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장 1절 ~ 20절: 이때에 가이사 아구스도가 영을 내려 천하로 다 호적 하라 하였으니 이 호적은 구레뇨가 수리아 총독 되었을 때에 첫번 한것이라 모든 사람이 호적하러 각각 고향으로 돌아가매 요셉도 다윗의 집 족속인고로 갈릴리 나사렛 동네에서 유대를 향하여 베들레헴이라 하는 다윗의 동네로 그 정혼한 마리아와 함께 호적하러 올라가니 마리아가 이미 잉태되었더라 거기 있을 그 때에 해산할 날이 차서 맏 아들을 낳아 강보로 싸서 구유에 뉘었으니 이는 사관에 있을 곳이 없음이러라 그 지경에 목자들이 밖에서 밤에 자기 양떼를 지키더니 주의 사자가 곁에 서고 주의 영광이 저희를 두루 비취매 크게 무서워하는지라 천사가 이르되 무서워 말라 보라 내가 온 백성에게 미칠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을 너희에게 전하노라 오늘 날 다윗의 동네에 너희를 위하여 구주가 나셨으니 곧 그리스도 주시니라 너희가 가서 강보에 싸여 구유에 누인 아기를 보리니 이것이 너희에게 표적이니라 하더니 홀연히 허다한 천군이 그 천사와 함께 있어 하나님을 찬송하여 가로되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기뻐하심을 입은 사람들 중에 평화로다 하니라 천사들이 떠나 하늘로 올라가니 목자가 서로 말하되 이제 베들레헴까지 가서 주께서 우리에게 알리신바 이 이루어진 일을 보자 하고 빨리 가서 마리아와 요셉과 구유에 누인 아기를 찾아서 보고 천사가 자기들에게 이 아기에 대하여 말한 것을 고하니 듣는 자가 다 목자의 말하는 일을 기이히 여기되 마리아는 이 모든 말을 마음에 지키어 생각하니라 목자가 자기들에게 이르던 바와 같이 듣고 본 그 모든 것을 인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찬송하며 돌아가니라
메시야 탄생은 창세 이후로 단 한번밖에 없는 사건이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이것을 또 성화 구원적인 면에서, 이룰 구원적인 면에서 생각을 해 보면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이룰 구원을 염려하셔서 때때로 사건을 동원시켜서 우리에게 자극을 줍니다. 구약 성경에 한나도 브닌나의 자극을 받아 사무엘을 탄생시켰지요. 많은 사람들은 세상이라고 하는 가이사 아구스도의 그 명령의 바람에 자극을 받아 세상 제 1 주의로 살아가지만 요셉과 마리아는 그 ‘세상 제 1 주의로 살으라’ 하는 그 명령에 자극을 받아 가지고 하나님의 백성이요, 아브라함의 믿음의 후손이요, 다윗의 그 조상, 그 신앙의 노선으로 올라간 것을 우리는 볼 수가 있습니다.
지금도 참 생명의 신앙을 가진 성도는 가이사 아구스도의 세상 제 1 주의로 살려는 그 세상 사상의 바람을 타지 않고, 죄악에 물들지 않고, 다윗의 신앙의 노선으로, 하나님 제 1 주의로 그렇게 살아갑니다. 그렇게 사는 성도는 세상에서 잘 살고, 못 살고 하는 그것이 문제가 아닙니다.
여관 방 신세도 하루 저녁 신세이지요? 한데 어떻게 하면 좋은 문화 시설을 다 갖추어 놓은 방에서 재미있게 누리고, 자고 가느냐? 어떻게 하면 하루 저녁 그 여관 방에서 세상 좋은 꿈을 많이 꾸고 가느냐? 안 그런 사람이 별로 없습니다. 그런 생각을 하는 통에 재미를 보는 사람은 누구냐 하면 바로 여관 집 주인입니다. 여관 집 주인은 굉장히 바쁩니다. 손님 신상을 적어 놓는 숙박계에 이름 올린 사람의 숫자를 세고. 방마다 돈 계산을 하느라고 여념이 없습니다. 돈 버는데 그렇게 바쁘단 말이요. 주인이나, 손님이나 이들이 모두 다 이방인들만은 아닌 것 같습니다. 왜 그러냐 하면 이들은 유대에 사는 사람들인데 유대 땅에는 여호와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이 더 많은 것입니다.
사실 가이사 아구스도의 그 명령을 듣고 가는 이 유대인들은 주전 700년 전에 이사야 선지자가 예언한 동정녀로 통해서 메시야가 온다고 하는 그 사실, 그 예언한 사실이 있고, 또 미가 선지자도 베들레헴에서 왕이 난다고 하는 그 예언이 되어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세례 요한의 예언도 이사야서 40장에 보면 있습니다. 이런 선지자의 예언을 모르는 이 유대인들은 아닙니다. 그리고 그 예언들이 자기들의 사는 지역에서 이루어졌고, 또 사건적으로 보면 그들이 있는 방마다에, 거처하고 있는 그 곳으로 사람마다에게 찾아간 것입니다.
요셉이 아내를 위해서 손님들에게나 여관 방 주인에게 통 사정을 하지 않았겠느냐? 그처럼 어려운 사정이 되었는데, 요셉과 마리아가 주인과 손님들에게 양해를 구하고, 통 사정을 왜 안했겠느냐 그 말이요. 그들을 찾아갔다 그 말이요. 하지만 그들은 선지자들의 예언을 깨닫는 데에 둔감했습니다 그리고 구주 예수, 이 메시야의 가치성을 또 몰랐던 겁니다. 그런 그들은 모두 다 하나님의 백성들이 아니었더냐 그 말이요. 모두 아브라함의 혈통을 가진 육적인 그 후손들이 아니었더냐? 하지만 그들이 그 때 당시 무슨 짓을 하고 있었느냐 그 말이지요. 그들은 또 메시야 대망도 하고 있었습니다. 한데 육의 생활, 육의 문제를 해결해 주는 이 메시야를 대망하고 있었다 그 말이지요.
우리가 또 이 여관 집을 교회로 놓고 볼만도 합니다. 손님들 중에는 여호와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 태반 이상입니다, 거의 다 입니다. 그러니 그들은 말씀도 갖고 있습니다, 유명한 사람도 있을 수 있고요. 하지만 이 오신 메시야는 결과적으로 보면 말 구유로 쫓겨난 셈이 된 겁니다. 또 참 성도인 요셉과 마리아도 같이 마굿간으로 쫓겨난 것입니다. 진리 잉태된 이 두 성도, 생명 잉태된 이 두 성도를 받지를 아니했다, 알아주지 아니했다 그렇게 보는 거지요. 밀려났단 말이지. 쫓겨났어, 받아주지를 아니했어, 싫어했어, 무시했어! 왜 그랬느냐? 요셉과 마리아가 돈이 없으니까, 유명하지 못하니까!
여관 집 주인을 교역자로 볼 때 육의 소원, 목적을 가진 교인의 머리 숫자를 세고, 돈 계산하느라고 바빴다 그 말이요. 교역자가 어느 쪽으로 더 가치 있다고 본 것이냐? 그러니까 생명 잉태, 진리 잉태, 메시야 잉태, 이것이 가치가 있는 것이 아니고, 돈과 손님들이 가치가 있다 그 말이요, 돈과 손님들이 가치가 있다. 그러니까 그것을 취하니까 결과적으로는 구주 예수 메시야를 박대한 셈이 된 겁니다, 결과적으로 그렇게 됐어요. 그렇게 한 그들이 아기 예수가 그들이 메시야 인줄 알고 그랬습니까? 모르고 그랬단 말이요. 그러니까 모르면 그렇게 된다, 모르면 그렇게 될 수밖에 없다. 그 때야 사건적으로 그런 일이 있었던 것이지만 우리가 시대적 사상적, 신앙 사상적 흐름을 모르면 그렇게 될 수밖에 없다는 것을 알겠어요? 이게 참 중요합니다.
그런데 이 천사들이 왜 여관으로 가서 전하지 않았을까? 여관에 가서 전도를 하면 많은 사람이 영광을 돌릴 수 있을 것이 아니었겠느냐? 그런데 목자들에게 가서 전한 것이다 그 말이요. 하나님의 백성이 육의 소원, 목적으로 살면 가기가 싫습니다, 그렇지요? 선지자의 예언을 무시하면 그 곳에는 가기가 싫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버리면 가기가 싫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은 그들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지 않습니다. 성경에도 우리가 봤지요. ‘개나 돼지에게 진주를 던지지 말라’ 그 가치성을 모른단 말이요. 늘 깨어서 눈을 뜨고 있는 양떼들을 지키고 있는 목자에게 기쁜 소식이 주어지는 것입니다. 영의 눈을 뜨려고 하는 자, 영의 눈을 뜬 자. 영의 눈을 뜬 자면 벌써 시대적 흐름을, 사상을, 교계의 신앙 사상과 흐름을 구별하는 자 아니요? 그게 눈뜨고 있는 사람이요.
그러니까 여관 집 목자와 들판에 있는 목자와는 대조적인 것을 우리가 볼 수가 있습니다. ‘어떻게 하면 손님을 많이 끌어들이나?’ 뭐 생각하면서? 돈 생각을 하면서! 그런 생각을 하는 것이 이것은 여관 집 주인인 격인 목자다. ‘어떻게 하면 양을 질적으로 하나님 앞에 합격이 되도록 잘 키워볼까, 주인의 눈에 들도록 키워볼까?’ 하는 이것은 들판의 목자입니다. 확실히 달라요.
여러분들이 하나님이라면 여관 집 목자와 들판의 목자, 어느 쪽에 가서 기쁜 소식을 전하고 싶습니까? 천사들이 목자들에게 전하는 말이 12절에 ‘너희가 가서 강보에 싸여 구유에 누인 아기를 보리니 이것이 너희에게 표적이니라’ 그러니까 뭐 마굿간에서 메시야가 탄생했지만 그 마굿간에 어디 십자가를 붙여 놨겠습니까? 예수님이 난 마굿간은 더 화려한 마굿간이었을까요? 목자들은 마굿간마다 가서 아마 찾았지 않았겠느냐? 마굿간이 뭐 그 집 밖에 없었겠느냐? 짐승 똥내 맡아가면서 거미줄 쳐진 그 먼지 뒤집어 써가면서 이 목자들이 누굴 찾느라고 그런 애를 쓰지요? 메시야 찾느라고, 단 한번밖에 없는 이 메시야 찾느라고! 주님 한번 만나보는 것이 그렇게 소원이라! 이 천사들의 명령은 다른 말로 하면 하나님의 계시입니다. 계시 전달입니다.
헤롯의 왕궁이나 여관 방에서 주님을 찾지 않고, 헤롯의 성전, 호텔 방에서 주님을 찾지 않고 하나님의 지시대로 마굿간에서 찾았습니다. 누가 버린? 하나님의 백성들이 내어버린 그 메시야를 이 목자들이 마굿간에서 찾습니다. 빌딩에서 못 찾습니다. 목자들에게 빌딩이 눈에 보이겠어요? 헤롯의 높은 탑이 눈에 보이겠습니까? 그 메시야를 천사의 지시대로, 하나님의 지시대로 찾았습니다. 그 메시야를 요셉과 마리아가 모시고 있습니다. 요셉과 마리아는 성도입니다. 오붓하게 독차지하고 있어요. 온 이스라엘이 버린 그 메시야를 요셉과 마리아가 독차지하고 있어요. 여관 집 주인이 버린 그 메시야를 요셉과 마리아가 모시고 있었던 겁니다. 참 그 시대적인 장면을 우리가 한번 진리 사상으로 끌어와 가지고 그걸 한번 생각을 해봐요. 그 때야 육신으로 오셨어도 몰랐는데, 그렇지 않아요? 현대 교회의 이 신앙 사상의 흐름 속에서 진리 찾기란 하늘의 별 따기입니다, 참 어렵다. 그걸 또 알아보기란 어렵다. 왜 어렵느냐? 모두 육을 잡고 가니까! 넓은 길로 가니까!
마굿간 꼭대기에는 뭐 십자가가 있었습니까? 없었습니다. 그 마굿간 벽은 도배를 아주 멋있게 했겠지요? 가마니 거적때기로 둘렀지 않았겠어요? 바람은 사방에서 불어오고. 그러니까 그 때에 처해있는 형편을, 또는 그 분위기를 생각할 때에 그 무슨 찬송이 나오겠어요. 생각을 해봐요, 무슨 찬송이 나오겠느냐? 예배당이라도 뭐가 멋있게 꾸며져야 그 분위기부터가 뭔가가 마음에 와 닿는 것 같고 그렇잖아요? 하지만 천군 천사들은 찬송입니다. 그렇지요? 목자들도 찬송입니다. 모든 만물이 다 찬송입니다. 메시야 찾느라고 이 목자들이 수고하고, 고생하고, 애를 쓴 그 모든 피로와 근심 걱정은 다 없어집니다. 왜냐? 구주 예수 메시야를 만났기 때문이지요. 여관 방 목자는 뭘 보고 노래 소리가 나올까요? 돈이 두둑이 들어오면 흥얼거리는 콧소리가 절로 날 테지! 보나 마나 그렇지 않았겠어요? 이 목자들은 헤롯의 성전을 보고 성전 안에 제사 드리는 사람의 숫자, 또 하나님 앞에 바쳐지는 헌금을 보고 영광이요, 찬송이라 하지 않느냐 그 말이요. 육의 목자들은 그것을 보고 느껴지는 거기에서 하나님께 영광이요, 찬송이라 그러지요. 사람 많이 모이고, 돈 많이 들어오니까 하나님께 영광이요, 찬송!
하지만 여관 방에 든 사람들은 그 하룻 밤을 지나면 어떻게 될 사람들이지요? 다 떠나갈 사람들이다. 그렇더라도 이 여관 방 목자는 뭐만 내면 된다고 하는 것이지요? 돈만 내고 가면 된다는 거지요. 그런 목자들이 없겠습니까? 그게 육의 목자들이요. 어차피 죽을 인생, 돈만 내고 가거라. 많이 들어오면 하나님께 영광이요, 찬송이요! 그러니까 그 목자를, 그 여관 집의 목자를 이걸 교회로 한번 생각을 하면서 우리는 깨닫는 겁니다. 여관 집 목자는 돈과 관계를 짓는 겁니다.
말씀의 가치성을 모르면 예수는 버려지게 돼요. 주님의 존귀성을 모르면 말씀을 버리고, 세상 물질성을 주님보다 더 가치 있게 봅니다. 이거는 벌써 주님을 버린 겁니다. 예수를 믿어도 예수님보다, 말씀보다, 주님의 그 존귀성보다 세상을 더 가치 있게 여겼다면 이거는 주님을 버린 격이다. 신앙 사상적으로는 그건 버린 거에요.
14절: 하나님이 알아주는 천상 천하에서 최고의 영광을 누리라고 합니까? 최고의 영광을 누리라고 해요? 예? 그냥 찬송 부르는 겁니까? 누가 태어났기 때문에 이 찬송입니까? 구주 예수! 메시야! 그리스도! 예수 탄생이 이게 참 천상 천하에서 최고의 영광입니다, 그렇지요? 누구의 영광일까요? 하나님께 영광! 그는 하나님의 백성을 피로 사서 하나님께 드리고, 하나님께 만족을 이루어 드리고, 당신의 백성을 사죄, 칭의, 새 생명으로 입혀 하늘의 영광스러운 자로 만드시는 이 일을 하셨습니다. 그러니까 영원히 영광스런 존재지요.
‘땅에서는 기뻐하심을 입은 사람들 중에 평화로다’ - 외모, 외형을 보지 않고, 죄악에 감염되어서 썩을 정신이 되어 가지고 사는게 아니고 세상 바람도 타지 않고 오직 주님 말씀 붙잡고 살아가는 참 성도를 보고 하시는 말씀입니다. ‘땅에서는 기뻐하심을 입은’ - 그건 누구요? ‘기뻐하심을 입은’ - 하나님의 택자하고도 어떤 사람을 기뻐하지요? 한 마디로 ‘이룰 구원을 잘 이루어 가는 그 사람들 중에 기뻐하심을 입은’ 그렇게 나오는 거요. 우리가 기본 구원이 전제된 상태에서 그걸 깨닫고 가야 되겠습니다.
평화는 뭐라고 그랬지요? 주님과의 의사 일치. 아니면 대립이 됩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이 성경에서 나오는 개념을 잘 알아야 되겠어요. 의례히 12월 25일 날 보편적, 일반적으로 그냥 생각을 해 버리지요? ‘싸우지 말고 다 평화롭게 살자!’ 하지만 누굴 안 믿지요? 메시야, 그리스도를 안 믿어요. 그러니까 일반적, 보편적, 도덕성적 개념으로 이 메시야 나신 것도 그렇게 생각을 해요. 그러니까 메시야가 온 인류를 향해서 ‘평화롭게 싸우지 말고, 욕심 내지 말고 살으라고 그랬는데 왜 싸우느냐?’ 그 말이지요. 인간들은 그렇게 생각을 하는 거지요.
그 메시야의 오심이, 주님 오심의 목적성이 그런 것이냐 그 말이요. 아니지요. 일반 사회인들은 자기네들 기준에 맞추어 놓은 그런 개념 하에서 그렇게 생각을 해요. 그런데 오늘 날 기독교 종교계의 유명하다는 사람들도 뭐라고 이 말을 써먹지요? 그게 뭐 하는 짓이요. ‘예수님은 세상의 불쌍하고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주러 오셨다’ 그러니까 세상의 개념을 가지고 이 말을 하는 거라 그 말이요. 그러면 이게 전혀 다르지. 성경의 뜻하고는 달라. 자- 그렇게 돌아갈 때에 과연 그런 개념 하에서 예수님께서 오신 것이었다고 하면 예수님께서 오셔서 하신 그 구원 사역이 실패입니까, 성공입니까? 그렇게 되면 실패가 되어 버리지요. 참 그러니 실패작으로 만들어 놓고, 우리가 볼 때에 예수님의 구원 사역을 완전히 무시해 버린 거고, 결과가 그렇게 되는 것이지요. 또 다른 말로 하면 예수님을 완전히 인간 자기들 차원으로 끄집어내린 격이 돼요. 그러니까 예수님의 구원 사역의 운동도 하나의 사회적, 도덕성 회복 운동, 그렇게 끄집어 내려진다 그 말이요. 그 얼마나 하나님께 욕을 돌리는 거냐 그 말이요. 그것도 모르고 지금 저러고들 있단 말이요.
주님 초림 때 선민 이스라엘이 육의 소원, 목적으로 살아갔습니다. 육의 문제 해결해 주는 그런 메시야 구세주로 대망을 했습니다. 그래서 메시야 오심도 몰랐고, 오신 주님을, 자기 구원을 박대하고 죽였습니다. 마지막 시대도 그렇게 될 것이라고 성경은 말하고 있습니다.
누가 메시야를 죽였지요? 불신자들이? 하나님의 백성들이! 교회가! 그리스도를 죽이고, 그리스도성을 죽이고, 메시야성을 죽이고, 부활성을 죽이는 곳이 어디냐 하면 교회입니다. 육의 소원, 목적을 가지고 살아가는 교회입니다. 그 예언이 이루어지는 것을 우리는 지금 피부로 느낄 수가 있습니다. 영적, 신앙적, 가치적으로 볼 때에 주님은 교회로 부터 박대를 받고 있습니다. 지금 진리의 성도가 박대를 받고, 진리를 가진 자가 박대를 받고, 진리의 교회가 박대를 받아요. 그 때나 지금이나 똑 같습니다.
그리고 자기네들에게도 분명히 메시야가 찾아갔고, 진리 생명이 찾아갔는데 그 가치성적인 면에서 선택을 하는데 있어서 이 여관 집 주인처럼 돈과 물질성, 세상성을 취하지, 옳은 것은, 하나님의 옳은 것은 어디다가 버렸지요? 마굿간에다가 버렸어요. 쓰레기 통에 버려졌어요. 우리가 그런 면을 사상적으로 볼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11, 12절이 그 말씀이에요. 그 때 당시로 이 하나님의 지시가 천사로 통해서 내려져서 참 목자는 그 표적을 볼 수가 있다 그랬지요? ‘그 표적을 보리니’ 했지요. 무슨 표적? 메시야가 마굿간으로 밀려난! 마굿간에 뉘인, 사람들이 버린 그 메시야, 그리스도, 진리, 아가페 등등. 오늘 날도 하나님의 그 계시 사상을 받아 가진 자는, 그런 목자는 오늘 날 그 표적을 볼 수가 있습니다, 알겠어요?
그 때 당시로서야 역사적이지만 오늘 날 사상적으로 그 때처럼 보는 겁니다. 이제 그게 보입니까? 그게 보여져야 되는 거요. 그게 보이는 거요. 오늘 날도 예수를 버리고 살아요. 또 참 성도가 예수님과 함께 버려져 있는 것을 보았지요? 버려진 그 성도가 주님을 모시고 있는 것을 발견할 수가 있다.
그렇다면 그것을 보는 그 목자의 시선을 가진 우리가 오늘 날 그 표적을 신앙 사상적으로 본다면 버려진 그 주님을 누가 모시고 올 수 있겠느냐? 누가 나의 주님을 모시고 올 수 있겠느냐? 세상이 알아주지 않아도 버려진 그 주님을 알고 살자가 누구겠느냐? 그래, 그 버린 주님을 안고 오면 편안하게 살까요, 애굽으로 피난을 가게 될까요? 참 그거... 예수 잘 믿으면 편할 줄 알았지! 진리 모시면, 하나님 말씀을 내가 생명 잉태적으로 가지면 하나님이 날 잘 보호해 주고, 편하게 살고, 그렇게 해줄 줄 알았는데 예수 모시고, 예수 안으니까 애굽으로 피난 가는 것이 마태 복음에 있지요? 마리아의 애굽 길이 그렇지요. 예, 그런게 있는 거지요.
그러나 오늘 날 이 장면에서 주님의 그 사역의, 그 오심의 상황을 볼 때에 우리가 이것을 현재로 끌고 와서 사건적으로 깨달아 나간다면 예수님의 그 사역이 고맙고 놀라와서 그 천군 천사들과, 그 목자들과 함께 찬양할 자가 누구겠느냐? 세상 모든 것이 다 달아날지라도 주님 모신 요셉과 마리아처럼 하나님의 사랑을 독차지할 자가 누구겠느냐?
우리가 참 오늘 날 교회에서들 ‘예수 오셨네!’ 하고 저러는데 기뻐서 기쁜지 모르지만 영적인, 신앙, 사상적인 면으로 우리가 볼 때에 주님이 버려진 것을 볼 수가 있고, 예수 믿으면서 세상 구하는 것을 우리가 볼 수 있고, 영적 사상적으로 볼 때 예수님 초림 때와 같은 현실을 지금 볼 수가 있다.
그래서 우리가 성경에 이렇게 사건이 되어진 것을 기본 구원만 생각하지 말고 우리의 이룰 구원도 생각을 하면서, 그리고 이 성경 구절이 12월 25일 날만 쓰여지는 것이 아니라 우리들에게 이룰 구원을 염려하셔서 이 사건을 우리들에게 주셨다는 것을 우리가 깨닫고 살아야 되겠습니다.
기도 올립시다.
사랑 많으신 하나님 아버지! 저희들을 당신의 자녀로 삼아주신 것 감사합니다. 원하옵건데 저희들에게 영적인 눈, 진리 사상을 궤뚤어 보는 눈, 하나님께서 이 세상에서 사건적으로 역사 하시는 그 주님의, 그 아버지 하나님의 뜻을 영적인 면에서, 신앙적인 면에서 잘 깨닫고 알아볼 수 있는 복된 저희들이 될 수 있도록 은혜를 베풀어 주시옵소서. 불신 세상은 눈에 보이는 즉흥적인 것으로 이렇궁, 저렇궁 하는 것이지만 아버지 하나님! 눈이 뜨인 성도는 보이지 않는 이 신앙 사상의 흐름을 보고 하나님께서 역사 하는 그 역사를 볼 줄 압니다.
하나님 아버지! 저희들에게 영의 눈이 뜨이게 해 주시고, 이 현실 세상을 잘 보고, 하나님의 역사도 보고 하나님의 뜻을 잘 이루어 드리는, 아버지 하나님께 기쁨을 드릴 줄 아는 귀하고 복된 당신의 자녀들이 될 수 있도록 축복해 주시옵소서.
이 모든 말씀 우리 주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 하옵나이다
- 아 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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