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탄절 종합/성탄절 설교

변화의 성탄절

에반젤(복음) 2020. 12. 20. 00:57

변화의 성탄절
본문 사61:1-3
빛과소금교회/최삼경목사


"주 여호와의 신이 내게 임하였으니 이는 여호와께서 내게 기름을 부으사 가난한 자에게 아름다운 소식을 전하게 하려 하심이라 나를 보내사 마음이 상한 자를 고치며 포로 된 자에게 자유를, 갇힌 자에게 놓임을 전파하며 여호와의 은혜의 해와 우리 하나님의 신원의 날을 전파하여 모든 슬픈 자를 위로하되 무릇 시온에서 슬퍼하는 자에게 화관을 주어 그 재를 대신하며 희락의 기름으로 그 슬픔을 대신하며 찬송의 옷으로 그 근심을 대신하시고 그들로 의의 나무 곧 여호와의 심으신 바 그 영광을 나타낼 자라 일컬음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저보고 인간에게 제일로 어려운 것이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변화라고 대답하겠습니다. 어린이도, 젊은이도, 늙은이도, 목사도, 장로도 변화되기 어렵습니다. 인간의 가치관, 목적, 습관, 다 변하기 어려운 것들입니다. 어떻게 인간이 변하기가 어려운지 성령마저도 인간의 본질을 변화시키지 못하는가 하는 생각이 들 정도입니다. 개인이 변하기가 어렵다면 민족의 변화란 더 어려울 것입니다. 숫자적으로 말하자면, 50년 동안 살아 생긴 습관을 고치려면 50년이 걸려야 할 것이며, 5천년 동안 이루어진 민족성을 고치려면 또 5천년이 걸려야 할 것입니다.


몰라서도 변화되지 못하고 알고도 변화되지 못합니다. 그런데 몰라서 고치지 못하는 것은 이해가 되지만 알고도 못 고치는 것은 더욱 이해가 안 됩니다. 상담을 해 보면 자기를 잘 알고 있는 것처럼 말하면서도 변화되지는 않습니다. 자기가 교만했다고 말하면서 아직도 교만이 흐르고 있었습니다. 남을 속였다고 고백하고 회개하여 믿고 돈을 빌려주었더니 남의 돈을 또 떼어먹고 달아나 버리는 것입니다. 거짓을 말하고 거짓을 해결하지 못하고, 정욕적인 죄를 말하고 또 정욕적인 죄를 짓습니다. 돈놀이하다가 매를 맞고 간증하고 또 돈놀이하는 사람도 보았습니다. 불효를 말하며 계속해서 불효의 길을 가고, 불충성을 고백하고 여전히 불출성의 길을 갑니다.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고 살던 것을 회개했다고 해 놓고 또 같은 방법으로 살아가는 사람도 있습니다. 어떻게 변화될 수 있을까요? 과연 진정한 변화는 무엇일까요?




변화는 점직적 변화와 순간적 변화가 있습니다. 예를 들어서 삭케오나 사울은 순간적으로 변화된 사람입니다. 삭케오는 예수를 만나 즉시 그의 모든 것이 변하였습니다. 그래서 기쁨으로 재산의 절반을 갈라서 가난한 자에게 주고 토색한 것은 4배로 갚겠다고 한 것입니다. 그러나 야곱은 순간적으로 변화된 사람이기도 하지만, 또한 점진적 변화를 이룬 사람이기도 합니다. 얍복강 가에서 순간적으로 변화되어 이스라엘이란 이름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그 후 많은 고난을 통하여 조금씩 조금씩 변화되어 노년에 요셉을 따라 애굽에 갔을 때 성화된 인격의 모습을 보이게 됩니다.


성도들은 대부분 이 두 가지 변화를 다 경험하게 되고 또 경험해야 합니다. 어떤 경우에는 자신도 남도 선명히 느끼도록 변화됩니다. 이것은 순간적 변화입니다. 어떤 사람은 예수를 믿고 나서 입맛도 변했다고 말합니다. 술맛도 변하고 담배 맛도 변했다고 합니다. 억지로 참으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그냥 입맛이 변해 버렸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좋아하던 술을 보면 역하고 담배 냄새를 맡으면 매스껍다고 합니다. 참새가 방앗간을 그냥 지나가도 술냄새나는 술집을 그냥 지나갈 수 없는 사람도 변해 버립니다.


처음에 예수를 영접하고 구원을 받을 때 큰 변화를 함께 경험하면 그 사람은 후에 고난을 적게 당합니다. 구원을 받고도 롯처럼 돈 좋아하고, 인색하고, 농담 잘 하고, 자식을 바르게 가르치지 못하면 천하고 추하게 됩니다. 보혜사 성령을 받으면 사람이 변화됩니다. 혈서를 써도 고쳐지지 않는 나쁜 버릇이 쉽게 고쳐지고, 절제력이 없는 사람도 절제력이 생깁니다. 성령을 받으면 창조적 생각이 생기고, 영적 가치를 알게 되고, 화평을 나누게 되고, 매사에 부정적인 사람이 긍정적인 사람이 되고, 영적 설득력이 생기며, 반대의견도 수용할 수 있게 되고, 주위 사람들에게 평안을 주게 되고, 그리고 이웃에게 진정으로 관심을 갖게 됩니다. 또한 고집을 버리고 부드러운 사람이 되고, 이기적인 사람이 자기의 모든 재능을 하나님 영광을 위하여 사용하게 되며, 강력한 인내심이 생기며, 뼈 속 깊은 미움을 품지 않고, 그리고 남을 위하여 희생할 줄 아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비교적 무의식적 변화를 점진적 변화에 속하고, 의식적 변화는 순간적 변화에 속합니다. 그러나 늘 기도하고 자신과 싸우고 신앙생활을 게을리 하지 않으면 어느덧 "아니! 내가 벌써 여기까지 왔나?" 깜짝 놀랄 만큼 변해 있는 자신의 모습을 발견하게 됩니다. 없는 것이 생기고 있던 것 중에 없어져야 할 것이 없어집니다. 죽어 없어지는 죽음의 변화도 경험하고, 살아 생겨나는 창조적 변화도 경험합니다.


한국의 초대 교회에 김익두 목사님 일화는 너무나 많습니다. 김익두 목사님은 예수 믿고 회개한 다음에 아예 자신의 부고장을 자신이 돌린 사건이 있었습니다. "김익두는 죽었다."고 생각하여 그렇게 한 것입니다. 얼마나 못된 짓을 많이 했던지 김익두가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사람들은 좋아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어느 날 죽었다는 김익두가 시장 바닥에 나타난 것입니다. 알고 보니 시커면 책 하나를 가지고 나타난 김익두가 예수를 믿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이 김익두에게 물통에서 물을 퍼서 뒤집어 씌웠답니다. 그러자 김익두는 물을 툭툭 털고 그를 쳐다보면서 하는 말씀이 "너는 옛날 김익두가 죽었다는 그 사실을 인해서 기뻐하라."고 하였다고 합니다. 이처럼 예수를 믿으면 죽게 됩니다.


요즈음 "총체적 위기"라는 말을 너무 많이 듣습니다. 정말로 위기인지, 아니면 위기라고 하는 것이 위기인지 모르겠습니다. 요즈음 몇몇 신문을 보노라면 1년 안에 곧 이 나라가 망하기라도 할 것처럼 느껴집니다. 얼마 전에 신문사에 전화를 걸어 나는 "목사인데 이 나라에 총체적 위기가 찾아 왔다면 그 책임을 언론도 져야 할 것이라고 봅니다. 그러니 사실을 보도하더라도 어둔 면만 보지 말고 밝은 면도 함께 보도록 해 달라"고 주문을 하였습니다. 그런데 이 "총체적 위기", "총체적 부패"에 대하여 인간이 내린 최선의 대안은 무엇입니까? 바로 "구조조정"이란 것입니다. 총체적 위기를 과연 구조조정으로 극복할 수 있을까요? 되는 면이 있고 되지 않는 면이 있을 터인데 되지 않는 면이 더 많을 것입니다.


위기가 극복되려면 두 가지가 함께 되어야 가능할 것입니다. 첫째는 마음이 변해야 합니다. 그리고 두 번째로는 먼저 자신이 변해야 합니다. 요즈음은 닭이 울지 않고 개들은 짓지 안는다고 합니다. 그 이유는 이렇습니다. 닭이 울지 않는 것은 현대인들은 일어나야 할 시간이 일정하지 않기 때문이고 하나는 다 시계를 가지고 있어서 제가 일어날 시간에 일어나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개가 짖지 않는 것은 모두 도둑놈이라 항상 짖고 있을 수 없어서 이제 포기해 버렸다고 합니다. 이 개의 학설에 의하면 밖에 있는 놈이나 안에 있는 놈이나 다 도둑이란 말입니다. 이 개의 말이 맞다면 사정을 하겠다는 사람이나 사정을 받아야 할 사람이나, 여당이나 야당이나, 부패를 주장하는 언론이이나 정부나 다 부패했다는 말입니다. 아무도 믿지 않습니다. 냉소주의와 불신만 가득 차고 있습니다. 저는 이것이 두렵습니다.


내가 먼저 내 마음에서부터 변하려고 하지 않고 변화를 말하는 것은 무의미하다고 봅니다. 모든 시대의 모든 지도자들은, 비록 총과 칼로 나라를 잡았어도 개혁 내지는 정화를 외쳤습니다. 전두환씨 같은 사람도 삼청교육대라는 것을 만들어서 정화를 시도하려고 했지만 정작 그 삼청교육대에 갈 사람은 그 사람이었다고 봅니다. 그러니 진정한 변화를 먼저 내가 변해야 하고 그리고 본질이 변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먼저 변화는 마음에서부터 시작되어야 합니다.


돼지가 새끼를 낳았는데 농부가 너무 예뻐서 한 마리를 집안으로 들여왔다고 합니다. 그는 돼지를 깨끗이 씻기고 발굽을 닦아주었습니다. 그리고 돼지에게 향수를, 그것도 세계에서 가장 비싸고 좋은 샤넬 No.5를 뿌려주고 목에 리본까지 달아 주었다고 합니다. 농부는 돼지를 안방으로 데리고 갔습니다. 돼지는 제법 멋있어 보였습니다. 분명히 붙임성 있는 애완동물이었습니다. 그런데 문이 열리자 그 돼지는 안방에서 뛰쳐나가 집 앞뜰에 있는 진흙 웅덩이 속으로 뛰어들어갔다고 합니다. 왜 그랬을까요? 돼지의 본성 자체가 변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술주정뱅이, 바람둥이, 마약쟁이, 도둑놈, 살인자에게 옷을 잘 입혀서 그를 교회로 인도했다고 합시다. 그는 예배당의 앞자리에 앉아서 큰 소리로 찬송도 하고 있을 때는 거룩한 신자같이 보일 것입니다. 하지만 그의 본성은 술집에 갔을 때 나타날 것입니다. 그의 인간 본성은 조금도 변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인간의 마음이 변한다는 것은 아예 불가능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구조조정만 힘쓸 수밖에 없는지 모릅니다. 길가의 창녀(娼女)들을 구해낼 방법이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그들의 마음을 바꾸어 놓기 전에 그들을 구해낼 방법이 없다고 합니다. 이들에게 전도하는 사명을 가진 분들의 말을 들어보면 환경을 바꾼다고 해서 그들이 변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고양이가 미남 청년을 사랑하게 되었습니다. 고양이는 미의 여신 <아프로디테>에게 자신을 여자로 만들어 달라고 간청했습니다. 고양이의 딱한 사정을 가엾이 여긴 여신은 고양이를 아름다운 처녀로 만들어 주었고, 청년은 첫눈에 그녀에게 마음이 사로 잡혔습니다. 이들은 결혼을 하였습니다. 첫날밤에 <아프로디테>신은 그 신방에 쥐 한 마리를 넣었습니다. 그러자 처녀가 된 고양이는 자신이 누구인지, 어디에 있는지를 까맣게 잊은 채 침대에서 뛰어내려 쥐를 잡아 입에 피를 묻히며 잡아먹더라고 합니다. 그래서 여신은 처녀를 본래 고양이 모습으로 되돌려 버렸다는 신화가 있습니다. 이처럼 본질이 변하지 않으면 변한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인간은 마음이 변하면 행동은 자연이 변합니다. 행동도 변합니다. 얼굴도 변합니다. 50대 이후에 얼굴은 자기가 책임을 져야 한다고 합니다. 아름다움도 화장으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위가 나쁘고 마음이 불편한 여자들은 화장을 하면 할수록 더 흉측합니다. 외적 미(美)도 속으로부터 나와야 합니다. 마찬가지로 은혜를 받으면 사람의 얼굴이 변합니다. 은혜스러움도, 분노도, 미련도, 정직함도, 색(色)끼도, 다 얼굴에 나타납니다.




둘째, 내가 변해야 변화가 일어납니다.


사람들은 네가 변하면 나도 변할 것이라고 말합니다. 아내가 변하면 남편도 변하겠다고 말하고, 남편이 변하면 아내도 변하겠다고 말합니다. 경상도가 변하면 전라도도 변하겠다고 하고, 전라도가 변하면 경상도도 변하겠다고 하고, 장로가 변하면 목사도 변하겠다고 하고, 목사가 변하면 장로도 변하겠다고 합니다.


알콜 중독자와 결혼한 한 여인의 고백입니다. "나는 내 노력으로 남편을 변화시키려고 했습니다. 그리고 할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어느 날 나는 포기하고 말았습니다. 온갖 노력을 다 했지만 헛수고였습니다. 나는 무력감에 시달렸고 패배감에 절망하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울면서 기도했습니다." "그때 저는 '주님, 저는 무능합니다. 제가 할 수 있다고 생각한 것을 용서해 주옵소서. 저를 하나님께 드립니다. 나는 아무 것도 할 수 없습니다.'라고 기도를 드렸습니다. 그런데 이상합니다. 그것이 제 결혼 생활의 전환점이 되었습니다. 둘이 다 변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변화는 천천히 되었습니다. 그러나 저는 제 마음을 남편에게 쏟아 놓은 기회를 가졌습니다. 그리고 제가 그의 사랑을 얼마나 필요로 하는지 고백했습니다. 그는 진지하게 나를 받아들였습니다. 그리고 그는 술을 끊을 새로운 동기를 갖게 되었습니다. 한 친구가 그를 금주단체로 데리고 간 것입니다. 이제 그가 술을 끊은 지 7년이 되었습니다. 저는 날마다 우리가 이제 서로에 대해 갖게 된 사랑과 존경을 인해 하나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주님께서는 먼저 나부터 바꾸어 놓으시고 남편도 바꾸셨습니다." 아내가 변하여 남편을 구한 경우는 참으로 많이 봅니다. 그냥 내가 변해 버리면 너는 따라서 변하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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