하고 있고 자신의 주장 속에서도 모순된 의견이 나타나는 문제가 있다. 한 예로 프리드만(R. E. Friedman)은 그의 저서를 통하여 신명기 역사의 첫 번째 편집을 주전 609년 요시야가 죽기 전으로, 두 번째 편집을 주전 587년 왕국 멸망 이후로 보고 있다.19) 그는 1981년의 저서에서는 Dtr2를 이집트 공동체의 산물로 추정하였다.20) 그러나 그는 이후의 저서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Dtr2 의 편집자를 예레미야로 보고 있으며 그가 왕국의 멸망이후 신명기 역사를 편집한 것으로 보고 있다.21) 그러나 프리드만의 주장은 요시야 시대와 그 이후 시대에 대한 역사나 사회 상황을 고려하지 않고 신명기 역사가 왜 이중편집을 할 수밖에 없었는지에 대한 세심한 연구 없이 내린 성급한 결론이라 할 수 있다. 왜냐하면 그가 처음 주장한 Dtr2의 이집트 공동체 편집설은 많은 이집트 유대인 공동체의 혼합종교의 경향22)을 고려할 때 이들에 의해 포로민들에게 결정적인 희망을 준 신명기 역사가 최종 편집되었다는 주장은 받아들이기 어렵기 때문이다. 또한 이후의 주장인 예레미야에 의한 신명기 역사 편집설도 예루살렘 제의에서 배척당한 아나돗 제사장 가문 출신23)인 예레미야에 의해서 정착에서 포로기까지의 방대한 역사를 서술할 수 있었는가에 대한 의문을 해결하기가 쉽지 않다. 이런 이유에서 이중편집 이론은 신명기 역사에 대한 편집 당시의 상황이나 편집 당사자에 대한 세심한 연구없이 편집 자체를 논하고 있는 오류를 발견할 수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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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V. 신명기 역사의 3중 편집이론
두번째 경향은, 괴팅엔(Gottingen) 대학의 학자인 스멘트(R.Smend)가 폰 라트 기념논문집에서 발표하고 그의 제자 디트리히(W.Dietrich)에 의해 발전된 이론으로 신명기 역사의 3중 편집이론이다.
스멘트는 그의 논문24)에서 여호수아서의 몇몇 구절들과 사사기의 서문 부분을 분석한 후 다음과 같은 연구 결과를 내놓았다. 즉, 언어와 특징적인 신학, 이야기 안의 연속성 단절의 발견 등을 통해 스멘트는 여호수아 1:7-9; 13:1bβ-6; 삿 2:17,20-21,23절 등은 기존의 신명기 역사에 후대의 편집자들에 의해 삽입되어져 구성된 것으로 보고 있다. 그리고 같은 편집자가 삿 1:1-2:9절 역시 삽입한 것으로 보고 있다. 이 후대의 편집자의 주된 특징은 율법을 첨가하는데 있었는데 스멘트는 이 편집자를 율법적 편집자(DtrN)로 부르고 있다. DtrN에 의하면 땅의 정복은 율법의 복종에 의존하고 있으며 정복 당하는 다른 백성들의 운명은 율법을 지키지 않음에 있다고 보고 있다. 그래서 스멘트는 원 신명기 역사(DtrG)에 율법적 편집자의 후대 편집이 있었던 것으로 보며 신명기 역사의 편집자는 율법의 관점에서 신명기 역사의 초기 전승 뿐 아니라 전체 역사를 개정하였다고 주장한다.25)
한편 스멘트는 그의 제자 디트리히(W. Dietrich)의 도움으로 그의 연구 방법을 전체 신명기 역사에 적용하게 되는데26) 삼중 편집이론을 완성한 디트리히의 연구는 다음과 같다.
디트리히는 스멘트의 연구 결과를 이용하여 열왕기 서의 연구를 통해 예언적인 경향이 있는 편집층을 구별하여 예언적 편집자(DtrP)라고 명명하였다. 디트리히에 의하면 이 예언적 편집자는 원 신명기 역사에 예언 형태의 언급을 추가하였을 뿐 아니라 열왕기 서에 나타난 많은 수의 주된 전통적인 예언 설화를 첨가하였다고 보고 있다.27) 그래서 디트리히는 신명기 역사의 편집을 원 신명기 역사(DtrH)는 왕국 멸망이 임박하였을 때 구성되었고 예언적 편집의 단계(DtrP)는 예언적 편집자가 이후 자신의 예언적 메시지와 다른 예언적 자료들을 삽입하여 역사를 구성한 것으로 본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율법적 편집단계(DtrN)는 여호야긴 왕의 석방 이후 친 다윗 성향의 율법적 편집자에 의해 여호야긴 석방으로 말미암은 희망이 사라지기 전에 신명기 역사를 편집하여 그의 저작을 완성한 것으로 보고 있다.28) 그래서 디트리히가 말하는 예언적 편집(DtrP) 단계는 그 시기상 원 신명기 역사(DtrH) 이후에, 그리고 율법적 편집(DtrN) 이전에 위치된 것으로 보고 있다.29) 이를 정리해 보면 스멘트 학파의 이론은 역사가(DtrG), 예언적 편집자(DtrP), 그리고 율법적 편집자(DtrN) 등의 3중 편집 과정을 통해 신명기 역사가 편집되었다고 주장하고 있는 이론이다.
디트리히의 의견은 바이욜라(T. Veijola)에 의해 수정 발전된다. 바이욜라는 그의 두 권의 저서를 통해 신명기 역사의 3중 편집 이론을 발전시키고 있다.30) 그의 연구는 신명기 역사의 3중편집 이론의 근거를 다윗과 그의 왕조의 개념이 어떻게 발전하느냐에 따라 각각의 편집층을 구별하고 있다. 바이욜라에 의하면 신명기 역사안에는 서로 다른 3개의 다윗의 신학적 모습이 분명히 나타나고 있다고 한다. 즉, 원 신명기 역사(DtrG)에 나타난 다윗은 정당하고 경건한 사람으로 묘사되고 있고 다윗의 왕위 계승도 그 자신의 노력에 의해 이루어진 것이 아닌 하나님의 목적에 의해 이루어 진 것으로 보고 있다. 또한 원 신명기 역사는 다윗 왕조를 영원한 왕조로 이해했는데 이러한 원 신명기 역사 편집자의 신학적 관점은 포로기 동안 발전되어 미래의 희망을 표현하였다고 본다. 이에 비해 예언적 편집자(DtrP)는 다윗을 경건한 사람으로 보기보다는 참회하는 사람으로 나타내고 있으며 예언의 중재자보다 그 중요성이 떨어지는 인물로 묘사하고 있다. 예언적 편집자의 신학에서는 심판에 초점을 맞추고 있고 다윗 왕조에게 어떠한 미래로 제공되지 않음을 말하고 있다. 이에 반해 신명기 역사의 율법적 편집자(DtrN)는 다윗을 율법에 순종하는 완벽한 모델로 제시하고 있고 후대의 왕 누구도 다윗의 위치에 도달할 수 없다는 기준을 제시하며 다윗을 나타내고 있다. 그래나 신명기 역사의 율법적 편집에서는 다윗을 율법을 신실하게 의지하였을 때에 한해 다윗왕조의 영원성을 보장하는 조건을 달고 있으며 이를 다윗 왕조뿐 아니라 모든 이스라엘 백성에게 확대 적용함으로 원 신명기 역사의 편집(DtrG)에 비해 반 왕조적 성향을 가지고 포로기 상황에 대응하였다 한다.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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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스멘트 계열의 학자들의 공헌은 노트의 단일 저작설에 반대하고 신명기 역사의 포로기 편집을 3단계로 세분화하여 더욱 구체적으로 나타낸 데 있다. 그러나 반대로 노트의 주장과 같이 역사, 율법, 예언등의 전문적 분야의 편집이 왜 한 사람의 관점과, 의도적 신학적 배열로 나타낼 수 없느냐는 질문에 대해선 효과적으로 답변을 못하는 문제가 제기되고 있으며 스멘트 학파 안에서도 의견이 일치되지 않은 문제를 나타내고 있다.32) 또한 크노퍼스(G. N. Knoppers)에 의하면 "스멘트 학파에 의한 다양한 편집층의 분류는 그 안에 심각한 방법론적인 부적절성과 불일치성이 비평가들에 의해 발견되어지고 있다."고 지적하고 있다.33) 오브라이언 역시 스멘트 학파는 DtrP, DtrN의 저작을 기초로 하여 신명기 역사의 정확한 재구성을 하는데 실패하였다고 보며 이들의 견해를 비판한다.34) 이러한 스멘트 계열의 견해는 그의 제자들과 독일 계통의 학자들에 의해 지지를 받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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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 신명기 역사의 한 사람에 의한 편집이론
세 번째 경향은, 신명기 역사의 이중 편집이나 3중 편집 이론에 반대하며 노트의 이론과 같이 신명기 역사를 다양한 성문화된 자료를 사용한 한 사람에 의해 편집되었다고 보지만 노트의 이론에 수정을 가하고 있는 주장들이다.
먼저 호프만(H-D, Hoffmann)은 신명기 역사에 나타난 제의 개혁의 주제를 연구하여 노트의 이론을 강화하려 했다.35) 그에 의하면 제의 개혁의 본문은 왕정 시대에 주로 다섯 가지 단계로 형성되었다고 보고 있다. 첫째 단계는 솔로몬에 의한 이교도 제의의 시작과 이어지는 북쪽 여로보암 치하의 북쪽 왕조와 르호보암 치하의 남쪽 왕조의 제의 행위를 말하고 있다. 둘째 단계는 북쪽 왕국의 아합(왕상 16:30-33), 아하시아(왕상 22:53-54), 요람(왕하 1:1-3)왕 등의 제의 평가 기준을 말하고 있다. 한 예로 북쪽 왕국의 아합왕은 부정적인 모델로 남쪽 왕국의 아사왕은 긍정적인 모델로 제시되고 있다. 세 번째 단계는 북쪽의 예후(왕하 9-10)왕과 남쪽의 여호야다(왕하 11:1-20)왕의 개혁 정책을 묘사하고 있다. 넷째 단계는 신명기 역사가에 의해 정치와 종교적인 면을 밀접하게 융합시켜 북쪽 왕국의 정치적인 멸망은 종교적인 타락의 상태와 밀접한 관련이 있음을 제시하고 있다. 마지막 다섯째 단계는 제의의 역사에서 종교 개혁을 수행한 위대한 개혁자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고 한다.36) 호프만은 이러한 제의 개혁의 주제는 왕정 시대의 역사 뿐 아니라 왕정이전의 역사에도 적용될 수 있다고 보며 왕정 이전의 역사를 정착에서 기드온까지, 아비멜렉에서 입다까지, 사사시대의 끝에서 사무엘 시대까지로 3분하여 제의 개혁의 주제를 적용시키고 있다.
그러나 호프만은 한 사람의 편집자에 의해 편집된 신명기 역사의 통일성을 여러 근거를 통해 강하게 제시하고 있지만 다음과 같은 문제점을 지니고 있다. 첫째, 호프만의 전승사적 방법은 성서 텍스트에 나타난 제의 보도의 불균형적인 성격을 만족스럽게 설명하지 못하고 있다. 둘째, 호프만의 이론은 신명기 역사안에서 한 사람 이상의 저작으로 추정되어지는 여러 본문들 사이의 긴장을 충분하게 설명하지 못하고 있는 단점이 있다.37)
이러한 경향의 또 다른 학자로는 펙함(B. Peckham)이 있다. 그는 그의 저서를 통해 신명기 역사에 대한 노트의 이론에 나타난 자료의 단편성과 불일치성에 의문을 제기하며 노트 이론을 수정하는 그의 이론을 제시한다. 펙함은 신명기 역사의 구문 분석과 각 자료들의 연관 관계의 연구를 통해 노트가 말한 신명기 역사의 한 사람에 의한 저작설과 이후 어떤 편집 과정을 거치지 않았다는 주장에 일단 긍정한다. 그러나 그는 신명기 역사의 최종 편집자(Dtr2)의 역할을 강조하며 다음과 같이 수정된 이론을 말한다. 즉, 신명기 역사의 최종 편집자가 사용한 자료로는 J, Dtr1 , P, E 전승으로 보고 있고 이 최종 편집자 한사람의 손을 거쳐(Dtr2) 이 자료들을 상호 연관 그리고 포함시켜 창세기-왕하 25장에 이르는 확장된 신명기 역사가 형성되었다고 본다.38) 그런데 펙함은 Dtr2가 신명기 역사를 형성할 때는 반복과 모방을 사용함을 통해 그 이전의 전승과 거의 구분 할 수 없는 그의 역사를 형성하였다고 주장한다.39)
이러한 펙함 이론의 공헌은 노트의 이론을 가장 잘 받아들이고 발전시킨 데 있다. 그러나 그가 복잡하게 제시한 신명기 역사의 편집층40)에 대해서 맥켄지(S. L. Mckenzie)는 "펙함은 신명기 역사를 어떻게 읽어야 할 지를 보여주려고 했지만 그것을 반드시 그의 방법으로만 읽어야 한다는 증거를 제시하지 못했다"41)고 비판하고 있다. 또한 오브라이언은 “만약 다른 평가 기준에 의해 본문의 관점을 가치있게 분석하여 인용되어지더라도 신명기 역사의 언어의 중요성과 그 특징적인 신학을 신명기 역사의 성격과 범위의 적당한 이해로 바꿀 수는 없다”42)며 펙함의 이론을 강하게 비판하고 있다.
이상에서 제시한 학자들의 공헌은 신명기 역사의 한사람에 의한 편집설이 말해 주듯이 신명기 역사의 통일성에 대해 많은 근거를 우리에게 제시해주고 있는 공헌이 있다. 그러나 이들 중 누구도 기존 학자들의 연구인 신명기 역사의 조직적 편집의 가능성에 대한 의견이나 여러 편집 층의 존재의 가능성을 대해 말하고 있는 의견에 대해 그 가능성을 차단할 만한 근거를 제시하지 못하고 있는 한계가 있다.43) 이들과 비슷한 경향의 학자로는 폴진(R. Polzin)44)과 반 시터스(J. van Seters)45) 등이 있다.
VI. 크로스 학파와 스멘트 학파의 타협적 위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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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번째 경향은 크로스 학파와 스멘트 학파의 중간에 서서 어느 한쪽에 치우치지 않고 타협적인 경향이 있는 연구이다. 이러한 경향은 단순히 크로스 학파와 스멘트 학파의 이론을 결합시켜 놓은 것이 아니라 두 이론의 문제점들을 보완 발전 시켜 새로운 결과를 제시한 연구라 할 수 있다.
이러한 경향의 연구자로는 먼저 메이스(A. D. H. Mayes)를 들 수 있다. 메이스는 크로스 학파에게선 신명기 역사의 요시야 시대 편집 이론을 받아들였고 스멘트 학파로부터는 율법에 강한 관심을 보이고 있는(DtrN) 포로기 편집 이론을 받아들였다. 그래서 그는 신명기 역사의 주된 편집층은 요시야의 개혁 사건에서 정점을 이루고 이 시기에 역사의 모든 구조를 완성하게 되었다고 본다. 그리고 이후 포로기 상황에서 이스라엘의 번영과 생존은 하나님의 율법에 순종함에 있음을 강조하는 후대 편집층이 생겨났다고 보고 있다.46) 그는 그의 저서에서 편집비평 방법에 의해 신명기 역사의 각 부분을 분석하여 구체적인 편집층을 제시하고 있는데 한 예로 사사기의 예를 들면 주 편집층에서는 이스라엘의 완전한 정복을 말하고 있고 그들의 우상 숭배가 외부로부터 온 대적들의 억압을 받는 이유가 되었다고 설명한다. 그러나 포로기 편집에서는 그들의 안전의 필수 요건으로 율법에 대한 순종과 우상숭배에 대한 거부와 관련하여 말하고 있다. 그래서 포로기 편집에서는 정복은 불완전하였고 이스라엘의 번영은 정복되어지지 않은 대적들에 의해 위협을 받게 되었다.47) 메이스는 여기서 한 걸음 더 들어가 포로기 편집자와는 별도로 독립된 고대 자료를 가지고 있는 제3의 편집자의 존재 가능성을 제기하며 이들이 가지고 있는 독립된 자료는 계약 법, 법궤, 레위인등의 자료로 구성되었다고 한다.48)
이러한 메이스의 연구는 크로스 학파와 스멘트 학파의 이론을 조화롭게 결합한 공헌이 있다. 그러나 그의 연구는 프로반의 지적대로 스멘트의 DtrG와 DtrN의 주제가 심각한 결함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메이스가 이를 자신의 이론의 기초로 하고 있는 점은 그의 모든 이론의 실패를 초래할 수도 있는 문제가 있다.49)
메이스 이후 역시 타협적인 위치에서 연구를 진행한 학자는 오브라이언(M. A. O'Brien)이다. 그는 여러 가지 방법을 사용하여 어떻게 다양한 역사의 부분들이 결합되어져 거대한 전체 역사를 이루게 되었는지를 발견하는데 연구의 초점을 맞추었다. 오브라이언에 의하면 원 신명기 역사가는 모세에서 요시야왕까지의 이스라엘 지도자의 이야기로서 역사를 바라보며 이러한 하나의 전체 개념에 의해 역사를 구성하였다고 보고 있다.50) 즉, 원래 존재하던 신명기 역사를 이스라엘의 지도자의 이야기와 동일화 시켜 모세에서 요시아까지의 신명기 역사의 구조적 분석을 통해 모세와 여호수아 아래의 이스라엘 시기, 사사에서 왕정 사이의 이스라엘 시기, 예언자와 왕 아래에서의 이스라엘의 시기 등 세부분의 통솔 기간이 나타난다고 한다. 모세에서 여호수아까지의 통솔 기간에 신명기 역사의 편집자는 두 개의 주 된 자료를 사용하였다 한다. 첫 번째 자료는 하나님에 대한 완전한 신실성을 강조하고 중앙 성소를 강하게 요구하고 있는 율법적 자료이며 두 번째는 신명기 역사 편집 이전의 정복 자료이다. 사사시대에서 왕정 시대 사이의 두 번째 시기에서도 신명기 역사의 편집자는 왕정 이전의 혼란 시기와 주전 9세기말의 예언 기록들을 두 가지 주 자료로 사용하였다 한다. 마지막으로 예언자와 왕 아래에서의 통솔 시기에서는 이스라엘 역사의 예언적 인도에 관심이 있는 기록과 신명기 역사의 편집자에 의해 재구성된 예언자들의 연설 자료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한다.51) 이러한 원 신명기 역사는 포로 상황에 직면한 후 이어지는 편집자에 의해 포로 상황이라는 재난을 신명기 역사 편집자의 신학적 관점으로 수정하여 그 의미를 분명히 하는 편집 단계를 거친다. 그리고 마지막 편집 단계를 통해 신명기 역사에는 지도자의 역사보다는 이스라엘의 불복종의 역사가 더욱 강조되고 있다고 본다.52)
이러한 오브라이언의 연구는 크로스의 이중편집 이론과 스멘트의 3개의 편집층의 타협적인 위치에서 무난한 논리를 펴고 있는 장점이 있다. 그러나 맥켄지(S. L. Mckenzie)의 비판처럼 신명기 역사의 형성 과정과 그 과정에서 만들어진 '학파'들을 서로 혼동해서 사용하고 있는 단점이 있다.53) 오브라이언과 비슷한 견해를 가진 학자로는 로핑크(N. Lohfink)54) 등이 있다.
이외에도 많은 연구들이 계속되고 있다. 그 몇몇의 예로는 신명기 역사에 나타난 마틴 노트의 업적을 기리며 노트의 『전승사 연구』(Uberlieferungsgeschichtliche Studien)가 출판된지 50주년이 됨을 기념하기 위해 맥켄지(S. L. McKenzie)와 그래함(M. P. Graham)의 편집으로 영국 쉐필드 대학의 JSOT 출판사에서 출판된 『이스라엘 전승의 역사』(The History of Israel's Tradition)55)가 있다. 이 책에는 신명기 역상의 연구에 헌신한 13명의 세계적인 학자의 글이 실려 있으며 제 1부에서는 마틴 노트의 업적에 대한 재조명, 제 2부에서는 신명기 역사 각 책의 연구가 이어지고 있다. 또한 위의 연구동향에서 제시하지 않은 학자들 중 중요한 사람은 크로스 학파의 영향을 받았지만 이를 수정하여 더욱 발전된 연구를 한 크노퍼스(G. N. Knoppers)56)와 신명기 역사의 편집자를 저자로서 그리고 편집자로서 매우 숙련된 한 사람의 저작으로 보고 있는 맥켄지(S. L. McKenzie)57) 등을 들 수 있다.
VII. 결 론
이상에서 살펴본 신명기 역사에 대한 최근 학자들의 4가지 연구 경향은 우리에게 어떠한 연구 방법도 신명기 역사 연구에 대한 전체 학계를 주도하지 못하고 있었음을 분명히 보여주고 있다. 그래서 우리는 각각의 학자들에 의해 이루어진 다양한 연구가 최근까지 활발하게 진행되고 있었음을 살펴 볼 수 있었다. 최근 일어나고 있는 신명기 역사의 영향이 전체 구약에 퍼져 있다는 주장인 “Pan- Deuteronomism" 도 결국 이러한 계속되는 연구의 결과일 것이다. 결론적으로 우리는 비록 2,500여년 이라는 시간의 한계를 뛰어넘지 못하여 모든 논의의 종지부를 찍을 탁월한 주장은 나오지 못하고 있지만 계속 이어지고 있는 많은 연구로 말미암아 신명기 역사의 원래 의도를 밝히는데 한 걸음 더 다가선 것만은 분명하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1). 액크로이드(P.R.Ackroyd)에 의하면 Deuteromoic과 Deuteronomistic 이라는 학술 용어는 정확하게 개념이 규정되어 있지 않기 때문에 정의를 내리기가 힘든 용어라고 한다. P. R. Ackroyd, "The Historical Literature," in The Hebrew Bible and Its Modern Interpreters, ed. D. A. Knight and G. M. Tucker (California:Scholars Press, 1985), p. 300. 또 Deuteronomic History와 Deuteronomistic History를 구분하지 않고 사용하는 학자도 있다. T. E. Fretheim, Deuteronomic History (Nashville: Abingdon Press, 1983), p. 15. 그러나 대부분의 학자들은 신명기 역사를 가르킬 때 Deuteronomistic History라는 용어를 사용하고 있다.
2). R. Coggins, "What does 'Deuteronomistic' mean " in Words Remembered, Texts Renewed : Essays in Honor of J. F. A. Sawyer, JSOT Supplement Series 195 (Sheffield: JSOT Press, 1995), p. 135.
3). S. L. Mckenzie, "Deuteronomistic History," The Anchor Bible Dictionary Vol. 2. (New York: Doubleday, 1992), p. 160; I. W. Provan, 1 & 2 Kings (Sheffield: Academic Press, 1997), p. 94. 참조.
4). J. H. Hayes, An Introduction to Old Testament Study (Nashville: Abingdon Press, 1979), p. 218.
5). M. Noth, The Deuteronomistic History, JSOT Supplement Series 15 (Sheffield: JSOT Press, 1981).
6). M. Noth, The Deuteronomistic History, p. 18.
7). 드 베테나 벨하우젠의 신명기 역사에 대한 연구는 W. M. L. de Wette, Lehrbuch der historischkritischen Einleitung in die Bibel Alten und Neuen Testaments (Berlin: G. Reimer, 1817). J. Wellhausen, Prolegomena to the History of Israel (Edinburgh: Adam & Charles Black, 1885).를 참고하라.
8). M. Noth, The Deuteronomistic History, p. 5.
9). M. Noth, The Deuteronomistic History, pp. 5-6.
10). 이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M. Noth, The Deuteronomistic History, pp. 18-25를 참조하라.
11). M. Noth, The Deuteronomistic History, pp. 90-91. 참조.
12). 그 가장 대표적인 경우가 왕조의 영속성과 성전의 영속성을 주장한 무조건적인 계약으로 알려진 다윗 계약이다. 포로기 상황에서 조건적으로 재해석된 다윗 계약이 나타나고 있는 것은 적어도 한 단계 이상의 편집 과정을 거쳤기 때문이라는 것이 이중 편집이론 주장자들의 설명이다.
13). F. M. Cross, Canaanite Myth and Hebrew Epic (Cambridge: Harvard University Press, 1973), pp. 274-289.
14). F. M. Cross, Canaanite Myth and Hebrew Epics, pp. 287-289. 참조.
15). M. A. O'Brien, The Deuteronomistic History Hypothesis:A Reassessment (Gottingen: Vandenhoeck & Ruprecht, 1989), p. 12. 참조.
16). R. E. Friedman, The Exile and Biblical Narrative: The Formation of the Deuteronomistic and Priestly Work (California: Scholars Press, 1981); R. D. Nelson, The Double Redaction of the Deuteronomisitic History, JSOT Supplement Series 18 (Sheffield: JSOT Press, 1981).
17). L. V. Alexander, " The Origin and Development of the Deuteronomistic History Theory and Its Significance for Biblical Interpretation," (Dissertation of Southwestern Baptist Theological Seminary, 1993), p. 138.
18). I. W. Provan, Hezekiah and the Books of Kings: A Contribution to the Debate about the Composition of the Deuteronomistic History (Berlin: Walter de Gruyter, 1980). 참조.
19). R. E. Friedman, Who wrote the Bible (New York: Harper & Row, 1987), p. 146.
20). R. E. Friedman, The Exile and Biblical Narrative: The Formation of the Deuteronomistic and Priestly Work, p. 36.
21). R. E. Friedman, Who wrote Bible , p. 146.
22). 이집트로 이주 온 유대인들이 형성한 사회는 강제 이주로 형성된 바벨론 포로민들의 사회와는 달리 자발적으로 이주해온 사람들로 형성되었는데 그들 중에는 그달리야가 암살 당한 뒤 느브갓네살의 제3차 유대인 포로(582 B.C.) 전에 신변의 위협을 느껴 이주한 사람들이 많았다. 그들의 종교 성향은 엘레판틴 성소에서 Yaho와 그 밖의 다른 신들을 언급하며 예배를 드리는 혼합종교의 양상을 보이고 있었다. M. Noth, The History of Israel (New York: Harper & Row Publisher, 1960), pp. 294-295. 엘레판틴에서 발견된 파피루스 중 한 유대인이 다른 상위 부서에 보낸 편지를 보면 “ … 나는 당신에게 Yaho와 Knub(엘레판틴의 유명한 남신)의 은혜가 있기를 기원한다 … .” 라는 내용을 통해볼 때 혼합종교가 이미 개인의 삶 속에까지 파고든 일반적인 경향임을 나타내고 있다. J. B. Prichard, The Ancient Near Eastern Text: Relating to the Old Testament (New York: Princeton University Press, 1969), p. 491.
23). 아나돗은 솔로몬 왕위를 계승할 때 왕권경쟁에서 경쟁자인 아도니야 편에 섰던 제사장 아비아달이 귀향간 장소로(왕상 2:26) 선지자 예레미야도 이 지역 출신이다(렘 1:1). 그렇기 때문에 예레미야는 예루살렘 성전 설교를 통해 다윗 언약의 내용과는 달리 성전의 멸망을 말하기도 한다(렘 7:12-15).
24). R. Smend, "Das Gesetz und die Volker Ein Betrag zur deuteronomistischen Redaktionsgeschichte," in Probleme biblischer Theologie (Munich: Kaiser Verlag, 1971), pp. 494-509.
25). R. Smend, "Das Gesetz und die Volker," p. 509. 참조.
26). R. Smend, Die Enstehung des Alten Testaments (Stuttgart: W. Kohlhammer, 1978).
27). W. Dietrich, Prophetie und Geschichte: Eine redaktionsgeschichtliche Untersuchung zum deuternomistischen Geschichtswerk (Gottingen: Vandenhoeck & Ruprecht, 1972), pp. 133-134.
28). W. Dietrich, Prophetie und Geschichte, pp. 143-144.
29). 각각의 편집 연대는 DtrG가 주전 580년대, DtrN이 여호야긴 석방 직후인 주전 560년경, DtrP가 둘의 중간 시기에 위치하고 있는 것으로 보고 있다. I. W. Provan, Hezekiah and the Books of Kings: A Contribution to the Debate about the Composition of the Deuteronomistic History (Berlin: Walter de Gruyter, 1988), p. 18. 참조.
30). T. Veijola, Die Ewige Dynastie, David und die Entstehung seiner Dynastie nach der deuteronomistischen Darstellung (Helsinki: Academia Scientiarum Fennica, 1975); T. Veijola, Das Konigtum in der Beurteilung der deuteronomistischen Historiographie, Eine redaktionsgeschichtliche Untersuchung (Helsinki: Suomalainen Tiedeakatemia, 1977).
31). T. Veijola, Die Ewige Dynastie, pp. 127-142. 참조.
32). E. Eynikel, The Reform of King Josiah and the Composition of the Deuteronomistic History (Leiden: E. J. Brill, 1996), p. 25.
33). G. N. Knoppers, Two Nations under God:The Deuteronomistic History of Solomon and the Dual Monarchies, Vol.1. The Reign of Solomon and the Rise of Jeroboam (Atlanta: Scholars Press, 1992), p. 39.
34). M. A. O'Brien, The Deuteronomistic History Hypothesis: A Reassessment, p. 8.
35). H-D Hoffmann, Reform und Reformen: Untersuchungen zu einem Grundthema der deuteronomistischen Geschichtsschreibung (Zurich: Theologischer Verlag, 1980)
36). 여기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H-D. Hoffmann, Reform und Reformen, pp. 47-270.을 참고하라.
37). L. V. Alexander, "The Origin and Development of the Deuteronomistic History and Its Significance for Biblical Interpretation," pp. 89-90. 참조. 오브라이언에 의하면 그 대표적인 구절로 왕하 17:34-41절을 들고 있다. M. A. O'Brien, The Deuteronomistic History Hypothesis, p. 16.
38). B. Peckham, The Composition of the Deuteronomistic History (Atlanta: Scholars Press, 1985), 참조.
39). B. Peckham, The Composition of the Deuteronomistic History, p. 49.
40). B. Peckham, The Composition of the Deuteronomistic History, pp. 95-140. 펙함은 여기에서 창세기에서 열왕기 하까지를 Dtr1과 Dtr2로 구분하여 복잡하게 창-왕하까지의 확장된 신명기 역사의 이론을 제시하고 있다.
41). S. L. Mckenzie, The Trouble with Kings: The Composition of the Book of Kings in the Deuteronomistic History (Leiden: E. J. Brill, 1991), p. 16.
42). M. A. O'Brien, The Deuteronomistic History Hypothesis, p. 20.
43). L. V. Alexander, "The Origin and Development of the Deuteronomistic History Theory and Its Significance for Biblical Interpretation," p. 113. 참조.
44). R. Polzin, Moses and the Deuteronomist: A Literary Study of the Deuteronomistic History: Part one: Deuteronomy, Joshua, Judges (New York: Seabury Press, 1980); R. Polzin, Samuel and the Deuteronomist: A Literary Study of the Deuteronomistic History: Part Two: 1 Samuel (San Francisco: Harper & Row, 1989).
45). J. van Seters, In Search of History: Historiography in the Ancient World and the Origins of Biblical Historiography (New Haven: Yale University Press, 1983).
46). A. D. H. Mayes, The Story of Israel between Settlement and Exile: A Redactional Study of the Deuteronomistic History (London: SCM Press, 1983), p. 56. 참조.
47). A. D. H. Mayes, The Story of Israel between Settlement and Exile, pp. 56-80. 참조.
48). A. D. H. Mayes, The Story of Israel between Settlement and Exile, pp. 56-57.
49). I. W. Provan, Hezekiah and the Books of Kings, p. 27.
50). M. A. O'Brien, The Deuteronomistic History Hypothesis, p. 22.
51). M. A. O'Brien, The Deuteronomistic History Hypothesis, pp. 24-26.
52). M. A. O'Brien, The Deuteronomistic History Hypothesis, pp. 291-292.
53).S. L. Mckenzie, "Review of The Deuteronomistic History Hypothesis: A Reassessment, by M. A. O'Brien," JBL 110 (1991): 141.
54). N. Lohfink, Deuteronomium und zur deuteronomistischen Literatur 1 (Stuttgart: Katholischen Bibelwerk, 1990)
55). S. L. McKenzie & M. P. Graham(ed.), The History of Israel's Tradition: The Heritage of Martin Noth, JSOT Supplement Series 182 (Sheffield: JSOT Press, 1994).
56). G. N. Knoppers, Two Nations under God: The Deuteronomistic History of Solomon and the Dual Monarchies, 2 Vols. (Atlanta: Schoars Press, 1993, 1994).
57). S. L. McKenzie, The Trouble with Kings: The Composition of the Kings in the Deuteronomistic History (Leiden: E. J. Brill, 19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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