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장 1절 ~ 20절: 이때에 가이사 아구스도가 영을 내려 천하로 다 호적하라 하였으니 이 호적은 구레뇨가 수리아 총독 되었을 때에 첫번 한것이라 모든 사람이 호적하러 각각 고향으로 돌아가매 요셉도 다윗의 집 족속인고로 갈릴리 나사렛 동네에서 유대를 향하여 베들레헴이라 하는 다윗의 동네로 그 정혼한 마리아와 함께 호적하러 올라가니 마리아가 이미 잉태되었더라 거기 있을 그 때에 해산할 날이 차서 맏 아들을 낳아 강보로 싸서 구유에 뉘었으니 이는 사관에 있을 곳이 없음이러라 그 지경에 목자들이 밖에서 밤에 자기 양떼를 지키더니 주의 사자가 곁에 서고 주의 영광이 저희를 두루 비취매 크게 무서워하는지라 천사가 이르되 무서워 말라 보라 내가 온 백성에게 미칠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을 너희에게 전하노라 오늘 날 다윗의 동네에 너희를 위하여 구주가 나셨으니 곧 그리스도 주시니라 너희가 가서 강보에 싸여 구유에 누인 아기를 보리니 이것이 너희에게 표적이니라 하더니 홀연히 허다한 천군이 그 천사와 함께 있어 하나님을 찬송하여 가로되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기뻐하심을 입은 사람들 중에 평화로다 하니라 천사들이 떠나 하늘로 올라가니 목자가 서로 말하되 이제 베들레헴까지 가서 주께서 우리에게 알리신바 이 이루어진 일을 보자 하고 빨리 가서 마리아와 요셉과 구유에 누인 아기를 찾아서 보고 천사가 자기들에게 이 아기에 대하여 말한 것을 고하니 듣는 자가 다 목자의 말하는 일을 기이히 여기되 마리아는 이 모든 말을 마음에 지키어 생각하니라 목자가 자기들에게 이르던 바와 같이 듣고 본 그 모든 것을 인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찬송하며 돌아가니라
TAPE 1 - A면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은 창세 이후로 이 지구 땅 위에서 한번밖에 없는 사건이었습니다. 두번도 없는 사건, 한번밖에 없는 사건. 이 사건이 이 지구 땅 덩어리 한 복판에서 벌어졌습니다. 이 땅의 중앙은 유대 나라가 되겠습니다. 그리고 그 유대 나라 안의 지극히 작은 베들레헴 동네, 베들레헴 동네하고도 아무도 돋보지 않는, 하찮고 보잘 것 없는 짐승의 집 마굿간에서 일어난 사건입니다.
우리가 생각할 때에 마굿간에서 태어난 어린 아이가 어찌 예수님뿐이겠느냐? 마굿간 보다 더 못한 곳에서도, 길거리에서도 태어나는 그런 아이도 있어요. 특히 예를 들어서 전쟁 같은 그런 사건이 있을 경우 더 더욱 그럴 수가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어디서 태어났다 하는 그 장소가 중요한 것이 아니고 이 마굿간에서 태어난 이 어린 아이가 바로 인류의 구주, 메시야라는 점에서 우리는 절대로 그 사건을 그냥 보아 넘길 수가 없는 것입니다. 사건이야 물론 시골 마굿간에서 되어진 일이지만 그 사건이 전 시대, 민족과 나라를, 전 지역을, 전 인류를 초월해서 모두 각자, 개개인에게 해당되는 사건이요, 연관이 되는 사건이요, 하늘과 땅, 임시와 영원, 금생, 내세에 영원히 우리 인간에게 해당이 되는 사건이기 때문에 중요하다 그 말이요.
그런고로 우리는 이 메시야 탄생, 예수 탄생의 이 성경 구절을 12월 25일 크리스마스 때만 써먹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절기 때에 써먹으라고 이 성경 구절이 있는게 아니라 그 말이요. 계시적, 신앙 사상적, 영적 사상적인 면으로 보면 이 사건은 누구에게든지, 12월 25일뿐만 아니고 봄, 여름, 가을, 겨울, 언제든지 자기에게 해당이 되고 있다 하는 것을 우리는 깨달을 수가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만약의 경우 오늘 날까지 이 예수 탄생의 12월 25일, 이 절기적인 분위기에 휩싸여서 생각을 했다면 그거는 회개를 해야 합니다. 또 예수 탄생의 이 성경 구절을 절기적인 무슨 생일, 절기적인 그런 것으로 해석을 해 나간다면, 그런 정신으로, 그런 분위기로 우리 기독자들이 산다면 이거는 예수님 탄생하고는 아무런 상관이 없습니다. 전혀 상관없이 예수 믿는 사람입니다. 그렇게 되면 오늘 이 말씀을 통해 우리에게 준 하나님의 뜻을 알 수가 없고, 그냥 날만 지키고 마는 겁니다. 어리석지요.
가이사 아구스도는 천하를 호령하는 세상에서 제일 권세가 있고, 권력이 있고, 명예가 있고, 영광이 있고, 이 세상에서 제일 높은 왕, 또는 사람을 말하는 겁니다. 물론 그 아구스도의 마음을 움직이는, 마음이 움직여지는 그 감화성을 본다고 한다면 그것은 성령의 감화가 아니고 악령의 감화입니다. 그 배후에 사단이 앉아 있습니다. 그러니까 사단이 이 세상에서 최고의 높은 그 왕을 붙잡고 운전을 한단 말입니다.
‘내가 이 세상에서 최고가 되어야지!’ 하는 그런 마음을 신자든, 불신자든, 종교적이든, 정치적이든, 예술적이든, 과학적이든 그 마음을 품고 살았다면 누구든지 그 사람의 주전자는 사단입니다. 예를 들어서 ‘세계 제일가는 부흥 강사가 되어야지!’ 이거는? 안 믿는 사람은 이런 생각을 못하지! 믿는 사람이 이제 그런 생각을 하는데 그거는 성령의 감화요, 악령의 감화요? 예? 그건 악령의 감화, 사단이 주장하는 사람들! 그러나 ‘내가 천국에서 제일 큰 자가 되어야지!’ 이거는? 성령의 감화! 그렇지요. ‘천국의 큰 자가 되어야지!’ 하는 그런 감화는 악령이 못 가져요. 성령님의 감화라야 그런 생각을 가져요.
제자들이 예수님에게 물었지요? ‘천국에서 누가 큰 자니이까’ 그러니까? 천국에서 큰 자를 또 알아야지! 예? 천국에서 큰 자가 되는 사람은 이 세상에서 어떤 사람이지요? ‘내노라!’ 하는 그 사람입니까? 예수님의 정신을 가지고 사는 자들이지요. 이룰 구원, 입을 구원, 건설 구원을 잘 이루어 가는, 예수님의 그 마음을 잘 닮아 가는 그 사람이 천국에서 큰 자야! 예수님은 그런 사람을 원하고 있어! 예, 그런 사람이 되라는 거지요.
그런데들 보면 성경을 보면서, 뭐 하기야 성경이 안 보이니까 그런거지! 까만 글자는 보이지만 하나님의 마음이 안 보이니까 ‘내가 세상에서 제 1인 자가 돼야지!’ 그 참... 아이고 참말로! ‘내가 세상에서 제 1인 자가 돼야지!’ 그러면, 예수님이 ‘그래 그래, 내 마음도 그렇다. 참 잘한다’ 그럴까요? 제자들이 예수님이 계시는데 저희들끼리 뭐라고 하며 싸웠지요? 예루살렘에 올라가면 예수님이 왕이 될 터인데 하나는 오른쪽, 하나는 왼쪽, 누구는 외무 대신하고, 누구는 내무 대신하고 뭐 총리 대신하고. 참!
이 세상에서도 우리 기독자들이 참 도둑의 심보를 가지고 믿는 사람이 많아요. 그런 도둑의 심보를 가지고 있는 사람은 조금밖에 없어요? 다 참 훌륭한 마음들을 가지고 있어요? 참!
이 가이사 아구스도를 세상 모든 사람들은 다 부러워하고 돋보고 있습니다. 돋보고 부러워하는 것뿐만이 아니고 소원을 하고, 목적을 하고 살아갑니다. ‘나도 가이사 아구스도가 돼야지, 나도 어느 부분에, 어느 계열에, 어느 파에 가이사 아구스도가 돼야지!’ 그래서 보면 장(長)자리 서로 앉으려고 그 법석이지요. 그 장자리 모자 왜 둘러써요? 아주 왕관 같은 것, 이런 것 쓰는 것은? ‘나는 세상에서 제일 꼬래비요?’ ‘제 1인 자요’ 하는 그 표시거든요.
저- 뭐야, 이 때쯤이면 의례히 그 멋있는 발언을 하지. 종교계에서 나와 가지고 뭐 ‘세상에서 싸우지 않고 다 평화롭게 살기를 원한다’ 하고 메시지를 탁- 내놓지? 아니, 그 소리 아무나 못하는 거요? 참, 여러분들은 그 소리 못하지? 유명한 그 사람들만 그 소리를 딱 하기 때문에 텔레비로, 전파로 그렇게 날리는 거지? 그런 말을 목사들이 나가서 한다고 하면 하늘 나라에서 하나님이 그 소리를 턱 듣고 ‘그래 네 말이 맞다. 세상에서 한 사람도 그 소리하는 사람이 없더니 네가 딱 그 말을 하니까 정말 참 내가 네 소원대로 세상을 그렇게 평화롭게 만들어 주마!’ 그렇습니까? 아니 누구든지 할 수 있는 얘기, 그거 뭐 옛날에도 그런 말한 사람이 많이 있고, 지금도 뭐 안 믿는 사람도 다 평화를 원하고, 믿는 사람도 평화를 원하고, 술집에서도 ‘우리 싸우지 말자’고 대포 한잔 놓고 악수도 하고 그러는데 아, 그 소리를 누구는 못해서!
여러분들, 테레비, 라디오에 그런 말 한마디하는데 전기 값이 얼만지 알아요? 예? 광고로 얼굴 한번 탁 비춰 주는데도 돈 받습니까? 비춰준다고 돈을 주기도 하고, 억대도 받고. 그 만큼 전기 값이 비싸다는 것 아니요? 그 전기 값은 누가 물어? 여러분, 그 테레비 보는 값이 얼마야? 삼천원? 그게 그거에요. 그런 유명하다는 사람이 나아가서 마이크 턱- 앞에 놓고 ‘내가 한 마디 하겠다’ 그러면 ‘아 그러십시요’ 그러겠지? 아닌 말로 여러분들이 거기 나가 가지고 ‘내가 한 마디 하겠다’ 그러면 ‘당신 어디서 왔어? 들어가서 말하거라’ 하겠어요? 그렇다고 목사들이 그렇게 말하는 내용들이 성경이 있는 뜻인 줄 알아요? 기가 막힐 노릇이지!
‘천하로 다 호적 하라’ - 그 때 당시로서 로마는 굉장히 강대국이거든요. 세계 제 1의 강대국입니다. 세계 제 1의 강대국의 황제가 됐으니 굉장한 거지요. 세계에서 제 1인자 아닙니까? 그러니 누가 그 명령을 거역할 수 있습니까? 땅에다 발을 밟고 사는 사람은 그 명령을 거역할 수가 없습니다. 거역했다가는 뭐 그 목이 가만있을 수 있나요? 어림도 없어요, 날아가 버립니다. 그러니까 겁이 나서라기 보다도 각자 자기 속에 가이사 아구스도를 돋보고, 부러워하고, 소원하고, 목적하고, 그 사람이 되기를 바라는 그 감화성이 있기 때문에, 말하자면 자기 속이 자기의 소(小) 왕국의 가이사 아구스도가 되어 있거든! 그러니까 소원해서, 자원해서 ‘내가 당신의 지배를 받겠습니다, 당신이 날 통치해 주십시요’ 하는 마음으로 각기 고향 앞으로 가서 호적을 하는 겁니다.
왜 호적을 하라고 하느냐? 호적을 하게 되면 인원 수, 사람의 수를 파악하게 되고, 사람의 수를 알게 되면 세금을 부과하게 됩니다. 거두어들이기에 좋지요. 당시에 육적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방 나라, 로마라는 강대국에 정복되어 속국이 되어 가지고 압제를 받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의 모든 사람들이 내는 세금은, 피와 땀을 흘려서 노력을 한 그 모든 수입금은 거의 다 세금으로 거두어지고, 거두어진 이 세금 전부는 가이사 아구스도에게 들어가게 되고, 가이사 아구스도의 세상 누림성, 세상의 행복성, 가이사 아구스도의 명예와 영광을 위해서 쓰이게 되는 겁니다.
만약의 경우 세금을 안내고 명령 불복종을 하게 되면 그 세상에서는 살아가기가 힘든 겁니다. 또 세상에서 부귀 영광으로, 세상 제 1인 자로 살고 싶은 사람은 가이사 아구스도를 등에 업어야 하고, 가이사 아구스도에게 잘 보여야 하고, 그래서 그 명령에 단 마음으로 움직이게 되는 겁니다. 오늘 날 거의가 가이사 아구스도를 등에 업었어요. 정치계는 정치계대로, 예술계는 예술계대로, 문화, 과학계는 문화, 과학계대로. 안 믿는 사람이야 우리는 말할 것 없어요. 그건 아예 가이사 아구스도의 그런 마음을 품고 있는 거니까! ‘이 세상에서 행복하게, 평화롭게, 멋있게 제 1인 자로 잘 살아야지, 누리고, 먹고, 마시고, 시집가고, 장가가고, 잘 살아야지!’ 그 소원 목적을 안 품은 사람이 어디 있어요. 다리 밑의 거지도 다 그 소원, 목적을 품고 사는데!
그러니까 안 믿는 사람은 우리가 여기서 논할 필요가 없는 것이고, 문제는 예수 믿는 사람이다 그 말이요. 이 기독교 종교계가 이 가이사 아구스도의 정신을 품고 있고, 예수 믿는 사람하고도 또 그 뭐요, 그 목사들이 그런 소원, 목적을 품는 사람이 제일 많아요, 제일 많아! 평신도들은 이거 뭐 논할 것도 없어! 가이사 아구스도가 되고 싶은 목사가 수두룩해요. 영적, 신앙 사상적으로 예수 정신 가지고 보면 수두룩해! 신앙 정신적으로 보면 훤하게 보이는데 뭐, 왜 안보여!
그런 사람은 성경 구절을 읽어 놓고는 뭘 전하는지 아십니까? 까만 글씨만 알고 말아버릴 바에야 뭐 하려고 교회 나와! 뭐 하러 하나님 종 밑에서 배워, 까만 것만 알고, 역사만 알 것 같으면 집에서 성경 사다놓고 읽으면 되지! ‘이 속에(성경 속에) 하나님께서 나에게 주신 깊은 뜻이 뭐냐? 왜 이 사건을 나에게 동원시켜서 나로 하여금 깨닫게 하는 것이냐?’ 이걸 봐야 될 것 아니요? 발굴해야 될 것 아니냐 그 말이요.
평소에는 자기의 소원과 목적을 사람들에게 속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가이사 아구스도의 명령이, 이 세상 명령이 사건적으로 일어나면, 사건적으로 오면 자기의 출생지를 찾아가게 되는 겁니다, 알겠어요? 평소 때는 다 여러분들, 뭐 시간 있고, 밥 잘 먹고, 차있고 그러니 교회 나오는 것이 그렇게 어렵지 않지요? 다시 말하면 꼭 교회 나온다 라기 보다도 예수 믿기가 어렵지 않다 그 말이요. 그러나 자기 개인적으로 사건이 닥친다든지, 사회적으로, 국가적으로 사건이 탁 부딪혀 놓으면 - 지금 제가 말씀드리는 것은 교회 나온다, 안 나온다 이걸 말 하는게 아니에요 - 그 사람의 마음 속에 그 치우치는 성질이 있어요. 신앙적으로 치우치느냐, 세상적으로 치우치느냐, 믿음으로 살려고 하느냐? 그게 나타나게 되는 겁니다. 그러니까 평소 때는 잘 몰라요. 사건이 탁 부딪혀 봐야 자기의 모습이 드러나는 겁니다. 알겠어요?
작은 사건은 작은 사건대로, 큰 사건은 큰 사건대로. 작은 사건이 왔을 때에 믿음을 좀 가진 사람은 그 사건을 이겨요. 그러나 믿음을 가지지 못한 사람은 지극히 작은 사건인데도 그걸 하나 못 이겨내, 그걸 하나 못 이겨내! 그러니까 믿음을 가진 사람에게는 그 사람이 당하는 그 사건이 사건이 아니란 말이요. 그런데 믿음이 약하니까 그 사람에게는 사건이야! 이게 신앙 실력이지. 쉽게 예를 들면 그렇다 그 말이요.
하나의 예를 든다면 믿음이 좋은 사람은 주일 날 손님이 왔다 그랬을 때에 그 손님을 교회로 모시고 오던지, 아니면 ‘잠깐 기다리라, 내가 교회 가서 예배드리고 오마’ 해서 기다리게 한다든지, 아니면 어쨌든 주일 지키는 것을 철두 철미하는 사람이 있어요. 기본적이지만 그렇다 그 말이요. 그런데 할 일없고, 심심하고 그러면 교회에 나와. 그래서 그 사람에게 ‘교회에 왜 안 나오느냐?’ 그러면 ‘집에 손님이 왔다 그러면서 난리 법석을 떠는 사람이 있어요. 손님인지, 발님인지 벌벌 떨어요, 하나님은 뒷전이야! 그러니까 평소 때는 잘 몰라요. 그렇다고 교회 안 온다고 해서 그 사람이 예수 안 믿는 건 아니에요. 그런데 그 부분적, 사건적인 면에서 ‘예수는 잠깐 저 뒷전에 가서 있으십시요’ 하는 식이란 말이요. 그거 예수 잘 믿는 거지?
자기의 출생, 출처를 찾아가게 돼! 이 말의 의미가 뭔고 하니 평소 때는 다 예수 잘 믿는 것같이 보이지요. 그러나 사건이 오면 자기 속의 신앙의 뿌럭지가 무엇이냐 하는 대로 그걸 찾아가게 돼요. 자기가 만들어진 그대로 들어간단 말이요, 나타나게 된단 말이요. 그러니까 속이지를 못해! ‘너는 이런 사람이다’ 하고 다른 사람이 와서 그 사람을 그렇게 끄집어 내는게 아니고 자기가 자기 스스로를 ‘나는 이런 사람이요’ 하고 나타내게 된다 그 말이요. 그러니까 사건이 오면 자기가 다른 사람을 속일 수도 없고, 자기가 자기를 속일 수도 없어요, 알겠어요? 우리가 그런 이치를 알고 믿자 그 말이요. 아는 사람과 모르는 사람과는 천지 차이에요, 땅과 하늘이에요.
이제 가이사 아구스도가 명령을 내려서 ‘천하로 다 호적을 하라’고 그러니까 사람들이 다 고향을 찾아서 가는 거지요. 그러니까 ‘호적을 하라’ 하는 사건이 왔단 말이요. 그 명령이 탁- 떨어지니까 그 명령에 의해서 그 가이사 아구스도를 좋게 보고, 부러워하고, 돋보고, 소원하고 목적을 하는 모든 사람들은 그 명령에 순종을 하게 되는 거지요. 지금 정신적으로 말씀을 드리는 겁니다.
그러면 지금 현재는 가이사 아구스도의 명령이 내려졌어요? 명령이 내려졌어요, 안 내려졌어요? 그 명령 소리는 어디 마이크로, 동네 마이크로 들리는 명령이요? 신앙적으로 들려 오지요. 그 명령은 신앙 사상적, 정신적 흐름이기 때문에 성령의 영감이 아니면 그 음성을 못 들어요. 그걸 알아야 돼요.
우리가 지금 요한 계시록을 보고 있지요?(주일 예배 때) ‘천사가 큰 소리로 외치니’ 큰 소리로 외친다고 하는 것은 ‘중요하다, 너에게 아주 중요하다’는 뜻이지요. 어린 아이가 우는 소리는 그 아이 엄마에게는 큰 소리이지요? 그렇지 않아요? 아, 그러니까 밥하다 말고도 얼른 우는 아이에게 가고, 아이를 방에 재워놓고 동네 사람과 집밖에서 얘기하다가도 자기 아이가 우는 소리가 나면 그게 크게 들리기 때문에, 중요하게 들리기 때문에 얼른 달려가잖아요? 그런 것처럼 이 요한 계시록에 ‘나팔 소리가 크다, 천사가 큰 음성으로 외쳤다’ 하는 ‘크다’는 것은 뭐요? 큰 음성이라고 하는 것은 육의 소리요, 영의 소리요?
여러분들은 예수 믿으면서 어느 면을 더 중요시 여기고, 크게 여깁니까? 그 명령이, 그게 중요하다 하는 쪽으로 자기 마음은 기울어지기 마련이에요. ‘이 세상에서 잘 먹고, 잘 살자, 예수여 복 주시옵소서’ 하는 것을 중요하게 여기는 사람은 그리로 가는 거고, ‘하나님 앞에 이런 이런 사람이 돼야 한다’ 하는 그 소리를 중요하게, 크게 여기는 사람은 그리로 마음이 쓰여지고. 속일 수 있습니까? 못 속여요, 못 속이는 겁니다.
성경의 이치만 갖다대면 금방 사람이 분별이 되지요. 옛 사람과 새 사람이 분별이 딱돼 버려요. 그리고 어떤 목적을 두고 그 음성을 외치느냐, 가르치느냐, 찾아가느냐에 따라서 거짓 목자도 되고, 거짓 선지자도 되고. 거짓 목자, 적 그리스도, 이단, 또 뭐가 있어? 사이비! 그래 몇 가지가 있어도 이 전부는 목적은 하나! 알겠어요? 목적은 하나, 세상 목적! 적 그리스도니, 거짓 그리스도니 하는 것은 부분적 면에서 이런, 저런 표현을 하는 겁니다, 알겠어요?
자- 귀신들의 장난, 죽 올라가면 누가 왕초로 있지요? 사단! 사단, 마귀. 사단, 마귀가 하는 짓이 부분적으로 그렇게 그렇게 나오는 거라 그 말이요. 다 한 통속이라 그 말이요, 알겠어요? 그런데 이단이라 그러면 어디 가서 찾으려고 그러지? 간판 없고, 교회 단체에 소속이 안됐고, 그런데서 찾으려고 그러지요? 눈도 삐었지! 지금 이 말 구유도 교회요, 교회! 알겠어요? 교회 성격을 띠고 있어! 말씀이 계시고, 요셉과 마리아가 성도에요. 그러나 거기 십자가가 붙었어요? 그 십자가에서 반짝 불이 번쩍번쩍하지? 요셉과 마리아가 무슨 돈이 있어서 반짝 불 붙이고 하겠어요. 짐승 똥 냄새가 풀풀 나고 있지요.
하여튼 말세가 되면, 마지막 그 날이 되면 일반적 이치로 따져서도 훤히 알 수 있는 건데도 교회에서 모르게 되는 겁니다. 이것이 이제 둘러 쌓이는 건데, 망할 자는 그래요. 정신이 멀쩡한 사람은 길을 걸어가도 신호등을 잘 쳐다보고 가지요? 자기가 죽으려고 그러면 이건 뭐요, 신호등이고, 뭐고 무시하고 가는 거지! 딴 사람도 빤히 아는 거야! 아는데 그렇게 씌었다 그 말이요. 오늘 날 기독교도 마찬가지! 너무나 일반적으로 빤한 이치인데도 불구하고 그래요. 망하려면 그래요, 그게 망할 징조지요.
조금 있으면 오는데 1월 1일이 뭐요? 신정? 그러면 음력은? 구정? 설 날? 이 때에 고향에 잘 찾아가지요. 고향 가는 사람을 볼 것 같으면 아기를 둘러 업고, 걸리고, 봇다리를 이고, 지고. 요새는 자가용이 있으니까 그게 필요 없지. 어쨌든 고향 들어갈 때에 마을의 가게에서 사든, 어쨌든 이고, 지고, 둘러 업고, 걸리고 갈 것 아니요? 그래 가는 사람들 보면 참 서로 주거니, 받거니 얘기도 하며, 또 어떤 사람은 사업에 실패를 해 가지고 참 혼자 고독하게 가는 사람도 있고, 어떤 사람은 사업에 성공해서 고향 찾아가는 사람도 있고, 거지 신세로, 불구자로 가는 사람도 있고, 지금은 마차는 없지만 자가용들 타고 가고, 오토바이로 가고, 옷 잘 입고 가는 사람, 울면서 가는 사람, 웃으면서 가는 사람, 천천히 가는 사람, 빨리 빨리 가는 사람, 고향 가는 사람이 천태 만상이다.
여러분들, 이것을 쭉 늘어뜨려 가지고 출생에서 부터 무덤에 이르기까지 이 세상 사는 사람들의 삶을 한번 가만히 봐요. 늘어뜨리면 그게 보여지는 겁니다. 그러니까 고향 찾아가는 사람들, 이걸 축소시켜서 보니까 명절이다 그렇게 보이는 거지만 그걸 쭉- 늘어뜨려서 가만 들여다보면 인생살이의 축소판이야! 알겠어요?
요셉도 다윗의 집 족속 인고로 갈릴리 나사렛에서 고향을 찾아서 베들레헴으로 올라갑니다. 자기 출처를 찾아가는 거지요. 언제든지 그래요. 우리 예수 믿는 사람이 자신이 가진 그 신앙 노선을 절대로 속일 수가 없습니다. 그 신앙의 노선을 가는 것을 보고 ‘아, 이 사람은 다윗의 집 사람이구나, 아, 이 사람은 여로보암의 후손들이구나, 아브라함의 후손이구나, 에서의 후손이구나’ 하고 그 신앙의 그 노선을 알 수가 있습니다.
우리가 구약 성경에 그 왕통을 가만 들여다보면 ‘어느 왕은 하나님 앞에 악하더라. 여로보암의 길로 가더라’ 있지요? 여로보암의 신앙 사상 - 금송아지 만들어 놓고, 어디다가 금송아지 만들었지요? 단과 벧엘에 다가 금송아지 만들어 놓고. 그게 여로보암의 길이거든요, 신앙 사상이란 말이요. 그러면 그 신앙 사상을 어떻게 알 수 있느냐? 기도의 간구성을 들어보면 그 사람이 어느 신앙의 바탕으로 걸어가고 있구나, 믿고 가고 있구나 하는 이걸 알아요, 속일 수 없어요. 절대로 못 속입니다, 안 그렇다가 아니요. 못 속여요.
TAPE 1 - B면
‘어느 교회 신앙 성도는, 어느 교회 교인은 어느 길로 가고 있구나, 어느 교회 목사님은 어느 길로 지금 가고 있구나’ 이걸 볼 줄 알아야 합니다. 우리 기독자라면 ‘내가 가고 있는 이 신앙의 노선이 지금 어느 길의 노선이냐, 바로 타고 가는 거냐?’ 그걸 볼 줄 모르면 안 돼요. 무조건 ‘예수 믿으면 된다’ 그게 아니요. 천만에요, 천만에!
시대가 발달할 수록, 또 마지막 그 날이 가까울 수록 하나님은 우리에게 신앙적으로 자꾸 깨우쳐 주려고 이 성경 말씀으로 못 깨달으니까 사건을 들어 일으키는데 체육계, 과학계, 문화계. 정치계들을 통해서 사건을 자꾸 만들어요. 우리는 얼른 얼른 깨달을 줄 알아야 돼요. 그걸 탁 쳐다보고 ‘옳지, 성경의 영적인 뜻을 우리에게 가르쳐 주시려고 그러시는구나!’ 하고 성경에서 확인하고 바로 살아야지, 그렇지 않겠어요? 우리가 그걸 볼 줄 알아야 돼요.
일반 세상 사람들은 일반 세상적으로 세상 사는 데에 세상 이치를 따지고 살아가는데 머리를 써야 되니까 그 세상적 면으로 영리해요. 그런데 우리 예수 믿는 사람들은 예수 믿으면서 이 성경 쪽으로 머리가 영리하고 하나님의 마음을 알고 이래야 되겠는데 이건 뭔고 하니 하나님의 마음도 모르고, 하나님을 아버지라 그러면서 하나님 아버지가 뭘 좋아하는지 그걸 몰라요, 전혀 몰라요. 성경에 대해서도 모르고, 세상살이에 복잡하니까 그 복잡한 것을 예수 이름 가지고 하나님 앞에 매달리니 세상적으로 연구한 것도 없어요. 그러니까 세상 쪽으로도 미련퉁이고, 예수 믿는 쪽, 성경 쪽에도 미련퉁이고 그래요. 머리가 석두요 석두!
우리 하나님은 그런걸 원하지 않아요. 세상은 세상 쪽으로 유명해 지려고 얼마나 애를 씁니까? 그렇지 않아요? 밤에 잠도 안 자며 연구하고, 세상 쪽으로 개발을 하고 그러지 않나요? 그런데 우리 예수 믿는 사람들은 뭐요, 세상 살기 불편한 것을 하나님에게 가져와서 복을 달라고 하는 식이야. 그러니 성경을 깨달을 수가 있나? 그러면 그런 교회에서 세상 가르쳐 줍니까? 세상 공부 가르쳐 줘요? 안된단 말이요. 그러면 무슨 소리냐? 예수 안 믿는 사람도 훤히 아는 것, ‘착하게 살아라, 부지런하게 살아라, 네 소원이 뭐냐? 네 힘으로 안되는 것은 하나님께 구해라. 그러면 하나님이 들어줄 것이다. 입이 찢어지도록 크게 벌려 봐라, 외쳐 봐라, 네 입에 채워줄 것이다’ 이런 식이야! 가래 떡을 채워줄는지, 찰떡을 채워줄는지 모르지만 우리 하나님은 그런 하나님 아니요.
그러니 전 그렇게 보입니다. 다 그럴까만은 참 이거는 일반 사람들보다도 아주 멍텅구리야! 그러니까 사람이 쓸모가 없어, 세상적으로도 쓸모가 없고, 예수 믿는 교회 쪽으로도 쓸모가 없어! 예수님을 수 십년 믿었다 그러면 아무리 몰라도 들은 것은 있을게 아니요? 귓문이 밝아지고, 귓문이 밝아져서 듣는 면에 분별이 되고, 이래야 되겠는데 그게 없어, 전혀 없어요. 그러면서 무슨 이상한 짓이 나오면 그냥 그리로 우르르- 몰려가고. 거 뭐하는 짓들이야! 그게 예수 믿는 거요? 일반적으로 따져봐도 이거는 틀려먹었고, 성경을 놓고 따져봐도 이건 틀려먹었어요. 그러니까 제가 참 노골적으로 말하면 쓰레기다, 쓸모 없는 쓰레기들이다.
요한 계시록에 왜 자꾸 사건을 일으키는지 아십니까? 쓰레기 치우려고 그래요. 안 믿는 사람은 우리가 논할 필요가 없어요. 그건 뭐 예수 안 믿으니까 하나님이 쓰레기로 취급하던, 그건 상관할 것 없어요. 문제는 예수 믿는 내가 그 말이요, 내가! 믿어도 좀 똑똑하게 믿어야 되지 않겠어요? 성경을 뭐 하려고 들고 다녀요. 그렇지 않아요? 들어서 깨닫던, 읽어서 깨닫던 성경을 깨달아야지! 깨달아 가지고 자기가 주님처럼 그 마음이, 속성이, 정신이, 소원 목적이 닮아져야 되지 않겠어요?
예수님이 집 한 간도 없었는데 하나님보고 ‘내 집 주시요’ 그런 기도한 것 있습니까? 그런 기도 있었나 눈을 닦고 봐요. 하나님 아들이기 때문에 그래요? 하나님이 사람되신 것은 ‘나도 사람이다, 너도 사람이다. 나는 사람됐을 때에 이렇게 살았다. 너도 사람이니 이렇게 살아라’ 그 말이요. 그런데 그 예수님의 소원, 목적하고는 전혀 달라. 전혀 상관이 없어요, 상관없이 예수 믿어! 사람 못된 것 중에 예수 믿는 사람이 제일 못 됐어. 어려우면 하나님 아버지보고 ‘뭐 해주십시요’ 해주기는 뭘 해줘, 두들겨 패는 거지! 사건을 갖고 와서 두들겨 패는 거지, 패버려야 돼!
우리가 이치적으로 생각을 해 봐요. 이스라엘 백성이 출애굽해 가지고 가나안 땅으로 가면서 광야에서 40년 동안 뺑뺑이를 돌릴 때에 멀리 있는 애굽 사람을 내리쳤어요, 가나안으로 가는 사람을 내리쳤어요? 가나안 가는 사람을 내리쳤지요. 애굽 사람은 다 평화롭게 살고 그래요. 그러나 가나안으로 가는 사람은 평화롭게 살고 그래요? 가나안으로 가는 사람들, 집도 없고, 절도 없고, 뭐가 있어요. 농사를 지을 수가 있나, 40년 동안 막 두들겨 부수고, 지진이 나게 해서 막 빠져 죽게 하고, 불뱀을 보내고. 이런 것처럼 맛을 봐도 단단히 봐야 돼요. 그게 말세 현상적으로 일어나는 거에요.
사건이 오면 신앙 있는 사람은 이겨나가서, 승리를 해서 개가를 올려 나가지만 이 성경도 모르고, 바로 살려고도 하지 않고, 세상 탓만하고, 세상 달라고 한 사람들은 세상적으로 고통을 주는 거지요. 그게 자기에게 직접 반영이 돼 가지고 고통이 되는 거에요.
여러분들, 현재적으로 예수 믿으면서 사건이 왔던, 편안했던, 자기 속의 고통이 세상, 육적인 고통이 슬며시 파고들어 오거들랑 그게 자기의 신앙인지, 아닌지 가름할 수 있는 그런 것임을 느낄 줄 알아야 합니다. 느낄 줄 알아야 돼요, 자기가 자기를 심사해야지요. 언제든지 그래요. 지금도 물론 사건이 일어났을 때에 ‘내가 이래선 안 되겠다, 내가 하나님 앞에 바로 서야지!’ 하는게 있어야지요.
그래서 저는 종종 여러분들에게 그런 말을 하지요. 가정에 사건적으로 어떤 일이 일어났을 때에 사람이 마음 속에서 반응이 생기지요? 그런데 그 때 기도원을 찾아가는 사람이 있어. 찾아가서 어떻게 하려는지 모르겠어! 그 사건을 누가 줬지요? 하나님이, 주님이! 하나님의 허락 하에서 됐다면, 그러면 그 사건을 준 것은 하나님이 나에게 요구성이 있는 거라. ‘너 고치라’ 그 말인지, ‘너 때를 빼라’ 그 말인지, 그걸 알려고 하고, ‘이 사건을 무슨 뜻으로 주셨습니까?’ 하고 성경으로 들어가고, 깨달으려고 그러고, 이렇게 들어가야지요.
자기 마음의 기울어짐이 어느 쪽으로 치우쳐져 있는지 그것도 알아야 되고, 회개 할건 회개하고, 그래야 되겠는데. 가정적으로 사건이 어려워질 때 기도원에 왜 가는고 하니 기도원에 가서 ‘하나님 이 사건 좀 해결해 주십시요’로 들어가는 거라! 이게 악령 받아 나와요. 악령 응답 받고 나와요. 벌써 이건 아주 정신 자체부터가 틀렸어!
전 그러지요. ‘그러지 말고 좋은 말씀 집회 있으면 그리로 가라’ 거기 가면 말씀 속에서 해결이 다 있는 거에요. 어떤 성경을 보던지, 어떤 설교를 하던지 그건 다 나와요. 그 이치는 다 나와요. 평소에는 예수를 개떡같이 믿어 놓고는 사건이 부딪히니까 무슨 신앙자인 것처럼 찾아가긴 뭘 찾아가요! 누굴 찾아가야 만이 응답이 있어요? 자기 집에서 기도하면 응답이 없나? 자기 집에서 성경 보면 하나님이 만나자고 안하나? 그러니까 그게 미신이요, 미신적 신앙 사상이야! 이방 종교관을 가지고 있어! 그거 예수 정신이 아니에요. 믿는 사람 정신이 그렇게 돌아가면 안 돼. 그거 신사적이 못 되고, 그 사람은 물욕적이고, 신앙적으로 나약하고, 그러면서도 세상적으로는 똑똑하다고 그러지! 남에게 안 지려고 그러지!
5절 ~ 7절: 예수님이 마굿간에서 왜 태어났지요? 마굿간에서 왜 태어났어? 사관에 있을 곳이 없어서! 여관에 방이 없어서! 예수님이 너무 너무 겸손해서 방이 있는데도 불구하고 ‘난 겸손해서 마굿간에서 태어난다. 메시야는 마굿간에서 태어난다더라. 그 옛날에 선지자가 그 말을 했다. 그러니 방이 있어도 마굿간에서 태어나야 된다’ 하고서 마굿간에서 태어난 거지요? 너무 너무 겸손하셔서? 마굿간에서 태어난게 겸손해서 거기서 태어난 거요? 뭐 하기야 어떻게 보면 겸손도 하지! 예수님이 어린 아기지만 만능의 능력을 짊어지고 나왔으니까 어린 아기가 말은 못한다 하더라도 뭐 큰 여관 방 아무 곳에나 들어가서 사람들을 다 내어쫓으면 쫓기는 거지 뭘, 안 그래요?
예수님께서 겸손을 강조하려고 여관 방이 남아 돌아가는데도 마굿간에서 태어나신 것은 아니지요? 그렇지요? 성경에 분명히 ‘사관에 있을 곳이 없었다’ 무슨 말이요? 사람들이 여관 방을 다 차지했다 그 말이지요. 사람만 차지했나? 고향 가느라고 봇다리 봇다리, 다 침대 위로, 밑으로 집어넣고, 사람이 앉고 설 데도 없이 가득 가득 찼고, 이유야 어떻던 방안이 다 꽉꽉 찼어!
요셉이 아무리 방을 얻으려 해도 얻지 못했다는 증거지. 또 그 뭐요, 마리아는 배가 불러서... 참 그 장면을 생각해 봐요. 요셉이 남편으로서 얼마나 애가 탔겠느냐? 아내는 배가 아프다고 그래 싸고. 마리아도 배가 아팠을까? 예? 안 아팠지? 예수님을 배었기 때문에 배가 간질 간질 했지! 그래서 웃었겠지? 나을 때도 고생하지 않고, 안 그래요? 아니, 그래도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인데 그 몸에서 태어날 때 감히 하나님의 아들이, 말하자면 하나님이 인간에게 어떻게 고통을 주고 태어날 수 있겠어! 그러니까 눈 깜짝할 사이에 요술, 마술처럼 싹 태어났겠지! 그래요, 안 그래요? 예, 인간의 고통을 다 당했단 말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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