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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 바르트 (Karl Barth, 1886-1968)

에반젤(복음) 2020. 12. 27. 14:22

칼 바르트 (Karl Barth, 1886-1968) (정승원 합동신학대학 교수)| 바르트 신학은 기독교에 끼친 영향이 매우 크며, 무엇보다도 보수 신학에 끼친 부정적 영향 때문이다. 그의 신학의 까다로움과 애매함으로 인해 많은 복음 주의자들은 그를 자기 진영으로 생각해 왔다. 아마도 슐라이어막허와 리츨로 시작되었던 구자유주의(old liberalism)가 정통적 보수 신학에서 너무도 벗어났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바르트 신학을 복음적으로 생각했던 것이 아닌가 싶다. 또한 그는 그의 대작 『교회 교의학』(Church Dogmatics)을 비롯한 자신의 저서에서 전통적으로 쓰였던 신학적 용어를 똑같이 쓰고 여러 개혁주의 보수 신학자들을 인용도 하고 성경적 개념들을 똑같이 도입하기 때문에 그를 복음주의자로 생각했을 수도 있다. 그래서 그의 신학을 신정통주의(neo- orthodoxy)라고 부르기도 한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그의 신학은 결코 보수-정통적 신학과 맥을 같이 하고 있지 않을 뿐 아니라 독소적 요소가 있다는 것이다. 한마디로 바르트 신학은 비성격적 신학이며 칸트, 헤겔, 키에르케고르 같은 철학자들의 사상 등을 기초로 나름대로 발전시킨 것이다. 물론 당시 바르트가 처했던 상황을 감안하면 어떤 동정적 이해가 가지 않는 것은 아니다. 너무도 인본주의적이었던 당시 자유 신학에 대항하여 기독교적 신앙 회복, 성경을 근거로 한 설교의 가능성과 필요성, 초월적 하나님의 위치, 예수 그리스도의 중요성 등을 확립하고자 했던 그의 학문적 업적은 크다고 하겠다. 그러나 바른 신학은 인간이 처한 상황에서 시작되는 것도 아니요, 다른 사람들의 입장을 생각해 줘야 하는 것도 아니요, 학문적 성취를 위한 것도 아니다. 바른 신학이란 하나님의 계시로 부터 출발하는 것이요 하나님의 말씀을 바로 해석하고 이해하는 데서 출발하는 것이다. 그러나 바르트는 성경 자체에서 시작했다기 보다는 초월적 기독교를 회복하고픈 마음에 철학적 조명 아래에서 나름대로의 '계시' 개념을 가지고 시작했던 것이다. 바르트의 출현을 흔히들 '신학자들이 놀고 있던 놀이터에 폭탄을 터트렸다'고 표현한다. 그만큼 바르트는 당시 구 자유주의적 신학자들에게 큰 타격을 가했던 것이다. 명예 박사 학위만 있었던 바르트는 원래 한 작은 마을의 목회자였다. 이 당시 그는 교인들에게 설교함에 있어서 자유주의 신학이 전혀 쓸모 없음을 발견하게 된다. 결국 그는 성경을 깊이 연구하기 시작했고 자유주의의 철학적 내용이 아니라 성경안에 있는 초월적 말씀의 개념을 가지고서야 교인들을 위한 적절한 설교를 하게 되었다. 이때 바르트는 로마서 주석을 쓰기 시작했고 그의 자유주의 비판이 유럽 전역에서 큰 인기를 얻기 시작했다. 그는 복음이란 인간들과 상관없이 하나님 자신으로부터 오는 것이기 때문에 신학을 인간의 보편적 경험이나 이성을 가지고 발전시킬 수 없다고 강력하게 주장했다. 그런데 바로 구 자유주의 신학이 이런 식으로 복음을 인간 이성과 문화의 전유물로 추락 시켰다고 바르트는 믿었던 것이다. 그래서 구 자유주의 신학을 '아래로부터 위로'의 신학이라 한다면 바르트의 신학은 '위로부터 아래로'의 신학이라고 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초월, 복음, 영원, 구원 등은 바로 하나님의 계시를 통하여 오는 것이며 인간은 순종함으로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이다. 바르트의 신학을 흔히들 '말씀의 신학,' '변증법적 신학' 혹은 '위기의 신학'이라고 한다. 이러한 것은 다 키에르케고르의 실존적 철학의 특징을 나타낸 것이라 하겠다. 인간의 죄성과 하나님의 전적 초월성 사이의 무한한 차이 때문에 하나님의 진리와 인간의 생각을 합리적으로 종합할 수 없다는 것이다. 즉 역설적 진리인 하나님의 자기 계시는 유한한 인간에게 오로지 신앙의 도약(leap)을 통해서만 포용될 수 있다는 것이다. 바르트는 키에르케고르가 말하는 시간과 영원 사이 혹은 인간과 하나님 사이의 '무한한 질적 차이'(qualitatively infinite difference)의 개념을 받아들이고 있는 것이다. 바르트는 여러 대학에서 교수생활을 하던 중, 1930년에 본 (Bonn) 대학에서 봉직하면서 작은 신학적 변화를 보이기 시작했다. 자유 주의에 대한 거부를 포기한 것은 아니었지만 그는 지난 10년 동안 천명하였던 '아니오'보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인간에 대한 하나님의 '예'를 더 강조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흔히들 생각하듯 그의 신학이 그리스도 중심적인 보수신학으로 방향을 바꾼 것이 결코 아니다. 오히려 그의 신학의 변증법적(dialectical) 특징이 더 강화된 것으로 볼 수 있다. 바르트는 처음에 조직신학에 관해 저술하기를 꺼려했다. 그 이유는 어떤 인간적 사상 체계에도 의존하지 않는, 절대적으로 신학적이고 그러므로 전적으로 성경적인 신학을 창출하고 싶었던 것이다. 더욱이 인간이가지는 신앙의 주관성보다는 하나님의 계시의 객관성을 강조하고 싶었던 것이다. 기독교 신학은 객관적이고 냉정한 과학이 될 수 없고, 오히려 예수 그리스도 안에 나타난 하나님의 객관적 자기 계시를 은혜와 믿음에 의해서만 이해할 수 있다고 믿었던 것이다. 오직 그리스도 예수안에 나타난 하나님의 자기 계시라는 범위 안에서 하나님에 대한 지식이 가능하다는 것을 강조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어쨌든 그는 이러한 신념들을 가지고 미완성으로 끝났지만『교회 교의학』(Church Dogmatics)이라는 조직 신학서를 쓰기 시작했고 1968년 세상을 떠날 때까지 13권까지 썼다. 그러면 왜 그의 신정통 신학이 정통이 아닌지 살펴보도록 하겠다. 1) 바르트의 계시관 먼저 바르트의 계시관을 살펴보고자 한다. 그의 대작 「교회 교의학」(Church Dogmatics)은 크게 4권으로 (세밀하게 나누면 13권이 된다) 되어 있는데 (원래 제 5권까지 쓰기로 했으나 그의 생전에 완성하지 못했다) 그 중 첫 권이 바로 '하나님의 말씀에 관한 교리'이다. 그의 신학을 한마디로 말한다면 '말씀의 신학' 혹은 '계시의 신학'이라고 할 수 있다. 그는 '말씀' 혹은 '계시'의 초월적 개념으로 '신학'의 가능성을 다시 확립 시키려 했던 것이다. 이 전 구자유주의(old liberalism)는 '신학'이 아니라 문화적 인간학'에 불과하다고 믿었던 바르트에게는 계시야말로 하나님의 초월성을 유지하며 '신학'을 가능케 하는 유일한 길이었다. 사실 그의 계시관은 단지 성경관에 그치는 것이 아니다. 그의 계시관이 바로 신론이요 기독론이요 성령론인 것이다. 그러므로 바르트 신학의 핵심은 바로 그의 계시관에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면 바르트가 말하는 계시란 무엇인가? 우리가 믿는 것과 같이 하나님이 인간에게 자신을 나타내고 그의 뜻을 알려주시는 것인가? 그렇지 않다. 물론 '계시'라는 말의 의미가 하나님의 나타나심을 뜻하기 때문에 이런 형식적인 의미로는 바르트가 말하는 계시라는 단어와 보통 우리가 말하는 계시라는 단어는 같다고 하겠다. 그러나 그의 계시관은 우리의 계시관과 다름을 잊어서는 안 된다. 한마디로 바르트의 계시는 '초월적 하나님'의 '전적으로 나타나심'(wholly revealed)을 의미한다. 바르트에게는 인간과 질적으로 영원한 차이를 가지신 하나님이 어떤 역사적인(달력의 의미로) 사건이나 인간의 언어 속에 나타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이것은 다시금 신학을 인간학으로 만드는 일로 바르트는 믿고 있는 것이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가 믿고 있는 것처럼 신성이 그의 만드신 만물에 분명히 보여 알게 된다든지 하나님이 인간의 언어로(성경으로) 자신을 계시했다고 믿는 것이 아니다. 전적으로 자신을 나타내셨다는 것은 바로 하나님의 초월성을 잃지 않고 '사건' (event)으로 자신을 나타내셨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 사건의 의미는 역사적 사건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바로 '계시의 행위'를 의미한다. 마치 키에르케고르가 주장했듯이 영원한 진리가 인간에 다가온 어떤 역설적 행위를 말하는 것이다. 그 초월성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순간적 나타나심(사건 혹은 행위)으로 하나님이 계시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나중에 자세히 설명하겠지만 이것이 바로 바르트의 변증법적 신학 방법인 것이다.) 그래서 바르트는 계시는 언어와 동일시 할 수 없고 믿음이 반영 되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제한적이고 오류가 있는 인간의 언어가 하나님의 계시가 될 수 없다고 믿는 것이다. 그러면 왜 바르트는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이다'라고 주장하는 것인가? 그것은 바로 사건으로서의 계시는 어떤 역사적 형태 혹은 방편을 동반한다고 믿기 때문이다. 바르트는 계시의 세 가지 방편으로 '그리스도,' '성경' 그리고 '설교'를 말한다. 계시가 단지 추상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이러한 역사적 형태로 나타난다는 것이다. 여기에 많은 사람들은 마치 바르트는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믿고 있고 설교를 하나님 말씀 선포로 정의하며 그 위상을 높였다고 오해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바르트에게는 계시란 역사적이지만 역사적인 것이 하나님의 계시가 될 수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조심해야 한다. 계시가 역사적이라는 말에는 우리가 동의할 수 있지만 역사적인 것이 하나님의 계시가 될 수 없다는 것은 우리가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이다. 계시가 역사적 성경에 나타났다고 해서 우리와 같은 성경관을 가진 것으로 볼 수 없는 것이다. 바르트에게는 역사적 기록인 성경은 하나님의 계시가 될 수 없다는 것이 더 핵심적인 것이다. 또한 바르트가 계시의 세 가지 방편 중 하나로 '설교'를 말할 때는 우리가 생각 하는 것처럼 설교를 '하나님 말씀 선포'로 보는 것이 아니라 '설교'를 통해서도 하나님의 초월적 계시가 주어짐을 의미하는 것이다. 즉 성경과 설교를 액면 그대로 동일시하는 것이다. 설교의 권위를 세운 것이 아니라 성경을 설교 정도로 추락시킨 것이다. 그러므로 바르트가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이다'라고 주장할 때 그 '이다'는 우리가 믿는 식의 '이다'가 아님을 분명히 알아야 한다. 오히려 그 말은 '성경은 우리에게 하나님의 말씀이 순간적으로 된다(becomes)'로 이해해야 한다. 바르트는 성경을 무오한 하나님의 말씀으로 보는 것은 오히려 하나님의 살아 있는 말씀을 죽은 말씀으로 만드는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의 초월성을 잃어버린다는 것이다. 그래서 바르트는 성경과 계시를 '동일화' 함에 있어서 그것은 직접적 동일이 아니라 간접적 동일인 것이다. (그리스도와 하나님을 동일시하는 것도 직접적 동일이 아니라 간접적 동일이다.) 이런 의미에서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이다'라고 말하는 것이다. 또한 바르트도 성경의 영감 (inspiration)을 이야기한다. 그러나 이 영감은 전통적 기독교가 믿는 그러한 영감이 아니라 초월적 하나님이 자신을 계시함에 있어서 불완전한 인간의 언어를 사용하셨다는 그 자체가 하나님의 영감이라고 주장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경은 하나님의 영감된 말씀이다'라는 바르트의 주장을 듣고 그의 성경관이 복음주의적이라고 오해해서는 안될 것이다. 그의 성경관은 다른 자유주의 신학자들의 성경관보다 더 나을 것도 없는 것이다. 2) 바르트의 계시관 및 신관 바르트의 계시관에 대해 다시 요약 설명하자면 그의 '계시'는 한마디로 그의 '초월적 하나님'이 어떤 인간적인 요소(언어, 시간적 역사를 포함하여)를 통하지 않고 역사속에 바로 나타나는 방편인 것이다. 그래서 바르트는 계시를 "위에서부터 바로 내려지는"(Senkrecht von Oben)것으로 설명한다. 또한 그래서 계시를 하나님의 '전적' 나타남'이라고 주장하는 것이다. 전적으로 나타나지 않으면 어떤 인간의 언어나 사상같은 매개체가 중간에 개입되기 때문인 것이다. 자신안에 스스로 존재하시는 하나님이 자신의 존재로부터 따로 인간에게 계시를 주시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자신이 전적으로 나타난다는 것이다. 하나님은 계시 사건과 동일시 된다는 것이다. 이것은 우리가 믿는 바와 같이 하나님의 존재의 권위와 그의 계시의 권위가 동등하다는 것이 아니라, 계시와 하나님의 존재가 동일시 되는 것이다. 즉 계시는 하나님의 존재의 방편인 것이다. 또 지적할 것은 바르트의 계시는 실존적 의미에서 받는 자의 믿음의 반응과 함께 일어나는 것이라면 그것은 너무 주관적이지 않느냐는 것이다. 바르트는 슐라이어막허나 리츨의 신학을 주관적이라 혹은 인간적이라 비판했지만 이러한 비판이 바르트 자신에게도 해당된다고 하겠다. 어쩌면 그에 눈에는 정통주의자들이 성경 자체를 하나님의 말씀으로 믿고 그것을 해석하고 논하는 것을 마치 하나님을 어떤 인간 연구의 객체적 대상으로 삼고 있는 것으로 보았는지 모르겠다. 어떻게 하나님 말씀을 인간이 소유할 수 있느냐는 것이다. 그러나 정말 하나님의 절대 주권적 능력을 인정한다면 하나님이 인간 저자들을 통하여 그의 말씀을 인간의 언어로 기록하게 하신 능력은 왜 인정할 수 없겠는가? 하나님 자신외에 다른 무엇으로 될 수도 있는 자유가 그의 속성이라면, 왜 시간속에서 인간 언어를 통해 자신을 계시하실 자유는 없는 것일까? 아무튼 우리는 이러한 바르트의 계시관을 알고나면 그의 계시관은 정통 신학이 아님을 쉽게 판단할 수 있을 것이다. 혹 성경이 정확 무오한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것을 받아들이기 힘든 사람에게는 이러한 바르트의 계시관이 그럴 듯 하게 보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바르트의 계시관은 그 계시 개념에만 국한 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존재까지 연결되는 개념이다. 우리가 믿는 인격적이시며 절대적 존재이신 하나님이냐 아니면 바르트의 전적 타자(wholly other)로서 추상적 개념적 하나님이냐의 선택까지 연결되는 것이다. 그러면 바르트의 신관을 더 구체적으로 살펴보자. 바르트는 하나님을 '전적 타자,' '감추어진 자,' '자유' 등으로 표현한다. 하나님의 '존재'는 그의 '자유'라고 정의하기도 한다. 자유는 하나님의 근본적 성품이라는 것이다. 하나님이 자유하시다는 것은 하나님은 자신이 아닌 그 무엇도 될 수 있는 자유도 있음을 의미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전적으로 감추어진 하나님이 전적으로 나타날 수도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바르트는 하나님을 "자유를 사랑하는 자"라고 정의하기도 한다. 그의 자유는 그의 감추어짐을 말하지만 그의 사랑은 그의 계시, 구원, 은혜등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러면 어떻게 하나님의 감추임과 계시가 동시에 가능한 것인가? 그것은 하나님의 자유란 그 자신외의 무엇이 될 자유도 있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내재하실 자유도 있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불변성은 그의 자유의 연속이라고 말한다. 즉 초월적 하나님이 동시에 내재적이라고 해서 불변을 상실한 것이 아니라 그것은 그의 속성인 자유의 연속이라는 것이다. 그의 영원성은 그리스도안에서 우리를 향한 자유라는 것이다 바르트가 하나님을 그의 계시와 동일시 할 때는 어떤 간접적 동일을 의미한다. 즉 계시가 역사적 형태를 취할 수 있어도, 역사적인 어떠한 것이 계시가 될 수는 없다는 것이다. 역사적 사건이 어떤 면에서는 계시에 참여할 수는 있지만 계시와 동일시 되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이런 계시의 간접성에서 나타나신 하나님은 언제나 그 계시속에서도 감추어지신 분이라는 것이다. 즉 계시안에서도 자유하시다는 것이다. 바르트의 이러한 간접성 개념은 변증법적 방법으로 하나님이 동시에 감추어지고 동시에 나타난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식으로 하나님을 계시와 동일시 하는 것에 문제가 있음을 발견 할 수 있다. 도대체 인간에게 나타난 하나님의 계시의 정체가 무엇이냐는 것이다. 우리가 생각하듯이 계시란 하나님이 자신을 알리는 매개체(특별 계시와 일반 계시)가 아니라 하나님 자신이라면 우리가 계시를 받을 순간(계시 사건) 그 계시와 하나님과의 관계는 어떻게 되는 것인가? 계시를 받는 순간에 우리가 하나님이 된다는 소리인가? 아니면 그 순간에 하나님이 인간이 된다는 소리인가? 아니면 계시란 인간에게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단순히 보편적 실재(realty)로서 우리 주변에 존재하는 (범신론적으로) 그 무엇인가? 실로 '간접적 동일'이라는 개념은 단지 변증법적 추론일 뿐 사실이기에는 너무추상적이고 형이상학적이다. 오히려 바르트는 철저하게 하나님의 감추임 혹은 초월성만을 강조해서 하나님을 헬라 철학에서 말하는 "알 수 없는 신"으로 정의하는 것이 더 낫지 않을까? 굳이 하나님의 초월성과 내재성을 동시에 말하고 싶으면 우리가 믿는 것처럼 인격적 하나님이 그의 초월적 능력으로 인간(역사적 매개체)을 통하여 자신을 나타내셨고 시간적 역사속에 나타나셨다고 하면 될 것이다. 이것이 뭐 그렇게 어려운 일인가? 하기야 하나님이 자신의 초월성을 끝까지 잃지 않고 역사속에 나타나는 방법이 변증법적 방법말고 없는 것으로 "믿는" 바르트에게는 우리가 가진 "믿음"은 참 믿음이 아니라고 할 것이다. 바르트의 역사관 바르트의 계시 개념과 더불어 그의 신학을 이해함에 있어서 꼭 알아야 할 것이 바로 그의 역사 개념이다. 바르트가 '역사'라고 할 때는 단지 우리가 갖고 있는 역사 개념이 아닐 수 있다는 것에 유의해야 한다. 그는 두가지 역사 개념을 말하기 때문이다. 즉 일반 역사(Historie)와 초-역사(Geschichte)이다. 이 두 개 다른 독일어는 똑같이 '역사'라고 번역이 된다. 그러므로 영어 로 'history,' 한글로 '역사'라고 할 때 바르트에게는 어떤 '역사'를 의미하는 지를 따져 봐야 할 것이다. 일반 역사(Historie)는 보통 달력에서 발생되는 사건, 즉 우리가 보통 알고 있는 역사를 말한다. 보통 역사가나 과학자들이 탐구하고 분석하는 사건들이다. 그러나 이 일반 역사는 어떤 의미가 결여된 역사라는 것이다. 반면에 초역사(Geschichte)는 특별한 의미의 역사이다. 믿음을 위한 의미가 들어있는 사건을 말한다. 과학적 혹은 역사적 관점으로 이해될 것이 아니라, 믿음으로 이해되는 것이고, 멀리서 조명하는 것이라고한다. 이 초역사의 중요성은 어느 시대나 어느 장소를 망라하여 적용된다고한다. 초역사란 하나님이 나타나시며 믿음을 불러 일으키는 순간을 의미한다. 하나님의 인격 혹은 그리스도와 동일시 되는 구속의 역사가 바로 초역사인 것이다. 이러한 초역사의 사건은 과학적 관망이 아니라 실존적 결단을 요구하는 것이다. 이렇게 바르트가 역사를 두 종류로 구분하는 데는 신학적으로 혹은 철학적으로 아주 중요한 이유가 있다. 계시가 역사속에 들어 올 때, 단지 우리가 가진 일반 역사적 범주에서만 이해할 경우, 그 계시는 초월성을 상실함으로 인간의 소유물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즉 역사 속에 나타난 하나님의 계시가 일반 역사속에 (전적으로 감추어지는 것이 아니라) 가두워질 수 있기 때문이다. 사실 바르트에게는 진정한 역사적 의미 혹은 신학적 의미는 초역사에 나타난 의미인 것이다. 이러한 두 역사의 구분을 변증법적 구분이라고 할 수 있고 또한 칸트적 이원론이라고 할 수 있다. 칸트는 우리가 이미 살펴 본대로 두 종류의 세계를 추론했다. 본체론적(noumenal) 세계와 현상적(phenomenal) 세계가 바로 그것이다. 바르트의 초역사는 바로 칸트의 본체론적 세계에 속한 것이요, 일반 역사는 칸트의 현상적 세계에 속한 것이다. 초역사속에 감추어진 진정한 의미의 계시가 일반 역사 속에 '마치 있는 것처럼'(as if) 나타난다는 것이다. 칸트 철학을 빌려 표현하자면 어떤 '실천적 당위성'을 따라 일반 역사속에 주어진다는 것이다. 그러나 분명히 알아야 할 것은 진짜 의미는 초역사속에 발견된다는 것이다. 즉 우리가 알 수 없는 초월성 속에 있다는 것이다. 그러면 이러한 두 종류의 역사가 어떻게 바르트의 신학에 적용되는지 간단히 살펴보도록 하겠다. 바르트는 구속 역사를 철저하게 '그리스도 중심적'으로본다. (물론 바르트가 말하는 '그리스도 중심적' 개념은 우리가 믿는 '그리스도 중심적' 개념과 다르다. 이것은 나중에 논하도록 하겠다.) 바르트 신학에 있어서 그리스도로 인한 구속 역사는 일반 역사가 아니라 초역사이다. 그러므로 바르트는 '창조' 조차 일반 역사가 아니라고 주장한다. 일반 역사라 한다 면 초역사인 그리스도안에서의 구속과 상관 없게 되기 때문이다. 인간 타락역시 일반 역사의 사건이 아니라고 한다. 같은 이유다. 일반 역사라하면 그 타락의 사건은 그리스도와 상관이 없는 사건이 되기 때문이다. 이렇게 바르트는 창조, 타락, 구속 모든 것을 초역사적 사건으로 본다. 이 말은 곧 이 사건들은 우리가 아는 식의 역사속에 발생된 사건들이 아니라는 것이다. 한편 동정녀 탄생은 일반 역사적 사건이라고 바르트는 주장한다. 이러한 주장을 들으면 바르트 역시 동정녀 탄생을 우리 처럼 역사적 사건으로 믿고 있다고 오해하기 쉽다. 그러나 바르트는 동시에 동정녀 탄생은 '직접적 계시'가아니라 주장한다. 그 이유는 동정녀 탄생이 영원한 하나님의 아들(그리스도) 의 성육신 사건과 동일시 될 수 없다는 것이다. 동정녀 탄생은 단지 초역사적 실재(reality)의 지표(sign)에 불과하다고 한다. 바르트가 동정녀 탄생을 일반 역사로 보는 것은 그것이 실재 일어났던 사건이라는 것이 아니다. 단지 동정녀 탄생을 구속적 의미와 관련이 없는 것으로 보는 것이다. 부활 역시 동정녀 탄생과 같이 일반 역사적 사건으로 본다. 빈 부덤은 전설적인 것이며 부활의 지표(sign)는 될 수 있다고 한다. 그러나 부활의 본 실재(reality)는 초역사적이라고 한다. 육체적, 일반 역사적 사건으로서의 부활은 오직 지표 일뿐이며, 참 사건(초역사적 사건)의 한 국면에 불과하다고 한다. 참 사건은 오직 믿음으로 알게 되는 것이라고 한다. 즉 직접적이 아니라는 것이다. 부활은 일어났다고 말한다. 그러나 그것은 과학자, 역사가들이 살피며 증명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고 한다. 초역사로서의 부활은 참으로 일어났고 제자들이 참으로 그리스도를 만났다고 한다. 이것은 참 사건이기 때문에 달력적 시간을 초월하는 것이요, 그것은 하나님의 참된 임재요 오늘날 우리에게도 보여지는 것이라고 한다. 바르트는 두 종류의 역사를 말한다. '일반 역사'(Historie)와 '초역사'(Geschichte)이다. 후자가 바로 진정한 의미의 역사라고 한다. 즉 창조나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 등 성경의 사건들이 우리 구원과 관련되는 진정한 믿음의 사건이 되기 위해서는 우리가 아는 식의 역사가 아니라 초역사에서 발생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역사성이 결여된 사건은 우리에게 무의미하다는 것을 바르트는 너무 잘 알고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직접적 일반 역사가 아니라 간접적 개념인 '초 역사'를 도입한 것이다. 직접적 개념의 일반 역사로 보자니 하나님의 초월성이 상실될 것이고, 어떤 추상적 개념으로만 한정하자니 인간에게 보편적으로 부여될 어떤 힘이(예를 들어 신앙, 결단, 종교성 등을 불러 일으키는 힘이) 결여될 것으로 본 것이다. 그래서 초역사의 개념을 도입한 것이다. 이러한 역사관과 관련하여 바르트는 두 종류의 이야기를 구분한다. 신화 (myth)와 사화(Saga)이다. 신화란 실재적으로 발생되지 않았던 것이지만 우리에게 뭔가를 남기는 이야기를 말하고, 반면에 사화란 어떤 역사적-과학적 진단을 초월하는 이야기라고 한다. 이 사화는 증명할 수 없는 것이지만 '발생되었을 수'도 있는 것으로 깊은 차원에서 진리에 다다르게 한다는 것이다. 바르트는 주장하기를 성경에는 신화는 없지만 사화는 있다고 한다. 예를 들어 창세기 1-2장과 부활 이야기는 사화라고 한다. 이 Saga도 마찬가지로 간접성의 의미가 있다. 이것은 신화처럼 상상적인 것도 아니요, 실재로 발생된 역사적 사건도 아니다. 단지 '발생되었을 수' 있는 이야기를 말하는 것이다. 사실 바르트가 '발생되었을 수도 있다'고 말하는 것은 그 사건이 일반 역사에서 발생된 사건이 아니라는 것을 의미한다. 다시 말하면 '발생 되었다' 혹은 '발생 되지 않았다'는 것은 Saga에는 큰 의미가 없다는 것이다. 중요한 것은 '발생 되었냐,' '발생되지 않았냐'가 아니라 그것이 믿음의 대상이 되는 초역사적 의미를 지녔느냐는 것이다. 바르트의 종말론 역시 그의 역사관에 비추어 이해해야 한다. 종말은 달력의 시간에 나타날 것이 아니라고 한다. 그 이유는 이미 지적했듯이 그렇게 되면 그 종말은 진정한 의미가 결여되고 우리 구원과 상관이 없는 것이 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바르트는 예수의 재림은 이미 부활과 오순절에 일어났다고 한다. 그에게 재림이란 어떤 '심판'을 의미한다. "마지막 때가 가까왔다" 라는 말은 모든 삶이 신적 심판아래 있기 때문에 항상 '위기'(crisis) 아래 있다는 말이라고 한다. 바르트의 신학을 '위기의 신학'이라고 말할 때는 바로 '신적 심판'이 그의 신학의 핵심이라는 말이다. 어떤 심판인가? 바로 '전적 타자'인 하나님이 인간 세계에 들어오는 (간접적으로 혹은 초역사적으로) 그 자체가 심판인 것이다. 물론 이 심판이라는 개념은 성경에서 말하는 '선악간의 심판'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키에르케고르가 말하는 '역설'(paradox)과 같은 것이다. 키에케고르는 인간과 영원한 질적 차이를 지니신 하나님이 인간 세계에 들어오는 그 자체를 역설로 보았다고 하면 바르트는 그것을 심판 혹은 위기로 본 것이다. 그러므로 바르트에게 종말이란 현 삶의 궁극적 차원을 보여주는 어떤 은유(metaphor)와 같은 것이다. 한편 우리가 종말적인 하나님 나라를 유업으로 어떻게 받는지는 모르지만 분명 받을 것이라고 한다. 이것 역시 간접성의 의미를 지니고 있다. 그러면 이러한 바르트의 역사관을 우리는 어떻게 평가할 것인가? 먼저 우리는 왜 의미있는 사건은 우리가 아는 식의 역사에, 즉 달력의 시간에 발생되지 않는가를 물어야 할 것이다. 물론 의미있는 사건은 어떤 면에서 초월성을 가지고 있다. 시간을 초월해서 현재나 미래에 의미를 부여한 (5) 바르트의 구원론 바르트 신학에 관한 글은 이 번 호로 마무리하고자 한다. 바르트는 그의 『교회 교의학』제5권에서 구속론에 관해 따로 집필하려 했지만 이루지 못했다. 그러나 이미 언급한대로 바르트 신학의 초점은 기독론에 있다. 그의 계시관, 신관, 역사관, 모두가 바로 그리스도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그러므로 지금까지 다룬 내용 역시 구원론에 관한 내용이라고 하겠다. 바르트에게는 그리스도야 말로 하나님과 인간에 관한 진리를 아는 유일한 길인 것이다. 이것은 우리가 알듯이 예수 그리스도가 인간과 하나님 사이의 유일한 중보자라는 말이 아니다. 그가 의미하는 바는 전적으로 자유하신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 (즉 인간과의 사랑의 교제 사건)에서 비로서 자신을 나타나도록 작정하셨다는 것이다. 물론 바르트는 말로는 성경에 나온대로 '화목'이니 '중보'니 '구속'이니 할것이다. 그러나 그가 의미하는 바는 성경과 다르다. 어떤 '사랑의 행위 혹은 사건'에서 하나님의 존재가 나타났다는 것이다. 이것은 이전의 신학에서(특히 아퀴나스 신학의 전통에서) 주장해 왔던 '존재 유비'(analogy of being) 를 반박하는 것이다. 즉 인간은 우리가 알고 있는 지식에서 우리가 모르는 하나님을 추론할 수 없다는 것이다. 대신에 바르트는 '믿음의 유비'(analogy of faith)를 주장한다. 즉 그리스도에서 나타난 하나님의 사랑의 행위는 바로 하나님 자신의 나타나심인데 이것은 오직 믿음으로 말미암아 현실화된다는 것이다. 우리 스스로 알 수도 소유할 수도 없는 하나님을 오직 그리스도 안에서 믿음으로 알수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바르트가 말하는 화목이란 바로 그리스도 자신이 '선택하시는 하나님'(electing God)과 '선택받은 인간'(elected man)이 동시에 된다는 의미인 것이다. 죄 없으신 참 하나님이 참 인간이 되셔서 우리 대신 죽으신 것이 아니라, 인간과의 사랑의 교제를 의미하는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사건에서 하나님 자신이 나타나셨음을 말하는 것이다. 하나님은 그리스도안에서 하나님이 되시기로 스스로 선택하셨다는 것이다. 그래서 바르트는 오직 그리스도안에서만 선택(election)과 유기(reprobate)가 있다고 말하는 것이다. 이 말은 모든 사람이 그리스도안에서 선택받고 또한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사람이 유기된다는 말이다. 그리스도 역시 유기된 인간으로 하나님의 저주를 겪었다고 한다. 그러므로 그리스도 안에서는 '예'가 있고 '아니오'가 없다고 한다. 예수 그리스도가 받은 저주는 마치 사랑하는 아들을 더 이상 크게 혼낼 수 없을 정도로 혼냄으로 인해 아버지의 사랑을 최대한으로 보여주는 역설적 의미가 담겨져 있는 것이다. 그리스도안에서의 유기는 바로 선택을 확정짓는 행위인 것이다. 위에서 언급한대로 그리스도안에서 이루어진 '사랑의 행위' 자체가 하나님의 나타나심이요 인간과의 교제라 한다면, 구원이라는 것은 보편적이 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또한 이런 보편적 구원의 방편으로서의 믿음이란 일종의 그리스도안의 '참여'(participation)를 의미하는 것이다. 이러한 '참여' 사상은 사실 이미 플라톤 철학에서 나타난 사상이다. 참 인간은 신과의 참여로 발견된다는 것이다. 바르트의 참여(혹은 교제) 개념 크게 다를 바 없다. 그래서 바르트는 하나님이 그리스도안에서 인간을 만나는 것(참여)이 바로 하나님의 성품이라고 말한 것이다. 한편 바르트는 역사적 인물로 나사렛 예수의 삶을 '초역사'가 아닌 일반 역사로 본다. 그러나 그의 개인적 역사는 오직 간접적인 계시라고 주장한다. 예수가 죄가 없다는 것은 그가 죄없음의 기준이 되기 때문이요, 그런 기준은 일반 역사속에서 발견될 수 없다고 한다. 바르트는 그리스도의 인격과 사역을 동일시 한다. 즉 일종의 행위 혹은 사건을 존재의 방편으로 삼는다는 것이다. 그러기 때문에 그리스도의 죄없음을 그의 대속과 동일시 하는 것이다. 이러한 주장은 예수 그리스도가 참 하나님이며 동시에 참 인간이심을 부정하는 것이다. 엄밀한 의미에서 그리스도의 인격과는 상관없이 십자가 사건 자체에 모든 의미를 부여하는 것이다. 이러한 바르트의 구원관은 성경적이기는 커녕 오히려 반기독교적이라 할 수 있다. 그는 구원을 살아 계신 하나님과의 화목으로 보지 않고, 어떤 無의 위협에서의 해방으로 보고 있는 것이다. 또한 그리스도안에서 구원의 '사건' 혹은 '행위'를 유일한 실재(reality)로 보는 것은 우리의 구원을 확실하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구원을 보편화시키고 또한 하나님의 실재적 구원의 섭리를 추상화시켰다고 하겠다. 또한 이렇게 구원론에서 하나님의 초월성을 유지하려고 한 바르트는 오히려 하나님을 범신론화 내지는 단일론화(예를 들어 구원에 있어서 인간과 하나님의 구분을 애매하게 만드는 것)시켰다고 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