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탄절 종합/성탄절 설교

성탄절설교, 말씀이 육신이 되신 날

에반젤(복음) 2020. 12. 21. 18:50

본문: 요 1:14-18

 

성탄절은 아기 예수 탄생하신 날이라고 하면서 세상 사람들이 즐기고 죄 짓는 날이 아니다.

성탄절에 태어난 아기 예수는 그냥 한 아들이 태어난 것이 아니다.

영원 전부터 계신 성자 하나님이 말씀으로 계시다가 인간의 몸을 입고 오신 것이다.

 

그래서 천사는 마리아에게 ‘나실 바 거룩한(죄없고 순결한) 이’라고 하였다.

어떻게 이 거룩한 탄생이 이루졌는가?

동정녀 마리아에게 성령으로 잉태케 하심으로 이루어졌다.

 

이 동정녀 탄생은 우리의 구원을 위해서 하나님이 하신 위대한 신비의 일이다.

동정녀 탄생은 가장 신비롭고 놀라운 사건이다.

이 일은 실로 하나님이 하신 최고의 행위였다.

 

예수 그리스도의 잉태에는 남자는 전혀 관여하지 않았다.

마태복음은 마리아의 남편 요셉이 동거하기 이전에 일어난 일임을 분명히 하고 있다.

그리스도는 마리아로부터 인성을 취하셨으나 이것은 성령에 의해 이루어진 일이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 동정녀 탄생을 못 믿는 사람은 삼위일체 하나님도 믿을 수 없을 것이고

성경에 기록된 많은 기적들도 하나님의 말씀도 믿을 수가 없을 것이다.

어줍잖은 우리의 이성으로는 결코 이해할 수 없는 신비인 것을 알아야 한다.

이것은 믿음의 문제이지, 과학이나 이성의 문제가 아닌 것이다.

동정녀 탄생이 무너지면 기독교도 성경도 우리의 구원도 다 무너지는 것이다.

 

말씀이 육신이 되심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역사였다.

어떤 분은 이 사실을 매우 훌륭하게 표현하였다.

‘주님의 신성에 어머니가 없었던 것처럼, 주님의 인성에는 아버지가 없었다.’

 

말씀이 육신이 되심은 우리가 구원받고 우리 죄가 사함을 받도록 하기 위해 이루어진 일이다.

사람의 자녀들이 하나님의 자녀가 되도록 하기 위해 하나님의 아들이 사람이 되셨다.

 

우리의 구원이 바로 이 아기 예수의 동정녀 탄생과 그분의 신비스러운 인격에 달려 있다.

그 아기 예수는 완전한 인간이면서 동시에 완전한 하나님이신 것을 믿어야 한다.

성자 하나님이 인간의 몸을 입고 오신 것이다.

 

성자 하나님이 변화하여 인간 예수가 된 것이 아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에서,

‘되어’라는 문구가 사람들로 하여금 하나님의 아들이 사람으로 변화했다고 생각하게 했다.

 

롬8:3에 예수 그리스도가 “죄 있는 육신의 모양으로” 오셨다고 한 표현이 더 낫다.

요일4:2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육체로 오신 것을 시인하는 영”이라고 한다.

예수 그리스도는 육체로 오신 것이지, 사람으로 변화된 것이 아니다.

영어의 표현으로 하면, was made가 아니고 became이다.

 

성경은 특히 한 구절 한 단어의 의미를 잘 살펴보고 우리의 교리를 분명히 해야 한다.

이를 분명히 하지 못한 결과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과 인격에 관하여 많은 이단들이 생겨 났다.

 

영지주의자들은 하나님이 어떻게 인간의 몸을 입느냐? 가현적으로 보였을 뿐이라고 주장하였다.

다른 이단들은 하나님과 사람이 이중인격이 되어 두 본성이 혼합되었음을 주장하였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했다”는 말씀의 정확한 의미는,

새로운 인격이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삼위일체의 두 번째 위격이 인간의 본성을 입으신 것이다. 이 영원하신 위격께서 스스로 육신을 입으시고 사람의 모양으로 이 세상에 나타나신 것이다.

 

말씀이 육신이 되심(성육신)에 의해 성자의 인격에는 아무런 변화도 일어나지 않았다

그분은 언제나 동일한 위격이시다.

동정녀 마리아의 태중에서도, 무기력한 아기의 모습으로 구유에 누워있을 때에도

그는 언제나 성삼위일체의 두 번째 위격이시다.

 

태초부터 아버지와 함께 계시다가 우리에게 나타내신 생명의 말씀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이 영원한 생명을 우리가 보았고 증언하여 너희에게 전하노니

이는 아버지와 함께 계시다가 우리에게 나타내신 바 된 이시니라

 

그래서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였다.

말씀이 육신이 되신 탄생은 한 인간의 태어나심이 아니라

영원한 영광의 성자 하나님이 인간의 몸을 입고 오신 날인 것이다.

 

‘거룩한 이’의 나심이요 탄생인 것이다.

이사야 선지자는 이 아기가 전능하신 하나님이라고 예언하였다.

사9:6-7) 이는 한 아기가 우리에게 났고 한 아들을 우리에게 주신 바 되었는데 그의 어깨에는 정사를 메었고 그의 이름은 기묘자라, 모사라, 전능하신 하나님이라, 영존하시는 아버지라, 평강의 왕이라 할 것임이라 그 정사와 평강의 더함이 무궁하며 또 다윗의 왕좌와 그의 나라에 군림하여 그 나라를 굳게 세우고 지금 이후로 영원히 정의와 공의로 그것을 보존하실 것이라 만군의 여호와의 열심이 이를 이루시리라

 

이 탄생은 아담이 범죄하여 타락하자마자 창3:15에서 예언하신 ‘여자의 후손’의 나심이다.

창3:15) 내가 너로 여자와 원수가 되게 하고 네 후손도 여자의 후손과 원수가 되게 하리니

여자의 후손은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 너는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니라 하시고

 

예수님이 지신 십자가는 여자의 후손이 뱀의 머리를 상하게 하고

뱀은 여자의 후손의 발꿈치를 상하게 한 사건이다.

여자의 후손의 탄생을 사도 바울은 이렇게 표현한다.

갈4:4) 때가 차매 하나님이 그 아들을 보내사 여자에게서 나게 하시고

 

이사야 선지자도 그리스도의 동정녀 탄생을 예언하였고 그 예언이 이루어진 것이다.

사7:14)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의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임마누엘이 무엇인가?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신다는 것 아닌가?

인간의 몸을 입고 오셔서 우리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의 이름이다.

 

우리를 구원하시고 자녀 삼아주실 이 여자의 후손의 탄생을 구약성경은 누누이 예언하여 왔다.

아브라함 언약이다.

창22:18) 또 네 씨로 말미암아 천하 만민이 복을 받으리니

 

천하 만민이 그로 말미암아 구원의 복을 받을 아브라함의 씨로 예수 그리스도가 오신 것이다.

그 예언이 성취되었음을 갈3:16이 증거하고 있는 것이다.

갈3:16) 이 약속들은 아브라함과 그 자손에게 말씀하신 것인데 여럿을 가리켜 그 자손들이라 하지 아니하시고 오직 한 사람을 가리켜 네 자손이라 하셨으니 곧 그리스도라

 

또한 말씀이 육신이 되신 탄생은 다윗의 후손이 영원한 왕권으로 오신 것이다.

삼하7:16) 네 나라가 내 앞에서 영원히 보전되고 네 왕위가 영원히 견고하리라

 

마태복음은 구약과 신약을 잇는 처음 시작을 이렇게 말한다.

마1:1)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의 계보라

이 예수 그리스도가 아브라함의 그 씨와, 다윗의 자손의 그 영원한 왕권임을 강조하는 것이다.

그분이 나심은 하나님의 아들의 오심이요, 그리스도의 오심임을 강조하는 것이다.

 

이분의 탄생이기에 천사들이 목자들에게 알리고 천군 천사들이 와서 그분을 높여 찬양하였다.

(눅2:8-14) 그 지역에 목자들이 밤에 밖에서 자기 양 떼를 지키더니, 주의 사자가 곁에 서고 주의 영광이 그들을 두루 비추매 크게 무서워하는지라. 천사가 이르되 무서워하지 말라 보라 내가 온 백성에게 미칠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을 너희에게 전하노라. 오늘 다윗의 동네에

너희를 위하여 구주가 나셨으니 곧 그리스도 주시니라. 너희가 가서 강보에 싸여 구유에 뉘어 있는 아기를 보리니 이것이 너희에게 표적이니라 하더니, 홀연히 수많은 천군이 그 천사들과 함께 하나님을 찬송하여 이르되,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하나님이 기뻐하신 사람들 중에 평화로다”하니라

 

“말씀이 육신이 되어”에서 우리가 보아야 할 또 다른 의미가 있다. 칼빈의 해석이다.

그것은, 하나님의 아들이 우리를 위해 그 존귀한 하늘 영광을 버리시고

낮고 비천한 상태로 내려오셨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다는 것이다.

 

성경은 인간을 낮춰 말할 때, ‘육신’(flesh)이라고 부른다.

하나님의 아들은 자신을 지극히 낮추셔서

인간의 비참함을 표현하는 바로 그 육신을 친히 취하신 것이다.

 

여기서 ‘육신’은 (바울이 즐겨 사용하는) 타락한 본성을 가리키기 위함이 아니라

죽을 수밖에 없는 운명을 가진 인간을 가리키려고 사용되었다.

즉 인간의 연약하고 덧없는 본성을 경멸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모든 육체는 풀이요’(사40:6)라는 구절이 육신의 특성을 잘 설명해준다.

 

그렇지만 그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였다.

 

성탄절은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신 날이요,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신 예수 그리스도가

육신을 입고 오신 날이다.

 

율법은 모세로 말미암아 주어졌지만

은혜와 진리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주어졌다.

그분이 이 땅에 오심으로 우리는 그분의 충만함으로부터 은혜와 진리를 받게 되었다.

 

은혜는 하나님이 우리의 구원을 위해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과 사역을 통해 주시는 선물이다.

은혜는 “무가치한 사람에게 베푸시는 하나님의 무조건적인 호의이다”.

은혜는 우리를 부르고(갈1:15), 우리를 중생시키며(딛3:5), 우리를 의롭다 하며(롬3:24),

거룩케 하며(히13:20,21), 우리를 보호하고 보존한다(벧전1:3-5).

 

우리는 용서받기 위해, 그리고 하나님께 돌아가기 위해, 우리의 상한 마음을 고치기 위해,

고난과 영적 전투의 때에 강해지기 위해 은혜가 필요하다.

선택으로부터 영화에 이르기까지 은혜는 홀로 화려하게 통치한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은혜 위에 은혜’를 받는다.

이것은 문자적으로 ‘은혜 위에 은혜를 조각하는 것’을 의미한다.

파도가 해안에 연이어 몰려오는 것처럼 은혜 위에 은혜가 계속해서 넘치는 것이다.

 

진리는 이론이나 사상이 아니다.

진리는 하나님 자신이요 존재요 그리스도와 성령을 통해서만 살 수 있는 생명이요 본질이다.

하나님으로부터 생명이 오기 전에는 이해할 수도 살 수도 없는 것이 진리이다.

 

그 좋은 사상들이 입으로는 주장되면서도 인간 사회에서는 실현되지 못한 이유를 알 수 있다.

하나님 없이, 하나님의 은혜와 생명이 없이는 알 수도 살 수도 없는 것이 진리이다.

진리를 알고 살 수 있을려면,

진리이시고 생명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 안에 오시고 성령을 힘입어야 한다.

 

우리의 구원과, 은혜와 진리를 주시기 위해서,

영원한 생명이시고 진리이시고 말씀이신 성자 하나님이 인간의 몸을 입고 오셨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셨다. 이것이 성탄절의 정확한 의미이다.

 

그래서 성탄절은 우리 그리스도인의 귀한 명절이요, 감사와 영광을 올려드려야 할 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