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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서사로 성경읽기(구약): 역동적 독서행위로서의 서사비평

에반젤(복음) 2023. 2. 8. 17:11
서사로 성경읽기(구약): 역동적 독서행위로서의 서사비평
한국성서학연구소 주최 ‘교회 위한 성서해석’ 학술대회
 
 
 
이종록 교수 / 한일장신대학교 구약학
여는 글


존 바스(John Barth)가 1967년에 “고갈의 문학”(The Literature of Exhaustion)이라는 글 1) 에서 (전통적)소설의 죽음을 선언한 이후로, 사람들은 서사(敍事) 2) 의 죽음을 말했다. 3) 그러나 이런 부정적인 평가를 내린 1960년대와는 달리 현대는 서사의 시대이다. 4) 비록 소설(小說)이 위기에 처하긴 했지만, 5) 서사는 다양한 문화영역에서, 그리고 일상생활뿐만 아니라 철학 사상에 이르기까지 각종 담론(談論)들을 이해하는 형식으로 부각되기 시작했다. 6) 그러므로 이 시대를 “서사문화의 시대”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서사문화의 시대란 이처럼 서사가 소설 같은 허구물이 아니라 우리의 문화적 삶 자체의 형식임을 인정하는 시대를 말한다. 반대로 말하면, 우리의 삶은 단지 과학에 냉정하게 지배되는 것이 아니라, 과학을 존중하면서도 또한 그것을 넘어서서 소설이나 영화 같은 서사형식으로 이루어져 나간다는 뜻이다. 7)
삶이 지속하는 한 서사는 결코 쇠퇴할 수 없다. 그 까닭은 서사의 쇠퇴와 소멸이 삶의 쇠퇴와 소멸을 가리키기 때문이다. 유명한 󰡔천일야화󰡕(千一夜話, 아라비안나이트)는 이야기의 계속은 삶이고, 이야기의 중단은 죽음임을 잘 보여준다. 8) 이야기와 삶이 갖는 긴밀한 관계를 이렇게 말할 수 있다.
사람이 사는 곳에 이야기가 있으며, 삶이 있는 곳에 이야기가 있다. 삶이란 곧 이야기로 구성되어 있다. 신문에 실린 사건들은 모두 이야기이고, 역사라는 것도 모두 이야기이다. 이야기를 통해서 모든 관계는 이루어지고 모든 문제는 해결된다. 우리는 이야기와 더불어 산다. 이야기가 끝나는 곳에서 삶도 끝난다. 아이는 수많은 이야기를 통해서 세상을 배운다. 사람들은 이야기의 부재나 이야기의 실종 속에서 아무 것도 알 수 없고 또 할 수 없다. 9)
삶 자체가 바로 서사이고, 서사는 삶을 형성하고 삶을 표현하는 가장 기본적인 방식이다. 10) 
  이야기와 삶이 갖는 이러한 근본적 관계성은 기독교에서도 마찬가지로 나타난다. 기독교는 성경을 중심하는 책의 종교인데, 성경은 수 많은 이야기들을 모은 것이다. 이것은 기독교가 서사적 종교임을 말하고, 성경서사가 없으면 기독교도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기독교 역사는 서사서술역사이다. 기독교는 유대교로부터 방대한 서사인 구약성경을 전달받았고, 구전들을 기술하고 새로운 글쓰기를 통해서 신약성경이라는 서사를 만들어 구약성경과 결합함으로써 방대한 서사 텍스트를 엮어냈다. 그리고 그 이후로 지금까지 기독교는 성경서사와 기타 서사들을 시대에 따라 여러 미디어를 사용하면서 다양한 서사 형태로 표현해왔다. 11)


이런 점에서 서사에 대한 연구는 문학을 비롯한 여러 분야에서, 특히 기독교 신앙에서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그렇기에 이 글에서는 가장 근본적 독서행위인 “(성경)서사비평”(敍事批評)을 다루려고 한다. 먼저 독서(讀書)가 무엇인지를 살필 것인데, 역동적 상호작용(相互作用)으로 의미(意味)를 발생시키는 서사비평이라는 성경독서가 매우 윤리적인 행위임을 말하려 한다. 그리고 서사가 무엇인지 규명할 것이고, 그런 다음, 서사비평을 구체적으로 어떻게 하는 것인지를 구약성경본문 세 개를 읽으면서 확인하려고 한다.


I. 독서란 무엇인가?
우리는 성경을 읽을 때, 성경을 읽는다는 것이 주관․객관의 신화를 넘어서는 역동적인 “독서행위”(讀書行爲) 12) 라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독서행위는 단순한 텍스트 반복생산에 그치지 않고, 텍스트를 매개로 서술행위(敍述行爲) 13) 와 (또 다른 서술행위인) 독서행위가 만나는 다면적인 상호작용을 통해 새로운 텍스트를 발생시키는 지극히 생산적인 작업이다.


허구적 공간에서의 인간과 세계의 상호작용은, 우리의 내면에서의 주체와 객관세계의 상호작용으로 전이되며, 그 순간 세계에 대한 인식은 무의식적인 자기인식으로 내면화된다. 14)
그래서 독서행위는 결코 일방적이지 않다. 독서행위는 저자, 텍스트, 그리고 독자가 양방향으로 엮어내는 상호작용이다. 15) 그래서 의미는 저자, 텍스트, 독자, 이 셋 중 어느 한곳에 존재하는 것 16) 이 아니라, 이 세 가지가 아우르고 충돌하는 상호교류적인 독서행위를 통해서 발생한다. 이런 점에서 독서행위는 하나의 사건, 즉 시뮬라크르(simulacre) 17) 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독서행위는 초월적(超越的)이다. 독서라는 행위는 문자를 읽는 것이지만, 문자를 넘어서게 하기 때문이다. 이것은 은유와 상징에서도 나타난다. 은유와 상징이라는 언어적 기능은 제한된 언어를 통해서, 그것을 넘어서는 무엇인가를 말하기 때문에 초월적이다. 독서가 보여주는 이런 초월성이 궁극적으로는 문자를 넘어 영적인 경험에 이르게 한다.


또한 독서행위는 대단히 인위적(人爲的)이다. 우리 앞에 놓인 성경은 독서행위 이전에는 그저 한권의 책일 뿐이다. 물론 오랜 세월 동안 수많은 사람들이 성경을 읽고 거기서 하나님 말씀을 듣고 실천해왔기 때문에, 전체적인 측면에서 성경이 하나님 말씀이라는 게 상당히 보편적인 명제이긴 하지만, 우리 앞에 놓인 개별 성경은 독서 이전에는 그저 책일 뿐이다. 오직 독서행위를 통해서만 개별 성경은 비로소 책을 넘어서고, 그 독서행위 과정에서 하나님 말씀이 출현한다. 18) 여기서 우리가 명심해야 할 것은 우리가 성경을 읽을 때, 성경이 우리를 강제적으로 통제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오히려 각 개인 그리고 그들이 속한 공동체가 어떤 성향을 갖느냐에 따라 독서결과가 달라진다. 그래서 동일한 성경을 읽으면서도 독자의 성향, 즉 이데올로기에 따라 독서결과는 정반대로 나타날 수 있다.

런데 기독교 역사를 되돌아보면, 불행하게도 기독교인들은 성서를 오해하고 오용(誤用)했다. 19) 특히 근대에 들어오면서 서구 기독교회는 선교 제국주의에 사로잡혀, 아시아와 아프리카, 남아메리카를 침략하고 식민지로 삼았는데, 그들은 다른 나라를 침략하는 근거를 성서에서 찾았으며, 다른 민족들을 무자비하게 학살하는 데에도 성서를 인용했다. 아메리카에 건너간 청교도들이 인디안들을 학살하고 그들로부터 땅을 빼앗고 국가를 세우면서도 성서를 인용해서 자신들의 추악한 행동을 합리화했고, 20) 흑인들을 노예로 부리면서도 그들의 비인간적인 행위를 성서를 통해서 정당화했다. 21)


이렇듯 성경독서를 포함하는 모든 독서행위는 인위적이고 이데올로기적일 수밖에 없다. 그래서 독서행위를 독자가 스스로 통제해야 한다. 독서행위는 인간이 행하는 다른 행동들과 마찬가지로 윤리적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22) 특히 성경독서는 다른 어느 것보다 윤리적이고 신앙적이어야 한다. 23) 성경을 읽으면서 거기서 하나님 말씀을 들어야 하고, 그 말씀에 순종하는 삶을 살아야 하다. 여기까지가 독서행위여야 하는 것이다. 즉 성경도 텍스트이고 우리 삶도 텍스트라는 것이고, 우리는 성경을 읽으면서 동시에 우리 삶도 읽어야 한다는 것이다.


Ⅱ. 서사란 무엇인가?
I장에서 우리는 저자, 텍스트, 독자, 이 셋 가운데 어느 한 곳에 담겨 있는 정태적 의미(meaning)를 찾는 게 아니고, 저자, 텍스트, 독자가 어우러져 상호작용하는 독서행위가 역동적 의미(significance)를 발생시킨다는 사실을 살펴보았다. 여기서는 ‘(성경)서사’(敍事)가 무엇인지를 알아보려고 한다.


1) 서사
서사란 허구 또는 실제의 사건이나 행위를 묘사(描寫)하기 위해 이야기 구조(narrative structure)로 설명하는 것이다. 24) 그래서 넓은 의미의 서사란 이야기를 지닌 모든 것들을 가리킨다.
세상에는 무수히 많은 서사물들이 있다. 무엇보다도 서사는 놀랄 만큼 다양한 장르들로 이루어져 있는데, 그것들 각각은 마치 어떤 재료라도 인간의 스토리를 담아내기에 적합하다는 듯이 다양한 매체와 형식들로 구성되어 있다. 분절 언어(음성언어와 문자언어), 영상(정지된 그림과 동영상), 몸짓, 그리고 이 모든 매체들이 혼합된 일련의 연쇄 등이 가능하다. 서사는 신화, 전설, 우화, 소설류, 서사시, 역사, 비극, 드라마, 코미디, 마임, 회화(카르파치오의 성 우르술라 연작화를 생각해보라), 스테인드글라스로 된 창, 영화, 만화, 뉴스, 그리고 일상의 대화 속에 들어 있다. (중략) 좋은 문학과 나쁜 문학이라는 구분과는 상관없이, 서사는 초국가적이고 초역사적이고 초문화적으로 존재한다. 그것은 인생 그 자체와 마찬가지로, 그저 거기에 있을 뿐이다. 25)


좁은 의미에서 서사는 소설을 가리키는데, 넓게 보면, 소설은 수많은 서사들 가운데 하나일 뿐이다. 26) 그래서 서사이론은 소설이론이나 비평을 포함하면서 또한 대체한다. 그런데 ‘(성경)서사비평’이 대상으로 삼는 것은 고정된 텍스트로서의 서사이다. 그래서 (성경)서사 설화와 다르다. 내러티브를 설화(說話)로 번역하기도 하는데, 엄밀한 의미에서 서사와 설화는 다르다. 최운식은 설화를 이렇게 정의한다.
설화는 개인의 창작물이 아니라 민족적 집단의 공동생활 속에서 공동의 의식에 의하여 자연발생적으로 형성된 문자(文字) 기술(記述) 이전의 구전문학(口傳文學)으로, 일정한 구조를 가진 꾸며낸 이야기이다. 27). 설화는 구전되는 이야기이기 때문에, 고정적이지 않고 가변적이며, 다양한 형태를 갖는다. 
  여기에 비해 서사, 특히 우리가 다루는 성경서사는 고정적이며 기술성을 갖는다. 기술성은 서사문학을 가능하게 하고, 세계인식과 세계경험, 그리고 자아표출을 가능케 한다.
기술성의 개념에는 필사된 글이나 인쇄된 글을 읽거나, 글을 통해 전체적인 틀을 구상하고 구성하고 작성할 때 부딪치게 되는 온갖 심리적인 국면과 인식론적 패턴 내지 사유방식 등이 포함되며, 이러한 사유체계에 의해 언표화되는 표현론적인 특징들이 포함될 것이다. 그리하여 글이 말에 비해 상대적으로 많이 갖는 성질들, 이를테면 반성적(reflective)이고 추상적․관념적이며 복잡하고 논리적인 측면들은 기술성을 판단하는 데 중요한 잣대가 될 것이며, 탈문맥화 작용을 일으키는 경향이 있다거나 객관적인 대상과 주관적인 인식을 구분하는 경향이 있음으로써 자아성찰을 가능하게 하는 사항들도 감안될 수 있을 것이다. 28)
우리는 서사 형식을 빌려 세계에 대해 생각하고 세계를 경험한다. 29) 이것이 서사적 기술행위이며 서사적 독서행위이다. “서사는 우리 모두의 사고에 영향을 미칠 뿐만 아니라, 사고방식 자체이며, 사고를 가능케 하는 유일한 방법이기도 하다. 만일 서사가 이데올로기와 밀접한 관계가 있다면, 그 말에는 우리가 서사화하는 방법-달리 말해, 우리의 사고 구조 바로 그것-이 이데올로기 그 자체라는 암시가 담겨 있다.” 30) 이렇듯 서사는 삶에서 비롯하고, 상호 작용하는 독서행위를 통해서 삶을 발생시키는데, 이 삶은 반드시 공동체적이(어야 한)다. 31)


서사적 지식은 인간을 규범에 예속된 ‘대상’의 위치에서 대화와 삶의 ‘주체’의 지위로 이동시킨다. 서사적 지식은 과학과는 달리 문화의 장에서 ‘공동체적 유대’에 우선적으로 관심을 두며, 지식의 논증방식 자체가 공동체 구성원들(주체들)간의 ‘대화’를 전제로 하는 것이다. 32)


서사는 고정적이지만, 독서행위를 통해 우리 삶으로 이어져서 새로운 서사, 새로운 텍스트를 발생시킨다. 그래서 롤랑 바르트는 작품과 텍스트를 구분하고, 텍스트를 읽는 텍스트와 쓰는 텍스트로 구분한다. 33) 모든 것은 텍스트 안에 있고, 독서행위를 통해서 의미가 발생한다고 보는 바르트는 서사에서 중요한 개념들을 이렇게 정리한다.
① 스토리: 스토리는 텍스트로부터 재구성된 일련의 서술된 사건들이고, 따라서 일종의 추상개념이다.
② 텍스트: 텍스트는 구체적이고 불변하는 생산 결과, 즉 지면에 인쇄된 단어들 외의 다른 무엇도 아니며, 서술 층위에서 이루어진 결정들의 (추론된) 결과이며, 연구자에게 있어서 텍스트의 일차적 관심사는 스토리의 차이에 있는 것으로 여겨진다.
③ 서술: 서술은 다층화된 텍스트 내적 과정, 즉 지면에 인쇄된 단어들의 (추론된) 원인이며, (스토리와 마찬가지로) 텍스트로부터 재구성된 것이다.
④ 텍스트성: 서술과 마찬가지로, 텍스트성도 하나의 과정으로, 작가가 텍스트를 생산하고 독자가 그것을 수용하는, 상호작용의 과정이다. 34)

물론 바르트적인 성향이 강하게 나타나지만, 이런 개념들은 역동적이고 상호교류적인 서사읽기에 대단히 중요하다.


2) 서사의 구성요소들
서사학자들은 서사의 층위(層位)를 다양하게 지칭하는데, 35) 기본적으로 서사는 이야기(story)와 담화(disourse)라는 두 층위를 갖는다. 이야기는 글이 되기 이전의 소재, 즉 글감이 되는 사건들을 말하고, 담화는 작가가 그 사건들을 서술하는 방식을 가리킨다. 36) 이야기는 “무엇이 일어났는가?”(what?) 37) 에 관심하고, 담화는 “어떻게 이야기하는가?”(How?)에 관심한다. 이 두 가지 층위를 가져야만 서사가 발생한다. 그런데 이러한 서사의 층위들은 개념적이고 추상적이어서 실재하지 않는다. “서술의 층위들이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다른 선결 층위들과 맺는 상호 의존 관계에 의해 단지 은유적으로만 존재한다.” 38) 두 층위들은 서술행위와 독서행위과정에서 드러난다. 서사가 갖는 이 두 가지 층위는 각 서사의 독특한 시공간(視空間. chronotope)을 만들어 내는데, 39) 이것은 독서행위를 통해 다양한 형태로 발현한다. 그리고 서사의 시공간은 실제 사건의 시공간과도 다르기 때문에, 서사의 시공간을 통해서 실제 사건의 시공간을 그대로 재현할 수도 없다.
스토리 세계, 즉 실제로 일어난 사건의 세계는 여전히 추상개념일 뿐 아니라, 그 세계의 외부에 위치한 존재들에게는 본질적으로 접근이 불가능한 세계임이 틀림없다. 독자로서 우리는 이 세계를 결코 꿰뚫어볼 수 없다.…우리가 독자로서 할 수 있는 모든 것은, 이론과는 달리 풀어쓰기(paraphrase), 다시 말하기, 즉 또 다른 담화를 제공하는 것일 따름이다. 40)
만약 실제 사건의 시공간과 서사의 시공간이 정확하게 일치한다면, 그 서사는 더 이상 서사가 아니다. 서사의 시공간은 독서행위를 통해 발현하고, 그것은 독자의 시공간과 얽혀서 색다른 시공간을 발현하고 경험케 한다. 여기서도 알 수 있듯이, 독서행위는 어디엔가 존재하는 정태적 의미를 찾아내거나 기술대상을 반복하고 재현하는 것이 아니고, 역동적 상호교류를 통해 의미를 발생시킨다. 어쨌든 서사는 이야기와 담화라는 두 가지 층위에 토대를 두는데, 담화는 네 가지 주요 구성요소를 갖는다. 41)
① 사건 - 모든 종류의 이야기 안에는 일련의 사건과 행위들이 있다.
② 인물 - 그 사건(행위)들을 일으키고 이끌어가는 인물들이 있다.
③ 배경 - 인물들이 일으키는 사건은 시․공간적, 지리적․역사적 배경 속에서 발생한다.
④ 서술자 - 모든 이야기는 화자(서술자)를 통해서 전달된다.

이것들을 서사기법으로 엮는 것이 서사적 기술행위이고, 그것을 파악하는 것이 서사적 독서행위인데, 서사기법은 반복, 대조, 비교, 인과관계와 실증, 절정, 전환, 구체화와 일반화, 목적의 진술, 복선, 요약, 질문, 포괄, 교차, 교차대조, 삽입 등이다. 42)


3) 서사적 해체
우리가 지금까지 중점적으로 다루어온 ‘독서행위의 역동성’은 저자, 텍스트, 독자가 상호 작용하는 것을 통해 전통적인 존재론(存在論)과 인식론(認識論)을 해체하는 것에서 결정적으로 드러난다.
그 같은 서사의 부활은 우리의 문화의 위치를 주체중심적이고 논리중심적인 공간에서 ‘물질적 삶의 공간’으로 이동시킨 데 따른 것이다. 사실의 형식(과학․법률 등)이나 과학적 인식 등의 점의 사유는 개인주체 내부의 논리중심적 공간이나 문화와 유리된 물질세계의 표면에 위치한다. 반면에 사사적인 선의 사유는 물질세계와 문화의 장의 접촉지점에서 작용하며, 개인주체를 넘어선 문화의 장(열린 공동체)이라는 물질적 삶의 공간에서 움직인다. 그처럼 점의 사유에서 선의 사유로, 논리중심적 공간에서 물질적 삶의 공간으로 이동함으로써, 철학과 문학, 문화와 정치학, 그리고 지식과 서사의 경계가 해체된다. 43)
이처럼 인물과 현실, 그 주체와 객체의 관계보다 사건이나 서사가 일차적이라는 생각은 들뢰즈에게서 보다 분명하게 드러난다. 들뢰즈의 경우 서사란 인물-환경의 상호작용이나 대화이기보다는 사건이 발생하는 시뮬라크르이다. 사건이란 사물들의 접속에 의해 물질과 문화의 접면에서 생성되는 것으로서, 물질세계와 (인간의) 의식세계 사이의 경계를 해체하는 시뮬라크르로서의 이미지이기도 하다. 그처럼 사물(세계)과 의식(인간)의 경계를 해체하는 사건의 시뮬라크르는, 물질적 실재(현실)나 인간의 의식(관념)에 선차성을 부여하는 실재론과 관념론의 대립을 넘어선다. 44)
의미를 발생시키는 독서행위의 역동성은 전통적인 정태적 형이상학을 넘어서서 역동적인 사건의 형이상학, 즉 시뮬라크르의 형이상학으로 나아가고, 이러한 사건의 형이상학은 역동적 인식론을 요청한다. 그리고 이러한 역동적 인식론은 타자(他者)인식 45) 이라는 윤리학적 형이상학 46) 을 추구하게 한다.


Ⅲ. 서사비평이란 무엇인가?
I장과 II장에서 우리는 독서행위가 무엇이며, 서사가 무엇인지, 그리고 이것들이 어떤 역동성을 갖는지를 살펴보았다. 여기서는 서사비평이라는 독서행위가 무엇인지를 구약성경본문 세 개를 읽으면서 알아보려고 한다.


1) 서사비평
우리가 서사를 읽는다는 것은 무엇보다 서사가 갖는 층위, 즉 이야기와 담화에 주목하는 것이다. 독서행위는 우리가 한 서사를 읽으면서, “이 서사는 어떤 사건을 어떻게 서술하는가?”를 계속 질문하는 것이다. 이것을 체계화한 것이 서사학(Narratology) 47) 인데, 이 용어를 1969년에 토도로프가 처음 사용했다. 48) 일반적으로 “서사학은 특히 서로 다른 형태와 매체로 이루어진 서사물들에 공통적으로 내재하는 보편 구조에 주목한다.” 49) 서사에 내재하는 보편구조를 밝혀내기 위해 사용하는 방식은 서사의 구조 연구, 50) 서사의 언어․문법적 연구, 그리고 서사담론 연구 51) 로 나눌 수 있다. (성경)서사비평은 서사학에서 서사담론연구에 속한다. 52)
서사의 보편구조 가운데 우리가 제일 먼저 생각해야 할 것은 전체적인 서사구성, 즉 서사전개방식이다. 대체로 서사는 “발단-전개-절정-종결,” 즉 기승전결(起承轉結)의 플롯을 취하는데, 문단나누기 작업을 통해서 드러난다. 그 다음 우리가 할 일은 ‘서사적 의사소통의 구조’를 찾아내는 것이다. 


채트먼은 모든 서사물에 공통되는 서사적 진술의 전달과정을 다음과 같이 정식화했다.
[서사텍스트]
실제작경{내재된 작경(서술자)→(수화자)→내재된 독자 53)}→실제독자

물론 앞에서 말한 것처럼, 의사전달과정은 이렇게 일방적이지 않고, 상호적이다. 이 구성요소들이 서로 어우러지면서, 서사를 이루고 전개하는데, 54) 우리는 특히 서술자(敍述者, narrator)에 주목해야 한다. 서사에서는 이야기하는 사람이 가장 중요하기 때문이다. 그런 다음 사건, 인물, 배경을 구체적으로 밝히면서 세부적인 독서를 해야 한다.
시간, 장소, 인물은 서사적 거래에서 복잡한 방식으로 상호 작용한다. 서사적 사건은 주로 시간의 기능이며, 배경은 주로 장소의 기능이며, 인물은 시간과 공간의 기능이다. 이를 달리 말하자면, 서사적 사건은 (주로) 통합축에서 작동하고, 배경은 (주로) 계합축에서 작동하는 반면, 인물은 항상 계합적 특성과 통합적 특성의 조합체란 것이다. 55)
정리해보면, 서사비평에서 중요한 개념들은 스토리와 담화, (작품 속) 서술자 (내레이터), 사건과 플롯, 등장인물, 배경 (시간적 배경, 공간적 배경)이다.


2) 서사비평의 실제(1): 민수기 11:24-30; 플롯
본문의 사건전개를 알아보기 위해서 본문의 문학적인 구조를 먼저 살펴보기로 하자.
① 발단 : 24 모세가 나가서 여호와의 말씀을 백성에게 고하고
② 전개 : 백성의 장로 칠십 인을 모아 장막에 둘러 세우매 25 여호와께서 구름 가운데 강림하사 모세에게 말씀하시고
③ 절정 : 그에게 임한 신을 칠십 장로에게도 임하게 하시니 신이 임하신 때에 그들이 예언을 하다가 다시는 아니하였더라 26 그 녹명된 자 중 엘닷이라 하는 자와 메닷이라 하는 자 두 사람이 진에 머물고 회막에 나아가지 아니하였으나 그들에게도 신이 임하였으므로 진에서 예언한지라 27 한 소년이 달려와서 모세에게 고하여 가로되 엘닷과 메닷이 진중에서 예언하더이다 하매 28 택한 자 중 한 사람 곧 모세를 섬기는 눈의 아들 여호수아가 말하여 가로되 내 주 모세여 금하소서 29 모세가 그에게 이르되 네가 나를 위하여 시기하느냐 여호와께서 그 신을 그 모든 백성에게 주사 다 선지자 되게 하시기를 원하노라
④ 종결 : 30 모세와 이스라엘 장로들이 진중으로 돌아왔더라

여기서 보는 대로, 본문은 발단·전개·절정·종결의 이야기 구조를 갖는다. 주된 사건은 성령강림이며, 칠십인의 장로들에게 성령이 임해서 그들이 예언을 하는 장면에서 이야기는 절정에 오른다. 그리고 본문은 주(主)플롯과 부(副)플롯으로 짜이는데, 주플롯은 24, 25절과 30절로 이루어지고, 26절에서 29절은 종속적인 부플롯을 이룬다. 주플롯을 보면, 모세는 하나님의 명령대로 따르고, 하나님은 모세에게 약속하신 대로 행하고, 그리고 모세와 장로들은 진중으로 다시 돌아온다. 이것이 이야기의 뼈대다. 여기에 엘닷과 메닷의 이야기가 부플롯으로 들어온다.
그리고 본문은 주로 (갈등과) 대화(의사소통)의 구조로 이루어진다. 대화와 관련된 어휘들을 찾아보면, “고하고,” “말씀하시고,” “고하여 가로되,” “말하여 가로되,” “이르되” 들이다. 이러한 대화체계는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하나님과 인간의 의사소통, 그리고 인간과 인간 사이의 의사소통이 이루어지는 것이다. 그런데 의사소통을 가능케 한 것이 바로 성령강림사건이다. 
  이런 점에서 이 사건은 초대교회에서 일어난 성령강림사건과 동일하다. 당시 성령강림은 제자들이 외국어를 할 수 있게 해서 각국에서 모여든 사람들과 의사소통이 가능케 했고, 제자들은 이를 통해 복음을 전했다. 이렇듯 이 두 가지 사건은 성령강림이 의사소통을 가능케 한다는 점에서 의미를 갖는다. 인간 사이의 문제는 주로 의사소통이 안 되서 일어난다. 그래서 의사소통은 문제해결에 매우 중요하다.


3) 서사비평의 실제(2): 역대하1-9장; 사건, 인물, 배경
① 사건과 플롯
솔로몬 이야기는 3인칭 전지적 관찰자 시점(視點)의 이야기다. 서술자는 솔로몬과 주변 인물들, 성전건축의 상세한 것들까지 다 안다. 그리고 성전건축에 동원된 사람의 수와 성전기물들과 그 숫자, 솔로몬의 재물의 종류와 숫자를 모두 기억한다. 그리고 서술자는 이야기에 깊게 참견해서, 자기 나름의 평가를 내리는 경우가 많다. 이런 점에서 이 서술자는 매우 적극적이고 참여적이다.

이 이야기는 크게 두 가지 이야기(이것을 주[主]플롯이라고 한다.)를 담는다. 첫째 이야기는 솔로몬이 기브온 산당에서 일천번제를 드리는 이야기(1:1-13)이고, 둘째 이야기는 솔로몬이 성전을 건축하는 이야기(2:1-7:22)이다. 그리고 이 두 사건에 살을 붙이는 작은 이야기들(이것을 부[副]플롯이라고 한다.)이 나오는데, 그것들은 대체로 경건한 솔로몬이 그 결과로 누리는 부귀와 영화에 관한 것이다. 솔로몬 이야기의 전체 짜임새를 보자.
첫 번째 이야기: 주플롯 1:2-13 솔로몬이 일천번제를 드리는 이야기 / 부플롯 1:14-17 솔로몬의 사역과 부귀
두 번째 이야기: 주플롯 2:1-7:22 솔로몬이 성전을 건축하는 이야기 / 부플롯 8:1-9:28 솔로몬의 사역과 부귀

솔로몬은 왕이 된 다음 기브온 산당에 올라가서 지혜를 얻는다. 그리고 나서야 예루살렘으로 돌아와 이스라엘을 치리하기 시작하고, 첫 번째 사업으로 성전을 건축한다. 이 얼마나 신앙적인 행동인가. 솔로몬 이야기에는 솔로몬의 정치와 행정적인 업적에 대한 이야기는 거의 없다. 이야기 구성에서도 알 수 있듯이, 내재된 저자는 성전 건축하는 데 모두 여섯 장(전체 분량의 3분의 2)을 할애한다. 또 모두 201절 가운데 135절이 성전건축기사다. 절수로 따지면, 성전 건축 장면이 전체의 67%를 차지한다. 그리고 1장 1-13절은 솔로몬이 기브온 산당에 올라가서 하나님께 기도하는 것이고, 8장 11-15절도 솔로몬의 경건한 모습과 성전운영에 대한 에피소드여서, 이야기의 거의 대부분이 솔로몬을 신앙적인 측면에서 묘사함을 알 수 있다. 또 서술자는 솔로몬의 범죄를 전혀 언급하지 않는다. 이런 점들을 통해서, 내재된 저자는 솔로몬을 성전건축자, 위대한 신앙인, 이상적인 인간으로 부각하려고 한다. 이처럼 솔로몬을 이상화하는 것이 내재된 저자의 의도이다.
그리고 8장 1절~9장 31절은 스바 여왕이 솔로몬을 방문한 사건을 중심으로 해서 몇 가지 이야기들을 아래처럼 묶는다. 내재된 저자는 이 이야기들을 통해서, 성전 건축한 이후에 부귀와 영화를 누리는 솔로몬의 모습을 보여주려 한다.
8:1-6 솔로몬의 성읍건축
8:7-10 솔로몬의 역군
8:11-16 솔로몬의 신앙
8:17-9:28 솔로몬의 부귀
8:17-18 솔로몬에게 후람이 금을 바침
9:1-12 솔로몬에게 스바여왕이 예물을 바침
9:13-21 솔로몬의 재산
9:22-28 솔로몬에게 각국 왕들이 예물을 바침

특히 8장 17절~9장 28절을 보면, 스바 여왕과 각국의 열왕들이 솔로몬의 지혜를 배우기 위해서 솔로몬을 찾아왔다고 서술자는 말한다. 역대하 1장~9장의 내재된 저자는 열왕기의 내재된 저자와는 달리 솔로몬의 지혜에 대한 이야기를 뒤에 함으로써, 솔로몬의 지혜보다는 솔로몬의 성전건축을 더 앞세우고, 누구든지 하나님 앞에 바로 서기만 하면, 반드시 복을 받는다는 사실을 강조하려고 한다.
한 작품에서 사건과 플롯은 그 작품의 특별한 이야기 세계를 형성한다. 솔로몬 이야기 세계에서는 왕과 백성들이 하나가 되어서 일을 하고, 모든 것이 풍요롭고 (“왕이 예루살렘에서 은금을 돌같이 흔하게 하고 백향목을 평지의 뽕나무같이 많게 하였더라” 1:15; 9:27), 평화롭다. 아무런 범죄도 일어나지 않는다. 전쟁에 대한 언급은 솔로몬이 하맛소바를 쳐서 취했다는 것이 유일하다(8:3). 파괴에 대한 언급도 없다. 그리고 이 이야기 세계에서 이스라엘은 어느 나라보다 강력하고 부강하며, 국제무대의 중심이다. 이것은 내재된 독자들이 염원하는 세상의 모습이었을 것이다. 내재된 저자는 그런 세계의 모습을 서술자를 통해서 독자들에게 들려주고 보여준다. 내재된 독자는 여기에 공감할 것이다. 실제 수신자와 독자들도 이 이야기를 읽으면서, 그런 아름다운 세상을 꿈꾸었을 것이다.


② 등장인물
- 주인공 : 이야기의 주인공은 당연히 솔로몬이다. 그런데 본문에서 묘사하는 솔로몬은 실제 솔로몬이라기보다는 이야기 세계 속의 솔로몬이다. 우리는 솔로몬을 이야기 세계 속에서 만난다. 문학적으로 볼 때, 역대기의 솔로몬은 실제 솔로몬과도 다르고, 또 열왕기의 솔로몬과도 다르다. 동일한 인물도 어떻게 묘사하느냐에 따라서 다른 인물이 된다. 역사비평은 성경본문을 넘어서 역사적으로 존재했던 하나의 솔로몬을 찾아내려고 하지만, 서사비평은 그럴 필요가 없다. 열왕기의 솔로몬과 역대기의 솔로몬을 조화시키고, 또 역사적인 연구결과를 따를 필요도 없다. 우리는 솔로몬 이야기를 읽으면서, 그 이야기 세계 속으로 들어가면 된다.

솔로몬 이야기는 솔로몬의 모노드라마라고 할 정도로, 솔로몬만 부각한다. 내재된 저자는 솔로몬이 모든 것을 다 한 것으로 묘사한다. 실제로는 솔로몬이 그 모든 일들을 직접 한 것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내재된 저자는 서술자를 내세워서, 그 모든 일들을 마치 솔로몬이 혼자서 한 것처럼 이야기하게 한다.
가. 솔로몬이 예루살렘 모리아 산에 여호와의 전 건축하기를 시작하니 (3:1)
나. 솔로몬이 또 놋으로 단을 만들었으니 (4:1).
다. 솔로몬이 또 하나님의 전의 모든 기구를 만들었으니 (4:19).
라. 솔로몬이 여호와의 전을 위하여 만드는 모든 것을 마친지라 (5:1).
마. 솔로몬이 여호와의 전과 자기의 궁궐을 이십년 동안에 건축하기를 마치고 (8:1).
바. 솔로몬이 가서 하맛소바를 쳐서 취하고 (8:3)
사. 솔로몬이 또 그 부친 다윗의 정규를 좇아 제사장들의 반차를 정하여 섬기게 하고 (8:14).
아. 솔로몬이 유브라데 강에서부터 블레셋 땅과 애굽 지경까지의 열왕을 관할하였으며 (9:26).

여기서 보는 것처럼, 서술자는 거의 모든 구절에서 솔로몬을 주어로 삼는다. 이것은 솔로몬만을 유일한 등장인물로 만든다. 이를 통해서, 내재된 저자는 솔로몬이 모든 것을 장악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이 이야기 속에서 솔로몬은 직접 일천번제를 드리고, 직접 성전을 건축하고, 성전의 여러 기구들을 직접 만들고, 혼자서 봉헌기도를 드리고, 혼자서 여러 성읍들을 건축하고, 혼자서 무역을 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리고 주변의 왕들이 솔로몬을 찾아와서 솔로몬에게 지혜를 구하고 예물을 바치는 것으로 묘사하고 있어서, 솔로몬이 당시에 가장 훌륭한 왕인 것처럼 보이게 한다(“솔로몬 왕의 재산과 지혜가 천하 열왕보다 큰지라”, 9:22). 내재된 저자는 독자들 눈에 솔로몬이 세상에서 가장 탁월한 왕으로 비춰지게 하려고 열심이다. 어쨌든 이 이야기 세계 속에서, 솔로몬은 가장 지혜롭고 가장 강력하고 가장 탁월하고, 당시 세계를 이끌어가는 인물로 묘사된다.
또 솔로몬은 여러 가지 복합적인 성향을 가진 원형의 인물이 아니고, 고정된 성격을 가진 평면형의 인물이다. 그는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일관된 모습을 보여준다. 솔로몬이 성전 건축하는 모습을 보면, 그가 얼마나 성전건축에 심혈을 기울이고 치밀하게 일을 하는지 알 수 있다. 봉헌 기도하는 모습도 보라. 서술자는 이런 솔로몬에 대해서 감탄을 금치 못한다. 내재된 저자는 서술자를 통해서, 실존했던 솔로몬과도 조금 다르고, 열왕기의 솔로몬과도 다른 독특한 솔로몬의 모습을 보여줌으로써, 솔로몬을 내재된 독자들이 바라던 이상적인 인물로 제시한다.
- 기타 인물들 : 기타 인물들로는 두로 왕 후람이 등장하고 (2장 11-16절, 8장 18절), 또 제사장들과 레위사람들이 등장한다(5장 11-14절, 7장 6절). 그리고 스바 여왕이 등장한다(9장 1-12절). 이들은 독자적인 역할을 하지 못하고, 솔로몬을 높이는 역할에 충실하다. 그 외에 성격묘사가 되지 않아서, 등장인물이라고 할 수 없는 사람들도 있다. 이들은 거의가 배경으로 처리된다. 그리고 서술자는 그들의 이름을 밝히지 않고 제사장이나 레위인, 천부장, 백부장, 재판관, 방백과 족장들로 부른다. 이 무명의 인물들 역시 솔로몬을 주인공으로 부각시켜 주는 배경의 역할을 성실하게 한다.


③ 배경
- 공간적 배경 : 솔로몬 이야기의 배경은 예루살렘이다. 1장 1-13절의 이야기에서 솔로몬은 예루살렘에서 기브온으로 갔다가 다시 예루살렘으로 돌아온다. 그리고 3장 1절에는 장소가 더 구체화된다. 솔로몬은 예루살렘 모리아산에서 성전을 건축한다. 2장에서 7장에 이르는 20년 동안, 솔로몬은 결코 예루살렘을 떠나지 않는다. 그러다가 20년이 지난 후에야 비로소 솔로몬은 하맛소바로 가고(8:3), 여러 성읍들을 건축한다(8:4-6). 그런 후에 솔로몬은 또 계속해서 예루살렘에 머문다. 여러 왕들이 예루살렘으로 솔로몬을 찾아온다. 마치 세계의 모든 왕들이 솔로몬을 알현하려고 찾아오는 듯하다. 솔로몬이 그들을 방문하기 위해서 예루살렘을 떠난 적은 없다.

이렇듯 솔로몬의 주요 활동무대는 예루살렘이다. 솔로몬이 예루살렘을 떠난 것은 8장 3절에만 분명히 기록되어 있고, 암시적인 구절도 8장 2절, 8장 4-7절에 불과하다. 솔로몬 이야기에서 예루살렘은 상징적인 의미를 갖는다. 예루살렘은 세계의 중심지이다. 솔로몬은 예루살렘에 앉아서, “유브라데 강에서부터 블레셋 땅과 애굽 지경까지의 열왕을 관할하였”고(9:26), 또 “솔로몬을 위하여 애굽과 각국에서 말들을 내어왔”다(9:28). 하나님의 성전이 있는 예루살렘이 세계 정치와 경제의 중심지이다. 이것은 내재된 저자와 독자들이 갖는 믿음과 희망을 반영한다.


- 시간적인 배경 : 솔로몬 이야기의 시간적인 배경은 솔로몬이 예루살렘에서 이스라엘을 다스린 40년 동안이다. 솔로몬은 왕위에 오른 지 4년 2월 1일에 성전건축을 시작했다. 서술자는 솔로몬이 그 이전 3년 동안 무슨 일을 했는지는, 솔로몬이 기브온 산당에 올라가서 일천번제를 드려서 지혜를 얻은 일 외에는 일체 언급하지 않는다. 우리는 솔로몬이 언제 기브온 산당에 올라갔는지 모른다. 내재된 저자는 마치 솔로몬이 기브온 산당에 일천번제를 드리고 와서 바로 성전건축을 시작한 것처럼 이야기를 꾸미고 있어서, 솔로몬의 업적을 성전건축에 국한시키려는 강한 의도를 보여준다. 그리고 서술자는 솔로몬이 몇 년 동안 성전을 건축했는지 말하지 않는다. 8장 1절에서 서술자는 “솔로몬이 여호와의 전과 자기의 궁궐을 이십년 동안에 건축하기를 마치고”라고 말한다. 솔로몬은 궁전도 건축했는데, 서술자는 궁전건축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는다. 그래서 마치 솔로몬이 재위기간의 절반인 20년 동안 성전만 건축한 것 같은 인상을 갖게 한다. 우리가 아는 대로 솔로몬은 성전을 7년 동안에 건축했다. 그렇다면 실제로는 40년 통치 기간의 6분의 1에 해당하는 성전건축에 이야기의 3분의 2를 할애하고, 6분의 5에 3분의 1을 쓴 것이다. 그리고 내재된 저자는 8장 3절~9장 28절의 이야기들을 시간순서대로 엮어 놓지 않는다. 솔로몬을 높이려는 여러 에피소드들을 시간적인 흐름과는 관계없이 나열해 놓았다. 시간순서를 그럭저럭 지키는 것은 2장 1절~8장 2절이다. 이런 점에서 내재된 저자는 실제시간이나 그 순서에는 별로 관심이 없음을 알 수 있다. 그의 의도는 다른 데 있다.
또 8장 16절에서 서술자는 성전건축 이야기가 끝나고 15절 정도 지나서 느닷없이 솔로몬이 성전건축기간 동안 내내 계속해서 행동거지를 바르게 했음을 말한다. “솔로몬이 여호와의 전의 기지를 쌓던 날부터 준공하기까지 범백(‘상식을 벗어나지 않는 행동’)을 완비하였으므로 여호와의 전이 결점이 없이 필역하니라.” 여기서도 시간개념을 파괴한다. 그리고 서술자는 몇 해 동안 계속된 솔로몬의 행동을 한차례만 언급한다(이와는 달리, 바울의 회심체험처럼, 한차례 일어난 행동을 몇 번이고 반복해서 언급하는 경우도 있다). 내재된 저자는 일상적인 시간순서를 따르지 않고, 솔로몬을 이상적인 왕으로 부각시키는 데만 전력을 다한다.


4) 서사비병의 실제(3) : 욥기 1:1-5; 해설자
① 본문읽기
한 사람이 우스 56) 땅에 살고 있었는데, 57) 그의 이름은 욥이었습니다. 그 사람은 흠잡을 데 없고, 58) 대쪽같았으며, 59) 하늘 무서운 줄을 알고, 60) 악한 일과는 거리가 먼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아들 일곱과 딸 셋 61) 을 두었습니다. 그의 재산은 양이 칠천 마리, 낙타가 삼천 마리, 소가 천 마리, 암나귀가 오백 마리나 되었으며, 종들이 매우 많았습니다. 그리고 그 사람은 동방의 모든 사람들 가운데서 가장 영향력 있는 인물이었습니다. 62) 그의 아들들은 각자 자기 생일에는 자기 집에서 잔치를 베풀고 세 자매들도 초청해서, 그들과 함께 먹고 마셨습니다. 그런데 잔치날들 63) 이 끝나면, 욥은 그들을 성결하게 할 마음으로 아침에 일찍 일어나서 그들 모두의 수만큼 번제를 드렸는데, 욥은 ‘내 아들들이 죄를 범하지 않고, 그들 마음속으로라도 하나님을 저주하지 64) 않았으면 좋으련만’ 하고 빌었습니다. 욥은 언제나 이렇게 처신했습니다. 65)



② 인물평가
본문을 읽으면서, 우리는 이야기를 전개해나가는 서술자의 목소리를 듣는다. 내재된 저자는 서술자로 하여금 등장인물들을 3인칭으로 서술하게 하는 전지적 관점에서 본문을 전개한다. 그런데 서술자는 욥에 대해서 매우 편파적인 태도를 보인다. 그는 욥에 대해서는 좋은 평가를 내리면서도 다른 사람들에 대해서는 객관적인 묘사로 그친다. 욥 외의 인물들에 대해서는 간접적인 ‘보여줌의 묘사’를 하지만, 욥에 대해서는 직접적인 ‘들려줌의 묘사’를 하는 것이다. 내재된 저자는 서술자와 하나님을 통해서 욥을 ‘흠잡을 데 없고 대쪽같고 하늘 무서운 줄 알고 악한 일과는 거리가 먼 사람’이라고 묘사한다. 이것은 본문을 통해서 일관되는 평가이다. 그리고 그의 재산을 언급한 다음, ‘그는 동방 사람들 가운데서 가장 영향력이 큰 사람이었다’고 말한다. 5절 마지막 부분에도 ‘욥은 항상 이렇게 처신했다’고 말한다. 그리고 이 본문 외에도 22절과 2장 10절은 욥이 ‘경우 없이 하나님을 욕하지 않았다’고 말한다. 이처럼 서술자는 욥의 행동에만 나름의 평가를 첨가하는 것이다. 그래서 본문의 서술자는 상당히 절제하면서도, 욥의 경우에만은 참견하기를 좋아하는 것으로 나타난다. 우리는 이것을 통해서 내재된 저자가 욥을 얼마나 좋아하는지 알 수 있다. 그는 욥에게 푹 빠져 있다. 그리고 자기처럼 우리도 욥을 좋아하기를 바라는 것으로 보인다. 내재된 저자는 욥에 대해서 일관된 애정을 보인다. 그는 욥에 대해서 조금도 의심을 품지 않는다. 이것은 인간이 갖추어야 할 매우 중요한 덕목이다. 본문은 우리에게 이것을 강조하는 것 같다.

③ 배경으로 처리된 인물들
본문은 욥 이외의 인물들을 배경으로 처리한다. 본문은 여러 사람들을 언급하지만, 실제 등장인물은 욥 한 사람이고, 그 외에는 모두 배경으로 처리한다. 그가 소유한 재산들, 종들, 가축들, 그리고 자녀들까지도 배경으로 처리한다. 내재된 저자는 욥만을 부각한다. 욥의 종들이나 자녀들도 인물들임에 틀림없지만, 전혀 어떤 성격을 갖지 못한다. 그래서 그들은 등장인물이 될 수가 없다. 여기서 우리는 내재된 저자의 편파성을 볼 수 있다. 그래서 배경으로 처리되는 인물들을 하나의 인격체로 되살아나게 하는 책임은 우리에게 주어진다.



④ 내재된 저자의 한계성
욥기는 그 내용을 어느 시대를 사는 사람이나 공감할 수 있다는 점에서 매우 현대적인 작품이다. 하지만 욥기의 내재된 저자가 우리를 독자로 생각하고 작품을 쓴 것이 아님은 분명하다. 그는 그 시대의 인물이고, 그 시대 사람들을 대상으로 글을 썼을 것이다. 그래서 우리 시대와는 다른 점들이 있다. 이런 점을 우리는 받아들여야 한다. 예를 들어 그는 서술자를 통해서 욥을 묘사할 때, 그가 많은 종들을 소유하고 있었다고 말한다. 많은 종을 소유하는 것은 지금은 비난받아야 할 일이지만 그 당시로는 전혀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그리고 13절 이하에는 많은 종들이 죽는데, 내재된 저자는 욥의 참상에만 관심을 기울일 뿐, 그들에 대해서는 아무런 슬픔도 갖지 않는다. 오로지 욥이 소유를 잃었다는 점에 관심을 기울인다. 이것은 내재된 저자가 종을 재산으로 소유하는 시대를 살았기 때문이며, 내재된 독자 역시 그것을 당연하게 받아들이는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그것이 우리에게는 이상하게 여겨질 수도 있음을 알아야 한다. 우리는 본문의 내재된 독자가 아니기 때문이다. 본문은 우리와는 그만큼 시간적인 거리가 있고, 지금은 통용되지 않는 과거의 관습들을 담고 있다. 우리는 욥기가 보여주는 현대성만큼이나 욥기가 갖고 있는 이러한 시대적인 한계성도 알아야 한다. 그래서 독자들은 욥기의 내재된 저자가 말하고 있는 것을 무조건 추종하는 태도는 버려야 한다. 욥기의 배경은 공간적, 시간적, 사회적으로 우리와는 다르기 때문에, 그의 말 가운데는 비판적으로 수용해야 할 것들도 있음을 알아야 한다. 본문에 나오는 하나님의 가치평가는 언제나 옳지만, 이야기를 전개해나가는 내재된 저자의 가치평가는 어느 시대에나 옳은 것은 아니다.


⑤ 서술자의 한계
본문의 등장인물 가운데서 서술자만큼 욥을 잘 알고 있는 사람은 없다. 우리는 그의 입을 통해서 욥에 대해서 듣고, 그가 알려주는 정보만큼만 욥을 알 수밖에 없다. 그런데 우리는 욥기 1장과 2장의 서술자가 욥에 대해서 잘 알고 있는 것 같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욥기 1-2장의 서술자는 욥의 외면적인 모습은 알고 있지만, 그의 내면적인 모습은 전혀 알지 못한다. 그래서 3장부터는 서술자가 바뀐다. 1장과 2장의 서술자는 3장부터는 사라졌다가 42장 7절에서 다시 등장하는데, 그러다 보니 욥의 친구들 가운데 엘리바스와 빌닷과 소발은 알지만, 엘리후에 대해서는 알지 못한다. 그리고 1-2장과 42장 7절~17절의 서술자는 욥의 외면만을 알고 있다. 우리는 여기서 욥을 가장 잘 알고 있을 것 같은 서술자가 실제로는 욥에 대해서 잘 알고 있지 못하다는 아이러니 66) 를 발견한다.



닫는 글
지금까지 우리는 가장 근본적이고 역동적 독서행위인 ‘(성경)서사비평’(敍事批評)에 대해 살펴보았다. 먼저 독서(讀書)가 무엇이고, 서사가 무엇인지 생각해보고, 서사비평은 어떻게 하는 것인지를 구약성경본문 세 개를 읽으면서 알아보았다.
이제 이 글을 마무리하면서 우리가 기억해야 할 몇 가지를 정리해보자. 서사와 삶은 밀접한 관계를 갖는데, 삶 자체가 바로 서사이고, 서사는 삶을 형성하고 삶을 표현하는 가장 기본적인 방식이다. 
  이야기와 삶이 갖는 이러한 근본적 관계성은 기독교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기독교는 성경을 중시하는 책의 종교인데, 성경은 수많은 이야기들을 모은 서사집이다. 이것은 기독교가 서사적 종교임을 말하고, 성경서사가 없으면 기독교도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기독교 역사는 서사서술 역사이다. 이런 점에서 서사연구는 기독교에서도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서사담론을 연구하는 서사비평은 한 가지 독서행위인데, 독서행위는 단순한 텍스트 반복생산에 그치지 않고, 텍스트를 매개로 서술행위와 독서행위가 만나는 상호작용을 통해 새로운 텍스트를 발생시키는 지극히 생산적인 작업이다. 이렇듯 독서행위는 저자, 텍스트, 그리고 독자가 양방향으로 엮어내는 상호작용이다. 그래서 의미는 저자, 텍스트, 독자, 이 셋 중 어느 한곳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이 세 가지가 아우르고 충돌하는 상호교류적인 독서행위를 통해서 발생한다. 이런 점에서 독서행위는 하나의 사건, 즉 시뮬라크르이다.


그리고 성경독서를 포함하는 모든 독서행위는 인위적이고 이데올로기적일 수밖에 없다. 그래서 독서행위를 독자가 스스로 통제해야 한다. 독서행위는 인간이 행하는 다른 행동들과 마찬가지로 윤리적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특히 성경독서는 다른 어느 것보다 윤리적이고 신앙적이어야 한다. 우리는 성경을 읽으면서 거기서 하나님 말씀을 들어야 하고, 그 말씀에 순종하는 삶을 살아야 하다. 여기까지가 독서행위여야 하는 것이다. 즉 성경도 텍스트이고 우리 삶도 텍스트라는 것이고, 그렇기에 우리는 성경을 읽으면서 동시에 우리 삶도 읽(어야 한다)는 것이다.


한국교회가 성경을 제대로 읽고 자신의 삶도 텍스트화하고 새롭게 글쓰기 하는 윤리적이고 신앙적인 독서행위를 통해, “소설의 위기”에도 불구하고 서사가 부활하는 “서사문화의 시대”에, 우리가 직면한 “성경의 위기”를 극복해서 “성경 서사문화 시대”를 다시 열기를 간절히 소망하면서, 이 글을 마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