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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로마의 기독교 7대 박해

에반젤(복음) 2021. 7. 14. 03:10

로마의 기독교 7대 박해

네로, 도미티안, 아우렐리우스, 디오클리티안 외에도 하드리안 황제 등 모두 7명의 황제들이 박해를 했으며 이 황제들의 박해를 7대 박해라고 한다.

 

12사도들은 모두 박해와 더불어 순교의 길을 걸었고 기독교를 성공적으로 발전시킨 바울도 박해 가운데서 순교로 일생을 마쳤다. 이렇게 기독교는 초기 역사부터 박해의 역사로 점철되었다. 황제에 의해 국가적으로 박해를 가한 대표적인 첫 번째 경우는 역시 네로 황제의 박해였다. 주후 64년 6월 18일 로마에는 대화제가 발생하였다. 도시의 14구역 중에서 10구가 소실되었던 것이다. 이 화재는 당시 네로 황제가 로마사를 다시 새롭게 건설하기 위해 방화했다는 소문이 나돌기 시작하였다. 네로는 누군가 범인이 잡히지 아니하면 자신의 입지가 곤란한 지경에 처하게 되었다. 결국 민중들의 소문들을 억누르기 위해 네로는 방화의 책임을 기독교인들에게 돌리고 말았던 것으로 전해진다. 당시의 역사가 타키티우스(Tacitius)의 기록은 다음과 같다.

 

"황제의 거듭된 부인과 신들에게 바쳐진 희생에도 불구하고 황제가 화제를 명령했다는 의심은 그치지 않았다. 그리하여 이 소문을 없애기 위해 네로는 이미 배덕적 행위로 시민들의 증오를 받고 있던 기독교 신자들에게 혐의를 씌우고 이들을 잔인하게 처벌하기로 결정했다. 이들이 쫓는 소위 그리스도는 티베리우스 황제(Tiberus) 제위 기간 중 본디오 빌라도(Pontius Pilate)에 의해 처형된 인물이다. 이 악한 미신은 한 동안 주춤하였으나 곧 유대뿐 아니라 전 세계의 모든 사교들이 모여들었던 로마에 다시 출현하였다. 그리하여 우선 스스로 기독교인이라 고백했던 자들이 체포되었고 이들의 증인에 의하여 더 많은 숫자가 정죄 받게 되었다. 그 이유는 화재 자체 때문이라기보다 이들이 인류를 증오했기 때문이다."

 

타키티우스의 기록에 의하면 기독교인들이 방화의 주범은 아니었다. 그러나 로마인들은 전반적으로 기독교인들을 배척하는 분위기를 볼 수 있다. 이 당시 네로의 치하에서 기독교인들의 박해 모습을 타키티우스는 아래와 같이 비교적 상술하고 있다.

 

"네로는 기독교인들을 죽이기 전에 시민들을 위한 오락에 이용하였다. 신자들 중 일부는 털옷을 덮어 씌워 개들이 찢어 죽이게 하였다. 또 다른 자들은 십자가형에 처하였다. 또 다른 이들은 불을 질러서 밤에 등불처럼 밝히게 하였다. 네로는 자기의 청원을 열어 이러한 쇼를 연출하였고 그는 마치 전차 경주처럼 옷을 입고 그 전차를 타고 돌아다님으로써 원형 경기장에서 스페타클을 연출하였다. 이 때문에 시민들은 벌을 받아 마땅한 이 사람들에게 자비심을 느끼기도 하였다. 왜냐하면 이들은 일반인들의 선을 위해서가 아니라 한 인간의 잔인성을 만족시키기 위해 죽어갔기 때문이다."

 

네로의 박해의 범위가 어디까지였는지는 확실하지 않지만 1세기 후반부터 2세기에 걸쳐 기독교의 저술가들은 네로의 박해를 기술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비교적 로마시 외의 박해 기록은 네로 당시 나타나지 아니하므로 박해의 중심은 로마시였다고 추론할 뿐이다.

 

네로 이후에 기독교인들에게 박해를 가한 황제는 도미티안 황제(Domitian, AD 81-96)였다. 그의 박해 이유는 명확하지 아니하지만 아마도 로마의 신들과 전통들을 거부한 기독교인들이 도미티안의 비위를 거슬렸던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그러나 도미티안 황제의 기독교인 박해의 결정적인 동기는 그의 유대인 박해에 있었다. 도미티안 황제는 주후 70년에 예루살렘 성전이 파괴되었으므로 유대인들이 매년 예루살렘에 보내던 헌금을 황제에게 바치도록 강요하였다. 이에 유대인들은 반발하기 시작하였고 도미티안은 그들을 박해하였다. 문제는 아직도 유대인과 기독교인이 이방인들에게는 명확하게 구별되지 아니했으므로 유대인과 기독교인들에게 무차별로 박해를 가했다. 로마에선 황제와 인척관계에 있었던 것으로 보이는 부부(플라비우스 클레멘스와 그의 아내 플라비아 도미틸라)가 처형되었다. 이 당시에 소아시아에 박해가 있었고 대표적으로 요한계시록의 저자인 사도 요한이 밧모섬에 유배되고 교회들도 시련을 겪었다.

 

2세기의 기독교 박해에 대한 기록은 1세기보다 많은 사료들이 증가하였다. [순교자들의 행전]이라는 책은 여러 순교자들의 체포, 재판, 그리고 죽음의 과정을 기록하고 있다. 특히 2세기의 기록 가운데서 박해에 대한 로마 당국의 태도는 소아시아 지역의 한 통치자인 플리니(Pliny)와 트라잔(Trajan)황제 사이에 교류한 서신(AD 112-113) 가운데 잘 나타나고 있다.

 

주후 111년 플리니라는 사람은 오늘날 터어키 북부 해안지역의 비시니아(Bithynia) 총독으로 임명되었다. 그가 이곳 총독으로 도착했을 때 놀랍게도 그곳에는 기독교인들이 많이 살고 있음을 알게 되었다. 그는 기독교인들을 조사하기 시작하였고 어떤 사람이 총독에게 기독교인들의 명단을 보냈을 때 그는 이미 기독교가 불법 종교 단체임을 알고 있었다. 플리니는 기독교인이지만 잘못을 뉘우치고 신앙을 포기하는 자들에게는 어떤 박해도 취하지 아니했다. 그리고 신앙을 고집하는 기독교인들에게도 3번의 개심 기회를 주었다. 또한 그들이 로마 시민인 경우에는 법에 따라 로마로 호송하였다. 그가 특히 로마의 트라잔 황제에게 서신을 통해 기독교인들의 처벌에 대해 문의했을 때에 황제는 아직 적용될 수 있는 일반적인 규칙이 제정되지 아니했다고 답변하였다. 그리고 그들의 성격으로 보아 국력을 소모하면서까지 색출해 낼 만큼 흉악한 것은 아니라고 하였다. 그래서 황제는 고발이 접수된 사건만 처리할 것이며 색출하기까지는 하지 말도록 하였다. 로마의 신들에게 숭배할 것을 받아드리는 자들은 용서하라고 하였으며 익명으로 고발된 것은 무효라고 하였다. 이는 로마법의 정신에 위배되기 때문이다. 이러한 사실들을 볼 때 이 시기 동안의 박해는 색출하지는 아니했지만 당국에 소환되었을 때는 처벌한 것이 제국의 공식적인 입장인 것으로 보여진다.

 

2세기 중반에 접어들면서 기독교의 박해는 심화된 것처럼 보인다. 박해의 주인공은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황제(Marcus Aurelius, AD 121-180)였다. 그는 그의 전임자들에게 비교하여 상당히 학식과 교양이 있는 지도자였으나 여전히 미신적이고 교만하였다. 그는 점성술가를 찾았으며 국가의 중요한 행사에는 희생의 제물을 드리곤 하였다. 자신의 제위 기간 중에 야만족들이 침략하고 홍수와 전염병이 발생하는 등 자연재해가 발행하였다. 그는 이러한 재난을 두고 제국의 신들이 분노한 결과라고 하였으며 신들의 분노를 유발시킨 것은 바로 기독교 신자들이라고 하였다. 그는 기독교의 박해를 지원하였으며 로마의 옛 종교의 부흥에 힘을 썼다. 그의 박해 상황을 잘 알려주는 사건으로 과부 펠리시타스와 그의 일곱 아들의 순교사건이 있다.

 

펠리시타스(Felicitas)는 대단히 유능한 교회의 일꾼이었다. 교회를 위해 열심을 다한 그녀를 당국과 이교도 사제들은 각종 회유와 협박으로 개심을 종용하였다. 그러나 그녀의 대답은 완강하였다. "내가 살아 있는 동안에도 당신에게 승리할 것이며, 나를 죽인다면 죽음을 통하여 더욱 더 큰 승리를 거두리라." 그녀의 고집을 이기지 못한 박해자들은 그녀의 아들들을 설득했으나 소용이 없었다. 결국 그들 모두는 처형되었다. 이 박해 기간 동안 유명한 기독교 학자였던 저스틴 마터(Justin Martyr, AD 100-165)가 순교하기도 하였다.

 

용과 비엔나에서도 박해가 있었다. 이곳의 교회들이 브리기아와 소아시아에 있던 기독교 신자들에게 보낸 편지를 통해 알려져 있다. 이곳의 박해는 갑작스럽게 이루어진 것으로 전해지고 있으며 교인들의 공공 장소 출입이 금지되고 폭도들이 거리에서 추격하거나 돌을 던지는 사태가 발생하였다. 총독과 폭도들로부터 고문이 행해졌고 순교자들은 최후를 맞아야만 했다. 신자들을 가두었던 장소가 너무 협소했기 때문에 질식해 죽는 사태도 발생하였다고 전하였다.

 

2세기의 기독교인들에 대한 박해는 전반적으로 위험 수준에 달해 있었다. 로마제국의 전역에서 계속 박해를 받았다는 근거는 없으나 항상 위험을 동반한 신앙생활을 했던 것은 사실이다.

이 박해는 팔레스타인, 로마, 소아시아, 아프리카, 그리고 프랑스 지역의 교회까지 포함되어 있었던 흔적을 보이고 있다. 2세기의 박해 동안 교회지도자들의 박해 당한 경험들이 있지만 가장 극적인 순교의 사건들은 다음과 같다.

 

처음 사례는 황제 트라얀 시대에 발생하였다. 대표적인 희생자는 안디옥의 감독 이그나티우스(Ignatius, AD 35-107)라는 지도자였다.

 

이그나티우스는 시리아의 대표적인 교회였던 안디옥교회의 감독으로 40년 간 교회를 위해 봉사했으며 특히 이단들 퇴치를 위해 열심히 싸운 믿음이 강한 감독이었다. 그는 노년기에 로마의 트라얀 황제(98-117)가 동방의 도시들을 순회 방문하던 중 안디옥을 방문하였다. 황제는 이그나티우스의 명성에 끌려 그를 만나게 되었다. 황제는 기독교를 멸시하는 사람이었으며 이그나티우스를 대면하자 혹독한 말로 그를 빈정되기 시작하였다. 이에 이그나티우스는 황제의 말에 응수하게 되었고 사태는 점점 더 악화되어 갔다.

 

트라얀: "여기 사악한 마구, 사람들을 속이는 자가 있구나!"

이그나티우스: "나는 마귀가 아니라 마음에 그리스도를 모신 자입니다."

트라얀: "네 속에 그리스도가 있다고? 본디오 빌라도가 십자가에 못박아 죽인 그리스도가 너에게 그렇게 중요한 존재인가?"

이그나티우스: "그렇습니다. 그 분은 나의 죄를 대신하여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셨기 때문입니다."

 

이 이야기를 들은 황제는 적법한 절차도 없이 이그나티우스를 로마로 압송하여 맹수들의 밥이 되게 명하였다. 드디어 이그나티우스는 로마의 국립 경기장인 콜로세움으로 알려진 격투장에 서게 되었다. 약 45,000명의 관중을 수용할 수 있는 대형 경기장이었다. 구경꾼들은 몰려들었고 드디어 황제가 이그나티우스를 맹수에게 던지라는 명령이 하달되었다. 이때 이그나티우스는 죽임을 당하기 전에 이와 같이 말하였다. "나는 맹수의 이빨 사이에 낀 하나님의 곡식으로 빻아져서 주님을 위한 거룩한 빵이 되고자 한다."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사자들이 그를 덮쳐 그는 결국 장열한 순교를 하였다. 후에 그의 친구들은 그의 죽음을 애도하면서 사자들이 먹다 남은 그의 뼈를 모아 매장하여 주었다. 그는 그리스도와 함께 더 좋은 곳(빌 1:23)으로 갔다.

 

또 하나의 극적인 순교는 계시록에 나타나는 아시아의 일곱 교회의 하나였던 서머나 교회의 감독인 폴리갑(Polycarp, AD 69-155)의 경우이다. 155년 경 그는 순교를 당했는데 사도 요한의 제자였다. 그는 2세기에 발생한 박해를 피하여 시의 외곽에 숨어 있었는데 하인의 밀고로 체포되었다. 로마의 집정관 앞에 압송되어 로마의 황제 가이사를 주로 고백하기를 강요하였다. 이를 거절하자 집정관은 여러 가지로 위협을 하면서 그의 신앙을 굴복시키려고 하였다. 폴리갑은 맹수의 위협이나 불의 위협에도 굴복치 아니하였다. 집정관은 최종적으로 네가 만약에 한 번만 굴복하면 석방시켜 주겠다고 제안하였다. 그때 폴리갑은 유명한 답변을 하였다.

 

"내가 86년 동안 그리스도를 섬겨왔으나, 그분은 나에게 어떤 잘못도 행하지 않았는데, 내가 어떻게 나를 구원해 준 나의 왕을 욕할 수가 있겠소. 당신은 한 시간 동안 타는 불로 나를 위협하나, 그 불은 이내 꺼질 것이요, 그러나 당신은 장차 올 심판의 불과 영원한 징벌의 불은 모르고 있소. 당신 마음대로 처결하시오."

 

이 말에 분노한 집정관은 횃불을 장작더미에 붙이도록 명령하였고 이내 연기와 화염이 폴리갑을 에워 쌓다. 이러한 장열한 지도자들의 순교는 로마, 소아시아뿐만 아니라 아프리카에서도 일어났으며 대표적인 사람은 카르타고의 지도자였던 키프리안(Cyprian, AD ?-258)이었다.

 

갈리우스: "그대가 키프리안인가?"

키프리안: "그렇습니다."

갈렐리우스: "그 일을 재고하라."

키프리안: "당신의 그러한 요청을 재고하십시오. 이것은 재고할 필요도 없는 단순한 문제입니다."

갈렐리우스: "로마의 신들과 그들에 대한 신성한 의식들의 반대자로 자청하고 나선, 신성 모독자인 그대의 생명은 너무 길었다. 그대는 악질적인 범죄의 기수였기에 우리는 그대를 본보기로 삼아 그대의 사귄 자들에게 교훈을 주고자 한다. 우리는 키프리안이 참수되는 것을 기뻐한다."

 

이 일 후에 곧 키프리안은 수많은 사람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백부장에 의해 단칼에 목을 베이게 되었다.

 

177년에는 프랑스의 남부 지역인 리용의 기독교인들에게도 박해의 파도가 밀려왔다. 당시 군중들은 그리스도인들을 근친상간과 식인의 죄로 고발하는 무식한 작태가 연출되었다. 그리스도인들이 성만찬식에 예수의 살과 피를 먹고 마신다고 하니까 이를 식인종의 행동으로 몰아붙였다. 그리고 기독교인의 예식에 불신자들을 참여시키지 아니한 여파로 기독교인들은 은밀한 집단으로 오해했으며 이는 곧 근친상간의 비밀집단으로 해석되어 버렸다. 이로 인해 많은 기독교인들이 끌려가서 변질되기도 하였고 어떤 이들은 신앙을 고수하며 순교의 고통을 감내해야 했다.

 

이렇게 기독교인들에 대한 핍박이 날로 심화되고 장기화되는 과정에서 특히 로마에서는 대도시에서 유일하게 피신할 수 있었던 곳은 지하 공동묘지로 알려진 지하갱도의 카타콤이었다. 적어도 1세기 말부터 기독교인들이 이곳에 거주하게 되었고, 이들은 서로의 정체성을 알리기 위해서 그리고 그들의 순수한 신앙의 절개를 표현하기 위해서 비둘기, 물고기, 떡 종려나무 등으로 기독교신앙의 상징들을 벽화나 비문들에 남기곤 하였다. 오늘날 일부 교인들이 자동차에 물고기의 스틱커를 붙이고 다니는 것은 여기서 유래한 것이다.

 

이러한 로마제국의 박해를 통해 그리스도인들은 수천 명에 달하는 죽임을 당했으며 이들 "순교자들의 피는 곧 교회의 씨앗"이 되었다. 사실 이러한 박해에도 불구하고 역설적으로 교회는 성장했다.

 

3세기 들어와서 박해에도 불구하고 증가하는 기독교에 대한 종교적인 쟁점이 제국의 중용한 문제로 등장하였다. 원래 로마 정부는 정치적인 속성상 종교에 대한 보편적인 정책을 폈고 이로 인해 제국의 통합과 일치를 위한 정부의 권한 강화를 꾀하곤 하였다. 그런데 기독교는 타종교와의 보편성을 인정치 아니하고 요지부동의 자세를 취하였고 여기에 대한 대안이 모색되어야 했었다. 이러한 긴장 가운데서 4세기 초 황제 디오클레티안(Diocletian)에 의한 기독교 박멸 정책이 시행되었다. 그는 자신의 정책을 지지하는 부하 갈레리우스와 막시미안과 결탁하여 기독교를 뿌리 뽑으려는 시도를 했다. 황제 자신은 신로마의 신인 주피터의 수호를 받고 있다고 하였으며, 두 부하는 헤라클레스 신의 수호를 받고 있다고 믿었다. 황제는 303년에 칙령을 선포하고 교회 건물을 파괴하고 모든 성경을 공개리에 불사르는 조치를 내렸다. 그리스도인들의 사회적인 권리 보장의 박탈은 물론이고 모든 성직자들의 체포령이 하달되었다. 그리고 종국에는 제국 내의 모든 그리스도인들을 멸절시키게 했다. 이때 순교한 자들의 수는 헤아릴 수 없을 정도에 달했고 기독교인들은 "사냥터의 모리배에게 몰리는 토끼"처럼 쫓겨다녔다. 자기를 쫓고 있는 자들이 성경을 불태우면서 "네가 믿는 성경이 어디 있느냐"고 했을 때 기독교인들은 "내 마음속에 있다"고 대답하였다. 305년에 디오클레티안황제가 죽은 후 갈레리우스는 6년 간 박해를 계속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