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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신,구약의 통일성과 차이점 기독교 강요를 중심으로

에반젤(복음) 2021. 8. 27. 13:15


신,구약의 통일성과 차이점 기독교 강요를 중심으로



 김충섭(합신19회)



들어가며
신구약의 통일성의 문제는 언약의 통일성과 관련하여 이미 마르시온때부터 구체적인 역사적 논쟁으로 드러난다. 본 발제에서는 역사적 고찰이나 현대적 상황등은 살피지 않고, 바로 신구약의 통일성과 차이점에 대하여 칼빈의 기독교 강요를 중심으로 그 내용을 요약, 정리하는 것으로 만족한다. 차후에 미흡한 점은 보완하기로 하고 김영규목사님의 글로 시작하고저 한다.

'칼빈이 신,구약의 통일성을 말할 때, 단순히 기독론적인 통일성을 의미하지 않는다. 그것은 삼위일체 하나님의 역사의 통일성이요 구원의 길과 서정에까지의 통일성을 의미한다. 칼빈의 증거 전체를 볼 때, 터툴리안의 삼위일체의 통일적 경륜과 어거스틴의 삼위일체의 경륜적 통일성이 칼빈의 언약의 통일성뒤에 깔려져 있음을 볼 수 있다. 이런 칼빈의 실체의 통일성이 정통 개혁주의 안에서 계속 되었고 웨스트 민스터 신앙고백서에서 현저히 고백되고 있다.'


펼치며
1) 신,구약의 통일성
칼빈은 7,8,9장에서 율법에 대하여 자세히 설명을 한 후, 반대자들에게 응수하고 자신의 견해를 정의하기 위하여 다음과 같이 전개한다. '하나님께서는 자기 백성으로 택하여 자녀로 삼은 모든 사람들에게 율법과 같은 교리의 끈에 의해서 모두 하나님과 계약을 맺게 하셨다... 족장들은 같은 중보자의 은혜로 말미암아 우리와 같은 기업에 참여하였고 또 공통적인 구원을 대망하기는 하였지만 이 교제에 있어서 그들과 우리의 형편이 어떻게 차이점이 있는가 하는 것이다... 이와 같이 전염병같은 오류로부터 경건한 자녀들의 마음이 빠져 들어가지 않도록 하기 위하여 동시에 구약과 신약사이의 차이점을 말할 때 즉각적으로 일어나는 모든 난문제들을 제거하기 위하여 우리들은 주님께서 그리스도의 강림 전에 옛날 이스라엘 백성들과 맺은 언약과 그가 강림한 후 우리와 맺은 언약사이의 유사점과 차이점들을 보아야 하겠다.'

(1) 언약의 통일성
모든 구약 족장들과 맺은 언약은 사실상 하나로 동일한 것이다. 다만 관장하는 양식에 있어서는 다르다. 구약과 신약이 합의하는 세가지는 다음과 같다. ① 불멸의 생에 대한 소망 - 분명히 복음은 인간들의 심정이 현세 생활에만 기쁨을 갖는 것에 국한시키지 않고 영생 불멸의 소망까지 높이 올려주는 것이요, 또 지상의 쾌락에만 마음을 묶어 두지를 않고 하늘 나라에 간직되어 있는 소망을 고해주는 것으로써 그곳까지 마음을 옮겨주는 것이다(엡1:13-14, 골1:4-5, 살후2:14). 따라서 그것은 "구원의 말씀"이요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권능"(롬1:16)이요, "천국"(마3:2, 13장)이라고 부른 것이다. ② 값없이 주시는 구원 및 그리스도의 중보 - 구약은 하나님의 값없는 긍휼위에 제정되었고 그리스도의 중보를 통하여 확정되었다. 그 이유는 복음의 전파 역시 "죄인들은 하나님 아버지로서의 자비로 인하여 그들이 공로없이 의롭다함을 얻은것"외에 다른 아무것도 아니며 그 전체 요점은 그리스도 안에 포함되어 있기 때문이다(요8:56, 히13:8 참조). 그러므로 구약의 목적은 그리스도와 영원의 생명에 있었다. ③ 성례전 의의의 공통점 - 이스라엘 백성들은 언약의 은혜에 있어서 뿐만 아니라 성례전의 의의에 있어서까지 우리들과 동등하다. 그들은 우리와 "같은 상징"(즉 성례전)을 가졌다. 즉 그들은 홍해를 건널 때 세례를 받았고(출14:21이하) "그들은 다 같은 신령한 식물을 먹으며 다 같은 신령한 음료를 마셨다"(고전10:3-4). 물론 여기서 먹고 마신다는 말은 바로 그리스도를 가리키는 것이라고 해석한다.

(2) 영생의 소망
구약의 족장들은 말씀과 영생을 받았다. 하나님의 말씀은 "썩지 아니할 씨로 항상 있는 것"(벧전1:23)이며, 언제나 참된 말이다(벧전1:24, 사40:6). 그러한 하나님의 말씀의 비취심을 받고 아담, 아벨, 노아, 아브라함 및 기타족장들은 하나님께 결합이 되었으므로 그들이 하나님의 영생의 나라로 들어갔다고 자신있게 말할 수 있다.
또한 구약의 성도들도 계약의 형식에 있어서 공통적으로 '나는 너희 하나님이 되고 너희는 나의 백성이 될 것이라'(레26:12, 시33:12, 합1:12, 사33:22, 신33:29, 출6:7)는 말로 신령적 생명에 관한 충분한 약속을 가지고 있었음을 통하여 그들도 영생의 소망에 동참하였음을 알 수 있다.

구약에 있어서도 죽음을 능가하는 은총을 볼 수 있는데, 이는 창17:7의 약속과 출20:6의 '수천대까지의 은혜', 출3:6, 마22:23-32, 눅20:27-38의 '산자의 하나님'되심과 '모든 성도가 그 수중에 있느니라'(신33:3)는 말씀을 통하여, 죽음과 생명의 심판자인 분을 후견인과 감독자 보호자롤 삼은 성도들은 죽음으로 멸절되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구약성도들(족장들)도 지상축복을 받은 것이 아님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신앙을 통하여 밝히 알 수 있는데, 그들도 영생을 구했다(히11:9-10, 13-16). 주님께서 그들에게 소유하리라고 약속하신 것은 휠씬 먼 곳 즉, 하늘이었다는 것이 분명하다. 그러므로, 가나안 땅에서는 무덤 외에는 "그들에게 발붙일만큼의 여유도 얻지 못하였다"(행7:5). 그들은 죽은 후에라야만 약속의 열매를 받기로 소망할 수 있다는 사실을 입증한다. 이 때문에 야곱은 가나안 땅에 묻히기를 높이 보고 그 아들 요셉더러 이 약속에 대한 서약을 시켰고(창47:29-30), 또 요셉은 몇세기 후, 즉 그들이 죽어 재가 된 오랜 후에 자기 뼈를 그 곳에 이장할 것을 명했던 것이다(창50:25).

성도들의 죽음은 영생에의 관문이었고(창49:18, 민23:10, 시116:15), 이러한 영생의 소망은 소망을 선포하며(시39:7, 102:25-28, 사51:6), 성도들의 축복은 천상내세의 영광이며(시97:10, 111:9, 34:22), 최후의 심판과 부활의 소망(시55:22-23, 49:6-14, 30:5), 의인과 악인의 종국을 비교(시30:5, 사54:7-8, 잠10:7, 시69:28..)한 다윗과 영생불멸을 증거한 욥과 선지자들, 특히 에스겔(겔37:1-14, 사29:19-21)과 이사야(사66:22-24), 다니엘(단12:1-2)에게서도 공통적으로 나타난다. 이를 통하여 신구약 성경이 영생에 합의하고 있음을 결론할 수 있다.

그리스도 주께서는 그를 따르는 자들에게 오늘날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과 함께 앉을 수 있는" 천국 외에는 다른 것을 약속하지 않으셨다(마8:11). 베드로는 그 당시 유대인들을 향하여 "선지자들의 자손이요 또 하나님이 그들 조상으로 더불어 세우신 언약의 자손인 때문에"(행3:25) 복음의 은혜의 후손들이라고 선포했던 것이다. 이사실은 말뿐 아니라 사실로도 증명이 되었는데, 주님이 부활하는 순간에 성도들중에 많은 사람들이 자기 부활에 함께 참여할 자격이 있는 것으로 하여 예루살렘에서 그들에게 나타내 주셨다(마27:52-53). 이같이하여 그는 그가 영원한 구원을 획득하기 위하여 한 것이나 고난을 받은 것은 무엇이든 구약 때 신자들에게도 우리들 자신들과 마찬가지로 확실한 보증으로 주셨던 것이다. 진실로 베드로가 중지하고 있는 바와 같이 그들 역시 우리가 생명으로 거듭나게 된 것과 같은 믿음의 영을 부여 받았던 것이다(행15:8). 우리는 우리 속에서 영생 불멸의 섬광과도 같은 성령님, "우리 기업의 보증"이라고 불리우는 성령께서 그들 속에도 마찬가지로 내주하였던 것이다.


2) 신,구약의 차이점
신구약의 차이점은 실체보다는 하나님이 교리를 배치하고 또 처분하시는 방식이다. 신구약에 기록된 약속들이 같다는 것과 이들 약속의 터가 그리스도란 점에 있어서 같다는 사실은 이러한 차이점에 있어 방해되지 않는다.


(1) 구약에서는 지상축복을 말하고 신약에는 직접말해줌
구약때 주님께서는 그의 백성들의 마음이 하늘나라 기업을 향하여 높이 올리기를 원했지만 이러한 소망이 더 잘 키워지도록 그들로 하여금 지상의 축복을 맛보도록 함으로써 이를 표시해 주셨다. 그들이 지상 소유가운에서 누릴 것은 마치 거울 속에서 보는 것처럼 그들을 위해서 하늘나라에 준비되어 있다고 믿었던 장래 기업을 바라보았던 것이다. 그러나, 이제 복음은 더 판명하게 내생의 은총을 계시해줌으로 이를 직접 명상하도록 하신 것이다. 이 사실은 바울이 유대민족을 어린 아이 유업 상속자, 즉 아직 자기를 혼자 치닥거리 할 수 없어 관리인이나 후견인 밑에서 그 보호를 맡기는 것과 비교했다(갈4:1-2). 즉 유업을 이을 자가 어릴 때는 종과 같다는 이유이다. 그러나 아브라함(창15:1)과 다윗(시73:26, 84:2)과 같은 성도들은 임시적인 축복들로부터 최고의 궁극적인 축복으로까지 올라간 것이다. 우리는 이 순례(나그네)의 땅이나 지상 예루살렘에는 본래 적합한 것이 아닌, 신자들의 참 본향, 또 하늘에 있는 도성 즉 "여호와께서 복을 명하셨는데 곧 영생이 있는"(시133:3)도성에 적합한 것이다. 이를 또 구약에서는 보이는 행복과 형벌로서 앞으로 올 영원한 축복과 죽음을 모형으로 보여주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어느정도 가리운 형태로 자신의 언약을 준 동안에는 장래, 그리고 영원한 축복의 은총은 지상적인 축복밑에, 그리고 영적인 죽음은 육체적인 형벌밑에 표시하고 상징하려 했던 것이다.

(2) 구약에서는 그리스도를 형상이나 의식으로 가르쳐 줌

구약은 실물이 없이 그 실체 대신에 형상이나 그림자로서만 보여죽 신약은 진리의 바로 그 실체를 현존하는 것으로 보여준다. 이러한 차이점은 신약이 구약과 대조해서 말할 때에는 거의 어디서나 볼 수 있으나 그것을 상세히 다룬 것은 히브리서에서 두드러진다. 율법 가운데는 "장차 오는 좋은 일의 그림자가 있지 살아 있는 실물의 모습은 없다"(히10:1). 하나님께서 한 번 영원하고 결코 쇠하지 않을 것으로 확증해 놓은 언약이 성취되어 이로 말미암아 그것이 최종적으로 확정되고 인준된 것이 곧 그리스도인 것이다. 그러한 인준이 대망되고 있는 동안 주님께서는 모세를 통하여 그 인준의 엄숙한 상징이라고 할 수 있는 의식들을 정해주신 것이다. 사도는 논하기를 더 좋은 언약의 보증(히7:22)이요, 중보자인 그리스도에게 양보하기 위하여 율법은 종식되고 폐디되어야 하며, 택함을 입은 자들에 대한 영원한 성결이 그리스도를 통하여 일단 획득되고 또 율법아래 남아 있던 방법은 도말되어 버렸다고 하였다. 구약의 의식들은 확고하고 실체적인 확증에 의해 서게 될 때까지는 일시적인 것이다. 그것이 새롬고 또 영원한 것이 된 것은 그리스도의 보혈로서 성결케 되고 확정이 된 후에야 된 것이다(눅22:20 '피로 세우는 새 언약의 잔'). 이것은 곧 하나님의 언약은 그의 피로 인봉이 될 때 그 실체가 확정되고 그것 때문에 새롭고 영원한 것이 된다는 뜻이다.

구약 율법은 몽학선생으로서 신약의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해 준다(갈3:24, 5:1-2, 엡4:13). 율법과 선지자(눅16:16, 마11:13)는 언젠가 명백하게 드러날 지혜를 미리 맛보이고 먼 곳으로부터 반짝이고 있는 것을 보여준 것인 반면에, 의의 태양이 오신 후에는(말4:2) 지혜와 지식의 모든 보화(골2:3)가 발견되어 우리는 그 때문에 하늘에 가장 심오한 성소에까지 올라갈 수가 있는 것이다.

구약의 성도들은 신앙의 위인들까지도 신약때의 희귀한, 강한 신앙을 갖지 못하고 유치한 상태에서 멀리서 그리스도를 바라다 보았다. 그리스도께서 친히 "많은 선지자와 임금이 너희 보는 바를 보고자 하였으되 보지 못하였으며 너희 듣는 바를 듣고자 하였으되 듣지 못하였느니라"(눅10:24), "너희 눈은 봄으로 너희 귀는 들음으로 복이 있도다"(마13:16)하셨다. 분명히 그리스도를 눈앞에 본다는 것은 지금까지 없었던 하늘나라의 신비의 계시를 더 명백하게 나타내 주는 특전에 있어서 뛰어나다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3) 구약은 문자(文字)적, 신약은 신령적

렘31:31-34을 중심으로 바울은 율법과 복음을 비교하여 전자를 문자적이고 후자를 신령적이라 불렀고, 전자는 돌판위에 새겼고 후자는 사람의 마음위에 쓴 것이라 했으며, 전자는 죽음을 후자는 생명을 전하는 것이며, 전자는 정죄를 후자는 의를, 전자는 꺼져 없어지는 것이고 후자는 영존하는 것이라 했다(고후3:6-11). 이를 설명하면, 구약이 문자적이라 함은 성령의 역사없이 공포된 것이지만 신약은 주님께서 인간들의 심령위에 신령하게 새겨놓았기 때문이다. 구약은 죽음을 가져오므로 인류 전체를 저주 가운데로 말려들게 하지만, 신약은 영생의 그릇이기에 사람들을 저주로부터 해방시켜 하나님의 사랑으로 회복시켜 준다(고후3:6하). 구약은 정죄의 사역으로 모든 불의한 아담의 자손들을 고발하지만, 신약은 의의 사역으로 하나님의 긍휼을 나타내주어 그것 때문에 우리가 의롭다함을 입는다(고후3:9). 의식법과 관련하여 구약은 현존하는 것들의 형상을 지니고 있어 시간과 함께 죽어 없어지는 것인 반면에 복음은 바로 그 실체를 보여주기 때문에 영원토록 견고하게 확정성을 갖는다. 예레미야는 도덕법까지도 허약하고 유한 언약(렘31:32)이라고 했는데, 그것은 은혜를 모르는 백성들의 돌연한 배반에 의하여 곧 파기되기에 그리 표현한 것이다. 의식들은 그 자신이 연약하기에 그리스도의 강림 때에 폐기되었는데 그 자체 내에 연약함의 원인을 갖고 있는 것이다.

(4) 구약은 속박, 신약은 자유(롬8:15, 히12:18-22, 갈4:22-31)

구약은 두려움과 떨림으로 양심을 때리지만 신약은 혜택으로 기쁨가운데 해방이 된 것이다. 구약은 노예의 멍에로 양심을 묶인채 있지만 신약은 관대한 정신으로서 자유 가운데 해방을 주는 것이다. 혹여 구약의 성도들중에 우리와 같은 신앙의 성령을 받아 우리들과 같은 자유와 기쁨을 누린 사람들은 율법으로부터 오는 자유를 누린 것이 아닌, 성령을 통하여 노예됨의 눌림을 알고 양심의 불안으로 지쳐서 복음에로 피난처를 찾아 온 것이다. 구약의 거룩한 족장들은 구약시대에 살았다고 해서 그곳에 고집을 부리고 살려고 한 것이 아니고 줄곳 신약을 사모해서 살았으며 그리하여 참된 사랑을 가지고 그것에 진정 참여했던 것이다. 하나님으로부터 다시 난 "약속의 자녀"(롬4:8)는 사랑을 통하여 역사하는 믿음으로 명령을 순종하는데(갈5:6) 창세때 이후 신약에 속하여 있는 것이다. 세상시작의 날부터 하나님의 특별한 선택을 입은 것으로 성경이 말하고 있는 모든 성도들은 우리들과 같은 축복에 참여하여 영원한 구원을 받게 된다.

(5) 구약은 한 민족과 신약은 온 세계와 관계됨

그리스도께서 강림하실때까지 주님께서는 한 민족을 성별하여 그 안에 자기 은총의 언약을 국한시키셨다(신32:8-9, 14:14-15). 하나님께서 그의 말씀을 그들에게 전달할 때에 그들을 그 자신과 묶어 결합하여 버림으로 그 자신, 그들의 하나님으로 불리우고 또 인정되었다. 그 당시에는 이스라엘 백성들은 친애하는 아들이요 하나님이 알고 보호와 후견아래 놓였으며, 성별되고 하나님의 임재로서 존귀를 받은 반면에, 다른 민족들은 외부인이요 흑암가운데 버림을 받고 있었으며, 더러운 채 두어졌고 하나님에게 접근하는 길로부터 일체 배척을 받고 있었다.

그러나, 만물을 회복시키기로 예정해 놓으신 "때가 차매"(갈4:4) 그리스도는 하나님과 인간들 사이의 중보자로 나타나셨고 또 오랫동안 하나님의 자비를 이스라엘 경내에 국한했던 담을 허시고(엡2:14), "먼데 있는 자들이나 가까운데 있는 자들에게 평안을 전하시고"(엡2:17) 다함께 "하나님과 화목하여"(엡2:16) 하나가 되게 하신 것이다. 그러므로, 이제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차별이 없고(갈3:28) 할례받는 자나 할례받지 않는 자의 차별이 없이(갈6:15) 그리스도가 만유의 주가 되신 것이다(골3:11). 그리하여 그리스도께서는 열방을 유업으로 만들어 주었고 소유가 땅끝까지 이르게 되어(시2:8), 바다에서부터 바다까지와 강에서부터 땅끝까지 다스리게 되신 것이다(시72:8, 슥9:10).

결론적으로 신구약성경이 일반적으로 차이가 있는 것은, 하나님께서 각 시대에 적합한 것을 꿰뚫어 알고 계시는 만큼 각각 다른 시대에 따라 다양한 형식을 취하시는 까닭이다. 당신께서 외적인 형식과 방법을 바꿨다고 해서 변하기 쉬운 분이라는 것은 아니고 도리어 변화무상한 인간들의 능력에 맞도록 적응시키신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만사를 현명하고 공정하게 하셨음을 의심하지 않아야 한다. 하나님께서는 이것들 중 하나도 자기 자신을 위하여 하시지 않고 인간들의 구원을 위하여 제정하셨다. 그리스도의 강림후 하나님의 부름은 모든 백성들에게 미치도록 더 광범위하게 보급되었고 성령의 은혜는 전보다 퍽 풍성하게 부어진 것이다. 하나님께서 그가 원하시는 곳에 자기 말씀을 전하도록 하시며 그가 원하시는 방도와 분량으로 자기 교리에로 전진과 성공을 시키는 분이시고 이 세상의 배은망덕 때문에 원하시는 시대에든지 자기 이름을 세상으로부터 거두어 버리로 또 원하면, 다시 그의 긍휼에 의하여 회복시키기도 하시는 것이다.

맺으며

칼빈은 기독교 강요를 통하여 신구약의 통일성을 언약과 영생의 실체의 통일성으로, 차이점을 실체가 드러나는 방식을 따라 다섯가지로 나누어 설명한다. 요약하면, 본질적, 실체적으로는 성경이 통일성을 이루지만, 드러나는 방식에 있어 하나님의 경륜을 따라 판명성의 차이가 있다할 수 있다.






출처: 창골산 봉서방 원문보기 글쓴이: 봉서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