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림절 자료/장년부 설교

주일설교.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아니하면 (신명기 28장 1-14절)

에반젤(복음) 2021. 10. 9. 10:25


주일설교.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아니하면 (신명기 28장 1-14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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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요즘 읽은 책 중에 『선에 갇힌 인간, 선 밖의 예수』(스캇 솔즈, 정성묵, 두란노서원, 2020)란 책이 있습니다. 제목에서 느껴지시는 것처럼, 선을 긋는 것과 같이 이 세상의 모든 것을 이분법적으로 선을 그어서 자꾸만 나누려고 한다는 내용입니다.


정치는 물론이고, 교회 밖이나, 교회 안이나 온통 내 편/네 편, 이 편/저 편, 이 쪽/저 쪽, 계속 선을 그어 대는데, 결국은 예수님에게까지 선을 그어 댑니다. 나만(내 교회만, 내 믿음만) 진짜로 예수님 편/ 너는(네 교회는, 네 믿음은) 가짜로 예수님 편, 이렇게 선을 그으면 예수님 안에서 하나 되기는 커녕, 원수지간이 될 것입니다.


작가가 말하기를, 예수님이 우리 편이냐/남의 편이냐 가지고 선을 그어 대지 말고, 내가 먼저(우리가, 교회가) 정말 예수님 편인지 먼저 깊이 생각하라, 좍좍 그어놓은 선에 예수님을 갇아 두지 말고, 선을 다 없애신 예수님을 따라서, 이 땅에서 평등과 정의가 지배하는 세상을 지향하라는 메시지입니다.


선 긋기의 명수는 아무래도 정치인과, 정치 논쟁이 아닐까 싶습니다. 요즘 뉴스를 보면 선거철 이라는 것이 실감이 납니다. 국가를 이끌어갈 지도자를 뽑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이슈이고, 국민의 한 사람으로서 참정권을 행사하는 것 또한 중요한 권리입니다. 저도 과거에는 정치 기사에 크게 관심을 두었던 시절이 있었고, 현재도 관심을 가지고 지켜보는 분야입니다. 다른점이 있다면, 과거에는 관심과 논쟁을 통한 적극적인 참여자였고, 현재에는 뉴스기사만 검색해보는 원거리 참여자로 만족하고 있습니다.


어느 자리에 가든지 정치 이야기가 과열되면 그 자리가 매우 불편해 지고 서로의 관계도 틀어지기 마련입니다. 제가 만나는 목사님 모임의 이름은 이른바, ‘비 정치 모임’입니다. 현실정치든, 교회 정치든, 정치에 관한 이야기는 일절 하지 않는 것이 원칙입니다. 제가 들어가 있는 모든 카톡 그룹방도 정치 이야기는 절대 사절이고 금지 사항입니다. 이런 저만의 원칙은 계속 지켜나갈 생각입니다.


우리는 선에 갇힌 인간들이 아닙니다. 죄와 사망의 선을 다 없애 주신 예수님 안에서 사랑으로 한 몸으로, 한 지체로 연결되어 하나가 되었습니다. 사랑의 공동체인 우리 교회 안에서 내 스스로 그어 놓은 선이 있다면 빨리 없애시고, 지금도 그어 가는 선이 있다면, 멈추시고, 지우십시오. 우리 교회와 모든 성도가 세상의 여러 논리 속에 매몰되어 가지 않고, 오직 복음의 능력으로 새롭게 변화되어가는, 아름다운 천국 백성의 모습으로 살아가실 수 있기를 축복합니다.


제가 선 이야기를 한 것은, 오늘 설교의 제목이 “좌로나 우로나 치우지치 아니하면” 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예수님, 성령님) 중심으로 살아가는 사람은, 선에 갇히지도 않고, 어느 쪽으로도 치우치지 않고 균형을 잘 이룰 수 있습니다. 오늘 말씀을 들을 실 때, 죄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않는 일체의 비결을 깨닫는 은혜가 임하시기를 바랍니다.


신명기 28장은 우리가 잘 알고 잇는 것처럼, 복과 저주에 대한 말씀입니다.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면 복을 받고, 불순종하면 저주를 받는 다는 내용인데, 전체 68장의 내용 중에 오늘 본문인 14절까지가 순종하여 복을 받는 다는 내용이고, 나머지가 불순종하면 저주를 받는 다는 내용입니다. 복과 저주의 내용이 2:8의 비율입니다.


저주에 대한 내용이 압도적으로 많고, 저주의 내용도 아주 구체적이면서 소름이 끼칠정도의 두려운 말씀들로 가득합니다. 제가 반복해서 많이 말씀드렸지만, 우리가 하나님을 믿으면서 복 받는 것을 참 좋아 하는데, “나는 복 안 받아도 괜찮아, 그냥 안 받고 말래”라고 쉽게 생각하면 큰 오산이라는 겁니다.


복 안 받아도 괜찮다는 안일한 생각은, 곧 하나님의 말씀을 불순종하겠다는 것이고, 이것은 복을 안 받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저주의 대상이 되는 겁니다. 우리는 순종이냐, 불순종이냐, 복이냐 저주냐, 둘 중 하나를 반드시 선택해야 합니다. 이렇게 사는 것이 하나님의 자녀가 살아가는 방법이기 때문에 어쩔수 없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믿는 한,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살아가는 한, 이 선택은 우리가 일평생 계속해야 되는 의무이자 책임입니다.


신앙생활이 계속되고 성경을 읽어 가면 갈수록 제가 깊게 느끼는 점이 있습니다. 우리가 살아가면서 제대로 하나님 믿는 방법은, 혼나는 이야기, 꾸짖는 이야기, 실패한 이야기, 무서운 죄와 벌의 이야기, 이런 스토리를 자주 접하면 좋은 자극제가 됩니다. 자극을 받으면, 하나님 이라는 큰 거울 앞에서 내 자신의 초라함을 볼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됩니다. 여러분들이 신명기 28장의 저주 부분 같은 내용을 정독해서 잘 읽고 반복해서 묵상하시면, 반드시 돌이키는 길로, 회복하는 길로 인도하여 주실 줄을 믿습니다. 스스로 해 보시면, 왜 은혜로 인도함 받는지 성령께서 깨닫게 해 주실 겁니다.


오늘 말씀도 분명히 축복에 관한 말씀인데, 무서운 저주 이야기가 주는 중압감은 본문 말씀 이전부터 크게 작용하고 있습니다. 오늘 말씀이 있기전에 신명기 27장에는 그리심산과 에발산에서의 축복과 저주 이야기가 나옵니다. 모세는 12개 지파를 나누어 그리심산에 6개 지파(시므온과 레위와 유다와 잇사갈과 요셉과 베냐민)를 서게 하고 거기서 축복을 선포 하였고, 에발산에 6개 지파(르우벤과 갓과 아셀과 스불론과 단과 납달리)를 서게 하고 거기서 저주를 선포했습니다.


그런데, 축복의 내용은 나오지 않고, 온통 저주의 내용만 나옵니다. 그리고 레위 사람들이 큰 소리로 저주의 내용을 한 가지씩 선포하면, 모든 백성은 그 내용에 화답하면서 “아멘”으로 복창하며 응답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큰 소리를 내어 아멘으로 합창하면서 저주받을 만한 내용에 해당하는 배반적인 행위들은 일체 하지 않겠다는 각오를 다졌습니다.


구약에서만 축복과 저주의 행위들이 마치 동전의 양면처럼 설명된 것이 아니라, 신약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대표적인 내용이 마태복음 25장에 나오는 “양과 염소”비유입니다. 양은 구원 받을 사람들, 염소는 구원 받지 못할 사람들을 뜻하는데, 임금(예수님)이 오실 때(재림), 양은 오른쪽, 염소는 왼편에 선다고 합니다.


양은 복 받은 사람들이며, 창세전부터 예비된 하나님의 나라를 상속 받을 것이고, 염소는 저주를 받은 자들이고 나(임금이신 예수)를 떠나 마귀와 그 사자들을 위하여 예비된 영원한 불에 들어갈 것이라고 예언 했습니다. 복 받은 자들은 영생에, 저주 받은 자들은 영벌에 들어간다고 말씀 합니다.


이 비유를 읽으면, 구약의 신명기 27, 28장을 읽는 것보다 훨씬 더 무섭습니다. 오늘 집에 가셔서 마태복음 25장을 정독하며 묵상해 보십시오. 공포영화보다 더 무서우실 겁니다. 저주를 제대로 알아야 하나님을 진짜로 두려워 하게 되고, 하나님을 진짜로 두려워 하는 사람이 정말 복있는 사람입니다.
이렇게 복과 저주는 늘 함께 공존합니다. 왜 그럴까요? 하나님과 함께 하면 복 받는 인생, 하나님을 떠나면 저주 받은 인생이 된다는 것을 잠시 잠깐이라도 잊지 말고, 항상 경각심을 가지고, 늘 깨어 있으라는 가르침을 주기 위함입니다.


말씀을 가르치는 지도자가, “믿으면 복 받는다, 무조건 복 주신다, 구하면 다 주신다”라고만 치우치게 가르치면, 성도들이 올바른 믿음 생활 하는 것을 오히려 방해하는 결과가 나타납니다. 성경의 가르침 대로, 복과 저주를 함께 놓고, 무엇을 선택하며 살것인가를 똑바로 볼 수 있게 해야 합니다. 비율 대로라면 저주의 이야기를 80% 해야 합니다. 그래야만 저주의 길에서 계속 돌이켜 복 받는 자리로 나아갈 수 있습니다.


복이라는 것이 결국은 구원 받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구원 받는 복은 예수님을 놓치지 않고 일평생 붙잡고 살아가다보면 이루어지는 일입니다. 주님이 나를 붙잡아 주시도록 계속 요청하며 사는 것입니다. 이것이 안 되면 구원의 복이 주어질리 없습니다. 구약과 신약에서의 복과 저주는 정확히 구원과 일치하며, 일관되게 우리에게 하나의 방향만을 제시해 주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의 제목을 보면, “순종하여 받는 복” 이라고 되어 있고, 아래 단락에는 “불순종하여 받는 저주”라고 되어있습니다. 구약에서는 순종과 불순종이 복과 저주를 받는 방법이었습니다. 광야 40년 역사를 보면, 노예에서 해방시켜 주시고, 홍해 길을 건너게 하시고, 만나와 메추라기로 굶지 않게 하시고, 불기둥과 구름기둥으로 인도해 주시고, 반석에 물이 나오게 하시고, 이루 헤아릴 수 없는 은혜를 주셨지만, 이스라엘 백성들은 감사보다는 불평과 원망을 쏟아냈습니다. 심지어는 지도자에게 반역하고, 하나님을 배반하기까지 했습니다.


오죽하면 하나님께서 직접 택한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해서 “목이 곧고 완악한 백성들아”라고 하셨겠습니까? 제가 기억하기로, 옛날 우리 어머니들이 아이들 교육하다가 정말 화가나시면, “너 누구 뱃속에서 나왔길래 그 모양이냐, 너 누구 닮아서 왕고집 소고집이냐”이런 말씀들을 많이 하셨습니다. 해도 해도 너무 하다 싶을 정도로 정말 징글징글 하게 말 안 듣고 순종하지 않는 백성이 이스라엘 백성이었습니다.


그러니 이런 상태의 백성에게 복에 대한 이야기만 했다고 가정해 보십시오. 맨날, 더 안주냐, 더 좋은 것 없냐, 왜 이번에는 이것 뿐이냐, 끊임없는 불평을 하면서 도무지 만족함이라고는 없었을 겁니다. 이런 상황이기 때문에, 하나님은 강력한 저주의 카드를 꺼내신 것입니다.


“복?, 그래 복은 주마, 얼마든지 주마, 단, 순종하면 주겠다, 그러나, 만약 내 말에 불순종 하면, 너희들에게 상상할 수 없는 저주가 실행 될 것인다. 불순종하면, 주었던 복도 다 빼앗길 것이다. 나는 분명히 말했고, 반드시 내가 말 한 그대로 할 것이니, 절대로 내 말을 잊지 말아라” 이렇게 선포하셨습니다.


선택은 우리의 몫입니다. 하나님은 복 주시는 분입니다. 복을 받지 못하고 오히려 저주를 받는 것은 내 선택이 어긋낫기 때문입니다. 이제 우리는 너무나도 선명한 복과 저주의 상황을 알았으니, 알고도 잘못 선택하는 어리석은 삶을 살아가서는 안 됩니다.


잠시 자깐 흔들리고 오판하더라도, 다시 복 받는 선택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그렇게 하도록 인도하시고, 지혜주시고, 능력으로 인도해 주시고 계십니다. 순종이 제사보다 낫습니다. 무조건 순종하면 됩니다.


본문 1, 2절을 읽어드립니다. “1. 네가 네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을 삼가 듣고 내가 오늘 네게 명령하는 그의 모든 명령을 지켜 행하면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를 세계 모든 민족 위에 뛰어나게 하실 것이라 2. 네가 네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을 청종하면 이 모든 복이 네게 임하며 네게 이르리니” 아멘.


지켜 행하면 --> 뛰어나게 하실 것이라, 말씀을 청종하면 --> 모든 복이 네게 임하며 이를 것이다. 모세 오경에서 무수히 반복되는 말씀입니다. 순종하면 전부 다 주시고, 불순종하면 전부 다 거두어 가시겠다는 것이 성경이 주는 복의 관계도입니다. 내가 복 받지 못하고 살아가는 것은, 운이 없어서도 아니고, 아직 때가 아니어서도 아니고, 돈이 부족해서도 아니고, 능력이 부족해서도 아닙니다. 순종의 관계가 끊어져 있기 때문입니다.


자, 우리는 순종하면 복이라는 사실을 이미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왜 순종하는 것이 어렵고 힘들다고 느껴질까요? 그것은 첫 단추가 잘못 끼워져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첫 단추? 무슨 말씀일까요? 순종하기 이전에, 듣는 습관이 없기 때문입니다.


2절에 “청종”이라는 단어를 보시면, ‘청(聽)’, 듣는다, ‘종(從)’, 따르며 나아간다, 듣기가 먼저이고, 따르기가 나중입니다. 하나님이 뭐라고 말씀하시는지 들어야 순종하든지 말든지 할 것 아닙니까? 순종하려면, 반드시, 절대로, 하나님이 나에게 순종을 요구하시는 것이 무엇인지 먼저 들으려는 자세가 있어야 합니다. 말씀 하실 때까지 집중하며 기다려야 합니다.


말씀을 들을 수만 있다면 순종은 그리 어렵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말씀이 들린다는 것 자체가 이미 하나님과 성령으로 통하여 있는 상태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말씀에 순종하려는 자에게 앞길을 열어 주시고, 모든 일에 순종 할 수 있도록 충분한 지혜와 능력도 함께 내려 주시기 때문입니다.


청종, 듣고 잘 따랐을 때의 결과가 3절에서부터 나오는데, 3~6절은 그냥 읽기만 해도 행복해지는 말씀입니다. 내가 청종의 주인공이 되어서 이런 복을 받는 다는 행복한 생각을 하시면서, 3~6절을 함께 큰 소리로 읽겠습니다.


“3. 성읍에서도 복을 받고 들에서도 복을 받을 것이며 4. 네 몸의 자녀와 네 토지의 소산과 네 짐승의 새끼와 소와 양의 새끼가 복을 받을 것이며 5. 네 광주리와 떡 반죽 그릇이 복을 받을 것이며 6. 네가 들어와도 복을 받고 나가도 복을 받을 것이니라” 아멘.


저는 이 말씀을 읽을 때마다 다 은혜가 되지만 특히 “들어와도 복을 받고 나가도 복을 받을 것이다”라는 말씀이 참으로 기가 막힌 은혜의 말씀이라는 것을 강하게 느낍니다. 어디를 들어가고 어디를 나간다는 말씀일까요? 일차적으로는 거주하는 집을 의미할 것이고, 성읍이나, 성전일 수도 있습니다.


좀 더 넒은 의미로는, 내가 하는 모든 일의 시작과 끝, 내 인생의 모든 시간의 삶의 과정과 종착지에 이르기 까지 모든 일에 복이 임한다는 뜻입니다. 그냥 한 마디로, 하나님이 전부 다 책임져 주시고, 완벽한 보장을 해 주시겠다는 선언 이십니다. 얼마나 감사하고 기쁜 복된 말씀인지, 읽기만 해도 그냥 모든 복을 다 받은 것 같이 마음이 평안해 집니다.


7절에서 13절 앞 부분까지는 순종하면 받게 되는 복의 내용이 계속 나옵니다.
7절에서는, 적군이 한길로 쳐 들어왔다 일곱 길로 도망가게 되는 복,
8절에서는, 창고와 손으로 하는 모든 일과 땅에 주시는 복,
9절에서는, 명령을 지켜 행하는 거룩한 백성(성민)이 되게 해 주신 복,
10절에서는, 여호와의 이름이 항상 함께 하는 복,
11절에서는, 몸의 소생과 가축의 새끼와 토지의 소산을 많게 해 주시는 복,
12절에서는, 많은 민족에게 꾸어 줄지라도, 꾸지 아니하는 복,
13절 앞 부분에서는, 머리가 되고 꼬리가 되지 않게 하시며 위에만 있고 아래에 있지 않게 하시는 복입니다.


정말 엄청납니다. 이 복을 다 주시겠다는 겁니다. 누구에게요? 하나님의 말씀을 잘 듣고, 말씀하신 대로, 귀에 들린대로 그대로 순종하는 사람에게 주십니다. 여러분들이 하나님을 진정 믿으신다면, 이 복이 나에게 주실 약속임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이 복이 곧 내가 받아 누리며 살아갈 복임을 소망하시기 바립니다. 하나님은 신실하시기 때문에, 약속 하신대로 이 복을 반드시 다 주실 것이고, 우리는 그 복의 주인공으로 살아갈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 엄청난 복 주심의 말씀에 꼬리표가 달려 있습니다. 13절 뒷 부분에서 14절 까지의 말씀입니다. “오직 너는 내가 오늘 네게 명령하는 네 하나님 여호와의 명령을 듣고 지켜 행하며 14. 내가 오늘 너희에게 명령하는 그 말씀을 떠나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아니하고 다른 신을 따라 섬기지 아니하면 이와 같으리라” 아멘.


듣고 지켜 행하면 이라는 말씀이 또 나옵니다. 14절에 “그 말씀을 떠나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아니하고” 라고 했습니다. 그 말씀을 떠난다는 것은, 말씀을 듣고 그 말씀을 간직하고 세상속으로 떠난다, 들어간다는 뜻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아멘”으로 말씀을 받았으면, 이제는 세상에 나아가서 잘 지켜 가야 하는데, 그 행동 지침이 오늘 설교 제목인 “좌로나 우로니 치우치지 아니하면”입니다.


좌와 우라고 하시니, 영생에 들어갈 양은 우측에, 영벌에 들어갈 염소는 좌측에 세우셨다는 마태복음 25장의 말씀이 다시 생각이 납니다. 그럼 여기서 우측으로 기울면 좋은 것이고, 좌측으로 기울면 나쁜 것일까요? 둘다 아닙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말씀은 곧 진리인데, 진리를 따른 다는 것은 좌나 우로 언제 기울지 모르는 중립을 지켜가는 불안한 상황을 연출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한길, 오직 바른 길, 하나님을 향한 외길로만 나아가라는 뜻입니다. 이쪽인지 저쪽인지, 이 색인지 저 색인지, 회색분자처럼 왔다갔다 하지 말고, 오직 말씀의 길, 순종의 길로만 가라는 확고한 명령입니다.


대개, 복을 받지 못하거나 풍성하게 누리지 못하는 사람들을 보면, 하나님을 배반하여서라기 보다는, 여러 갈래길에 서서 애매한 입장을 취하기 때문입니다. 처음에 말씀 드린 것처럼, 선에 갇힌 인간처럼, 이리저리 꼼수를 부리며 자신이 선택할 수 있는 다양한 길을 계속 만들어 가기 때문입니다. 다 지우고, 다 없애고, 오직 하나님과 나 사이에 말씀으로 연결된 한 선만 남겨 놓아야 합니다. 그래야만 넉넉히 순종의 길, 복의 길로 거침없이 나아갈 수 있습니다.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아니하면”, 오늘 설교 제목에 무슨 뜻이라고요? 하나님만 선택할 수 있는 외 길, 하나님과 연결 된 한 선 만 남겨 놓으라는 겁니다. 꼭 기억하십시오. 만약 계속해서 좌, 우로 치우치며 이리 흔들 저리 흔들 거리게 되면 어떻게 될까요? 14절 마지막 부분처럼 다른 신을 따라가는 선택을 하게 됩니다.


“다른 신”은 하나님 이외의 모든 것을 말합니다. 특별히 음란함, 교만함, 맘몬(재물 신)이 가장 대표적인 다른 신에 속합니다.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면, 우리는 다른 신들의 공격에 속수 무책으로 당하게 되고, 복을 받으며 살아가야 할 인생인데, 저주에 빠진 허망한 인생길을 걸어가게 됩니다.


우리는 다 연약하기 짝이 없어서,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 보다, 눈에 잘 보이고 너무나 좋아 보이는 다른 신을 선택해서, 좌측으로 확 기울어지고, 우측으로 확 기울어지는 어리석은 선택을 하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반드시 바로 잡고, 기울어진 우리 몸과 마음과 영혼을 하나님 선에, 말씀과 순종의 선에 맞추고 고정시켜야 합니다.


여러분, 우리 하나님은 참 좋으신 분입니. 더 주시고, 더 기쁘게 해 주실 슈 있는 분입니다. 제발, 내가 가지고 있는 아주 작은 것에 만족하지 마시고, 내가 상상하지 못하는 신령한 것들을 무한하게 공급해 주시는, 좋으신 우리 하나님의 복을 구하십시오.


듣고, 순종하고, 치우치지 아니하면, 이 좋은 복이 다 내 것이 됩니다. 어려울 것 같지만, 어렵지 않습니다. 할 수 있습니다. 하셔야합니다. 오늘 이후부터 결단 하신다면, 앞으로 우리의 인생은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아니하면”, 오늘 설교 제목처럼, 하나님이 예비 해 놓으신 복된 길, 단 하나의 길에 서게 될 줄로 믿습니다.


00교회 모든 성도가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않는 굳건한 믿음의 부자가 되셔서, 하늘의 복, 신령한 복의 은혜를 충만하게 받고, 누리고, 나누며 살아가는 하나님의 귀하고 복된 자녀들이 되시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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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 아버지! 우리 모두를 말씀에 순종하는 굳센 믿음으로 붙들어 주셔서, 모든 일에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아니하도록 선택하여, 복에 복을 누리는 은혜의 주인공들이 되게 하여 주옵소서. 순종하여 복 받는 길로 우리를 인도하여 주시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