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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열두광주리 가득히 4-대강절 설교 12편"

에반젤(복음) 2020. 12. 6. 23:20

 

제목 ; 주님을 간절히 기다리는 자에게

성경 ; 61:10-62:3, 4:4-7, 2:22-40.

 

 

새 천년이 시작되는 올해에 어떤 좋은 일이 있지 않겠는가 하는 기대를 가지고, 우리는 2천년 새해를 맞이했습니다. 2000이라는 숫자가 막연히 우리에게 그런 기대를 갖게끔 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신문과 TV를 비롯한 매스컴들은 새해 벽두에 새로운 천년의 시작을 아주 요란스럽게 떠들어댔습니다.

그러나, 한 해가 저물어 가는 오늘 우리에게 들려오는 소식은 아주 우울한 것뿐입니다. 어제 신문을 보니, 올 한 해 동안 구조조정으로 말미암아 20만이 넘는 사람들이 길거리로 내쫓기게 되었다고 합니다. 제가 아는 어떤 사람도 구조조정으로 잘려서 직장을 잃게 되었다는 소식이었습니다.

나라살림도 좋아질 기미가 보이지 않습니다. 경제에 관해서 아주 해박한 지식을 갖고 있기 때문에 ‘준비된 대통령’이라 자임하신 분이 나라를 통치하고 있건만, 웬일인지 나라 경제는 점점 더 악화되어가고 있습니다. 대우와 동아가 이미 무너졌고, 현대마저 흔들거리고 있습니다. 그런가 하면 농민들은 자신들의 빚을 갚아달라고 정부에게 요구하고 있으며, 지방 광역단체는 15조의 빚을 지고 있다는 암담한 소식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이제 오늘밤 0시에 다시금 새해를 맞이하게 됩니다. 사람들은 새해에도 새로운 꿈과 희망을 갖게 될 것입니다. 금년에 이루지 못했던 일들을 새해에는 기필코 이루어내야겠다는 다짐을 하는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지난 일에 대해서는 후회하거나 미련을 갖지 말아야 합니다. 과거의 일들은 훌훌 다 털어 버리고 기쁜 마음으로 새해를 맞이해야 합니다. 더군다나, 우리는 좋으신 하나님을 믿고 의지하는 신앙인들입니다. 그런고로,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신다면 무슨 일이든지 할 수 있으리라는 굳건한 믿음을 가지고 밝아오는 새해를 맞이해야 할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꼭 기억하고 살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도우신다는 사실입니다. 그냥 막연하게 좋은 일이 있으리라는 기대만 갖고 살아서는 안됩니다. 미래에 대한 준비를 해야 합니다. 어떻게 말입니까?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바르고 경건하게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야, 자신이 원하는 바를 이룰 수 있습니다.

누가복음 2장의 ‘시므온’이라는 사람은 메시야를 늘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어느 날, 그는 ‘메시야를 보기 전에는 죽지 않을 것’이라는 성령의 계시를 받았습니다. 시므온이 그런 계시를 받은 것은 우연이 아닙니다. 그는 원래부터 바르고 경건한 사람으로서 언제나 성령이 충만한 삶을 살았습니다.

 

그러다가, 드디어 그는 성전에서 아기 예수를 만나뵙는 영광을 누렸던 것입니다.

또 한 사람, 아기 예수를 뵙는 영광을 누렸던 사람이 있습니다. 홀로 살아가던 여든 네 살의 ‘안나’라는 하는 여 예언자입니다. 그녀는 늘 성전을 떠나지 않고 밤낮으로 기도하면서 하나님을 섬겼다고 했습니다. 한 마디로 말해서, 안나는 아주 성실하게 믿음생활을 했던 사람입니다.

그러니까, 결국 ‘시므온’이나 ‘안나’는 평소에 메시야를 뵙게 되리라는 소망을 가지고 믿음생활을 성실하게 한 것입니다. 그리고, 성령이 충만한 가운데 경건하고 바르게 살아감으로써 주님 예수를 맞이할 준비를 하고 있었습니다. 그 결과, 그들은 자신들의 소원을 이룰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도 다시 오실 주님을 뵙고자 원한다면, 그리고 이 세상에서 사는 동안 주의 은혜 안에서 진정 복된 삶을 살기를 원한다면, 주께서 일러주신 대로 성실하게 살아가야 합니다. 더군다나, 하나님은 죄에서 우리를 구원하여 참 자유를 주셨고, 우리를 자녀 삼아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를 수 있는 특권까지 주셨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오늘 우리는 시므온이나 안나처럼 진실하게 살아가야 합니다. 다시 오실 주님을 기다리면서 바르고 경건하게 살아가야 합니다. 그러다 보면, 오늘 이 세상에서 사는 동안 기쁨과 만족을 누리며 살게 될 것이며, 다시 오실 주님도 만나뵙게 되는 영광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하지만, 오늘 우리는 어떻습니까?

 

1.영원하신 주님을 뵙고자 하는 마음이 과연 얼마나 간절한 것입니까?

 

이사야 선지자는 말하기를 ‘여호와를 생각하면 나의 마음은 기쁘고 가슴이 뛴다(61:10)’고 했습니다. 그만큼, 이사야는 하나님을 사모하고 그리워했던 것입니다. 그러면서, 그는 ‘하나님께서 도와주실 때까지 쉬지 않고 부르짖겠다(62:1)고 했습니다. 그러니까, 이사야 선지자는 하나님을 애타게 그리워하면서 열심히 찾았던 것입니다.

우리는 어떻습니까?

①생명의 주가 되시는 주님을 얼마나 그리워하면서 열심히 찾고 있습니까?

아주 급한 일이 있거나 아쉬울 때에만 주님을 찾고 있는 것은 아닙니까? 진정 그리워하고 사랑하는 마음으로 주님을 찾은 적이 얼마나 되던가요? 혹시, 왜 주님을 그토록 간절하게 찾아야 하고 기다려야 하는지, 그 이유를 아직도 깨닫지 못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요? 아마, 그런 사람이 우리 중에도 분명히 있으리라 여겨집니다.

그러기에, 주님 뵙기를 원하면서 간절히 기도하는 사람이 적은 게 아닐까요? 기도하는데 무슨 이유와 핑계가 있겠습니까? 주님을 사모하는 마음이 조금이라도 있다면 어떤 악조건 속에서라도 주님을 열심히 찾아야 할 것입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주께서 도와주실 때까지 쉬지 않고 부르짖겠다’고 했는데, 오늘 우리는 과연 얼마나 주님을 찾으면서 기도하고 있는 것일까요?

 

주님을 가까이하면서 그 뜻대로 살려는 노력을 하지 않을 경우에는

②성령을 배척하면서 악령의 지시를 따르게 마련인 것입니다.

시므온은 성령이 충만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러기에, 성령께서는 시므온에게 메시야를 보게 되리라는 계시를 보여주었습니다. 그리고, 시므온은 성령의 인도함을 받아 성전에 가서 아기 예수를 만나뵙게 되는 영광을 누리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누가복음 2:34-35 말씀에서, 시므온은 성령의 감동을 받아 주님의 부모에게 축복할 때에 ‘장차 예수를 배척할 자들이 있는가 하면, 예수 때문에 큰 기쁨을 누릴 사람도 있으리라’고 예언했습니다. 그러니까, 시므온처럼 성령의 인도함을 받는 사람은 주님을 만나뵙고 기쁨을 누리게 될 것이며, 악령의 지시를 따르는 사람은 예수를 배척하면서 거역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예수를 멀리하게 된다면 경건생활을 온전하게 할 수가 없을 것입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여호와를 생각하면 그 마음이 기쁘고 가슴이 뛴다’고 했는데, 그것은 ‘하나님께서 정의롭게 살 수 있는 길로 인도하여 주시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왜냐하면, 주님의 뜻에 따라 정의롭게 살 때에 영광을 누릴 수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와 반대로, 성령을 무시하고 주를 멀리하면서 경건하게 사는 것을 포기할 경우,

③모든 일이 소원하는 대로 되지 않을 뿐만 아니라, 기쁨과 만족을 모르는 인생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런 사람들은 요행수를 바라고 살아가게 됩니다. 그래서, 복권이나 증권 같은 것을 사서 한 순간에 많은 돈을 얻고자 합니다. 한 마디로 말해서, 땀흘리는 수고나 노력은 하지 않고 밤낮 없이 용꿈이나 꾸게 되리라 기대하고 사는 것입니다.

얼마 전에 신문을 보니, 요즘 세상에는 소위 대박이 터지기를 기대하고 사는 사람이 많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도박을 하거나 증권, 또는 경마를 해서 일확천금을 노리는 사람이 많아졌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한 사람이 대박을 터뜨려 행운을 잡기 위해서는 999명이라고 하는 많은 사람이 큰 피해를 입거나 고통을 겪어야 한다고 합니다.

이사야가 노래한 것처럼 ‘땀흘려 일하고 정의롭게 살아서 승리하는 인생(62:2)’을 살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일부 어리석고 미련한 사람들은 운수대통해서 영광을 누리게 되는 그 때를 기다리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어떻습니까? 하나님 말씀에 따라 순종하고 바르게 살아서 복을 누리기를 원하십니까? 아니면, 우리가 사는 것은 내 멋대로 살더라도, 하나님은 우리에게 긍휼과 자비를 베푸셔서 모든 일이 잘되기를 바라고 있습니까? 우리는 맘 내킬 때마다 가끔 교회를 나오게 되더라도, 하나님은 변함없이 언제나 우리를 항상 지켜 보호해주시기를 바라고 있는 것은 아닙니까?

 

아닙니다. 그래서는 안 됩니다. 심은 대로 거둔다는 것을, 우리는 명심해야 합니다. 악을 심으면 악의 열매를 거두고, 선을 심으면 선한 열매를 거두게 되어 있습니다. 혹 노력하지 않고 거두게 되는 열매도 있을지라도, 그런 열매는 우리에게 행복보다는 불행을 가져다 주는 경우가 훨씬 더 많다는 것을,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런고로, 우리는 새해를 맞이하기 전에, 우리의 신앙상태를 점검해봐야 합니다. 우리의 믿음이 지금 주의 기쁨과 만족을 누리기에 알맞은 상태인지, 아니면 하나님의 채찍을 맞아야 정신을 차리게 되어 있는지, 자신을 냉철하게 돌아봐야 할 것입니다.

아무쪼록 새해에는 좀더 올바른 신앙을 가지고 주의 뜻에 따라 살아감으로써 하나님의 은총의 햇빛을 듬뿍 받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기쁨과 만족을 누리는 복된 한 해가 되실 수 있기를 축원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주님을 늘 가까이 만나뵐 수 있기를 간절히 원하면서 살아야 합니다. 누가복음 235절 말씀에, ‘주님을 배척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 배척으로 말미암아 그 사람은 파멸에 이르게 된다’고 했습니다. 반면에, ‘주님을 가까이하려고 노력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런 사람에게는 예수가 큰 기쁨이 된다’고 했습니다.

그런고로, 우리는

 

2.주님을 늘 만나뵙기를 소원하면서 경건하게 살도록 힘써야 할 것입니다.

 

2: 35 말씀에 ‘주님은 사람들의 마음속 가장 깊은 생각들을 드러내게 하리라’고 했습니다. 그러니, 주님을 속이려는 생각은 아예 하지 말아야 합니다. 주님 앞에서, 우리는 솔직해야 합니다. 진실하게 살아야 합니다. 믿는 척만 해서는 도무지 주님을 만나뵐 수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①그야말로, 우리는 주님 뵙기를 간절히 소망하면서 기다려야 합니다.

시편기자는 노래하기를 ‘내 영혼이 주님을 기다리는 것은 파수꾼이 아침을 기다림보다 더 간절하다(130:6)’고 했습니다. 우리도 그와 같이 간절한 마음으로 주님을 기다리되, 시므온과 안나처럼 밤낮으로 기도하면서 경건하게 살아야 할 것입니다.

앞으로 결혼해야 할 처녀총각들은 좋은 배우자 만나기를 소원하고 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자신부터 먼저 좋은 배우자감이 되려고 힘써야 합니다. 자신은 그런 노력을 거의 기울이지 않으면서 좋은 사람 만나기를 소원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런 사람은 바보 아니면 천치가 틀림없습니다.

교인들은 먼저 자신이 좋은 성도가 되기를 힘쓰면서 좋은 목회자를 원해야 할 것이고, 목회자는 자신이 먼저 훌륭한 목회자가 되고자 힘쓸 때에 교인들도 바른 길을 가려고 노력할 것입니다. 그런고로, 우리는 각자가 먼저 자신을 위해서 울어야 합니다.

 

우리는 주님을 만나뵐 때까지, 우리 스스로를 계속 채찍질하면서 거듭나야 합니다. 신랑 예수를 맞이할 수 있는 자격을 얻을 수 있도록, 우리의 성품과 신앙태도가 달라져야 합니다. 지금 이 상태로 주님을 뵙게 된다면, 그야말로 우리는 스스로가 부끄러워서 도망치게 될 것입니다.

②그러므로, 우리는 성령의 인도하심에 따라 살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웬만큼 교회를 다니게 되면, 우리는 성령과 악령을 구분할 수 있습니다. 문제는 성령의 지시에 따라 살려고 하는 의지가 있어야 합니다. 그러기에, 하나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도우신다고 한 것입니다.

16:13 말씀에 ‘진리의 성령이 오시면 너희를 이끌어 진리를 온전히 깨닫게 하여 주실 것이다’라고 하셨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성령의 지시에 따라 살기만 하나님의 말씀에서 벗어나는 일이 없게 됩니다.

그러니,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하겠습니까? 진리의 성령 안에서 살아야 합니다. 그러면, 이미 우리 가까이에 와 계신 주님을 만나뵙는 영광을 누리게 될 뿐만 아니라,

③그 주님 안에서 기쁨과 만족을 누리며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진리를 벗어난 상태에서 얻게 되는 기쁨과 만족은 다른 사람을 아프게 하고 손해를 끼치면서 누리게 되지만, 주님 안에서 누리는 기쁨과 만족은 모든 사람이 함께 나눌 수 있는 기쁨과 만족인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진리 안에서 누리는 기쁨과 만족은 하나님께도 영광이 됩니다.

성도 여러분! 다가오는 새해에는 우리 모두 진리 안에서 살기 위해 분투 노력합시다. 진리가 아니면 아예 보지도 말고 말하지도 말고 가지도 맙시다. 내 감정과 이익에 따라 행하는 것은 진리를 거스르는 일입니다. 우리는 이런 일을 적극 배척하면서 주의 뜻에 따라 살도록 노력합시다.

새해에는 항상 주님을 가까이 모시고 살면서 날마다 주님을 만나뵙는 생활이 될 수 있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제목 ; 어둠 속에서 비추는 생명의 빛이시라!

성경 ; 52:7-10, 1:1-4(5-12), 1:1-14.

 

 

요즘 ‘자살 사이트’가 사회적인 문제로 등장하고 있습니다. ‘자살 사이트’란, 자살하고 싶은 사람에게 자살하는 방법을 알려주거나 도와주는 인터넷 사이트입니다. 그러니까, 자살하고 싶지만 용기가 없어서 죽지 못하는 사람에게 그를 죽여줄 수 있는 사람을 찾아줍니다. 그리고, 혼자 죽기가 두려워 동반자살을 원하는 자에게는, 그에 합당한 사람을 구해주기도 하는 것입니다.

 

현재 ‘자살 사이트’가 얼마나 되는지 그 숫자를 다 알 수 없지만, 그 대부분은 자살을 유도하기보다는 방지하려는 목적으로 개설된 것이라고 합니다. 그렇지만, 그런 사이트가 자살하고 싶은 사람들에게 악용되는 예가 많다고 하는 사실이 문제입니다.

사람이 세상에 태어나서 한 번쯤은 자살을 꿈꾼다고 합니다. 아마 우리 중에서도 자살을 생각해보지 않은 사람은 거의 없으리라 생각합니다. 그야말로 앞이 안 보일 정도로 캄캄하게 되었을 때에, 그래서 도무지 살아갈 용기가 없거나 살 의미를 잃어버렸을 경우, 우리는 자살을 생각하게 됩니다. 그러나, 죽을 용기가 있다면 그 용기만으로도 인생을 충분히 살아갈 수 있습니다.

아무튼, 우리가 인생을 살다보면 어둡고 캄캄한 시기가 있게 마련입니다. 거기에다가 거센 풍랑까지 있을 경우에는, 참으로 그 인생은 위태롭고 암담할 것입니다. 생각해보십시오. 칠흑같이 어둔 밤바다를 항해하는 배 한 척이 산더미 같은 파도를 만나게 된다고 합시다. 그 얼마나 절망적이겠습니까? 그 절망적인 상태가 계속되어 심히 고통스러울 때에는 차라리 빨리 죽는 게 낫다는 생각이 들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럴 때, 멀리서 비치는 한 줄기의 등대 불빛을 발견했다고 합시다. 그 순간, 그 마음을 사로잡고 있던 절망이나 어둠은 순식간에 사라지고 기쁨으로 희망의 불빛을 바라보게 되겠지요. 그리고, 그 불빛을 향하여 힘차게 앞으로 나아갈 수가 있을 것입니다. 절망과 비탄의 한숨만 짓던 그 입에서는 노랫소리도 흘러나오게 될 것입니다.

예수는 죽음의 바다에서 갈 방향을 찾지 못하고 방황하며 헤매던 우리 인류에게 한줄기 생명의 빛으로 다가오셨습니다. 어둡고 캄캄한 이 땅에 생명의 빛으로 오셔서 우리를 죽음의 바다에서 구원하셨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어디로 가야할 지, 또한 어떻게 살아야 할 지, 그 인생의 진로와 방법을 우리에게 제시하셨습니다.

일제의 암흑기를 살았던 김활란 박사는 ‘캄캄한 밤 사나운 바람 불 때, 만경창파 망망한 바다에 외로운 배 한 척이 떠나가니, 아 위태하구나 위태하구나!’하고 노래했습니다. 일제의 회유와 압박을 견뎌내자니, 참으로 고달프고 힘든 인생을 살아야 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는 그 어둠 속에서도 희망을 잃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주님을 의지하는 믿음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절망 중에 그 사공 떨면서도 한 줄기의 밝은 빛 보고서, 배 안에도 하나님 계심 믿고, 오 기도 울린다 기도 울린다! 아버지여 이 죄인 굽어보사 성난 풍랑 잔잔케 하시고 이 불쌍한 인생을 살리소서. , 우리 하나님 우리 하나님! 모진 바람 또 험한 큰 물결이 제 아무리 성내어 덮쳐도 권능의 손 그 노를 저으시니, 오 맑은 바다라 맑은 바다라!(찬송 4611, 3)

 

매춘여성을 대상으로 선교하는 ‘우물가선교회’라는 단체가 있는데, 그 회장인 최재하 목사님이 룸살롱의 웨이터로 위장취업을 한 적이 있다고 합니다. 거짓웃음과 몸을 팔아 생명을 연장하는 불우한 여성들에게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였습니다.

목사님은 그들과 친해지려고 노력했습니다. 그들과 함께 지내면서 그들의 고충을 헤아려 잘 보살펴줬습니다. 짓궂은 손님 때문에 울고 있는 아가씨가 있으면 위로하고 토닥거렸습니다. 그러다 보니, 최 목사님도 그들 인생을 깊이 이해하게 되었습니다.

그곳에서 성탄절을 맞이하게 되었습니다. 최 목사님은 생일 초대장을 만들어 웨이터와 호스테스에게 돌렸습니다. 사람들이 누구 생일이냐고 물었지만, 최 목사님은 웃음으로만 답했습니다. 밤이 깊어가자, 손님들은 모두 가고, 짝짓기에서 제외된 아가씨들과 웨이터만 남았습니다. 최 목사님은 전등을 끄고 케이크에 촛불을 밝혔습니다.

마담이 다시 누구 생일이냐고 묻자, 최 목사님은 조용히 입을 열어 예수님의 생일에 대해서 말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분이 이 세상에 오셨을 때, 그가 어떤 사람에게 제일 깊은 관심을 가졌고 어떻게 사셨는지도 이야기해 주었습니다. 분위기가 아주 엄숙해졌습니다. 그리고, 어떤 아가씨들은 손수건을 꺼내어 눈물을 닦기 시작했습니다.

이 때, 최 목사님은 하나님의 임재를 느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 불쌍한 죄인들을 가슴에 품어주시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음란하고 추악한 일에 쓰임 받던 그들과 그들의 공간이 거룩한 모습으로 바뀌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 날, 최 목사님과 그들은 '고요한 밤 거룩한 밤'을 가슴이 미어지도록 소리쳐 불렀다고 합니다.

그 후, 그들은 최 목사님께 예수님에 대해 좀더 자세히 알려달라고 요청했습니다. 그리하여, 룸살롱에서는 자연스레 성경공부가 시작되었습니다. 그 결과, 많은 이들이 주께로 돌아왔습니다. 얼마 후, 그 룸살롱이 문을 닫았습니다. 왜냐하면, 그 룸살롱의 주인이 신앙을 이유로 전업했기 때문입니다.

최재하 목사님이 어둠 속에 있던 그들에게 예수를 소개함으로써, 그들도 광명을 얻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새 인생을 살게 된 것입니다. 1:12 말씀처럼, 그들도 하나님 의 아들인 예수를 영접함으로써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영광을 누리게 되었습니다.

그렇습니다. 본래 예수님은 세상 모든 것을 창조하신 하나님이십니다. 그런데, 그 귀한 신분을 버리고 이 낮은 곳에 내려오셨습니다. 마치 최 목사님이 목사라는 신분을 버리고 웨이터가 되어 룸살롱에 들어갔듯이, 예수님은 하나님이라는 신분을 버리고 인간이 되어 이 세상에 오셨던 것입니다.

왜냐하면, 헛되고 썩어질 것에 목을 매고 무의미하게 살아가는 인생들을 그냥 보고만 있을 수 없으셨던 것입니다. 그동안 수없이 많은 선지자들을 보내어 인생들의 어리석음을 깨우쳐 주셨건만, 사람들은 귀를 기울이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예수께서 직접 이 세상에 오셨던 것입니다.

 

‘주님은 그 인격과 행함에 있어서 하나님 그 자체라는 사실을 보여주셨다(1:3)’고, 히브리서 기자는 말했습니다. 주님은 우리의 모든 죄를 깨끗하게 씻어 정결하게 하신 후에 죽으셨습니다. 그래서, 누구든지 예수를 믿으면, 그 죄에서 벗어날 수 있는 은총을 베푸셨습니다. 뿐만 아니라,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로 믿고 영접하면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특권까지 부여하셨습니다.

오늘 우리는 예수를 믿어 구원함을 얻었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영광도 누리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주님처럼 그 인격과 행함이 있어서 하나님의 자녀다운 모습을 보여줄 수 있어야 합니다. 지난 ‘말씀의 잔치’ 때에 강사님이 말씀한 것처럼, 우리는 그 인격과 성품이 거듭나고 변화되어 성화의 단계까지 다다를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지금 어떻습니까?

 

1.하나님의 자녀답게 살고 있는지요?

 

‘예수를 영접한 사람들, 곧 그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다(1:12)’고, 성경은 말합니다. ‘자녀가 되는 권세’를, 어떤 성경에서는 특권 또는 권위라 번역했습니다. 권위는 지위나 신분만 갖고 얻을 수 있는 게 아닙니다.

그 언행에 있어서 세상 사람들과 다른 모습을 보여주어야 합니다. 목사요 장로이니까, 사람들이 무조건 존경하며 따라야 한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그 사는 모습이 여느 사람과 달라야 합니다. 그래야, 사람들이 마음속으로 존경하며 따르게 됩니다.

그런고로,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로서 그 특권을 누릴 수 있으려면, 하나님의 자녀다운 언행을 보여주어야 합니다. 김홍기 목사님이 말씀하셨듯이, 믿음으로 구원을 받았으면, 이제는 말씀에 따라 행함으로써 구원의 완성을 이루어가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 우리는 어떻습니까? 하나님의 자녀다운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까? 믿음으로 구원받았음을 그 행함으로 보여주고 있는지요? 참으로 부끄러운 이야기지만, 우리는 아직도 옛 성품을 다 버리지 못하여, 우리 모두의 아버지가 되시는 하나님의 이름을 더럽힐 때가 많습니다.

①그 이유는 죄악 세상에서 완전히 떠나지 못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빛으로 오신 주께서 우리를 어둠 속에서 빛 가운데로 건져내셨건만, 우리는 여전히 어둠의 행위를 벗어버리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름은 아무개 집사요 권사인데, 그 언행은 옛날 그대로인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니까, 이름만 빛의 자녀이지, 그 행위는 여전히 어둠의 자녀로 살고 있는 것입니다.

②그 인격과 행함에 있어서 하나님의 자녀다운 모습을 찾아보기가 어렵습니다.

 

주의 자녀라면, 그 얼굴에 항상 기쁨이 있어야 합니다. 물론 주님을 굳건히 의지하는 믿음이 있기 때문에 먼저 그 마음에 평화와 기쁨이 깃들게 되거니와, 그 현상이 얼굴에도 나타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름만 주의 자녀이고, 아직도 어둠이 그 마음을 지배하고 있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런 사람은 그 얼굴 또한 평화롭지 못합니다. 그래서, 얼굴이 항상 일그러져 있거나 짜증 섞인 표정을 하고 있습니다.

성도 여러분! 이번 성탄절에 다시 한 번, 생명의 빛으로 오신 주님에 대해서 깊이 생각해보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그 주님께서 우리 몸과 마음을 온전히 주장하실 수 있도록 거듭나고 새로워질 수 있는 저와 여러분이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2.주의 자녀답게 살아감으로써 영광스러운 인생이 되어 가도록 합시다.

 

주께서는 이 세상에 오셔서, 어떻게 사는 것이 참다운 인간의 모습인지를 우리에게 보여주셨습니다. 우선 그 인격과 행함에 있어서, 그 자신이 하나님이셨음을 보여주셨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에는 십자가에서 참사랑이 무엇인지 보여주셨습니다. 그 결과, 주 예수 그리스도는 영화롭게 되어 ‘지금은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신다’고, 히브리서 기자는 증언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주님의 뒤를 따르는 제자들입니다. 우리가 주님처럼 온전하게 살 수 없지만, 주님을 본받아 살도록 힘써야 합니다. 그러니까 주님께서 태양이라면, 우리는 달처럼 태양의 빛을 받아서, 그 빛을 사람들이 사는 세상에 비추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①우선 주를 기쁨으로 영접해야 합니다.

내 마음과 생각을 꽉 붙들고 있는 어둠의 사상들을 다 버리고, 주님의 말씀과 생각으로 바꿔야 합니다. 다시 말해서, 어둠을 몰아내고 빛을 받아들여야 합니다. 그래서, 주님의 자녀가 되어야 합니다.

주님의 자녀가 되었으면 더러운 모든 것들을 버려야 합니다. 그래서, 몸과 마음을 깨끗이 해야 합니다. 분노와 원망과 다툼, 교만과 혈기를 버려야 합니다.

②주님의 진리 말씀 안에서 하나님의 자녀답게 살아야 합니다.

주님의 자녀라고 하면서 자꾸 내 생각을 앞세우게 되면, 하나님의 자녀답게 살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내 생각은 어둠에 속한 것들이 많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내 생각이 옳은 듯 하더라도, 우선 말씀을 비춰서 냉정하게 자기 생각을 잘 판단해봐야 합니다.

그 이전에, 말씀을 잘 깨달을 수 있게 해달라고 기도해야 합니다. 기도하고 말씀 보는 일을 부지런히 하면서 진실하게 살려고 애쓸 때에 주님을 닮게 됩니다. 그래서, 우리 믿음생활이 진실하게 될 때, 그 마음에 기쁨과 평화가 임하는 것입니다.

 

③그 마음과 얼굴에 기쁨이 있고, 다른 사람들과 평화롭게 살아가게 될 때에, 우리는 주님의 영광을 보게 될 것입니다.

, 빛의 자녀가 됩니다. 그리고, 그 삶이 주님을 증거하게 됩니다. 이처럼 주님을 증거할 수 있는 삶으로 성숙하게 될 때, 우리 인생은 영광스럽게 될 것입니다.

우리 모두, 생명의 빛이신 주님을 열심히 닮아감으로써 그 인생이 영화롭고 아름답게 되기를 축원합니다.

 

제목 ; 참빛이신 예수를 언제나 바라보고 살자!

성경 ; 61:1- 4, 8-11, 살전5:16-24, 1:6-8, 19-28.

 

어저께 신문에는 이번 미국 대통령 선거에서 최종 승리가 확인 된 부시가 새벽기도회를 마치고 나오는 모습을 담은 사진이 실려 있었습니다. 저는 그 사진을 보면서 미국의 밝은 미래를 내다보았습니다.

한편, 고어도 아주 인상 깊은 패배선언을 해서 우리를 감동시키고 있습니다. 조선일보 ‘만물상’은 고어의 연설을 ‘너무나 멋진 연설문’이라고 평가했습니다. 그런데, 그 연설문 중 ‘인간이 아니라, 하나님과 법에 따르겠다’고 한 부분을, 특히 눈에 띠는 내용이라고 소개했습니다. 그러니까, 지금까지는 고어가 자신의 승리를 위하여 애썼으나, 이제는 결론이 났으므로, 그것을 하나님의 뜻으로 받아들이겠다는 것입니다.

미국이 우리를 실망시키는 일도 참 많으나, 그래도 아직 우리가 배워야 할 점이 더 많은 나라입니다. 특히 부시와 고어의 언행을 통해서, 미국은 아직도 기독교 국가임을 알 수 있습니다. 세계 최고의 대통령이 되었으나, 결코 교만한 자세를 취하지 않고 겸손히 주 앞에 무릎꿇고 기도하는 부시의 모습은 참으로 아름답고 존경스럽습니다.

그런데, 미국만 아닌 온 세상을 다스리시는 하나님께서 부시 당선자보다 더욱 겸손한 모습으로 이 세상에 오셨다는 사실을,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그분이 바로 참빛이 되어 오신 예수이십니다. 이사야가 증언하기를 주님은 ‘아주 높은 보좌’에 앉아 계셨습니다. 하건만, 그 높은 보좌를 버리고 인간의 모습으로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 오셨습니까? 죄에서 우리를 구원하여 영생을 얻게 하시려고 오셨습니다. 주님은 우리를 죄에서 건져내어 깨끗하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더 이상 죄에 빠지지 않도록 하기 위해, 우리를 당신의 자녀로 삼으셨습니다. 바울은 ‘너희의 영과 혼과 몸을, 예수께서 다시 오실 때까지 흠 없이 지켜주시기를 빈다(살전5:23)’고 말했습니다.

그런고로, 우리는 우리를 죄에서 구원하시려고 이미 2천년 전에 오셨던 그 예수님의 탄생을 기릴 뿐만 아니라, 그 날짜와 시간은 알 수 없지만 어느 날 갑자기 틀림없이 나타나실 재림 예수를 기다리는 마음으로, 금번 성탄절을 맞이해야 합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이미 오셔서 우리를 죄에서 구원하고, 어떻게 사는 것이 올바른 삶인지를 모범으로 보여주신 그 예수님을 본받아 살아야 합니다. 그리고, 다시 오실 주님을 맞이하기 위해서 정의롭고 거룩한 인생을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해마다 성탄절을 무의미하게 보내고 있습니다. 예수 탄생의 참된 의미를 망각한 채, 세상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하나의 축제행사로만 지키고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예수께서 이 세상에 오신 참된 목적을 되새기는 게 아니라, 성탄절 분위기에 휩싸여 하루를 보내고 있습니다.

 

1.우리는 빛으로 오신 예수를 제대로 증거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요한복음 19절 말씀에 ‘그 빛이 세상에 오셨으니, 모든 사람을 비추는 참 빛’이라고 했습니다. 주께서도 직접 말씀하시기를 『나는 세상의 빛이다. 나를 따라 오는 사람은 어둠 속을 걷지 않고 생명의 빛을 얻으리라(8:12)』라고 하셨습니다.

이처럼, 주님은 세상의 빛으로 오셨습니다. 그래서, 무엇이 옳고 그른지를 구별할 수 있게 하셨습니다. 물론, 우리는 옳은 것을 받아들여 그대로 살아야 합니다. 바울도 ‘어떤 일이든지, 그것이 참으로 옳은 것인가를 확인해 보고, 만일 옳은 일이거든 받아들여야 한다(살전5:21)’고 말했습니다.

그러기에, 주님은 우리에게 말씀하시기를『너희는 세상의 빛이다(5:14)』라고 하시면서 『너희 빛을 사람들에게 비추어, 그들이 너희의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 신 너희 아버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도록 해야 한다(5:16)』고 가르치셨습니다.

그런고로, 우리는 참빛이신 주님만을 열심히 바라봐야 합니다. 그래야, 우리도 그 빛을 받아서 세상 사람들에게 빛을 비출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어둔 세상만 바라보고 살면, 그 어둠이 내 얼굴을 가려서, 우리 자신의 얼굴도 어둡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우리는 어떻습니까?

①혹시 거룩하신 주님을 외면한 채 살아가고 있는 아닙니까?

다시 말하면, 그 관심이 온통 세상에 쏠려있는 까닭에, 자신이 주의 제자라는 사실도 잊어버린 채 살아가고 있는 것은 아닌지요? 예수를 처음 믿게 되었을 때에는 구원과 영생이 참 귀하다는 것을 알고, 자신을 불러주신 주님께 감사를 드렸을 것입니다. 그러나, 세월이 흐르면서 처음 받은 그 은혜와 감격을 잃어버린 것입니다.

그 결과, 땅의 썩어질 것에 더 많은 관심을 기울이며 살고 있습니다. 참으로 무엇이 옳고 그르냐에 따라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감정과 이익에 따라 판단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돈이 될 때에는 불법과 부정도 행하는 것입니다. 반면에, 옳은 일인 줄 알면서도 손해가 된다거나 기분이 나쁠 때에는 그 일을 외면하고 있습니다.

 

탁구 여왕이었던 양영자 선수를 모를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그가 죽을병에 걸렸다가 하나님의 은혜로 고침 받은 일이 있습니다. 그녀가 그 이전에는 돈과 명예를 얻기 위해서 탁구를 열심히 했다고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은혜를 체험한 후에는, 그 운 동하는 목적이 달라지게 되었습니다.

그는 고백하기를 ‘내가 탁구의 재능을 갖게 된 것은 내 스스로 얻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주신 선물이었다. 또한, 세계 대회에서 여러 차례 좋은 성적을 거둔 것도, 내가 잘나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였음을 깨닫게 되었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자신의 명예가 아닌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탁구를 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그녀는 말하기를 ‘예수만이 나의 소망이고 기쁨이다. 이제 나의 목표는 올림픽 금메달이 아니라, 천국의 면류관이다’라고 했습니다. 우리의 인생목표도 양영자 선수와 동일해야 합니다. 그래야, 예수의 제자 된 그 빛을 발할 수 있습니다.

그렇지 못할 때에는

②빛이 되는 삶을 살 수 없는 것입니다.

욕심은 끝이 없기 때문에, 인생 목표가 세상에 있을 때에는 만족함이 없습니다. 그런 사람에게는 기쁨과 감사도 없고, 항상 불평 불만을 품게 마련입니다. 바울은 ‘어떤 처지에 있든지 감사해야 한다’고 했는데, 그 목표가 세상에 있을 때에는 그런 감사가 나올 수 없습니다. 일이 잘 안 될 때에는 말할 것도 없거니와, 일이 잘 되어도 더 크게 이루지 못해서 불만인 것입니다.

그러니, 천국을 목표로 삼고 살아야 할 우리가 그런 생활태도를 보인다면, 세상 사람들이 뭐라 하겠습니까? 그들에게 본이 되기는커녕, 오히려 비웃음거리가 될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그들 스스로가 올바른 생활을 하지 못할지라도, 예수 믿는 사람들이 바로 살기를 기대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우리를 주목하고 있는 것입니다.

‘곳곳마다 번민함은 사랑 없는 연고요, 측은하게 손을 펴고 사랑 받기 원하네. 어떤 이는 고통과 근심 걱정 많으니, 사랑 없는 까닭에 저들 실망 하도다. 사랑 없는 까닭에×3, 저들 실망하도다(찬송373)

예수 믿는 우리가 바로 살기를 포기한다면, 이 세상은 참으로 소망이 없습니다. 하건만, 우리는 자신의 등불이 꺼진 줄도 모르고 다른 사람의 등불 꺼진 것만 탓하고 있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예수 믿는 이들이 더 타락했다고 아우성인데, 우리는 서로 남의 흉보고 탓하기에만 여념이 없습니다.

세상 사람들이 우리를 향해 욕하고 흉보는 것은 기쁘게 감내해야 합니다. 그러나, 우리끼리는 서로 위로하고 격려해주어야 합니다. 우리끼리 싸우거나 다투면, 세상 사람들은 우리를 더욱 우습게 알거니와, 그 결과로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게 됩니다.

 

그러므로, 남의 등불 꺼진 것을 가지고 말할 게 아니라, 자신의 등불이 꺼지지 않았나 잘 살펴봐야 합니다. 그래서, 주님이 다시 오시기 전에 기름을 채워야 합니다. 그리고, 참빛이신 주님만을 바라봄으로써 우리의 빛을 밝게 비춰야 하는 것입니다.

부시가 대통령에 취임하면, 저는 그를 위해서 기도하겠습니다. 그가 정치를 훌륭하게 잘해야, 새벽기도회에 참석하고 나오는 모습의 사진을 본 사람들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목사가 목회를 잘하면 하나님께 영광이 됩니다. 그리고, 여러분의 교회가 세상 사람들로부터 인정을 받습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저나 김 목사님이 목회를 잘할 수 있도록 계속 기도하면서 열심히 뒷받침을 잘해주어야 합니다. 여러분이 목사의 뜻을 거역하거나 방해한다면, 그 결과가 어떻게 되겠습니까? 말할 것도 없이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게 되고, 여러분 자신에게도 큰 손해가 되며 창피스런 일이 될 것입니다.

교인들끼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서로서로 예수의 빛을 잘 드러낼 수 있도록 도와줘야 합니다. 교우들 중에서 누가 칭찬 받을 일을 한다면, 먼저 하나님께 영광이 되고, 우리 모두에게도 영광이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제부터 우리는 성도의 허물을 들춰내어 소문내거나 비난하는 일을 삼가도록 해야 합니다. 그와 같은 짓은, 우리 모두 함께 창피 당하는, 아주 어리석고 미련한 짓이라는 것을 명심하셔야 합니다.

 

3.우리 모두 주님의 참빛을 받아서 빛 된 생활을 하도록 합시다.

 

‘세상 등지고 주님만 보네, ,

, 뒤돌아 서지 않겠네.

세상을 바라보면 실망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미워하시는 거짓과 부정과 불법이 난무하기 때문입니다. 그렇다고, 세상을 바라보면서 좌절하거나 절망을 한다면, 그 사이에 우리 자신도 타락하게 됩니다. 그래서, 우리 자신이 또한 하나님과 이웃에게 실망을 끼치게 되는 것입니다.

①우리는 예수님만을 바라봐야 합니다.

요한복음 18절에 ‘세례요한은 빛이 아니었고, 다만 그 빛을 증거하러 왔음 따름이었다’고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오늘날에도 말씀을 증거하는 목사가 예수님이 아닙니다. 그리고, 장로나 권사가 교회를 대표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 모두가 함께 바라봐야 할 분은 오직 예수님뿐입니다.

어둔 세상 바라보고 실망하지 마십시오. 올바르지 못한 교인을 바라보고 낙심하는 일이 없도록 하십시오. 또한, 그런 사람들을 비난하는 일에 열을 올리지 마십시오. 각자 주님만을 바라보고, 그 빛을 받아 거룩한 삶을 살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②참빛이신 주님을 본받아서 빛 된 삶을 살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

주님의 말씀에 비추어볼 때에, 과연 어느 것이 옳은 일인지를 잘 분별해야 합니다. 그래서, 옳은 일이면 받아들여 실천해야 합니다. 그러나, 거짓되고 악한 것은 멀리해야 합니다. 자신에게 아무리 많은 유익을 가져다 줄지라도, 하나님 말씀에 어긋나는 일이면 목숨을 내놓고 거절해야 합니다.

바울은 말하기를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바라시는 뜻이 있다(살전5:18)’고 했습니다. 그것은 ‘항상 기뻐하며, 언제나 기도에 힘쓰고, 어떤 처지에 있던지 감사하는 마음을 잊지 않고 사는 일’이라고 했습니다. 어둠이 아닌 빛 가운데에 있으면, 그렇게 살 수 있습니다. 반면에, 악한 영에 사로잡히게 될 때에는 불평 불만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참빛은 기쁨과 평화를 가져다 줍니다. 왜냐하면, 주님은 기쁨과 평화의 왕으로 이 세상에 오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주님을 모셔 사는 사람은 항상 기뻐하고 어떤 처지에 있던지 감사하면서 살 수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주님과 동행하며 그 말씀을 되새기는 기도의 생활을 하게 됩니다.

③이렇게 사는 성도가 어찌 하나님의 복을 받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이사야 ‘정의와 말씀을 사랑하며 사는 주의 백성과 그 후손은, 세계 만민에게 알려져 존경을 받고 여호와께 복 받은 백성이라는 칭찬을 받으리라(61:9)’고 했습니다.

우리 모두 그렇게 되기를 원합니다. 참빛이신 예수님만을 바라보고 정의롭게 살아감으로써, 세상 사람들에게 존경과 칭찬을 받고 하나님께는 영광을 돌리는, 저와 여러분이 될 수 있기를 축원합니다.

 

제목 ; 주님께서 오실 길을 예비하라!

성경 ; 40:1-11, 1:1-8, 벧후3:8-15

 

저는 지난 시간에 ‘인생은 기다림’이라 정의한 후에, 우리 기독교인은 공통적으로 ‘다시 오실 주님을 기다리고 있다’고 말했습니다. 그런데, 다시 오실 주님을 맞이하려면 ‘항상 깨어 있어야 한다’고 했습니다. 다시 말해서, 기독교인이 지켜 행해야 할 본분을 잊지 않고 잘 감당해야 합니다.

그런데, 그 사명의식을 잘 깨닫지 못하고 사는 사람들이 있어서 걱정입니다. 막연하나마 좋은 미래가 열렸으면 하는 기대를 갖고 살지만, 그 좋은 내일을 위해 오늘 내가 무슨 일을 해야 하는지, 그 사명을 잘 모르고 있거나 아니면 외면하고 있습니다. 즉 성도의 본분을 망각하고 살면서 천국에만 가려는 몰염치한 분들이 있습니다.

한 사나이가 사막을 여행하던 중에 길을 잃었습니다. 그는 물 한 방울 마시지 못한 채 사막 한 가운데서 헤매고 있었습니다.

 

마침 한 남자를 만났습니다. 그런데, 그는 넥타이 장사꾼이었습니다. 그는 “넥타이 하나 사라”고 말했습니다. 그러자, 사나이는 “뭐라고요? 당신 지금 제 정신입니까? 목말라 죽게 된 사람에게 넥타이를 사라니?”하면서 따지듯이 말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다시 한 번 사나이에게 “넥타이가 당신에게 꼭 필요할 겁니다. 넥타이를 하나 사십시오”라고 진지한 표정으로 말했습니다.

하지만, 그 사나이는 화가 나서 “집어치워요! 그리고 당장 꺼져버리시오! 지금 나에겐 시원한 냉수 한 사발이 최고야! 내게 지금 넥타이는 아무 소용없어!”하고 소리쳤습니다. 넥타이 장사는 할 수 없다는 듯이 다음의 말 한마디를 남기고 어디론가 사라져버렸습니다. “후회하게 될 텐데…”

그는 갈증을 참으며 앞으로 더 걸어갔습니다. 저녁나절에 되었을 때쯤, 그는 커다란 식당 하나를 발견했습니다. 주차장에는 고급 승용차가 죽 늘어서 있었고, 사람들의 표정은 모두 행복해 보였습니다. 그 사나이는 급히 식당 문을 열고 들어갔습니다. 그리고, 그는 외쳤습니다. “제게 우선 마실 물 좀 주십시오. 그리고, 돈은 얼마든지 드릴 테니 먹을 음식도 좀 주십시오!

그러나, 사나이는 영문도 모른 채 종업원들에게 쫓겨나야 했습니다. 사나이는 항변했습니다. “아니, 사람이 죽게 생겼는데, 왜 이러십니까?” 그러자, 종업원들은 말없이 식당 문밖에 세워둔 팻말을 가리켰습니다. ‘정장 차림이 아닌 분은 입장할 수 없습니다.’ 그 사나이는 결국 물도 음식도 먹지 못한 채 식당 앞에서 죽고 말았습니다. 넥타이가 없었기 때문이었습니다.

‘머지않아 다시 오실 주님을 맞이할 수 있도록 준비를 잘하라!’ ‘주님을 맞이하기 위해서는 항상 깨어 있어야 한다!’ 이런 하나님의 말씀이 세상 사람들에게는 ‘사막에서 넥타이를 사라’는 것처럼 아주 쓸데없고 무익한 소리로 들릴 것입니다. 당장 먹고사는 일이 중요하지, 주께서 언제 오신다고 그 맞이할 준비를 하라는 것인가!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우리에게 ‘항상 깨어 기도하라’니, 무슨 정신 없는 소리인가! 이렇게 항변하고 싶은 분들이 많을 줄 압니다.

그렇지만, 이사야의 말을 한 번 들어보십시오. 그는 ‘모든 인간은 풀 포기처럼 허무하고, 인간의 모든 영화와 권세도 들의 꽃과 다른 게 없다(40:6)’고 했습니다. 그는 이어서, 이처럼 ‘한 포기 풀과 같은 인생은 곧 마르고 시들겠지만, 하나님의 말씀은 언제나 영원하다(8)’고 말했습니다.

그러니까, 우리 인생은 지금 갖가지 일들로 인해서 바쁘게 살고 있지만 머지않아 죽게 된 운명인 것입니다. 시집가고 장가가는 일, 먹고 마시며 즐기는 일, 그리고 멋 부리고 뽐내며 출세하는 일 등, 이런 모든 일들이 한 순간에 불과한 것입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미래를 바로 내다볼 줄 알아야 합니다. 미래에 대한 확실한 설계(設計)가 되어 있어야, 오늘을 올바르게 살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미래에 대한 바른 전망(비전)을 가져야, 오늘 내가 해야 할 일을 바로 알고 바로 선택을 하며, 그 결과로 올바른 인생을 살 수 있습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대부분의 사람들이 먼 미래를 내다보지 못하고 현실문제에 급급해하거나 안주합니다. 그 결과가 어떻게 되리라 어느 정도는 짐작하면서도, 미래에 되어질 일들을 애써 모른 체 하고 있습니다. 머지않아 자신에게 닥쳐올 하나님의 심판이 얼마나 두려운 일인지를 미처 깨닫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현재 잘 살면 된다’는 식으로 하나님의 길을 외면한 채 세상 길로만 빠져들고 있습니다.

성경은 그런 인생을 가리켜 ‘거친 사막’이라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런 인생이 사는 세상도 ‘거친 사막’이라 했습니다. 우리가 어느 길로 가야 살길인지, 그 길을 찾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런 세상과 그런 사람들에게는 ‘항상 깨어있어 주님 맞을 준비를 하라’는 말씀이 귀에 들어올 리가 만무합니다. 그야말로, ‘광야에서 넥타이를 사라’는 말로밖에 들리지 않을 것입니다.

 

1.그런 사람들이 주님께서 찾아오실 길을 예비할 수가 있겠습니까?

 

세례 요한은 세례 받고자 온 사람들에게 ‘너희는 주께서 가실 길을 광야에 뚫어놔라. 거친 사막을 평평하게 다듬어, 주께서 통과하실 큰길을 닦아라(1:3)’ 외쳤습니다. 그리고, 그는 ‘회개하고 세례 받아라. 그러면 하나님께서 용서하시리라’고 했습니다.

요컨대, 세례 요한은 ‘아무런 준비 없이 주님을 맞이할 수 없다. 그러니, 죄를 회개하고 세례를 받음으로써 하나님의 용서를 받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지금까지 자기 생각과 세상 욕심에 묶여 살았던, 그 옳지 못한 생활태도를 버리고 주님께로 돌아오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의 명령에 따라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오늘 우리는 어떻습니까? 자기 중심적인 사고방식을 버리고 말씀대로 살고자 애쓰고 있는지요?

①거칠고 고집스런 마음을 버리지 못한 채 사는 이들이 적지 않습니다.

이스라엘은 그 고집스런 마음을 버리지 않고 살다가 결국 멸망했습니다. 그리고,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가서 인간 이하의 대접을 받아야 했습니다. 그들은 한참동안 고난 당하면서도 그 잘못을 깨닫지 못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이사야 통하여 그들을 구원하실 계획을 미리 말씀하셨습니다. ‘주께서 백성을 구원하러 오실 것이니, 주님 맞을 준비하라’고 말입니다.

늦게나마 이 말씀을 깨달은 사람들은 자신들의 그릇된 과거를 하나님 앞에 회개하고 진심으로 뉘우쳤습니다. 그래서, 꿈에 그리던 고향으로 돌아갈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남의 나라에서 종살이하면서도 자신들의 죄를 깨닫지 못하고 하나님만 원망하던 사람들은 고향에 돌아갈 수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약속을 믿지 못한 까닭에 고향에 돌아갈 꿈을 버렸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계속 타향에서 종살이하다가 이국에서 한 줌의 흙이 되고 말았습니다.

 

오늘 우리 중에서도 천국에 대한 확신을 갖지 못하고 사는 불행한 사람들이 없지 않아 있습니다. 그래서, 다시 오실 주님을 맞이할 수 있으리라는 기대와 꿈을 저버린 채 살고 있습니다. 즉 예수를 믿는 이유와 목적을 확실히 깨닫지 못하고 그냥 형식적으로 교회를 다니고 있는 것입니다.

②그러기에, 그런 사람들은 여전히 예수 믿기 이전과 다름없이 원수의 손아귀에서 벗어나지 못하게 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주님 말씀에 순종하면서 살기보다는 자기 고집에 따라 살고 있습니다. 그런 이들은 자기 의()가 강해서 타인의 말은 잘 듣지 않습니다. 자기 생각만이 옳고 다른 사람들은 다 틀려먹었다고 생각합니다. 그런 이들은 특히 자신의 허물을 거의 발견하지 못하므로, 다른 사람이 무슨 잘못을 범할 때에 그걸 잘 용납하지 못합니다. 그래서, 다른 사람들과 화목을 이루지 못하고 갈등을 빚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런 사람은 마음이 늘 평안하지 못합니다. 그리고, 항상 불평불만을 가슴에 담아두고 살아갑니다. 다른 사람들이 하는 일은 거의 마음에 들지 않아서 비타협적이고 비협조적으로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③그러기에, 그런 사람들의 인생은 사막과 같습니다.

그리고, 그런 사람들이 속한 세상도 자연히 사막과 같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사람은 어쩔 수 없이 허물과 잘못을 범하게 마련인데, 그걸 용납하지 못할 경우, 그런 사람이 있을 곳은 이 세상 아무 곳에도 없습니다. 그런고로, 그런 사람이 바라보는 세상은 다 틀려먹은 세상인 것입니다.

그처럼 세상을 비관적으로 보면, 자신이 해야 할 일을 제대로 할 수 없습니다. 정직하게 살아야 무슨 소용이 있느냐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결국 타인의 잘못을 문제삼으며 세상 탓만 하다가, 바로 자기 자신이 지탄받아야 할 대상이 되고 마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은 주님이 오셔서 이루시는 평화로운 세상에서 살 수 없기 때문에, 다시 오시는 주님을 맞이할 자격이 없습니다.

그러나, 다른 사람이 아닌 바로 자신의 잘못을 깨달아 하나님께 그 잘못을 회개하고 용서를 받게 될 경우, 그런 사람은 남의 허물을 좀처럼 들춰내거나 문제삼지 않습니다. 그런 사람은 자신의 부족한 면을 발견하려고 애쓰면서, 그 부족한 점을 고쳐 살고자 하나님께 도움을 청합니다. 그러니까, 세상 사람들을 바라보면서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바라보고 사는 것입니다.

 

 

2.하나님께서 보시기에 올바른 삶을 살고자 노력하고 애써야 합니다.

 

사실 그렇습니다. 교회 안에서 직분을 맡고 있으면서 제 역할을 잘 감당치 못할 경우, 그런 사람은 자신만 불완전한 신앙생활 하는 것으로 그치는 게 아니라, 다른 사람까지도 신앙생활을 제대로 하지 못하도록 방해하는 장애물이 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그런 사람 때문에 나 자신이 신앙생활을 온전하게 하지 못하는 이유가 될 수 없습니다. 우리는 그런 사람을 바라보고 신앙생활을 할 것이 아니라, 스승이신 주님만을 바라보도록 해야 합니다. 그래서, 나 자신이 다른 사람에게 실망을 주 는 일이 없도록 해야 하는 것입니다.

①그러므로, 우리는 다른 사람 핑계 댈 게 아니라, 나 자신이 하나님 앞에 바로 서도록 진실한 회개를 해야 합니다.

나 자신이 하나님과 온전한 관계를 이루면, 우리는 세상을 다시 보게 됩니다. 비록 겉보기에는 악인들이 이 세상을 주도하는 것 같지만, 정작 이 세상을 주관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신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 즉 주의 뜻에 따라 살려고 애쓰는 다수의 의인들이 보이지 않게 선한 삶을 살고 있는 까닭에, 이 세상은 존속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타인이 바로 살지 못하고 신앙생활을 엉터리로 한다고 해서 분개하거나 불평한 일이 아닙니다. 먼저 내 속에 있는 거칠고 고집스런 마음을 제거하도록 해야 합니다. 그래서, 항상 겸손히 주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고 그 말씀에 순종하며 사는 성실한 크리스천이 되어야 합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항상 깨어 있어 주님의 오심을 준비하라’의 말씀에 따라 하나님 앞에서 바르게 살도록 힘써야 합니다. 좌절하거나 실망하는 일없이

②주님께서 오실 길을 예비해야 합니다.

주의 오심을 준비하는 첫째 단계는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는 일입니다. 항상 나를 앞세우는 일이 없도록 조심해야 합니다. 그야말로, 불기둥과 구름기둥이 앞서 진행하기 전까지, 우리는 조용히 기다려야 합니다. 그러다가, 주님께서 앞서 가시면 우리는 겸손히 그의 뒤만 따라가야 합니다.

주의 오심을 준비하는 두 번째 단계는, 자신이 죄에 빠지는 일이 없도록 자기를 항상 돌아봐야 합니다. 남이 잘못하는 것 가지고 문제삼으려 할 것이 아니라, 자신의 허물을 발견하는 일에 힘써야 합니다. 그래서, 그 허물과 잘못을 고쳐 가는 일에만 전심을 기울여야 합니다. 타인이 잘못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알아서 하실 일입니다.

주의 오심을 준비하는 세 번째 단계는 이웃과 평화롭게 사는 일입니다. 주님의 말씀 안에서 하나될 때에 평화를 이룰 수 있습니다. 각자 자기 생각과 주장을 버리고, 말씀 중심으로 의견을 모아야 합니다.

 

이런 단계를 거쳐서 주님의 오심을 준비하다 보면, 천국은 이미 우리 가운데 이루어져 있음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또한 우리 가운데 오신 임마누엘의 하나님을 만나뵙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주의 오심을 간절한 마음으로 기다리면서 주님 맞이할 준비를 열심히 해야 합니다. 그럴 때에,

③우리는 주님과 함께 영원한 천국에 들어가게 될 것입니다.

내 생각과 내 고집에 따라 살 경우에는 실패와 허무만이 가득한 인생을 살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이 다스리는 나라는 기쁨과 평화가 가득합니다. 왜냐하면, 모든 사람이 주님의 뜻에 따라 의견의 일치를 이루어 살기 때문입니다.

이사야서 4011절 말씀에 ‘목자가 자기 양떼를 돌보듯이, 주님께서 자기 백성을 먹이시고 그 품에 안아주신다’고 했습니다. 모든 사람이 이 말씀을 믿고 주님을 따르게 된다면, 어찌 갈등과 다툼이 일어나겠습니까? 이런 믿음을 가진 사람들끼리 모여 산다면, 서로 위로하고 격려하면서 따뜻한 사랑을 나누게 될 것입니다.

우리들의 교회가 먼저 이런 천국이 되도록 합시다. 아니, 그 이전에 우리의 가정이 이런 천국이 되도록 해야 합니다. 아니, 그 이전에 우리 마음에 이런 천국을 이루어야 합니다. 남을 아끼고 사랑하는 마음이 가득한 성도들이 다 되시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평화의 왕으로 오시는 주님을 우리 모두가 함께 맞이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제목 ; 기쁘게 의를 행하여 주님 맞을 준비를 하자!

성경 ; 64:1-9, 13:32-37, 고전1:3-9

 

 

인생을 가리켜 한마디로 어떻게 표현할 수 있을까요? 어떤 이는 ‘고해(苦海)’라고 말했습니다. 욥기5:7말씀을 보면 ‘인생은 고난을 위해서 태어났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어떤 사람은 ‘인생은 허무한 존재다’라고 했습니다. 시편89:47에서, 시인은 ‘주께서 모든 인생을 어찌 그리 허무하게 창조하셨는지요’라고 노래했습니다. 또 어떤 사람은 ‘인생은 나그네다’라고 했습니다. 베드로는 말하기를 ‘우리는 하늘에 고향을 둔 이 땅의 나그네들이다(2:11)’라고 했습니다.

그밖에도, 사람들은 제각기 나름대로 인생을 정의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 저는 ‘인생은 기다림이다’라 풀이하고 싶습니다. 사람들은 대개 뭔가 좋은 일이 있으리라는 기대를 품고서 오늘과 내일, 그리고 영원한 미래를 기다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미혼의 젊은이들은 좋은 짝이 나타나기를 기다릴 것이고, 경제 사정이 어려운 분들은 그 형편이 나아질 날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를 믿는 우리에게는 공통적인 기다림이 있습니다. 그것은 다시 오실 주님에 대한 기다림입니다. 주님이 다시 오시는 그 날에는 ‘우리가 영원히 변하지 않는 영광의 면류관을 상으로 받게 된다(벧전5:4)’고 했습니다. 그리고, ‘주님과 함께 천년 동안 왕 노릇을 하게 된다(20:6)’는 것입니다. 또한 ‘하나님께서 지으신 영원한 집이 있어서, 우리는 그 집에서 영원히 살게 된다(고후5:1)’고 했으니, 어찌 그 날이 기다려지지 않겠습니까? 그뿐만 아닙니다. 그 날이 되어 주님과 함께 천국에 들어가면, 눈물과 고통이 없고 서로 헤어지거나 나뉘는 일도 없이, 오직 기쁨과 평화가 가득한 세상에서 살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주님은 ‘밧모섬’에 있는 요한 사도에게 환상 중에 나타나셔서『내가 진실로 속히 오리라(22:20)』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자, 요한 사도는 ‘아멘.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라고 응답했습니다. 그만큼, 우리는 주님의 오심을 간절하게 기다리고 있습니다. 세상 살기가 힘들거나 어려운 때일수록 더욱 주의 오심을 기다리게 됩니다.

‘사랑의 원자탄’ 주인공이신 손양원 목사님은 일제의 쇠사슬에서 신음하던 중에 이런 노래를 부르셨습니다. ‘낮에나 밤에나 눈물 머금고 내 주님 오시기만 고대합니다. 가실 때 다시 오마 하신 예수님, - 주여 언제나 오시렵니까?’ 우리는 이 노래에서 주님의 오심을 기다리는 손양원 목사님의 간절한 마음을 읽을 수 있습니다.

우리가 이토록 주님의 재림을 간절히 기다리고 있지만, 그러나 그 날이 언제가 될지 알 수 없다는 사실이 안타까운 일입니다. 주님은 생전에 말씀하시기를 『그 날과 그 시간은 아무도 모른다. 하늘의 천사들도 모르고 나도 모른다(13:32)』고 하셨습니다. 다만, 예수께서는 제자들에게 ‘내가 언제 다시 올지 알 수 없으니, 항상 깨어 있어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런고로, 우리가 지금 해야 할 일은 ‘항상 깨어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주께서 다시 오실 날을 기다리는 동안, 우리는 주님이 분부하신 말씀을 열심히 지켜 살아야 합니다. 고전1:7에서, 바울은 말하기를 ‘그분의 뜻을 이루는 데 필요한 모든 은총의 선물과 능력을 받았다’고 했습니다. 그러니, 우리는 그 날이 오기를 기다리면서, 주께서 일러주신 진리 말씀을 실천하기 위하여 힘써야 할 것입니다.

만일 우리가 주님 맞을 준비를 소홀히 하게 된다면 어떻게 될까요? 그래서 ‘설마, 금방 오시려나? 다음에 오시겠지!’하면서 게으름을 피우거나 잠이나 자고 있다고 합시다. 그 때에 갑자기 주께서 오신다면, 그런 사람들은 어떻게 되겠습니까? 그런 이들은 미련한 다섯 처녀처럼 문밖에서 땅을 치며 통곡을 하게 된다고 했습니다.

 

이사야는 말하기를 ‘하나님께서는 구원해달라고 기다리는 모든 사람에게 엄청난 일을 하셨다(64:4)’고 했습니다. 그것은 바로 ‘기쁘게 의를 행하고 주의 명령대로 순종하며 사는 사람을 구원해 주신다(5)’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우리를 죄에서 구원하신 주의 은혜에 감사하면서 하나님의 말씀 따라 의롭게 살아가야 합니다. 그래서, 다시 오실 주님을 맞이할 준비를 해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어떻습니까? 모든 시대 상황을 볼 때에 마지막 때가 가깝다는 것을 너무나 잘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1.과연 얼마나 주님 맞을 준비를 성실하게 하고 있는 것입니까?

 

어느 신학교에서 한 젊은이가 교수에게 찾아가 질문했습니다. “교수님, 사람이 죽기 얼마 전쯤이면 내세를 위해 준비하는 것이 좋을까요?” “그야 몇 시간의 여유만 있어도 충분하겠지” 교수는 쉬운 듯이 대답했습니다. 그러자, 그 젊은이는 “그거 참 좋군요”하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그는 속으로 자기 앞에 놓여진 수십 년의 세월을 만끽할 수 있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가 교수실을 막 나가려 할 때 그 교수가 젊은이에게 물었습니다. “자네는 언제쯤 죽을 것인지 알고 있나?” “그거야 어떻게 알 수 있겠습니까?” 그 젊은이는 마음내키지 않는 듯이 대답했습니다. 이에, 교수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렇다면, 지금 바로 준비하는 것이 좋지 않겠는가?

바보가 아닌 다음에야, 모든 사람들은 자신도 언젠가는 죽게 되리라는 것을 다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자신이 언제 죽게 될는지, 그 때와 그 시간을 알고 있는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다만 오래 살았으면 좋겠다는 기대를 가지고 있을 따름입니다. 물론 그 기대대로 이루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전능하신 하나님은 우리 인간의 속셈을 다 알고 계실 것입니다. 그래서, 그 때를 알려주시지 않는지 모릅니다. 그러니, 어쩌겠습니까? 우리는 내일이라도 당장 주님께서 오시면 기쁘게 맞이할 수 있도록 항상 만반 의 준비를 하고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도, 대부분의 성도들이

①‘항상 깨어 있어라’는 경고의 말씀을 귀담아 듣지 않고 있습니다.

주님은 말씀하시기를 『그때가 오면 선한 일을 한 사람들은 다시 살아나서 영원한 생명의 나라로 들어가고, 악한 일을 저지른 사람들은 다시 살아나서 심판을 받게 되리라(5:29)』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20:13의 말씀을 보면 ‘각 사람이 자기의 행위대로 심판을 받게 된다’고 했습니다.

그런데도, 하나님의 심판을 두려워하지 않고 주님 맞을 준비를 하지 않는 이들이 있습니다. 이사야 선지자가 말하기를 ‘우리는 불의와 죄악으로 더러워졌다(64:6)’고 하면서, ‘죄악에 찌든 우리는 심판의 폭풍에 휘말리어 사라지고 있다’고 멸망을 앞둔 동족을 바라보면서 한탄했던 것입니다. 그러면서, 이사야 선지자는 ‘하나님께 돌아와 구원해달라고 호소하는 이도 없고, 스스로 뉘우치면서 주님께 매달리는 이도 없다(7)’고 통탄스러운 듯이 말했습니다.

 

오늘 우리는 과연 어떻습니까? 우리가 사는 이 땅에 이사야 선지자가 다시 나타난다면 뭐라고 말씀하겠습니까?

②주님 맞을 준비를 하지 않고 정신 없이 잠만 자고 있는 사람들을 보고, 이사야 선지자는 과연 무슨 말을 할까요?

주님 맞을 자격이 충분하다고 말씀하겠습니까? 아니면, 한숨만 푹푹 쉬고 있을까요? 자신이 감당해야 할 책임을 외면한 채, 육신의 안일과 자신의 이익 챙기기에만 급급한 사람들을 보고, 그는 어떻게 말씀하겠습니까? 물론 그런 사람들도 옛날 아담과 하와처럼 변명할 말이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아담과 하와가 에덴동산에서 쫓겨난 것처럼, 자신의 책임을 성실하게 감당하지 않고 이런 핑계 저런 이유로 주님 맞을 준비를 소홀히 했던 사람들은 바깥 어두운 데로 쫓겨날 것이 틀림이 없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그 어두운 곳에서 땅을 치고 통곡하면서 후회하게 될 것입니다.

미국에서 실제로 있었던 비극적인 사건입니다. 자전거를 타고 학교에서 집으로 돌아가던 한 소년이 자동차에 치였습니다. 운전사는 피 흘리는 소년을 놔둔 채 뺑소니쳤습니다. 다행히 뺑소니 차량번호를 본 사람이 있어서, 그가 경찰에 신고했습니다. 경찰은 그 차량번호를 추적하여 그 날로 범인을 검거했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범인은 피해자의 아버지였습니다. 그러니까, 운전 기사는 피해자가 자기 아들인 줄도 모르고 사고를 낸 후 뺑소니쳤던 것입니다.

만일 오늘 우리가 마땅히 감당해야 할 일을 회피하거나 자신의 책임을 외면하고 도망쳤다고 합시다. 그렇게 되면, 심판 날에 이르렀을 때에야 그런 도피가 우리를 멸망의 길로 이끌고 간 올무가 되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 양심은 무엇이 옳은 일인지 잘 알고 있건만, 우리가 그 양심을 버리고 도망칠 경우, 그 비양심이 우리를 심판하는 도끼가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가 어떻게 해야 합니까? 어떻게 주님 맞을 준비를 해야 하겠습니까?

 

2.항상 깨어 있어야 합니다.

 

바울은 말하기를 ‘예수님은 우리가 진리를 충분히 이해할 수 있게 해주셨다(고전1:5)’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도의 사명이 무엇인지 잘 몰라서 주님의 뜻대로 살지 못했노라고 핑계 댈 수 없을 것입니다. 주일이면 교회에 나와서 예배드려야 한다는 사실을 몰라서 불참하는 게 아닙니다. 심판 날이 가깝다는 사실을 망각하고 자기 형편과 의지에 따라 살고 있을 뿐입니다.