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사/- 근, 현대 교회사

[스크랩] 서구 세계의 교회사

에반젤(복음) 2021. 8. 21. 05:41

     

서구 세계의 교회사

1.1. 역사(歷史)란 무엇인가?

현재 우리들이 사용하고 있는 '역사', 즉 History·Histoire·Storia·Historia란 학술 용어는 희랍 고전 시대의 헤로도투스(Herodotus)와 투키디데스(Thucydides)가 처음 사용했다. 희랍어의 '히스토리아'라는 낱말은 원래 '탐구'·'발생한 원인'·'중요한 의미'를 밝히는 정신과 태도를 요청한다. 다시 말하면 역사라는 말의 고전적 의미는 '탐구하여 얻어진 지식'을 뜻한다. 그래서 19세기까지 "역사가는 다만 과거의 사실 그 자체로 하여금 말하게 하는 데 그쳐야 한다"는 역사주의를 고수하게 되었다. 특히 역사주의의 대표적 역사가의 하나인 랑케의 입장에 의하면, 일단 지나간 사실은 그 자체로서 다른 어떤 것과도 바꿀 수 없는 가치를 갖고 있으므로, 과거의 사실을 가장 냉정하게 객관적으로 관찰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왜 역사를 알아야 하는가? 역사가 지나간 사회의 제도와 사상에 관계된 것이라면 그것들이 우리들의 현재와 미래에 어떠한 의미가 있는가? 우리 인간사회는 진보하는가, 그렇지 않은 것인가? 하는 등의 많은 문제가 제기된다. 그래서 역사 철학자 헤겔은 "역사라는 말은 객관적인 측면과 주관적인 측면을 종합하고 있는 것으로서, 이것은 사건을 의미하는 동시에 사건의 서술을 의미한다"고 말하게 되었다. 독일어의 "게쉬히테"( Geschichte)란 말은 역사의 개념을 파악하는데 도움이 된다. "게쉬히테"의 어의는 '일어난 일' 또는 '발생한 사건'을 의미하고 있는 동시에, 이에 관한 '지식과 설명'이라는 뜻도 내포하고 있다. 그래서 역사 연구의 삼대요소(三大要素)를 사실·이론·해석이라 강조하게 되었다.

물론 역사를 연구하는 절차나 방법은 과학성을 띠어야 하지만, 그 막대한 사료(史料) 가운데 어떤 것을 선택하느냐는 역사가의 독자적인 주관에 달려 있다. 즉 역사는 오늘에 이르기까지의 인간 생활의 본질이 무엇인가를 탐구하는 동시에, 그 현재적 의미를 발견해 내는 것을 목적으로 하고 있다. 그러므로 역사는 시간의 변화를 겪은 과거의 사건일 뿐만 아니라, '현재의 거울'이 되는 것이다. 그래서 20세기에 들어와서 역사주의나 실증주의를 극복함으로써 역사(history)를 소위 객관적인 '사실'과 해석된 '역사적 사실'을 구별하게 되었다. 유명한 영국의 역사가 카(E. H. Carr) 같은 사람은 역사를 정의하여 '현재와 과거와의 대화'라 하였다. 그리고 코링우드도 "과거는 어쩔수 없이 현대 상황 속에서 형성된 인간 정신을 통하여 그것을 판단하기 때문에 현대사가 되지 않을 수 없다"고 주장하였다.

확실한 "진정한 의미의 모든 역사는 현재의 역사이다"라는 크로체(Benedetto Croce)의 말은 명언이 아닐 수 없다. 어떤 의미에서 역사야 말로 '신념의 행위'(act of faith)이기도 하다. 왜냐하면 역사란 결국 처음부터 '인간 활동의 결과로 엮어져 있기' 때문이다. 독일 하이델베르크 대학에서 역사철학을 담당했던 칼 뢰비트 교수도 "역사는 집약적인 생의 장면이다"라 하였다. 이 집약된 생의 장면에도 장구한 시간의 흐름이 있었고 지역적으로 광범함에도 불구하고 변화지 않은 인간의 본질이나 혹은 인간 활동을 지배하는 어떤 법칙 같은 것들이 작용하고 있는 듯하다. 기원전 1세기의 희랍인과 21세기에 살고 있는 한국인은 다 같이 인간으로서의 기본적 속성을 공유하고 있음은 확실하다. 그러기에 우리들은 모든 시대와 지역을 초월하여 지나간 인간들의 경험에서부터 값진 교훈을 얻을 수가 있는 것이다.

1.2. 교회사를 왜 연구하는가?

교회사 연구는 성서를 토대로 한 신앙 생활의 구현과 경험의 자취들을 살피는 일이다. 박해와 시련을 무릅쓰고 교회를 지켜온 불굴의 신앙이 역사 속에서 어떻게 꽃을 피울 수 있었는가를 신앙의 눈으로 조명하는 작업이다. 뿐만 아니라 성령의 감화로 창조주 하나님을 더욱 찬양하며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다시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정점으로하여 인류 역사의 진로를 바로 잡아간 역사를 탐구한다. 뿐만 아니라, 교회사를 통하여 하나님의 주권, 즉 하나님의 의(義)와 사랑과 평화가 지배하는 '하늘나라'를 확장해 온 성도들의 행적을 살펴보게 한다. 하지만 교회는 하나님이 세우시고 예수 그리스도가 그 머릿돌이 되신 거룩한 기구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거기에 모여 있는 성원들은 저마다 인간적인 약점과 한계성을 지니고 있다. 따라서 교회는 신도들의 공동체이면서도 동시에 죄인들의 공동체임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다. 그렇기 때문에 '역사적인 교회'는 끊임없이 하나님의 거룩하고도 완전하신 뜻을 따라 부단히 '개혁에서 개혁으로'(reformanda quia reformata), 나날이 새롭게 거듭 나지 않고서는 참된 모습을 전승할 수가 없다. 이러한 교회의 속성을 들어 '연속적인 갱신체'라 부르기도 한다.

헤겔은 그의 역사관을 '자유의 확장자'라 말한 적이 있다. 이와 같이 그리스도교의 역사를 '구원의 확장자'라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이 하나님의 구속사 속에서 한민족도 예수를 구주로 영접한지가 천주교는 2세기요 개신교 역시 100년이 넘었다. 이 시기야말로 '알곡'과 '죽정이'를 구분해 내는 결정적인 시험기간이기도 하다. 이런 뜻에서 볼 때 지금은 최고의 긴장 속에서 자신을 성찰하고 개혁해 나아가야 할 때이다. 실로 역사의 참된 본질은 '시이저(Caesar)와 그리스도(Christ)와의 동시대성과 끊임없는 항쟁'속에 있다. 이처럼 역사가 안고 있는 모순과 고통과 죄악의 반복은 현재의 우리들로 하여금 주저함과 불안을 느끼게도 한다. 그러나 바로 이곳과 이때야말로 더욱 그리스도가 승리해야만 하겠다. 왜냐하면 시이저가 계속해서 그리스도를 못박는 역사가 되어서도 안되며, 우리의 역사가 '가라지'와 '죽정이'가 계속해서 무성해지는 터전이 되어서도 결코 안되기 때문이다. 이러한 요청과 당위는 우리 한국 민족의 역사적 전개 과정에서도 그리스도 교회의 위치와 사명의 수행은 더욱 절실하다.

1.3. 교회의 탄생

복음서에 의하면 그리스도의 교회의 형성은 예수가 그의 제자들을 불러모으신 때부터 시작되었다고 볼 수 있다. 좀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예수에게 소명(召命)되어 추종하던 제자들의 부활 신앙에서 교회 성립의 의의를 찾는다. 특히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이 "반석"이라는 이름의 베드로에게서부터 확고하게 되었기 때문에, 그런 의미에서 흔히들 베드로를 들어 교회의 기초요 반석이라고도 한다. 이러한 확신은 예수가 사망하자 흩어졌던 제자들이 오순절에 성령의 역사를 경험함으로써 더욱 강화되었다. 즉 부활하시어 열 한 제자와 5백여 형제, 그리고 바울(사울)에게 나타났다가 승천하신 그리스도의 영(靈)의 은사와 능력이 사도적 교회를 태동시키셨다. 그래서 비록 '가냘픈 남은 자'(feeble remnant)들로 시동되었지만, 이 교회에 예수의 생애와 말씀과 구원의 능력이 전승되고 보존되어 왔다.

당시 유대인은 민족적으로 정치적 억압과 경제적 궁핍 속에서 암흑의 시기를 힘겹게 살아 왔었다. 그러면서 어떤 초자연적인 권능을 가진 메시야가 로마의 세력을 물리치고, 하나님의 의와 사랑으로 통치하는 막강한 왕국이 건립될 것이라 멸망하고 있었다. 그러다가, 메시야라 믿으며 추종하던 대중들과 대부분의 제자들은, '고난의 종'의 길을 택한 예수가 십자가에서 비참하게 죽어가자 뿔뿔이 흩어져 갔다. 그러나 예수의 부활과 승천, 그리고 오순절(五旬節)에 성령이 충만하게 임하는 놀라운 사건이 폭발하게 되었다(사도행전 2장). 이 오순절은 '50일째의 날'이란 뜻인데 원래는 초여름의 보리를 수확한 축제, 즉 '첫 열매를 거두어들이는 축제'로 불리어진 것이었다. 이 축제가 역사적으로는 이스라엘 민족이 가나안에 정착한 후 그 토지에서 얻은 수확물의 첫 열매를 하나님께 드리는 축제로서, 유월절의 안식 그 이튿 날에 거행하였다. 신약시대 초기 특히 사도행전에는 오순절 날에 성령이 충만히 강림하였고, 이 사건이 초대 그리스도 교회 탄생을 가져온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오순절에 나타난 성령의 역사로 흩어졌던 그리스도인들이 다시 모여들게 되었다. 그래서 교회를 '하나님으로부터 부르심을 받은 백성 정체'를 가리키는 뜻으로 사용하였다. 이처럼 하나님의 백성들은 무엇보다도 그리스도에 대한 충성과 개인적 민족적인 죄를 회개(悔改)하고 영적 은사를 통하여 신앙공동체를 형성해 갔다. 그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위하여 그리스도의 복음을 불굴의 의지와 믿음으로써 전파해 갔다. 이러한 배경으로 인하여 초대 그리스도인의 공동체를 그리스도께서 선포하신 "하나님의 나라"와 동일시하려는 경향이 있었다. 초대 그리스도인들의 단체를 '에클레시아'라고도 불렀는데, 이 명칭은 특히 전령자(傳令者)가 다니면서 급히 불러모은 시민들의 모임을 지칭하는 말에서 기원한다. 이들 하나님의 백성들은 자신들을 구약시대부터 전해온 '남은 자'로 자처하게 되었다. 이들은 예수께서도 친히 '적은 무리들이여'라고 부르신 신자들로서(눅 12:32) '새 이스라엘,' '새 인류'를 대표하며 '새로운 시대'에 산다고 믿었다.

에클레시아는 하나님의 백성들의 한 몸, 즉 새 인류의 하나됨(unity)을 의미하며 이 일체는 사랑의 유대와 자비와 용서의 관계로 이루어진다. 그러면서도 이라한 하나된 친교 공동에의 회원들은 세상에서는 신앙의 순례자이면서 역사의 완성을 대망하는 종말론적 공동체의 일원들이기도 하다. 교회는 그 후에 또 하나의 특이한 말로 불렀는데, 이는 곧 '그리스도의 몸'이라는 것이었다. 이 말을 처음으로 채용한 사람은 사도 바울이다. 그리스도인의 생명적 통일성과 조화를 의미하는 것으로서 교회를 '그리스도의 몸'이라는 것으로 표현한 것은 대단한 의미가 깊다. 그리스도를 따르는 사람은 누구나 살아 계신 그리스도의 지체이며, 이 몸(교회)의 머리는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바울의 교회론에 따르면,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이며 세계 만민은 이 몸의 가지(지체)가 된다. 그러므로 한 몸의 지체가 된 세계의 전 인류는 그리스도 안에서 한 형제가 된다.

사도 바울이 말한 그리스도의 몸으로서의 교회론 외에, 초대 기독교에서는 교회의 또 다른 개념을 말했는데 이는 '거룩한 교제'이다. 이 개념은 기원후 5세기 경에, 공식적으로 사도신조에 들어가게 되었다. 크리스천은 '한 주님' 아래 '한 영혼'·'한 교회'로 연합하여 그리스도의 이름을 공유하고 있다는 것이다. 교회 안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권위가 사도적 전승과 함께 지속되어 왔다. 그러므로 위대한 교부 이레니우스는 교회야말로 진리의 유일한 보고이며, 인간이 잃어버린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하는 성소로 믿는다고 고백하게 되었다.

1.4. 로마제국과 기독교의 탄생

기독교의 탄생은 로마제국의 지배 하에 있던 지중해변에서 였다. 로마국경 밖에는 미개한 야만족들만이 살고 있는 것처럼 여겼고, 로마제국 만이 문명세계라 믿고 있었다. 기독교는 결코 텅 빈 세계에 들어갔던 것이 아니라 우주, 종교, 죄, 상벌에 대한 여러 가지의 신앙과 개념들로 가득 차 있던 로마로 뻗어 나갔다. 특히 기독교가 들어간 세계는 그리스 사상의 영향을 크게 받고 있었고, 당시 로마의 지성 세계를 지배하고 있던 것도 그리스 사상이었다. 이중에서도 각별히 중요한 사상은 로고스(Logos)과 이데아(Idea)와 스토이시즘(Stoicism)이었다. 로고스는 끊임없이 변화하는 우주의 제일동인(第一動因)이며, 이 제일동인은 로고스로부터 시발하여 로고스를 목표로 한다. 따라서 인간의 본성은 동물적인 육체와 감상적인 영혼뿐만 아니라 동시에 신적인 요소인 로고스도 있으며, 이 로고스는 신적인 것과 함께 보편적인 것이라 했다. 그리고 소크라테스의 제자 플라톤(427-347 BC)은 참으로 영원하고 참된 지식은 보이는 세계의 현상들로부터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영적 세계에 존재하는 이데아의 세계에서 얻을 수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이 보이지 않는 영적 세계는 불변의 보편적인 것으로, 감성이 아니라 이성으로 알 수 있는 '예지의 세계'이며, 인간의 영혼은 그 훨씬 이전에 있는 선재적(先在的)인 관념계의 지식을 나누어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보이는 세계의 가시적인 현상들은 이전에 이미 있는 이데아의 세계를 반영하며 지시하고 있는데 불과하다. 그러므로 이데아의 세계는 영혼의 참된 본향이기 때문에 이 세계와 교제하며, 이 세계에 들어갈 최고의 행복을 발견하게 된다는 것이다. 이에 반하여 스토아철학은 제논(Zenon, ?∼264 BC)이 창시한 것인데, 고대의 이교윤리 사상의 가장 고상한 것으로서, 기독교와 상통하는 점이 많다. 특히 당시의 윤리적 폐허 위에 세워진 사상으로서 많은 영향을 주었다. 그는 물질주의적 우주관에 입각하여 세계는 신(로고스)의 몸으로서 가장 아름답고 선하게 형성되어 있기 때문에 인간은 이 자연의 본성에 따르는 것이 곧 도덕적인 삶이 된다. 그리고 죄악이란 다름 아닌 '이성의 결핍'이며, 이상적인 국가란 로고스에 따르는 도덕에 근거하는 나라이다. 그러나 이 이상국가는 인간애에 입각하여 모든 사람을 '다른 자기'로 사랑하는 현자(賢者)로서만 가능하다는 사상이다. 이러한 세계동포주의는 기독교의 세계 선교의 사상적 발판을 만들어 주는 등, 바울신학의 스토아적 요소에도 영향을 끼쳤다고 여겨진다.

기독교가 출현할 즈음에는 위와 같은 고대 사상은 큰 변화를 일으키게 되었다. 그 변화 중에서도 혼합주의적인 성격이 두드러지는데, 한 분이신 통치자 하나님에 대한 신앙은 교회에서는 성자 숭배로, 국가적으로는 영웅 숭배로 변모해 갔다. 당시 로마제국은 국가의 안정과 영속을 위해 고대의 전통적인 종교 의식을 살려 통치자를 숭배하는 의식으로 전환시키려는 정책을 강화하게 되었다. 이 때부터 기독교와 본질적으로 충돌해야 하는 계기가 마련되었다. 로마 수령의 '애국적인 신성화'로 추앙된 <로마신, Deo Roma>에 대한 숭배를 대대적으로 강요하였다. 그러나 초대 그리스도인들은 로마 황제에 대한 숭배와 그리스도에 대한 충성과는 타협할 수 없는 것으로 생각하였다.

처음 얼마동안 로마정부는 기독교를 단지 법적 보호 아래 있던 유대교의 한 분파로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다가 유대인 자신들의 기독교에 대한 적개심과 네로 당시(64년) 로마 도성에 발생한 화재 사건을 그리스도인의 방화로 인한 것이라 뒤집어씌움으로써 그 철저한 박해는 절정에 달하게 되었다. 기독교도에 대한 죄목은 방화 외에, (1) 로마신을 섬기지 않는 무신론자라는 것과, (2) 지상의 나라보다도 하늘나라를 대망하는 무정부주의자, (3) 황제 숭배를 거부하는 반역자, (4) 그리스도의 피와 살을 나누어 먹는 성만찬 의식이 오해되어 식인종이란 혐의를 받았고, (5) 성만찬 의식은 대부분 밤에 비밀리에 거행되었음을 기화로 남녀간에 매우 방탕한 추행을 했다는 것들이었다. 이와 같은 지탄과 박해에 대한 그리스도인들의 최선의 대답은 그리스도를 향한 충성과 높은 도덕성을 견지하는 것이었다.

이미 베드로 전서가 쓰여진 90년경부터 그리스도를 믿는다는 고백만으로도 그리스도인에 대해 본격적인 박해가 로마에서 가해지게 되었었다. 그 중에서도 특히 장엄한 이대(二大) 순교자가 있었는데 안디옥의 감독 이그나티우스와 폴리캅이었다. 신앙의 영웅이그나티우스(Ignatius de Antiochia)는 트라야누스(98∼117 재위)때 소아시아를 거쳐 로마로 호송되어 투기장에서 순교하였다. 그는 순교하기 전에 감독·신부·집사의 삼중의 목회직(牧會職)을 강조하면서, 특히 감독은 파괴적인 박해 세력을 대항하는 통일의 간성이라 하여, 목회 역사상 특이한 의의를 가지게 하였다. 이그나티우스는 정치에 타협하지 않고 죽음을 택한 최초의 모범 신앙인이란 영예를 얻었다. "칼날에 더 가까이 가면 갈수록 하나님께 더 가까이 간다"는 것이 그의 표어였다. 그는 말하기를 "나는 하나님의 곡식이며, 나는 그 짐승들의 이빨 사이에서 갈기갈기 찢겨짐으로써 그분의 순수한 떡이 되기를 원한다"라고 하면서 장렬한 순교를 하였다.

그리고 '결백한 얼굴'을 가진 서머나의 노감독 폴리캅(Polycarp)도 순교의 날이 가까이 오고 있던 어느 날 밤, 그의 베개가 머리 밑에서 불붙는 것 같이 뜨거움을 느끼고 최후가 다가오는 것을 예측했다. 그가 체포되어 법정에 도착하자 행정관은 그의 노령을 감안하여, 그리스도를 한 번만 부인하면 놓아 주겠다고 약속했다. 그러나 폴리캅은 당당히 서서, "86년 동안 그 분은 나에게 해를 주지 않았는데 내가 어찌 왕(구주)를 비난하겠느냐"고 반문하였다. 드디어 불덤이 위에 놓여졌으나 불꽃이 그의 몸을 피하였다. 이렇게 되자 형집행관은 칼을 빼어 그를 찔렀는데, 너무나 피가 많이 쏟아져서 장작 불을 모두 꺼버렸다. 이런 장관을 본 사람들은 "그 시체를 내어 주지 말라. 혹은 그리스도 대신에 이 사람을 예배할지 모른다"고 말하였다. 이와 같은 순교자들의 숭고하고도 뜨거운 피 위에 지금의 교회가 서 있으며, 이들은 선망하고 있는 모든 그리스도의 제자들의 마음 속에 지금도 맥맥히 흐르고 있다.

1.5. 콘스탄틴의 기독교 공인 - 교회 위기의 시작

그리스도인들은 4세기간에 걸친 처절한 박해와 위협을 극복하고 강한 자의식과 사랑으로 단합하여 진리에 충성하며 의를 따랐다. 그러면서 혁신적인 신앙과 새로운 형태의 논리로 전에 없던 참된 도리를 표현하고 있었다. 누가 보아도 몰락해 가는 로마인들보다는 훨씬 높은 윤리 의식과 확고한 믿음으로 강력한 조직체를 이루고 있었다. 이러한 기독교를 정치적 측면에서 보고 있던 콘스탄틴 황제는 오랫동안 추진해 오던 대통일의 완성을 위해 기독교가 통일 추진의 인자(因子)가 되기를 바라고 있었다. 콘스탄틴에게 있어서 통일의 내용은 황제도 하나요, 법률도 하나이며, 시민권도 하나이므로, 물론 종교도 하나여야만 했다. 이 황제는 제위(帝位)를 둘러싸고 이탈리아와 북 아프리카를 통치하던 막센티우스(Maxentius)와 최후의 결전을 벌일 전날 밤 이상한 꿈을 꾸었다. 콘스탄틴 대제는 꿈속에서 그리스도의 첫 글자를 보는 한편, "이 상징을 사용하면 이기리라"는 말까지 들었다. 이를 하나의 계시로 여겨 그의 철모와 그의 병사들의 방패에 의 기호를 그려 넣었다. 312년 10월 28일, 역사를 판가름하는 대결전에서 막센티우스는 패하여 목숨을 잃었고, 서방은 콘스탄틴의 천하가 되었다. 그는 기독교의 하나님이 그에게 승리를 허락한 것으로 믿었다.

드디어 313년 초경에 밀란 칙령(Edict of Milan)을 선포하였는데, 그 내용은, (1) 양심의 절대적인 자유, (2) 기독교의 동등한 법적 권리, (3) 최근의 박해에서 몰수된 교회 재산의 반환 등이었다. 이어서 319년에는, (4) 성직자의 공적 의무(납세 등) 면제, 321년에는, (5) 재산 상속의 권리, (6) 교회의 법인 승인, (7) 일반 시민에 대한 일요일 휴무령, (8) 이방 신의신앙금지, (9) 성직자를 위해 연보 거두는 일, (10) 제국의 협조 아래 로마와 예루살렘과 베들레헴 등 곳곳에 커다란 교회들을 건립하였다. 이제 박해는 그쳤고 황제의 비호 아래 신도수는 급증하였으나, 지금까지 독자적인 노정(路程)을 가던 교회에 황제가 개입하는 것을 인정함으로써, 교회의 앞날에 불길한 그림자가 따르게 되었다. 교회는 적으로부터 자유는 얻었지만 동시에 로마 황제에 의해 전반적인 간섭을 받게 되었다. 이제부터 교회는 국가와 숙명적인 연합과정이 시작되어다.

결국 콘스탄틴 대제는 기독교를 공인함으로 말미암아 교회로 하여금 미래의 세계와 역사를 위해 뻗어 갈 수 있는 위치에 올려 세워 놓았다. 그러나 동시에 이로 인하여 소위 제국적 교회(Imperial Church)가 출현하게 되었고, 황실의 개입이 정책상으로 완전히 이뤄지게 되었다. 그리하여 교회는 끊임없이 개혁에서 개혁으로 연속적인 갱신을 거듭해야 할 본성마저 둔화되어 결국 중세에 이르러서는 종교 개혁 운동을 불붙게 하고 말았다.

2. 종교 개혁 운동

2.1. 타락 이전의 교회 제도

초대교회가 교회의 직제를 갖추어 감독·성직자·집사를 임명한 것은 대개 두 가지의 이유에서였다. 그 하나는 역사적인 압력, 즉 교회를 향한 공격과 핍박에 맞서 자신을 방어하며 일사불란한 조직적 통일체를 유지할 필요가 있었다. 그리고 또 다른 하나의 이유는 교회의 대(對)사회적 봉사였는데, 하나님의 백성들이 모여든 공동체의 조직과 직책을 제도적으로 강화한 동기는 하나님에 대한 예배와, 그리고 무엇보다도 이웃을 위한 구제 사업을 보다 효과적으로 수행하기 위해서 였다. 초대 교회의 제도사와 생활사(史)를 아는 데 가장 흥미있는 저작이라고 일컬어지는 책이 있는데 [디다케](Didache, 곧 교훈)라고도 하고 혹은 [12사도의 교훈]이라고도 한다.

이 책은 초대 교인들이 수첩처럼 늘 몸에 지니고 다니던 지침서의 구실을 하였다. 특히 교역자(敎役者)에 대한 지침을 보면, 교회의 지도자는 순회 생활을 원칙으로 하고, 교인들은 그를 천사처럼 대접하되, 성직자 자신이 후대를 강요해서는 절대로 안된다. 교역자는 1일 유숙하는 것을 원칙으로 하되 부득이한 경우는 더 머무를 수는 있다. 그러나, 어떤 경우에라도 3일을 머무를 수는 없고, 만일 그렇게 하는 성직자가 있으면 이는 거짓 사도이다. 그리고 유숙지로부터 다음 유할 곳까지 갈 때 먹어야 하는 빵만 받을 수는 있어도 금전을 요구하면 거짓 사도이다. 또한 성신(聖神)의 은사를 베풀지라도 식탁을 명해서도 안된다. 이렇게 참된 교역자는 높은 제사장이니 첫 과실과 열매로 대접하며, 그의 말을 함부로 비판하지 말라고 하였다. 이러한 교훈은 예수께서 이미 제자들에게 교시한 것과도 일맥상통한다. 예수는 제자들에게 "아무 것도 가지지 말라," "나를 따르려거든 세상의 모든 것을 버려야 한다"고 했다. "지팡이나 주머니나 양식이나 돈이나 두 벌 옷을 가지지 말라"고 명하셨던 것이다(눅 9:3).

그 뿐만 아니라 초대교회가 베푼 세례 의식도 대단히 엄격하였다. 원래는 레위족이 몸을 씻는 습관에서 유래된 '세례'(Baptism)는 지원자가 긴 시험을 치르고, 일신상의 모든 것을 결백하게 정리한 다음 세례 받을 가격이 주어진다. 그리고 이 때부터 세례 후보자는 보통 2·3년간 집중적인 지도를 받은 다음에, 후보자의 보증인을 소환하여 그들의 도덕적 자격을 증언케 하였다. 그리고 부활절을 앞두고 40일간의 사순절 동안 내내 후보자들은 날마다 마귀를 쫓아내는 의식, 금식과 참회와 교리 공부를 한다. 그리고는 수난절의 수요일에 감독 앞에서 마지막 시험을 또 받는다. 그후 일요일 전날은 철야하다가 새벽 닭이 우는 소리를 듣고 후보자들은 세례장에 인도되어 가서, 다시 간결한 신앙고백을 하고 세례를 받았다. 이처럼 엄격하고도 철저한 의식이 끝나면, 한 잔은 물이, 다른 한 잔은 꿀이 섞인 우유를 마시는 축복을 받는다. 물은 속삶의 정결을, 꿀을 탄 우유는 그들이 들어갈 약속의 땅을 각각 의미하였다. 이 '세례'는 정화·입교·영원한 생명으로 소생함을 뜻하며, 한 번만 받을 수 있으며, '세례를 대치할 만한 덕은 순교뿐'이라 할 만큼 중대하게 생각하고 있었다.

2.2. 흔들리는 중세

그러나 콘스탄틴 대제가 기독교를 공인하게 되자 교회는 변질되어 갔고 신도들도 사도적 전통으로부터 차츰 이탈해 갔다. 사도적 전통으로부터의 이탈은 분명히 기독교 전체의 타락이 시작됨을 뜻했다. 비록 신앙의 자유로 교인의 수는 늘었지만 그 질은 저하되었으며, 엄숙했던 신앙은 값싸게 되었고 도덕과 규례들은 해이해지기 시작했다. 이러한 현상에 대한 반동으로 몬타나스(Montanist) 운동과 노바티안(Novatian)과 같은 극단적인 도덕적 엄격주의자들이 나타나, 교회에는 본격적인 분파작용이 가속화되기에 이르렀다. 교부들의 말대로 교회는 마치 '죄인들의 학교'와 같아서 도덕적 실패자나 신앙의 결함을 가진 자가 많았다.

그런데 누가 먼저 '중세기'란 말을 썼는지는 분명치 않으나 인문주의자(人文主義者) 풀라비오 비온도(Flavio Biondo)가 쓴 말로서 그가 죽은지 6년이 지나서야 중세기(Medium aevum)라는 명칭이 발견되었다 한다. 그리고 이 중세기를 일깨워 근대로 향하게 한 것은 문예부흥 운동이다. 이 운동을 일으킨 간접적인 원인은 십자군 전쟁과 해양로의 발견이며, 직접적인 원인은 1453년 터키족이 콘스탄티노플을 점령한 사건이다. 이 때에 학자들이 희랍어 고전과 헬라 문화를 가지고 이탈리아로 피난함으로 인해서 고전들이 라틴어로 번역되어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다. 이러한 문예 부흥 운동의 영향으로 독일에서도 '공동생활 형제단'(The Brethren of the Common Life)이 고전 문서와 초대 교부들의 저서들을 속속 발간하였고, 그때 설립한 대학들은 희랍어와 히브리어를 철저히 연구하여, 성서를 보다 자세히 이해하려 했다. 따라서 영국에서도 학문의 부흥으로 교회를 개척하려는 운동이 태동하였는데 그 중에서도 옥스포드의 3대 개혁자로 알려진 콜렛(Colet), 무어(More), 그리고 에라스무스(Erasmus)는 유명하다. 이 중에서도 에라스무스는 희랍어 성서를 수준 높고도 우아한 라틴어로 번역하면서 여러 가지의 사본들을 비교 검토하기 시작했다. 이것이 아마도 성서비판학의 첫 시도가 되지 않을까 여겨진다.

이제 시야를 돌려, 종교개혁운동이 독일의 한 대학에서 순수한 신앙적 동기에서 일어나, 그곳에서 그친 한 신학적 토론회로 머문 것이 아니라 전 유럽을 휩쓸게 된 사회적·정치적 상황은 어떠했는가를 살펴 보자. 당시의 독일은 각 지역마다 영주(領主)를 중심으로 자주 의식이 고조되어 있었으며, 특히 로마 교황청의 불공평한 세금 강요에 대해서 분노하고 있었다. 프랑스도 1453년에 영국과 백년전쟁을 끝맺고 왕 프랜시스 1세는 강력한 독재 체제로 신성 로마제국과 모든 면에서 대결할 실력을 기르고 있었다. 따라서, 영국의 강력한 튜도(Tudo) 왕조는 장미전쟁을 1485년에 끝내고 외세의 간섭을 배제하고자 했다. 스페인도 무어족과 11년간을 싸워 이교도를 소탕하여 로마의 단순한 야심의 대상물이 될 수는 없었다. 그리고 특히 이탈리아는 소왕국들이 서로 싸우는 바람에 가톨릭의 총 본부까지 싸움터가 되어 효과적인 통제력을 잃고 무력해 갔다.

이런 때에 로마 교회의 실정은 또 어떠했던가? 한 마디로 평하면, 중세교회는 중앙집권을 고수하고 있었으면서도 그 방대한 조직체를 유지해 나가기엔 안팎으로 너무 힘에 겨웠다. 게다가 교회는 그 본연의 사명에서 멀리 떠나서 전쟁과 재물과 권력에 골몰하고 있어서, 그야말로 '정신이 빠진 텅 빈 조직'만 남아 있었다. 지난날 성 어거스틴이 410년 북방의 고트(Goth)족이 비록 로마성은 함락했으나 교회는 그 무서운 혼돈과 위기 속에서도 멸망치 않고 견디어 냈으며, 하나님의 도성(都城)은 영존(永存)한다고 믿었던 그 도성(교회)은 흔들리기 시작하였다. 바야흐로 중세기는 '종교적 기근'을 극심히 겪게 되었다. 실로 교회사의 수레바퀴는 본궤도를 이탈하여 뒤뚱거리고 있었다. 그때의 로마교회는 황폐하여 마치 황야와 같이 되어 있어서 중세교회는 또 다시 '제2의 세례 요한'을 요청하게 되었다.

일찍이 복음의 진리를 외치다가 용감하게 순교한 보헤미아의 허스(Johann Hus)가 화형장에서 마지막으로 한 말 가운데 "그대들이 지금은 작은 새를 불사르지만, 이제부터 100년후에는 한 큰 황새가 날 터인데, 세상에서 아무도 그를 처형할 수 없을 것이다"라 예언했다. 이와 같은 예견이 선언된지 86년 만에 <루터>가 독일에서 태어났다. 루터(Luther)라는 이름은 본래 독일 고어 '순수한,' '맑은,' '뒤섞이지 않은' 등의 의미를 함축한 말이다. 이 루터가 출생한 '때'와 '땅'은 개혁을 서두르기에 여러 가지 조건이 무르익어 있었다. 한 예로서, 울지(Wolsey)가 교황청 대사로 영국에 임명되어 교황청에 바칠 세금을 잘 바치지 않자, 교황청 당국은 이 결손을 메우기 위해 그 때까지 강력한 중앙 정부가 없었던 독일에 세금을 부과하여 영국 대신 착취의 대상으로 삼고 있었다.

종교적인 측면에서 볼 때도 당시의 세속 사회에서는 신학문을 장려하고 있던 반면 성직자들은 무능하기 그지없었다. 심지어 영국의 어느 교구에서는 교직자 311명 중에서 주기도를 외우지 못하는 자가 11명이나 되었고, 또 27명은 주기도를 누가 가르쳤는지도 모르고 있을 지경에 있었다 한다. 이와 같은 환경을 꿰뚫어 보기나 한 듯이 토마스 칼라일(Thomas Carlyle)이 그의 [영웅 숭배론]에서 아이스레벤에 장보러 갔다가 갑자기 산기가 돌아 그곳 어느 초라한 집에서 낳은 루터를, 그보다 훨씬 이전에 베들레헴의 한 촌락에서 나신 예수의 탄생과 비교한 것은 흥미롭다. 어쨌던 루터가 태어나 청장년이 되었을 때는 권력과 금력에 혼을 빼앗긴 종교계는 추악하기 그지 없었다. 독일 사가들은 종종 종교 개혁기를 "폭거가 시대"라고 부르는데, 이 폭거(Jakob Fugger)는 고리 대금 업자로서 당대의 독일과 로마 교황청에까지 막강한 영향력을 미치고 있었다.

2.3. 면죄부의 출현

1513년 알브레히트(Albrecht) 신부는 불과 23세의 나이로 삼교구(三敎區)의 대감독이 되고 싶었다. 이는 연령 규정에도 미달할 뿐만 아니라, 한 교구 이상 통활할 수 없다는 규정도 범해야만 가능했다. 그래서 그는 교황청에 3만 두카덴을 초수입세조(初收入稅條)로 헌납하고 세 교구를 통할하는 대감독에 임명되었다. 이 때에 알브레히트 감독이 폭거에게서 거액을 대부받았다. 그러나 이 거액의 채무 상환은 감독의 정규 수입 만으로는 도저히 불가능하였다. 그래서 면죄부 판매를 통해 알브레히트는 교황 레오에게 그 중 일부를 상납하기로 하고 면죄부 판매의 청부를 맡았다. 물론 공적인 명분은 성 베드로 성당의 건축을 위함이라고 내세웠다. 1517년 9월에 알브레히트는 이미 10년 전에 판매 경험이 있는 능수능변을 겸한 60세가 넘은 티첼(J. T. Titjel)을 기용했다.

티첼은 외친다. "나는 교황의 사신이다. 즐거워하라. 나는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비견할만한 능력을 가진 홍십자(면죄부)를 1만 9백 매나 가지고 왔노라. 면죄부를 사는 돈이 돈궤짝에 쨍그렁하며 떨어지는 순간에, 그대들의 양친이나 애인의 불쌍한 영혼이 고통의 연옥에서 벗어나 천국으로 튀어 올라간다. 이 면죄부야말로 아무리 큰 죄라도 덮어지지 않은 것은 하나도 없다. 그렇다. 심지어 신의 모친을 범한 죄라도! 이토록 큰 은총을 무시하는 미련한 자들에게 어떤 벌이 내릴 것인고. 벌써 팔 것은 얼마 남지 않았다. 누구든지 지금 곧 와서 사라! 사라! 만일 나의 설교에 이의를 제기하는 자는 이단자로서 화형에 처해질 것이다"라고 협박을 했다. 루터는 이미 이전에 한 수도사로서 로마 교황청 성지를 순례하면서 그 타락상을 감지하고 있었다.

루터는 무명의 한 평범한 청년 수도사로서 구약에 나타난 하나님의 '거룩하신 의' 앞에서 전신이 녹아 없어지는 극도의 두려움에 떨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비텐베르크 대학의 가장 높은 탑과 같이 솟은 좁은 기도실에서 [시편]에 나타난 하나님의 '긍휼하심'을 발견하였는데, 이를 일러 그 유명한 '탑의 경험'이라 한다. 그리고 루터는 [로마서]를 통하여, 인간은 오직 '믿음으로' 의롭게 여기심을 받는다는 바울의 의인교리(義認敎理)를 더욱 강하게 깨달았다. 이어서 그는 [갈라디아서]를 통하여 그리스도인의 참된 '자유'를 맛보게 되었다. 이러한 루터의 신앙적 체험사를 중요시하면서, 루터신학을 연구하는 데는 그의 시편 강해·로마서 강해·갈라디아서 강해를 필독의 책으로 꼽고 있다. 루터가 터득한 철저한 복음적 신앙에서 볼 때 교황청의 면죄부 판매는 패륜이 아닐 수 없었다. 그러나 루터의 중심적 관심사는 그와 같은 면죄부 판매의 신학적 근거가 되는 '사죄의 원리'에 있었다. 여기에 루터의 '면죄부(免罪符) 공격의 신학성'이 있었던 것이다.

2.4. 루터의 공개 토론 제의 - 95개조

루터가 더욱 경악한 사실은 음탕한 신도가 면죄부를 사서 소유하고 있다는 이유로 참회를 거부하는 사태가 벌어졌다. 루터는 "애굽의 어두움 보다 한층 더 어두움이여!" "오! 위기에 처한 우리의 세대여"라고 탄식하면서 위기감을 느끼게 되었다. 루터는 드디어 1517년 10월 31일, 신학도의 순수한 한계를 엄수하면서 저 역사적인 [95개의 논제](Die 95 These)를 대학 정문 벽에 내 걸었다. 여기에서 루터는, (1) 형벌보다 죄 자체가 우선 근본 문제라는 것, (2) 신앙생활은 회개의 연속이어야 한다는 점, (3) 비록 교황과 교회의 법이라도 신의 권능에서 결코 독립될 수 없다는 것, (4) 죽은 자를 위한 면죄부 매수는 무의미하며, (5) 연옥에는 교회법이 미치지 못하고, (6) 오직 그리스도의 십자가만이 천국의 문이요, (7) 교회의 제일되는 자본은 오직 복음 뿐이라는 것을 역설하며, 공개 토론을 제의했다. 이 공개 토론의 제의는 신앙양심의 명을 따른 '한 인간'이 '전 중세'를 상대로 한 엄청난 선전포고였다.

전 중세 유럽은 부패하고 속(영혼)이 텅빈 상태였다 해도, 그 정치적·군사적 힘은 아직도 막강하였다. 거기에다 처음부터 비조직적이며 순수한 종교적 양심의 소리로 외치기 시작한 종교개혁 운동은 여러번 좌절될 뻔한 아슬아슬한 위기를 맞았다. 그러나, 그 때마다 이상하게도 이 개혁 운동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이교도 터키인의 로마 침공으로 위기를 모면했다. 특히 1530년에서 1531년 사이에 신실한 가톨릭 신자였던 황제 찰스 5세(Charles V)가 마드리드 조약과 윔스칙령을 토대로 종교개혁 운동자들을 소탕하기 시작했다. 프로테스탄트 교회로서는 '최대의 위기'를 맞게 되었다. 그러나, 이때도 역시 터키군의 새로운 공격을 받아, 찰스황제는 우선 이교도를 물리치기 위해서는 교회 전체의 연합적인 도움이 필요하여, 1532년 뉘른부르크에서 종교개혁 운동자들과 평화조약을 맺지 않을 수 없었다. 이 때부터 개혁운동은 좀 더 자유롭게 되었다.

한편 종교 개혁 운동을 추진하는 과정에서 개혁 지도자들에게도 문제가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1525년 농민들은 군주의 혹사와 착취에 견디다 못해 농민들이 반란을 일으켰다. 이 때 늘 농민의 아들이라 말하던 루터는 농민반란을 혹평하며 그들을 지지하지 않았다. 농민들을 업신여겼던 그의 비이성적인 처사는 바울이 할례당을 혹평한 것보다 훨씬 더 부도덕적인 것이었다. 또한 쮜리히의 개혁 지도자 칼빈도 법학·천문학·지리학·의학·신학·생리학에 능한 인문주의자였지만 자유 사상가 셀베트(M. Servetus)를 화형에 처한 행동은 '인간 칼빈'으로서는 부끄러움을 남긴 사건이 되었다. 셀베트가 죽임을 당한 곳에 칼빈의 후예들은 이 자유 사상가의 동상을 세우고, 사죄와 아울러 찬사의 비문을 새겨 놓았다. 그리고 또 하나의 문제는 종교 개혁자들이 양심의 자유와 신앙의 주체적(실존적) 결단을 중요시함으로써, 어두웠던 중세를 일깨워 근대로 이행시킨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하지만 반면에 양심의 자유와 믿음의 주체성을 강조한 나머지 '종교의 분열'을 본의 아니게 가속화시킨 결과를 가져오게 한 것도 숨길 수 없는 부작용이었다.

하지만 윌리암 제임스(William James)는 루터를 평하여 "웅장한 자세로 신과 인간 사이에 편만한 조잡한 관념들을 일소한 것은 신학을 유치한 상태에서 구출하였다"고 했다. 확실히 루터는 니이버의 말대로 "믿음과 행위의 샘터를 청결케"하였다. 칼라일도 "아! 그렇다! 높이! 크게 하늘을 향해 홀연히 솟은 화강암, 자연과 진리의 진정한 아들, 그를 보내신 하나님께 많은 세기들이 내세운 믿음 만으로(Sola Fide), 성서 만으로(Sola Scriptura), 그리고 은총 만으로(Sola Gracia)"는 그리스도 교회가 견지해야 할 영원한 주제들이며, 인간이 구원을 받을 수 있는 불변의 원칙들이 아닐 수 없다.

3. 세계교회의 에큐메니칼(교회연합) 운동

3.1. '에큐메니칼'의 말 뜻과 역사

루터의 종교개혁 이후 유럽은 다양한 개신교 종파가 파생하게 되었다. 이후 기독교는 서양의 제국주의와 함께 세계각국으로 뻗어 가면서 급속한 신장세를 거듭했다. 그러나 교파간의 난립은 교회의 일치된 모습을 보여주지 못했고 진보(進步)와 보수(保守)의 양대진영으로 나뉘어 사상적 대립을 초래하기도 했다. 이러한 분열상을 극복하기 위해 교회일치(에큐메니칼) 운동을 전개하기 시작했다.

20세기의 세계교회가 전개하고 있는 연합(一致)운동을 일컬어 '제2의 종교개혁'이라 할만큼, 이 연합운동은 그야말로 세기적인 운동이다. 그래서 역사가들은 세계교회운동은 현대 세계 교회사에 있어서 최대의 기적이며 성령의 은사라고도 평가하고 있다. '에큐메닉스'라는 말은 희랍어 oikos에서 나온 것으로서 '한 집에 있는 방들'을 의미한다. 다시 말하면 그 집에 사는 식구를 통칭해서 쓰기도 한다. 그리고 오이코스에서 다시 '사람들이 들어가 살고 있는 땅'이란 뜻의 oikoumene란 말이 나왔고, 에큐메니칼이란 말이 파생된 oikoumenikos는 '사람 사는 땅만큼 넓은'이란 의미를 함축하고 있다. 그러므로 에큐메니칼 운동은, 세계 땅 끝까지 이르는 교회의 선교적 사명과 이 세상에서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는 모든 기독교인의 영적 합일을 모색하는 운동이라 할 수 있다.

이렇게 볼 때 에큐메니칼 운동은 근대에 이르러 일어난 생소한 운동이 아니고 그 역사는 실로 유구하다. 주후 49년에 예루살렘에서 첫 에큐메니칼회의가 개최되었다(사도행전 15장; 갈라디아서 21:1-10). 이 대회의 의장은 야고보가 된 듯하고, 인간의 구원은 할례로서가 아니라 믿음으로 말미암이며, 베드로를 포함한 유대주의자들과 일대 논쟁을 벌려, 바울과 바나바가 주장한 이방 전도를 공인하였다. 다음으로는 325년에 콘스탄틴 황제가 주선하여 모인 니카야(Nicaea) 회의인데 여기에서 그리스도 교회의 정치는 회의 정치에 의한다는 원리를 만들었으며, 세계교회의 회의가 최고의 권위를 가진다는 예규를 남겼다. 그리고 대내적으로는 세계교회의 통일성과 친교를 공고히 하였을 뿐만 아니라, 대외적으로는 민주주의적 의회정치의 발전에도 크게 공헌하였다.

3.2. 세계교회협의회(W.C.C.)의 형성과정

근대에 들어와서 W.C.C.는 처음부터 선교사업과 교회의 연합을 지향하는 성격으로 윤곽이 잡혀왔다. 특히 이 운동은 교권이나 제도에 관심이 적은 진취성과 창의욕이 강한 청년·학생들이 선구적 역할을 하였다. 이 중에서도 1910년 에딘버러 선교회의는 그 어느 회의보다도 폭넓은 포용성과 공동성을 확인하였고, 특히 1,200명의 회원 중에서 불과 17명이 피선교지의 대표였으나 이들 소수의 식견과 선교 정책론이 선교 모교회 대표들에게 끼친 감화는 대단히 컸다. 그러나 '세계교회협의회'가 형성되기까지는 긴 준비 기간이 필요했었다. 세계교회협의회의 위대한 환상을 현실적 운동으로 태동시킨 계기는 1933년 5월에 영국 요오크의 성공회 대주교 윌리엄 템플이 열명의 에큐메니칼 운동 지도자들을 자택으로 초청하여 회담을 가진 때였다. 그리고 1938년 5월 네델란드에서 W.C.C. 형성 준비 위원회에서 바로 전년도 런던 회의에서 제시한 W.C.C.를 에큐메니칼 운동체의 정식 명칭으로 확정하였다.

이러하여 세계교회협의회라는 공식 명칭으로 연합운동을 전개해 왔지만 다른 큰 과제가 남아 있었다. 그 과제란 또 하나의 세계적 연합체였던 '국제선교협의회'와의 합동 문제였다. 이것이 1961년 8월에 인도 뉴델리에서 "그리스도는 세상의 빛"이란 주제 아래 W.C.C. 제3차 대회가 모임으로써 완전히 통합되었다. 이렇게 I.M.C.가 W.C.C.와 통합함으로써 세계 각국의 기독교협의회(N.C.C.)는 자동적으로 W.C.C. 산하로 들어가게 되었다. 이 세계교회협의회 성격을 제2차 대회에서 표명하는데 그것을 요약해 보면, (1) 예수 그리스도를 주로 고백하는 사람들은 누구나 자교파 밖에서 친교의 대상이 된다. (2) 비록 서로 용납할 수 없는 경우가 있을지라도, 서로 유리되고 고립되어서는 안됨을 믿는다. (3) 회원 교회는 형제로서 서로 다툴 수 없음을 안다. (4) 서로 남에게서 배우고 연구하는 가운데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가 성장하여 교회 생활이 쇄신되도록 한다. (5) 그럼에도 불구하고 회원 교파들의 신조나 의견은 강압받지 않으며, 회원 교파는 완전히 자유로운 입장에 있다.

3.3. W.C.C.의 이념과 기능과 성과

이어서 세계교회협의회의 기능을 정리해 보면, (1) '신앙과 직제' 및 '생활과 사업'의 두가지 세계적인 운동을 실천하고, (2) 교회 상호간에 공동으로 행동할 수 있게 편리를 도모하며, (3) 연구를 위해 서로 협력하도록 하며, (4) 에큐메니칼 의식의 확장을 조장하여 에큐메니칼 정신을 특수 인물의 전유물로서가 아니라, 모든 회원에게 보편화 시키는 일. (5) W.C.C.밖에 있는 다른 연합체 운동과 관계를 긴밀히 하며, (6) 경우에 따라서는 특수 제목으로도 세계대회를 소집하고, 거기서 발견한 것을 발표할 권한을 갖는다. 이상과 같은 기능들을 정리해 볼 때 W.C.C.는 결코 어떤 단일 교파를 새로 만들려는 운동이 아니다. 따라서 이 연합운동은 인간들의 인위적인 운동만이 아니라, 궁극적으로는 성령의 '하나되게 하시는' 자유로운 역사에 맡기고 순종하는 운동임을 알게 된다. 그러므로 세계교회협의회 회원들이 공통적으로 승인하는 운동임을 알게 된다. 그러므로 세계교회협의회 회원들이 공통적으로 승인하여 채택한 일치된 고백은 다음과 같다. 즉 "W.C.C.는 성서에 따라 예수 그리스도를 하나님이요 구주로 고백하고, 성부·성자 및 성령의 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같이 부름 받은 사명을 성취하고자 하는 교회들의 친교이다."

이러한 세계교회협의회의 고백아래 동일계 교파 간의 합동이 약 60여종이고, 타 교파와의 합동이 약 30여종에 달하였다. 이 같은 에큐메니칼 운동의 성과 중에서도 스코틀랜드에서는 800년까지 18종의 장로교파가 그후 4종으로 통합되었고, 다시 1929년에 이르러 하나의 장로교로 단일화되었다. 그리고 캐나다에서는 1860년 21개 교파였던 것이 1925년에 와서 캐나다 연합교회가 되었다. 따라서 피선교지의 교회 중에는 필리핀이 1929년에, 그리고 일본이 1940년에 일본 조합교회가 이루어 졌다. 그뿐만 아니라 남인도에서도 29년간에 걸친 간곡한 협의 끝에 1947년에 심지어 성공회와 다른 개신교파 간에까지 완전한 합동을 이루어 '남인도 연합교단 교회'를 탄생시켰다. 이 외에도 파키스탄, 세이론 등지에서도 연합교회를 이루었다. 이와 같은 세계교회의 경이적인 연합 성과에 비해, 한국에서는 타교파간은 고사하고 같은 교단 안에서 마저 강단 교류조차 하지 않고 있는 것은 실로 '때의 징조'를 깨닫지 못하는 수치가 아닐 수 없다.

물론 '교회의 연합' 운동은 광적인 획일화로 상처를 입듯이 또한 무질서한 다원주의에 의해서도 파괴될 수가 있다. 고로 다양성 안에서의 일치는 언제나 일치와 자유의 근원이신 그리스도에게로 거듭거듭 돌아가는 것이 무엇보다도 중요하다. 교회원이 "그리스도와 보다 친밀해 질수록 우리들은 서로서로 더욱 더 친밀해 진다." 정녕 하나님께서는 이 시대의 인류를 위한 가능성을 열어주시기 위해 지금도 일하고 계시며, 그리스도가 이 모든 가능성의 '길'이 되신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그를 증거하면서 같이 행진해야 할 것이다. 사람에게 살아계시는 그리스도를 알리는 일보다 더 큰 봉사는 없고, 봉사하는 삶을 사는 것보다 더 효과적인 증거는 없다. 이 증거는 우선 그리스도 교회가 자체 안에서 만이라도 에큐메니칼 교제를 통하여 이 파국적인 분열과 대립의 세계 상황을 향해 '눈으로 볼 수 있는 연합'(visible union)을 실천해야 하겠다. 이렇게 함으로써 '하나님의 평화'를 보여 주는 일이 될 것이다.

심일섭(강남대학교, 교회사학) 

 

출처 : Joyful의 들 원문보기   글쓴이 : Joyfu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