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신학대학신학대학원 1 9 9 0 학 년 도 석 사 학 위 논 문
로마서를 중심으로한 율법 과 은혜 에 대한 연구 성서신학 전공 김 중 욱 목 차 I. 서 론 ............................................... 1 A. 논문의 목적 ........................................... 1 B. 연구방법 및 범위 ...................................... 2 II. 율법과 은혜에 대한 언어고찰 ............................ 4 A. 율 법 ............................................... 4 1. 구약에 나타난 율법에 대한 언어고찰 ................ 4 2. 신약에 나타난 율법에 대한 언어고찰 ................ 6 3. 바울의 s 사용 ................................. 8 B. 은 혜 ............................................... 10 1. 구약에 나타난 은혜에 대한 언어고찰 ................ 10 2. 신약에 나타난 은혜에 대한 언어고찰 ................ 11 3. 바울의 s 사용 ................................. 12 III. 바울의 사상적 배경 .................................... 14 A. 유대주의 사상 ......................................... 14 B. 헬라주의 사상 ......................................... 20 C. 다메섹 체험 ........................................... 29 IV. 로마서의 역사적 신학적 배경 ............................ 32 A. 역사적 배경 ........................................... 32 1. 로마교회 .......................................... 33 2. 저작연대 및 목적 .................................. 37 B. 신학적 배경 ........................................... 38 1. 로마서의 성격 ..................................... 39 2. 중심적 사상 ....................................... 45 V. 로마서에 나타난 바울의 율법과 은혜사상 .................. 51 A. 교리적 이해 ........................................... 51 1. 율법에 대한 교리적 이해 ........................... 51 2. 은혜에 대한 교리적 이해 ........................... 56 B. 실천적 이해 ........................................... 59 1. 율법에 대한 실천적 이해 ........................... 59 2. 은혜에 대한 실천적 이해 ........................... 63 VI. 결 론 .............................................. 68 * 참 고 문 헌 .............................................. 71 . 서 론 A. 본 논문의 목적 만일 우리가 사려깊은 그리스도인들 이라면 우리는 하나님의 율법이 오늘날 우리의 삶에서 어떠한 위치를 차지해야 하는가를 알 필요가 있다. 율법을 반대하는 자는 율법이 그리스도인의 삶에서 전적으로 폐기되었다는 것과 그리스도인은 율법과 아무런 관계가 없으며 율법 또한 그리스도인과 아무런 관계가 없다고 선언한다. 반면에 율법주의자들은 율법에 속박되어 있는 자들이다. 그들은 하나님과 자신들과의 관계가 율법에 대한 복종에 달려 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그들은 율법의 행위로 의롭다 하심을 얻으려고 하기 때문에 그들은 율법을 가혹하고 완고하며 엄한 선생이라고 생각한다. 요컨데 도덕률 폐기론자들은 율법을 거부하고, 율법주의자들은 율법을 두려워 할 뿐아니라 그것에 속박되어 있다. 그러나 율법을 준수하는 신자들은 율법을 사랑하고 그에 순종한다. 그렇지만 '율법아래' 있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은혜아래' 있다고 해야 할 것이다. 이런 율법과 은혜의 관계에 대한 분명한 지식과 확신이 없는 신자가 많다. 그리하여 율법 주의적 신앙생활을 하는 안타까운 모습을 보게된다. 그것은 율법을 구속받은 하나님의 자녀로서 지켜야 할 신앙과 생활의 규범으로 받아들이지 못하는데 기인하는 것이다. 현대교회의 많은 그리스도인은 '율법준수'를 구원에 적용시키고 있다. 결과적으로 그리스도 안에서 참된 자유와 기쁨이 없다. 신앙생활을 하면서 혼란은 더해간다. 본 논문은 로마서에 나타난 바울의 율법과 은혜에 대한 연구로 의롭게 되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믿음을 통하여 되어진다 (롬 1:16-17, 3:21-24, 5:1, 8:30-34)는 바울신학의 핵심을 근거로 하여 진정한 율법관과 은혜관을 점검해 보려고 시도하였다.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믿음으로 구원을 받고 (엡 2:8) 의롭게 된다 (롬 1:16-17)는 것과 은헤로 구원을 이루어 나가고 성화 된다는 것은 바울 신학의 핵이고, 기독교 진리의 핵이다. 이러한 이유로 필자는 율법과 은혜에 대한 바른 이해를 정립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율법과 은혜의 관계를 성경적으로 잘 이해하며 분명한 지혜를 얻음으로 하나님의 교회를 더 잘 섬기고 세우며, 그리스도인으로서 이 땅에서 복음에 합당한 삶을 살아갈 수 있을 것이다. B. 연구방법 및 범위 본 논문은 다음과 같이 전개 될 것이다. 본 논문의 연구방법은 로마서를 중심으로 하며 그러나 바울의 권면에 대한 상호 보충적 확실한 규명을 위해 필요에 따라 성경의 다른 여러 본문들도 자유롭게 사용하고자 한다. 그 전개 방법은 문헌연구와 주석적 방법에 입각하여 다루어 나갈 것이다. 서론에 이어 II 장에서는 율법과 은혜에 대한 어원적 고찰과 바울이 전반적으로 사용한 율법과 은혜에 대한 용어의 개념을 살펴 보았다. III 장에서는 바울이 율법과 은혜의 정확한 이해에 도달하게 된 방법 및 과정을 살펴보기 위해 그의 사상적 배경을 고찰해 보았다. IV 장에서는 로마서의 역사적, 신학적 배경을 검토 하였고, V 장에서는 율법과 은혜에 대한 바울이 이해한 내용을 중심으로 교리적 이해와 더 나아가 율법과 은혜에 대한 실천적인 이해를 찾아내어 어떻게 실제적으로 신자의 삶속에 적용할 수 있는가를 살펴 보았다. 그리고 VI 장에서는 결론으로서 본 논문의 내용을 요약하고 정리 하였다. I. 율법과 은혜에 대한 언어고찰 A. 율 법 1. 구약에 나타난 율법에 대한 언어고찰 구약에서 율법은 일반적으로 '토라' ( torah)로 불려졌는데 이 용어는 '야라'(yara)의 히필형 (Hiphil)으로 '호라' (hora)에서 유래된 단어이다. 어근의 의미는 '던지다'이다. 따라서 히필형 (Hiphil)은 '가리키다' (손을 던져 가르치는 것) 즉, '지시하다' 혹은 질서 혹은 줄 (Row)이라는 의미로 사용되었고 70인역 (Septuagint : LXX)에서는 ' s'로 번역 되었다. 본래 이 말은 제사장이나 예언자가 주는 개개의 지시나 가르침을 의미했다. 그러나 후에는 어떤 규정, 법, 법령집을 가르키게 되고 모세오경 전체를 가르키게 되었다. 또한 그후에는 구약전체를 의미하거나 때로는 종교적 가르침 전반까지도 의미하게 되었고 구약에서는 주로 하나님의 법을 의미한다. '토라'는 단수로서 하나의 '법'을 의미하나 복수로서도 동일한 의미로 사용된다. 그러나 단수 토라가 하나님이 주신 법 전체의 의미로 사용될 때가 더 많다. 율법의 목적은 하나님을 아는 지식과 인간과 하나님의 관계에 대한 지식을 교훈해 주며 자기를 계시해 주신 바대로 하나님의 자녀들로서 살도록 지도하는데 있다. 시편 19편과 119편이 이런문제를 잘 다루고 있다. 완성된 구약성경에서 토라는 전문적으로 오경을 가르킨다. 즉 그것은 율법 본문을 포함하고 위대한 입법자 모세가 죽기까지의 그 역사를 포함하는 구약의 앞부분을 가르킨다. 토라의 동의어로서 이스라엘의 율법을 의미하는 일반적인 단어들로서는 다음과 같다. ① 미츠바 ( , 명령 혹은 명령들) 이 술어는 율법이 하나님의 의지의 표현으로서 인간에게 부여된 것이므로 반드시 지켜야 한다는 의미에서 적용되었다. ② 다바르 ( , 말씀. 출 34:28) ③ 에다 ( , 증거 혹은 증언)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취급하시는 기본 원리들을 증거해 주는 하나님의 율법에 관한 술어이다 (출 25:22). ④ 미슈파팀 ( ) 하나님께서 승인 하셨다는 면에서 토라에 속하면서도 재판관들이 재판 사건을 처리하고 결정한 법들을 가르킨다. ⑤ 피쿠 딤 ( , 교훈들) 이것은 시편에서만 발견되는 술어이며, 인간이 처한 여러가지 상황에 맞게 제공된 규칙들이나 조언들을 의미하는 것이다. ⑥ 후킴 ( , 법령들) 문자 그대로는 새겨진 법들로 이것은 입법자에 의하여 직접 법령화된 법들을 가리키며 (레 18:4 ; 신 4:1,8), 여기서 구전율법과 성문율법이 구분된다. 2. 신약에 나타난 율법에 대한 언어고찰 헬라어 s (율법)은 어원적으로 (분배하다)에 속하며 그러므로 '적당한 것', '어떤 사람에게 할당된 것' 이란 의미를 가진다. 그리이스에서 고대에 그것은 존재하거나 용인되는 규준, 규칙, 관습, 사용 또는 전승의 종류를 포함하는 포괄적인 범위의 의미를 갖는다. 그 개념은 기원적으로 종교적이며 제의에서 주요 역할을 한다. 초기에 s는 제우스 (Zeus) 왕국의 한 창조물이요 계시였다. 즉 그것은 참된 신적인 존재였다. 그러나 그리이스에서 정치적 규칙이 발달하자 이 단어는 사법계에서 전문적으로 사용하게 되었다. 법적인 규준이나 사용이 의식적으로 고정적이며 구속적인 s, 즉 법이 되었다. 여기에서 정치적인 법과 절대적인 법사이에 구분이 없어졌다. 세월이 흐르면서 s는 자연의 법, 도덕율, 위반시에 처벌규정을 가진 강제적 명령 또는 국가의 규칙들을 의미하게 되었고 s가 근본적으로 인간의 법규로 이해되었고 5세기말 궤변학자들 간에 s는 그것의 원래 의미와 아무상관도 없는 변질된 의미인 '계약' 또는 '협정'으로도 될 수 있었다. 히브리의 율법 개념이 헬라어 번역인 70인역에서 s로 표현된 히브리어가 여럿이 있다. s로 가장 많이 번역된 히브리어는 '토라' 인데 따라서 '토라'는 신약의 법개념에 절대적인 영향을 끼쳤다. 70인역에서 '토라'는 대다수의 경우에 s로 번역되었다. 그러나 s는 '토라' 보다도 더욱 일반적이다. '토라'라는 용어 이외에 s로 폭넓게 번역된 히브리 단어는 없다. 그러나 '토라' 만큼 폭넓게 s로 번역 되지는 않았을 지라도 s로 번역되어 신약의 율법개념에 영향을 끼친 단어들이 있다. '미쉬파뜨' (mishpat, 복수는 mishpatim)는 우리말 성경에서 '율례', '법도', 규례'로 번역되었으며 영어 성경에는 'judgement'(KJV) 또는 'ordinance' (RSV)로 되어 있다. 이것을 범하면 재판관에게 재판을 받게 되고, 재판관은 이것을 지침으로 하여 재판을 실시한다. 이는 영원한 원칙인 십계명의 일시적인 적용으로서 그 십계명의 울타리 역할을 하기 위하여 즉 십계명을 범하지 않도록 보호하기 위해 주어졌다. '호끄' (hoq 복수는 huqqim)는 우리말 성경에서 '규례', '법도', '율례'로 번역 되었으며 영어 성경에서는 주로 'statute'로 되어 있는데 원어는 '제한', '의무', '규칙'의 의미가 있다. 제사에 관한 모든 율법들과 우리가 흔히 예식법이라고 부르는 모든 것들이 '후낌'이라고 일컬어졌는데 이를 범하면 양심과 하나님의 판단을 받게 된다. '미쯔와' (mitswah, 복수는 mitswoth)는 '짜와' (tsawah, 명령하다)에서 파생된 명사인데 '명령'으로 더러는 '계명'으로 번역되었으며 영어 성경에서는 대부분 'commandment'로 되어 있다. 이것은 매우 다양하게 사용되었으나, 그 대부분이 하나님께서 모세를 통하여 이스라엘 백성에게 '명하신' 것들을 나타낼 때 사용되었다. 이와같이 헬라어 s는 70인역을 통해 각기 다른 히브리적 율법개념을 나타내는 일반적인 용어로 발전하였다. 모세를 통한 율법의 반포이래 율법은 이스라엘 백성의 생활 전반에 걸쳐 지침이 되었으며 악으로 부터 보호하는 방벽의 구실을 하였고 더 나아가서 영혼을 소성케 하는 (시편 19:7) 기능이 있는데 이는 언약의 기초위에 세워진 것 이었다. 그러나 신구약 중간시대에서는 율법의 역할이 근본적 변화가 일어났다. 즉 율법의 중요성은 언약의 개념을 흐리게하며 하나님의 백성으로서의 자격을 소유하는 조건이 되었다. 이와같이 구약시대에서 유대교를 거쳐 신약시대로 넘어오면서 율법의 개념은 부정적인 측면으로 변질 되었다. 3. 바울의 s 사용 율법에 대한 바울의 사상은 그가 모순된 진술을 상당히 많이하고 있는 것처럼 나타나고 있기 때문에 이해하기가 퍽 어렵다. 그런데 이를 더욱 혼란시키는 것은 바울의 서신에서 s 라는 용어가 특정한 것만을 나타내는 것이 아닌 점이다. 바울에 있어 s의 사용은 완전히 일정하지 않는데 왜냐하면 그가 구약의 율법을 지칭하지 않았을 때도 때때로 이 용어 s를 사용했기 때문이다. 구약서 전체를 지칭하는 경우 (롬 3:19), 비유적 사용 (롬 6:2, 8:2 ; 갈 6:2)의 경우등이 그것이다. 또 율법을 하나님의 특정한 명령에 대한 강조로서가 아니라 다만 '성서'를 의미하는 것으로 가끔 사용하였다 (고전 14:9,21,34 ; 갈 4:21). 때때로 s는 롬 7:21의 "내가 한 법 (principle)을 깨달았노니" 라고 한것과 같이 법이나 규범을 의미하기도 한다. 이같은 의미는 로마서 7:23, 8:2에서도 나온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s의 용법은 하나님의 최고의 자기 계시로서의 토라에 적용된 경우이다. 바울에 있어 s는 어떤 행동을 요구하는 것으로 특별한 뜻으로 이해되었다. 그는 율법이 하나님의 뜻의 표현이었고 거룩하고 의롭고 선하며 영적인 것으로 이해하였다. 바울 서신중 s는 전부 110회 나타나는데 그중에서 로마서에 67회, 갈라디아서에 29회가 나온다. 그러므로 바울의 율법개념이 이 두 서신에 집중되어 있음을 보는데 갈라디아서는 유대주의자들과 율법문제로 충돌하는 교회에 즉석으로 써보낸 서신이다. 이에 비하여 로마서는 현실적인 어려움의 상황이 없는 가운데 바울이 심사숙고하여 저술한 서신임으로 그의 율법개념이 더욱 잘 나타나 있다. 회심이전에 열렬한 바리새인 이었던 그는 율법에 대해 대단히 열심이었으며 (갈 3:13-14 ; 빌 3:5-6), 이것으로 인해 교회를 핍박하게 된 것이다. 그러나 바울의 회심은 그로 하여금 율법에 대한 재평가를 하도록 만들었고 회심 후에 그는 율법을 그리스도를 감추는 베일 (고후 3:14-15)로 그리스도께로 인도하는 몽학선생 (갈 3:24)으로 깨달았던 것이다. 바울은 은혜 안에서의 그의 삶의 차이를 발견함으로서 율법의 불완전성을 더욱 확신하게 되었다 (롬 6:14, 7,8장). B. 은 혜 1. 구약에 나타난 은혜에 대한 언어고찰 은혜란 말의 히브리어는 '하눈' ( hann)이라는 말로서 셈어의 '호의를 보여주다' 라는 원래의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이 단어에 어원을 두고있는 히브리어 명사형 '헨' ( hen)은 70인역에서 거의 대부분 s로 번역되어 있는데 '권세를 가진자가 호의를 베풀다', 매력 (charm), 미 (beauty) 라는 의미로 쓰여졌다. 동의어로 '헤세드' ( hesed)가 있는데 이는 하나님은 사랑이심을 강조하는 말이다 (렘 9:24 ; 시편 112:4). 구약에서는 은혜를 크게 둘로 나누는데 하나님이 모든 피조물에게 나타내시는 일반적인 선의로서 하나님 자신의 성품에 가까운 것이다. 또 하나는 특별히 이스라엘에 대한 하나님의 태도로서 인자라고 할 수 있다. 그 어느 경우나 은혜는 그 대상의 가치나 공적에 관계없이 주시는 하나님의 사랑이다.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택한 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주권에 의한 것이지 이스라엘의 가치에 의한 것이 아니다 (창 12:2 ; 출 33:19 ; 신 7:7). 2. 신약에 나타난 은혜에 대한 언어고찰 헬라어에서 s는 일반적으로 쾌활함, 친절, 혹은 매력을 의미한다. 단어는 친절한 태도 및 탄성 혹은 호의를 의미하기도 한다 (눅 1:30, 2:52 ; 행 2:47). 또한 고마움, 감사의 의미로도 사용되었다. 70인역에서 s는 히브리어 ( hen)의 번역으로서 자기보다 높은 지위에 있는 자가 그가 양해를 받아야 할 자로 부터 호의를 얻게 된다는 뜻이다. 이것이 그리스도교에서 은혜라는 용어로 사용될 때는 허물된 자를 용서하고 축복하는 무상적인 하나님의 사랑 특히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나타난 구속적인 사랑을 말한다. 은혜 s는 라틴어 gratia에 해당하며 성서에서는 하나님의 총애 또는 호의로 표시한다. 특히 바울 서신에 있어 이는 기본어의 하나가 되어 ' , 빛' 또는 ' ', 일 또는 공덕에 대하는 '값없이 받는 총애'를 뜻한다. 이와같이 은혜는 그 경로도 값없이 주시는 것이고 그 상태로는 원칙적으로 기쁜( ) 것이다. Aristotle는 이 단어를 '필요한 자에게 보상을 바라지 않고 충분한 도움을 주는 것' 이라고 정의했다. 3. 바울의 s 사용 바울에게 있어 s는 구원의 사건을 이해하는데 있어 가장 선명하게 설명할 수 있는 중심 개념이다. 그에게 s는 일반적으로 그리스도 안에서 공로없는 인간에게 주는 하나님의 값없이 주는 선물을 뜻한다. 바울 서신이외에 신약성서에서 s란 말이 51회 나와있으며 그 중 27회가 사도행전과 베드로 전서에서 나오고 있다. 그 까닭은 이들 문서가 바울과 밀접한 관계가 있기 때문으로 보여진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바울서신 전체를 통하여 s란 말이 101회나 나온다. 이런 숫자를 통한 중요성을 제외하고도 s란 말은 바울에게 독특한 의미를 지닌다. 바울의 복음을 이해하고 선포하는데 있어 핵심적인 의미를 담고 있는 용어 이다. Moffatt이 지적한 것 처럼 바울은 다메섹에서 그리스도를 만난 이후 복음을 전하며 일생을 주님을 위해 살아가면서 모든 멧세지에서 "All is of Grace, and grace is for all"의 사상을 담아서 선포 하였다. II. 바울의 사상적 배경 A. 유대주의 사상 메첸은 바울이 그리스도론을 무엇인가 새것으로는 생각하지 않고 있다고 한다. 그리스도에 관한 그의 교의는 마치 견고하게 확립되어 있어 아무 변호도 필요하지 않는것 같이 취급하고 있다고 한다. 그렇다면 그토록 확신있는 바울의 태도를 우리는 어떻게 설명해야 할 것인가 ? 메첸은 브레데 (Wrede)가 바울 동시대의 유대교의 신학에서 바울의 태도가 설명되어 질 것 이라고 말하였다고 하였다. 브레데의 말이 사실로서 받아들여 질려고 하면 우리는 이 가설을 검토하기 위해 유대교적 환경을 연구해야 한다. 첫째로 메첸은 유대인의 분파를 팔레스틴 지역내의 유대인과 이방지역에 거주하는 디아스포라 (diaspora)로 나눈다. 디아스포라에 대한 일반적인 자유주의적인 의식은 사도행전의 선명한 묘사에 중대한 오진을 범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고 그는 말한다. 그는 몬테피오레 (Montefiore)가 믿는 바에 의하면 이산된 지역의 유대교는 팔레스틴 지역의 유대교 보다는 오히려 비자유주의적이기 조차 하였다고 하였다. 설령, 그렇지 않은 유대교가 존재했다 하더라도 바울은 엄격한 바리새적 교육을 받았으며 다소에서 태어나 예루살렘에서 자랐음을 사도행전은 보여준다 (행 12:3). 바울은 그가 말하는대로 아랍어를 말하는 부모 밑에서 태어나 아랍어를 말하는 유대인으로 그들의 기쁨은 율법에 나타난 의를 추구하는 것이었다. 그의 특출한 자질은 열심이었다. 최근의 저술자 가운데서 그란트 (F. C. Grant)는 바울의 배경이 근본적으로 유대적이라고 말한다. 그는 바울의 유대주의가 서방 디아스포라의 것이라고 믿고 있다. 뿐만 아니라 바울 생애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친 것은 다소 보다는 예루살렘 이었다고 유닉 (Van Unnik)은 말하고 있다. 또한 메첸은 몬테피오레 (Montefiore)가 말하는 바울의 율법관을 긍정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몬테피오레는 바울의 복음이 온화한 율법관이 아니라 준엄한 율법관 이었다는 것이다. 그것은 하나님의 자기 만족신앙이 아니라 하나님의 정의 만족으로서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대한 신앙 이었다. 회심 후에도 회심 전에도 바울은 자유주의자는 아니었다. 또한 유대교의 지역적 구분외에 유대교의 문화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그것은 바리새파, 사두개파, 엣세네파이다. 이중의 두파는 성경에도 나타나며 엣세네파는 어느 종류의 금욕적 관습과 동물제물의 거부를 하는 아마 외래의 영향에 기초를 두는 것 이라고 여겨지는 종교적 실천에 의해 유대민족의 일반적인 생활로 부터 분리되고 있었으며 당시의 초대교회와 아무런 긴밀한 접촉을 갖지 않았음이 분명하며 바울 역시 그 근원에서 영향을 받았다고 생각할 만한 근거는 전혀없다. 메첸은 사두개파가 수입이 많은 사제권을 갖고 또 로마의 지배에 동조하는 세속적인 귀족이었다고 한다. 사두개파는 천사와 악마에 대한 신앙을 거절하였다. 바리새파의 예정론에 반대하여 그들은 만사를 임의로 결정할 수 있는 사람의 선택된 자유를 주장하였다 (막 12:18 ; 행 23:8). 그들이 청년 바울에게 영향을 주었다고 생각하기에는 너무나 거리가 멀다. 메첸은 바리새파가 율법에 대한 열심을 갖고 있었으며 정통 유대교를 대표하고 있었다고 한다. 유대의 성전이 파괴되었을 때 유대민족에게 남은 것은 율법 뿐이었으며 바리새파는 율법을 해석하는 과정에서 율법을 전통적으로 해석하고 적용하는 하나의 체계를 세웠다. 바울에게 충성을 요구한 것은 이 당파였다. 바울은 자유주의적 유대인이 아니라 철저한 바리새인 이었다 (빌 3:5). 그는 충실한 유대인 이었을뿐 아니라 그 이상이었다 (갈 1:14). 그는 선별된 사람들 중의 한 사람이었다. 율법을 준수하기 위해 보통의 생활은 모두 버릴 맹세를 세운 사람이었다. 그리고 율법을 준수함에 있어서 조금도 흠잡힐 점이 없도록 세심하게 조심을 기울인 사람이었다 (빌 3:6). 바리새인들은 356개의 해서는 안될 율법과 248개의 해야할 율법등 도합 613개의 율법을 만들어 사람들을 괴롭혔다. 후에 바울은 이때의 일을 회상하면서 "전에 법을 깨닫지 못할 때에는 내가 살았더니 계명이 이르매 죄가 살아나고 나는 죽었도다"고 말하였다 (롬 7:9). 바리새인으로서의 바울에게 있어서는 율법은 모든 것을 지배하는 표준이었다 (행 22:3). 그래서 박해자로서의 바울에게 박해를 강요하는 표준은 열심이었으며 그 열심이라는 단어는 폭력적인 의미까지도 내포하고 있다 (행 22:4,5). 바리새인으로서의 바울에 대한 연구는 두번째 관점인 율법의 언급을 필연으로 삼아야 한다. 그것은 그가 그토록 율법 준수에 열심을 기울인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율법은 구전이든지 기록된 것이든지 그들의 매일의 삶의 표현방식 이었으며 특히 왕에 의하여 혹은 왕을 위하여 드려지는 제사와 예루살렘의 성전이 제사를 주관하는 인간과 장소와 한가지로 그들의 하나님 의식을 살아있게 하는 수단이었다. 율법의 중요성은 언약의 개념을 무색하게 만들고 하나님의 백성이 되는 조건이 되었다. 더욱 중요한 것은 율법을 지키는 것이 하나님께서 개인을 심판하시는 기초가 되었다는 것이다. 시리아의 바룩의 묵시서 51:7에서 "자신의 행위로서 구원받은 자들, 그리고 율법이 그들에게 희망이 되었던 자들" 이라고 한 것에서 행위에 대한 보상을 약속하고 행위로 말미암은 구원의 교리를 유대주의에서 찾아볼 수 있다. 율법은 구약성경 특히 모세오경에 발견 된다. 그러나 성문율법의 주변에는 대량의 구전해석들이 생겨나서 장로들의 구전에 의해서 경건한 유대인의 생활은 지극히 세밀한 것에 까지도 얽매었으므로 예수께서 율법사들의 형식주의와 위선을 배척하실 때에 사람들은 언제나 감동을 받지 않을 수 없었다. 바울의 바리새파는 은혜의 종교와 달라서 공적 종교의 모든 잘못을 가지고 있었다. 바울 그 자신이 나중에 율법을 그리스도로 인도하는 몽학선생에 비유하였다 (갈 3:23-24). 만일 바리새인이 율법을 외면적 규칙일 뿐 아니라 제 1의 목적으로는 하나님과 인간에 대한 자비와 공의와 사랑을 요구하는 것이라는 점을 이해하기만 하면 그들은 자기복종의 정도로 그렇게 간단하게 만족하지 않았을 것이고 또 율법을 사람들을 그리스도로 이끄는 양육자로서의 위대한 기능으로 이해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런고로 전체적으로 보아 당시 바리새인의 율법관에 미루어 생각할 때 바리새인 사울 (Saul)이 영적 율법관을 갖고 있었다고는 생각할 수 없다. 바울은 다메섹 도상에서 "나는 네가 핍박하는 예수라"하는 예수의 음성을 대했을때 자신의 죄를 발견한 것이다. 메첸은 발덴스페거 (Baldenspeger)의 말을 빌려 기독교 이전의 유대교가 그 주변을 회전하고 있던 또 하나의 촛점이 메시아 대망이라고 하였다. 1세기의 유대교는 하나님의 백성을 그 적의 압제에서 구출하는 왕에 대한 대망 외에는 아무것도 열심을 갖지 않았다는 인상이 일반적이다. 이러한 인상은 신약성경에서 주어지며 (눅 19:11), 외전을 통해서 볼때는 메시야 대망에 대해서 거의 아무것도 언급되어 있지 않아 약간 다른 인상을 준다. 또 미래기 사상 가운데는 하나님의 그릇으로서의 메시야가 아니라 하나님 자신이 이스라엘에게 축복을 주는 새시대를 도래하시게 하는 분으로서 표현되는 일도 흔히 있다. 예수님은 자신이 확실히 메시야라는 사실을 주장한다 (요 4:25-26). 또 예수님을 죽인것은 예수님을 통한 메시야 대망의 기대가 허물어진 유대인이 그를 거짓을 주장하는 자라고 인정 했기 때문이므로 그의 반대자들도 예수의 제자들 못지않게 유대인의 왕을 대망하고 있었던 것이 사실이다. 성경의 내적 외적 증거를 전체적으로 보면 기원 1세기에는 메시야의 대망이 유대인 사이에 견고하게 확립이 되었다는 사실은 확실하다. 신약성경은 제 1세기의 일종의 메시야 대망이 널리 퍼져 있었다는 사실을 충분히 입증한다. 메시야는 그들을 로마의 지배하에서 해방하는 다윗계의 지상적 왕임을 보여준다. 율법에 대한 랍비적 관심이 메시야에 대한 관심을 약화시키는 경향이 있었다고 말하는 것이 옳은 것 이라면 바울의 기독교 이전 생활을 지배한 것은 메시야 대망이 아니었던 것 같다고 발덴스페거(Baldenspeger)는 주장한다. 물론 바울자신이 기독교 이전의 생활에 대해서 말할 때 자기를 한사람의 메시야주의자로 나타내었던 일은 성경에 없다. 그는 오히려 자기를 율법에 열심이 있는 사람들안에 넣고 있다 (행 22:3). 그러나 그 중요성을 과장해서는 안된다. 신약성경 전체를 살펴보면 메시야 교리가 바울시대에 이미 공고하게 수립되어 있었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된다고 메첸은 말하고 바리새인 바울이 이러한 정통신앙에 이견을 가졌다는 것은 있을 법도 하지 않는 일이라고 하였다. 그래서 바울은 어떤 메시야 교리를 회심 이전부터 믿고 있었음을 알 수 있는 것이다. 지금까지 필자는 유대인의 분류, 율법, 메시야관 같은 몇가지 관점에서 바울과의 관계를 추적해 보았다. 종합해 보면 바울은 아랍어를 쓰는 팔레스틴 (Pale Stin) 유대교의 엄격한 바리새인 으로서 구약의 율법과 전통을 준수하기 위해 열심있는 청년이었다. 하지만 그가 간직하고 있는 모든 종교적 유산과 자질은 부활하신 예수님과의 만남이전에는 그에게 육체의 예법만 되어 있었을 뿐 이었다 (히 9:10). 그리스도를 인격적으로 만난 바울은 과거의 모든 자랑할 만한 육 (flesh)의 조건들을 오히려 해로 여기며 배설물로 여기노라고 확신있게 고백하고 있다 (빌 3:9) B. 헬라주의 사상 헬라주의적 바울 연구는 종교사학파의 산물이다. 이 경향의 사람들은 바울이 특히 예루살렘에서의 몇해 밖에는 대부분 이방 헬라적 환경에서 산 사람이란 것을 강조하고 그 영향을 찾으려고 하였다. 이들의 주장을 논하기 전에 먼저 헬레니즘 문화의 일반적 특성을 살펴보는 것이 좋을 것이다. 디벨리우스의 말을 빌리면 헬레니즘 문화는 세계주의 혼합주의로 말미암아 외래적인 것 특히 동방적인 문화의 통일과 결합을 지향하는 경향으로 흘렀다. 당시의 언어는 '코이네'로 통일되었고 지중해 세계의 통일은 편리한 교통의 조직에서 이루어졌고, 권력의 통일과 한 민족의 법을 초월하는 법의 통일을 첨부해 주었다. 군대의 이동과 관직의 전근이 자주 있음으로써 늘 새로 확장되는 제국의 국경안에서 교류가 성행함으로 통화 도량형의 통일이 이루어졌다. 이 모든 것이 기독교의 전파에 유리하였던 조건이 되었다. 이러한 헬레니즘의 문화의 요소들이 바울에게 어느정도 영향을 끼쳤는지를 살펴보려고 한다. 라이젠스타인은 바울이 헬라적 신비종교 관념을 유대교적 사상과 혼합하였다는 것을 계통적으로 증명하였다. 헬라의 신비종교의 신앙과 이스라엘의 예언자 정신이 바울에 의하여 잘 혼합되어 새것으로 형성되었다는 것이다. 라이첸스타인은 이것을 증명하는 것으로서 바울이 사용한 비유대적인 서로 대립되는 개념들을 들었다. 곧 영과 혼, 영과 육, 신앙과 공로 같은 개념들이다. 이러한 사용법은 영지주의에서 영향을 받은 것이라고 보았다. 또 바울이 구속을 풀이할 때 헬라 신비종교의 인간화나 새로난다는 이론을 채택하였다고 보았다. 바울의 구속론이 헬라적 신비종교의 인간신화나 새로난다는 이론을 취했다는 주장은 잘못된 것이다. 바울의 그리스도안에 있는 존재란 인간의 신화가 아니라 신과 구별되는 구속받은 인간이다. 다이스만(G. A. Deissmann)은 바울의 그리스도안에 있는존재의 개념을 그리스도 신비주의라고 하면서 헬라적 신비종교와의 차이를 잘 말해준다. "결정적인 문제는 주도권이다" 행위하는 신비주의와 반응하는 신비주의가 있다. 인간이 하나님께 접근해 가거나 혹은 하나님이 인간에게 접근해 간다. 수행의 신비주의적인가 ? 혹은 은혜의 신비주의인가 ? 노력하는 신비주의인가 ? 신의 선물의 신비주의인가 ? 두번째로 신비주의의 목적이 일치하거나 혹은 교제이다. 즉 하나님과 하나됨이거나 혹은 하나님과의 교제이다. 전자는 하나님 안에서의 인간의 인격성의 상실이고 후자는 하나님의 임재를 통한 인격성의 성화이다. 슈바이쳐 역시 다음과 같은 점들을 들어 라이첸스타인을 비판하고 있다. 라이첸스타인은 바울의 새로 난다는 개념을 많이 언급하지 않는다. 그는 바울의 신비주의가 많은 다른면에서 종말론과 밀접하게 묶여진다는 사실을 언급하지 않으며 또한 헬레니즘으로 부터는 바울의 그리스도안에와 그리스도의 신비적용을 설명할 수 없다는 것을 언급하지 않고 있다. 바울이 통속적인 스토이시즘으로 부터 용어와 사상등의 다양성을 인정했다는 것은 논의의 여지가 없다. 이와같은 것으로 양심, 본성, 부적당, 비밀, 온전한 자, 영적인 자와 인격적인 자의 대조, 지식과 무지, 형상과 영광, 빛의 사람 등이다. 케네디는 이런 어휘들이 구약적 용법이나 보통 술어에서 영향을 받았을 수 있으리라고 한다. 바울은 이런 용어에 익숙하여서 그의 복음을 헬라세계에 전하는데 큰 힘이 되었다. 바울은 길리기아 다소에서 났고 (행 9:11, 21:39), 로마시민권을 가졌다. 바울이 다소에서 출생하여 성장한 것과 로마 시민이라는 사실은 후에 기독교가 세계적으로 선교되는데 커다란 의미를 갖는다. 다소는 국제적인 도시로서 학문과 무역의 중심지 였으며 (행 16:37, 22:28), 또한 종교가 성행하였다. 다소에는 농사의 신 산단 (Sandan)이 예배되었고 신비종교 의식과 비슷한 모양으로 제사를 지냈다. 디온 크리소스톰에 의하면 이 신은 헤라클레스란 그리스 이름으로 예배를 받았다고 한다. 이 산단 헤라클레스 신은 다소에서 매년 장작더미를 태우는 축제로서 예배드려지며 그 절정은 신상이 불태워지는 것이었다. 이것은 타는듯한 여름 햇볕에 자연이 말라죽으며 그러한 가운데에 새 생명이 움트는 신비를 상징하는 것이다. 앗시리아의 아도니스, 푸르기와와 아티스, 애굽의 오시리니, 바벨론의 탈무츠의 의식들은 다 그와 유사한 것들이다. 이 모든 신들은 죽고 다시사는 신비스런 농사신을 대표하였다. 다소에 관한 논문을 쓴 빌리에 의하면 다소에는 많은 신적 구세주란 비명이 발견되었는데 이 산단의 구속론적 의미를 표시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이러한 예배의식이 바울의 그리스도 중심적인 구속론의 발달에 영향을 끼치지나 않았나 하는 것이 이 방면의 연구가들의 관심이었다. 바울이 이런 종교의식을 본적이 있었겠지만 그렇다고 그의 구속론 형성에 어떤 영향을 끼친것으로 볼 수는 없다. 그 이유로서 바울의 구속론과 신비종교사이의 명백한 차이를 들 수 있다. "신비종교의 신들과 산단신이 비 인격적인 신인 반면에 바울의 구속론에 있어서 죽었다가 다시사신 주는 역사적인 십자가에 죽으신 역사적 존재다." 신비의식에 있어서 구원이란 무지와 운명으로부터 구속이며 그 방법은 순전히 의식이요 비 윤리적인 반면에 바울은 구원에 관해 말할 때, 그리스도께서 주신 새로운 힘, 도덕적 원동력을 특징지우고 있다. 또한 메첸에 의하면, 아티스, 오시리스, 아도니스는 다 죽었다가 다시 사는 구속신 이라고 알려졌지만, 이 신들의 부활과 기독교 신앙에 있어서의 부활이 의미하는 것 사이에는 명백한 차이가 있다. 아티스, 오시리스, 아도니스는 식물신으로서 그들의 죽음과 부활은 해마다 식물이 말라 죽었다가 소생하는 것을 재연한다. 다소에는 또한 당시에 널리 퍼져있던 고대 황제예배가 있었지만 요세푸스에 의하면 유대인은 이 예배에 참여할 의무를 공적으로 면제 받았다고 한다. 이 의식은 일반적인 기독교 사상 특히 바울 신앙의 형성에 영향을 끼치지는 못하였다. 부셋트 (Wilhelm Borsset)는 한걸음 더 나아가 그의 넓은 종교사적 지식에 의해 문제를 더 포괄적으로 파악하였다. 그는 처음 그리스도교에 헬라 혼합종교의 영향이 많았다는 전제로부터 처음교회는 예수의 근본적 단순한 복음을 예배 신비체인 그리스도에 관한 종교로 형성하여 갔다고 하였다. 이 발전을 매개한 것이 처음 교회가 수입한 헬라세계에서 성행하던 주 예배였다고 보았다. 헬라적 그리스도교회가 그들의 예배의 대상에게 처음으로 '주'라는 칭호를 드렸는데 그것은 당시 파사지방, 헬라지방, 로마에 많던 신적 퀴리오스 (kyrios)에 평행하여 적용한 것이라고 하였다. 이 칭호가 예배에 있어서 예수의 왕적인 지위를 표시하는 것이었다고 한다. 빌립보서 2장 9절에 있는 모든 이름위에 있는 이름이란 표현은 이런 내용을 지시하는데 사실 이 칭호는 구약에서 야웨 하나님께 드린 칭호이지만 이제 예수에게 적용되었고 지금은 '주'로서 현재한 예배의 중심대상을 지시한다는 것이다. 예수에 대한 이러한 증언은 무의식적으로 교회전체 심리속에 있는 억제할 수 없는 깊이 가운데서 생겨난 것이라고 한다. 바울의 그리스도론의 중심을 이루는 표현 '주'와 '하나님의 아들' 이라는 칭호는 유대교는 물론 이방종교와 관계를 가진 것이며 이것을 부셋트는 헬라적 경건성에서 이해하려고 하였다. 그래서 바울이 확립한 주 예수의 성례전적 예배라는 것이 복음을 팔레스틴에서 헬라지역으로 옮겨 헬라화 하는 일의 준비가 되었다고 한다. 그리고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예배를 바울은 신비종교에서 수입하였다고 하였다. 위의 주장에 대해 슈바이쳐는 다음과 같이 비판하고 있다. "우리가 부셋트의 이론 전제 중의 하나인 주 예수의 성례전적 예배를 생각할 때, 헬라의 그것과는 다르다. 헬라적 교회에 있어서 크리스챤 신앙이 헬라적 영향을 받은 성례전적인 특성을 취했다는 것은 지지되지 않는다". 우리가 부셋트가 주장하는대로 바울의 등장이전에 팔레스틴 교회와 헬라적 교회의 구별을 찾을 수는 없다. 불트만은 "바울이 예수의 개인적 제자가 아니었으므로 헬라적 교회의 복음에 의해 크리스챤 신앙을 얻었다"라고하였다. 하지만 처음에 헬라적 교회니 팔레스틴 교회니 하는 사상적 구별을 증명할 수 없다. 실제로 헬라에 있던 교회는 헬라에 살던 사람들에 의해 형성된 것이 아니라 예루살렘 교회에 큰 핍박이 나서 사방에 흩어진 교인들에 의해서 형성된 것이다 (행 8:1-8). 바울이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예배를 신비종교에서 수입하였다는 부셋트의 주장은 바울이 신앙한 그리스도의 부활과 신비종교와의 차이를 파악하지 못한 결과다. 불트만은 말하기를 바울은 그의 고향도시에서 헬라문화와 접촉했고, 일반철학과 종교적 혼합주의 형상을 알게 되었다. 그러나 그의 기독교 신학에 나타난 이 혼합주의 (신비종교와 영지주의)가 초기 크리스챤 신학의 이념들에 적용된 것이 얼마나 되는지 확실치 않다고 함으로써 바울의 혼합주의 특히 영지주의에서 어느정도 인지는 확실치 않으나 결정적 영향을 받았다고 한다. 불트만은 바울이 세운 교회안에 영지주의자들이 들어간 흔적은 고린도교회에서 부활을 정신화 하였다는 것 (고전 15장)과 다른 예수를 전하는 자가 있는 것 (고후 11:4)과 거짓교사가 세계의 원소를 숭배할 것을 주장하였다는 것 (골 2:4-23) 들이다. 불트만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바울자신은 영지주의적 표현법을 명백하게 실존에 관한 기독교적 이해를 표현하는 적절한 형식으로 간주한다. 그는 영을 가진 인간으로서 하나님의 것들인 신적 지혜의 신비를 탐색하는 지혜를 가졌다고 생각한다 (고전 2:6-). 그는 타인의 판단에서 해방되었다고 느끼는 반면 그리스도의 영을 가진자로서 타인을 판단하는 권리가 있다고 느낀다 (고전 2:15-). 그는 우리가 지식을 가진다는 제안을 받아들일 뿐 아니라 (고전 8:1), 또한 모든 것이 내게는 합법적이다 (고전 6:12, 10:23)라고 말한다. 그는 그의 자유를 자랑하고 영지주의자들 처럼 자유의 역설적 특성을 인식하는 권위를 자랑한다 (고전 9:1-23). 그는 성숙한 자와 완전한 자에 속한다 (빌 2:15 ; 고전 2:6). 그러나 독자에게 나는 다 얻지 못했다는 것을 확신시킨다." 우리는 이와같은 표현방법이 바울의 서신에서 나타난다는 것을 긍정해야만 한다. 그러나 바울이 사용한 용어법이 영지주의의 단순한 복사에 불과한 것인가 하는 문제가 제기된다. 메첸은 "영지주의에 있어서 지식은 인간의 지성의 성취로서 얻은 것이 아니라 신의 은혜의 계시에 의해 허락된 지식이다. 신의 호의를 받아들인 인간은 초인으로 승화 되어진다. 즉 그는 이미 신화되어진 존재이다"라고 말한다. 결국 영지주의에서는 지식이 인간을 구원하는 반면에 바울에게서 지식은 그렇게 탁월한 위치를 갖는 것이 아니다. 지식은 다양한 성격을 가진 많은 영적인 은사들과 더불어 나타나는 것으로 (고전 12:4-11) 구원의 수단이 아니라 구원의 영향들 중의 하나일 뿐이다. 바울의 교훈에 따르면 구원은 신비적 통찰력에 의해서가 아니라 믿음의 들음을 통해서 얻는 것이다. 또한 영지주의의 영을 가진 인간이 신화된 존재인 반면에 바울에게 있어서 믿는자와 믿는자안에 내재하는 그리스도 사이에는 인격적 구별이 주의깊게 보존된다. 이제까지의 바울을 헬라적 입장에서 해석하려는 시도를 고찰한 결과로서 다음과 같이 결론을 지을 수 있다. 바울은 길리기아 다소에서 출생하여 성장하면서 헬레니즘의 제 요소에 접촉할 수 있었다. 그러나 바울을 마치 헬레니즘 영향에 의해 형성된 헬레니즘의 산물인 것처럼 생각하는 것은 전적으로 잘못된 태도이다. 화이틀리 (D. E. H. Whiteley)는 바울이 신비종교의 영향을 받았다는 점을 부인하며 신비종교에 남아있는 모든 증거들 중 대부분은 바울시대 이후의 것이라고 하며 바울은 엄한 유대인으로 성장 (빌 3:5)했으며 따라서 이방종교에서 무엇을 얻어올 사람으로는 볼 수 없다고 하였다. 바울의 사상세계와 당시의 헬라문화가 많은 점에서 공통된 것은 분명하다. 그러나 바울의 사상 중에 헬라적 근원에서 나올 수 있는 것이 많다고 하더라도 순수하게 헬라적 근원만을 가진 것은 거의 없다. 따라서 바울의 용어사용에 있어 헬라적 용어사용이 있을지라도 이는 그 형식에 의존하는 것이지 직접적인 헬라영향 아래에서 표현하고 있다고 보기는 어렵다. 바울은 헬레니즘의 사상과 개념을 복음전파를 위해 혹은 자신의 목적을 위해 자유롭게 독창적으로 이용했으며 또한 새로운 의미를 부여하였다. 따라서 이질적인 헬라종교의 관념을 바울에게 주입시키는 것은 바울이해를 왜곡하기 쉽다. 그는 이러한 사상체계에 마음을 열어 놓은 것은 사실이나 그것들이 그를 형성하지는 않았다. 바울의 그리스도와의 관계는 절대로 범신론적이 아니고 그것은 부활하신 예수님과의 직접적인 만남을 통한 진실로 사랑의 인격적 관계요, 초자연적이다. C. 다메섹 체험 바울의 회심을 심리학적으로 설명할 수 있다고 홀스텐은 말하고 있다. 바울의 표현형식이 구약 모세의 가시덤불 환상, 족장들이 특별한 지시를 받을 때에 들은 음성, 예언자들의 환상이 기술되던 모양으로 기술되었고 바울자신도 황홀경에서의 경험을 여러번 말했기 때문에 (고후 12:2-4 ; 고전 14:6 등), 그런 해석도 상당한 근거를 가졌다고 한다. 그러나 이것을 입증할 만한 근거가 뚜렷하지 못하다. 바울자신의 고백에 의하면 그의 회심과 사도됨은 인간적인 수단에 의한 것이 아니라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로운 선택에 의한 것임을 강조한다 (갈 1:15-16). 바울의 회심기록에는 공통적으로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만났음을 강조하고 있다 (행 9:1-9 ; 고전 9:1). 위의 말에 미루어 바울의 회심과 사도됨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하나님의 행위라는 것이 자명하다. 바울의 회심의 의의로서 가장 특징적인 것은 그리스도와의 관계에 들어간 것이다. 그리스도와 원수였던 바울이 그리스도 안에 있는 그리스도의 사람 (사도)이 되었음을 의미한다. 이러한 관계를 가능케 한 것은 바울이 목격한 (행 20:16 ; 고전 15:8)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서 였다. 케네디에 의하면 바울이 그리스도로서 그에게 나타났던 부활 하신자를 묘사할때 그는 메시야에 관하여 공허하게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하나의 사실로서 그는 끊임없이 지상 예수에 관하여 그리스도란 이름을 사용한다 (롬 5:6 ; 고후 1:5). 이것은 바울이 다메섹에서 만난 예수는 단순한 관념이나 추상이 아니라 실제로 부활하신 구체적인 인격임을 의미한다.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는 바울의 모든 것을 새롭게 변화시켰다. 바울 자신의 증언에 의하면 옛 세계를 특정지우는 죄 (롬 6:2)와 율법 (롬 7;6 ; 갈 2:19)과 초등학문 (골 2:20) 그리고 세상 (갈 6;14)에 대하여 죽었으며 이제 사는 것은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며 동시에 그리스도가 그 안에 사는 것이다 (갈 2:20). 한마디로 옛 바울이 죽고 그리스도 안에서 바울이란 새사람이 재창조 되었다. 따라서 바울이 알고 있던 이전의 모든 것은 다메섹 회심을 통하여 그리스도 안에서 새롭게 해석 되었을 뿐 아니라 독특하게 그의 사상을 형성하게 되었다. 바울 자신의 말은 이 모든 것을 명백하게 설명해 준다.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 (고후 5:17) 바울의 배경연구에 관하여 스튜와트 (J. S. Stewart)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회심경험은 바울생애의 가장 생명력 있고 구성적인 영향이었다. 이에 비하여 그밖에 모든것 - 그의 유대적 가문, 랍비적 훈련, 헬레니즘과 접촉, 유전과 환경의 모든 요인은 완전히 이차적인 것이다. V. 로마서의 역사적 신학적 배경 A. 역사적 배경 "모든 길은 로마로 통한다"(All roads lead to Rome)라고 말해질 정도로 로마는 고대제국에 있어서 정치적, 문화적으로 서구의 중심지였고, 기독교 역사에 중요한 역할을 한 대도성이었다. 신약시대의 로마의 인구는 약 100만이 넘었으며 대부분이 노예들이었다고 한다. 또 로마는 이교의 도시였는데 갖가지 사원(Temple)이 420개가 넘었다고 한다. 로마에는 폼페이에 의한 팔레스틴 점령이후에 많은 유대인들이 로마로 가서 살고 있었다. 또 로마는 당시 정치적으로나 상업적으로 세계의 중심지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도바울 당시 그리이스와 로마세계는 영적으로 볼때 희망이 없는 세계였다. 그리이스와 로마의 사고개념에 따르면 임종의 순간에는 육체의 소망이 없으며 영혼을 위한 소망도 없다. 스토아 철학자들은 대부분 영원히 남는 것은 합리적인 우주이며 사람은 그렇지 않다고 생각하였다. 그러나 로마서는 소망을 준다. 복음은 "모든 믿는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며 첫째는 유대인에게요, 또한 헬라인(이방인)에게라"(롬 1:16)고 한다. 로마서는 바울의 복음서이다. 바울은 유대인으로 태어나 교육을 받은 유대적인 인간이었다. 그는 그리스도인이 되기 위해서 유대주의를 사상적으로나 윤리적으로 극복해야 하였고, 또한 이교도들을 그리스도 앞으로 인도하려면 그들의 생각을 알고 그것을 극복해야 하였다. 그래서 그는 숙명적으로 유대주의와 투쟁하며 이교주의와 논쟁하게 되었다. 1. 로마 교회 복음이 언제 어떻게 누구로 말미암아 로마에 전파되었으며 교회가 언제 어떻게 누구로 말미암아 설립되었을까 ? 하는 문제는 확실하지 않다. 로마교회는 바울자신이 선교활동을 통해 설립한 교회는 아니다. 로마도시가 로마제국 안에서 취하고 있는 전략적인 위치와 오순절날 이후에 기독교 교회안에서 역사했던 요소들을 고려해 보면 로마교회가 어떻게 생겨나게 되었는가를 짐작할 수 있다. 그러나 고오데 (Godet)가 지적한 대로 로마교회에 대하여 세가지 점을 상고해 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즉 첫째로 로마교회가 어떻게 설립되었느냐는 교회창설 문제와, 둘째로 교회의 구성된 대다수가 유대인이었겠느냐, 이방인이었겠느냐 하는 교회구성 인원 문제와, 세째로 교회의 경향이 특수한 것이었겠느냐 혹은 바울적인 것이었겠느냐 하는 교회의 성격문제들이 곧 그것이다. 첫째로 로마교회 창설문제에 관하여서는 두가지 추측이 있다. 하나는 유대와 사마리아와 소아시아 또는 로마에서 예루살렘에 상경하여 회개한 로마사람들이 로마에 돌아가서 (행 2:10 참조) 기원 4,50년경에 교회를 설립하였다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기원 42,3년경에 베드로가 로마에서 전도한 결과로 교회가 설립되었으리라고 하는 설이다. 이 두가지 추측 중에 후자는 특히 카톨릭 교회에서 역설하는 것이다. 이 설은 확실하지 못할 뿐 아니라 '남의 터 위에 건축하지 아니하려고' 한 바울의 주장 (롬 15:20)을 보아서도 그 당시 베드로가 로마에 교회의 기초를 정하지 않은 것 만은 사실인 듯 하다. 교회사가 유세비우스 (Eusebius : 260-339)가 베드로와 바울이 로마에서 순교하였다는 것을 인정하였다. 이것이 진실한 사실이었는지 아닌지 모르지만 그렇다고 해서 로마교회의 기원을 베드로와 관련시킨다는 것은 그 이유가 박약하다고 아니할 수 없다. 뿐만 아니라 만일 베드로가 로마에 교회를 설립하였다고 하면 로마서와 같은 바울의 긴 서신에 그 설립자에 대한 기록이 전혀 없을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베드로와 바울이 로마교회를 세웠다는 기록이 고대 문서에 더러있다. 하지만 A.D. 42-43년경에 베드로가 로마교회를 세웠다는 주장은 프로테스탄트 신학자들에 의해 정면으로 거부된다. 그 이유는 예루살렘 총회시에 (행 15장) 베드로가 그 총회에 참석했기 때문이다 (A.D. 49년). 그러므로 로마교회의 설립에 대한 문제는 그것이 어디까지나 불분명 한것이 사실이나 가능한 상상이 인정된다고 할것 같으면 그것은 안디옥 교회의 경우와 같이 예루살렘 교회의 유대인 신자중 몇 사람이 스데반의 박해를 말미암아 로마도성에 까지 이르러 거기서 집회를 시작한 것이 로마교회의 시초가 되지 않았나 생각된다. 로마교회는 그 설립연대도 불분명하다. 로마교회에 관하여 둘째로 상고하여 볼만한 것은 교회의 구성 인원 문제이다. 즉, 당시 로마교회 교인의 대다수가 유대인 이었겠느냐, 이방인 이었겠느냐 하는 문제이다. 로마교회는 그 창설 경유에서 알 수 있는대로 물론 그 시초는 유대인 신자로서 시작된 것이 거의 분명하다. 그러나 그 이후 점차 이방인 구도자들도 모여들어서 교회는 일약 왕성하여 장족의 진보를 보게 되었다. 그리하여 안디옥 교회에 있어서와 마찬가지로 로마교회도 유대인과 이방인과의 혼성교회가 되었다. 이것은 로마서를 이해하는데 실로 적지않은 도움을 주는 문제이기 때문에 여기서 조금 밝힐 필요가 있다. 즉 그것은 바울이 로마서를 기록할 때에 그 어느편을 주요목표로 하고 썼겠느냐 하는 것이다. 첫째로 유대적 요소의 우세를 주장하는 사람들은 그 이유로서 로마서 9-11장에 기록된 유대인의 구원에 관한 기사는 교회의 구성요소가 유대인이라고 가정함으로써 비로서 납득할 수 있다는 것과 또한 1-8장에서 신앙의인의 교리도 율법과 복음과의 관계를 문제시 하고 있는점을 보아서 이것도 역시 율법의 준수를 구원의 필수조건으로 하는 유대인의 우세를 가정하고 있다. 그밖에 로마서 전체를 통해 구약에서의 인용이 대단히 많은 점을 지적하여 로마교회의 유대적 요소의 우세를 주장한다. 즉 로마서는 바울이 주로 유대신자를 목표로 기록 하였다는 것이다. 그러나 로마서를 좀더 엄격하게 검토할 때에 오히려 이방인 우세설이 더 타당할듯 하다. 즉 1장 5-6절을 보면 로마교회를 이방인 중에서 불러내었다고 하였으며 15장 14-16절에는 바울이 로마서를 기록한 것이 자기가 이방인의 사도로서 이방인을 구원으로 인도하기 위한 것이 그 목적이라는 것을 명백히 하였다. 그러므로 로마서가 유대인 신자만을 목표로 하고 기록하였다고 생각하는 것은 지나친 속단일 것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로마교회에 유대인이 전혀 없으리라고는 생각할 수 없으며 위에서 말한바와 같이 로마교회의 시초는 유대인으로 말미암은 것이요, 그 이후에 이방인이 격증하여 바울이 로마서를 기록할 당시에는 유대인 보다는 이방인이 우세한 교회 구성요소가 되어 있었으며 따라서 로마서는 이와같은 상황을 바울이 염두하고 기록하였으리라고 하는 오늘날 대다수의 학자들의 설이 타당하다고 생각한다. 로마교회의 성격 역시 바울적인 성격의 교회라 할 것이다. 즉 로마교회가 비록 바울의 로마방문 이전에 설립된 것이라고 할지라도 그것은 직접 간접으로 바울의 영향을 많이 받은 교회였다고 생각한다. 2. 저작 연대 및 목적 로마서의 저자가 바울이라는 사실이 의심된 일은 지금까지 별로 없었으며, 로마서는 그의 사대서신(四大書信), 즉 로마서, 갈라디아서, 고린도전후서의 하나로 인정되었으며 그의 중심 신학사상이 기록되어 있는 서신으로 알려져 있다. 그 내증, 외증이 모두 본서의 바울저작을 확증하고 있다. 기록연대는 바울의 제 3차 전도 여행말기 즉, 고린도에서 예루살렘으로 출발한 연대를 계산해 보면 일러도 57년, 늦으면 59년 부활절 조금전에 해당하는 것이다. 바울은 수년동안 로마에 가기를 염원하였다. 그는 로마서에서 그의 희망을 피력하였다 (롬 1:10,11, 15:23). 이러한 계획을 세워놓고 그 기회를 기다리고 있던 바울은 자기가 로마에 가기전에 로마교회에 대한 자기의 관심과 로마방문의 계획과 그리고 자기가 로마에가서 전하려고 하는 복음의 내용에 대해서 미리 로마인들에게 간단히 알려줄 필요성을 느꼈다. 로마서 1장 11절 이하의 기록이 바울의 로마방문의 계획을 표시하고 거기에는 바울의 로마서 집필의 동기와 목적도 나타나 있다. , 바울은 아직도 한번도 방문해 본 일이 없는 로마교회 신자들에게 자기의 확신을 피력하며 복음의 내용, 즉 복음의 근본적 과제와 그리스도교의 실천적 도덕문제를 기록함으로써 그들에게 '신령한 은사'를 나누어 주며 복음에 굳게 서서 깊은 신앙의 자리에 들어가게 하기 위하여 로마서를 기록한 것이다. 바꿔 말하면 이론적인 교의학을 위한 것이 아니고, 동방모든 지방에서와 같이 로마를 중심으로한 서방 모든 지방에서도 복음을 편만하게 전하기 위하여 미리 그 복음의 내용을 간단 명료하게 표시하려고 한것이 그 주요 목적이었다. 로마도성이 세계적 활동무대와 세계교회의 중심이 되며 근원지가 되고 있다는 것을 간파한 대전도자 바울은 먼저 그곳에 복음에 대한 이해를 깊이 해줄 필요성을 느꼈다. 그래서 바울은 위대한 세계전도의 대환상을 가지고 로마서와 같은 위대한 서신을 기록하였을 것이다. B. 신학적 배경 로마서를 비룻한 바울서신의 형태는 개인서신에 속한다. 그러나 그것은 사적인 개인서신의 성격을 넘어선다. 그 까닭은 서신의 발신인이 한 개인으로서가 아니라 그리스도의 사도로서 쓰고 있으며 수신인은 사적이며 개인적인 관계를 지닌 어떤 누구가 아니라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라는 공동체이기 때문이다. 또한 바울서신은 특별한 시간과 장소, 특별한 상황에서 쓰여진 특별한 경우의 문서들일 뿐만 아니라 또한 권위있는 문서이다. 래서 바울서신들은 '복음서'의 문학장르와 전혀 다르다. 편지의 형식은 바울의 행동신학의 방식에 대한 어떤것을 암시한다. 즉 복음의 역사적 구체성을 암시하고 있다. 복음의 핵심은 결코 추상적인 것이 아니다. 진정한 복음은 그것의 상황성과 역사적 구체성과 연결되어 있다. 그러므로 바울서신의 해석자들은 그 서신들의 구체적인 상황을 떠난 '본질'에만 관심을 두어서는 안된다. 바울 사상은 특별한 상황에 적합한 것이며 그의 논의는 결코 상황의 요구와 분리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바울은 그가 관심하는 교회들이 당면하고 있는 문제 그 교회들이 제기한 문제성들을 해결하려는 토론과 논쟁 및 대화의 과정에서 그의 신학사상을 형성하고 전개하고 있다. 이러한 관점에서 로마서는 그 독특성에서 이해되어야만 한다. 우리는 바울 사상의 '본질'을 무시간적 신학적 구조나 영속적인 서신으로 규정할 수 없기 때문이다. 바울은 로마서에서 '영원한 진리'를 설명하거나 교의적 독백을 기술하려하지 않는다. 바울의 목적은 케리그마에 있지 도그마에 있지 않다. 즉 바울에게 있어서 복음이란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구속의 빛안에서 특별한 상황을 조명하는 힘인 것이다. 본 장에서는 이와같은 사실을 고려하여 로마서의 성격과 중심 신학사상을 살펴 봄으로써 다음에 논의될 율법과 은혜사상에 대한 이해를 돕고자 한다. 1. 로마서의 성격 전통적으로 로마서는 바울의 사상을 총제적으로 종합한 가장 조직적인 서신으로 취급되어 왔다. 이러한 로마서의 포괄적이고 조직적인 특성은 최근 당연한 것으로 여겨지고 있다. 바울 자신은 매우 분명하게 이 편지를 쓰게된 상황을 지적한다. 그는 오랫동안 로마교회를 방문할 수 있게 되기를 바라고 기도했으나 여러가지 이유로 해서 (롬 1:9-13, 15:22) 방문하지 못했다. 그런데 마침내 그는 로마로 여행할 수 있는 기회가 생겼다. 바울은 동쪽지방에서 맡았던 임무를 완수 했으며 (롬 15:9, 23:24) 스페인으로 선교여행을 떠날 계획을 가지고 있었다 (롬 15:24). 로마서는 스페인에 대한 바울의 선교와 특별히 관계되어 있다. 그가 지나가는 로마를 방문하여 선교활동을 하기를 원했다. 그러나 먼저 그는 마케도니아와 아카이아의 성도들이 예루살렘에 있는 가난한 성도들을 위해 모은 의연금을 지고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야만 했고 (롬 15:25-27), 이 일을 마치면 바로 로마를 경유하여 스페인으로 여행할 예정이었다 (롬 15:28-29). 즉 바울은 스페인 선교보다 예루살렘 방문을 더 중요한 것으로 여겼던 것 같다. 이 의연금은 예루살렘 사도회의에서 바울에게 부탁한 (갈 2:10) 것에 대한 약속 이행임에도 불구하고 그것은 예루살렘에 있는 '가난한 성도들' (롬 15:26)을 위한 단순한 경제적 지원의 성격을 넘어서는 의미를 지닌다. 그것은 하나님의 목적안에서 바울의 사도적 선교의 성취로서의 '유대인들'과 '이방인들'의 교회의 종말론적 일치를 상징적으로 말해주고 있다. 이방인들의 물질적인 것 ( )은 예루살렘에 있는 성도들의 정신적인 축복 ( )에 대한 감사의 반응인 것이다 (롬 15:27). 그래서 로마서의 주제 (롬 1:16-17)는 의연금에 대한 의무 (롬 15:25-28)에서 더욱 깊이 확인 되었다. 이것은 로마서의 주제를 나타내는 개별주의와 보편주의를 잘 통합해 준다. 즉 복음은 "먼저 유대인들에게, 그리고 이방인들에게 까지 믿는 사람이면 누구에게나 구원을 가져다 주는 하나님의 능력" (롬 1:16)이다. 그런데 바울은 의연금에 대해 걱정을 나타낸다. 바울은 예루살렘에 있는 기둥들에 의해 의연금이 받아질런지 의심하고 있으며 유대에 있는 유대인들을 두려워 하고 있다 (롬 15:30). 그런 관계로해서 바울은 로마의 중재를 요청한다. "여러분도 나를 위하여 하나님께 간곡히 기도해 주십시오" (롬 15:30). 이것으로부터 이 편지가 로마에 대해 바울의 입장을 호소하고 있으며 그것의 신학적 구조는 분명히 이 호소와 관계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런 점에서 볼 때, 로마서는 예루살렘에 대한 숨겨진 서신이다. 따라서 로마서는 바울사상의 상황에서 제기된 '유대적 질문'을 토의하고 있다. 이 편지에서 바울은 유대주의자들이나 영지주의적 열광주의와 싸우고 있는것이 아니다. 로마서의 문제는 이단과의 싸움이 아니라 바로 유대인들과의 문제인 것이다. 로마서 14장과 15장에서 지적하고 있는것과 같이 약한자와 강한자 사이의 긴장은 롬 15:8-9에서 지적한 것 같이 유대인 그리스도인들과 이방인 그리스도인 사이의 관계를 말하고 있다. 로마서의 진정성은 심각하게 의문시 되지도 않았으며 사실상 논의할 여지 조차 없다. 로마서의 진정성을 부인하는 것은 곧 바울의 서신 전체를 부인하는 것이 된다. 왜냐하면 비교의 기준으로 제시될 수 있는 서신으로 이보다 더 진정성이 명확한 것은 없기 때문이다. 로마서에 대한 가장 중요한 해석학적 열쇠는 상황이다. 이방인을 위한 사도로 부름을 받은 바울 (롬 1:5, 13-14, 11:13, 15:16)의 초기의 투쟁은 이방인들을 위한 율법으로부터 자유한 복음에 집중되었다. 그 투쟁의 과정에서 바울은 그가 유대교, 율법, 그리고 복음의 율법적 근거등을 폐지하기를 원했던 사실과 특히 갈라디아에서의 위기의 증대에 의해 회의를 갖기 시작했다. 고린도 서신에서 이방 그리스도교가 점차 방어적인 모습에서 공격적인 모습으로, 소수의 입장에서 다수의 입장으로 변해가고 있음은 이를 잘 말해준다. 주후 70년 이전 예루살렘 멸망 이전에 예루살렘에 있는 모교회는 바울 자신도 인정한대로 우월한 위치에 있었다. 그러나 유대 그리스도인의 위기 이후 이방 그리스도 공동체가 그리스도교의 지배적인 형태로 변하게 되었다. 이제 교회라 일컬음은 곧 이방인 그리스도 교회와 동의어가 된 것이다. 이제 70년 이전의 상황은 매우 약화되어 거의 더 이상 문제가 되지 못했다. 유대 그리스도인의 삶과 사상과 사회적, 문화적 접촉을 할 기회가 없었던 완전한 이방 그리스도인들은 유대 그리스도교로부터 사실상 이탈되어 있었다. 따라서 그들이 바울을 대선교사로 존경한다 하더라도 그의 신학적 사상은 오해되었고 수정되었거나 부정되었다. 이런 상황에서 이방인의 사도로서의 바울은 유대 그리스도교에 우위를 느껴 자랑하는 이방 그리스도인들에게 경고를 할 필요성을 느꼈다. "믿음이 강한 사람(이방 그리스도인)은 자기 좋을대로 하지말고 믿음이 약한 사람(유대 그리스도인)의 약점을 돌보아 주어야 합니다." (롬 15;1) "여러분이 음식문제를 가지고 형제의 마음을 상하게 한다면 그것은 사랑에 사는 사람의 도리가 아닙니다." (롬 14:15) "나는 이방인에게 말합니다... 그러니 여러분은 두려움을 가질지언정 자랑할 것은 하나도 없읍니다." (롬 11:13, 20-21. 비교. 11:25 "여러분이 모든 것을 다 알았다고 장담할지 모르지만...") 그러나 한편 대조적으로 로마서의 주요부분에서 바울은 유대교와 오히려 맞서고 있다(비교 롬 2:1-11, 17-29, 3:1-8, 9-20, 4:1, 6:1-15, 7:1,4-6, 9-11장). 그러나 로마서의 이 국면은 편지가 이방교회를 향하고 있기 때문에 종종 무시된다(롬 1:5-6, 1:13, 1:14). 바울의 논쟁의 촛점은 로마교회의 이방적인 성격을 배타적으로 부정하고 있다. 이처럼 로마서는 유대 그리스도인과 이방 그리스도인 모두에 대한 이중성격을 가지고 있다. 쿨멜(K mmel)은 말하기를 "로마서는 이중성격을 예시한다. 그것은 본질적으로 바울복음과 유대교 사이의 논쟁이다. 이 편지의 독자는 유대 그리스도인들이었으며, 그 공동체는 주로 이방 그리스도인으로 구성되어 있었음을 말해주는 진술이 이 편지에는 내포되어 있다"라고 말한다. 이같이 로마서의 성격은 유대인과 이방인과의 관계의 서신이며, 따라서 이스라엘을 위한 기본적인 변호에 그 관심이 있다. 이러한 사실들에 비추어 볼 때, 유대적 논증과 '유대적' - 이방 그리스도인들 사이의 관계는 명료화될 필요가 있다. 그 까닭은 로마서는 주로 유대인과의 대화이기 때문이다. 로마서는 "구원사에 있어서 이스라엘의 역할은 무엇인가", "율법과 할레의 기능은 무엇인가"라는 유대적 질문에 대한 한 그리스도인의 답변이다. 바울은 로마서에서 유대교화하는 이단(갈라디아서에서 처럼)을 공격하지 않고 구원사에 있어서 유대교의 역할을 심사숙고하고 있다. 복음은 이스라엘의 택함과 구원사의 폐지인가 성취인가 ? 구원사의 통일성과 연속성은 무엇인가 ? 그리스도의 하나님은 신실하시 하나님인가 아니면 변덕스런 하나님인가 ? (롬 3:3) 로마서에서 바울은 유대적 방식 혹은 할례를 받아들이는 그리스도인들을 공격하지 않을 뿐 아니라 그런 방식으로 유대교가 복음안에 있음을 밝히며 논증하고 있다. 로마서의 바울에게 있어서 유대인과의 대화는 동시에 복음을 위한 변증인 것이다. 로마서의 바울은 다른 곳에서는 달리 독특한 로마서의 상황과 논쟁안에서 이해될 수 있다. 2. 중심적 사상 로마서는 소위 오늘날 말하는 교의학이나 조직신학의 교과서로 기록되지 않은 것만은 사실이다. 그러나 로마서는 갈라디아서나 고린도서와 같이 교회내의 구체적 문제를 취급하여 해답해 주려는 것이 아니고 미지의 교회신자들에게 장차 자기가 전하려고 하는 복음의 진리를 특수한 목적을 가지고 비교적 객관적으로 또 조직적으로 서술한 것은 사실이다. 그는 평소에 여러지방 교회에 다니면서 많은 신자들 앞에서 복음의 내용을 설명 하였는데 이제는 로마교회의 신자들을 자기의 청중으로 삼고 시간과 마음의 여유를 가지고 복음의 진리를 계통적으로 진술한 신학적 설교가 곧 로마서인 것이다. 그러므로 비록 로마서에서 종말론이나 교회론과 같은 신학문제가 취급되어 있지 아니하고 구원론을 주축으로 하여 그 밖에 중요한 신학문제가 진술되어 있기 때문에 로마서가 사신(私信)이라고 하기보다는 일반적으로 공적성질을 띤 논문과 같은 인상을 준다. 따라서 본 서는 서신이라기 보다는 신학적 해설서라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신학자들 중에는 바울이 기독교 신학을 체계화하고 영원히 전하기 위해 로마서를 기록한 것이라 말하기도 한다. 로마서가 특정한 기회에 어떤 특정한 문제해결을 위하여 꼭 필요하게 쓰여진 것은 사실이다. 그런 까닭에 교회의 특별한 사정을 가정하지 않고 해석할 수 없는 부분이 적지않다. 그런데 이런 부분에 있어서 바울이 복음의 근본진리에 대해서 변론을 담당하게 전개하였고, 그리고 이에 따른 많은 사항을 치밀하고, 조직적으로 논술하기도 하였다. 뿐만 아니라, 철학적 고찰을 가지고 설명하였고 마지막에 가서는 구원에 있어서도 실천적, 윤리적 교훈들을 첨가하였다. 여기에서 바울의 체계있는 신학을 설파하는 것이 되기도 하였다. 바울은 신학자로서, 사상가로서의 자기를 보여 주었다. 다른 편지에서도 역시 바울의 신학과 사상을 들어내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로마서에 있어서 율법과 은혜를 중심하여 확실하고도 분명히 나타난 바울신학의 중심사상을 엿볼 수 있다. 그러면 로마서의 중심사상은 무엇인가 ? 그것은 구원론이다. 다른 무슨 문제 보다도 바울은 그리스도 안에서 구원의 문제를 더 중요하게 논술하였다. 그리고 이 문제를 다루는데 있어서도 형식적인 교리나 교설을 서술하는 것 보다는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구원의 사실 자체를 더욱 역설하였다. 바울은 구원의 교리를 논함에 있어서 인간의 상태를 먼저 살펴보았다. 인간은 본래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함을 받았고 율법을 받은 존재인데 죄를 짓고 율법을 범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러한 죄에 사로잡힌 인간은 개인 뿐만 아니라, 전 인류에게 관한 것이며 아담의 범죄로 말미암아 죄가 전 인류에게 군림하게 되었다는 것이다.그리하여 바울에 의하면 실제적으로 죄는 인간을 사로 잡아 그 노예로 삼아 인간에게 있던 하나님의 창조의 조화를 상실하게 하였다는 것이다. 드디어 죄는 인간을 타락시켜 사망에 이르게 하였다. 그 결과 하나님의 심판이 인간에게 임하게 되었다. 하나님의 심판은 최후의 날에 나타나실 것이지만은 현재의 인간의 타락과 범죄는 하나님의 진노가 이미 부분적으로 나타난 결과라고 하였다. 하나님이 인간에게 주신 율법에 대하여 바울은 그 거룩한 기원을 의심하지 않았다. 그러나 거기에 구원이 있다고 생각 하지를 않았다. 반대로 율법은 인간이 죄에 사로잡혀 그 노예가 되었다는 가련한 상태를 경고해 주는 것이라고 하였다. 이 점에서 오히려 인간에게 율법을 주신 하나님의 의도를 볼 수 있다. "율법으로 말미암지 않고는 내가 죄를 알지 못하였다" (롬 7;7). "율법이 가입한 것은 죄를 더하게 하려 함이다" (롬 5:20)라고 한 바울의 말은 도덕선생으로서의 역할을 하는 율법이 죄의 엄중성을 깨닫게 하도록 하여주고 있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율법이 없으면 죄를 죄로 알지 못하고 죄때문에 멸망할 것인데 율법이 죄를 깨닫게 하여 구원에 이르게 한다는 것이다. 율법이 인간을 죄의 종에서 해방하거나 타락과 사망에서 건져내지는 못하지마는 인간이 죄에 사로잡혀 사망아래 있다고 하는 현실을 경고하는 의미에 있어서 율법은 그 의의가 있으며 따라서 바울이 율법을 거룩하고 의롭고 선하며 영적이라고 말한 것은 타당하고 유대인의 율법해석과도 동일하다. 그러나 인간을 죄에서 해방시켜 사망에서 구원하는 것이 율법의 행위로 말미암은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속죄로 말미암아 완성된다는 것이 바울의 구원론의 핵심이다. "율법이 육신으로 말미암아 연약하여 할 수 없는 그것을 하나님은 하시나니 곧 죄를 인하여 자기 아들을 죄 있는 육신의 모양으로 보내어 육신에 죄를 정하사" (롬 8:3),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구속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자 되었다" (롬 3:24). 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속죄의 사실을 그대로 받아들여 믿고 의심하지 않는 것이 곧 신앙이다. 바울에 의하면 인간이 구원받는 길은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하여 나타난 하나님의 은혜의 사실에 대한 응답, 즉 신앙이라는 것이다. 신앙은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어진 하나님의 사랑을 받아들이는 인간의 행동이다. 바울은 이 신앙까지도 성령의 선물이라고 하였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하여 나타난 하나님의 은혜를 믿음으로서 의롭다함을 얻고 구원에 이르게 되었다는 것은 죄로 말미암아 죽을 수 밖에 없는 인간에게 분명히 기쁜 소식 즉, 복음이 아닐 수 없다. 이처럼 바울은 복음은 바로 이런 것이며 믿으면 어떻게 된다는 것을 명확히 가르치고 믿도록 하기 위하여 로마서를 기록하였다. 그런 관계로 내용이 규범적 의의를 지니고 있기도 하는 것이 이방인에게 복음을 전하는 사도들이 어떤 가르침을 주장하며 그 가르침의 특징은 어떤 것인가 ? 유대교와 어디가 다른가 ? 그것이 저들 자신의 가르침과 어떻게 일치하며 또 다른 것이 있는가 ? 등을 직접 알 수 있다. 이러한 염원에서 열의를 가지고 용의주도하게 기록한 것이 다른 서신이 미치지 못하는 로마서의 우수성 이라 말할 수 있다. 로마서는 얼마나 사도바울의 개인적 감상이나, 욕망, 동기를 떠나 객관적인 태도에서 복음 진리 그 자체를 적나라하게 저술하였음을 알 수 있다. 로마서는 바울의 여러 서한 중에서도 가장 높이평가 되는 것은 이 복음의 진리의 객관적 서술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바울의 신학의 진수가 표시되어 있기 때문이다. 바울이 후세에 미친 최대의 영향이라면 로마서에 나타난 바울의 신학에서 비롯되었다고 한마디로 말할 수 있다. 바울신학은 인간의 어떤 사색의 소산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신앙 즉, 예수 그리스도의 은총 그리고 그 은총에 압도되고 사로잡히고 구원받은 사실에서 출발한 것이다. 이 신학에서 움직이고 역사하는 살아있는 신앙의 힘이 많은 사람에게 미치고 저들을 촉구하고 생명력을 불어주고 힘이 되게 하고 예언자 개척자가 되게 하였다. 그러므로 로마서가 오늘에 이르기까지 모든 사람에게 가장 귀중한 책으로 인정받게 되고 중요시 하게되는 이유라고 말하게 되는 것이다. 성서의 위력도 바울의 서신 가운데서도 가장 광범위하고 조심스럽게 쓰여진 것으로 서신의 구조가 분명하고 신학적으로 중요한 문제들이 취급되어 있는 로마서에서 그 절정에 이르고 있다고 말한다. 지금까지 로마서에 나타난 바울신학의 중심사상을 살펴보았다. 즉, 그의 중심적 사상은 그리스도로 말미암는 '구원의 복음'이다. . 로마서에 나타난 바울의 율법과 은혜사상 A. 교리적 이해 1. 율법에 대한 교리적 이해 로마서에서 바울은 다양한 의미로 율법이란 용어를 사용하고 있다. 로마서 1장부터 8장까지 율법이란 단어가 59번 사용되었으며 9장 - 16장까지 7번 사용되었다. 로마서에 나타난 교리적인 이해를 고찰 해 볼 때 그 의미는 다음과 같다. 바울에 있어 s 사용이 일정치 않다는 점이다. 사실 율법에 대한 바울의 사상은 그가 수 많은 모순적인 진술을 하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에 이해하기 어렵다. 그는 로마서에서 율법이 비록 거룩하며 의로우며 선하다고 강조 하면서도 (롬 7:12) 그리스도인은 율법아래 있지않고 은혜아래 있다고 주장하며 (롬 6:14) 율법을 행하는 자들이 의롭다 하심을 얻을 것이며 율법으로 말미암아 살것이라고 주장하지만 (롬 10:5) 동시에 그는 율법의 행위로는 하나님 앞에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나니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았음 이라고 말하며 (롬 3:19-20) 의문을 통해서는 사망에 이를 뿐이라고 주장한다 (고후 3:6). 또한 그는 자신이 율법의 의로는 흠이 없는 자라고 주장하지만 어느 누구도 율법을 완전하게 지킬 수 없다고 주장한다 (롬 8;7). 율법이라는 용어자체도 가끔 구약의 개념으로 말하나 전적으로 그 의미는 아니며 또한 그의 율법의 개념은 단순히 모세의 법에서만 출발하지 않았던 것이다. 바울이 해석한 율법의 여러가지 특징들은 오직 그의 종말론적 전망에서만 이해될 수 있는 새로운 기독교적 해석을 나타내고 있다는 점이다. 이는 그리스도와 더불어 메시아시대가 시작되었고 그리스도 안에서 새것이 잉태하였음으로 바울은 그리스도안에 있기전에 율법을 즉, 인간적인 관점에서 그리고 모든 경험을 해석할때 처럼 옛 세대를 이해하였다. 육적차원 ( )에서 볼때 율법은 긍지와 자랑거리인 선행의 기초였다. 그러나 그리스도안에 있는 영적차원 ( )에서 볼때 율법은 하나님의 구속목적, 전혀다른 역할을 감당하게 되었다. 로마서에 나타난 바울의 율법에 대한 태도가 두가지로 드러남을 알 수 있다. 먼저 부정적인 입장을 살펴보면 바울은 율법이 구원에 이르게 하는 것이라는 점을 인정하지 않는다. 이것은 그가 율법을 전적으로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특히 그가 강조하는 것은 율법의 실패와 율법을 통한 죄의 지배라는 것이다. 바울에게 있어 율법은 여전히 의롭고 거룩한 하나님의 뜻이지만 율법은 사람들을 하나님 앞에서 의롭게 하는데 실패하였다. 그 이유는 사람들이 지닌 연약성 (롬 8:3), 타락성 (롬 7:23) 때문에 율법이 요구하는 순종을 할 수 없다는 것이다. 율법이 범죄한 인간들을 의롭게 할 수 없는 또 다른 이유는 그것이 외적인 의문인 반면, 인간의 타락한 마음을 변화시키는 내면적 능력을 필요로 하는데 있다. 율법은 기록된 법전이지 하나님의 영이 주는 생명이 아니라고 바울은 주장한다. 또 그는 율법을 통해 죄의 지배가 이루어 진다고 하였다 (롬 5:13 이하, 7:7 이하). 죄는 율법안에서 기회만을 호시탐탐 노리고 있다. 그는 율법이 없는 곳에는 범함도 없다고 못을 박았다 (롬 4:5). 죄와 죽음으로 부터의 해방은 율법으로 부터의 해방을 의미한다 (롬 7:1). 다음으로 그는 율법에 대해 긍정적, 적극적 평가를 내리고 있다. 그는 율법을 하나님의 법이라고 표현하며 (롬 7:22, 25), 신성한 것이라고 선언하며 (롬 7;14), 율법의 계명들은 거룩하며 의로우며 선하다고 선포한다 (롬 7:12). 또한 바울은 자신이 전한 복음이 율법을 "폐하는 것이 아니고 도리어 율법을 굳게 세운다"고 말한다 (롬 3:31). 바울은 율법의 행위로는 아무 육체라도 의롭다 하심을 받을 수 없다는 사실과 (롬 3:20) 하나님의 의는 율법외에 나타났다는 사실과 (롬 3:27) 사람은 율법의 행위없이 믿음으로 의롭게 된다는 사실 (롬 3:28)을 주장해 왔다. 율법의 행위에 대한 반복적인 부정은 "율법은 어떤 것인가 ? 그것은 폐지된 것이냐 ?"는 질문을 낳게했다. 그는 믿음은 율법을 굳게 세운다고 대답했다 (롬 3:31-32). 여기에 나타난 율법은 순종하고 실천할 것을 명하는 율법이며 어떠한 계명에 대한 어떠한 순종행위도 정의에는 아무런 소용이 없다는 것이 바울의 주장이다. 바울은 은혜의 교리에서 도덕폐기론적 추론이 나올 위험성을 잘 알고 있었다. 롬 6장에서 이 문제에 대해 잘 다루고 있다. 그는 도덕폐기론적 추론을 거절할 뿐만 아니라 어리석은 것이라고 지적하는 논증을 제시하고 있다. 그렇다면 율법이 어떤 방식으로 하나님의 계획속에 건설적인 자리를 차지하는가 ? 먼저 율법은 하나님의 목적들과 하나님의 요구들을 증거하는 것으로 간주된다 (롬 3:21). 다음으로 율법은 죄의 중개자로서 그 하는 일 속에서 그 일을 통하여 하나님께 봉사한다는 것이다. 롬 7:11,12에 율법에 대한 부정적인 진술과 긍정적인 진술이 나란히 나타나 있다. "죄가 기회를 타서 계명으로 말미암아 나를 속이고 그것으로 나를 죽였는지라. 이런 이유로 ( = for this reason) 율법도 거룩하며 계명도 거룩하며 의로우며 선하도다". 이 결론에 대한 해답이 13절에 되어지는데 "율법을 통하여 죄가 드러났고 심히 죄되게 되었다"고 바울은 말한다. 죄가 개개의 삶속에서 은신처를 구했으며 죄의 전제적인 힘이 실제적으로 더 발휘하게 되었으며 그 사악한 의도들이 드러나게 되었다. 그래서 바울은 "율법이 가입한 것은 범죄를 더하려 함이라. 그러나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넘쳤나니......" (롬 5:20-21)라고 외쳤다. 로마서에서 바울은 율법이 그리스도의 사역과 달리 하나님의 의에 완전하게 이르게 할 수 없었던 일을 숙고하면서 하나님의 전반적인 구속 목적 가운데 율법이 차지하는 역할을 새롭게 해석한다. 먼저 그는 율법이 하나님의 본래 목적이 아니었음을 보여 줌으로써 구원을 제시할 수 없는 율법의 무능력을 설명한다. 그는 롬 4:1-5에서 아브라함이 율법을 가지고 있지 않았어도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었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할례의 표가 있기전에 의가 믿음으로 주어진 사실을 지적한다 (롬 4:9-12). 만일 구원이 율법으로 말미암지 않고 약속으로 말미암는다면 하나님의 구속 목적 가운데서 율법이 차지하는 역할은 무엇인가 ? 율법이 더한 것 ( )은 사람들을 그들의 죄에서 구원하기 위함이 아니라 죄가 무엇인지 보여주기 위함이었다 ( 3:20, 5:13,20). 하나님의 뜻을 선언하고 하나님이 금하는 것을 보여 줌으로써 율법은 죄가 무엇인지 보여준다. 그래서 바울은 율법을 정죄 (롬 5:13), 진노 (롬 4:15) 그리고 사망의 도구 (롬 7:19)라고 불렀다. 그러나 이 율법이 하나님의 약속과 모순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율법은 인간을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하는 일종의 가정교사 (tutor)의 역할을 하며 이제는 신앙이 왔으므로 교사의 기능이 끝났다는 것이다. 즉 사망의 도구라고 (롬 7;19) 불렀다. 이 비극적인 상황을 만들어 내는 것은 율법자체가 아니라 사람들 속에 있는 죄이다. 로마서에 실린 바울의 논의는 유대인들이 율법을 어떻게 이해하여야 할 것인가를 교훈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유대 그리스도인들 처럼 율법에 대해서 연관성이 없던 이방 그리스도인들이 은혜로 구원얻는 길을 율법의 행위로 구원얻는 길로 바꾸지 않도록 지도하기 위해 기록한 것이다. 2. 은혜에 대한 교리적 이해 그리스도교가 은혜의 종교인것 같이 이해된 것은 바울에 의하여 되었다고할 만한 것이다. 바울이 사용한 은혜란 말은 기쁨, 사랑스러움 (엡 4:29 ; 골 4:6), 호의 (롬 1:5), 감사 (고전 10:30) 따위의 의미로 사용하기도 하지만 그리스도의 역사적 사실을 지시하는데 주로 사용 하였으며 하나님편에서 온 희생, 긍휼, 자비를 지시하는 것이다 ( 3:24). 은혜라는 용어가 로마서에서 22번 나타나는데 그 중 1장부터 8장까지 11번, 11장부터 16장까지 11번 나타난다. 로마서에 나타난 바울의 은혜개념 배후에 있는 기본사상은 하나님의 자격을 묻지 않으시는 관대하심이라는 것이다. 은혜는 어떤 이유에 근거하여 주어지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은혜를 받은 사람의 지위에 따라서 어떤 제약을 받는 것이 아니다. 은혜는 은혜받을 사람의 조건과는 전적으로 관계가 없다. 하나님의 은혜는 너무나 광대하고 측량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에 모든 부류의 죄인들이 다 받을 수 있도록 되어진 것이다. 바울의 은혜의 사상은 값없는 은사로서 인간을 용서하시는 하나님 이시라는 사상이다. 받을 만한 자격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받는 것이 은혜이다. 로마서 전체를 통해 바울은 은혜란 하나님의 관대하심에서 오는 선물이며 인간이 결코 벌어들이거나 획득하는 것이 아니고 그가 그저 믿음으로 받아들이는 것이라는 확신에 가득차 있다 (롬 3:24, 4:4, 11:6). 은혜는 공로의 요소가 전혀 없기 때문에 은혜가 되는 것이다. 하나님의 은혜에는 무진장의 넉넉함이 있다고 바울은 이해했다. 바울은 죄가 많은 곳에 은혜가 더 넘치게 되었다고 고백하였다. 은혜에는 일종의 무한성이 있으며 완전한 타당성 일종의 무진장함이 있다. 인간이 구원받는 것은 행위로 말미암은 것이 아니며, 오직 은혜만으로 말미암은 것이다. 다른 아무것도 없다. 사실 다른 어떤것을 개입시키면 구원의 전체 원리가 붕괴된다. 이것이 로마서에 깔려있는 논의이다. 여기서 바울에게 있어서 은혜와 행위는 서로 배타적인 원리임을 알 수 있다. 은혜는 은혜받는 사람을 채무자로 만들지 않는다는 것이다 (롬 6:23). 사람들은 흔히 은혜로 구원받고 자신의 힘으로 그것을 지키려고 잘못 생각한다. 그러나 바울은 "하나님의 은사는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 있는 영생이니라"고 말했다. 영생은 하나님께서 주시는 선물이다. 영생은 빚이 아니다. 은혜는 갚아야 할 필요가 없다. 이 말은 그리스도인들이 선한 일을 하거나 혹은 하나님을 진실되게 섬길 필요가 없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물론 아니다. 누구든지 구원을 받은 후에는 선한일을 하며 하나님을 충성되게 섬겨야 한다. 그러나 이와같은 행동의 배후에 있는동기는 그리스도의 사랑이다. 그리고 이와같은 일을 할 수 있는 능력도 성령님께로서 나오는 것이다. 하나님의 은혜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밝히 계시 되었다. 은혜의 중심은 예수이다. 바울은 그리스도의 역사적 사실 - 죽으심, 부활, 승천 등 - 을 지시하는데 주로 은혜란 말을 사용하였다. 은혜는 그리스도의 사실에서 객관적으로 일어났으나 성령으로 현대적 사실로서 바울 자신에게 일어나고 있다는 의미를 강하게 담고 있다.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은혜의 구체화 혹은 본질이라는 것이 바울사상 저변에 깔려있다. 바울은 하나님의 은혜가 공로사상에 기초한 세계가 붕괴되었을때 도입된 하나의 비상수단이나 율법의 불가능성이 발견되었을때 개입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원하신 섭리이며 모든 시간 이전부터 있었다고 이해했다. 왜냐하면 은혜의 본질되시는 예수께서 하나님과 함께 선재하셨기 때문이다 (요 1:1-2). 은혜는 의로 말미암아 왕노릇한다 (롬 5:21). 하나님은 인간을 구원하시는 일을 기뻐하시지만 동시에 의로써 인간의 구원을 보호하시는 것도 기뻐하시는 것이다. 하나님의 은혜를 하나님의 관용으로 착각한다면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필요없고 무의미한 것이 된다. 십자가는 하나님의 사랑과 의(義)의 표시이다. 하나님의 義가 없는 하나님의 사랑은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 하나님의 은혜는 십자가로 먼저 죄의 문제를 해결하고 난 다음에 죄를 용서한다. 은혜는 죄인의 죄를 직접적으로 용서하지 않고 십자가를 통해 용서한다. 지금까지 말을 종합해 볼 때, 바울은 자기에게 있는 모든 것이 은혜에 의한 것이라는 말이다 (롬 12:3). B. 실천적 이해 1. 율법에 대한 실천적 이해 a. 바울의 율법에의 순종개념 "믿음은 진정한 순종의 길" 바울은 율법에 대한 순종에 대해 언급을 피한다. 또한 그는 율법을 '의지하는 자들'인 유대인을 (롬 2:17) 비판하고 있다 (롬 2:21). 유대인들은 율법이 하나님의 뜻을 완전하고도 최종적인 것으로 밝혀 주는 것이라고 이해하며 자기들이 율법을 소유하고 있다는 (롬 2:13) 사실 그 자체만으로도 하나님과의 독특한 관계를 지니는 증거라고 생각한다. 율법안에서 자랑하면서 (롬 2:23) 그들은 하나님과 자기들과의 관계를 자랑한다. 그러나 그들의 자랑은 율법이 범해졌을 때 하나님을 모독케 하는 것으로 변한다 (롬 2:23-24). 2:25-28절에 나타난 율법에 순종한다는 바울의 의도는 율법을 단순히 형식적으로 지키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진정한 순종은 전 인간을 하나님께 위임하는 것이다. 이 점은 진정한 할례가 '마음속에 감추어진' 그 어떤 것이라고 말하는 귀절에서 표현된다 (29절). 특히 2:27에서 바울이 율법 ( s)과 성문법전 ( )을 구별하는것을 주목해야 한다. 바울은 롬 7:6에서 성령과 율법을 대조시키고 있다. 여기에서 그는 그리스도에게 속한자는 율법에서 벗어나 영의 새로운 것을 섬겨야 한다고 말한다. 이 귀절들은 진정한 할례는 신령에 있고 문자에 있지 않다 ( )고 기술되어 있는 롬 2:29이해에 큰 도움을 준다. 바울의 순종개념은 '율법의 행위들'( )을 반대하는 그의 논박속에 잘 설명되어 있다. 율법의 행위가 무엇인가 하는 것은 율법의 불가능을 알게되고 복음의 위력에 사로잡히는 깊은 체험에서 밝혀지는 것이다. 그것은 은총의 체험이다.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을 통해 얻어지는 것이다. 바울이 의인은 율법을 행함으로써 얻어지는 그 어떤 것이라는 견해를 거부할때 그는 그 견해 속에서 전제되는 피상적인 순종개념을 거부하는 것이다. 그는 롬 1장에서 행위가 아닌 믿음으로 의롭게 된다는 위대한 선포를 한 후에 롬 2장에서 진정한 순종개념을 말한 뒤에 4장에 가서 아브라함의 예를 들어 믿음을 통한 철저한 순종을 강조하였다. 율법자체가 증거하는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에 의해서 (롬 3:21) 그 율법은 행위의 법이기를 그치고 "믿음의 법이 되었다"(롬 3:27). 신자는 자기의 삶 전체를 하나님께 순종하며 바치기 때문에 율법의 행위들로 부터 새로운 의미에서의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 자유롭게 되었다. b. 율법의 마침이 되신 그리스도 (롬 10;4) "그리스도는 율법의 마침이 되시니라"는 말은 율법의 목적이 그리스도 안에서 성취 또는 실현된 의미로 여겨져 왔다. s라는 용어는 여기서 이중적 측면을 지닌다. 한편으로 그리스도의 오심은 통고된 구원의 양식인 율법이 끝이나게 하여 율법의 행위를 통하여 생명을 얻으려는 인간노력의 끝이라는 의미로 이 용어를 사용하며 다른 면으로는 그리스도 안에서 율법의 참된 기능이 처음으로 정확하게 평가 되었고 율법의 진정한 목표가 성취 되었다는 것이다. 사실 율법의 모든 교훈과 모든 명령 모든 약속은 언제나 그리스도를 가르킨다. 그러므로 신자는 율법의 모든 부분을 율법을 완성하신 그분께 적용시켜야 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렇게 되기 위해서는 우리가 우리 자신의 모든 의를 벗어던져 버리고 우리가 지은 죄악을 깨닫고서 굴복하여야 하며 또한 공로없이 거져주시는 의를 오직 그리스도 안에서 구할때 가능하게 된다.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로서 율법의 시대는 지나갔다. 예수께서 "다 이루어졌다"고 십자가 위에서 외치셨을때 그리스도께서는 거룩한 율법의 요구에 직면해서 그 값을 치루시고 믿는자에게 율법의 의를 부어 주셨으며 우리 안에서 성취시켜 주셨다. 신자는 율법에 대하여 죽었고 (롬 7장), 율법으로 부터 자유하게 되었으며, 율법에서 구원받게 되었다. c. 율법에서 해방된 삶 (롬 7:4) 율법에서 부터의 해방은 우리가 하나님의 뜻을 행할 의무에서 해방된다는 뜻은 아니다. 이 말은 우리가 그 뜻을 우리의 힘으로 행하는 것처럼 행하는 그 행함에서 해방된다는 뜻이다. 만일 내가 육신으로 하나님을 기쁘게 하려고 노력한다면 그 즉시로 나 자신을 율법아래 두는 것이다. 나는 율법을 범하였다 (롬 3:10). 율법은 사형을 언도하였다 (롬 6:23). 그리고 그 사형이 집행되었다. 이제 죽음으로 나, 즉 육의 나는 (롬 7:14) 율법의 모든 요구에서 해방된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법이 있다. 이제부터 새 계명아래 있게 되는 것이다 (마 22:35-39). d. 사랑은 율법의 완성이다 바울은 신자와 율법의 관련성을 이웃을 사랑하라는 율법의 명령에 입각하여 규정 짓는다 (롬 13:8). 그는 무슨 계명이든지 사랑안에 다 포괄되었다고 하였다 (롬 13:9). 그는 남을 사랑하는 자는 율법을 다 이루었다 ( )고 하였고 (롬 13:8), 사랑은 ( ) 율법의 완성 ( ) 이라고 선언했다. 완성 ( ) 이라는 말은 충만하다, 채우다, 성취하다의 뜻이 담겨져 있다. 바울은 로마서 전체에서 한번도 율법에 순종하라는 말을 하지 않는다. 성문법전의 하나로서 율법은 그리스도 안에서 끝난 것 내지는 완성된 것이다. 왜냐하면 율법은 생명을 약속했지만 그것을 가져다 줄 수는 없었다. 그런데 그 생명은 그리스도의 부활과 죽음을 통하여 인간들에게 부여되었다. 율법의 공허를 채우며 그 약점을 보강하며 그가 뜻하면서 성취 못하는 바로 완성하는 것이 사랑이다. 바울은 사랑을 신자의 삶 전체의 내용과 양식으로 보고 있다 (고전 13장). 믿는자는 그리스도와 더불어 죽음과 부활에 동참 (롬 6:13)함으로 사랑의 수납자가 되었다. 바울은 율법을 실천하는 자로서의 신자를 이야기 하지 않고 율법은 믿는자의 삶속에서 사랑으로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에 의해 성취된다고 언급한다 (롬 13:8). 하나님의 사랑은 십자가에서 순수한 은혜의 사건으로 계시되어 진다 (롬 5:8). 인간 편에서는 아무 공로없이 받는 것이다. 자기자신을 하나님께 드리는 것은 "하나님의 사랑의 반사"이다. 그러므로 사랑안에서 이루어지는 순종은 바울이 로마서 13장 8절에 분명하게 해답해 놓은 것처럼 "이웃사랑"이다. "남을 사랑하는 자는 율법을 다 이루었느니라." 2. 은혜에 대한 실천적 이해 바울은 로마서 전체에서 하나님의 은혜로 오직 믿음으로 의롭게 되어진다는 논술을 전개해 나갔다. 그러면 그 결과는 무엇인가 ? 은혜를 통하여 하나님의 사랑이 미쳤다. 따라서 그는 그 은혜의 도움으로 그 은혜에 합당하게 사는 것을 보일 수 있도록 하고자 하는 말할 수 없는 바램과 욕망으로 가득 채워져야 한다. 은혜는 악한자의 왕국에 존재하는 죄의 세력을 극복하게 만든다 ( 5:20). a. 은혜아래 사는 삶 은혜아래 있다는 것은 부활하신 그리스도가 신자안에 살고 신자로 하여금 승리토록 해 주신다는 것을 의미한다. 즉, 이것은 자신의 공로를 가질 필요가 없다는 것을 의미하며 (롬 11:6), 주 예수께서 전체를 행하신 다는 것을 의미하며, 은혜아래 있을때 신자안에서 그리스도께서 행하시기 때문에 죄는 더 이상 신자를 통치하지 못하는 것이다. b. 성령을 좇아 사는 삶 (롬 8:3,4) "... 육신을 좇지않고 영을 좇아 행하는 우리에게 율법의 요구를 이루어지게 하려 하심이니라" 바울이 성령 안에서 은혜의 생활의 적극적인 면을 상세히 설명하는 곳이 로마서 8장이다. 그리스도 안에서 생명의 성령의 법을 따라 살때에 승리하는 삶을 살게 된다 (롬 8:1,2절). "그런고로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니라" (롬 8:6). 따라서 성령을 따라 행하는 삶의 결과는 승리, 생명과 평안이다. 신자의 삶 속에서 죄와 사망의 법이 항상 존재하고 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리스도 예수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을 통하여 사망의 법에서 신자를 해방시키셨다. 주 예수님은 성령님으로 말미암아 우리의 마음 가운데 거하신다. 성령을 좇아 행하는 삶은 곧 그리스도의 뜻을 이루는 삶이다. 성령을 좇아 행한다는 의미는 성령님께 복종하고 생활의 주도권을 맡기는 것을 의미한다. 또한 그것은 자신의 노력이 아니라 성령님이 행하시도록 자리를 양도하는 것이다. c. 몸을 통한 거룩한 산 제사 (롬 12:1) 8장에서 바울은 성령의 인도함을 받고 성령을 좇아사는 자는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부르고 있다 (롬 8;14). "또 미리 정하신 그들을 또한 부르시고 부르신 그들을 또한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그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셨느니라" (롬 8:30) 여기서 의인이 영광으로 인도되는 것을 본다. 로마서 8장의 은총론은 그리스도의 몸을 주제로 하고 있는 12장에 들어가면 분명해 진다. 바울은 로마서 5장에서 "신자의 죄가 용서함을 받았다"고 선언하며 6장에서는 "신자는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다"는 것과 7장에서는 "신자는 날때부터 완전히 무력하다"고 하며 그런고로 내주하시는 성령님을 신뢰한다고 8장에서 언급한다. 이런 결과로 12장에 우리 많은 신자들이 그리스도 안에서 한몸이 되었다고 결론을 내린다. 로마서 12장 이하의 장들은 신자의 실제생활과 처신에 대한 대단히 실제적인 교훈들을 전하고 있다. "너희의 몸을 산 제사로 드리라"는 바울의 호소는 개인적인 것을 넘어서 전체에 대한 공헌을 의미하고 있다. 그리스도 안에서 한몸을 온전히 이루어 온전한 헌신의 삶을 살 수 있는 것이다. d. 넉넉한 승리의 삶 (롬 8:35)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 그리스도인은 영원히 율법의 저주와 정죄로부터 자유롭게 해방되었다. 죄와 자기의존과 개인주의는 사람가운데 하나님의 목적을 반대하게 하는 삶의 가장 교묘한 수법이다. 율법의 정죄에서 벗어나 은혜아래 살게 된다는 가르침에 가장 자주 일어나는 반대는 마 5:17,18의 말씀이다. "내가 율법이나 선지자나 폐하려 온 줄로 생각지 말라. 폐하려 온 것이 아니요 완전케 하려 함이로다." 이 말씀에서 특히 주의를 기울여야 할 점은 그리스도께서 이 말씀을 하실때에 관한 것이다. 이 말씀은 십자가의 사건을 치루시기 전에 하신 말씀이다. 그리스도께서 율법의 요구를 다 마치심으로 율법을 완성하셨고 율법의 끝이 되셨고 율법의 요구를 다 치루어 주셨다. 율법은 구속사적 관점에서 볼때에 은혜안에 용해되고 흡수되고 말았다. "이제는 율법외에 하나님의 한 의가 나타났으니 율법과 선지자들에게 증거를 받은 것이라." (롬 3:21) 율법은 복음안에 용해되고 하나님의 의가 대신한 것이다. 하나님의 구원하는 은혜는 율법의 정죄하는 힘과 맞먹는데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훨씬 능가하는 것이다. 신자는 예나 지금이나 그리스도 안에서 죽고사는 공동운명체적 입장에서 율법을 완성했고 또 이 시험에서 합격했다. 일단 시험에 합격 했으면 다시 수험준비의 고생을 치를 필요가 없다. "의롭다 하시는 이인 하나님" (롬 8:32)과 "죽으실 뿐 아니라 다시 살아나신 예수 그리스도" (롬 8:33, 34)를 믿을 때, 우리는 은혜 아래서 넉넉한 승리의 삶을 영위할 수 있는 것이다. I. 결 론 필자는 본 논문에서 로마서에 나타난 율법과 은혜의 참된 의미는 어떤 것인가를 고찰해 보고자 하였다. 인간이 어떻게 하나님과 옳바른 관계를 맺어 하나님의 인정하심을 얻을 수 있느냐의 문제는 인생에 있어서 최대의 문제였던 것이다. 구약시대에 있어서는 율법을 준수함으로 그 의를 얻을 수 있는 것으로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 율법의 준수에서 얻을 수 있는 의(義)에는 모든 인간이 실패한 것이었다. 그 까닭은 인간은 죄로 인하여 그 인간 본성이 전적으로 타락된 상태에 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신약시대에 와서는 율법의 의가 달리 해석되었다. 바울의 말에 의하면 하나님이 인간에게 율법을 주신 목적은 율법을 지키므로 사람이 의롭게 되기 위함이 아니고 의의 표준을 보여 주는데 있다고 하였다 (롬 3:21). 즉 이말은 그리스도가 세상에 오심을 가르키는 말로써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가 새로운 것으로 변혁됨을 의미하는 말이다. 장구한 세월을 거쳐서 인간은 그가 범한 죄를 제거하거나 극복하려고 노력했음에도 일관된 실패로 끝났던 것이다. 그러나 이제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세상에 오심으로 죄의 제거와 극복이 가능하게 되었던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그의 말씀이 육신이 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그의 십자가의 죽음을 속죄로 용납하시니 그를 믿는 인간을 의로 인정하시고 의인으로 취급하며 의롭다고 선언 하셨다. 과거의 죄악된 생활과 현재의 불완전에 상관없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자에게 하나님과 완전된 관계를 맺는 위치를 부여하신 것이다. 이렇게 죄된 인간이 하나님 앞에서 의인으로 취급받게 됨은 하나님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피가 인간의 죄를 속죄했기 때문이다. 인간편에서의 아무런 공로없이 전적으로 하나님에 의해서 속죄가 성취 되었다. 이것이 기쁜 소식이며 이것이 은혜이다. 율법은 모든 죄에 대한 대가를 지불하고 요구한다. 그러나 은혜는 모든 죄에 대한 대가는 지불 되었다고 대답한다. 율법은 해야 할 일이고 은혜는 이미 되어진 일의 감격이다. 율법은 죄인을 정죄하나 은혜는 죄인을 의롭게 만든다. 율법아래 있는 자는 삯을 받고 일하는 종이지만 은혜아래 있는 자는 유업을 받을 아들인 것이다. 바울은 바리새적 율법이해로 시작하여 율법의 의를 얻으려고 노력 하였으나 그것이 불가능 하다는 것을 체험하였고 그리스도와 만남으로 (행 9:1-10) 유대교적 의(義)는 불가능함을 확신하는 "은혜를 통하여 믿음으로"라는 대 선언을 하게 된 것이다. 그러므로 율법의 마침은 은혜의 삶에 시작을 의미하는 것이다. 바울은 율법외에 하나님의 한 의(義)가 나타났는데 그것은 복음안에 들어있고 믿음을 통해서 은혜로 성취할 수 있음을 강력하게 주장하고 있다 (롬 1:16-17). 그러므로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율법에서 은혜의 자리로 옮겨지게 되는 것이다. 바울이 로마서에서 확실히 명시한 것은 하나님이 은혜로 인간을 선택하시고 부르시고 의롭다 하시고 거룩케 하시고 영화롭게 하신다는 사실이다.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전적인 은혜 (Sola Gratia)에 의해 구원의 사역이 이루어짐을 강조하고 있다. 현대교회는 이런 바울의 율법과 은혜사상을 옳바로 재현함으로써 율법의 강요가 아니라 주의 사랑의 강청으로 십자가를 지고 은혜의 구체화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섬기며 인생의 삶을 살아갈 때, 비로소 기쁨과 감격이 있고, 감사와 노래가 있고, 선교와 주님의 고난에 동참이 가능하게 될 것이다. * 참 고 문 헌 1. 외 국 서 적 Barker, 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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