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세윤 박사/선교의 창

[스크랩] 선교 그 패러다임의 전환

에반젤(복음) 2021. 8. 18. 20:07
선교: 그 패러다임의 전환
= 교회개척운동 사역: 무슬림 지역을 중심으로 =

김요한

선교 역사는 무엇을 이야기 하는가? 

대부분 무슬림 지역의 선교역사적 배경을 보면, 폴 히버트가 이야기한 바와 같은 실증주의(Positivism)가 주류를 이룬 식민지 시대의 선교를 떼어놓을 수 없다. 인도네시아의 경우를 예를 들면, 350여년이 넘는 기독교 국가 화란의 식민지와 함께 이루어진 선교는, 그 시대적 상황의 불가피성을 고려한다고 하더라도, 결국 기독교의 서구적인 구조성을 떠나지 못한 채, 서구 기독교 형태를 심는데에 주력할 수 밖에 없었고, 그 결과로 애니미즘을 숭배하던 종족들 가운데에 복음이 받아들여지긴 하였지만, 대다수의 무슬림들에게는 서구 세력에 대한 반작용과 독립을 향한 거센 반발로 오히려 반목과 편견의 결과만을 낳고 말았다. 
  현대화와 세계화의 흐름을 감안한다고 하더라도, 무슬림들이 주류를 이루는 곳에서는, 서구적인 기독교 문화나 구조를 문화 일부 가운데에 어쩔 수 없이 수용하면서도, 기독교 자체를 적대적인 세력으로 지속적으로 견제하고 있으며, 이슬람 교육에 대한 강조와 근본주의적인 사고체계를 더욱 공고히 해 나가고 있는 실정이다. 또한 선교사역의 결과로 지속적인 선교의 열매가 일부 지역적인 교회의 양적인 성장으로 드러나기도 하였지만, 결국 이슬람을 위협하는 세력집단의 성장으로 이해되어, 종교적 긴장이 고조되는 경우가 자주 있음을 알 필요가 있다. 
  무슬림 다수의 지역에는 대부분, 이미 세워진 교단과 교회들이 있다. 그러나, 이들은 서구화된 기독교 조직과 구조 가운데에서 주류를 이루는 무슬림들을 대상으로 선교는 고사하고, 사회전반에 영향을 미치지 못하는 자신들만의 고립된 문화의 형태를 만들고 말았다. 시편 67편은 열방 즉 모든 민족으로 하여금 하나님을 찬양할 수 있도록 구원의 도를 땅끝까지 알리어, 그 땅이 축복의 소산을 내는 것을 기록하고 있다. 이는 선교적 차원에서 이해할 때에 열방과 민족들이 살아가는 그 땅에 주님의 몸이 이루어지는 영적인 소산이 바로 선교의 목표임을 알게 해준다. 그것은 또한 하나님 나라가 어떻게 이루어져 가는가 알게 해준다. 하나님 나라는 하나님께서 통치하시는 나라이다. 그 나라에는 하나님의 통치를 받는 백성들이 필요한데, 그 백성들이 바로 모든 열방, 즉 민족들임을 알 수 있다. 필자가 사역하는 인도네시아의 마두라 섬을 중심으로 동부자바에 마두라 종족이 주류를 이루고 살고 있다. 이들 마두라 땅에도 우리 주님의 몸이라고 하는 교회가 세워졌다. 마두라 섬에도 교회가 있다. 그런데, 이들 교회에 들어가보면, 마땅히 있어야할 그 땅의 거류민인 마두라 사람들은 하나도 보이지 않고, 온갖 다른 종족들만 있다. 마두라 사람들이 사는 그 땅에서 영적인 소산이 난다면, 그것은 어떤것이어야 할까? 마땅히 마두라 종족으로 하나님의 백성이 되어 주님의 몸인 교회를 이루는 그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지금까지의 선교 역사는 그 땅의 소산을 내는데에 실패하고 말았다. 이제 무슬림 지역에서 우리가 누구를 대상으로 어떠한 주님의 몸을 이루게될 것인가에 대한 실마리를 이와 같은 상황 가운데에서 찾아야 한다.
  동부자바의 한 지방 도시 근교에 있는 마두라 마을에서 집단회심이 이루어졌다.  이 소문은 현지인 팀원이 속한 바 있던 교단에도 알려져, 일련의 목사들이 마을에 내려와 그 회심하였다는 마두라 사람들을 만나서 교회에 나가냐고 물어보았다. 아무도 교회에 나가지 않는다고 대답하였다. 이에 이들 교단 목사들은 마두라 회심자들을 기존의 교회로 데리고 나가지 않는다고 현지인 팀원을 질책하였다. 팀원들과 같이 모여서 과연 이들 마두라 종족들이 기존의 교회에 나가야 하는가 기도하며 토의하였다. 마침내, 우리는 바로 그들의 삶의 현장속에서 모이는 그 자신들이 교회임을 알게 되었다. 그들의 땅에서 그들로 이루어진 회중이야말로, 그 땅의 영적인 소산이리라.

진정한 선교 패러다임 전환의 필요

랄프 윈터 박사에 의하여 미전도 종족에 대한 선교의 포커스가 주창된 지 이제 30여년이 지나가고 있다. 그동안 수 없이 이야기 되어 왔던 것은, 바로 선교에 대한 패러다임의 전환이었는데, 그것은 국가나 지역적인 선교 포커스에서 그 땅에 살면서 동질한 문화를 구성하고 있는 종족들에 대한 포커스로의 전환을 의미한 바 크다. 이제는 미전도종족 선교를 하지 않으면, 현대선교의 축에 놓여 있지 못할 정도로 미전도종족에 대한 선교의 중요성이 강조되고 있는 시대가 되었다. 이슬람을 종교로 신앙하는 무슬림 종족들은 모두 이 미전도 종족에 속하고, 미국의 9.11 테러 참사와 아직도 해결되지 못한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의 정치/종교적 관계 그리고, 헌팅턴 등과 같은 미래 학자에 의하여 예견된 문명충돌의 시나리오 등은 이슬람이 주류를 이루고 있는 지역이나 종족들에 대한 선교적 새로운 관심을 고조시키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사실 무슬림 사역을 감당하고 있다고 말하는 경우, 종종 자신들이 무슬림 지역에 살면서 기존의 교회나 기독교의 구조 가운데에서 활동하는 것을 말하게 되는 경우가 많이 있다. 그러나, 기성 교단이나 교회가 그 지역의 일반 주류의 문화와는 다르게 자신들만의 성을 쌓아 살아가는 이상, 그들과 동역하는 사역자는 무슬림들의 세계관을 이해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실제로 그들에게 나아가 복음을 전할 기회는 더더욱 없어지고 만다. 결국 할 수 있는 일이라곤, 어찌하여 회심하거나 어쩔 수 없는 관계 때문에 간혹 교회 안으로 들어오는 무슬림들을 대상으로 삼는 것이 대부분이 되고 만다. 
  게리슨이 정리한 바 있던, 교회개척운동은 여러가지 면에서 선교의 패러다임 전환을 이루는 동인이 되어가고 있는데, 그가 정리한 교회 개척운동의 속성을 연구해 보면, 선교는 그 자체가 개척적이요 사도행전적이 되어야 함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다. 이제 미전도종족을 향한 선교 대상에 대한 패러다임 전환이 이루어졌다면, 그들을 대상으로 하는 사역의 성격과 방법, 그리고 그들 가운데에 어떠한 일이 일어나는 것을 목표로 하는가에 대한 패러다임 전환이 필요하게 되었다. 
  어떠한 의미에서 이러한 전환의 인식은, 새로운 탄생이라기 보다는, 전통이라는 두터운 옷이 본질을 가리고 있을 때에 성경에 드러난 순수한 원리로 돌아가는 것이요, 시대적 상황이 요구하는 개혁이라고 할 수 있다. 이에 대하여 랄프 윈터 박사는 서구화 된 기독교 전통의 문화에 가리워진 복음전도와 선교를 뛰어넘어 다시 순수하게 성경적 원리로 돌아가는 개혁에 대하여 이야기한 바 있다.

패러다임 전환의 그 내용은 무엇인가?

하나님 나라의 확장과 교회성장 패러다임

종종 맥 가브란을 교회성장학의 대가로서 설교에 인용하는 경우가 많이 있다. 교회의 성장을 이야기 하려면 무엇이 교회인가에 대한 주제와 분리하여 이야기 할 수 없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우리가 이해하는 교회의 정의, 즉, 예수를 구주로 믿고 주님으로 고백하는 하나님의 자녀들로 이루어진 지역적이고 가시적인 공동체로서의 주님의 몸을 생각할 때에, 선교의 목표도 그 주님의 몸을 이루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주님의 몸은 분명히 유기체적으로 성장해야 하는 것이 성경적인 원리라고 할 수 있다. 맥 가브란은 주님의 몸이 어떻게 유기체적으로 성장할 수 있을까에 대한 원리로서 “동질 집단의 원리”를 이야기 하였다. 한국 교회의 성장 모델이 바로 이 동질집단의 원리에 잘 부합되는 것으로 보여진다. 즉, 동일한 문화권 가운데에 살아가면서 복음전도의 장벽이 없는 집단, 즉 종족 집단이 바로 교회가 성장할 수 있는 가장 좋은 환경이라는 것이다. 주님의 몸으로서의 유기체적인 성장은 바로 하나님 나라의 확장이라고 이야기 할 수도 있겠다. 
  이러한 내용들을 염두에 두고, 우리가 어떠한 점에서 이제 발상의 전환을 꾀해야 하는지 살펴보기로 하자. 우리가 이야기 하는 교회성장은 자주 지역의 개교회 차원에서 이루어진다. 즉, 어느 지역에 믿음의 공동체가 형성되었을 때에 그 곳에서 기독교적 활동이나 예배에 참여하는 신자들의 숫자가 많아지는 것을 교회성장으로 이해하는 경향이 있다. 이러한 숫자적인 성장이 진정한 성장이 아니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숫자는 중요하지 않고 질적인 성장이 중요하다고 이야기 하기도 한다. 그러나, 이 두 경우 다 그 이야기의 핵심은 각각의 개교회를 중심으로 한 것이다. 이러한 성장의 특징은 정적이고 수직적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한 교회성장에 대한 이해로서 수 많은 대형교회가 형성되었지만, 결국은 유기체적인 주님의 몸으로서의 기능은 거의 상실되고 말았다. 
그러면, 성경에 등장하는 하나님 나라의 확장의 관점, 즉 선교의 관점에서 교회성장을 어떻게 이해할 수 있는가? 이는 개교회의 질적인 혹은 양적인 성장의 문제가 아니라, 복음이 모든 열방 가운데에 확산되어 가는 수평적인 전파와 관련되어 있다. 하나님 나라가 완성되는 것은, 마태복음 24장 14절에 우리 주님께서 직접 말씀 하신 바와 같이 모든 민족에게 복음이 증거되기 위하여 온 세상에 전파되어야 하는 것이다. 따라서, 본질적인 의미의 선교는 그 자체가 복음전파(Propagating)와 확산(Spreading)으로 특징지어져야 한다. 이러한 복음전파는 개교회 신자의 숫자가 증가되기 위하여 전도활동을 하는 것과는 근본적으로 그 의미가 다르다. 복음전파를 위한 전도와 선교를 우리는 종족 개 교회의 양적인 성장으로 국한 시키는 죄를 범해왔다고 하면 너무 과격한 발언이 될것인가?        
  게리슨은 교회개척운동에 대하여 현상론적인 설명을 한 바 있다. 교회개척운동은 한 지역이나 종족 가운데에 개 교회의 양적인 성장을 이야기 하는 것이 아니라, 복음전파의 수평적 확산으로서 교회를 개척하는 교회들의 숫자가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하는 곳에 그 특징들이 무엇인가를 잘 정리하였다. 이렇게 교회가 수평적으로 성장하기 위하여 어떠한 교회를 지향해야 할 것인가? 성경에서는 어떠한 교회의 모습을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는가? 게리슨의 교회개척운동의 10가지 우주적 요소 가운데에 교회형태를 지적한 것이 있는데, 그는 교회개척운동이 일어나는 곳의 교회는 가정교회나 셀 형태가 되어야 한다고 하였다. 지금까지 대형교회로의 성장을 꾀하였던 교회들이 그 한계점을 인식하고, 이제는 셀 형태의 교회로서의 전환을 꾀하고 있는 곳이 많이 있다. 그러나, 이는 결국 중앙집권적인 체제라는 관점에서 그 구조적 한계점을 갖게될 것이다.    
  미전도 종족은 말 그대로 아직 복음의 씨앗이 제대로 뿌려지지 못한 종족이요, 더우기 자신들로 이루어진 주님의 몸이 일어나지 못한 종족이다. 이곳에서 우리가 사역을 한다면, 어떠한 교회관과 어떠한 복음전도의 원리를 가져야 할까? 이곳은 선교의 개척지이다. 선교의 개척지에서는 사도행전적 교회들이 일어나야 한다. 이제 개척 사역의 목표가 되고 있는 교회개척운동이 이러한 사도행전적 교회 운동으로 이해할 수 있다.    

교회의 정의에 대한 성경적 의미의 재발견

성경에서 이야기하는 교회는 늘 살아 있는 유기체와 비유된다. 유기체의 특징은 세포단위 즉, 각개 세포들의 생명현상에 기인한 결합과 상호작용으로 규정된다. 
아직도 한국 선교사들 가운데에는 교회개척을 교회당을 세울 수 있는 부지의 매입과 교회당을 건축하는 것으로 생각하고 있는 경우가 많이 있다. 교회의 본질에 대한 유기체의 관점에서 볼 때에 이러한 형태의 교회 인식은, 자체가 무생물과 다름없다. 마두라 종족은 인도네시아에서 세번째로 큰 종족으로서 마두라섬과 동부 자바 지역을 중심으로 하는 인구가 1300-1500만이나 되는 큰 종족이다. 150년이 넘는 선교의 역사 가운데에 마두라 섬내에서도 소위 교회개척이라고 부르는 많은 선교활동이 이루어졌다. 마두라 종족들이 사는 섬내에 15 이상의 교회당이 세워졌고, 동부자바의 주도인 수라바야에는 아시아에서 가장 큰 규모라는 교회당이 체육관 처럼 웅장한 자태로 들어서 있다. 그런데, 비극적인 사실은, 그들 교회당 안에 마두라 종족은 거의 없다는 사실이다. 그 지역의 주류를 이루고 있는 사람들이 수 백년 동안 외면하고 있는 교회당을 우리가 교회 개척이라는 이름으로 지속적으로 지어본들 진정한 의미의 교회개척이 이루어질 것인가? 종족에 대한 포커스를 가지지 못한 경우에, 그래도 교회당이 많이 세워지는 것이 없는 것 보다는 좋다는 논리로, 여전히 그 땅의 거류민을 의식하지 않는 교회건축이 바로 교회개척으로서 이루어지고 있는데, 이는 심각한 종교의 대결구도로 까지 이어질 수 있다. 한국 사람들이 주류를 이루는 한국 땅에 교회가 세워졌다면, 그 교회당 안에는 당연히 한국 사람들이 하나님께 예배 드리기 위해서 모인다. 만일 한국 땅에 세워진 교회당 안에 들어가보니, 한국 사람은 전혀 없고, 미국 사람만 모여 있다거나, 세네갈 사람, 우간다 사람들이 모여 있다고 생각한다면, 이는 한국사람과는 무관한 교회이거나 특수 교회임에 틀림없다. 마두라 사람들이 사는 마두라 땅에 교회가 섰는데, 마두라 사람들은 없고 온통 중국사람, 자바 사람, 바딱 사람들만 모여 있다면, 이는 무엇인가 근본적으로 잘못된 것임에 틀림없다. 
무엇이 잘못된 것일까? 우리가 종족에 포커스를 이루지 않았을 때에는 인도네시아에 교회가 세워지도록 기도하였고, 소련을 위하여 기도하였으며, 유고연방에 교회가 세워지도록 기도하였다. 기도와 함께 그렇게 세워진 교회에 하나님의 백성이 모였다. 그러나, 그 땅에 살고 있는 사람들에 대한 포커스를 잃었을 때에 우리는 그 나라 가운데에 대형교회가 들어서고 믿는 자들의 숫자가 증가하는 것으로 만족하였지, 과연 누가 하나님 나라를 구성하는 백성으로 부름을 받는가에 대한 성경적 인식이 결여되었다. 이제 소련은 없어지고 말았다. 이제는 우리가 소련을 위하여 기도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 소련이라는 나라에 살던 사람들로 이루어진 여러 종족들을 위한 기도는 여전히 유효하다. 
결국 교회란 건물 자체나 구조가 아니라, 모든 민족 가운데에서 우리 주님을 찬양하는 사람들로 이루어진 회중이라는 것을 이해할 때에, 지금 우리가 보는 교회관에서 무엇이 잘못된 것인지 확실하게 볼 수 있다. 결국 현지 미전도 종족으로 이루어진 토착적인 교회가 일어나야 한다는 말인데, 여기서 토착적이라는 말은 현지 회심자 그룹들의 자체 주도권을 말한다.                  
  
선교에 대한 강조점: 종족인가 사역인가에 대한 패러다임

현대선교는 다양한 형태로 진행된다. 특히 단기 선교와 전문인 선교가 현대선교의 중요한 핵으로 떠오르면서 수 많은 이름이 붙여진 사역의 종류가 있다. 예를 들면, 교수사역, 캠퍼스사역, 학생사역, 의료사역, 콤퓨터사역, 유치원사역, 비지니스사역 등등 헤아릴 수 없이 많은 다양한 형태의 사역이 진행되고 있으며 현재도 계발되고 있다. 물론 이러한 다양한 사역의 형태로 인하여 다양한 접근이 이루어지고, 총체적인 사역이 가능하다. 
  그런데, 우리가 이와같이 사역의 형태에 포커스를 이루고 있는 동안, 우리의 선교적 목표도 어느새 “내가 무엇을 해야 하는가” 혹은 “내가 무엇을 할 수 있는가?”에 그 출발점을 두기 시작했다. 그 결과로, 선교의 방향도 하나님의 계획을 바라보기 보다는 먼저 자기 자신의 능력과 전문분야가 무엇이냐에 따라서 결정하게 된다. 그래서 자신의 전문 분야가 없는 사람은 아무리 선교에 대한 소명이 분명하다고 하여도 선교지에 나가기 어려운 시대가 된 것 같다. 많은 헌신자들이 “나는 ooo사역을 하리라”에 목표를 두고, 자신을 준비한다. 
그러나, 우리가 이제 선교의 출발점을 “과연 어떠한 일이 이루어져야 하는가?”에 포커스를 맞추고 아직 이루어지지 못한 선교의 과업에 대한 인식을 하게 될 때에 이 과업은 단순한 사역의 종류의 문제가 아니라는 것을 알게되며, 그것이 인간의 힘과 능력으로는 불가능하다는 것을 인식하게 된다. 남아 있는 과업에 대한 진정한 인식은, 우리가 계획하고 구상한 선교의 계획이나 우리의 지식 및 전문 분야 조차도 무용지물이 될수도 있다는 것을 깨닫게 해준다. 
  그 남아 있는 과업은 무엇인가? 과연 하나님 나라의 온 역사 가운데에 아직도 남아 있는 물리적인 시간, 즉 주님의 재림까지 이어지는 역사 가운데에 이루어져야 할 일이 무엇인가? 사실, 우리가 조금만 주의를 기울여 하나님의 말씀을 상고해보면, 성경 전체가 그것을 우리에게 명백히 알려주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스라엘을 선택된 종족으로 택하셔서 구속의 샘플링으로 삼으신 것 처럼, 이제는 모든 종족이 그렇게 택함을 입어야 한다는 것을 지속적으로 우리에게 계시하셨다. 완성된 그 날이 되면, 그 남은 백성들을 모든 지역으로부터 부르시고 모든 열방으로 하여금, 민족 혹은 종족들 가운데에서 방언으로 찬양하도록 하실 것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관심이 종족 단위에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마태복음 24:14과 누가복음 24:46-47에 우리 주님께서 하나님 나라의 완성시기와 성경에 기록된 내용이 무엇인지에 대하여 직접 말씀하시는 것을 보더라도 모든 종족들 가운데에 복음이 전해지는 상황이 이루어지지 않으면 아직 우리 주님께서 재림하실 조건이 이루어지지 않은 것임을 알 수 있다.      
  따라서, 우리는 선교에 대한 강조점을 사역보다는 우리가 복음을 전하기 원하는 사람들인 종족에 두어야 함이 마땅하다. 우리의 주 관심은 사역이 아니라 하나님의 백성으로 돌아올 영혼들에 있어야 한다는 말이다. 우리가 미전도된 종족들에게 복음을 전하기 원한다고 하면서, 우리의 걱정은 언제나 아직 전문적인 준비가 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래서, 많은 후보자들이 사역지로 떠나기 전에 자신의 전문분야 개발을 목표로 많은 시간을 들이는 것을 볼 수 있다. 전문 분야가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결국 소명을 포기하기에 이르기도 한다. 만일 우리가 사람에 관심을 두고 그 사람들과 더불어 살아갈 것을 목표로 한다면, 우리의 전문사역 분야와는 무관하게 그 미전도 종족들이 살고 있는 상황 속에서도 얼마든지 더불어 전문 분야를 계발해 나갈수도 있다. 이러한 일은 그들 가운데에 들어가서 삶을 공유하여야 가능하다. 이렇게 더불어 살면서 그들의 문화에 적절하게 복음을 전하는 것은 우리 주님께서 성육신하신 그 원리라고 생각할 수 있는데, 이를 상황화라고 한다. 

궁극적 목표로서의 교회개척운동

무슬림 미전도 종족에 대하여 상황화와 더불어 그 복음전도의 결과가 집단적인 회심운동으로 수평적인 교회개척의 확산이 일어나는 것을 기대할 필요가 있다. 이는 게리슨의 교회개척운동이라는 용어를 빌어 이해할 수 있다. 교회개척운동을 온전히 이해하기 위해서는 선교사역의 목회구조적 개념이나 한 지역 교회를 세우는 정적인 교회개척 개념으로부터의 페러다임 전환이 시급하다. 이에 대하여, 미전도 종족사역이 지향해야 하는 궁극적 목표로 ‘교회개척운동’에 전략적인 이해가 매우 필요하다. 
  교회성장학의 대가인 맥가브란이 동질 집단 원리를 주창하여 동질집단이라 할 수 있는 종족 단위의 교회성장에 대한 효과적 원리가 선교계에 널리 소개되었다. 이는 개인의 회심에 역점을 둔 서구 방식의 제자 양육보다는, 집단적인 회심을 통하여 예수 그리스도께 향하는 집단운동이 그 핵심 포인트로 드러나고 있다.
    그리스도의 대위임령에 대한 과업 완수를 위하여, 개인이 우선이냐 집단이 우선이냐를 가르는 것은 어리석은 일일 것이다. 우리가 전하는 복음은 개인이 받아들여야 하는 것이며, 집단의 구성원은 개인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복음전도에 있어서 성령의 역사하심에 대한 다이내믹한 속성을 우리가 간과하지 않는다면, 성경의 많은 회심의 기록 가운데에, 상황의 역동성 속에서 집단적 회심의 결과를 이루어 내는 경우가 많이 있음을 보게 된다. 예를 들면, 베드로의 설교라는가, 바울과 실라가 빌립보에서 선교활동 할 때에, 리디아가 예수를 믿고 온 가족이 예수를 영접한 일이나, 간수장 집안의 회심 사건, 그리고 수많은 바울의 전도 여행시에 일어나는 사람들의 반응은 대개가 집단적인 성향을 띄는 경우가 많이 있다.
    2000년도 들어와 선교의 방향에 새로운 전기를 던져주고 있는 것이 바로 데이빋 게리슨의 "교회개척운동(Church Planting Movements)"라는 제목의 작은 소책자에서 다루고 있는 교회개척운동이다. 게리슨이 다루고 있는 교회개척운동은 우리에게 하나님의 나라가 확장되어 가는 그 역동성과 긴박성 그리고 교회개척운동이 일어나고 있는 현장에 대한 이해를 통하여, 미전도 종족을 대상으로 사역하는 우리가 궁극적으로 지향해야할 것에 대하여 간결 명료하게 제시하고 있고, 교회의 외적 형태에 대해서도 새로운 지평을 던져주고 있다.                  
    게리슨은 교회개척운동을 "구별되는 한 종족이나 인구 집단 내에 ‘교회를 개척하는 토착 교회’가 빠르고 지수적으로 증가하는 것"(A Church Planting Movement (CPM) is a rapid and exponential increase of indigenous churches planting churches within a given people group or population segment)으로 정의한다. 이 정의의 중요한 그 첫 번째 것이 ‘빠르고 지수적인 증가’이다. 교회개척운동은 교회를 개척하는 교회들의 숫자가 운동으로서 빠르게 증가하는 것을 의미한다. 지수적 증가는 새로 개척된 교회 자체가 또 다시 그러한 교회를 개척할 때에만 가능하다. 이 원리는 사역현장의 모든 현지인들에 대한 지도자화를 통하여만이 가능할 것이다. 지도자화란 말은 현지인이 복음전도 사역에 있어서 그 주도권을 갖는다는 말이다. 이는 바울이 디모데에게 부탁한 그 원리이다. 즉, 이러한 교회개척운동은 교회개척 전문가나 선교사에 의해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교회 스스로 즉 교회의 구성원 모두가 복음전도에 대한 긴급성 가운데에 주체의식을 가지고 동참할 때에 가능하게 된다. 그렇기 때문에 여기에서 중요한 단어가 바로 ‘토착’(indigenous)이라는 단어이다. 따라서 교회개척운동은 밖으로부터의 자원 공급에 의존하는 것이 아니라 내부자적인 운동(Insider’s Movement)되어야 한다. 이 말은 복음을 전하는 자가 없이도 복음 스스로 저절로 교회개척을 이룬다는 의미는 아니다. 그러나, 교회개척 운동은 그 자체가 어느 순간 속히 그 주도권이 토착화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대단히 흥미 있는 현상은, 이러한 교회개척운동이 초대교회적인 상황 즉, 복음전도를 위한 주변의 상황이 열악한 곳에서 오히려 일어난다는 것이다. 초대교회적 상황이 흔히 발견되는 그곳에 많은 미전도 종족들이 있다는 것을 염두에 둔다면, 이들 미전도종족들 가운데에 교회개척운동이 전개될 것을 기대할 수 있는 것은 자명한 일이다.  
데이빋 게리슨의 책 가운데에 소개된 교회개척운동의 전형은 지수함수적 증가이다. 이 같은 지수함수적 증가가 의미하는 것은 물론 집단적인 회심운동이다. 사실 한국교회의 역사를 살펴보면, 이와같은 지수함수적인 교회의 증가가 이루어졌던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지금의 한국 교회상황은 그 성장이 멈추고 포화되었지 않았나 하는 의구심을 갖게 하는 많은 징조가 있다. 교회 성장의 관점에서 한국교회는 좋은 모델 케이스가 될 수 있다. 한국은 멕가브란의 동질집단의 원리가 적용되는 곳이며 토착교회의 설립이 빠르게 이루어진 곳이기 때문이다. 한국이 비록 거시적으로 동질집단을 대표할 수는 있지만, 좀 더 세부적으로 들여다보면, 그 안에도 더 작게 구분되는 더욱 동질적 조직들인 클러스터들이 존재한다. 이러한 구분되는 동질 집단인 클러스터들은 서로가 사회적/경제적/문화적/종교적 상호작용을 할 수있고, 교회성장의 특징 또한 다른 것을 알 수 있다. 한 지역 혹은 어느 클러스터의 방향성 있는 회심의 결과는 다른 집단 클러스터에 영향을 미치고 그것이 전체적인 운동의 양상으로 전개될 수 있다. 
  우리나라의 교회가 경이적인 성장을 이룬 것이 60년대 중반에서80년대 중반의 약 20여년에 걸쳐서라고 한다. 이후, 80년대 후반에 들어와서는 어느정도 포화되어 가는 양상을 보여주었다. 이는, 한국교회를 리드하였던 신학교 졸업생들의 사역에 대한 사명의식 변화에서도 감지된다. 70년대에 신학교를 졸업한 학생은 누구나 교회 개척에 대한 열의와 소망을 가지고 있었다. 따라서 교회개척이 하나의 운동처럼 전개되었다. 그러나, 지금의 신학생들은 대부분 기존의 교회 가운데에서 일자리를 찾는 것으로 사역에 대한 사명의식이 바뀌어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어느 교회에 부목사 자리가 있어서 광고가 나가면 몇 백대 일의 경쟁이 이루어진다고 한다. 다시 말하면, 졸업생들의 사역현장에 대한 인식이 교회밖에서 교회라는 조직 내부로 들어오게 된 것을 알 수 있다. 이는 데이빋 게리슨이 지적한 교회개척운동을 저해하는 요소 가운데에 한가지이다.    
  교회개척운동 기구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아래 그림 (a)는 우리가 목표로하는 한 미전도종족 그룹을 대표한다. 이들은 보다 균질한 사회적 소집단 (예, 씨족, 친족, 혹은 종교적 집단 등)인 여러 클러스터(타원)로 구성되는 거시적인 계라고 할 수 있다. 이들이 이슬람 신앙으로부터 예수에 대한 믿음으로 그 전체적인 방향을 트는 것이 바로 집단회심운동이라고 이야기 할 수 있다. 즉, 예수를 대적하고 세상을 바라보고 있는 방향(왼쪽; 각 클러스터들이 자연적으로 향하고 있는 방향)에서 예수를 향하는 방향(오른쪽; Fext 혹은 복음전도 및 선교가 지향하는 방향)으로 전환하는 회심운동을 일으키도록 하는 것이 선교의 목표이다. 물론 외부의 영향 Fext은 모든 복음전도 임팩트라고 할 수 있다. 선교 및 복음전도의 관점에서 외부의 영향은 기도와 물질 지원, 선교 연구, 정탐여행을 포함한 모든 총체적인 선교적 노력이라고 할 수 있다. 외부의 복음전도활동(Fext)에 대한 반응은 집단내에 우선 그 수용성이 가장 큰 클러스터(이중 타원)의 방향전환, 즉 예수께 향하는 방향으로의 전환으로 시작된다. 일단 회심자 그룹이 생겨 복음전도 활동의 주도권을 갖게 되면 주변의 다른 클러스터에 영향을 미치게 된다. 만일 회심자 그룹이 한 지정된 장소에 숫자적으로 증가하는 기존의 교회개척 패러다임에 머물러 있다면, 수평적인 확산은 이루어질 수 없다. 따라서, 수평적인 확산을 위해서는 각각의 클러스터 단위가 작을수록 효과적일 수 있고, 가속도가 붙을 확률은 그만큼 커진다. 게리슨의 교회개척운동에 등장하는 교회형태는 가정이나, 셀 형태를 이야기 하는데, 이는 수평적 확산을 위하여 필수적이라 할 수 있다. 이러한 수평적 확산의 전체적인 시간 양상은 위의 그림 (b)와 같이 나타난다.  










그림 (a) 클러스터로 이루어진 한 인구집단          그림 (b)  클러스터들이 방향전환을 할 때에
                                                  결과적으로 나타나게 되는 시간 양상 (P는 
                                              예수께 향하는 클러스터들의 숫자 지표.)

  게리슨이 이야기 하는 교회개척운동은 그림 (b)에서 임계시간이라고 할 수 있는 Tc를 지나면서 교회들의 숫자의 성장이 괄목할만하게 진행되는 구간(Tg)을 나타낸다.                                
위와 같은 현상은 각개의 클러스터들이 서로 다른 구속상태(constraint)를 이루고 있을 때에 특별히 관찰되며, 전체적인 변화의 시간정도를 나타내는 소위 시간상수는 그 구속조건들이 어떻게 상호관련되어 있는가에 따라서 결정된다. 이러한 구속상태의 이해를 돕기 위하여 한국 교회의 역사적 상황과 무슬림 지역의 상황을 비교해 볼 수 있다. 한국교회는 일제 통치시대, 이차대전과 광복 그리고 6.25 등을 거치면서 교회의 급속적인 성장을 이룩하였다. 반면에 무슬림 지역들은 식민지 시대, 이차대전과 독립을 거치면서 더욱 선교의 문이 닫히게 되었다. 어떠한 차이가 있는가? 만일 우리 나라가 예를들어 일본이 아닌 서구 기독교 국가의 식민통치를 받았다면, 과연 어떠했겠는가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우리나라는 식민지를 벗어나면서 근대화의 시기에 기독교인들의 지대한 공헌에 힘입어 발전하였다. 그것이 교회성장의 확실한 밑걸음이 되었던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현재의 이슬람 국가의 대부분은 기독교국가 통치에서 벗어나기 위하여 투쟁해야 했고, 과거의 십자군 전쟁 이후의 편견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이와 같이 서로 다른 역사적 상황배경을 그 사회의 각개 집단들 즉 클러스터들이 어떤 조건하에 있게 하는 하나의 구속상태로 표현할 수 있는 것이다. 따라서 사회집단을 이루는 종족집단 가운데에는 여러가지 형태의 구속상태가 존재할 수 있다. 이러한 구속상태들이 바로 전체적인 시간상수를 결정하는 인자들이다. 
  우리의 모든 선교사역의 노력들은 데이빋 게리슨이 이야기하는 교회개척운동의 실제를 앞당기기 위한 것이라할 수 있다. 즉, 그림 (b)에서 보는 교회개척운동의 시발점인 임계시간 Tc의 시점을 앞당기고자 하는 것이다. 만일 우리가 Tc의 시점을 앞당기기 원한다면, 구속상태를 정확하게 파악할 필요가 있다. 다른 종류의 클러스터들 가운데에는 외부의 영향에 대하여 좀 더 반응성이 좋은 것이 존재할 수 있다. 그림 (a)의 클러스터들 가운데에 이중의 타원으로 표시된 것이 바로 그것인데, 이와 같은 서브그룹은 전체적인 운동을 유발하는 시발그룹이 될 수 있다. 사실 하나님 나라의 확장에 대한 특징과 교회역사를 살펴볼 때에, 어느 종족이든 성장을 경험한 이후에 그림 (b)에 있는 성장이 둔화되는 Ts의 시간이 나타난다. 어떤면에서 볼 때에 그것은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누구나 모두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아닌 제한적인 속죄(Limited Atonement)를 생각한다면, 성장이 무한적으로 계속될 수는 없다. 그러나, 이미 성장둔화기에 들어간 교회들은 성장을 연장시키기 위해서 다시 성장 초기의 메카니즘으로 눈을 돌릴 필요가 있다. 즉, 어디에 아직 돌아오지 못한 클러스터들이 있는가 파악하고, 그곳에 존재하는 구속상태를 파악하여 교회의 내부 구조적 한계를 벗어나 현장적인 복음의 영향력을 끼쳐야 할 것이다. 
  교회개척운동에 대한 기구를 이상과 같이 설명하였지만, 사실 그것은 결코 자연적으로 발생할 수 있는 현상이 아니다. 이를 위하여 복음의 임팩트가 필요하고, 내부자들을 결박하고 있는 구속력이 헐거워질 필요가 있다. 우리가 복음의 임팩트를 아무리 가하여도, 내부의 클러스터들간의 결속력이 강할 때에는 효과적인 결과를 낳을 수 없는 것은 자명하다. 사실, 여기에서 우리가 염두에 두어야 할 부분이 바로 성령 하나님의 역사하심에 대한 민감성을 키우는 일이다. 역사속에서 특별한 시간 가운데에 징조와 표적을 보이시는 하나님의 방법에 민감하여야 한다. 클러스터들을 결속하는 것은 비단 역사 가운데에 이루어진 기독교에 대한 편견이나 오해의 장벽 만이 아니라, 악한 어둠의 세력이 그 배경에 있다는 것도 간과해서는 안된다. 결국, 이 모든 일들은 다시 원점으로 돌아가, 하나님의 말씀 가운데에 드러나는 하나님의 뜻에 민감하게 반응해야 하며, 이는 우리 개개인의 영성과 기도 가운데에서만이 증거될 것이다.    

맺는 말

본 소고에서는 마지막 선교의 세기라고 하는 미전도종족 선교시대에 대한 의미를 생각해 보면서, 기존의 지역과 나라에 치중된 선교의 포커스가 이제 미전도종족에 대한 포커스로 패러다임 전환을 이루게 되었지만, 아직도 그 내용에 있어서 진정한 의미의 패러다임 전환을 이루지 못하고, 그 선교적 목표도 불분명한 점에 대한 원인 분석과 함께, 이제 현대 선교가 총체적인 패러다임 전환을 꾀할 시점에 이르렀음을 강조하고자 하였다. 
총체적인 선교 패러다임 전환이란 사실, 사도행전적 복음전도의 원리와 방법으로 돌아가는 것을 의미한다. 다시 순수한 성령님의 역사하심으로 돌아가며 하나님의 말씀에서 그 원리를 찾아 적용하자는 의미에서 진정한 개혁을 의미한다고 할 수 있다. 이는 본질적인 의미를 벗어나 이미 상식화한 교회의 개념이나 교회개척 및 교회성장의 의미를 벗어버리고, 다시 본질로 돌아가는 것을 의미한다. 건물이나 구조를 의미하는 교회가 아닌 회심자들의 연합을 이루는 진정한 유기체로의 교회, 모든 회심자들이 직접적인 복음전도의 일선에서 움직이는 역동적인 교회, 그리고 어느 건물에 예배드리는 신자의 숫자가 양적으로 증가하는 수직적인 성장이 아니라, 복음의 수평적인 확산에 따른 회중들의 숫자가 기하 급수적으로 증가하는 교회개척운동을 우리가 바라 보아야 함을 강조하였다. 
한국교회가 세계에서 가장 많은 선교사를 파송한다고 할지라도, 개혁을 요구하는 시대적 요구에 부응하지 못한다면, 결국은 우리가 복음을 받을 당시의 선교 방법이었던 서구 식민지 하에서 이루어진 포지티비즘의 반복과 서구의 선교 역사에서 범하였던 그 실수를 다시 반복하게 되고 말것이다.  ***


김요한 

국제 오엠에프 선교사 (1994년 파송)
국제 오엠에프 동남아 무슬림 사역부 실행위원/전략코디네이터
GMS 협력 선교사 (Dual Member)
물리학 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