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장로교의 역사 한국 장로교회의 시작은 곧 한국 개신교회의 시작과 다름이 없다고 할 것이다. 한국 최초의 장로교인인 서상륜 등은 비록 국외에서이긴 하지만 선교사가 입국을 하기 전에 먼저 성경을 우리말로 번역하여 쪽복음(한 개의 복음서 내용만 담은 성경책자)을 가지고 복음의 씨를 뿌려 교회의 터전을 닦았다. 그로 말미암아 우리 나라 최초의 장로교인들에 의해 한국 최초의 장로교회이자 개신교회는 소래(송천・松川)교회가 황해도(1884년)에 세워지게 되었다. 현재 총신대학 양지 캠퍼스에는 소래교회를 복원하여 옛 선조들의 신앙을 본받고 느끼도록 하고 있다. 1884. 9. 22 미국 북장로교에서 의료 선교사 알렌(H.N.Alen)이 입국하여 의료 봉사로 복음 전도의 길을 열고 선교 활동을 한 이후, 1885. 4. 5 부활절에 마침내 장로교 선교사인 언더우드(H.G.Underwood)가 우리나라에 들어오게 되었다. 그는 부임 이후 얼마 안되어서 압록강에서 32명에게 세례를 베풀기도 했는데, 이는 선교사가 입국하기 전에 이미 이 땅에 신앙을 고백하는 장로교인이 많이 존재했었음을 말해 준다. 초기에 설립된 장로교회들을 보면 소래교회, 서울의 새문안교회, 연동교회, 승동교회, 안동교회, 평양의 장대현교회 등이다. 이후 이들 교회는 크게 부흥하여 인근 지역에서 중심적인 역할을 감당하게 된다. 1889년에는 오스트레일리아 장로회 소속인 선교사들이 들어와 경남 일대에서 선교 활동을 폈으며, 1892년에는 미국 남장로교 소속의 선교사들이 들어와 호남 지역을 중심으로 선교 활동을 시작했고, 1893년에는 선교사들이 점점 많아지면서 교회 설립이 본격화되고 교세가 증가하자 모든 장로교 선교사들이 <장로회 선교 공의회-Presbyterian Mission Council>를 조직하여 선교 정책과 활동 방향을 의논하게 되었다. 1898년에는 캐나다 장로교 소속의 선교사들이 들어와 함경도와 간도 지역을 중심으로 선교 활동을 폈다. 1901년에 조선인 장로들도 참여하여 <조선 예수교장로회 공의회>로 재조직하였다. 1901. 5. 15에는 평양 장로회 신학교를 설립 개교하였다. 이렇듯 제각기 진출한 4개의 장로교 선교회는 한국 장로교회의 창설을 위해 서로 긴밀한 협력을 위하는 한편, 신학 교육, 문서 사업 등에서 연합을 도모하기로 했다. 이들은 장로교 공의회(Presbyterian Council)를 조직하여 협력 방안을 구체화하다가 마침내 4개의 장로교회가 협동으로 연합 장로교신학교(평양 신학교)를 설립하게 되었다. 장로교회는 초창기로부터 보수주의 신학의 든든한 기초 위에서 성장해 왔다. 유일한 장로교 신학교였던 평양 신학교의 성격은 설립자인 마포 삼열(Marfet Samuel) 박사의 희년 기념 연설 가운데 "나는 사도 바울이 결심하였던 바와 마찬가지로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복음 이외는 다른 것은 전하지 않기로 결심하였다"는 말속에 잘 드러나고 있다. 1903년부터 일기 시작한 부흥의 기운은 1907년에 그 절정에 달하였는데, 이 놀라운 대부흥의 역사는 장로교회가 그 중심이었다. 그 후 장로교회는 신앙뿐만 아니라 그 세력에 있어서도 괄목할 만한 성장을 가져오게 된다. 1907. 9. 17에 평양의 장대현교회에서 당시 교세가 노회를 조직할 정도에 이르렀기 때문에 노회를 조직하고 독립된 노회라는 의미에서 <미국 장로회 조선 독노회(獨老會)>라고 불리우게 되었으니 당시 4개의 각기 다른 장로교파가 분할 선교한 조선 장로교회가 하나의 교회로 성립되었던 것이다. 교세는 예배처 984개처, 세례교인 17,890명, 원입교인 21,482명이고 선교사를 포함한 목사 47명, 장로 53명(어떤 자료에는 33명의 각파 장로교 선교사와 36명의 한국인 장로) 이였다. 제1회 창립 노회에서는 서상륜의 동생인 서경조, 한석진, 이기풍, 송린서, 방기창, 길선주, 양전백 등 평양 신학교 제1회 졸업생 7명에게 목사 안수를 하여 최초의 조선인 목사 7명을 배출했는데 그 중 이기풍을 제주도 선교사로 파송하여 조선인 최초의 선교사가 되었다. 1910년 국권을 잃고 일본의 식민지가 된 이후 장로교회를 비롯한 교회들이 탄압을 받았다. 1911년 제 5회 노회에서 총회를 조직하기로 결의하고 노회 산하의 각 대리회(시찰회?)를 노회로 조직 편성하기 시작했다. 1911년 10월 8일부터 1912년 2월 15일 사이에 전라노회, 경기 충청노회, 황해노회, 함경노회, 경상노회, 남평안노회, 북평안노회 등 7개 노회가 조직되었다. 7개 중 4개가 북반도 지역에 있으며 특히 평안도에 2개 노회가 조직되었다는 사실은 북장로교가 먼저 들어와 열심히 선교활동을 한 결과이며, 그 중에도 평양 신학교를 중심으로한 평안도의 장로교 교세가 강했다는 것을 알 수 있게 해준다. 당시에 평양은 조선의 예루살렘이라고 불리 울 정도였다. 한국 기독교는 무엇보다 하나님의 놀라우신 섭리와 초대 교회 사역자들의 열심, 그리고 한국인의 종교적 심성과 국가 사회적 배경이 조화를 이루어 급속히 성장한 결과 독노회를 조직 한지 5년만인 1912년에 감격적인 총회의 조직이 이루어지게 되었다. 1912년 9년 1일 평양의 장로회 신학교에 전국 7개 노회 총대 목사 96(선교사 44, 한국인 목사 52), 장로 125 계 221명이 모여 <조선 예수교장로회 총회>를 조직하고 초대 총회장 으로 언더우드 목사를 선출했다. 당시 교세는 교회수 2,054교회, 목사 128명, 장로 225명, 세레교인 53,008명, 교인 총수 127,228명이었다. 첫 총회는 중국 산동성에 박태로, 사병순, 김영훈 등 3명을 선교사로 파송하기도 하였다. 1919년 특별히 억압받는 민족의 고통 속에서 교회의 민족적 의지를 고창한 3.1독립운동에 적극 참여하면서 장로 교회는 더욱 극심한 박해를 받았으나 이 운동이 있은 뒤에 조선인들이 기독교를 새롭게 이해하기 시작하였으니 이제 기독교는 더 이상 외래 종교가 아니라 가장 애국적이요 우리 민족을 사랑하는 종교로 이해되었다. 그런 와중에서도 1920년대와 30년대는 사경회와 부흥의 물결이 다시 일었다. 요한계시록 강해로 유명한 길선주 목사와 신유의 기사를 행사하며 전국을 순회한 김익두 목사가 이 시기에 활약하였고 해외 선교와 국내 전도활동, 농촌운동 등을 통해 지속적인 성장을 해 왔다. 1924년에는 남선교회 전국 연합회와 청년회 전국 연합회의 전신인 <기독 청년 면려회 조선연합회 >가 창립되었고, 1928년에는 <조선 예수교장로회 여전도회 총회>가 조직되었다. 1930년대로 들어서면서 신학적인 갈등이 노출되기 시작하였다. 1932년부터 일기 시작한 일제의 신사참배 강요로 기독교 학교가 어려움을 겪기 시작했다. 앞서 언급했던 것처럼 한국 장로교회는 처음부터 보수주의 신학을 바탕으로 자라 왔으나, 점차 외국의 새로운 신학 사상과 방법론에 눈뜨고 귀국한 신진 신학자들에 의해 도전 받기 시작하였다. 이에 대하여 평양 신학교의 박형룡 박사는 당시의 교계의 형편을 다음과 같이 술회하고 있다. "한국 장로교회는 초기 50년 동안 정통 신학교의 고수에 성공하였으나 그 말단에 가서는 자유주의의 잠행적 운동의 침입을 면치 못했던 것이다. 다른 교파에서 공공연하게 진행되는 자유신학 운동에 발맞추어 암암리에 정통신학 반대의 행동을 취하는 인사들이 장로교회 안에 생겼던 것이다. 당시 자유주의 신학은 성경의 고등비평과 성경의 유오(有誤)를 주장하며, 그리스도의 동정녀 탄생, 그리스도의 신성, 십자가 대속, 재림 등을 부인하는 것이다." 1934년에는 조선 예수교장로회 선교 50주년 희년 축하 예배를 거행하였다. 한편에서는 교회 안에서 여러 분파 운동이 나타났다. 이단 사이비도 대두하기 시작하였다. 신학 노선의 갈등이 드러나기 시작한 것이다. 1938. 9. 10 제27회 총회는 일제의 탄압에 굴복하여 신사참배하기로 가결하니 진리를 수호하는 주의 신실한 종들은 신사참배 반대운동을 전개하였고 평양 장로회 신학교도 신사참배를 거부하고 문을 닫았다. 주기철, 한상동, 주남선 목사 등은 검속되어 평양 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루다가 주기철목사 등 많은 분들이 순교하였으며 한상동, 주남선목사와 손명복, 조수옥전도사 등은 평양 형무소에서, 손양원목사는 청주 감옥에서 옥고를 치뤘다. 1940. 4. 19 이러한 도전은 총회적으로는 신학적인 대립을 가져오게 되었고 여러 요소들과 함께 교회의 평화를 위협했다. 그 무렵 일제(日帝)의 신사참배 강요로 한국교회는 함께 어려운 시련에 부딪치게 되었는데, 이 문제에 있어서 보수주의자들과 자유주의자들의 입장은 서로 다른 것이었다. 평양 신학교는 바로 이 문제 때문에 자진해서 무기 휴교에 들어간 반면 자유주의 신학자들은 신사참배 문제와 상관없이 서울 승동교회 안에 '조선 신학원'을 세웠다. 이렇게 해서 세워진 조선 신학교는 해방 전후로 독무대적인 활동을 하게 되었다. 그러자 일제 말엽에 신사참배를 반대해서 옥에 갇혔던 목사들과 망명 중이던 교회 지도자들은 뜻을 같이하여 보수신학의 보루였던 평양 신학교의 전통을 이어서 보수 신학교를 새로 세워야 할 필요성을 느끼게 되었다. 1943년에는 성경에서 구약과 요한계시록이 삭제되고 찬송가가 개편되었다. 그 해에 일제의 강압으로 교단명을 <일본 기독교 조선 장로교단>으로 개편되었다. 1945년 7월에는 감리교회를 비롯한 여러 교회와 함께 <일본 기독교 조선교단> 으로 통합되었다. 1945. 8. 15 해방을 맞아 출옥하였다. 일제시대에 신사참배를 거부하며 투옥되었던 한상동 목사를 선두로 하는 경남 지역 인사들이 출옥한 후 신사참배를 한 인사들을 정죄하게 되었고 이것이 발단이 되어 부산을 중심으로 한 인사들이 교단을 분리하여 순수한 개혁주의 보수신학교를 세우기로 하였다. 1946년 고려 신학교가 태동하였다. 1947년 조선 신학교 학생 51명이 김재준 교수에 대한 진정서를 제출하였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독립을 얻은 이후에 장로교 총회를 재건하였으나 해방 이후 한반도는 38선을 기준으로 남북으로 분단되었다. 38선 이북의 장로교회들은 공산당의 지배 하에서 박해를 받았다. 많은 기독교인들이 신앙의 자유를 찾아 남쪽으로 내려왔으며 6・25 전쟁으로 월남하는 기독교인들이 늘어났다. 이 때 이북에 있던 적지 않은 교회와 노회도 월남해 왔다. 이를 계기로 오늘날까지 이북 노회라 불리우는 피난한 노회가 존속되고 있다. 1948년 옥중 성도들이 부산의 '고려 신학교'를 중심으로 정식 교단을 창립하였으니 <대한 예수교 장로회 고신 총회>가 되었다. 그 후 '고려 신학교'의 교장으로 있던 박형룡 박사는 자유주의의 신학적 도전을 효과적으로 대처하며, 정통 신학을 보수하기 위하여 서울로 상경하여 남산에 '장로회 신학교'를 설립하였다. 조선 신학교(1940. 4. 19 개교)가 정규대학으로 인가를 받았다. 1949. 1월에 합동 찬송가를 발행하였다. 1949. 4. 19 서울 새문안교회에서 모인 제35회 총회에서는 장로회 신학교를 총회 직영 신학교로 인준하였다. 이것은 교회의 순수성을 지키려는 보수신학의 승리였다. 이처럼 교리적 순수성을 지킨 총회는 WCC(World Council of Churches: 세계교회협의회)와의 유대 관계에 대한 찬반양론으로 다시 한번 분립의 진통을 겪게 된다. 1951. 4. 조선신학교를 한국 신학대학으로 명칭 변경하였다. 1952. 9월 전쟁이 아직 끝나지 않고 있던 때에 <대한 예수교장로회 총노회>를 조직, 분립하여 오늘의 예장 고신측이 되었다. 1953. 6. 10 다시 교파 분열이 시작되어 김재준목사를 비롯한 함경도 출신 인사들이 중심이 된 조선신학교(한신대학)의 신신학이 문제가 되어 <대한 예수교장로회 호헌총회>를 조직, 분립하였으며 1954년 6월 제 39회 총회에서 <한국 기독교 장로회>가 분립하였다. 1954년 미국 에반스톤에서 열린 WCC대회에 대한 상이한 견해 차이가 드러나기 시작하면서 여기에 속한 선교사들에 대한 수용 찬반의 의견이 대두되기 시작하였다. 1959년 전쟁이 끝난 뒤 제44회 총회에서 WCC가 신학적으로 자유주의화 되었기 때문에 탈퇴를 해야 한다는 입장과 그렇지 않다는 상반된 입장이 점점 가시화되면서 총회는 결국 WCC를 지지하는 총회와 반대하는 총회로 갈라지게 된 것이다. WCC를 지지하는 자들은 연동교회에서 총회를 속개하여 ‘통합총회'를 이룩했고, 통합측을 추종하는 교수와 학생들은 신학교를 분립하기에 이르렀다. 1960. 12. 13 신학교 문제와 WCC 반대하는 자들은 승동교회에서 교단의 합동을 위하여 NAE(National Association Evangelism)와의 관련을 끊고 먼저 고신측 교단과 합동(合同)하여 <대한 예수교장로회(합동) 제45회 총회>로 하였다. 기념 사업으로 고신측에서 편집하여 온 새찬송가를 생명의 말씀사에서 발행하여 함께 사용하였다. 1961년 평양신학교의 전신을 지키던 장로회 신학교 교수와 학생들은 총회의 결의에 의하여 고려신학교와 합동하였다. 1961. 6. 21 대한예수교 성경장로회(현 대신측) 창립총회 개최. (발기인 김치선박사, 마두원선교사) 초대 총회장에 김치선 박사 피선. 1963. 9. 17 고신측 7개노회(부산, 경남, 경북, 전라, 진주, 경동) 교회수 445, 목사 116명이 재 분립하여 나가서 제13회 고신총회를 회집하였다. 1965년 지금의 사당동(서울특별시 관악구 사당동 산 31-3번지)에 총회 직영 신학교를 신축하여 이전하게 되었으며, 1967년에는 1959년 통합측의 이탈로 인하여 문교부로부터 학교법인 '대한 예수교 장로회 총회신학교'(1975년 '총신대학'으로 1995년에는 '총신대학교'로 개명)로 설립인가를 받고 많은 인재를 배출하며 장족의 발전을 하여 소위 장자적 총회로서의 명분을 유지하였다. 1975년 총회 내에 교권주의자들의 횡포와 신학적 좌경화(모세모경의 편집설등)의 분위기가 싹트기 시작하였고 이영수목사를 비롯한 몇몇에 의한 교단이 사조직화 되고 교단 신학교는 사유화되어 가는 문제가 확산되자 이에 대한 개혁의 목소리가 일기 시작하였다. 1979년 9월 제45회 총회(대구 동신교회당)는 시작 전부터 총신대학교의 신학적 좌경화와 교권주의의 횡포에 대한 지적이 있어 왔기 때문에 이를 예감한 교권주의자들의 사전 소집과 교회당 정문 및 출입문 완전 봉쇄로 입장하지 못한 채 자파 세력만으로 총회를 진행하여 임원 선거가 끝났다. 이렇게 해서 입장하지 못한 총대들이 개혁의 기치를 들고 <대한 예수교 장로회(보수) 총회>가 탄생하고 방배동에서 총회 신학교를 별도로 운영하게 되었다. 1981년 박윤선박사와 뜻을 같이하는 인사들이 끝까지 합동측에 남아서 개혁운동을 펼쳤으나 교권주의자들의 횡포에 뜻을 이루지 못하고 분립하여 나와서 합동신학교를 설립하고 <대한 예수교 장로회(개혁) 총회>를 구성하였다. 1983년 대한 예수교 장로회(보수) 총회와 대한 예수교 장로회(개혁) 총회는 신학과 신앙의 동질성을 인정하고 연합하여 새롭게 <대한 예수교 장로회(개혁) 총회>를 구성하였다. |
출처: 소명 카페 원문보기 글쓴이: 새벽종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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