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사 설교 /D. L. 무디

[스크랩] 무디의 삶이 주는 교훈

에반젤(복음) 2022. 3. 23. 22:11
 무디의 삶이 주는 교훈



1. 무디의 회심


   다음은 무디의 주일학교 선생이었던 킴볼의 고백이다.  “나는 무디에게 그리스도와 그의 영혼에 대하여 얘기해 주기로 마음을 먹고 홀튼 신발가게를 향하여 걷고 있었다. 무디는 뒤켠에서 신발을 포장하고 있었다. 나는 그에게 즉시 다가가서 손을 그의 어깨에 얹고서 지금 생각하면 엉성하게, 예수를 믿을 것을 간구하였다. 내가 정확히 무슨 말을 했는지 모르겠다. 무디는 못 알아들었을 것이다. 나는 다만 예수가 우리를 사랑하며 또한 예수도 우리에게 사랑받기를 원한다고만 얘기했을 따름이다. 그것이 전부였다. 이 젊은이는 마치 자신에게 비치는 빛을 맞이할 준비가 되어있던 것 같았다. 그는 그 곳 보스턴의 신발가게 뒷켠에서 자신과 그의 생애를 예수께 드렸다”


   이 사건은 무디의 생애에서 큰 전환점이 되었다. 그 순간까지 오직 소극적인 종교만 알았지 예수에 대한 적극적인 믿음이 없었다. 예수의 윤리에 대하여 이해하고있었지만 삶을 변화시키는 그리스도의 능력은 모르고 있었다. 무디는 말했다. “예수를 영접하기 전에는 십자가를 향하여 일했으며, 그 후에는 십자가로부터 일했다. 그 때에는 구원을 얻기 위하여 일했으나 지금은 구원을 받았기 때문에 일을 하고 있는 것이다”


   그는 말하기를 “예수를 영접한 영혼의 충동은 사랑하고 싶은 마음이다. 내가 회심한 그 날 아침 밖으로 나가서 눈에 보이는 모든 것들을 사랑하기 시작했다. 땅에 비치는 밝은 햇빛을 그토록 사랑해 본 적이 없었다. 그리고 새들이 달콤한 노래로 지저귀고 있는 순간 그 새들이 그토록 사랑스러울 수가 없었다. 모든 것이 달라졌다”




2. 무디의 초기 주일학교


   무디는 비록 초등학교 5학년 정도까지 밖에 교육을 받지 못하였지만 배우기를 그치지 않았다. 19세의 무디가 시카고에 도착하자마자 플리머스(Plymouth)街의 회중교회에 나가게 되었다. 다른 사람을 도와주는 일에 열심인 무디는 주일학교 반을 가르치고 싶었으나 거절당하였다. 그 후 무디는 주일학교 반을 가르치고 싶다고 다시 한 번 요청했다. 주일학교 교장은 무디에게 반을 허락하되 무디가 직접 학생들을 데리고 와야한다는 조건이었다. 그 다음 주일 무디는 누더기 차림의 부랑소년 18명을 거리에서 모아왔으며 급기야는 주일학교가 넘치게 되었다. 이것이 어린 시절부터 가난하고 불행한 자들에게 관심을 보였던 무디 사역의 특색이다.


   무디와 그의 동료들은 주일 아침 6시면 홀에 도착하여 오후의 주일학교를 위해 강당을 준비해 놓았다. 그들은 가능한 한 학생들을 최고로 영접하도록 노력했다. 가구와 의자들을 가능한 한 모양이 좋게 배치하였다. 무디는 그가 하는 일이 하나님을 위한 진정한 사역이며 주일학교를 감독하는 것만큼이나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무디는 “제가 직접 열 사람 몫의 일을 하는 것보다 열 사람으로 하여금 그 일을 분담하도록 하는 것이 더 낫다고 생각했다”라고 회고하였다. 무디는 일찍부터 일을 조직하고 분담시키는 능력을 보였다.


   그의 주일학교 시간은 절대로 지루한 적이 없었다. 지루하게 만드는 것은 죄라고까지 무디는 믿고 있었다. 그는 책임자로서 예배의 분위기와 방향 인도에 책임을 져야한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1시간 반 동안의 예배는 영적인 찬송, 성경 봉독, 기도 그리고 흥미진진한 간증이나 신화, 가끔의 경연대회, 그리고 학과시간으로 이어져 나갔다.


   주일학교는 무디의 훈련장이었다. 조금씩 그는 사람들 앞에서 말하는 법을 익혀 나갔다. 그는 특히 성경 이야기하기를 즐겼으며 그 실력은 날로 늘어나게 되었다.


   주일학교 선생님 중에 한 분이 불치의 병으로 앓아 눕게 되자 그 선생님은 자신이 맡고 있는 빈민굴의 소녀들을 걱정하였다. 그들은 아무도 예수를 영접하지 않았고, 그는 병 때문에 시카고를 떠나 기후가 온화한 지역으로 가야만 했다. 무디는 그 선생의 깊은 동정심에 감동을 하였고, 그 선생님을 부축하여 그의 학생들을 방문하기로 자원하였다. 그는 학생 한 명 한 명을 방문하였고, 기적과 같이 각 소녀들이 그리스도를 믿기로 결심하는 것이었다. 그는 나중에 회고하기를 “나는 그 때까지 숫자에만 관심을 가지고 있었는데, 그 후로는 개개인의 영에 대하여 관심을 갖게 되었다”라고 하였다.




3. 어머니 뱃시 홀튼 무디


   무디의 어머니 뱃시 홀튼은 1805년 2월 5일 출생하였다. 그녀는 일찍이 메사추세츠州 노스필드 마을에 1673년에 정착한 전통적인 청교도 혈통 출신이었다. 벳시는 농부이자 벽돌장이인 에드윈 무디와 결혼하였다. 에드윈은 아내와 7명의 자녀 그리고 8개월 째 임신 중인 쌍둥이를 남겨둔 채 일찍 세상을 떠났으며, 무디는 다섯 번째 자녀였다. 그녀는 고생을 회고하면서 “하나님이 내게 이 아이들을 주셨으니 내가 어머니로서의 역할을 해 나가면 하나님이 애들의 아버지가 되어 주실 것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라고 말했다.


   뱃시는 검소한 만큼이나 인정이 많은 사람이었다. 그녀는 가난한 자를 결코 문전박대(門前薄待)한 적이 없었다. 그리고, 자녀들이 하나님과 이웃들에 대하여 의무감을 갖도록 키웠다.


   그녀는 무디가 1855년 예수를 구세주로 영접하였을 때 의심을 하였고, 무디의 설교에 대하여 거부 반응을 일으켰으며, 자신은 죽는 날까지 유니테리언으로 남아있을 것이라고 선언하였다. 그러나, 1875년 무디가 고향 땅에서 개최한 연속적인 부흥집회에 참석하여 예수 그리스도를 믿기로 영접하였다. 그 후로 무디의 사역을 전폭적으로 지지하는 자가 되었다.


   “이 세상에서 남자가 가질 수 있는 가장 큰 복은 좋은 어머니와 좋은 아내이다.”


   무디는 그의 어머니 장례식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그런 좋은 어머니를 가졌다는 것에 대하여 우리는 매우 자랑스럽게 생각한다. 우리는 정말 좋은 유산을 이어받았다”




4. 무디의 균형 바퀴 ; 에마 레벨 무디


   에마 레벨은 1843년 런던에서 태어났다. 1860년 무디와 약혼을 하고 1862년 결혼을 하였다. 무디 부부는 여러 면에서 대조적이었다. 무디는 즉흥적이고 솔직하게 말을 하는 타입이며, 정규 교육이 부족하고 정력적이며 건강한 반면, 에마는 보수적이고, 별로 나서지않는 세련된 매너의 교사였고 체력이 별로 강하지 않았다. 두 사람이 모든 면에서 달랐기 때문에 무디는 그의 아내를 가리켜 나의 ‘균형 바퀴’라고 즐겨 불렀다. 그렇게 많이 달랐어도 그들은 깊이 사랑하였다.


   에마는 무디의 우수한 동역자였다. 에마는 집안의 재정을 담당하였고, 무디가 잔 일에 신경을 쓰지 않도록 최선을 다하였고, 무디가 설교에만 집중할 수 있도록 하였다. 그 외에도 일반 가사 일을 돌보았다. 밭과 과수원에서 나오는 채소와 과일을 저장하고 통조림을 하는 일들이었다. 그리고, 그녀는 남편의 많은 친구들을 대접하였다. 주일 오후에는 자녀들에게 성경을 가르치고, 시편과 복음서의 구절을 외우도록 도왔다. 무디의 선교 사역 초기에는 편지 문의에 관한 일을 맡아 하였다. 그녀는 무디의 개인비서가 되어 무디의 우편물을 처리하고, 무디의 여행 일정을 정하는데 도움을 주었다.


   에마 레벨 무디는 다만 장식용 꽃이 아니었다. 그는 남편의 국내외 선교 사역에서 충성되고 몸을 아끼지 않는 정말 근사한 동역자였다.




5. 시카고 대 화재


   1871년 10월 9일, 월요일 무디가 15년간 공들여 쌓아 올린 모든 것들이 사라져 버렸다. 시키고의 대 화재로 인하여 1800채의 건물을 파괴해 버렸고, 9만명이 집을 잃었고, 300명이 사망하였다. 강도, 약탈, 범죄가 이 재난의 공포를 더욱 부채질하였다. 이 화재는 무디의 시카고 선교 사역에 결정적인 타격을 가하였다.


   우리는 왜? 라는 질문에 충분한 대답을 가지고 있지 않으나,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역사의 사건들에 대한 하나님의 섭리가 개입되어 있음을 믿는다. 무디의 생애에 있어서도 이 재난이 선교 사역에서의 전환점을 이루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화재 직후 무디는 그의 사역을 재건하기 위한 모금운동을 벌였다. 2개월 반만에 그는 임시교회를 지어 타 버린 일리노이 스트리트 교회와 도시의 선교활동을 수용하였다. 밤에는 임시 교회가 집 잃은 자를 위한 복음센터 그리고 수용소의 역할을 했다. 수백 명의 사람들이 이 임시교회의 밝은 불빛과 훈훈함에 이끌려 복음을 듣게 되었다. 낮에는 식품과 의료의 보급센터로서의 역할을 했다. 고통, 손실, 재앙은 이 도시 사람들이 복음에 대하여 새롭게 마음을 열 수 있는 기회를 가져다주었다. 사람들이 사랑과 은혜의 복음에 응답하면서 성령 부흥의 물결들이 집회마다 휩쓸었다.


   무디는 한 명에게 설교를 하건, 만 명에게 설교를 하건 관계없이 그의 청중들이 이 영원한 운명의 문제를 결정하도록 신중하게 인도해 나갔다. 사랑으로, 현명하게, 조용하게, 하지만 명확하게 결정을 촉구했다.


   무디가 시카고에서만의 활동에서 벗어나 영국에서 설교하는 소명을 받아들였다. 영국에서의 첫 번째 복음 운동을 위하여 1873년 출발하였는데 이것이 무디의 세계 선교의 시작이 되었다. 무디는 1875년까지 영국에 머물러 있다가 미국 동부에서 열리는 집회를 인도하기 위하여 미국으로 돌아왔다. 무디는 양 대륙에서 가장 각광을 받는 복음 전도자가 되었다. 한 성공회 신부는 표현하기를 “무디는 한 손에는 영국 사람들을, 그리고 다른 한 손에는 미국을 얹고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번쩍 위로 들어 올렸다”라고 하였다.




6. 무디의 아들


   우리의 자녀들이 진리에서 멀어질 때, 우리들은 큰 슬픔을 경험한다. 특히, 대중의 눈을 의식하면서 살고 있는 목사나 선교사의 자녀인 경우에는 더욱 그렇다. 무디에게는 세 명의 자녀가 있었다. 그 중 둘째 윌이 가장 걱정을 끼쳤다.


   세 아이가 성장할 때 무디는 진실한 크리스천의 지식으로 키우려고 노력하는 한편, 너무 선교 관계의 일에 아이들이 노출되지 않도록 노력했다. 그들은 아이들이 기독교에 저항감을 갖지 않기를 원했다. 또한 지루한 종교심을 피했다. 유명 인사로서의 생활에도 불구하고 무디는 아이들에게 평범한 어린 시절을 경험하게 하기 위해 노력했다.


   또 하나의 원칙은 혜택과 인내 훈련이 균형을 이루어야 한다는 점이었다. 무디는 모든 혜택-교육, 여행, 장난감, 취미생활 등-을 누리기를 원했다. 한 편으로는 자녀들에게 극기 훈련을 가르치기를 희망하였다.


   윌을 위하여 무디가 할 수 있었던 것은 기도로 하나님의 도움을 간청하는 것과 서로가 솔직하게 대화를 하는 일이었다. 무디는 바쁜 중에도 시간을 내어 윌에게 편지를 주고 받았다. 또한 무디는 잘못을 했을 때에는 용서를 구하였다. 자녀들의 잘못으로 인하여 화를 낸 저녁이면 무디는 자녀들이 잠이 들기 전에 그들의 방에 가서 사과를 하였다.


   윌 무디는 결국 돌아왔다. 1889년 4월에 있었던 일이다. 무디는 이 소식을 듣자마자 “내가 이 소식을 들었을 때 내가 얼마나 기뻤는가는 네가 아들을 갖게 되기 전에는 모를 것이다”라고 편지를 썼다. 그리고 “네가 영생에 대한 굳건한 믿음을 가지기를 정말로 바란다. 내가 보기에는 오직 이것만이 이 세상에서 붙잡고 있을 가치가 있는 것 같구나. 나머지 모든 것은 반드시 사라져 버린다”고 썼다.




7. 교육자 무디


   초등학교 5학년의 교육 수준을 가진 사람이 위대한 교육자가 되는 경우는 거의 없으나, 무디가 그 예외라고 할 수 있다. 1858년 자신의 선교학교를 조직하였고, 1864년이 되어서는 이 선교학교가 새 일리노이 스트리트교회의 주춧돌이 되었다. 1879년 노스필드 여자학교를 세워 가난하지만 높은 이상을 가지고있는 여학생을 교육시켰으며, 1881년에는 같은 취지로  마운트 허몬 남자학교를 설립하였다.


   1880년에 노스필드 여름 수양회를 개최하였다. 이 수양회는 대학생과 일반 크리스찬을 위한 수양회로 설계되어 이를 통하여 학생 자원운동(Student Volunteer Movement)을 발족하는데 기초가 되었다.


   시카고 복음협회는 현재 무디 성경학교로 알려졌으며, 1887년 창설되었다. 이 학교는 기독교 교육의 학사 과정의 대학이면서 출판사, 잡지, 통신 성경학교, 야간대학, 라디오 방송, 영화사, 선교 항공학교, 방송국, 대학원 등으로 확장되었다.


   무디는 1895년 종교서적 행상협회를 창설하여 저렴한 가격으로 기독교 서적을 출판하여 판매하였다. 또한 스코틀랜드의 글래스고 훈련원의 설립에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였는데 이 훈련원은 오늘날까지 기독교 봉사원을 배출하고 있다.


   강조되어야 할 점은 무디에게는 교육 그 자체가 목적이 되지 않았다. 무디에게 교육의 목적은 개인을 그리스도에게 직접 인도하고 그들로 하여금 그리스도의 사역에 유용하게 쓰여지게 됨을 의미하는 것이다. 무디는 교육 그 자체를 위한 교육을 비웃었다. “교육적 불량배야말로 가장 악랄한 불량배이다”라고 비평하였다.


   무디에게는 진리의 말씀, 곧 성경이야말로 모든 교육사업의 중심이었다. 무디가 다른 종류의 책들도 읽었지만 한 가지 중요한 원칙을 가지고 있었는데 그가 설립한 모든 학교들이 이 원칙에 의해 운영되기를 바랐다. 그 원칙은 “성경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되지 않는다면 나는 어떤 책이라도 읽지 않는다”였다.


8. 무디의 사회적 양심


   무디는 사회개혁자가 아니라 복음 전도자였다. 1877년 무디는 “전 미국은 지금 개혁을 부르짖고 있다. 이러한 부르짖음이 얼마나 계속될지는 나는 알 수가 없다. 이러한 부르짖음은 오랫동안 있어왔지만 그리스도가 우리 정치에 개입하지 않는 한 진정한 의미의 개혁은 이루어지지 않을 것이다. 인간은 본능적으로 악하기 때문에 개혁자 자신이 그들의 마음에 들어가지 않는 이상 개혁은 이루어질 수 없다”고 말했다.


   무디가 사회개혁의 충동에 휩쓸리지 않는 이유 중 하나는 무디 자신이 더 깊은 개혁에 관심을 두고 있었기 때문이다. 인간의 원죄와 타락에 대한 그의 신념은 그를 단순한 개혁자적 의식 구조에서 탈피시켰다. 우선적으로 개혁이 필요한 것은 사회적 제도가 아니라 바로 인간 내부의 원천이었다. 무디는 중생을 통한 개인적 개혁을 설교하였다. 무디가 사회적 변혁을 무시하지는 않았지만 그의 주요 관심은 인간의 영혼이었다. 인간의 영혼 문제를 수반하지 않은 사회 구조의 변혁은 헛것이라고 믿었다. 무디는 “펌프를 하얗게 칠해 놓는다고 해서 샘물이 깨끗해지는 것은 아니다”라고 말했다.


   무디가 당시 사회 개혁을 지원하지 않은 또 하나의 이유는 사회악은 개인에게 그 근원을 두고 있으므로 개인 하나 하나를 다루어야한다는 신조 때문이었다. 그는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하나님과 함께하는 마음은 사회적 문제를 야기하지 않으며, 사회문제의 10분의 9는 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의를 추구하는 회심자들 자신에 의하여 스스로 해결되며, 나머지 10분의 1은 크리스천의 동정심으로 이루어진다”


   무디가 사회개혁자들의 노선을 멀리한 세 번째 이유는 대부분의 개혁자들이 진보주의자들이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인간의 노력과 능력이 하나님의 나라나 그에 상응하는 세속적 나라로안내할 수 있다고 믿고 있었다. 무디는 “나는 이 세상을 하나의 난파선으로 본다”라고 하면서 궁극적인 개혁은 그리스도의 재림까지 기다려야 한다고 믿었다. 그의 희망은 후천년설이나 사회적 다윈주의(Darwinism)에 대한 희망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전천년설의 재림과 이 땅 위에서의 그리스도의 통치에 기초를 둔 것이었다.


   그러나, 무디가 사회적 활동을 등한시한 것은 아니다. 도시의 사회문제를 안고 있는 글래스고에 무디는 사회개혁자가 아닌 복음 전도자로서 왔다. 그는 고아원 기금을 모금하였으며, 글래스고 복음협회를 운영하면서 복음주의와 자선사업에 전력하였다. 이를 통하여 도시의 고아원, 굶주린 자, 빈민들을 도왔다. 무디가 끼친 영향력의 하나로 영국의 기독교 노동운동을 들 수가 있다.


   무디가 비록 사회개혁자는 아니었지만 사회악의 제거에 큰 영향을 끼쳤다. 그는 단지 하나님의 말씀을 전했을 뿐이고 사람들이 응답하였을 때 무디는 그들에게 하나님을 위하여 무엇인가 큰 일을 하라고 용기를 주었을 뿐이었다. 무디는 막13:34의 “각각 사무를 맡기며”라는 구절을 자주 인용하였다. 무디의 사역은 복음을 전하는 일이었으며, 하나님은 다른 사람들을 세워서 각각 다른 종류의 봉사를 하도록 하신다는 것을 무디는 인정하고 있었다.




9. 무디와 전천년설


   1800년대 중반까지 대부분의 미국 복음주의자들의 견해는 후천년설이었다. 당시 그리스도의 지상 천년통치는 지상의 크리스찬들의 승리적 노력을 통하여 이루어진다고 믿었으며, 그리스도의 실제적 재림은 천년이 끝난 다음 실현된다고 믿었다. 이러한 미래적 관점은 당시 젊고 힘찬 미국의 낙관적 믿음에 적합하였다. 당시 미국의 되어가는 일들이 매우 낙관적이었고, 앞으로도 틀림없이 더욱 잘 되어갈 것이 확실해 보였다. 따라서 기독교는 사회악을 치유하고 결국 세상을 이길 것이라는 믿음이었다. 


   이와 대조적인 견해 즉 전천년설은 현 세대는 점점 부패할 것이라고 보았다. 세상의 부패는 오직 예수님의 재림에 의해서만 바뀔 수 있다고 믿었으며, 주님 자신이 직접 천년시대로 세대를 인도해 들어가야 한다고 믿었다. 예수의 재림이 이 천년 통지 전에 이루어지기 때문에 전천년설이라고 불리었다.


   무디는 전천년설을 확실히 옹호하였다. 그는 전천년설을 채택한 미국 최초의 유명한 복음 전도자였다. 그의 이러한 견해로 말미암아 무디의 설교에 영향을 받았던 복음 전도자들과 그 세대의 복음주의자들의 견해가 바뀌게 되었다.


   성경의 예언은 무디에게 매우 중요한 요소가 되었다. 성경에는 세 가지 주요 사실들이 예언되어 있는데 첫째 그리스도의 초림, 둘째 성령의 강림, 셋째 천국으로부터의 주님의 재림이다. 그동안 교회는 세 번째 예언을 소홀히 해 왔다. 신약성경에 예수님의 재림에 대하여 최소한 50번이상 언급하고 있다고 무디는 강조하였다.


   무디는 요한계시록 20장을 상징적으로 받아들여서는 안된다고 믿었다. 그리스도는 글자 그대로 지상에서 1000년동안 통치할 것이라고 믿었다. 재림은 두 차례에 걸쳐 이루어지는데 먼저는 천년 왕국 전에 믿은 자들의 휴거를 위하여 재림할 것이며, 다음은 천년 왕국이 끝난 다음에 마지막 심판과 종말의 완성을 위해 재림할 것이다. 여기에서 무디는 성경과 예언에 있어서 글자 그대로의 성경 해석방식을 취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무디의 전천년설은 그 세대에 대한 자신의 염세주의를 반영하고 있다. “성경 어디에서도 이 세상이 점점 더 나아질 것이며, 그리스도가 천년동안 영적인 통치를 할 것이라는 말씀을 찾아볼 수가 없습니다. 오히려 이 땅은 점점 더 부패하고 있다는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대홍수 전에 이 세상은 실패였습니다. 유대인들의 세상은 실패였습니다. 인간 자신이 직접 갈 길을 정하고 모든 것은 자신의 지혜에 맡길 때 인간들은 어디를 가든 상관없이 실패하기 마련입니다. 그리스도는 그의 교회를 구원합니다. 그는 마침내 믿는 자들을 이 세상에서 전부 데려감으로써 구원을 이룹니다”


   무디는 그리스도의 재림을 어느 순간에나 기대하고 있으면서도 그의 두 교육기관에 대한 장기적인 계획을 세움으로써 일부 사람들은 이를 모순적인 행위라고 비판하였다. 무디에게는 복음주의가 무엇보다 우선이었지만 다른 사람들을 지금 현재 돕는 행위를 배제하지 않았다.


   그는 보스턴의 트레몬트 교회에 모인 청중들을 향하여 다음과 같이 말했다. “반드시 있을 재림에 대하여 우리들의 시계가 서로 시간이 좀 틀리다고 비판하지 마십시오…우리들은 스스로 프로그램을 만들어 놓고는 앞으로 무슨 일이 닥쳐올 것이라고 자신들에게 말하고 있습니다. 그렇게 행동하는 사람은 스스로 큰 짐을 지고 다니는 것입니다. 우리는 모릅니다. 어떤 일이 닥칠 지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이런 무디의 입장은 다른 의견의 사람들과 친분을 유지하고 협조를 받는데 도움이 되지 못아고, 오히려 실망을 안겨주기도 하였다.


   무디는 “우리 주님이 다시 돌아오신다는 것을 이해한 이후에 저는 보통 때보다 세 배 정도는 더 열심히 일하고 있는 것같이 느껴집니다. 저는 이 세상을 난파선으로 보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제게 구조선을 주시면서 ‘무디야, 가서 구조할 수 있는데 까지 구조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심판을 위해 다시 오실 것이고, 이 세상을 불바다로 만드시겠지만 하나님의 자녀들은 이 세상에 속하지 않습니다. 마치 물에 떠 있는 배와 같습니다. 이 세상은 점점 더 어두워가고 있습니다. 멸망이 점점 다가오고 있습니다. 만약 여러분의 친구들이 이 난파선 안에 구원을 받지 못한 채로 있다면 그들을 구해내는 데 잠시도 지체하지 마십시오.”


   무디는 그의 설교 “우리 주님의 재림”에서 다음과 같이 강조하였다. “하나님의 심판의 나팔소리가 나의 이 설교가 끝나기 전에 울려 퍼질지도 모릅니다… 자, 그럼 이 질문을 각자에게 해 보시기 바랍니다. ‘주님이 오늘 저녁에 오신다면 과연 나는 준비가 되었는가?’




10. 무디와 성령


   어린 시절 무디는 성령을 하나님의 영향 또는 속성이라고 생갹했다. 그가 성령이 신성 중의 한 인격체라는 것을 이해하기까지는 오랜 세월이 걸렸다. 일부 크리스찬들은 성령의 역사를 회심하는 순간 인간에게 내재하는 기본적인 일 하나만 수행한다고 생각한다. 그 후에 성령은 우리 안에서 우리 자신을 조절하도록 역사한다고 믿고 있다. 또 다른 사람은 성령은 믿는 자들에게 소위 ‘이차적 축복’이라는 것을 주기 원한다고 주장한다. 무디는 이상의 두 가지 견해의 중간적 입장을 택하고 있다.


   무디에게 있어서 중생은 성령이 일차적으로 하는 역사였다. 만약 인간의 본성이 타락으로 인하여 파괴되었다면 인간은 율법의 저주에서부터 구원을 받아야 할 뿐 아니라 그의 타락한 마음도 재생되어야 한다. 이러한 재생은 성령이 인간의 옛 본성을 새로운 본성으로 창조해 낼 때 이루어진다. 중생에 대한 무디의 입장은 칼빈주의와 일치하였다.


   무디는 중생이란 성령이 일생을 두고 안에 내재하는 시발점이라고 보았다. 성령은 인간에게 새로운 품성을 준다. 그들의 신체는 살아있는 하나님의 성전이 된다. 성령은 자유를 가져오며 인간으로 하여금 옛 생활을 깨어버릴 수 있도록 능력을 준다. 성령의 지속적인 내재는 믿는 자가 성령의 구제로 밀봉되고 보호되었다는 것을 증명하고 있다. 1871년까지 성령의 역사에 대한 무디의 관점은 이 정도에 머물렀다.


   그 후 그가 시카고 화재를 위한 모금을 위하여 뉴욕에 있을 때 하나님의 사랑에 완전히 압도되어 혼자 기도하기 위하여 친구의 집을 찾아갔다. 하나님의 존재가 너무나 강렬하게 느껴져서 그 자리에서 숨이 넘어갈 것 같은 체험을 했다. 이 경험은 그의 생애에 큰 전환점을 이루었다고 무디는 말했다. 그 순간 이후로 그가 별다르게 설교를 하지 않아도 청중들의 반응은 전보다 훨씬 더 대단했다. 무디는 이 경험을 “사역을 위한 성령의 선물” “충만함” “기름부음” “감격” “사역의 능력주심” “성령의 세례”등으로 불렀다. 문제는 그 이름이 아니라 그것의 실재에 있었다.


   많은 크리스찬의 사역이 성령의 능력없이 이루어지고 있다고 무디는 확신하였다. 그는 골리앗은 힘을 가진 반면, 다윗은 능력을 가졌다고 비유하였다. 또 바리새인들은 영향력을 가진 반면 무식한 사도들은 능력을 가졌다고 말했다.


   무디는 또한 회심의 순간에 성령의 내재와 그 후에 능력으로 충만한 것의 차이점을 알게 되었다. “그리스도의 피로 깨끗하게 된 하나님의 자녀 안에 성령이 거하기는 하지만 반드시 그가 능력의 충만을 갖고 있는 것은 아니다”라고 말하였다.


   무디는 많은 크리스찬들이 하나님이 10년 전에 주신 과거의 은혜의 자비로 살고 있다고 생각하였다. 그 이후에 신선한 만나가 없었다. 너무 많은 설교가 하나님의 능력에 의지하는 것이 아니라 언어의 우아햠과 지적 능력에 의지하고 있었다.


   “샘을 파는데 두 가지 방법이 있습니다. 한 가지 방법은 물을 발견할 때까지 땅을 파서는 펌프로 물을 끌어올리는 방법이고, 다른 한 가지 방법은 낮은 지층으로 가서 수맥을 때려 물이 저절로 솟아오도록 하는 방법입니다. 나중 것이 바로 분수 우물입니다. 우리가 원하는 크리스찬들은 바로 분수 우물과 같은 사람들입니다.”


   무디의 “성령 세례”에 있어서 몇 가지 분명히 해 두어야 할 점들이 있다.
   첫째, 무디는 이러한 능력 받음을 오순절 교회에서 하는 것 같은 방언과 연결시키지 않았다.
   둘째, 무디는 이러한 능력 받음을 19세기 완벽주의자들이 주장하는 완전 성화주의와 연결시키지 않았다. 회심이 되었다고 해서 옛 성품의 뿌리가 완전히 뽑히는 것이 아니다. 다만 새 품성이 큰 능력을 갖고 바고 그 옆에 자리를 차지한다. 이 두 품성은 항상 충돌하고 있다. 자신이 바로 크리스찬의 완벽주의가 잘못이라는 것을 보여주는 증인이라고 했다.
   셋째, 무디는 이 능력 받음은 단지 두 번째 축복에서 끝난다고 보지 않았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맡기신 여러 가지 사역들을 위한 능력을 그 때 그 때 주신다고 보았다.


   그밖에 무디는 이렇게 말하였다. “많은 사람들이 일단 충만하게 되면 그 후로 항상 충만해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여러분, 우리는 마치 구멍난 물동이 같습니다. 계속 채우려면 바로 분수 밑에 항상 갖다 놓아야 합니다”




11. 하나님은 왜 무디를 쓰셨나


  (1) 무디는 하나님께 완전히 굴복하였다.
      무디의 친구 토리는 “그의 전 존재 그리고 가진 것들은 일체 하나님에게 속했다.”라고 말했다. 자기 자신을 완전히, 남겨놓지 않고, 부족한 채로, 그리고 전부 다 하나님께 바친 사람이었다. 우리들이 자신의 영역에서 무디와 같이 쓰여지려면 우리가 가진 모든 것들 그리고 우리의 존재를 모두 하나님의 손에 맡기고 하나님의 뜻대로 쓰여지게 하나님이 지시하는 곳으로 가야만 한다. 오늘 날 많은 사람들이 재질이 있고, 교육도 받고, 충분한 자격이 있음에도 철저한 굴복이 없으므로 하나님이 그 능력을 내려주지 않으시는 것이다.


  (2) 무디는 기도하는 사람이었다.
      가장 깊고 가장 의미있는 면에서 볼 때 무디는 기도하는 사람이었으므로 그의 생애에서 그토록 위대한 능력을 갖게 된 것이다. 무디는 극복하기 어려운 엄청난 규모의 재정적, 행정적, 영적 도전을 받아왔다. 하지만 무디는 하나님 안에서 불가능이란 없다고 믿었다. 그런 어려운 경우에 무디는 친구들과 학생들을 모아서 하루를 금식 기도로 보내곤 했다. 기도가 없이 선교활동을 시작하느니 한 영혼의 영혼을 위하여 하나님의 축복을 간구하는 것이 더 낫다고 무디는 확신하였다.


   (3) 무디는 깊이있고 실질적인 성경 연구가였다.
       무디가 비록 많이 배우지 못하였고, 책읽기를 즐겨하였지만 예술이나 과학을 공부하지 않았다. 하지만 “무디는 이 세상의 모든 책들을 합쳐 놓은 것보다 더욱 가치있는 유일한 책의 깊이있고 실질적인 연구자였다”라고 토리는 말하였다. 성경이야말로 위안을 주고, 회복시켜 주며, 힘을 불어넣어 주며, 또한 무장을 하게 해 주는 능력을 가지신 하나님으로부터 나온 유일한 책이다.


   (4) 무디는 겸손했다.
       무디는 자신의 생애를 하나님의 안목으로 보았다. 그의 사역은 국제적인 관심을 끌었으나 항상 친절하였고 거만하지 않았다. 명성과 매스컴은 그에게 별 영향을 주지 않았다.  그는 자기보다 더욱 훌륭한 사람들이 계속해서 나올 것이라고 믿었다. 노스필드에서 그는 항상 다른 사람들 그리고 젊은이들을 앞세웠다. 마귀는 한 사람의 용기를 꺾는데 실패하면 다른 방법으로 접근하여 더욱 비참한 결과를 초래한다. “당신은 이 시대 최대의 복음 전도자야. 당신이야말로 이전의 모든 것들을 깨끗이 쓸어버릴 인물이라구. 당신이야말로 유망한 인물이야. 당신이 바로 이 시대의 무디라고!” 만일 그 소리에 귀를 기울인다면 당신은 곧 무너지고 말 것이다.


   (5) 무디는 돈에서 해방된 사람이었다.
       소수의 복음 전도자들이 돈에 대한 집착으로 복음사역이 의심받았다. 만약 무디가 사업을 계속하였으면 부자가 되었을 것이지만 그 돈에 손대지 않았다. 이익금으로 스코필드와 시카고에 학교를 지었다. 하나님의 사역을 위하여 모금하는 것을 즐겼지만 절대로 자신을 위하여는 모으지 않았다.


   (6) 무디는 잃어버린 자들을 위한 강한 열정을 갖고 있었다.
       그는 구원을 받은 후 한 가지 결심을 했다. 24시간 동안 최소한 1사람에게 그의 영혼에 대하여 이야기하겠다는 것이었다. 이런 에피소드가 있다. 하루는 시카고에서 무디가 전혀 모르는 사람에게 다가가서 “선생님께선 크리스챤이십니까?”하고 물었다. “남의 걱정 말고 당신 일이나 돌보시오”라고 그 사람이 대답하자 무디는 “이게 바로 내 일입니다”라고 말했다. 그러자 그는 “그렇다면 당신은… 무디군요?” 모든 크리스찬은 영혼 구제자가 되어야한다고 말했다.


   (7) 무디는 위로부터 능력을 받았다.
       토리는 무디가 그의 사역에서 성령의 강한 능력을 받았기 때문에 쓰임을 받았다고 말했다. 토리는 그 능력은 “성령의 세례”라고 불렀다. 하나님은 자기 자신을 열어놓고 하나님의 능력을 구하는 자들을 사용하신다. 바로 이것이 복음 사역에 종사하는 사람에게 성공을 약속해 주는 것이다.

 

출처: 성남노회 선교부 원문보기 글쓴이: 선한이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