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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1907년 평양대부흥운동의 요인 규명

에반젤(복음) 2021. 8. 21. 07:04


1907년 평양대부흥운동의 요인 규명
 
이병수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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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머리말

2. 환경적 요인
(1) 종교적 상황 (2) 문화적 상황 : 한국인의 성격
(3) 경제적 상황 (4) 정치적 상황

3. 영적 요인
(1) 기도 (2) 성령 (3) 말씀 (4) 부흥의 결과

4. 맺음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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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머리말

이 논문은 두 가지 목적을 가지고 있다.
하나는 그 동안 평양부흥의 원인에 대한 다양한 학문적 접근들을 살펴보면서
이러한 방법들을 정리해보는 것이다.
이미 평양부흥에 대한 다양한 관점에서의 연구들이 있어 왔다.
그러나 본 논문에서는 이러한 접근에 대한 정리와 아울러
평양부흥이 특별히 그 당시의 역사적 상황과 깊은 관련성 가운데서 나타났던
부흥운동이라는 것을 종합적으로 살펴보고자 한다.2)

논문의 또 다른 지향점은 구약의 선지자가 선포했던 것처럼
평양부흥을 통해 “옛 적 길로 돌아가자”는 온고이지신(溫故而知新)의 지혜이다.
평양부흥은 한국교회사에서 매우 중요한 위치에 있어 왔고,
따라서 그것을 연구하는 사람들의 많은 관심을 받아왔다.
평양부흥이 그렇게 중요하게 생각된 이유는
그것이 한국교회와 사회에 미친 영향이 여러 가지 측면에서 지대했기 때문이다.
한국교회는 현재 많은 어려움을 겪고 있는데
특히 영적인 면과 양적인 성장에 있어 한계에 부딪히고 있는 실정이다.
이러한 현실 가운데서 평양부흥을 다시 한번 살펴보는 것은
오늘날 한국교회의 역사적 반성을 위해서 의미있는 일이라 하겠다.
베이컨이 ‘역사는 우리를 현명하게 한다’고 말했듯이
과거의 평양부흥을 통해서 현재를 점검하는 가운데 그것이 한국교회를 현명하게 한다면
참으로 유익한 일이라 사료된다.

1920년대에 백낙준은 평양대부흥운동에 대해 평가하면서
“현대의 한국크리스천들은 이 운동을 회고하고 추억함으로써
신앙생활의 샘터를 찾는다”3)라고 했고,
김인서는 1930년대에 “조선교회 역사상에서조선교회 첫 번 부흥”4)이라고 묘사했다.
이렇게 중요한 평양부흥운동을 많은 학자들이 다양한 관점에서 연구하였다.
지금까지 발표된 평양부흥을 해석하는 관점들은 크게 네 가지로 나누어볼 수 있다.
첫째, 전통적으로 많은 사람들이 접근하는 방식은 교회성장의 관점에서의 연구이다.
즉, 평양대부흥 사건이 한국교회의 성장 과정에서 얼마나 큰 영향을 주었는가를
강조하는 관점이다.
최근 박용규는 1907년 대부흥운동을 한국교회의 영적 각성의 전형으로 파악했다.5)
둘째, 선교사(宣敎師)의 관점에서 선교사들이 평양부흥을 어떻게 보고
접근했는가에 관심을 가지는 연구가 있다.
주로 선교사 출신의 연구자나 서구인들이 이런 관점을 택하였다.
셋째, 평양부흥운동이 한국 기독교의 형성에 끼친 영향을
한국인의 주체적 관점에서 바라보는 연구도 있다.
이 관점으로 평양부흥을 연구했던 대표적인 학자는 이덕주이다.
그는 특히 평양 및 여러 부흥운동에서 한국인들의 역할을 강조하는 가운데
그들이 어떻게 기독교를 한국인의 문화 및 심성 가운데
토착화시켰는가를 잘 지적하고 있다6).
마지막으로 평양부흥의 발생과 전개과정에 어떠한 요소들이 작용했으며
영향을 끼쳤는가를 살펴보는 관점이 있다.
예를 들어 서정민은 평양부흥을 선교사들의 비정치화 과정에서 생긴 운동으로
파악한 바 있다.7)

이러한 다양한 관점들은 각기 나름대로 유익한 면도 있지만
또한 각기 그 한계점을 가지고 있다.
예를 들면 교회 성장의 관점에서 연구할 때 그것이 사회에 미쳤던 영향,
혹은 기독교 문화 및 신학에 미쳤던 영향이 무시되어질 수 있다.
또한 선교사의 관점에서 그것을 연구할 때 발생하게 되는 어려움은
선교사들이란 (예외가 있겠지만) 선교사역을 보고하는 가운데
일반적으로 좋은 면만 부각시키거나 사역을 과장하는 경우가 많다는 점이다.
그런 왜곡 현상이 평양부흥에 있어서도 나타날 수 있다고 짐작할 수 있다.
더욱이 선교사의 입장에서 관찰하고 기록한 기록들은
평양 부흥 시 선교사 자신들의 잘못에 대한 회개의 언급이 부족하고
다만 한국인의 잘못과 그것에 대한 회개가 주를 이루어 균형 있는 설명이 부족하다.
한국인 위주의 관점은 평양부흥을 주체적으로 접근하는 가운데
선교사에 대한 지나치게 비판적 태도로 말미암아
선교사들의 긍정적인 면이 무시될 수 있는 위험성이 존재하는 것이
문제점이라고 지적할 수 있다.

마지막으로 평양부흥을 여러 가지 원인에 관심을 가지고 밝히다 보면
어떤 요소에 집중하느냐에 따라 전혀 다른 해석이 나올 수 있다.
즉 그것을 주로 정치적, 사회문화적인 요인과의 연관성 속에서 분석하다 보면
부흥 사건이 지닌 본질적으로 “종교적” 의미를 잃게 될 위험이 있다.
그러나 또 다른 극단에서, 즉 평양부흥의 원인을 지나치게 종교사적 및 교회사적 관점에서 취급하는 것에도 위험이 도사리고 있다.
성령의 역사, 기도 그리고 말씀이라는 부분만으로
평양부흥운동을 접근하는 태도를 예를 들 수 있다.
이런 접근은 한국이라는 특수한 역사적 상황에 대한 충분한 고려 없이
평양부흥을 “순수한” 종교적 사건으로 해석하는 잘못을 범하게 된다.
예를 들면, 1903과 1905년의 원산부흥과 1907년의 평양부흥에 개입된 상황의 차이점을
충분히 고려하지 못할 경우 생기는 문제를 지적할 수 있다8).
원산부흥이 특히 감리교 의료선교사였던 하디(Hardie)의 개인적인 심경의 변화를 통해서
나타났다면, 평양의 부흥은 그 당시의 역사적 상황이 많은 영향을 미쳤다고 생각한다.
이러한 차이점 부분을 상세하게 묘사하는 것이 필요하다.
전체적으로 보아 본 논문은 류대영이 말한
“한민족중심의 주체적 기독교 사관의 넓은 범주”9)를 따르고자 한다.

우리가 평양부흥을 연구할 때 중요한 것은
무엇이 그 부흥을 가능하게 했는가 하는 역사적 원인에 대한 탐구라고 생각한다.
그 이유는 헤로도투스(Herodotus) 이래로 역사에서 가장 중요한 과제는
과거 사건에 대한 원인을 밝히는 작업이기 때문이다.
영국 역사학자 에드워드 카아(Edward H. Carr)는 “역사의 연구는 원인의 연구이다”라고 했고,10) 마찬가지로 역사학자 요한 폰 모스하임(Johann Lorenz von Mosheism)도 “역사적 연구는 과거에 무엇이 일어났는가를 밝힐 뿐만 아니라 왜 이런 저런 사건들이 일어나게 되었는가에 대해서도 말해야 한다”고 주장했다.11)
본 논문은 이러한 주장에 동의하면서 평양부흥이 일어나게 되었던 원인들을 밝힐 것인데,
그것을 크게 두 가지로 분류해서 환경적 요인과 영적 요인으로 설명하겠다.




2. 환경적 요인

기독교 부흥운동 연구에서 대표적인 학자인 에드윈 오르(Edwin Orr)는
평양부흥의 발단이 무엇인지 연구하는 가운데,
그것을 그 당시 세계적인 부흥이 일어났던 웨일즈 부흥과
인도의 부흥이라는 세계사적 맥락 속에서 설명하기도 했다.12)
한마디로 평양부흥은 그 당시의 국제적인 기독교 부흥운동 가운데 한 현상이라는 것이다.
물론 평양부흥은 20세기 초에 일어났던 국제적인 부흥 중의 하나라는 사실은
부인할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이 한국이라는 지리적, 시대적 상황 속에서 나타났던
독특한 현상이라는 것 또한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따라서 이 부흥이 일어났던 상황,
다시 말해서 그 부흥을 가능하게 했던 환경적 요인이 무엇인지 살펴보는 것이 중요하다.
모든 역사적 사건은 보편성과 특수성이라는 균형 있는 관점에서 보아야 하기 때문이다.
역사에 유사한 사건은 있을 수 있지만
동일한 사건은 어떠한 상황에서도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평양부흥을 이러한 역사적 맥락에서 연구했던 다양한 학자들이 있다.
미국 학자들 가운데 대표적인 인물이 알프레드 왓슨(Alfred W. Wasson, 王永德)이다.
그는 감리교 학자로서 1934년에 간행된 책《한국에서의 교회 성장》
(Church Growth in Korea)에서 이러한 관점을 개진했다.
그 책에서 왓슨은 한국의 교회가
어떻게 그렇게 경이적인 성장을 이루었는가에 대해 탐구하는 가운데
한국 교회의 성장이 정치적 및 사회적 조건에 따라 성장한다는 점을 강조하였다.13)
즉 그는 한국에서의 교회성장의 지역적 편차를 제시함으로써
교회성장에 평양을 중심으로 한 서북부 사람들의 성격이
복음에 더 수용적이었다든지 하는 문화적 요소들을 포함하여 지정학적 요소,
정치 및 사회적 환경을 간과할 수 없음을 지적했다.
그는 이러한 맥락에서 한국교회의 부흥도 영적인 요소가 중요한 요소였지만
환경적 요소도 무시될 수 없는 중요한 원인임을 강조하였다.
왓슨이 감리교 입장에서 견해를 피력했다고 한다면 로이 쉐어러(Roy E. Shearer)는
장로교 입장에서 교회 성장을 설명했는데
그 역시 그것을 환경적 요인에 입각해서 설명했다.14)

이러한 학문적 접근 가운데 앞에서 언급한 두 학자들의 견해를 종합하고 발전시켜
평양부흥을 역사적 상황 가운데서 설명한 사람이 헤이젤 와트슨(Hazel T. Watson)이다.15)
와트슨은 교회성장학파의 대표적인 학자이며 선교학에 사회학의 중요성을 강조한
도날드 맥가브란(Donald McGavran)의 학문적 지도를 받았던 사람이다.
맥가브란의 영향하에서 왓슨은 한국교회 성장을 연구하는 가운데
한국교회 성장과 평양부흥의 상관성을 지적하였다.
즉 평양부흥을 통해서 한국교회가 영적 및 양적으로 급성장을 하게 되었는데,
평양부흥은 그 당시의 한국 정치, 사회적 상황과 깊은 관련이 있음을 지적한 것이다.
와트슨의 공헌은 한국부흥이 진공 속에서 일어나지 않았음을 밝히면서
일부학자들이 간과했던 한국부흥 이면의 종교적, 사회적, 문화적 요소들을
강조했다는 점이다.

평양부흥이 역사적 상황과 밀접한 관련성이 있었다는 사실은
일찍이 백낙준 박사가 다음과 같이 지적한 데서도 잘 드러나고 있다:

1897년부터 1906년까지의 기간은 교회의 발흥기였다.……
국내 정치사상 대변화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기독교회는……아무런 방해를 받지 않고
전국에 널리 퍼져나가고 있었다.……
宣敎史의 입장에서 볼 때 이 9년간의 한국문제는 정치와 선교의 범주에 속한다.
정치문제들은 선교사업과 밀접한 관계가 있기 때문에
당시의 실정을 파악하려면 정치문제에 대한 개관이 필요하다.
정치문제는 한국을 지배하려는 러시아와 일본간의 치열한 경쟁에 집중되어 있었다.”16)

우리가 이러한 역사적 상황 가운데서 평양부흥을 살펴보는 이유는
역사에 가장 중요한 요소라 할 수 있는 인간의 삶이
한두 가지 요인으로 설명할 수 없는 매우 복잡하고 총체적인 무엇이기 때문이다.
그러면 평양부흥이 일어났던 시대적 상황이 어떠했는지를 살펴보는 것이 필요하겠다.





(1) 종교적 상황
그 당시의 한국의 종교적 상황은 이전에 한국사회를 주도해왔던 불교,유교 및 도교 등
어떠한 종교도 한국을 구원해 줄 수 없는 절망적인 상황에 처해 있었다.
그 이유는 조선조 500년이란 세월 속에 삶의 근간을 이루었던 이러한 종교들이
도리어 나라를 어려움에 빠뜨리게 하고
외부의 세력 앞에 여지없이 무너지는 것을 경험했기 때문이었다.
특히 이러한 종교들을 한국에 전해주었던 중국이
기독교를 자국의 종교로 표방하는 서구의 세력 앞에 보잘 것 없는 하나의 ‘종이호랑이’ 나
‘잠자는 곰’이라는 사실로 판명되자
한국인의 정신적 상황은 공황상태에 빠지게 되었던 것이다.
이런 상황에 대해 백낙준은 다음과 같이 묘사한다. “옛 기초들이 흔들렸고,
옛 질서는 사라지고 있었다.”
따라서 “한국 백성의 문제는 근원을 거슬러 올라가면 영적인 것이었다.”17)
또한 함석헌도 비슷한 맥락에서, “쇠퇴한 산사의 기울어진 불단 밑이나 고루한 유생들의
냄새나는 유건(儒巾) 속에서는 아무리 용기를 뽐내어도 참 생명 있는 것이 나올 수 없다.
그것만으로는 안 된다”고 당시의 정신적 상황을 진단했다.18)

19세기 말 한국인들이 정신적?종교적 공황을 겪고 있었다는 사실은
구구하게 설명을 덧붙일 필요도 없이 자명하다.
그런 공황 상태에 있던 한국인들에게 기독교 복음이 전해지면서,
그것만이 유일한 대안으로 간주될 수 있었다.
“복음”에 의하여 새 혼이 생성될 수 있었던 것이다.19)
이러한 종교적 상황이 기독교 복음을 적극적으로 수용하는 태도를 만들었을 뿐 아니라
나아가서 평양부흥에 직간접으로 영향을 미치게 되었던 것이다.
개항기 한국의 종교적 상황은 심리적 요소와도 관련될 수 있는데
그것이 한국인의 성격과도 연루될 수 있었다.
이것을 한국인의 성격 속에서 살펴볼 때 더욱 뚜렷하게 나타난다고 볼 수 있다.





(2) 문화적 상황 : 한국인의 성격
문화에는 다양한 요소들이 포함되어 있는데
그 가운데 중요한 요소가 국민성이라고 할 수 있는 한 민족의 성격(personality)이다.
평양부흥에 영향을 받은 한국인의 성격은 어떠했는가?
그 당시의 한국인의 성격이 평양부흥 후의 첫 번째 국제적인 선교회의였던
1910년의에딘버러 보고서에서 잘 밝혀져 있다.
보고서는 다음과 같이 한국인의 성격과 한국교회의 성장을 연결하여 설명하였다:
“성격에서 한국인은 조용하고, 부드럽고, 유순한 민족이다.
특히 손님대접하기를 잘하는 환대하는 마음과
관대한 마음, 인내, 충성심 그리고 믿음의 단순성들이다.
이러한 자질들 때문에 복음의 영향하에서 한국인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칭찬할 만한 추종자들이 되었다.”20)
즉 한국인의 열린 마음과 단순한 믿음이 기독교에 즉시적인 반응을 하게 만들었다는 것이다. 미국 북장로교 해외선교부에서 오랫동안 일했던 아더 브라운(Arthur J. Brown)도
한국인들이 일본인이나 중국인들보다 “순하고 감정적”(docile and emotional)인 것도
한국인들이 기독교를 매우 빨리 받아들인 이유 가운데 하나로 꼽았다.21)

이런 한국인의 특성과 기독교의 관계가 평양부흥에서도 잘 나타났다고 볼 수 있다.
예를 들면 평양부흥 기간 동안 성도들이 통성기도를 하면서 공적으로 죄를 고백을 하는 것과 그것을 듣는 자들도 또한 함께 자기들의 죄에 대해 애통해 하면서
같이 죄를 고백하는 현상이 있었다.
이러한 현상은 특히 서북부 지역에 살고 있는 사람들의 지역적 성격과도
관련을 가지고 있는 듯 하다.
타 지역 사람들에 비해서 좀더 감정적이고 다혈질이었던 평양사람에게
종교적인 현상도 더 감정적이고 강렬하게 나타났다고 짐작할 수 있다.
이런 점은 그 당시 한국 전체가 다 어려운 가운데
평양이 겪은 경제적 상황과도 밀접한 관련성이 있다.





(3) 경제적 상황
청일전쟁(1894)과 러일전쟁(1904~1905)을 겪으면서 한반도는 초토화되었는데,
특히 청일전쟁의 결정적인 전투가 평양에서 벌어졌기 때문에 평양은 크게 파괴되었다.
그 당시의 경제적 어려움은 환경적 불결함으로 나타났다.
이 점은 한국을 방문한 외국인들의 보고서들에 잘 나타나 있다.
1884년에 방문했던 미국 해군 군의관 조지 우즈(George W. Woods)의 보고에 의하면
“서울의 좁아터진 먼지투성이 길은 온통 사람과 짐승의 오물로 뒤덮여 더러운데다가.
누더기에 가까운 헐렁한 옷차림의 사람들, 벌거벗은 아이들, 제멋대로 돌아다니는 개들,
그리고 짐을 실어 나르는 소와 말로 뒤범벅이 되어 있었다.
도로 양 옆의 시궁창에는 온갖 오물이 흐르면서
표현할 수 없이 지독한 악취를 풍겼다”고 한다.22)
그런데 이 점에서는 20여 년 후에도 큰 변화가 없었는지,
1907년에 방문했던 예일 대학 교수 조지 래드(George T. Ladd)도
서울의 한국인 거주지에 대하여 거의 비슷한 묘사를 하고 있었다.

가장 번화한 도시였던 서울의 형편이 이러했다면
상대적으로 소외된 지역이었던 평양의 형편은 말할 바 없었다.
이런 상황에서 선교사들은 “자발적” 또 “선의의” 봉사자로 민중들 사이에서
활동하고 있었다.
사실 당시 한국인들이 겪고 있던 지독한 경제적 어려움이 그 당시에
“쌀 신자” 및 “설탕 신자”를 양산하게 되는 결과를 빚기도 했다.
브라운은 가난과 억압의 “비참한 속박”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서 “도움과 인도를 요청하며 불쌍하게 손을 내미는” 한국 사람들에 큰 인상을 받았다고 말한 바 있다.23)
그런 간절한 도움의 요청은 다른 어떤 아시아 사람들보다 더 간절한 것이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많은 그리스도인들 가운데 선교사들로부터 구호를 받고 질병을 치료받는 가운데서 기독교와 접하게 되고 그것을 계기로 신자가 된 경우도 많았다.24)
이런 극심한 가난이 나라를 잃게 되는 충격, 슬픔과 상승효과를 일으켜
평양부흥에서 폭발적인 역사가 나타났다고 볼 수 있다.





(4) 정치적 상황
이상의 여러 환경적 요소들이 평양부흥에 기폭제로 작용했지만
무엇보다도 크게 작용했던 것이 정치적 상황이라 할 수 있다.
평양부흥이 일어났던 정치적 상황은 한마디로 한국에게 가장 암울하고 절망적인 시기였다.
그 시대만큼 민족과 교회가 고통을 당하고 있었던 때는 일찍이 없었다.
1907년 평양부흥이 일어났던 시기에 가장 중요한 역사적 사건은 러일전쟁이었다.
그 전쟁에서 일본이 러시아에게 승리한 후에
한국의 외교권을 찬탈하는 ‘을사조약’, 고종의 폐위 그리고 군대해산 등이 이어졌다.
러일전쟁이 8월에 끝나자 이내 ‘을사조약’을 통해
국가의 중요한 권한이 일본의 손으로 넘어갔고,
고종 황제는 더 이상 그가 스스로 만들었던 국호인 대한제국의 통치자가 아니었다.

이런 정치적 혼란은 한국인들에게 종교적 위안처를 찾게 만들었음에 틀림없다.25)
이런 점은 인간 삶의 보편성 가운데서도 쉽게 감지 될 수 있는 신앙적 경험이라 하겠다.
즉 개인 및 교회의 영적 부흥이 평소의 평범한 삶에서 나타나기보다는
고난과 여러 가지 복합적인 어려운 상황에 직면하게 될 때 그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서
기도하게 되고 영적인 각성이 일어나는 것이다.
그런데 그리스도인들은 어쩔 수 없는 어려운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서 기도를 시작했다가
기도하는 가운데 그들로 하여금 기도하게 했던 상황은 사라져 버리고
오직 순수한 신앙적 경험만 하게 되는 경우가 많다.
평양부흥도 정치적 환경이 평양의 그리스도인들로 하여금 기도하게 했다가
그것이 종교적인 차원으로 반전된 결과라고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이러한 역사적 사건 가운데서 간과되어질 수 없는 것은
미국이 스페인과의 전쟁에서 승리한 후에 필리핀을 점령하는 조건으로
일본이 한국을 점령하는 것을 미국이 허용하는 가운데서 생긴
미국에 대한 좋지 않은 감정이라 하겠다.
‘을사조약’을 전후하여 한국정부가 기대했던 미국의 한국 문제 개입이 수포로 돌아가자
한국 주재 미국선교사들은 점점 더 악화되어 가는 국내의 정치적 상황,
그로 인해 일본인들에 대한 반감뿐만 아니라
미국인들에 대한 반감이 고조되고 있는 상황을 심각하게 우려하지 않을 수 없었다.
러일전쟁이 한창 진행되고 있던 1905년 1월에 루즈벨트 대통령은
미국의 외교사상에 가장 주목을 끄는 이례적인 협약을 하게 되는데
그 협약은 미국이 필리핀을 점령하는 대신 일본이 한국을 점령할 수 있도록
허락한 내용이었다.26)
고종이 비밀리에 미국에 파송한 특사 헐버트의 노력이 실패한 데다
한국정부와 전혀 상의도 하지 않고 루즈벨트 대통령이 한국을 “배신”한 것이다.
오랫동안 친구관계로 생각해 왔던 미국이 한국에 대한 일본의 지배를 서둘러 승인하자
국내 곳곳에서는 미국인들에 대한 실망의 목소리가 점점 더 커져만 갔다.
그와 같은 미국의 태도는 한국인들에게 반미 감정을 유발했을 뿐만 아니라,
미국 선교사들의 위치를 매우 어렵게 만들었다.
격렬한 반 외국인 감정, 특히 반미감정이 폭풍같이 일어났던 것이다.

당시의 반미감정에 대해 윌리엄 뉴튼 블레어(William Newton Blair)는,
이 무렵에 많은 젊은이들이 미국에서 한국으로 돌아왔는데,
그들은 “미국에 있는 부도덕성과 음주, 그리고 불경스러움에 대한 이야기”를 하면서
“한국교회를 어떤 길로 이끌려고 하는 이 외국인들, 이 미국인들이 무슨 올바른 것을 가지고 있습니까?”라며 선교사들을 공격했다고 한다.27)
블레어는 이와 관련하여 다음과 같은 말을 덧붙였다:

어떤 이들은 한국의 불행한 상황에 대해
일본보다 미국인들이 더 책임이 있다고 장황하게 말하곤 하였다.
어떤 때는 폭도들이 일어나서 우리의 모임들을 해산시켰다.
사실 한국인들은 오랫동안 미국을 특별한 친구로 생각해 왔다.
우리의 외교관 알렌박사는 국왕과 모든 사람들의 신뢰와 존경을 받았다.
영국의 예를 따라, 한국에 대한 일본 지배를 미국이 서둘러 승인하자
모든 곳에서 실망은 컸다. 격렬한 반 외국인, 특히 반 미국인 폭풍이 그 나라를 휩쓸었다.28)

이러한 사태 전개는 그 동안 한국선교에 공들였던 많은 사역들이
하루아침에 물거품이 될 것이라는 염려가 미국 선교사들을 중심으로 일게 했던 것이다.
이런 분위기에 대한 선교사들의 염려는 1907년에 있었던 겨울 사경회를 통해서
이러한 한국의 절망적인 정치적 상황들을 믿음으로 극복하려는 노력으로 이어졌다.
따라서 반미감정에 대해 선교사들이 걱정하는 가운데
평양부흥이 발발하게 되었던 상황들도 무시할 수 없는 것이다.

서정민은 평양부흥의 배경 가운데 여러 가지를 언급한다.
즉 복음이 들어온 지 꽤 오랜 세월이 지났음에도 불구하고
변함없는 한국 기독교인들의 “종전 그대로의 신앙태도,
선교사와 한국인의 지도자 사이의 위화감, 정치문제와 민족적 교회에 대한 일제의 강압태세, 새로운 비전을 구하기 위해 몰려드는 예비 교인군,
무엇보다 현실적 좌절감에 깊이 빠진 교회인들의 좌절 극복” 등이
당시 한국 교회의 당면한 문제였으며,
나아가서 그것들이 또한 평양부흥이 폭발적으로 전개된 이유였다고 그는 지적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캔들러(W. C. Candler)의 글을 인용하면서
서정민은 평양부흥의 중요한 배경으로 1905년의 ‘을사조약’을 간접적으로 암시한다.29)
캔들러는 미국 남부 감리교회의 주교(Bishop)로서 ‘을사조약’ 후 1906년경에
한국을 방문한 적이 있었다.
그는 한국을 여행하면서 다양한 사람들과 접촉하는 가운데
여러 자료들을 모았고 그것에 기초해서 “그는 상처 입은 마음으로 인해
그리스도께로 돌아오는 한 민족”(An Broken Hearted Nation Turning to Christ)이라는
제목하에서 이 글을〈아틀란타 저널〉(Atlanta Journal)에 기고했다30).
그 글에서 캔들러는 ‘을사조약’으로 절망적인 그 당시 한국의 정치적 및 사회적 상황을
이렇게 묘사했다.

여러분은 마음이 깨진, 상처 입은 나라를 본 일이 있습니까?
보지 못하였다면 한국만큼 상처 입은 나라를 여러분들이 정말 보지 못했을 것이 확실합니다. 나는 한국에 오기 전에 모든 희망의 광선이 희미해져가는 가운데서
비참한 삶들로부터 마음 아파하는 남녀를 본 일은 있습니다만
한국처럼 온 나라 전체가 좌절한 모습을 결코 본적은 없었습니다.
한국은 내가 보기에 이제 땅위의 희망이 없는 것같이 보였습니다.
(중략) 대한제국의 황제는 그의 왕실에서 힘을 잃고 무기력한 반면에
이토 통감이 실제로 통치자가 되었습니다.……
오랜 세기를 두고 추구한 일본의 야망이 성취되고
한국은 그 마지막 독립의 희망을 잃고 말았습니다.

해외의 많은 학자들이 정치적 및 사회적 대 격변들이 사람들로 하여금
기독교 복음에 귀 기울이도록 했다고 지적한다.31)
1906~7년의 평양부흥들은
이러한 한국의 정치적 상황 즉 환경적 요인과 결코 무관하지 않다고 볼 수 있다.







3. 영적 요인
우리는 평양부흥에 관계된 외적 요인들 즉 환경적 요인들을 앞에서 살펴보았다.
이러한 환경적 요인은 또한 자연스럽게 영적 요인들과 함께 어우러져서
평양부흥을 가능하게 했다.
역사에 어떤 사건과 관련하여
항상 제기되는 다른 사건과의 연속성과 불연속성이라는 주제는
평양부흥에서 함께 나타난다고 볼 수 있다.
평양부흥에서 그 문제를 우리는 하디의 원산부흥과의 관계에서 찾아볼 수 있다.
하디의 원산부흥이 평양부흥에 여러 측면에서 영향을 주었던 것은 사실이다.
예를 들면 하디의 원산부흥을 통해서
많은 선교사들과 한국인들이 은혜를 받았고 그것이 평양부흥에 연결되었기 때문이다.
또한 앞에서 지적한 대로 평양부흥이 일어나기 직전의 복잡한 정치적 상황
그리고 반미감정에 대한 염려 등으로 선교사들이 특별기도회를 위해서
하디 선교사를 강사로 모셨던 것은 원산부흥과의 연속성의 측면에서 설명할 수 있다.
원산부흥과 평양부흥 사이의 이러한 연속성의 측면을
박용규가 다음과 같이 잘 지적하고 있다.

1903년 8월 하디로 인해 촉발된 영적 각성의 움직임이
1906년 초에 실시된 전국적인 동시 부흥회를 통해 특정지역에서 전국적으로 확장되면서
그만큼 부흥운동을 사모하는 분위기가 더욱 강하게 나타났다.……
1906년 가을 평양과 원산과 서울에서 열린 일련의 사경회, 특히 평양사경회,
존 스톤의 서울과 평양 집회, 그 해 가을에 있었던 저딘의 목포부흥회,
그리고 선교사들의 정오 기도회가 바로 그것이었다.
이것은 곧 발흥할 평양 대부흥운동의 영적 토양을 제공해 준 중요한 사건이었다.32)

이런 연속적인 면에도 불구하고
원산부흥과 평양부흥 사이에는 불연속성 즉 차이점이 존재했다.
이 불연속성의 본질은 위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두 사건을 일으킨 환경적 요인 즉 역사적 상황이 달랐다는 데 있을 것이다.
이러한 종교적, 종교외적 상황은 평양부흥이 일어나게 된 가장 중요한 종교적 원인인
기도로 자연스럽게 연결되었다.





(1) 기도
선교사의 정오기도회
교회역사에서 부흥의 가장 중요한 요인은 기도였다고
부흥과 기도의 상관성을 연구하는 많은 학자들은 주장한다.33)
평양부흥에서도 기도가 가장 중요한 요인이었음을 많은 자료들이 증명한다.
1907년 평양부흥의 목격자이기도 했던 중국선교사 조나단 고포드(Jonathan Goforth)는
그의 책《성령의 불길이 한국을 휩쓸 때》(When the Spirit's fire swept Korea)에서
평양부흥의 중요한 원인을 열정적 및 지속적 기도로 간주했던 것이다.34)
풀러 신학교의 대표적 교회성장학자인 맥가브란(Donald A. McGavran)도
그의 주저 가운데 하나인《교회성장의 이해》(Understanding church growth)에서
부흥운동과 기도의 상관관계를 언급하면서
그것의 대표적인 예를 1907년의 평양부흥이라고 주장했다.35)
특히 그는 평양부흥에서 나타났던 강렬하고도 지속적인 성도들의 기도가
부흥의 영적 요인 중에서 결정적인 것임을 지적했다.

또 평양부흥에서 다양한 형태의 기도들이 행해졌는데 그것은 선교사들의 기도,
통성기도 그리고 공중 회개기도들이었고 이러한 기도들이 부흥에 중요한 요인이 되었다.
그 가운데 주목해서 살펴볼 것은
평양부흥이 있기 직전에 있었던 선교사들의 정오 기도회였다.
먼저 선교사들의 정오기도회의 배경을 살펴보면 평양 거주 선교사들은
1906년 8월 기간 동안 “자신들의 삶에 하나님의 능력을 더 깊이 체험하고 싶은 감동이
일어나 이 목적으로 8일간의 성경공부와 기도 모임을 열었다.”36)

그러나 앞서 지적한 바와 같이 한국교회의 영적 부흥을 위한 선교사들의 기도는
1905~7년을 둘러싼 정치적 상황 속에서 볼 필요가 있다.
이 정치적 위기는 밖으로는 ‘을사조약’으로 인해 대한제국의 외교권이 박탈된 것에 이어 1907년의 정미 7조약, 그리고 군대해산 등에 대한 위기이고
안으로는 의식 있는 애국 청년들이 교회를 정치의 도구로 사용하려는 것이었다.
다음과 같은 샤프(C. E. Sharp)의 지적은
당시 기독교 지도자들이 갖고 있었던 정치적 동기를 잘 설명해 준다.
샤프는 한국인들이 교회에 들어온 다양한 동기를 설명하면서
“가장 주요한 동기가 보호 및 힘에 대한 동기”37)였고 다분히 정치적이었다는 것이다.
선교사 게일(Gale)도 이러한 교회의 정치적 도구화에 대한 염려를 우려하였다38).
따라서 교회 밖으로는 ‘을사조약’으로 나타난 미국의 “배신”과
교회 안으로는 이러한 선교사들의 정교 분리와 정치 불간섭의 원칙에 입각한
“민족정치적 중립표방”으로 하여금 반미감정이 일어나게 되었다.

이러한 상황이 선교사들로 하여금 한국교회가 정치적 위기 가운데서 순수하도록
기도하게 했던 것이다.
이것을 블레어는 당시 한국인들의 “마음이 혼란스럽고 그 마음에 압제자에 대한
격렬한 증오심을 가지며, 지도자들이나 사랑과 용서의 메시지에 대해서 점차 냉담해지고
그것을 거부하게” 되었으며 “악마에게 이용당할 수 있는 좋은 상황”에 놓이게 되었다고
말했다.39)

선교 현장에 위기감이 감돌고 있었고 이런 상황 가운데
1906년 8월에 평양의 장로교와 감리교 선교사들은 모두 다 “그 상황의 심각성을 깨닫고서
기도와 성경공부를 하기 위해 한 주간 동안 함께 모였다.”40)
강사는 원산의 하디였다.
이 기도회에서 중요한 기도 제목은 이러한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서
평양에서 열리는 겨울 남자 사경회를 위한 것이었다.
선교사들의 간절하면서도 끈기 있는 기도의 결과로 “확실히 1906년 말 한국,
특히 평양지역의 영적 분위기는 이전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깊고 성숙해 있었다”고 한다.41)
이와 같은 분위기에 힘입어 선교사들은 해마다 크리스마스 시즌에 갖던 친목 모임을
중단하고42) 감리교 및 장로교 선교사들이 다시 연합하여
곧 개최될 예정인 장로교인의 남자 사경회와 그 후에 개최될 감리교인의 사경회를 위해
열심히 기도했다.

1907년 1월 2일 장로교 사경회가 시작되자
선교사들이 하던 매일 정오 기도 모임은 대부분의 감리교 선교사들이 지방에 가야하고
참석할 수 있는 선교사들은 얼마 되지 않는 상황으로
선교사들의 정오기도회는 중단해야만 하는 형편이었다.
그러나 기도하고자 하는 선교사들의 마음은 너무나 강렬하였고
사경회 기간동안 매일 정오기도회를 개최하기로 하였던 것이다.43)
따라서 평양지역 선교사들을 중심으로 정오기도모임은
사경회 기간에도 열려 일 주일간 계속되었다.44)

평양 주재 장로교 선교사 그레함 리(Gramham Lee)가 “이 정오 기도회는
우리들에게 바로 벧엘이었다”45)고 말할 만큼 이 기도회는 선교사 자신들에게
대단한 영적 각성의 새로운 도전의 기회가 되었다.
특히 평양부흥의 절정이라고 할 수 있는 평양의 오순절 첫째 날(1907년 1월 14일)
월요일 정오는 선교사들과 한국인 지도자들 모두가 더욱 더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하였다.46) 그들은 야곱이 얍복 강에서 하나님 당신께서 축복하지 않으면
당신을 놓지 않겠다고 한(창세기 32 : 26) 그런 심정으로
그들은 끈질기게 기도했다고 한다.47)
이 기도는 강렬하고도 끈질긴 기도가 그 특징이었고
이것이 평양부흥의 불씨가 되는 중요한 요인이 되었다.





통성기도
평양대부흥은 선교사의 정오기도회와 함께 “통성기도”(united audible prayer)가
부흥에 중요한 요인이 되었음을 많은 선교 보고서가 보여주고 있다.
모인 회중이 옆 사람을 의식하지 않고 전심을 다해 드리는 이와 같은 통성기도는
평양부흥운동을 특징짓는 가장 두드러진 현상이었다.
본래 통성기도는 평양부흥운동 이전에는 보기 힘든 매우 낯선 기도 방식이었다.
그것이 한국교회에 처음 소개된 것은 1906년 가을 한국을 방문한
하우드 애그뉴 존스톤(Howard Agnew Johnston) 박사를 통해서였다.
그는 1906년 웨일즈 부흥운동 소식을 한국에 소개하면서
웨일즈 부흥회에서는 공적기도를 인도하는 인도자만 기도하지 않고,
각 사람이 다른 사람을 의식하지 않은 채
큰 소리로 통성기도를 하였다는 사실을 알려준 것이다.48)
웨일즈 부흥운동의 소식을 듣고
그와 같은 부흥운동이 한국교회에도 발흥하기를 간절히 사모했던 선교사들과
교회 지도자들은 통성기도를 그대로 한국교회에 도입했다.

이러한 통성기도의 현상을 그 당시의 다른 여러 지역에서 일어났던
부흥운동시의 기도 현상과 함께 에드윈 오르(J. Edwin Orr)는 설명한다.
오르는 특히 웨일즈 부흥운동의 격렬한 기도현상이 여러 다른 지역의 부흥 운동에
영향을 미쳤다고 보았다.
그는 웨일즈에서 있었던 통성기도를 그로부터 영향을 받은 다른 지역의 부흥운동과
비교,연결하여 말하였는데, 웨일즈 부흥운동시 기도하는 소리를
“태풍과 같은 통성기도”(a hurricane of audible prayer),
인도 부흥운동에서의 기도 소리를 “먼 곳에서의 천둥과 같은 소리”
(a noise like distant thunder),
그리고 아프리카에서의 기도를 “엄청나게 몰려오는 바람소리”
(the sound of a rushing mighty wind)와 같은 것으로 각각 묘사했던 것이다.
이에 비하여 오르는 평양부흥에서 있었던 기도를
“기도의 대양에서 밀려오는 파도소리”
(the noise of the surf in an a ocean of prayer)와 같은 것으로 묘사했다.49)

“기도의 대양에서 밀려오는 파도소리”는 1월 14일 월요일 저녁에 처음으로 나타났다.
그 전날 주일은 영적인 놀라운 특징이 전혀 없었다고 한다.50)
“그 모임은 죽은 것 같았고 하나님의 성령이 우리를 떠난 것 같았다”51)고 한다.
따라서 월요일 오전에 선교사들과 한국인 지도자들은 더욱 더 그날 저녁 모임을 위해서
이전보다 더 갑절로 간절히 기도하였다.
특히 하나님만이 놀라운 부흥의 역사를 일으켜 줄 것이라고 믿고 하나님만 의지하였고
쉬지 않고 끊임없이 기도하였다.52)

이날 저녁 짤막한 설교 후에 리 선교사가 모임을 맡아 기도회를 시작했다.
한꺼번에 너무 많은 사람들이 기도하기 시작하자
리 박사는 “만일 여러분들이 그런 식으로 기도하기를 원한다면 모두 기도합시다”라고
통성기도를 제안했다.
이 통성기도의 결과로 그 다음에 나타난 현상에 대하여 블레어는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

모든 회중이 다함께 큰 소리를 내어 기도하기 시작했다.
그 효과는 표현할 수 없었다.
무질서가 아니라 영혼과 소리의 거대한 조화였다.
저항할 수 없는 기도의 충동에 영들이 함께 어우러져 움직였다.
그것은 많은 것이 아니라
한 성령에게서 난 하나로서의 위에 계신 한 분 아버지께 올려졌다.53)

그것은 과거에는 찾아볼 수 없었던 철저한 회개, 성령의 은혜를 사모하는 간절한 염원,
이 민족의 장래가 오직 하나님께만 있다는 민족적 신앙애가 한데 어우러진 간절한 기도였다. 또한 여러 가지의 정치?경제?사회?문화의 대격변기에 “한 맺힌 심정”으로
오직 절대자에게만 모든 문제의 해결이 있음을 고백한 가운데서 나온 기도였다.
이것이 당시의 현장을 목격한 영국의 윌리엄 세실(William Cecil) 경은 이렇게 증언한다.
“그(그래함 리)가 나의 아버지라는 말로 기도를 시작하자 비상한 힘이 밖으로부터
쏟아져 들어와 온 회중을 사로잡았다.
” 이 통성기도는 평양부흥의 중요한 요인이 되었고
그 이후 한국인의 정서에 잘 맞는 기도로서 한국교회의 토착화된 기도의 형태가 되었다.





공중 회개기도
평양부흥을 촉발케 했던 중요한 기도의 요인 중의 하나는
많은 사람들이 공중 앞에서 자기의 죄를 고백하는 것이었다.
그것도 상상할 수 없는 죄악들 예를 들면 자기 아내가 바로 옆에서 듣는 가운데
다른 여인과의 간음을 고백하는 것, 그리고 한 여인은 청일전쟁 때 피난 가는 도중에
자기의 아이가 무거운 짐으로 느껴지자 그 아이를 나무에 쳐서 죽이고
도망 간 것을 고백하고 회개하는 것들이었다.54)
특히 이 고백적인 기도가 다른 사람들의 내면 속에 감추어져 있던 죄악을 토로하게 하고
이러한 회개의 연쇄반응들이 옆에 있는 사람의 마음을 움직여 고백함으로서
그들의 영혼을 죄악으로부터 정결하게 하는 폭발적인 부흥의 계기가 되었다.
이러한 공중 앞에서 회개 기도를 그 당시의 참석자 였던 블레어는 다음과 같이 묘사했다.
“인간이 정말 자행할 수 있는 모든 죄가 공적으로 그날 고백되어졌다.……하나님의 성령이 영혼들에게 잠잠히 임할 때 지상의 어떤 세력도 그것을 멈추게 할 수 없었다.”55)





(2) 성령
이러한 공적회개는 성령의 역사가 아니면 불가능한 것이었고
진정한 부흥의 중요한 요인은 성령의 역사인 것이다.
종교적 부흥 연구의 대표적 학자 가운데 한 사람인 조나단 에드워즈(Jonathan Edwards)는
부흥이 하나님의 영인 성령의 역사임을 강조한다.56)
마찬가지로 많은 선교사 및 목격자들이 평양부흥이 성령의 역사였음을 인정한다.
1910년 에딘버러 세계선교대회에서 평양부흥을 “진정한 오순절 성령사건”
(a genuine Pentecost)57)이었음을 지적했고 게일(James S. Gale)은 평양부흥의 둘째 날인 1907년 1월 14일(월)에 “하나님의 영이 내려오는 것 같았다”58)고 묘사한다.
이러한 성령의 역사에 감동되어 사람들이 연달아 일어나서 죄를 고백하고,
엎드려지고 울고하면서 “새벽 2시까지 그 모임이 죄의 고백, 울음,
그리고 기도로 계속되었다”59)고 한다.
여기서 주목할 것은 새벽 두시까지 참석한 회중들이 기도했다는 것은
그 당시의 농경사회의 문화에 익숙한 사람들이
현대인과 같이 시간에 쫒기지 않는 상황이라고 하더라도
성령의 역사와 인도하심이 아니면 불가능함을 잘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





(3) 말씀
또한 이 평양부흥의 중요한 요인들은 성령과 동시에 하나님의 말씀이었다.
특히 길선주 장로가 평양부흥의 셋째 날 1907년 1월15일(화) 세례요한에 대해 설교하면서
회개를 촉구했을 때 그들의 반응은
사도행전에 나타나는 사도 베드로의 설교를 들은 청중들이 고백했던 것과 같았다.
그 당시 평양 장대현교회 성도들은 말씀을 통한 성령의 역사로 인해
“오 하나님 내가 어찌 하오리까?”(O God, what shall I do?)라고 하면서
죄를 고백하고 회개했다.60)
이것을 에딘버러 선교대회 보고서가 잘 증명하는데
그것에 의하면 평양부흥이 성령의 역사임을 강조함과 더불어
한국 교회가 성경에 “특별한 탁월성”(Special prominence)을 두었다는 것을
지적하고 있기 때문이다.61)
이러한 성경의 중요성은 평양부흥을 가능하게 했던 사경회 중심의 성경 강조와 함께
평양부흥 이후 한국교회의 중요한 특징 가운데 하나가 되었다.
이러한 현상을 백만 구령운동 이후 한 보고서는 다음과 같이 묘사하고 있다.
“일반적으로 말해 한국의 그리스도인은 성경을 사랑하는 영혼이다.
대개 그는 세상에서 성경 외에는 어떠한 책도 가지고 있지 않다.”62)





(4) 부흥의 결과
평양부흥의 결과를 그 당시 현장을 목격했던 많은 선교사들과 한국인 기독교 지도자들은
다양한 관점에서 설명한다.
진정한 부흥은 영적 변화와 양적 변화가 동시에 발생한다는 것을 성경은 증명한다.
사도행전에서 오순절 성령강림 후 사도 베드로의 설교를 듣고 회개한 성도들이
경제적으로 있는 자와 없는 자가 유무상통하는 장면이든지,
이러한 삶의 변화를 통해 세상 사람들에게 칭찬받는 것 등이 영적 변화라 할 수 있다.
이러한 영적 변화 후에 양적 변화 즉 신자의 숫자가 날마다 증가했다는 것을
사도행전은 보여준다.
이러한 변화가 평양 대부흥운동에서도 나타났고 이것을 두 가지 차원에서,
즉 질적 변화 및 양적 변화로 살펴볼 수 있겠다.


질적 변화

평양부흥에서 질적 변화란 무엇보다도 영적 변화가 두드러졌다는 것이다.
평양부흥이 진정한 부흥임을 선교사들이 다양한 보고서에서 설명했는데
그 부흥의 성격이 참됨을 그 당시의 회중과 사회적 삶에 나타난 여러 가지의 변화를 통해서 이것을 증명한다.63)



첫째,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지식이 깊어졌다는 것이다.
언더우드(Horace Grant Underwood)는 1907년 평양부흥이 한국의 “기독교인들에게 하나님과 그리스도에 대한 정확한 지식을 가져다 주었다”고 한다.64)
기독교에서 가장 중요한 지식은 하나님과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것이다.
그 지식이 사람들로 하여금 구원에 이르게 하고 자신의 삶을 변화시킬 뿐만 아니라
자기가 살고 있는 세상을 변화시키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기독교 신앙은 지식과 함께 가는데
그것에 가장 선행되어야 할 지식이 하나님에 대한 지식이다.
그러한 점에서 평양부흥은 한국 기독교를 새로운 차원으로 인도하는데
중요한 계기가 되었던 것이다.
마찬가지로 에딘버러 선교 보고에서도 평양부흥의 결과로 “한국교회는 죄의 심각한 성격과, 그리스도의 구원의 능력, 기도의 효과 그리고 하나님의 임재를 알게 되었다.”65)



둘째, 죄에 대한 심각성과 의에 대한 인식이 두드러졌다는 것이다.
이전의 한국 기독교인들에게 이러한 개념이 없었던 것은 아니었으나 부족했다.
그러나 부흥 후에 이러한 인식이더욱 더 깊어졌다는 것이다.66)



셋째, 부흥회를 통해서 경험한 회개와 그 후에 찾아오는 죄용서의 기쁨과 평화가 넘쳤다.
평양부흥의 둘째 날인 1월 15일 화요일 길선주 장로의 설교시 그의 설교를 듣고
많은 사람들이 죄를 고백하고 회개한 후에 말할 수 없는 기쁨을 누렸다고 한다.67)



넷째, 평양부흥회를 통해 한국교회가 경험한 것 가운데 한 가지 특징적 현상은
인간관계의 회복 가운데서 동양과 서양을 막론하고 하나됨이었다.
참다운 회개는 하나님과의 관계 회복에서 시작되어
자연히 인간관계의 회복으로 연결되기 때문이다.
어떤 점에서 진정한 영성 및 영적 회복은
인간관계에서 구체적으로 나타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이것이 선교사와 한국인, 한국인과 한국인 관계에서 잘 나타났고
특히 서구 선교사들이 한국기독교인에 대한 종교적 및 문화적 우월감이라는
자민족 중심주의에서 서구인과 한국 기독교인과의 동등한 입장으로 바라보는
동반자적 관계 변화가 있게 되었다.
그 당시 평양부흥의 목격자였던 무어(J. Z. Moore)가 “동양인과 서양인과 한 형제로서
하나라는 점”을 강조하는 가운데서 하나됨의 모습을 나타낸 것이
평양부흥 후에 나타난 특징 가운데 하나이다.68)
선교사의 보고에 의하면 선교사는 세 가지 관계를 가진다고 한다.
선교사와 비기독교인 현지인과의 관계, 선교사와 현지인 그리스도인과의 관계,
그리고 선교사와 동료 선교사의 관계이다69).
그 동안 한국교회에 문제가 되었던 것은
두 번째 서구 선교사와 특히 현지 지도자들 사이에 생겼던 마찰이었다.
그런데 평양대부흥을 통해 그런 관계가 회복되었던 것이다.
더욱이 놀라운 것은 한국인과 일본인 사이의 용서와 사랑의 회복이 있었는데
일본인 무라타라는 기독교 전도자가 평양부흥회에 참석해서
그러한 일이 일어났다는 것이다.70)



다섯째, 평양부흥은 한국교회의 신앙의 순수성을 유지하는데 기여했다.
기독교 복음이 한국에 들어올 때 교회에 출석했던 사람들은 다양한 동기로 들어오게 되었다. 예를 들면 경제적 이유로 쌀과 설탕 및 약을 얻기 위해서,71)
혹은 정치적인 이유로 그 당시의 애국 민족 청년들이 일본의 침략을 제어하는데
미국의 세력을 통해서 가능한 것으로 여기고 교회를 출석하는 등
순수하지 못한 동기들이 있었다.
그러나 그 당시 비종교적인 이유로
교회에 들어왔던 사람들로 말미암아 오염되었던 교회가 이 부흥을 통해서
여러 가지 불순한 동기들로부터
전체적으로 “깨끗하고 좀 더 순결하고 달콤하고 새롭게 되었다.”72)
이 부흥을 통해서 많은 그리스도인들은 기독교가 무너져가는 동양문화
특히 한국문화의 대안으로서 하나의 강력한 서구문화로만이 아니라
살아 계시고 인격적인 하나님을 만나는 참된 종교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즉 평양 대부흥운동을 통해서
한국의 기독교인들은 기독교의 영적 차원을 경험하는 좋은 계기가 되었다.



여섯째, 부흥운동이 가져다 준 도덕적 및 윤리적 변화 또한 간과될 수 없는 것이었다.
부흥회를 통해 기독교인들은 자신의 죄를 회개하면서 높은 윤리 수준을 유지하게 되었다.73) 이 부흥은 참된 회개운동이었기 때문에 삶에서 많은 변화가 있었는데
어떠한 기독교인은 중국인에게 경제적인 손해를 끼쳤고
부흥 후 그 사람에게 경제적인 차액을 다시 돌려주기 위해서
먼 길을 마다하지 않고 달려갔다는 놀라운 삶의 변화가 있었다.74)

마지막으로 평양부흥으로 나타난 변화 중의 하나는 사회적 변화였다.
진정한 부흥은 개인과 교회의 내적 변화만이 아니라 사회적 변화를 동반하는 것이다.
특히 “온갖 우상으로 가득 찼던 도시, 정령숭배 및 악들 중에서도
가장 악들이 무성했던 도시, 한국에서 가장 희망 없는 지역으로 여겨졌던 그 도시가
평양부흥후 어디에서나 기도하며 우는 소리 및 찬양소리가 들려졌다”고 한다.75)
러일전쟁의 결과로 폐허가 되었던 그 도시가
“동양의 예루살렘”으로 탈바꿈하게 되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양적 변화
평양부흥의 결과를 살펴보면 무엇보다도 교회의 성장에 기여한 바가 크다.
격렬하고 감정적인 차원에서 맛본 이런 종교적 경험은 한국교회의 영성이
크게 심화되는 계기가 되었을 뿐만 아니라,
윤리적 변화 및 양적 성장에도 놀라운 변화가 있었다.
이와 관련하여 송길섭의 다음과 같은 평가는 정당한 것으로 보인다.

이 운동은 한국교회가 사상 처음으로 성령의 뜨거운 은사를 체험한 운동이었다는 데서
그 의의와 충격, 또 여파가 대단히 컸다.
그 때까지 여러 가지 동기로 입교한 기독교인들이 비로소 회개라는 것이
실제 신앙생활에서 어떤 것이며 무엇을 의미하는 지를 직접 체험하게 되고
또 그 감격을 맛보게 된다.
또한 이 성령운동은 한국교회의 신앙내용을 풍성하게 하였을 뿐만 아니라
교회의 경이적 성장까지 가져오게 된다.76)

이러한 경이적인 교회성장은 부흥운동의 결과 영혼에 대한 사랑의 표현으로
전도에 대한 관심이 일어났다.
그 열심이 “날 연보”(Day Offering) 및 선교사업과 연결되었다.
평양부흥운동 때 일어났던 한 가지 현상인 날 연보는 영적 부흥에
전도가 동반되었던 현상 가운데 하나였다.
전도는 평양부흥의 현상만이 아니라 모든 부흥의 역사에 나타나는 공통적인 현상이었다.77) 그럼에도 불구하고 날 연보에는 독특한 점이 있었다.
날 연보라는 전도 운동의 독특한 면은
경제적으로 하나님께 헌물을 바칠 수 없는 어려움에 놓여있는 은혜 받은 성도들이
돈이나 물질 대신 시간을 바치는 헌신 제도로서,
바친 날(시간)에는 세속적인 일이 아닌 하나님의 일로서 전도에 봉사하고,
전도를 하되 일상적인 전도와 구별하기 위해
복음이 들어가지 않은 다른 동네에 가서 전도하는 독특한 전도 방법이었다.
전도하기 위해서 돈을 연보하듯이 날을 연보하여 전도에 헌신하고자 한 것이었다.
이러한 토착화된 독특한 전도방법이
1905년 선천에서 시작하여1907년 평양부흥을 거치면서 다른 여러 지역으로 확산되었고
1910년 백만구령운동에 이르기까지 계속되었다.78)

전도의 열기는 이기풍 목사를 제주도에 보내고 그 외 여러 지역
특히 중국 및 사할린?연해주?하와이 등지에 선교사들을 파송하는 것으로 이어졌다.




4. 맺음말

이상의 논의를 두 가지로 정리하겠다.

첫째, 평양부흥 연구에 대한 포괄적 접근이 필요하다.
당시의 많은 보고서와 학자들의 연구들은 평양부흥을 “성령의 역사”였다고 지적했다. 1910년 에딘버러 국제선교회의 보고서는 그 평양 부흥을 “영적 오순절의 부흥운동”으로
간주했고 또한 많은 사람들이 평양부흥을 성령운동으로 묘사했던 것이다.
모든 참된 종교적 경험이 다 그렇듯이 성령의 역사도
말씀과 기도라는 구체적인 “은혜의 수단”들을 통해 경험된다.
그런데 그런 경험을 충분히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 당시의 역사적 상황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
이러한 역사적 접근이 “세속” 역사와 교회사를 연결함으로써
기독교적 경험의 독특성을 약화시키는 것처럼 보일 수 있지만,
실제로는 결국 기독교도 이 세상에서 경험될 수밖에 없는
역사적 종교라는 점을 확인시켜준다.
이런 점에서 사회적-문화적 및 역사적 차원들(socio-cultural and historical dimensions)에 관한 깊고 넓은 연구를 통해서 전통적인 교회사적인 접근 방법을 탈피하고
좀 더 포괄적으로 평양부흥을 평가하는 접근 방식이 필요하다.79)



둘째, 평양부흥이 오늘의 한국교회에 주는 여러 가지 교훈을 찾아야 한다.
이덕주가 지적한 바와 같이 1907년의 평양 대부흥은
선교사들로부터 전달받은 기독교를 한국적으로 “토착화”시키고
이후의 한국 기독교의 성격을 결정지은 역사적인 대사건이었다.80)
그러나 서정민 등이 설파한 바와 같이
그때 형성된 한국 기독교의 성격을 비역사적이고 탈역사적으로 만든
결정적인 계기가 되기도 했다.
평양부흥운동 이후 전개된 한국의 역사는 지극히 암울한 것이었다.
따라서 내세적, 초월적, 개인적 신앙을 가지게 된 한국교회가 그런 역사적 상황 속에서
제대로 된 역사적 책임을 하지 못했다는 점은 아쉬운 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부흥에서 본격적으로 경험된 영적인 기독교가
일제하에서 기독교인이 보여주었던 가장 강력한 항일행위의 하나였던
신사참배 반대운동으로 이어졌다는 점도 간과해서는 안 될 것으로 보인다.81)

평양대부흥 당시 정치, 문화, 사회적 위기 상황에서
한국교회는 깊은 종교적 경험을 통해 신앙을 내적으로 심화시키고
교회를 외적으로 성장시키고 사회를 변화시키는 기회로 삼았다.
그러므로 영적, 신학적, 도덕적 위기에 직면한 오늘날 한국교회는 자신의 성격을 결정지은 역사적 사건이었던 평양대부흥에 대한 역사적 재평가를 시도함으로서
오늘날의 상황을 극복하는 좋은 본보기로 삼을 필요가 있다.
자신의 과거에 대한 역사적 반성을 통해
오늘날의 총체적 난국을 극복의 기회로 삼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평양대부흥운동과 같은 영적 각성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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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고신대학교 신학부 조교수(조직신학 및 선교학 전공)
2) 따라서 1차 자료(primary source)도 참조하지만 2차 자료(secondary source)를
많이 참고한다.
3) 백낙준,《한국개신교사, 1832~1910》, 연세대학교 출판부, 1993, p. 392. 백낙준은
이 책을 예일대학교 박사논문으로 집필할 당시인 1920년대의 한국교회를 기점으로 1907년 평양대부흥을 회고하면서 묘사했던 내용이다.
4) 김인서, “영계선생소전”(중 2),〈신학지남〉14권 2호, 1932년 3월, p. 33.
5) 박용규,《평양대부흥운동》, 생명의 말씀사, 2000, pp. 205~207.
6) 이덕주,《한국 토착교회 형성사 연구》, 한국기독교역사연구소, 2001, pp. 87~158.
7) 서정민, “초기 한국교회 대부흥운동의 이해,”《한국기독교와 민족운동》, 종로서적, 1992
8) 물론 전자의 부흥이 감리교를 중심으로 한 부흥이고 후자는 장로교를 중심으로 한 부흥이라는 차이가 있다는 것은 이미 주지의 사실이다.
그러나 여기서 강조하고자 하는 차이점은 전자와 후자의 상황이 달랐고
따라서 다른 상황들로 말미암아 부흥의 심도와 영향력의 범위가 달랐다는 점을
고려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9) 류대영 교수는 그의 책《초기 미국 선교사 연구, 1884~1910》, 한국기독교역사연구소, 2001, p. 29에서 “포스트콜로니얼적이면서 동시에 한국적 관점”을 말하면서
특히 “한국적 관점이란 이만열 교수가 1980년대 이후에 정립시켜온 한민족 중심의 주체적 기독교 사관의 넓은 범주를 뜻한다”라고 설명한다.
10) Eward H. Carr, What is history?, New York : Random House, 1967, p. 35.
11) James E. Bradley and Richard A. Muller, Church History: An introduction to research, reference works, and methods, Grand Rapids, Michigan : William B. Eerdmans Publishing Company, 1995, p. 15.
12) J. Edwin Orr, Evangelical awakening in Eastern Asia, Minneapolis, Minnesota : Bethany Fellowship, 1975, pp. 26~31.
13) 이와 관련하여, 1960년대 이후의 한국교회 성장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될 수 있다.
예를 들면 이 시기에 한국교회가 급속한 성장을 하게 된 이면에는 한국전쟁 이후 극단적
남북 대치, 수많은 사람들이 시골을 떠나 대도시로 가는 가운데 고향을 떠난 정신적 외로움, 폭압적인 군사독재 등 여러 가지 상황들이 사람들로 하여금 복음에 수용적이도록 만들었고 그러한 것이 한국교회 급성장을 가능하게 했던 것이다.
14) Roy E. Shearer, Wildfire : Church growth in Korea, Grand Rapids, Michigan : William Eerdmans Publishing Company, 1966, p. 6. 또한 그 당시 장로교 선교사였던 알렌 클락
(한국명 곽안련)이 장로교의 입장에서 네비우스 선교정책의 성공과 장로교의 성장 관계를 The Korean Church and the Nevius Methods 라는 책에서 설명했다.
15) Hazel T. Watson, “Revival and church growth in Korea, 1884~1910,” M. A. thesis, Fuller Theological Seminary, 1968.
16) 백낙준, 앞의 책, pp. 275~276.
17) Ibid.
18) 함석헌,《성서적 입장에서 본 한국역사》, 성광문화사, 1954, p. 226.
19) Ibid., p. 237.
20) World Missionary Conference, Carrying the gospel to all the non-Christian world, Vol. I, New York : Fleming H. Revell Company, 1910, pp. 72~73.
21) Arthur J. Brown, The Mastery of the Far East : The Story of Korea's Transformation and Japan's Rise to Supremacy in the Orient, New York : Charles Scribner's Sons, 1919, p. 516.
22) 류대영, 앞의 책, p. 67 참조.
23) Brown, p. 517.
24) 예를 들어, 이만열,《한국기독교 의료사》, 아카넷, 2003 참조.
25) 류대영?이만열?옥성득,《대한성서공회사 II : 번역?반포와 권서사업》, 대한성서공회, 1994, pp. 251~255, 304~307.
26) 백낙준, 앞의 책, pp. 281~284 참조.
이것을 일명 가츠라 태프트 밀약(1905)이라고 한다.
27) 윌리엄 뉴튼 블레어,《속히 예수 밋으시기를 ?라?이다》, 두란노, 1995, pp. 95~96.
이 책은 당시 평양부흥의 목격자였던 미국 북장로교 선교사로 한국명으로 방위량 목사가 1946년에 펴낸 Gold in Korea (Edinburgh : The Banner of Truth Trust)라는 책을 김승태가
번역한 것이다.
28) Ibid.
29) 서정민, “초기 한국교회 대부흥운동의 이해,”《한국기독교와 민족운동》, pp. 258~259에서 이것을 언급하고 있다.
30) W. C. Candler, “An Eminent opinion,” The Korea Review, 1906, No. 12., p. 457.
31) 이러한 견해에 대한 대표적인 학자들은 다음과 같다: A. Weisberger, They Gathered at the River (1958) ; William G. McLoughlin, “Revivalism” in The Rise of Adventism : Religion and Society in Mid-Nineteenth Century America(1974), pp. 119~150 ; idem, Revivals, Awakenings and Reform: An Essay in Religion and Social Change in America(1978). 특히 윌리엄 G. 맥로우린(William G. McLoughlin)은 위의 책 p. 132에서 “미국에서 부흥운동과 영적 각성운동들은 미국의 중요한 문화적 전환점의 시대와 적어도 궤를 같이 하고 있다”(revivalism and awakenings in America are synonymous with, or at least coterminous with, her crucial cultural turning points)고 주장한다.
32) 박용규, 앞의 책, pp. 175~176.
33) Richard F. Lovelace, Dynamics of spiritual life: An evangelical theology of renewal, Downer Grove, Illinois : Inter-Varsity Press, 1979, p. 156.
34) Jonathan Goforth, When the Spirit's fire swept Korea, Grand Rapids : Zondervan, 1984, pp. 6~9.
35) Donald A. McGavran, Understanding church growth, Grand Rapids, Michigan : William B. Eerdmans Publishing Company, 1980, pp. 188~189.
36) “The Religious Awakening of Korea,” Korea Mission Field, July, 1908, p. 105.
37) C. E. Sharp, “Motives for seeking Christ,” Korea Mission Field, Aug., 1906, p. 182.
38) J. S. Gale, Korean in Transition, New York : Laymen's Movement, 1909, p. 202.
39) 블레어, p. 96.
40) Ibid., p. 97.
41) Graham Lee to Dr. Brown, Dec. 26.
42) 그 당시의 절박한 상황과 선교사들의 간절한 기도의 염원이 블레어의 글에 잘 나타나 있다: “크리스마스가 왔다. 우리 흩어졌던 사람들이 다함께 성탄절의 기쁨을 나누기 위해 평양에 모였다. 우리는 우리의 가족과 친근해지는 성탄절과 신년 사이의 그 주간을 보내고,
사경회의 바쁜 계절을 준비하면서 쉬었다. 모든 공동체는 친목을 위해 저녁시간에 오며
가장 좋은 시간을 가졌다.
그러나 그해 겨울 우리는 친목 모임을 가질 마음의 여유가 없었다.
매일 저녁 기도 모임이 열렸다.” 블레어, p. 99.
43) Ibid.
44) G. S. McCune, “The Holy Spirit in Pyeng Yang,” Korea Mission Field, Jan., 1907, p. 1.
45) Graham Lee, “How the Spirit Came to Pyeng Yang,” Korea Mission Field, Mar., 1907, p. 35.
46) James S. Gale, p. 204.
47) 블레어, p. 101.
48) Charles Allen Clark, The Nevius plan for mission work illustrated in Korea, Seoul : Christan Literature Society of Korea, 1937), p. 164에서 평양부흥의 통성기도를 앞선 웨일즈 부흥운동의 기도현상과의 상관성을 잘 설명하고 있다.
49) J. Edwin Orr, The Flaming tongue, Chicago : Moody Press, 1973, p. 193.
50) James S. Gale, p. 204.
51) Graham Lee, p. 33.
52) Ibid.
53) 블레어, pp. 101~102.
54) James S. Gale, p. 207.
55) William N. Blair and Bruce F. Hunt, The Korean Pentecost, Edinburgh : The Banner of Truth Trust, 1977, p. 74.
56) Jonathan Edwards, Jonathan Edwards on Revival, Edinburgh : The Banner of Truth Trust, pp. 109~147.
57) World Missionary Conference, Carrying the gospel to all the non-Christian world, Vol. I, New York : Fleming H. Revell Company, 1910, p. 77.
58) James S. Gale, p. 204.
59) Ibid.
60) James S. Gale, p. 205.
61) World Missionary Conference, p. 75.
62) “The Great Present Need of Korea,” Korea Mission Field, Apr., 1911, p. 105.
63) W. G. Cram, “A Genuint change,” Korea Mission Field, May, 1907, pp. 67~68.
64) Horace Grant Underwood, “The growth of the Korean Church,” Missionary Review of the World, 1908, No. 31., p. 405.
65) World Missionary Conference, p. 77.
66) “The Direct effects of the Revival,” Korea Mission Field, May, 1908, p. 70.
67) James S. Gale, p. 210.
68) J. Z. Moore, “The Great Revival Year,” Korea Mission Field, Aug., 1907, p. 118.
69) Paul G. Hibert, Anthropological insights for missionaries, Grand Rapids, Michigan : Baker Book House, 1993, pp. 260~275.
70) W. M. Baird, “The Spirit among Pyeng Yang students,” Korea Mission Field, May, 1907, p. 67.
71) F. S. Miller, “News Calender,” The Korea Review, No. 6., 1901, p. 267. 밀러(Miller) 목사는 그 당시 서울에 주재했던 일본 신문기자가 기독교에 대해 비판적으로 기록한 글을 인용하면서 다양한 동기들 때문에 교회 출석하는 예를 20가지 들고 있다. 그 동기들 가운데 하나는 많은 예쁜 여인들이 있기 때문에 교회 가는 것도 언급되어 있다.
72) William N. Blair and Bruce F. Hunt, p. 78.
73) 이덕주, p. 157.
74) William N. Blair and Bruce F. Hunt, p. 75.
75) Ibid.
76) 송길섭,《한국신학사상사》, 대한기독교출판사, 1994, p. 150.
77) 교회 역사는 영적 부흥과 전도 및 선교가 거의 예외 없이 함께 진행됨을 잘 증명하고 있다. 예를 들면 경건주의(Pietism) 운동을 통한 영적 부흥시 진젠도르프(Zinzendorf)를 중심으로 한 모라비안 선교, 무디(D. L. Moody)를 중심으로 미국의 부흥운동시 학생자원봉사운동(S. V. M.)을 통한 선교 등을 예로 들 수 있다.
78) “The Million movement and its results Korea,” Korea Mission Field, Jan., 1911, p. 5.
79) 이러한 점에서 이미 언급한 류대영의《초기 미국선교사 연구》는 주목된다.
80) Ibid., pp. 91~92.
81) 서정민은 이것을 이미 언급했던 “초기 한국교회 대부흥운동의 이해,” pp. 281~283에서 잘 지적하고 있다.




자료출처: 이 논문은 사단법인 한국기독교역사연구소 한국기독교역사학회
에서 발행하는 《한국기독교와 역사》 (논문집) 19호에 실린 이병수교수의 논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