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쁨을 외쳐보자
본문: 이사야40:1-11, 빌립보서 4:4-7, 누가복음 1:57-66 엘리사벳이 아들을 낳자 친척들과 이웃들이 함께 기뻐하면서 하나님의 손길이 그 아기를 보살피고 계심을 느끼며 “이 아기가 장차 어떤 사람이 될까?”하고 기대한다(눅 1:57-66). 이 아기가 누구인가? 이사야의 예언대로 이 아기는 포로 된 이스라엘의 광복의 기쁜 소식을 외치는 전령처럼 외치는 자이고 백성을 위로하는 자이다(사 40:1-11). 그러기에 외치는 자인 우리는 주님 오실 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고 주님과 함께 항상 기뻐하고 언제나 감사하는 마음으로 기도하고 간구하며 사람으로서는 감히 생각할 수 없는 하나님의 평화를 누리도록 외칠 수 있어야 한다(빌 4:4-7). 오늘 이 세 본문이 증언하는 것은 주 오심을 준비하는 자의 외침이다. 예수님이 오시기 전에 먼저 세례 요한의 외침이 있었다. 오늘은 이처럼 구원의 기쁨이 왔다고 외치는 신앙을 찾는 시간이다. 1. 이 아기가 장차 어떤 사람이 될까? 엘리사벳이 달이 차서 아들을 낳았다. 이웃과 친척들은 주께서 엘리사벳에게 놀라운 자비를 베푸셨다는 소식을 듣고 엘리사벳과 함께 기뻐하였다. 정결예식을 행하던 날, 관례대로 아비의 이름을 따서 아기의 이름을 사가랴라고 부르려 했다. 그러나 엘리사벳은 ‘요한’이라 이름 짓기를 원했다. 그때까지 입을 열지 못하고 있던 사가랴도 서판에 ‘아기 이름은 요한’이라고 썼다. 이 일을 본 이웃들은 무서운 생각마저 들었다. 이 일이 곧 유다 산골에 두루 퍼져 이야깃거리가 되었다. 사람들의 마음에는 주님의 손길이 그 아기를 보살피고 계신 것이 분명하다고 여겼다. “이 아기가 장차 어떤 사람이 될까?” 하면서 은근히 큰 인물이 될 것을 기대했다. 참으로 가슴이 두근거린다. 이 아기가 커서 어떤 큰 일을 우리에게 이루어 줄 것인가? 이미 이 아기가 누구이며 무엇을 외칠 것인지를 오래 전에 이사야 예언자가 예고하였다. 2. 광복의 기쁜 소식을 외치는 사람 이사야 40:1은 “너희는 위로하라 내 백성을 위로하라”이다. 하나님으로부터 등을 돌리고 점점자라목처럼 자신 속으로 빠져들며 싸늘하게 식어가는 신앙밖에는 남은 것이 없는 이스라엘을 하나님께서 보셨다. 이제 조금만 지체해도 때가 너무 늦을 것을 아셨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절박하게 외칠 수밖에 없으셨다. 자신의 백성을 위로하라고 외치신다. 그래서 하나님의 전권을 위임받은 전령 이사야는 하나님께서 당신의 백성을 용서하시고 본래대로 회복시키기로 결정하셨음을 동족에게 알리며 위로하기 위하여 파송을 받는다. 그러자 새로운 명령이 울려 퍼진다. “한 소리가 말한다. 외쳐라” 그러자 예언자 이사야는 “제가 무엇을 외쳐야 한단 말입니까?”하며 따지듯이 질문한다. 하나님의 구원의 손길을 가장 예민하게 기다렸던 예언자의 입에서 터져 나온 볼멘 소리였다. 뼈저린 체념과 좌절의 한복판에 서 있는 이스라엘과 함께 같은 고통을 겪으며 허우적거리는 이사야에게 하나님은 설교하도록 명령하신다. “외쳐라!” 백성들을 향하여 설교한다는 것이 아무런 의미가 없다고 생각하는 이사야에게 하나님은 가차 없이 한마디로 끊어 말씀하신다. “외쳐라!” 그래서 하나님의 외침이 예언자 이사야의 임을 통하여 이스라엘에 울려퍼진다. 그 첫째가 사막의 길을 닦으라는 것이다. 사막을 통과하는 길을 닦는 것은 바빌론으로부터 풀려나서 고국으로 돌아갈 길을 닦는 것이다. 따라서 이스라엘 백서들은 귀향을 거스리는 장애물들을 제거해야 했다. 그래야 주의 영광이 나타날 것이다. 그리고 모든 사람이 주의 영광을 볼 것이다. 그 둘째는 하나님이 오신다는 사실을 유다의 모든 도시에 알려야 한다(9-11)는 것이다. 위로를 받아야 할 처지인 시온이 위로를 받기도 전에 일거리를 부여받은 것이다. 기쁨의 전령인 시온은 하나님이 포로들을 이끌고 귀환행진을 하면서 예루살렘을 향해 지금 오고 있음을 선포하라는 예언자의 외침을 듣는다. 비록 하나님의 도래가 아직은 이루어지지 않았지만 두려워말고 그렇게 선포하라고 하신다. 곤경에 처한 그의 백성들에게는 애정을 느끼고 그들을 불쌍히 여기셔서, 절대절명의 위기에 처해 있던 그들을 구하여 함께 데려오시는 하나님을 세상에 알려야 한다. 하나님께서는 목자가 양을 보호하듯이 이스라엘을 보호하여 즐거운 귀향행렬을 참여시키시고 앞장서서 인도하여 오신다고, 마음 속에서 우러나오는, 넘치는 기쁨을 외쳐야 한다. 이것을 예언자 이사야는 외쳤다. 그리고 오늘 사가랴와 엘리사벳과 사람들이 기대를 가지고 바라보는 아기인 요한이 커서 외칠 내용이다. 3. 기쁨의 삶을 살라고 외치는 사람 사실 교회의 임무 자체가 이사야가 외치고 세례 요한이 외친 것을 외치는 것이다. 바울은 자기가 최초로 세운 빌립보 교회를 매우 사랑했다. 빌립보서는 바울이 죽음의 위험에 처해 있는 감옥에서 쓰여진 것이다. 그러기에 빌립보서는 교우들이 바울을 더 이상 보지 못하게 될 경우 바울의 마지막 권면이고 외침이 되는 셈이다. 그러면 바울이 빌립보 교우들에게 마지막으로 한 절규는 무엇인가? 모두가 경험하고 있는 박해와 고난에도 불구하고 기쁨의 생활을 하라는 것이다. 기쁨이 빌립보 교우들의 신앙의 특징이 되라고 한다. 빌립보 교인 하면 기쁨에 젖어 사는 사람이라는 이미지를 가지라는 말이다. 그런데 기쁨은 그 자체가 자신을 향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을 향하는 것이어야 한다. 이것은 넉넉함으로 나타난다. 기쁨에 젖어 사는 사람은 다른 사람을 대할 때 항상 넉넉함으로 대한다. 그리고 이 기쁨은 주가 가까이 오신다는 의식에 의해 새롭게 된다. 주께서 가까이 오셨으니 기쁠 수밖에 없다. 그래서 아무것도 염려하지 말고 기뻐하라고 한다. 기쁨을 항상 유지하기 이해서는 언제나 감사함으로 기도하고 간구하며 소원을 하나님께 아뢰라고 한다. 성탄절이다. 정말 주께서 오실 때가 눈앞에 다가왔다. 이때 우리가 할 수 있는 단 하나는 외치는 것이다. 주체할 수 없는 기쁨을 외치는 것이다. 이사야 외치고 요한이 외친 것을 세상에 외쳐야 한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실 때가 되었으니 길을 닦으라고 외치자. 하나님께서 보내시는 구세주가 오신다고 외치자. 참으로 주님이 가까우니 신나게 잔치준비를 시작하는 한 주가 되자. * 해 뜨는 언덕에 올라(1999년도 교회력에 따른 예배와 설교자료), 대한기독교서회, 1998, PP.67-70 ③ 제목: 거룩한 응답 본문: 이사야 9:2-7, 디도서 2:11-14, 누가복음 2:1-20 1. 석의적 접근 a. 구약의 말씀(사 9:2-7): 본문은 유다왕 아하스 때 북 이스라엘과 아람 연합군의 침공사건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7, 8장에서는 북 이스라엘과 아람 연합군의 공격에 직면한 남 유다가 어떠한 방법으로 해결하는 것이 하나님 백성의 도리인가를 밝혀주고 있다면, 이사야 9-11장까지는 하나님께서 적대적인 두 왕국과 앗수르 제국을 심판하는 것과 남은 자들을 위하여 메시야가 오시고 그가 통치할 것을 강조하고 있다. 본문은 찬양의 시작(2-3), 하나님을 찬양하는 이유(4-7a), 결론적인 확신(7b)으로 구성되어 있다. 첫 번째 부분에서는 하나님을 빛의 영상으로 표현하는 것이 중심이다. 이는 이사야 2:1-5에서의 시온에 대한 종말론적 비전의 확장이라고 볼 수 있다. 3절에는 구체적으로 이 빛이 백성들에 대한 하나님의 임재임을 암시하고 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에 대하여 기뻐하며 찬양할 수 있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둘째 부분에서는 (1)성전을 통하여 지상의 세력을 파괴하는 하나님의 구원(4), (2) 하나님에게 대항하는 세력의 영원한 패배(5), (3() 구원의 실체로서의 매시야 탄생을 통하여 빛을 만드신 하나님의 구체적인 행위(6-7a)에 대하여 찬양을 하고 있다. 특히 6절에서는 메시야의 특성으로서 기묘자, 전능하신 하나님, 영원한 아버지, 평화의 왕을 든다. 7절 전반부에서는 메시야 통치의 특성으로 정의, 의, 영원한 평화를 나타내고 있다. 마지막 부분은 이러한 하나님의 구원은 그의 신실하심을 통하여 이루어질 것을 확신하는 것으로 끝을 맺고 있다. b. 서신의 말씀(딛 2:11-14) 디도서는 불완전한 목회의 상황에 접해 있는 교회 지도자들에게 보내는 편지이다. 본문은 은혜를 통한 구원의 선포로서 시작된다(11). 후에 성도들이 취해야 할 것과 취하지 말아야 할 내용을 구분하고 있다(12-13). 마지막에는 그리스도의 구원사역의 본질을 간단하게 설교하는 가운데 현재그리스도인의 기다림의 성질을 밝히고 있다. 본문에 사용된 구원을 상징하는 은혜는 (1) 현재의 신자들의 삶에서 부적절한 태도를 벗어버리는 것, (2) 신자들의 삶이 육적인 일을 벗어 버리고 절제와 의와 현신의 삶으로 자라는 것을 말한다. 이러한 은혜는 역사적 그리스도이신 예수님의 오심을 통하여 확증되었다. 그리고 이것은 현재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라 미래에 대하여 열려진 사실이라는 것을 인식해야 한다. 그러므로 기독교인은 현재만이 아니라 미래를 바라보고 살아야 한다. 특히 2:13에서는 삶속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과 영광의 확증을 바라는 믿음의 자세를 강조하고 있다. 그리스도인들은 그리스도의 구원이 현재적이지만, 그의 은혜는 하나님의 의지를 완성시키기 위하여 지금도 역사하고 있음을 인식해야 한다. 우리들은 하나님의 은혜의 실제를 축하하면서 또한 하나님의 완성을 희망해야 한다. C. 복음서의 말씀(눅 2:1-20) 1장에서 누가는 요한의 탄생에 대한 이야기를 “우리 발을 평화의 길로 인도한(1:79) 돋는 해(1:78)”라고 언급하며 끝을 맺고 있다. 2장에서는 예수님에 대한 탄생 이야기로 시작하면서 “돋는 해”, 즉 메시야인 예수님에 대한 이야기로 관심을 돌리고 있으며 ‘평화’의 주제(14)를 다시 끌어들이고 있다. 예수님 탄생 이야기는 (1) 배경 설명(1-5), (2) 예수님의 탄생(6-7), (3) 목자들의 이야기(8-200로 구성되어 있다. 1장에서는 요한의 탄생 기사(1:57-58)에 이어 그의 할례 이야기가 나오지만, 2장에서는 예수님의 탄생 이야기(2:6-7)에 이어 그의 할례 이야기(2:21)로 직접 연결되지 않고 중간에 목자들의 이야기를 첨가시키었다. 이는 다른 복음서에서는 볼 수 없는 누가의 특징이다. 배경설명(1-5)에서는 예수님의 탄생 이야기를 가이사 아우그스도의 호적 명령과 인구조사를 연결시키어 설명하고 있다. 이는 예수님이 베들레헴에서 태어났다는 마태복음 전승을 알고 있던 누가가 나사렛에 살고 있던 마리아와 요셉을 다윗의 동네인 베들레헴과 연관시키기 위한 문학적 의도에서 나왔다. 또한 인구조사 때 메시야가 태어날 것으로 본 시편 87:6의 해석과 ‘로마의 평화’를 수립한 아우그스도에 대비하여 그리스도이신 예수님을 ‘평화의 왕’으로 선포하기 위하여, 그리고 예수님을 열심당원과 같은 반 로마적인 인물로 소개하지 않으려는 정치적 변증을 내용으로 한 신학적 의도 속에서 이루어졌다. 예수님 탄생 이야기(6-7)에서 누가는 예수님이 탄생했다는 사실보다는 마리아가 새로 태어난 아이를 어디에 두었느냐에 더 관심을 두고 있다. 그래서 ‘구유’와 ‘강보’라는 단어가 반복되고 있다. 누가는 장소를 통하여 예수님의 겸손성을 나타내려고 하였다. 목자들의 이야기(8-20)에서는 목자들의 다양한 반응을 소개해 주고 있다. ‘구주’와 ‘주님’으로 나타난 예수님에 대하여 목자들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찬송하면서 마지막에는 양떼로 돌아가는 것으로 끝맺고 있다. D. 설교를 위한 조명 서론 죽어 있는 사람은 반응을 보이지 않는다. 살아있는 사람만이 반응을 나타낸다. 신앙에서도 살아있는 사람만이 주님의 명령에 반응을 나타낸다. 주님의 말씀에 응답하는 자만이 하나님 나라와 의를 누리며 살 수 있다. 하나님에 대한 응답이 없이는 어둠의 모습만이 펼쳐질 뿐이다. 우리는 늘 주님 앞에 거룩한 응답을 해야 한다. 하나님의 나라와 의가 중심이 된 거룩한 응답을 해야 한다. 자신을 떠나 하나님에게 중심이 된 신앙의 고백들이 우리의 삶에서 나타나야 한다. 특히 거룩한 성탄에 우리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응답을 보여야 한다. 우리는 우리를 부르시는 하나님의 음성에 어떻게 응답해야 하는가? 목자들의 모습을 통해서 하나님은, 우리가 해야 할 응답을 가르쳐 주신다. 본론 * 먼저, 하나님은 순종의 모습을 보여 주신다(15, 16절). 베들레헴 들 밖에서 양을 치던 목자들은 천사들로부터 두렵고 떨린 소식을 들었다. 그리스도가나타나서 구유에 강보로 싸여 있으니 가서 보라는 천사들의 명령에 목자들은 말구유로 달려갔다. 목자들은 거룩한 명령에 거룩한 순종으로 응답을 했다. 천사들의 명령을 따랐던 목자들은 자신들의 인생에서 가장 거룩한 경험을 하였다. 그들은 이스라엘 백성이 기다렸던 그리스도를 직접 눈으로 볼 수 있었다. 천사들의 명령을 받아들인 순종의 결과는 이들에게는 감당할 수 없을 만큼 큰 영광이었다. 주님을 맞이하는 성탄에 주님은 우리의 삶에서도 거룩한 순종을 요구하고 있다. 목자들과 같은 순종의 삶을 명령하신다. 성탄을 맞이하는 우리도 그 명령을 들을 수 있어야 하며, 조건 없이 받아들여야 한다. 이것이 성탄을 맞아들이는 거룩한 자세다. 오늘 우리의 삶에서 성탄 행사도 중요하지만 주님의 명령을 받아들이는 자세가 더 중요하다. 주님의 명령을 온 마음으로 따르지 않고서는 거룩한 주님의 영광에 동참할 수 없다. 주님의 명령 따라 미움의 힘이 지배하는 곳에서 사랑으로, 거짓이 만연한 곳에서 진리로 동참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 * 그 다음으로 하나님은 경배하는 모습을 보여주신다(20a). 목자들은 먼저 아기 예수님께 달려와 그에게 경배하고 찬양했다. 구주와 주님 되신 어린 아기 예수님에게 경배하였다. 온 마음과 정성을 다하여 그리스도께 찬양을 드렸다. 목자들은 자신들이 중심이 되지 않고 오직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삼았다. 그래서 그리스도께 경배하고 찬양을 드렸다.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가 중심이 된 성탄을 맞이했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은 자신에게 집중된 성탄을 즐기고 있다. 모두 다 아기 예수 그리스도는 말 구유에 놓고 자신의 육신을 위한 즐거움을 찾고 있다. 자신들의 쾌락을 찾느라고 분주하다. 그래서 거룩한 성탄이 오히려 쾌락과 방탕의 날로 변하고 있다. 성탄절 절기에 오히려 더 많은 스트레스 환자들이 생기며, 폭력 사건도 일년 중에 제일 많이 일어나고 있다. 성탄은 우리 중심의 날이 아니다. 주님이 주인 되신 날이다. 우리는 다만 구주와 주님으로 오신 그리스도를 경배와 찬양할 의무만이 주어졌다. 성탄은 우리를 위한 거룩한 선물이다. 이 선물을 받아갈 수 있는 사람은 오직 감사와 경배를 드릴 수 있는 사람뿐이다. * 하나님은 삶 속에서 전해야 한다는 것을 알려 주신다(20b). 목자들은 다시 삶의 자리로 돌아갔다. 목자들은 마리아와 함께 구주와 주님으로 오신 아기 예수님을 찬양했다. 그러나 그들은 그 자리에만 머물지 않았다. 그 기쁜 소식을 안고 다시 삶으로 돌아갔다. 기쁨의 날을 이어가기 위하여 다시 양을 치던 자리로 돌아갔다. 목자들은 성탄의 기쁨을 장소에 국한시키지 않았다. 시간 속에 남겨 놓지 않았다. 그들의 삶의 터전으로 다시 옮겨 놓았다. 그래서 이들을 통하여 구유에 임한 그리스도의 영광이 온 이스라엘에 전해졌다. 오늘 우리는 거룩한 성탄을 한 날, 한 장소에 국한 시키고 있다. 특정한 시간과 장소 속에서 성탄의 의미를 축소시키고 있다. 성탄의 영광과 기쁨이 삶의 전 시간과 장소에 울려 퍼지지 못하고 있다. 주님은 우리에게 목자들처럼 다시 삶의 자리로 돌아가 구주와 주님 되신 그리스도를 전하라 말씀하신다. 일년 365일을 거룩한 날도 만들라고 한다. 모든 날이 기쁨의 날, 경배의 날이 되어야 한다. 이제 시간과 공간 속에 주님의 모습과 구주의 모습을 가두어 놓지 말고, 모든 숨 쉬는 삶의 자리로 나가야 한다. 모여 있는 삶이 아니라 흩어지는 삶을 살아야 한다. 흩어져서 영광을 재현해야 한다. 정치, 경제, 문화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주님 되심과 구주되심을 전하고 그의 영광을 삶에서 나타내야 한다. 이럴 때 성탄의 영광은 온 대지를 비추게 된다. * 결론 주님을 향한 참된 응답은 주님이 중심이 된 삶에서 일어날 수 있다. 환경과 자신이 아닌 주님의 나라와 의에 초점을 맞추어야 한다. 여기에서부터 거룩한 응답이 시작된다. 자기 자신이 중심이 된 응답에서는 어두음이 나타나지만, 주님이 중심이 된 응답은 하나님의 나라를 드러내며 어두운 세상에 빛을 비출 수 있다. 그리고 하나님의 뜻을 발견하며 우리가 상상할 수 없는 사건들을 경험할 수 있다. 거룩한 성탄을 맞아 목자들은 이 일을 이루어 내었다.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고, 거룩하신 주님께 경배와 찬양을 드리고, 삶으로 그 기쁨을 이어갔다. 주님은 오늘도 이러한 거룩한 응답을 우리에게 요구하신다. 주님의 오심에 대해 목자들과 같은 거룩한 응답이 있을 때, 칠흑 같은 어두운 세상은 가장 밝은 날이 될 수 있다. * 정장복, 2000년도 교회력에 따른 예배와 설교 핸드북, 홍성사, 1999, pp. 138-142 ④ 제목: 그리스도, 크리스마스 성구: 디도서 2:11-14 1. 본문 해설 마르틴 루터는 디도서에 대하여 이렇게 평가하였다. “디도서는 작은 채이지만 기독요인이 알아야 할 모든 지식과 생활이 포함되어 있다” 디도는 그레테 섬에서 선교하고 있었다. 그레테는 그리스 남쪽 지중해에 위치한 큰 섬이다. 고대 지중해 문명의 발상지 중의 하나로서 오천 년 전에 미노안(Minoan) 문명이 꽃을 피운 곳이다. 그들은 비옥한 육지를 찾아 가나안 땅에 상륙하여 무력으로 땅을 점령하였고, 이스라엘을 괴롭힌 블레셋 사람들의 원조이다. 그들은 난폭하고 호전적인 백성이었다. 그리스 시인 호머가 “회오리치는 파도와 옥토를 정복하는 그레테 사람들, 아흔 개의 고을을 그 발 아래 두었나니”라고 읊은 것처럼, 지중해 지방의 강자로 활동하던 사람들이다. 이런 곳에서 전도하는 디도의 어려움은 매우 컸으리라 여겨진다. 그런 디도에게 바울은 격려하기 위해 이 편지를 쓰고 있는 것이다. 본문인 디도서 2:11-14은 구속사적 근거를 제시하고 있다. 구원의 은총을 소유하게 된 결과로 정신을 차려 바르고 경건하게 살게 된다는 것이다. 본문의 내용을 살피면 다음과 같다. 1) 구원은 모든 사람을 향하여 베풀어졌다. 구원은 전 인류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이다. 인간의 조건에 제한 받지 않는 대속의 사건으로서의 예수 그리스도를 의미한다. 그리스도의 대속적 죽음의 가치는 죄 때문에 하나님과의 관계가 단절된 모든 사람에게 해당되는 것이다.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란 구원받은 성도들이 구원받기 이전 죄인의 상태에 있을 때에 하나님 앞에 내 놓을 공로나 의가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죄로부터 건지시고 영생을 허락하신 것을 말한다. 또한 은혜란 하나님의 자비를 뜻한다. 인간들을 구원하시겠다는 자비하신 그 뜻, 은혜가 인격화하여 나타난 것이 복음이다. 2) 그렇다면 하나님을 믿는 성도가 이 세상에 살면서 가져야 할 태도는 세상에서 경건치 않은 것과 세속적인 욕심을 다 버리고 근신함과 의로움과 경건함이다. 버려야 하는 세상의 모습으로는, 경건치 않은 쾌락이나 소유에 대한 무절제한 욕망과 부도덕한 마음, 우상숭배 등이고 갖추어야 하는 태도는 절제와 의로움,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모습과 함께 영생의 소망이다. 따라서 천국에 들어갈 소망을 가진 성도들은 모든 생각과 행동을 지켜보시는 하나님 뜻, 근신함, 의로움, 경건함으로 살려고 힘써야 한다. 3) 이런 성도들을 하나님은 양육하신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자녀들을 영생의 소망을 이루는 날까지 바르게 살아가도록 가르치신다. 하나님께서 같이하신다는 뜻으로 이러한 훈련의과정 가운데에서 인도하기ㅗ, 도우시고, 훈계하신다는 의미이다. 구원을 받고 양육을 받은 서오들은 이 세상에 살면서 복된 소망과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이 나타나심을 기다린다. 복된 소망이란 영생에 대한 확신과 소망을 뜻한다. 또 송도들이 기다리는 것은 약속하신 대로 다시 오시는 그리스도이다. 그는 온 세상을 평화와 공의로 다스려 당신의 백성들을 위로하시며 기쁘게 하실 것이다. 이 같은 모습으로 오실 그리스도를 기다리는 성도의 소망은 영원히 변하기 않고 견고한 산 소망이다. 그리스도께서 죄인들을 대신하여 죽으심은 인간들을 모든 죄로부터 건지시고 깨끗하게 하셔서 선한 일에 열심을 기울이는 그의 친백성으로 만들기 위해서이다. 죄 가운데 죽을 수밖에 없던 인간들을 대신하여 죄 없으신 그리스도께서 대신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인간들ㅇ르 죄로부터 깨끗케 하셨다. 그 결과로 구속받은 자들은 이전과 달리 용서받은 새로운 피조물이 되었고 의롭게 되었으며 하나님의 자녀라는 지위를 갖게 되었다. 이 같은 구속 받은 자들은 하나님의 친백성으로서 하나님을 위하고 그의 뜻대로 살아야 하는 특별한 백성이 되었다. 그리므로 하나님의 친백성이 된 성도들은 그 신분에 맞게 행동하여 모든 일에 하나님의 정의와 사랑을 나타내도록 힘써야 한다. 설교 제목: 그리스도, 크리스마스 서론 하나님에게는 모든 사람이 특별하다. 이것을 말해 주는 것이 성탄이다. 알게 해 주는 것이 성탄이다. 인간은 자신에게 특별한 사람이 있어 그를 특별하게 대한다. 그런 인간에 대한 특별한 감정과 대접을 하나님은 예수를 통해 우리에게 하셨다. 그것을 우리는 구원과 영생이라 부른다. 모든 인간은 하나님께 특별한 감정을 가질 수 있다. 그럴 자격이 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모주건, 늘 열려 있다는 사실을 확인한 사건이 성탄이다. 잊혀진 아버지, 잃어버린 하늘나라를, 상실한 존재 근원을 다시 인간에게 회상시키고 회복시키며 동시에 하늘 아버지와 인간을 이어놓는 가교가 성탄이다. 본론 1. 예수의 별멍이 임마누엘이다. 이 히브리 말은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란 뜻이다. 오늘 이 순간에도 우리의 가슴 속에 베들레헴 마을이 있고 아기 예수가 누웠던 말 구유가 있다면 비단 12월 25일이 아니더라도 언제나 크리스마스가 될 수 있을 것이다. 누구에게서 먼저 시작되었는지 모르겠으나 일년 내내 ‘매리 크리스마스’라고 인사하는 사람들이 있다. 거룩한 주님을 농담의 재로로 사용한다는 곱지 않은 시선과 비난에 대해 “매일매일 성탄이란 아주 좋은 일 아니냐?”고 오히려 진지하게 대답한다. 이와 비슷한 예화가 있다. 미국의 유명한 설교가이던 존슨 목사의 회고담이다. 크리스마스를 앞두고 맏아들 하워드가 교통사고로 세상을 떠났다. 크리스마스 이브 저녁 식탁에서 둘째 아들이 불쑥 말했다. “하워드가 하늘나라에 가서 처음 크리스마스를 지내겠지?” 그랬더니 막내가 얼른 이렇게 말하였다. “바보 같은 소리하지 마, 하늘나라에선 매일 크리스마스런 어린 막둥이의 말을 듣고 존슨 목사는 잠에서 깬 듯이 얼굴을 번쩍 들었다고 한다. 성탄의 기쁨과 감격은 날마다 어떤 환경에서든 우리의 것이 되어야 한다. 아기 예수는 날마다 우리 마음속에서 새롭게 탄생되어야 한다. 그래서 나의 영원한 친구가 되어야 한다. 아기 예수는 추운 겨울에 오셨다. 그래서 추위에 떠는 사람들의 친구가 되셨다. 아기 예수는 외롭게 태어났다. 그래서 고독한 사람들의 동료가 되셨다. 아기 예수는 밤하늘의 큰 별과 함께 태어나셨다. 그래서 길 잃어 방황하는 인류의 등대가 되셨다. 아기 예수는 “하늘에는 영과, 땅에는 평화‘라고 노래하는 천사의 합창을 자장가로 하여 태어나셨다. 그래서 불화와 전쟁으로 스스로를 지옥에 넣는 인간들에게 사랑의 중보자가 되셨다. 크리스마스는 가장 위대한 자가 가장 보잘것없는 사람처럼 태어난 생일이다. 크리스마스는 온 천하를 소유한 가장 부유한 왕이 가장 가난한 자처럼 태어난 날이다. 2. 곽노순 목사의 ‘신의 정원’이란 묵상집에 ‘그리스도, 크리스마스’라는 제목의 시가 있다. “여물통에서 형틀로 이어지는 한 일생을 보라! 불우하게 시작하여 비운으로 막을 내리면서도 아무의 동정도 구하지 않고, 아무도 원망하지 않은 여정을 우리는 그리스도라 부른다. 아무것에도 얽매이지 않은 채 존재에 대한 신뢰 삶에 대한 성실 인간에 대한 사랑으로 일관된 저 일생을 보라! 형장으로부터 외양간 이전의 높은 곳으로 다시 환원하는 큰 원이 우리들에게서도 같은 공명이 일어나기를 기다리고 있다. 이 초대와 선물을 크리스마스라 한다” 마굿간에서 나신 예수를 생각하여 보자. 십자가에서 돌아가신 예수를 생각하여 보자. 불우한 시작이며 비운의 맺음이다. 동정을 구함이나 원망함 없이 이 땅에서 사신 예수님 그분을 그려본다. 자유와 사랑, 믿음과 정직으로 살아가시지 않으셨는가! 십자가에서 하늘 보좌로 올라가심이 있었듯이, 예수님의 오심은 우리의 본래의 고향으로 돌아감을 드러내시려는 사건이다. 크리스마스는 우리를 자유와 사랑, 진리와 믿음 그리고 구원으로 부르시는 하나님의 초대이며 선물이다. 3. 곽노순 목사의 같은 채에서 ‘지구를 떠날 때 빚을 조금은 갚는 추억이 있게 된다면’이란 제목의 시가 있다. “기차에 탔을 때 옆에 앉은 할머니 한 분이 아들을 만나고 가는 길이라고 입을 떼면서 과자를 꺼내 권한다. 30년 전에 다니던 골목을 찾으려 한참 서성대는데 아주머니 한 분이 뉘댁을 찾느냐고 물어온다. 비행기 안에서 잠이 들었다. 눈을 떠보니 담요 한 장이 무릎 위에 잘 덮여 있다. 다 큰 자식이 한 밤중에 돌아와도 어머니는 일어나 ‘이제 오나?’하신다. 아는 젊은 분 하나는 내가 청하기도 전에 이제는 어머니 산소에 다녀오셔야 하지 않겠느냐면서 동행을 청한다. 생각지도 않을 때 분에 넘치는 선물을 받는다. 우리는 얼마나 남의 사랑을 받으며 살아가는가? 일생 동안 얼마나 많은 빚을 지고 살아가는가? 조용한 미소 따뜻하게 잡아 주는 손 말없이 그저 옆에 서 주는 사람 아마도 하나님은 수줍으셔서 이런 여러 사람의 얼굴 뒤에 숨어서 이렇듯 나를 사랑하는가 보다. 지구를 떠날 때 빚을 조금은 갚는 추억이 있게 된다면 얼마나 좋을까?” 받아야 할 사랑만 세고 있으면 어떡하는가? 일생 동안 받은 사랑을 세어 보면서 사랑의 빚이 내게 수북하게 있다고 여기면서 사랑의 빚을 갚으려고 해야 한다. 내가 받은 사랑을 어떻게 갚을까? 받기만 하여서야 되겠는가? 내게 사랑을 준 그분을 바라보면서 그분에게 진 사랑의 빚을 조금은 갚으려 하여야 한다. 성탄은 하나님께서 육신을 입고 인자 예수라는 얼굴 뒤에 숨어 사랑하며 살러 오신 복의 날이다. 또한 우리에게 네 뒤에 숨어 사랑하자고 우리를 앞세우심을 시작하신 날이다. 교회는 하나님의 숨은 사랑이 사람들의 영혼에 물들여지는 곳이다. 성탄에 우리는 하나님의 사람이 된다. 결론 사랑, 사랑, 사랑이 성탄이다. 하나님이 인간을 어여삐 여겨 우리와 함께 거하시고, 그것을 알리며 축하한 날이 성탄이다. 하나님의 사랑 속에 우리가 있으며 세상이 있다. 영원한 생명과 함께. * 1998년 교회력에 따른 예배와 강단, 김종렬 엮음, 대한기독교서회, 1997, pp.520-526 ⑤ 제목: 참된 복의 삶 성구: 누가복음 1:39-56 사람은 누구나 나름대로의 꿈과 이상이 있지만, 궁극적 목표는 복된 삶에 대한 열망으로 초점이 모아집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을 축하하고 기뻐하는 이유도 예수 그리스도께서 모든 인류에게 구원과 복을 주시기 위해서 오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세월이 흐를수록 영적 부패를 부추기며 분별력을 잃어버린 비도덕적인 문화 상품이 판을 치는가 하면, 다양한 점술 프로그램이 신문이나, 전화정보, 인터넷 등을 통해 쉽게 접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인간은 이성적이고 도덕적인 행동을 부단히 추구하면서도 한치 앞을 내다보지 못하는 나약한 존재이기 때문일 것입니다. “너희는 돌아보아 하나님 은혜에 이르지 못하는 자가 있는가 두려워하고 또 쓴 뿌리가 나서 괴롭게 하고 많은 사람이 이로 말미암아 더러움을 입을까 두려워하고 음행하는 자와 혹 한 그릇 식물을 위하여 장자의 명분을 판 에서와 같은 망령된 자가 있을까 두려워하라”(해 12:15-16). 성탄절을 맞아 엘리사벳을 찾아간 마리아의 이야기를 통해서 “참된 축복의 삶은 어떤 것일까?”를 생각하며 은혜를 나누려고 합니다. 1. 하나님의 은혜를 입는 것입니다. 마리아는 수많은 여인들 가운데 하나님의 아들을 잉태할 수 있는 사람으로 하나님의 은총을 입었습니다. 천사가 마리아에게 “성령이 네게 임하시고 지극히 높으신 이의 능력이 너를 엎으시리니 이러므로 나실 바 거룩한 자는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으리라”(35)고 했습니다. 마리아가 잉태하여 낳은 아들은 지극히 높으신 이의 아들이라 일컬을 것이고 그들의 조상인 다윗의 왕위를 이 아들에게 주실 것이며 그는 영원한 왕이 될 것이며 그 나라는 무궁할 것이라고 알려주었습니다. 그러니 이 얼마나 영광스러운 일입니까? 사람들은 하나님 중심의 은총을 생각하지 않고, 자기 중심의 은총을 구하기 때문에 문제가 생깁니다. 그러나 마리아는 달랐습니다. 마리아의 삶의 중심은 언제나 하나님이었습니다. 마리아는 “내 영혼이 주를 찬양하며 내 마음이 하나님 내 구주를 기뻐하였음은 그 계집 종의 비천함을 돌아보셨음이라”고 노래했습니다. 처음 수태고지를 들었을 때의 두려움은 사라지고 감격과 기쁨이 그의 영혼 속에 가득 차고 넘쳤습니다. 나사렛 한 촌에서 가난하고 비천하게 사는 마리아에게 임한 은혜는 정말 감당하기 어려운 큰 영예였습니다. 마리아는 받을 만한 자격이 있어서가 아니라 “주께서 나를 돌아보셨기 때문”이라고 고백합니다. 겸손은 하나님의 은혜가 머무는 심령의 샘입니다. 이제 하나님의 은혜 아래 있는 마리아에게는 ‘계집 종’도 ‘비천함’도 사라지고 ‘성모 마리아’만 남게 되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의 선택하심을 입은 것이 복입니다. 하나님의 자녀로 선택받은 것이 복입니다. 더구나 하나님을 위해 일할 수 있는 동역자로 선택하심을 입은 것 참된 복인 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동역자’(고전3:9)가 되었다는 이 사실이 얼마나 감격스럽습니까? “우리가 하나님과 함께 일하는 자로서 너희를 권하노니 하나님의 은혜를 헛되이 받지 말라”(고후 6:1) 2. 하나님의 섭리에 순종하는 것입니다. 마리아와 엘리사벳은 서로 비슷한 시기에 임신을 하였고, 그 임신은 특별한 임신이었습니다. 이 두 사람의 임신은 하나님의 섭리에 따른 임신이었습니다. 본래 엘리사벳은 아이가 없었습니다. 엘리사벳은 제사장 사가랴의 아내였습니다. 그들은 매우 경건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나 늙을 때까지 이들에게는 자식이 없었습니다. 히브리인들에게 자식이 없다는 것은 커다란 수치였습니다(창30:1). 그래서 엘리사벳은 “주께서 내 수치를 벗겨 주셨다”고 하나님을 찬양했습니다(25). 엘리사벳은 이토록 힘들고 어려운 기도와 기다림을 통하여 임신에 이른 것입니다. 이 아이가 바로 세례 요한이었습니다. 내가 생각하는 복과 하나님이 원하시는 복 사이에는 많은 간격이 있을 수 있습니다. 나이 많을 때까지 아이를 낳지 못했던 엘리사벳의 심정이 어떠했을까? 견디기 힘든 고통의 연속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특별한 섭리가 있었기에 그렇게 하신 것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 거룩한 여인에게 자식 낳는 복을 오랫동안 늦추셨지만 비범한 자식을 주심으로 그들의 슬픔을 몇 배로 갚아주셨습니다. 또 인간적으로 보아 출산이 불가능한 나이에 엘리사벳은 세례 요한을 낳아 하나님의 능력을 몇 배로 증거하게 되었습니다. 마리아를 살펴봅시다. 마리아는 처녀였습니다. 겨우 약혼만 한 상태였습니다. 하나님은 이런 사람에게 성령 잉태를 통보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약속과 성취사이에는 커다란 장벽이 있음을 우리는 압니다. 사실 앞으로 태어날 아기에 대한 천사의 말은 마리아의 삶과 존재의 모든 방향을 변화시킬 뿐 아니라 신앙의 고통을 가져오는 일이었습니다. 만약 이 천사의 말을 믿었다가 잘못된다면 이 처녀의 장래에는 어떤 비극이 오겠습니까? 얼마든지 충격 받을 만한 일이었습니다. 약혼은 무시될 수도 있습니다. 집밖으로 끌려내 돌에 맞아 죽을 수도 있습니다. 나사렛이란 작은 동네 사람들이 이 일에 대해서 무엇이라고 말할까 두려워 자살이라도 생각할 만큼 심각한 문제였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리아는 “주의 계집종이오니 말씀대로 내게 이루어지이다”(38)하고 순종하였습니다. 마리아는 하나님의 섭리를 믿었습니다. 믿음의 생활은 세상으로부터의 고립의 생활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적극적으로 헌신하는 생활입니다. 또한 우리는 자기를 포기함으로써 헌신하고, 헌신의 은총에 복종하며 살 때에만 헌신의 삶을 살 수 있습니다. 헌신의 생활은 하나님의 섭리 속에서 이루어져야 합니다. 그렇지 않다면 아무리 열심히 봉사한다고 해도 하나님께 헌신하는 생활이 아니라 자기만족의 생활에 지나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마리아는 더 큰 은혜, 더 큰 복을 위해 적은 것을 희생하기로 했습니다. 남편 될 사람으로부터 버림당한다 해도, 사람들로부터 비웃음과 손가락질을 받는다 해도 하나님의 섭리를 믿고 따르기로 했습니다. 마리아는 두렵고 떨리는 일이었으나 믿음으로 받아들였습니다. 마리아는 그 일이 힘들고 어려운 일일지라도 하나님께서 원하신다면 기꺼이 순종했습니다. 마리아는 하나님의 섭리에 순종함으로 ‘주님의 어머니’가 되었고, 이 땅의 여인들 중에서 가장 큰 여인이 되는 복을 받았습니다. 하나님의 섭리를 믿고 따를 수 있는 것이 복입니다. 3. 하나님께 복을 받는 것입니다. 천사로부터 수태고지를 들은 마리아는 즉시 세례요한을 잉태한 엘리사벳을 찾아갑니다. 이때 세례요한은 복중에서 마리아의 복중에 있는 예수 그리스도를 알아보고 기뻐했는데 엘리사벳도 성령에 감동되어 마리아가 메시아를 잉태하고 있음을 크게 기뻐하며 그녀를 축복합니다(41-45). 특히 성령의 감동으로 엘리사벳은 마리아에게 “내 주의 모친이 내게 나아오니 이 어찌 된 일인고”(43), “믿은 여자에게 복이 있도다 주께서 그에게 하신 말씀이 반드시 이루리라”(45)고 했습니다. 마리아도 자신의 임신에 대하여 ‘하나님의 은혜’로 인정하였습니다. 그가 당장 현실에서 당할 고통과 그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은총 중에서 그녀는 하나님의 은혜를 택한 것입니다. “보라 이제 후로는 만세에 나를 복이 있다 일컬으리로다”(48). 마리아는 믿음의 눈으로 장래를 바라보았습니다. 비록 결혼은 파국으로 끝나고, 사람들은 자기를 비웃고 욕한다고 할지라도 하나님은 자기를 존귀케 하시리라는 믿음을 가졌습니다. 세상에서는 비천한 자신이지만 이제 후로는 모든 사람이 자신을 부러워할 것이며 하나님께서 영원히 존귀케 해주심을 생각하면서 찬양하고 있는 것입니다. 내가 높아지려고 하면 하나님은 여지없이 꺾으시지만 하나님이 높여주실 때 막을 자가 없습니다.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시고 모든 사람을 그 발 앞에 무릎 꿇게 하셨습니다. 마리아는 믿음의 눈으로 이것을 바라보고 찬양하였습니다. 실로 마리아의 잉태는 엄청난 희생을 각오한 모험이었지만 하나님은 그를 존귀케 해주셨습니다. 파혼을 각오했지만 요셉은 마리아를 버리지 않았습니다. 돌에 맞고 침 뱉음 당하는 수모를 각오했지만 누구도 그녀를 욕하지 않았습니다. 그녀의 희생과 헌신을 통하여 하나님의 아들이 이 땅에 태어나셨습니다. 마리아의 찬양은 계속됩니다. 하나님은 교만하고 권세 있는 자를 물리치시고 비천한 자를 높이시며, 주리는 자들을 좋은 것으로 배불리셨으며 부자를 빈손으로 돌려보내십니다. 이 노래를 통해 우리는 도덕적, 사회적 그리고 경제적 각성을 촉구하게 됩니다. 회개해야 합니다. 변화가 있어야 합니다. 복된 삶은 현실에서 하나님의 듯을 발견하는 데서부터 시작됩니다. 마리아가 지극히 평범한 쳐녀이었음에도 가장 큰 여인이 될 수 있었던 것은 그녀가 하나님의 뜻을 발견했기 때문입니다. * 목회정보 자료집 ‘강단과 목회’, 기독교대한감리회 본부 선교국, 1996, pp.664-667 |
'성탄절 종합 > 성탄절 설교' 카테고리의 다른 글
[스크랩] 큰 기쁨의 좋은 소식 (0) | 2023.12.17 |
---|---|
[스크랩] 예수님이 주신 평화의 선물 누가복음 2:1-14 (0) | 2023.12.17 |
[스크랩] 올바른 성탄절 (0) | 2021.12.25 |
[스크랩] 성탄의 선물 (마 2:1-12) - 황금과 유향과 몰약 (0) | 2021.12.23 |
[스크랩] 송년주일설교. 와서 보라, 더 큰 일을 보리라 (요한복음 1장35-42절) (0) | 2021.12.2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