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이 주신 평화의 선물 누가복음 2:1-14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이 사람의 몸을 입고 이 세상에 오신 성탄을 앞두고 있습니다. 지난 100년 사이에 태어난 세 명의 천재들 덕분에 온 인류는 큰 혜택을 입고 또 많은 변화를 맛보았다는 기사를 어느 신문에서 본 적이 있습니다. 그 세 명의 천재들은 심리학자 프로이드와 화가 피카소, 물리학자 아인슈타인이었습니다.이 기사를 보면서 옳은 말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들은 너무나 탁월한 천재들이었기 때문에 20세기 과학과 문화 예술을 주관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2000여년 전에 태어나신 예수 그리스도가 이 세상에 오심으로 전 인류가 어떠한 혜택과 축복을 누리게 되었는가를 누가 다 설명할 수 있겠습니까? 이 세상에 있는 모든 종이를 다 끌어 모아 놓아도 그 내용을 다 쓸 수 없을 것입니다. 예수님으로 인해 개인이 받은 간증과 개인이 받은 은혜들을 다 기록하려 한다면 종이가 모자랄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두움에 싸여 있는 이 세상 사람들은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이 오심으로 인해 우리 인류가 어떤 놀라운 축복과 은총을 입었는지 잘 모르고 있고, 알고 있다 해도 말하는 것을 꺼리고 있습니다. 신문 한 모퉁이에라도 거기에 대해 감사하다고 쓰는 자가 한 사람도 없습니다. 어떤 사람은 '하나님 자신이 사람의 몸을 입고 세상에 오시기 위해서는 용기가 필요했을 것이다.'라고 묘한 말을 했습니다. 하나님에게 무슨 용기가 필요합니까? 용기라는 덕목은 하나님에게는 해당이 안되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이, 아니 하나님 자신이 처녀 마리아의 태를 빌려 세상에 오신 이야기를 성경에서 읽을 때면, '아무리 광대하고 크신 하나님이라 할지라도 용기 없이는 그렇게 하시기가 참 어려웠을 것이다' 하는 생각이 들 때가 있습니다. 필립 얀시라고 하는 탁월한 저술가가 현대 의학의 지식을 빌려 예수님의 탄생을 이렇게 설명하는 글을 보았습니다. '만물을 만드신 하나님께서는 작아지시고 작아지시고 또 작아져서 마침내는 하나의 난세포가 되기까지 작아지는 형태로 오셨다.' 다시 설명을 하면 육안으로서는 식별이 불가능한 수정란이 불안에 떨고 있는 10대 소녀 마리아의 태 중에서, 태아가 형성되기까지 세포 분열을 계속해서 커져 가야 될 난세포가 되어 세상에 오셨다는 이야기입니다. 좀 심한 표현이라는 생각도 들지만 따지고 보면 예수님의 탄생은 그런 과정을 거쳐서 이루어진 것이기 때문에 전혀 과장된 말도 아니고, 지나친 상상도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어떻게 천지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이, 크고 광대하신 하나님이 그렇게 작아지실 수 있었을까요? 어떻게 그런 모습으로 사람이 되어서 세상에 오실 수가 있었을까요? 그렇다고 해서 그가 탄생할 때에 유대 나라에 있는 왕과 모든 귀족들이 정장을 하고 서서 무슨 환영 축제를 했습니까? 팡파레를 불었습니까? 그렇지 않으면 많은 시민들이 와서 축하를 드리기를 했습니까? 아무도 그를 환영하지 않았습니다. 오직 마구간에 있는 짐승 몇 마리와 천사들의 말을 듣고 달려온 가난하고 천한 몇 명의 목자들 외에는 하나님이 그토록 작아지셔서, 그토록 낮아지셔서 이 세상에 오셨음에도 불구하고 놀라는 사람도 없었고, 영접하는 사람도 없었습니다. 영국의 여왕 엘리자베스가 얼마 전에 미국을 방문할 때였습니다. 그의 행차를 놓고 많은 언론들이 호들갑을 떨며 경쟁하듯이 여왕의 의전품 목록에 대해 보도했습니다. 행사 때마다 2벌씩 갈아입을 옷을 가져갔고, 누가 죽었을 때를 대비해서 상복까지 가지고 갔으며 왕이 병이 들면 급하게 쓰려고 19l짜리 혈장액을 들고 가고, 또 화장실에 들어가서 아무 변기에나 앉다가 세균에 오염될까 두려워서 변기 깔개까지 들고 간 것입니다. 이런 것, 저런 것 다 챙기다 보니 짐만 해도 2000kg이 넘었고, 게다가 전속 미용사 두 사람에 경호원과 수행원을 수십 명씩 데리고 갔습니다. 이 여행에 들어간 경비가 우리 돈으로 무려 26억원이나 되었습니다. 여왕이 모습을 드러내는 곳마다 유명하다는 사람은 다 모여서 그를 영접하느라고, 또 언론사들은 그 사실을 보도하느라고 이만저만 요란했던 것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이 보실 때 영국이라는 나라는 먼지보다도 더 작을 것입니다. 제 방에는 밀키웨이 즉, 천문학자들이 발견했다고 하는 은하계를 그린 지도가 있습니다. 그것을 펴놓고 들여다보면, 그 안에서 태양계는 그야말로 모래알보다 작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 태양계 중에서도 아주 작은 별 중에 하나인 지구, 그 중에서도 아주 작은 나라 중에 하나인 영국이라는 나라의 여왕이 다른 나라를 방문하는데도 그렇게 요란을 떠는데, 하나님의 아들, 그 크신 분이 오신 것에는 누구 하나 주목하는 사람이 없었던 것입니다. 도대체 왜 하나님께서 이처럼 비천한 모습으로 세상에 오셔야 했습니까? 오늘 우리가 읽은 말씀 가운데 14절이 바로 그 해답입니다.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기뻐하심을 입은 사람들 중에 평화로다.' 평화를 주시기 위해 하나님이 사람이 되셔서 오셨습니다. 샬롬이요 에이레, 우리 나라 말로 화평이요, 화목을 주시기 위해 주님이 오셨습니다. 본문 바로 위에 있는 1장 79절을 보면, 예수님을 영접하기 위하여 6개월 먼저 세상에 보냄을 받았던 세례 요한의 아버지가 성령의 충만함을 입고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서 예언한 말씀 가운데 이런 구절이 나옵니다. '예수님이 오시면 어두움과 죽음의 그늘에 앉은 자에게 비취고 우리 발을 평강의 길로 인도하시리로다.' 하나님이 그토록 작아지시고 낮아지셔서 이 세상에 꼭 오셔야 될 이유, 그것은 우리에게 평강을 주시기 위해서였습니다. 평화를 주시기 위해서였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수 천년 전에 이사야는 장차 이 세상에 오실 예수 그리스도를 내다보면서 평강의 왕이라고 불렀던 것입니다. 평화의 왕이라고. 첫째로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를 하나님과 평화하게 하려고 오셨습니다. 성경적으로 표현한다면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과 우리 사이를 화목 시키기 위해서 오셨습니다. 여러분은 예수 없는 우리의 현주소가 무엇인가 잘 아실 것입니다. 골로새서 1장 21절에서 명료하고 간단하게 우리의 현주소에 대해 이렇게 말합니다. '악한 행실로 멀리 떠나 마음으로 하나님과 원수 된 사람' 이것이 우리 모두의 현주소였습니다. 여러분, 어린 아들이 아버지와 원수가 되어 어떻게 하루인들 마음 편하게 살 수 있겠습니까? 신하가 임금과 원수가 되어서 어떻게 하룻밤인들 베개를 높이 하고 지낼 수 있겠습니까? 불가능한 이야기입니다. 하물며 천지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 전지전능하신 하나님, 거룩하신 하나님, 그 하나님과 원수가 되어 있는 인간이 어떻게 하루인들 마음 편하게 이 세상을 살 수 있겠습니까? 모두가 영적으로 눈이 어두워서 알지 못하기 때문에 잠을 자는 것이고, 알지 못하기 때문에 웃고 떠드는 것이지, 만일 영적으로 눈을 뜨게 되어 하나님 앞에 자기의 현주소가 얼마나 저주스러운가를 발견하기만 한다면 한 사람도 마음의 평안을 가지고 살 수 없을 것입니다. 사는 그 자체가 저주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인간의 이와 같은 저주스러운 처지를 보다 못한 하나님은 오래 전부터 인간과 화해하려고 노력하셨습니다. 평화하기를 원하셨습니다. 그래서 한 때는 많은 선지자들을 보내기도 하셨습니다. 그리고 어떤 때는 한 세대를 완전히 불로 심판하시면서 다시는 인간이 하나님을 함부로 거역하고 범죄하지 못하도록 경고하셨습니다. 또 어떤 때는 소돔과 고모라와 같이 악하고 음란하고 더러운 성을 본보기로 심판하시면서 남아있는 이 지구상의 사람들에게 경고하시어 하나님 앞에 회개하고 돌아오도록 메시지를 보내셨습니다. 그러나 아무도 하나님의 이와 같은 화해의 몸짓에 눈을 돌리는 자가 없었습니다. 반응을 보이지 않았습니다. 생각다 못한 하나님께서는 드디어 중대한 결단을 내리셨습니다. '내가 직접 내려가 보아야 하겠다.' 그래서 예수님을 보내신 것입니다. 자기 아들을 사람의 몸을 입혀서 세상에 보내셨습니다. 그것도 다수에 해당하는 평민의 모습으로, 다수에 해당하는 가난하고 힘없는 사람의 모습으로 이 세상에 친히 오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이 이렇게 직접 찾아오신 이유가 무엇입니까? 원수 된 인간과 화목하기 위해서입니다. 어느 신학자가 평범한 이야기를 가지고 우리를 찾아오신 예수님을 설명한 글을 보았습니다. 오랫동안 우정을 나누면서 절친한 관계를 유지하던 두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무슨 일이었는지는 모르지만 두 사람이 크게 다투고 사이가 나빠졌습니다. 일년 동안 그들은 상종을 하지 않았습니다. 이런 말이 있습니다. '우정을 쌓는 데는 수 십년이지만 그 우정의 탑을 발로 차 버리는 것은 1분이면 족하다.' 아무리 친한 사이라도 한번 틀어지기 시작하면 끝이 없습니다. 믿을 것이 못 되는 것이 우정입니다. 1년이 넘도록 서로가 상종을 하지 않고 지냈는데 그 두 사람 중에 하나가 아마 교회를 다녔나 봅니다. 어느 날 예배 시간에 설교를 듣는데 마음에 가책이 왔습니다. '내가 이렇게 형제를 사랑하지 못해서 되겠는가?' 집으로 돌아간 후 그 옛날 친구와 다시 좋은 관계로 회복되기 위해서 노력을 무척 많이 했습니다. 편지를 5통이나 보냈는데도 그 친구에게는 일언반구 반응이 없었습니다. 고민하다 못해서 이 사람이 눈보라가 몰아치는 어느 날 밤, 도무지 그날 밤을 그대로 넘기면 안될 것 같아 눈을 맞으며 꽤 멀리 떨어진 친구의 집으로 찾아갔습니다. 문을 두드렸습니다. 안에 있던 친구가 문을 열어 보니 자기 친구가 눈을 소복이 맞고 오들오들 떨면서 서 있는 것이었습니다. 급히 그를 집안으로 불러들였습니다. 그 두 사람이 다시 우정을 회복하는 데는 10분도 걸리지 않았습니다. 한 사람이 너무 낮아진 자리에서 자기와 평화하기 위해서 찾아왔기 때문에, 그 앞에 녹아지지 아니할 사람의 마음은 없는 것입니다. 하늘의 영광을 버리시고 하나님 되심을 부인하고 사람의 모습, 그것도 천한 사람의 모습을 입고 마구간에 탄생하셔서 우리를 찾아오신 하나님은, 바로 눈을 맞고 떨면서 문 밖에 서서 벨을 누르는 친구의 모습과 같다는 것입니다. 그 이야기를 읽으면서 '하나님은 그 이상이다. 이건 비유가 안된다.'고 많이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에베소서 2장 14절 이하에 보면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의 화평이신지라. 오셔서 먼데 있는 너희에게 평안을 전하고 가까운데 있는 자들에게 평안을 전하셨으니 이는 저로 말미암아 우리 둘이 한 성령 안에서 아버지께 나아감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무엇이 예수님이 주시는 평안입니까? 원수 된 우리가 모든 죄를 용서받고 하나님 아버지께 담대히 나아가게 되는 것이 예수님이 주신 평화입니다. 주님의 이름으로 하나님 앞에만 나가면 모든 허물과 죄를 순식간에 용서받고 하나님은 우리를 자녀로 받아들이시는 것입니다. 여러분, 오늘 예배드리기 위해서 이 자리에 나온 우리 모두가 얼마나 행복한 사람입니까? 왜 그렇습니까? 우리에게 평화를 주신 예수님 때문에 우리는 오늘 하나님 아버지를 찬양하면서 예배하고 있는데 이런 축복은 아무나 받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14절을 다시 보십시오. 아무나 누리는 축복이 아니라고 말합니다. '땅에서 기뻐하심을 입은 사람들에게만 평화로다.'라고 했습니다. 사랑의교회에서는 1년에 한 400건 정도 장례가 납니다. 400건이면 매일 한 건 이상 난다는 말이 아닙니까? 엄청나게 많습니다. 교회가 크다 보니 그런 십자가도 져야 됩니다. 물론 그 중에 대부분은 연로하신 부모님들이 세상을 떠나는 장례입니다. 복되고 영광스러운 죽음도 많이 있지만, 가슴 아픈 장례도 있습니다. 자녀가 먼저 예수 믿고 주님을 만난 뒤 이 구원의 은혜가 너무 감격스러워서 '우리 어머니 아버지도 예수 믿도록 해야지.'라고 생각하고는 수년 동안 부모를 위해 간절히 기도하고, 어떤 때는 직접 찾아가서 꼭 예수 믿으라고 눈물로 전하기도 하고, 대각성 전도 집회 때는 초대해서 복음을 듣게 하는 등 온갖 노력을 다 해보았지만 안 믿고 계속 미루기만 하시더니 어느 날 갑자기 그 부모님이 세상을 떠나시는 것입니다. 얼마나 안타깝습니까? 우리 생각에는 하나님과 원수된 인간을 하나님과 다시 손잡고 화목하도록 하기 위해 예수님이 오셨다면 온 인류가 하나도 빠짐 없이 하나님과 평화하는 은혜의 길이 열릴 것도 같은데, 하나님은 그렇게 하시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누구만이 하나님과 평화 할 수 있습니까? 기뻐하심을 입은 사람들, 바꾸어 말하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사람들만 예수님을 통해서 하나님과 평화 할 수 있도록 해 주셨습니다. 하나님의 눈에 드는 사람입니다. 우리 모두가 이 자리에서 이렇게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며 찬송할 수 있는 것은 우리가 하나님의 눈에 들었기 때문입니다. 아무 이유가 없는데, 그만한 구실이 있는 것도 아닌데, 하나님이 우리를 너무 잘 보셨습니다. 우리만 보시면 기뻐하시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를 무조건 자기와 화목하시고 자기 품에 안으셨지 않습니까?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을 향하여 '아버지, 하나님 아버지'라고 언제든지 부를 수 있는 영광을 누리게 되었고, 하나님은 우리와 이세상 끝날까지 동행하시는 임마누엘의 하나님이 되셨습니다. 얼마나 둘 사이가 가까워졌는지 임마누엘의 하나님은 '이 세상 끝날까지 내가 너희와 함께 있으마.'라고 약속하시게 되었습니다. 한순간도 나를 혼자 떼어놓지 않겠다고 약속하시는 자비로우신 아버지가 되셨습니다. 그러므로 로마서 8장31절 이하에 바울이 너무나 흥분하고 너무나 황홀해서 소리친 그 말씀이 정말로 우리 마음에 그대로 와 닿습니다. '이 일에 대하여 무슨 말하리요?' 다시 말하면, 말이 필요 없다는 것입니다. '나 같은 것을 어찌해서 하나님이 만세 전에 미리 아시고, 나 같은 것을 예정하시고, 나 같은 것을 때가 되자 부르시고, 부르신 다음에 믿음을 주시고, 믿음을 주신 다음에 모든 죄를 용서하시고 의롭다 하시고, 하나님의 아들로서 영화롭게 하셨는가? 이렇게 해서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과 평화 할 수 있는 은혜를 주셨는데, 이 일에 대해서 무슨 말이 필요한가'라는 의미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시면 누가 우리를 대적하리요.' '하나님이 우리를 받으셨고, 우리와 평화 하셨는데 누가 아니라고 말할 수 있겠는가' 하는 말입니다. '누가 그 사실을 부인하겠는가?'라는 뜻입니다.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어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우리에게 모든 것을 주시지 않겠느냐?' (롬8:32) 의롭다 하시는 이는 누굽니까? '하나님이시니 누가 우리를 정죄하리요.' 그렇지 않습니까? '예수 그리스도로 인해서 우리를 자기의 소유로 받으시고 우리와 평화하신 하나님인데 누가 우리를 보고 이러니 저러니 말하겠는가'라는 말입니다. 하나님과 우리 사이를 깰 자는 아무도 없습니다. 할렐루야! 우리의 평화를 흔들 자가 아무도 없습니다. 그러므로 이 평화를 주신 예수님이 세상에 오셨다는 소식만큼 우리에게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이 없습니다. 천사가 목자들을 만나 한 이야기는 '이 세상에 미칠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을 너희에게 전하노라.'라는 말씀이었습니다. (눅2:10)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이라고 했는데, 왜 기쁩니까? 왜 좋은 소식입니까? 예수님은 우리를 하나님과 평화하게 하시는 평화의 왕이기 때문입니다. 이 평화는 세상의 암흑과 혼돈 속에서도 없어지지 아니하는 것입니다. 이 평화는 폭풍이 몰아치는 바다에서도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에서도 우리를 지켜 주십니다. 찬송가 469장을 여러분은 다 잘 아실 것입니다. 제가 이 자리에 있기 때문에 은혜스럽게 부르는 것이 아닙니다. 저 혼자 불러도 1시간이라도 부를 수 있는 찬송가입니다. '내 영혼에 평화가 넘쳐 남은 주의 축복을 받음이라/ 내가 주야로 주님과 함께 있어 내 영혼이 편히 쉬네/ 평화 평화로다 하늘 위에서 내려오네/ 그 사랑의 물결이 영원토록 내 영혼을 덮으소서' 얼마나 우리 예수님이 좋은지요. 우리 중에 아직도 믿음이 없어서 이 평화의 주님을 마음에 모시지 못하고 있는 형제 자매가 있습니까? 예수 믿으시기 바랍니다. 죄 용서 받고 하나님과 원수 된 관계를 청산하시고 하나님과 화목하시기를 바랍니다. 예수님에 대하여 아직 잘 몰라서 이 평화를 소유하지 못하고 체험하지 못한 자가 있습니까? 하나님의 말씀을 펴놓고 우리를 위하여 이 세상에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배우십시오. 그분 앞에 더 가까이 나가서 그의 영광을 보십시오. 세상의 염려와 근심이 너무 무거워 이 평화를 잃어버리고 있는 자가 있습니까? 주님을 바라보시기 바랍니다. 그분을 바라보시기 바랍니다. 그분은 우리의 평화의 왕입니다. 근심, 걱정을 그에게 맡기시기를 바랍니다. 그분은 온 세상 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이시오, 우리의 염려와 근심을 다 책임져 주시는 분이시오, 우리의 인생 길을 인도하시는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이십니다. 그분을 바라보십시오. 둘째로 예수님은 우리를 이웃과 평화 할 수 있게 하시게 위해서 오셨습니다. 티끌보다 많은 죄, 석탄보다 검은 죄를 예수의 이름으로 씻음 받고 하나님과 평화를 누리게 된 사람은 자기 안에 놀라운 능력이 생기는 것을 체험하게 됩니다. 무슨 능력입니까? 다른 사람을 용서하고 화해해서 다른 형제와 평화 하고자 하는 능력입니다. 평화를 주신 주님 때문에 형제를 사랑할 수 있는 능력이 내 안에 생기는 것입니다. 평화를 주신 주님 때문에, 평화의 왕 예수님이 내 안에서 다스리시는 그 은혜 때문에 형제를 용서하고 화해하고 평화 할 수 있는 능력을 소유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런 이유로 로마서 12장 18절 이하에서 하나님은 우리에게 이렇게 명령하십니다. '할 수 있거든 너희로서는 모든 사람으로 더불어 평화하라. 내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친히 원수를 갚지 말아라. 원수를 사랑하라.' 주님이 이렇게 명령하실 때에는 그 명령을 순종할 수 있는 충분한 은혜가 뒤에 따라오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왜 이렇게 명령합니까? 우리를 하나님과 화목시켜 주신 예수 그리스도가 내 안에서 다스리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그 분이 내 안에 계시고 그분이 나에게 능력을 주시기 때문에 형제까지도 나는 용서하고 포용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 이 말씀이 우리에게는 남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단순한 종교적인 미사여구가 아닙니다. 할 수 있기 때문에 주님이 명령하는 것입니다. 교회 다니는 우리 모두에게 주신 명령입니다. 나우웬이 말했습니다. '용서는 공동체인 교회 생활의 접착제입니다. 용서는 좋을 때나 나쁠 때나 우리를 함께 있도록 붙들어 주고 우리가 서로를 사랑하는 가운데 자라게 합니다.' 옳은 말씀입니다. '나는 용서받아야 될 사람이요, 용서해야 될 사람이요, 당신도 용서받아야 할 사람이요, 항상 용서해야 될 사람입니다.' 이 사실을 서로 인정하는 것이 교회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회 안에서 보면 평화의 왕을 아직도 만나지 못한 사람처럼 형제와 원수가 되어 있는 사람들도 많고, 한 번 상처를 입으면 두고두고 그 상처가 묵은 상처가 되어 고침을 받지 못하는 비극도 여기저기에 있습니다. 입으로는 용서한다 하면서도 마음으로는 용서를 안하는 것입니다. 입으로는 좋은 말을 하지만, 속으로는 그 사람의 실수를 절대 잊 버리지 않는 것입니다. 부부 간에도 그렇습니다. 고부간에도 그런 것을 봅니다. 형제간에도 그런 것을 봅니다. 심지어 교회 안에서 함께 하나님을 예배하는 바로 옆에 앉아 있는 형제들까지도 서로 용서하지 못하는 앙금을 가지고 예배를 드리는 것을 봅니다. 여러분, 만약에 우리가 이런 사람이라면, 평화의 왕으로 오신 예수님을 아직 만나지 못한 사람이라고 봐야 됩니다. 하나님 앞에 모든 죄를 용서받고 하나님과 평화한 사람이라고 말할 수가 없습니다. 우리가 세상을 살다 보면 감정이 상할 때도 있습니다. 어떤 때는 서로가 좀 심한 다툼도 할 수 있습니다. 서로 상처를 주기도 하고 피해를 입히기도 합니다. 이것이 세상입니다. '나는 절대 누구에게도 피해를 주지 않는다. 나는 절대 어떤 사람에게도 상처 주는 일이 없을 것이다.' 누가 그렇게 장담하면서 인생을 살 수 있습니까? 아무도 그렇게 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다 피해를 줄 수밖에 없는 사람입니다. 피해 받을 수밖에 없는 사람입니다. 누구나 다 감정이 상할 수 있습니다. 오늘 친했다가 내일 원수가 될 수도 있습니다. 우리는 다 약한 인간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평화의 왕이 내 가슴이 항상 살아 계셔서 그분이 주시는 은혜를 가지고 무조건 백번이고 천번이고 일곱번씩 일흔번이라도 형제를 용서해야 될 사람입니다. 용서함으로써 그들과 평화를 누림으로 우리가 평화의 왕을 모시고 사는 사람들임을 세상이 볼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 만약 우리가 형제를 용서하지 못합니까? 묵은 감정을 가지고 계속 그를 접대합니까? 그렇다면 한 가지만 알아두십시오. 주기도문을 통해서 날마다 하는 기도가 있습니다. '다른 사람의 죄를 용서해 준 것같이 하나님이여 나의 죄를 용서해 주옵소서.' 보십시오. 내가 형제를 사랑하고 형제를 용서하고 평화하지 못하면 하나님도 내 죄를 용서해 주시는 것을 보류하신다는 것입니다. 마음에 상한 감정을 가지고 있고 죄 용서함을 받지 못하고 있고 마음에 증오가 있으면 누가 손해를 봅니까? 내가 미워하는 그 사람이 손해 봅니까? 천만의 말씀입니다. 손해는 내가 보는 것입니다. 그런 마음을 갖고 있으면 기도가 잘 안됩니다. 영적으로 점점 더 병이 들어갑니다. 자기도 모르게 병이 들어갑니다. 병이 들어가면 은혜와는 거리가 멀어집니다. 나중에는 정신적으로 큰 피해를 입습니다. 그것이 심해지면 육신까지 병이 납니다. 누가 손해를 봅니까? 평화의 왕을 모시고 있다면서 모순된 삶을 사는 사람이 손해를 봅니다. 우리는 그렇게 살면 안됩니다. 사랑하는 형제 자매 여러분, 우리는 지금 새천년의 문턱에 서 있습니다. 평화의 왕 예수님 때문에 하나님과 평화 하였다고 하면서 형제와 불화하면 안됩니다. 뒤의 것을 잊어버리십시오. 20세기를 잊어버리십시오. 앞에 있는 푯대를 향해 달려 갈 자세를 다시 가다듬으십시오. 과거의 묵은 감정이나 원한, 피해의식을 다 묻어 버리십시오. 다시 말하면 과거에 대해서 문을 닫고 못질을 해 버리십시오. 자물통을 잠가 버리고 다시 보지 마십시오. 모든 것을 용서하면서 새로운 2000년을 맞이해야 합니다. 평화의 왕 예수님이 나를 지배하시어 내가 하나님과 화목한 사람으로서, 가는 곳마다 이 평화의 왕이 모든 사람들에게 증거 되어 미움이 있는 곳에 진정한 사랑이 꽃 필 수 있도록 하는 평화의 사신이 되어야 합니다. 10년 전에 이 강단에서 어느 자매가 한 세례 간증을 제가 기억합니다. 예수를 믿지 않고 있었을 때 그는 생활이 넉넉했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된 일인지 간염이 걸려서 고생을 하고 되었습니다. 사업을 하는 남편은 그런대로 수입이 좋고 잘 사니까 마음이 다른 데로 갔나 봅니다. 투병 생활을 하는 아내를 돌볼 생각은 안하고 바깥으로 돌면서 마음을 다른 데 주고 있었던 것입니다. 여인의 입장에서는 얼마나 답답하겠습니까? 얼마나 그 가슴이 찢어지겠습니까? 얼마나 가슴 아프겠습니까? 잠을 못 자고 고민하는데 이웃에 있던 우리 교회 순장이 가서 전도를 했답니다. '예수 믿으세요. 예수님 믿으면 다 이길 수 있어요.' 새가족반에 나왔습니다. '믿음이란 무엇인가?'라는 제목으로 그날 말씀을 배웠습니다. 무조건 믿기만 하면 예수님이 나의 죄를 용서하시고 나의 구주가 되시고 내 마음에 계신다고 하는 것을 배웠습니다. 믿기로 작정했습니다. 그리고 다락방에도 열심히 나갔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배우면서 점점 마음이 열렸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하나님의 그 놀라운 평화가 자기 마음에 밀물처럼 밀려드는 것을 체험했습니다. 그렇게 불안하고 용서하지 못해서 갈등하던 마음이 순식간에 치유함을 받은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평화의 왕, 살아계신 주님이 그 자매의 마음에 오셔서 좌정하시고 다스리기 시작하신 것입니다. 평화의 주님이 그 마음을 다스리니까 평화를 해치는 모든 것들이 다 쓸려 나가는 것입니다. 얼마나 감사합니까? 자기도 모르게 남편을 용서하게 되었습니다. 남편을 다 용서해 버렸습니다. 그리고 남편을 대하는 태도가 달라졌습니다. 그리고 항상 최고가 아니면 안된다는 강박 관념으로 자녀들을 들볶으며 그들에 대해 항상 상한 감정을 가지고 있던 마음도 순식간에 사라졌습니다. 아이들이 연약한 그대로, 못난 그대로 얼마나 감사하게 여겨지는지 몰랐습니다. 그러자 애들을 대하는 태도가 달라졌습니다. 집안의 분위기가 180도로 바뀌었습니다. 그렇게 영적으로 치유를 받으니까 얼마 후에 간염까지도 깨끗이 고침을 받았다고 합니다. 그가 끝으로 이렇게 간증을 했습니다. '하나님과 함께 하는 마음의 평안이 있기에 인생의 거센 파도를 두려움 없이 타고 넘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할렐루야! 사랑하는 형제 자매 여러분, 평화의 왕이 오셨습니다. 그분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과 평화 하게 되었습니다. 동시에 그분을 내 마음에 모시고 우리는 이 세상 어디를 가든지 평화의 사신으로, 평화의 대사로 일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내가 만나는 사람들과 평화 합시다. 그리고 내가 일하는 직장에 하나님의 평화가 임하였음을 선포합시다. 그리고 모든 사람들이 이 평화를 통해서 새로워지는 은혜를,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는 것을, 주님이 다스리시는 새 역사가 창조되는 것을 우리 모두가 목격하면서 사는 내일이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성 프란시스의 기도를 다시 한 번 기억합시다. '주여 나를 평화의 도구로 써 주소서/ 미움이 있는 곳에 사랑을, 다툼이 있는 곳에 용서를, 분열이 있는 곳에 일치를 가져오는 자 되게 하소서' 아멘. 성탄의 은혜 갈라디아서 4:3-7 우리 기독교 신앙에는 4가지 중요한 신앙의 기틀이 있다. 하나는 하나님에 대한 창조 신앙이다. 하나님이 우주만물을 창조하시고 인간을 당신의 형상대로 창조해 주신 것을 믿고 감사하는 것이다. 둘째는 오늘 말씀 드리는 임마누엘 신앙이다. 하나님이 함께 할 때 능치 못한 것이 없다는 믿음이다. 셋째는 십자가와 부활을 믿는 신앙이다. 그리고 마지막은 하나님의 심판을 믿는 재림신앙이다. 주님이 역사의 종말에 다시 오셔서 역사와 인류를 심판하시며 믿는 자가 휴거되고 부활하리라는 믿음이다. 오늘 본문에서도 죄 아래 있고 율법의 정죄 아래 있는 우리 인간을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가 세상에 오심으로 구원해 주시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며 하나님의 아들로서의 기업을 누리게 된 것을 찬양하고 있다. 먼저 3절에 보면 예수님 오시기 전 우리 인간의 비참한 모습과 실존을 묘사하고 있다. '이와 같이 우리도 어렸을 때에 이 세상 초등 학문 아래 있어서 종노릇하였더니' 했다. 무슨 말인가? 우리가 율법 아래서 죽을 수밖에 없는 죄인으로 정죄되고 율법과 죄의 종노릇하던 삶을 설명해 주는 말이다. 여러분! 세상에서 뭐니 뭐니해도 가장 비참한 삶이 종의 삶이다. 노예의 신분이다. 종에게는 자기 인권이나 권리나 소유가 없다. 자식을 낳아도 그 자식마저 자동으로 다시 종의 신분이 된다. 종은 짐승처럼 마구 다루어진다. 미국의 노예역사를 보아도 참 얼마나 비참한지 모른다. 채찍으로 얻어맞고 부모와 자식이 팔려 생이별하고 부부가 갈라지는 그러한 쓰라린 경험을 했다. 옛날 예수님 시대에 보면 종이 되는 몇 가지 케이스가 있었다. 첫째는 남의 돈을 빌려 빚을 갚지 못하면 그 빚 때문에 종이 된다. 다음으로는 전쟁에서 전쟁포로로 사로잡혀갈 때 종이 되었다. 그리고 종의 자녀로 태어나면 자연히 종이 된다. 한번 종이 되면 누가 빛을 갚아주거나 탕감해 주지 않는 한 종에서 자유인이 되는 길이 없었다. 그런데 이러한 죄의 종된 우리 인간에게 기쁨의 소식이 전해졌다. 그것이 무엇인가? 4절에 보니까 '때가 차매 하나님이 그 아들을 보내사 여자에게 나게 하시고 율법 아래 나게 하셨다'고 했다. 여기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때가 차매'하는 말씀이다. 그 다음에 보면 '하나님이 그 아들을 보내사' 하였다. 성탄은 하나님의 아들이 성육신 하셔서 우리와 함께 하신 임마누엘 사건이다. 하나님의 영원이 시간 속에 들어오셔서 우리와 함께 계시게 된 사건이다. 이것은 하나님의 희생이었다. 저는 제가 목회하면서 가장 마음으로 힘든 경우가 자녀를 잃은 가정의 장례식을 집례할 때였다. 아직 나이 젊은 아들을 먼저 떠나보내는 가정에게 참 위로할 말이 없다. 그 때마다 저는 우리 하나님 아버지의 심정을 늘 생각해 본다.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를 위해 보내주시고 십자가에 못박게 하신 주님의 그 고통하는 사랑을 생각해 보곤 하였다. 성탄은 이 고통하는 하나님의 사랑을 통해 우리가 구원받고 축복받게 된 사건이다. 오늘 본문에 보면 이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시게 된 임마누엘의 축복과 사랑을 좀더 구체적으로 설명해 주고 있다. 1) 여자에게 나게 하시고 무슨 말인가? 인간으로 오신 주님의 모습을 설명해 주는 말씀이다. 죄인을 구하러 오신 예수님의 모습을 보여주는 장면이요 내용이다. 창세기 3장 15절에 보면 하나님이 아담 이브를 유혹해서 범죄케 한 뱀을 향해 '여자의 후손이 네 머리를 상하게 하리라' 하셨다. 무슨 말인가? 예수님께서 세상에 오셔서 마귀의 권세와 세력을 꺾으시고 인간을 그 손에서 빼앗아 구원하실 것을 말씀하신 것이다. 지난 주 Homeless를 위한 성탄예배 때 그런 말을 했다. 예수님은 가난한 자의 모습으로 오셨다. 어떤 의미에서는 Homeless의 삶을 사셨다. 그러므로 누구보다 우리의 고독과 아픔, 슬픔과 고통, 헐벗음과 굶주림을 잘 알고 계신다. 여기에 큰 위로가 있다. 그가 가난하게 되심은 우리를 부요하게 하시고, 그가 채찍에 맞고 찔림은 우리를 고치시고 구원하시기 위함이었다. 2) 율법아래 나게 하셨다 율법으로 우리는 정죄 아래 있게 되었다. 죄를 범한 우리는 법에 의해 모두 죽을 수밖에 없고 멸망 받을 수밖에 없는 처지에 처하게 되었다. 왜냐하면 율법으로는 의롭다고 판단될 수 있는 사람이 세상에는 한 사람도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예수님이 율법 아래 태어나셔서 십자가상에서 자신의 생명을 쏟아바침으로 그 모든 율법의 의를 이루신 것이다. 십자가상에서 '다 이루었다' 하셨는데 그 말은 헬라어로 '테테루스타이'라는 말을 썼는데 그것은 빚을 다 갚았다는 뜻이다. 주님이 세상에 오셔서 우리의 죄의 빚을 다 갚았다는 말이다. 그래서 우리를 죄의 노예에서 자유인이 되게 하셨다. 할렐루야! 이것이 가장 큰 성탄의 선물이요 축복이다. 이렇게 예수님은 세상에 오셔서 율법 아래 있는 자들을 속량해 주셨다. 뿐만 아니라 우리로 하나님의 아들의 명분을 얻게 하셨다. 아들의 영을 우리에게 주셨다. 그래서 이제 종이 아니라 아들로서의 유업을 얻게 하셨다. 성탄절은 홀로 된 자나 병상에 있는 분들이나 객지생활을 하는 이들에게 더 외롭고 쓸쓸한 계절이 될 수도 있다. 그러므로 그들에게 주님의 따뜻한 사랑의 손길을 뻗치고 베푸는 계절이 되도록 힘써야 한다. 그것이 곧 주님을 사랑하고 주님을 섬기는 길이 되는 것이다. 성탄의 비전과 새 시대 미가서 5:1-15 미가는 주전 8세기경에 약 60여 년간이나 오래 활동한 유다의 선지자였습니다. 우상을 섬기던 요담왕(왕하 15:32-36)과, 친 앗수르적 사대주의 정책을 취하던 아하스왕과(왕하 16:1-16), 반 앗수르적 정책을 취하다가 그의 침략을 받았던 히스기야왕(왕하 18:1-8)의 치세 어간에 살았던 사람입니다. 선지자 미가에게 임한 영감의 사명은 죄로 인한 하나님의 심판과 남은 자의 구원을 외치는 것이었습니다. 이런 죄와 심판과 구원에 대한 외침은 비단 미가의 경우뿐 아니라, 사실상 구약시대 선지자들이 외친 저들의 존재적 사명의 주제였습니다. 오늘 우리에게 주어진 본문은 미가 선지자에게 영감된 거룩한 메시야의 탄생, 곧 성탄과 그 성탄으로 말미암아 도래할 새 시대인 신약복음시대의 영광을 예언하고 있는 장면입니다. Ⅰ. 메시야 성탄의 비전을 받았습니다(미 5:1-4). 메시야의 탄생은 유대땅 베들레헴이고, 그의 기원은 태초요 영원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그 메시야는 이스라엘을 다스릴 자라고 하였습니다. 1. 언제 탄생할 것인가? 이스라엘의 수난기라고 하였습니다. 딸 군대, 딸 시온(미 4:8, 10, 13, 5:1), 곧 이스라엘의 통치자(재판자)가 이방의 침략을 받아 업신여김을 받을 때(미 5:1) 메시야가 탄생할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그것을 가리켜 '임산한 여인이 고통을 겪는 해산의 기간'이라고 비유하였습니다(미 5:3). 바로 이러한 성경의 표현은 이스라엘에 왕이 끊어진 수난기를 뜻합니다. 메시야 예수께서 탄생하시기 전에 이스라엘 백성은 포로생활에 붙인바 되어 고난을 겪을 것이고, 그 동안에 베들레헴에서 먼저 난 다윗 왕가는 단절이 되어 버린 때를 가리킵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이 시기를 가리켜 「고통하던 자」, 「흑암에 행하던 백성」이라고 하였습니다. 말라기 선지자 이후 약 400여 년간의 암흑기를 가리킵니다. 2. 어디에서 탄생할 것인가? 유다 베들레헴이라고 하였습니다. 미가서 5장 2절에 「베들레헴 에브라다야 너는 유다 족속 중에 작을지라도 이스라엘을 다스릴 자가 네게서 내게로 나올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베들레헴이란 '떡집'이란 뜻인데 여기에 에브라다라는 말이 붙어 있습니다. 에브라다는 '열매가 많다'라는 뜻인데, 스불론의 베들레헴과(수 19:5) 구별하기 위함인 것 같습니다. 그 뿐 아니라 '에브라다'는 라헬이 베냐민을 해산하고서 죽어 장사되어, 라헬의 묘비가 세워진 기념 장소로 슬픔의 역사를 간직한 곳이기도 합니다(창 35:19, 48:7). 베들레헴은 '유다 족속 중에 작은 곳'이라고 하였습니다. 예수님 당시에도 하나의 동네였습니다(눅 2:4). 초라한 시골 촌락이었습니다(요 7:42). 종의 형체를 입으시고 오실 메시야는 어떤 특정 지역의 후광을 입고 오시지 않고, 이름 없는 한 작은 촌 베들레헴에서 출생할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럼에도 그는 만민이 먹을 생명의 양식으로 떡집인 베들레헴에 오실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3. 어떤 분이신가? 메시야의 실체가 어떠한가? 그는 「이스라엘을 다스릴 자」라고 하였습니다(미 5:2). 곧 메시야를 가리킵니다. 바로 왕되신 메시야를 뜻합니다(마 2:2). 그 분은 영원하신 메시야라고 하였습니다. 「그의 근본은 상고에, 태초에니라」고 하였습니다. 이 말은 '옛날부터, 영원의 날부터'라는 뜻으로, 메시야의 자존적 영원성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메시야는 태초부터 계신 말씀이었습니다(요 1:1). 영원하신 아버지라고 하였습니다(사 9:6). 하나님의 영감은 선지자 미가에게 거룩한 메시야 성탄의 비전을 보여 주었습니다. 오실 메시야는 이스라엘이 이방인의 막대기 아래 압제를 당하던 흑암의 날(때), 곧 임산한 여인이 해산의 고통을 겪는 날에, 작은 고을 유다 베들레헴에서 상고, 태초이신 이스라엘을 다스릴 자 그 분이, 곧 왕이 탄생하실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그가 처녀의 몸에서 성령으로 잉태하여 출생하실 하나님의 독생자로, 그 이름은 임마누엘이라 할 것이라고 하였습니다(사 7:14). 학개 선지자는 그 분을 가리켜 '만국의 보배' 곧 만국의 소원이라고 하였습니다(학 2:7). 말라기 선지자는 '의로운 태양', '치료하는 광선'이라고 예언하였습니다(말 4:2). Ⅱ. 메시야의 새로운 통치 시대를 예언하였습니다(미 5:5-15). 하나님의 영감은 선지자 미가에게 메시야의 탄생으로 말미암는 새 시대를 알려 주었습니다. 그것은 메시야 시대의 영적 통치를 알려주는 것입니다. 우리 성경은 메시야 시대 곧 새 시대의 영적 통치를 몇 가지로 알려주고 있습니다. 1) 신적 통치라고 하였습니다. 오실 메시야 자신이 여호와의 자격으로 임하신다고 하였습니다. 미가서 5장 4절에 「그가 여호와의 능력과 그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의 위엄을 의지하고 서서…」라고 하였습니다. '그가 …섰다'고 하였습니다. 그가 하나님의 능력과 이름으로 서서 계신다고 하였습니다. 세상에 오실 메시야 자신이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그는 자신과 하나님(아버지)은 하나라고 하였습니다(요 5:17-23, 14:7-10). 요한복음 10장 30절에 「나와 아버지는 하나이니라」고 하였습니다. 2) 목자적 통치(다스림)라고 하였습니다. 미가서 5장 4절 중에 「…서서 그 떼에게 먹여서 그들로 안연히 거하게 할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실로 그는 자신이 선언하신 대로 선한 목자였습니다(요 10:11). 그는 양의 문이었습니다(요 10:9). 그가 양의 목자로 오셨다고 하였습니다. 그가 양의 목자로 오신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고 하였습니다(요 10:10). 그는 하나님의 위엄과 하나님의 능력의 이름으로 그의 양떼를 먹이는 목자라고 하였습니다. 아무도 그의 손에서 그 양을 빼앗을 자가 없다고 하였습니다. 그는 그 양들에게 영생을 보장한다고 하였습니다(요 10:28). 이렇게 선지자 미가는 선한 목자, 능력의 목자, 구원의 목자, 생명의 목자로서의 메시야적 통치시대를 내다보았습니다. 3) 그는 우주적 통치자라고 하였습니다. 미가서 5장 4절 하반절에 「…그가 창대하여 땅끝까지 미치리라」고 하였습니다. 이는 오실 메시야의 통치 영역을 말합니다. 여기 '창대하다'는 말은 '크게 자라다', '크게 되다', '굳게 되다', '강하게 되다'라는 뜻으로 메시야적 통치 영역이 땅끝까지 미칠 영향을 나타내는 예언입니다. 과연 그의 통치 영역은 예루살렘이었고, 온 유대였고, 사마리아와 땅끝이라고 하였습니다(행 1:8). 모든 족속이라고 하였습니다(마 28:19). 온 천하만민이라고 하였습니다(막 16:15). 모든 민족이라고 하였습니다(마 24:14). 결국 각 나라와 족속과 백성과 방언들로부터 이루 셀 수 없는 큰 무리의 영역이 되고 말았습니다(계 7:9). 그래서 천사는 외치기를 「…온 백성에게 미칠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을 너희에게 전하노라」고 하였습니다(눅 2:10). 4) 평화의 통치라고 하였습니다. 미가서 5장 5절에 「이 사람은 우리의 평강이 될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앗수르 사람의 침략을 받았을 때 「…그가 우리를 그에게서 건져내리라」고 하였습니다(미 5:6b). 앗수르 군대가 이스라엘 땅과 이스라엘 궁을 짓밟을 때 하나님은 일곱 목자와 여덟 군왕 같은 용맹스러운 지도자, 권능 있는 지도자들을 일으켜 그를 격퇴할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이러한 미가의 표현은 구약적입니다. 신약에 오실 메시야께서 일곱 목자와 여덟 군왕 같은 용맹스러운 지도자, 권능 있는 지도자를 일으켜 교회가 당하는 모든 위험에서 영전(靈戰)의 승리를 거둘 것이라고 하는 예언입니다. 말하자면 미가서 5장 5절의 「이 사람」은 그 뒤 6절 하반절에 「…그가 우리를 그(원수)에게서 건져내리라」고 예언된 사람과 같은 자를 가리킵니다. 그 메시야는 우리의 '평강'이라고 하였습니다(사 9:6). 바울은 그를 우리의 화평이라고 하였습니다(엡 2:14). 5) 메시야적 통치는 남은 자, 곧 선택 자가 그 대상이라고 하였습니다. 미가서 5장 7절에 「야곱의 남은 자」, 8절에도 「야곱의 남은 자」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전 성경에서 보여주는 '남은 자'의 궁극적 의미는 선택받은 언약의 백성을 의미하였습니다. 저들의 영적 특질을 두 가지로 묘사하였습니다. (1) 그 하나가 이슬 같고 단비 같다고 하였습니다. 「야곱의 남은 자는 많은 백성 중에 있으리니 그들은 여호와에게로서 내리는 이슬 같고 풀 위에 내리는 단비 같다」고 하였습니다.(미 5:7). ① 즉 저들의 구원이 천적(天的)이라는 사실입니다. 「그들은 여호와에게로서 내리는 이슬 같고 풀 위에 내리는 단비 같다」고 하였습니다. 남은 자의 구원은 하나님께로 말미암는다는 것입니다. 전적으로 타율주의적인 구원임을 알려줍니다(요일 4:10). ② 그것은 공개적 비밀과 같은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이슬과 단비는 실로 고요합니다. 들레지 아니합니다. 더욱이 이슬은 밤에, 아무도 모르게 고요히 하늘에서 내립니다. 메시야적 구원의 은혜가 그러하다는 사실입니다.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는 구원체험은 참으로 신비한 비밀인 동시에 또한 결과적으로 드러나고 마는 공개적인 성질의 것입니다. (2) 또 다른 하나는 사자와 같은 기질이 있다고 하였습니다. 미가서 5장 8절에 「야곱의 남은 자는 열국 중과 여러 백성 중에 있으리니 그들은 수풀의 짐승 중의 사자 같고 양떼 중의 젊은 사자 같아서 만일 지나간즉 밟고 찢으리니 능히 구원할 자가 없을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메시야적 구원의 은혜를 받는 자는 소수라고 하였습니다. 저들은 '열국 중과 여러 백성 중에 있다'고 하였습니다. 그럼에도 승리하는 자들이라고 하였습니다. 사자는 승리의 표상입니다. 요한계시록 5장 5절에 「유대 지파의 사자 다윗의 뿌리가 이기었다」고 하였습니다. 그를 믿는 신자들도 이길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저들은 그리스도의 승리 때문에(요 19:30), 부전승으로 승리할 것이라고 하였습니다(요 16:33). 그 부전승의 비결은 믿음이라고 하였습니다(요일 5:4). 믿음으로 죄를 이기고, 세상을 이기고, 마귀를 이기고(요일 2:13), 사망을 이긴다고 하였습니다(고전 15:56-57). 말하자면 오실 메시야의 통치권내에 들어가는 신약시대 구원받을 신자들은 이슬 같고 단비 같은 고요한 생명의 통치와, 사자 같은 능력의 힘을 받아 살 것이라고 예언한 것입니다. 6) 종말론적 구원역사 시대라고 하였습니다(미 5:10-15). 이 부분 중에서 나타나는 몇 가지를 보면, ① 먼저 전쟁을 종결짓는다고 하였습니다. '말'과 '병거'와 '성읍'들을 훼파하고 무너뜨린다고 하였습니다(미 5:10-11). ② 각종 우상들과 여러 우상숭배의 행위들을 끝장내어 버린다고 하였습니다. '복술', '점장이', '새긴 우상과 주상', '아세라 목상'들을 섬기는 백성과 나라들을 하나님은 진노와 분한으로 심판하겠다고 하였습니다(미 5:12-15). 세상에 전쟁이 종식되고, 하나님 외에 다른 신을 섬기는 일이 없어지고 마는 때는 종말의 때가 아닌가? 바로 그 시대는 예수 재림과 함께 성취될 완전 신권 통치시대가 아닌가? 그렇다면 미가 선지자는 예수 그리스도의 성탄을 종말론적으로 보았을 뿐만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최종 재림까지 내다보며 새 시대를 예언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 선지자 미가는 오실 메시야 예수를 하나님 자신이라고 하였습니다. 목자라고 하였습니다. 우주적 통치자, 평화의 통치자, 선택받은 자의 메시야, 그리고 전쟁과 우상을 종식시킬 공의로운 심판의 메시야라고 하였습니다. 바로 그 분의 탄생(강세)은 새 시대를 여는 축복의 관문이 될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구약시대를 살아가던 하나님의 사람들인 선지자들은 한결같이 밝아오는 미래 즉 새 시대의 비전을 받고, 그 세계를 믿음으로 소망하면서, 그 미래의 새 시대를 예언하고 살았습니다. 주전 8세기경, 미가 선지자도 예외없이 이 예언 사명에 집중하고 있었습니다. 그는 메시야이신 예수께서 유대 베들레헴 작은 고을에서 탄생하신다고 예언하였습니다. 바도 메시야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베들레헴 탄생과 함께 바야흐로 새 시대가 도래할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예수 성탄과 함께 도래할 새 시대는 어떤 성격의 시대입니까? 바로 새 역사의 신기원이 된다는 사실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베들레헴 탄생(강세)과 함께 전 인류의 역사는 새 시대, 새 역사를 시작하게 된다는 사실입니다. 그것이 바로 B.C.(주전)가 끝나고 A.D.(주후)의 역사가 기록되는 때였다는 사실입니다. 그때부터 세계 역사의 연호가 시작되어 지금 1999년까지 기록되고 있습니다. 그것은 또한 새 나라, 새 복음이 반포되는 일이었습니다. 바로 마가복음 1장 14-15절에 「예수께서 갈릴리에 오셔서 하나님의 복음을 전파하여 가라사대 때가 찼고 하나님 나라가 가까왔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 하시더라」고 하였습니다. 바로 '하나님의 복음', '하나님의 나라'가 시작되는 시대였습니다. 예수의 성탄은 그리스도께서 새로운 하나님의 제국을 건설하러 오신 것입니다. 그것은 결코 유대나라나 헬라제국이나 로마제국이 아닌 '하나님의 나라'였습니다.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머리로, 왕으로 고백하고 섬기는 하나님 백성(그리스도인)의 모임인 교회운동이었습니다. 이 새 나라, 새 복음 곧 '천국 복음'이 모든 민족들에게 전파되기 위하여 세계와 역사는 존재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 '천국 복음'이 온 세상에 다 전파된 후에는, 이 세상 역사가 그 대단원의 막을 내리는 우주적 종말이 올 것이라고 예수께서 친히 증거하였습니다. ※ 바로 여기에 우리가 맞는 성탄의 참되고 본질적인 의미가 있습니다. 성탄은 새 역사의 신기원이 됩니다. 인류 역사는 예수 그리스도의 성탄에서 그 출발을 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성탄은 새 나라, 새 복음 곧 천국 복음의 시작이었습니다. 예수는 이 세상 나라가 아닌 하나님의 나라를 가지고 오셨습니다. 실로 인류가 받은 무한에의 선물, 영광의 선물, 축복의 선물이 아닌가? 바로 예수 성탄이 지닌 표적이 아닌가? 그것은 또한 새 시대의 표적이 아닌가? 그는 바로 많은 사람 곧 잃어버린 아브라함의 자손을 그에게로 되돌리기(찾음) 위하여 별들의 전쟁을 선포하러 오셨습니다. 그의 성탄은 실로 별들의 전쟁을 선포하는 선전포고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예수 성탄은 위대한 새 시대의 출발이 된 것입니다. 성탄의 축복이 있기를 축원합니다. - 아 멘 - 성탄절(2) 참 예배(마 2:1-12) 오늘 본문은 헤롯왕 때의 동방박사에 관한 이야기가 소개되어 있습니다. 이 본문은 우리에게 여러 가지 교훈을 줍니다. 1. 하나님의 부르심에 응답하는 삶의 중요성 2장 1절을 보십시오. "헤롯 왕 때에 예수께서 유대 베들레헴에서 나시매..." 예수님은 헤롯왕 때 태어났습니다. 헤롯은 에돔 사람 안티파텔의 아들이었습니다. 그는 로마 황제에 아부하여 그에 의해서 주전 47년에 유대 총독으로 임명되었고, 주전 40년에 유대지역 분봉왕으로 임명되어 주후 4년까지 권좌에 있었습니다. 그는 헤롯 대성전을 지어 명성을 날렸고, 경제적으로는 일방적 폭정을 통해 경제적으로는 어느 정도 성과를 올렸습니다. 굶주린 백성을 위해 세금을 감면해 주고, 자기의 금접시를 녹여 식량을 사들여 백성을 먹이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경제 외적인 면에서 그는 연산군 이상으로 못된 모습을 보였습니다. 자기의 왕좌를 지키려고 자기 아내와 장모를 죽이고, 장남 이외에 두 아들을 죽였고, 근친상간을 하기도 했습니다. 그는 죽을 때 예루살렘에서 가장 존경받는 한 사람을 감옥에 가두고 자기가 죽는 시점에 같이 죽이라는 유언을 남겼습니다. 그 이유는 자기가 죽으면 아무도 눈물을 흘리지 않을 테니까 그 위인을 죽임으로 눈물을 흘리게 하려고 한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 헤롯이 통치하는 어두운 시대에 태어났습니다. 그 사실은 시대가 어둡다가 시대를 탓하지 말아야 함을 교훈합니다. 내가 왜 이런 환경에서 태어나고, 이런 환경에서 지내느냐고 말하지 마십시오. 내가 그런 처지에 있는 데에는 하나님의 오묘한 섭리가 있습니다. 이 시대에 나를 향한, 우리 교회를 향한 하나님의 놀라운 뜻이 있습니다. 사람들은 대개 이 하나님의 뜻을 발견하지 못하기에 시대를 탓합니다. 에스더 4장 14절에 보면 모르드개가 에스더에게 이런 말을 합니다. "네가 왕후의 위를 얻은 것이 이 때를 위함이 아닌지 누가 아느냐?" 마찬가지로 나의 현재의 위치가 이 때를 위한 것이라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이 나를 이 가정에 태어나게 하신 목적이 있습니다. 또한 나를 이 가정으로 시집보낸 목적이 있습니다. 나를 이 시대에 태어나게 하신 목적이 있고, 이 교회에 나를 보낸 목적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어떤 경우에도 환경을 탓하지 말고 하나님께서 현재의 이 자리로 부르신 것으로 알고 현재의 이 자리에서 최선의 결과를 만들기에 우리는 힘써야 할 것입니다. 2. 하나님께 경배하는 삶의 중요성 오늘날 예수님이 태어나던 그 날에 바로 동방박사가 방문했는지, 상당한 시간이 흐른 후에 동방박사가 방문했는지에 대한 의견 차이가 있습니다. 사람들은 보통 주님 태어나던 그 날에 동방박사가 방문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찬송가 116장을 보면 성탄절 밤에 동방박사가 방문했다는 가사도 있습니다. 그러나 상당한 시간이 흐른 뒤에 방문했다는 의견도 만만치 않게 많습니다. 이 문제에 대해서는 나중에 기회가 있을 때에 논의해 보기로 하겠습니다. 동방박사가 아기 예수님을 보고 어떻게 했습니까? 11절 말씀을 보십시오. "집에 들어가 아기와 그 모친 마리아의 함께 있는 것을 보고 엎드려 아기께 경배하고..." 오늘 본문에는 세 종류의 사람이 나옵니다. 1. 헤롯과 같은 사람(3절) 겉으로는 환영하나 속으로는 저주하고 적의를 가진 사람입니다. 요새 믿는다고 하면서 "예수 믿는 사람이 왜 그래!"라고 자주 말하는 분이 있습니다. 그런 모습은 정의로운 모습인 것 같지만 기초가 바르지 못한 정의감입니다. 2. 제사장과 서기관과 같은 사람(4절) 이런 부류의 사람들은 지식은 많습니다. 헤롯이 메시야 나실 것을 물으니까 베들레헴이라고 금방 대답할 정도입니다(5절). 그러나 실질적으로 메시야에 대해 관심도 없고 감동도 없습니다. 오직 자기의 자리, 기득권을 지키는 것이 더 중요할 뿐입니다. 이런 사람들은 교회에 잘 나오니까 회개할 것도 없는 줄 압니다. 또한 일을 열심히 하니까 반성할 것도 없고 하나님 앞에 떳떳한 줄 압니다. 그러나 오래 예수 믿은 사실만 자랑하고, 훈장만 자랑하면서도 자기의 생애를 다 드려 헌신해 본 경험이 없는 사람이 되어서는 안됩니다. 오랜 믿은 것을 자랑하지 말고 예수님 만난 것을 자랑해야 할 것이고, 훈장을 자랑하지 말고 주님과 함께 동행하는 것을 자랑해야 할 것입니다. 3. 동방박사처럼 경배하러 먼길을 달려 온 사람 우리는 오늘 본문의 동방박사의 경배를 통해서 예배에 관한 3가지 자세를 배우게 됩니다. 1) 죽음을 무릅쓰고 먼길을 찾아왔다는 점입니다. 예배란 하나의 종교 의식이 아니고 생명을 바쳐 하나님을 만나는 결단이요 헌신입니다. 그들이 먼 길을 달려온 유일한 목적은 오직 '경배!'였습니다. 하나님을 만나기 위해서는 이런 경배, 이런 헌신이 없이는 불가능합니다. 은혜는 어디에서 옵니까? 하나님을 경배하는 태도에서 옵니다. 예배 시간에 목사의 설교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을 진심으로 경배하는 태도입니다. 어떤 태도로 하나님을 만나러 오느냐가 예배에서 가장 중요한 은혜 받는 포인트입니다. 생명을 걸고 하나님을 만나려고 애써보십시오. 어떤 희생의 대가를 치르더라도 나는 하나님을 만나리라고 결심해 보십시오. 왜 그 오랜 세월 동안 하나님이 멀리 느껴지는지 생각해보셨습니까? 그것은 하나님을 만나려는 강렬한 욕구가 없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2) 예물을 준비했다는 점입니다(11절). 동방박사는 보배합을 열어 예수님께 황금과 유향과 몰약을 바쳤습니다. 동방박사가 세 사람이라는 것은 그들의 예물로 추정하는 것입니다. 여기에 나오는 세 가지 예물은 기름부음을 받은 자(메시야)임을 증명하는 예물입니다. 먼저 황금은 왕이 받기에 합당한 예물오서 그리스도의 왕권을 상징합니다. 그리고 유향은 제사장의 사역과 관련되어 있습니다(출 30:34-48). 제사장은 향을 피우며 백성을 위해서 기도하는 임무를 맡습니다. 그리고 몰약은 예수님이 선지자임을 상징합니다. 몰약은 썩지 않게 하는 액체이며 슬픔과 탄식과 죽음에 관계된 약입니다. 예수님은 돌아가실 때에도 몰약을 받으셨습니다. 이 세 가지 예물을 드렸다는 것은 예배의 중요한 요소로서 물질적 헌신과 드림 및 베품의 중요성을 다시 한번 생각해보게 합니다. 모든 관계에서의 승리는 결론적으로 '드리는 자'에게 있는 것이지 '구경하는 자' 혹은 '받는 자'에게 있는 것이 아닙니다. 3) 그리고 그들은 하나님의 음성에 순종했다는 점입니다(12절). 순종이 제사보다 낫습니다. 그런데 간혹 내 방식을 고집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자기 식으로 믿으려고 하기에 부딪침이 많습니다. 그러나 순종하는 사람에게는 평화가 주어질 것입니다. 순종하는 사람은 바보 같아 보이고 줏대 없는 사람처럼 보이나 많은 사람들이 그 사람을 보면서 감동을 받습니다. "저렇게 형편없고 말도 되지 않는 일에도 순종하는구나..." 그런 말을 들을 정도로 순종하면 순종 자체가 큰 능력을 주기 시작합니다. 그러면서 하나님이 마련하신 은혜의 길이 활짝 열려지기 시작합니다. 신앙생활의 결론은 인격에 순종이 있느냐 없느냐로 결론지어집니다. 목회하면서 어려운 여건에서도 순종하는 성도의 모습을 보면 눈물이 날 때가 많습니다. "어떻게 저런 상황을 아름답게 이겨내나."라고 생각하면 흐뭇한 마음이 듭니다. 순종하는 사람이 생각하는 것은 대우가 아니라 순종 그 자체입니다. 그가 몰라서 순종하는 것이 아니고, 느끼지 못해서 순종하는 것이 아니다. 그러한 생각이나 느낌보다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더 크기에, 주님께 순종하는 마음이 더 크기에 자기 생각을 뒤로 물리고 순종하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동방박사의 모습을 통해 참된 예배의 세 가지 모습을 살펴보았습니다. 헌신이 없는 예배, 예물이 없는 예배, 순종이 없는 예배는 참 예배가 아닙니다. 성탄절을 맞이해서 다시 한번 참된 예배의 주인공으로 준비되시기를 바랍니다. 성탄절(3) 최선으로 이끄시는 하나님마태복음 2장 13-23절 마태는 다른 복음서보다 아주 강하게 예수님이 구약 예언의 성취자임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특히 2장에서는 네 번이나 강조합니다. 1) 6절. 예수님의 베들레헴 탄생은 미가서 예언의 성취였습니다(미 5:2). 2) 15절. 예수님이 어렸을 때 애굽으로 피난 갔고, 그곳에서 다시 나온 것도 호세야 예언의 성취였습니다(호 11:1). 3) 18절. 예수님 때문에 베들레헴 어린 아이들이 많이 죽게 된 것은 라마의 통곡에 대한 예레미야서의 예언의 응답이었습니다(렘 31:15). 4) 22-23절. 애굽으로 다시 나오게 된 예수님이 베들레헴으로 돌아가지 않고 나사렛으로 가는 것 역시 구약 예언의 응답입니다(사 11:1). 구약은 예수님의 그림자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통해서 구약을 조명해 보면 구약에 펼쳐진 하나님의 섭리를 더욱 많이 이해하게 됩니다. 마찬가지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나 자신을 볼 때에도 나 자신이 보다 분명해지기 시작합니다. "내가 왜 사는가? 나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를 외치며 방황하던 사람이 예수님 앞에 서게 되면 자신의 생의 의미를 발견하게 됩니다. 그리고 자기에게 주어진 환경, 고난과 어려움이 의미가 있음을 알게 됩니다. 예수님을 통해서 보면 세상의 부조리가 이해됩니다. 또한 세상의 고난과 역경과 여러 가지 상황들이 이해됩니다. 마지막 때의 선교 사명도 예수님을 통해 분명히 깨닫게 됩니다. 여러분! 모든 사건을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보고 해석하십시오. 그리고 예수님을 통해서 그 사건이 주는 의미를 삶에 적용하십시오. 그러면 희미하던 삶의 그림자들이 분명하게 살아나고 무의미하던 인생이 가치 있는 인생으로 변하며 능력이 필요한 사람들이 능력을 받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누구든지 예수님을 만나면 그 인생이 송두리째 변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사도 바울이 그랬고, 이 복음서의 저자인 세리 마태도 그랬습니다. 본문 13절 말씀을 보십시오. 하나님의 사자가 요셉을 지시하여 애굽으로 예수님을 피신시킵니다. 이 구절에서 우리가 얻을 수 있는 교훈이 무엇일까요? 3가지만 살펴볼까요? 1. 언제나 하나님의 보호의 손길이 있다는 점입니다. 우리의 삶이 성공적인 삶이 되려면 무엇이 제일 필요할까요? 1) 약속에 대한 확신이 필요합니다. 사실상 하나님의 말씀은 모두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약속입니다. 2) 소명에 대한 확신이 필요합니다. "하나님께서 이 일에 부르셨다!"는 확신을 가져야 합니다. 3) 동행에 대한 확신이 필요합니다.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실 것이다"라는 확신을 가져야 합니다. 하나님의 약속이 있고, 내가 소명 받은 존재이고, 하나님이 분명히 동행하신다면 우리에게 때로 어려운 일이 닥쳐도 능히 그 상황을 이기고 나갈 수 있을 것입니다. 왜 나에게 작은 위기가 있을까요? 아마 그것은 큰 위기를 막기 위해서일 것입니다. 왜 나에게 작은 고통이 있을까요? 아마 그것도 큰 고통을 막기 위해서일 것입니다. 2. 하나님은 때로 꿈으로도 역사하고 급한 때는 천사도 보내십니다. 우리를 보호하는 천사가 있다는 사실을 믿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초자연을 나의 자연으로 이해하려고 하지 말아야 합니다. 때로 하나님은 꿈을 통해서 우리의 갈 길을 인도하고 또한 꿈과 환상을 통해서 마음에 좋은 확신을 가질 수도 있게 하십니다. 그러나 항상 꿈을 바라는 사람이 되어서는 안될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일반적인 경우에는 말씀으로 인도하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항상 율법(말씀)을 입에서 떠나지 말게 하고 주야로 묵상해야 합니다. 묵상은 하나님의 일과 방법과 약속과 목적을 생각하고 나의 삶의 방향을 정하며 실생활에서 적용하기 위한 기초행위입니다. 그러므로 믿는 자에게 묵상은 매일의 삶의 우선 순위가 되어야 합니다. 묵상은 하나님의 승리감을 우리에게 전달하며 무엇보다도 말씀에 대해 순종하는 삶을 살게 하는 촉매와도 같습니다. 3. 마리아와 요셉의 순종을 통해서 순종을 배우게 됩니다. 태어난 지 6개월도 되지 않은 아이를 데리고 애굽에 피난간다는 것이 얼마나 고통스런 일입니까? 그러나 그들은 순종했습니다. 전설에 의하면 헤롯이 너무 철저히 추적해서 이곳 저곳 피하다가 밤에 한 굴에 들어갔을 때 그 굴에는 거미 한 마리가 있었는데, 그 거미가 성령의 감동을 받아서 밤 추위를 막아주려고 굴 어귀를 거미줄로 쳤습니다. 그런데 헤롯의 부하들이 이곳까지 추적해서 굴마다 조사하러 다니는데, 거미줄 쳐진 이 굴에서는 "설마 이곳에..."라고 하며 돌아갔다고 합니다. 전설이지만 애굽으로 내려가는 길의 힘든 여정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그래서 크리스마스 트리에 금줄과 은줄을 다는 것이 이 거미줄을 상징하는 것이라고 해석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리고 성경을 보면 천사가 빨리 떠나라고 했습니다. 떠날 준비가 되었을까요? 아마 거의 준비가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준비하실 것이라는 확신만 가지고 떠납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요셉과 마리아의 순종을 배울 수 있습니다. 때로 우리는 하나님의 뜻을 성공적으로 이루기 위해 최선을 다해 준비하고 미래의 청사진도 보다 구체적으로 작성해야 합니다. 그러나 더욱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뜻에 시시때때로 순종하려는 자세입니다. 그래서 한 걸음 한 걸음 기도를 통해 하나님의 인도함을 받는 것이 미래에 대한 정교한 청사진을 받는 것보다 중요하다고 말하는 것이 아닐까요? 때로 사람들은 답답한 마음에 미래에 대해 알고자 동분서주합니다. 그러나 미래의 문제에 지나치게 매달리는 것은 썩 바람직한 일이 아닙니다. 오히려 하나님의 뜻을 알고 그 뜻에 순종하려는 현재의 발걸음이 중요합니다. 그리고 순종이라는 단어 자체가 받아들이기 어려운 일에 대한 순종을 포함합니다. 좋은 일, 편한 일, 내가 원하는 일만 순종하는 것은 순종이 아닙니다. 어렵고 힘들어도 순종하는 것이 참 순종인데, 그렇게 어렵고 힘든 상황에서도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면 반드시 하나님께서 나를 최선으로 이끄실 것입니다. 순종을 통해 하나님의 돕는 손길을 항상 체험하며 살기를 바랍니다. 예수 탄생의 진정한 의미 새 천년의 첫 성탄절에 성탄의 기쁨이 온누리에 가득하기를 바라마지 않는다. 그러나 마냥 성탄의 기쁨을 나누고 기원하기에는 너무나 어수선한 난국이다. 새천년에 대한 기대와 희망으로 떠들썩하던 새해의 분위기는 사라지고 온통 위기의 징후 뿐이다. 우리 사회에 만연한 불안과 실의, 냉소와 비관이 우리를 더욱 어둡게 하고 있는 현실이다. 우리는 고통분담에 대한 사회적 동의를 통하여 구조조정을 이루어내고 새로운 도약을 이루어야 할 기회를 놓치고 있다. 대신에 고질적인 집단이기주의로 인해 경제상황은 다시 악화되고 사회적 신뢰체계는 무너져 내리고 있다. 제 2의 경제위기론이 더 무성하게 난무하고 있는 형편이다. 국민의 60% 이상이 경제위기의 재발에 대한 위기의식을 지니고 살아가고 있다는 통계가 나오고, 경제불황으로 내년에는 실업자가 100만명 이상 될 것이라는 반갑지 않은 예측도 들린다. 현재의 경제위기를 극복할 사회적 동기부여를 발견하기는커녕 저마다 자기 몫 챙기기에 혈안인 형국이다. 저마다 책임과 의무를 생각하기 보다는 자신의 권리와 이익을 챙기기에 급급하다. 생활현장에서 강제로 내몰린 희생자들에게는 사회의 보살핌과 든든한 유대, 그리고 회복에 대한 희망이 보이지 않는다. 경제적 위기를 극복할 사회적 신뢰체계의 구축은 더욱 요원하게 보인다. 경제가 어려울수록 서로 돕는 공동체의 지혜가 절실히 필요함에도 불구하고 신자유주의 경쟁이념만이 대안인양 호도되고 있는 분위기이다. 그러나 우리 사회의 진정한 위기는 만연된 불신에 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사회의 총체적 위기 속에서 성탄과 교회의 존재의미를 물어야 한다. 그리고 이 시대를 향한 교회의 사명과 역할을 물어야 한다. 교회는 성탄의 기쁨에 들떠 축하하기 전에 이천년 전에 예수님이 이 땅위에 오신 참된 의미를 되새기며 교회의 본질 회복을 위해 노력해야 할 것이다. 예수님은 ■■가난하고 포로되고 눌리고 고통당하는 사람들■■의 소외된 삶의 현장 한가운데로 오셨다. 그리고 그들과 함께 하셨다. 그들을 회복시키셨다. 교회는 예수님의 성육신의 모범을 따라 우리 사회의 소외된 자들과 함께 해야 한다. 역설적이지만 경제가 무너져 내리고 사회적 신뢰체계가 허물어지는 가운데 고통당할 이웃들이 존재한다는 것은 교회에는 희망이다. 그들을 위해 교회가 존재하기 때문이다. 흑암의 땅에 빛으로 오신 예수님을 본받아 교회는 고통당하는 이웃들과 함께 고통을 나누며 치유하는 회복의 보루로 거듭나야 한다. 이것이 무너지고 있는 교회의 신뢰를 회복하는 길이고 우리 사회에 희망을 주는 길이다. 지금 사회가 교회에 요구하는 것은 경쟁에 살아남기 위한 비범한 능력이 아니다. 겸허히 이웃의 고난 가운데 동참하는 교회이다. 거기에 신뢰회복이 있고 사랑이 있고 소망이 있다. 구조조정으로 소외당한 이웃들에 대해 관심을 가지고 섬기며 보살피자! 이것이 이 시대를 향한 주님의 뜻이고 교회가 감당할 몫이다. 이것이 새천년 첫해의 예수 탄생의 진정한 의미이다. 방은 많은데… 지난 한 세기 동안 인류는 여러 분야에서 많은 진보를 추구해 왔지만 특히 생활의 변화에 큰 영향을 준 것은 영상과 음향 기술의 발전일 것이다.거기다가 정보 통신의 기술까지 결합되어 사람들은 아침에 눈을 뜨면서 잠자리에 들 때까지 TV,VTR,컴퓨터 등의 화면을 들여다보며 살고 있다.늘 화면만을 들여다보며 살다보니 실제로 사람과 사람을 바라보는 시간이 줄어들게 마련이다.즉 집안의 가족 관계에서부터 사회의 친구나 동료관계에 이르기까지 모든 인간 관계가 소원해지고 있다. 군중 속에서의 고독을 절감하는 사람들이 동창회 모임을 자주 갖고 군대나 단체의 동기생 모임 또는 등산이나 낚시의 동호인 모임도 만들어 모이지만 이미 영상 문화 속에서 살게 된 21세기의 인류는 점점 개인으로 흩어져서 밀실 속으로 빠져들어가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그래서 오히려 고독한 사람들을 위한 밀실 문화가 등장했다.게임방 토크방 노래방 등 ■■방의 문화■■가 확산되고 있는 것이다. 예수께서 세상에 오셨을 때에도 ■■방의 문화■■는 있었다.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떠나서 보이는 신들을 섬기던 사람들은 인간을 어둡고 무서운 신전 속으로 몰아넣었다.하나님의 백성임을 자부하던 예루살렘 사람들까지도 기도하는 집이 되어야 할 하나님의 전을 장사꾼들의 거래소로 만들고 있었다.예수께서는 장사하는 사람들의 상을 엎으시고 너희가 이 성전을 헐면 내가 사흘 동안에 일으키리라고 하셨다. 예수께서는 사람들을 모든 밀실로부터 끌어내셨다.그분은 갈릴리의 바닷가에서 또는 들판이나 거리에서 또는 산에서 천국의 복음을 전하셨다.그분은 사람을 가두는 모든 밀실로부터 사람을 해방시키기 위해 오셨던 것이다.그리고 오직 하나님께 기도할 때에는 사람들에게 보이려고 거리에서 기도하지 말고 골방에 들어가 문을 닫고 은밀한 중에 계신 네 아버지께 기도하라고 말씀하셨다.즉 사람은 하나님을 조용히 모셔들여 그 말씀에 귀를 기울이기 위해서 골방을 준비하라고 하신 것이다. 그러나 21세기에 인류가 마련한 모든 방에는 하나님께서 들어오실 자리가 없다.몸부림치는 영상과 떠들어대는 음향들로 가득한 그 방들은 이미 하나님의 자리를 허용하지 않고 있는 것이다.2000년 전 예수께서 이 땅에 오셨을 때에도 들어갈 방이 없어 마구간에서 태어나셨다.이제 다시 그분이 세상에 오신다 해도 방의 이름을 가진 곳은 많으나 그분을 모실만한 방은 없을 것 같다.그렇다면 오늘날의 교회들은 과연 그분을 모셔들일 만한 방을 준비하고 있는 것일까? 혹시 지난날의 예루살렘 성전처럼 소와 양과 비둘기 파는 사람들과 돈 바꾸는 사람들로 가득하여 다시 오신 예수께서 발을 들여놓으실 틈도 없게 되어 있는 것은 아닌지 면밀하게 살펴볼 일이다.■■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도 집이 있으되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도다■■(누가복음 9:58) 올해는 성탄절이 유난히 조용하다고 한다.캐럴도 들리지 않고 오가는 선물도 줄어든 채 조용하다 못해 썰렁하다는 푸념이 들린다.물론 어려운 경제사정의 반영일 것이다.그러나 올해야말로 진정한 성탄절의 의미를 되새기기에 절호의 기회가 아닐까.흥청망청 소란한 속에서 산타와 크리스마스 트리, 선물꾸러미를 바라보느라 잊어버렸던 성탄의 뜻을 마음에 다시 새기는 시간으로 보낼 수 있지 않을까. 어려운 경제사정만 빼고 성탄절은 이렇게 조용했으면 좋겠다.로이 스미스의 말처럼 ■■자기의 마음속에 크리스마스가 없는 사람은 절대로 그것을 나무 밑에서도 발견하지 못할 것■■이기 때문이다. 사람이 사는 세상은 언제나 문제가 많고 어려움이 많고 고통이 많기 마련입니다. 그런 가운데서도 올 겨울이야말로 가장 추운 겨울이 되고 있음을 보게 됩니다. 우리 사회가 안고 있는 문제점들이 한꺼번에 다 터져 나온 것과 같습니다. 경제부흥의 뒤안길에서 육신의 생명을 위한 문제도 해결하지 못한 채로 어려움을 겪고 있는 수많은 사람들, 정신적으로 핍박을 받고 고민하는 사람들, 영적으로 참 빛을 받지 못하고 어둠의 그늘에서 헤매고 있는 수많은 사람들, 그들에서 생명의 빛을 비추어 주시기 위해 주 예수께서 오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21세기를 바라보는 이 시점에서 우리 민족은 분단의 아픔을 치료하는 일들을 하나씩 전개해 나가는 이 시점에서 구주 성탄을 맞게 되었으니 올해의 성탄은 우리 민족에게 있어서 그 의미가 다른 때보다 더 크다고 하겠습니다. 주 예수께서 이 세상에 오실 때에 하나님의 아들의 위엄을 갖추고 가장 화려하게 오실 수가 있었지만 그러나 그렇게 하지 않고, 가장 비천한 자의 모습으로 오셨습니다. 이는 가장 비천한 사람의 입장을 이해하시고, 그들에게 새 힘을 주시기 위함입니다. 오셔서 사실 때에 당시 가장 멸시를 받는 갈릴리 지역에서 사셨고, 스스로 갈릴리 사람이 되셨고, 처음 일꾼들을 갈릴리 사람들 가운데서 선발하였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의 능력이 있었기에 돌들로 떡덩이가 되게 할 수가 있었고, 그 결과 부자로 행세할 수가 있었지만 그렇게 하지 않고, 은혜 받은 사람들이 자원하여 바치는 헌금으로 어렵게 생활하였습니다. 이는 성실하게 사는 사람을 주님께서 사랑하시고, 평범한 시민으로 사는 사람들을 사랑하시고 이해하셨기 때문입니다. 세리와 죄인들의 친구라는 말을 들을 정도로 그들을 이해하였고, 회개하기를 원했습니다. 갈릴리에서 조용히 비치기 시작한 이 빛은 점점 주변을 밝히기 시작했고, 급기야는 로마제국에 이 빛을 가득히 채웠으며, 온 세계로 향해 비쳐나가고 있습니다. 오늘 우리도 그 빛을 받고 있습니다. 최초의 성탄에 천군 천사들의 축하 찬양이 하늘에서 있었습니다.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기뻐하심을 입은 사람들 중에 평화로다' 하는 노래였습니다. 이 노래의 가사처럼 성탄은 그 의미를 올바로 되새길 줄 아는 사람들에게 기쁨이요 평화입니다. 다가오는 21세기는 모든 피조물이 함께 더불어 살아가는 세기가 되어야 합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이 성탄을 의미있게 맞는다면 새로운 세기를 맞이해서도 의미 있는 삶을 살게 될 것입니다. 그리스도는 어둠에 비추는 빛으로 오셨고, 그 빛을 받는 사람의 마음은 감동을 받았고, 그 밝은 빛은 지금도 계속해서 비추고 있습니다. 구주 성탄에 전국 교회와 온 성도들에게 성탄을 통해서 주시는 바 은혜와 평강이 가득하기를 바랍니다. 오 헨리의 ■■크리스마스 선물■■ 미국의 소설가 오 헨리의 작품 ■■크리스마스 선물■■이 생각난다.한 도시에 가난하지만 사랑이 넘치는 부부 짐과 델라가 살았다.성탄절이 다가오자 두 사람은 각각 걱정이 되었다.서로에게 선물은 하고 싶은데 너무 가난했기 때문이다.그러나 남편 짐은 아내의 긴 머리에 꽂을 머리핀을 사기로 마음먹고 갖고 있던 시계를 팔기로 결정했다.아내 델라는 남편에게 시계줄을 선물하기로 하고 자신의 긴 머리를 잘라 팔았다. 두 사람은 시장으로 나가 선물을 구입했다.짐과 델라는 서로를 기쁘게 할 마음으로 거의 같은 시간 집에 도착했다.짐은 머리핀을 들고 아내의 머리에 꽂아 주려고 했으나 아내의 머리는 이미 짧게 깎여 있었다.델라 역시 시계줄을 들고 있었으나 남편에겐 이미 그 시계가 없었다.준비된 선물은 쓸모없게 됐지만 둘은 곧 부둥켜 안고 행복의 눈물을 흘렸다.사랑은 추위를 녹인다.모두가 그리스도의 사랑을 넘치게 나누는 성탄절이 되길 기도하자. 구세주로 오신 예수님 누가복음 2장 41~52절 예수의 부모는 해마다 유월절에는 예루살렙에 갔다. 예수가 열두살이 되는 해에도 그들은 절기 관습을 따라 유월절을 지키러 올라갔다. 그런데 그들이 절기를 마치고 돌아올 때에 소년 예수를 예루살렘에 그대로 머물러 있었는데 그의 부모는 이것을 모르고 일행 가운데 있으려니 생각하고 하룻길을 간 다음에 비로소 그들의 친척들과 친지들 가운데서 그를 찾다가 찾지 못하였으므로 그들은 그를 찾으려고 예루살렘으로 되돌아갔다. 사흘 뒤에야 그들은 성전에서 예수를 찾았는데 그는 선생들 가운데 앉아서 그들의 말을 듣기도 하고 그들에게 묻기도 하고 있었다. 그의 말을 듣고 있는 사람들은 모두 그의 슬기와 대답에 경탄하였다. 그의 부노는 예수를 보고 놀랐다. 어머니가 예수에게 '얘야, 이게 무슨 일이냐? 네 아버지와 내가 너를 찾느라고 얼마나 애를 태웠는지 모른다.'하고 말하였다. 예수가 부모에게 말하기를 '어찌하여 나를 찾으셨습니까? 내가 내 아버지의 집에 있어야 할 줄을 알지 못하셨습니까? '하였다. 그러자 부모는 예수가 자기들에게 한 그 말이 무슨 뜻인지를 깨닫지 못하였다. 예수는 부모와 함께 내려가 나사렛에서 돌아와서 부모에게 순종하면서 지냈다. 예수의 어머니는 이 모든 일을 마음에 간직하였다. 예수는 지혜와 키가 자라며 하나님과 사람에게 더욱 사랑을 받았다. 어제 우리는 성탄을 맞이했습니다. 이 성탄 트리는 종교 개혁을 한 마르틴 루터가 성탄 트리를 만들었다는 공식 기록이 있습니다. 루터는 종교 개혁을 하기도 했지만 신부의 옷을 벗고 결혼을 하여 가정을 꾸미기도 하였습니다. 그런데 12월 25일은 돌아오는데 어떻게 가족과 함께 성탄을 집에서 맞이할까 곰곰히 생각한 끝에 전나무가 우거진 숲 속에 갔습니다. 너무 가난했기 때문에 성탄 선물은 살 수가 없고 한 밤 중에 숲 속에 가보았더니 그 날 눈이 너무 많이 내려서 성탄 트리가 있는 그 숲 속의 나무들이 눈에 완전히 뒤덮였답니다. 그런데 그 날 마침 눈이 많이 와서 달빛이 너무 환하게 빛나더랍니다. 그래서 루터는 눈이 쌓인 나무가 달빛에 너무 환하게 빛나는 것을 보고 아기 예수의 빛이 그의 마음 속에 그렇게 빛나고 있다고 감탄하였습니다. 그리고 조그만 전나무 하나를 베어서 집으로 가지고 왔습니다. 달빛에 빛나던 아기 예수의 밝음을 보고 집에 돌아와서 눈을 다 털어낸 다음 독일 사람들이 좋아하는 작은 촛대를 꽂아서 빛나게 했습니다. 그리고 그날 성탄의 밤을 가족과 함께 즐겼습니다. 이것이 크리스마스 트리의 연원입니다. 달밤에 눈속에 비친 하늘의 빛남, 방에 들어와 꽂아놓은 촛불의 빛남, 그 빛의 주인공이 아기로 태어난 예수 그리스도 그분이십니다. 우리는 그 축하의 마음을 어제 예배 때에 같이 드렸습니다. 빛이 태어났습니다. 언제부터인가 12월 25일을 성탄절이라고 해서 전세계가 같이 지킵니다. 그런데 1월 6일을 성탄절로 지키는 몇몇 교회가 있습니다. 그 교회가 바로 정교회입니다. 로마 카톨릭 교회외에 정교회가 있습니다. 동서 로마가 갈라졌을 때, 동쪽 로마인 비잔틴 제국에서는 교회 이름을 정교회라고 했습니다. 서쪽 로마에 속하던 교회 이름이 로만 카톨릭입니다. 종교 개혁은 서쪽 로마인 천주교에서 일어났습니다. 이미 동쪽 비잔틴 문화권에 속했던 정교회는 종교 개혁의 영향을 받지 않았습니다. 현재 동구라파 지역을 비롯해서 북아프리카, 남인도까지 중동 쪽에 퍼져 있는 큰 교회 이름이 정교회입니다. 정교회에서는 예수께서 태어나신 것은 분명한데 천지 창조 때에 6일째 되는 날에 사람을 만드셨고 첫째 아담도 신학적으로 보면 6일째 되는 날 만드셨으므로 둘째 아담이라 이름하는 예수도 아마 새해 6일날 만드셨을 것이라고 보고 1월 6일을 성탄절로 지킵니다. 그런데 카톨릭 교회와 개신교에서는 로마 제국의 기록에 따라 로마 달력으로 첫해 25일 되는 날, 즉 12월 25일 예수 그리스도가 탄생을 하셨을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이렇게 해서 12월 25일이 성탄절로 확정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12월 25일을 성탄절로 지키든, 1월 6일을 성탄절로 지키든 중요한 것은 메시아 아기 예수가 빛으로 우리 세상에 오셨다는 것입니다. 말씀이 육신을 입고 세상에 오셨으니 은혜와 진리가 충만합니다. 요한 복음 1장 14절의 말씀입니다. 12월 25일이 첫 인류의 시작입니다. 우리는 사실 우리 신앙의 역사는 어제 시작되었습니다. 이제 우리는 새 역사 속에 살고 있습니다. 사실 성탄절은 세 가지라고 생각합니다. 첫 번째 성탄절은 어제였습니다. 아기가 세상에 하늘의 이름으로 태어난 날이 12월 25일 첫 성탄입니다. 아기 예수로 태어난 메시아가 십자가 못박혀 돌아가시면서 첫 번째 성탄은 극치에 달합니다. 두 번째 성탄은 첫 번째 성탄이 마감하는 그 순간에 두 번째 성탄이 시작합니다. 십자가로 첫 번째 성탄이 극치에 올라서 완성을 이루고 부활절 아침에 죽은 예수 그리스도가 영원한 생명으로 부활하시면서 제 2의 성탄이 시작됩니다. 제 1의 성탄을 금년에 드리고 제 2의 성탄은 내년 부활절에 송축합니다. 그때는 영원한 우리 가슴 속을 비출 것입니다. 마지막 성탄은 아무도 누릴 수는 없습니다. 부활하셔서 하나님 우편에 앉아계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 마감 날에 재림하셔서 주님께 모든 사람이 다 끌어올림을 받아서 주님이 우리 모두를 가슴으로 끌어안아서 하나님께 바칩니다. 그것이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입니다. 재림할 때 세 번째이자 마지막 성탄이 옵니다. 어제 우리는 인생의 시작, 희망의 시작, 신앙의 시작, 믿음의 시작, 사랑의 시작을 축하했습니다. 이제 우리는 축하된 마음으로 오늘을 살아갑니다. 여기 성경 본문에 보면 예수의 어머니 마리아가 12살 된 아들 예수를 만나는 장면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성경 어디를 들추어보아도 30에서 33살까지 예수께서 공생애를 시작하셔서 그에 관한 기록이 쓰여 있는데 한 살부터 30살까지는 예수께서 무엇을 하셨는지 아무 기록이 없습니다. 단 한가지 기록이 오늘 본문의 말씀입니다. 오늘 본문에 누가 복음 2장 41절에서 52절, 이 말씀에만 30세 이전의 예수에 대한 기록이 있습니다. 거기에 보면 예수께서 12살 되었을 때 예루살렘 성전에 가서 제사장과 서기장과 율법학자들과 함께 하나님의 말씀을 토론하고 구약의 말씀도 같이 읽고 기도하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 장면이 나옵니다. 이것이 유일한 예수 생애에 관한 내용입니다. 그래서 과거 신학을 연구하는 학자들이 공생애를 시작하기 전의 30년에 걸친 예수 생애에 관한 기록이 없으니 역사적 예수는 알 길이 없다고 말했습니다. 사실입니다. 중요한 것은 30년간의 예수의 생애가 아니라 3년간의 공생애입니다. 우리는 어제 새 역사를 시작했지만 유대교의 역사는 우리와 조금 계산법이 다릅니다. 유대 사람들은 우리가 부활절을 맞을 즈음에 유월절을 시작합니다. 유월절은 과거 애굽 땅에서 종살이를 하다가 모세를 통해서 출애굽을 해서 광야를 거쳐서 가나안 땅에 입성을 하던 기록, 소위 엑소더스의 시작입니다. 그러니까 유월절의 뜻은 '파샤'라는 말로 설명됩니다. 이 말은 출애굽하기 바로 전날 밤, 해방을 맞기 바로 전날 밤 양을 잡아서 피를 문설주에 바르라, 그러면 그 집은 하나님의 심판을 피할 것이다는 뜻을 담고 있습니다. 즉 하나님의 진노를 피하여 넘어간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그 말을 영어에서는 Pass Over라고 합니다. 이것이 우리 달력으로는 부활절이 있는 3월 혹은 4월입니다. 이때 이스라엘의 역사가 시작합니다. 유월절이 되면 유대땅에 사는 모든 사람들이 성지 순례를 했습니다. 예수도 유월절에 성지 순례를 했습니다. 또 그로부터 50일이 지난 오순절에, 우리로 말하면 5,6월 정도에 성지순례를 합니다. 오순절의 시작은 유대교에서 비롯되었습니다. 그날은 농사지은 첫 수확물을 하나님께 드리고 그리고 감사하자는 뜻에서 유대 사람들은 반드시 성지순례를 하게 되어 있습니다. 또 7월 15일부터 일주일 동안 이스라엘 사람들은 출애굽하여 광야에서 집을 짓고 살았던 것을 기억해서 집 앞에 장막이나 초막을 짓습니다. 그리고 그 속에서 일주일을 삽니다. 광야 생활을 다시 한번 상기하자는 뜻입니다. 그래서 그날을 수확절, 장막절, 또는 첫 배를 바친다고 해서 수장절이라고 부릅니다. 유월절에 역사가 시작하고 오순절에 감사를 드리고 초막절에 헌물을 바칩니다. 이 세 절기에는 반드시 가야 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6살이 되면 엄청난 예식을 회당에서 거행합니다. 거룩하신 하나님과 하나님이 만드신 우리는 근원이 같기 때문에 우리도 거룩합니다. 성탄절의 의미는 하나님과 우리가 근원이, 출발이 같다는 것입니다. 어제 하늘과 땅이 만났기 때문에 우리는 하늘을 품고 살고 땅에서 하늘을 심고 기르며 삽니다. 하늘과 땅의 축복이 같습니다. 이것이 축복입니다. 성탄의 말씀입니다. 여러분은 지금과 하늘과 함께 새로운 삶을 시작합니다. 땅이 자라서 하늘로 상달이 됩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십니다. 땅과 하늘이 함께 시작하는 날, 오늘 하나님께 진지하고 감사한 마음으로 예배를 드립니다. 여러분의 인생이 하늘과 땅이 함께 하는 것으로 새로 시작하시기 바랍니다. 구유에 나신 예수 눅 2:1-7 지금 예수께서 다시 탄생하신다면, 국가의 분단지경에서 더욱이 국가적 경제위기를 하루하루 넘기고 있는 이 나라를 결코 후보선상에서 빼시지 않으리라고 생각해봅니다. 오늘 성탄절이 보다 깊은 은총이 함께 하시는 성탄절이 되리라고 믿습니다. 요셉과 마리아는 호적을 하기 위하여 갔지만 있을 만한 곳을 얻지 못하고 만삭이 된 몸으로 마굿간에서 쉬게 되었고 이 마굿간에서 예수님을 낳게 되었습니다. 그때 많은 장소, 많은 방들이 있었지만 예수님을 위한 방은 없었습니다. 이 땅에는 생명의 주님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할 방이 없었습니다. 수많은 사람이 다 들어갈 수 있는 사람이 사는 곳 그 어디에도 예수님을 위한 장소는 없었습니다. 더욱이 예수님께서 탄생하신 곳은 동방박사들이 찾던 예루살렘왕궁이나 성전이 아니라 베들레헴이라는 조그만 마을이었고 그중에서도 사람들이 모여드는 여관이 아니라 마굿간의 구유였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이렇게 구유에서 탄생하신 놀라운 이치를 깨닫게 되면 감사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것도 꼴이 없이 빈 구유에 주께서 나셨습니다. 첫째, 예수께서 나신 구유는 짐승의 밥그릇입니다. 구유에는 주인이 마련해 주신 꼴이 넉넉하게 있습니다. 밖에서 꼴을 구하지 못한 가축들이 이곳에서는 매일 일용할 꼴을 얻을 수가 있습니다. 눈이 오나 비가 오나 폭풍이 몰아쳐도 이 구유에는 목자가 가져다 주는 꼴이 있습니다. 곧,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에게 일용할 생명의 떡이 되셨습니다. 이 생명의 떡은 남아서 주는 떡이 아니었습니다. 이는 주님께서 하나밖에 없는 그 생명을 바치심으로써 내어 주신 떡이었습니다. 제자들과 마지막 식탁을 나누실 때, 예수께서 떡을 떼어 들고서는 감사의 기도를 하시고 제자들에게 뭐라고 하셨습니까? "받아 먹으라 이것이 내 몸이니라...너희가 다 이것을 마시라...이것은 죄 사함을 얻게 하려고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 바 나의 피 곧 언약의 피니라"(마26:26-28) 예수님은 오병이어의 역사로 배부름을 경험한 백성들이 몰려들자 그들에게 이러한 말씀을 가르치셨습니다. 요 6:27 썩는 양식을 위하여 일하지 말고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을 위하여 하라 요 6:33 하나님의 떡은 하늘에서 내려 세상에게 생명을 주는 것이니라 요 6:34 저희가 가로되 주여 이 떡을 항상 우리에게 주소서 요 6:35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곧 생명의 떡이니 내게 오는 자는 결코 주리지 아니할 터이요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라 요 6:51 나는 하늘로서 내려온 산 떡이니 사람이 이 떡을 먹으면 영생하리라 나의 줄 떡은 곧 세상의 생명을 위한 내 살이로라 하시니라 그 밥그릇은 금은으로 된 것이 아니었습니다. 짐승들이 먹는 밥그릇입니다. 냄새나고 더럽습니다. 예수님은 심지어 짐승같은 사람에게도 밥이 되어 주시겠다는 것입니다. 때문에 만민에게 생명을 주시는 떡이 되셨습니다. 속되게 쓰이는 말이 있죠. "너는 내 밥이야!" 그렇습니다. 예수님은 나에게 영생을 주시려고 밥이 되셨습니다. 둘째로, 구유는 매일같이 목자들의 손이 와 닿는 곳입니다. 주님께서는 말씀 하시기를 "나는 선한 목자라"고 하셨습니다.(요 10:14). 어린 양들은 목자에게 운명을 맡깁니다. 목자가 주는 것을 먹고 목자를 따라 어디든지 갑니다. 구유는 목자가 없으면 가장 비참한 곳입니다. 구유에 소나 양은 있는데 목자가 없다고 생각해 보십시요. 가축들이 갇혀 있는 상태로 먹을 것과 마실 것도 없이 말라 죽어가는 비참한 모습은 상상하기도 끔찍합니다. 지금 사료를 구하지 못해서 안타까와 하는 낙농가들을 보세요. ...구유는 돌보아주는 목자가 있을 때에만 낙원이며 안식처입니다. 주께서 무리들을 보시고 목자 없는 양같다고 하셨습니다. 예수님 없는 이 세상은 목자 없는 구유와 같습니다. 사람들은 갖가지 방법들을 다 동원하고 있지만 누구도 인생 문제를 해결한 사람은 없는 것입니다. 허무함과 좌절, 배고픔과 목마름의 연속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러나 예수께서 계신 그곳은 그렇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예수께서 계신 곳은 어두움과 사망은 물러가고 사랑과 생명, 진리와 은혜 그리고 하나님의 영광이 넘치는 곳이기 때문입니다. 예수께서는 그 목자없는 양같은 무리를 보시고 양들을 먹임과 같이 그들을 먹이셨습니다. 이를 요한복음에서는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막 6:34 예수께서 나오사 큰 무리를 보시고 그 목자 없는 양 같음을 인하여 불쌍히 여기사 이에 여러 가지로 가르치시더라 이제 우리도 빈 구유에 나신 예수님을 경배하십시다. 빈방이 없습니다 (누가복음 2장 1~7절) 성탄절을 통하여 절망하고 낙심한 마음에, 상처를 안고 살아가는 마음에 소망을 선포하고, 우리의 손길이 필요한 이웃들에게 물질과 몸으로 마음껏 사랑을 베푸는 사랑의 축제가 있어야 하겠습니다. 우리 기독교 신앙에는 4가지 중요한 신앙의 기틀이 있다. 하나는 하나님에 대한 창조 신앙이다. 하나님이 우주만물을 창조하시고 인간을 당신의 형상대로 창조해 주신 것을 믿고 감사하는 것이다. 둘째는 오늘 말씀 드리는 임마누엘 신앙이다. 하나님이 함께 할 때 능치 못한 것이 없다는 믿음이다. 셋째는 십자가와 부활을 믿는 신앙이다. 그리고 마지막은 하나님의 심판을 믿는 재림신앙이다. 주님이 역사의 종말에 다시 오셔서 역사와 인류를 심판하시며 믿는 자가 휴거되고 부활하리라는 믿음이다. 오늘 본문에서도 죄 아래 있고 율법의 정죄 아래 있는 우리 인간을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가 세상에 오심으로 구원해 주시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며 하나님의 아들로서의 기업을 누리게 된 것을 찬양하고 있다. 성탄은 하나님의 아들이 성육신 하셔서 우리와 함께 하신 임마누엘 사건이다. 하나님의 영원이 시간 속에 들어오셔서 우리와 함께 계시게 된 사건이다. 이것은 하나님의 희생이었다. 오늘 본문 1절과 2절에서, 예수님의 탄생의 역사적 배경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그 당시 로마의 황제인 [가이사 아구스도]는 로마제국은 물론 로마에 속한 모든 식민지까지 인구조사를 하라고 명령을 내렸습니다. 이 인구조사의 목적은 정확하게 세금을 거두어들이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래서 모든 사람들이 일단 자신의 호적지로 가서 혼인으로 인한 새로운 가족의 출생이라든가 또는 다른 가족의 사망...... 그 동안의 변동상황을 신고하게 되어 있었습니다. 이 때에 마리아의 남편인 요셉은 갈릴리 지방 나사렛이란 동네에 살고 있었는데, 본래 다윗의 집 족속인고로 유대 땅 베들레헴이 있는 다윗의 동네로 마리아를 데리고 호적을 신고하러 가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아직 결혼은 하지 않았지만, 정혼한 사이였기 때문에 만삭이 된 - 성령으로 잉태한지 10개월이 다 된 마리아를 데리고 베들레헴까지 가게 된 것입니다. 이런 일로 인해 마리아는 베들레헴에서 예수님을 낳게 되었습니다. 만약에 이 때에 호적령이 내려지지 않았다면 마리아는 자신이 살던 나사렛에서 예수님을 낳았을 것입니다. 이렇게 되었다면 성경에 예언된 메시아의 탄생이 맞지 않게 됩니다. 그런데 이 때를 맞추어 하나님께서 로마 황제의 마음을 움직임으로 전국에 호적령을 내리게 하셨습니다. 이리하여 요셉으로 하여금 만삭이 된 마리아를 데리고 베들레헴까지 가서 예수님을 낳도록 하나님께서 섭리하신 것입니다. 참으로 놀라운 일입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예언의 말씀이 얼마나 정확하게 성취되는가를 다시금 보게 됩니다. 예수님이 탄생하기 약 700년 전에 미가 선지자는 이렇게 예언했습니다. 미가 5:2~3절을 보면 [베들레헴 에브라다야 너는 유다 족속 중에 작을지라도 이스라엘을 다스릴 자가 네게서 내게로 나올 것이라 그의 근본은 상고에, 태초에니라]고 했습니다. 이 말씀을 한마디로 알기 쉽게 말하자면,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이 메시아로 이 세상에 오시는데 반드시 베들레헴에서 나오게 될 것이라는 예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들에게 성경의 말씀을 일점 일획이라도 가감하지 말고 그대로 지키라고 명하셨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말씀은 정확무오하기 때문에 함부로 가감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신 4:2, 마 5:18). 하나님은 신실하신 분이기 때문에 언제나 예언하신 말씀대로 이루십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부활 승천하시면서 다시 오시겠다고 말씀하신 대로 이 땅에 다시 오실 줄 믿습니다. 그러므로 저와 여러분은 언제나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열심히 읽고, 그 말씀대로 된다는 것을 기억하며, 말씀대로 살아야 할 것입니다. 예수님이 탄생할 당시에 유대 나라는 망하여서 로마의 식민지가 되어 있었습니다. 더구나 불행하게도 말라기 선지자 이후로는 어느 선지자도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구약시대로부터 이제까지 그 많은 선지자가 메시아가 반드시 오실 것이라고 거듭해서 예언하였지만, 그 당시 사람들은 메시아에 대한 소망이 희미해질 대로 희미해져서 메시아에 대한 기대를 거의 잊고 살았습니다. 이때를 가리켜 학자들은 영적 암흑기라고 부릅니다. 이처럼 대부분의 사람들이 영적으로 깜깜한 이때에 선지자의 예언대로 예수님께서 탄생하셨습니다. 그런데 그 당시 예루살렘에는 수많은 제사장이 있었고, 서기관들이 있었지만 어느 누구도 메시아의 탄생을 아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모두가 다 영적 소경들이었기 때문입니다. 다만 메시아의 탄생을 알리는 별이 나타났을 때, 그 별을 보고 별을 따라 베들레헴까지 먼길을 마다 않고 찾아왔던 동방박사들만이 아기 예수님을 찾아와 엎드려 경배하고 보배합을 열어 황금과 유향과 몰약을 예물로 드렸다고 했습니다(마 2:1~11). 그리고 그 밤에 들판에서 양떼를 지키던 목자들이 천군 천사가 전해주는 말을 듣고 베들레헴까지 가서 아기 예수님께 찾아와 경배하였다고 했습니다(눅 2:15~20). 이처럼 모든 사람들이 고대하던 메시아가 탄생하였지만, 막상 찾아와 경배한 사람은 이스라엘 사람이 아닌 동방의 박사들과 한 밤중에 양떼를 지키고 있던 몇 명의 목자들뿐이었습니다. 예루살렘에 있는 헤롯왕과 그 많은 제사장과 서기관들은 이러한 사실을 모르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메시아가 탄생했다며 동방에서부터 그의 별을 보고 그에게 경배하러 왔노라고 하는 동방박사들의 말을 듣고서야 비로소 온 예루살렘이 소동했다고 했습니다. 마찬가지로 예수님이 재림하실 때도 이와 같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이 재림하시는 날짜와 시간을 아는 사람이 하나도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이 재림하실 때에 전세계가 크게 소동하게 될 것입니다. 누구보다도 교회 안에 남아있는 사람들, 다시 말하면 예수님 오실 때 공중에 들려 올라가지 못한 신학박사들과 목사님, 장로님, 집사님, 권사님 등등 많은 사람들이 크게 소동하며, 땅을 치고 가슴을 치며, 후회하고 통곡하게 될 것입니다. 마태복음 24장을 보면, 예수님께서 재림하실 때의 상황이 노아의 때와 같을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노아는 홍수심판을 대비하여 하나님이 명하신 대로 방주를 만들었습니다. 그런데 노아의 식구들이 방주에 들어가던 날까지도 세상사람들은 먹고 마시고 장가들고 시집가고 홍수가 나서 저들을 다 멸하기까지 깨닫지 못했다고 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오실 때에 두 사람이 밭을 가는데 한 사람은 데려감을 당하고 한 사람은 버려둠을 당할 것이며, 두 여자가 매를 가는데 한 사람은 데려감을 당하고 한 사람은 버려둠을 당할 것이라고 했습니다. 심지어 두 사람이 같이 잠을 자다가 한 사람은 데려감을 당하고 한 사람은 버려둠을 당한다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깨어 있으라 어느 날에 너희 주가 임할는지 너희가 알지 못함이니라]고 했습니다(마 24:42~43). 이는 예수님께서 언제 오실는지 알지 못하므로 저와 여러분 모두가 평소에 준비해 놓고 살라는 말씀입니다. 여러분은 재림하실 예수님을 영접할 준비를 해 놓고 계십니까? 주님께서 언제 오시든지 기쁨으로 주님을 맞이할 수 있으시기 바랍니다. 본문 7절을 보면 [마리아가 맏아들을 낳아 강보로 싸서 구유에 뉘었으니 이는 사관에 있을 곳이 없음이러라]고 했습니다. 구유는 낙타나 나귀나 말의 먹이통을 말합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이 태어나신 곳이 마구간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는 이를 통하여 그 당시 사람들의 고약한 인심을 엿볼 수 있습니다. 젊은 여인이 산통이 있어 해산을 하려고 하는데 잠시라도 몸을 풀 수 있도록 방을 내어주는 사람이 그곳에 하나도 없었다는 사실입니다. 산모는 급한 나머지 마구간을 빌려 아기를 낳고 구유에 누일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 광경을 볼 때 참으로 그 당시 이스라엘의 인심이 얼마나 야박했는지 짐작할 수 있습니다. 사사기 시대로 거슬러 올라가보면, 베냐민 지파의 사람들이 그러했습니다. 여관이 없었던 그 시절에 여행중인 한 나그네가 잠자리를 구했으나 아무도 그 나그네를 자기 집으로 영접하여 유숙케 하는 자가 없다고 했습니다(삿 19:15). 이 사건이 발단이 되어 베냐민 지파는 이스라엘 각 지파들의 총공격을 받아 전멸당하는 위기에 놓이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자비하심으로 겨우 600명의 남자들만 남아 종족을 보존해야 하는 불행을 겪었습니다(삿 20:47~48). 마태복음 25:31절 이하를 보면, 예수님께서 양과 염소의 비유를 말씀하시면서 주님께서 오른 편에는 양을, 왼편에는 염소를 두고 심판하십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양을 향하여 창세로부터 복 받을 자들이라고 칭찬하셨습니다. 너희들은 내가 주릴 때에 먹을 것을 주었고, 목마를 때에 마시게 하였고, 나그네 되었을 때 영접하였고, 벗었을 때에 옷을 입혔고, 병들었을 때에 돌아보았고, 옥에 갇혔을 때에 와서 보았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양들은, 우리는 결코 주님을 만나 본적이 없는데 언제 우리가 주님께 이런 대접을 했다는 말씀입니까? 하고 되물었습니다. 그러나 우리 주님은 그렇지 않다고 하시면서 네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이어서 왼편에 있는 염소들에게 이렇게 책망하셨습니다. 내가 주릴 때, 목마를 때, 나그네 되었을 때, 벗었을 때, 병들었을 때, 옥에 갇혔을 때, 도무지 너희가 나에게 사랑을 베풀지 않았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자 그들은 우리가 주님을 만났으면 해드렸을텐데, 우리가 언제 주님을 만난 적이 있느냐고 의아해 했습니다. 이에 대하여 우리 주님께서는, 네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에게 하지 않은 것이 곧 내게 대하여 하지 않은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오늘날 기독교인들이 우리의 이웃들에게 어떻게 행하며 살아야 하는지 보여주고 있습니다. 성도 여러분! 만일 예수님을 해산하려고 마리아가 이 부산 땅에 나타났다면 어떠했겠습니까? 우리가 평소에 사랑을 베풀며 살았다면 요셉과 마리아가 왔더라도 역시 사랑을 베풀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평소에 사랑을 베풀며 살지 않았다면 역시 영접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교회에 나아와 예배를 드리고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때에 머리 속에만 집어넣고 갑니다. 그 중에 몇몇 사람들은 마음속에 감동을 받아 가기도 합니다. 그러나 말씀대로 순종하고 행하는 사람은 참으로 적습니다. 오늘날 교회에 출석하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행함이 없는 죽은 믿음을 가지고 살아가기 때문에 이 사회에 어떤 영향력도 끼치지 못하고 있습니다. (약 2:17). 믿음은 3가지로 이루어집니다. 1. 하나님(말씀)을 아는 것입니다. 2. 하나님(말씀)을 신뢰하는 것입니다. 3. 하나님(말씀)을 사랑하며 행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믿음은 하나님을, 하나님의 말씀을 알고 믿고 행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야고보서 2:19절을 보면, 귀신들도 하나님이 한 분인줄 알고 믿고 떤다고 했습니다. 이처럼 귀신들도 하나님을 알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알고 있습니다. 어찌보면 우리 자신들보다 하나님을 더 잘 알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귀신은 하나님을 신뢰한다거나,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습니다. 더더욱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지 않습니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하나님을 알고 말씀을 잘 알아도,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없고 하나님의 말씀대로 행하지 않는다면 귀신의 믿음을 우리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날 남한 땅에 1300만 명이나 되는 기독교인이 있다고는 하나 전혀 힘이 없습니다. 이 사회에 영향력을 끼치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한 마디로 행함이 있는 믿음의 사람이 적기 때문입니다. 산 믿음의 사람이 정말로 드물기 때문입니다. 행함이 없는 사람은 불신자와 다를 바 없습니다. 죽은 믿음은 아무런 힘이 없습니다. 그래서 이 사회에 좋은 영향을 끼치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기독교의 생명은 사랑에 있습니다. 우리 기독신자의 생명도 사랑에 있습니다. 사랑을 잃어버리면 생명을 잃어버린 것입니다. 요한일서 3:10절을 보면 [하나님의 자녀들과 마귀의 자녀들이 나타나나니 무릇 의를 행치 않는 자나 그 형제를 사랑치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께 속하지 아니하니라]고 했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자녀와 마귀의 자녀를 구별하는 것은 그 사람이 의를 따라 사는지, 그 형제를 사랑하는지 하는 것을 보면 알 수 있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그 형제를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기독교인이 아닙니다. 저와 여러분이 이 세상을 복음화 하는 방법은 기독교인답게 사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자녀답게 사는 것입니다. 즉 사랑을 행하며 사는 것입니다. 사랑만큼 사람의 마음을 감동시키는 것은 없습니다. 여러분이 이웃을 전도하기 원하십니까? 평소에 사랑을 많이 베푸시기 바랍니다. 저는 너무 바쁘다 보니 친척들을 일일이 찾아보지도 못하고 전화할 시간을 내기도 힘듭니다. 그래서 저는 그 분들에게 매달 용돈을 보내드리고 있습니다. 그분들이 그돈을 어디에 쓰시든지 상관없이 보냅니다. 그렇게 하다보면 얼마 후에 모두 다 교회에 나간다는 반가운 소식을 듣게 됩니다. 이번 성탄절에는 우리 모두 작은사랑이라도 실천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우리 교회는 이번 성탄 감사헌금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에 사용할 것입니다. 아무쪼록 저와 여러분은 이 말씀대로 살아서 우리 모두 작은 사랑이라도 나누어주는 산 믿음의 사람이 되십시다. 성탄을 예비하라 예언자의 소리가 끊어진지 400년이나 되어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의 징조와 음성만을 기다리고 있는데 신앙적으로는 혼미하고 정치적으로는 눌림을 당하여 견딜 수 없는 고통의 나날이 되어 가고 있었다. 특히 안나스와 그의 아들 가야마가 대제사장으로 있었고 가이샤디베료가 통치하는 가운데 사회적으로 불안한 때에 광야에 외치는 소리로 나타난 세례요한은 곧 예수님의 탄생을 예비하는 사람이었다. 오늘의 뜻깊은 성탄을 앞둔 인류에게 다시 오실 메시야를 영접하기 위한 그 길을 예비하지 않으면 안된다. 이제 기쁘고 즐거운 성탄의 계절에 예배의 신앙을 통해서 영원한 천국을 예비하시는 슬기로운 성도가 되시기를 바란다. 1. 예비하시는 하나님 (여호와 이레) 하나님은 태초에 말씀으로 천지를 창조하시고 그후에 인간을 만드셨다. 이때부터 하나님은 예비하시는 하나님이셨다. 창세기 22장에 하나님의 명령을 따라서 아들을 제물로 바치기 위하여 모리아 산으로 간 아브라함이 제단을 쌓고 이삭을 제물로 드리려는 순간 "아브라함아! 아브라함아! 그 아이에게 손을 대지 말라"는 음성을 주셨고 이삭 대신 양을 준비해 놓으셨다. 그래서 아브라함은 창 22:14에서 "여호와 이레-여호와께서 준비하셨다고 했다." 이 말씀 속에는 메시야가 십자가를 지셨다가 승리하실 것까지 암시하고 있다. 그러므로 우리의 하나님은 모든 것을 예비하시고 계심을 성경전체를 통해서 볼 수 있다. 우리 인간들이 이 세상을 사는 동안뿐 아니라 이 세상을 떠난 후에도 믿는 자들의 있을 곳을 예비하시고 영원한 생을 보장하신다. 예비하신 그날 그곳을 향한 성도의 신앙 행진이 끊임이 없으시기를 바란다. 2. 약속을 성취하신다. 1930년대에 70세가 넘어서 세상을 떠난 노배우 리챠드 핸더슨이란 분은 "푸른 복장"이란 연 극을 1,653회나 공연했다. 이 작품의 내용은 우주를 내려다보시는 하나님과 가브리엘 천사를 그린 것인데 가브리엘 천사는 범죄하고 타락한 인간들을 하나님께 말하기를 제의했지만 하나님은 "조금만 더 기다리자"는 내용이다. 갈 3:16에 보면 인간들끼리도 한 번 약속을 꼭 지키는데 하물며 저희 하나님께서 약속한 것을 이루시지 아니하겠느냐"고 기록했다. 성경은 분명히 말씀하기를 짝이 없는 것은 하나도 없다고 하셨다. 이 말은 약속과 응답이 없는 것이 없다는 것이다. 유명한 마틴 루터킹 목사는 정의를 부르짖다가 너무 실망하여 골방에 들어가서 하나님께 "나는 더 이상 할 수 없습니다."고 부르짖을 때 하나님께서 그에게 응답하시기를 "진리를 사수하라. 정의 편에 서서 끝까지 봉사하라. 내가 네 곁에 섰느니라"고 하시므로 새 힘을 얻고 나아가서 자기의 주장을 성경대로 부르짖게 되었다. 하나님은 약속하신 모든 것을 반드시 이루신다. 세례요한을 통하여 약속하신 메시야가 초림하시므로 인류는 성탄을 맞이했고, 98년도의 성탄도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이제 사람들은 재림의 주님을 예비하신 "내가 다시 너 있는 곳에 오리라"고 하신 말씀을 기억하고 마리나타의 신앙으로 주님을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3. 어떻게 예비하는가? 예수님은 외형적인 것에 관심을 두지 않으시기에 말구유에 오신 것이다. 1)믿음이 있어야 한다. 오늘날 믿는 자들의 신경을 자극하는 말씀이 있으니 "인자가 올 때에 믿는 자를 보겠느냐?"는말씀이다. 예수님의 어머니도 가브리엘 천사가 예수의 탄생을 예고했을 때 처음에는 믿지를 못했다. 그러나 눅 1:37에 "대저 하나님의 말씀은 능치 못하심이 없느니라"하실 때 마리아의 마음속에 믿음이 들어가기 시작했다. 하나님의 말씀을 나의 이성으로 판단하지 말고 조건 없이 믿을 때 믿음이 생기고 하나님의 거룩한 역사가 일어나는 것이다. 우리가 기다리는 메시야가 98년도 믿는 이의 마음속에 크리스마스가 되어서 기쁘고 즐거운 주님의 계절을 맞이하시기를 바란다. 2)잘못된 것은 회개해야 한다. 하나님은 죄없는 자를 찾지 않으시고 회개하는 자를 찾으신다. 요일 1:8이하에 "죄없다 하는 자는 하나님을 거짓말쟁이로 만드는 자라" 사람이 잠자리에 눕기 전에 하루를 돌아보면 회개할 것이 없는 사람이 하나도 없다. 하물며 죄많은 세상을 사는 동안 모든 사람들이 원치 않게 죄악에 물들어서 더럽게 되었기에 죄없는 사람은 없는 것이다. 이렇게 부끄러운 상황에서 어떻게 주님을 맞이하겠는가? 그러기에 회개해야 한다. 우리가 기다리는 메시야는 더럽고 추한 곳을 싫어하신다. 마음의 그릇을 깨끗이 비우고 회개할 때 우리가 기다리는 메시야가 오시는데 그때서야 성탄이 되는 것이다. 결론적으로 성탄을 예비하는 마음으로 깨어 있어야 하고, 죄악된 세상에 메시야가 도래하시어 인류의 구세주가 되셨으니 그를 기다리는 사람들은 축복 받은 사람들이다. 이제 우리를 위하여 천국을 예비하시고 약속하신 대로 주님이 오신다. 그 재림을 기다리는 믿음의 삶은 지금 성탄을 준비하고 예비하는 것처럼 믿음을 가지고 회개하는 마음으로 기대려야 한다. 요셉의 성탄 마태복음1:18-25 "네 헛된 평생의 모든 날 곧 하나님이 해 아래서 네게 주신 모든 헛된 날에 사랑하는 아내와 함께 즐겁게 살지어다 이는 네가 일평생에 해 아래서 수고하고 얻은 분복이니라(전 9:9)" 요셉 청년은 처녀 마리아와 정혼한 후 일년 후 이 소박하나 왕궁도 부럽지 않을 꿈을 꿉니다. 그러나 마리아의 임신으로 모든 꿈이 깨어집니다. 성령의 계시로 아내를 데려와 아기 예수 탄생때까지 불침 하고 대부가 됩니다. 이 사건 통해 우리가 받을 은혜는? 1. 하나님은 우리들의 모든 일을 주관합니다. "성령으로 잉태된 것이 드러났더 니 …" 요셉의 파혼사건이 실상은 하나님이 역사한 일입니다. 그러나 이 엄청난 사실을 성령의 계시 없이는 인간은 모릅니다. 베르나드 성자는 이 세상에서 나외에는 아무도 해할자가 없다 했습니다. 나로 실패하게 한 것은 원수가 아닙니다. 나 자신의 무지와 나태와 게으름과 교만과 우월감입니다. 절망, 좌절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변장된 축복, 고난의 보자기에 쌓인 축복이란 엄청난 영적 비밀을 발견 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합성어 갖고 살아야 합니다. "너는 범사에 그를 인정하라 그리하면 네 길을 지도하시리라(잠3:6)"과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롬8:28)" 선하신 하나님은 우리 모든 일을 주관하시고 선 으로 인도하십니다. 고난이 왔다면 변장하고 온 하나님의 축복입니다. 2. 하나님은 모든 일에 말씀하십니다. "바벨론으로 이거할때에 요시야는 여고냐와 그의 형제를 낳으니라(11 절)" 침묵의 칼 침묵의 심판이 있습니다. 말 안한 것은 부모가 자식 심판 할 때 갈등할 때 친구가 말안함 으로 무시함으로 칼쓸 수 있습니다. 하나님도 침묵으로 아브람 심판 합니다. "하갈이 아브람에게 이스마엘을 낳을 때에 아브람이 팔십륙세 이었더라 아브람의 구십구 세 때에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나타나서 그에게 이르시되 나는 전능한 하나님 이라 너는 내 앞에서 행하여 완전하라.(창16:16-17:1)" 아브람 죄지을 때 15년간 하나님은 침묵으로 심판 합니다. 그러나 요셉에게 하나님은 말씀하십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요 1:14)" "주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보라 날이 이를지라 내가 기근을 땅에 보내리니 양식이 없어 주림이 아니며 물이 없어 갈함이 아니요 여호와의 말씀을 듣지 못한 기갈이라(암8:11)" "내 백성이 지식이 없으므로 망하는도다 네가 지식을 버렸으니 나도 너를 버려 내 제사장이 되지 못하게 할 것이요 네가 네 하나님의 율법을 잊었으니 나도 네 자녀들을 잊어버리리라 저희는 번성할수록 내게 범죄하니 내가 저희의 영화를 변하여 욕이 되게 하리라(호4:6-7)" 지식이 없어 이 백성이 망합니다. 하나님 말씀이 들릴 때 희망입니다. 하나님 말씀 안 들릴 때 절망이요 심판입니다. 3. 하나님은 모든 일에 은혜 주십니다. 왜 시골 처녀 총각 선택했습니까? 그들은 믿었고 들었습니다. 믿는 것 보면, 순종한 것 보면 선택함이 분명합니다. "이방인들이 듣고 기뻐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찬송하며 영생을 주시기로 작정된 자는 다 믿더라 (행13:48)" 하나님은 은혜 주실 때 도구 쓰실 때 있으나 마리아의 선택은 도구없이 성령으로 하나님이 직접하십니다. 우리의 잘못으로 교통 사고 낼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건져 주신 하나님 보고 참으로 사는 것이 하나님의 오직 은혜임을 고백 합니다. "무릇 여자로서 머리에 쓴 것을 벗고 기도나 예언을 하는 자는 그 머리를 욕되게 하는 것이니 이는 머리 민 것과 다름이 없음이니라(고전11:5)" 기도 응답될 때 하나님이 참 나를 사랑하시는 구나 위기에서 쓰시고 건져 줄 때 하나님이 나를 아직도 이땅에서 쓰시고 계시는 구나하는 사랑과 은혜의 확신이 옵니 다. 성탄은 마리아와 요셉의 작품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작품입니다. 누구 용서 못해준다고 좌절 마시요 용서할 마음만 먹으면 내가 1%만 해 도 99%는 하나님이 다 하십니다. 불가능한 일 1%만 하십시오 하나님 이 다해주십니다. 그러므로 축복과 구원이 옵니다. 빈방이 없습니다 누가복음 2장 1~7절 이 때에 가이사 아구스도가 영을 내려 천하로 다 호적을 하라 하였으니 이 호적은 구레뇨가 수리아 총독되었을 때에 첫번 한 것이라 모든 사람이 호적하러 각각 고향으로 돌아가매 요셉도 다윗의 집 족속인고로 갈릴리 나사렛 동네에서 유대를 향하여 베들레헴이라 하는 다윗의 동네로 그 정혼한 마리아와 함께 호적하러 올라가니 마리아가 이미 잉태되었더라 거기 있을 때에 해산할 날이 차서 맏아들을 낳아 강보로 싸서 구유에 뉘었으니 이는 사관에 있을 곳이 없음이러라 오늘 본문 1절과 2절에서, 예수님의 탄생의 역사적 배경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그 당시 로마의 황제인 [가이사 아구스도]는 로마제국은 물론 로마에 속한 모든 식민지까지 인구조사를 하라고 명령을 내렸습니다. 이 인구조사의 목적은 정확하게 세금을 거두어들이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래서 모든 사람들이 일단 자신의 호적지로 가서 혼인으로 인한 새로운 가족의 출생이라든가 또는 다른 가족의 사망...... 그 동안의 변동상황을 신고하게 되어 있었습니다. 이 때에 마리아의 남편인 요셉은 갈릴리 지방 나사렛이란 동네에 살고 있었는데, 본래 다윗의 집 족속인고로 유대 땅 베들레헴이 있는 다윗의 동네로 마리아를 데리고 호적을 신고하러 가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아직 결혼은 하지 않았지만, 정혼한 사이였기 때문에 만삭이 된 - 성령으로 잉태한지 10개월이 다 된 마리아를 데리고 베들레헴까지 가게 된 것입니다. 이런 일로 인해 마리아는 베들레헴에서 예수님을 낳게 되었습니다. 만약에 이 때에 호적령이 내려지지 않았다면 마리아는 자신이 살던 나사렛에서 예수님을 낳았을 것입니다. 이렇게 되었다면 성경에 예언된 메시아의 탄생이 맞지 않게 됩니다. 그런데 이 때를 맞추어 하나님께서 로마 황제의 마음을 움직임으로 전국에 호적령을 내리게 하셨습니다. 이리하여 요셉으로 하여금 만삭이 된 마리아를 데리고 베들레헴까지 가서 예수님을 낳도록 하나님께서 섭리하신 것입니다. 참으로 놀라운 일입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예언의 말씀이 얼마나 정확하게 성취되는가를 다시금 보게 됩니다. 예수님이 탄생하기 약 700년 전에 미가 선지자는 이렇게 예언했습니다. 미가 5:2~3절을 보면 [베들레헴 에브라다야 너는 유다 족속 중에 작을지라도 이스라엘을 다스릴 자가 네게서 내게로 나올 것이라 그의 근본은 상고에, 태초에니라]고 했습니다. 이 말씀을 한마디로 알기 쉽게 말하자면,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이 메시아로 이 세상에 오시는데 반드시 베들레헴에서 나오게 될 것이라는 예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들에게 성경의 말씀을 일점 일획이라도 가감하지 말고 그대로 지키라고 명하셨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말씀은 정확무오하기 때문에 함부로 가감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신 4:2, 마 5:18). 하나님은 신실하신 분이기 때문에 언제나 예언하신 말씀대로 이루십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부활 승천하시면서 다시 오시겠다고 말씀하신 대로 이 땅에 다시 오실 줄 믿습니다. 그러므로 저와 여러분은 언제나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열심히 읽고, 그 말씀대로 된다는 것을 기억하며, 말씀대로 살아야 할 것입니다. 예수님이 탄생할 당시에 유대 나라는 망하여서 로마의 식민지가 되어 있었습니다. 더구나 불행하게도 말라기 선지자 이후로는 어느 선지자도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구약시대로부터 이제까지 그 많은 선지자가 메시아가 반드시 오실 것이라고 거듭해서 예언하였지만, 그 당시 사람들은 메시아에 대한 소망이 희미해질 대로 희미해져서 메시아에 대한 기대를 거의 잊고 살았습니다. 이때를 가리켜 학자들은 영적 암흑기라고 부릅니다. 이처럼 대부분의 사람들이 영적으로 깜깜한 이때에 선지자의 예언대로 예수님께서 탄생하셨습니다. 그런데 그 당시 예루살렘에는 수많은 제사장이 있었고, 서기관들이 있었지만 어느 누구도 메시아의 탄생을 아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모두가 다 영적 소경들이었기 때문입니다. 다만 메시아의 탄생을 알리는 별이 나타났을 때, 그 별을 보고 별을 따라 베들레헴까지 먼길을 마다 않고 찾아왔던 동방박사들만이 아기 예수님을 찾아와 엎드려 경배하고 보배합을 열어 황금과 유향과 몰약을 예물로 드렸다고 했습니다(마 2:1~11). 그리고 그 밤에 들판에서 양떼를 지키던 목자들이 천군 천사가 전해주는 말을 듣고 베들레헴까지 가서 아기 예수님께 찾아와 경배하였다고 했습니다(눅 2:15~20). 이처럼 모든 사람들이 고대하던 메시아가 탄생하였지만, 막상 찾아와 경배한 사람은 이스라엘 사람이 아닌 동방의 박사들과 한 밤중에 양떼를 지키고 있던 몇 명의 목자들뿐이었습니다. 예루살렘에 있는 헤롯왕과 그 많은 제사장과 서기관들은 이러한 사실을 모르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메시아가 탄생했다며 동방에서부터 그의 별을 보고 그에게 경배하러 왔노라고 하는 동방박사들의 말을 듣고서야 비로소 온 예루살렘이 소동했다고 했습니다. 마찬가지로 예수님이 재림하실 때도 이와 같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이 재림하시는 날짜와 시간을 아는 사람이 하나도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이 재림하실 때에 전세계가 크게 소동하게 될 것입니다. 누구보다도 교회 안에 남아있는 사람들, 다시 말하면 예수님 오실 때 공중에 들려 올라가지 못한 신학박사들과 목사님, 장로님, 집사님, 권사님 등등 많은 사람들이 크게 소동하며, 땅을 치고 가슴을 치며, 후회하고 통곡하게 될 것입니다. 마태복음 24장을 보면, 예수님께서 재림하실 때의 상황이 노아의 때와 같을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노아는 홍수심판을 대비하여 하나님이 명하신 대로 방주를 만들었습니다. 그런데 노아의 식구들이 방주에 들어가던 날까지도 세상사람들은 먹고 마시고 장가들고 시집가고 홍수가 나서 저들을 다 멸하기까지 깨닫지 못했다고 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오실 때에 두 사람이 밭을 가는데 한 사람은 데려감을 당하고 한 사람은 버려둠을 당할 것이며, 두 여자가 매를 가는데 한 사람은 데려감을 당하고 한 사람은 버려둠을 당할 것이라고 했습니다. 심지어 두 사람이 같이 잠을 자다가 한 사람은 데려감을 당하고 한 사람은 버려둠을 당한다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깨어 있으라 어느 날에 너희 주가 임할는지 너희가 알지 못함이니라]고 했습니다(마 24:42~43). 이는 예수님께서 언제 오실는지 알지 못하므로 저와 여러분 모두가 평소에 준비해 놓고 살라는 말씀입니다. 여러분은 재림하실 예수님을 영접할 준비를 해 놓고 계십니까? 주님께서 언제 오시든지 기쁨으로 주님을 맞이할 수 있으시기 바랍니다. 본문 7절을 보면 [마리아가 맏아들을 낳아 강보로 싸서 구유에 뉘었으니 이는 사관에 있을 곳이 없음이러라]고 했습니다. 구유는 낙타나 나귀나 말의 먹이통을 말합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이 태어나신 곳이 마구간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는 이를 통하여 그 당시 사람들의 고약한 인심을 엿볼 수 있습니다. 젊은 여인이 산통이 있어 해산을 하려고 하는데 잠시라도 몸을 풀 수 있도록 방을 내어주는 사람이 그곳에 하나도 없었다는 사실입니다. 산모는 급한 나머지 마구간을 빌려 아기를 낳고 구유에 누일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 광경을 볼 때 참으로 그 당시 이스라엘의 인심이 얼마나 야박했는지 짐작할 수 있습니다. 사사기 시대로 거슬러 올라가보면, 베냐민 지파의 사람들이 그러했습니다. 여관이 없었던 그 시절에 여행중인 한 나그네가 잠자리를 구했으나 아무도 그 나그네를 자기 집으로 영접하여 유숙케 하는 자가 없다고 했습니다(삿 19:15). 이 사건이 발단이 되어 베냐민 지파는 이스라엘 각 지파들의 총공격을 받아 전멸당하는 위기에 놓이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자비하심으로 겨우 600명의 남자들만 남아 종족을 보존해야 하는 불행을 겪었습니다(삿 20:47~48). 마태복음 25:31절 이하를 보면, 예수님께서 양과 염소의 비유를 말씀하시면서 주님께서 오른 편에는 양을, 왼편에는 염소를 두고 심판하십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양을 향하여 창세로부터 복 받을 자들이라고 칭찬하셨습니다. 너희들은 내가 주릴 때에 먹을 것을 주었고, 목마를 때에 마시게 하였고, 나그네 되었을 때 영접하였고, 벗었을 때에 옷을 입혔고, 병들었을 때에 돌아보았고, 옥에 갇혔을 때에 와서 보았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양들은, 우리는 결코 주님을 만나 본적이 없는데 언제 우리가 주님께 이런 대접을 했다는 말씀입니까? 하고 되물었습니다. 그러나 우리 주님은 그렇지 않다고 하시면서 네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이어서 왼편에 있는 염소들에게 이렇게 책망하셨습니다. 내가 주릴 때, 목마를 때, 나그네 되었을 때, 벗었을 때, 병들었을 때, 옥에 갇혔을 때, 도무지 너희가 나에게 사랑을 베풀지 않았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자 그들은 우리가 주님을 만났으면 해드렸을텐데, 우리가 언제 주님을 만난 적이 있느냐고 의아해 했습니다. 이에 대하여 우리 주님께서는, 네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에게 하지 않은 것이 곧 내게 대하여 하지 않은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오늘날 기독교인들이 우리의 이웃들에게 어떻게 행하며 살아야 하는지 보여주고 있습니다. 성도 여러분! 만일 예수님을 해산하려고 마리아가 이 부산 땅에 나타났다면 어떠했겠습니까? 우리가 평소에 사랑을 베풀며 살았다면 요셉과 마리아가 왔더라도 역시 사랑을 베풀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평소에 사랑을 베풀며 살지 않았다면 역시 영접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교회에 나아와 예배를 드리고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때에 머리 속에만 집어넣고 갑니다. 그 중에 몇몇 사람들은 마음속에 감동을 받아 가기도 합니다. 그러나 말씀대로 순종하고 행하는 사람은 참으로 적습니다. 오늘날 교회에 출석하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행함이 없는 죽은 믿음을 가지고 살아가기 때문에 이 사회에 어떤 영향력도 끼치지 못하고 있습니다. (약 2:17). 믿음은 3가지로 이루어집니다. 1. 하나님(말씀)을 아는 것입니다. 2. 하나님(말씀)을 신뢰하는 것입니다. 3. 하나님(말씀)을 사랑하며 행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믿음은 하나님을, 하나님의 말씀을 알고 믿고 행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야고보서 2:19절을 보면, 귀신들도 하나님이 한 분인줄 알고 믿고 떤다고 했습니다. 이처럼 귀신들도 하나님을 알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알고 있습니다. 어찌보면 우리 자신들보다 하나님을 더 잘 알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귀신은 하나님을 신뢰한다거나,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습니다. 더더욱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지 않습니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하나님을 알고 말씀을 잘 알아도,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없고 하나님의 말씀대로 행하지 않는다면 귀신의 믿음을 우리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날 남한 땅에 1300만 명이나 되는 기독교인이 있다고는 하나 전혀 힘이 없습니다. 이 사회에 영향력을 끼치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한 마디로 행함이 있는 믿음의 사람이 적기 때문입니다. 산 믿음의 사람이 정말로 드물기 때문입니다. 행함이 없는 사람은 불신자와 다를 바 없습니다. 죽은 믿음은 아무런 힘이 없습니다. 그래서 이 사회에 좋은 영향을 끼치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기독교의 생명은 사랑에 있습니다. 우리 기독신자의 생명도 사랑에 있습니다. 사랑을 잃어버리면 생명을 잃어버린 것입니다. 요한일서 3:10절을 보면 [하나님의 자녀들과 마귀의 자녀들이 나타나나니 무릇 의를 행치 않는 자나 그 형제를 사랑치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께 속하지 아니하니라]고 했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자녀와 마귀의 자녀를 구별하는 것은 그 사람이 의를 따라 사는지, 그 형제를 사랑하는지 하는 것을 보면 알 수 있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그 형제를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기독교인이 아닙니다. 저와 여러분이 이 세상을 복음화 하는 방법은 기독교인답게 사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자녀답게 사는 것입니다. 즉 사랑을 행하며 사는 것입니다. 사랑만큼 사람의 마음을 감동시키는 것은 없습니다. 여러분이 이웃을 전도하기 원하십니까? 평소에 사랑을 많이 베푸시기 바랍니다. 저는 너무 바쁘다 보니 친척들을 일일이 찾아보지도 못하고 전화할 시간을 내기도 힘듭니다. 그래서 저는 그 분들에게 매달 용돈을 보내드리고 있습니다. 그분들이 그돈을 어디에 쓰시든지 상관없이 보냅니다. 그렇게 하다보면 얼마 후에 모두 다 교회에 나간다는 반가운 소식을 듣게 됩니다. 이번 성탄절에는 우리 모두 작은사랑이라도 실천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우리 교회는 이번 성탄 감사헌금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에 사용할 것입니다. 우리가 이 부산을 복음화 하기 위해서 우리가 행하며 보여줄 수 있는 것은 오직 사랑뿐입니다. 이 작은사랑들이 모아져서 부산 시민들이 이구동성으로 수영로 교회는 좋은 교회라고 칭찬하는 때가 오게 되면, 자연히 부산이 복음화될 줄 믿습니다. 아무쪼록 저와 여러분은 이 말씀대로 살아서 우리 모두 작은 사랑이라도 나누어주는 산 믿음의 사람이 되십시다. 영광과 평화와 기쁨(누가복음2:8-14) 모나코라는 아주 작은 나라가 있습니다. 국민들은 음악을 사랑하며 범죄가 없는 평화로운 나라입니다. 이 나라에는 유명한 국립 교향악단이 있는데 "사랑과 평화의 노래"를 불러 국민들의 마음을 사로잡고 있습니다. 단원은 85명밖에 되지 않습니다..그런데 .이 나라의 군인은 82명뿐 입니다. 육해공군을 합친 수보다 교향악단 단원 수가 더 많습니다.. 인류에게 평화를 가져다주는 아름다운 음악 인류에게 평화를 가져다주는 것은 무력이 아니라 아름다운 음악이라는 사실을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사야는 메시야 예수께서 오시는 그날에 부를 평화의 노래를 이와같이 불렀습니다. "그때에 이리가 어린 양과 함께 거하며 표범이 어린 염소와 함께 누우며 송아지와 어린 사자와 살진 짐승이 함께 있어 어린 아이에게 이끌리며....젖먹는 아이가 독사의 구멍에서 장난하며 젖뗀 어린 아이가 독사의 굴에 손을 넣을 것이라"(사11:6-) 예수께서 이 땅에 나실 때에 하늘에서 천군천사들이 내려와 평화의 노래를 불렀습니다. 평화는 어떠한 가치입니까? 괴테는 "평화는 인류 최고의 이상이다"라고 말한 바 있습니다. 우리의 평화가 되시는 하나님 성경은 그 평화의 진정한 근원이 하나님이라고 밝혀 줍니다. 가정의 평화도, 직장에서의 평화도, 인간 관계 속에서의 평화도, 국가의 평화도 그리고이 지구촌의 진정한 평화도 오직 하나님에게서만 올 수 있습니다. 구약성경에 하나님이 가지고 있던 이름 중에 여호와 샬롬』이라는 이름이 있습니다. 이 말은■■우리의 평화가 되시는 하나님■■이라는 뜻입니다. 신약성경에도 그는 우리의 화평이신지라...말하고 있습니다. 예수께서 태어났을 때, 천사들은 그분의 탄생 소식을 이렇게 알렸습니다.■■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기뻐하심을 입은 사람들 중에 평화로다■■(눅 2:14). 예수께서 탄생하시기 수백 년 전에 이사야 선지자는 이미 그분을 가리켜■■평강의 왕■■(Prince of Peace) 이라고 예언했습니다(사 9:6 참조). 에베소서 2장 14절 이하에 보면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의 화평이신지라. 오셔서 먼데 있는 너희에게 평안을 전하고 가까운데 있는 자들에게 평안을 전하셨으니 이는 저로 말미암아 우리 둘이 한 성령 안에서 아버지께 나아감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무엇이 예수님이 주시는 평안입니까? 원수 된 우리가 모든 죄를 용서받고 하나님 아버지께 담대히 나아가게 되는 것이 예수님이 주신 평화입니다. 주님의 이름으로 하나님 앞에만 나가면 모든 허물과 죄를 순식간에 용서받고 하나님은 우리를 자녀로 받아들이시는 것입니다. 여러분, 오늘 예배드리기 위해서 이 자리에 나온 우리 모두가 얼마나 행복한 사람입니까? 왜 그렇습니까? 우리에게 평화를 주신 예수님 때문에 우리는 오늘 하나님 아버지를 찬양하면서 예배하고 있는데 이런 축복은 아무나 받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14절을 다시 보십시오. 아무나 누리는 축복이 아니라고 말합니다. '땅에서 기뻐하심을 입은 사람들에게만 평화로다.'라고 했습니다. 십자가에 달리시기 전날밤 예수께서는 사랑하는 제자들에게 이런 메시지를 유언처럼 그리고 유산처럼 남겼습니다.■■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 같지 아니하니라■■(요 14:27). 예수께서는 인간과 하나님 사이의 진정한 평화를 위해서 자신의 생명을 던졌습니다. 평화는 단순히 환경을 개선함으로써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물론 평화로운 환경을 만들기 위한 노력이 필요하지만, 평화의 진정한 근원이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아직도 주님이 우리의 평안이라고 말합니다. 평화를 바라는 많은 사람들은 지금 이 순간도, 평화를 방해하는 정치적, 사회적 요인이 무엇인가를 분석하고 이 세상을 좀더 평화롭게 할려고 끊임없이 노력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평화를 위협하는 적이 정치적, 사회적 요인이나 외적 환경에 있다고 말하지 않습니다.성경은 평화를 깨뜨리는 무서운 적이 바로 죄라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화평케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것임이요■■(마 5:9). 이 위대한 팔복의 메시지를 기억하십니까?■■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하나님을 볼 것임이요■■(8절).주님은 먼저 마음의 청결을 이야기하고 그 다음에 화평을 이야기하십니다. 청결한 마음 없이, 양심의 진정한 자유 없이 평화를 소유하기란 불가능합니다. 그렇습니다. 죄 문제의 해결이 없이는 평화라는 주제에 접근할 수 없습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으심, 이 죽으심이 가져온 가장 놀라운 결과는 하나님과의 평화입니다. 천사가 목자들을 만나 한 이야기는 '이 세상에 미칠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을 너희에게 전하노라.'라는 말씀이었습니다. (눅2:10)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이라고 했는데, 왜 기쁩니까? 왜 좋은 소식입니까? 예수님은 우리를 하나님과 평화하게 하시는 평화의 왕이기 때문입니다. 이 평화는 세상의 암흑과 혼돈 속에서도 없어지지 아니하는 것입니다. 이 평화는 폭풍이 몰아치는 바다에서도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에서도 우리를 지켜 주십니다. 대영제국의 국립 미술관에 가면 이런 그림 하나가 걸려 있습니다. 전쟁중에 통신이 두절되었습니다. 본부에 연락을 해야 하는 임무를 맡은 한 통신병이 본부와 연락을 하기 위해 양손에 끊어진 전선을 쥐고 메시지를 보낸 다음 그 자리에서 총에 맞아 쓰러져 죽은 모습을 그린 그림입니다. 그 병사의 죽음이 끊어진 전선을 연결시켜 통신을 가능하게 했던 것입니다. 예수께서 십자가에 죽으실 때, 그분은 한 손에 아버지의 손을 쥐고 다른한 손에 내 손을 쥐고 계셨습니다. 즉, 죄로 말미암아 단절되었던 하나님과 나 사이를 연결시키기 위해서 그리스도께서 친히 죄의 대가를 치르신 것입니다. 그분의 죽으심으로 인하여 우리는 하나님을 아바 아버지라고 부를 수있는 놀라운 축복을 받게 되었습니다. 첫째로 평화를 실현하는 때는 언제입니까 ? 이사야는 9장 2-6절에서 이렇게 노래합니다. '이는 한 아기가 우리에게 났고 한 아들을 우리에게 주신 바 되었는데 그 어깨에는 정사를 메었고 그 이름은 기묘자라 모사라 전능하신 하나님이라 영존하시는 아버지라 평강의 왕이라 할 것임이라.' 한 아기 곧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평강의 나라가 임한다는 것입니다. 둘째, 평화가 실현되는 장소는 어디입니까 ? 교회가 곧 평화의 전당입니다. 국회의사당이나 유엔총회가 열리는 회의장이 평화의 산실이 아니라 바로 교회가 평화의 산실인 것입니다. 바로 여기에 전쟁과 갈등속에서 평화를 갈망하는 시대에 처한 교회의 사명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김구 선생님은 경찰서 대신 교회를 세우자고 역설했던 것입니다. 예루살렘의 타락은 결국 예수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박는 것으로 귀결되었습니다. 이것은 무엇을 말해주는 것일까요 ? 교회에 평화가 없으면 예수 그리스도를 또다시 십자가에 못박는 결과를 초래하게 된다는 것을 말해 줍니다. 셋째, 평화를 이루는 방법은 무엇일까요 ? 그러면, 이처럼 온 인류가 염원하는 평화를 이루는 방법은 무엇일까요? 월남전이 치열하던 어느날 정오에 팝 반루어라는 퇴역 군인 한명이 국회의사당?에서 노란 바탕에 붉은 줄이 간 월남국기를 두르고 정좌했습니다. 잠시 후 그는 가솔먼을 온 몸에 뿌리고 평화를 외치며 성냥불을 그어댔습니다. 그가 티우대통령, 호지명, 아내 그리고 다섯 자녀에게 보낸 유서에는 다음과 같이 씌어져 있었습니다. '나는 월남에 평화가 돌아오기를 기원하면서 나자신을 불태웁니다.' 그러나 오늘날 월남의 상황은 어떻습니까? 그가 분신자살한 며칠 후, 월남은 잔인한 호지명군의 군화에 짓밟히지 않을 수 없었고 월남전역에 걸쳐 대대적인 살륙이 진행되었습니다. 그 땅에는 아직 평화는 오지 않았습니다. 자기 몸을 불태우는 희생조차도 평화를 가져올 수 없었습니다. 인간이 할 수 있는 가장 고귀한 노력과 희생조차도 평화를 가져오지 못합니다. 넷째, 평화를 궁극적으로 이루시는 분은 누구입니까? 여호와 하나님이 친히 다스리실 때 꿈과도 같은 평화의 나라가 이루어질 것입니다. 유럽에서는 결혼한 부부들이 아이를 낳는 것을 매우 두려워한다고 합니다. 그 이유는 아이들을 낳을 경우 그 아이들이 틀림없이 핵전쟁의 회생물이 될 것이 분명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 일은 오직 여호와의 다스리심을 받을 때만 가능할 것입니다. 유엔총회가 하나님의 율법에 근거해서 세계문제들을 논의하고, 백악관과 국회의사당과 청와대가 하나님의 다스리심에 순종할 때 비로소 그 일은 이루어질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제 우리가 해야 할 선택이 무엇인가는 분명해졌습니다. 마태복음 5장9절에■■화평케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이요■■(9절)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즉 평화를 만드는 자라야 하나님의 아들다운 아들이라는 선언인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은 분쟁과 분열이 있는 곳에 평화를 심기 위한 중재자로서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내가 이세상을 따나는 날, 어떤 모습으로 나의 삶이 사람들에게 기억될 것으로 생각합니까? 평화를 만들었던 사람 아니면 분쟁을 일으키는 장본인, 둘 중의 하나로 기억될 것입니다. 사실 우리의 불화, 우리의 분쟁,우리의 갈등의 밑바탕에는 우리의 욕심과 자존심이 도사리고 있습니다. 이죄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자신의 생명을 내어주셨던 예수 그리스도, 그분으로 말미암아 죄 사함과 구원을 얻는 사람 만이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르게 되고 참된 평화를 알게 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 진정하고 참된 평화는 평화의 왕, 만왕의 왕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만 가능합니다. 오늘 우리는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를 통하여 평화가 이루어져 가고 있으며 세상 끝날 그리스도께서 다시 오실 때 그 이상은 완성될 것입니다.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는 하나님과 우리 사이를 화목케 했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을 아버지로 부르는 모든 이들 사이를 화평케 했습니다. 바로 여기에 미움과 분열과 소외를 뛰어 넘어, 모든 사람들이 다 함께 살아 계신 하나님을 아버지로 부를 수 있는 놀라운 평화가 이루어졌습니다. 헨리 나우웬이 말했습니다. '용서는 공동체인 교회 생활의 접착제입니다. 용서는 좋을 때나 나쁠 때나 우리를 함께 있도록 붙들어 주고 우리가 서로를 사랑하는 가운데 자라게 합니다.' 옳은 말씀입니다. '나는 용서받아야 될 사람이요, 용서해야 될 사람이요, 당신도 용서받아야 할 사람이요, 항상 용서해야 될 사람입니다.' 이 사실을 서로 인정하는 것이 교회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회 안에서 보면 평화의 왕을 아직도 만나지 못한 사람처럼 형제와 원수가 되어 있는 사람들도 많고, 한 번 상처를 입으면 두고 두고 그 상처가 묵은 상처가 되어 고침을 받지 못하는 비극도 여기 저기에 있습니다. 입으로는 용서한다 하면서도 마음으로는 용서를 안하는 것입니다. 입으로는 좋은 말을 하지만, 속으로는 그 사람의 실수를 절대 잊어버리지 않는 것입니다. 부부간에도 그렇고 고부간에도, 형제간에도 그런 것을 봅니다. 심지어 교회 안에서 함께 하나님을 예배하는 바로 옆에 앉아 있는 형제들까지도 서로 용서하지 못하는 앙금을 가지고 예배를 드리는 것을 봅니다. 여러분, 만약에 우리가 이런 사람이라면, 평화의 왕으로 오신 예수님을 아직 만나지 못한 사람이라고 보아야 됩니다. 하나님 앞에 모든 죄를 용서받고 하나님과 평화한 사람이라고 말할 수가 없습니다. 우리가 세상을 살다 보면 감정이 상할 때도 있습니다. 어떤 때는 서로가 좀 심한 다툼도 할 수 있습니다. 서로 상처를 주기도 하고 피해를 입히기도 합니다. 이것이 세상입니다. '나는 절대 누구에게도 피해를 주지 않는다. 나는 절대 어떤 사람에게도 상처 주는 일이 없을 것이다.' 누가 그렇게 장담하면서 인생을 살 수 있습니까? 아무도 그렇게 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다 피해를 줄 수밖에 없는 사람입니다. 피해 받을 수밖에 없는 사람입니다. 누구나 다 감정이 상할 수 있습니다. 오늘 친했다가 내일 원수가 될 수도 있습니다. 우리는 다 약한 인간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평화의 왕이 내 가슴이 항상 살아 계셔서 그분이 주시는 은혜를 가지고 무조건 백번이고 천번이고 일곱번씩 일흔번이라도 형제를 용서해야 될 사람입니다. 용서함으로써 그들과 평화를 누림으로 우리가 평화의 왕을 모시고 사는 사람들임을 세상이 볼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 마음에 상한 감정을 가지고 있고 죄 용서함을 받지 못하고 있고 마음에 증오가 있으면 누가 손해를 봅니까? 내가 미워하는 그 사람이 손해 봅니까? 천만의 말씀입니다. 손해는 내가 보는 것입니다. 그런 마음을 갖고 있으면 기도가 잘 안됩니다. 영적으로 점점 더 병이 들어갑니다. 자기도 모르게 병이 들어갑니다. 병이 들어가면 은혜와는 거리가 멀어집니다. 나중에는 정신적으로 큰 피해를 입습니다. 그것이 심해지면 육신까지 병이 납니다. 누가 손해를 봅니까? 평화의 왕을 모시고 있다면서 모순된 삶을 사는 사람이 손해를 봅니다. 우리는 그렇게 살면 안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지나간 날들을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푯대를 향해 달려갈 자세를 다시 가다듬으십시오. 과거의 묵은 감정이나 원한, 피해의식을 다 묻어 버리십시오. 다시 말하면 과거에 대해서 문을 닫고 못질을 해 버리고 다시 보지 마십시오. 모든 것을 용서하면서 새로운 2001년을 맞이해야 합니다. 평화의 왕 예수님이 나를 지배하시어 내가 하나님과 화목한 사람으로서, 가는 곳마다 이 평화의 왕이 모든 사람들에게 증거 되어 미움이 있는 곳에 진정한 사랑이 꽃 필 수 있도록 하는 평화의 사신이 되어야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평화의 왕이 오셨습니다. 그분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과 평화하게 되었습니다. 동시에 그분을 내 마음에 모시고 우리는 이 세상 어디를 가든지 평화의 사신으로, 평화의 대사로 일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내가 만나는 사람들과 평화하고 내가 일하는 직장에 하나님의 평화가 임하였음을 선포하고 모든 사람들이 이 평화를 통해서 새로워지는 은혜를,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는 것을, 주님이 다스리시는 새 역사가 창조되는 것을 우리 모두가 목격하면서 사는 내일이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성 프란시스의 기도를 다시 한 번 기억합시다. '주여 나를 평화의 도구로 써 주소서/ 미움이 있는 곳에 사랑을, 다툼이 있는 곳에 용서를, 분열이 있는 곳에 일치를 가져오는 자 되게 하소서' 아멘. 오늘은 하늘에 있는 천사들이 땅에 내려와서 아기로 태어난 구세주를 찬양하는 음성을 듣겠습니다. 여러분께서 아까 함께 읽으셨습니다. 가장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주께서 기뻐하시는 사람들에게 평화입니다. 이것이 하늘 성가대가 부른 크리스마스 캐롤입니다. 첫 번째를 천사들이 이렇게 불렀습니다.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입니다. 땅에서는 주께서 기뻐하시는 사람들에게 평화입니다. 하늘 천사들이 아멘 했고 그것을 받는 땅에 있는 사람들이 아멘 했습니다. 하늘의 아멘과 땅의 아멘이 합치면 구세주가 태어나는 크리스마스 캐롤이 울립니다. 하늘에서 천사들이 내려와서 땅에는 평화입니다. 아기 예수를 만난 모든 사람들이 평화를 즐기고 있을 때 하늘은 계속 찬송을 했습니다. 사랑과 진실이 만나고 평화가 정의와 입맞춤니다. 이런 아름답고 좋은 일들이 평화라는 이름으로 오늘 우리에게 임하십니다. 여러분은 찬양을 하시고 기도를 하십시오. 평화는 미소에서 출발합니다. 미소를 통한 평화와 기쁨이 있을 때 하늘에는 영광입니다. 영광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닙니다. 세상에 평화와 기쁨과 정의를 한참 즐기고 있을 때 하늘은 영광으로 덮입니다. 영광이 딴데 있는 것이 아닙니다. 영광이 땅에 임하면 평화로 바뀝니다. 평화가 하늘로 상달되면 영광이라고 합니다. 예수 믿는 목적, 기독교인 된 목적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일입니다. 그러면 땅에 있는 동안 평화를 위해 일하고 평화를 즐기면 하나님이 영광을 받습니다. 하늘에 있는 영광이 땅에 임하면 평화가 되듯이 땅에 있는 평화가 하늘로 올라가면 영광이 됩니다. 성탄절을 하루 앞둔 오늘 여러분들의 가슴 속에 하늘 영광이 임하시는 기쁨이 여러분에게 충만하시기를 바랍니다. 오늘 우리교회 연합성가대의 아름다운 찬양으로 주님 오심을 축하합니다. 천사장이 지휘하는 성가대가 다시 노래합니다.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고 땅에서는 기뻐하심을 입은 우리에게 평화입니다.” 임마누엘 (사 8:5-10; 마 1:18-23) 성탄절은 예수님께는 가장 슬픈 날이지만 가장 기쁜 날로 만드셨다. 하나님 없던 사람을 하나님 있게 하셨고 함께 하시는 임마누엘이 되게 하셨기 때문이다. 이사야는 예수님의 탄생 800년 전에 예수님의 탄생을 예언하면서 예수님의 이름을 임마누엘이라고 한다. 임마누엘은 하나님의 성품이며 하나님의 일이며 하나님의 목적이다. 이런 의미를 예수님 오실 때 예수님의 이름으로 주셨다. 성탄 주일을 맞이하여 예수님의 탄생 때에 주어진 이름의 의미를 통하여 성탄의 의미가 살아나게 하자. 1. 성탄의 방법 사람이 세상에 오는 방법은 부모님의 몸을 통하여 온다. 그러나 세상을 죄에서 구원하시려 오시는 예수님은 죄인의 방법으로 오실 수 없다. 그 방법이 초자연적인 방법인 처녀가 잉태하여 이 땅에 오는 방법이다. 죄는 하나님과의 단절이며 단절된 자체가 죄이다. 단절은 하나님께 대한 죄악이며 인류에 대한 범죄행위이다.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다. 죄를 범한 인간은 절대로 자신을 구원할 수 없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성탄은 하나님의 구원에 대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최후의 유일한 수단이었다. 2. 성탄의 이름 이사야서는 예수님의 이름을 기묘자, 모사, 전능하신 하나님, 영존하시는 아버지, 평강의 왕이라 한다. 그 외에도 그리스도, 인자, 하나님의 아들, 선한 목자, 등 예수님의 이름은 많다. 태어나실 때에도 예수라는 이름을 가지고 나셨고 구원자 외에도 임마누엘이라는 이름을 가지고 나셨다. 죄가 분리라면 구원은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시는 것이다. 지금도 예수님을 믿으면 죄와 멀어지고 멀어졌던 하나님과 함께 한다.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행 2:21)고 하셨다. 임마누엘은 그 이름이 구원이며 그 이름에 힘이 있다. 3. 성탄의 목적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심으로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시려는 목적은 성취된다. 그러므로 임마누엘은 성탄의 목적을 성취하신 것이다. IMF 시대를 살고 있지만 우리만 당하는 고통이 아니라 예수님이 함께 하시는 IMF이다. 하나님은 큰 날개로 우리를 감싸고 계시며 원수를 패망하게 하신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백성을 하나님이 없는 백성이 결단코 이기지 못한다. 이 하나님은 "세상 끝날 까지 나와 항상 함께 하리라"고 하신다. 임마누엘로 오신 주님과 함께 구원을 체험하고 주님을 의지하고 용기를 가지고 승리하자. 종의 모습을 취하신 하나님 이사야 61장 1~2절 주께서 나에게 기름을 부으시니, 주 하나님의 영이 나에게 임하셨다. 주께서 나를 보내셔서, 가난한 사람들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고, 상한 마음을 싸매어 주고, 포로에게 자유를 선포하고, '갇힌 사람에게 석방을 선언하고, 주의 은혜의 해와 우리 하나님의 보복의 날을 선언하고, 모든 슬퍼하는 사람들을 위로하게 하셨다. 빌립보서 2장 5~8절 여러분은 이런 태도를 가지십시오. 그것은 곧 그리스도 예수께서 보여 주신 태도입니다. 그분은 하나님의 모습을 지니셨으나, 하나님과 동등함을 당연하게 생각하지 않으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서 종의 모습을 취하시고, 사람과 같이 되셨습니다. 그는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셔서,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순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기까지 하셨습니다. 요즘의 모습들을 보면 우리는 크리스마스의 참뜻을 알지 못하고 예배를 드리는 Sorry Christmas를 Merry Christmas로 둔갑시킨게 아닌가 합니다. 일전에 요르단 암만에서 "새천년 뉴밀레니엄에 있어서의 종교의 역할"주제로 세계 종교인들이 모이는 회의에 참석했었습니다. 여기에서 신기하게 느껴졌던 것이 바로 세계종교인들의 회의의 주제에 뉴밀레니엄이라는 단어를 쓰는데 반대하는 종교가 없었다는 것입니다. 밀레니엄이라는 것은 바로 예수님이 태어나신 크리스마스를 역사의 기점으로 보는 관점에서 나온 말입니다. 그리스도가 태어나서 2천년 ,새천년이 어떻게 된다는 것입니까? 하나님의 아들이 구세주로 났다면 부정은 무너지고 정의의 역사가가, 갈등과 전쟁은 물러나고 평화역사가가 죽음의 세력이이 깨지고 생명이 역동하는 그런 역사가 시작되어야 우리가 정말 구세주가 온 날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까, 그러나 지난 2000년간 그런 세상과는 정반대 삶을 살아왔고 새천년의 꿈을 말하지만 다가올 새천년 역시 우리들은 억압과 부정과 갈등과 대립과 죽음의 역사로 엮어진 속에서 살아갈것입니다. 그런데 왜 예수님이 나심으로서 하나님이 이세상을 구원하신다는 구세주란 말을 쓰는 것입니까? 크리스마스 이야기가 무엇입니까? 시골처녀가 아기 낳을 방이 없어서 말구유간에서 아기를 낳았습니다. 그런데 그 지역에서 거지취급 받던 목자들이 와서 경배를 하고 33년 동안 땅위에서 머리둘곳도 없이 살아가며 고난을 겪다가 33살에 십자가에서 피흘리고 죽은 바로 사형수 그분이 우리가 지금 축하하는 예수님이시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결국 우리가 오늘 이분이 세상에 온 것을 무엇 때문에 축하를 해야되고 우리를 구원하신 주라고 하는 말을 해야하는 걸까요. 도대체 2000년전에 유대나라에 태어나 33살에 죽은 그분은 누굽니까? '문화사적으로 본 2000년 예수'라는 책에 예수라고 하는 인물에 대해서 신학 수십가지 수백가지가 될뿐이 아니라 소설 그림 그리는 사람이 다 제멋대로 묘사했다는 이야기를 읽은 적이있습니다. 같은 러시아 사람인 도스토예프스키가 본 예수와 톨스토이가 본 예수가 다릅니다. 이 시간에 당신의 지금 머리속에 생각하는 예수도 또한 사람 각자 한사람 한사람 마다 모두 다를 것입니다. 못돼도 수십가지의 예수가 나올겁니다. 우리가 크리스마스를 맞이해서 역사를 표면적으로 보면 달라진 것도 달라질 것도 없습니다. 그러나 역사의 밑바탕에 어떤 변화가 일어났는가에 대한 물음은 다릅니다. 여기에 대해서 가이사랴 빌립보를 지나면서 사람들이 나를 누구라 하더냐하는 예수님의 물음에 대해서 각종 대답이 나오지만, 초대교회시절에는 교인들이 예배시간에 공동으로 읽는 글이 있었습니다. 빌립보서 2장 5절부터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예수는 근원적으로 본래 하나님의 본체였다. 그런데 그분이 사람의 모습으로 태어나서 자기를 낮추어 죽기까지 복종하여 십자가에 두었는데 종의 모습으로 십자가에서 죽었다. 바로 이분을 통해서 하나님께서는 그를 전 피조물의 구세주로 삼고 모든 만물이 피조물들이 그를 주님이라고 고백하게했다" 이 뜻을 우리가 이해하지 못하고 크리스마스를 지키는 것은 이상한일이 될 뿐입니다. 다시말하면 천지를 만든 하나님 그 하나님은 성서에 사랑이십니다. 그 사랑의 하나님이 권력욕과 물질욕이라는 가치로서 엮어진 인간의 역사속에 오시어서 이 역사의 근원을 뒤집어버렸습니다. 이것이 마가복음 10장 40절이하의 예수님 말씀입니다. "지금까지 이 세상을 다스려온자들은 사람을 억누르고 사람을 지배하고 사람들을 마음대로 부려먹고 그래야 잘난 사람인줄 알았겠지만 이제는 그래서는 안된다. 나는 이 세상에 온것은 섬김을 받으러 온것이 아니라 섬기러 온 종이다." 바로 그것이 예수님이었습니다. 우리가 천지만물을 창조하신 그분이 이 피조물속에 나타났는데 종의 모습으로 태어났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믿는다는 것은 결코 쉬운이야기는 아닙니다. 우리는 사랑이신 하나님의 아들이 이세상에 태어나셨을 때 계실 장소가 없었다는 것, 태어날 장소가 없이 밀려났다는 것, 그리고 천사들이 목자들에게 나타나 구세주가 구유에 핏덩어리가 있는 아기로 바로 이것이 하나님이라는 증거라고 말했다는 것 우리는 이 사실을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밀려나고 밀려나서 말구유에서 애기가 나는 , 바로 그것이 하나님의 역사의 시작입니다. 오늘 이 세계 곳곳에도 아니 우리가 사는 이 서울거리는 호텔이라는 호텔 고급호텔은 완전 만원입니다. 여기에서 밀려나고 밀려나서 지금은 들어가 잘 방이 없어서 길가에 노숙하고 있는 사람들이 지금 이 서울거리에 얼마나 많습니다. 또한 서울거리에 병원이라는 병원은 가득차 있지만 들어 갈 수도 없는 사람들이 이 서울거리에 얼마나 많이 살고있습니까. 우리가 이 참혹한 현실을 볼 수 있는 눈을 가지지 못하면 크리스마스의 아기를 우리는 볼 수 없을 것입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크리스마스를 보아야 하는 것입니다. 오늘 크리스마스 축하를 서울안에 있는 모든 교회들이 야단치고 법석을 치지만 아기예수가 없는 크리스마스만 번쩍 번쩍거리고 있습니다. 아기예수는 구유에 태어나 떨고 있었습니다. 아기예수는 그렇게 화려한 크리스마스 화려한 장소에 있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여기에 하나님이 사람의 모습, 완전한 종의 모습으로 떨고있는 그 아기, 그 구유에 누운 아기로 오신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이 세상을 구원하는 역사가 시작되는 장소인 것입니다. 여기에서 역사는 새 역사가 시작되는 것이며 우주는 새우주가 되는 것입니다. 즉 힘에 의해서, 소유에 의해서 지배되던 세계가 이제는 사랑에 의해서 지배되어지는 세계로 바뀌어졌다 그런 뜻입니다. 그러므로 이 새로운 역사에 사는 사람들은 요한일서 4장 11절에 사랑하는 여러분은 명심하십시오 아직까지 하나님을 본 사람은 하나도 없습니다. 그러나 여러분이 정말 서로 사랑하면 하나님을 볼 수가 있습니다. 바로 사랑하는 그 장소에 하나님은 와 계시기 때문입니다. 크리스마스의 참뜻은 신학자들의 예수에 대한 교리학설을 잔뜩 늘어놓고 목사가 강단에서 설교를 요란하게 하는 그런 것으로 크리스마스로 우리에게 이해되는 것이 아니라 천지와 만물을 창조한 사랑의 에너지 바로 이 땅에 가장 버림받고 억압받고 눌림을 받고 천대를 받고 고통을 겪는 바로 그 사람들을 통해서 알게되고 만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것은 사랑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오늘의 이 크리스마스에 이러한 모든 구유에 누운 실업자들 노숙자들 병자들 옥에 갇힌 죄수들을 우리들이 보는 것으로만 크리스마스를 그치는 것이 아니라 예수를 바로 그 장소에서 보아야한다는 것입니다. 그 고통 당하는 그 장소에서 하나님이 와서 고통을 벗겨주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배고프다는 사람에게 하나님이 나타나서 밥을 주는 그것이 아닙니다. 바로 고통 당하는 그 고통을 하나님 자신이 그 고통을 함께 당하고 있다는 그것이 바로 크리스마스입니다. 우리가 그 사실을 깨닫고 이 크리스마스를 지키게 될 때 우리들의 이 크리스마스가 수많은 고통, 사람의 말로 표현 할 수 없는 그 고난을 당하는 사람들 가운데 와서 몸소 자기가 그 고난을 겪고 고난받는 사람들의 종의 모습으로 온 바로 그분을 오늘 여기에서 축하하는 것이 크리스마스라는 것을 잊어서는 안될 것입니다. 우리는 종의 모습으로 온 바로 그 그리스도의 종입니다. 우리가 종의 종, 참된 종의식 없이 새천년을 맞이한다는 것은 또다시 낡은 역사가 되풀이되는 것의 시작밖에 될 수 없는 것입니다. 종의 모습으로 온 하나님이 낡은 역사가 새하늘과 새땅으로 바뀔 때까지 모든 사람을 섬기는 분으로 하늘과 땅과 만물을 창조하고 지배하는 그분이라는 이것을 믿는 신앙이 우리들에게 있어야 이 크리스마스의 의미가 살 것입니다. 단지 낮은 자들을 동정심으로 돕는 자들은 예수 믿는 사람이 아닙니다. 크리스마스 지키는 사람이 아닙니다. 우리는 그분들에게 점심 대접하는 것이 예수님께 점심 대접하는 것이며 또한 예수님 자신이 그들과 함께 굶주리고 계셨다는 것. 그 사실을 우리가 진실로 깨달아야 할것입니다. 이 죽음보다 더한 깊은 고통의 속으로 고난의 가장 깊은 곳에 들어오신 하나님, 참으로 무어라고 말할 수 없는 인간으로서 감당할 수 없는 고통을 겪으신 그분이 바로 하나님이십니다. 함께 계시고 우리는 또 그 하나님을 모시고 그 하나님이 오늘도 나의 경배를 받는 그러한 날이 바로 오늘인 것입니다.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 죽으시기 위해 예수 말구유에 태어나신 그 아기 속에서 새역사 새하늘 새땅을 바라볼 수 있을 때 에 우리는 비로서 Sorry Christmas가 아닌 Merry Christmas, 기쁜성탄 영광 하나님께 돌리는 성탄이 된다고 생각합니다. 성탄 메시지 크리스마스가 예루살렘과 베들레헴에 김도석 목사 <남가주 기독교 교회 협의회 회장> 예루살렘은 "평화의 도시"라는 말입니다. 이 평화의 도시에 동방으로부터 온 박사들이 "왕으로 나신 이가 어디 계신가"하고 찾는 데서부터 문제가 일어났습니다. "헤롯왕 때에" 헤롯은 나 외에 누가 왕의 또 있느냐고 소동이 난 것입니다. 제사장들을 모아 자문을 듣고 각료회의를 소집하여 대책을 세우느라고 정신없이 서둘러야만 했습니다. 소동하는 성탄 그것이 마태복음의 성탄입니다. 상류사회의 성탄이요 왕들의 크리스마스입니다. 내가 왕이다, 내 주장대로 해야 하겠다고 가정에서도, 마을에서도, 업계마다 헤게모니를 내가 잡아야 한다고 소동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루살렘이 술렁거립니다. 힘의 확대와 자랑을 맘껏하는 세상에 예수께서 힘없는 아기로 가장 가난한 집에 그것도 말구유에 오신 것입니다. 힘을 힘으로 대결하거나 부를 부로 내려 누르거나 칼을 쓰는 자에게 칼을 가지고 맞서려고 오시지를 않았습니다. 서로 맞서 경쟁하며 싸우는 싸움터에서 우리를 건져내려고 오셨습니다. 예수께서 나신 곳이 베들레헴입니다. "떡집"이라는 뜻입니다. 떡집 마을, 경제 세계에 예수님이 구주로 오셨습니다. 사람들은 떡을 먹겠다고, 손해보지 않겠다고, 오시는 구주 예수를 모실 방이 없었습니다. 저마다 이 저녁에 기회가 있는 대로 좀 더 많은 돈을 벌어야 한다고 하면서 자기 이권에만 바삐 돌아갑니다. 좀 더 큰집, 좋은 마을, 더 큰방을 차지하겠다고 오시는 구주를 영접할 공간이 나질 않습니다. 호텔은 많아도 구주가 오실 방이 없습니다. 자기 향락과 즐거움을 위해서는 엄청나게 쓰면서도 다른 사람을 위해서는 지독하게 인색한 세상입니다. 베들레헴 마을에 오신 예수님은 떡만 먹겠다고 사는 사람들을 풀어 해방하시려고 오셨습니다. "크리스마스"라는 단어는 성경에 없지만 11세기경에 고대 영어 Cristes Maesse(Christ's Mass)라를 말에서 오게 된 것입니다. 동방에서 경배하러 온 박사들처럼 그리스도를 경배하는 날이라는 말입니다. 내가 왕이 되겠다고 소동을 피우는 것이 아니라 왕으로 오신 예수를 경배하는 일에 성탄의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동방의 박사들처럼 기뻐하며 경배하고 드리고 나누는 계절이 되기를 기원해 봅니다.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 구기조 목사 <남가주 한인 목사회회장> 1998년도 성탄절을 맞이하여 하나님의 은혜와 평강이 함께 하시기를 기원합니다.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라는 뜻이라고 일러 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천만 번 탄생해도 우리의 영혼 속에 예수가 없으면 예수님과 나와는 아무 상관이 없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탄생은 낮아지면 높아지는 진리 사랑은 사랑으로 일깨울 수 있다는 진리가 제시되며 주면 받게 되는 진리가 제시됩니다.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 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빌 2:6-7)라고 말씀하셨으며 십자가를 지심은 우리의 죄보다 사랑이 커서 행하신 일로 하나님은 그 이름을 높여 주셨다고 하셨습니다. 우리의 슬픔과 고통을 대신하시기 위하여 오셨으며 우리가 받아야 할 대우를 십자가로 대신 당하시고 영원한 행복을 믿는 자들에게 주시기 위하여 이 땅에 탄생하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가 여러분의 가정과 심령에 넘치시기를 다시 한번 기원하는 바입니다. 이 기쁜 소식을 김수신 목사 <헐리웃 교회> 기쁜 성탄을 맞이하여 하나님의 크신 사랑과 임마누엘이 되신 우리 주님의 평강이 사랑하는 여러분에게 함께 하시기를 기원합니다. 세상에 태어나는 자는 다 살려고 태어나는데 그러나 예수님은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 로 주려고 죽기 위하여 태어나셨으니 이는 하나님의 뜻대로 따르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그의 아들을 이 땅에 보내신 것은 인간이 할 수 없는 것과 천사도 할 수 없는 큰 목적을 이루시기 위하여 보내신 것입니다. 오직 그분만이 할 수 있는 일을 이루시기 위해서입니다. 그것은 인간을 죄악에서 구원하고 영생을 주시고 뿐만이 아니라 질병에서 고침 받고 영과 육신이 고난에서 참 자유와 기쁨과 소망과 평강을 주시기 위해서 오셨습니다. 인간 스스로는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없기 때문에 하나님이 예수를 보내신 것입니다. 이것이 복음입니다. 이 땅에 인류에게 가장 기쁜 좋은 소식입니다. 땅속에서 캐낼 수 없고 최고의 인간의 지식과 첨단 과학과 재주로는 할 수 없는 새로운 것이 위로부터 왔기에 이 땅에 복된 소식입니다. 즉, 말씀이 육신을 입고 오신 예수 그리스도가 바로 복음인 것입니다. 교회는 이것을 알려야 합니다. 우리는 이 말씀을 모르는 내 형제에게, 자식에게 전해 주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내가 사는 길이요, 내 가족, 내 이웃, 이 사회를, 이 지구를 오직 살리는 길이기 때문입니다. 다른 길이 없습니다. 성탄절에 형제들이시여! 지체하지 마시고 우리는 회개하고 이 예수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모시로 말씀을 배우며 하나님을 경외하며 삽시다 하고 전해주시기 바랍니다. 왜냐하면 이 예수 그리스도안에는 지혜와 지식의 모든 보화가 감추어져 있기 때문입니다. (골 2:3) 이 기쁨을 우리는 누리며 맛보아 아는 자들이 다 되시고 주님을 경배하며 내 마음에 내 가정에 모시고 부족함이 없이 사시기를 주 예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평화의 왕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 주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을 축하합니다. 이번 성탄절을 맞이하여 우리 모두에게 기쁨과 복된 씨즌이 되었으면 합니다. 우리 주님의 탄생하심은 온 인류가 하나님께 받은 것 중 가장 큰 선물입니다. 어두움과 혼돈의 속에서 새 시대를 여시고 온 세계 역사의 원년을 이룩하셨습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는 온 세상의 기원이 되십니다. 어제는 그 동안 평화로워 보이던 중동지역에서 미군이 이라크 바그다드시에 미사일을 발사하므로 전쟁이 발발하게 되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평화의 왕으로 오셨는데 전쟁터에서 주님을 영접하므로 다툼과 전쟁과 두려움을 종식시키고 평화와 안전을 가져왔으면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죄악과 범죄로 인하여 멸망당할 수밖에 없는 인류를 구원하시기 위하여 오신 분이라고 성경은 말씀하는데 이제 누구든지 저를 믿고 구원을 얻게 하였으면 좋겠습니다. 또한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의 소망이 되어 주십니다. 가난한 자나 부자, 병든 자나 건강한 자, 소외된 자나 믿는 자, 모든 이들에게 친구가 되어 주시고 위로와 기쁨이 되어 주심을 분명히 믿습니다. 이번 성탄절의 찬송소리가 길거리와 주택가에 울려 퍼지고 길을 걷는 이들에게 들려질 때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늘의 축복을 누리는 기회가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하늘에는 영광 땅에는 평화 누가복음 2장 8~14절 그 지역의 목자들이 들에서 밤을 새우면서, 자기들의 양 떼를 지키고 있었는데 주의 천사가 그들에게 나타나고, 주의 영광이 그들에게 두루 비치었다. 그들은 몹시 두려워하였다. 천사가 그들에게 말하였다. '두려워하지 말아라. 나는 온 백성에게 큰 기쁨이 될 소식을 너희에게 전해 준다. 오늘 다윗의 동네에서 너희에게 구주가 나셨으니, 그는 곧 그리스도 주님이시다. 너희는 갓난아기가 포대기에 싸여, 구유에 뉘어 있는 것을 볼 터인데, 이것이 너희에게 주는 표적이다. 갑자가 그 천사와 더불어 하늘 군대가 나타나서, 하나님을 찬양하여 말하였다. 가장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주께서 기뻐하시는 사람들에게 평화로다. 미리 성탄 축하 드립니다. 오늘 밤 내일 새벽 말구유간에서 어린아기 예수가 태어납니다. 오늘을 기념하여 내일을 맞이하기 위해서 저희들이 자정예배로 지금 드립니다. 아까 우리는 메시아 오라토이오를 감격 속에 드렸습니다. 마음으로 같이 불렀습니다. 모두가 기쁜 맘으로 부르고 듣고 함께 불렀습니다. 오늘은 하늘에 있는 천사들이 땅에 내려와서 아기로 태어난 구세주를 찬양하는 음성을 듣겠습니다. 여러분께서 아까 함께 읽으셨습니다. 가장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주께서 기뻐하시는 사람들에게 평화입니다. 이것이 하늘 성가대가 부른 크리스마스 캐롤입니다. 첫 번째를 천사들이 이렇게 불렀습니다.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입니다. 땅에서는 주께서 기뻐하시는 사람들에게 평화입니다. 하늘 천사들이 아멘 했고 그것을 받는 땅에 있는 사람들이 아멘 했습니다. 하늘의 아멘과 땅의 아멘이 합치면 구세주가 태어나는 크리스마스 캐롤이 울립니다. 혹시 여러분 왕중 왕이라는 영화를 보셨습니까? 저도 봤습니다. '왕중왕'이라는 영화가 상당히 많은 사람들에게 심금을 울려주었습니다. 그 영화의 감독이 시콜데밀입니다. 이 사람이 왕중왕 영화를 촬영하면서 남겨주었던 이야기가 있습니다. 주께서 골고다 언덕에서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실 때 양편에 강도 두사람이 함께 십자가에 못박혀죽었습니다. 로스앤젤레스 근교에서 이 영화를 촬영하는데 십자가 3개를 세워두었습니다. 세워두고나서 예수를 죽이라고 함성을 지르던 민중들을 동원해야겠는데, 이 감독생각에는 예수를 죽여라 하고 신나게 소리치려면 그 얼굴에 분노와 좌절이 있는 사람이어야 겠다고 싶어서 이런 사람을 고르려고 LA의 뒷골목에 가서 분노에 찬 사람만 수백명을 모았습니다. 소위 엑스트라입니다. 이 사람들을 십자가 뒤에와 앞에다가 계속 세워놨는데 촬영시간이 너무 급박하여 차일피일 미루다가 오늘과 똑같은 12월 24일 그날 촬영을 하게 되었습니다. 사람들을 다 십자가에 모아놓고 촬영하면서 감독이 그래도 홀리나이트 성탄전야인데 기도라도 하면 좋겠다 싶어서 감독이 실제로 수백명 사람들을 보고 이제는 예수를 십자가에 못박으시오라고 소리지르기 전에 성탄을 맞았으니 2분만 묵상 기도하십시다 하고서 모든 사람들이 2분 동안 기도를 했습니다. 기도를 하고 나서 2분이 되자 옆에 있는 십자가에 있는 한 그룹에서 무슨 노래가 흘러나왔느냐 하면 '기쁘다 구주 오셨네'라는 캐럴이 울려 퍼지는 겁니다. 그 캐럴이 울려 퍼지자 그 옆에서 고요한밤 거룩한밤 캐럴이 울려 퍼졌습니다. 마지막 예수를 십자가에 못박아야할 가운데에서 '참 반가운 신도여' 하는 캐럴이 울려 퍼졌습니다. 2분 기도를 하고 촬영을 하려하는데 3곳에서 연속해서 캐럴이 울립니다. 촬영장소가 온통 흥분에 도가니로 바꼈습니다. 이 데밀이라는 감독이 찌그린 얼굴을 좀 촬영을 해야할텐데 캐럴 부르는 모든 동원된 사람들의 얼굴이 기쁨에 충만해서 좋아서 춤추며 캐럴을 불렀습니다. 이 감독이 각본에 없는 촬영을 다시 합니다. 찌그린 얼굴대신 골고다언덕을 크리스마스 캐롤로 채우자 그렇게 해서 촬영이 끝났습니다. 이 감독 말이 내 생애 최고의 영화를 찍었다 그 장면만은 최고의 영화를 찍었노라고 고백하는 내용을 책에서 읽어보았습니다. 2분을 묵상하고 기도했더니 사람들이 평화의 얼굴로 변했습니다. 우리는 2분이 아니고 2000년동안 기대하며 메시아를 기다렸습니다. 오늘 여러분의 얼굴에는 저의 얼굴에는 하늘의 평화의 미소가 가득합니다. 구주가 나시면 아기예수가 태어나면 우리는 기뻐서 찬양할 수밖에 없습니다. 아기예수가 나시면 우리는 웃을 수밖에 없습니다. 아기예수가 나시면 우리는 기도할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의 얼굴은 하늘로 향하여 있어야 합니다. 하늘이 와서 땅에 소리쳤습니다. 지금 아기예수가 태어나니 이 모든 땅에는 평화가 있으라하고 같이 기도하겠습니다만은 아기예수가 태어나면 미움 속으로 아기예수가 태어납니다. 미움이 충만한 곳에 태어나면 그때 미움이 있던 세상은 돌변하여 사랑으로 바뀝니다. 아픈 상처투성이의 세상에 아기예수가 태어나면 그곳에는 하나님의 용서가 있습니다. 갈기갈기 찢기고 갈라진 곳에 태어나면 아기예수는 하나로 일치시킵니다. 잘못이 있는 곳에 태어나면 아기예수는 진실로 바꿔놓습니다. 절망에 우는 사람들이 있는 곳에는 희망이 용솟아오릅니다. 깜깜한 밤에는 캄캄한 어둠을 밝은 빛으로 바꿔줍니다. 슬픔이 있는 곳에는 기쁨을 주십니다. 성프란시스의 기도입니다. 하늘에서 천사들이 내려와서 땅에는 평화입니다. 아기 예수를 만난 모든 사람들이 평화를 즐기고 있을 때 하늘은 계속 찬송을 했습니다. 사실 하늘 찬송은 다른게 아니었습니다. 미가서를 통해서 이미 예언한적이있습니다. "아기예수가 태어나면 여러분은 칼을 대장간에 다시 넣어서 칼을 쳐서 밭을 가는 보습을 만드십시오 창을 쳐서 낫을 만들어 추수하십시오 그런 세상이 올 겁니다." 또한 "야수와 어린양이 함께 풀을 뜯어먹을 겁니다." 이사야를 통한 말씀입니다. 사자가 사람을 잡아먹는게 아니라 소처럼 여물을 먹는 세상이 올 겁니다. 그런 미래의 꿈 꿔본일이 있습니까? 아기예수가 태어나면 그런세상됩니다. 사랑과 진실이 만납니다. 평화가 정의와 입맞춤니다. 이런 아름답고 좋은 일들이 평화라는 이름으로 오늘 밤 우리에게 임하십니다. 여러분은 찬양을 하십시오. 그리고 기도를 하십시오 예수께서 태어나신 팔페스틴 땅 가짜 평화가 지배하고 있었습니다. 로마의 총독이 지배하고 로마의 황제 아우구수도가 지배하는 가짜 평화가 편만했습니다. 이스라엘민족에게는 좌절이었지만 로마에게는 기쁨이었습니다. 좌절당한 민족에게 슬픔을 당한 민족에게 아기예수가 태어나서 이 슬픔을 기쁨으로 바꿔드립니다. 이 좌절을 희망으로 바꿔드립니다. 여러분 그 아기예수를 만나십시오. 그를 제일 먼저 만난 사람들이 목자들이었습니다. 가장 많이 슬픔을 당했기 때문입니다. 가장 소외를 당했기 때문에 먼저 알았습니다. 그 다음에 멀리 있던 동박박사들이 와서 아기 예수를 경배했습니다. 거짓 평화에 물들고 거기에 안주하던 사람들은 한참 후에야 참평화가 온 것을 알았습니다. 우리는 목자처럼 동방박사처럼 만나서 함께 경배하십시다. 인도에서 수많은 사람들을 도와주고 함께 고통 당하고 함께 위로했던 마더 테레사 그 여성이 이런 말을 썼습니다. 세계를 정복하고 싶으십니까? 그러면 폭탄으로 하지 마십시오, 총기를 사용해서 세계정복을 꿈꾸지 마십시오 세계정복은 단 한가지 사랑과 동정으로 만 가능합니다. 사람의 마음을 정복할 수 있습니다. 평화는 미소에서 출발합니다. 얼굴을 펴십시오 전혀 미소짓고 싶지 않은 사람 있습니까? 찡그리고 싶은 사람이 앞에 있습니까? 하루에 최소한 다섯 번만 웃어주십시오. 평화가 옵니다. 예수께서는 하루에 다섯 번이 아니라 일곱 번하되 일곱 번씩 일흔 번씩이라도 하십시오. 오늘 예수가 태어난 날, 웃으십시다. 아기예수가 태어난 날 평화가 온다는데 함께 웃으십시다. 함께 즐거워하십시다. 함께 춤추십시다. 그러고 나서 하늘을 쳐다보았더니 뭐라고 하시겠습니까? 하늘에는 영광입니다. 영광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닙니다. 세상에 평화를 기쁨을 이 세계정의를 한참 즐기고 있어서 하늘을 쳐다보았더니 하늘 이름이 영광으로 덮혔습니다. 영광이 딴데 있는 것이 아닙니다. 영광이 땅에 임하면 평화로 바뀝니다. 평화가 하늘로 상달되면 영광이라고 합니다. 예수 믿는 목적은 기독교인 된 목적은 하나님께 영광을 그러면 땅에 있는 동안 평화를 위해 일하고 평화를 즐기면 하나님이 영광을 받습니다. 하늘있을때의 영광이 땅에 임하면 평화가 되듯이 땅에 있는 평화가 하늘로 올라가면 영광이 됩니다. 오늘은 영광스러운 날 평화가 넘치는 날 이날이 오늘의 성탄절입니다. 오늘 여러분들의 가슴속에 하늘 영광이 기뻐하시는 하나의 가슴이 하나님이 여러분에게 태어나시기 바랍니다. 아기예수로 태어나시기를 바랍니다. 여러분은 평화를 즐기시기 바랍니다. 모든 분이 평화롭게 되기시를 바랍니다. 여러분의 가정이 평화의 가정되시기 바랍니다. 우리사회가 평화의 사회가 되기를 기원합니다. 우리 나라가 이 세계가 평화의 세계가 되기를 진심으로 축원합니다. 함께 하는 예수그리스도가 오늘우리를 향해서 오고있습니다. 천사장이 지휘하는 성가대가 다시 노래합니다.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입니다. 땅에서는 주께서 기뻐하시는 여러분에게 평화입니다. 아멘. 예수님 탄생과 마리아 누가복음 1:26-38 오늘 이 시간에는 {예수님 탄생과 마리아}, 이런 제목으로 같이 은혜를 나누겠습니다. 한번 따라하시겠습니다. "예수님 탄생과 마리아". 예수님의 탄생하신 것만큼 우리 인류에게 기쁜 소식은 없어요. 천사가 말합니다. "예수님의 나심은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께는 영광이요 땅에서 기뻐하심을 입은 사람들 중에 평화로다." 그랬어요. 예수님이 탄생하지 아니하셨다면 우리의 죄가 용서받을 수 없어요. 우리가 마귀의 종에서 하나님의 아들 될 수 없어요. 우리가 영원한 천국에 갈 수가 없어요. 그러나 예수님께서 탄생하셨기 때문에 우리는 이제 하나님의 아들이 되었고, 또 천국 갈 수 있고, 우리가 마귀의 종이 아니고, 우리가 복되게 살아갈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탄생만큼 인류에게 큰 기쁜 소식이 없어요. 그런데 예수님의 탄생이 있기까지는 많은 사람들의 믿음과 헌신이 있었어요. 그 가운데서 꼭 우리가 기억해야 할 사람은 누굽니까? 마리아. 마리아의 훌륭한 신앙이 없었다면 성령으로 예수님이 잉태되는 기적이 이루어질 수가 없었을 것입니다. 지금 우리 사회 속에는 참으로 순수한 믿음과 희생적인 헌신의 모습을 찾아보기가 참 힘들어요. '주여, 주여' 하는 사람은 많아요. 교회에 와서 복 받겠다는 사람은 많아요. 병 고침 받겠다는 사람은 많아요. 기적을 체험하겠다는 사람은 많아요. 그러나 정작 믿음을 가진 사람은 너무 작아요. 또 믿음을 갖겠다고 몸부림치는 사람이 너무나 작아요. 중요한 것은 뭡니까? 믿음이에요. 세상 것 다 잃어버려도 믿음만 있으면 되는데, 근본이 믿음이거든요. 믿음으로 구원받고, 믿음으로 치료받고, 믿음으로 사랑 받고, 믿음으로 축복 받는데, 정작 믿음이 있어야 되는데, 그 믿음을 가진 사람이 너무나 작고, 그 믿음으로 헌신하는 사람이 너무나 적다 그것입니다. 누가복음 18장 8절에 보니까 예수님도 그런 말씀을 했습니다. "인자가 올 때에 세상에서 믿음을 보겠느냐?" 오늘 우리는 마리아의 신앙을 살펴봄으로 과연 나는 믿음이 있는가, 나는 과연 마리아와 같은 신앙을 가지고 있는가 한번 살펴봐야 돼요. 왜 성탄절이 옵니까? 예수님의 탄생을 기억하라고. 예수님의 탄생을 맞이하면서 과연 그 때 주변 사람들의 신앙을 다시 자기들도 갖고 회복하라고 우리에게 깨닫게 하시는 것입니다. 자, 그러면 마리아의 신앙은 어떤 신앙인가? 첫째, 마리아는 성결한 사람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어떤 사람을 쓰신다구요? 하나님은 깨끗한 사람을 쓰세요. 성결한 사람을 쓰세요. 마리아는 성결한 생활을 했기 때문에 아기 예수를 잉태하는 축복을 받을 수 있었어요. 마리아는 요셉과 정혼한 자입니다. 끝까지 순결을 지켰어요. 만약에 마리아가 요셉과 정혼하고 순결을 지키지 않았다면 마리아의 몸에 예수님이 절대로 잉태될 수가 없다구요. 당시의 결혼 법에 의하면 약혼한 여인은 이미 남자에게 속한 자로 되어 있어요. 그래서 다른 사람과 교제할 수 없어요. 뿐만 아니라 남편이 죽더라도 쉽게 다른 남자와 결혼할 수 없어요. 약혼자가 죽어도 다른 남자와 쉽게 결혼할 수가 없어요. 그래서 누가복음 1장 34절에 이렇게 말합니다. “마리아가 천사에게 말하되 나는 사내를 알지 못하니 어찌 이 일이 있으리이까” 사내를 알지 못했다고 그랬습니다. 아주 순결을 지켰어요. 성결하게 살았어요. 그래서 하나님은 마리아처럼 깨끗하고 성결한 사람을 통해서 일하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삶 속에서 모든 더러운 것들을 다 멀리해야 돼요. 내 입에서도, 내 눈에서도, 내 생각에서도, 내 생활에서도. 거룩한 성령의 능력으로 아기 예수가 잉태되었습니다. 마리아가 성결하게 자기 자신의 몸을 잘 지켰기 때문에 임마누엘 되신 "거룩한 구세주"가 나셨어요.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아들"이 탄생하게 된 것입니다. 성경이 말합니다. 누가복음 1장 35절입니다. “천사가 대답하여 가로되 성령이 네게 임하시고 지극히 높으신 이의 능력이 너를 덮으시리니 이러므로 나실바 거룩한 자는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으리라” 이렇게 말씀했습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우리 예수님이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시다구요. 마리아를 쓰실 때 마리아가 성결했던 것처럼 우리가 지금 예수님의 쓰임받는 도구가 되어지기 위해서, 재림의 주님을 기다리는 성도가 되어지기 위해서, 우리는 어떻게 살아가야 됩니까? 우리들도 예수님의 영적인 신부감이 되기 위해서는 성결해야 돼요. 영적으로 볼 때 우리는 모두가 다 예수님의 신부가 될 사람들입니다. 세상 신부들이 남편을 위해서 정숙하고 순결해야 되는 것처럼, 약혼한 약혼녀가 결혼할 때까지 약혼자를 기다리기 위해서 순결하고 깨끗하게 살아야 되는 것처럼, 예수님의 신부가 될 우리 성도들은 더더욱 거룩하고 더더욱 성결한 삶을 살아야 될 줄 믿습니다. 데살로니가전서 5장 23절입니다. “평강의 하나님이 친히 너희로 온전히 거룩하게 하시고 또 너희 온 영과 혼과 몸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강림하실 때에 흠 없게 보전되기를 원하노라“. 우리 주님께서 사도 바울을 통해서 말씀하십니다. 주님의 재림하실 때까지 예수 믿고 구원받은 성도들은 영과 혼과 몸이 흠 없이 보존되었다가 신랑 예수를 만나야 된다 그랬습니다. 우리 모두 마찬가지입니다. 마리아가 성결했기 때문에 아기 예수가 잉태된 것처럼, 예수 믿고 구원받은 우리들은 모두가 성령 충만해서 성령의 능력 안에서 성결해야 돼요. 깨끗해야 돼요. 주님을 맞이하고, 주님의 사랑 받는, 신부감이 아니라 신부가 되는 우리 모두가 됩시다. 따라하세요. "우리 모두 예수 신부가 되자. 신부가 되자." 신부감만 되지 마시고 신부가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둘째, 마리아는 주님을 위해 헌신했습니다. 마리아가 성결한 것과 마찬가지로 또 마리아는 주님을 위해서 헌신했어요. 목숨을 각오한 마리아의 헌신이 예수님의 탄생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 것입니다. 마리아는 희생을 각오했어요. 마리아는 죽기를 각오했어요. 마리아는 하나님의 일을 이루어 드리기 위하여 죽기를 각오했어요. 그렇습니다. 마리아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기 위해서는 죽음을 각오해야 하는 희생이 있어야 했던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 당시 법은 처녀가 정혼한 상태에서 부정해서 아이를 잉태하면 파혼을 당합니다. 결혼을 못해요. 결혼을 못하는 것뿐만 아닙니다. 이제 자기 아버지 족보에서도 빠져나가야 돼요. 그뿐이 아닙니다. 돌로 맞아 죽어야 돼요. 약혼한 여자가 다른 남자와 잠을 자서 임신했으면 돌로 맞아 죽어야 해요. 돌로 맞아 죽어야 돼요. 그런데 자기는 얼마나 억울해요. 자기는 남자와 자본 적도 없는데 자기가 잉태된다면 파혼 당하지요. 결혼 못하지요. 자기 아버지의 족보에서 빠져나가야 되지요. 돌로 맞아 죽어야 되지요. 이건 보통 희생이 아니에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리아는 "그것이 주님의 일이시면, 그것이 주님이 하시는 일이시라면 나는 거기에 쓰여지겠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말합니다. 누가복음 1장 38절입니다. “마리아가 가로되 주의 계집종이오니 말씀대로 내게 이루어지이다“. 너무 멋있는 말이에요. 한번 여성이 할 수 있는 말, 신자가 할 수 있는 말 중에 이것보다 더 위대한 말은 없을 거예요. "주의 계집종이오니 말씀대로 이루어지이다."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한 마리아는 예수님을 잉태함으로 성자의 어머니가 될 수 있는 영광과 큰 축복을 받았습니다. 또 그 뿐이 아닙니다. 인류에게 구원의 기회를 제공하는 데 일익을 감당하는 복을 받았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을 잉태하는 복을 받았을 뿐만 아니라 인류에게 구원의 길을 열어주는, 또 그 일을 감당하는 놀라운 축복을 마리아가 받았습니다. 또 마리아는 어려운 환경 가운데서 예수를 낳았어요. 또 잘 길렀어요. 자, 산모가 애기를 낳는다는 것은, 이건 힘든 것이 아닙니까? 그렇지요. 힘들잖아요. 그래서 옛날에 어머니들은 애기 낳으러 갈 때는 신발을 거꾸로 놓았다고 그러잖아요. 왜? 죽을 수 있으니까? 그렇지요. 애기를 낳는다는 것만 해도 엄청 힘드는데 마리아는 그 애기를 낳을 자리가 없었어요. 그렇지요. 요셉과 함께 유대 지방으로 호적 하러 갔어요. 그런데 가난한 신랑 요셉은 돈이 없어요. 고급 호텔을 얻을 수가 없어요. 미리 예약도 못했어요. 여관도 없어요. 그런데 마리아는 배가 불렀어요. 아주 시간을 다퉈요. 그런데 이 집 가도 방이 없대. 저 집 가도 방이 없대. 사실 방이 없었겠어요? 돈이 없지. 돈만 많이 줘봐 왜 없어요? 가난한 목수, 가난한 신랑 요셉을 만나서 돈이 없어. 그러니까 어디 가서 낳았어요? 마구간에 가서. 아들 낳기를 마구간에서 낳았어요. 그러니 얼마나 힘들었어요? 애기 낳는 것도 힘드는데 마구간에서 누가 애기 받아주는 사람도 없이 얼마나 고생했어요. 그것뿐이 아닙니다. 마리아는 또한 그 어려운 중에도 예수님을 훌륭하게 길렀어요. 잘 키웠습니다.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그래서 태어나자마자 그냥 내버려둬도 그냥 컸을까요? 천만의 말씀이에요. 어머니의 희생과 어머니의 사랑이 없다면 안 되는 거예요. 그런데 그것만이 아닙니다. 이제 마리아의 남편 요셉이 목수예요. 가난한 목수가 일찍 죽었어요. 그러니까 마리아는 청상과부예요. 청상과부. 과부가 되었어요. 과부가 되었어요. 몇 살에 과부 되었다고는 성경에 없으니까 모르겠습니다만은 일찍 과부가 됐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과 다른 형제들을 두고 잘 키웠어요. 잘 교육을 시켰어요. 예수님만이 훌륭하게 아닙니다. 그 형제 누가 있었어요? 야고보. 야고보. 예수님의 아우입니다. 예수님의 아우 야고보. 야고보는 "야고보서"를 기록했고 초대 교회의 훌륭한 교회 지도자가 되었습니다. 남편 없는 마리아 과부가 예수님만 잘 기른 것이 아니라구요. 실제로 육신적인 아들들도 잘 길렀어요. 과부가. 얼마나 고생했어요. 그뿐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구약의 말씀을 얼마나 잘 알고 계세요. 그 아들들이 성경말씀을 얼마나 많이 알고 있어요. 그러니까 마리아는 낳아놓기만 한 것이 아니에요. 잘 키웠어요. 잘 교육을 시켰어요. 신앙교육을 잘 시켰어요. 또 마리아는 깊은 모성애를 가지고 있었어요. 아들 예수가 로마 국가에 대한 정치범으로, 또 유대 종교에 대한 신성 모독 죄로 십자가에 못박혀 죽임을 당하게 되었을 때에도 그 마리아는 끝까지 용기를 가지고 아들 곁에 있었어요. 베드로는 도망갔지만 마리아는 안 도망갔잖아요. 십자가를 지고 가는 그 모습을 마리아는 따라가면서 보는 거예요. 마지막 골고다 산 위에서 머리에 가시관을 쓰시고 양손과 양발에 못박히시고 옆구리에 창이 찔리는 그 모습까지, 마지막까지 마리아는 보는 거예요. 대단하잖아요. 보통 여인 같으면 기절했을 거예요. 좇아가지 못하고 포기했을 거예요. 우리도 마리아처럼 주님의 뜻을 위해서는 헌신, 헌신하는 사람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특별히 어머니들, 어머니들 항상 자녀 곁에 있으시기를 바랍니다. 자녀 곁에 있어야 돼요. 예수님 곁에 항상 마리아가 있었어요. 그렇지요? 여러분의 자녀 곁에 항상 여러분이 있어야 한다구요. 그래야 여러분의 자녀가 잘 되는 거예요. 잘 되는 거예요. 하나님은 순종하는 자들에게 더 좋은 것으로 채워주십니다. 땅의 것을 포기하면 하늘의 것으로 갚아주시고, 썩을 것을 포기하면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 갚아주십니다. 사사기 5장 9절입니다. “내 마음이 이스라엘의 방백을 사모함은 그들이 백성 중에서 즐거이 헌신하였음이라 여호와를 찬송하라“. 그렇지요. 하나님이 누구 곁에 있냐구요? 누구를 즐거워하고 계시냐구요? 당신을 위해서 헌신하는 사람 곁에 있고, 당신을 위해서 헌신하는 사람의 삶 속에 하나님이 같이 동행하시는 것입니다. 마리아가 자기 개인의 생명을 아끼지 아니하고 주님을 위해 내놓은 것처럼 우리도 마찬가지인 것입니다. 마리아가 있었기 때문에 예수님이 탄생하신 것처럼 우리가 정말로 다시 오실 예수님을 맞이하기 위해서 우리들도 마리아와 같은 삶을 살아야 한다구요. 우리의 몸과 마음을, 또 내가 가진 물질과 재능을 주님을 위해서 헌신할 때, 마리아와 같은 놀라운 복을 우리도 받고 누리며 살아갈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여러분에게 있기를 바라고, 여러분 모두가 다 마리아처럼 성령과 말씀이 충만해서 헌신할 수 있는 여러분이 다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셋째, 마리아는 순종함으로 큰복을 받았습니다. 따라합시다. "마리아는 큰 복 받았다." 여러분, 정말로 마리아와 같은 복 받기를 원하세요? 그러면 어떻게 해야 되지죠? 크게 두 가지. 어떻게 해야 되지요? 성결해야지. 성결, 성결. 성결하지 아니한 사람은 아무리 헌신해도 하나님은 필요 없다고 그러세요. 성결하지 않은 사람은 하나님이 안받아주신다구요. 첫째 어떻게 해야 돼요? 성결해야지요. 회개함으로 깨끗해야 되지요. 그렇지요. 그 다음에 어떻게 해야 돼요? 우리는 헌신해야 되지요. 성결과 헌신이 없이는 마리아가 받은 복을 못 받는 거예요. 우리 모두가 다 과거에 어떻게 살았다고 하더라도 예수의 보혈에 씻음을 받았기 때문에 우리는 다 깨끗하게 된 줄 믿습니다. 이제 다시 성령 충만함 받아서 성결하게 살고, 많은 은사를 받아서 은사로 열심히 헌신하고 봉사함으로 말미암아 마리아가 받은 복을 다 받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마리아는 아낌없이 헌신하고 절대적으로 순종한 결과로 큰 은혜와 복을 받을 수 있었습니다. 가브리엘 천사는 마리아에게 아기 예수에 대한 첫 소식을 전달했을 때부터 이것을 미리 알려 주었습니다. 누가복음 1장 30절입니다. “천사가 일러 가로되 마리아여 무서워 말라 네가 하나님께 은혜를 얻었느니라“.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들이여! IMF 경제 체제에서 아무리 어려워도 걱정하지 마세요. 하나님의 은혜 받은 자여! 걱정하지 마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자, 그럼 마리아는 어떤 은혜를 받았을까요? 마리아는 구세주 예수님을 수태하는 은혜를 입었어요. 마리아는 최고의 복을 받았습니다. 마리아는 예수님의 모친이 되어서 예수를 잉태하는 복을 받았어요. 그래서 누가복음 1장 42절에 이렇게 말합니다. “여자 중에 네가 복이 있으며 네 태중의 아이도 복이 있도다“. 여자 중에 제일 복 있는 사람이 누구래요? 마리아라는 거예요. 여자 중에 제일 복 있는 사람은 마리아.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들이여, 성도 중에 제일 복 있는 여러분 다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가브리엘 천사가 일러준 말 중에 "주께서 너와 함께 하시도다"하는 말씀이 있었습니다(눅 1:28). 마리아는 하나님께서 돌보시고 함께 하시는 복을 받은 사람입니다. 주님이 함께 하시면 두려움이 사라지는 거예요. 염려 근심이 사라지는 거예요. 또 마리아는 하나님을 믿음으로 복을 받았어요. 하나님의 말씀을 믿었어요. 환경이 어떠할지라도, 자기가 손해보고 어려움을 당할지라도, 하나님의 말씀을 그대로 받아들이고 그대로 하나님의 말씀을 믿었어요. 마리아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성령께서 친히 아기를 잉태하게 하신다 하는 가브리엘 천사의 말을 듣고 이를 믿음으로 받아들였어요. 여러분, 믿음이 뭡니까? 보고 아는 것, 믿음이 아니에요. 만져서 아는 것, 믿음이 아니에요. 맛보고 아는 것, 믿음이 아니에요. 믿음이 뭡니까? 안 봤는데도, 모르는데도 하나님이 말씀하셔. 그걸 믿는 거예요. 여러분, 예수님 봤어요? 예수님 봤어요? 하나님 봤어요? 하나님 봤어요? 못 봤어요. 그런데 예수님 계세요, 안계세요? 어디 계세요? 어떻게 알았어요? 성경에 말씀하신 것을 믿기 때문에 예수님이 우리의 구세주인 것을 알고, 하나님의 아들이신 것을 알고, 하나님이 계신 것을 알고, 천국을 알고. 할렐루야!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 믿고 성령 충만함 받으면 예수님의 제자들보다도 우리가 더 복 있는 사람인 것을 아시길 바랍니다. 주님이 말씀하시잖아요. "보고 믿는 자보다 보지 않고 믿는 자들이 더 복 있다고 그랬잖아요." 예수님의 제자들은 보고 믿었어요. 우리는 안보고도 믿어요. 안보고도 믿어요. 확실하게 믿어요. 그러므로 우리는 더 하나님의 사랑 가운데서 축복 받을 수 있어요. 베드로는 예수님을 보고도, 많은 기적을 체험하고도, 예수님이 잡히시니까 어떻게 했어요? 도망갔어요. 예수님을 모른다고 저주하면서 모른다고 그랬어요. 그러나 다행하게도 마가 다락방에서 성령 충만받고 나니까 그때 철이 들었어요. 베드로는 늦게 철들은 사람이에요. 그렇지요. 늦게 철들었어요. 여러분들은 예수님을 믿자마자 성령 충만해서 끝까지 믿음으로 사시기를, 하나님의 말씀을 의심하지 말고 믿게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누가복음 1장 45절입니다. “믿은 여자에게 복이 있도다 주께서 그에게 하신 말씀이 반드시 이루리라“ 이렇게 말씀했습니다. 그렇습니다. 100살이 된 아브라함이 이삭을 낳은 것도 믿음에 의해 되어졌습니다. 또 젊었을 때부터 아이 한번 낳아 본 적이 없는 제사장 사가랴가 세례 요한을 낳은 것도 믿음에 의한 것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처럼 사람으로서는 도저히 불가능한 일들을 믿는 자에게 행하시는 거예요.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들이 믿는 자에게 그대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기적은 누구에게 일어납니까? 기적을 믿는 사람에게 기적이 일어납니다. 또 하나님의 은혜를 받으면 마리아와 같이 복이 있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누가복음 1장 47절로 48절입니다. “내 마음이 하나님 내 구주를 기뻐하였음은 그 계집종의 비천함을 돌아 보셨음이라 보라 이제 후로는 만세에 나를 복이 있다 일컬으리로다“ 이렇게 말씀했습니다. 마리아는 분명 하나님의 아들의 모친이라고 하는 놀라운 축복과 영광을 누리게 되었어요. 그런데 그 기쁨도 잠깐, 그 아들이 십자가 형틀에 죽게 되었어요. 뼈아픈 슬픔도 겪게 되었어요. 마리아에게도 역시 그 아픔, 얼마나 고통스러웠겠어요? 어쩌면 주의 모친으로 축복된 그 신분 때문에 십자가의 무게가 더 무거웠을 것입니다. 그러나 염려할 것이 없었어요. 죽으신 예수는 실패하게 아니에요. 죽으신 예수는 인류를 구원하여 하나님의 아들 되게 하시기 위하여 대신 죽으시고, 그 직분의 임무가 그치자마자 예수님은 3일에 부활하셨어요. 이제 그 마리아가 십자가에 죽는 예수님을 바라본 것이 아니라, 그 죽는 예수님을 바라볼 때도 마리아는 분명히 인류가 구원받기 위해서, 내 아들이 십자가에 못박힌다 분명히 말하는 것을 믿었다구요. 그렇기 때문에 기절하지 않았어요. 절망하지 않았어요. 낙심하지 않았어요. 끝까지 똑바로 보고 있었어요. 아니라 다를까 그 마리아가 믿은 대로 아들 예수는 3일만에 부활하셨습니다. 그 다음 사건 또 중요합니다. 그 정도 되면 흥분할 것 같지요. 그 정도 되면 한번 뽐내는 거지. '야, 저 예수가 나의 아들이야. 내가 낳았다고. 나를 좀봐.' 그랬을 거예요. 그러나 그 때도 마리아는 겸손했어요. 많은 무리 속에 함께 있으면서 예수님의 말씀을 듣습니다.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아라. 몇 날이 못되어 성령이 임할 것이다. 성령이 임하면 권능을 받는다. 권능을 받으면 예루살렘과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된다." 아들이지만 이제 마리아도 그 예수를 믿어야 구원을 받습니다. 믿었어요. 이제 순종합니다. 그래서 마가 다락방에 갔을 때 거기 마리아 없었나요? 있었지요. 거기에는 사도행전 1장 13절 이하에 보니까 예수의 제자들, 예수를 따르던 여인들, 예수님 어머니 마리아, 예수의 형제들, 모두가 다 120명 속에 있었어요. 120명 속에 있었다구요. 모두가 다 마음을 같이 했어요. 마리아가 교만하지 않았어요. 척하지 않았어요. 뽐내지 않았어요. 겸손하게 자기도 그 예수를 믿어서 구원받기 때문에, 그 예수님 구세주의 말씀에 순종해서, 이제 아들이 아닙니다. 구세주의 말씀에 순종해서 마음을 같이 했어요. 전혀 기도에 힘썼어요. 그 예수님의 말씀을 기다렸어요. 오순절 날, 예수님이 약속하신 그 날 성령이 임한 거예요. 그 때 예수님의 제자들만 성령세례 받았어요? 아니에요. 예수를 따르던 여인들만 성령세례 받았어요? 아니에요. 예수의 아우들도 성령세례 받고, 예수의 어머니 마리아도 성령세례 받았습니다. 얼마나 멋진 여인입니까? 앞의 것만 보지 말아요. 뒤의 것을 봐요. 얼마나 마지막 장식을 잘 했냐구요. 이 마리아가 너무 너무 멋있는 사람이에요. 그러므로 하나님의 놀라운 축복에 참여했어요. 우리도 마리아처럼 주님을 믿음으로 바라보는 사람이 되어야 해요. 믿음으로 바라보는 사람. 마가복음 9장에 보면 한 귀신들린 아들을 둔 아버지가 예수님을 찾아왔어요. "하실 수 있으시면 내 아들을 불쌍히 보고 치료해 주세요. 내 아들은 불에도 들어가고 물에도 들어갑니다."하면서. 그 때 예수님이 뭐라고 말씀했어요. "할 수 있거든이 무슨 말이냐 믿는 자에게는 능치 못함이 없느니라" 그랬어요. 그때 아버지가 뭐라고 그랬어요? 아들 귀신 쫓아달라고 왔다고 그 말을 듣고 나서 아들 병 치료해 달라고 그랬어요? 아들 귀신 쫓아달라고 그랬어요? 그것보다 더 중요한 게 있어요. 자기는 믿음이 없거든요. "나의 믿음 없는 걸 도와주소서. 나에게 믿음을 주소서. 나에게 믿음을 주소서. 나에게 믿음을 주소서." 흉악한 귀신을 쫓으려 왔던 아버지가, 아들에게 붙은 귀신을 쫓으러 왔던 아버지가 벌써 뭐가 먼저고 뭔가 후인지 알았어요. 믿음 없이 고쳐달라고 그래야 고쳐질 수 없으니까 고치는 건 뒤의 일이에요. 먼저가 뭡니까? 믿음 없는 게 문제예요. "믿음 없는 나를 도와주소서. 믿음을 주소서. 믿음을 주소서. 믿음을 주소서." 그러니까 예수님이 말씀하세요. 이제는 믿음 없던 아버지에게 믿음이 있는 것을 보시고 흉악한 귀신을 쫓아준 줄 믿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 주님은 어제나 오늘이나 똑같아요. 교회 와서, 교회에 왜 와요?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러 와요. 또 왜 와요? 병 고치러 와요. 네, 필요해요. 문제해결 받으러 와요. 필요해요. 기적을 체험하러. 필요해요. 그러나 그것보다 먼저 필요해요. 뭐가 있어야 돼요? 믿음. 믿음이 있어야 돼요. 믿음 없이는, 자기의 믿음 없이는 기적이 안 일어나는 거예요. 그러므로 교회에 올 때 뭐 받으러 와야 돼요? 우리가 하나님 앞에 드리러 왔다가 주님께 뭘 받아야 돼요? 믿음 받아야 돼요. 믿음. 믿음. "믿음은 들음에서 나고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느니라." 우리가 믿음으로 구원받고 믿음으로 치료함 받고 믿음으로 변화 받고 믿음으로 축복을 받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IMF때 부도난 것 그까짓 거예요. 실직 당한 것 그까짓 거예요. 병들어도 그까짓 거예요. 중요한 것은 뭐냐? 믿음 잃어버린 게 문제예요. 믿음 잃어버린 것. 이럴 때 여러분, 믿음만 찾으면 IMF전의 사업보다 10배, 100배 더 잘 됩니다. 직장 잃어버린 것 믿음을 찾아버리면 IMF 전의 직장보다 10배, 100배 더 좋은 직장에 일할 수가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뭐냐? 믿음이에요. 믿음. 믿음. 믿음.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믿음을 팔아버리고 나와서 지금 보이는 것만 달라고 그럽니다. 보이는 것은 잠깐이요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한 것이라고 그랬습니다. 우리는 보이는 것 때문에 사는 것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믿음 때문에 삽니다.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사느니라." 주님이 말씀했잖아요. 하늘의 복은 받을 그릇이 준비된 사람에게만 주어집니다. 우리도 마리아처럼 하나님의 말씀을 순수하게 받아들이고 믿는 사람이 되어야 돼요. 그래서 성결한 사람, 헌신한 사람, 주님이 무슨 말씀을 하시더라도 말씀대로 이루어지이다 하고 믿을 때 주님이 말씀하십니다. "네 믿음대로 될지어다." 마리아와 같은 신앙 안에서, 마리아와 같은 복을 받아서 어려운 이 환경을 이기고 승리하는 여러분 다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성탄의 진리 누가복음 2:8-14 사람이 사는 세상에는 역사적인 기록들이 남아 있습니다. 그 수다한 기록들 가운데는 사람들의 기억에서 사라져버린 사건들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 사건들이 과거라고 하는 시간 속에서 매장되어 버리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런가 하면 우리에게 남겨진 역사의 기록들 중에는 이 땅에 사람이 살고 있을 동안 그 사건이 영원히 살아서 생각나게 하고, 기억나게 하고, 감격하여지게 하고, 기쁨을 샘솟게 하는 일들도 있습니다. 결코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사라져 버리거나 잊혀져 버릴 수 없는 살아 있는 역사가 있습니다. 말하는 역사가 있습니다. 행동하게 하는 역사가 있습니다. 바로 역사가 주는 힘입니다. 그것은 바로 역사 속에서 일어났던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 사건입니다. 그는 과거 어느 역사의 시점에 있었다가 사라져 버린 자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지금도 그는 역사의 한가운데 살아 계신 분이기 때문입니다. 아니 현재 여기 세상에 숨쉬고 살고 있는 사람들 가운데 그분과 관계를 맺고 있는 그 사람들이 살고 있기 때문입니다. 바로 그리스도인이라 일컫는 사람들 속에 그분이 살아 계시기 때문입니다. 예수 성탄 진리는 바로 그리스도인들의 삶 속에 살아 있습니다. 그 성탄의 영광이 그리스도인에게 빛을 주고, 힘을 주고, 용기를 주고, 기쁨을 주고 있습니다. 그리고 멋진 승리의 삶을 창조해내고 있습니다. 1998년의 예수 성탄을 맞으면서 또 다시 '성탄의 진리'를 만나보기 원합니다. Ⅰ. 예언된 진리입니다 사실상 전 구약성경은 장차 오실 예수 그리스도를 예언한 것입니다. 예수님 자신은 이 사실을 가리켜「너희가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 줄 생각하고 성경을 상고하거니와 이 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증거하는 것이로다」(요 5:39)라고 하였습니다. 더욱이 예수 탄생의 예언은 더 내용적이고 구체적으로 예언되었습니다. 예컨대, 1. 예수 탄생의 방법이 예언되었습니다 이사야서 7장 14절에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라고 하였습니다. 이것은 예수 탄생 740여 년 전에 이사야 선지자를 통하여 예언된 것입니다. 이것을 가리켜 징조라고 하였습니다. 2. 그 이름이 예언되었습니다 이사야서 7장 14절에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리라」고 하였습니다. 그 뜻을 말하면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 함이라」고 하였습니다(마 1:23, 사 8:8-10). 하나님의 천사(가브리엘)는 마리아와 정혼했던 청년 요셉에게 현몽 할 때, 「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 하니라」(마 1:21)고 하였습니다. 이 천사의 예언은 먼저 마리아에게도 주어진 이름이었습니다(눅 1:31). 3. 예수 탄생의 시기와 나라와 장소가 예언되었습니다 ① 예수 탄생의 시기는 「이 모든 날 마지막에」(히 1:2)라고 하였습니다. 「때가 찼을 때」라고 하였습니다(엡 1:9, 갈 4:4). 이 사실을 역사적 시기로 표현하기를「헤롯왕 때」(마 2:1)라고 하였습니다. 누가복음 2장 1-2절에는 「이 때에 가이사 아구스도가 영을 내려 천하로 다 호적하라 하였으니 이 호적은 구레뇨가 수리아 총독 되었을 때에 첫번 한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바로 이때 예수께서 탄생하였습니다. ② 예수가 탄생할 나라는 유대라고 하였습니다. 마태복음 2장 1절에 「헤롯왕 때에 예수께서 유대 베들레헴에서 나시매…」라고 하였습니다. ③ 그리고 예수 탄생의 지역까지 예언하기를 베들레헴이라고 하였습니다(마 2:1). 이는 선지자 미가에 의하여 예언된 것입니다. 미가서 5장 2절에 「베들레헴 에브라다야 너는 유다 족속 중에 작을지라도 이스라엘을 다스릴 자가 네게서 내게로 나올 것이라 그의 근본은 상고에, 태초에니라」고 하였습니다. 헤롯왕도 예수께 경배하러 왔던 동방박사들 때문에 이 사실을 확인하게 되었습니다(마 2:3-6). 더 거슬러 올라가면 예수에 대한 예언은 여자의 후손으로(창 3:15, 갈4:4-5), 아브라함의 자손으로(창12:3, 마 1:1), 이삭의 자손으로(창 17:19, 눅 3:34). 야곱의 자손으로(민24:17, 마 1:2), 유다 지파 중에서(창 49:10, 눅 3:33), 다윗의 위를 상속할 자로(사 9:7, 눅 1:32, 33) 예언되었습니다. 그래서 마태복음 1장 1절에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의 세계」라고 하였습니다. Ⅱ. 초자연주의에 속하는 진리입니다 마태복음 1장 23절에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라고 하였습니다. 이 소식을 처음 천사에게 들은 당사자 마리아는 깜짝 놀랐습니다. 그리고 자신은 사내를 알지 못한다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무서워하였습니다. 그때 가브리엘 천사는 「성령이 네게 임하시고 지극히 높으신 이의 능력이 너를 덮으시리니…」라고 하였습니다(눅 1:26-35). 천사는 요셉에게 현몽할 때도 「…요셉아 네 아내 마리아 데려오기를 무서워 말라 저에게 잉태된 자는 성령으로 된 것이라」고 하였습니다(마 1:20). 성령께서 마리아와 요셉을 간섭하였습니다. 그리고 저들에게 믿음이 일어나도록 역사 하였습니다. 그래서 마리아는 「주의 계집종이오니 말씀대로 내게 이루어지이다」라고 하였습니다(눅 1:38). 요셉도 잠이 깨어 일어나서 주의 천사의 분부대로 행하여 아내를 데리고 왔다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아들을 낳기까지 동침치 아니하더니 낳으매 이름을 예수라 하였다고 하였습니다(마 1:24-25). 마리아의 고통과 요셉의 번민은 초자연적인 성령의 역사에 의하여 풀려진 것입니다. 그 후 예수의 동정녀 탄생은 마리아와 요셉의 성탄 신조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기독교 교리가 된 것입니다. 곧 사도들의 신조가 된 것입니다. 그리고 역사상의 기독교회가 한결같이 고백하여 오는 신조가 된 것입니다. 이것은 기독교가 초자연주의에 속한 구원 종교임을 입증해주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이 사실을 사도 요한은 「말씀이 육신이 되었다」고 하였습니다. 「우리 가운데 거하신다」고 하였습니다.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고 하였습니다(요 1:14). 그 말씀은 태초부터 계셨다고 하였습니다. 여기 '태초'는 시간 전의 영원을 가리키는데,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다고 하였습니다.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라고 하였습니다(요 1:1). 그렇다면 하나님이신 예수께서 사람이 되어 오셨다는 사실입니다. 이것이야말로 하나님 자신만이 하실 수 있는 초자연주의에 속하는 일입니다. 예수 성탄의 진리는 자연주의, 이성주의가 아닌 초자연주의에 속하는 진리입니다. Ⅲ. 구원의 진리입니다 마태복음 1장 21절에 「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고 하였습니다. 1. 예수 성탄은 자기 땅에, 자기 백성을 찾아오신 것입니다(마 1:21) 요한복음 1장 11절에도 「자기 땅에 …자기 백성」이라고 하였습니다. 요한복음 13장 1절에도 「…예수께서 자기가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로 돌아가실 때가 이른 줄 아시고 세상에 있는 자기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시니라」고 하였습니다. 2. 세상에 있는 자기 백성은 죄인이라고 하였습니다 요한복음 1장 11절 중에 「자기 땅에 오매 자기 백성이 영접지 아니하였다」고 하였습니다. 이 자기 땅에 있던 자기 백성을 가리켜 잃어버린「아브라함의 자손」이라고 하였습니다(눅 19:9). 예수님은 이 죄인들을 비유하기를 「병든 자」라고 하였습니다(막 2:17). 사도 베드로는 제각기 자기 길로 가버린 길 잃은 양이라고 비유하였습니다(벧전 2:25). 3. 그의 오심은 이러한 죄인을 구원하러 오셨다고 하였습니다 누가복음 19장 10절에 「인자의 온 것은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려 함이니라」고 하였습니다. 마가복음 2장 17절에도「건강한 자에게는 의원이 쓸데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데 있느니라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바울도 말하기를 「미쁘다 모든 사람이 받을 만한 이 말이여 그리스도 예수께서 죄인을 구원하시려고 세상에 임하셨다 하였도다 죄인 중에 내가 괴수니라」고 하였습니다(딤전 1:15). 4. 죄인 구원은 오직 예수 자신의 목숨을 대속물로 드림에 있었습니다 그래서 마가복음 10장 45절에「인자의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고 하였습니다. 여기 '대속물'이란 팔려가 버린 노예를 해방시키기 위하여 대신 지불하는 몸값을 가리킵니다. 바로 그것은 예수께서 자기 몸을 십자가에서 대신하여 희생함으로 죄 값인 사망을 지불하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베드로는 말하기를「너희가 알거니와 너희 조상의 유전한 망령된 행실에서 구속된 것은 은이나 금같이 없어질 것으로 한 것이 아니요 오직 흠 없고 점 없는 어린 양 같은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로 한 것이니라」고 하였습니다(벧전 1:18-19). 5. 바로 이것이 성탄의 복음이라고 한 것입니다 누가복음 2장 10절에 「천사가 이르되 무서워 말라 보라 내가 온 백성에게 미칠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을 너희에게 전하노라」고 하였습니다. 예수 탄생은 좋은 소식, 곧 복음(福音)이라고 하였습니다.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이라고 하였습니다. 온 백성에게 미칠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이라고 하였습니다. 그 큰 이유는 온 인류는 죄인이기 때문입니다. 죄인에게는 구원만이 기쁨의 좋은 소식입니다. Ⅳ. 역사적 진리입니다 예수 성탄의 사건은 전설이나 신화나 혹은 미신이 아닙니다. 이것은 역사적 사건의 사실입니다. 그래서 유대의 권위 있는 역사가 요세퍼스 사기에도 '이 때에 예수라고 하는 지혜로운 사람이 있었다.'고 하였습니다. 로마 역사가 타기투스(Tacitus)는 네로 황제의 기독교 박해에 대하여 말하는 중 예수 그리스도에 관하여 말하기를 '그리스도인이라고 하는 큰 무리가 있었다. 그 이름은 베리오 황제 때에 유대의 감사 본디오 빌라도에게 처형된 그리스도라고 하는 사람에 의해서 유래하였는데…'라고 하였습니다. 성경은 예수 탄생의 역사성에 대하여 바로 말하기를 「헤롯왕 때에 예수께서 유대 베들레헴에서 나셨다」고 한 사실입니다(마 2:1). 헤롯왕이 역사적인 인물이 확실하다면 예수 탄생 역시 역사적 사건이요 사실이 아닌가! 로마 황제 가이사 아구스도가 천하에 호적령을 내리고, 구레뇨가 수리아 총독이 되었을 때에 첫번째 한 것이 역사적 사실이라면, 이때 호적령을 따라 다윗 집 족속인 요셉이 그 정혼한 마리아와 함께 나사렛 동네에서 유대 베들레헴으로 호적하러 올라간 것이 사실이 아닌가! 그 어간에 베들레헴의 어느 구유에서 예수가 탄생했다는 기록이 역사적 사실이 아닌가(눅 2:1-7)! 무엇보다도 예수 탄생은 역사의 신기원이 되어버린 사실이 역사의 진리임을 보여줍니다. 역사의 연호는 예수 탄생을 기점으로 주전(B.C.)과 주후(A.D.)로 나뉘어지고 말았습니다. 그 역사의 연호가 지금 1988년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직접적이든 간접적이든 오늘의 인류는 예수의 역사적 탄생을 인정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세계 3대 칼빈주의 신학자 중에 한 사람인 헤르만 바빙크(H. Bavink) 박사는 이런 기록을 남겼습니다. '70인역(LXX)이 지적한 대로 구약에 있는 그리스도에 대한 예언이 456번인데, 오경(창, 출, 레, 민, 신)에서 75번이요, 선지서에서 243번이요, 그 나머지 부분에서 138번이다.'라고 하였습니다. 이러한 구약의 예언은 예수 그리스도 자신의 탄생과, 33년의 지상에서의 삶과, 십자가에 죽으심과 부활로 말미암아 다 이루어졌습니다. 하나님은 저 에덴동산에서 범죄한 아담에게 그리스도께서 세상에 여인의 후손으로 오셔서 뱀의 후손(마귀)을 이기실 것을 예언하고 약속해 주셨습니다(창 3:15). 마귀를 이기신 예수께서 여인의 후손으로 출생하실 것을 예언하신 것입니다(갈 4:4 ). 하나님은 주전 2,000년 전에 아브라함에게 이 사실을 예언하고 약속했습니다. 「땅의 모든 족속이 너를 인하여 복을 얻을 것이니라」고 하였습니다(창 12:3). 여기 아브라함의 자손은 오실 예수를 가리킨 것입니다. 또한 이사야 선지자에게도 740여 년 전에 다시 구체적으로 오실 메시야는 처녀 몸으로 올 것이라고 예언했습니다(사 7:14). 그 후에 미가 선지자를 통해서 유대 베들레헴에서 탄생할 것이라고 예언했습니다. 그리고 마리아와 요셉에게 예고하였습니다. 결국 그 예언은 그대로 역사 속에서 이루어졌습니다. 우리는 이러한 진리 앞에서 우리 믿음을 다시 확인해야 합니다. 먼저 그 구속의 예언을 주신 하나님을 믿어야 합니다. 그 예언을 영감으로 기록한 계시, 곧 성경의 참됨을 믿어야 합니다. 그 예언의 성취로 나타난 예수 그리스도의 초자연적 탄생을 믿어야 합니다. 그 예수 탄생의 결과 우리에게 임한 구원의 축복을 믿어야 합니다. 그리고 감사해야 됩니다. 그리고 만민에게 미칠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을 인류에게 전해야 합니다. 1998년의 성탄을 맞는 우리 모두에게, 「하늘의 하나님께는 영광, 땅에서는 기뻐하심을 입은 사람들 중에 평화」가 임하시기를 축원합니다. 할렐루야! 은혜를 받은 자 누가복음 1:26-38 이 땅 위에 절기가 많습니다. 절기의 배경은 어떤 위대한 인물이 이 땅에 태어날 수도 있고 또 국가의 경축하는, 축하의 날이 될 수도 있습니다. 이 세계에 나라마다 명절이 많이 있고 또 온 세계의 사람들이 맞이하는 종교의 절기도 많습니다. 그러나 우리 주님 탄생하신 날처럼 세계가 다 기뻐하고 다같이 감격해하고 맞이하는 절기는 성탄절밖에 없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온 땅 위에 오신 하나님이시고 우리 인류를 구원하기 위해 오신, 온 인류의 구세주의 탄생이 바로 성탄절인 것입니다. 성탄절이 되면 선진국이나 미개한 나라나 산이나 바다나 대도시나 농촌까지 탄일종은 울리게 되고 군인이 있는 전방에도 농부가 있는 농촌에도 어부가 있는 배 위에도 성탄절은 거룩하고 성탄절은 우리에게 참으로 평화와 기쁨과 자유를 주는 하나님의 최고의 선물의 날이 되는 것입니다. 성탄절이 되면 온 세계의 나라들이 들뜨게 되고 특별히 이 사업을 하는 분야는 백화점 같은 이런 곳들은 연중 가운데서도 성탄절에 가장 목표를 높이 세워서 사업의 갖가지 번영을 위해서 모두 많은 계획을 세워서 성탄절 목표에 이르려고 하고 있습니다. 많은 유흥업소, 호텔도 어느 나라 할 것 없이 방을 얻기가 어려울 정도로 성탄절이 되면 흥청거리는 것입니다. 저는 몇 년 전에 미국에서 성탄절 바로 지나서 시카고라고 하는 도시를 가보았는데 얼마나 아름다운지요. 수많은 수십만 가정이 다 아름답게 성탄절 장식을 했어요. 그냥 늘어놓은 게 아니예요. 아주 예술적으로, 아름답게, 집집마다 다 다르게, 온 도시가 다 꽃밭이에요. 세상에 어찌 이렇게 아름다울 수 있을까. 온 나라가 전부 반짝반짝 하는 거예요. 예수님 나신 것 어떻게 장식해도 무엇으로 꾸며도 그 감격과 감사를 다 표현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은 성탄절의 참 의미를 모르고 성탄절이 어떠한 뜻으로 어떠한 마음으로 맞이해야 되는지 전혀 모르게 성탄절을 지나는 분들이 많습니다. 일본에는 성탄절만 되면 베이비 호텔이 생긴다고 합니다. 이 말은 무슨 말이냐 하면 둘 부부가 즐기려고, 재미있게 지내려고, 애가 귀찮으니까 애를 7일에서 20일 정도 맡겨놓는 거예요. 호텔에다. 그래서 애는 7일에서 20일 까지는 엄마 아버지 구경도 못하고 호텔에서 외롭게 진짜 고요한 밤을 보내는 거예요. 하룻밤 지나는데 얼마냐, 애 하루 맡기는 데 15000엔에서 20000엔 이에요. 우리 돈으로 말하면 20만원이 넘는 거요. 애 하나에 보모가 다 따라야 되니까. 그리고 애 가져다 넣어 놓고 둘이는 그럴려고 하는 거예요. 성탄절의 의미를, 성탄절 밖에서 성탄절을 맞이하는 것입니다. 성탄절은 예수님을 모시고 예수와 함께, 주안에서 성탄절이 있는 것입니다. 그것은 성탄절의 그 뜻을 먼저 알아야 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시려고 그 아들을 이 땅 위에 보내셨습니다. 어디에 태어나셨습니까? 짐승이 있는, 짐승을 기르는, 짐승이 자고 쉬는 마구간에 태어나셨습니다. 주님은 우리를 구원하시려고 태어나시기도 가장 낮은 곳에 불쌍하게 태어나시고, 사시기도 가난하게 육적으로 너무너무 불쌍하게 사시고, 죽으시는 마지막 죽음도 너무 불쌍하게 비참하게 죽으셨어요. 가난하게 태어나셨으면 좋게 사시든지, 못 사셨으면 돌아가실 때라도 잘 돌아가시든지, 주님은 태어나심과 사심과 돌아가심이 이렇게 가장 불쌍하고 가난하고 비참하게 마치셨어요. 왜? 왜 그러셨어요? 우리를 위해서예요. 가장 낮은 자의 친구가 되시려고 낮은 곳에 태어나시고, 가장 불쌍한 자의 이웃이 되시려고 불쌍한 우리 인간의 곁에 사람의 몸을 입고 오셨어요. 마구간 같은 곳에 소망을 주시려고 아무리 이 세상의 비참한 곳이라도 주님이 함께 하시면 살 수 있고 승리할 수 있고 구원을 받을 수 있고 하나님 자녀가 될 수 있고, 가장 낮은 곳에 있는 자를 올리시고 일으키시고 위로해 주시고 사랑을 주시고. 왕이 오셨어요. 다른 분이 그렇게 태어나서는 아무 의미가 없어요. 하나님의 아들이 거기 오셨다는 데 의미가 있는 거예요. 전능하신 왕의 왕이 거기 오신 것에 힘과 능력이 있는 거예요. 그가 옴으로 모두가 살게 되고 그가 오셔서 비취므로 모두에게 빛이 비취게 된 것입니다. 저가 어느 곳에 집회를 갔는데 군부대입니다. 그 부대 사령관이 은혜를 많이 받으셔서요 저보고 식사 대접을 하겠다고 그래요. 군에서 중장이에요. 그러면 상당히 높은 분이에요. 많지 않아요. 그래서 저를 자꾸 대접하려 그래요. 그래서 저가 가만히 생각하니까 나야 뭐 대접받는 게 그리 중요한 게 아니니까, 마침 우리 교인이 그 부대에 있더라구요. 우리 교인 계급이 소령이에요. 그래서 내가 그랬죠. 집사님, 오늘 저녁에 내가 집사님 댁에 갈 테니까 뭘 좀 준비해 놓으라고. 그래서 제가 그 사령관을 모시고 그 소령 집으로 들어갔어요. 우리 저기 가서 먹읍시다. 집으로 들어갔어요. 왜그랬어요? 높은 분이 그 집에 들어가면 그 집에 뭔 일이 일어나는 거요. 좋은 일이 일어날 수 있는 거예요. 내가 그걸 모를 리 있겠어요? 모시고 가서 같이 인사드리고 우리 교인이라고, 내가 뭐 진급시켜 달리고 그런 말은 안했어요. 전혀 그런 건 할 필요 없어요. 그냥 이분이 아주 좋고 착하고 우리 교회 아주 믿음의 생활 잘한다고. 그래요. 높은 분이, 그 군인이 별을 달고 낮은 집에 들어가면 그 집에 놀라운 일이 있는 거예요. 얼마 지나서 보니까 중령을 달아 가지고 왔더라구요. 그럴 수밖에 없는 거죠. 그 정도에 있는 분이 봐 줄려고 하면 반드시 길이 열릴 수밖에 없는 거죠. 그래요, 왕의 왕이 오셨어요. 온 우주를 창조하시고 다스리는 분이, 전능하신 분이, 능치 못하심이 없는 하나님의 아들이 이 땅 위에 우리에게로 오신 거예요. 우리에게 놀라운 일이 일어날 수밖에 없는 거예요. 여러분. 땅에서도 다 같은 사람이라도 높은 분이 어디 가면 놀라운 일이 일어나는데, 그는 능치 못하심이 없는 전능하신 분이에요. 누구든지 저를 믿으면 저를 영접하면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는 것입니다. 죄 아래 있는 죄인의 집을 찾아 오셨어요. 죄에서 건지시려고. 미국 영화를 보면 늘 많이 나오는 게 뭐예요? 갱단이에요. 아주 깡패들이 총을 쏘고 파바바박 그러고 항상 나왔다 하면 그래요. 온 도시를 수라장으로 만들고. 결론은 어떻게 나요? 보안관이 등장합니다. 머리를 이렇게 제치고 뚱뚱한 보안관이 등장하면 그 거리와 그 모든 도시에 질서가 탁 잡히는 거예요. 예수님은 이 땅 위에 질서를 잡으려고 오셨어요. 우리를 괴롭히는 모든 어둠의 세력을 물리치시고 그 한 분이 오심으로 그 한 분으로 말미암아 이 땅은 거룩하게 되고 빛이 비취게 되고 생명을 얻게 되고 은혜를 받게 된 줄로 믿습니다. 여러분들도 아마 그 영화를 보셨을 것입니다. 아마 말은 거의 다 들으셨을 거예요. 콰이강의 다리라는 이런 영화, 유명한 작품이 있습니다. 이 작품은 2차 대전 중에 일본군이 태국이라는 나라에 콰이 강이 흐르는데 거기에다가 철교를 놓는 거예요. 강 위에다가 다리를 놓는 거예요. 그런데 그 다리를 놓을 때 인부를 연합군 포로병들, 일본군이 붙잡아 온 포로병들을 다 데려다가 거기에서 일을 시키는 거예요. 하루는 일본군이 이 다리 공사에 중요한 장비가 없어졌어요. 그래서 이거 분명히 연합군들이, 포로병들이 이 다리가 놓아지면 일본군은 작전을 빨리 진행하지마는 연합군은 피해가 가니까 요놈들이 아마 어디 훔쳐서 숨기든지, 버렸을 것이다 이렇게 생각하고 전부 포로병들을 불러놓고 말했어요. 이것 찾아내라고 이것 당장 안 가져다 놓으면 다 쏴 죽여버린다고. 일순간에 파리목숨 같은 이 포로병들 금방 죽을 수밖에 없었어요. 큰일났습니다. 아무도 길이 없습니다. 찾을 길이 없습니다. 그 때 어떻게 합니까? 영국군 포로병 한사람이 젊은이가 나와서 내가 그랬다고, 그거 내가 그랬다고 나갔어요. 그래서 즉시 그 자리에서 처형을 당했어요. 며칠 지나서 보니 그 사람이 그렇게 한 게 아니고 이 장비를 나중에 찾지 않습니까? 그 사람의 잘못이 아니에요. 그 사람으로 말미암아, 그 젊은이는 내가 아니면 다 죽는다고 생각한 거예요. 그래서 전체를 살리기 위해서 내가 그랬다고 나가서 희생당한 거예요. 하나님의 아들이 이 땅에 오신 것은 내가 죄인이라고, 내가 온 인류의 죄인이라고 내가 나쁘다고 주님께서 우리의 죄를 위하여 당신이 돌아가시려고 제물이 되시려고 우리를 살리시려고 그가 죄가 없으시면서 죄인이 되셔서 앞에 걸어나가셔서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신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살았고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이 은혜를 받는 것입니다. 세상의 많은 사람들은 성탄절을 모릅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왜 오셨는지 그 의미를 모르고 예수 밖에서 흥청거리고 만족하려고 하고 방탕의 삶, 음란한 삶, 타락의 삶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성경은 말합니다. 하나님을 떠난, 하나님이 없는 이런 방탕과 쾌락을 좇아 살아가는 데는 반드시 하나님의 심판이 있다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마태복음 24장에 보면 홍수 전에 노아가 방주에 들어가던 날까지 사람들이 먹고 마시고 장가들고 시집가고 있으면서 홍수가 나서 저희를 다 멸하기까지 깨닫지 못하더라. 하나님은 물로도 심판하시고 불로도 심판하시고 오늘날까지 하나님 앞에 방탕의 삶을 살아가는 문화와 국가와 개인은 반드시 심판하셨습니다. 타이탄이라는 말은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거신족의 이름이에요. 큰 신의 이름이 타이탄이에요. 그래서 우리나라도 자동차를 타이탄이다, 큰 힘이 있다. 영국은 1912년, 진짜 큰 배를 하나 만들었어요. 배가 얼마나 크냐, 46300톤급의 어마어마한 배를 만들었어요. 길이만 259미터예요. 100미터를 달려가도 뛰어서 가야되는데 200미터면 얼마나 커요? 거기다가 59미터가 더 기니까 큰배를 만들었어요. 그래서 그 배의 이름이 타이타닉이에요. 타이타닉이라는 말은 절대로 침몰할 수 없는 배라는 뜻이에요. 인간의 교만이지요. 절대로 안전할 수도 없고 절대로 침몰 안 할 수도 없고 절대로 안 죽을 수도 없고, 인간은 이 세상에 하나님의 제한, 하나님이 주시는 그 은혜아래 살게 되어있는데도 이런 교만한 마음이 들어오면 심판을 받을 수밖에 없는 거예요. 이 세상에는 타이탄이 없어요. 힘있는 자는 하나님 이외에 없는 거예요. 2208명을 태우고 가다가 빙산에 부딪혀서 여자와 어린아이를 제외하고 다 죽지 않습니까? 여기에 특징이 두 가지예요. 향락을 좇아가던 사람, 돈 많이 벌어 가지고 즐기려고 하던 사람, 만족하려고 하던 사람들, 쾌락을 좇아가던 종말. 가장 큰, 과학적으로 완전하고 든든한 배를 하나님이 빙산으로 부딪히게 했어요. 우리나라도 얼마나 많이 봅니까? 1971년 대연각 호텔에서 화재가 일어났어요. 그 날이 성탄절이에요. 성탄절을 모르고 성탄절 밖에서 성탄절을 즐기려고 했던 수많은 사람들이 그 호텔에서 밤이 새도록 그렇게 즐기고 놀다가 불이 났어요. 죽은 사람만 한 호텔에서 163명이 죽었어요. 100명이 얼마나 많아요? 여러분 한번 악수를 100명만 해보세요. 10층, 15층, 16층 위에서 그냥 그대로 떨어지는 거예요. 불길이 뜨거워서 못 견뎌서 다 창문에 나와 가지고 둘 부부가 붙잡고, 부부 같으면 다행이야, 붙잡고 떨어지고. 그래서 장례식도 하나 못했다 그러잖아요? 너무너무 부끄러워 가지고, 왜? 다 가족끼리 그래 죽은 게 아니고, 그래가지고 떨어졌고 그것도 TV에 비추는데 전부 벌거벗고 나와 서있어요. 세상의 논리가 다 그런 길로 가잖아요? 세상에 배워서 지성인이 뭐 특별하게 고상하게 사는 줄 아세요? 세상에 돈 많이 벌어 가지고 어디에서 이상적으로 사는 줄 아세요? 다 그런 길로 가는 거예요. 성탄절 밖의 성탄절이에요. 하나님이 미워하시는, 심판하는 곳이에요. 마귀는 항상 그런 길로 인도해요. 크다고 믿으면 안돼요. 그것도 '대연각' 이에요. 타이탄이야. 아주 큰집이다. 청량리에 있었던 대왕코너 아시잖아요? 거기도 화재가 세 번이나 싹 쓸었잖아요. 얼마나 많이 죽인 호텔인지 모릅니다. 다 어떻게 하면 똑같이 다 그런 곳에 심판이 있었고 그럴 때마나 언제나 연말에 성탄절과 함께 흥청거릴 때 불이 났어요. 어디입니까, 여러분. 이래도 우리가 깨닫지 못하고 있습니까? 오늘까지도 수없이 많은 일들이, 하나님의 심판이 두 곳으로 갑니다. 첫째는 교만이에요. 교만하면 심판하는 거예요. 타락하면 심판하는 거예요. 교만은 패망의 선봉이에요. 겸손한 자에게는 은혜를 주십니다. 겸손은 그렇기 때문에 큰 보화입니다. 겸손한 가정입니까? 행복이 노력 안 해도 저절로 와요. 겸손한 기업입니까? 저절로 된다고요. 겸손한 믿음입니까? 저절로 잘 믿는 거예요. 교만하고 잘 믿는 길은 없어요. 교만하고 행복할 길은 없다고요. 아무리 힘쓰는데 왜 행복이 안 오느냐? 교만이 있는 한은 그 집을 찾아갈 축복이 없다는 거예요. 겸손해야 은혜 받는 거예요. 이사야 14장에 사탄이 내가 하늘 뭇 별 위에 올라가서 나의 보좌를 펴리라 하나님과 비기리라 올라가리라 올라가리라. 심판이에요. 이사야 16장에는 모압의 심판, 이사야 17장에는 다메섹의 심판, 이사야 19장에는 앗수르의 심판, 이사야 23장에는 두로의 심판, 이 많은 나라 나라들이 하나님 앞에 멸망 받은 것은 교만이 아니면 향락이에요. 오늘도 우리 시대가 어떤 방향으로 흘러가고 있습니까? 성탄절 밖의 흥청거리는 성탄절은 기업이든 개인이든 하나님의 심판이 있을 뿐인 것입니다. 우리는 고요한 밤으로 보내야 합니다. ♪그 어린 주 예수 눌 자리 없어 그 귀하신 몸이 구유에 있네 저 하늘의 별도 반짝이는데 그 어린 주 예수 꼴 위에 자네♪ 베들레헴으로 가십시다. 베들레헴의 주님을 보면서 우리들도 주님과 같은 마음으로 겸손하게 이 세상을 살고, 가난한 우리 이웃에 있는 불쌍한 우리 형제를 돌보면서 사랑과 긍휼을 베푸는 그리스도 안의 성탄절이 되기를 바랍니다. 여러분의 목적을 어디에 두고 있습니까? 크고 강하고 타이탄이 되고 타이타닉이 되고 최고로 좋은 집에서 좋은 차 타고 최고로 좋은 곳에 가서 좋은 음식 먹고 가장 좋은 것들 가지고 만족하며 살아가는 거기에 주님이 오시는 게 아니예요. 일본이 얼마나 힘이 있는지요. 중국을 다 통일하고 점령하고 한국도 다 점령하고 말레이시아도 다 점령하고 인도네시아도 다 점령하고 필리핀도 다 점령하고. 다 나중엔 어떻게 합니까? 미국을 공격해 들어가잖아요. 미국의 침략을 받는 게 아니라 미국을 향하여, 진주만을 향하여 비행기와 잠수함과 함정을 끌고 와서 일순간에 수라장을 만들어 놓습니다. 일본, 그때까지 신앙을 지키던 성도들이 일본은 우상 숭배하고 하나님 앞에 교만하기 때문에 일본은 심판 받을 것이다, 늘 그렇게 믿던 교인들, 감옥에서 수절하며 신앙을, 그 고문을 다 지키던 분들도 그때 다 넘어졌어요. 왜? 진주만 공격한 거 보고 아이코, 기다렸더니 결구 안되는구나, 소용없구나, 하나님도 지는구나, 잘 믿어도 별 수 없구나. 하나님을 믿다가 낙심하지 말기를 바랍니다. 악이 제아무리 강하여 하늘까지 올라갈 지라도 사탄은 하나님 앞에 심판 받게 되어 있고, 인간의 교만은 나라와 국가 관계없이 오늘날까지 하나님이 심판하십니다. 오래 걸리는 게 아니예요. 일순간에, 일본이 망한 것도 한순간이었어요. 원자탄이 히로시마, 나가사키에 떨어지면서, 그래서 아무도 일본이 패망한 것을 믿어지지를 않았어요. 만세를 모두 큰소리치지 못했던 것은 정말 일본이 망하겠느냐 하는 생각에. 역대 앗수르, 바벨론, 두로, 모든 나라들이 다 심판 받은 것처럼 하나님을 떠난 나라들은 하나님을 저버리는 교만한 나라들은 반드시 심판을 받게 되어져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탄생이 이제 5일로 다가오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대강절 마지막 주일입니다. 우리는 촛불을 켜서 들고 탄생하신 베들레헴의 주님을 향하여 한 발걸음 한 발걸음 겸손하게 나아가시기를 바랍니다. 오늘 말씀하여 준 대로 마리아와 같이 주님을 영접하시기를 바랍니다. 마리아는 은혜를 받은 여인이었습니다. 본문에 말씀하고 있습니다. '은혜를 받은 자여 평안할 지어다 주의 은혜가 너를 덮으리니' 하나님께서 은혜를 베풀어 주셨어요. 우리 모두에게도 하나님이 은혜를 주시면, 은혜는 하나님의 선물이에요. 인간은 다 부족해요. 카톨릭에서는 마리아를 완전히 예수님보다 더 높이고 거룩하게 마리아를 생각하지마는 우리 개신 교회는 그렇게 안 봐요. 마리아도 죄인이고 마리아도 인간이고 마리아도 부족해요. 그래서 카톨릭은 마리아는 결혼도 안하고 자녀가 예수님 이외에는 없는 걸로까지 말해요. 우리 개신교 성경에는 마리아가 그 후에 결혼해 가지고 자녀도 여러 명 낳았다고 해요. 사람이 무슨 결혼을 안하고 거기에 놀라운 것이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가 임하는, 그래서 우리는 전적 은혜라는 거예요. 전적 하나님의 은혜, 할렐루야. 사도바울이 말한 '내가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라' 내가 예수 믿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라는 거예요. 절대적인 은혜요. 그래서 마틴 루터는 종교개혁을 할 때 '믿음으로 구원함을 받는다' 우리가 믿음으로 구원함을 받는 거예요. 행함으로 받는 게 아니라. 칼빈은 뭐라 그랬어요? 믿는 것도 하나님 은혜라는 거예요. 하나님이 은혜를 주어야 믿는 거지 내가 믿고 싶다고 믿어지느냐는 거예요. 모든 것을 하나님의 은혜로 보는 것입니다. 오늘 이 시간 나온 여러분들에게 마리아같이 우리가 부족하지마는 하나님의 은혜가 우리를 덮어주시고 하나님의 은혜가 우리에게 충만히 임재하기를 바랍니다. 우리는 은혜를 늘 받아들이는 삶, 하나님의 은혜가 아침부터 저녁까지, 아니 우리의 일생에 항상 하나님의 은혜가 우리와 함께 해주셔야 하는 것입니다. 어떤 학자는 말하기를 태양이 아침부터 저녁까지 우리를 비추듯이 하나님의 은혜도 매일매일 내가 이 세상을 살면서 떠나는 그 날까지 하나님의 은혜가 우리를 비추어 주시고, 늘 도와주시고, 내 영혼의 은혜, 삶의 은혜, 내 생명의 은혜, 내 모든 가정과 자녀와 범사의 생활에 하나님의 은혜가 늘 우리를 도와주시고 함께 하시고 지키시고 보호하시는 줄로 믿습니다. 여러분들도 잘 아는 우리 박태준 포철 회장님이 계세요. 이분이 정권이 바뀌면서 천하에 나쁜 놈이 되고 천하에 죽일 놈이 되고 온갖 그의 죄가 전부 언론에 드러나면서 정치하는 사람, 권력을 가진 사람의 명예가 생명보다 귀한데, 만신창이가 되가지고 결국 미국으로 건너갔지 않습니까? 매일매일 살아가는 데 너무너무 속상하고 병들고 잠이 안 오고 견딜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친구의 인도함을 따라 그까짓 은혜가 무슨 소용이 있냐, 교회가 무슨 소용이 있냐 하던 분이 예수를 믿고 예수를 나의 구주로 영접하고 은혜를 받았어요. 은혜를 받고 나니 첫째, 자기 마음이 그렇게 편하고 매일매일 괴롭던, 잠이 안 오고 속상하고 너무너무 안타깝고 답답하고 분하고 죽이고 싶고 그런 마음이 눈 녹듯이 녹아지고 사라지게 되고 편안한 마음으로 바뀌어졌어요. 여러분, 사람이 그런 마음을 인간의 힘으로 해결할 수 있어요? 우리 교인 가운데 야구선수가 한 분 있는데 이번에 신년에 들어와 가지고 IMF 때문에 이렇게 잘하던 분도 자꾸 회사에서는 내보내려고 그러죠 그래서 계약은 잘 안 해주고 돈도 안올려주고 오히려 줄일려 그러죠. 여기 신경을 써 가지고요 지난 주일에 저에게 와서 그래요. 운동 선수가 몸아 탄탄하기 때문에 운동 살이기 때문에 1kg을 줄이려고 하면 아무리 운동해도 1kg가 안 준대요. 줄 게 어디 있겠어요? 그만큼 단단한 몸에, 날마다 단련된 몸에 1kg을 줄일 수 있겠어요? "목사님, 내가 이 한 열흘동안 계약이 안되고 이렇게 되면서 몸이 5kg이 줄었어요" 사람이 고민하는 것이 이 얼마나 밥이 안 넘어가고 첫째, 잠이 안 오고. 여러분, 인간의 고민이 누가 해결할 수 있어요? 잠이 안 오는 잠을 누가 자게 해줄 수 있냐는 거예요. 이 속상하고 원통하고 이 괴로운 맘을 누가 해결할 수 있어요? 교회에 나가고 예수 믿고 나니까 이 박 회장의 마음이 편안해지고, 그 다음에는 몸의 병이 다 치료가 되고. 그 병 고치려고 천하의 유명한 병원 다 찾았는데 주님을 영접하고 은혜를 받아들이니, 하나님이 하늘에서 우리를 찾아오신 그분을 맞이했더니, 이렇게 건강을 얻고. 그 다음에 세 번째, 이분이 뭐예요? 눈만 감으면 드러나는 이분에 대한 그 증오, 여러분, 참 얼마나 속상하겠어요. 이를 가는 거죠. 지금 본정신이에요? 이거는 아무도 해결할 수 없는 영원히 지옥까지 갈 때까지 갖고 가는 이 원한이 꽉 찼어요. 눈만 감으면 그분이 나오는 거예요. 이거는 어쩔 수 없는 거죠. 그래서 우리나라 몇 번 들어와도 만나지도 않고요, 얼굴이 말이 아니었어요. 그런데 예수를 믿고 이분이 들어와서 누구하고 먼저 사과했느냐, 이 분 찾아가 가지고 악수하고 사진 다 나왔잖아요. 왜 그래요?" 이거는요 우리 힘으로 안 되는 거예요. 은혜를 받아야지, 큰 은혜를 받아야 내 문제도 해결되지마는 너와 나 사이의 막힌 담도 이 은혜라는 교량이 있어야 연결되는 거지 안 그러면요 부모자식 간에도 못 풀고 평생 사는 분이 얼마나 많고 부부간에도, 형제간에도, 친구간에도 해결 못하고 사는 분들이, 평생 사는 분이 얼마나 많은데요. 인간이 굉장한 줄 알아요? 은혜 없으면 약한 거예요. 넓은 마음이 어디 있고 건강한 몸이 어디 있단 말이에요. 은혜를 떠나서 큰소리 칠 사람이 어디 있어요? 하나님이 내리시는 은혜가 만가지 우리의 삶 속에, 우리의 발걸음, 우리의 모든 일들 위에 그의 모든 은혜가 마리아처럼 위에 덮기도 하고 채우기도 할 때에, 내일 있을 큰 일들도 우리는 염려하지 아니하는 것은 다 주님의 은혜가 내일 되면 해결할 것이다, 우리는 믿음이 있는 것입니다. 범사를 하나님의 큰 은혜를 믿고 살기 때문에 우리는 늘 두렵지 않습니다. ♪지금까지 지내온 것 주의 크신 은혜라 한이 없는 주의 사랑 어찌 이루 말하랴 자나깨나 주의 손이 항상 살펴 주시고 모든 일을 주안에서 형통하게 하시네♪ 위로를 기다리는 자 누가복음 2:25-35 유명한 데일 카아네기의 사무실에는 아주 중요한 자리에 커다란 거룻배의 그림 한 점이 걸려있었다고 합니다. 노는 모래 위에 놓여있고, 배는 무척이나 낡은 것 같은 그러한 배의 모습을 하고있습니다. 썰물에 모래 위 언덕에 이렇게 걸려있는 배를 그린 그런 그림입니다. 마치 모래언덕에 버려진 것 같은 그림 하나가 있었다고 합니다. 문제는 이 그림은 처량하게 아주 쓸모 없이 내버려진 것 같은 그림, 그 배 한 척이 그려있는 그림이지만은, 문제는 그 그림 밑에 한 줄의 글이 쓰여져 있는데, 그 글이 중요합니다. 이렇게 씌여 있었답니다. "반드시 밀물 때가 온다." 지금은 썰물이 돼서 물이 다 빠져나가서 이 배가 이렇게 모래 언덕에 걸쳐있지만은 반드시 밀물 때가 와서 이 배를 물위에 띄워 놓을 것이다. 그리할 때에 이 낡은 배도 쓸모 있게 쓰여질 때가 올 것이다. 반드시 썰물이 있는가하면, 또 밀물 때가 있다. 그래서 밀물 때를 기다리는 이 낡은 배 한 척, 이 거룩의 모습을 그 사무실에 늘 걸어놓고 그는 그 그림을 보면서 무엇인가 깊은 생각을 했더랍니다. 윌리암 말스톤(Dr.William Marston)이라고 하는 심리학 박사님께서는 삼천 명을 상대로 해서 설문조사를 해본 결과, 많은 사람들이 사는 목적에 94%가 결국 기다리는데 있었다는 겁니다. 그 많은 시간, 또 그 많은 마음, 그 생각을 전부 기다리는 일에 쓰고 있었다는 겁니다. 무엇인가를 기다립니다. 소식을 기다리고, 사람을 기다리고, 또 기회를 기다리고, 좀더 변화되기를 기다리고, 좀더 좋은 세월을 기다리고, 좀더 발전되기를 기다리고……. 무엇인가 무던히 기다리는데 그 많은 세월들을 또 그 마음을 쓰고 있었다고, 그렇게 평가하고 있습니다. 기다림이라는 게 뭡니까? 현대인은 언제나 현재로 만족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오직 미래를 향해서 기다립니다. 기다리기는 하는데 기다림에 합당한 행동은 또 없습니다. 또 그 기다림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깊은 사색도 비판도 연구도 없이 막연하게 기다립니다. 프랭클 박사님은 자기에게 많은 고민을 가지고 찾아오는 정신병 환자들에게 아주 강한 충격적 질문을 해서 그들로 하여금 자기 정신의 그 약한 점을 치료하도록 조치했다고 합니다. 지금 뭐 고민이 많아서 뭘 어쩌구 어떻구, "이래서 못 살겠습니다." 하는 사람을, 다 듣고 나서는 한마디 딱 찌르는데, "그러면 왜 아직도 자살을 하지 않았습니까?" 가만히 보니까 꼭 죽을 지경인데 왜 안 죽었냐 그 말이오. 그러면 그때 가서야 "아, 그 이유가 있지요." 이래서, 혹은 자녀들 때문에, 혹은 명예 때문에, 혹은 가정, 가문의 명예다, 혹은 한 가닥 믿는 내 신앙 때문에……, 뭐 뭔가 이유를 들기 시작한대요. 바로 거기서부터 생각을 다시 하라. 그래서 그 생의 궤도를 수정했다 하는 얘깁니다. 어떤 글에 보니깐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사람은 목표가 있고, 사랑이 있고, 꿈이 있으면 살만하다. 돈은 없어도 됩니다. 때로는 건강이 없어도 됩니다. 목표가 있고 사랑이 있고 꿈이 있으면 충분히 살만하다. 왜요? 목표가 있으면 길이 있습니다. 사랑이 있으면 친구가 있습니다. 꿈이 있으면 소망이 있습니다. 그런고로 살만한 것입니다. 문제는 여기에 있습니다. 그런데, 이 기다림이라고 하는, 이것이 두 가지로 설명이 됩니다. 근본적으로 다른 방향이 있습니다. 하나는 '희망사항'이라고 하는 기다림입니다. 막연한 바램입니다. "좀 나아지겠지, 행여 좀 나아지겠지." 하는 겁니다. 과거로부터 현재로, 현재로부터 미래로 생각하는 막연한, 아무 내용도 없는, 아무 보장도 없는, 그러한 바램이 있습니다. 이것을 '희망사항'이라고 합니다. 전 그래서 '희망'이라는 말을 좋아 안합니다. '소망'이라는 말이 좋아요. 왜냐하면 소망이라는 기다림은 약속이 있는 겁니다. 객관적 약속이 있고, 내용이 있고, 그 미래로부터 현재로 생각게 하는 그것이 바로 '소망'입니다. 그러니까 약속이 있는 바람, 약속을 받은 그러한 바램이 바로 소망입니다. 결정적 미래로부터 약속된 미래로부터 주워지는 바람, 그것이 소망이기 때문에 저는 소망을 좋아합니다. 여러분, 기다림이, 그 내용이 내 현재의 나를 변화시키고 있는 것입니다. 현실이 나를 변화시키는 것도 아니고, 과거가 나 자신을 만들어 가는 거 아닙니다. 문제는 내가 가진 꿈이요. 내가 가진 소망, 그것에 의해서 내가 변화되는 것이올시다. 미래적 존재로 만드는 것이올시다. 이런 재미있는 얘기가 있습니다. '여성은 그가 생각하는 그 사람과 닮은 아이를 낳는다.' 누구 미워하지 마세요. 그 사람 닮은 아이를 낳을 거예요. 열심히 사랑하고, 그리워하면 그 사람 닮는 아이를 낳는 답니다. 유명한 소설가 토마스 하디의 소설 중에 그런 '환상의 여인'이라는 책이 있는데 그 내용 중에는 바로 이것을 주제로 합니다. 어떤 여인이 시를 읽었는데, 그 시인을, 그 시를 쓴 시인을 사모하고, 사랑하게 됩니다, 마음속으로. 그러나 한번도 만난 적이 없어요. 뭐 아무 관계도 없어요. 그러나 마음속으로 그 시를 또 읽고, 또 읽고, 또 읽으면서 그 시인을 마음속에 그리워하게 됩니다. 아이를 낳고 보니깐 그 시인 닮은 아이를 낳아 놓았어요. 남편으로부터 오해를 받습니다. 이것이 진행되는 스토리의 내용입니다. 여러분, 누구를 사랑하십니까? 누구를 기다리십니까? 누구를 열렬히 기다리고 있습니까? 바로 그 사람을 내가 닮게 될 것입니다. 나도 모르게 나라는 존재가 그 미래적 이미지로 화해가고 있다는 것이올시다. 어떤 의미에서 사랑하는 것도 생각이고, 미워하는 것도 생각입니다. 그런 내가 생각하는, 그 생각하는 만큼에 존재가 되어진다는 걸 잊지 말아야합니다. 무엇을 생각하고 살아야하겠습니까? 그 꿈이, 그 소망이 나를 변화시키는 것이오. 무엇을 기다리며, 얼마나 기다리며, 그리고 어떻게 기다려 가야 하겠습니까? 오늘 본문에 있는 말씀은 주님의 위로를 기다린 사람의 모습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특별한 신앙입니다. 그 내용을 간단히 정리하면은 그는 물질적인 어떤 풍요로움을 기다리는 것도 아닙니다. 오히려 영적인 것을 기다렸고, 그는 자기 자신만의 영달이나 안위를, 또는 좋은 일이 있어지기를, 자기를 위해 기다린 것이 아니에요. 만 백성,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기 위하여, 만 백성을 구원하는 역사가 이루어지기 위해서 그는 우주적 구원에 그런 미래를 생각하며 기다렸습니다. 또는 내 방법대로 기다린 게 아니오. 내가 생각하는 시나리오대로 미래를 기다린 것이 아니고, 성경이 말씀하는 하나님의 뜻, 하나님의 경륜, 하나님의 길! 그의 방법대로, 그의 계시하신 말씀을 따라서 그를 기다리고 구원을 기다렸습니다. 조금 어려운 신학적 말씀을 드려 죄송합니다마는, 이런 기다림을 이렇게 신학적으로 정리합니다. 'The Messiahnic Age'를 기다린 것이 아니고, 'The Messiah'를 기다린 것이다. '메시아의 세대'를 기다린 것이 아니라, 그 '메시아'를 기다린 것이다. 이렇게 정리됩니다. 이 무슨 말씀이고 하니, 일반적으로 메시아의 시대라 함은 전쟁도 없고, 평화롭고, 빼앗기고 빼앗는 것도 없고, 평등하고, 번영하고, 자유롭고, 모두가 평안하게 사는 어떤 그런 유토피아적인, 바로 그런 세대, 그런 세상 오기를 기다리는 거요. 이게 바로 '메시아의 세대를 기다리는 신앙'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생각하는 이데올로기라고 하는 것, 많은 철학들이 전부 엄격하게 말하면 '메시아니즘'입니다, '메시아니즘'. 그 좋은 세상을 기다리고, 좋은 세상을 만들어 보겠다고 저마다 외쳐봤지요. 노력 해봤지, 혁명도 해봤지, 싸워도 봤지……. 그러나 그 세대는 오기는커녕 점점 멀어지기만 합니다. 여러분, 메시아의 세대, 좋은 세상, 그것을 기다리는 믿음이 아니고, 오늘 본문에 나타난 내용은 그 메시아를 기다리는, 오로지 메시아를 기다렸어요. 그래서 다시 한 번 신학적으로 정리하면은 'A Christ'냐, 'The Christ'냐 하는 말을 합니다. '한 그리스도'냐, '그 그리스도'냐. 오늘 본문에 나타난 이 말씀은 '그 그리스도', '그 메시아'를 기다린 것이죠. 여기에 대단히 중요한 의미가 있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의 '메시아 사상'은 대단합니다. '메시아 대망사상' 대단합니다. 예수께서 오심도 바로 그 '메시아 대망사상'의 맥락에서 설명이 되고, 또 예수께서 십자가를 지시게 되는 사건도, 또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는 사건도 알고 보면, 바로 이 '메시아 사상'의 차이에 있는 것입니다. 어떻게 이해하고 있느냐에 따라서 신앙 내용이 결정됩니다. 그런데 문제는 여기에 있습니다. 첫째는 무한히 그저 막연하게 기다리기만 하는 그런 '추상적 메시아니즘'이 있습니다. 그저 좋은 세상 올 거다. 막연하게 무한히 미래적, 그러한 대망 관련이 있단 말이오. 여러분, 이것이 무슨 문젭니다. 아무 것도 없는데, 아무 약속도 없는데 그냥 기다리고, "좋은 때가 올 거다. 그저 기다려봐." 이것처럼 무서운 사상이 없습니다. 그러나 성경이 말씀하는 것은 그런 게 아닙니다. 마치 무지개를 쳐다보는 것처럼 무한히 미래적인 것이 아니라 약속을 믿었으면 성취를 믿어야한다는 거죠. 약속과 성취가 함께 있어서, 비로소 바른 대망신앙이 되는 것이올시다. 여러분, 우리의 이 소망의 지계표를 자꾸 옮겨서는 안됩니다. 제가 아는 장로님 한 분이 계시는데 연세가 높으세요. 한 칠십 훨씬 넘은 그런 분이, 늘 날 보고하는 말이 "나는 한가지 소원이 있습니다." "그게, 뭔데요?" "내 딸이 하나 있는데, 큰 딸이 있는데 이미 사십이 넘었는데 아직 시집을 못 갔어요." 뭐 본인은 뭐 생각 없이 자기 나름대로 생을 즐기고 살아가고 있지만은 부모의 마음을 그렇지 않아요. 저게 빨리 시집을 가야겠는데……, 싶어요. 그래서는 "저 딸이 시집가는 걸 보고 죽으면은 한이 없겠다"고 입버릇처럼 늘 그러시더라구요. "저거 딸을 시집가는 것을 보고 죽으면 한이 없겠다고" 그런데 고맙게도 옛날에 대학 다닐 때 연애하던 총각인데, 또 장가 안 가고 늙어 가는 게 하나 있더라구요. 그래서 서로 어떻게 오랜만에 만나고, 만나고 해서 "우리 다 때늦었는데, 우리끼리 삽시다." 뭐 이렇게 된 거예요. 어쨌든 그렇게 많이 가까웠던 것 같지는 않은데 결혼이 됐어요. 제가 결혼 주례를 했습니다. 주례하고 같이 그 장로님하고 차를 타고 가면서 "장로님, 내가 하나 물어봅시다. 그 딸 시집만 보내면 소원이 없겠다고 했는데, 이제 딸 시집갔으니 아무 소원도 없겠고만요?" 했더니, 장로님 빙그레 웃으시면서 "저게 뭘 하나 낳을 수 있을까?" 그래서 "또 뭘 하나 나가지고 아주 시집 장가까지 보내지 그래요?" 그냥 그러고 말았습니다마는, 보세요. 여러분 소원이라는 어떻게 됩니까? 어떤 때 우리 부모들 보면은 "저 내 아들, 저거, 저 대학입학 하는 거 보고 죽어도 한이 없겠다." 그래요. 대학입학하고 나니까 또, 이젠 또 "졸업하는 것보고……." 졸업하고 나니깐 "취직하는 것보고……." "장례식까지 보고 그래요." 우리 인간들이 소원이라는 게 자꾸만 옮겨가는 거예요. "내가 하나님께 구한 것이 있는데, 옳지, 하나님이 이것을 내게 주셨다. 나는 다 이루었다. 나는 아무 소원도 없다." 좀 그런 마음으로 살았으면 신바람 나겠는데……, 뭐 그렇게 욕심이 많은지. 저도 모르는 욕심을 그냥 따라가고 있는 거예요. 약속을 믿는 자는 성취를 믿어야 되는 거예요. 또 하나는 이 기다리는 마음이 있다면, 이에 따르는 행동이 있어야 됩니다. 자, 기도하고 있습니까? 그 기도의 응답을 받을 준비를 해야지요. 경건한 생활로 거룩함으로, 내일을 기다리는 자의 마땅한 준비가 있어야지요. 좋은 날은 기다리면서 아무 준비가 없다면, 이 얼마나 어리석은 일입니까? 성경에 예수님께서 친히 비유로 하신 말씀을 보세요. 아시는 대로 열 처녀 비유를 보니깐 신랑을 기다린다. 신랑을 기다리면은 신랑을 맞을 준비를 해야 될 것 아닙니까? 준비는 없이 기다리는, 이게 바로 어리석은 처녀죠. 안 그렇습니까? 아 시집갈 날을 기다린다면, 그 신랑과 살 그때를 생각하며 차곡차곡 준비해야 될 것 아닙니까? 자 다가오는 미래를 위해서 여러분, 죽음을 준비하셨습니까? 주님 만날 준비를 하셨습니까? 영원한 하늘나라에서의 그 영광을 누릴 준비를 했습니까? 어차피 이 세상은 떠나야 돼요. 이건 어차피 멀어질 것이고, 나와 상관없는 거예요. 다가오는 미래를 약속의 땅, 약속의 시간을 위해서 여러분은 무엇을 준비하고 계십니까? 또한, 초대교회 사람들은 그 날을 준비하느라고, 그 날을 바라보고 있었기에 오늘의 어떤 고난도 개의치 않고, 순교의 죽음도 아주 넉넉하게 기쁨으로 감수할 수 있었던 거 아니겠습니까? 또 한 가지는 이 성취 문제에 대하여 이것을 현실화하는 신앙이 있어야 합니다. 다시 말해서 주님을 기다렸으면, 이제는 만나야지요. 만났으면 영접해야지요. 나는 이 성경, 예수님 나심을 중심해서 되어지는 사건 속에 늘 마음에 걸리는 게 있어요. 동방박사가 예물을 준비해 가지고 와서, 아 헤롯 궁전을 찾아와서 말하지 않습니까? "이스라엘 나라에 오신 메시아가 어디서 나셨느뇨?" 예루살렘이 소동했다구요. 온 소동을 했어요. 이 때문에 소동은 해놓고, "베들레헴에서 낳았을 겁니다." 하고 지시하고는 박사들은 그리로 갔는데, 예루살렘 사람들이 그리로 갔다는 얘기가 없어요. 떠들기만 하고, 소란만 하고, 자기들은 안 갔어요. 이게 문제란 말입니다. 주님을 영접하지 않았습니다. 바리새 교인, 서기관, 제사장……. 당시에 종교 지도자들은 그렇게도 간절하게 메시아를 기다렸고, 가르쳤지만 진작 예수님께서 오실 때는 영접하지 않았어요. 성경에 아주 시적이면서 우리 맘을 아프게 하는 부분이 뭡니까? 나실 곳이 없어서, 사관에 용납할 곳이 없어 말구유에 나셨다는 얘깁니다. 주님이 오실 곳이 없어요. 아무도 영접할 수가 없어서 말구유, 외양간에서 나셔야 했다는 그 사정. 그때나 오늘이나 마찬가지입니다. 그뿐 아니라, 헤롯은 예수님의 나심을 아는 순간 벌써 죽이려고 듭니다. 가야바도 그를 죽입니다. 왜? 자기의 보좌를 양보하기가 싫어서. 자기 부정이 어려워서 익숙한 곳으로부터 벗어나질 못해요. 고정관념에서 벗어나질 못해요. 자기 왕좌를 예수님께 드리지 못했어요. 그런고로 그들은 예수를 영접하지 못하고,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아버립니다. 이 얼마나 마음 아픈 얘기입니까? 당시 사람들은 그렇게도 기다리는 것 같았는데, 오신 예수를 영접하지 못합니다. 그런고로 우리는 소망을 현실화 할 수 있어야 됩니다. 믿음을 구체화 해야됩니다. 약속 안에서 오늘 현실을 살아가야 합니다. 성취된 현실을 살아가야 합니다. 오늘 시므온 보세요. 아기 예수를 품에 안고 "내 눈이 주의 구원을 보았습니다." 이 시간에 그에게 주어진 게 뭡니까? 나이 많은 노인입니다. 빵이 주워집니까, 옷이 주워집니까? 그러나 그는 이것으로 만족합니다. 기다리다가 만나고, 그는 마침내 이렇게 고백합니다. "종을 평안히 놓아주시는도다. 이제는 기쁜 마음으로 조용히 세상을 떠나겠습니다." 그런 내용입니다. 만족함입니다. 주님을 만나고, 주님을 영접한 그것으로 충만합니다. 더 바랄 것이 없습니다. 앞에 주님을 만날 것입니다. 지금 우리는 주님을 이미 영접했습니다. 주님을 영접한, 메시아를 영접한 그 감격 하나만으로 충분합니다. 왜? 오늘 내가 사는 모든 현실과 생활, 그 자체가 약속의 성취의 일환이기 때문입니다. 그 크신 은혜 안에서 가장 뜻 있고, 가장 만족한 주님을 영접한 자의 충만함이 있는 성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회복케 하시는 메시아 이사야 61:1-9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하나님의 백성으로 선택을 하셨습니다. 애굽에서 종살이하던 그 사람들을 인도해 내셨습니다. 그리고는 이미 그 조상들에게 약속하셨던 젖과 꿀이 흐르는 땅, 풍요한 가나안 땅에 그들을 인도해 들이셨습니다. 그 땅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번영과 풍요를 누렸습니다. 그 조상들 중에 그만큼 풍요하며 번영하게 살았던 사람들이 없었습니다. 그 곳에서 그들은 가난과 배고픔을 다 벗어버리게 되었고 넉넉하고 풍성한 삶을 살수가 있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께로부터 너무나 큰 은혜와 축복을 받았던 것이지요. 그러면 마땅히 하나님 앞에, 하나님을 섬기고 하나님의 명령에 철저히 순종을 해야 마땅한 일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하나님의 은혜를 받으면서도 하나님을 떠났습니다. 하나님의 계명과 윤리를 무시했습니다. 하나님을 배반하고 반역하고 불순종하고, 그래서 그들에게 주어진 풍요와 번영을 가지고 타락하는 길에 사용을 했습니다. 그들은 이웃나라의 신들을 섬겼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풍년을 주셨는데 이웃나라의 신들이 풍년을 줄 것으로 믿고 섬겼습니다. 이웃나라 신들에게 예배드리는 의식이 더 세련되고 품위 있어 보여서 그것을 따라갔습니다. 이웃나라 신들이 더 능력이 있어 보였기 때문에 그 이웃나라 신들을 섬겼습니다. 별도 섬겼구요, 달도 섬기고, 강도 섬기고, 산도 섬기고, 점도 치고, 자기 자식들을 불 가운데로 지나가게 하는 참혹한 예배의식도 가지고, 이렇게 하나님을 완전히 떠났습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완전히 깨어졌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물질적인 풍요를 주셨는데 그 물질적인 풍요를 가지고 그들은 사치와 향락에 빠져갔습니다. 물질적인 풍요가 사람을 망친 겁니다. 물질적으로는 풍요했지만 사람들은 타락하고 정신적으로 황폐하고, 윤리는 무너져갔습니다. 점점 그들은 험악하고 살벌한 삶을 살아갔습니다. 따뜻하고 질서 있는 가정, 한 가족 식구처럼 서로 돌보던 이웃공동체가 파괴되었습니다. 남편은 아내를 거침없이 내버렸고 이웃은 더불어 함께 살아갈 사람들이 아니라 경쟁하고 먹고 먹히는 원수 같은 사이가 되어버렸습니다. 가난에서 배고픔에서 벗어났건만 너무 많이 가지고자 하는 마음을 가지고 싸우고 물고 뜯는 그런 생활이었습니다. 가난한 자는 더욱 더 억눌렸고, 고아와 과부는, 나그네는 동정의 대상이 아니라 착취의 대상이 되었습니다. 사회가 밑바닥에서부터 무너져 버린 것이지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의 죄에 대해서 심판하셨습니다. 외적이 침략해 들어왔습니다. 예루살렘성과 성전이 다 파괴되었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의 민족적인 자랑, 신앙적인 자랑인 예루살렘 성이 다 파괴되어버렸습니다.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약속의 땅,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은 외적의 약탈과 방화로 인해서 황폐한 땅이 되어버리고 말았습니다. 나라는 망했고, 그 나라의 사람들은 포로로 잡혀갔습니다. 선택된 백성, 하나님의 백성인데 외국에 잡혀가서 압제와 멸시를 당했고, 이방 모든 나라와 백성들이 그들을 손가락질하고 멸시와 조롱거리, 웃음거리가 되는 그런 수치를 겪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택한 백성과 그 나라는 완전히 멸망해 버렸습니다. 이 세상 속에서 그 이름이 사라져버렸습니다. 모두 끝났습니다. 하나님께서 택한 백성이라도 하나님을 떠난 백성은 망한다는 사실을 성경은 장황하게 우리에게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그렇게 해서 오랜 시간이 지났습니다. 아무도 이스라엘이라는 나라, 유대라는 사람들, 이들을 기억하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세월이 흘러가면서 잊혀져버린 나라와 사람들이 되고 만 것이지요.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 백성을 잊어버리지 않으셨습니다. 아직도 사랑하셨습니다. 그들이 하나님을 떠났을 때, 하나님께서 진노하시고 그들을 심판하시기는 했지만, 그러나 그것은 그들을 완전히 멸망시키려는 계획이 아니라 그런 나라가 망하고 포로가 되고 하는 과정을 통해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다시 돌아오게 하고 회개하게 하고 구원하기 위한 계획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메시아를 보내셨습니다. 오늘 본문말씀 1절에는 메시아가 그들에게 가셨을 때에, 여호와의 신이 임하셨다고 말씀합니다. 주 여호와 신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여호와께서 내게 기름을 부으셨다고 하고 있습니다. 메시아, 그리스도 이 말의 뜻은 기름 부은 자라고 여러 번 말씀드린 적이 있습니다. 이 본문 말씀은 기름부음 받았다는 것과 여호와의 신이 임하셨다라는 것이 같은 뜻임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사람을 택하시고 하나님의 일을 하게 하실 때에는 항상 하나님의 신을 부어주십니다. 우리 신약성경에서 사용하는 말로 하면, 성령께서 강림하시고 성령 충만하게 되는 것이지요. 주의 일을 하는데 가장 필수적인 조건, 꼭 갖춰야하는 자격이 있다면, 그것은 성령 충만을 받는 것입니다. 삼손같이 엄청난 힘을 가진 사람도 그 힘을 사용할 때에 반드시 따라오는 말이 있었는데, 여호와의 신이 그에게 임하셨다, 감동했다고 말합니다. 사울 왕과 다윗 왕에게도 전쟁에서 승리할 때, 나라를 다스릴 때, 여호와의 신이 그에게 감동했다고 말씀합니다. 선지자들도 제사장들도 주의 일을 감당할 때에는 하나님의 신에 감동되어서 일을 했습니다. 우리 주님 예수님도 사역을 시작하실 때에 여호와의 신이 그에게 임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승천하실 때에 제자들에게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땅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래서 오순절 날, 약속하신 대로 성령이 강림했습니다. 사도들과 초대교회 온 성도들이 성령 충만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힘차게 능력 있게 담대하게 주의 일을 한 것이지요. 주의 일을 하고자 하는 사람은 성령 충만 받는 일이 필수적인 것입니다. 꼭 갖추어야 합니다. 주의 일을 하는데 남자냐 여자냐, 학벌이 어떠냐, 신앙연령이 얼마냐 하는 것은 중요한 문제가 아닙니다. 그것은 자격요건이 아닙니다. 가장 중요한 자격요건이 있다면 그것은 성령 충만 받는 것입니다. 자기 힘으로, 자기의 능력으로 주의 일을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능력으로, 그 하나님의 능력에 철저히 의존하고 순종할 때에만 제대로 주의 일이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들 가운데 교사라든지, 성가대원이라든지, 구역에서 일을 보는 분이라든지, 혹은 식당이나 교통안내부원으로 일을 하거나, 또는 교회 안에서나 교회 밖에서나 주의 일을 하는 분들은 모두 성령 주시기를 간구하시기 바랍니다. 또, 오늘 본문 말씀을 보면, 여호와의 신의 기름 부은 받은 메시아께서 오셔서 가난한 자에게 아름다운 소식을 전파하신다는 말씀을 볼 수가 있습니다. 기쁜 소식, 구원의 복된 소식, 복음을 전파하게 된 것이지요. 메시아께서 오셔서 여호와의 은혜의 해를 선포했습니다. 하나님의 신원의 해를 선포했습니다. 메시아는 두 가지 기능을 가지고 있습니다. 하나는 심판자의 기능을 가지고 있구요, 또 하나는 구원자의 기능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 분을 믿고 영접해 받아들이는 사람에게는 구원자로서 역사를 하시고, 하나님을 믿지 않고 하나님의 명령에 불순종하는 사람에게는 심판자로 역사 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메시아가 오실 때, 그가 전하는 소식이 믿는 자에게는 은혜의 해로 받아들여지는 것이고 믿지 않는 자에게는 신원의 해, 심판의 날로 받아들여지게 되는 것입니다. 이번 주에 우리는 성탄주간을 맞게 됩니다. 우리 주님이 오시는 날이지요. 이 우리 주님이 오시는 날, 믿는 여러분들, 우리 예수님을 주님으로 영접하고, 그리스도를 나의 주님으로 받아들이고, 그 그리스도와 함께 동행하는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인데, 믿는 자들에게는 은혜의 날이 되는 것입니다. 이 성탄절이 여러분들에게 은혜의 날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메시아가 오셔서 구원의 소식, 은혜의 소식을 전파하실 때에 하나님의 백성들은 곤고한 모든 것에서부터 일어서고 회복을 하게 되는 것이지요. 오늘 본문말씀에는 메시아가 오셔서 회복시키시는 세 가지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제일 첫 번째는 사람들을 회복시키십니다. 가난한 자, 억눌린 자, 마음이 상한 자, 포로 된 자, 감옥에 갇힌 자, 슬픈 자, 이 모든 사람들이 기쁜 소식을 듣고 격려를 받고 치유를 받고 자유를 얻게 되고, 위로를 받게 되고 그들이 회복된다는 그런 말씀이지요. 절망에 빠져 있는 사람들, 전혀 희망이 없는 사람들, 회복이 불가능하게 여겨지는 사람들이, 희망의 빛을 보게되는 것이고, 가능성을 보게 되는 것이고, 위로와 격려를 받게 되다는 말씀입니다. 본문 3절 말씀에는 특별히 깊은 슬픔과 근심 가운데 빠져 있는 사람들에게 메시아가 오셔서 그들을 일으켜 세워서, 위로하고 격려하는 극적인 장면을 묘사하고 있습니다. 슬픔에 빠졌어요, 절망에 빠졌습니다. 넘어져 있습니다. 처참한 상황에 있습니다. 메시아께서 그들에게 오셔서 어루만지시고, 위로하시고, 희망을 불어넣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를 깨끗하게 목욕시키고 단장해서, 아름다운 옷을 입히고 관을 씌워서 그들의 얼굴에 기쁨이 가득하게 하고, 그 입에서 찬송이 넘쳐나게 만드신 다는 것입니다. 나라가 망해서 남의 나라에 포로로 잡혀갔고, 나라가 다시 일어선다든지, 우리가 다시 고향 땅으로 돌아간다든지 하는 희망이 전혀 없는 사람들에게 무슨 기쁨이 있겠습니까? 무슨 평안이 있겠습니까? 절망적인 사람들, 낙심하고 좌절하고 슬픔이 가득 차고 근심이 가득한 사람들, 그 사람들에게 나라를 다시 세우고, 다시 고향으로 돌아오게 하고 그들에게 기쁨을 준다는 회복의 말씀을 오늘 이 본문 말씀 가운데 볼 수가 있습니다. 메시아가 오셔서 은혜의 해를 선포하면, 절망가운데 있는 사람들, 슬픔과 근심가운데 있는 사람들이 기쁨으로 회복된다는 역사입니다. 경제적인 형편이 어려워지다 보니까 가정이 깨지는 경우가 많이 있다는 것을 우리가 봅니다. 신문이나 뉴스 같은 것을 보아도 많이 있습니다. 그런 경우를 보면, 참 안타깝지요. 얼마 전에도 TV에 자주 나오는 이야기가 또 나왔습니다. 부모들은 다 소식을 끊어버리고 아이들은 고아원에 갖다 맡기고 하는 이야기였습니다. 그 아이들의 일기 내용을 보니까, 엄마는 벌써 오래 전에 아이들을 떠나갔고, 아빠도 얼마 전에 자기들을 고아원에 맡기고는 돈벌러 간다면서 소식을 끊었습니다. 그 아이에게 인터뷰를 하는 거예요. 아빠 어디 가셨느냐, 아빠가 자주 연락하느냐, 뭐 연락이 안 되는 거지요. 아빠하고 자주 만나기는 하느냐고 물으니까 '아빠가 3년 있으면 데리러 온다고 했습니다.' 엄마는 얼마나 자주 만나느냐 에는 '6년이나 한 9년 되면 만날 겁니다.'라고 대답합니다. 뭐 아이들이 3년, 6년, 9년이 어느 정도 기간이고 자기들과 어떻게 연관되는 지 알기나 하겠어요? 그저 어른얘기 옆에서 듣고, 그런가보다 하고 하는 얘긴데, 사실은 암울한, 희망이 없는 말임이 분명하지요. 천연덕스럽게 얘기를 잘하더라구요, 그러나 그 얼굴을 볼 때, 그 눈빛을 볼 때, 그 속에 슬픔과 불안이 가득 차 있는 것을 발견할 수가 있었습니다. 너무나 안타까운 일이지요. 너무나 가슴아픈 일입니다. 저는 그것을 보면서 만약에 저 엄마와 아빠가 일찍부터 예수그리스도를 영접하고 그들의 생활태도를 바꿨다면, 저렇게는 안됐을 텐데, 예수를 만나면, 저 가정 속에 예수를 모시면 저 아이들의 얼굴 속에, 눈빛 속에 있는 어두움과 불안을 없앨 수 있었을 텐데, 기쁨과 평안을 누릴 수 있었을 텐데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시면, 슬픔가운데, 절망가운데 있던 사람들이 위로와 격려를 받게되는 것입니다. 새롭게 세움을 받게되는 것입니다. 메시아를 만나게 되면 하나님의 형상, 인간본래의 모습을 회복할 수가 있게 되는 것입니다. 메시아가 다시 오시면 또 황폐하였던 땅이 회복되고 무너진 성과 성전을 다시 수축하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 4절 말씀을 보면, 약속으로 받았던 땅이 회복되고, 무너진 성전을 다시 수축하게 되고, 본래의 기업을 다시 회복된다는 말씀을 합니다. 나라가 다 망했어요, 다 사람들이 떠나갔습니다. 그러나 메시아가 오시면, 그들이 약속 받았던 그 땅, 그 기업을 다시 회복하게 될 것이고, 성전을 다시 쌓게 될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다시 말하면, 그들의 기업이 회복되고 그들의 사회가 복원되고 그들의 공동체가 회복된다는 것이지요. 황폐된 들, 무너진 성, 이 모든 것들이 회복되면서 사람들이 다시 돌아오게 되고 하나님의 선택된 백성들이 그 곳에서 하나님을 섬기며 다시 아름다운 공통체를 만들어나가게 될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우리 사회 속에 암울하고 어두운 이야기들을 많이 듣게 됩니다만, 메시아가 우리 가운데 오면 우리 사회가 회복되고 우리 공동체가 회복이 될 줄로 믿습니다. 또 세 번째로 회복이 되는 것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본래의 지위와 직분입니다. 6절 이하의 많은 말씀을 보면, '너희들은 여호와의 제사장이라 일컬음을 얻을 것이라, 사람들이 너희를 우리 하나님의 봉사자라고 할 것이다'라고 말씀합니다. 여호와의 제사장, 하나님의 봉사자라는 것이지요. 본래 이스라엘 사람들이 그랬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들을 택하셔서 이방 모든 사람들로부터 제사장이고 봉사자로 세운 겁니다. 그런데 하나님을 떠나고 제 구실을 못하니까 나라가 망하고 그들이 포로로 잡혀가서, 사람들로부터 존경받고 존중받는 제사장과 봉사자가 아니라 손가락질을 당하고 멸시를 당하는 그런 신분으로 전락하고 만 것이지요. 하층 백성들, 3류 백성들이 되어 버리고 말았던 것입니다. 그런데 메시아가 오셔서 은혜의 해를 선포하게 되면, 그 신분이 회복되어 하나님의 제사장과 봉사자가 되리라고 말씀합니다. 이방사람들에게 존중히 여김을 받고, 높임을 받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방사람들에게 여호와께 복 받은 자손이라고 인정하고 칭찬하게 될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지위와 신분과 직분이 완전히 회복된다는 것입니다. 우리나라의 경제가 성장하면서 우리나라 교회도 같이 성장을 했습니다. 참 귀한 일이었습니다. 우리나라도 강한 나라로 생각이 되었고, 우리 한국교회도 세계교회 속에서 강한 교회로 생각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가지고 있는 경제 성장이 사실은 그 속에서 부정과 부패로 얼룩져 있다는 사실을 뒤늦게 알게 되었습니다. 그리고는 속절없이 무너져 간 것이지요. 그런데 참으로 안타깝게도 사회가 부정과 부패로 썩어져 가고 있을 때에, 교회는 성결을 지키고 거룩한 공동체로 서 있지 못했습니다. 세상과 똑같이 물질로 세속으로 얼룩지고, 세상사람들이 부정 부패 할 때에 성도들도 똑같이 부정 부패하는 삶을 살았습니다. 그래서 많은 성도들이, 그리스도인들이 부정과 부패에 연루되어서 재판을 받고 감옥에 들어가고 하는 모습들을 우리가 TV나 신문에서 볼 수 있게 되었습니다. 교회와 성도들이 세상 속에서 조롱거리와 웃음거리가 되었던 것이지요. 하나님 제사장이고 하나님의 봉사자로 세상 속에서 존중을 받아야 할 성도와 교회가 웃음거리와 조롱거리가 되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메시아가 오시면, 그분을 영접해 드리면, 성도와 교회가 세상 속에서 여호와의 제사장으로 하나님의 봉사자로 그 직분과 신분을 회복하게 된다는 말씀입니다. 여러분, 우리 성도들, 우리 교회는 세상 속에서 여호와의 제사장이요, 하나님의 봉사자인 그 직분을 회복해서 나타내야만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가진 삶은 이런 것이다, 하나님을 섬기는 것은 이런 것이다, 하나님의 뜻대로 바른 삶을 사는 것은 이런 것이라는 것을 세상 사람들에게 가르치고 보여주어야 하는 사람들인 것입니다. 여호와의 제사장, 하나님의 봉사자인 그 직분을 회복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세상 사람들로부터 존중을 받고, 저 사람들은 여호와 하나님께 복 받은 자손이라고 인정받고 칭찬 받는 그런 성도와 교회가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메시아를 영접해 모셔드릴 때 그렇게 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들 메시아를 영접해 모셔드림으로 우리 세상 속에서 여호와의 제사장이고 하나님의 봉사자인 직분을 회복하게 되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의 백성이 죄로 인해서 진노를 받아 멸망을 당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그들을 잊어버리지 아니하시고 그 인간을 구원하시려고 메시아를 보내셨습니다. 메시아가 이 땅에 오셔서 은혜의 해를 전파했고, 그래서 절망하는 인간, 황폐된 땅, 떨어진 직분을 전부 회복케 하셨습니다. 그래서 슬픔을 기쁨으로 변하게 하시고 근심을 평안으로 변하게 하고 찬송으로 변하게 하는 놀라운 회복의 역사가 나타나게 하신 것이지요. 여러분 이 성탄절에 메시아를 모셔들이시기를 바랍니다. 여러분 개인에 있어서, 여러분의 가정에 있어서, 또 우리 교회에 있어서, 여러분들의 직장이나 이웃이나 사회 속에서 메시아를 모셔들임으로 인해서 메시아가 여러분이 있는 곳곳마다 은혜의 해를 선포하는 역사가 나타나시기를 바랍니다. 은혜의 해를 선포 받은 백성들이 또 나아가서 세상 속에서 은혜를 선포하고 여호와의 제사장으로서 하나님의 봉사자로서 그 직분을 감당함으로 인해서 우리 가정이, 우리교회가 우리가 속한 사회 속에 은혜가 넘쳐나고, 하나님께서 회복케 하시는 은혜가 넘쳐나시기를 바랍니다. <주제 설교> 1. 성탄절(1) 눈 높이 맞추기(마 1:18-25) 2. 성탄절(2) 참 예배(마 2:1-12) 3. 성탄절(3) 최선으로 이끄시는 하나님(마 2:13-23) 4. 성탄절(4) 빛이신 예수님(요 1:1-14) 성탄절(1) 눈 높이 맞추기 마태복음 1:18-25 성탄절은 어떤 날입니까? 하나님께서 인간의 육신을 입으신 성육신의 날입니다. 성육신이란 무엇입니까? 1. 사랑하는 대상처럼 되는 것이 성육신입니다. 성탄절은 인간을 사랑하기에 하나님께서 사랑하는 대상인 인간처럼 되신 날이 바로 성탄절입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위대한 사랑은 무엇입니까? 사랑하는 대상처럼 되는 것입니다. 상대방의 입장과 처지를 이해하고 그 입장이 되어 행하는 사람이 사랑이 많은 사람입니다. 어떤 집사님은 자녀가 원하는 대학교에 붙었는데 좋아하는 내색을 전혀 보이지 않습니다. "무슨 기분 나쁜 일이 있나... 어디서 싸웠나..." 궁금했는데 알고 보니 다른 집사님의 자녀가 좋은 결과를 얻지 못했기 때문에 그 집사님의 입장을 생각하고 좋아하지 않기로 다짐한 것입니다. 얼마나 훌륭한 집사님입니까? 우리 교회에는 이처럼 남의 심정을 헤아릴 줄 아는 성육신의 원리를 아는 집사님이 많아야 할 것입니다. 그래야 우리가 추구하는 건강한 교회가 될 수 있습니다. 2. 성육신이란 눈 높이를 맞추는 것입니다. 눈 높이를 맞출 줄 아는 것은 정말로 훌륭한 일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쉽지 않은 일입니다. 귀찮기도 합니다. 그래서 성육신의 사랑에는 수고와 땀이 필요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눈 높이를 맞추어야 한다는 것은 알지만 그것이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닙니다. 수십 년 동안 해 왔던 언어생활을 어떻게 쉽게 바꾸겠습니까? 그래서 시간이 필요하고 노력이 필요하고 특히 사랑하는 마음이 필요합니다. 저도 중 고등부 전도사와 주일학교 전도사를 다 해봤기 때문에 눈 높이를 맞춘다는 것이 정말 어려운 일이라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아이들 수준의 기도, 말씀, 행동을 하는 것이 어른에게 설교하는 것보다 어렵습니다. 그러나 그처럼 눈 높이를 맞출 줄 알아야 훌륭한 선생입니다. 밤에 아이들에게 성경이야기 해 주면서 재울 때 아내가 아이의 수준에 맞춰 기도하는 것을 보면 그 기도가 그렇게 감동을 줍니다. 또한 주일학교 선생님들의 행동을 보면 완전히 어린 아이 위주로 모든 언행을 배려하는 모습 속에서 감동이 됩니다. 그렇게 눈 높이를 맞추면 아이들이 그 사랑하는 마음을 알게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아이를 정말 위한다면 아이의 언어를 이해하고 아이처럼 되어주어야 합니다. 하나님이 인간 예수님으로 오신 것은 아이를 정말 위하기에 아이처럼 되어준 사건입니다. 즉 하나님이 인간에게 눈 높이를 맞추어준 사건입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예수 그리스도께서 성육신하실 때의 모습이 간략히 그려져 있습니다. 오늘 본문이 우리에게 주는 교훈 몇 가지를 살펴볼까요? 첫째, 타인의 잘못을 감싸주는 모습을 교훈 받게 됩니다. 본문 18절을 보십시오. "예수 그리스도의 나심은 이러하니라 그 모친 마리아가 요셉과 정혼하고 동거하기 전에 성령으로 잉태된 것이 나타났더니..." 요셉의 씨로 잉태된 것이 아니라 성령으로 잉태되었다고 합니다. 이 말은 결국 예수님은 죄가 없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처녀의 잉태는 당시로서는 용납될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약혼자 요셉이 얼마나 괴로웠겠습니까? 그런데 요셉이 어떻게 했습니까? 19절을 보십시오. "그 남편 요셉은 의로운 사람이라 저를 드러내지 아니하고 가만히 끊고자 하여..." 남편 요셉은 의로운 사람인데 어떻게 했습니까? 그는 마리아의 잘못을 드러내지 않았습니다. 많은 경우에 '의로운 사람'은 불의를 지적하고 정의를 외쳐야만 한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러나 먼저 사랑하고 그 다음에 바른 말을 하는 것이 좋습니다. 사랑이 없는 바른 말은 먼저 남을 무너뜨리고, 결국 자기 자신을 무너뜨립니다. 그래서 그 공동체를 무너뜨립니다. 진정 사랑을 하는 자만이 바른 말을 해야 합니다. 둘째, 어려움을 묵묵히 극복하면 하나님이 축복을 내리심을 교훈 받습니다. 요셉은 마리아의 잉태를 드러내지 않고 가만히 끊고자했습니다. 배우자의 실수를 조용히 처리하려는 태도가 보입니다. 헤어지더라도 상대의 파멸을 원치 않기에 소리 없이 조용히 일을 처리하려는 태도가 얼마나 본 받을만한 태도입니까? 아마 요셉은 정말 마리아를 사랑했던 것 같습니다. 또한 본문은 요셉의 침착하고 신중한 모습, 기도하는 모습을 엿보게 합니다. 여러분! 내 생각으로 섣불리 행동하지 않아야 합니다. 한 번 더 기도하고 한 번 더 생각해야 합니다. 어떤 이해할 수 없는 사건도 어떤 의미가 있을 수 있다고 생각해야 합니다. 여러분! 어떤 일에 대해 너무 속단하지 마십시오. 인생사에 일어나는 그 수많은 일들을, 이해할 수 없는 일들을 어찌 다 알 수 있습니까? 하나님이 마음껏 일을 처리하도록 기회를 드려야 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우리의 계획보다 더 놀라운 계획을 우리가 이해할 수 없는 사건을 통해서도 이루시기 때문입니다. 결국 주의 사자가 나타나 실상을 알려주고 낳을 아들의 이름까지 지어줍니다. 본문 20절과 21절을 보십시오. "이 일을 생각할 때에 주의 사자가 현몽하여 가로되 다윗의 자손 요셉아 네 아내 마리아 데려오기를 무서워 말라 저에게 잉태된 자는 성령으로 된 것이라 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 하니라." 우리가 어려움을 묵묵히 처리하려고 하면 하나님께서는 음성과 마음의 확신을 주시고, 길을 열어주시고, 어려움의 순간에서 구원의 역사를 베푸실 것입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은혜가 여러분들에게 넘쳐 나기를 바랍니다. 성탄절(2) 참 예배 마태복음 2:1-12 오늘 본문은 헤롯왕 때의 동방박사에 관한 이야기가 소개되어 있습니다. 이 본문은 우리에게 여러 가지 교훈을 줍니다. 1. 하나님의 부르심에 응답하는 삶의 중요성 2장 1절을 보십시오. "헤롯 왕 때에 예수께서 유대 베들레헴에서 나시매..." 예수님은 헤롯왕 때 태어났습니다. 이 사실은 상당히 중요한 의미를 가집니다. 헤롯은 에돔 사람 안티파텔의 아들이었습니다. 그는 로마 황제에 아부하여 그에 의해서 주전 47년에 유대 총독으로 임명되었고, 주전 40년에 유대지역 분봉왕으로 임명되어 주후 4년까지 권좌에 있었습니다. 그는 헤롯 대성전을 지어 명성을 날렸고, 일방적 폭정을 통해 경제적으로는 어느 정도 성과를 올렸습니다. 굶주린 백성을 위해 세금을 감면해 주고, 자기의 금접시를 녹여 식량을 사들여 백성을 먹이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경제 외적인 면에서 그는 연산군 이상으로 못된 모습을 보였습니다. 자기의 왕좌를 지키려고 자기 아내와 장모를 죽이고, 장남 이외에 두 아들을 죽였고, 근친상간을 하기도 했습니다. 그는 죽을 때 예루살렘에서 가장 존경받는 한 사람을 감옥에 가두고 자기가 죽는 시점에 같이 죽이라는 유언을 남겼습니다. 그 이유는 자기가 죽으면 아무도 눈물을 흘리지 않을 테니까 그 위인을 죽임으로 눈물을 흘리게 하려고 한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 헤롯이 통치하는 어두운 시대에 태어났습니다. 그 사실은 시대가 어둡다고 시대를 탓하지 말아야 함을 교훈합니다. 내가 왜 이런 환경에서 태어나고, 이런 환경에서 지내느냐고 말하지 마십시오. 내가 그런 처지에 있는 데에는 하나님의 오묘한 섭리가 있습니다. 이 시대에 나를 향한, 우리 교회를 향한 하나님의 놀라운 뜻이 있습니다. 사람들은 대개 이 하나님의 뜻을 발견하지 못하기에 시대를 탓합니다. 어려운 때라고 느껴질수록 '탓하기'보다 '참여하기'에 더욱 힘써야 합니다. 에스더 4장 14절에 보면 모르드개가 에스더에게 이런 말을 합니다. "네가 왕후의 위를 얻은 것이 이 때를 위함이 아닌지 누가 아느냐?" 마찬가지로 나의 현재의 위치가 이 때를 위한 것이라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이 나를 이 가정에 태어나게 하신 목적이 있습니다. 또한 나를 이 가정으로 시집보낸 목적이 있습니다. 나를 이 시대에 태어나게 하신 목적이 있고, 이 교회에 나를 보낸 목적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어떤 경우에도 환경을 탓하지 말고 하나님께서 현재의 이 자리로 부르신 것으로 알고 현재의 이 자리에서 최선의 결과를 만들기에 우리는 힘써야 할 것입니다. 2. 하나님께 경배하는 삶의 중요성 오늘날 예수님이 태어나던 그 날에 바로 동방박사가 방문했는지, 상당한 시간이 흐른 후에 동방박사가 방문했는지에 대한 의견 차이가 있습니다. 사람들은 보통 주님 태어나던 그 날에 동방박사가 방문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찬송가 116장을 보면 성탄절 밤에 동방박사가 방문했다는 가사도 있습니다. 그러나 상당한 시간이 흐른 뒤에 방문했다는 의견도 만만치 않게 많습니다. 이 문제에 대해서는 나중에 기회가 있을 때에 논의해 보기로 하겠습니다. 동방박사가 아기 예수님을 보고 어떻게 했습니까? 11절 말씀을 보십시오. "집에 들어가 아기와 그 모친 마리아의 함께 있는 것을 보고 엎드려 아기께 경배하고..." 오늘 본문에는 세 종류의 사람이 나옵니다. 첫째, 헤롯과 같은 사람(3절) 겉으로는 환영하나 속으로는 저주하고 적의를 가진 사람입니다. 요새 믿는다고 하면서 "예수 믿는 사람이 왜 그래!"라고 자주 말하는 분이 있습니다. 그런 모습은 정의로운 모습인 것 같지만 기초가 바르지 못한 정의감입니다. 둘째, 제사장과 서기관과 같은 사람(4절) 이런 부류의 사람들은 지식은 많습니다. 헤롯이 메시야 나실 것을 물으니까 베들레헴이라고 금방 대답할 정도입니다(5절). 그러나 실질적으로 메시야에 대해 관심도 없고 감동도 없습니다. 오직 자기의 자리, 기득권을 지키는 것이 더 중요할 뿐입니다. 이런 사람들은 교회에 잘 나오니까 회개할 것도 없는 줄 압니다. 또한 일을 열심히 하니까 반성할 것도 없고 하나님 앞에 떳떳한 줄 압니다. 그러나 오래 예수 믿은 사실만 자랑하고, 훈장만 자랑하면서도 자기의 생애를 다 드려 헌신해 본 경험이 없는 사람이 되어서는 안됩니다. 오랜 믿은 것을 자랑하지 말고 예수님 만난 것을 자랑해야 할 것이고, 훈장을 자랑하지 말고 주님과 함께 동행하는 것을 자랑해야 할 것입니다. 또한 교회에 다니는 것을 자랑하지 말고 교회에 대한 애틋한 사랑을 자랑해야 합니다. 셋째, 동방박사처럼 경배하러 먼길을 달려 온 사람 우리는 오늘 본문의 동방박사의 경배를 통해서 예배에 관한 3가지 자세를 배우게 됩니다. 1) 죽음을 무릅쓰고 먼길을 찾아왔다는 점입니다. 예배란 하나의 종교 의식이 아니고 생명을 바쳐 하나님을 만나는 결단이요 헌신입니다. 그들이 먼 길을 달려온 유일한 목적은 오직 '경배!'였습니다. 하나님을 만나기 위해서는 이런 경배, 이런 헌신이 없이는 불가능합니다. 너무 쉽게 예수님을 믿으려고 하는 자세에서는 은혜가 주어지기가 힘듭니다. 은혜는 어디에서 옵니까? 하나님을 힘써 경배하는 태도에서 옵니다. 그런 의미에서 예배 시간에 목사의 설교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예배를 드릴 때 바로 하나님을 진심으로 경배하는 태도입니다. 어떤 태도로 하나님을 만나러 오느냐가 예배에서 가장 중요한 은혜 받는 포인트입니다. 생명을 걸고 하나님을 만나려고 애써보십시오. 어떤 희생의 대가를 치르더라도 나는 하나님을 만나리라고 결심해 보십시오. 왜 그 오랜 세월 동안 하나님이 멀리 느껴지는지 생각해보셨습니까? 그것은 하나님을 만나려는 강렬한 욕구가 없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2) 예물을 준비했다는 점입니다(11절). 동방박사는 보배합을 열어 예수님께 황금과 유향과 몰약을 바쳤습니다. 동방박사가 세 사람이라는 것은 그들의 예물로 추정하는 것입니다. 여기에 나오는 세 가지 예물은 기름부음을 받은 자(메시야)임을 증명하는 예물입니다. 먼저 황금은 왕이 받기에 합당한 예물오서 그리스도의 왕권을 상징합니다. 그리고 유향은 제사장의 사역과 관련되어 있습니다(출 30:34-48). 제사장은 향을 피우며 백성을 위해서 기도하는 임무를 맡습니다. 그리고 몰약은 예수님이 선지자임을 상징합니다. 몰약은 썩지 않게 하는 액체이며 슬픔과 탄식과 죽음에 관계된 약입니다. 예수님은 돌아가실 때에도 몰약을 받으셨습니다. 이 세 가지 예물을 드렸다는 것은 예배의 중요한 요소로서 물질적 헌신과 드림 및 베품의 중요성을 다시 한번 생각해보게 합니다. 모든 관계에서의 승리는 결론적으로 '드리는 자'에게 있는 것이지 '구경하는 자' 혹은 '받는 자'에게 있는 것이 아닙니다. 또한 하나님의 보상과 진정한 축복도 받는 자보다 드리는 자에게 있습니다. 3) 그리고 그들은 하나님의 음성에 순종했다는 점입니다(12절). 순종이 제사보다 낫습니다. 하나님께서도 그렇게 말씀하시고, 교회생활에서도 그렇고, 심지어는 직장에서도, 세상 공동체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런데 간혹 내 방식을 고집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자기 식으로 믿으려고 하기에 부딪침이 많습니다. 그러나 순종하는 사람에게는 평화가 주어질 것입니다. 순종하는 사람은 바보 같아 보이고 줏대 없는 사람처럼 보이나 많은 사람들이 그 사람을 보면서 감동을 받습니다. "저렇게 형편없고 말도 되지 않는 일에도 순종하는구나..." 그런 말을 들을 정도로 순종하면 순종 자체가 큰 능력을 주기 시작합니다. 그러면서 하나님이 마련하신 은혜의 길이 활짝 열려지기 시작합니다. 신앙생활의 결론은 인격에 순종이 있느냐 없느냐로 결론지어집니다. 제자가 갖추어야 할 제일 요건도 순종이 있느냐 없느냐가 중요한 포인트입니다. 목회하면서 어려운 여건에서도 순종하는 성도의 모습을 보면 눈물이 날 때가 많습니다. "어떻게 저런 상황을 아름답게 이겨내나."라고 생각하면 흐뭇한 마음이 듭니다. 순종하는 사람이 생각하는 것은 대우가 아니라 순종 그 자체입니다. 그가 몰라서 순종하는 것이 아니고, 느끼지 못해서 순종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한 생각이나 느낌보다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과 교회 사랑하는 마음이 더 크기에, 또한 주님께 순종하는 마음이 더 크기에 자기 생각을 뒤로 물리고 순종하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동방박사의 모습을 통해 참된 예배의 세 가지 모습을 살펴보았습니다. 헌신이 없는 예배, 예물이 없는 예배, 순종이 없는 예배는 참 예배가 아닙니다. 성탄절을 맞이해서 다시 한번 참된 예배의 주인공으로 준비되시기를 바랍니다. 성탄절(3) 최선으로 이끄시는 하나님 마태복음 2:13-23 마태는 다른 복음서보다 아주 강하게 예수님이 구약 예언의 성취자임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특히 2장에서는 네 번이나 강조합니다. 1) 6절. 예수님의 베들레헴 탄생은 미가서 예언의 성취였습니다(미 5:2). 2) 15절. 예수님이 어렸을 때 애굽으로 피난 갔고, 그곳에서 다시 나온 것도 호세야 예언의 성취였습니다(호 11:1). 3) 18절. 예수님 때문에 베들레헴 어린 아이들이 많이 죽게 된 것은 라마의 통곡에 대한 예레미야서의 예언의 응답이었습니다(렘 31:15). 4) 22-23절. 애굽으로 다시 나오게 된 예수님이 베들레헴으로 돌아가지 않고 나사렛으로 가는 것 역시 구약 예언의 응답입니다(사 11:1). 구약은 예수님의 그림자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통해서 구약을 조명해 보면 구약에 펼쳐진 하나님의 섭리를 더욱 많이 이해하게 됩니다. 마찬가지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나 자신을 볼 때에도 나 자신이 보다 분명해지기 시작합니다. "내가 왜 사는가? 나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를 외치며 방황하던 사람이 예수님 앞에 서게 되면 자신의 생의 의미를 발견하게 됩니다. 그리고 자기에게 주어진 환경, 고난과 어려움이 의미가 있음을 알게 됩니다. 예수님을 통해서 보면 세상의 부조리가 이해됩니다. 또한 세상의 고난과 역경과 여러 가지 상황들이 이해됩니다. 마지막 때의 선교 사명도 예수님을 통해 분명히 깨닫게 됩니다. 여러분! 모든 사건을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보고 해석하십시오. 그리고 예수님을 통해서 그 사건이 주는 의미를 삶에 적용하십시오. 그러면 희미하던 삶의 그림자들이 분명하게 살아나고 무의미하던 인생이 가치 있는 인생으로 변하며 능력이 필요한 사람들이 능력을 받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누구든지 예수님을 만나면 그 인생이 송두리째 변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사도 바울이 그랬고, 이 복음서의 저자인 세리 마태도 그랬습니다. 본문 13절 말씀을 보십시오. 하나님의 사자가 요셉을 지시하여 애굽으로 예수님을 피신시킵니다. 이 구절에서 우리가 얻을 수 있는 교훈이 무엇일까요? 3가지만 살펴볼까요? 1. 언제나 하나님의 보호의 손길이 있다는 점입니다. 우리의 삶이 성공적인 삶이 되려면 무엇이 제일 필요할까요? 1) 약속에 대한 확신이 필요합니다. 사실상 하나님의 말씀은 모두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약속입니다. 2) 소명에 대한 확신이 필요합니다. "하나님께서 이 일에 부르셨다!"는 확신을 가져야 합니다. 3) 동행에 대한 확신이 필요합니다.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실 것이다"라는 확신을 가져야 합니다. 하나님의 약속이 있고, 내가 소명 받은 존재이고, 하나님이 분명히 동행하신다면 우리에게 때로 어려운 일이 닥쳐도 능히 그 상황을 이기고 나갈 수 있을 것입니다. 왜 나에게 작은 위기가 있을까요? 아마 그것은 큰 위기를 막기 위해서일 것입니다. 왜 나에게 작은 고통이 있을까요? 아마 그것도 큰 고통을 막기 위해서일 것입니다. 2. 하나님은 때로 꿈으로도 역사하고 급한 때는 천사도 보내십니다. 우리를 보호하는 천사가 있다는 사실을 믿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초자연을 나의 자연으로 이해하려고 하지 말아야 합니다. 때로 하나님은 꿈을 통해서 우리의 갈 길을 인도하고 또한 꿈과 환상을 통해서 마음에 좋은 확신을 가질 수도 있게 하십니다. 그러나 항상 꿈을 바라는 사람이 되어서는 안될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일반적인 경우에는 말씀으로 인도하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항상 율법(말씀)을 입에서 떠나지 말게 하고 주야로 묵상해야 합니다. 묵상은 하나님의 일과 방법과 약속과 목적을 생각하고 나의 삶의 방향을 정하며 실생활에서 적용하기 위한 기초행위입니다. 그러므로 믿는 자에게 묵상은 매일의 삶의 우선 순위가 되어야 합니다. 묵상은 하나님의 승리감을 우리에게 전달하며 무엇보다도 말씀에 대해 순종하는 삶을 살게 하는 촉매와도 같습니다. 3. 마리아와 요셉의 순종을 통해서 순종을 배우게 됩니다. 태어난 지 얼마 되지 않은 아이를 데리고 애굽에 피난 간다는 것이 얼마나 고통스런 일입니까? 그러나 그들은 순종했습니다. 전설에 의하면 헤롯이 너무 철저히 추적해서 이곳 저곳 피하다가 밤에 한 굴에 들어갔을 때 그 굴에는 거미 한 마리가 있었는데, 그 거미가 성령의 감동을 받아서 밤 추위를 막아주려고 굴 어귀를 거미줄로 쳤습니다. 그런데 헤롯의 부하들이 이곳까지 추적해서 굴마다 조사하러 다니는데, 거미줄 쳐진 이 굴에서는 "설마 이곳에..."라고 하며 돌아갔다고 합니다. 전설이지만 애굽으로 내려가는 길의 힘든 여정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그래서 크리스마스 트리에 금줄과 은줄을 다는 것이 이 거미줄을 상징하는 것이라고 해석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리고 성경을 보면 천사가 빨리 떠나라고 했습니다(13-14절). 떠날 준비가 되었을까요? 아마 거의 준비가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준비하실 것이라는 확신만 가지고 떠납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요셉과 마리아의 순종을 배울 수 있습니다. 때로 우리는 하나님의 뜻을 성공적으로 이루기 위해 최선을 다해 준비하고 미래의 청사진도 보다 구체적으로 작성해야 합니다. 그러나 더욱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뜻에 시시때때로 순종하려는 자세입니다. 그래서 한 걸음 한 걸음 기도를 통해 하나님의 인도함을 받는 것이 미래에 대한 정교한 청사진을 받는 것보다 중요하다고 말하는 것이 아닐까요? 때로 사람들은 답답한 마음에 미래에 대해 알고자 동분서주합니다. 그러나 미래의 문제에 지나치게 매달리는 것은 썩 바람직한 일이 아닙니다. 오히려 하나님의 뜻을 알고 그 뜻에 순종하려는 현재의 발걸음이 중요합니다. 그리고 순종이라는 단어 자체가 받아들이기 어려운 일에 대한 순종을 포함합니다. 좋은 일, 편한 일, 내가 원하는 일만 순종하는 것은 순종이 아닙니다. 어렵고 힘들어도 순종하는 것이 참 순종인데, 그렇게 어렵고 힘든 상황에서도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면 반드시 하나님께서 나를 최선으로 이끄실 것입니다. 순종을 통해 하나님의 돕는 손길을 항상 체험하며 살기를 바랍니다. 성탄절(4) 빛이신 예수님 요한복음 1:1-14 오늘 본문은 주님의 성육신에 대한 말씀입니다. 이 본문이 주는 영적인 교훈은 무엇인지 몇 가지 살펴볼까요? 1. 주님은 우리와 항상 함께 계신다는 교훈 본문 1절을 보십시오.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구절에서 말씀은 우리 예수님을 의미합니다. 이 구절에서 '태초에'라는 말은 무슨 의미를 내포합니까? "우리 주님께서 계시지 않는 때가 없다"는 말을 내포합니다. 그 말은 지금 이 시간에도 주님께서 함께 하신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지금 이 시간에만 주님께서 함께 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가장 수치스런 모습으로 있을 때에도 주님께서 함께 하십니다. 그리고 이 구절에서 '계셨다'라는 말은 무슨 의미를 내포합니까? "우리 주님께서 계시지 않는 장소가 없다"는 말을 내포합니다. 그 말은 지금 이 장소에서 주님께서 함께 하신다는 말입니다. 아니, 내가 어디로 가든지 주님께서는 언제나 나와 함께 하실 것입니다. 2. 주님께서 우리를 위한 계획을 가지고 있다는 교훈 3절 말씀을 보십시오.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 온 천지만물을 다 주님께서 지으셨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이 말은 주님께서 나를 지으셨다는 말이고, 결국 이 말은 "주님께서 나를 위한 계획을 가지고 계신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이 3절 말씀에는 또 한가지 깊은 메시지가 있습니다.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다는 말은 우리에게 주어진 상황과 환경도 주님 없이 된 상황과 환경이 아니고 주님 허락 하에 된 것이라는 사실이라는 점입니다. 가끔 우리는 어려운 상황을 만납니다. 착잡한 마음이 일지만 그 상황도 하나님이 만드셨음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 상황을 통해 전달하려는 하나님의 메시지가 있고, 최종적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유익을 주시려는 하나님의 섭리가 분명히 있을 것입니다. 여러분! 여러분이 지금 처하고 있는 그 상황! 그 상황은 하나님 없이 이루어진 상황에 아닙니다. 결론적으로 보면 하나님께서 그 상황을 만드신 것입니다. 그 상황이 어떤 상황이든지 상관없이 결론적으로 하나님은 나에게 유익을 주시고 복을 주시는데 그 상황을 항상 선용하신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3. 주님은 사람들의 빛이라는 교훈 4절 말씀을 보십시오. "그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 이 빛은 태양빛, 달빛 같은 빛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영적인 빛을 말합니다. 오늘날 많은 것들과 많은 사람들은 자신이 그러한 빛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오직 주님만이 우리의 인생의 영적인 빛입니다. 가끔 우리는 캄캄한 밤을 걸어가는 것 같은 상황을 만납니다. "이런 경우에는 어떻게 해야 할까...." 몇 날을 같은 기도제목을 놓고 기도해도 잘 길이 보이지 않습니다. 그러면 때로 울적한 기분을 느낄 때도 있습니다. 그때 주님이 빛으로 내 마음에 찾아주지 않으면 무슨 희망이 있겠습니까? 울적할 때에도 주님이 빛이라는 믿음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우리의 삶에 희망이 넘치게 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4. 주님의 빛을 받았다고 어둠은 금방 물러가지 않는다는 교훈 본문 5절 말씀을 보십시오. "빛이 어두움에 비취되 어두움이 깨닫지 못하더라." 원어적인 의미로는 "어두움이 사라지지 않았다"라는 말입니다. 세상에 와서 참빛이 비추어졌음에도 불구하고 어두움은 바로 물러가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빛이 비취면 어두움은 자연히 물러간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오히려 빛이 비췰수록 그림자가 뚜렷해지게 마련입니다. 그래서 괴테가 이런 말을 한 적이 있었습니다. "광선이 강한 곳에는 더 뚜렷한 그림자가 있게 마련이다." 사실입니다. 밝은 빛이 있을 때, 그 빛을 막는 물체가 있으면 그 물체 뒤의 그림자는 오히려 더 뚜렷하게 나타나게 됩니다. 그래서 믿음 생활하면서 가끔 믿음의 회의에 빠지는 경우가 생깁니다. 그런 상황은 믿음생활 하면서 누구나 일생에 몇 번쯤은 경험하는 상황입니다. 그처럼 믿음이 회의에 빠질 때는 대개 나의 삶에 큰 바위가 가로막고 있을 때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참 빛이신 주님을 영접했다고 해서 이렇게 말할 수 없습니다. "우리가 참 빛을 받았기 때문에 문제가 없고 마음에 그림자가 하나도 없어!" 실상은 그렇지 않다는 것을 우리는 겸허하게 인정해야 합니다. 참 빛을 받았지만 그 빛을 막는 환경 속에서는 웬만한 사람에게는 그림자가 더욱 뚜렷하게 느껴지는 법입니다. 그것은 자연스런 일입니다. 그러나 낙심하지 말아야 합니다. 가끔 실망스러워도 주님을 향한 마음과 정성과 뜻을 포기하면 안됩니다. 참 빛이 비췬다고 어두움이 당연히 물러나는 것은 아니지만, 오히려 더 강하게 빛에 반발할 수도 있지만 최종적으로는 빛이 승리한다는 사실을 결코 잊지 말아야 합니다. 5. 우리는 주님의 생명 되심과 빛 되심을 증거 해야 한다는 교훈 예수님 당시 엄청난 빛을 발한 사람이 있었습니다. 당시 유대인들은 그 사람을 보고 깜짝 놀랐습니다. 그래서 유대인들은 그분이 바로 그들이 그렇게 고대하던 메시아인 줄 알았습니다. 그 사람이 누구입니까? 바로 세례 요한입니다. 그러나 세례 요한은 진정한 참 빛이 아니었습니다. 본문 8-9절 말씀을 보십시오. "그는 이 빛이 아니요 이 빛에 대하여 증거 하러 온 자라 참 빛 곧 세상에 와서 각 사람에게 비취는 빛이 있었나니..." 세례요한은 참 빛이 아니라 참 빛이신 주님을 증거 하러 온 사람이었습니다. 가끔 하나님은 우리에게도 빛을 주시고, 우리 안에 빛에 있게 하십니다. 그때 우리의 할 일은 무엇입니까? 그 빛을 가지고 나 자신은 감추고 참 빛이신 주님을 증거 하는 일을 해야 합니다. 우리는 언제든지 우리의 삶과 언어로서 주님을 증거 하려고 해야 합니다. 그 일을 잘 하기 위해서 더욱 주님을 잘 알아야 합니다. 주님을 더 잘 알기 위해서는 주님에 대한 강한 열정이 있어야 합니다. 또한 우리는 어떻게 주님을 증거 할 수 있을 것인가를 생각해야 합니다. 그것이 없다면 하나님의 진리의 빛과 축복의 빛은 항상 희미할 수밖에 없습니다. 항상 주님을 증거함으로 빛이 넘치도록 주어지고, 또한 주어진 빛이 의미가 있도록 하는 삶을 살아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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