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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사중복음의 기원

에반젤(복음) 2021. 8. 21. 06:44
사중복음의 기원
<목창균 /서울신대 총장>


 서론 
중생, 성결, 신유, 재림의 사중복음은 한국 성결교회가 어떤 교회인가를 제시해주는 표지요, 정체성 그 자체다. 사중복음은 흔히 심프슨으로부터 유래된 것으로 이해되어왔다.  그러나 최근 들어 전통적 해석을 부정하는 새로운 견해가 제시되었다.  성결 오순절 운동 유래설이 그것이다. 성결교회의 사중복음은 심프슨이 아니라 성결-오순절운동에서 고조되던 사대 표제를 만국성결교회가 수용한 것으로부터 유래되었다는 것이다.  사중복음이란 용어는 심프슨으로부터 유래했지만, 그 내용은 웨슬리적이라는 것이다.  
    성결교회는 사중복음을 강조해 왔으나, 그것을 체계적으로 정립하지는 못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따라서 소위 성결-오순절 운동 유래설은 사중복음의 신학적 배경과 기원에 대한 논의의 새로운 장을 연 것으로 평가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견해는 주로 성결론에 근거했다는 한계를 지니고 있다.  따라서 그것을 사중복음 전체의 근원 해명으로 간주하기에는 미흡점이 적지 않다. 
    이 연구의 주  목적은 성결교회 재림론의 형성배경과 발전과정을 추적하여 성결 -오순절운동 기원설의 문제점을 지적하고 사중복음의 기원을 규명하는 것이다.  성결교회의 사중복음이 심프슨으로부터 전적으로 유래했다고 보는 견해와 심프슨으로부터 전혀 유래하지 않았다는 견해, 즉 심프슨 유래설과 성결-오순절 운동 유래설은 모두 극단적이다. 필자는 양자 택일이 아닌, 양자 모두를 포용하는 통전적 입장을 오히려 사중복음 기원에 대한 적절한 이해로 생각한다.  한국 성결교회의 사중복음은 단순히 심프슨이나 혹은 성결-오순절 운동과 같은 단 한가지 근원으로부터 유래한 것이라기보다 오히려 그들 모두를 포함한 여러 근원으로부터 유래한 것이다. 



I.  성결-오순절운동 기원설
  1. 성결교회 재림론은 웨슬리적인가?
사중복음의 성결-오순절운동 유래설은 성결교회가 사중복음의 내용을 웨슬리적으로 해석했다는 것과 성결교회가 사중복음의 명칭과 순서를 바꿨다는 것을 주요한 근거로 삼는다. 성결교회가 사중복음이란 용어를 심프슨으로부터 빌렸지만 그 내용은 웨슬리적인 것이 특징이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재림론의 경우 그 내용이 과연 웨슬리적인가 하는 것이다.  성결교회의 전통적 재림론은 전 천년설과 환란 전 휴거설을 중심 축으로 형성되었다.  이것은 [조선 예수교 동양선교회 성결교회]의 신앙개조에 의해서도 확인된다.

주께서 육신을 가지시고  친히 천년왕국시대 전에 재림하실 일이 절박함을 우리가 믿노니 주께서 생각지 아니한 때에 공중에 오시기는 성도들을 영접하실 일과 그 성도들과 같이 지상에 임하실 일을 구별할지니라.
 
이는 그리스도의 천년왕국 전 재림과 재림의 두 단계, 즉 성도들을 위해 오시는 공중재림과 성도들과 함께 오시는 지상재림을 명시하고 있다.  
이것은 웨슬리로부터 직접 유래한 것으로 보기 어렵다.  왜냐하면 웨슬리가 전 천년주의자인가, 후 천년주의자인가 하는 것은 아직도 해석자들 사이에서 논란이 될 만큼,  웨슬리 자신이 명확한 입장을 밝히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는 자신이 전 천년주의자라거나 후 천년주의자라고, 혹은 둘 중 어느 것을 선호한다고 말한 바도 없다.  그의 설교나 신약성서주석에는 전 천년설적 요소와 후 천년설적 요소가 혼재해 있다.  따라서 전 천년설을 변호하는 해석자들은 웨슬리를 전 천년주의자로,  그리고 후 천년설을 변호하는 자들은 그를 후 천년주의자로 해석하는 경향이 있다.  전자는 직접적 증거보다 오히려 간접적 증거에 더 의존했다.  웨슬리가  전 천년주의자인 하틀리를 칭찬했다는 것,  웨슬리가 존경한 초기 교부들이나 그와 가깝거나 그에게 영향을 끼친 인물들이 전 천년주의자였다는 것으로부터 웨슬리 역시 전 천년주의자라 추론했다.  반면, 후자는 웨슬리가 후 천년설의 토대가 되는 낙관적  역사관을 가졌다는 것,  요한계시록 20장에 대한 그의 주석은 천년왕국 이후의 재림을 명시하고 있다는 것을 근거로 그를 후 천년주의자로 간주했다.
웨슬리의 입장은 일반적으로 전 천년설보다 오히려 후 천년설에 가까운 것으로 이해된다. 이는 현대 미국의 대표적 성결운동 신학자인 데이턴(Donald W. Dayton)에 의해서도 입증된다.  "역사적으로 메토디스트와 성결 전통은 종말론에 별로 관심이 없었거나 혹은 흔히 전 천년설에 반대되는 후 천년설적 경향을 띠고"있다.  전 천년설과 신유와 같은 ''여러 테마들을 후기에 옹호한 자들은 종종  자기들의 원천이 웨슬리라고 주장하기도 했음이 사실이다.  웨슬리가 전 천년설을 가르쳤고 신유에 대해 정통주의자였으며...  그러한 모든 주장들은 잘못되었거나 최소한 과장된 것이다."  하워드 스나이더 역시 웨슬리의 견해를 후 천년주의적인 것으로 해석했다.
    설사 웨슬리의 입장을 전 천년설에 가까운 것으로 해석한다 할지라도, 그것은 역사주의
적 전 천년설이지 성결교회의 미래주의적 전 천년설은 아니다. 왜냐하면 19세기 이전 어느 누구도 환란 전 휴거설로 요약되는 미래주의적 전 천년설을 주장한 바 없기 때문이다.  미래주의적 전 천년설은 1830년대에 영국 프리머드 형제단의 죤 다비(John N. Darby)에 의해 최초로 제시된 해석이다. 역사적 전 천년설은 다니엘서와 요한 계시록 등에 기록된 마지막 날에 대한 예언들이 교회의 전 역사를 통해 성취된다고 주장하는 반면,  미래주의적 전 천년설은 그 예언들이 교회 역사 내에서 성취되지 않으며 그리스도의 재림 직전의 짧은 기간 내에 이루어질 것이라고 믿는다. 역사적 전 천년설은 그리스도의 재림을 공중재림과 지상재림, 두 단계로 구분하지 않으며 환란 통과설을 주장하는데 반해,  미래주의적 전 천년설은 그리스도의 이중재림과 환란 전 휴거설을 주장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결교회 사중복음의 내용은 웨슬리적이라고 주장하여 그 재림론 역시 웨슬리적인 것으로 속단한 것은 웨슬리의 재림론과 성결교회의 재림론에 대한 비교연구나 성결교 재림론 발전에 대한 역사적 연구에 근거한 것이 아니다.  사중복음 중 성결론이 웨슬리적이라는 것을 근거로 재림론 역시 웨슬리적이라고 추론한 것이다.  따라서 사중복음의 내용이 웨슬리적이라는 주장은 성결론의 경우 타당하나, 재림론의 경우에는 부당하다.



  2. 초기 성결교회는 사중복음의 명칭을 변경했는가?
    성결-오순절운동 기원설의 또 다른 근거는 성결교회가 사중복음의 명칭과 순서를 바꿨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초기 동양선교회는 과연 사중복음의 명칭을 변경했는가? 1905년 11월 [동양선교회]조직 후, 전도담당 이사 [나카다 쥬우지]가 발표한 [동양선교회란 무엇인가?] 란 글에 따르면, 초기 동양선교회가 사용한 사중복음의 명칭은 심프슨의 사중복음 명칭과 동일하다.  "본회의 목적은 일본을 비롯하여 동양 여러 나라의 교화로서 그리스도의 신부된 성(聖) 교회를 세우는 것입니다. 곧 주의  재림에 대한 준비입니다. 이 일을 위하여 사중복음이라고 일컫는 구원, 성결, 주의 재림, 신유를 주장합니다." 이는 사중복음의 명칭변경이 [동양선교회] 창립 초부터가 아니라 후대에 이루어진 것임을 말해준다.  따라서 이것은 성결교회의 사중복음이 심프슨으로부터 유래되지 않았다는 근거라기보다 오히려 성결교 사중복음의 발전근거로 이해하는 것이 더 적절할 것이다.
 
  3. 만국 성결교회는 과연 성결-오순절 운동에서 고조되던 사대 표제를 수용했는가?  

    미국 성결운동은 중생, 성결, 신유, 재림의 사대 표제를 고조했던 것이 아니라 오히려 신유, 재림, 세계 복음화와 같은 성서적 교리를 배제하려는 경향이 있었다.  1878년 성결운동의 탁월한 지도자 다니엘 스틸(Daniel Steel)은 전 천년설은 온전한 성결의 교리와 절대적으로 양립할 수 없다고 선언했으며, 1887년 [전국 성결협회]는 신유 또는 재림을 취미로 삼는 자들에게 회원권을 주지 않기로 결의했다.  그러나 1890년대 중반, 성결운동의 급진파들은 신유와  재림교리를 옹호했다. 만국 성결교회가 그것을 신앙개조에 포함한 것은 수개월간에 걸친 심사숙고와 기도의 결과였으며 만국 성결교회의 혁신적인 면이기도 했다. 
    한편, 현대 오순절운동은 1901년 초, 캔사스주의  [베델성서대학]에서 팔함(Charles F. Parham)에 의해,  또는 1906년 로스안젤레스 아주사 거리의 부흥회를 통해 시작되었다.  미국 최대 백인 오순절교파 [하나님의 성회]는 1914년에, 맥퍼슨(Aimee S. McPherson)의  [사중복음 국제교회] 는 1927년에,  [하나님의 성결교회]는 1926년에 창립되었다. 오순절 운동은 만국성결교회 창립과 비슷 시기에 일어난 것은 사실이나,  4대 표제는 오순절운동의 복잡한 발전과정의 마지막 단계에서 출현했다. 그렇다면,  만국성결교회가 사대 표제를 오순절운동으로부터 수용했다는 것은 적절하지 않다.  만국성결교회는 창립 초부터 4대 표제의 요소들을 강조한 반면, 오순절운동의 4대 표제는 그보다 훨씬 후대에 출현했기 때문이다.



  4. 성결교회는 심프슨으로부터 사중복음이란 명칭만을 빌려온 것인가?
    성결-오순절운동 유래설은 사중복음은 성결-오순절운동으로부터 온 것이요, 심프슨으로부터는 단지 그 명칭만을 빌려온 것일 뿐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우리의 연구에 따르면, 심프슨은 오순절 운동뿐만 아니라 만국 성결교회에도 적지 않은 영향을 미쳤다. 오순절 운동 역사가들은 최근 오순절 운동의 선구자로서의 심프슨의 역할과 공헌을 높이 평가하고 있다.  영국의 저명한 오순절 운동가 도날드 기(Donald Gee)는 "사중복음"은 심프슨에서 시작되었을 뿐만 아니라 심프슨이 미국 오순절 운동의 씨를 뿌렸다고 주장했다. 오순절 성결교회 역사가 사이난(Vinson Synan)은 심프슨을 현대 오순절 운동의 태동에 영향을 끼친 사람 중 하나로 지적했다. [하나님의 성회] 역사학자 브럼백(Carl Brumback)은 오순절 운동에 대한 심프슨의 유산은 교리, 찬송가, 선교 비젼 등 곳곳에 퍼져있다고 보았다.  브럼호퍼(Edith L. Blumhofer)는 심프슨의 신유의 복음, 전 천년적 종말론, 그리스도 중심적 성결론을 오순절주의의 중요한 서곡으로  평가했다. 웨슬레안 역사가 데이턴 역시 오순절 신학의 "사중유형"(Fourfold pattern)이 19세기 심프슨의 사중복음에서 예견된 것임을 밝혔다. 특히 닌키르켄(Charles W. Nienkirchen)의 최근 저서 [심프슨과 오순절 운동]은 심프슨과 오순절 운동의 관계를 비롯하여, 오순절 운동이 주장한 네 가지 표제, 구원, 성령세례, 신유, 재림이 심프슨에서 유래했다는 것을 명확히 논증했다. 
    한편,  심프슨의 사중복음이 만국성결교회 신앙개조에도 영향을 미쳤다는 것이 전혀 불가능한 일은 아니다.  왜냐하면 만국성결교회의 공동 창립자인 셋 리스(Seth C. Rees)가 심프슨의 제자였기 때문이다. 만국 성결교회사에 따르면,  리스는 심프슨의 숭배자였으며 1888년 미시간주 레이즌 밸리에서 목회하는 동안,  심프슨이 창립한  [기독교인과 선교사연맹]의 미시간지부 회장으로 활동했다. 그 후, 뉴 잉글랜드 지역으로 목회지를 옮겨 심프슨과 더 깊은 교제를 나누게 되었다. "리스는 심프슨의 사역에 깊은 감명을 받았으며 세계 선교와 그리스도의 재림에 대한 그의 견해를 진심으로 받아들였으며, 신유에 대해 대부분 그와 입장을 같이했다." 그는 만국성결교회 초대 총회장을 비롯하여, 1897-1905, 그리고 1926 -33년에 이르는 오랜 기간 동안 총회장을 역임했다. 따라서 심프슨의 전 천년적 재림과 신유의 메시지가 리스를 통해 만국 성결교회에 영향을 끼쳤다고 볼 수 있다. 



  5. 왜 동양선교회 사료들의 증거를 왜 외면하는가?
    동양선교회 사료들은 그 창립자들이 심프슨의 사중복음, 특히 신유와 재림론으로부터 영향을 받았다고 증거하고 있다. 우드(Robert D. Wood)는 [동양선교회] 초기 50년사 [이 죽어야할 손](In these Mortal Hands)에서 동양선교회의 근원을 밝히면서 심프슨과 그의 [기독교인과 선교사연맹]이 동양선교회 창립자들에게 미친 영향을 구체적으로 제시했다.  "카우만과 길보른에 대한 심프슨의 영향이 증가했으며,  그것은 그 후 그들의 강조점들에서 나타났다."  전 천년기적 재림과 신유에 대한 강조가 그것이다.  심프슨은 그리스도의 전 천년기적 재림교리를 열렬히 변호했으며, 카우만과 길보른은 그것을  직접 들었다.  또한 "신유에 대한 심프슨의 강조는 챨스 카우만과 동양선교회에 깊은 감명을 주었다."  이 외에도,  우드는 [동양선교회]가 세계 선교의 목적과 방법, 선교사 후보의 자격 등에 대해 [기독교인과 선교사연맹]의 원칙들을 채택했다고 보았다.  
    동양선교회 창립자들에 대한 심프슨의 영향은 길보른에 의해서도 확인된다. 그는 1919년 10월  29일 심프슨의 사망소식을 듣고 [동양선교회]를 대표하여 보낸 조위문에서 이를 고백했다.

  그의 영향은  [기독교인과 선교사 연맹]에 속한 사람들에 국한된 것이 아닙니다.  모든  교단의 설교자,  선교사,  편집자, 교인들이 전 세계에서 그리스도를 위한 그의 지칠줄 모르는 열심에 의해 감명과 감동을 받았읍니다.  내가 그의 발치에 앉도록 허락되었던 것이 얼마나 기쁜 일인지요.  그의 영감 있는 메시지는 항상 내 영혼을 감동시켰읍니다.
    앞에서 인용한 논거들에 따르면,  성결교회가 사중복음이란 명칭 외에 심프슨으로부터
전혀 영향을 받지 않았다고 주장하는 것은 지나친 견해다.  오히려 동양선교회의 창립자들이 사중복음을 강조하게 된 것은 심프슨의 영향이었다고 보는 것이 더 타당하다. 



II.  사중복음 기원에 대한 통전적 이해
    성결교회의 사중복음이 심프슨으로부터 전혀 유래하지 않았다는 견해와 심프슨으로부터 전적으로 유래했다고 보는 견해 모두 극단적이다.  왜냐하면 성결교회는 사중복음이란 명칭은 물론 전 천년주의적 재림론을 심프슨으로부터 수용했지만,  심프슨의 재림론 전부를 받아들인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성결교회는 세대주의적 재림론의 영향을 여러 경로를 통해 받아들였다.
    성결교회는 세대주의와 비슷한 구조의 재림론를 가지고 있다.  전 천년설과 환난 전 휴거설이 그것이다.  그렇다면 성결교회는 어떻게 세대주의를 접하게 되었는가? 성결교 재림론과 세대주의의 접맥은 성결교회 창립과 재림론 형성 배경에 대한 추적을 통해 확인된다.  한국 성결교회는 미국 만국 성결교회선교사 카우만과 길보른의 동양선교에 그 역사적 기원을 두고 있으며,  직접적으로는 1907년 김상준,  정빈의 전도활동과 복음 전도관 설립을 통해 시작되었다.  성결교회는 이 두 통로를 통해 세대주의와 접하게 되었다.   세대주의는 카우만과 길보론을 비롯한 동양선교회 창립자들은 물론, 김상준,  이명직 등 초기 성결교 지도자들에게 영향을 미쳤다.
 
  1.  동양선교회 창립자

     [동양선교회]의 재림신앙은 미래주의적 전 천년설에 기초했다.  이것은 1905년 11월 [동양선교회]가 조직된 후, 발표한 [동양선교회란 무엇인가?] 란 글에 의해 확인된다.      
 
주의 재림이란 천년기적 재림(전천년 재림)을 가르키는 말인데, 주께서 오늘 밤이라도 성도들을 불러모으기 위하여 공중에 나타나고, 그리고 성도들을 데리고 지상으로 오셔서 천년동안 전 세계를 지배하시는 일...입니다.
 
    카우만이 공중재림과 지상재림, 성도의 휴거를 믿었다는 것은 그의 아내에 의해 증거되고 있다.  "주님이 오실 때, 카우만은 그를 영접하기  위해 들림을 받을 수 있도록 살아 있
기를 간절히 원했다. 그러나 그는 천사장의 나팔이 전 세계에 울려 퍼질 때, 주님과 죽은 성도들과 함께 돌아올 것이다." 길보른 역시 동양선교회가 전파하는 순복음이 무엇인가를 설명하면서 전 천년설적 재림론을 밝혔다. 재림은 "예수께서 왕의 왕으로서 천년기 전에 재림하셔서 이 땅 위에 하나님의 나라를 설립하신다''는 것을 의미한다. [동양선교회]가 전
천년적 재림론을 강조하게 된 것은 창립자 카우만의 재림신앙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  그의 재림신앙은 심프슨,  무디성서학원,  만국성결교회의  영향 아래 형성되었다.

  1) 심프슨
    심프슨은 1880 - 1890년대에 전 천년설로 신자들을 양육한 저명한 복음주의 목사 가운데 하나다. 그는 본래 후 천년주의자였으나, 1870년대 말부터 전 천년주의자로 입장을 바꿨다.그것은 세대주의자 브룩스(James Brookes)와 침례교 신학자 고든(Adoniram J. Gor- don)의 영향에 힘입은 바 컸다. 특히 그는 세대주의 재림개념에 공감하여 세대주의자들과 많은 교류를 가졌다. 1886년 블렉스톤의 설교에 감명을 받은 것은 그가 [기독교인과 선교연맹](Christian and Missionary Alliance)을 창립하는 계기가 되었다. 블렉스톤은 이 연맹의 부총재와 심프슨의 집회 주 강사로 활약했다.  또한 심프슨은 1892년 스코필드(Scofield)가 후원한 집회에 참여하기도 했다. 그러나 그는 세대주의를 완전히 수용했던 것은 아니었다.  교회의 환난 전 휴거를 믿었으나, 대 환난의 기간을 말하는 것이 가능하다거나, 주의 재림이 어느 순간에나 일어날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또한 세대주의의 미래적 예언해석을 오류로 간주하고 역사적 해석을 지지했다.
    재림은 심프슨의 부흥과 선교운동에 가장 활력적 요소였다.  심프슨은 세계 복음화를 그리스도 재림의 전제 조건으로 간주하고 전 천년설과 세계선교를 결합시켰다. 이것은 그의 [기독교인과 선교사연맹]의 목적에도 나타나고 있다.  이 연맹의 목적은 "사중복음의 다른 항목과 더불어 그리스도의 인격적이며 전천년기적 재림의 확산을 촉진하는 것이다." 카우만이 선교사로 소명 받은 것은 심프슨의 집회에서였다.  1894년 카우만은 아내와 함께 시카고 무디교회에서 열린 심프슨의 선교대회에 참석하여 은혜받고 동양에 선교사로 가기로 결심했다. 또한 그가 동양선교를 위한 전도표제로 삼았던 것이 심프슨이 주창한 사중복음이었다.  특히 전 천년설적 재림론은 ''동양선교회 창립자들이 심프슨이 말하는 것을 확실히 들었던 주제''였다. 따라서 카우만과 길보른은 심프슨을 통해 세대주의적 재림개념에 접하게 되었다. 

  2)  무디성서학원
    무디(D. L. Moody, 1837 -1899)는 세대주의적 전 천년설을 수용한 미국 최초의 저명한
 부흥사였으며,  그 후 거의 모든 복음 전도자들이 그의 종말론을 따랐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어드만(W. J. Erdman), 채프만(J. W. Chapman), 톨레이(Reuben A. Torrey)가 그 대표적 예다.  무디는 본래 후 천년주의자였으나 1860년대 후반 전 천년주의로 입장을 전환했다.  그는 그리스도의 전 천년기적 재림을 분명히 했으며, 요한 계시록  20장의 문자적 해석에 근거하여 그리스도가 1000년간 지상을 통치하실 것을 확신했다. 무디의 입장변화는 흔히 세대주의로 알려진 영국 프리머드 형제단의 영향에 힘입은바 큰 것으로 설명된다. 그들의 밀접한 교류가 그것을 입증해준다. 그는 형제단으로부터 성서예언에 대한 교훈을 배우기 위해 1867년 영국을 여행했으며, 형제단의 부흥사 무어하우스(Henry  Moorehouse)는 1868년 시카고의 무디 집을 방문했다. 무디의 절친한  친구들 중  많은 사람들이 세대주의자였으며 그 대표적 인물이 스코필드다.
   무디에게 미친 세대주의 영향으로 지적되는 것은 그가 비밀 휴거 때에 그리스도께서 어
느 순간 재림하신다고 자주 말한 것, 이스라엘의 회복을 믿고, 때로 이스라엘과 교회의 구별하고 세대에  대해 언급한 것 등이다. 반면, 세대주의와는 달리,  무디는 교회를 하나님의 구원계획 중간의 막간극(parenthesis)으로 간주하지 않았으며, 공중재림과 지상재림 사이에 7년의 간격이 있다고 결코 말하지 않았다.
    1887년 무디는  [무디성서학원]을 설립하여 다양한 기간의 훈련과정을 통해 많은 수료생을 배출했다.  이들을 통해 전천년설이 미국 전역은 물론 전 세계로 확산되었다.  1889년부터 1923년 사이에  [무디성서학원]  출신 중 1143명이 외국 선교사가 되었으며, 그 중 818명이 1923년 당시 선교현장에서 사역하고 있었다. 중국에 227명, 일본에 55명, 한국에 31명 등이었다. 그 중 두 사람이 카우만과 길보른이었다. 
    카우만은 1895년 동양선교의 사명을 받고 선교사가 되기 위한 준비과정으로  [무디성서학원]에 입학하여 6년 동안 공부했다. 카우만은 이곳에서 일본 유학생 나카다를 만나게 되었으며,  후일 서로 협력하여 일본에 [동양선교회]를 창립했다. 길보른 역시 1897년  [무디성서학원]에 입학하여 1899년에 졸업했다.
  따라서 동양선교회 창립자들이 모두 [무디성서학원] 에서 공부했으며, 그것이 그들의 전 천년주의적 재림론 형성에 적지 않은 영향을 미친 것으로 이해된다.  이것은 카우만이 [무디성서학원]  2대 교장 톨레이(Torrey)의 재림론 강의에 큰 감명을 받았다는 기록에 의해서도 확인된다.  "어느 주일 아침 카우만은 톨레이박사가 '그리스도의 재림' 이란 제목으로 강의를 하고 있던 시카고 무디교회에 참석했다. 이 전에는 그리도의 재림은 희미한 신앙이었다...  그 날부터 성경은 그에게 새로운 책이 되었다."

  3) 만국성결교회
    만국성결교회는 1897년 마틴 냅(Martin Wells Knapp)과 셋 리스(Seth C. Rees)에 의해창립된  [만국 성결연합과 기도연맹](the International Holiness Union and Prayer League)으로부터 시작되었다.  그 후 바뀐 명칭이 만국성결교회(International Holiness Church)였으며, 그것은 나사렛교회와 더불어 19세기 성결운동의 주류에 속한 교회였다.
    폴 토마스(Paul W. Thomas)의 필그림 성결교회사에 따르면, [만국 성결연합과 기도연맹]의 특징은 몇 가지로 정리된다. 첫째, 그것은 전 세계에 성결을 전파하기 위한 적극적 노력이었다. 즉 죄인의 구원과 신자의 성화를 위해 범 세계적으로 성결을 전하는 것이 그 연맹의 주 목적이었다. 둘째, 그것은 초 교파 단체였다. 그것은 교단창립 보다 오히려 모든 신자의 영성을 증진을 위해 시작되었다.  회원의 유일한 자격조건은 순수한 마음의 소유 또는 그 체험에 대한 열망이었다.  셋째, 그것은 어떤 면에서 급진적이었다. 당시 많은 성결운동 지도자들이 전 천년기적 재림과 신유에 대해 부정적이었던데 반해, 그 연맹 지도자들은 그들을 순 복음의 전 세계적 확산을 위해 절대 필요한 것으로 확신했다. 넷째, 그것은 적극적이요 공격적 연맹이었다. 그것은 캠프 모임, 부흥회, 문서출판, 선교활동 등을 통해 공격적으로 사역을 전개했다. 
    만국 성결교회의 재림론은 세대주의적 전 천년설이었다. 당시 많은 성결 지도자들, 특히 감리교출신 지도자들이 후 천년주의자들이었음도, 만국성결교회 창립자들은 전 천년적 재림신앙을 선포했다. 1900년도에 출판된 만국 성결교회 헌법은 제5조에 그리스도의 재림에 대한 교리를 간략히 진술하고 있으며, 교회 지침서(manual)에는 보다 구체적으로  전천년설, 이중 재림, 환란 전 휴거로 요약되는 재림에 대한 신조를 밝히고 있다.  ''우리는 주의 재림이 인격적이며 전 천년기적이라는 것과 또한 임박하다는 것을 믿는다(행1:9-11, 살전4:14-17,  마24:27,  25:13,  26:29,  계22:12).   우리는 그리스도가 그의 성도들을 받아들이기 위해 공중에 재림하시는 휴거(rapture)와 성도들과 함께 지상에 재림하시는 현현(revelation)를 구별해야 한다." 뿐만 아니라 만국성결교회가 목사안수 준비를 위해 지정한 도서목록  중 재림에 관한 도서는 세대주의자 블렉스톤의 [예수의 재림](Jesus is Coming)이었다.  이것은 만국 성결교회가 세대주의적 재림론을 받아들이고 있었다는 것을 분명히 말해준다. 
    카우만 부부는 [부흥사](Revivalist)란 잡지의 뜨거운 영적 논조(tone)에 큰 감명을 받고 그 편집자 냅을 만나기 위해 1900년 9월 신시내티를 방문했다.  그들은 때 마침 문을 연, 냅이 원장으로 있는 [하나님의 성경학교](God's Bible School) 기숙사에 6주간 체류하며 선교사 훈련을 받았다. 그것은 카우만의 미래 선교사역을 위한 일대 전환점이 되었다. 그는 마태복음20장 4절에 근거한 사도적 선교방법,  즉 오직 신앙에 의한 방법을 따르기로 결심하고, 감리교 선교부와의 기존 관계를 청산했다. 그리고 일본에 고등학교 교사로 가는 대신,  직접 복음전파와 전도자 양성을 위해 선교사로 가기로 작정했다.  그는  [하나님의 성경학교]에서 선교사 파송 예배를 드리고 1901년 1월 시카고에서 만국성결교회의 지도자 냅,  리스, 스토커(Charles Stalker)에 의해 그 교단 최초의 선교사로 안수받았다. 한편 1년 후 길보른은 카우만과 합류하기 위해 일본으로 가는 도중  [하나님의 성경학교]를 방문하여 소정의 과정을 마치고 안수받았다. 
    [동양선교회]  창립자인 키우만과 길보른은 [만국성결교회]와  밀접한 관계를 유지했다.  카우만은 [만국성결교회] 최초의 선교사였으며, 길보른은 [만국성결교회]  평생 회원이었다.  그들은 만국 성결교회를 그들의 사역을 위한 표본으로 삼아 선교활동을 수행했으며 만국 성결교회와 신앙적, 신학적 맥을 같이했다. 만국 성결교회는 [동양선교회]가 별개의 조직체임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그들의 선교사역 일부로 간주하여 많은 관심과 재정적 후원을 아끼지 않았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성경학교] 는 1920년대 초반까지 [동양선교회] 소속 미국인 선교사 대부분을 배출했다.
 
  2.  성결교 초기 지도자     

    성결교회의 재림론은 동양선교회 창립자 카우만과 길보른을 통해 세대주의 영향을 받았을 뿐만 아니라,  김상준, 이명직을 비롯하여, 한국 성결교회 초기 지도자들도 세대주의자나 세대주의 저서를 통해 그 영향을 받았다.  블렉스톤과 죠지 왓슨의 영향이 그것이다. 
    블렉스톤은 미국 감리교 출신의 저명 세대주의자였으며, 그의 저서 [예수의 재림]은 1878년 초판이 출판된 이래 1916년까지 25개 언어로 386,000부 이상 발행된 베스트 셀러였다.  그것은 1917년  [동양선교회] 공동 창립자 나카다주지에 의해 일본어로, 그리고 1913년 게일(James S. Gale)선교사에 의해 한국어로 번역되었다. 블렉스톤 재림론의 근본 토대는 문자주의적 성서해석, 전 천년설과 환란 전 휴거설이었다.  
    만국성결교회는 목사안수 후보생이 읽어야 할 도서목록에 블렉스톤의 저서를 지정했으며, 카우만과 길보른은 그것을 [동양선교회]의 종말론 이해의 표준으로 삼았다. 특히 카우만은 블렉스톤과 개인적 친교를 가졌을 뿐 아니라 동양선교를 위해 그의 재정적 후원을 받기도 했다. 그는 블렉스톤이 전천년설과 웨슬리적 성결을 결합시킨 것에 공감했다.  따라서 카우만은 블렉스톤의 저서를 [동양선교회] 산하 성서학원의 재림론 교과서로 채택했다.   [동경성서학원]의 경우, 나카다주지는 그것을 그의 재림론강의에 사용했다.
    블렉스톤은 만국 성결교회와 동양선교회뿐 아니라 한국 성결교회 재림론 형성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 김상준, 이명직을 비롯, 한국 성결교회 초기 지도자들은 [동경성서학원] 수학을 통해 블렉스톤의 재림론과 세대주의 교리에 접하게 되었으며, 그 후 그의 저서의 한국어 번역본도 이용했다. 이것은 김상준과 이명직에 의해 확인된다. 김상준은 [사중교리]에서 블렉스톤의 저서를 인용했으며, 이명직은 장창덕의 [휴거론] 서문에서 재림학의 태두 블렉스톤, 모리슨,  왓슨 등의 학설에 대해 잘 알고 있다는 것을 밝혔다. 
    한편, 왓슨의 재림론은 한국성결교회 재림론의 뿌리로 간주되어왔다. 왓슨은 미국 남부출신의 성결운동가요 세대주의적 전 천년설주의자였다. 그는 후 천년주의자였으나 1896년 전 천년주의자로 전환했으며, 여생을 전 천년설 전파와 저술에 전념했다. 한국 성결교회가 왓슨의 재림론에 영향을 받게된 것은 그의 설교와 저술을 통해서였다.  1914년 그는 카우만의 인도로 한국을 직접 방문했으며 성결교회 제1회 수양회 개회예배 설교를 했다.  왓슨의 전기에 따르면, 그의 일본과 한국 방문 목적은 젊은 목회자들에게 설교하는 것이었다. "카우만의 부인은 그의 설교와 성경강의에 큰 감명을 받았으며 그 같은 것을 결코 들어보지 못했다고 생각했다." 그의 저서 [백의] (White Robes)는 한국어로 번역되어 성결교 기관지  [활천]에 연재되었다.  한편, 김상준은 [묵시록강의] 서문에서 그가 왓슨에 힘입고 있음을 밝힌바 있다. 

  동 서양의 영적 대가, 곧 미국의 사이스와 왓슨 두 박사와 일본의 사사오 떼쯔 사부로우의 해설을 고루 채택하여...  설명하오니... 
 
또한 이미 지적한대로,  이명직 역시 블렉스톤과 더불어 왓슨의 재림론을 잘 알고 있었다.


결론

    한국 성결교회의 재림론은 단순히 심프슨이나 성결-오순절운동 또는 만국 성결교회로부터 유래했다기보다 오히려 그들 모두를 포함한 여러 근원으로부터 유래했다. 무디 성서학원, 심프슨, 만국성결교회, 블렉스톤과 왓슨 등의 재림론이 그것이다. 그들을 관통하고 있던 공통적 흐름이 세대주의적 전 천년설이었다. 
    동양선교회 창립자 카우만은 심프슨의 집회에서 하나님의 은혜를 체험하고 선교사로 소명받았으며, [무디성서학원]에서 성경을 체계적으로 공부하고 만국성결교회에서 선교사로 안수받았다.  카우만과 동양선교회가 전 천년설적 재림신앙을 강조하게 된 것은 이런 카우만의 신앙형성 및 교육배경과 무관하지 않다. 심프슨, 무디성서학원, 만국성결교회는 전 천년설을 수용했으며, 세대주의의 영향을 받고 있었다.  특히 만국성결교회의 신앙개조는 전 천년설, 공중재림과 지상재림, 휴거와 현현 같은 세대주의적 재림개념을 그대로 반영하고 있다. 
    한편 한국 성결교회는 동양선교회 창립자들을 통해 세대주의적 전 천년설을 수용했을 뿐 아니라 감리교출신의 세대주의자 블렉스톤과 왓슨의 재림론으로부터 직접 영향을 받았다.




출처: 소명 카페 원문보기 글쓴이: 새벽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