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회자료실/구원의 확신

[스크랩] 구원의 두 측면

에반젤(복음) 2022. 3. 1. 02:40

 구원의 두 측면

 

 

 

신약 성경의 구원은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로서 죽음과 부활을 통해 인류의 구속을 성취한 구원자로 믿음으로 얻어진다. 그 결과 위로부터 거듭난다. "너희가 거듭난 것이 썩어질 씨로 된 것이 아니요 썩지 아니할 씨로 된 것이니 하나님의 살아 있고 항상 있는 말씀으로 되었느니라"(벧전1:23)

 

 

 

아들 그리스도를 통해 아버지의 말씀이 전해진다. 아버지의 말씀은 그의 의지, 뜻과 계획 그리고 목적을 전한다. 아들이 말씀으로 이런 역할을 한다. 아들 이외 계시의 방법은 절대로 없다(14:6). 그러므로 말씀은 몇 가지 신학적 의미를 가진다.

 

 

 

첫째 '로고스' 자체로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다. 본체론적 관점에서 본 '로고스'이다.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1:1) 둘째 만물을 창조한 말씀인 그리스도이다.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1:3: 참조 히1:2) 창조 사역을 통해 드러난 말씀은 인식론적 관점에서 본 로고스이다. 셋째 그리스도는 생명의 빛인 로고스이다. "그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1:4) 경륜론적(또는 예정론적) 관점에서 본 로고스이다. 넷째 만물을 붙드는 주()로서 로고스이다. "이는 하나님의 영광의 광채시요 그 본체의 형상이시라 그의 능력의 말씀으로 만물을 붙드시며 죄를 정결케 하는 일을 하시고 높은 곳에 계신 위엄의 우편에 앉으셨느니라"(1:3) 역사적 관점에서 본 로고스이다. 그리고 다섯째 구속을 성취한 구속자로서 로고스이다. "죄를 정결케 하는 일을 하시고 높은 곳에 계신 위엄의 우편에 앉으셨느니라" 구속사적 관점에서 본 로고스이다.

 

 

 

신자들을 중생시키는 말씀은 다섯째 로고스에 해당한다. 사도 바울은 이 로고스를 '살려주는 영'인 '부활주 예수 그리스도'로 소개한다(고전15:45절). 구속사적 로고스는 앞서 설명한 로고스의 다양한 면모들 덕분에 가능하다. 죄인을 중생시킨 말씀의 놀라운 면모들은 구속이나 구원이 인간의 능력을 벗어난 초자연적 사역에 속한다고 주장한다. 다시 말해 아들 그리스도의 성육신, 지상 삶, 공생애, 죽음과 부활, 성령 강림과 그의 재림은 획기적인 구속사적 사건이라고 증언한다.

 

 

 

그러므로 구원이나 구속을 인간의 주관적 관점에서만 생각하지 말라! 구원은 말씀인 그리스도를 통해 계시된 하나님의 의지, , 계획과 목적을 알려주는 하나님의 작정 또는 경륜이라는 객관적 진리와 긴밀히 관계되기 때문이다. 성경의 구원론은 주관적이 아니라 객관적 관점에서 더 묵상되어야 한다. 객관성이 없는 주관성은 의미를 잃는다.

 

 

 

신약에서 주로 'from'이란 관점에서 구속과 구원이 주로 해석된다. 그러나 from(해방) into(소속) towards(목표, 방향)를 배제시킬 수 없다. 도착이 없는 출발은 논리적으로 불가능하다. 신약 성경은 방향, 소속과 도착점을 하나님 나라로 설명한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3:3)

 

 

 

그럼 구약 성경은 신약의 구원론을 어떻게 설명할까? 출애굽 사건은 종 되었던 애굽에서(from) 해방(구속)되는 것뿐만 아니라 이스라엘이 하나님 나라로 출생했음을 뜻했다(구원과 중생). 이것만이 전부가 아니다. 이스라엘은 광야를 거쳐(through) 가나안으로 들어갈 것이다(into). 그 목적은 가나안을 기업으로 상속 받기 위함이다. 그러므로 출애굽 사건이 시작되자마자 이스라엘(하나님 나라)은 하나님의 백성으로 기업 상속을 위해(목표) 가나안으로 향했다(방향). 이렇게 구약 성경은 보이는 방식으로 구원론을 종합적으로 잘 설명한다.

 

 

 

그러나 신약 성경은 예수님의 단독적인 구속 사역을 소개하며 구원론이 설명된다. 그리고 이 당시 눈에 보이는 하나님 나라는 지상에서 오래 전 이미 사라졌다. 그러므로 신약 성경은 예수님의 구속 사역과 그 결과인 구원을 역사적 방법이 아닌 논리적 방법으로 설명하다. 신약 성경이 마치 역사와 무관하게 논리적으로 구원론을 증언하는 듯하다.

 

 

 

이를 보완하도록 구약 성경이 기록된다. 신약과 구약은 기록 방식에서 차이가 있어도 내용에선 차이가 없다. 구약 시대 선민은 특정한 지역인 가나안에서 살았다. 그곳을 벗어나면 안된다. 그러나 신약 시대 신자는 이런 제한없이 산다. 살아야 하는 영역이 지정학적 의미에서 영적 의미로 바뀐다. 이와 같이 구약 성경은 눈에 보이는 방식으로 즉 역사적으로 하나님 나라를 이해하도록 돕는다.

구약 성경의 이런 장점은 논리적으로 설명된 예수님의 구속 사역을 역사적으로 해석하도록 돕는다. 신약의 구원론은 위에서 이미 설명한 구약 성경의 구원론적 의미들을 모두 담기 때문이다.

 

 

 

첫째 구속(출애굽 사건)의 결과 죄와 사망(애굽의 노예 상태)의 굴레로부터 벗어나 완전히 하나님의 백성(새로운 피조물)이 된다. 둘째 구원 받은 성도(이스라엘)는 하나님과 언약을 체결한다(24). 이 결과 언약 백성이 된다. 구원은 곧 율법을 지킴으로 언약을 준수해야 할 의무를 부여한다. 율법은 하나님의 백성답게 살도록 돕기 때문이다. 셋째 이런 훈련을 위해 하나님 나라의 시민(칭의)은 죽음의 땅인 광야에 한 동안 처하며 애굽의 삶과 사고 방식을 버리고 하나님 나라의 것을 새롭게 습득해야 한다(성화). 넷째 이런 모든 훈련과 노력은 가나안에 하나님 나라를 세우기 위함이다. 그 때 비로소 천상에 있는 가나안 즉 천국을 기업으로 상속받을 수 있다(영화).

 

 

 

구약이 설명하는 신약의 구속과 구원은 죽어서 단순히 천국에 들어가는 것을 보장해 준다는 정도가 아니다(구원의 확신). 좀 더 심각한 의미를 갖는다. 하나님 나라의 시민으로서 세상 방식을 버리고 하나님 나라 방식을 새롭게 습득하며 세상 삶을 살아야 한다(보내는 목회). 성도는 이 세상에 하나님 나라를 세우고 확장시키기 위해 구원의 은총으로 하나님의 부름을 받는다(모으는 목회).

 

 

 

자연스럽게 신약 시대 구원 받은 신자에게 이 세상은 삼중 모습을 띤다. 성도가 사는 이 세상은 애굽, 광야와 가나안과 같다. 애굽은 성도가 속히 벗어나야 할 세상의 문화와 문명이다. 광야는 이 세상이란 성도가 살아가면서 세상 것을 버리고 하나님 나라의 것을 습득해야 할 훈련 장소이다. 그리고 가나안은 성도가 지상 삶을 살면서 인류 사회 안에 하나님 나라를 세우기 위해 가치관 면에서 영적 투쟁을 치러야 할 전투 장소이다.

 

 

 

성경의 구원론은 상반된 이중적 문화관을 가르친다. 배타적(금욕적) 문화관과 참여적 문화관. 성도는 한편 이 세상 문화를 배척하면서도 다른 한편 이 세상 문화에 참여해야 한다. 하나님의 통치를 거부하는 인간 나라를 세우려는 문화를 배척해야 한다. 그러나 하나님 나라를 세우도록 돕는 문화는 적극적으로 전하고 세워야 한다. 당연히 신자의 삶도 이중적 - 배타적 그리고 참여적 - 이다.

 

 

 

이것은 모두 성경이 가르치는 세계관 때문이다. 성경은 이 세상을 비관적으로 보면서도 낙관적으로 본다. 죄악 세상이란 점에서 이 세상은 지극히 비관적이며 부정적이다. 그러나 하나님 나라를 세워야 할 장소란 점에서 낙관적이며 긍정적이다. 이런 가르침들이 구약 성경에선 애굽, 광야와 가나안이란 장소들로 잘 설명된다.

 

 

 

신약의 구원론이 구약 성경의 관점에서 이해된다면 이신칭의가 전부다라는 주장은 성경적이지 않다. 성화만 주장해도 곤란하다. 칭의가 출발점이라면 성화는 과정이며 영화는 도착 지점이다. 과정이 무시하는 칭의는 율법폐기론이다. 번영신학도 과정을 생략하고 칭의와 영화의 영광스런 면만 가르친다.

그러나 영화란 목표와 방향을 잃지 않을 때 칭의와 성화로 구성된 신앙 삶은 건전해지고 조화와 균형을 잃지 않으며 성숙해진다구원을 단순히 천국행 티켓 확보로만 이해한다면 교회와 신자는 현실 도피적 신앙 삶을 산다. 이를 값싼 구원 또는 복음이라고 부른다. 

그러나 신자는 이 세상의 빛과 소금이다. 이런 설명은 단순히 영적으로만 해석될 수 없다. 사화과학적 의미를 포함하기 때문이다. 즉 구원을 영적만 아니라 윤리적으로도 설명할 수 있어야 한다이 때 신자들은 신앙 삶을 어떻게 구체적으로 살아야 하는지를 배우며 신자 삶은 더욱 적극성을 띤다.

구원을 주관적 관점에서만 설명하지 말라! 하나님 나라와 연결시켜 구원의 의미를 더욱 확장시켜라! 이 때 교회와 신자는 제 사명 - 하나님 나라의 건설과 확장 - 을 잘 수행할 수 있다. 이것이 교회와 성도가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목표이다. 교회론 중심의 구원론은 성경적이 아니다. 교회는 하나님 나라가 아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