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약성서의 희생 제사와 예배, 그리고 삶 강성열, 호신대 구약학 I. 들어가면서 인간은 지상에 존재한 이후로 계속하여 다양한 신들을 예배하여 왔다. 인류의 역사는 곧 예배의 역사라고 해도 틀린 말이 아닐 것이다. 예배는 그만큼 인간의 종교 생활에 있어서 큰 비중을 차지한다. 예배야말로 인간과 신을 관계 맺는 가장 소중한 연결고리에 해당하기 때문이다. 예배가 없이는 인간과 신 사이의 관계가 형성되지 못한다. 예배를 통하여 인간은 비로소 신을 만나고, 신은 인간의 예배 행위를 매개로 하여 자신을 드러낸다. 참으로 예배는 인간과 신 사이의 관계를 결정짓는 가장 중요한 요소이다. 이는 인류가 지상에 존재해 온 이후로 지금까지 변함없이 적용되는 진리이다. 어느 종교이건 예외가 없다. 예배 없는 종교란 존재하지 않는다. 옛날이나 지금이나 사람 사는 세상에서 예배를 배제한 종교라는 것은 도무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구약성서는 이 점을 가장 분명하게 확증하는 책이다. 구약성서를 읽어보면, 이스라엘 주변 세계의 여러 민족들, 곧 메소포타미아 지역과 이집트 및 시리아-팔레스타인 등지의 거주민들이 오랜 세월 동안 매우 다양한 신들을 섬기고 예배해 왔음을 알 수 있다(삿 16:23; 삼상 6:4; 왕하 3:26-27; 5:17 등). 그들은 대체 어떠한 신들을 섬기고 예배했던 것일까? 이는 그들이 어떠한 종교를 가지고 있었는가를 통해서 확인할 수 있다. 주지하는 바와 같이, 그들의 종교는 자연계 안에 있는 각종 피조물들을 신적인 존재로 보거나 숭배의 대상으로 여기는 이른바 '자연 종교'(nature religion)의 성격을 강하게 가지고 있었다. 따라서 그들이 섬기고 예배하던 신들은 하늘과 땅과 물과 바다와 공기와 해와 달과 별들 및 각종 동식물 등일 수밖에 없었다. 비록 구약성서가 이러한 자연 숭배 행위를 야웨 유일신 신앙의 시각에서 비판적으로 서술하고 있기는 하지만, 고대 근동 세계의 무수한 민족들이 그들 나름의 방식을 따라 여러 신들을 섬기고 예배해 왔음은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역사적인 사실이다. 이스라엘 민족도 이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구약성서는 민족사의 시작에서부터 종말에 이르기까지 줄기차게 야웨 하나님만을 섬기고 예배해야만 했던(그러나 실제로는 그렇게 하지 못한) 이스라엘 민족의 종교사를 심도 있게 다루고 있다. 하나님을 향한 그들의 공식적인 예배 행위는 갈대아 우르에서 하란을 거쳐 가나안 땅으로 옮겨간 아브라함으로부터 시작된다. 하나님의 부르심에 순종하여 가나안의 세겜 땅 모레 상수리나무에 이르렀던 아브라함은, 하나님께로부터 자손의 약속과 땅의 약속을 확인받은 후에 그곳에 제단을 쌓고서 하나님께 예배를 드렸던 것이다(창 12:7-8). 그런가 하면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을 이집트로부터 이끌어내신 후에 시내산에서 십계명을 비롯한 각종 율법 규정들을 주셨는데(출 19장 이하), 그 중에는 하나님을 어떻게 예배할 것인지를 상세하게 지시하는 제사 규정들(레위기, 특히 1-7장)이 포함되어 있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이스라엘 민족은 약속의 땅 가나안에 들어가면서부터, 그 지역 사람들이 섬기고 예배하던 다른 신들을 마음대로 섬기기 시작했다. 이른바 우상 숭배에 빠진 것이다. 이스라엘의 우상 숭배 행위는 사사 시대를 거쳐(삿 2:11-13, 19; 3:7; 6:25, 28, 30 등) 왕정 시대에까지 이어졌으며(왕상 11:4-8; 16:32-33; 18:19; 왕하 17:16-17; 21:3, 23:4 등), 나라가 멸망한 후에도 지속되었다(왕하 17:24-34). 진실한 마음으로 야웨 하나님을 섬기는 사람들도 있었지만, 그렇지 않았던 사람들이 훨씬 많았던 것이다. 이스라엘 나라가 남북으로 분열되고 마침내는 완전히 멸망에 이르게 된 것은 바로 그 때문이었다. 하나님 아닌 다른 신들을 예배하고 섬긴 것이야말로 멸망의 가장 큰 원인이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이스라엘 백성은 대체 어떠한 방식으로 하나님을 섬기고 예배해야만 했던 것일까? 이스라엘의 하나님 예배는 참으로 많은 구성 요소들을 가지고 있다. 이를테면 예배를 드리기 위한 공간인 성막 또는 성전, 그리고 진설병이나 그룹, 등대, 제단, 향단 등의 각종 예배용 물품들, 예배에 사용되는 노래(시편)와 음악 및 각종 악기들, 성서 본문 읽기와 기도 및 설교 등의 다양한 예배 순서들, 십일조를 포함한 각종 예물들, 예배를 위해 봉사하는 제사장과 레위인 및 성가대 등의 사람들, 예배에 참여하여 희생 제사를 드리는 자들, 안식일이나 유월절, 맥추절, 수장절 등의 각종 절기와 축제 등이 그에 해당한다. 그런데 이 모든 것들을 여기서 다 다룰 수는 없는 노릇이다. 더욱이 그것들 중의 일부는 오늘날의 예배에서 발견되지 않기 때문에, 이 글에서 그것들 모두를 상세하게 다룰 필요는 없다. 도리어 중요한 것은 이러한 예배의 구성 요소들에 있는 것이 아니라, 예배하는 자들의 마음가짐이나 삶의 자세에 있다. 구약성서는 시종일관 이 점을 강조한다. 물론 이러한 강조점은 구약 예배의 핵심을 이루는 동물 희생 제사와 밀접한 관련성을 가지고 있다. 따라서 이 글은 동물을 제물로 잡아 드리는 희생 제사에 초점을 맞추되, 그것이 이스라엘 백성의 삶과 어떻게 관련되는지, 그리고 궁극적으로는 그것이 오늘의 우리에게 어떠한 교훈을 주는지를 중점적으로 논하고자 한다. 이를 위해 먼저 바람직한 예배의 원형에 해당하는 아벨의 제사를 살핀 후에, 레위기가 규정하는 이스라엘의 5대 제사에 대하여 논하기로 한다. 이어서 이스라엘의 잘못된 예배 행위를 우상 숭배와 형식주의(mannerism, 본질에는 관심이 없고 형식에만 치우친 제사 행위)의 측면에서 살피고, 마지막으로 하나님을 섬기는 바람직한 예배가 어떠해야 하는지를 종합적으로 정리하고자 한다. II. 바람직한 예배는 이러한 것이다: 아벨의 제사 구약성서는 어떠한 제사를 드리는 것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바람직한 예배인지를 처음부터 분명하게 밝힐 필요를 느낀 것으로 보인다. 그 가장 뚜렷한 증거를 우리는 창세기 4장에 나오는 가인과 아벨의 이야기에서 찾을 수 있다. 이 본문은 하나님을 향한 이상적인 예배의 모델을 제시하고 있다. 여기에 소개된 가인과 아벨의 제사는 사실 하나님께 제물을 바친 인간의 첫 제사 행위로 기억된다. 그 중심 내용은 이렇다: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첫 인간인 아담과 하와는 가인과 아벨이라는 두 아들을 낳는다. 가인은 나중에 커서 땅을 경작하는 자(농업)가 되었고 동생 아벨은 양을 치는 자(목축업)가 되었다. 이 둘이 어느 날 똑같이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게 되었는데, 농사를 짓고 사는 가인은 그가 수확한 농산물, 곧 자신이 경작하던 땅의 열매를 제물로 삼아 하나님께 드렸고, 양을 치는 아벨은 그가 가지고 있는 양의 첫 새끼와 그 기름을 하나님께 드렸다. 그런데 묘하게도 하나님께서는 가인의 제사를 물리치시고 아벨의 제사만을 받으셨다. 왜 하나님께서는 아벨의 제사만 받으시고 가인의 제사는 받지 않으셨던 것일까? 그 이유를 알기 위해서는 히브리어 본문을 좀더 깊이 살펴볼 필요가 있다. 히브리어 본문은 흥미롭게도 가인과 아벨 두 사람이 하나님께 드린 제사를 똑같이 히브리어 '미느하'로 표현하고 있다. '미느하'는 '선물'(膳物)이라는 뜻과 '소제'(素祭; cereal offering)라는 뜻을 가지고 있는 낱말이다. 그런데 여기서 중요한 것은 두 사람이 드린 제물이 무엇이었느냐에 있지 않다. 왜냐하면 다음 항목에서 살필 이스라엘의 제사법에 의하면 곡물로 드리는 제사가 엄연히 존재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레위기 2장에 있는 소제가 바로 그것이다. 그리고 사실 이스라엘에서는 양이나 염소가 아닌 송아지나 비둘기를 제물로 삼아 드리는 경우가 더 많았다. 레위기에 규정된 번제나 화목제, 속죄제, 속건제 등이 이를 잘 보여 준다. 따라서 두 사람의 제사에 대한 전통적인 해석, 곧 가인은 곡물을 드린 까닭에 그의 제사가 안 받아들여진 것이고 아벨은 피를 흘리는 양의 제사를 드린 까닭에 그의 제사가 받아들여진 것이라는 해석은 받아들이기 어렵다. 엄밀하게 말해서 이러한 해석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희생을 세상 죄를 지고 가는 어린 양의 속죄 제물로 보는 신약성서의 관점에서 생겨난 것이다("피 흘림이 없은즉 사함이 없느니라," 히 9:22). 그러나 가인과 아벨의 제사는 이것과는 전혀 무관한 것이다. 양자 사이에 있는 제물의 차이는 문화권의 차이에서 비롯된 것이지, 결코 제사의 정당성을 보증해 주는 어떤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두 사람은 순전히 자신의 노동의 첫 열매를 하나님께 예물로 드린 것이었다. 생각해 보라. 농사짓고 사는 가인에게서 어떻게 양의 제사를 바랄 수 있겠는가를! 하나님께서 어찌 땅을 갈고서 그 열매로 사는 가인에게서 무리하게 양이나 염소의 제사를 원하시겠는가? 하나님은 결코 사람의 직업이나 그 직업과 관련된 제물의 종류를 차별하는 분이 아니다. 그렇다면 진짜 원인은 어디에 있는 것일까? 이에 대한 해답은 창세기 4장 4절과 5절에서 그 단서를 찾을 수 있다. 이 본문을 표준새번역 개정판(2001년)으로 읽으면 다음과 같다: 주님께서 아벨과 그가 바친 제물(히브리어 본문을 직역하면 '아벨과 그의 제물')은 반기셨으나 가인과 그가 바친 제물('가인과 그의 제물')은 반기지 않으셨다. 이 본문에 의하면 하나님께서 받으신 것은 아벨이 바친 제물뿐만이 아니었다. 하나님께서 제물보다 먼저 받으신 것은 아벨이라는 한 인격이었다. 그래서 본문은 '아벨과 그가 바친 제물'('아벨과 그의 제물')이라는 표현을 쓰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사실은 가인과 아벨의 제사에 대해서 설명하는 히브리서 11장 4절 본문에 의해서 뒷받침된다. 이 본문은 아벨이 가인보다 더 나은 제사를 드린 것은 순전히 그가 가진 믿음에 의해서였다고 말한다: "믿음으로 아벨은 가인보다 더 나은 제사를 하나님께 드림으로 의로운 자라 하시는 증거를 얻었으니...." 아벨은 하나님을 향한 온전한 믿음과 그를 경외하는 신앙을 가지고 있었던 까닭에, 흠 없고 순전한 제사를 드릴 수 있었다. 달리 말해서 아벨의 제사는 그의 정결한 생활과 깊이 관련되어 있는 것이었다는 얘기다. 따라서 그가 하나님께 드린 제사는 사실 그의 삶 전체를 드리는 제사라고 할 수 있다. 즉 아벨은 생활 속에서 의롭고 경건하게 살려고 애썼고, 그러한 삶의 연장선상에서 정성스러운 제사를 드린 것이다. 참으로 그의 제사는 기쁨과 감사가 있는 제사였으며,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제사였다. 다소 역설적이기는 하지만 하나님께서 가인에게 하시는 다음의 말씀(4:7)이 이를 잘 보여 준다: "네가 선을 행하면 어찌 낯을 들지 못하겠느냐? 선을 행치 아니하면 죄가 문에 엎드리느니라. 죄의 소원은 네게 있으나 너는 죄를 다스릴찌니라." 가인에게 주어진 이 말씀으로부터 우리는 역으로 아벨이 평소에 하나님 보시기에 올바른 생활을 했기 때문에 그 제사도 바른 것이었다는 결론을 이끌어낼 수 있다. 이러한 결론은 제사가 공의롭고 바른 삶과 같은 차원에 속한 것임을 강조하는 예언자들의 메시지와 그 맥을 같이 하는 것이다(사 1:10-17; 호 6:6; 암 5:21-24; 미 6:6-8; 렘 7:3-7 등). 제사는 곧 그것을 드리는 자의 삶이요 인격이나 다름이 없는 것이다. 달리 말하자면 삶과 인격 전체가 곧 하나님께서 기뻐 받으시는 제사요 예배인 것이다. 그러나 가인은 그렇지 못했다. 그에게는 아벨만큼의 성숙한 믿음이 없었던 까닭에, 자연히 그의 제사는 흠 없고 순전한 것이 될 수 없었던 것이다. 그는 아마도 양의 첫 새끼와 그 기름을 바친 아벨처럼 정성을 기울여 제물을 준비하지 않았을 것이다. 한 마디로 말해서 하나님께 대한 믿음이 없는 제사였던 것이다. 하나님께 대한 믿음이 없었으니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그를 경외하는 마음도 별로 없었을 것이다. 이것은 그가 자기 제물이 받아들여지지 않자 당장에 성을 내면서 얼굴색을 바꾼 것에서 그대로 드러난다(창 4:5). 만일에 그에게 정말로 하나님을 향한 믿음이나 경외심이 있었다면, 하나님께서 무슨 이유로 자신의 제사를 열납하지 않으셨는지를 헤아리고서 자신의 잘못된 상황을 개선하고자 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에게는 그러한 반성이 없었다. 도리어 그는 하나님을 향하여 크게 분노할 따름이었다. 이로써 그는 자신의 제물이 아벨의 경우처럼 기쁨과 감사가 넘치는 제사가 아니라 의무감에서 비롯된 억지 제사였음을 드러낸 셈이 되었다. 또한 가인은 평소의 생활 속에서 올바른 행동으로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것에 관심이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오히려 그는 죄의 유혹에 너무도 쉽게 자신을 내어주는 사람이었다. 죄의 지배를 받고서 사는 불경건한 사람이었던 것이다(4:7). 그의 이러한 성향은 마침내 동생 아벨을 시기한 나머지 그를 들에서 쳐서 죽이는 결과를 가져왔다(8절). 그는 동생을 죽이고서도 뻔뻔스럽게 하나님 앞에서 자기 죄를 숨기면서 하나님께 대드는 파렴치한 사람이었다(9절). 이러한 그가 하나님께 아무리 좋은 제사를 드린들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그런 까닭에 하나님은 가인이라는 인격과 그의 삶을 받지 않으신 것이고, 당연히 그의 그릇된 인격과 삶으로부터 비롯된 그의 제물까지도 받지 않으신 것이다. 가인의 이러한 모습을 두고서 요한일서 3:12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가인 같이 하지 말라. 저는 악한 자에게 속하여 그 아우를 죽였으니 어찐 연고로 죽였느뇨? 자기의 행위는 악하고 그 아우의 행위는 의로움이니라"(참조, 유 1:11). III. 이스라엘의 다섯 가지 주요 제사 1. 레위기 제사법의 배경 구약성서는 여러 군데에서 이스라엘의 제사에 대해서 기록하고 있지만(출 20:24ff.; 34:25ff.; 민 15장; 신 12장 등), 그래도 가장 상세하게 설명하고 있는 책은 레위기이다. 우리가 잘 아는 바와 같이 레위기는 출애굽 사건과 그 이후에 주어진 시내산 계약을 그 배경으로 하고 있다. 출애굽 사건은 고통에 찬 이스라엘의 신음과 부르짖음 소리에 대한 야웨 하나님의 응답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점은 출애굽 사건을 묘사하는 출애굽기 2:23-24; 3:7-9; 6:5; 민수기 20:16; 신명기 26:6-8; 느헤미야 9:9 등에 잘 나타나 있다. 이 본문들은 한결같이 이스라엘이 이집트에서의 고역을 견디지 못한 나머지 하나님께 부르짖었고, 그들의 탄식과 신음 소리를 들으신 하나님께서 조상들에게 주신 약속을 생각하시고서 그들을 구원하기로 작정하셨다고 보고한다. 이스라엘의 탄식과 부르짖음에 대한 하나님의 응답은 결국 압제와 속박 속에서 신음하는 그들을 이집트로부터 '내보내는' 것으로 귀결된다. 그리고 이러한 출애굽의 은총은 그들로 하여금 구원과 해방의 하나님을 잘 '섬기게' 하려는 것을 궁극적인 목적으로 가지고 있다("내 백성을 보내라. 그들이 나를 섬길 것이니라"; 출 3:12, 18; 4:23; 5:1, 3; 7:16; 8:1, 20; 9:1, 13; 10:3 등). 이를 위해 하나님은 시내산에서 모세를 통하여 십계명을 비롯한 각종 율법 규정들을 주셨다. 이것을 우리는 시내산 계약(법)이라 칭한다. 한 마디로 말해서 시내산 계약은 이스라엘이 출애굽 사건에 나타난 하나님의 구원 은총에 어떻게 응답할 것인가를 규정하고 있는 것이다. 시내산 계약은 그러기에 의무이기 전에 하나님의 은총에 감사, 감격하는 마음으로 지켜야 할 자발적인 응답의 규정인 셈이다. 레위기도 그 중에 하나에 속하는 것으로서, 구원 받은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어떻게 섬기고 예배할 것인지, 곧 하나님께 어떻게 제사를 드리고 또 생활 속에서 성결을 지키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가르치고 있는 책이다. 레위기의 이러한 가르침은 궁극적으로는 이스라엘이 어떻게 하여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거룩한 백성이 되며 이방 나라들을 위한 제사장 나라가 될 것인가(출 19:5-6)를 목표로 하고 있다. 2. 번제 레위기는 크게 두 부분으로 나눌 수 있다. 첫째 부분(1-10장)은 하나님께 제사 드리는 것과 관련되며, 둘째 부분(11-27장)은 일상 생활 속에서 거룩하게 살아가는 것과 관련된다. 그리고 이 둘은 다음과 같이 세분할 수 있다: 제사 제도(1-7장), 제사장 위임식(8-10장), 부정함과 그 처리 방법(11-16장), 실제적인 성결을 위한 규정들('성결 법전'이라고 함; Holiness Code, 17-26장), 서원 예물에 관한 규정(27장). 여기서 우리가 취급하고자 하는 것은 이른바 이스라엘의 5대 제사라고 알려진 번제, 소제, 화목제, 속죄제, 속건제 등의 제사들이다(레 1-7장). 이 제사들은 여러 가지 의미들을 가지고 있지만, 한 마디로 요약해서 말하자면 희생 제물을 통해 개인과 백성의 잘못을 용서받고(속죄), 더 나아가서 향기로운 제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함으로써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계약 관계)를 유지하려는 목적을 가지고 있다. 이들 주요 제사들 중에서 가장 중요한 의미를 갖는 번제를 먼저 살펴보기로 하자. 번제(燔祭, Burnt Offering; 히브리어로 '올라')는 그 이름이 뜻하는 바와 같이 남김없이 다 태워서 드리는 제사이다. 그러한 의미에서 번제는 전반적인 속죄를 위하는 제사요, 온전한 헌신을 다짐하는 제사라고 할 수 있다. 번제는 그 제물의 내용에 따라 세 가지로 나누인다. 소의 번제(1:3-9)와 양이나 염소의 번제(1:10-13), 그리고 비둘기의 번제(1:14-17) 등이 그러하다. 물론 이러한 구분은 재산의 많고 적음에 따라 재물의 내용이 달라져야 한다는 평균의 원칙에 기인한다. 즉 재산이 아주 많은 사람은 소를 제물로 드리고 중산층 정도에 속하는 사람은 양이나 염소를 제물로 드리며, 그러할 경제적인 여유가 전혀 없는 사람은 비둘기를 제물로 드리도록 규정한 것이다. 세 가지의 번제가 그 절차에 있어서 대동소이하므로 여기서는 그 첫 번째인 소의 번제만을 정리해 보자. 예배자, 곧 헌제자(獻祭者)가 소를 가지고 번제를 드릴 경우에는 일정한 순서를 따르는데, 흥미로운 것은 헌제자와 제사장들이 하는 일이 명확하게 구별된다는 점이다. 먼저 헌제자는 제물의 머리에 안수함으로써(4절) 자신의 죄를 고백함과 동시에(참조, 16:21) 그 제물이 자신의 죄를 대신하여 죽을 것임을 상징적으로 표현한다. 이는 자신의 죄를 희생 제물에게 전가(轉嫁)하는 행동에 다름 아니다. 제물의 머리에 안수한 그는 자신의 죄와 죽음을 대신할 그 제물을 죽이고, 죽은 제물의 몸에서 흘러나온 피를 그릇에 담아 제사장들에게 전달한다(5절). 이어서 그는 희생 제물의 가죽을 벗기며, 그 다음에는 죽은 제물의 몸을 불에 타기 쉽게 조각을 낸다(6절). 마지막으로 그는 오물이 많이 묻은 제물의 내장과 정강이를 깨끗하게 씻는다(9절). 그렇다면 제사장들은 어떠한 일을 하는가? 그들은 먼저 헌제자가 그릇에 담아 온 죽은 제물의 피를 회막 문 앞 사면에 뿌린다(5절). 이어서 그들은 단 위에 불과 나무를 준비하고(7절), 헌제자가 가져온 제물의 조각들과 머리와 기름을 단 위에 놓는다(8절). 그리고 마지막으로 단 위에 올려진 모든 것들을 불살라 하나님께서 흠향하시도록 한다(9절). 이러한 역할 분담에서 분명해지는 것은, 번제에서 가장 활발하게 움직이는 사람은 제사장들이 아니라 헌제자라는 사실이다. 희생 제물을 죽이고 피를 받고 가죽을 벗기고 몸을 토막 내고 내장과 정강이를 씻는 모든 자질구레한 일들은 헌제자의 몫으로 돌아가고, 제사장들은 그 헌제자가 가져다 준 것을 제단에서 하나님께 바치는 일을 맡는다. 이는 헌제자가 제사장의 제사(예배) 집전을 그냥 구경하는 것이 아니라, 행위로써 제사장 집전의 예배에 적극 참여하였음을 의미한다. 다시 말해서 이스라엘의 제사는 제사장이 처음부터 끝까지 모든 일을 다 도맡아서 하는 것이 아니라, 헌제자의 적극적인 협조 속에서 이루어진다는 얘기다. 어찌 보면 이스라엘의 제사는 처음부터 끝가지 헌제자가 주도하는 예배라고 해도 틀린 말이 아닐 것이다. 이 점에서 오늘의 우리는 설교자 중심의 예배 구조를 개선하여 회중의 적극적이고 능동적인 예배 참여를 유도하는 예전 프로그램을 개발하여야 할 것이다. 3. 소제와 화목제 번제에 바로 이어서 소개되고 있는 소제(素祭, Cereal/Grain Offering; 히브리어로 '미느하')는 다섯 가지 희생 제사들 중 유일하게 곡물을 불로 태워 드리는 제사로서, 야웨 하나님께 대한 감사와 충성을 표현하는 제사이다(2장). '미느하'가 '선물 또는 공물'이라는 뜻을 아울러 가지고 있음을 고려한다면, 소제는 하나님께 드리는 선물이라고 해도 틀리지 않을 것이다. 소제에 쓰이는 재료에는 고운 (밀)가루나 볶은 곡식과 기름, 유향 등이 있다. 소제물에 누룩이나 꿀을 넣는 대신에 소금을 넣는 것은 부패를 방지하기 위해서이다. 소제는 예물의 성격에 따라 요리하지 않고서 드리는 예물(1-3절)과 요리하여 드리는 예물(4-10절)의 둘로 나누어진다. 요리하여 드리는 소제물은 화덕(oven)에 굽는 경우와 번철(frypan/griddle)에 부치는 경우 및 솥에 삶는 경우 등의 세 가지 방식을 사용할 수 있다. 불로 태우고 남은 것은 제사장의 몫으로 돌리는 것이 기본 원칙이었다. 소제의 이러한 특성은 오늘의 예배가 무엇보다도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는 기본 정신에서 비롯되어야 함을 우리에게 가르쳐준다. 출애굽 사건에 나타난 하나님의 구원 은총에 감사하는 마음으로 드리는 것이 이스라엘의 제사였던 것과 마찬가지로, 오늘의 예배도 우리의 모든 삶의 영역에서 이루어지는 하나님의 자유로운 구원 은총에 감사하는 태도를 수반해야 하는 것이다. 감사하는 마음으로 제사를 드리는 자야말로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자이기 때문이다(시 50:8-15, 23). 또한 시편 기자가 노래하는 바와 같이, 찬양과 감사야말로 짐승을 잡아 죽이는 희생 제물보다 하나님을 더욱 기쁘시게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시 69:30-31). 요컨대 십자가에서 나타난 하나님의 사랑과 일상 생활 속에서 주어지는 하나님의 무수한 은총들에 대한 감사의 응답이 없는 예배는 올바른 예배라고 할 수가 없다. 세 번째 제사인 화목제(和睦祭, Peace/Fellowship Offering)는 유일하게 복수형으로 표현되는 제사이다. 히브리어로 '제바흐 슐라밈'인데, 여기서 '슐라밈'이라는 낱말은 우리가 잘 아는 '샬롬'의 복수형다. 따라서 '화목제'로 번역되는 '제바흐 슐라밈'을 직역하면 '평화들의 제사' 또는 '평화들을 목적으로 하는 제사'라는 뜻이 된다. 이 제사는 일차적으로는 하나님과 예배자 사이의 화해와 친교 및 하나님께 대한 감사와 서원을 위해서, 그리고 이차적으로는 예배자와 가족을 포함하는 그의 이웃과의 화해와 친교를 위해서 드리는 제사이다(3장). 화목제는 제물의 종류에 따라 소(1-5절), 양(6-11절), 염소(12-17절) 등의 셋으로 나누인다. 화목제의 제물은 소나 양이나 염소의 내장, 콩팥, 간 등에 있는 기름을 반드시 드리며, 양의 경우에는 기름기가 많은 꼬리 부분을 드린다. 제물의 가슴과 오른쪽 다리는 제사장의 몫으로 돌아가며, 나머지는 제사 드리는 자가 친지들을 비롯한 이웃들과 나누어 먹는다. 친교의 제사이기 때문에 다섯 제사 중에서 유일하게 공동 식사를 포함하고 있다. 그런데 오늘의 예배는 화목제의 이러한 요소를 제대로 살려내지 못하고 있다. 가능하다면 화목제가 화해와 친교를 목적으로 하는 제사라는 점에 기초하여, 예배가 끝날 무렵이나 끝난 후에 성도들로 하여금 예배의 연장선상에서 화해와 친교의 순서를 갖게 하는 것이 바람직할 것이다. 친교의 식사를 나누게 한다면 더욱 좋을 것이다. 이 점에서 볼 때 화목제의 실현은 대규모 교회보다는 소규모 교회에서 보다 원활하게 이루어질 수 있음이 분명해진다. 대형화를 추구하는 교회는 거기에 알맞는 친교의 프로그램을 개발하지 않으면 안 된다. 4. 속죄제와 속건제 속죄제(贖罪祭, Sin Offering; 히브리어로 '핫타아트')는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부지중에) 야웨의 계명을 위반했을 경우에 그 죄를 용서받기 위해서 드리는 제사이다(4:1-5:13). 고의로 또는 일부러 지은 죄는 제사를 통해서도 사함을 받지 못하기 때문에(민 15:22-31), 속죄제에 해당하지 않는다. 속죄제를 위한 제물에는 재산의 많고 적음에 따라 소나 염소 또는 비둘기나 곡식 가루 등이 있으며, 하나님께 드리고 남은 것을 제사장의 몫으로 돌려야만 했다. 물론 제사의 형태는 죄를 지은 사람의 신분이나 지위에 따라서 달라진다. 제사장(4:3-12), 이스라엘 온 회중(4:13-21), 이스라엘 회중의 지도자인 족장(4:22-26), 이스라엘 일반 백성(평민, 4:27-35) 등이 그렇다. 마지막으로 속건제(Guilt/Trespass Offering; 히브리어로 '아샴')는 하나님(5:15-19)과 사람(6:1-7)에게 잘못한 일이 있을 경우에 드리는 제사이다(5:14-6:7). 속건제는 범죄 행위로 인하여 피해를 입은 자에게 보상할 것을 요구하는 것을 제외하고는 속죄제와 크게 구별되지 않는다. 한 예로 레위기 5:6은 이 두 제사를 동의어로 사용하고 있다. 그러나 대체적으로 보아 속죄제가 하나님께 대한 죄에 더 많이 치중하고 있다면, 속건제는 사회적인 측면에서의 위반 행위를 더 많이 강조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이를 가장 분명하게 보여 주는 것이 보상의 법칙이다. 레위기 6:1-7은 만일에 이웃에게 잘못하여 물질적인 손해를 입혔을 경우에는 반드시 피해액의 오분지 일을 더해 보상할 것을 명하고 있다. 오늘의 예배는 속죄제와 속건제의 이러한 예배 정신을 충실하게 반영하지 않으면 안 된다. 세상을 살면서 하나님과 사람에게 잘못을 범하지 않는 사람은 어디에도 없다. 이것은 모든 인간의 삶이 속죄제와 속건제의 요건에 해당됨을 의미한다. 따라서 예배자는 누구나 하나님과 사람에게 잘못한 모든 것들을 사함 받으려는 간절한 마음으로 예배에 참여해야 한다. 그러나 그것만 가지고서는 안 된다. 이웃에게 잘못한 일로 인해서 어떤 형태로든 손해-그것이 정신적인 것이든 물질적인 것이든 간에-를 입혔을 때에는, 어떠한 방법으로든 그것을 충분히 보상해 주어야 한다. 예물을 제단에 드리다가 형제에게 원망 들을 만한 일이 생각나면 예물을 제단 앞에 두고 먼저 가서 그 형제와 화목하고 그 후에 와서 예물을 드리라는 예수의 가르침(마 5:23-24)도 같은 맥락에 속한 것이다. IV. 하나님을 잘못 섬기는 이스라엘 앞서 말한 바와 같이, 출애굽 사건을 통하여 하나님의 특별한 구원 은총을 경험한 이스라엘은 오직 그만을 예배하고 그에게만 영광을 돌리는 삶을 살아야만 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이스라엘은 그렇게 하지 못했다. 지도층 인사들을 포함한 다수의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의 은혜를 오래도록 간직하지 못한 채로 서서히 야웨 신앙의 기본 틀로부터 벗어나기 시작했다. 그들의 종교적이고 신앙적인 탈선은 크게 두 가지 방향에서 이루어졌다. 그 하나는 하나님 아닌 다른 신들(우상)을 섬긴 것이었고, 다른 하나는 하나님을 섬기고 예배하되 예배의 본질을 망각한 채로 형식주의에 빠진 것이었다. 첫 번째 것을 먼저 살피기로 하자. 1. 하나님 아닌 것들을 예배하는 잘못 (1) 우상 숭배로 점철된 역사 하나님 아닌 것들을 예배하려던 이스라엘의 잘못은 하나님께서 모세를 통하여 제반 율법 규정들을 전달하시던 바로 그 순간부터 시작되었다. 그 대표적인 예가 바로 금송아지 사건이다. 출애굽기 32장에 의하면, 당시의 이스라엘 백성은 아론을 사주하여 금송아지를 만들게 하고서는, 그 금송아지야말로 출애굽의 하나님이라고 하면서 그를 향하여 번제와 화목제를 드렸으며, 그 앞에서 기쁨의 잔치를 열었다(1-6절). 그러나 금송아지 숭배는 피조 세계에 속한 그 어떤 것으로도 하나님을 형상화해서는 안 되고, 그것을 섬기거나 예배해서도 안 된다는 십계명의 엄한 금지(출 20:4-5)를 위반하는 행동이었다. 이스라엘의 이러한 탈선은 가나안 정착 이후로 한층 심화되었다. 유목 이동 문화에 친숙해 있던 이스라엘 백성은 가나안에 정착하면서 풍요와 다산(多産)을 추구하던 바알 종교에 깊숙이 빠져들기 시작했다. 가나안 사람들은 바알이야말로 가나안 땅에 비를 내려주는 신이라고 생각했으며, 바알과 그의 배우자인 아세라 사이의 부부 관계가 풍요와 번영을 약속한다고 믿었다. 그리하여 바알 신전에 이른바 신전 창기(temple prostitute)를 두고서 그들과 성 관계를 맺음으로써 바알과 아세라의 부부 관계를 재현하고자 했다. 인간의 성 본능에 기초한 바알 종교의 이러한 매력은 야웨 하나님의 성적인 파트너를 허용하지 않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큰 유혹으로 작용하였다. 이스라엘이 얼마나 쉽게 그 유혹에 넘어갔는가는 이스라엘의 가나안 정착 초기인 사사 시대의 혼란상에 잘 반영되어 있다(삿 2:11-13; 참조, 호 4:13-14). 비록 사사들의 열정적인 활동이 끊임없이 이어지긴 했지만 별다른 효과가 없었다. 사사 시대에서 왕정 시대로 바뀌었어도 이스라엘의 바알 종교 밀착은 여전하였다. 아니 그 이상이었다. 주변 나라들과 활발하게 무역 거래를 하던 다윗-솔로몬 시대의 국제화, 개방화 정책이 본격화되면서부터 바알을 비롯한 다른 신을 숭배하는 일이 한층 빈번해지게 된 것이다. 특히 솔로몬의 무분별한 정략 결혼은 예루살렘을 이방 종교의 전시장처럼 만들어 버렸다(왕상 11:1-8). 이러한 분위기는 분열왕국 시대에도 변함이 없었다. 북왕국 이스라엘의 경우, 여로보암 1세(주전 922-901년)는 벧엘과 단에 금송아지 단을 쌓고서는 그 송아지 신상에게 제사를 드리고 분향하기까지 하였다(왕상 12:28-33). 이스라엘 역사가들이 북왕국의 왕들을 설명할 때마다 18왕들 가운데 15명이 "여로보암의 길을 따라갔다"고 비판하는 것을 보면(왕상 15:26, 34; 16:19, 26, 31 등), 송아지 숭배가 북왕국에서 얼마나 깊이 뿌리내리고 있었는지를 금방 알 수 있다. 이방 여인 이세벨과 결혼한 후로 바알 숭배를 온 백성에게 강요한 아합의 행동도 이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느밧의 아들 여로보암의 죄를 따라 행하는 것을 오히려 가볍게 여기며, 시돈 사람의 왕 엣바알의 딸 이세벨로 아내를 삼고 가서 바알을 섬겨 숭배하고, 사마리아에 건축한 바알의 사당 속에 바알을 위하여 단을 쌓으며, 또 아세라 목상을 만들었으니....(왕상 16:31-33). 남왕국 유다에서는 어떠했는가? 남왕국에서는 바알 종교 외에도 다른 많은 이방 종교가 폭넓게 유통되었다. 그 이유는 남왕국이 주변 나라들에 대하여 북왕국보다 훨씬 개방적인 태도를 취한 때문이었는데, 그 중에서도 강대국이던 앗수르와 바벨론 및 아람(시리아) 등의 종교가 주류를 이루었다. 남왕국에서 유행하던 이방 종교의 실상이 어떠했는가는 히스기야와 요시야의 종교개혁을 통해서 확인할 수 있다. 히스기야가 집권하던 때에 유다 백성들은 모세가 광야에서 만들었던 놋뱀을 숭배하기까지 하였으며(왕하 18:4), 요시야 초기에는 므낫세 때부터 유행하던 바벨론 지역의 각종 점성술과 해와 달과 별들을 숭배하는 이른바 천체숭배 사상이 널리 퍼져 있었다(왕하 21:4-6; 23:5-14). 나라가 바벨론에 망한 다음에는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간 사람들이 바벨론 종교에 더욱 깊이 빠져들게 되었다. (2) 예언자들의 눈으로 보는 우상 숭배의 현실 다른 신들을 부지런히 섬기는 이스라엘의 모습을 보다 못한 하나님께서는 예언자들로 하여금 당시의 우상 숭배를 강하게 비판하게 하셨다. 그 첫 예로 엘리야의 예언 활동을 들 수 있다. 가뭄 예언(왕상 17:1)과 갈멜산 대결(왕상 18:20-40)에서 정점에 이른 엘리야의 예언 활동은 북왕국의 잘못된 바알 숭배를 겨냥한 것으로서, 바알이 아니라 야웨 하나님이 유일한 참 신이요, 비(또는 풍요)를 내려주시는 분임을 널리 입증하는 것이었다. 그런가 하면 북왕국의 여로보암 2세(주전 786-746년) 말기에 활동을 시작했던 호세아는 음란한 여인 고멜과 결혼함으로써 당시에 북왕국 백성들이 얼마나 철저하게 하나님을 버리고 이방 종교에 빠졌는가를 자신의 삶으로 직접 보여 주었다. 그는 하나님과 이스라엘과의 관계를 부부 관계로 묘사하면서, 이스라엘의 바알 숭배가 남편이신 하나님을 버린 것이나 다름없는 것임을 여러 차례 고발하였다(호 2:5-8; 4:11-14; 10:1-2 등). 호세아의 이러한 메시지는 남왕국의 예레미야에게 그대로 계승되었다. 예레미야의 고발에 의하면 유다 백성은 수풀이 우거진 곳(신전이나 산당)에서 신전 창기와 더불어 제사를 드렸으며, 돌과 나무로 된 헛된 우상을 향해 절하였다(렘 1:16; 2:20-28; 3:6-10; 10:1-11 등). 그들이 섬기고 예배하는 이방 신들의 수는 너무도 많아서 남왕국 성읍들의 숫자와 맞먹을 정도였다(렘 2:28; 11:13). 남왕국 멸망 직전에 활동했던 에스겔의 메시지도 이와 비슷한 상황을 지적하고 있다. 그에 의하면 유다 백성들은 도처에 지은 산당을 여러 가지 색깔로 꾸미고서는 그곳에서 여러 신들을 섬기는 음행을 저질렀으며, 태양상을 비롯한 각종 우상들을 만들거나 벽에 그려놓고서는 그 앞에서 경배하였다(겔 6:4-6; 8:3-16; 16:15-18 등). (3) 자녀를 제물로 바치는 인신 제사 이상에서 보듯이 하나님께서 세우신 예언자들은 남북 왕국의 우상 숭배 행위를 격렬하게 비난하였다. 그런데 그 중에서도 특히 하나님의 진노를 샀던 행동이 하나 있었다. 자녀를 제물로 바치는 행위가 바로 그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예배 행위는 도무지 용납할 수 없는 무거운 범죄 행위였다: "또 네가 나를 위하여 낳은 네 자녀를 가져 그들에게 드려 제물을 삼아 불살랐느니라. 네가 너의 음행을 작은 일로 여겨서 나의 자녀들을 죽여 우상에게 붙여 불 가운데로 지나가게 하였느냐?" (겔 16:20-21) 당시에 가나안 사람들은 사람들 죽여서 제물로 바치는 이른바 인신 제사(人身 祭祀; human sacrifice)야말로 신에게 드리는 최고의 예물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처음부터 이스라엘 자손에게 원하신 것은 레위기 1-7장의 제사 규정에 명시된 바와 같이 짐승과 곡물을 제물로 드리는 제사였다. 사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으로 하여금 이삭을 제물로 바치지 못하게 하시고 이삭 대신에 수양을 제물로 바치게 하신 것은, 인신 제사라는 그릇된 예배 행위를 교정하려는 목적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이것은 결국 이스라엘의 야웨 하나님이 가나안 지방의 신들처럼 아들의 생명을 요구하는 비도덕적이고 저급한 신이 아니라, 우주 만물을 창조하시고 사람의 생명을 주관하시는 지극히 윤리적인 신임을 강조하는 것에 다름 아니다. 그런데도 이스라엘은 자기 자녀를 제물로 바치는 인신 제사의 악습에 빠져들곤 했다. 북왕국 이스라엘의 왕들(왕하 17:17) 및 남왕국 유다의 아하스 왕(왕하 16:3)과 므낫세 왕(왕하 21:6) 등이 그러했다. 예레미야(7:31)나 에스겔(16:36; 20:26, 31; 23:37)의 메시지 역시 마찬가지이다. "너는 결단코 자녀를 몰렉에게 주어 불로 통과케 말아서 네 하나님의 이름을 욕되게 하지 말라...."고 명하는 레위기의 제사 규정(레 18:21; 20:2-5)도 따지고 보면 인신 제사가 이스라엘 전역에서 얼마나 널리 행해졌는지를 분명하게 보여 주는 한 예에 해당한다. 2. 하나님께 예배만 드리면 된다는 잘못된 생각 (1) 삶과 유리된 제사 우상 숭배 못지 않게 이스라엘의 예배를 빗나가게 한 것은 예배가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사는 삶과 전혀 무관한 것인 양 생각하던 태도였다. 대단히 많은 이스라엘 사람들이 그러한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이 점에 있어서는 지배 계층이나 일반 백성이나 별 차이가 없었다. 그들은 한결같이 일상 생활이야 어떻든 많은 제물을 준비하여 정해진 시기에 하나님께 예배만 드리면 된다는 생각에 사로잡혀 있었다. 이처럼 잘못된 생각을 통렬하게 비판한 자들이 바로 예언자들이었다. 특히 주전 8세기 이후로 활동하기 시작한 문서 예언자들이 그러했다. '문서 예언자'(the written/writing/literary prophets)는 자기 이름으로 기록된 책(또는 문서)을 가지고 있는 예언자들을 일컫는 바, 후기(後期) 예언자라고 불리는 그들은 왕을 비롯한 지배 계층이 강화된 왕권을 이용하여 힘없고 약한 백성들을 괴롭히고 있는 현실을 고발하였으며, 권력층의 사치와 향락 풍조를 비난하였다. 그 중에 가장 대표적인 예언자가 바로 최초의 문서 예언자인 아모스였다(암 3:7-8; 7:14-15). 북왕국의 여로보암 2세 말기에 활동한 아모스는 이스라엘 공동체가 현저한 도덕성의 위기에 직면해 있는 것을 통찰하고서, 지배층의 착취와 억압(암 2:6-8; 3:9; 5:11; 8:4 등) 및 사치와 향락(암 3:15; 4:1; 5:11; 6:4-6 등)을 매우 강경한 어조로 비판하였다. 그는 또한 언론(암 2:12; 5:10, 13)과 사법(암 5:12)까지도 왜곡시킴으로써 공법을 인진(쓴 풀)으로 만들고 정의를 땅에 던지는 자들의 악독함을 준열하게 고발하였다(암 5:7). 아모스의 이러한 메시지는 그보다 약간 늦게 남왕국에서 활동을 시작한 이사야(사 1:21-23; 3:14-26; 5:8-12, 22-23 등)나 미가(미 2:1-2, 8-9; 3:1-9; 6:10-11 등)의 경우에도 거의 똑같이 나타나고 있다. 남왕국 유다가 멸망하기 직전에 활동했던 스바냐(습 1:4-9; 3:1-7), 하박국(합 1:2-3), 예레미야(렘 5:1, 26-28; 9:3-9, 13-14 등), 에스겔(겔 7:23; 8:17; 9:9; 22:6-12, 23-31) 등의 경우도 예외가 아니었다. 예언자들은 이렇듯이 하나님께서 요구하시는 의로운 삶이 배제된 제사를 드리는 모든 행동을 격렬하게 비난하였다. 그들이 보기에 절대 다수의 사람들은 삶과 유리된 제사를 드렸으며, 희생 제사 그 자체의 효력을 믿고 있었다. 달리 말해서 제사 의식을 행함으로써 그들 자신을 위한 복지와 행복을 보장받겠다는 주술적인 생각이 그들의 마음 속에 있었던 것이다. 일종의 제사 만능주의인 셈이었다. 그러다 보니 토라(율법)에 순종하는 삶은 어디론가 사라져 버리고, 도리어 정해진 때에 하나님께 제물만 많이 갖다 바치면 모든 죄악이 사함을 받고 모든 문제가 해결된다는 생각이 사람들의 예배 의식을 지배하게 되었다. 그 결과 그들이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는 갈수록 형식에 치우치게 되었고, 믿음도 없고 정성도 없는 예배, 곧 하나님을 향한 진실하고 정직한 삶이 배제된 '가인의 제사'가 널리 행해지게 되었다. 말라기 예언자가 비난해마지 않던 불성실한 제사, 곧 하나님의 단에 더러운 떡을 드리는가 하면, 눈 먼 것이나 저는 것, 병든 것들만을 골라 주께 드리는 제사가 그 대표적인 경우에 해당하는 것이었다(말 1:7-8). 상황이 이렇다 보니 하나님을 향한 믿음과 정성, 그리고 토라에 순종하는 진실한 삶을 제물과 묶어 드리는 '아벨의 제사'는 정말 찾아보기 어려웠다. (2) 지나친 형식주의: 북왕국 하나님은 이러한 예배의 변질 내지는 탈선을 매우 싫어하셨다. 그는 제사 만능주의도 원치 않으셨지만, 예배의 본질을 잃어버린 지나친 형식주의도 원치 않으셨다. 그 까닭에 하나님께서는 아모스의 입을 통하여 다음과 같이 말씀하신다(표준새번역 개정판): "나는 너희가 벌이는 절기 행사들이 싫다. 너희가 성회로 모여도 도무지 기쁘지 않다. 너희가 나에게 번제물이나 곡식 제물을 바친다 해도, 내가 그 제물을 받지 않겠다. 너희가 화목제로 바치는 살진 짐승도 거들떠보지 않겠다.... 너희는 다만 공의(히브리어로 '미슈파트,' justice)가 물처럼 흐르게 하고, 정의('츠다카,' righteousness)가 마르지 않는 강처럼 흐르게 하여라"(암 5:21-22, 24). 아모스의 이 예언은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의 가르침을 따라 바르고 의로운 삶을 살 때에 비로소 그들의 제물과 예배가 하나님께 받아들여질 것임을 뜻한다. 그렇지 않을 경우에는 아무리 많은 제물을 바쳐도, 그리고 아무리 열심히 절기를 지켜도 하나님께서 그들의 제물과 절기를 인정하지 않으리라는 것이다. 아모스보다 약간 늦게 북왕국에서 예언 활동을 시작한 호세아도 이 점에 있어서는 예외가 아니다. 그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의 회개를 촉구하시면서, "나는 인애를 원하고 제사를 원치 아니하며 번제보다 하나님을 아는 것을 원하노라"고 말씀하시는 분임을 강조한다(호 6:6). 여기서 이스라엘에게 인애(히브리어로 '헤세드')와 하나님을 아는 것이 없다는 것은 이스라엘에게 하나님을 향한 사랑이나 충성심이 없고, 또 하나님의 뜻을 이해하고서 실천에 옮기려는 노력이 없음을 뜻했다. 한 마디로 토라에 순종하는 삶이 그들에게 없었다는 것이다. 호세아는 또한 이스라엘의 변화된 모습을 상상하면서, 그들이 말씀을 가지고서 야웨께로 돌아오되, 불의한 일들을 버리고 선한 일에 힘쓸 것이요, 수송아지를 대신하는 입술의 제사, 곧 삶 전체를 하나님의 말씀에 비추어 새롭게 변화시키기로 다짐하고 맹세하는 제사를 드릴 것이라고 말한다(호 14:2). (3) 지나친 형식주의: 남왕국 아모스나 호세아와는 달리 주전 8세기 후반에 남왕국 유다에서 활동한 이사야도 거의 같은 메시지를 전한다. 그는 유다 백성이 무엇하러 하나님께 많은 제물을 드리는지 알 수 없다고 하면서, 하나님께서 수양의 번제물과 살진 짐승의 기름을, 그리고 수송아지와 어린 양과 수염소의 피를 싫어하시며 지겹게 여기신다고 말한다(사 1:11). 하나님은 또한 그들이 소중하게 여기는 제사의 날, 곧 월삭(초하루)과 안식일과 각종 절기들까지도 싫어하신다. 하나님께서 진정 그들에게 원하시는 것은 그들이 제사를 드리기에 앞서 먼저 악한 행실과 태도를 고치는 일이었다(1:13-14). 또한 하나님은 그들이 옳은 일 하는 법을 배우고, 공의를 구하며, 억압받는 자들을 도와주되, 특히 고아와 과부의 송사를 변호하여 주기를 원하셨다(1:16-17). 이사야와 거의 같은 시기에 남왕국에서 활동한 미가 역시 같은 맥락에서 하나님께 드리는 제사와 이스라엘 백성의 올바른 삶이 서로 구분되어 있지 않음을 강조한 바가 있다. 그는 일 년 된 송아지를 번제물을 성별하여 하나님께 드린다 해도, 그리고 수천 마리의 양이나, 수만의 강 줄기를 채울 올리브 기름을 드린다 해도, 주께서 기뻐하지 않으신다고 말한다. 심지어 죄 용서를 구하기 위하여 자기 몸의 열메, 특히 자기 맏아들을 제물로 바친다 해도 하나님께서 받지 않으실 것이라고 말한다. 그는 하나님께서 진정 원하시는 제사가 그러한 것들에 있는 것이 않으며, 도리어 공의('미슈파트,' justice)를 행하고 인자('헤세드')를 사랑하며 겸손히 주와 함께 행하는 삶에 있음을 강조한다(미 6:6-8). 남왕국 유다의 멸망 직전에 활동한 예레미야는 또 어떠한가? 그는 하나님께 최상의 제물을 드리기 위해 멀리 떨어진 나라로부터 값비싼 유향과 향품을 수입하는 행동을 못마땅하게 생각한다. 그러한 것들을 곁들여 번제와 희생 제물을 드린다 해도 하나님께서 그것들을 기뻐 받으실 리가 만무하기 때문이다(렘 6:20). 더 나아가서 예레미야는 하나님께 예배드리기 위해 예루살렘 성전으로 출입하는 사람들을 향하여 다음과 같이 강한 어조로 설교하기까지 한다(표준새번역 개정판): "'이것이 주님의 성전이다, 주님의 성전이다, 주님의 성전이다' 하고 속이는 말을, 너희는 의지하지 말아라. 너희가 모든 생활과 행실을 참으로 바르게 고치고, 참으로 이웃끼리 서로 정직하게 살면서, 나그네와 고아와 과부를 억압하지 않고, 이곳에서 죄 없는 사람을 살해하지 않고, 다른 신들을 섬겨 스스로 재앙을 불러들이지 않으면.... 그래, 내 이름으로 불리는 이 성전이, 너희의 눈에는 도둑들이 숨는 곳으로 보이느냐? 여기에서 벌어진 온갖 악을 나도 똑똑히 다 보았다. 나 주의 말이다"(렘 7:4-6, 11). 예레미야의 이 설교는 하나님께 제사 드리는 곳이 무조건 성전으로 불리는 것은 아님을 강조하고 있다. 만일에 유다 백성이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선하고 의로운 삶을 살지 못한 채로 성전에 와서 무턱대고 제사만 드리겠다고 한다면, 그곳은 더 이상 하나님의 성전이 아니라 '도둑의 소굴'(개역개정판)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 그의 논지였다. (4) 예배와 삶은 하나다 이상에서 보듯이, 주전 8세기 이후의 예언자들은 토라에 순종하는 삶이 하나님께 드리는 희생 제사와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음을 줄기차게 강조하였다. 예배와 삶이 불가분의 관계 속에서 하나로 연결되어 있다는 것이다. 이로써 그들은 이스라엘 백성을 깨우쳐 그들로 하여금 생활 속에서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면서 살게 하고자 애썼다. 그들이 보기에 제사나 예배라는 것은 단순히 희생 제물을 드리는 행위를 의미하기보다는, 그 사람의 삶 전체-희생 제물을 포함한-를 하나님 앞에 드리는 것을 의미했다. 신정(神政) 공동체의 생활 규범인 토라에 순종하는 삶이야말로 하나님께서 가장 기쁘시게 받는 제사라는 얘기였다. 이것은 예언자들에게 있어서 제사가 성전에서 드리는 예배 이상의 의미를 지니고 있었음을 알게 해준다. 즉 예배는 삶 전체와 관련되어 있는 것이다. 사실 사무엘이 사울을 책망하면서 "여호와께서 번제와 다른 제사를 그 목소리 순종하는 것을 좋아하심 같이 좋아하시겠나이까? 순종이 제사보다 낫고 듣는 것이 수양의 기름보다 나으니"라고 한 말(삼상 15:22)도 넓게 보면 같은 맥락에 속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이 비난은 아말렉을 진멸하라는 하나님의 명을 무시하고서, 하나님께 제물로 바치기 위해 일부 재물을 탈취해 왔다고 변명한 사울을 겨냥한 것으로서, 하나님께서 정말로 소중히 여기시는 것은 그의 명령에 순종하는 삶이지, 좋은 것들을 취하여 그에게 제물로 바치는 것이 아님을 뜻했다. 제사도 중요하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하나님께 순종하는 삶이라는 것이다. 이와 관련하여 우리는 예언자들의 제의 비판과 같은 어조로 표현되어 있는 잠언의 일부 가르침들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악인의 제사는 여호와께서 미워하셔도 정직한 자의 기도는 그가 기뻐하시느니라"(잠 15:8). 이 격언은 악인의 제사와 정직한 자의 기도를 대비시키면서 경우에 따라서는 제사가 기도보다 못한 것일 수도 있음을 지적하고 있다. 또한 "인자와 진리로 인하여 죄악이 속하게 되고 여호와를 경외함으로 인하여 악에서 떠나게 되느니라"(잠 16:6)는 격언은 인자와 진리 및 야웨 경외를 통하여 속죄가 이루어진다고 봄으로써, 우회적으로 제사 만능주의의 위험성을 경고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경고는 "의와 공평을 행하는 것은 제사 드리는 것보다 여호와께서 기쁘게 여기시느니라"(잠 21:3)는 격언에 의해 뒷받침되고 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너는 하나님의 전에 들어갈 때에 네 발을 삼갈찌어다. 가까이 하여 말씀을 듣는 것이 우매자의 제사 드리는 것보다 나으니 저희는 악을 행하면서도 깨닫지 못함이니라"(전 5:1)는 전도자의 가르침도,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고 그것에 순종하려는 지혜자의 태도와 무조건 제사만 드리면 된다고 하는 미련한 자를 대비시킴으로써,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삶이 형식에 치우친 제사보다 더 나은 것임을 지적하고 있다. V. 올바른 예배를 실천하려면 구약 시대의 이스라엘은 주로 짐승을 제물로 잡아 드리는 희생 제사를 통하여 하나님을 예배해 왔다. 곡물을 제물로 드리는 경우도 있었지만, 동물 제사에 비하면 그 비중이 훨씬 적은 편이었다. 그리고 사람을 제물로 잡아 바치는 인신 제사는 절대로 용납될 수 없는 것이었다. 그런데 흥미롭게도 구약 시대의 예배를 구성하는 많은 요소들, 이를테면 예배 장소인 성막이나 성전, 등대나 제단과 같은 중요한 예배용 물품들과 기구들, 예배용 노래와 음악 및 악기들, 찬양과 기도와 설교, 성가대와 제사장, 십일조를 비롯한 각종 예물, 각종 절기 등은 오늘에 이르기까지 그 맥을 이어오고 있지만, 희생 제사만큼은 신약 시대 이후로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의 삶에서 사라지고 말았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 위에서 인류를 위해 대속의 죽음을 죽으심으로써, 구약 시대의 희생 제사를 마감하셨기 때문이다(히 9:11-28). 더욱이 신약성서가 율법의 행함이나 제사 행위 자체를 통해서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향한 믿음과 그에 수반되는 선한 삶을 통하여 구원을 얻고 그것을 완성해 간다고 가르치는 까닭에, 사람들은 오늘날 구약 시대의 희생 제사에 대해서 규정하는 레위기를 그렇게 즐겨 읽지 않는다. 그러나 비록 레위기에 규정된 희생 제사들이 오늘의 교회에서 문자 그대로 행해지지 않는다고 할지라도, 그것이 오늘의 우리에게 주는 교훈은 적지가 않다. 무엇보다도 우리는 구약 예배의 핵심을 이루는 희생 제사가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관계, 그리고 하나님과 이스라엘 백성 사이의 관계를 규정하는 매우 중요한 것임을 알아야 한다. 만일에 구약성서에서 희생 제사의 요소를 빼버린다면, 하나님과 이스라엘 사이의 관계는 형체 없는 것이 되고 말 것이다. 왜냐하면 위에서 보았듯이 레위기의 제사법은 하나님의 구원 은총을 경험한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을 섬기고 예배하는 데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상세하게 규정한 것이기 때문이다. 달리 말해서 각종 제사에 대한 규정은 하나님의 구원 은총에 대한 이스라엘의 응답을 기본 특징으로 가지고 있다는 얘기다. 오늘날의 예배 역시 이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모름지기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자는 자신의 예배 행위가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에 대한 감사의 응답이 되게 해야 할 것이다. 또한 우리는 번제로부터 속건제에 이르기까지의 다섯 가지 주요 제사가 오늘날의 신자가 갖추어야 할 예배의 기본 정신을 소중하게 간직하고 있다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것은 오늘의 예배가 이스라엘의 5대 제사가 가지고 있는 기본적인 의미들을 구현하는 데에 힘써야 함을 의미한다. 우리는 하나님께 예배드릴 때마다 전반적인 속죄와 온전한 헌신, 감사와 충성, 화해와 친교, 부지중에 지은 범죄와 남들에게 입힌 손해를 속죄하는 태도 및 손해 배상 등의 기본 정신을 반드시 실천에 옮길 수 있어야 한다. 그 중에서도 특히 오늘의 예배에 부족한 것은, 화해와 친교를 목적으로 하는 화목제의 요소와, 이웃에게 입힌 손해를 배상할 것을 규정하는 속건제의 요소인 것으로 여겨진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많은 노력이 앞으로 필요할 것이다. 마지막으로 우리는 이스라엘의 잘못된 예배를 통해서도 훌륭한 교훈을 받을 수 있다는 점을 알아야 한다. 앞서 살핀 바와 같이, 이스라엘은 하나님 아닌 다른 것들을 섬기고 예배하는 잘못을 범했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께 드려야 할 제사를 지나치게 형식적으로 드리는 경우가 너무도 많았다. 특히 후자의 경우, 이스라엘 백성은 삶 속에서 하나님의 공법과 정의를 실천하지 않아도 제사만 드리면 모든 죄악과 잘못이 면책된다는 잘못된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이러한 태도는 중세의 면죄부 매입 행위와 전혀 다를 바가 없다. 하나님께서 세우신 예언자들은 바로 그 점을 불만스럽게 생각했다. 그리하여 그들은 삶과 유리된 제사를 강하게 비판했다. 이 점에서 우리는 예배와 삶이 서로 분리될 수 없는 것임을 다시금 새롭게 인식할 필요가 있다. 예배는 자신의 삶을 제물로 하여 하나님께 드리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삶 전체가 곧 하나님께 드려지는 예물에 해당하는 바, 그 삶 전체를 정해진 날에 하나님께 드리는 것이 곧 제사요 예배라는 것이다. 따라서 예배는 삶의 결정체요 삶의 열매라 할 수 있다. 한국 교회의 맹점 중의 하나는 예배 만능주의에 빠져서 예배와 삶을 분리시키고 있다는 점이다. 바울의 예배 이해(롬 12:1-2)에 잘 나타난 바와 같이, 오늘의 그리스도인들은 예배 자체를 거룩하게 드리려고 노력해야 할 뿐만 아니라, 예배를 유효하게 하는 것은 결국 그의 삶이라는 인식에 기초하여 자신의 삶 전체가 곧 예배라는 생각을 가지고 세상을 살아야 할 것이다. parent.ContentViewer.parseScript('b_1257288'); |
출처: 송수천목사설교카페입니다! 원문보기 글쓴이: 송수천목사설교카페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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