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탄절 종합/성탄절 설교

스크랩 기다리던 주님 오심을 환영합시다. (눅7:19-23)

에반젤(복음) 2020. 12. 20. 00:37

기다리던 주님 오심을 환영합시다. (눅7:19-23)

 

 

세례 요한은 메시야에 대하여 오해하고 있었습니다. 다른 유대인들과 마찬가지로 메시야가 오시면 이스라엘을 이방의 압제에서 해방시켜 주시고 다윗 시대의 영광을 회복시켜 줄 것이라고 기대했습니다.그런데 자신이 메시야로 증거한 예수께서 자신의 기대와는 달리 전혀 다른 방향으로 하나님 나라를 전파하고 , 그를 위해 증거 하다가 투옥된 자신을 전혀 모르는체 하고 신경 쓰지 않았습니다. 자기는 최선을 다했는데도 알아주지 않고 도와주지도 않고 아는체도 하지 않으니 화가 났을 법도 합니다. 그럼에도 아직도 예수님이 메시야일 것이란 생각과 어쩌면 아닐 것이란 생각으로 혼란한 자신을 그대로 드러낸 것입니다. 그래서 자신의 제자들을 예수께 보내 직접 물어보게 된 것입니다. 예수님 당신이 메시야입니까? 예수님이 메시야가 아니라면 우리가 다른 메시야를 기다려야 하는 것입니까? 이 질문에 예수님은 구약에 예언된 메시야의 예언이 이루어지고 있음을 전하라고 하면서 예수님 자신이 메시야임을 전하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이 답변을 하면서 세례요한을 폄하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예수께서는 세례요한은 바람에 흔들리는 갈대처럼 약한 자도 아니고, 화려한 상류층의 사람도 아니며, 어떤 선지자보다 나은 자로써 메시야의 길을 예비한 구약의 마지막 선지자로 , 여자가 낳은 자중 가장 큰 자라고 평가하였습니다. 세례요한은 이미 말4:5에서 예언된 선지자로 일시적으로 신앙적 회의를 갖긴 했지만, 회개의 세례를 통해 메시야의 첩경을 평탄케 한 위대한 선지자였다는 것입니다. 세례요한의 그 공을 인정한 예수님은 메시야의 첩경을 예비한 위대한 선지자로써 모든 선지자보다 큰 자라 말씀하였습니다.

 

세례요한은 메시야의 길을 예비한 선구자로 자신의 본분과 사명을 흔들림 없이 아주 잘 감당한 선지자였습니다.(요1:19-34)한편 예수께서 세례요한에 대한 긍정적 평가와 함께 “하나님의 나라에서는 극히 작은 자라도 세례요한보다 크니라”는 말씀을 합니다. 이는 계시의 점진성을 말하는 것으로 구약은 구속복음의 빛을 희미하게 바라볼 수 밖에 없었지만 이제 빛되신 예수님이 직접 오셔서 인도하는 신약성도들은 구속의 은혜를 받은 신약성도들이 하나님의 자녀로써 신분이 상승되고 하나님과함 께 하늘 보좌에서 천년동안 왕 노릇할 은혜의 백성임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 크신 은혜로 구속하신 하나님이신 예수님 오심을 환영해야 합니다. 몸과 마음을 정결히 하고 경건하고 거룩한 마음으로 주님오심을 기다리며, 예수님 이 땅에 오심을 찬양하고 기뻐하는 성도가 되기 원합니다. 기다리던 예수님 오심을 찬양하고 기뻐하며 환영하기 위해 무엇을 해야 합니까? 어떻게 준비해야 합니까? 찬란한 트리를 설치하고 여러 행사 이벤트를 통해 시끌벅적한 잔치를 벌여야 예수님 오심을 환영하는 것입니까? 아니면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목적인 영혼 살리는 일에 몰두하다가 가난한 자를 섬기고 나누고 헐벗은 자를 입혀주고 배고픈 자에게 먹을 것을 주다가 주님 오실때 주님을 영접하며 환영하시겠습니까? 이를 위해서 세 가지 멧세지를 전파하고자 합니다.

첫째로 오실 그분을 간절한 마음으로 기다리라.(19-20)

둘째로 예수로 인하여 실족하지 아니하는자가 복이 있다.(23)

셋째로 성도는 선지자보다 나은 하나님의 자녀다 (26)

구체적으로 말씀을 따라가며 은혜 나누도록 하겠습니다.

 

첫째로 오실 그분을 간절한 마음으로 기다리라.(19-20)

19절에서 세례요한이 예수님에 대해 의문과 회의를 느끼고 있습니다.요한의 제자들은 나인성 과부의 아들을 살린일과 요한이 투옥된 후에 예수님이 향하신 이적과 기사에 대해 자기들의 선생인 요한에게 보고합니다.그런데 제자들이 전해준 기적과 이적에 대한 보고를 듣고 예수님이 메시야인지에 대해 의문을 품기 시작합니다. 왜 선지자 중에 가장 큰 선지자가 이런 실수를 했을까요? 세례요한은 그리스도의 길을 예비하기 위한 선지자로 이 땅에 태어났습니다.그가 태어났을 때 대제사장이었던 사가랴는 성령 충만함을 입어 세례요한에 대해 “ 그 백성을 돌아보실 하나님을 증거 할 자”(눅1:68) 라 이렇게 말한 것입니다.

 

하나님이 그 백성을 돌아보실 것이란 사가랴의 예언은 주님의 각종 사역, 특히 나인성과부의 아들을 살리신 주님의 기적을 통해 문자 그대로 성취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돌아보셨습니다(16)

세례 요한은 자기 부친 사가랴의 예언이 성취된 나인성 사건을 보고 받고 기뻐뛰며 주님을 찬양해야 마땅했습니다. 기뻐뛰며 찬양해야 했던 세례요한이 오히려 예수님에 대해 의문을 품기 시작한 것은 그 심령의 중심에 문제가 발생했다는 것입니다. 우리 인생에서 어려운 고비마다 ,하나님께 대한 회의가 들 때마다, 과거 우리 삶 속에서 은혜를 베풀었던 하나님의 은혜를 생각하며 놀라운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리하면 하나님께서 우리의 삶 속에 베푸셨던 하나님의 은혜를 발견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오늘 우리 앞에 놓인 문제 역시 우리를 하나님께로 더 가까이 인도하려는 디딤돌이란 것을 깨닫게 될 줄 믿습니다. 세례요한은 주님에게 단도직입적으로 묻습니다. 요한은 절박합니다. “오실 그이가 당신입니까?” 즉 “예수님이 우리 민족이 그렇게 수많은 세월동안 기다렸고 현재 기다리고 있는 그 메시야이십니까?”하고 묻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세례요한은 이제 헤롯에게 처형당할 절대 절명의 위기를 몸에 느끼고 있는 때입니다. 세례요한은 구약에서 예언된 바와 같이 주님이 오실 길을 예비하는 엘리야였습니다.

마17:11“...엘리야가 과연 먼저 와서 모든 일을 회복하리라.

12,...엘리야가 이미 왔으되 사람들이 알지 못하고 임으로 대우하였도다.

13..예수께서 말씀하신 것이 세례요한인 줄을 깨달으니라.“

 

이렇게 주의 길을 예비하러 온 세례요한이 소리높여 외친 것은 다름아닌 하나님의 심판이었습니다. 곧 그는 유대인들을 독사의 자식들이라고 부르며 그들에게 임박한 하나님의 진노와 심판에 대해 선포하였던 것입니다. 그가 외친 메시야는 심판주인데 정작 예수님은 심판주와는 거리가 먼 딴판인 것입니다. 예수님은 대단한 카리스마를 가지고 사람들 앞에 군림하며 심판주로써 위용을 보여 주는 것이 아니라 세리와 죄인들과 어울리며 친구가 되어 주십니다. 진노와 심판대신 병자들을 고쳐주고 죽은 자를 살릴 뿐만 아니라 용서와 사랑을 선포하시는 것입니다. 이러니 세례요한이 혼돈을 일으킬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과연 예수님이 내가 예언한 심판의 메시아란 말인가? 아니면 메시아는 사랑의 메신저인가? 우리나라 여성이 남성에 대해 거는 꿈은 크게 두 가지가 있다고 한다.바로 신데렐라의 꿈과 평강공주의 꿈이다. 신데렐라의 꿈은 백마 탄 왕자님이 유리 구두를 들고서 자기를 찾아와 주기를 바라는 것이다.반면 평강공주의 꿈은 현재의 남자가 온달처럼 보잘 것 없지만 자기의 헌신으로 언젠가는 그를 훌륭하게 만들겠다는 꿈이다.

 

그런데 이 두가지는 언뜻 보기에는 다른 것 같지만 사실은 똑같은 것이다.이미 출세해 있는 남자를 원하는 것인가, 아니면 출세의 가능성이 있는 남자를 원하는 것인가의 차이일 뿐이다.즉 여자가 남자를 이용해서 자기의 욕구를 충족시킨다는 점에서는 마찬가지이다.남성도 여성에 대해서 크게 두 가지의 꿈을 갖고 있다고 한다.미스 코리아의 꿈이나 복부인의 꿈이 그것이다.즉 자기 아내가 출중한 미인이든지, 아니면 뛰어난 경제력이 있어 돈을 많이 벌어주기를 바라는 것이다.하지만 이런 꿈들은 가정의 행복을 위해서 빨리 깨버리는 것이 좋다.하나님이 만드신 부부는 요구하며 바라는 배필이 아니라, 서로 간에 돕는 배필이기 때문이다.바로 세례 요한이 예수님에 대해 이런 잘못된 기대를 하고 있었던 것입니다.그렇습니다. 우리는 자기 나름대로 어떤 틀을 가지고 기대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 틀 속에 자기 남편이 들어와야 합니다. 자기 자식이 들어와야 합니다. 자기 이웃들이 형제들이 성도가 그리고 급기야 마지막엔 목사까지 그 틀 속에 들어오면 좋은 사람이고 벗어나면 적이 됩니다. 요한이 오해한 것처럼 예수님이 사랑의 메시야일 뿐이요 심판의 메시야는 아니란 말입니까? 아닙니다. 오히려 그리스도께서는 이러한 사랑과 용서의 복음을 통해 가장 무서운 심판을 선포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사랑과 자비를 거부하는 자들은 가장 무서운 심판에 처해질 것이기 때문입니다.

눅10:10“... 너희를 영접하지 아니하거든

11우리 발에 묻은 먼지도 너희에게 떨어버리노라 그러나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온 줄 알라 하라

12 ...그 날에 소돔이 그 동네보다 견디기 쉬우리라.

13 화있을 진저 고라신아....

14심판때에 두로아 시돈이 너희보다 견디기 쉬우리라

15가버나움아 ...음부에까지 낮아지리라

16너희 말을 듣는 것은 곧 내말을 듣는 것이요 ...나를 저버리는 자는 나 보내신 이를 저버리는 것이니라.“

그렇습니다. 복음이야말로 유일의 구원의 길이자 가장 무서운 심판임을 분명히 깨달아야 하겠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시대가 악할수록 , 그리고 악행을 거듭하는 사람일수록, 더욱 더 사랑의 복음을 전하고 그들을 위해 기도에 힘씀으로써 많은 생명을 영생으로 인도함과 동시에 불법을 행하는 자들에게 더욱 준엄한 하나님의 심판을 선포하는 성도 여러분 되시기 원합니다.심판주 되신 예수여,! 사랑과 평화를 안고 오시는 예수여, 치유와 위로의 예수여! 어서 오시옵소서! 오늘 간절히 기도하며 기다리는 성도 여러분위에 천군천사의 기쁨의 나팔이 울릴 줄 믿습니다.

 

둘째로 예수로 인하여 실족하지 아니하는 자가 복이 있습니다.(23)

22절 말씀은 그리스도가 누구신가? 라는 질문에 대한 답변임과 동시에 우리 자신의 정체성을 가장 확실하게 드러내는 말입니다. 예수께서 요한에게 요한의 제자들이 본 것을 그대로 가서 말하라고 말한 이유가 무엇입니까? 예수님은 그들에게 그렇다 내가 그 메시야다 라고 말하는 대신 요한의 제자들이 눈으로 보는 것 즉 병자들이 온전케 되는 것, 가난한 자들에게 복음이 전파되는 그 모습대로 전하라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그 어떤 말보다 그리스도의 정체성에 대한 확실한 대답은 그 어떠한 말보다 그분의 삶과 사역이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 예수께서 구약의 예언대로 사셨고 행하셨기 때문에 그의 사역과 삶을 보면 예수님의 정체성을 분명하게 알 수 있다는 것입니다. 열매를 보고 나무를 알 수 있듯이 그 사람의 행위나 삶을 보면 그의 정체성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자신의 지위나 재산 학위 훈장 같은 것으로 자신에 대해 증거하려고 해선 안 됩니다.나는 이러한 사람이라고 피알 한다고 해서 높아지거나 인정받거나 존경받게 되는 것 아닙니다. 성도는 성도다운 삶을 살므로 성도로 인정받을 수 있습니다. 교회나 사회에서 인정받기 위해서는 그 직분에 알맞은 모습으로 살고 가장 합당하게 행동을 해야 합니다.[... 내가 내 아버지의 이름으로 행하는 일들이 나를 증거하는 것](요10:25)이라는 예수님 말씀처럼 그 직분에 합당한 모습으로 살 때 내가 누구인가를 확실히 나타낼 수 있는 줄 믿습니다. 자신이 누구인지를 가장 확실하게 증거해 주는 것은 바로 자신의 삶입니다. 23절에서 주님은 “누구든지 나로 인하여 실족지 아니하는 자가 복이 있도다” 합니다. 여기서 실족하다는 말은 ‘돌에 걸려 넘어지다’는 말입니다. 세례요한이 예수님의 메시야인지 아닌지에 대해 왜 흔들렸을까요? 왜 바리새인들과 유대인들은 예수님을 배척하고 십자가에 못 박았습니까? 그것은 자신들이 가지고 있는 그릇된 가치관과 기준으로 그리스도를 보았기 때문입니다. 세례요한은 메시야를 진노와 심판의 기준으로, 그리고 유대인들은 로마로부터 유대를 독립시키고 자유와 번영을 줄 세상적인 왕으로 기대했기 때문입니다. 자기기준과 기대에 맞지 않으면 평가하고 배척한 것입니다.

 

그렇다면 오늘 우리는 어떻습니까? 오늘 우리현대인들은 심판과 구원 같은 미래적인 일엔 관심도 없는 것 아닌지요? 현대인들이 가장 큰 관심을 갖는 것은 돈과 권력 섹스같은 것입니다. 이처럼 육신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에만 관심을 가지고 그런 기준으로 사물을 바라보는 사람들에게 예수 그리스도는 아무런 가치도 없습니다. 오히려 자기들의 행복을 방해하는 걸림돌에 불과하다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평생 가난한 삶, 베풀고 희생하는 삶, 절제하는 삶을 사셨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우리 주님이신 예수님은 그렇게 약하고 무능하고 가난한 분이 아닙니다. 그분은 만물을 창조하셨을 뿐 아니라, 그 안에 있는 만유로부터 찬양을 받으시는 창조주시오, 모든 생명과 부귀, 권세와 영광의 근원이 되는 분이십니다. 그러한 주님께서 그렇게 가난한 삶을 사신 것은 오로지 우리를 부요하게 하시기 위함이었습니다.

고후8:9“ ...은혜를 알거니와 부요하신 이로서 너희를 위하여 가난하게 되심은 그의 가난함으로 말미암아 너희를 부요하게 하려 하심이라.”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성도 여러분들이 진정으로 권세와 영광, 행복을 얻는 복된 길은 이러한 주님을 바로 알고 영접하는 것을 깨닫는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이 그렇게 얻기 원하는 장수 그리고 진정한 부귀와 영광을 얻는 비결은 오직 이 모든 것들의 근원이 되시는 그리스도를 올바로 알고 모셔 들이는 것입니다. 벧전2:7“ 그러므로 믿는 너희에게는 보배이나 믿지 아니하는 자에게는 건축자들의 버린 그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고.” 사막의 신기루와 같이 하늘의 무지개와 같이 잠간 있다가 사라질 헛된 것들에 사로잡혀 그리스도에 걸려 넘어지는 자 되지 말고, 오히려 예수 그리스도를 디딤돌 삼아 영원한 생명과 영광의 나라에 이르는 지혜롭고 복된 성도 여러분 되시길 축원합니다.

 

셋째로 성도는 선지자보다 나은 하나님의 자녀다 (24-28)

24-28절은 세례요한의 삶과 사역에 대한 주님의 평가입니다. 하나님의 사람은 바람에 흔들리는 갈대와 같이 시류에 따라 흔들리지 않습니다. 주님이 세례요한의 사역에 대해 다른 사람들이 폄하하지 않도록 높이 평가해준 것입니다. 세례요한은 감옥에 갇힐 정도로 하나님의 일에 심지가 굳고 강직한 사람입니다. 요한이 예수님에 대해 예수님이 메시야입니까? 라고 묻고 있습니다. 세례요한을 지조 없는 사람이라고 비난하지 못하게 말문을 막은 것입니다. 이제까지 예수님을 선지자라고 증거하더니 이제와서 예수님에게 새삼스럽게 메시야냐고 묻는 이유가 무엇이냐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메시야가 아니면 무엇하러 광야에서 예수님 오실 길을 개척하고 그 고생하고 있었습니까? 예수님이 메시야인 것을 전제로 요한이 광야에서 외쳤고 석청과 메뚜기를 먹으며 산 것이 아니냐는 것입니다. 그것도 몰라서 질문이라고 묻느냐 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세례요한을 메시야의 선구자로써 위상을 확실히 확립해주고 있습니다. 세례요한이 지조 없는 사람이 아니라고 분명히 말합니다. 그는 하나님의 사역을 감당함에 뿌리를 깊게 박고 선 불굴의 굴참나무와 같은 존재라는 것입니다.세례요한은 불의를 보면 참지 못하는 사람입니다. 세례요한은 세상의 유혹과 핍박에도 아랑곳 하지 않고 오직 하나님의 종으로 자신의 사명만 생각하며 충성스럽게 섬겼던 사람입니다. 자기가 기대했던 것과 다른 모습 다른 방법과 다른 형태로 예수님이 사역을 감당하시지만 요한은 일거수 일투족에 일희일비하지 않고 , 예수님이 메시야라는 그의 확신을 재점검하고 그는 주님가실 길을 예비하는데 전력을 투구합니다. 세례요한은 결코 부드러운 옷이나 화려한 옷을 입고 살았던 사람이 아닙니다. 옷 두벌 있는 자는 없는 자에게 나누어 주라합니다. 부드러운 옷 대신 약대털옷을 입었습니다. 화려함 이나 사치는 생각조차 하지 않고 살았습니다. 사람들에게 이제까지 걸어온 삶의 모습을 바꾸라고 말한 것처럼 자신이 세상적인 안락과 사치를 모두 부인했습니다. 다른 사람에게 무엇을 권면하려면 내가 먼저 그렇게 살고 행동해야 합니다. 마3:4“요한은 약대털옷을 입고 허리에 가죽띠를 띠고 음식은 메뚜기와 석청이더라.” 이러한 신앙의 자세는 예수님이 세례요한을 여자가 낳은 자 중 가장 큰 자라고 평가함으로 보상을 해 주십니다. 이 평가가 세례요한에게 얼마나 중요한지 절정에 이른 평가라 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이러한 세례요한의 삶의 방식을 본받아야 합니다. 우리는 세례요한이 그랬듯이 하나님의 말씀을 세상에 전하는 사명을 가진 사람들입니다. 이러한 사명을 효과적으로 감당하려면 우리부터 그 말씀에 걸맞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이웃을 위해 자신을 희생해야 하고, 우리의 소유를 가난한 자들에게 나누어 주어야 하며, 자기 십자가를 지고 주님 뒤를 쫓아야 합니다. 그래야 복음을 듣는 자들이 우리가 전하는 메시지에 수긍합니다. 세례요한과 같이 복음에 걸맞는 삶을 살므로 복음 전도자의 사명을 충실히 감당하는 성도 여러분 되시길 축원합니다.

 

28절 말씀대로 성도가 위대한 것은 그리스도께서 위대하기 때문입니다. 앞에서 예수님은 여자가 낳은 자중에 세례요한보다 큰 이가 없다고 말했습니다. 하나님의 나라에서 가장 작은 자가 세례요한보다 큰 자라면 도대체 신약성도들이 무엇을 했기에 여자가 낳은 자 중에 가장 큰 자인 세례요한 보다 큰 존재라 한 것입니까? 몇일 전에 루간다에 외계인 무덤이 200기가 돌무덤으로 묻혀 있다 합니다. 그들은 키가 213cm 나 되고 머리가 사람보다 크며 입이나 코가 없이 박쥐처럼 텔레파시를 통해 의사를 소통한 것 같으며 약 500년-1400년전에 조성되고 바이러스에 감염되어 죽고 생존자들은 비행접시를 타고 외계로 간 것 같다 합니다. UFO 즉 미확인비행체라는 것에 현혹될 것도 없고 교황청이 외계인이 있을 수 있다고 했다고 해서 동요할 필요 없습니다. 우주에 어떤 생물체가 있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창조한 것은 인간 뿐이며 우주 만물을 사람이 다스리고 통치하라고 하셨다는 것입니다. “여자가 낳은 중에 세례요한 보다 큰 이가 없다, 그러나 신약성도는 그 누구라도 세례요한보다 크다” 이렇게 성경은 말하고 있습니다. 과연 신약 성도들이 세례요한 보다 클 만큼 신앙적으로나 인격적으로나 능력면에서 탁월한 존재들입니까? 아닙니다. 우리는 주님의 말씀에 대해 오해하지 말아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신약성도들이 세례요한보다 크다고 하신 것은 철저히 계시와 구속사적 입장에서 말씀하신 것이지 그 외의 어떤 인간적 기준에서 말한 것이 아닙니다. 이러한 주님의 말씀은 몇 가지 예를 들어 알 수 있습니다. 옛날 왕들은 겨울에 수박을 먹을 수 없었습니다. 요즘 평민들은 자유롭게 먹습니다. 석가나 공자도 지구가 둥글어 자전하고 공전하는 이치를 깨닫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오늘날 초등학생이면 이런 이치쯤 다 압니다. 알렉산더 대왕이 말을 타고 시속 60km 속도로 달려 보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요즘 사람은 웬만하면120km는 달려 보았습니다. 갓난아이도 자동차타고 지금은 달리고 있습니다. 바람같이 질풍노도와 같이 유럽과 중앙아시아에 공포를 조성하며 달렸던 징기스칸도 하늘을 날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특전사 군인들은 비행기를 타고 하늘을 날다가 땅에 떨어져 임무를 수행합니다. 이렇게 볼 때 현대인들은 과거 어느 현자나 영웅보다 더 많은 지식을 가졌고 화려한 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그렇다고 현대인들이 과거의 현자나 영웅들보다 더 큰 권력이나 영광을 차지하는 것은 아닙니다. 현대인들이 이러한 문명의 혜택을 받고 있는 것은 지혜롭고 똑똑해서 잘나서가 아니라 단지 현대에 태어났기 때문입니다. “현대인들이 이렇게 멀리 볼 수 있는 것은 뉴톤이라는 거인의 어깨위에 앉아 있기 때문이다”는 러셀의 말이 아주 적합한 표현입니다. 이처럼 신약성도들이 구약의 누구보다 클 수 있는 것은 우리가 위대해서가 아니라 우리를 구원하신 그리스도께서 위대하시기 때문입니다. 즉 그리스도께서 모든 계시와 구속 사역을 이루어 놓으시고 천국의 길을 열어 놓으셨기에 우리들은 구약의 모든 사람들이 보기를 원했던 지혜와 계시를 받고 하나님의 자녀로써 축복을 누리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내 공로가 아니라 우리 주님 주신 은혜 때문입니다. 구원해 주신 예수님의 공로때문입니다. 우릴 사랑해서 십자가에서 죽으신 예수님 희생으로 우리는 그저 얻은 선물입니다. 우리에게 넘치는 축복을 주시기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희생하셨던 주님을 기억하면서 그분에 대한 감사와 찬송 경배를 드리는 경건한 성도 여러분 되시길 축원합니다.

 

결론

세례요한은 메시야의 길을 예비하고 예수께 세례를 베푼 유일한 자입니다. 그는 구약에서 예언되고 전통으로 관습으로 이어져온 선지자중 가장 큰 자였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세례요한의 사역과 그의 신분을 확실하게 높여 주셨습니다.그러한 세례요한조차 천국에서예수님을 주님으로 모시고 겸손히 구별하여 거룩하게 신앙생활한 신약성도에 비해 작은 자라 한 것입니다.그것은 신약성도는 예수를 나의 주 나의 하나님으로 믿고 고백하는 순간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 천국을 이어받을 상속자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할렐루야, 이 은혜 이 사랑에 감격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기다리고 기다리던 주님 오심을 찬양해야 합니다. 어떻게요?

첫째로 오실 그이를 간절한 마음으로 기다리라.(19-20)

둘째로 예수로 인하여 실족하지 아니하는자가 복이 있다.(23)

셋째로 성도는 선지자보다 나은 하나님의 자녀다 (26)

 

예수님은 천국 문을 열어 놓으시고 믿음으로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하고 믿음으로 신앙 고백하는 자들에게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놀라운 권세를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과 함께 공중어린양의 혼인잔치에 참여하며 예수님과 함께 천년동안 왕 노릇하며 영원토록 하나님과 함께 하실 줄 믿습니다. 모든 영광 홀로 받으시옵소서, 마라나타, 주 예수여 어서 오시옵소서.

 

 

출처: 야곱의 우물가    글쓴이: ♡겨자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