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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으로 본 요한계시록 6장

에반젤(복음) 2022. 9. 17. 07:15

복음으로 본 요한계시록 6장

 

율법이란 무엇인가? (계 6:1-17)

 

1. 내가 보매 어린 양이 일곱 인 중의 하나를 떼시는데 그 때에 내가 들으니 네 생물 중의 하나가 우렛소리 같이 말하되 오라 하기로 2. 이에 내가 보니 흰 말이 있는데 그 탄 자가 활을 가졌고 면류관을 받고 나아가서 이기고 또 이기려고 하더라 3. 둘째 인을 떼실 때에 내가 들으니 둘째 생물이 말하되 오라 하니 4. 이에 다른 붉은 말이 나오더라 그 탄 자가 허락을 받아 땅에서 화평을 제하여 버리며 서로 죽이게 하고 또 큰 칼을 받았더라 5. 셋째 인을 떼실 때에 내가 들으니 셋째 생물이 말하되 오라 하기로 내가 보니 검은 말이 나오는데 그 탄 자가 손에 저울을 가졌더라 6. 내가 네 생물 사이로부터 나는 듯한 음성을 들으니 이르되 한 데나리온에 밀 한 되요 한 데나리온에 보리 석 되로다 또 감람유와 포도주는 해치지 말라 하더라 7. 넷째 인을 떼실 때에 내가 넷째 생물의 음성을 들으니 말하되 오라 하기로 8. 내가 보매 청황색 말이 나오는데 그 탄 자의 이름은 사망이니 음부가 그 뒤를 따르더라 그들이 땅 사분의 일의 권세를 얻어 검과 흉년과 사망과 땅의 짐승들로써 죽이더라...

 

어린양 예수님으로 인해 드디어 인봉한 두루마리 책의 비밀이 열리기 시작하는 장면입니다. 성경에 감췬 영생의 비밀이 열린다면 이 얼마나 놀라운 일입니까?(고전2:7, 골2:2-3). 신약성경은 구약의 결론으로 이미 열린 책이라면 구약성경은 해석이 필요한 책입니다. 그래서 고후3:15에 "오늘까지 모세의 글을 읽을 때에 수건이 그 마음을 덮었도다" 했습니다.

 

일곱 인을 해석하는 키는 인봉된 두루마리를 구속의 상징인 어린 양이 펼치신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네 생물”이 차례로 일곱 인을 지휘합니다. 네 생물은 구룹 천사(겔10:20-21), 혹은 4복음서를 가리킵니다. 여기서는 4복음서를 가리키는 것으로 보입니다. 신약의 복음에 의해서 구약성경이 열림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그리고 신약의 복음이 그 예표가 되는 구약성경과 만날 때 더욱 구체적으로 다가오고 살아 역사하는 생명적이고 역동성 있는 복음이 됩니다.

 

구약성경을 "율법과 선지자"라고 부르는데 두 가지를 하나로 요약하면 율법입니다. 결국 구약성경 전체가 십계명 혹은 모세오경에 기반하고 있고, 예수님의 앞길을 인도하던 세례요한 안에 율법과 선지자가 동시에 존재한 것과 같습니다. 즉 율법은 요한처럼 죄를 책망함과 동시에 예수님의 앞길을 준비하는 책입니다.

 

율법의 목적이 인간이 죄인임을 알려주고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의 구세주임을 알려준다는 점에서 율법을 구속사적 관점에서 접근한다면 율법의 정체와 아울러 영생의 비밀이신 예수 그리스도와 그 복음을 그곳에서 발견하게 됩니다. 일곱 인 재앙은 구약성경의 비밀 곧 율법의 비밀입니다. 일곱 인을 떼실 때 시종 놀라운 재앙이 주어지는 것도 선지서에 나타난 초림 성령강림 재림 등에 대한 예언이 그렇듯 구약적인 표현방식에 부합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구약성경이 담고 있는 율법의 비밀은 무엇일까요?

 

1. 율법은 복음의 눈으로 다가갈 때 열립니다.

 

1절 “네 생물 중의 하나가” 네 생물은 여기서는 복음서를 상징합니다. 4복음서의 별명이 사람 사자 독수리 소입니다. 신약의 복음으로 구약을 이해하라는 것입니다. 이 복음의 상징인 네 생물이 두루마리의 인을 떼는 순서를 진행한다는 것은 대단히 자연스럽고 부합한 것입니다. 이처럼 구약성경을 복음의 눈으로 볼 때 성경이 열리고 율법의 정체도 열리기 시작합니다.

 

2. 율법은 죄를 깨닫게 합니다.

 

2절에 “이에 내가 보니 흰 말이 있는데 그 탄 자가 활을 가졌고 면류관을 받고 나아가서 이기고 또 이기려고 하더라”이 나오는데 여기서 의견들이 다양한데 긍정적인 낱말은 희다는 것 뿐, 활은 웬 활이며, 이미 면류관 쓰셨거나 수여하시는 분이시지 무슨 면류관을 받으며, 이기신 분이지 이기고 이기려고 하더라? 그리스도로 보기에는 뭔가 석연치 않습니다.

 

두루마리를 여는 전체적인 맥락에서 볼 때 율법의 색깔을 암시합니다. 율법이 악한 건 아니라는 말입니다. 롬7:12에 “이로 보건대 율법은 거룩하고 계명도 거룩하고 의로우며 선하도다.”, 14절에서는 율법이 신령하다는 말까지 썼어요. 이와 비슷한 말씀이 성경에 많습니다(롬7:7).

 

그리고 흰색은 검은 죄악은 잘 드러내 주는 색깔입니다. 그래서 롬3:20에 "그러므로 율법의 행위로 그의 앞에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나니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음이니라" 했습니다. 율법을 말에 비유한 것은 율법의 신속하고 역동적인 그 특징을 잘 표현해줍니다. 율법의 위력이 대단합니다. 율법이 잘 해석되면 그 율법 앞에서 예수가 구주임을 부정할 수가 없고, 어떤 의인도 자신을 죄인이 아니라 할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3. 율법은 양심의 기능도 합니다.

 

1절 “우렛소리 같이 말하되 오라 하기로” 네 생물의 소리가 하늘의 우렛소리와 같이 울렸습니다. 시내산에서 율법이 수여되던 배경과 같습니다(출19:16, 20:18, 히12:18-21). 이처럼 율법이 우리 안에 들어오면 두려워 하는 이런 배경을 만듭니다(롬8:15). 혹은 양심의 기준이 되기도 합니다. 그래서 롬2:15에 “이런 이들은 그 양심이 증거가 되어 그 생각들이 서로 혹은 송사하며 혹은 변명하여 그 마음에 새긴 율법의 행위를 나타내느니라” 했습니다.

 

4. 율법은 심령을 쏘는 기능이 있습니다.

 

2절 “그 탄 자가 활을 가졌고” 이처럼 율법은 우리 양심을 쏩니다. 고전15:55-56 “사망아 너의 승리가 어디 있느냐 사망아 네가 쏘는 것이 어디 있느냐 사망이 쏘는 것은 죄요 죄의 권능은 율법이라” 결과적으로 율법이 쏜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정죄 받은 심령은 죽을 수밖에 없습니다.

 

5. 복음을 알기까지 율법의 심판은 계속됩니다.

 

2절 “면류관을 받고 나아가서 이기고 또 이기려고 하더라” 이처럼 율법이 가입하면 그 정죄로 말미암아 죄와 사망이 왕노릇합니다. 그런데 그 승리가 절대적인 것은 아닙니다. 여기 “이기고 이기려고 하더라.”는 이 애매한 표현의 시제는 현재형이며 아직 승리가 불분명한 부정 과거 능동태 가정문으로 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흰말이 예수님일 수 없고, 율법의 권세가 아무리 커도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과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완전한 복음을 만나면 더 이상 맥을 추지 못합니다(롬7:24, 롬8:1-2, 고전15:57). 그리스도의 복음을 알고 그 복음을 온전히 믿음으로 자기에게 적용하기까지 율법은 제 세상 만나듯 심령을 저주 아래 던지고 지옥에 던져 넣을 만큼 그 잔인함을 보입니다.

 

6. 율법은 상하게 하고 살육하는 힘이 강합니다.

 

3-4절 “둘 째 인을 떼실 때에 내가 들으니 둘째 생물이 말하되 오라 하니 이에 다른 붉은 말이 나오더라” 여기 붉은 색은 부정적인 용례로 죄악이나 살육을 의미합니다. 즉 율법의 정죄는 심령을 상하게 하고 고통스럽게 하고 죽입니다. 율법적 양심을 가지면 가질수록 위력은 커집니다. 이 율법의 칼날에 의해 심령은 갈기갈기 찢어지고 맙니다.

 

7. 율법은 불법이 아닌 허락된 말씀입니다.

 

4절 그 탄 자가 허락을 받아” 율법은 불법이 아니요 허락된 말씀입니다. 율법이 폐했다면 절기 안식일 제사 조항 등 예표적인 것이 사라졌지 하나님의 원하시는 의의 기준으로서는 오히려 강화되었습니다(마5:17). 예수님 때문에 율법이 우리를 정죄할 수 없다는 말이지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율법주의나 무율법주의 모두 경계해야 합니다. 무율법주의자들은 니골라당과 같이 죄를 지으면서도 죄가 아니라는 복음적 오만에 빠져 있습니다. 예표로서의 율법, 구원의 방법으로서의 율법, 믿는 자를 정죄하는 의미에서의 율법이 폐한 것이지,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뜻이 무엇인지 알려주는 율법 자체가 사라진 것이 아닙니다. 신약 어디를 보아도 규모 있는 교훈으로 가득합니다.

 

8. 율법주의에 빠지면 마음의 평안이 사라집니다.

 

4절 “땅에서 화평을 제하여 버리며” 율법주의에 빠지면 마음의 평안이 없어요. 율법 아래서 자기를 비춰볼 때 지은 것은 죄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것이 율법을 내신 목적이기도 합니다. 롬3:19에 “우리가 알거니와 무릇 율법이 말하는 바는 율법 아래에 있는 자들에게 말하는 것이니 이는 모든 입을 막고 온 세상으로 하나님의 심판 아래에 있게 하려 함이라” 그래서 구주 예수와 그 복음을 온전히 의지하게 됩니다.

 

9. 율법주의에 빠지면 많은 사람을 죽입니다.

 

서로 죽이게 하고 또 큰 칼을 받았더라.” 칼은 필요한 도구이지만 칼이 커지면 위험합니다. 율법의 중심은 사랑이지만 율법적이 되면 사랑이 없습니다. 큰 칼은 사랑이 식어질 때입니다. 사랑이 식어지면 율법만 남아서 큰 칼이 됩니다. 그 칼로 나는 물론 남까지 정죄하고 죽입니다.

 

10. 율법은 시험의 기능이 있습니다.

 

5절 “내가 보니 검은 말이 나오는데” 검은 말의 내용은 기근입니다. 그리고 검은 색은 햇볕에 탄 색깔입니다. 햇볕은 시험을 상징합니다. 이처럼 율법주의에 빠지면 자기 행위에 의존하고 사탄의 시험으로 심령에 기근이 옵니다. 율법의 정죄로 심령이 바싹바싹 타고 그래서 복음을 알아야 합니다.

 

11. 율법은 행위를 달아보고 심판합니다.

 

5절 하 “그 탄 자가 손에 저울을 가졌더라” 밀 보리 감람유와 포도주 모두 부피로 계량해야 하는데 저울을 가진 것은 하나님께서 율법의 저울로 우리 행위를 달아보신다는 것입니다. 잘 지키면 생명과 복, 못 지키면 사망과 저주, 그래서 무서운 것입니다.

 

12. 율법의 기능은 그림자적 기능입니다.

 

6절 “내가 네 생물 사이로부터 나는 듯한 음성을 들으니” 하나님의 음성인데 네 생물 사이에서 나는 듯 출처가 명확하지 않습니다. 그게 율법입니다. 이처럼 율법은 하나님의 음성인데 그게 확실하게 느껴지지 않습니다. 히10:1에 “율법은 장차 올 좋은 일의 그림자일 뿐이요 참 형상이 아니”라고 한 것처럼 상당 부분이 그러하기 때문입니다.

 

13. 율법의 특성은 소극적입니다.

 

6절 하 “이르되 한 데나리온에 밀 한 되요 한 데나리온에 보리 석 되로다” 검정말이 나와서 가령 인구 3분의 1이 죽는다든지 그런 기근인 알았는데 하루에 보리 석되면 생존 가능합니다. 이처럼 율법은 서민처럼 먹고 살만큼 소극적이고 최소한의 법입니다. 십계명도 최소한의 법이예요. 십계명마저도 범할 정도 같으면 사람도 아닙니다. 십일조도, 율법의 의도, 백성의 완악함을 인하여 주신 최소한의 수준입니다. 그래서 마5:20에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의가 서기관과 바리새인보다 더 낫지 못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말씀하셨습니다. 더 나은 그리스도의 의여야 합니다.

 

14. 율법의 대부분은 해석이 필요한 거친 음식입니다.

 

6절 하 “이르되 한 데나리온에 밀 한 되요 한 데나리온에 보리 석 되로다” 밀은 고운가루이기 때문에 비쌌고, 보리는 서민들의 거친 음식으로 가격이 저렴했습니다. 이처럼 율법은 고운가루처럼 복음이 일부 나타나 있지만 대부분은 신약적인 해석이 필요한 거친 음식들입니다.

 

15. 율법의 핵심은 지금도 살아 있습니다.

 

6절 하 “또 감람유와 포도주는 해치치 말라” 율법에서는 이런 나무는 열매는 채취해도 벌목을 금지했는데 귀한 나무가 아니라 왜 감람유와 포도주일까요? 이처럼 나무인 율법보다 그 핵심인 사랑이 더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새 계명의 핵심은 예수 믿음과 서로 사랑입니다. 이것이 영원한 신약의 새 계명입니다.

 

16. 율법은 사망권세를 가졌습니다.

 

8절 “내가 보매 청황색 말이 나오는데 그 탄 자의 이름은 사망이니 음부가 그 뒤를 따르더라” 청황색은 죽음의 색깔입니다. 이처럼 율법은 사망의 권세가 있습니다. 그것은 롬7:13에 “오직 죄가 죄로 드러나기 위하여 선한 그것으로 말미암아 나를 죽게 만들었으니 이는 계명으로 말미암아 죄로 심히 죄 되게 하려 함이라” 했습니다. 법이 생기면 그 누구도 예외 없이 그 법에 따라 처벌을 받는 것과 같습니다. 롬8:2에서 죄와 사망의 법이라고 한 것도 그런 의미입니다..

 

17. 율법은 음부의 권세도 가졌습니다.

 

그 탄 자의 이름은 사망이니 음부가 그 뒤를 따르더라” 음부를 영적 체험에서 본다면 복음을 모를 때 율법으로 인해 마음에 지옥?이 이루어지더라는 것입니다. 예수 믿어 마음에 천국이 이루어지는 것과 같습니다(눅17:20-21). 최종 지옥은 아니지만 양심의 심판대 앞에 마음이 지옥처럼 고통스럽습니다.

 

18. 그러나 율법은 죄는 죽이지 못합니다.

 

8절 “그들이 땅 사분의 일의 권세를 얻어” 성경에서 4는 일반적으로는 사방 세계 땅 등을 가리키지만 영적으로 세상일 수도 있고, 죄나 육신적인 인격일 수도 있습니다. 4분지 1의 권세란 4의 개념이 파괴됨을 의미합니다. 그런데 율법은 이와 흡사하게 죄는 살리고 생명만 죽입니다(갈3:11). 그래서 롬7:9-10에 “계명이 이르매 죄는 살아나고 나는 죽었도다 생명에 이르게 할 그 계명이 내게 대하여 도리어 사망에 이르게 하는 것이 되었도다” 했습니다.

 

19. 율법은 심령을 고통스럽게 합니다.

 

검과 흉년과 사망과 땅의 짐승들로써 죽이더라” 먼저 검으로 죽입니다. 율법의 조항으로 우리의 잘못을 깊이 찌릅니다. 또 흉년으로 죽입니다. 율법은 우리 심령에 기근이 들게 합니다. 또 사망으로 죽이더라. 율법의 정죄로 내 심령도 죽고 영적 유기체인 내 지체들도 나 때문에 시험에 빠질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속죄의 복음에 견고히 서시기 바랍니다.

 

20. 더욱 죄의 열매를 맺게 만듭니다.

 

땅의 짐승들로써 죽이더라” 가나안 땅에 맹수가 번성함은 큰 두려움이었습니다. 우리 안에도 이 짐승이 있으니 곧 죄의 옛사람입니다. 율법이 온 후로 이 짐승이 살아납니다. 롬7:8-9에 “그러나 죄가 기회를 타서 계명으로 말미암아 내 속에서 온갖 탐심을 이루었나니 - 전에 율법을 깨닫지 못했을 때에는 내가 살았더니 계명이 이르매 죄는 살아나고 나는 죽었도다” 했습니다.

 

 

21. 율법의 정죄를 이기는 길은 보혈의 공로에 서는 것입니다.

 

9절 “죽임을 당한 영혼들이 제단 아래에 있어” 여기 제단은 번제단으로 피의 희생이 드려지는 곳입니다. 이처럼 율법의 재앙에서 영혼이 사는 길은 그리스도의 속죄의 공로를 믿는 것입니다(롬8:33-34).

 

22. 성도는 율법에 대해 죽은 자입니다.

 

10절 “큰 소리로 불러 이르되 거룩하고 참되신 대주재여 땅에 거하는 자들을 심판하여 우리 피를 갚아 주지 아니하시기를 어느 때까지 하시려 하나이까” 언듯 순교자처럼 보이지만 원수에 대한 기도내용이나, 이제야 흰 두루마기를 지급 받는다든가, 엉뚱하게 순교자의 수가 차야 한다는 등 일반 순교자로 보기 어렵습니다. 그들이 하나님을 "거룩하고 참되신 대주재"로 부르는 것을 보아 그들은 의와 진실과 주님의 것으로 살기를 갈망하는 자임을 봅니다.

 

그들의 기도제목은 “땅에 거하는 자들을 심판”해 달라. 여기 땅은 계14:6에 "땅에 거주하는 자들 곧 모든 민족과 종족과 방언과 백성"들이라 했는데 이 표현은 바벨탑 사건 이후 생겨난 특징들로 세상이나 죄나 육신 등을 상징합니다. 이런 것들이 영혼의 원수입니다. 율법이 악에서 신원해 줄 줄 알았는데 도리어 죄를 살게 하는 범인이었습니다. 롬7:9에 "죄는 살아나고 나는 죽었도다" 한 바와 같습니다. 상기의 기도의 응답은 그리스도 안에서 주어졌습니다. 복음 안에서 보면 성도는 예수 안에서 죄와 옛사람이 죽었고, 율법에 대해서도 죽어 관계가 없어졌습니다(롬7:4). 이 믿음을 끝까지 견지하시기 바랍니다.

 

23. 복음의 믿음에서 자라가시기 바랍니다.

 

11절 “각각 그들에게 흰 두루마기를 주시며 이르시되 아직 잠시 동안 쉬되.” 흰 두루마기는 의의 행실인데(계19:8) 이제 받아 입음은 성경이 열려 예수 복음을 확신했다는 증거입니다. 그리고 “그들의 동무 종들과 형제들도 자기처럼 죽임을 당하여 그 수가 차기까지 하라.” 하신 말씀은 같은 동류의 증가, 이걸 개인의 신앙에 적용하면 네가 더 죽어라(고전15:31). 그래서 더욱 믿음으로 의로움에서 자라가라는 말씀입니다. 그 때 율 진정한 쉼이 있습니다.

 

영원한 속죄와 새 사람 그리고 율법에서의 자유가 복음입니다. 복음을 믿는다고 하지만 율법에 대한 이해와 적용함도 부족하고 서툴기 때문에 더 알고 더 믿고 더 온전히 믿는 훈련을 해야 합니다. 그래서 믿음에서 믿음으로 자라가시기 바랍니다(롬1:17). 총담 같이 검어지는 상복이(6:12) 아니라 성경이 열리므로 복음을 알게 되어 믿음으로 하나님께서 의로움을 입혀주시는 과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24. 복음적 신앙으로 대개혁이 일어납니다.

 

12절 “내가 보니 여섯째 인을 떼실 때에 큰 지진이 나며” 여섯째니까 창조의 6일처럼 율법적 신앙이 무너지고 복음적 신앙으로 바뀌는 장면입니다. 지진은 땅의 근본이 흔들리는 것입니다. 구속사건을 암시하는 큰 지진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운명하실 때도 큰 지진이 있었습니다. 이처럼 성경이 열리면 율법적인 신앙에서 벗어나 복음적 신앙으로 바뀌는 대변혁이 일어납니다. 기도의 내용부터 달라지고 영원한 영광과 함께 주신 구원을 찬양하며 천국 백성의 기쁜 모습으로 살아갑니다.

 

25. 율법적 신앙을 장사지냅니다.

 

해가 검은 털로 짠 상복 같이 검어지고” 해의 의미가 다양하지만(마13:6, 시84:11), 인생의 날(요9:4, 전1:3)을 뜻하기도 합니다. 검은 털로 짠 상복은 초상 났을 때 가족이 입는 상복으로 빛이 투과되지 않는 깜깜한 천입니다. 인생의 날이 저물었습니다. 두루마리가 열리는 과정에서 이런 걸 보여주신 것은 율법적 신앙을 장사지내는 것을 가리킵니다. 더 이상 심판 아래 있지 않습니다(롬3:19-20).

 

26. 율법적 신앙을 불행으로 생각합니다.

 

달은 온통 피 같이 되며” 달이 피 같이 변했다는 것은 그 이전에는 아름다웠다는 것을 전제한 표현입니다. 그것은 달의 우아한 정서나 행복감인데 온통 피와 같이 되었습니다. 율법적인 신앙 아래서는 행복을 기대할 수 없습니다.

 

27. 율법적 신앙을 절망으로 여깁니다.

 

13절 “하늘의 별들이 무화과나무가 대풍에 흔들려 설익은 열매가 떨어지는 것 같이 땅에 떨어지며” 하늘의 별은 메시아를 상징하는데 복수형이니까 구원의 소망을 의미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무화과는 이스라엘이나 그들이 여망하는 메시야 시대를(미4:4), 대풍은 욥의 열 자녀가 당한 것 같은 큰 시험을 의미합니다(욥1:18-19). 설익은 무화과는 꼭지가 강한 과일인데 떨어졌다면 얼마나 큰 대풍이었는지 짐작하게 합니다. 이처럼 율법적 신앙 아래서는 분명한 희망마저 자기에게 성취될 수 없는 절망임을 깨닫게 됩니다.

 

28. 율법적 신앙을 퇴보로 여깁니다.

 

14절 “하늘은 두루마리가 말리는 것 같이 떠나가고” 이제 하늘마저도 두루마리가 말리는 것같이 떠나갑니다. 하늘은 아브라함에게 보여주시며 말씀하셨던 것처럼 교육의 필드와도 같습니다. 무지개와 같은 보장도 나타나고 비밀한 것을 알려주는 징조의 장이기도 합니다. 하늘과 두루미리가 펼쳐 있다면 진리적 안정상태입니다.

 

하늘이 두루마리처럼 떠난 것은 심령상태가 창조의 둘째 날 이전으로 돌아갔습니다. 첫날의 빛 되신 예수님이 구주이심은 알지만 율법 아래 있으니 마음이 혼돈하고 공허하고 흑암이 깊음 위에 있듯 뒤죽박죽한 상황입니다. 율법 아래서 정답이 나오지 않습니다. 바울이 예수 만나기 전 “오호라 나는 곤고한 자로라”(롬7:44) 한 것도 이 때문입니다. 혹을 떼려 왔다가 붙이는 격으로 더 무겁고 복잡하고 절망적이고 사망과 시험이 왕 노릇하며 앞길이 칠흑과 같이 어둡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오직 예수 오직 복음에 서게 하시기 위한 율법의 전초작업이란 점에서 슬프지만 꼭 필요한 과정입니다. 자기의 의를 조금도 더하지 않는 오직 믿음, 오직 복음의 사람이 되시기 바랍니다. 히3:6에 "우리가 소망의 확신과 자랑을 끝까지 굳게 잡고 있으면 우리는 그의 집이라." 했듯 예수 안에서 우리를 죄에서 구원하시고 부활과 승천으로 새롭고 영광스럽게 하신 그 진리를 믿고 날마다 하나님께 감사와 찬양으로 경배하시기 바랍니다.

 

29. 온전히 예수 복음에 돌아오게 되었습니다.

 

각 산과 섬이 제 자리에서 옮겨지매” 여기서 산들은 난제와 대항세력을, 섬들은 외로움과 방치와 유배 유기 등을 상징합니다. 구원 받지 못하고 유기된 느낌, 그러나 불가능은 없습니다(막11:22-24, 슥4:7). 예수 복음 안에서 죄에서 승리나 은혜생활 등 율법으로 할 수 없는 것들이 가능하게 되었습니다. 알고 보니 예수 안에서 모든 난제가 해결된 것입니다. 수십 년 기도해도 불가능하던 것들이 믿고 찬양함으로 누리게 되었습니다.

 

30. 율법은 예수님과 그 복음 앞으로 인도합니다.

 

15-17절 “땅의 임금들과 왕족들과 장군들과 부자들과 강한 자들과 모든 종과 자유인이 굴과 산들의 바위틈에 숨어 산들과 바위에게 말하되 우리 위에 떨어져 보좌에 앉으신 이의 얼굴에서와 그 어린 양의 진노에서 우리를 가리라 그들의 진노의 큰 날이 이르렀으니 누가 능히 서리요 하더라.” 이들은 보좌에 앉으신 이의 얼굴과(시34:16) 어린 양의 진노를 두려워합니다. 가려달라는 심정을 넘어 차라리 위에 떨어져 죽여 달라고 할 만큼 두렵고 절박한 심정입니다. 하나님께서 마음을 다스려주시고 예수님이 죄에서 구원해 주신다는데 두려울 이유가 뭘까요?

 

그러므로 본 절은 죄를 의인화시켜 죄가 예수와 그 복음을 만나 두렵고 떠는 것으로 보입니다. 그것은 뒤에 이어지는 진노의 큰 날이 증거합니다. 여호와의 날에 대해서 요엘 2장에서는 “크고 두려운 날”이라 했고, 말라기 4장에서는 “용광로 불같은 날”이라고 했습니다. 말라기 3장에도 이 날을 “나의 정한 날”(17절)이라, “극렬한 풀무불 같은 날”(4:1절) 그리고 “그 이르는 날”(1절), “여호와의 크고 두려운 날”(5절)이라고 했습니다.

 

이 날은 그리스도의 초림과 성령강림과 재림을 가리킵니다. "보좌에 앉으신 이의 얼굴에서와 그 어린 양의 진노"라 했듯 이 날은 아버지의 사랑과 다스리심과 어린양의 구속의 역사가 현실로 나타나는 날이며, 하나님께 신원하심을 받고 우리의 죄악이 처리되고 변화되고 사명자가 되는 날이고, 죄와 사망과 사탄이 심판을 받는 날입니다. 악으로서는 두려운 날입니다. 땅의 임금들을 비롯해 나라의 구성인원 전체가 뒤집힌 것처럼 성령이 임하시면 우리의 어떤 숨어 있는 죄까지도 처리하십니다. 이렇게 예수님과 성령의 은혜 없이는 구원 받지 못한다는 절박한 마음을 심어준 것이 율법의 큰 공로라면 큰 공로입니다.

 

율법에서 해방되는 길은 아버지의 용납하시는 사랑과 우리를 죄에서 구원하신 예수의 복음에 굳게 서는 것 말고는 없습니다. 그것을 분명히 하기 위해 율법이 주어졌습니다. 인간은 죄인이며 스스로 의로울 수 없고 오직 예수와 그 복음으로 돌아오라는 것이 율법이 주는 메시지입니다. 그러므로 이 모습 이대로, 그러나 예수 이름으로, 이신득의로, 보혈의 공로로, 아버지 사랑으로 무장하여 믿음으로 살아가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