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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울의 의인론

에반젤(복음) 2021. 7. 30. 12:18

바울의 의인론

 

 

Ⅰ. 들어가는 글

 

이 글은 바울이 율법, 복음, 하나님의 의(義)등의 용어(用語)를 사용하면서 투쟁한 역사적 삶의 자리가 무엇이었는가를 살펴보는데 있다. 그것은 동시에 그 삶의 현실을 통해 율법과 복음, 하나님의 의(義)가 정작 어떤 의미로서 사용되었는지를 좀 더 구체적으로 알아보는데 있는 것이다. 따라서 이 글은 본 주제와 관련하여 간과될 수 없는 역사적인 두 개의 큰 사건을 살펴보면서 바울 신학의 올바른 이해에 접근하려 한다. 그 하나는 "예루살렘 사도회의" 이며 다른 하나는 "안디옥 사건"이다. 이 두 사건의 공통점은 모두 복음의 진리를 사수하기 위한 바울의 투쟁이었다는 데 있다.

 

Ⅱ. 복음의 진리를 위한 투쟁

 

1. 예루살렘 사도회의

 

"십 사 년 후에 내가 바나바와 함께 디도를 데리고 다시 예루살렘에 올라 갔노니 계시를 인하여 올라가 내가 이방 가운데서 전파하는 복음을 저희에게 제출하되 유명한 자들에게 사사로이 한 것은 내가 달음질하는 것이나 달음질 한 것이 헛되지 않게 하려 함이라. 그러나 나와 함께 있는 헬라인 디도라도 억지로 할례를 받게 아니하였으니 이는 가만히 들어온 거짓 형제 까닭이라. 저희가 가만히 들어 온 것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의 가진 자유를 엿보고 우리를 종으로 삼고자 함이로되 우리가 일시라도 복종치 아니하였으니 이는 복음의 진리로 너희 가운데 항상 있게 하려 함이라. 유명하다는 이들 중에 (본래 어떤 이들이든지 내게 상관이 없으며 하나님은 사람의 외모를 취하지 아니 하시나니) 저 유명한 이들은 내게 더하여 준 것이 없고 도리어 내가 무할례자에게 복음 전함을 맡기를 베드로가 할례자에게 맡음과 같이 한 것을 보고 베드로에게 역사하사 그를 할례자의 사도로 삼으신 이가 또한 내게 역사하사 나를 이방인에게 사도로 삼으셨느니라. 또 내게 주신 은혜를 알므로 기둥같이 여기는 야고보와 게바와 요한도 나와 바나바에게 교제의 악수를 하였으니 이는 우리는 이방인에게로 저희는 할례자에게로 가게 하려 함이라. 다만 우리에게 가난한 자들 생각하는 것을 부탁하였으니 이것을 나도 본래 힘써 행하노라"(갈 2:1-10)

 

예루살렘 사도회의는 원시 그리스도교 역사에서 일어난 가장 중요한 사건중의 하나이다. 이 회의의 개최 동기는 이방인 선교를 통해서 발생하였는데 논쟁의 핵심은 이방인들에게도 복음을 전할 것이냐 전하지 말 것이냐가 아니라 어떻게 전할 것이냐는 문제였다. 이방인 그리스도교 공동체들은 처음부터 율법으로부터 자유로웠다. 반면에 예루살렘에서는 철저히 율법에 엄격한 분파가 형성되었다.

 

그리하여 예루살렘의 유대인 그리스도인들은 할례에 집중된 그들의 엄격한 율법적 요구들을 안디옥의 이방인 그리스도인들에게 문제를 제기 하였다. 그리고 안디옥의 교란자들은 안디옥의 이방인 그리스도인들이 누리는 자유를 박탈하려고 하였다. 사회적 신분으로 볼 때 율법의 권위를 빙자한 이들은 예루살렘의 기득권자들로서 언제나 현상유지를 원하는 자들이었다. 그러기에 바울은 유대인과 이방인의 관계 문제에 있어서 유대인의 특권을 인정하고서는 그 어느 것도 해결할 수 없었다. 이러한 유대 그리스도인들, 기득권자들의 율법적 요구들은 이방인 그리스도인들에게 매우 심각한 위협이 되었다.

 

문제의 핵심은 이방인들이 그리스도인이 되기 위하여 유대교 율법의 요구들, 특히 할례의식을 구원의 필수 요건으로 승인하고 율법을 받아들여야 하는가? 였다. 바로 이 난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안디옥 교회는 바울과 바나바를 율법에서 자유로운 선교의 대표자로서 예루살렘 원 사도들에게 파견하기로 결정했던 것이다. 왜냐하면 바울은 이방인들에게 할례의 의무를 부과시키지 않고 복음을 전파했기 때문이다.

 

바울의 입장에서 볼 때 예루살렘 원 교회와의 단절은 이방인을 향한 이제까지의 모든 그의 선교활동을 무의미하게 만드는 것이었으며, 그것을 조장 확대하는 유대교 그리스도인들의 작태는 '복음의 진리'를 위태롭게 하는 것이었다. 바울은 이방인에게 할례의 의무를 강요하는 것은 복음의 진리에 위배되는 것이라고 보고, 그런 주장을 내세우는 거짓 형제들과 투쟁하였던 것이다. 그래서 바울은 할례 받지 않은 그리스도인 디도를 예루살렘에 동반함으로써 할례의 요구를 처음부터 거절하였다. 그가 그의 적대자들에게 내세운 반박적 논리는 다음과 같다.

 

첫째, 율법은 모두 폐기되었다. 둘째, 율법의 일부분 즉, 할례의식과 같은 제의적 율법은 폐기되었다. 셋째, 율법의 전부 혹은 일부분은 이방사람들에게 적용되지 않는다. 이렇게 해서 그는 유대인과 이방인 사이에 차별의 장벽이 되고 있던 할례를 거부함으로써 유대인에 대한 이방인의 평등한 권리를 옹호하고자 했다. 이것이 바울 인권사상의 정수이다.

 

바울의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삶과 신학적 사유는 하나님의 은총이라는 구체적 사실, 즉 그리스도 사건을 통해서 이룩된 구원의 현실에서 출발한다. 그에게 있어 자유는 율법의 저주를 분쇄한 십자가의 직접적인 결과였다. 이방선교의 의미는 유다인과 이방인이라는 민족적 경계선을 넘어서는 수평적 확대운동을 지시한다. 그러므로 유다인과 이방인 사이에 문화적 장벽이 되는 할례의식은 마땅히 폐지되어야하는 것이었다. 바울은 예루살렘 회의에서 유다 사람들과 대등한 이방 사람들의 평등한 권리를 옹호했으며 그것이 복음의 진리 즉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구원의 현실이라고 역설했다. 또 이러한 바울의 입장은 곧 약자들의 권리를 옹호하고 현실의 변혁을 요구하는 입장이기도 했다.

 

바울에게 있어서 할례자체는 구원과 무관하며, 구원을 얻기 위한 필수조건도 아니었다. 문제는 할례 선동이 갈라디아 교회를 혼란케 한다는 데 있었다. 바울에게는 예수그리스도의 복음으로 말미암아 유대인이나 종이나 자유인이나 여자나 남자의 차별이 이미 폐지된 것이었다. 그런데 유대 그리스도인들은 이방 그리스도인들에게 할례를 강요함으로써 다시금 차별과 불평등을 재건하려고 하였던 것이다. 이방인의 할례문제는 단순히 그 하나의 의식만이 문제되는 것이 아니고 율법의 효력문제, 구원사 내에서의 유대민족의 특권이 문제되는 것이었다. 이러한 근본적인 문제는 결국 안디옥 사건에서도 공통적으로 드러난다.

 

2. 안디옥 사건

 

"게바가 안디옥에 이르렀을 때에 책망할 일이 있기로 내가 저를 면책하였노라. 야고보에게서 온 어떤 이들이 이르기 전에 게바가 이방인과 함께 먹다가 저희가 오매 그가 할례자들을 두려워하여 떠나 물러가매 남은 유대인들도 저와 같이 외식하므로 바나바도 저희의 외식에 유혹되었느니라. 그러므로 나는 저희가 복음의 진리를 따라 바로 행하지 아니함을 보고 모든 자 앞에서 게바에게 이르되 네가 유대인으로서 이방을 좇고 유대인답게 살지 아니하면서 어찌하여 억지로 이방인을 유대인답게 살게 하려느냐 하였노라“(갈 2:11-14)

 

바울은 갈라디아서 2장 11-14절에서 안디옥에서의 충돌사건을 진술한다. 이 사건의 전말은 다음과 같다. 게바가 이방인 그리스도인들과 식사를 하고 있었는데 야고보파 사람들이 예루살렘으로부터 내려왔다. 그러자 게바가 식탁에서 물러갔고 다른 유대교 그리스도인들과 바나바까지도 식탁에서 물러갔다. 이에 대하여 바울은 게바를 신랄하게 책망하였다.

 

안디옥에서 진행되었던 식사는 유대교 그리스도인들과 이방인 그리스도인 사이에 이루어진 밥상공동체였다. 유대인과 이방인 사이에 식탁교제는 금지되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안디옥의 그리스도인들은 이러한 식탁교제를 관행적으로 이루어왔다. 그것은 곧 예수의 죄인들과의 식탁교제의 본보기가 반영된 식탁교제였다. 이로써 그들은 그리스도 사건을 통하여 유대인과 이방인 사이의 민족적 차별의 벽을 무너뜨렸던 것이다. 그런데 게바와 유대교 그리스도인들은 이러한 밥상공동체의 의미를 파괴함으로써 이방인 그리스도인들의 평등한 권리를 무참히 짓밟아 버렸던 것이다. 이러한 게바의 행동을 바울은 복음으로부터의 이탈로서 평가했다. 왜냐하면 게바의 행동은 곧 버렸던 율법을 구원의 길로서 또다시 받아들이는 행동이기 때문이었다.

 

안디옥 사건을 통해서 그는 어떤 이유에서든지 구원의 현실을 부정하는 행동은 복음의 진리에 위배되는 위선으로서 비난받아야 마땅하다고 주장하였다. 바울의 비판은 복음의 수호라는 차원이었다. 바울의 투쟁은 하나님 앞에서 모든 인간은 어떤 이유에서도 차별 받을 수 없다는 사상이었으며 그것은 곧 시대를 뛰어넘어 어느 시대에서나 보편타당한 하나님의 말씀수호였다.

 

3. 약자의 편을 드시는 하나님: 바울의 의인론

 

"우리는 본래 유대인이요 이방 죄인이 아니로되 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은 율법의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는 줄 아는 고로 우리도 그리스도 예수를 믿나니 이는 우리가 율법의 행위에서 아니고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서 의롭다 함을 얻으려 함이라 율법의 행위로서는 의롭다 함을 얻을 육체가 없느니라. 만일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의롭게 되려 하다가 죄인으로 나타나면 그리스도께서 죄를 짓게 하는 자냐 결코 그럴 수 없느니라. 만일 내가 헐었던 것을 다시 세우면 내가 나를 범법한 자로 만드는 것이라 내가 율법으로 말미암아 율법을 향하여 죽었나니 이는 하나님을 향하여 살려 함이니라.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내가 하나님의 은혜를 폐하지 아니 하노니 만일 의롭게 되는 것이 율법으로 말미암으면 그리스도께서 헛되이 죽으셨느니라“(갈 2:15-21)

 

적지 않은 보수계 신학자들이 바울의 의인론(義認論)을 내면적 양심의 번뇌에 대한 해답으로 해석하는 오류로 인하여 그 본래의 모습이 가리워졌으며, 그 결과 바울이 의인론을 통해 말하려던 진정한 의미가 제대로 이해되지 못해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특히, 한국교회도 진정한 바울의 의인론을 제대로 해석해주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결론부터 요약하면 바울의 의인론은 그것이 발현된 구체적인 역사적 상황을 가지고 있는데, 그것은 바울이 유대인과 이방인의 관계문제를 의인론이라는 올바른 사상적 관점을 근거로 해결했다는 것이다. 특히, 유대 그리스도인들에 의하여 자기 권리를 침해당하는 이방인 그리스도인들의 편에 하나님이 서신다는 사실은 의인론의 삶의 자리를 관념론적, 형이상학적인 수렁으로 빠지지 않도록 길잡이 역할을 해준다.

 

의(義)라는 용어는 단지 하나님의 속성만을 나타내는 추상명사가 아니다. 그것은 역사 내적이며 현실 변혁적인 행위명사이며 동작명사이기도 하다. 의(義)는 대상을 분명히 가지고 있다. 그 대상은 세계이다. 의는 의롭지 못한 세계를 향해 야훼 하나님께서 의롭게 하시는 사건이며, 심판의 사건이다. 다시 살펴보면, 바울은 의롭게 됨의 근거를 '하나님의 의'에서 찾는데 여기서 의(義)라는 명사는 하나님의 속성이나 존재의 신비를 나타내는 정적인 의미가 아니라, 하나님의 활동을 나타내는 동적인 의미를 가진다는 것이다.

 

바울은 하나님의 의를 '법정적'인 의미로 사용한다. 구약성서를 통해 나타나는 야훼의 의처럼 하나님의 의는 왜곡된 인간관계를 정상적인 인간관계로 회복시킨다. 유대 그리스도인들은 자기들의 율법을 고집함으로 이방 그리스도인들에 대해 특권을 사용했다는 사실은 앞글의 두 사건 속에서 개략적으로 살펴보았다. 이러한 유대인의 부당한 처사에 대해 하나님은 이방인 편에 서서 그의 정의(mi pa, misupat, 미수파트)를 나타낸다.

 

바울의 의인론은 안디옥 사건과 밀접히 연관되어 있다. 바울이 그의 최초의 의인론을 안디옥 사건과 연결시켰다는 것은 의인론의 삶의 자리를 밝혀내는 데 상당히 중요하다. 앞에서도 살펴보았듯이, 갈라디아서 2장 11-14절에 기록된 안디옥 사건은 유대 그리스도인들이 그들의 식탁 예식과 정결법을 주장함으로 유대인과 이방인의 평등한 권리를 상징하는 밥상공동체가 파괴되는 장면을 묘사한다. 이에 대해 바울은 즉각 침해당한 이방 그리스도인들의 권리를 수호하기 위해서 15-21절을 통해 의인론을 전개한다. "오직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만 의롭게 된다는 것"이 의미하는 바는 이방인이 율법을 지키지 않는다는 이유로 유대인에게 차별과 멸시를 당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유대인들은 율법이라는 무기로 이방인들을 차별하고 억압하였다. 바울은 이런 차별기능을 정확히 인식하고, 그로 인해 차별 당하는 이방 그리스도인들의 자리를 수호하기 위하여 율법의 의가 아닌 믿음의 의를 선언하였던 것이다. 그러므로 바울의 의인론은 더 이상 유대인들이 율법이라는 특권을 가지고 이방인들을 차별하고 멸시할 수 없음을 나타낸다. 이런 맥락에서 바울의 의인론은 강자에 대한 약자의 보호법이며 지배자에 대한 피지배자의 투쟁교과서라고 필자는 생각한다. 또한 바울의 의인론은 모든 불평등과 불의, 착취, 수탈로 점철되는 왜곡된 인간관계에서 생기는 모순된 구조를 해결하려는 구체적이며 치열한 하나님의 해방사건 이었다.

 

Ⅲ. 나가는 글

 

바울은 새로운 피조물, 새로운 인간, 새로운 세계를 위해 투쟁했던 인물이다. 그것은 곧 인간이 인간답게 살 수 있는 세계를 위한 투쟁을 지시하는 것이다. 그의 의인론이 비록 역사적 제약성을 지니고 있지만 근본적인 모티브는 하나님의 세계에 억압과 차별이란 결코 있을 수 없다는 전 역사를 포괄하는 보편적인 하나님의 의로운 선언인 것이다.

 

오늘 이 시대는 지식과 정보가 부족한 시대는 결코 아니다. 보이는 곳에서나 보이지 않는 곳에서나 진실로 행동하는 양심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앎으로서 끝나버리면 그것은 신학이 아니다. 신학은 신학 함(doing theology)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먼저 인간답게 살아야 한다. 그것은 곧 인간답게 살지 못하도록 만드는 모든 구조에 투쟁과 전쟁을 선포하는 것과 같다.

 

출처: 네이버 블로그 mokpojsk