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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복음으로 본 요한계시록 요약 - 2장

에반젤(복음) 2022. 9. 17. 07:11
[요약] 복음으로 본 요한계시록 2장


에베소 교회에 보낸 편지 (계 2:1-7)

1 에베소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라 오른손에 있는 일곱 별을 붙잡고 일곱 금 촛대 사이를 거니시는 이가 이르시되 2 내가 네 행위와 수고와 네 인내를 알고 또 악한 자들을 용납하지 아니한 것과 - 7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지어다 이기는 그에게는 내가 하나님의 낙원에 있는 생명나무의 열매를 주어 먹게 하리라

<에베소 교회의 사회적 배경>

에베소가 위치한 지역은 현재 터키에 해당되며 에베소는 상업적으로 매우 중요한 교역의 중심지로서 소아시아에서 제일 부유한 도시요, 종교적으로는 세계 7대 불가사의 중 하나인 아데미(Artemis) 여신상이 있어서 미신이 성행하였으며 황제 숭배가 행해지던 부도덕한 곳이었다(행 29장). 정치적으로는 로마로부터 자치권을 인정받아 민주적으로 선출된 통치기관이 있었으므로 명목상 '버가모'가 소아시아의 수도였을 뿐 실질적으로는 에베소가 소아시아의 정치, 경제, 문화의 중심지 역할을 하였다.

<에베소의 복음전파>

에베소에 기독교가 전파된 것은 브리스길라와 아굴라에 의해서 이루어졌으며 또한 바울이 이 에베소 지역에 2년 간 머무르며 목회하였고 후에 디모데가 바울의 열심을 본받아 목회 활동을 함으로 예루살렘과 안디옥에 이어 기독교 선교의 중심지가 되었다(행19장; 딤전1:3).

<에베소 교회>

1. 에베소 교회에 계시된 그리스도의 모습

오른손에 있는 일곱 별을 붙잡고 일곱 금 촛대 사이를 거니시는 이”로 나타난다. 일곱 별은 일곱 교회의 사자요, 일곱 금 촛대는 일곱 교회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일곱 별을 붙잡으심은 그리스도께서 주의 종들을 강하게 보호하시고 통치하시고 지배하심을 시사한다(1:13,16,20). 그리고 일곱 금 촛대 사이를 거니심은 그리스도께서 교회들을 사랑하고 임재하고 계심을 암시한다.

그러나 에베소 교회의 현실은 그 반대다. 이 모습은 주께서 주의 종을 붙드시길 원하시며, 교회 역시 함께 하시기를 원하는 모습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에베소 교회의 사자들은 권능을 잃어버렸고 교회는 냉랭하기 그지없는 상황이다.

2. 에베소교회 칭찬

1) 행위와 수고와 인내
2) 악한 자들을 용납지 아니함
고상한 영적 분별력을 말한다. 에베소에 있던 자칭 사도라 하는 자들은 뒤에 언급되는 니골라당으로 보인다(계2:6, 행20:28-30, 고후11:13, 갈1:8,9). 그들은 예수를 부인할 뿐만 아니라 가르침을 통해서 이익을 추구하였다(고후11:13,15, 12:11).
3) 참고 주의 이름을 위하여 견디고 게으르지 아니함
당시 교회는 황제 숭배 강요 때문에 심한 박해 가운데 있었고, 그리스도의 성육신을 부인하는 이단들의 내적 도전들이 많았으나, 에베소 교회는 그리스도의 이름을 붙잡고 복음에 확고히 서서 그리스도에 대한 자신들의 신앙을 굳게 지켰다.

3. 에베소교회의 책망

"너의 처음 사랑을 버렸느니라." 에베소 교인들은 거짓 사도들을 분별하느라고 형제를 의심하고 엄격하게 구별함으로 형제에 대한 사랑이 식어졌다. 이러한 형제에 대한 사랑은 하나님에 대한 사랑과 불가분리의 관계에 있다(막12:29). 따라서 에베소 교회가 교리적으로는 뛰어났지만 생명 없는 형식주의로 전락하여 사랑을 상실했음을 단호하게 책망하고 있다.

4. 회복의 길

1) 어디서 떨어진 것을 생각하라
2) 회개하라
3) 처음 행위를 가지라
4) 돌이키지 않으면 네 촛대를 그 자리에서 옮기리라.

5. 추가적인 칭찬

오직 네게 이것이 있으니 네가 니골라당의 행위를 미워하는도다 나도 이것을 미워하노라. 악을 미워하는 것은 하나님을 사랑함이다. 즉 하나님에 대한 사랑의 작은 불씨는 남아있었다. 니골라에 대한 여러 설이 있지만 대부분의 학자들은 니골라당은 발람의 교훈을 따른 자들로 이해된다(14,15절).

6. 이기는 자에게 주시는 상급

이긴다는 것은 군사적 용어로 사단과 대결하여 끝까지 그리스도에게 충성한 자를 나타낸다. 그 상급은 내가 하나님의 낙원에 있는 생명나무의 과실을 주어 먹게 하리라. 생명나무는 에덴동산 중앙에 있는 영생의 나무다. 이 과실을 약속하심은 에베소 교회가 사랑을 상실함으로 율법적 선악과만 먹고 있었던 셈이었다.


[강해1] 첫사랑을 회복하라

처음 사랑이란 순서나 시간적인 처음 사랑이 아니라 남녀 간의 첫사랑처럼 처음 은혜를 체험했을 때 갖는 하나님에 대한 그 뜨겁고 순수한 사랑을 말합니다. 예수를 위해 그 무엇도 아깝지 않고 예수 없이는 한 순간도 상상할 수 없는 그런 사랑입니다. 그것이 하나님께서 우리를 창조하신 인간의 제일된 목적이기도 합니다.

처음 사랑이 얼마나 중요할까요?

1. 첫사랑이 없다면 믿음도 온전할 수 없습니다.

2절 “내가 네 행위와 수고와 네 인내를 알고” 다른 말로 표현한다면 믿음입니다. 믿음에 행함이 있었습니다(약2:14-26). 사랑이 넘칠 때 의무는 기쁨이지만 사랑이 사라진 행위는 행복도 없고 무거운 짐일 수밖에 없습니다.

2. 첫사랑이 없다면 정통 진리도 온전할 수 없습니다.

2절 하반 절 “또 악한 자들을 용납하지 아니한 것과 자칭 사도라 하되 아닌 자들을 시험하여 그의 거짓된 것을 네가 드러낸 것과” 에베소 교회가 얼마나 바른 진리에 섰는가를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 역시 주님에 대한 감격이 없다면 차가운 말씀일 수밖에 없습니다. 정통 신앙도 보수해야 하지만 그에 못지않게 뜨거운 성령으로도 충만해야 합니다.

3. 첫사랑이 없다면 주를 위한 고난과 사명도 의미가 없습니다.

3절 “또 네가 참고 내 이름을 위하여 견디고 게으르지 아니한 것을 아노라” 당시 에베소 교회는 많은 박해에 봉착해 있었습니다. 서기 64년 사도 바울이 로마의 성 밖에서 순교를 당하자 사도 요한은 그를 대신해 에베소 교인들의 지도자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도미티안 황제 때에 로마로 끌려가 고문을 당하고 지중해 연안의 밧모섬으로 유배되어 이곳에서 대리석을 채취하는 중노동에 시달리면서 요한계시록을 썼습니다.

에베소 교회는 많은 박해를 받았으나 죽음을 불사하고 믿음을 배반치 않으며 신앙을 지켜냈습니다. 주님이 명령하신 선교의 사역도 게으르지 않았습니다. 이 정도면 훌륭한 교회 아닙니까? 그러나 주님에 대한 첫사랑을 잃어버렸다면 주를 위해 충성함과 고난을 견디는 믿음도 오래 갈 수 없을 것입니다.



4. 첫사랑이 없다면 실락원입니다.

이기는 자에게 주시는 상급으로 즉 첫사랑을 회복하면 하나님의 낙원에 있는 생명나무의 과실을 주어 먹게 하시겠다고 하셨는데 생명나무는 에덴동산 중앙에 있는 영생의 나무입니다. 이 과실을 약속하심은 상대적으로 에베소 교회가 사랑을 상실함으로 율법적 선악과만 먹고 있었던 셈입니다. 그 결과 축복의 동산은 차가워지면서 부끄러움 즉 서로의 잘못만 보일 뿐이었습니다. 사랑 만이 실락원을 복락원으로 만들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서로 사랑함으로 체험 가능한 생명의 하나님을 더 온전히 모실 수 있습니다.



[강해2] 어떻게 첫사랑을 회복할까요?

1. 문제점을 깨달아야 합니다.

4절 “그러나 너를 책망할 것이 있나니 너의 처음 사랑을 버렸느니라” 주님의 책망이 없었다면 에베소 교회는 별로 문제 없는 것로 착각하고 있었을 것입니다. 외형적으로는 뭐 하나 미흡한 것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부부의 사랑이 그렇듯 가장 중요한 것이 사라졌습니다.

2. 원인을 추적해야 합니다.

5절 “그러므로 어디서 떨어진 것을 생각하고 회개하여 처음 행위를 가지라” 는 말씀은 ‘너희가 어디서 떨어진지 조차도 몰랐구나.’ 하는 질책이기도 합니다. 에베소 교회의 업적으로 볼 때 몇 가지 추측해볼 수 있습니다. 주의 일에 너무 특심하지 않았는가? 주의 일에만 분주하면 주님 앞에 엎드릴 시간이 없습니다.

다음은 너무 말씀에만 치중하지 않았는가? 개혁주의의 예리한 칼날을 가졌다고 주님을 사랑하거나 영적으로 풍성한 것은 아닙니다. 말씀 위주의 신앙이나 강단은 영적으로 죽기 마련입니다.

3. 신앙의 핵심을 파악해야 합니다.

5절 “회개하여 처음 행위를 가지라” 여기 처음 행위는 하나님과 이웃을 향한 감격적인 사랑을 말합니다. 성경의 핵심은 예수 그리스도요, 한 편으로는 사랑입니다. 성령 받아 첫사랑을 시작했듯 감격적인 사랑을 회복하는 것은 성령으로라야 가능합니다.

4. 주님의 경고를 들어야 합니다.

5절 하 반절 “만일 그리하지 아니하고 회개하지 아니하면 내가 네게 가서 네 촛대를 그 자리에서 옮기리라” 첫사랑 즉 성령에 무관심하면 부흥은 멈춥니다. 교회가 사라집니다. 참 믿음을 물려주지 못하면 기독교가 몇 대나 이어질지 불보듯 뻔합니다. 이러한 경각심을 가지시기 바랍니다.

계2:1에 “오른손에 있는 일곱 별을 붙잡고 일곱 금 촛대 사이를 거니시는 이”로 나타나신 것은 에베소 교회를 향한 희망이자 상태를 역설적으로 보여줍니다. 즉 주의 종들은 능력을 잃어버렸고 하나님께서는 너희 회중과 함께하시지 않는다는 주님의 경고로 볼 수 있습니다.

5. 작은 불씨라도 살릴 때 가능합니다.

6절 “오직 네게 이것이 있으니 네가 니골라 당의 행위를 미워하는도다 나도 이것을 미워하노라” 에베소 교회가 주님을 사랑하는 작은 불씨는 남아있었습니다. 교회를 염려하며 이단 니골라 당을 미워하고 있었습니다.

당시 니골라당은 육은 더럽고 영은 깨끗하다는 이원론 사상과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았으니 범죄해도 상관 없다는 복음을 오바한 이단 사상입니다. 에베소 교인들은 이런 세속주의 이단이 교회에 퍼지는 것을 심히 안타깝게 여기고 있었습니다. 주님을 사랑하고 있는 증거입니다.

한국교회가 예전만 못한다 할지라도 주님을 사랑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이단들이 양들을 삼키려고 달려들 때 그들의 행위를 미워하며 교회를 염려합니다. 자유민주주의를 수호하고 악법에 반대하는 것도 신앙의 자유에 대한 염려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작은 불씨는 남았습니다. 이 남아 있는 작은 불씨를 살려 다시 부흥을 일으키시기 바랍니다.

6. 전투적 믿음으로 이기시기 바랍니다.

7절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지어다 이기는 그에게는 내가 하나님의 낙원에 있는 생명나무의 열매를 주어 먹게 하리라” 귀 있는 자는 들으라는 말씀은 주위를 집중시키는 화법임과 동시에 듣지 않는 자가 많다는 의미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이기라는 말씀도 전투적 믿음을 강조함과 아울러 저항도 만만치 않다는 것입니다. 나부터 이겨야 합니다. 안일하고 게으르며 세상에 빠져있는 자신부터 일깨워야 합니다. 첫사랑의 회복은 달리 표현하면 성령의 부흥을 의미합니다. 초대교회처럼 몸과 마음을 집중하여 성령의 부흥운동을 일으킵시다. 그 부흥의 성령 안에서 주님을 진실로 만나시기 바랍니다.

주님을 3번이나 부인했던 베드로를 부활하신 주님은 갈릴리로 부르셨습니다. 첫사랑의 장소로 부르신 것입니다. 위기에 빠진 부부가 새롭게 출발하기 위해 처음 만났던 장소를 찾는 것처럼 주님께서는 제자들을 첫 사랑의 기억이 서린 곳으로 부르셨습니다. 그리고 다가가 그물을 배 오른쪽에 던져 보라고 말합니다. 놀라운 것은 그물에 고기가 가득히 잡혔습니다.

그 때 요한이 베드로에게 외칩니다. "저분은 주님이시다!" 베드로는 넘 반가워 물로 뛰어들어 주님께 달려갑니다. 예수님과 제자들은 잡은 생선을 구워 해변가에서 아침 식사를 나눕니다. 말을 없지만 만감이 교차되는 순간입니다. 식사를 마친 다음, 예수님은 베드로를 따로 불러내십니다. 아마도 둘이서 해변을 걸었는지 모릅니다.

말없이 걸으시던 예수께서 베드로에게 물으십니다.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15절) 예수께서 베드로를 부르시면서 처음 만났을 때의 이름 '시몬'을 사용하십니다.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려는 뜻이 분명합니다. 그러시면서 세 번이나 사랑에 대해 물으십니다.

그런데 주님께서는 부드러운 눈길로 베드로의 떨리는 눈동자를 보시고 또 말씀하십니다. "내 어린 양을 먹여라." 베드로는 참혹하게 실패한 자신에게 더구나 여전히 사랑에 부족한 자신을 믿고 일을 맡기시겠다는 말씀을 듣고 얼어붙었던 베드로의 마음이 녹아지기 시작합니다.

주님께서는 두 번 더 그의 사랑을 확인하시고 그에게 양들을 돌보라고 부탁하십니다. 베드로가 세 번 실패한 것을 생각하고 세 번 그렇게 하셨습니다. 이 사건으로 베드로는 예수님과의 첫사랑을 회복하게 되었습니다. 그랬기에 그는 주님을 위해 그의 생명을 바칠 수 있었습니다. 이렇게 주님을 깊이 만나시기 바랍니다.





서머나 교회에 보낸 편지 (계 2:8-11)

8 서머나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라 처음이며 마지막이요 죽었다가 살아나신 이가 이르시되 9 내가 네 환난과 궁핍을 알거니와 실상은 네가 부요한 자니라 자칭 유대인이라 하는 자들의 비방도 알거니와 실상은 유대인이 아니요 사탄의 회당이라 10 너는 장차 받을 고난을 두려워하지 말라 볼지어다 마귀가 장차 너희 가운데에서 몇 사람을 옥에 던져 시험을 받게 하리니 너희가 십 일 동안 환난을 받으리라 네가 죽도록 충성하라 그리하면 내가 생명의 관을 네게 주리라 11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지어다 이기는 자는 둘째 사망의 해를 받지 아니하리라

<서머나 교회의 사회적 배경>

'서머나'는 에베소 북쪽 약 80km 지점에 있었고 인구 약 20-30만 정도의 소아시아에서 가장 아름다운 항구 도시였다. '서머나'란 말 가운데 '머'(Myrrh)는 '유향'이란 뜻으로 이곳은 향료 수출지로도 유명하였고, 이곳은 호머(Homer)의 출생지이며 학문, 특히 과학과 의술이 발달한 도시였다. 종교적으로는 이교 문화와 종교의 집합처로 황제 숭배의 중심지였다. 그로 인해 복음이 순수하게 전달되지 못하고 황제 숭배가 성행하는 등 혼합화와 박해가 뒤따른 도시로 초대 감독 폴리갑(B.C.155-166)이 이곳에서 순교하였다.

<서머나 교회>

1. 서머나 교회에 계시된 그리스도의 모습

“처음이요 나중이요 죽었다가 살아나신 이가 가라사대” “처음이요 나중이요”는 우주를 창조하시고 역사 전체를 지배하시며 태초에도 계셨으며 역사의 종말에도 계신 그리스도의 주권을 나타낸다.

“죽었다가 살아나신”에 해당하는 부정과거형으로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이 역사적이며 단회적 사건임을 나타낸다. 그리스도께서 자신의 모습에 대해 이렇게 계시하신 것은 투옥과 사형의 핍박 가운데 있는 서머나 교회 교인들에게 소망을 주시기 위함이다.

2. 서머나 교회의 칭찬

1) 내가 네 환난과 궁핍을 안다.
2) 실상은 네가 부요한 자다.
3) 자칭 유대인이라 하는 자들의 훼방도 안다.
서머나에는 유대인들이 많이 거주하고 있었고 서머나의 고위직에 오른 자들이 많아서 기독교를 박해하고 방해하였다. 예를 들면 황제 숭배를 이용하여 거짓된 말로 로마 제국을 충동해서 서머나의 감독이었던 폴리갑을 처형한 것을 볼 수 있다.

3. 핍박하던 유대인의 실체

"실상은 유대인이 아니요 사단의 회라" - 혈통적으로 아브라함의 자손이라고 주장하여 하나님의 선민임을 자랑했던 서머나의 유대인들은 표면적 유대인일 뿐 하나님의 백성이 아니었고(롬2:28,29), 이들의 유대주의는 가장 포괄적이며 강한 기독교의 훼방자로 복음을 방해하고 교회를 핍박한 사단의 회였다.

4. 예수님의 권면

"네가 장차 받을 고난을 두려워 말라." 이로 보아 당시의 신자들이 장차 임할 핍박과 고난을 생각하고 두려워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볼지어다 마귀가 장차 너희 가운데서 몇 사람을 옥에 던져 시험을 받게 하리니." 핍박하는 자가 누구든 그 주체는 마귀였다. "너희가 십일 동안 환난을 받으리라." “십일 동안”의 헬라어 '헤메론 데카'에 대한 해석으로 짧은 기간을 나타내는 셈어적 표현이다.

5. 충성하는 자의 상급

"네가 죽도록 충성하라 그리하면 내가 생명의 면류관을 네게 주리라." 당시 극심한 황제 숭배 강요 속에서 죽음의 위협을 받고 있던 교인들을 향한 단호한 명령이요, 상급에 대한 약속이다. "이기는 자는 둘째 사망의 해를 받지 아니하리라." 생명의 면류관과 연결된 것으로 승리자에게 주어진 약속을 나타낸다. “둘째 사망”은 탈굼역에서 유래한 것으로 유대인에게는 아주 친숙한 용어로 불신자가 당할 영원한 죽음을 가리킨다.


생명의 면류관 (계 2:8-11)

예수님께서는 박해 당하고 있는 서머나 교회에 "네가 죽도록 충성하라. 그리하면 내가 생명의 면류관을 네게 주리라"(10절)고 하셨습니다. 본래 면류관은 아무나 쓰는 것이 아닙니다. 왕이나 혹은 당시 올림픽에 우승한 사람이 쓰는 승리의 관입니다.

생명의 면류관이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요10:10) 하신 것처럼 생명을 얻되 풍성히 얻을 뿐 아니라 생명이 왕 노릇하는 풍성한 은혜가 바로 생명의 면류관입니다. 사망이 없고 모든 것을 이기는 생명입니다(롬8:1-2).

생명의 면류관의 주인공이 되려면

1. 연단을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8절 “처음이며 마지막이요” 서머니 교회에 나타나신 예수님의 모습은 처음이며 마지막이셨습니다. “처음이요 마지막”이란 우리와 관련한 주님의 이름으로 보아야 합니다. 즉 우리에게 구원의 선한 일을 시작하신 이가 그리스도 예수의 날까지 온전히 이루실 것입니다.

당시 서머나 교회는 표면적으로는 황제숭배를 강요하는 로마의 세력과 기독교를 박해하는 유대주의적 율법의 세력이라는 큰 두 세력에 의해 다각도로 박해를 받고 있었습니다. 이 모든 것이 우리를 생명적인 예수의 사람으로 만들기 위한 것입니다.

지금 한국교회는 정치적으로는 코로나19로 지나치게 교회를 압제하고 종교적으로는 예수 이름을 도둑질한 이단들이 교회를 괴롭히고 능멸하고 있습니다. 이기는 방법은 진짜를 보여주는 길밖에는 없습니다. 또 다시 이신득의의 종교개혁과 영적부흥을 일으켜야 합니다(약1:2-4). 안일하고 완악한 인간의 모습을 깨뜨리는 데는 환난이 최고입니다.

동방의 의인 욥이 가장 고통스러웠던 것은 자신이 당하는 환난의 의미를 알지 못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그에게 요구하시는 것은 율법이 아닌 복음에 돌아오는 것이었고, 귀로만 듣던 하나님이 아니라 눈으로 뵙는 실재적 수준을 요구하셨습니다. 고난이 우리를 위한 연단이라는 것을 알 때 우리는 진실로 회개할 수 있을 것입니다.

2. 다시 일어나시기 바랍니다.

8절 “죽었다가 살아나신 이가 이르시되” 서머니 교회에 죽었으나 다시 부활하신 모습으로 나타나신 것은 부활이 있으니 죽음을 두려워 말라는 의미와 함께, 온전히 예수 안에서 새롭게 나타나길 원한다는 의미도 있습니다. 죽어야 사는 것이 성경의 진리입니다.

딤후2:11-12 “미쁘다 이 말이여 우리가 주와 함께 죽었으면 또한 함께 살 것이요 참으면 또한 함께 왕 노릇 할 것이요 우리가 주를 부인하면 주도 우리를 부인하실 것이라”

3. 죽도록 충성하시기 바랍니다.

10절 “네가 죽도록 충성하라 그리하면 내가 생명의 관을 네게 주리라” 생명의 면류관을 주시기 위해서 시련을 주셨으니 우리가 할 일은 그 의도에 맞추어 죽도록 충성하는 것입니다(벧전4:12-16, 약1:2-4, 히12:9-13). 그리고 연단의 목적은 하나님 두려운 줄 알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것이 경건이며 경건이 들어설 대 비로소 하나님과 동행이 가능합니다.

4. 실상을 오해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9절 “내가 네 환난과 궁핍을 알거니와 실상은 네가 부요한 자니라” 실상은 버리심이 아니라 특별히 사랑하심이며, 환난과 궁핍을 당하지만 영적으로는 부요하며, 육신적으로는 두렵지만 영적으로는 가장 안전할 때입니다. 하나님께서 멀리 계신 것 같아도 가장 가까이 계실 때입니다.

서머나 교회가 완전해서 책망이 없는 건 아닙니다. 그렇지만 연단 중에 있기 때문에 굳이 책망하실 필요가 없었습니다. 동방의 의인 욥도 연단이 필요했습니다(욥23:10, 욥7:18). 남보다 연단이 많다면 하나님께서 더 귀히 쓰시기 위해서라고 생각하시기 바랍니다.

5. 영적으로 대처하시기 바랍니다.

9절 “자칭 유대인이라 하는 자들의 비방도 알거니와 실상은 유대인이 아니요 사탄의 회당이라” 언약 안에 머물지 않다면 아브라함의 혈통일지라도 가짜일 뿐입니다. 그들은 사탄의 일을 하는 사탄의 회였습니다. 배후에 마귀의 역사만 알아도 대처하는 방법이 달라집니다. 육신적으로 투쟁하며 시험에 빠지지 않고 예수 이름으로 기도로 싸우게 됩니다(엡6:12).

6. 육감이 아닌 영감을 따라 사는 것입니다.

10절 “너는 장차 받을 고난을 두려워하지 말라 - 네가 죽도록 충성하라 그리하면 내가 생명의 관을 네게 주리라” 고난의 예고는 육감으로는 두려울 일입니다. 그러나 두려워 말라 하심은 육감보다 영감을 따르라는 말씀입니다. 딤후1:7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것은 두려워하는 마음이 아니요 오직 능력과 사랑과 절제하는 마음이니" 그러므로 성령으로 늘 충만하시기 바랍니다.

7. 섭리의 손길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10절 “마귀가 장차 너희 가운데에서 몇 사람을 옥에 던져 시험을 받게 하리니 너희가 십 일 동안 환난을 받으리라” 이 말씀 속에 시험이 악인들의 계획 속에 진행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예정과 섭리 가운데 진행됨을 보여줍니다.

눅12:6-7 “참새 다섯 마리가 두 앗사리온에 팔리는 것이 아니냐 그러나 하나님 앞에는 그 하나도 잊어버리시는 바 되지 아니하는도다 너희에게는 심지어 머리털까지도 다 세신 바 되었나니 두려워하지 말라 너희는 많은 참새보다 더 귀하니라”

그러므로 기쁨으로 온전한 믿음을 위해서 최선을 다하시기 바랍니다. 10일이라 했는데 서머니 교회가 10일간만 시험을 받은 건 아닙니다. 10은 연단의 수요 다 채움의 만수라는 점에서 훈련의 여부에 따라 단기 혹은 장기일 수도 있습니다. 이 연단의 하나님의 손에서 자유할 수 있는 길은 오직 부르심에 순종하는 길밖에는 없습니다.

부탁드리는 것은 적당히 믿을 생각은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처음이요 나중인 하나님께서 우리를 온전케 하시기로 작정하셨으니 온전한 믿음으로 반응할 때까지 그 손길은 멈추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시험을 이기기 위해서 육신적으로 판단하지 말고 현실을 영적으로 이해하고, 영적으로 대처하고, 하나님이 원하시는 믿음의 목표를 향해 전진하시는 승리의 성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버가모 교회에 보낸 편지 (계 2:12-17)

12. 버가모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라 좌우에 날선 검을 가지신 이가 이르시되 13. 네가 어디에 사는지를 내가 아노니 거기는 사탄의 권좌가 있는 데라 네가 내 이름을 굳게 잡아서 내 충성된 증인 안디바가 너희 가운데 곧 사탄이 사는 곳에서 죽임을 당할 때에도 나를 믿는 믿음을 저버리지 아니하였도다 14. 그러나 네게 두어 가지 책망할 것이 있나니 거기 네게 발람의 교훈을 지키는 자들이 있도다 발람이 발락을 가르쳐 이스라엘 자손 앞에 걸림돌을 놓아 우상의 제물을 먹게 하였고 또 행음하게 하였느니라 15. 이와 같이 네게도 니골라 당의 교훈을 지키는 자들이 있도다 16. 그러므로 회개하라 그리하지 아니하면 내가 네게 속히 가서 내 입의 검으로 그들과 싸우리라 17.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지어다 이기는 그에게는 내가 감추었던 만나를 주고 또 흰 돌을 줄 터인데 그 돌 위에 새 이름을 기록한 것이 있나니 받는 자 밖에는 그 이름을 알 사람이 없느니라

<버가모 교회의 사회적 배경>

버가모는 서머나 북쪽 약 100km되는 곳에 위치한 수도로 주전 130년 경에 로마의 식민지가 되었다. 이곳은 에베소와 서머나가 상업적으로 아시아의 중심 역할을 한 반면에 문화적인 측면에서 아시아의 중심부 역할을 했다. 그래서 의학교가 있었으며 장서 20여만권을 소장한 도서관이 있었으며 책을 만드는 종이인 양피지의 생산지였다. 종교적으로 치료의 신으로 이해되었던 '아에스쿨라피우스'(Asclepius)라 불리는 뱀신과 주신인 '제우스'(Zeus), 그리고 아테네 신전 지도자 '디오니소스'(Dionysos) 등을 숭배하는 우상 숭배지였다.

<버가모 교회>

1. 버가모교회에 계시된 그리스도

1) 좌우에 날선 검을 가진 이, 날선 검은 예리한 말씀의 상징으로 버가모 교회를 혼란스럽게 하는 발람의 교훈을 따르는 자들과 니골라당을 대적하시는 예수님의 모습이다. 이런 모습으로 나타나심은 버가모 교회가 이런 이설과 이단을 허용했기 때문이다.

2) 다 아시는 이, "네가 어디에 사는지를 내가 아노니 거기는 사탄의 권좌가 있는 데라." 버가모 교인들이 지금 처하여 있는 어려움을 아신다는 의미로 위로의 말씀이시다. 버가모가 황제 숭배와 온갖 우상 숭배의 중심지였기에 그들이 신앙을 지키기 위해 당하는 고난은 이루 말할 수 없는 것이었다. “사단의 권죄가 있는 곳”이란 버가모가 이방신과 황제 숭배의 중심지였다는 사실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인다.

2. 버가모 교회의 칭찬

"네가 내 이름을 굳게 잡아서 내 충성된 증인 안디바가 너희 가운데 곧 사탄이 사는 곳에서 죽임을 당할 때에도 나를 믿는 믿음을 저버리지 아니하였도다." '굳게 잡아서'에 해당하는 헬라어 '크라테이스'는 '크라테오'('붙잡다')의 현재 능동태 시상으로 '계속해서 굳게 잡았음을 의미한다(25절; 3:11). 즉 여러 가지 우상과 황제 숭배 강요에도 순교를 불사하며 그리스도를 따르는 믿음을 저버리지 않았음을 시사한다.

3. 버가모 교회에 대한 책망

"그러나 네게 두어 가지 책망할 것이 있나니 거기 네게 발람의 교훈을 지키는 자들이 있도다." 버가모 교회가 부분적으로는 발람의 교훈을 좇는 자들이 있었다. 발람의 교훈은 하나님의 백성으로 하여금 이방사람들 잡혼을 하게 하고 우상 숭배하는 일에 타협케 한 것을 가리킨다(민22-25장; 31:8,16).

'발람'은 어원적으로 '백성을 정복하라'는 의미의 '니골라당'과 동일한 의미를 가진다. 그러므로 이어 나오는 니골라당의 교훈은 발람의 교훈과 동일한 것으로 보인다.

4. 회복의 길

"그러므로 회개하라 그리하지 아니하면 내가 네게 속히 가서 내 입의 검으로 그들과 싸우리라." 회개하라는 것은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을 회복할 것을 의미한다. 회개하지 않으면 내 입의 검으로 그들과 싸우리라 하심은 교회 자체를 심판하실 것을 의미한다. 한국교회가 사회에 짓밟혀 있다면 바른 진리와 신앙에 서지 못한 하나님의 심판일 것이다.

5. 이기는 자에게 주시는 약속

1) "이기는 그에게는 내가 감추었던 만나를 주고." 감추었던 만나는 성경의 오묘한 무궁한 진리의 말씀을 뜻한다. 가짜복음인 발람의 교훈 즉 니골라당의 교훈을 극복한다면 참복음의 더 오묘한 말씀을 발견하도록 복주실 것이다.



2) "또 흰 돌을 줄 터인데 그 돌 위에 새 이름을 기록한 것이 있나니 받는 자 밖에는 그 이름을 알 사람이 없느니라." 흰 돌에 대한 의견이 다양하지만 이기는 자에게 주시는 상급이란 점에서 당시 경기에 승리한 자에게 우승 기념으로 새겨 주었던 흰 돌이 그 배경으로 보인다.


그리고 거기에 새긴 새 이름은 하나님께서 개명해 주시듯 새 사람을 암시하는 표현으로 참복음의 그 결과로 새사람이 될 것을 시사함이다. 그 결과 가짜복음에서 맛보지 못한, 받은 자밖에는 알지 못할 신령한 은혜를 누리게 해주실 것이다.


[강해 1] 감추었던 만나 (계 2:12-17)

말세에 있을 최고의 시험은 말씀에 대한 시험입니다. 그래서 선지자 아모스는 "보라 날이 이를지라 내가 기근을 땅에 보내리니 양식이 없어 주림이 아니며 물이 없어 갈함이 아니요 여호와의 말씀을 듣지 못한 기갈이라."(암8:11) 했습니다. 아모스의 예언대로 교리사에서 최종적인 다툼은 때 아닌 성경론입니다.

신학의 서론이 성경론이요 성경은 신앙과 신학의 근본이므로 다투려면 성경이 쓰여지던 초대교회 때 다투어야 할 텐데 모든 논제를 다 다룬 다음에 이제야 논의되고 있습니다. 이것은 사탄이 역사의 마지막에 진리의 근본인 성경을 뒤엎음으로 교회에 큰 타격을 입기기 위함입니다.

만나는 신약에서 예수 그리스도요,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딤후3:15에 "성경은 능히 너로 하여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에 이르는 지혜가 있게 하느니라“ 한 것처럼 성경이 천국 가는 길에 밝은 빛과 같은 신앙의 안내서가 되어야 합니다.

7절에 “이기는 그에게는 내가 감추었던 만나를 주고” 이 말씀은 아직도 무궁무진한 진리가 성경 속에 담겨 있다는 의미입니다. 성경 이해의 부족으로 아직도 성경이 수건으로 덮여(고후4:14-15) 있거나, 열려있지만 풍부하지 못한다면 이제는 성경 속에 감추인 신령한 만나를 발굴하여 내놓을 수 있도록 힘써야 할 것입니다.

감추었던 만나를 먹으려면

1. 말씀의 분별력을 가져야 합니다.

12절 “좌우에 날선 검을 가지신 이가 이르시되” 버가모 교회에 좌우에 날선 검을 가지신 모습으로 나타나신 이유는 아직 버가모 교회가 진리에서 떠나 있거나 혹은 말씀에 대한 이해가 부족했음을 의미합니다. 실제로 버가모 교회 중 일부는 발람의 교훈 즉 니골라당의 교훈을 허용하는 등 이단에 치우쳐 있었습니다. 지금도 다원주의를 주장하는 이가 있는데 이는 기독교를 부정하는 것과 다름이 없습니다.

바른 성경 해석을 위해서 선지자들과 사도들이 물려준 정통교리의 틀을 떠나지 말고, 또 성경 기자의 시각으로 성경을 보며, 성경을 성경으로 해석하고, 무엇보다 성경의 저자이신 성령의 영감의 도움을 받아야 합니다.

성경을 축자영감으로 보고 성령의 도우심으로 연구하다 보면 신령한 눈이 열려 오묘하고 풍성한 꼴을 얻게 됩니다. 나아가 그 말씀이 우리 신앙체험에 부합하도록 적용함까지 나가야 합니다. 성경이 우리에게 신령한 지도서가 되지 못한다면 무슨 유익이 있겠습니까?

2. 예수 이름을 굳게 붙잡아야 합니다.

13절 “네가 어디에 사는지를 내가 아노니 거기는 사탄의 권좌가 있는 데라 네가 내 이름을 굳게 잡아서 내 충성된 증인 안디바가 너희 가운데 곧 사탄이 사는 곳에서 죽임을 당할 때에도 나를 믿는 믿음을 저버리지 아니하였도다”

여기 안디바(안티파스, Antipas)는 예수 이름 때문에 순교한 순교자입니다. 터툴리안에 의하면 안디바는 버가모 교회의 명성 높은 감독으로 황제숭배를 거절하다가 불에 달구어진 놋쇠 황소 위에 얹히어 타서 순교했다고 합니다.

이처럼 성경을 연구하는데도 예수 이름을 굳게 붙들어야 합니다. 성경의 답은 이미 나와 있습니다. 그것은 예수와 우리 신앙에 관한 이야기라는 것입니다(요5:39, 고후4:16). 예를 들면 성막을 아무리 잘 설명해도 신령한 관점에서 이해하지 못하면 아직도 감춰진 만나일 뿐입니다.

3. 성경을 이탈하지 않아야 합니다.

14절 “그러나 네게 두어 가지 책망할 것이 있나니 거기 네게 발람의 교훈을 지키는 자들이 있도다” 버가모 교인들은 외부로 오는 박해는 이겼으면서도 내부로 오는 거짓된 교훈은 이기지 못했습니다. 발람은 민수기 22장-25장에 나오는 인물로 그는 모압 왕 발락의 재물에 눈이 어두워 이스라엘 백성들을 미인계와 우상으로 시험에 빠뜨린 인물입니다.

이처럼 버가모 교회가 복음의 자유를 지나치게 확대 해석하여 종교적 윤리적 방종으로 오도하지 않았나 학자들은 추측합니다. 예수의 공로로 구원을 받았으므로 어떤 행위를 해도 무방하다는 것은 이단적 주장입니다. 예수와 함께 죄에 대해서 죽었는데 어찌 그 가운데 살겠습니까?(롬6:1-2)

그들의 교훈은 신신학적이고 진보적이고 복음을 극대화한 듯 쇼킹했지만 성도들의 영적 문제는 더욱 꼬이고 이탈하게만 할 뿐이었습니다. 교리의 진위 여부는 우리의 삶에서 검증됩니다. 그대로 살아보니 되더냐는 것입니다(사8:20-22). 아무리 그럴듯해도 이단설로는 진정한 하나님 나라의 은총을 받아 누릴 수 없습니다.


[강해 2] 새 이름의 흰 돌 (계 2:12-17)

당시 배경으로 흰돌은 경기에서 우승자에게 주었거나, 법정에서 무죄 판정의 증거로, 혹은 공식 연회에 참여할 수 있는 티켓으로, 혹은 제사장의 가슴에 있는 에봇 속에 있던 우림과 둠밈이라는 두 돌 중 하나로 보는 견해가 있습니다. 그러나 이기는 자에게 주신다는 점에서 경기자에게 우승으로 주던 것을 배경으로 하신 말씀으로 보입니다.

흰 돌에 쓰인 새 이름이란 이름이 그렇듯이 결국 새 사람을 상징하는 단어입니다. 그리고 "받는 자 밖에는 그 이름을 알 사람이 없느니라." 한 말씀은 새 사람이 누리는 풍성한 은혜를 암시합니다. 그러므로 흰돌의 새 이름은 발람사상과 같은 비진리를 이긴 자에게 주시는 것으로 신령한 복음의 은혜를 누린 자에게 주시는 그 결과는 크다 할 수 있습니다.

성령 안에서 새 사람으로 살려면

1. 이길 만큼 몇 배로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13절 “네가 어디에 사는지를 내가 아노니 거기는 사탄의 권좌가 있는 데라” 버가모 교회의 상황이 너무나 악했습니다. 그곳은 사탄의 권좌가 있는 곳이었습니다. 버가모에는 제우스, 아에스쿨라피우스, 아테네, 디오니소스를 주된 신으로 섬겼는데 그 중 특히 뱀을 상징하는 아에스쿨라피우스를 섬겼습니다. 이런 우상숭배가 창궐했던 사실을 지칭하여 사단의 위라고 말하신 것으로 보입니다.

그러나 그만큼 자신과 및 환경이 악하다면 그만큼 기도해야 합니다. 성령의 역사가 많이 일어난 현장에는 다가가기만 해도 마음이 훈훈합니다. 반면 사탄의 문화로 찌들은 곳에서는 더 많이 기도해야 하고 더 영적으로 주의를 기울여야 합니다. 함부로 안수하다가는 본래 의도와는 달리 잘못하면 사탄의 잔치가 되어버립니다.

개인적으로도 일곱 귀신에 붙들린 막달라 마리아와 같이 악하다면 더 많이 기도해야 합니다. 신앙 가족이라든지 배후의 기도가 부족한 사람 역시 더 많이 기도하고 노력해야 합니다. 환경이 으스스하고 기도가 집중되지 않을 때는 여럿이 기도하거나 찬송을 틀어놓고 기도해도 도움이 됩니다. 산중보다는 예배당이 가장 좋은 기도처입니다.

2. 복음의 진리에 생명을 거시기 바랍니다.

12절 “네가 내 이름을 굳게 잡아서 내 충성된 증인 안디바가 너희 가운데 곧 사탄이 사는 곳에서 죽임을 당할 때에도 나를 믿는 믿음을 저버리지 아니하였도다” 버가모 교회는 좋은 믿음의 본이 있었습니다. 버가모 교회의 감독 안디바의 순교적 신앙이 그것입니다. 안디바는 로마 도미티아누스 황제 때 황제 숭배를 거부하다가 화형에 처해졌다고 합니다.

이처럼 말씀대로 복음에 견고히 서시기 바랍니다. 예수 안에서 용서와 씻음과 거룩함과 영광스럽게 됨을 받았음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보혈을 믿되 하나님과 온전히 화목할 만큼 담대히 믿으시기 바랍니다. 예수 안에서 주신 구원과 승리의 확신에 서야 합니다.

그리고 말씀 기도 찬송 예배 성례 사랑 등 성화의 방편을 죽으면 죽으리라 고집적으로 적용하면서 나가면 그 산 순교적 신앙에 은혜의 잔치가 주어집니다. 매일 매일 하나님을 경외함의 신앙생활에 목숨 거시기 바랍니다. 오늘의 최대의 핍박자요 방해꾼은 황제도 총독도 아닌 나 자신입니다.

3. 진리를 벗어나지 마시기 바랍니다.

14-16절 “그러나 네게 두어 가지 책망할 것이 있나니 거기 네게 발람의 교훈을 지키는 자들이 있도다 발람이 발락을 가르쳐 이스라엘 자손 앞에 걸림돌을 놓아 우상의 제물을 먹게 하였고 또 행음하게 하였느니라 이와 같이 네게도 니골라 당의 교훈을 지키는 자들이 있도다 그러므로 회개하라 그리하지 아니하면 내가 네게 속히 가서 내 입의 검으로 그들과 싸우리라”

버가모 교회의 문제는 발람의 교훈 즉 니골라 당의 교훈을 분별하지 못하고 받아들인 자가 많았습니다. 니골라가 초대교회 일곱 집사 중 하나(행6:5)인지 확실하지 않지만 기독교 초기의 교회의 교부 이레나이우스에 의해 니골라당의 창시자로 알려져 있습니다. 이들은 당시 사회의 팽배했던 영지주의의 영향을 받아 이원론 사상으로 그리스도인들에게 주어진 자유를 육신을 위한 기회로 삼음으로 기독교의 교리를 잘못 오용하여 육신의 죄악을 조장하게 한 이단입니다(갈5:13).


※ 니골라당의 주요사상

ㄱ. 영은 선하지만 육신은 근본적으로 악하다.
ㄴ. 믿음으로 영이 구원을 받기에 육신의 행위는 어떠하든 상관없다.
ㄷ. 율법에서 해방되었기 때문에 육체가 짓는 죄는 정죄의 대상에서 제외된다.
ㄹ. 인간은 자신이 원하는 대로 살 수 있는 자유가 주어졌다.


이처럼 그들은 이원론 사상에다 그리스도의 복음을 지나치게 확대 적용한 나머니 죄를 지어도 상관이 없다는 교훈을 만들어냈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이들의 교훈이 이스라엘로 우상 제물을 먹게 하고 행음하게 한 발람의 교훈과 흡사하다고 지적하시면서(14절), 니골라당의 행위를 지적하고 계십니다. 우리나라에도 그런 이단이 존재하는데 그리스도의 피의 복음을 지나치게 남용하여 죄를 지어도 상관이 없다는 교훈을 한다면 명백한 이단입니다.


우리의 믿음에 비진리가 섞여있다면 영적으로 빛을 보지 못합니다(벧전2:2). 한국 교회을 돌아볼 때 선조들이 예수 이름을 위해 순교적인 피를 많이 흘린 것으로 유명하지만, 아직도 이교적 풍토를 떨어내버리지 못하고 있음을 발견합니다. 진리 안에서 우리의 생각과 언어와 삶이 바뀌지 않는다면 하나님을 바로 모셨다고 할 수 없을 것입니다(요2서 1:9).


바른 진리에 서지 못한다면 감추인 만나도 먹을 수 없고, 변화된 진리의 새 사람도 될 수 없습니다(요일3:24). 그러므로 새 사람이 되게 하고, 나아가 하나님 나라를 누림에 부족함이 없게 하는 바른 복음의 진리를 취하는 것이 곧 니골라당의 교훈을 이기는 것입니다.




두아디라 교회에 보낸 편지 (계 2:18-29)

18. 두아디라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라 그 눈이 불꽃 같고 그 발이 빛난 주석과 같은 하나님의 아들이 이르시되 19. 내가 네 사업과 사랑과 믿음과 섬김과 인내를 아노니 네 나중 행위가 처음 것보다 많도다 20. 그러나 네게 책망할 일이 있노라 자칭 선지자라 하는 여자 이세벨을 네가 용납함이니 그가 내 종들을 가르쳐 꾀어 행음하게 하고 우상의 제물을 먹게 하는도다 21. 또 내가 그에게 회개할 기회를 주었으되 자기의 음행을 회개하고자 하지 아니하는도다 22. 볼지어다 내가 그를 침상에 던질 터이요 또 그와 더불어 간음하는 자들도 만일 그의 행위를 회개하지 아니하면 큰 환난 가운데에 던지고 23. 또 내가 사망으로 그의 자녀를 죽이리니 모든 교회가 나는 사람의 뜻과 마음을 살피는 자인 줄 알지라 내가 너희 각 사람의 행위대로 갚아 주리라 24. 두아디라에 남아 있어 이 교훈을 받지 아니하고 소위 사탄의 깊은 것을 알지 못하는 너희에게 말하노니 다른 짐으로 너희에게 지울 것은 없노라 25. 다만 너희에게 있는 것을 내가 올 때까지 굳게 잡으라 26. 이기는 자와 끝까지 내 일을 지키는 그에게 만국을 다스리는 권세를 주리니 27. 그가 철장을 가지고 그들을 다스려 질그릇 깨뜨리는 것과 같이 하리라 나도 내 아버지께 받은 것이 그러하니라 28. 내가 또 그에게 새벽 별을 주리라 29.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지어다

<두아디라 교회의 사회적 배경>

두아디라는 버가모와 서머나의 중간 지점에 위치해 있으며 공업도시로 유명한 곳이었다. 주전 190년 경 로마의 식민지가 되었고 태양신 '아폴로'(Apollo)와 '아데미'(Diana), '삼바다'(Sambatha) 등의 신전이 있었으며, 공업이 발달하게 된 동업 조합이 유명하였다. 빌립보에서 개종한 자주 장사 루디아가 이곳 출신의 여인이었다(행16:14). 두아디라 교회가 어떻게 설립되었는지 정확하게 알 수 없으나 바울이 에베소에 머물 때 전도하였거나 루디아가 전달하여 세워졌을 것으로 추측된다.

1. 두아디라 교회에 계시된 그리스도

"그 눈이 불꽃 같고 그 발이 빛난 주석과 같은 하나님의 아들" 두이디라 교회에 나타나신 주님의 모습은 어떤 은밀한 죄도 찾아내시고 회개치 않는 범죄한 죄인을 산산조각으로 짓밟아버리시는 심판자의 모습이시다. 이 모습은 두아디라에서 숭배하던 태양신 '아폴로'와 거짓 예언자 '이세벨'(20절)을 염두에 두고 경고하시는 것으로 그들의 우상 숭배와 행음에 대해 반드시 심판하시리라는 사실을 암시한다.

그리고 '하나님의 아들'이란 언급을 구태여 하신 이유는 시2:7을 반영한 것으로 두아디라 지방의 우상이면서 제우스의 아들로 여겼던 아폴로나 황제 등과 대조를 이루어 오직 그리스도만이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시사한다.

2. 두아디라 교회의 칭찬

“내가 네 사업과 사랑과 믿음과 섬김과 인내를 아노니 네 나중 행위가 처음 것보다 많도다” 두아디라에 공업이 발달하여 사업이 흥행했던 것처럼 교회 역시 부흥에 원대한 꿈이 많았다. 교회 부흥의 원동력인 사랑을 비롯해 믿음과 섬김과 인내도 많았고, 나중행위가 처음 것보다 많다고 하셨듯 시작은 미약하였으나 더욱 창대해졌다.

3. 두아디라 교회의 책망

“자칭 선지자라 하는 여자 이세벨을 네가 용납함이니” 두아디라 교회는 에베소 교회와는 반대되는 현상으로(4절) 에베소 교회가 믿는 도리를 강조하다 사랑을 잃었으나 두아디라는 사랑을 강조함으로 부흥하였지만 지나친 용납으로 이세벨을 받아들이는 잘못을 범하였다. 구약성경에서 이세벨은 시돈의 왕녀로(왕상16:31; 왕하9:7) 이스라엘 왕 아합의 왕비가 되어 바알신을 장려하며 우상숭배를 하게 한 대표적인 악녀이다.

이는 두아디라 교회의 세속에 대한 지나친 관대를 지적하신 것으로, 이세벨적 행위는 발람의 가르침인 니골라당과 유사하다(14, 15절). 당시 두아디라에는 공업이 발달하여 조합(組合)이 성행하였는데 구성원들이 우상의 제물을 먹고 성적 부도덕에 빠지는 일이 비일 비재했다.

그리고 “회개할 기회”란 이미 결정적인 경고가 주어졌음을 나타내며 그럼에도 회개하기를 원치 않았다. 그 결과 그를 침상 즉 질병으로 치실 것이고, 이세벨의 교훈을 따르는 자 역시 큰 환란으로 치실 것이다. 실제로 소아시아의 비문들은 음행의 결과로 질병에 걸려 죽은 사실들을 전하고 있다.

4. 두아디라 교회의 희망

"두아디라에 남아 있어 이 교훈을 받지 아니하고 소위 사탄의 깊은 것을 알지 못하는 너희에게 말하노니" 이들은 남은 자로 이세벨의 교훈을 배척하고 세속에 물들지 않은 자들이다. 사탄의 깊은 것이란 성도를 타락시키는 사탄의 술수 즉 이세벨적 교훈을 암시하며, 알지 못한다란 거기에 빠지지 않았음을 의미한다. “다만 너희에게 있는 것을 내가 올 때까지 굳게 잡으라” 세속의 유혹은 의인을 넘어뜨릴 만큼 강하다. 그러므로 근신하여 끝까지 굳게 잡아야 한다.

5. 이기는 자에게 주시는 약속

“만국을 다스리는 권세를 주리니” 메시야의 주권 사상을 노래한 시2:8,9을 반영하는 것으로 예수 안에서 그 권세에 참여함을 시사한다. 즉 세속의 유혹과 관련하여 나를 이기는 자는 세상과 마귀를 산산조각 낼 수 있는 영권을 얻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새벽별”은 예수님(계22:16)을 가리키지만, 여기서는 어둠이 물러가고 새 희망이 오게 될 것을 시사한다. 즉 세상의 악을 통치할 자는 세속을 이긴 영적으로 강한 자인 것이다.


[강해1] 이세벨을 용납하지 말라 (계 2:18-29)

두아디라 교회의 대표적인 죄는 이세벨적 교훈을 용납함입니다. 이세벨은 시돈왕 엣바알의 딸로 이스라엘 왕 아합에게 정략결혼으로 시집 와서 북이스라엘에 바알숭배를 만연시킨 악한 여자입니다. 엣바알이란 ‘바알과 함께’라는 뜻이니 얼마나 골수 바알숭배자였겠습니까?

사랑과 섬김 안에서 부흥하는 두아디라 교회의 최대의 실수는 이세벨적인 이단자를 용납한 것입니다. 바알은 육신이 잘되자는 주의입니다. 육신의 쾌락과 번영이 그 목적으로 한 마디로 세속주의라고 할 수 있습니다. 성도들의 육신적인 면에 치중하여 강조하지 않았나 생각합니다.

이 세대를 본받고 사랑함이 바로 음녀요 음행인데 이 세속주의가 우리의 신앙과 교회에 얼마나 깊이 파고드는지, 그런데 대부분은 모두가 그렇게 하니까 그것이 잘못된 것인지조차 알지 못하고 있습니다. 세속주의, 물량주의, 인본주의, 합리주의, 동성애 등 세상 따라가다는 성령으로 시작했다가 육신으로 마칠 수밖에 없고 버려짐을 당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이세벨의 세속주의는 언제 찾아올까요?

1. 신령한 면이 강조되지 않을 때 찾아옵니다.

18절 “하나님의 아들이 이르시되” 두아디라 교회에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란 언급을 구태여 하신 이유는 가짜 하나님의 아들이 많았기 때문이니다. 그들은 지방의 우상이면서 제우스의 아들로 여겼던 아폴로나 황제 등입니다. 그래서 그 우상에 대한 숭배가 성행했습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의 모습은 예수 말고 그들은 하나님의 아들이 아니다는 메시지입니다.

여기서 발견한 교훈은 예수를 강조하시기 바랍니다. 물질 건강 형통 평안도 하나님이 주신 복이지만 이런 것이 강조되어 하나님 아들이신 예수님 자리를 차지하면 안 됩니다. 기복적인 것을 강조하면 교인들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듯대로 살려는 것보다 소원성취를 위해 선을 넘는 그 무엇이든지 하려고 합니다. 세상을 위해 가장 값진 영원한 것을 저버립니다.

2. 세속주의는 성공했을 때 찾아옵니다.

두아디라 교회가 얼마나 성공적이었는지, 19절 “내가 네 사업과 사랑과 믿음과 섬김과 인내를 아노니 네 나중 행위가 처음 것보다 많도다” 하셨습니다. 두아디라 교회는 에베소 교회가 가진 모든 장점과 아울러 에베소 교회가 잃어버린 사랑까지도 겸비한 모범적인 교회였습니다. 그 뿐 아니라 꿈을 가지고 날로 발전해가는 승승장구한 모습을 보였습니다. 한 마디로 대단한 교회입니다.

그러나 두아디라 교회의 순탄과 거대한 성장의 틈바구니에서 기생할 수 있는 어두운 그림자가 있었습니다. 바로 이세벨을 용납함입니다. 두아디라에는 각종 사업조합이 있었고 각 길드마다 수호신이 있었습니다. 그 조직 속에서 우상의 제물과 음행이 저질러졌습니다. 성도들은 의식주를 위해 이 조직 속에서 이세벨의 길을 따라가는 자들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교회는 사람의 눈치를 의식한 체 제대로 된 메시지를 선포하지 못했습니다.

이처럼 교회 성장과 함께 찾아오는 것들이 세속주의입니다. 대형교회가 되다 보면 교인들의 눈치를 보다가 메시지의 선포가 퇴색되기 싶습니다. 이혼이나 동성애가 잘못이라고 말하지 못합니다. 누구에게도 부담 주지는 두루뭉실한 메시지만 전합니다.

그 뿐 아니라 규모가 갖추어지다 보니까 교계 안에 정치가 생기고 권력과 명예가 생깁니다. 높아지려는 사람도 생기고 지배하려는 사람도 생겨나면서 부정과 부패 암투의 세속적 권력으로 떨어집니다. 이웃사랑 봉사 전도 선교 이단문제 사회 국가 등 성도가 해야 할 책임이 산적해 있는데도 그리 생산적이지 못한 문제로 모이고 흩어지기를 반복하며 에너지를 투자합니다.

혹은 외형적인 성공지상주의가 생겨납니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모습보다는 외형적인 성장에만 치중합니다. 외형적으로 성공한 사람에게 받은 충격 때문입니다. 마치 곳간을 헐고 다시 짓자는 부자의 생각처럼 계속하여 빚을 얻어 외형적인 성장에만 치중합니다. 그러다 보니 본질적인 면을 위해서는 투자할 힘이 없습니다. 성공할수록 더욱 본질에 충실하시기 바랍니다.

3. 신학적으로 타락했을 때 찾아옵니다.

20절 “자칭 선지자라 하는 여자 이세벨을 네가 용납함이니 그가 내 종들을 가르쳐 꾀어 행음하게 하고 우상의 제물을 먹게 하는도다”북왕국의 아합왕 시절의 왕후 이세벨은 신령한 복을 강조하는 여호와 종교를 배척하고 육신이 잘되자는 바알신을 장려한 사람입니다. 그래서 여호와의 종들은 죽임을 당해 사라지고 바알의 제사장들은 날로 늘어만 갔습니다.

이처럼 신령한 일보다는 현세적인 일에 치중한다면 그것은 신학적 타락입니다. 이 땅에는 그런 세미나가 끊이지 않고 있고 하나님보다는 방법론을 찾아 헤매고 있습니다. 큰 교회도 작은 교회도 필요합니다. 보이지 않는 교회도 필요합니다. 하나님께서 은혜 주시는 대로 하면 됩니다. 그렇지만 모두가 다 맘모스 교회만 목표로 나간다면 하나님의 부르심이나 사역의 본질을 모르고 있는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요즘 같아서는 보이지 않는 교회가 더 필요합니다. 외부의 시기로 인한 박해가 얼마나 많습니까? 종교 간의 위화감 조성으로 손해 보는 것이 얼마나 많습니까? 지혜로워야 합니다. 우리 세계에서 덕이 된다고 모두에게 다 덕이 되는 건 아닙니다. 현대는 글로벌시대입니다. 한 사람의 부덕으로 전체 공동체가 위기를 맞기도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 신학이 바로 서야 합니다.

4. 진리를 분별치 못할 때 찾아옵니다.

24절 “사탄의 깊은 것”은 바로 이세벨의 사상을 말합니다. 사탄이 교회를 시험 들게 하려는 온갖 사악한 술수를 가리킵니다. 많은 사람들이 여기에 빠졌지만 빠지지 않은 소수가 있었습니다.

이처럼 주님께 칭찬을 받으려면 세속주의에 가담하지 않아야 합니다. 예를 들어 사람 본위 헌신이라면 그 헌신은 세속화된 것입니다. 명예와 권력을 위한 직분이라면 역시 세속화된 것입니다. 일하지 않으면서 직분은 왜들 탐합니까? 세상적인 욕심 때문입니다.

두아디라 교회의 상태는 28절에도 암시되어 있습니다. “내가 또 그에게 새벽 별을 주리라” 하셨습니다. 새벽별은 예수님인데 새벽별이라 한 것은 소망의 예수입니다. 이 말씀은 회개하지 않으면 희망이 없다는 말씀이기도합니다. 한국 교회가 성장했다 해도 세속주의를 떨어내버리지 못한다면 희망이 없습니다.


[강해2] 만국을 다스리는 권세 (계 2:18-29)

유교의 사서삼경 중 대학에 나오는 말 중에 여러분이 잘 아는 수신제가치국평천하(修身齊家治國平天下)라는 말이 있습니다. "자신의 몸과 마음을 바르게 한 사람만이 가정을 다스릴 수 있고, 가정을 다스릴 수 있는 자만이 나라를 다스릴 수 있으며, 나라를 다스릴 수 있는 자가 천하를 평화롭게 다스릴 수 있다."는 뜻입니다.

신앙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수신이 되지 않으면 모든 것은 가망이 없습니다. 6-7절을 보면 예수님께서 두아디라 교회에 만국을 다스리는 권세를 주시겠다고 하셨습니다. 이 권세가 얼마나 대단한 권세인지 “그가 철장을 가지고 그들을 다스려 질그릇 깨뜨리는 것과 같이 하리라.” 만국을 때려 부수게 해주시겠다는 것입니다.

여기 “만국”(萬國)은 문자적으로는 세계 모든 나라이지만 영적으로 보면 우리가 나라입니다. 그러므로 만국이란 사람들의 마음입니다. 그러므로 결국 세상이란 사람들의 마음입니다. 두아디라 교회로 본다면 이 만국은 당시 만연된 이세벨주의를 가리킵니다. 이세벨주의는 바알숭배가 그러하듯 세속주의를 가리킵니다.

이세벨의 문제는 악한데다가 권세까지 가졌습니다. 이 무적의 이세벨을 산산조각 낸 사람이 등장하지요. 먼저는 엘리야입니다. 엘리야가 갈멜산상에서 바알과 아세라 선지자들과 대결하여 영적인 대승을 거듭니다.

다음은 왕하 9장과 10장을 보면 님시의 손자요 군대장관이었던 예후입니다. 예후가 엘리사에게서 기름 부음을 받고 왕이 되어 곧바로 북이스라엘의 요람 왕과 남쪽 유다의 아하시야 왕을 죽이고, 아합의 왕비 이세벨과 아합의 아들들 70명과 그의 집안을 몰살시키고 아하시야의 형제들 42명도 죽였습니다. 남북 이스라엘의 악을 척결하였습니다.

또한 예후는 레갑의 아들 여호야다와 손을 잡고 계책을 써서 이스라엘의 모든 바알숭배자들을 모두 모아놓고 처형했습니다. 대혁명이었습니다.

이처럼 국을 다스리는 권세란 각인 혹은 모두의 마음을 다스리는 혁명을 말합니다. 예루살렘 교회 앞에 하루에도 수천 명씩 변화되고 마침내는 로마까지 복음화 되었듯 악한 마음을 깨뜨리는 철장권세를 받아 세상을 개혁하는 대 변혁이 일이 일어나야 합니다.

만국을 다스리는 권세를 받으려면

1. 시험을 이기시기 바랍니다.

26절 “이기는 자와 끝까지 내 일을 지키는 그에게 만국을 다스리는 권세를 주리니” 이세벨의 세속주의를 이겨야 합니다. 세상을 이길 자는 예수 그리스도 말고는 없습니다. 그리고 세상을 이기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은혜를 받은 자만이 이길 수 있습니다. 세속을 못 박으신 예수 공로 믿고 늘 하나님을 경외하시기 바랍니다. 그 때 성령이 임하시고 우리에게서 세상은 사라집니다.

21-22절에 “또 내가 그에게 회개할 기회를 주었으되 자기의 음행을 회개하고자 하지 아니하는도다 볼지어다 내가 그를 침상에 던질 터이요 또 그와 더불어 간음하는 자들도 만일 그의 행위를 회개하지 아니하면 큰 환난 가운데에 던지고 또 내가 사망으로 그의 자녀를 죽이리니” 했습니다. 세상을 이기지 못하면 내가 죽는다는 경각심을 가져야 합니다.

2. 뒤로 물러나지 않는 믿음을 가지십시오.

26절 “끝까지 내 일을 지키는 그에게 만국을 다스리는 권세를 주리니” 두아디라 교회에는 이세벨의 함정에 빠지지 않는 참 신앙인이 있었습니다. 아직 만국을 다스리는 권세를 받지 못한 것을 보면 세상을 변화시킬 만큼 더 연단이 더 필요한 자들입니다.

그러므로 여기 “끝까지”와 "지키라"는 말씀은 믿음의 강한 근성을 가리킵니다. 우리를 죽이려는 사람 없어도 결심하고 초대교회처럼 생명 걸고 신앙생활하시기 바랍니다. 담대하시기 바랍니다(히10:35-39).

이스라엘 백성들은 홍해를 건넜던 그 하루만 같으면 신자 중의 신자였을 것입니다. 모두 기뻐서 소고를 잡고 춤을 추며 찬양했습니다. 그러나 그 믿음은 불과 사흘밖에는 가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연단이 필요한 것입니다.

시험을 이기신 예수님 앞에서 세상 가지고 시험을 걸던 마귀는 떠나고 천사가 나타나 수종을 들었습니다. 그리고 성령의 능력과 권세가 강하게 나타났습니다(눅4:14-15). 이처럼 온전히 세상을 이기는 자가 악을 산산조각으로 부술 수 있는 사명자가 되는 것입니다.





※ 계시록에 나타난 그리스도의 교회

1. 일곱교회(1:4)
2. 나라와 제사장(1:6)
3. 하나님의 말씀과 그 증거로 죽임당한 영혼들(6:9)
4. 하나님의 종들(7:3)
5. 흰옷 입은 무리(7:9)
6. 큰 환난에서 나오는 자들(7:14)
7. 예수의 두 증인(11:3)
8. 주 앞에 섰는 두 감람나무와 두 촛대(11:4)
9. 두 선지자(11:10)
10. 종 선지자들(11:18)

11. 성도들(11:18)
12. 주의 이름을 경외하는 자들(11:18)
13. 해를 입은 한 여자(12:1)
14. 어린양의 피와 그 증거로 싸우는 자들(12:11)
15. 여자의 남은 자손(12:17)
16.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며 예수의 증거를 가진 자들(12:17)
18. 십사만사천(14:1)
19. 짐승과 그의 우상과 그의 이름의 수를 이기고 벗어난 자들(15:2)
20. 예수의 증인들(17:6)

21. 어린양과 함께 있는 자들(17:14)
22. 하나님 백성들(18:4)
23. 어린양의 아내(19:7)
24. 어린양의 혼인잔치에 청함 받은 자들(19:9)
25. 하늘에 있는 군대들(19:14)
26. 첫째 부활에 참예하는 자들(20:6)
27. 이기는 자(21:7)
28.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21:10)
29. 어린양의 생명책에 기록된 자들(21:27)
30. 그 두루마기를 빠는 자들(22:14)

31. 교회들(22:16)
32. 신부(22:17)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